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일요신문 | 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title>
        <link>https://www.ilyo.co.kr/?ac=list&amp;cate_id=180</link>
        <description>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Wed, 29 May 2013 08:50:00</lastBuildDate>
        <pubDate>Wed, 29 May 2013</pubDate>
        <image>
            <url>https://www.ilyo.co.kr/design/images/facebook_icon_200.jpg</url>
            <title>일요신문 | 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title>
            <link>https://www.ilyo.co.kr/?ac=list&amp;cate_id=180</link>
        </image>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최종회] ‘빛과 그림자’]]></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630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6305</guid>
            <pubDate><![CDATA[Wed, 29 May 2013 08:5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이명박은 ‘경제대통령’으로선 낙제점이나 G20 정상회의 유치 등은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다.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29/1369785055563050.jpg"/> 2013년 2월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춘추관으로 내려와 퇴임 연설문을 읽었다. A4용지 17쪽 분량이었다.&ldquo;위대한 국민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던 지난 5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영광된 시간이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선진국이 이제 우리의 현실이 돼가고 있습니다.&rdquo;이명박은 이날 자신의 브랜드 사업인 4대강 사업에 대해선 &ldquo;논란도 있지만 해외 전문가들은 높이 평가한다&rdquo;고 자찬했다. 그리고는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9명의 초상화가 걸린 청와대 세종실에 자신의 초상화를 거는 행사를 열었다.건설사 CEO 출신으로 &lsquo;경제 해결사&rsquo;를 자임한 &lsquo;경제 대통령&rsquo; 이명박은 과연 한국 경제를 살려냈을까. 그리고 17대 대선에서 그가 내건 747공약 즉, 7% 경제성장, 4만 달러 소득, 세계 7대 강국 진입은 성공했을까. 일자리 300만 개 창출은 어떻게 됐을까.이명박 정부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9%. 노무현정부(4.3%) 때보다 못하다. 7%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는 공염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2700여달러로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보다 1088달러 늘었다. 물가를 고려하면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한 것과 다름없다. 일자리 창출은 125만 개에 그쳤다. 300만 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국민은 747을 믿었지만 실은 무리수였다. 오히려 기획재정부는 2011년 국가채무에 따른 이자지급액이 50조 원 정도에 육박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부동산과 교육 현실을 들여다봐도 이명박은 &lsquo;경제대통령&rsquo;으로선 낙제점을 받았다는 평가가 많다.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부동산 대책은 2012년 9월 10일 나왔다. 주택을 사들일 때 내는 취득세는 50% 줄여주고, 미분양 주택을 사 집값이 올라도 5년간 오른 차익은 양도소득세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 부동산 거래 활성화에 관심이 쏠렸지만 시장의 반응은 &lsquo;글쎄&rsquo;였다. 5년 동안 20차례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성과가 없었고, 이명박의 부동산 대책은 &lsquo;양치기 소년&rsquo;의 외침과 같이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노무현 정부 때보다 못했다. 노무현은 부동산 값이 너무 올라서 각종 규제를 내놓았지만 오히려 집값은 널뛰듯 뛰었다. 반면 이명박은 부동산 값을 올리려고 규제를 완화했지만 집값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lsquo;거래 실종&rsquo;이라는 표현이 뉴스의 단골 표현 중 하나였다.  <img alt="2010년 11월 12일 G20 기업자금지원 경진대회 시상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 하퍼 캐나다 총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29/1369785055563051.jpg"/> 우리나라 공교육비 민간 부담률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사교육을 줄이겠다면 공교육 강화를 강조했지만, 학부모의 부담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일각에서는 이런 이명박을 두고 &lsquo;백지왕&rsquo;이라고 비판했다. 대선 당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구축을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2011년 갑자기 재검토 의사를 피력했고,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도 경제 중심의 과학도시로 바꾸려 했다가 역풍을 자초했다. 영남권 신공항 유치는 &lsquo;없던 일&rsquo;로 해버렸다. 표를 공약(空約)으로 샀다는 비판이 고조됐다. 그 사이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은 남남이 됐다. &ldquo;영남권의 분열과 반목은 어찌 보면 영남 대통령 이명박이 불러들인 것&rdquo;이라는 이야기가 고향땅에서부터 나왔다.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정비사업으로 축소해 진행하면서 4년간 22조 원을 투입했지만 감사원은 최종 발표는 &lsquo;총체적 부실&rsquo;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4대강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지시한 상태다. 그 속의 비리 내역 의혹은 또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수질 악화와 환경 파괴에 대해선 시민사회단체와 환경단체가 현미경과 망원경을 교차해 들여다보고 있다.박근혜 정부가 &lsquo;한반도 신뢰 프로세스&rsquo;를 펼치기도 전에 대북관계가 악화하는 것을 두고도 이명박 탓을 하는 이들이 많다. 금강산 관광 중 박왕자 씨 피격 사건,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의 후속 격이 이번 정부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lsquo;비핵&middot;개방 3000&rsquo; 즉,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주민 소득을 3000달러까지 올리겠다는 구상은 용도 폐기 운명에 처했다.이명박 정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평가는 잔인하다. 올해 2월 모노리서치라는 여론조사기관이 전국 성인남녀 1082명을 대상으로 이명박 정부 평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명박 정부가 &lsquo;매우 못했다&rsquo;라고 40.6%가 응답했다. 10명 중 4명 이상이 아주 부정적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lsquo;대체로 못했다&rsquo;라는 26.8%까지 합치면 10명 중 7명 가까이가 이명박의 국정운영을 질타했다. 보는 눈은 같다. 가장 못한 일로 ▷4대강 사업(39.9%) ▷인사부정 및 부패 척결(15.9%) ▷일자리 창출 및 경제 활성화(13.4%) ▷국민 통합 및 소통(12.9%) ▷남북관계 재정립(3.8%) ▷G20 정상회담 등 외교(2.0%)를 꼽았다. 한 정치권 인사는 &ldquo;국민적 실망감이 이렇게 커서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앞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아직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는 진행형이고,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rdquo;고 평가했다. <img alt="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가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29/1369785055563052.jpg"/> 역대 정부에서 매년 위기를 겪은 이명박으로선 할 말이 많을 듯하다. 국정 운영에 동력을 걸면서 가장 힘을 발휘해야 했던 취임 1년차에는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문제로 촉발된 촛불 정국이 지속됐고, 용산 참사 사건까지 터졌다.취임 2년차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위기를 맞았다. 측근비리 등으로 수사를 받던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자 이명박은 &lsquo;정치적 타살&rsquo;의 주범이라는 보이지 않는 혐의가 덧씌워진다. 제2의 촛불사태를 직감한 이명박 정부는 경찰병력을 이용해 서울광장을 폐쇄하지만 노무현 영결식 전날까지 이어지면서 국민적 반감이 극에 달하게 됐다.취임 3년차에는 &lsquo;북풍&rsquo;이 강했다. 2010년 초반부 터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말 터진 연평도 포격 사건은 이명박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겼다. 그 사이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파문까지 일어 안팎으로부터 괴로웠다. 특히 집권 3년차에는 전국의 대학교수 200여 명이 &lsquo;올해의 사자성어&rsquo;로 장두노미(藏頭露尾)를 꼽았다. &lsquo;4대강+천안함+민간인 사찰+영포회+한미자유무역협정+연평도&rsquo; 등 각종 사건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진실을 밝히고 반성하기보다는 감추려고만 하는 모습이었다고 꼬집은 것이다.재산이 많으니 돈 욕심을 버리겠다던 이명박은 &lsquo;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rsquo;을 자부했지만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lsquo;정치적 멘토&rsquo;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그들의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등 친인척과 최측근은 &lsquo;돈 문제&rsquo;에 얽혀 줄줄이 구속돼 체면을 구겼다. 아들 시형 씨는 내곡동 대통령 사저터 특혜 계약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특유의 &ldquo;내가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rdquo;로 시작하는 화법은 주위의 조언이나 직언을 새겨듣지 않는 &lsquo;불통 논란&rsquo;을 불러왔고, 퇴임을 얼마 앞두지 않고 한 최측근의 사면은 &ldquo;낯이 두껍다&rdquo;는 비판을 자초했다.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 등 난관에서도 위기 극복에 앞장섰고, G20 정상회의 유치는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다.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고, 한미&middot;한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무역의 활로를 넓혔다. 핵안보 정상회의를 열면서 국가 위상을 알리기도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과 녹색기후기구(GCF) 사무국 유치 등은 이명박으로선 성과 중 하나다. 또 이명박은 실용주의를 외치면서 임기 중 49차례 84개국을 방문하면서 자원 외교에 주력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전 수주, 아덴만 구출 작전의 성공 등은 가뭄에 단비 같은 영광의 순간이었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퇴임 이후의 삶이명박 전 대통령의 &lsquo;퇴임 이후 삶&rsquo;도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박근혜 정부와 19대 국회의 집중 조사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부인 김윤옥 여사가 관심을 쏟아 왔던 &lsquo;한식 세계화 사업&rsquo;에 대해서도 국회가 감사에 전격 나서게 됐다. 지난 대선 말 불거진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검찰 수사가 예고돼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주목된다.국회는 또 이명박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밝히려고 혈안이 돼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매출액이 70% 이상 급성장한 태아건설의 김태원 대표는 이명박과 고대 동기에다 현대건설 동기인데 이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예정돼 있다. 검찰도 4대강 사업과 관련한 이명박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여기에다 최근 이명박은 서울 송파 올림픽공원 내 실내 테니스장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토요일 오전을 독점해 제2의 &lsquo;황제테니스&rsquo; 논란에 휘말렸다. 테니스를 사랑하는 이명박 내외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이 공원 실내 테니스장을 대통령스럽게 사용했다는 것이다.일각에서는 이명박이 강남구 논현동 사저와 별도의 사무실을 차린 것을 두고 앞으로 있을 송사에 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22] 친인척 스토리]]></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888</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888</guid>
            <pubDate><![CDATA[Thu, 23 May 2013 08:57: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23/1369267054558880.jpg"/> 이명박은 당선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압구정동 한 중식당에서 외손녀(둘째 딸 승연 씨의 자녀)의 돌잔치를 치른다. 취임 전이었다. 당시 한 매체는 이명박이 가족들에게 신신당부했는데 그 요지는 이렇게 전해졌다. &lsquo;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으려면 가족이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rsquo; &lsquo;분수를 좀 지켜주세요&rsquo; 사위 세 명이 참석했고, 막내아들이 있던 자리였다. 당시 큰 사위는 &ldquo;장인어른의 뜻을 잘 받들겠습니다&rdquo;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에게 친인척 관리는 결코 쉽지 않았다. 이명박에게도, 아내인 김윤옥 여사에게도 챙겨야 할 친인척들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나 이명박은 사회 지도층 인사와 혼인관계로 얽혀 있어 두드려야 하는 돌다리가 너무 많았다. 가까이에는 효성가와 LG가, 멀게는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SK가 등과 얽혀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사건과 사고는 꼭 의외의 곳에서 터지게 된다. 2009년 4월 대법원은 2008년 4월 18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국회의원 공천을 받게 해주겠다며 30억 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 언니 김옥희 씨(당시 75세)에 대해 징역 3년과 추징금 31억 8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옥희 씨는 2008년 2월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게 해줄 수 있다면서 김종원 전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30억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있었다. 이 판결에서 옥희 씨에 대해선 전직 공기업 임원 등으로부터 다른 공기업 감사를 시켜줄 수 있다면서 1억 5000만 원을 받은 혐의도 추가됐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가까운 누구라는 사칭 사기가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속행된 셈이었다. 게다가 옥희 씨는 수감 기간 절반을 병원 특실에서 보내면서도 병원비를 체납했고, 병원이 독촉하자 &ldquo;청와대에서 내줄 것&rdquo;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쳐 구설에 여러 번 올랐다.사실 대통령 친인척들은 본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 세간이 주목하게 된다. 그들의 주변부가 가만두질 않는 것이다. 역대 정권의 말로가 대통령 친인척 비리로 얼룩지고, 급기야 여럿 투옥되기도 해 새 정부로서는 반면교사로 삼을 것 같지만, &lsquo;친인척 수난사&rsquo;라는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특히 17대 대통령 이명박은 3남 4녀 중 다섯 번째였고, 부인 김 여사도 3남 4녀 가운데 여섯째여서 관리대상으로 해야 할 가족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명박의 바로 위 형은 이상득 전 의원이고, &lsquo;도곡동 땅 사건&rsquo;의 주인공 이상은 씨는 큰형이다. 이명박의 바로 위 누나와 여동생은 한국전쟁 때 이명박의 눈앞에서 사망했다. 김 여사의 바로 밑 동생은 김재정 씨로 이상은 씨와 함께 도곡동 땅을 산 주인공으로 구설에 여러 번 올랐다.김재정 씨는 당뇨병과 신부전증 등에 의한 심근경색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계속하다 2010년 유명을 달리했다. 이 대통령의 &lsquo;차명재산 관리인&rsquo;이라는 의혹은 그 뒤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김 씨는 이명박의 큰형 상은 씨와 함께 설립한 ㈜다스의 감사이자 최대 주주였는데 급여도, 배당금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lsquo;실제 대주주는 그가 아닌 것 아니냐&rsquo;는 의혹을 받아왔다. 도곡동 땅에 대해서도 1993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의 재산 공개 당시 &lsquo;1985년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 재직 때 사들인 도곡동 165번지 일대 150억 상당의 땅을 처남 김재정 이름으로 은닉한 사실이 밝혀졌다&rsquo;는 언론보도가 전해진 터였다. 김 씨는 1978년부터 1992년 사이 전국 수십 곳의 땅을 사들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국 47곳에서 산 땅만 224만㎡(67만 7600평)에 달할 정도였다. <img alt="이상득 전 의원(왼쪽)이 저축은행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7월 구속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장남 시형 씨는 지난해 10월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과정에서 배임과 부동산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특검 조사를 받았다. 임준선·최준필 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23/1369267054558881.jpg"/> 이명박의 아들 딸들은 다행히 큰 사고를 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크고 작은 촌극을 소소하게 일으켰을 뿐이다. 