새누리당 지상욱 대변인이 17일 서울 여의도 당사 기자실에서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20대 총선 참패의 원인을 분석한 ‘국민백서’를 공개하고 있다. 백서는 총선 참패의 원인과 관련해 전문가, 일반인, 출입기자, 당 사무처 직원, 총선 경선후보 등의 의견을 나열식으로 담았다. 연합뉴스
“2016년 4월 13일 저녁이 돼서야 우리는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누리당이 발간한 국민백서 서문 내용이다. 백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뭐가 잘못된 거지, 우리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천막당사 같은 일을 겪지 않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어서야 했다. 백서는 꼭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291쪽 분량의 백서는 ‘우리는 왜 너희를 찍을 수 없었나’ 등 6개의 부제로 묶어 총선 패배의 주요 원인을 나열하고 있다.
백서 초반부는 “우리 당 별명 중 하나는 개누리당이다. 접두사 ‘개’의 사전적 의미는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등이다. 예문으로 개떡, 개수작 등이 있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 실제 의미도 예시처럼 부정적이다. 우리 당은 색누리당 좀비정당 자폐정당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밝혔다.
총선 직전 무릎을 꿇은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의 사진에 대해선 “아스팔트에 붙은 껌을 제거하는 작업으로 놀림 받았다”고 혹평했다. 다양한 인포그래픽과 사진을 통해 백서는 집권여당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있다.
백서 말미엔 ‘대통령 탈당론’ 등 과감한 주장도 있다. 인명진 목사는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두 야당과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대통령은 3당을 동등하게 대하며 협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서로 붙잡고 엉켜 있는 한 다음 대선은 어렵다. 새누리당은 정권 재창출이 어렵고 대통령은 남은 2년의 국정성공이 어렵다. 대통령은 결국 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총선 책임 원인을 조목조목 언급한 대목은 폭탄의 뇌관이다. 백서는 총선 패배의 책임자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전 대표를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백서의 FGI(표적집단면접조사) 분석 결과 일부분이다.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은 친박과 비박 간 대결 구도를 만들었고 공천 과정까지 이어졌다. 친, 비박의 갈등은 국민에게 한편의 막장드라마로 비쳤다. 공천 막바지엔 김무성 대표의 옥새파동까지 벌어지면서 당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국민은 이때 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특히 FGI에 참여한 국민들 대부분은 “‘도장런’은 추태의 절정. 진짜 새누리당에 투표하기 싫어서 기권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옥새 파동을 일으킨 김 전 대표를 향해 화살을 겨눴다.
김 전 대표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백서 내용에 대해 반발하는 까닭이다. 김 전 대표는 19일 “백서는 역사, 왜곡된 표현을 바로 잡아야할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당권주자인 한선교 의원은 1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서를 차분히 봤는데, 지난 3개월 동안 언론 등에서 제기된 비판을 넘어서는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새누리당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당의 분란을 걱정해 살짝 분칠을 한 것은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선교 의원실 관계자는 “좀 날카로운 지적들은 백서에서 다 빠져있었다”고 귀띔했다.
백서는 총선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진박 마케팅’도 지적하고 있다. 인터뷰에 응한 당내 경선 후보자는 “진박 마케팅은 아주 안 좋았다. 하도 진박, 진박 해서 새누리당이 졌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설 직후 진박 감별사가 돌아다니면서 당이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FGI에 참여한 강 아무개 씨도 “새누리당 내 정치인들이 친박을 팔고 진박 마케팅을 벌여 당 대표를 흑싸리 껍데기로, 친박이라 주장하는 인간들이 당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서가 총선 직전 진박 마케팅을 집중적으로 벌인 최경환 의원 등 친박 핵심 인사들의 명단과 ‘친박 패권주의’를 누락했다는 것이 비박계의 주장이다. 실제로 백서에 언급된 인사는 김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뿐이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결국엔 당 사무처도 최경환 의원을 넣느냐를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 의원은 실체가 없다. 공식적인 직위를 가지고 진박 마케팅을 벌인 것은 아니다. 또 당 기획조정국이 백서 실무작업을 했는데 그쪽은 친박책임론을 언급할 만한 깜냥이 안 된다. 어떻게 영감들 책임론을 당에서 운운하나. 더구나 친박 책임을 백서에 깔면 종국엔 VIP(박근혜 대통령)하고 연결이 되지 않겠나. 누가 쉽사리 할 수 있나. 당 기조국도 결국 누군가에게 ‘컨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