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훈이 지난 31일(한국시간) 2009 US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십 매치 플레이 최종 라운드에서 우승한 뒤 캐디 역할을 한 아버지 안재형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
안병훈의 영어이름은 ‘벤(Ben)’이다. US아마추어챔피언십 결승전 상대가 스탠퍼드대학의 벤 마틴이었으니, ‘벤 VS 벤’의 대결에서 이긴 셈이다. 또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12학년)인 안병훈은 이미 UC버클리로 스카우트가 확정된 상태다. 버클리와 스탠퍼드는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명문 대학으로 라이벌 관계다. 즉 흥미롭게도 안병훈은 대학 입학도 하기 전에 지역 라이벌대학을 가장 큰 대회에서 물리친 것이다.
대학 진학과 관련해 안재형 전 감독은 재미있는 비화를 공개했다. 현재 플로리다에 사는 안병훈은 서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한국 사람도 많고, 한국과도 가깝고, 또 골프 환경도 좋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LA중심가에 위치한 사립 최고 명문인 USC를 원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USC의 골프 코치가 안병훈을 낮게 평가하고 다른 선수들을 우선 선발하는 까닭에 어드미션을 얻지 못했다. 안병훈은 보기 좋게 낙방한 셈이다. 어쩔 수 없이 안병훈은 UC버클리를 택했다. 안재형 전 감독은 “이번 병훈이의 우승을 보면서 USC 골프팀이 아마 뼈저리게 후회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기본에 충실’ - US아마 쾌거 후 바로 주니어대회 출전
1주일 만에 안병훈이 출전한 대회는 주니어플레이스챔피언십이다. 미국내 상위 40명에 전세계의 주니어 강자 80명을 초청해 승부를 가리는 제법 큰 대회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는 주니어 대회(고등학생까지 대상으로 함)다. 대학생은 물론 성인까지 총출동한, 그 우승자에게는 마스터스, US오픈, 브리티시오픈 출전권이 주어지는 US아마추어챔피언십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일종의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김연아가 고등부대회에 출전한 것이나 다름없다.
안재형 전 감독은 “사실 남들이 다 그러더군요. US아마를 우승한 선수가 뭐 하러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느냐고요. 하지만 병훈이는 아직 주니어 대회 우승이 없어요. 아무리 큰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해도 지금은 주니어 선수가 맞고요. 그래서 원칙대로, 그리고 사전에 계획한 대로 이번 대회에 출전한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안재형 전 감독은 물론 엄마 자오즈민도 세계적인 탁구선수였다. 따라서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안 전 감독은 “탁구나 골프나 기본적으로 훈련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 안병훈이 마지막 라운드 23번홀에서 벙커에 빠진 공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 ||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큰 쾌거를 달성했지만 지금 ‘안 부자’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어서 들어오라고 난리지만 금의환향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바로 학교 수업 결손이다. 운동선수의 경우 공부는 제쳐놓고 성적만 따지는 한국의 문화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렇게 큰 대회에서 우승했으면 학교에서 플래카드 붙여놓고, 그까짓 수업은 적당히 봐주겠지만 미국은 그런 게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9월 초 이미 학교가 개학했는데 아직 학교를 가보지도 못하고 있어요. US아마 우승으로 바빴죠. 그리고 이번 대회까지 출전하면 두 주를 빠지는 거죠. 학점을 제대로 취득하지 못하면 대회출전은 물론이고 대학진학까지 지장이 있어요. 지금 병훈이와 제 최대 고민은 바로 학교 수업입니다.”
어떻게든 다음 주부터는 학교 수업에 참석하고, 또 수업진도를 따라갈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가을학기가 끝나는 연말까지는 한국에 갈 여유가 없고, 내년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안병훈의 귀국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안 전 감독도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 가고 싶지만 아들의 스케줄과 함께 하다 보니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국에 있는 엄마 자오즈민이 예정보다 빨리 플로리다 집으로 올 계획인데 어차피 아들의 골프는 ‘아빠’가 책임지기로 한 까닭에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안재형 전 감독은 “대학 1년까지는 함께 다닐 생각입니다. 그 후에는 대학생활을 하든, 프로로 가든 병훈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려면 한 2년은 더 걸릴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제 탁구가 아니라, 골프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농담하지 말라, 한국 탁구계가 아들 때문에 골프로 잠깐 외도한 나를 버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웃음으로 답했다.
만만치 않은 스포츠 유전자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 야후스포츠의 골프 칼럼니스트인 브라이언 머피는 부모인 안재형, 자오즈민을 언급하며 안병훈을 “아마 탁구 경기에서 엄마를 이기지 못하는 유일한 아이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유머스럽게 표현했다. 이어 안병훈과의 흥미로운 일문일답도 소개했다. “타이거(우즈)가 해내지 못한 일을 했다. 미래에 너의 우상인 타이거와 대결하기를 원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안병훈이 “내 우상은 Y. E. Yang(양용은)이다. 질문을 다시 해주시겠어요?”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화제를 모은 아빠에 대한 안병훈의 촌평. “아빠는 말이 많은 편이다. 했던 말을 또 하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아빠의 충고는 도움이 된다. 가끔 아버지한테 ‘아빠, 그만 좀 말하세요, 집중해야 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AJGA(미국주니어골프협회)에 관계된 한국 사람들에 따르면 안병훈은 속이 깊고, 머리가 좋다고 한다. 즉 아빠가 한국의 잘나가는 감독직마저 던진 채 자신을 위해 미국으로 온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또 감사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2005년 14세에 미국으로 온 안병훈은 오는 9월 17일로 만 18세가 된다. 처음엔 영어가 힘들었지만 이제는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하다. 186㎝에 96㎏의 당당한 체격. 그러나 안병훈의 음성은 생각보다 어리게 들렸다. “갑자기 너무 큰 대회에서 우승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직 정신이 없지만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안 전 감독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기술적으로 비거리가 좋고, 아이언샷이 정확한 게 장점이다. 또한 승부근성이 강하고, 머리가 영리하다는 점에서 발전가능성이 높다”라고 평가했다. 공의 무게와 도구(채)의 종류가 바뀌어서 그렇지 안병훈은 세계적인 탁구선수였던 부모의 유전자를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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