이명박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맏딸 주연 씨는 이명박의 외모와 성격까지 고스란히 닮았다고 전해진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기악을 전공했고, 대선 기간에는 막내 동생 시형 씨와 함께 아버지 곁을 지키며 선거운동을 도왔다. 하지만 집권 직후 이명박의 해외 출장 때마다 동행하면서 &ldquo;청와대 직원인지, 외교부 직원인지 모르겠다&rdquo;는 비판을 자초하게 된다. 주연 씨의 남편은 검사 출신인 이상주 씨다. 대선 당시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로 일했는데, 2012년에는 삼성전자 최연소 팀장으로 승진한다. 애플과의 특허소송 등 특허 부문을 제외한 해외 법률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둘째 딸 승연 씨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남편은 서울대 의대 내과 전문의인 최의근 박사. 승연 씨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서울대병원의 홍보대사로 위촉돼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병원은 &lsquo;엄마젖 사랑 사진 및 수기 공모전 시상식&rsquo;에서 승연 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서울대병원은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고 노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배정민 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한 바 있었다. 서울대병원이 얼마나 청와대 덕을 보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 박사의 아버지로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전문의인 최윤식 교수는 이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셋째 딸 수연 씨는 언니들과 달리 미술을 전공했다. 남편은 조현범 한국타이어 사장. 정권 초반에는 부사장이었다. 조 사장의 아버지는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고, 조석래 전 전경련 회장(효성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조 사장은 대선 당시 효성ITX, 아트라스BX 등 &lsquo;이명박 테마주&rsquo;를 만들어 구설에 오르기도 했는데, 2005년 건설교통부는 조 당시 부사장이 전국에서 일곱 번째로 비싼 집에서 살고 있다는 주택 가격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 사장은 세 사위 가운데 가장 많이 언론에 거론됐다. 무혐의가 됐지만, 코스닥업체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의혹이 이는 등 &lsquo;사위 게이트&rsquo;로 번질 만한 폭발성 있는 의혹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막내 시형 씨는 유명한 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환영식에서 슬리퍼를 신고 공식석상에 나타나 히딩크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과 사진을 찍어 &lsquo;무개념&rsquo;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그 뒤로 언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2011년 &lsquo;내곡동 사건&rsquo;으로 다시 조명을 받게 된다. 내곡동 부지 9필지는 시형 씨와 청와대가 대통령 사저 부지로 매입한 곳인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마지막으로 그린벨트가 해제된 곳이었다고 한다. 또 시형 씨와 청와대가 부지를 사는데 들었던 비용이 54억 원 정도인데 회사원인 시형 씨가 돈을 내는 과정에서 많은 의문을 낳았다. 결국 시형 씨가 23억 원, 청와대가 약 30억 원에 매입했어야 맞는 것이 시형 씨가 11억 2000만 원, 청와대가 42억여 원을 들이면서 문제가 된 사건이었다.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장녀 성은 씨의 남편은 LB인베스트먼트(옛 LG벤처투자) 사장 구본천 씨다. 막내 지은 씨의 남편은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의 장남 오정석 씨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이상득 전 의원의 맏아들 이지형 씨는 전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의 대표이사로 수백억 원의 자산가로 알려졌다. 이 전 의원은 올해 초 솔로몬&middot;미래저축은행과 코오롱그룹으로부터 7억여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투옥 중이다.대구가 고향인 김 여사는 경상도 억양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을 워낙에 소박하고 털털하게 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몇몇 구설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 첫 번째가 &lsquo;왼손 경례&rsquo;였다. 2010년 현충일 당시 이명박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할 때 김 여사는 혼자 왼손 경례를 해 많은 비판을 자초했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영부인 감이 아니라는 비판이 인다. 2010년 10월에는 국민 세금을 들여 김 여사 명의의 요리책을 내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책은 국&middot;영문합본판으로 1700부가 한정 제작되기로 돼 있었다. 이명박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 여사를 이화여대 메이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메이퀸을 뽑는 학과 대표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진실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친인척 관리는 어떻게?이명박 정부에서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민정1비서관 산하에 &lsquo;친인척관리팀&rsquo;이 있었다. 팀에는 경찰, 검찰, 감사원 등 정보기관 출신 행정관 10여 명이 활동했으며 이명박의 친인척 1200여 명을 관리했다. 관리범위는 대통령의 8촌 이내 친족과 외가 쪽 6촌 이내, 부인 김윤옥 씨의 6촌 이내 친족 등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관리팀이 다 맡을 수 없었고, 일부는 경찰이 관리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은 담당 친인척에게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연락하거나 주변 탐색을 통해 정보를 모았다.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해 관리팀의 행정관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보고서는 민정1비서관과 민정수석을 거쳐 윗선에 보고되는 식이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21] 말실수와 해프닝]]></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471</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471</guid>
            <pubDate><![CDATA[Tue, 14 May 2013 09:3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민대화합과 경제발전을 위한 기도회’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14/1368491463554710.jpg"/> 언행에서의 사소한 실수는 정치인에게 치명타가 되기도 한다. 특히 대통령으로선 티끌 만한 실수 하나도 국민적 질타를 받아야 할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용서까지 구해야 한다. 서민적인 어투 탓에 자주 구설에 올랐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될 정도로 이명박의 구설도 절대 적지 않았다. 특히 이명박의 &lsquo;종교 편향&rsquo;은 임기 내 두고두고 발목을 잡기도 했다.이명박의 &lsquo;기독교 편향&rsquo;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예고탄을 쐈다. 이른바 &lsquo;서울시 봉헌&rsquo; 발언 논란이다. 2004년 5월 30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lsquo;청년&middot;학생 연합기도회&rsquo;에서 당시 이명박 시장은 &lsquo;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rsquo;를 직접 낭독했다.&ldquo;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rdquo;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이명박의 친 기독교 발언은 국회의원 이명박의 입에서 이미 나온 바 있다. 때는 1996년. 기독교TV가 &lsquo;이명박 의원 초청 신앙강좌&rsquo;를 마련했는데 그곳에서 이명박은 사찰을 &lsquo;절간&rsquo;으로, 스님을 &lsquo;중&rsquo;으로 표현했다.&ldquo;저희는 어머님이 그렇게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산(살게 된) 집이 &lsquo;절간&rsquo;이었습니다. 그 절에 &lsquo;중&rsquo;이 떠난 다음에 모두 몰리(몰려) 들어가 &lsquo;중&rsquo;이 다시 못 오게 만들었습니다.&rdquo;이 발언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잠시 문제가 됐다. 당시 이 시장 후보는 불교방송에서 &ldquo;소문은 사실무근이며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rdquo;고 밝혔지만 이후 불교계의 인터넷 언론인 불교정보센터가 방송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이명박의 해명은 &lsquo;거짓말&rsquo;이 되고 말았다.사실 이명박의 &lsquo;화법&rsquo;은 철저한 &lsquo;자기 확신&rsquo; 내지는 &lsquo;자기 자만&rsquo;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ldquo;내가 해봤으니 아는데&rdquo; &ldquo;내가 한때 말이야&rdquo; 등을 서두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lsquo;이명박 화술 스타일&rsquo;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 대통령까지 오른 &lsquo;자수성가&rsquo;에 대한 자신감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img alt="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14/1368491463554711.jpg"/>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명박의 &lsquo;나도 한때&rsquo; 화법에 담긴 심리를 &lsquo;자뻑(자아도취) 권위주의&rsquo;로 분석한 바 있다. 그의 말을 옮겨 보면 이렇다.&ldquo;천하의 이명박이가 이 나이에 안 해본 게 어디 있고, 모르는 게 뭐 있겠나라는 심리가 담겨 있다. 밥을 굶기도 해봤고, 달동네에서도 살아봤고, 고학도 경험했다. 사회 밑바닥 중 안 해본 일이 없다. 데모하다 감옥에도 다녀왔고,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도 역임했고, 안 가본 나라도 없고, 국회의원도 해봤고, 테니스와 클래식, 발레 감상 같은 취미생활에다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종교적 봉사활동도 해봤고&hellip;가난이나 어려움을 공감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감격하고 공감하는 것이다.&rdquo;그래서 이명박의 &lsquo;나도 한때&rsquo; 발언을 찾아보니 이렇게나 많았다. &ldquo;학생 때 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다&rdquo;(2008년 6월 중소기업성공전략회의), &ldquo;나도 체육인이다. 15년간 수영연맹 회장을 했고, 세계체육연맹 집행위원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rdquo;(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 초청 오찬), &ldquo;내가 어린 시절 노점상을 해봐서 여러분 처지를 잘 안다&rdquo;(2008년 12월 서민 초청 연찬), &ldquo;나도 한때 철거민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철거민과 비정규직의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rdquo;(2009년 2월 12일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만찬), &ldquo;나도 창업했던 소상공인이다.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무엇보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rdquo;(2009년 4월 소상공인 교육생과 만남) 등등.특히 &ldquo;나도 기업인 출신으로서 아세안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한 적이 있다&rdquo;(2009년 5월 한&middot;아세안 최고경영자 정상회의)는 발언은 정말 이명박의 &lsquo;자아도취&rsquo;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하지만 이런 이명박에게도 가끔 &lsquo;무식이 탄로&rsquo;나 버리는 해프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명박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img alt="소설가 이외수 씨는 이명박 대선후보의 현충원 방명록 글을 보고 잘못된 맞춤법을 교정해 자신의 홈피에 올렸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14/1368491463554712.jpg"/> 2009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 행보의 하나로 서울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재래시장 상인들은 &ldquo;대형마트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rdquo;며 울먹였는데 이명박은 자꾸 다른 소리만 한다. &ldquo;내가 노점상 할 때는 슈퍼마켓이 없었다&rdquo;라든지, &ldquo;요즘은 인터넷으로 하면 웬만한 건 좀 양이 적어도 농촌에서 보내준다. 농촌에도 전부 인터넷이 들어가 있어서 개인이 인터넷으로 하면 보내주는데 시장까지 안 보내주겠냐?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안 하고 가까운 데서 떼어다 팔려니까&hellip;&rdquo;라며 인터넷 직거래를 오히려 제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또 &lsquo;내가 한때&rsquo; 발언을 꺼냈다.&ldquo;내가 옛날에 노점상 할 때는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다. 끽소리도 못하고&hellip;. 장사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죽고 뭐&hellip; 이렇게 모여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 좋아졌잖아, 세상이.&rdquo;이명박의 &lsquo;멜라민 발언&rsquo;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2008년 이명박은 &lsquo;멜라민 파동&rsquo;이 일자 직접 식품의약품안전청을 방문했다. 당시 식약청장이 &ldquo;(성인의) 반 치사량이 3그램 정도이고, 굉장히 많은 양을 먹어도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영아의 경우 (분유 등) 멜라민을 다량 섭취하면 사망&hellip;&rdquo;이라고 보고했다. 그 뒤 이명박은 한 과자 봉지를 들어 보이며 &ldquo;근데 이게&hellip; 뒤에 설명이 잘 붙어 있어요? 멜라민이란 말이 없네&rdquo;라고 답한다. 멜라민 성분을 표시하지 않은 제품이 문제가 돼 방문한 것인데 제품에 왜 멜라민이라는 표시가 없냐고 되물은 것이다. 이명박은 재임 중 &lsquo;경인 아라뱃길 사업현장 보고회&rsquo;에서도 &ldquo;4면의 바다를 가진 대한민국이 바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 역사의 과오&rdquo;라는 말실수를 했다. 네티즌 사이에서 &lsquo;대한민국은 4면으로 둘러싸인 섬나라&rsquo;라는 각종 패러디가 줄을 이었다.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이명박과 부인 김윤옥 씨가 한국 여자핸드볼 경기 관람 중 태극문양이 거꾸로 뒤집힌 태극기를 들고 열심히 응원하는 장면이 캡처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일부 누리꾼은 국기를 거꾸로 하는 것은 그 국가에 대한 모욕이며 스스로 굴욕을 표현한 것이라며 캡처 사진을 퍼 나르기도 했다.그렇다면 이명박의 한글 맞춤법은 어땠을까. <img alt="취임식 때 쓴 방명록에도 맞춤법이 틀려 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14/1368491463554713.jpg"/> 이명박은 이미 대선 후보 시절인 2007년 6월 6일,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lsquo;당신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번영된 조국,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것을 받치겠읍니다&rsquo;라고 쓰면서 &lsquo;습니다&rsquo;, &lsquo;이루는 데&rsquo; &lsquo;모든 것을&rsquo; 등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실수를 보인다. 이후 네티즌이 그의 어휘 실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각종 손 글씨를 찾아내기 시작하는 데 여러 곳에서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lsquo;3&middot;15 정신으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화와 국가번영을 이루어지기 기원합니다&rsquo; (2007년 3월 23일 마산 국립3&middot;15민주묘지 방명록), &lsquo;충무공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후손들에게 늘 깊게 전해주리라 믿습니다&rsquo; (2007년 4월 4일 충남 아산 현충사 방명록), &lsquo;반드시 경제살리고, 사회통합 이루어 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살려서, 크게 보답하겠읍니다&rsquo; (2007년 10월 22일 광주국립 5&middot;18 민주묘지 방명록) 등의 문장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거나, &lsquo;습니다&rsquo;를 &lsquo;읍니다&rsquo;로 쓰고 있었다.이명박은 잘되면 제 탓, 잘못되면 남 탓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2004년 서울시장 재직 때 중앙버스차로제를 실시하며 혼란이 인 것을 두고 &ldquo;반상회를 해서 내용을 알려줬지만 (시민들이) 관심도 없었다. 그나마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잘 타고 다닌다&rdquo;고 밝힌 적도 있다.이명박의 목소리와 말투는 결코 친근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명박으로선 참 딱한 일이었다. 쇳소리가 나는 탁한 음성과 사투리가 섞인 불분명한 발음은 항상 화젯거리였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1 대 1 토론회를 하지 않았던 것,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될 수 있으면 TV 카메라 앞에 서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 스스로 목소리가 친근감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대선 당시 앵커 출신의 정동영 후보는 화술이 너무 뛰어나 &lsquo;정치 수사&rsquo;만 돋보였다. 어눌해 보였던 이명박으로선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심금을 울리지 못한 연설들, 내용은 좋지만 꼭 한 군데씩 틀린 맞춤법으로는 국민의 심리적 위기감을 치유하고, 국민적 단결을 끌어내는 국가 지도자의 능력으로는 큰 흠결이었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MB의 언행불일치국민과 언론이 왜 사사건건 이명박의 언행을 비판했을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스스로 &lsquo;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rsquo;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스스로 무게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경선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고 이명박을 돕기로 했다. 이명박 후보는 BBK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와 이회창의 출마 강행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해 11월 11일 &ldquo;정권 창출 이후에도 주요한 국정 현안을 협의하는 정치적 파트너로서, 소중한 동반자로서 (박근혜와) 함께 나가겠다&rdquo;고 약속했다. 이에 화답하듯 그 이튿날 박근혜는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서 &ldquo;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정도(正道)가 아니다&rdquo;라고 선언했다.하지만 이듬해 4월 총선 공천작업에서 이명박계 등 주류는 친박근혜 세력을 대폭 물갈이했다. 박근혜의 &ldquo;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rdquo;는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됐고, 이명박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만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20] 언론정책]]></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161</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5161</guid>
