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부터) 전재용 박상아의 관계 보도한 777호, 전도연의 결혼소식을 전했던 773호, 심은하의 웨딩숍 방문 포착. 696호, 전두환 씨의 재산을 찾아낸 654호, 김대업 테이프 의혹 보도한 539호. | ||
창간 15주년의 비밀은 ‘타블로이드’에 있다. 1991년까지 학원사에서 발행하던 <일요신문>은 판권이 일요신문사로 넘어오면서 1992년 보통 신문의 절반 크기인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재창간, 거듭났다. 읽기 편한 스타일, 쉽고 재미있는 뉴스로 사실상 국내 최초로 ‘타블로이드 정신’을 구현해낸 것이다. 때문에 일요신문사는 1992년 4월 15일을 창간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창간 당시 “타블로이드로 내면 망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을 보기 좋게 뒤엎고 <일요신문>은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후 <일요신문>을 베끼는 ‘유사지’들이 난립했다. 하지만 <일요신문>은 778주 동안 한 번도 정상을 내주지 않았다. 총 20종 가까이 난립한 주간신문 가판 시장점유율(2006년 자체조사)을 보면 <일요신문>이 73.0%를 차지하고 있다. 이어 A 사가 17.4%, B 사가 3.4%, C 사 2.8%, D 사 1.7%, 기타 1.7%였다.
지난 2005년 여론조사전문기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한 주간신문 가판 독자 조사에서도 독자의 70%가 <일요신문>을 구입한다고 밝혔다. 또 주간신문 독자 가운데 <일요신문>을 알고 있는 비율(인지율)은 92%를 기록했다.
이런 <일요신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권력이나 자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독자만을 위한 신문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일이다. ‘김대업 테이프 손댄 흔적 많다’ ‘노무현 대통령감 1위’ 등 각 대선후보 진영에서 보면 오락가락하는 <일요신문>의 특종과 기획보도는 많은 오해를 샀다. ‘도대체 누구 편이냐’는 것. 대선전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각 캠프는 이를 분석하느라 진땀을 뺐고 결국 그들 모두 <일요신문>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건 당연한 결론이었다. <일요신문>은 ‘독자편’이기 때문이다.
‘독자편’에 서서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추적하다 보니 특종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04년 11월 고현정이 컴백 기자회견장에서 “10년간 저를 취재하느라 고생하신 일요신문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한 것은 <일요신문>의 근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최근 연예계의 ‘권력화’를 반영하듯 ‘고현정 이혼 후 컴백’부터 ‘전도연 결혼’ ‘심은하 결혼’ ‘이선희 결혼’ ‘문근영 슬픈 가족사’ 등 연예 분야의 굵직한 특종이 많았다.
물론 <일요신문>의 특종은 한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29만 원밖에 없다”던 전두환 씨 일가의 재산 추적은 지난 2004년 전 씨 본인 명의의 땅까지 찾아내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최근에는 전 씨의 차남 재용 씨 이혼과 톱 탤런트 출신 박상아의 관계를 보도하는 등 전 씨 관련 추적은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 15년간 <일요신문>이 발굴한 특종을 언급하자면 끝이 없다.
<일요신문>의 이런 특종과 기획은 대권 판도를 바꾸기도 했다. 지난 1997년 대선 <일요신문>은 대선후보들과 그 아들들의 병역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이회창 씨 아들들의 병역 의혹을 최초로 확인, 끈질기게 추적 보도했다. 이 씨는 결국 두 번의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후 공직자 후보들의 병역검증은 ‘법제화’됐다.
<일요신문>은 정치 예측에도 ‘혜안’을 보여준다. ‘아니면 말고’ 식 추측과 차원이 다르다. 지난 2002년 대선을 위한 민주당 경선 초기, 지지부진하던 노무현 후보는 광주에서 승부를 갈랐다. <일요신문>은 광주 경선 일주일 전 ‘파란의 경선정국 대예측 노무현 바람 광주선 태풍’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예측은 적중했다. “일요신문이 쓰면 현실이 된다”는 정치권 인사들의 감탄사는 빈말이 아니다.
▲ 최형우 ‘휠체어 산책’ 포착한 262호(왼쪽), 전 청와대 실장 장학로 씨. 268호(가운데), 청와대 나서는 김현철 씨. 291호. | ||
<일요신문>은 이제 ‘대한민국 대표’를 넘어 ‘세계 한민족 대표’가 됐다. 창간 직후인 1992년 미주판과 일본판을 시작으로 뉴질랜드판 중국판 인도네시아판 필리핀판 호주판 싱가포르판 등, 시기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10개국에서 동시 발행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기 때문이다. 해외 동포들의 정보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건 <일요신문>뿐이다.
<일요신문>이 다시 태어난 건 1992년. 대선의 해였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역시 선두’라는 헤드라인으로 포문을 연 <일요신문>은 깊이 있는 정치정보에 목마른 독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줬다. 5주년인 1997년 대선에서는 대선 판도를 바꿔놨다. 10주년인 2002년 대선 땐 핫 이슈였던 ‘병역비리 녹음테이프’의 조작 가능성을 보도해 ‘설’이 판치는 정국을 바로잡았다. 이제 15주년, 2007 대선에서 <일요신문>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세상이 주목하고 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