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에로 콘텐츠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는데 그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이승희였다. 무선 인터넷은 개념조차 없었으며 전용선은커녕 익스플로러도 생소하던 1990년대 중반.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서서히 이행되던 이때 등장한 이승희는 수많은 남성들을 ‘sung hi lee’라는 검색어로 밤새게 만들었으며, 사진 한 장 보는 데 5분 이상 걸렸던 전화선의 느린 전송 속도 앞에서도 인내하게 했다. 미국에서 온 ‘노랑나비’ 이승희.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 시절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유명사다.
1970년 서울 은평구의 기지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8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휴스턴, 댈러스, 시카고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던 어린 시절의 이승희는 공주보다는 톰보이에 가까웠으며 중·고등학교 시절엔 공부밖에 모르는 비사교적인 아이였다. 잦은 이사로 수많은 전학을 해야 했던 그녀는 친구가 없었고 오로지 도서관에서 책만 보았던 아이였다.
198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오하이오 주립대 의대에 진학했다. 스포츠 의학 쪽으로 진로를 결정한 그녀는 3년 동안의 대학 생활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전액 장학금을 받은 우등생이었다. 이때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곳은 종종 들르곤 했던 댈러스의 한 나이트클럽. 어느 날 밤 그곳에선 패션쇼가 열리고 있었는데 에이전트는 이승희에게 즉석으로 모델 제안을 했다. 이후 친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플레이보이>의 에이전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카메라 앞에 서기를 권유했고 이승희는 1992년에 처음으로 화보의 주인공이 된다.
<플레이보이>의 격월간 특별판인 <란제리>는 이승희의 주무대였고 1996년엔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란제리>의 표지 모델이 된다. 음료수인 마운틴듀를 비롯해 맥스웰 커피, 선키스트 주스, 밀러 맥주, 힐튼 호텔, 카멜 담배 등 다양한 제품의 모델을 거친 그녀는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보급을 통해 믿을 수 없는 스타덤에 오른다. 1996년 네티즌들이 선정하는 ‘누드 퀸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2위에 오른 것. 인터넷의 속성상 그녀는 빠른 시간 내에 전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고향인 한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뜨거운 팬덤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 한국을 찾았을 때 공항부터 이승희에게 쏟아진 관심과 카메라 플래시는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희 신드롬’은 진정 대단했다. 특히 그녀가 등장하는 “여자의 가슴이 바뀐다”는 카피의 CF는 한국 여성들의 ‘가슴관’을 바꿔놓았고, 이승희가 살짝 성형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 성형외과에 이른바 ‘이승희 스타일’의 가슴 성형 문의가 쇄도했다. 종 모양에 밑으로 늘어뜨렸을 때 꼿꼿하게 모양이 유지되는 현수형이 결합된 그녀의 가슴은 진도희 이후 한국 사회에 다시 한 번 가슴 혁명을 일으킨 셈이었다.
그녀의 나비 모양 문신도 화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해 사회적 시선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여기엔 160㎝가 조금 넘는 한국 여성이 월등한 신체 조건의 서양 여성들을 제치고 최고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양된 일종의 애국주의도 작용했다.
영화 출연 제의도 잇따랐다. 사실 그녀는 1995년에 영화 촬영을 위해 한국을 찾은 적이 있었다. 펄 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재미교포 홍의봉 감독의 <살아 있는 갈대>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상황은 달라졌다. 신상옥 감독의 <용호천사>와 <치외법권>의 주연으로 언급되었고, 입양된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이윤택 감독의 <해당화>엔 무려 2억 7000만 원의 개런티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녀가 최종 선택한 영화는 <물 위의 하룻밤>(1998). 조악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승희라는 이름으로 서울 관객 10만 명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다.
하지만 단 1년 뒤인 1998년부터 그녀는 급격하게 잊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 그녀가 2007년에 결혼했으며 다시 스포츠 의학 공부를 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한때 숱하게 검색창에 기록되었던 ‘sung hi lee’는 망각의 이름이었다. 음지의 누드를 당당한 예술로 끌어올린 이승희.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옷을 입고 벗을 자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다. 나는 누가 벗으라고 해서 벗는 사람도 아니고, 벗지 말라고 해서 벗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나의 누드는 내가 내 삶에 대해 갖는 결정권이다. 그건 파워풀한 것이다. 그 생각은 나를 정말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