            <pubDate><![CDATA[Wed, 08 May 2013 09:3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최 위원장은 이 대통령과 수시 독대하며 정치 전반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8/1367973048551610.jpg"/>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은 한마디로 꼼수로 점철된 극심한 아마추어리즘의 완결판이었다. 대통령이 심을 수 있는 언론사 수장 자리에 &lsquo;이명박 사람들&rsquo;만 꽂으려 했으니 반발이 잇따랐고, 언론사의 투쟁과 파업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치적 홍보에만 열을 올리고 언론의 건강한 비판에는 귀를 막으려 했던 이명박은 아군인 줄로만 알았던 보수 언론으로부터 임기 말과 퇴임 후 극심한 비판 보도에 시달려야 했다.이명박의 언론관은 이미 서울시장 재직 때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때는 2004년, 서울시가 일부 언론사에만 국외취재 경비를 전액 지원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서울시청 출입기자단이 시장 사과와 담당자 징계 등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이명박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ldquo;진상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해 사과할 사안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 언론사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rdquo;2007년 6월 한 토론회에서 당시 이명박 대선 후보는 &lsquo;언론 매체를 차별 대우할 것인가&rsquo;라는 뼈있는 질문에 &ldquo;대통령으로서 친한 정도에 따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rdquo;고 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옳지 않기 때문에 참는 것이지, 마음으로는 &lsquo;그게 아니다&rsquo;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던 인수위원회는 출범 당시부터 이명박의 언론관을 여과 없이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가능토록 하고, 문화방송 MBC를 민영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먼저 속도를 낸 것은 신문&middot;방송 겸영이었다.2008년 1월 8일 인수위 강승규 부대변인은 문화관광부 업무보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는 &ldquo;언론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고 미디어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신문법을 폐지하고 대체입법을 하기로 했다&rdquo;고 발표했다. 그게 바로 신문&middot;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었고, 이명박 편에 있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자세를 취했다.MBC 민영화도 이명박의 굳은 결심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7년 11월 22일 한나라당은 예정돼 있던 MBC &lt;100분 토론&gt;에 일방적으로 불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 이유는 같은 날 MBC 라디오 &lt;시선집중&gt;이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왔던 에리카 김을 인터뷰했다는 것이었다. MBC &lt;PD수첩&gt;이나 &lt;시사매거진 2580&gt; 같은 심층탐사보도 프로그램도 이명박의 BBK 사건을 파헤친 바 있다. 한나라당은 MBC 본사를 직접 찾아 항의할 때마다 민영화 설을 흘리게 된다. 그게 바로 MBC의 &lsquo;괘씸죄&rsquo;였던 것이다. <img alt="2011년 3월 28일 언론 노조와 시민단체 등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왼쪽) 연임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8/1367973048551611.jpg"/> 이명박이 정권을 잡으면 무조건 방송에 진출하겠다는 언론사는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경험을 쌓던 중이었다. 조선일보는 비즈니스앤이라는 자체 케이블 방송 채널을 개국해 송출하고 있었고, UCC 사이트인 키위닷컴도 오픈해 운영했다. 수십억원을 들여 스튜디오와 녹음실, 종합편집실을 가동한 것에서도 어떤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중앙일보는 Q채널, J골프, 히스토리채널, 카툰 네트워크 등 다양한 케이블 채널을 자회사로 가지고 있었다. 이런 보수 신문사들이 모두 종합편성채널권을 가지게 된 것을 우연으로 보는 정치권 인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사실 이명박 정부에서 &lsquo;조중동&rsquo;은 특권 이상을 누렸다. 권언유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대선 당시 대선미디어연대는 조중동에 대해 &ldquo;한나라당이 아니라면 아니라는 취지에서 쓰고, 한나라당이 침묵하면 침묵했고, 한나라당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하면 기사가 사라졌다&rdquo;고 평가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 인선, 4강 특사단 파견, 총리 후보 압축, 신문법 폐지, 국정원 대화록 등 굵직굵직한 특종이 모두 조중동에서 나온 것을 두고서도 &lsquo;이명박의 편애가 심하다&rsquo;라는 지적이 잇따랐다.취임 첫해 미국산 쇠고기 촛불 파동으로 위기에 빠진 이명박은 &lsquo;언론사 낙하산 부대&rsquo;를 투입해 구원받으려 했다. 사건은 사건이고, 국민이 알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장악력이 큰 골치 아픈 방송부터 어떻게든 요리하고자 했다. 그게 바로 이명박의 &lsquo;언론 장악&rsquo; 시도다.이명박은 스카이라이프, YTN, 아리랑TV, 한국방송광고공사 등 대통령이 앉힐 수 있는 언론계 사장 자리에 대선에서 자신의 언론&middot;방송 특보를 지낸 공신들을 차례로 내보내기 시작한다. 대선 캠프의 방송특보로 KBS 보도국장 출신인 이몽룡 씨가 스카이라이프 사장으로 가는 것을 시작으로, 언론특보 정국록 씨를 아리랑TV 사장으로 보낸다. 캠프 방송총괄본부장이었던 구본홍 씨는 YTN 사장 자리를 꿰찼고, 방송특보 단장이었던 양휘부 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은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으로 임명된다. 광고 판매를 독점하는 기관에 캠프 출신 인사를 기용했으니 &ldquo;광고 탄압을 통한 방송 길들이기 아니냐&rdquo;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 즈음에 임기가 남은 KBS 정연주 사장을 사퇴시키면서 언론 탄압 비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이 모든 언론 &lsquo;장악과 탄압&rsquo; 시나리오의 중심에는 최시중 &lsquo;감독&rsquo;(방송통신위원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ldquo;방송과 인터넷 때문에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이 확산됐다&rdquo;는 겁 없는 이야기를 한 최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전후 대통령의 멘토로서 줄곧 실세로 거론된 인물이었다. &lsquo;정권 실세&rsquo; &lsquo;넘버3&rsquo; &lsquo;방통대군&rsquo; &lsquo;방송통제위원장&rsquo; 등으로 지칭된 그는 청와대를 무시로 드나들며 이 대통령과 수시 독대했으며, 방송이나 통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다음은 그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2008년 12월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창립 2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최 위원장은 김형오 국회의장, 여야 원내대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등 자신을 감독하는 국회 요인들이 줄줄이 참석한 자리에서 20분 이상 훈계를 늘어놓았다. <img alt="‘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 등 언론·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방송법 시행령 개정과 민영 미디어렙 도입 중단을 촉구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8/1367973048551612.jpg"/> &ldquo;공영방송, 공&middot;민영방송, 또는 민영방송 등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MBC의 정명(正名)은 과연 무엇인가. 이 자리가 축하의 말보다 오늘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는 냉엄한 자리가 되길 바란다. MBC가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국민의식 속에 무엇을 심어주었는지 돌아보라.&rdquo;그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생일상에 재를 뿌린 격이었다. 고령이었기 때문에 비판을 의식하지 않고 뜻한 바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lsquo;70대 리더십&rsquo;을 펼쳤다. (최시중은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함께 다녀왔다. 현지를 여행하면서 전후 비참한 생활을 하는 현지를 지켜보며 최시중은 &ldquo;대한민국도 국부를 창출할 뛰어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rdquo;고 생각했고 이명박을 지목했다)2009년은 미디어 관련법 처리가 정국의 핵폭탄이 된 해다. 대기업의 지상파 방송 진출 허용 문제를 둘러싸고 국회 문화체육예술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가 열쇠를 쥐고 있었는데 위원들 면면이 모두 조중동 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에는 조선일보 출신인 김효재, 진성호, 최구식 위원이 있었고, 자유선진당에는 김창수 위원이 있었다. 중앙일보 출신으로는 고흥길 문방위 위원장과 홍사덕 위원이 배치됐다. 동아일보 출신으로 김경재 위원이, 그리고 강승규, 안형환, 허원제, 한선교 등 위원장을 포함해 새누리당 16명 위원 중 10명이 언론사 출신으로 채워졌다. 미디어 관련법은 그렇게 국회에서 처리된 것이다.하지만 이명박의 언론 장악은 곧 암초를 만났다. 바로 사법부다. 2009년 11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는 정연주 KBS 사장 해임에 대해 &ldquo;KBS 사장의 임기 제도는 공영방송의 독립성, 공정성,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정 전 사장에 대한 해임 처분은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위법성이 있어 KBS 사장 해임 처분을 취소한다&rdquo;고 판결했다.YTN 구본홍 사장 임명을 반대한 노조원 6명이 해고되고, 14명이 징계를 받은 것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는 &ldquo;YTN이 2008년 10월 7일 처분한 해고는 재량권을 남용했고, 정당한 이유가 없어 무효&rdquo;라고 밝혔다.2009년 10월 20일 &lsquo;국경없는기자회&rsquo;(RSF)는 &lsquo;2009 세계 언론자유지수&rsquo;를 발표했는데 한국이 175개국 가운데 69위로 강등된다. 2007년 39위, 2008년 47위에서 더 떨어지면서 이명박과 언론의 관계는 차갑게 식어버린다. 2011년 국제 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아예 &lsquo;언론자유국&rsquo;에서 &lsquo;부분적 언론자유국&rsquo;으로 강등하는데 그 이유는 &ldquo;검열과 함께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 콘텐츠에 대한 정부 영향력의 개입이 확대된 데 따른 것이며 정부가 대형 방송사의 경영에 개입해 왔다&rdquo;를 들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선 아주 창피한 상처였다.이명박이 얼마나 언론을 장악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2010년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1월 10일 &lsquo;세종시 수정안 홍보계획&rsquo; 문건을 작성해 각 부처에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이 문건에는 &lsquo;언론을 접촉할 때 지역차별이 없다라고 집중 홍보하라는 지침과 함께 KBS &lt;뉴스라인&gt; 20분 특집 편성(세종시 및 과학기술벨트 정책 설명-총리실장, 민동필 이사장, 강병주 교수 등)&rsquo;이라고 기술돼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국방송 KBS에 정부가 정책 홍보 뉴스를 편성해 넣으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종합편성채널이란지상파 방송처럼 보도, 오락, 교양 등 모든 분야 프로그램을 편성할 수 있는 채널로 줄여서 종편이라고 한다. 2009년 7월 22일 국회에서 통과된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안에 따라 신문의 방송사 겸업이 가능해지고, 기업의 방송사 지분 소유허용에 대한 규제도 완화됐다. 매일경제신문의 매일경제TV, 동아일보의 채널A, 조선일보의 TV조선, 중앙일보의 JTBC가 선정됐고, 한국경제신문의 HUB, 태광그룹의 케이블연합종합편성채널은 탈락됐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9] 천안함·연평도 안보정국]]></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801</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801</guid>
            <pubDate><![CDATA[Wed, 01 May 2013 09:23: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천안함 46용사 합동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훈장 추서에 앞서 경례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1/1367367825548010.jpg"/> 이명박 대통령의 &lsquo;아마추어리즘&rsquo;에 대한 비판은 집권 3년차에 집중포화를 맞게 된다. 경제 대통령 이미지로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가 &lsquo;안보 무능&rsquo;이라는 직격탄에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2010년 초에 터진 천안함 폭침 사건과 그해 말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이명박의 대응은 그야말로 &lsquo;신출내기&rsquo;였다. 실종자 수색 작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국민적 질타가 이어졌고, 침몰 사건의 원인 규명을 두고 미적지근하게 대응했으며, 책임자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제 식구 감싸기 논란에까지 빠졌다. 이명박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율(리얼미터)은 천안함 사태 직전인 3월 26일 51.1%에서 사흘 뒤인 29일에는 40%로 11.1%포인트나 떨어졌다. 기세등등했던 집권 여당 한나라당 지지도도 천안함 사건 이전과 비교하면 5.2%포인트 떨어지면서 동반 하락했다. 민주당은 천안함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특위 구성을 주장하고 민주노동당은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실시를 제안하면서 야권의 공조를 불러오기도 했다.천안함 폭침 원인을 두고 각종 설들이 제기되면서 대한민국은 각종 음모론으로 얼룩졌다. 급기야 천안함 전역 장병 일부가 5대 의혹에 대한 집중적인 대응에 나서면서 일각에서는 &ldquo;이명박보다 예비역이 낫다&rdquo;는 표현까지 적나라하게 나왔다. 당시 5대 의혹에 대한 예비역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ldquo;천안함이 침몰지역인 백령도 인근 1.8km까지 간 적이 없다. 그곳은 수심이 낮고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라 만약 그곳에 갔다면 특별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천안함 한 척만 사고지점에 간 것도 이상하다.&rdquo;&ldquo;천안함 노후화로 말미암은 &lsquo;피로 파괴설&rsquo;이 제기돼 있는데 천안함이 1989년 건조돼 20년 이상된 것이지만 천안함보다 오래된 군함도 작전 수행 중이다.&rdquo;&ldquo;인류 해군 역사상 초계함이 내부 요인으로 두 동강 난 경우는 한 차례도 없다. 초계함 내부는 방화 장비가 잘 갖춰져 화재 가능성도 낮다.&rdquo;&ldquo;암초에 걸려 침몰했다는 암초 좌초설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대비 시간이 충분해 실종자가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없다.&rdquo;&ldquo;제1차 연평해전 때 천안함이 파손됐다고 하는데 당시 즉각 보수해 재출동할 정도로 완비했다. 속초함이 76mm 함포를 쏜 것은 북한과 같은 명확한 적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rdquo;국방부의 발표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전역 장병의 직언은 이명박 정부를 당황케 했다. 그래선지 이명박은 4월 20일 북한 정권을 향해 &ldquo;북한이 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김일성 주석의 98회 생일을 맞아 평양 대동강변에서 벌인 불꽃놀이를 벌였는데) 백성은 어려운데 60억 원을 들여 생일이라고 밤새도록 폭죽을 터뜨렸다. 그 돈으로 옥수수를 사면 얼마나 살 수 있겠느냐. 북한이 바르게 가야 한다고 본다&rdquo;고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이 발언도 &ldquo;천안함 이야기는 못하고 폭죽 이야기나 해댄다&rdquo;는 비판 여론을 불러오게 된다.당시 정치권에서는 이명박의 안보관에 대해 &ldquo;올 것이 왔다&rdquo;는 분위기였다. 이명박은 건설 CEO 출신인 기업가라 어떤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아주 신중하게 따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lsquo;신속한&rsquo; 결정보다는 &lsquo;정확한&rsquo; 결정을 추구한다는 논리였다.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것도 이명박이 수지 타산만 따지는 기업가 출신이기에 북핵 언급이 없는 정상회담에 나서지 않았으며, 남북관계도 마치 사업을 하듯 대한민국이 &lsquo;갑&rsquo;이고 북한이 &lsquo;을&rsquo;이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안보 분야만큼 즉각적이고 신속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분야도 없다.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 소장 출신으로 정치권의 대표적인 &lsquo;북한통&rsquo;인 송영선 미래희망연대 의원은 당시 이명박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ldquo;10년 동안 엄마(과거 정권)가 밥을 떠먹여 주는 바람에 아이(북한)가 숟가락, 젓가락질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새엄마(이명박 정권)가 와서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숟가락, 젓가락질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lsquo;니 손으로 떠먹으라&rsquo;고 윽박질렀다. 천안함 사건은 숟가락, 젓가락질이 제대로 될 리 없는 아이가 잔뜩 열이 받아 새엄마 얼굴에 밥그릇을 냅다 던진 셈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이라는 상대가 있는 냉엄한 국제 정치 속에서 현 정부가 북한을 대하는 방식은 잘못됐다.&rdquo;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lsquo;비핵&middot;개방&middot;3000&rsquo;으로 압축된다. 즉, &lsquo;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3000달러로 올려주겠다&rsquo;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비핵화할 뜻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완전히 차단되고 정체됐다는 비판이 보수진영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대화와 압박을 병행하는 투트랙으로 가야 한다는 주문과 비공개적으로라도 채널을 복원해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잇따랐다.문제는 &lsquo;이명박의 사람들&rsquo;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혼선만 부채질하면서 천안함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보기관끼리 보이지 않는 암투가 노출되기도 했다. 군 정보기관을 접촉한 언론은 &lsquo;북한 연루&rsquo; 가능성을 보도했고, 국정원 접촉 언론은 북한과 관계없음을 보도하면서 국론 분열을 불러온 것이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외교안보실과 정무라인, 홍보라인이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ldquo;도대체 컨트롤 타워가 어디냐&rdquo;라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img alt="천안함 희생장병 합동분향소를 찾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조문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1/1367367825548011.jpg"/> 그렇게 몇 개월을 우왕좌왕하고 있던 차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지고 만다.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할 징후가 상당히 포착되었음에도 이를 예측하고 준비한 정황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경악은 극에 달했다.당시 한 일화다. 12월 2일 국방부 대변인과 기자들 사이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오갔다.기자: 잘 아시겠지만 참여정부에서는 국방정책과 관련해 &lsquo;협력적 자주국방&rsquo;이라는 슬로건을 분명히 제시했죠. 이명박 정부에도 이 같은 국방정책 슬로건이 있나요? 국회 국방위에도 아는 분들이 없어서요.대변인: 아&hellip;국방백서를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제 코멘트보다는 그게 공식 입장이니까 국방백서를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기자: 실례지만 대변인께서도 잘 모르시는 건가요?대변인: 그렇게 물으시면 저를 시험하시는 거고&hellip; 제가 어설프게 답하는 거보다 거기에 잘 정리해놓았을 테니 그걸 보고 이해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국방백서에는 &lsquo;정예화된 전진강군&rsquo;이라고 적혀 있었다. <img alt="이명박 정부는 안보 무능이라는 직격탄에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됐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501/1367367825548012.jpg"/> 집권 3년차, 가장 힘이 실려야 했던 이명박 국정수행 지지율은 &lsquo;북풍&rsquo;에 포격당한 꼴이 됐다. 보통 외부로부터 안보 위기가 닥치게 되면 정부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뭉치는 결집 효과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천안함과 연평도로 생긴 &lsquo;북풍&rsquo;은 반대로 불었다. 연평도 포격 일주일 뒤 &lsquo;리얼미터&rsquo; 조사는 그 전 주보다 3.9%포인트나 빠지면서 이명박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42.7%대로 나타났다. G20 효과가 북풍이라는 한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lsquo;미온적인 군사 대응&rsquo;과 &lsquo;대북 대응 방향 혼란&rsquo;이 큰 이유로 꼽혔다.이 반사이익은 곧바로 당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돌아갔다.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박 전 대표가 죄다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박 전 대표는 연평도 도발 다음날인 11월 24일 &ldquo;이번에 북한이 우리 국민과 영토에 직접적으로 포격을 한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이고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도발에는 반드시 큰 대가를 따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rdquo;라고 대북 비판 수위를 한껏 높이게 된다. 그리고 &lsquo;모든 수단과 방법&rsquo;에 대해선 &ldquo;거기에는 외교적, 군사적 모든 수단이 다 있다&rdquo;고 밝히면서 보수진영의 세력 결집을 꾀한다.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전 대표는 다음날인 25일 북한 포격으로 사망한 군인 유족을 찾아 &lsquo;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좋은 대북정책을 만들어달라&rsquo;는 당부에 &ldquo;뜻을 잘 새겨서 정말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rdquo;고 약속했고, 다음날인 26일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와 트위터에 글을 남기면서 &ldquo;여성은 안보에 약할 것&rdquo;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일거에 해소한다.&ldquo;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국민은 국가를 신뢰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rdquo;&ldquo;평소 공기의 존재에 무관심하듯, 우리의 모든 생활이 무의식 중에 안보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도발이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다.&rdquo;뜻하지 않은 안보 정국에 이명박은 죽고, 박근혜는 산다. 거기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효과까지 재 부각되면서 박 전 대표로선 &lsquo;여의도 야당&rsquo;으로 점차 자리매김하게 된다.최기서 언론인 잠깐천안함 폭침 사건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한 인천해양경찰서 소속 해안 경비정에 의해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됐지만 나머지 46명은 실종됐다. 당시 사고 원인에 대해선 어뢰설, 기뢰설, 내부폭발설, 피로파괴설, 좌초설 등 다양했다.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 미군의 육해공 연합 호국훈련에 대해 자국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것이라며 호국훈련 종료 후 76.2mm 평사포, 122mm 대구경 포, 130mm 대구경 포 등을 이용해 연평도 군부대 및 인근 민가를 향해 개머리 해안부근 해안포기지로부터 무차별 포격을 가한 사건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8] 민간인 불법사찰 파문]]></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474</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474</guid>
            <pubDate><![CDATA[Wed, 24 Apr 2013 10:2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24/1366766577544740.jpg"/> [일요신문] <img alt="검찰이 수사 개시 나흘 만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증거인멸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24/1366766577544741.jpg"/>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재선을 위해 비밀 공작반을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시켜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된 사건이다. 닉슨은 이 사건으로 사임한다.지난해 4월 미국의 일간지 &lt;뉴욕타임스&gt;(NYT)는 이명박 정부에서 논란이 된 민간인 사찰 사건을 &lsquo;한국판 워터게이트&rsquo;로 소개해 보도했다. NYT는 불법 사찰, 은폐 시도, 증거 인멸, 대통령 관련 인사들의 구속과 함께 이명박이 불법 사찰을 알고 있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여러모로 &lsquo;닮은꼴&rsquo;임을 소개했다.2010년 6월 21일.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신건, 이성남 의원은 &ldquo;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이명박 대통령의 비방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일반 시민을 불법 사찰했다&rdquo;고 폭로했다. 이명박 정부의 &lsquo;민간인 불법 사찰&rsquo; 사건이 공론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로부터 닷새 뒤 MBC PD수첩팀은 &lsquo;대한민국 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rsquo;편에서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의 사찰 의혹을 집중 조명했고, 검찰은 다음 달인 7월 5일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에 착수한다.집권 3년차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부가 그랬듯 스스로 정권의 힘을 빼는 사건을 자초한다.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국민은행 퇴직자로 구성된 협력업체 ㈜KB한마음의 당시 사장 김 씨는 촛불시위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에 대해 &lsquo;대통령명예훼손죄&rsquo;로 고발당한다. 정부는 모회사인 국민은행에 압력을 넣어 유죄가 입증되지도 않은 김 씨가 회사에서 내몰리게 된다. 김 씨는 소유 주식도 포기해야 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김 씨가 강원 평창 출신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이광재 씨와 동향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이 오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한다. 하지만, 털어도 김 씨로부터 나간 정치자금은 발견되지 않았다.서울 동작경찰서는 총리실의 지시 공문을 받아 김 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다. 결국 무혐의 의견서가 나왔고 이를 작성한 수사관은 교체된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 씨에 대해선 동영상과 관련된 명예훼손을 들어 검찰에 사건이 송치된다. 검찰은 수개월을 끌면서 수사를 진행했고,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다. 그런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김 씨측 변호인은 여러 수사기록을 확보, 국무총리실이 진행한 불법적인 사찰의 전모를 언론에 알리게 된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 민간인 사찰 사건의 전모다. 김 씨의 담당 변호인인 최강욱 측의 변론요지서에 따르면 당시 동작경찰서의 &lsquo;내사결과 보고서&rsquo;에는 &ldquo;조사결과를 종합한 결과, 청구인(김종익을 말함)의 횡령 혐의에 관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 사건의 동영상 및 블로그를 보아도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총리실의 내사 및 국민은행과의 특수한 관계 등으로 국민은행 측의 요구에 따라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지분까지 이전해 개인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본 것으로 판단해 혐의 없음이 명백하므로 내사를 종결하고자&rdquo;라고 밝히고 있다.이 사건이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비화한 것은 그 뒤 발생한 일련의 은폐 시도와 증거 인멸, 대통령 측근들의 줄줄이 구속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img alt="지난해 민간인 불법사찰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영준 전 차관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1억 6400여만 원이 선고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24/1366766577544742.jpg"/> 사찰 업무를 담당했던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이인규 지원관은 청와대를 시시때때로 드나들며 관련 내용을 보고했고,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인 이영호,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던 박영준 등이 보고라인에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들은 모두 이명박과 동향인 경북 포항&middot;영일 출신으로 &lsquo;영포라인&rsquo;의 핵심들이다.공직윤리지원관실은 또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lsquo;이레이저&rsquo; &lsquo;디가우서&rsquo;라는 전문장비를 동원해 사찰기록이 담긴 결정적인 증거물 &lsquo;컴퓨터 하드디스크 파일&rsquo;을 영구삭제 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검찰은 수사 개시 나흘 만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압수수색하면서 결정적인 증거물을 없앨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또 증거인멸 과정에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주무관이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실 행정관으로부터 &lsquo;대포폰&rsquo;을 건네받아 사용한 사실이 통화기록 조회를 통해 확인되면서 &lsquo;청와대 배후설&rsquo;은 점점 더 커지게 됐다.&lsquo;민간인 불법 사찰&rsquo; 사건의 본질은 &lsquo;누가&rsquo; 그리고 &lsquo;왜&rsquo; 사찰을 지시했느냐에 있다. 사찰 담당이었던 이인규 전 지원관은 &ldquo;이강덕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팀장에게 민간인 사찰 내용을 구두로 보고했다&rdquo;라고 진술했고, 사건 기록 대장에는 &lsquo;BH(Blue House:청와대) 하명&rsquo;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지원관실 조사관 수첩에 기록된 &lsquo;BH 지시 사항&rsquo;이라는 문구나, 청와대 최 아무개 행정관이 만든 &lsquo;대포폰&rsquo; 등을 보면 청와대의 뒷받침 없이는 이런 사찰은 진행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사찰 사건과 관련한 이들이 모두 &lsquo;영포라인&rsquo;(영일&middot;포항)의 핵심이거나 주변부 인물이었다.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의 주요 폭로자인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ldquo;누가 그렇게 못자리하듯 인사 발령을 냈는가?&rdquo;라며 &lsquo;몸통&rsquo; 발본색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수사를 맡았던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 부실 수사의 몸통으로 떠올랐다. 경북 상주 출신에 대구 대건고,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TK-고려대 라인이었던 것이다.한 민간인의 불법 사찰 의혹을 계기로 이 사건은 당시 한나라당 남경필 정두언 의원 등의 부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고위 공무원 중 호남 인사, 노조 관계자, 언론인,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으로까지 확산할 뻔했지만, 불씨는 커지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청와대 국정원 검찰 등 정부의 주요 기관에서 전방위적으로 민간인 사찰을 벌여왔다는 의혹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론과 여론의 동력을 획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한 정치권 인사는 &ldquo;당시 총리실의 사찰 활동은 과거 군사독재 하에 있던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이 자행했던 행태와 다르지 않은데 당시 수사 권한이 없는 기무사가 민간인을 수사, 구금, 고문했고 검찰조사 과정에도 입회하는 등 불법 행위를 벌였다&rdquo;며 &ldquo;하지만 각 기관이 사실상 대통령의 수족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활동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rdquo;고 전했다. 김 씨가 정보수사기관에 강제로 끌려가 고충만 당하지 않았던 것만 다르다는 뜻이다. <img alt="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지난해 3월 기자회견을 통해 2010년 당시 자신이 총리실 자료삭제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24/1366766577544743.jpg"/> 일각에서는 정부가 김 씨를 고발한 &lsquo;대통령명예훼손죄&rsquo;는 노태우 정부에서 폐지된 &lsquo;국가원수모독죄&rsquo;와 같은 것으로 법이 국민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의 방패막이로 여론의 자유와 비판의 목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하지만 여전히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은 그 배후가 가려져 있다. 총리실이 사건을 어떻게 기획했고, 그것을 은폐하고자 누구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결론이 없다. 이명박 자신도 &ldquo;언론을 통해서 사건을 처음 전해 들었다&rdquo;며 거리를 두고 있다.2010년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이 사건과 관련한 총리실과 청와대 인사들에 대해 1년 6월 미만의 징역형을 내렸다. 그 후 민간인 사찰과 관련해 청와대와 총리실 사이에 돈이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 돈에 대해 청와대 자금설, 정권 실세 자금설, 정부 기관 자금설 등이 회자됐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다만 지난해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으로 구속 기소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1억 6400여만 원이 선고됐다. 박 전 차관이 가장 큰 몸통이었는지, 아니면 박 전 차관이라는 깃털을 제거함으로써 몸통이 은폐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민간인 불법 사찰은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음은 분명해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국민사찰, 국민탄압, 국민테러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최근 대법원 2부는 회사자금 1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lsquo;민간인 불법사찰 사건&rsquo;의 피해자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에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 전 대표는 2005년 9월부터 2008년 8월까지 KB한마음 대표로 재직하면서 회계장부를 조작해 1억 1512만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뒤 8750만 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 씨는 &ldquo;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사찰을 폭로한 사실 때문에 검찰로부터 표적수사를 당했다&rdquo;며 반발했지만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 사건을 두고 이명박과 그 주변 인물들의 &lsquo;전략적 판단의 미흡함&rsquo;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게 하는가를 우호 언론에 주문했더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을 것이란 얘기다. 종합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lsquo;대북 원조&rsquo;로 보도하느냐 &lsquo;대북 퍼주기&rsquo;로 보도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생각이 바뀔 수 있듯이 이 민간인 불법 사찰을 &lsquo;동향 보고&rsquo;나 &lsquo;여론 수집&rsquo;으로 보도하게 했더라면 거대한 사건으로 비화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참여정부 VS MB정부 &lsquo;총리실 공직감찰조직&rsquo;사실 노무현 정부에서나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실의 공직감찰 조직은 비슷했다. 노무현 정부에는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산하 조사심의관실이 있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있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국무총리실 직제 규정에 따라 공직기강 확립, 부조리 취약 분야 점검 및 제도 개선, 공직자 사기 진작 등의 업무를 맡았지만, 과거 청와대의 비밀경찰로 불렸던 &lsquo;사직동팀&rsquo;과 노무현 정부의 심의관실 기능을 합쳐놓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좀 다르다.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훈령으로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실 산하에 특별감찰반을 신설해 고위 공직자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이 두 조직 모두 조사 인력 대부분을 타 기관에서 파견 받아 운영한 점, 40~50명가량의 인원이 배치된 점, 공직자에 대해 내사를 진행하거나 감시하고, 미행하고, 비위사실이 확인되면 당사자로부터 확인서를 받아 해당 기관이나 총리실에 통보하는 식의 감찰 방법을 행한 것은 비슷하다. 그래서 각종 선거에서 이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이 떠오르면 노무현 정부에서도 불법 사찰이 있었다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장했던 것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7] 세종시 논란의 끝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072</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4072</guid>
            <pubDate><![CDATA[Wed, 17 Apr 2013 08:2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주고받은 ‘강도’ 설전은 세종시 수정안 문제가 권력 싸움으로 비화된 단면을 보여준다.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17/1366154890540720.jpg"/>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고자 내민 &lsquo;세종시 대리인&rsquo; 정운찬 국무총리 카드는 실패작이었다. 정 총리를 세종시 세트에 묶어 팔아 그 지지율을 단번에 올리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정 총리는 대박 아닌 쪽박 신세가 됐다. 정 총리가 &lsquo;세종시 행정 비효율&rarr;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 또는 대폭 축소&rarr;세종시 경제도시화&rsquo;로 수정론의 수위를 높일수록 정 총리 발탁이 집권 여당 내 박근혜 독주를 막는 여러 카드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명박에 대한 여론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실 세종시는 정 총리가 나서기엔 판돈이 너무 큰 게임이었던 것이다.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면 여권은 책임론에 휩싸일 것이고, 그 책임론의 1차 표적은 정운찬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실제, 그렇게 됐다.세종시 논란이 이명박의 조기 레임덕을 불러왔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이 있을까. 단적으로 당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 12개 단체는 성명서를 내고 전국 과학기술인들의 염원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lsquo;행정도시 축소 변질용&rsquo;으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며 폭발했다. &ldquo;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에 대한 추진 논의에서 정치적 고려나 이해관계는 배제하라!&rdquo; &ldquo;정치권은 과학벨트 사업을 당리당략에 이용하지 마라!&rdquo; 등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녹아 있었다. 과학기술인부터 이명박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세종시 논란은 이렇듯 국론 분열과 지역 갈등, 여야 갈등, 집권 여당 내 계파 갈등 등 모든 분란을 품고 있었다. 정책적, 정치적 이슈가 세종시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lsquo;국민적 피로도&rsquo;도 심각했던, 논란의 작품이었다.새누리당 내부에는 &ldquo;이러다 곧 쪼개진다&rdquo;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정몽준 당 대표는 이명박의 세종시 수정안을 받아들이면서 박근혜 전 대표와 각을 세웠는데, 그 유명한 &lsquo;미생지신(尾生之信)&rsquo; 일화를 남기고 만다.&ldquo;미생이라는 젊은 사람이 애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내리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결국 &lsquo;익사&rsquo;했다.&rdquo;즉, 세종시 수정안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박 전 대표가 곧 &lsquo;익사&rsquo;하게 될 것 운운한 것이다. 홍준표 의원도 &ldquo;세종시 논란은 박근혜 전 대표의 &lsquo;신의성실원칙&rsquo;과 이명박 대통령의 &lsquo;사정변경원칙&rsquo;이 부딪친 것이고, 그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토론을 통해 정해야 한다. 토론이 안 되면 분당하는 것이 맞다&rdquo;며 박 전 대표를 겨눈다.분명한 것은 세종시 논란에서 이명박은 사라지고 박근혜만 보였다는 데 있다. 박 전 대표는 정 대표의 발언에 &ldquo;이해가 안 된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rdquo;이라고 응수한다. 정 대표를 향해 &lsquo;손가락질이나 받을 것&rsquo;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2010년 1월 11일, 정부가 세종시를 수정해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동시에 박 전 대표는 대권행보의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1990년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영삼이 내각제 합의각서 공개를 따지며 당무를 거부, 경남 마산으로 내려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압박한 뒤, 차기 대권을 보장받았던 것이나, 이회창이 1993년 국무총리로 임명되고 나서 127일 만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표를 던지고 &lsquo;대쪽&rsquo; 이미지를 얻어 단숨에 대권 주자로 도약한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은 박근혜를 자극했고, 박 전 대표는 이명박을 겨냥해 정면승부수를 던졌다.하지만 이명박이 세종시 출구 전략으로 &lsquo;개헌 카드&rsquo;를 꺼내든 것도 정치적 경험이 없는 데서 오는 아마추어적 발상과 같았다.그해 2월 25일 이명박은 취임 2주년을 맞이해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 간담회를 열고 &ldquo;선거법 개혁과 행정구역 개편, 제한적이지만 헌법에 손을 대야 한다&rdquo;고 언급한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은 &ldquo;올해 말까지 개헌해야 한다&rdquo;며 말을 받았고,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ldquo;내각제로 가야 한다&rdquo;는 주장을 꾸준히 펼친다. 당시 친이계가 자꾸 차기 대통령의 힘을 빼는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이야기를 하면서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깝게 있는 박근혜를 불필요하게 자극한 것이 됐다. 주호영 특임장관과 박형준 정무수석이 꾸준히 박근혜와 접촉하려 했지만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img alt="세종시 수정안이 재석 275인 중 찬성 105인, 반대 164인, 기권 6인으로 부결됐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17/1366154890540721.jpg"/> 그러다 정 총리가 말을 거들면서 이명박과 박근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당시 이명박이 &ldquo;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rdquo;며 여당 내에서 반대만 하지 말고 일단 멈추고 충분히 이야기하자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박근혜를 이 말을 받아 &ldquo;집안사람이 마음이 변해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rdquo;고 받아친다. 사실상 이명박을 &lsquo;강도&rsquo;로 비유한 것이다.평정심이 무너진 청와대에서 이동관 홍보수석은 당시 정치권에서 통용되던 &lsquo;박근혜 전 대표&rsquo;라는 호칭을 버리고 &lsquo;박근혜 의원&rsquo;과 &lsquo;박 의원&rsquo;을 다섯 번이나 거론하면서 &ldquo;잘못을 했으면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니냐. 적절한 해명과 그에 따른 공식적인 조치가 필요하다&rdquo;고 공세를 편다. 친박계는 이동관을 해임하라고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들은 척 만 척했다. 그 와중에 정 총리는 &ldquo;집안사람이 강도로 돌변한다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가정&rdquo;이라고 반박, 박근혜를 &lsquo;상식 없는 사람&rsquo;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이명박으로선 세종시 수정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자 노림수였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이었던 2005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골자로 한 &lsquo;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rsquo;이 통과될 때, 이명박은 &ldquo;수도가 분할되면 나라가 망한다&rdquo;는 논리로 수도분할반대운동의 선봉에 선 바 있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촛불 정국에서 벗어나 녹색 성장을 외친 이명박의 지지율이 상승세였고, 야당인 민주당은 거대 야당 구실을 전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으며, 경기는 회복세였다. &lsquo;경제 대통령&rsquo;을 표방한 이명박으로선 집권 2년차에 4대강과 함께 세종시 수정안을 투트랙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는 &lsquo;침묵하던&rsquo; 박근혜의 입을 열게 했고, &lsquo;여의도 대통령&rsquo;이라는 봉인을 이명박 스스로 해제해준 꼴이 된 것이다. 2010년 6월 22일,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국토해양위에서 부결 처리되면서 사실상 &lsquo;사망선고&rsquo;를 받았다. 주요 정치인들이 세종시를 두고 정치생명을 건 힘겨루기를 해왔기 때문에 정치적 파장이 만만찮았고, 가장 큰 피해자로 이명박이 지목됐다. 국정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2009년 11월 27일, &lsquo;국민과의 대화&rsquo;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ldquo;저 하나가 좀 불편하고, 욕먹고,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이것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rdquo;며 &lsquo;역사적 소명&rsquo;이라 밝혔던 이명박으로선 불편하고 욕먹고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면서도 세종시 수정을 해내지 못하게 됐다.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변경해 삼성과 한화, 롯데와 웅진 등 대기업 유치까지 이끌어냈지만, 이명박의 대여 리더십은 그 순간, 끝장이 났다.당시 정치권에서는 이명박과 노무현이 아주 닮은꼴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하반기인 2005년, 한나라당에 &lsquo;대연정&rsquo;을 제의하면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부를 들쑤셔 놓아 국정 파행이 거듭된 것처럼, 이명박의 세종시도 같은 꼴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권에선 집권 하반기로 갈수록 &lsquo;분열적 이슈&rsquo;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그해 6월 29일 결국 정치권의 많은 반대에도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본회의로까지 간다. 거기에서 박 전 대표는 직접 본회의 단상에 올라 반대토론에 나선다. 2005년 4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 이후 5년여 만이었다.&ldquo;오늘은 지난 열 달 동안 큰 혼란과 갈등을 가져온 세종시 논란이 최종 결정되는 순간이다. 우리 정치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진다면 끝없는 뒤집기와 분열이 반복될 것이다.&rdquo;박 전 대표의 말에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다. 언론은 일제히 &lsquo;박근혜의 힘&rsquo;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명박이 언론의 주목도에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하지만 박근혜로서도 잃은 것이 많았다. 당내 차기 대선주자로 우뚝 섰지만 당내 계파 갈등을 심화시킨 주역이 됐고, 충청권의 지지를 얻었으나 당시 이명박 정권과 대립하게 됐으며,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지만 고집스러운 이미지도 연출시킨 꼴이 됐다.그러면서 이명박을 둘러싼 친이계는 체제 결속을 강화하면서 세대교체론으로 박근혜를 깎아내리는 전략을 꾀하기 시작한다. 친이계 내부에서 &lsquo;박근혜만 아니면 된다&rsquo;는 생각은 더욱 확고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장 그 다음 달 벌어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4명의 친박계 주자 중 서병수만이 턱걸이로 최고위원에 당선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세종시 일지▶2002년 9월: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가 &lsquo;신행정수도 건설&rsquo; 공약 발표▶2003년 12월: &lsquo;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rsquo; 국회 통과▶2004년 10월: 헌법재판소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2005년 1월: 정부 &lsquo;16부4처3청&rsquo;을 이전하는 &lsquo;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rsquo; 국회 제출▶2005년 3월: 여야 &lsquo;16부4처3청&rsquo;을 &lsquo;12부4처2청&rsquo;으로 줄여 이전하는 안에 합의▶2006년 1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개청▶2007년 7월: 세종시 기공식▶2009년 9월: 정운찬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ldquo;세종시 수정&rdquo; 방침 표명▶2009년 11월: 이명박 &lsquo;국민과의 대화&rsquo;에서 세종시 수정안 당위성 역설, 세종시 민관합동위 발족▶2010년 1월: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변경하는 수정안 확정▶2010년 3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제출▶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상임위에서 부결, 본회의 부결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6] 세종시 수정안 정국]]></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367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3673</guid>
            <pubDate><![CDATA[Wed, 10 Apr 2013 08:44: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당시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에 대해 “원안+알파가 필요하다”며 원안 수정을 공식 선언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10/1365551057536730.jpg"/>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과거를 돌아보며 가장 후회하는 일은 무엇일까. 정치권 호사가들에게 물어보면 단연 &ldquo;세종시일 것&rdquo;이란 답이 가장 많다. 세종시 문제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풀어야 할 &lsquo;묵은&rsquo; 숙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에 대해 &ldquo;재미 좀 봤다&rdquo;고 할 정도로 표를 의식한 공약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재미를 봤을지 몰라도 이명박으로선 여간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세종시 문제로 집권 여당에서 계파 분열이 표면화됐고, 한나라당 대선 경선 패배 후 정중동하고 있던 박근혜 의원(현 대통령)이 &lsquo;여의도 대통령&rsquo;으로 귀환하는 문을 열어젖히게 한 계기가 됐다. 문제는 세종시가 원안대로 갔으니, 이명박으로선 약속대로 밥 사고 뺨 맞고 주저앉은 꼴이 됐다.2008년을 미국산 쇠고기 촛불 파동 수습으로 국정 드라이브에 시동도 걸어보지 못한 이명박은 2009년에는 &lsquo;세종시&rsquo;라는 암초를 만난다. 2007년 9월, 본격 대선판이 불붙었을 때 이명박의 말 한마디 &ldquo;세종시를 반드시 지키겠다&rdquo;가 스스로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그 다음달 이명박이 충청권 공약사업으로 &ldquo;충청권에 6만 6000㎡ 규모, 인구 50만 명을 목표로 하는 국제과학기업도시를 건설하겠다&rdquo;고 바로 잡았지만, 이미 충청민의 뇌리 속에는 &lsquo;세종시 사수&rsquo;라는 단어만 박혀 있었다.지금에 와서 그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이명박이 천명한 &lsquo;세종시 사수&rsquo;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가 아니라 세종시가 충청권 발전을 이끌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ldquo;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은 심정&rdquo; &ldquo;공무원들 점심값 가지고 어떻게 (충청권)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냐&rdquo; &ldquo;양심상 그 일(세종시)은 그대로 하기 어려울 것&rdquo; &ldquo;백년대계에 타협은 없다&rdquo;등의 세종시를 두고 발언한 이명박의 언급은 세종시는 절대 행정중심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이명박은 촛불 파동으로 잃은 동력을 &lsquo;녹색성장&rsquo;으로 다잡으면서 세종시를 &lsquo;녹색성장도시&rsquo;나 &lsquo;과학기술도시&rsquo; 등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노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충남 이전 공약에 따라 2003년 신행정도시건설추진기획단이 출범했고, 2004년 8월 충남 연기&middot;공주 일원, 공주&middot;논산 일원, 천안, 충북 진천&middot;음성 일원 등 4개 후보지에서 연기&middot;공주 지역이 최종 후보지로 확정돼 있었다. 입지 선정&rarr;토지 확보&rarr;계획 수립&rarr;토지 보상&rarr;용지 조성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던 것이다.작금에 와서도 문제지만 당시에도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의 세종시에 대해선 반대론이 극심했다. &ldquo;행정기능이 나뉘게 되면 부작용이 만만찮다&rdquo; &ldquo;서울과 거리가 멀어 업무처리 지연으로 인한 시간 낭비와 비효율을 초래한다&rdquo; &ldquo;청와대와 입법부, 사법부 모두를 옮기지 않고 일부만 이전하는 것은 뇌를 반쪽 내는 것과 같다&rdquo; 등등의 비판론이 고조됐다.행정도시보다는 과학, 교육 기능이 복합된 클러스터로 콘셉트를 바꿔야 한다. 친환경적인 중저밀도 주거단지를 조성해 인근의 대학과 연구시설, 산업시설을 활용한 자족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과 같이 그때도 똑같았다. 실험적 과학교육도시 이야기도 나왔지만, 거짓말처럼 당시에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세종시 원안대로라면 이전 대상 기관과 공무원은 불과 &lsquo;9부 2처 2청&rsquo;에 1만 명 규모였다. 산하기관과 연구기관 인력까지 포함해도 36개 기관에 1만 2000명에 불과했다. 50만 명의 자족도시가 목표였지만 실은 인구 6만 명 채우기도 빠듯했던 것이다. 호주의 캔버라, 뉴질랜드의 웰링턴,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등 전 세계 각 국의 행정수도 실험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특히 독일은 베를린과 본이라는 이중 행정수도는 업무 비효율을 가져오고 있다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었음에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특히 충북 증평&middot;진천&middot;괴산&middot;음성이 10월 재보선 선거에 추가되면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으로선 충청권 삼국지에서 승리해야만 &lsquo;충청 교두보&rsquo;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이 &lsquo;충청권 맹주&rsquo;를 두고 총력전이었으니 세종시 수정 추진이 몰고 올 불상사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이명박이 세종시 수정 추진의 수문장으로 &lsquo;정운찬 총리&rsquo; 카드를 내민 것은 두고두고 회자하는 대표적인 &lsquo;실정&rsquo;의 하나다. 당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충청 인사를 총리에 내세워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려는 의혹에 대해 이이제이(以夷制夷: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함)라고 비판했고, 민주당에서는 나아가 이충제충(以忠制忠)이라 표현하면서 공세에 나섰다. <img alt="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11월 27일 생방송 된 ‘대통령과의 대화’에 출연해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10/1365551057536731.jpg"/> 하지만 이명박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해 11월 4일 세종시 원안 수정을 공식 선언했다. 2010년 초  &lsquo;세종시 최종안&rsquo;을 내겠다고 밝혀버린 것이다.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여당의 계파 갈등이 세종시 뇌관으로 폭발해버리는 순간이었다.친이명박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친이계 모임인 &lsquo;함께 내일로&rsquo;와 이명박 정부의 산실인 &lsquo;안국포럼&rsquo; 출신 의원들은 원안 수정을 위한 동력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반면 친박계는 박근혜 의원의 의중을 살피며 &lsquo;원칙론&rsquo; 즉, &ldquo;약속은 지켜져야 한다&rdquo;는 쪽으로 원안 사수에 나선다.11월 4일 한나라당 최고위원&middot;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가 시발탄이었다. 친이계인 홍준표 의원이 &ldquo;세종시 원안이 잘못됐으면 개정할 권리는 국회에도 있고, 정부에도 있다. &lsquo;절대불가&rsquo;라는 원칙을 세워놓고 개정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rdquo;라고 말문을 열자, 친박계 리더격인 홍사덕 의원은 친이계가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이야기에 대해 &ldquo;국민투표론까지 나오는데 충청 사람은 전 국민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처음 실행한 이래 이런 비겁한 국민투표를 한 적이 없다&rdquo;고 맞섰다. &lsquo;비겁&rsquo; 운운하면서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된다.앞서 박근혜 의원은 정운찬 총리가 자신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ldquo;의회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국민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지 잘 모르시는 것 같다&rdquo; &ldquo;저를 설득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야 할 것&rdquo;이라고 맞선다. 18대 국회에서 사사건건 &lsquo;여당 내 야당&rsquo;을 자임한 &lsquo;여의도 대통령&rsquo; 행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국민이 간과한 것은 이명박의 &lsquo;새로운 모습&rsquo;이었다. 사실 이명박을 향한 야권의 비판은 대부분 이명박이 포퓰리스트의 전형이며, 대중영합을 너무나도 잘하는 사람으로 매도해 왔다. 하지만 세종시에 대해선 이명박은 표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언론과 충청민이 이명박의 반대론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살폈다면 지금의 행정 비효율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세종시에 대해 박근혜 의원이 &lsquo;세게&rsquo; 나간 것은 그에게 &lsquo;꽃놀이패&rsquo;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와 원칙의 이미지를 재각인시키는 기회이자, &ldquo;세종시에다 원안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rdquo;고 말하면서 그의 대권 가도에서 꼭 필요한 충청권 표심을 얻을 기회였다. 원안보다 나을 경우에도 박근혜 덕, 원안보다 못할 경우에는 이명박 탓이 된다는 것. 박근혜 의원의 발언은 &lsquo;지역 이슈&rsquo;도 &lsquo;정치 이슈&rsquo;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파괴력을 갖추게 되면서 이명박 호는 세종시에서 나아가 박근혜라는 암초에서 사사건건 좌초되기 시작한다.세종시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들이 집대성된 핫이슈였다. 여의도 정치 경험이 없는 이명박으로선 애를 먹기 딱 좋은 현안인 셈이었다. 대중영합주의, 지역주의, 기회주의, 국회의 점거농성과 강행처리, 국론분열, 계파갈등, 말 바꾸기, 권력투쟁 등에다 미디어법이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이슈처럼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대립에 &lsquo;지역 변수&rsquo;가 더해진 고차방정식이었으니, 이명박으로선 난제였다. 그의 리더십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였다.당시 이완구 충남도지사는 &ldquo;세종시 건설은 지난 7년 동안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공약이 된 사안이고, 2005년에는 여야 간 표결로 합의된 사안이었다. 2200만 평에 이전된 행정기관을 중심에 두고 자족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교육, 과학, 의료, 첨단지식, 문화, 체육 기능을 보강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수도권 과밀화와 집중화에 따른 불균형발전을 바로잡는 국가균형발전&rdquo;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한다(이후 그는 사퇴한다).한나라당 &lsquo;분당설&rsquo;도 제기되면서 이명박으로선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치킨게임처럼 마주 보고 달리면서 차기 주자(박근혜)와 현직 대통령이 너무 일찍 대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이 완성되면 박근혜가 거부하고 내분이 인 뒤 친이계든 친박계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것이란 시나리오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이명박의 결정적인 실책은 &lsquo;이건희 사면&rsquo;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 있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강원도와 스포츠계가 한목소리로 &lsquo;이건희 구출&rsquo;을 주장했고, 경제5단체도 기업인의 대사면을 정부에 공식 건의했는데 느닷없이 삼성과 청와대의 빅딜설이 회자한 것이다. 삼성이 세종시로 본사 또는 계열사를 이전하는 대신 이명박 정부가 특사를 감행한다는 음모론. 이건희는 당시 차명계좌를 보유하면서 조세를 포탈한 혐의로 2009년 5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바 있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세종시 탄생 배경세종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토균형발전정책 공약의 하나로 행정기능 중심의 자족형 복합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해 연기&middot;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 중앙행정기관과 그 소속기관이 이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에 둥지를 틀지 않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이 다수고, 지금까지도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아 행정 비효율이라는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5] 4대강 사업 후폭풍]]></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332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3325</guid>
            <pubDate><![CDATA[Wed, 03 Apr 2013 08:5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김진애 민주당 4대강사업국민심판특위 위원장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11년 12월 5일 4대강 사업 부실 공사 의혹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03/1364946720533250.jpg"/> &ldquo;21세기에 그런 (대)운하를 파서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rdquo;(2007년 박근혜) &ldquo;경제적 효과가 어떨지&hellip;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엄청난 재앙이 될 정책&rdquo;(2007년 문재인) &ldquo;운하를 파서 환경을 파괴하고 낡은 시대로 돌아가는 것&rdquo;(2007년 정동영) &ldquo;국민 혈세를 토목 건설업자에게 퍼주기 위한 사업&rdquo;(2009년 유시민) &ldquo;4대강은 누가 봐도 위장된 운하사업이다. 4대강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rdquo;(2010년 손학규).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후 당시 유력 정치인들의 4대강 관련 발언은 이랬다. 여당 내 야당이었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조차도 4대강 반대론자였다. &ldquo;대한민국은 지금 4대강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있을 정도&rdquo;라며 국론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당시 한나라당은 친박근혜계를 빼면 모두 4대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니, 당 대 당, 당 내부를 막론하고 정쟁이 멈출 줄 몰랐다.&ldquo;한반도 대운하는 물류난 해결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성장 모티브를 제공할 것&rdquo;(2008년 김문수) &ldquo;4대강 사업을 직접 보면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rdquo;(2010년 정몽준) &ldquo;경인운하와 4대강 정비사업을 환영한다. 한강도 정비될 것&rdquo;(2008년 오세훈). 하나의 사업을 두고 이렇게 시각차가 컸다.국민 혈세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의혹은 지금도 유효하다. 건설업체 배만 불렸다는 이야기는 꾸준하다.3월 16일 대법원은 4대강 사업의 주요 공사구간 사업비 원가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즉, 건설사들 사이에 담합이 있었는지, 공사비를 부풀렸는지, 남는 돈은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lsquo;까보라&rsquo;는 &lsquo;법적 명령&rsquo;을 내린 것이다. 그동안 제기된 의혹의 실체를 곧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사업비 원가는 국토관리청과 건설업체만 알 수 있었고, 알고 있었다. 각종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청구도 거부된 상태였다. 검찰이 4대강 사업에 참여한 17개 건설사를 담합 등의 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대법원의 판결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박근혜 대통령도 4대강만큼은 짚고 넘어가자는 입장으로 보인다. 3월 11일 새 정부의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국회의 &lsquo;4대강 수질개선을 위한 총인시설 (담합)입찰 관련 감사요구안&rsquo;을 거론하며 &ldquo;예산 낭비와 국민적 의혹이 없도록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rdquo;고 강조했다. 즉, 전 정부의 정체성과 같았던 초대형 프로젝트 사업에 대해 잘못이 있는지 바닥에서부터 따져보라고 지시한 셈이다.지난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은 낙동강 40공구 공사를 담당한 하도급업체들이 노동자들에게 가짜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고 주장했다. 또 액수를 부풀린 대금을 지급하고 나서 차액을 돌려받는 식으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도 했다. 22조 원이 넘게 투입된 &lsquo;혈세 먹는 하마&rsquo; 프로젝트였다 보니 실제 투입된 인력과 장비가 대거 부풀려졌다는 주장과 제보가 쏟아졌다는 후문이다.이들에 따르면 이런 &lsquo;공사비 과다계상&rsquo;은 설계시공을 일괄입찰방식(턴키방식)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의 전 과정을 건설업체가 일괄적으로 책임지다보니 &lsquo;건설사 마음대로&rsquo; 돈을 책정해 떼먹기도 하고 돌려받기도 했다는 뜻이다. 4대강 정비 사업 중 사업비 규모가 큰 곳은 대부분 턴키방식이었다. 4대강 사업의 턴키방식의 평균낙찰률이 90%를 넘은 것도 입찰 업체 사이에 담합이 있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있다.사실 2007년 이명박이 대운하 공약을 내놓았을 때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거대 기업들은 쾌재를 불렀다. &lsquo;단군 이래 최대&rsquo;라는 토목사업이 시작될 것이란 기대에 맞춰 파이를 서로 차지하겠다며 현대건설 대림 대우 GS건설 삼성물산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그리고 SK건설 포스코 롯데건설 금호산업 현대산업개발이 다른 컨소시엄을 만들었고, 한화 두산 쌍용 동부 계룡건설 한진중공업 코오롱글로벌 경남기업 삼환기업도 자그들끼리 힘을 합쳐 컨소시엄을 꾸렸다. 그리고 이들 기업이 4대강 사업의 지분을 나눴고,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운영위원회까지 구성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경쟁에서 떨어져 강 건너 불구경하기보다는 4대강 지분을 공평하게 서로 나눠 먹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ldquo;경쟁입찰로 포장한 들러리 입찰&rdquo;이라는 지적이 꾸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지송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해 6월 기자간담회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강 사업 참가 건설사에 담합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ldquo;4대강 사업은 (건설사 입장에서) 절대 돈이 안 남는 공사인데도 이 업체들이 욕먹고 처벌받고 하니 건설사들은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을 것이다. 4대강 공사를 안 했으면 지금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rdquo;라고 했다. 돈 안 되는 사업에 거대 기업 19곳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건설업계는 최근 &ldquo;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rdquo;는 낭패감에 휩싸인 분위기다. 강을 정비하는 사업은 시범 지역부터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야 했다는 &lsquo;자백성&rsquo; 발언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가 임기 5년 내 해치운다는 생각으로 일괄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것이 잘못이지, 공사에 뛰어든 기업은 잘못이 없다는 푸념도 들린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꾸준히 조사하고,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해나가야 했을 사업이었다는 뒤늦은 지적이 잇따른다. <img alt="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가 2011년 10월 22일 경기도 여주군에서 열린 4대강 새물결맞이 기념행사에 앞서 행사 관계자들과 함께 한강 이포보 공도교를 도보로 건넌 후 손을 흔들며 완공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403/1364946720533251.jpg"/> 이명박도 새 정부의 &lsquo;4대강 손보기&rsquo;를 예견한 듯 보인다. 이명박이 만약에 대비해 공무원, 건설사 임직원, 언론 등에 4대강 사업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훈&middot;포장 등을 무더기로 포상했기 때문이다. 1000명이 넘는 이들이 4대강 사업으로 지위와 훈장을 챙겼다. 일부는 4대강 사업이 완료되기도 전에 포상부터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통령 포상을 받게 되면 추후에 징계를 받더라도 한 단계 낮은 조치를 받게 된다. 곧 아플 터이니 예방접종부터 시킨 셈이다. 국토부와 수자원공사, 지방자치단체는 박근혜 정부의 &lsquo;처분&rsquo;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특히 지자체는 하천변 시설물 관리를 떠맡은 상태다. 매년 부담해야 할 예산이 갈수록 커질 것이기 때문에 끙끙 앓고 있다. 4대강에 8조 원을 투입한 수자원공사는 당장 내년부터 이자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매년 2000억~3000억 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된다는 말도 있다.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한 달가량 남았던 지난 1월, 감사원은 4대강 정비 사업이 &lsquo;총체적으로 부실했다&rsquo;는 진단을 내놨다. &ldquo;16개 보 가운데 11개 보에 대한 근본적인 보완이 필요하다&rdquo;는 것이 주요 골자다. 보 내구성 부족, 수문 안전성 부족, 수질관리 기준 부실, 음용수의 안전성 저하, 불합리한 준설 계획, 과다한 유지관리 비용 등도 지적당했다. 부족과 부실투성이다.감사원 발표는 곧 관련 부처 간의 삿대질로 비화했다. 발표 이튿날인 1월 18일,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과 유영숙 환경부 장관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 결과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ldquo;4대강 사업은 현 정부 최대의 국책사업인 만큼 철저한 관리와 점검을 했다. 그 결과 지난해 가뭄과 네 차례의 태풍에도 피해를 크게 줄이는 등 큰 효과를 거뒀다&rdquo;는 것이 권 장관의 주장이다. 이어 1월 23일에는 임종룡 국무총리실장이 &ldquo;총리실을 중심으로 4대강 사업에 대해 다시 한번 철저한 검증에 나서겠다&rdquo;고 밝혔다. 4대강 사업은 마무리됐지만 4대강 검증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이명박의 4대강은 많은 숙제를 남겼다. 계획 수립에서 완공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제에 일조하면서 환경도 생각한다 했다. 홍수와 가뭄을 동시에 잡겠다고도 했다. 매년 2000억 원이 넘는 유지비가 투입되어야 하는 22조 2000억 원이 기 투입된 사업이다. 올해 4대강 지류, 지천 사업이 시작되면 30조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그래서 천문학적 혈세가 더 투입되기 전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장비를 이용해 정밀안전진단을 하고, 처리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완공된 사업을 벌써 &lsquo;철거하느냐 유지하느냐&rsquo;를 따져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보 건설에 따른 효과나 부작용을 파악하려면 몇 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얼마 정도의 기간에는 천문학적 유지비가 투입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서 벌어진 대북송금 의혹 특검을 받아들여 여권의 분열과 김대중 정부 인사들의 사법처리를 불러왔다. 4대강을 두고 &lsquo;제2의 대북송금 특검&rsquo;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명박은 올해 1월 19일, 감사원 감사 발표 직후 &ldquo;전체 사업 중에서 (문제가 된 곳은) 아주 부분적인데 그것만 다 모아 놓았다. 어떻게 그런 걸로 총체적 부실이라고 할 수 있느냐&rdquo;며 대로했다고 한다. 1월 15일 국무회의에서는 &ldquo;(4대강 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태국 물사업과 관련해 일부 NGO가 한국 기업의 수주를 반대하는 활동을 벌인다고 한다. 매우 반국가적이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다. 관계 부처에서 체크해서 대책을 강구하라&rdquo;고 지시했다.이명박은 수질 살리기를 큰 목표로 정했다. 환경부는 아예 &lsquo;수영이 가능한 좋은 물&rsquo;(하천 2급수) 기준에 도달하는 권역을 76%에서 86%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4대강에 보가 설치되면서 물이 고여 있게 됐고, 그 탓에 조류가 증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지적도 있다. 2012년 여름, 4대강에는 &lsquo;녹조라떼&rsquo;라 이름 붙여진 진한 녹색의 강이 방송과 신문에 보도됐다. 하천의 부영양화 경향이 크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는 감사원도 지적했다. 녹조라떼가 상수원 오염까지 일으키지 않도록 수질예보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여당이 국토해양위원장을 야당에 준 까닭은?19대 국회 초반, 새누리당은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여당 몫, 야당 몫으로 나눌 때 국토해양위원장을 야당에게 줬다. 건설예산 등 SOC(사회간접자본)사업을 주무르는 이 알짜배기 위원장을 내놓은 이유는 여야의 셈법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으로선 대선 정국에서 4대강 사업을 물고 늘어지면서 여당 후보와 이명박의 &lsquo;공동책임론&rsquo; 내지는 &lsquo;절반의 책임론&rsquo;을 추궁할 수 있고, 새누리당으로선 야권이 4대강 때리기에 나설 때 &lsquo;청와대와의 거리두기&rsquo;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여당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4] 4대강 사업 강행 앞과 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948</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948</guid>
            <pubDate><![CDATA[Wed, 27 Mar 2013 09:2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7월 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지역투자박람회 개막식을 마치고 4대강 살리기 사업관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27/1364343609529480.jpg"/> 선거 후보의 &lsquo;핵심 공약&rsquo;은 딜레마다. 그것 때문에 꼭 당선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역풍이 분다고 버릴 수는 없다. 야권은 사사건건 이 &lsquo;핵심 공약&rsquo;을 물고 늘어지고 대통령 당선자는 &lsquo;당근&rsquo;을 주며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공약 이행의 성과는 역사가 판단할 몫이다. 하지만 당장 &lsquo;눈에 보이는 성과&rsquo;에만 집착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선 고민이 컸을 법하다. 그래서 이명박이 선택한 것은 &lsquo;이보 후퇴 후 일보 전진&rsquo;이었다. &lsquo;한반도 대운하&rsquo;를 &lsquo;4대강 정비사업&rsquo;으로 바꾼 뒤, 여론을 살펴 추진키로 한 것. 그래도 반감은 숙지지 않았다.2008년 5월 21일. 포항이 고향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은 경북도청에서 열린 대구&middot;경북 업무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ldquo;외국에 가보면 가장 큰 항구는 바다가 아니라 강에 있다. 그런데 강을 하수구인 양 쓰는 곳은 우리나라 말고는 없다. 이런 것을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여러 강의 물길을) 잇고 하는 것은 국민이 불안해하니 뒤로 좀 미루자.&rdquo;&lsquo;대운하 2단계 추진론&rsquo;의 탄생은 바로 이 발언에서부터 나왔다. 주민들이 개발을 원하는 영산강과 낙동강부터 운하를 하고 나서 4대강을 정비하고, 그 뒤 여론을 봐가며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그도 그럴 것이 다음날인 5월 22일, 이명박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lsquo;대국민사과문&rsquo;을 발표했다. 그 정도로 여론은 나빠져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를 이끌 정국 추동력은 완전히 상실된 상태. 하지만 한쪽으로는 사과하는 한이 있어도 &lsquo;대운하&rsquo;만큼은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lsquo;대운하&rsquo;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분위기였다.&lsquo;대국민 홍보&rsquo;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그즈음이다. 장석효 당시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회장은 &ldquo;국민이 내용을 모른다. 처음에 (명칭을) 잘 정했어야 하는데 마땅한 이름이 없었다. 별생각 없이 &lsquo;운하&rsquo;라고 이름 붙였다&rdquo;며 이름 붙이기(네이밍&middot;naming)라는 첫 단추부터 실수였다고 고백한다.이만의 당시 환경부 장관은 대운하 사업 논란에 대해 환경재단이 주최한 한 강연에서 &ldquo;국민이 운하를 잘 몰라서 그렇다&rdquo;고 밝혔다. 원래 운하라고 하는 것은 내륙에 선박의 항행이나 농지의 관개, 배수 또는 용수를 위하여 &lsquo;인공적으로&rsquo; 만든 수로(水路)를 뜻한다. 이에 이 장관은 &ldquo;운하에는 기존 강에 별다른 공사 없이 배가 다니게 하는 워터웨이(waterway)와 강 양쪽에 콘크리트벽을 쌓아 만든 커낼(canal)이 있다&rdquo;며 이명박의 대운하는 바로 &lsquo;워터웨이&rsquo;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친환경 치수와 관광 개념을 앞세운 셈인데 그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엔 &ldquo;진작에 비상 급수, 홍수 예방, 문화&middot;역사 관광 벨트 등을 위한 워터웨이로 이름을 붙였어야지&hellip;&rdquo; 하는 아쉬움이 이명박에게 우호적인 세력에게서 새어나온다. 이명박은 2008년 10월 정부가 제시한 100대 국정 과제에서 &lsquo;대운하&rsquo;를 아예 빼기도 했다.임기 첫해를 &lsquo;쇠고기 파동 정국&rsquo;으로 보낸 이명박은 임기 둘째 해 &lsquo;녹색 뉴딜&rsquo; 카드를 꺼내 든다. 2009년 첫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서다. 하지만 누가 봐도 &lsquo;녹색&rsquo;보다는 &lsquo;뉴딜&rsquo;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친환경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힘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단연 4대강 정비 사업이 뉴딜의 첫 정책으로 꼽혔다.사실 4대강 사업은 정부가 경기 부양을 언급할 때마다 단골로 나온 사업이었다. 2008년 12월 균형발전위원회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거론되더니 한국형 뉴딜 정책 10대 프로젝트에 포함되면서 재등장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ldquo;4대강 유역 정비로 &lsquo;위장&rsquo;한 대운하 건설을 중단하라&rdquo;고 외쳤다. 지역 경제는 토목 공사가 아니라 교육과 복지를 통해 기반부터 닦아야 한다는 논리였다.하지만 이명박은 2009년 신년 국정연설에서 &ldquo;4대강 살리기는 재해 예방, 환경 보전, 수량 확보, 수질 개선, 관광 산업 진흥 등 다목적 효과가 있다. 28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rdquo;고 역설한다. 여기에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lsquo;지역 발전&rsquo;이라는 명분을 넣는다. 수도권이 반대하니 지역 여론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지역 개발, 땅 개발을 원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에서 이명박의 &lsquo;4대강 사업&rsquo;에 우호적인 여론이 퍼지기 시작한다.&lsquo;뉴딜&rsquo;에만 쏠리는 비판을 돌파하고자 이명박이 내놓은 카드가 바로 &lsquo;자전거&rsquo;였다. 친환경적 교통수단인 자전거, 그리고 4대강을 잇는 자전거 길, 이명박은 &lsquo;바로 이거다&rsquo; 무릎을 쳤다. <img alt="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전혜숙 민주당 의원이 4대강 주변 유적지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27/1364343609529481.jpg"/> 2009년 5월 3일. &lsquo;대한민국 자전거 축전&rsquo; 폐막식에서 이명박은 &ldquo;우리의 IT 기술과 부품소재 개발 잠재력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차세대 자전거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rdquo;이라고 밝힌다. 뜬금없는 &lsquo;자전거 선진국&rsquo; 발언에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한다. 인터넷에서는 &ldquo;왼쪽 페달 없애고 왼쪽 핸들 안 돌아가는 &lsquo;명바이크&rsquo;가 탄생하는가&rdquo; &ldquo;MTB(산악용 자전거)는 MB가 타는 산악용 자전거?&rdquo; 등등 &lsquo;자전거 선진국&rsquo;에 대한 비아냥과 자조 섞인 댓글이 줄을 잇는다. 이명박은 그전에도 &ldquo;전국을 자전거 길로 연결하겠다&rdquo; &ldquo;자전거 시대를 열겠다&rdquo;고 외치면서 자전거는 녹색성장의 동반자이자 녹색뉴딜 사업의 핵심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모두가 &ldquo;결국 4대강 사업을 미화하기 위해, 포장하기 위해 자전거 정책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rdquo;는 의심을 품었다. 자전거 선진국은 출퇴근이나 등하교를 자전거로 할 수 있게 해야지 레저용 길부터 만드는 것은 후진국적 발상이라는 따끔한 지적도 나왔다.2009년은 &lsquo;4대강 의혹&rsquo;으로 점철됐다 해도 과언 아니다. 국정원이 4대강 정비 지역 현장 탐방에 나서 주민들의 여론을 청취한 것을 두고 &lsquo;국정원 개입&rsquo; 논란이 인다. 그런데 현장 탐방 뒤 아무 결과가 없자 주민들이 청와대 앞으로 시위를 가려 했고, 그 사이에 국정원이 &ldquo;그러다 (정부에) 밉보일 수 있다&rdquo;고 회유하면서 일종의 협박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국정원은 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국제범죄조직 등에 대해서만 직무상 정보수집에 나선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당시 &ldquo;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해 정보를 수집하고 작성, 배포하는 것은 국정원 고유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명백한 위법&rdquo;이라고 주장했다. 22조 원이라는 대규모 국책공사를 초고속으로 1000일 안에 마무리한다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매일 220억씩 들어가는 사업을 &lsquo;초법적&rsquo;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2008년 12월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지더니, 2009년 2월 국토해양부가 정부합동 4대강 살리기 기획단을 발족, 4월 말 마스터플랜에 대한 중간 용역보고회가 열렸다. 그리고 6월 초에 최종 마스터플랜이 발표된 것이다.그해 6월 국회에서 열린 4대강 살리기 사업 마스터플랜 간담회에서 민주당 측 보좌관이 국토해양부 측에 법적인 절차를 묻자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측은 &ldquo;모든 절차를 따르게 되면 목표 기한 내에 사업을 마칠 수 없다&rdquo;고 답한다. 결국, 핵심 공약을 &lsquo;법 위에서&rsquo; 이뤄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불법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게다가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대규모 사업에 예산을 주려면 미리 예비타당성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뒤로 하고, 기본적인 &lsquo;예타&rsquo;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그해 8월 17일은 대한민국 언론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날이기도 했다. MBC &lt;PD수첩&gt;이 &lsquo;4대강 수심 6m의 비밀&rsquo;을 방영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구린 구석이 있었는지 국토해양부는 서울남부지방법원에 &lsquo;방송금지 가처분 신청&rsquo;을 냈는데 기각되면서 시청자들이 몹시도 궁금해 했다. 그런데 방송 3시간 전, 김재철 MBC 사장과 경영진은 &ldquo;회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이사들이 &lsquo;사전 시사&rsquo;를 요구했는데 제작진이 불응했다&rdquo;며 &lsquo;방송 보류&rsquo;를 결정한다. &lsquo;김재철&rsquo;이라는 이름이 지금껏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MBC 사장을 역임했던 당시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ldquo;법원에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거부한 것을 경영진이 방송 보류 결정을 한 것은 심각한 문제&rdquo;라며 부끄러워했다. &lt;PD수첩&gt;팀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4대강 정비 사업이 대운하를 위한 포석이라는 의혹에 휩싸인 이유, 4대강 정비 사업 지역과 고질적인 물 부족 내지는 홍수 피해 지역이 서로 다른 곳이라는 지적이었다.2009년 국회 국정감사도 &lsquo;4대강 국감&rsquo;으로 명명됐다. 특히 8조 원에 이르는 사업비용을 대는 수자원공사는 뺨을 있는 대로 맞았다. 수자원공사가 4대강 주변을 관광지나 주택단지로 개발하려 한다, 오히려 강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땅장사를 부추긴다, 낙동강변에 디즈니랜드나 카지노를 건설할 것이다 등등 각종 의혹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청와대와 정부는 또 애매한 공기업을 끌어들여 순간의 소나기만 피하려 든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가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해 국책사업을 공기업에 떠넘긴 편법 예산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ldquo;정부의 &lsquo;분식회계&rsquo; 아니냐&rdquo;는 비판이었다. 국토해양부는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에 야당의 4대강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알리는 문건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는 정부와 여당이 미리 짜고 모의 또는 공조했다는 일종의 &lsquo;공작설&rsquo; &lsquo;방해설&rsquo;로 회자했다. 국토부가 그동안 국회에 제출한 문건과 동일한 표지양식, 편집양식, 기호, 약물, 서체, 어투가 한나라당 여러 의원실에 &lsquo;한나라당&rsquo; 이름을 달고 퍼진 것이었다.그해 국감장에서는 4대강에 난도질당하던 한 초선 의원이 &ldquo;이제 도산 안창호만 남았다&rdquo;는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벤치마킹했고, 4대강살리기추진본부가 마스터플랜에 올려놓았던 도산 안창호의 &lsquo;강산개조론&rsquo; 말고는 4대강을 옹호할 근거가 하나도 없게 됐다는 푸념이었다. 하지만 그 뒤 조금씩 4대강은 정비되면서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간다.최기서 언론인 잠깐 - 안창호 선생의 &lsquo;강산개조론&rsquo;도산 안창호 선생은 &lsquo;4대 민족개조론&rsquo;을 주창했는데 그중 국토개조론이 있다. 1919년 상해에서 도산 선생은 연설에서 &ldquo;우리 한국의 모든 것을 다 개조해야 하겠소. 심지어 우리 강과 산도 개조해야 하겠소. &lsquo;강과 산을 개조해 무엇 하나?&rsquo; &lsquo;이 급하고 바쁜 때에 언제 그런 것들을 개조하나?&rsquo; 하시리다 마는 그렇지 않소. 강과 산을 개조하고 아니하는 데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지 아시오. 강과 산을 개조해 산에는 나무가 가득히 서 있고, 강에는 물이 풍만하게 흘러간다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행복이 되겠소. 산과 물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 두면 나무가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릅니다. 홍수가 넘쳐서 강산을 헐고 묻습니다. 강산이 황폐하면 민족도 약해집니다&rdquo;라고 부르짖었다. 이명박의 &lsquo;4대강 사업&rsquo;이 과연 이 정신을 얼마나 실천에 옮겼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3] 한반도 대운하 찬반론]]></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499</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499</guid>
            <pubDate><![CDATA[Wed, 20 Mar 2013 08:5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낙동강살리기 희망 선포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살리기 깃발을 받아들고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20/1363737069524990.jpg"/> &lsquo;이명박&rsquo;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뭘까. &lsquo;4대강 사업&rsquo;이 아닐까. 4대강 사업은 원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었지만 좁은 땅덩어리에 운하가 말이 되느냐는 비판을 받으면서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난 1월 감사원의 &lsquo;4대강 사업은 총체적으로 부실했다&rsquo;는 감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lsquo;4대강 브랜드&rsquo;는 실패작으로 평가받는 분위기다. 이명박의 최대 역점 사업이 낙제 수준의 성적표를 받은 셈이다. 사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이 서울시장으로서의 그릇이었다면, 대통령 정도 되면 운하 정도는 건설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임기 내내 밀어붙이기로만 했을 리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건물을 세우며 보람을 느끼던 건설 CEO 출신이었고, 불도저 리더십은 그런 뜻에서 나왔다. 마음을 먹으면 이뤄내야만 분이 풀리는 스타일. 누군가는 그를 두고 &lsquo;작심실천가&rsquo;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무시무시한 별칭은 작심까지 오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면 실천하는 과정에서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었다.이명박의 머릿속에 &lsquo;한반도 대운하&rsquo;가 전혀 지워지지 않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 역사를 짚어보자.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1980년대 초다. 이명박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해외 출장이 잦았다. 한번은 이명박이 네덜란드 헤이그로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바지선이 운하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을 목격한 이명박은 &ldquo;바로 이거다!&rdquo; 하며 무릎을 쳤다.그로부터 얼마 뒤, 이명박은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던 대운하 구상을 공식적으로 꺼내놓는다. 1987년 겨울이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상공회의소를 방문했을 때, 이명박은 경부운하 건설을 공식적으로 제안할 기회를 노렸다. 논리는 이랬다. &lsquo;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듯이, 새로 들어서는 노태우 정부에서는 경부운하 건설을 검토해야 합니다&rsquo;.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한 귀로 흘렸다.이명박은 현대건설에서 물러나 국회의원이 된다. 15대 국회, 당시 신한국당 소속이었던 이명박 의원은 1996년 7월 18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힌다.&ldquo;철도, 도로의 수송 능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로스앤젤레스간 해상운송비보다 높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습니까.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연간 13조 원이 넘는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매년 2조 원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습니다. 유지보수비가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운하는 관광&middot;레저산업에도 이용될 뿐 아니라,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rdquo;그때 이명박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던 인물이 바로 이재오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ldquo;이거다. 나라를 다시 한 번 바꾸는 길은 운하 건설이다는 생각이 들었다&rdquo;고 밝힌 바 있다. 이재오는 이명박에게 &ldquo;형님 대통령 하소. 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합니다. 내가 볼 때는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소 그랬다&rdquo;고 했다.이명박은 운하 건설을 촉구하고자 &lsquo;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rsquo;를 구성해 동료 60여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경부운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명박은 당시 국회의원 모임인 &lsquo;아침공부 모임&rsquo;에서 줄기차게 운하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고, 토론을 청했다. 세종연구소와 삼성그룹도 비슷한 연구를 하면서 동력을 얻는 듯했으나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슈화하지는 못한다. 1995년 8월 세종대 부설 세종연구원은 &lsquo;신국토개조전략&rsquo;이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ldquo;서울과 부산을 운하로 연결해 &lsquo;수상 고속도로&rsquo;를 만들자&rdquo;는 것을 골자로 한 프로젝트였다.이명박은 2001년 다시 경부운하를 제안한다. 그땐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위원장으로서였다 (이명박과 같은 분과에 있던 김형오, 강만수, 백용호 등은 훗날 이명박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명박은 당시 &ldquo;2002년 한나라당의 대선 공약으로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내놓자&rdquo;고 주장하는데, 미래경쟁력분과 간사를 맡고 있었던 곽창규 당시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ldquo;한나라당에서는 운하처럼 논란이 예상되는 이슈를 먼저 제안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운하 계획을 아웃시킨 바 있다&rdquo;고 답한다. 이명박은 그 대답을 듣고도 &ldquo;괜찮다. 안 받아도 된다. 나중에 내가 써먹어야겠다&rdquo;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은 집요한 사람이다. 마치 생떼를 쓰듯, 마음먹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뤄내야 직성이 풀렸다. 누군가는 &ldquo;지금 생각해보면 청계천 사업은 대운하의 시험무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dquo;고 꼬집었다.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청계천 복원이 마무리되자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본격적인 운하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img alt="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영산강살리기 희망선포식이 열린 광주 영산강 6공구 서창지구 입구에서 광주전남지역 환경단체 회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4대강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20/1363737069524991.jpg"/> 2006년 10월, 이명박은 아예 기자들을 대동해 운하가 있는 곳으로 간다. 독일의 라인-마인-도나우 운하(RMD)를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한반도 대운하를 &lsquo;국운융성&rsquo;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포부를 밝힌다. 처음엔 물류 효율성을 염두에 둔 &lsquo;경부운하&rsquo;였지만 점점 생각이 커지면서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개념까지 넣어 &lsquo;내륙운하&rsquo;로 발전시켰고, 이어 한반도 통일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며 &lsquo;한반도 대운하&rsquo;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운하 구상은 대선 정국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가 됐다. 그 당시 이명박의 주장은 이랬다.&ldquo;유럽 국가들은 수만 ㎞에 달하는 운하로 연결돼 유럽연합(EU)이란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한반도 대운하를 통해 해묵은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민정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rdquo;&ldquo;대운하는 국운융성, 국민통합을 위해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다.&rdquo;&ldquo;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너무 찌들어 있었던 것 같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람들이 전부 다 그냥 멍해졌다. 짜증만 나는 거다. 국가가 발전하는 데는 뭔가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지도자가 공장 안에 들어가서 물건을 경쟁력 있게 만들어라 하는 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그건 기업가가 할 일이다. 나라 전체 국민이 한 번 국운융성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만드는 게 지도자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한반도 대운하가 국운융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rdquo;&ldquo;자연하천 준설과 인공수로 부분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시에 시작하면 2년도 안 걸린다.&rdquo;물론 대운하 반대파의 논리도 거셌다. 환경이 파괴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장담할 수 없다. 예산을 감당할 수 없다. 건설기간이 터무니없다.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등등. 지도자는 직언과 충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미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명박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줄 알았다. 귀를 열어놓지 않았고, 시야는 좁았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맹목적이었다. 이런 반대파의 논리를 전혀 수렴하지 않았다.운하의 나라인 독일의 하우프 전 교통부 장관이 밝힌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ldquo;마인-도나우(MD) 운하는 바벨탑 이후 인류가 저지른 가장 무식한 사업이다.&rdquo; 이 말은 독일의 MD운하(일명 RMD)를 모델로 그것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이명박의 대운하 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하우프 전 장관의 이 발언은 2007년 4월 11일 &lsquo;21세기 한국의 수자원 보전과 한반도대운하&rsquo;란 주제로 열린 한국 육수학회 창립 40주년 특별 학술심포지엄에서 박창근 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가 설명하면서 돌출됐다.대운하 반대파의 논리는 &ldquo;18~19세기에는 토목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증가된 물류를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운하 건설이 활발했다. 그러나 철도의 출현으로 운하의 역할은 축소됐고, 도로의 건설은 철도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교통사적 입장으로 보면 18세기까지를 운하의 시대라고 하면, 19세기는 철도의 시대, 그리고 20세기는 도로의 시대다. EU-25개국 화물수송 현황(2005년)을 살펴보면 도로 44.3%, 철도 10.0%, 내륙운하 3.4%, 파이프라인 3.3%, 해운 39%, 항공 0.1%를 점하고 있다. 이 통계는 운하가 물류운송수단으로는 사양사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rdquo;귀가 번쩍 뜨이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 인터넷 진보 매체는 RMD로 취재진을 급파한 뒤, 2006년 이명박과 그 일행이 그곳을 다녀가고서 한반도 대운하연구회발로 낸 &lsquo;한반도 대운하 국운융성의 길&rsquo; 팸플릿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한다. 이명박 측은 듀스브르크 내항을 &lsquo;내륙의 발전을 가져온 대표적 사례&rsquo;로 소개했지만, 그 매체는 그곳 시민들의 말을 인용해 &ldquo;완전히 몰락한 도시&rdquo; &ldquo;기동성이 좋은 도로가 있는데 왜 운하로 물류를 이동시키겠느냐&rdquo; &ldquo;자본주의 사회에선 시간이 곧 돈이다. 운하처럼 한가하지 않다&rdquo;는 등의 정반대 분위기를 전한다.최기서 언론인잠깐 - 국정운영 철학 &lsquo;돌관&rsquo;이명박의 국정운영 철학으로 불렸던 &lsquo;돌관&rsquo;(突貫). 돌관은 &lsquo;하면 된다&rsquo;로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치는 건설업계의 정신을 뜻한다. 바로 이명박이 몸담았던 현대건설의 기업정신이다. 이종수 현대건설 사장은 &ldquo;어떤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목표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돌진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것이 현대건설의 대표적 정신 &lsquo;돌관&rsquo;이다&rdquo;고 밝힌 바 있다.이명박이 4대강을 집중적으로 개조한 것은 이런 그의 철학에 있다. 장비나 시설이 부족해도 무조건 &lsquo;하면 된다&rsquo;는 식이다. 이명박은 대운하 반대파들의 논리에는 항상 정면 대응하며 &ldquo;경부고속도로, 청계천 복원, 서울숲 조성 사업도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성공적이었다&rdquo;고 주장하며 반대파들을 돌파해나간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2]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정국]]></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109</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2109</guid>
            <pubDate><![CDATA[Wed, 13 Mar 2013 09:15: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13/1363133700521090.jpg"/> 2008년은 국민이 분노했고, 2009년은 국민이 큰 슬픔에 잠겼던 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lsquo;조문 정국&rsquo;이 이어졌고, 애도하고 추스르며 잠잠해지는 듯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는 &lsquo;노무현 죽이기&rsquo;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지면서 &lsquo;정치적 타살&rsquo;로 규정돼 이명박을 지목하게 된다. DJ 서거까지도 괜히 MB 탓인 듯한 사회 분위기가 흐르면서 이명박 대통령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명박은 집권 2년차 강도 높은 &lsquo;국정 드라이브&rsquo;를 걸려다 어쩔 수 없는 변수에 부딪혀 모든 프로젝트를 멈춰 세워야 했다. 청와대에는 낭패감과 위기감이 고조됐다.청와대가 오락가락한 것을 두고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라는 지적이 일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이명박은 봉하마을 빈소를 직접 찾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명박이 보낸 조화가 빈소에서 훼손되고, 청와대는 다시 조화를 보낸다. 그러는 사이 현직 대통령의 신변 안전 문제가 거론됐고, 이명박은 빈소 방문 계획을 거둔다. 대신 그달 29일 영결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하지만 영결식장에서 이명박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lsquo;미소&rsquo;를 짓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누리꾼들의 질타가 쏟아진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lsquo;비정치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rsquo;는 전제 아래 서울광장을 추모제 장소로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부 측이 반대하면서 국민적 분노가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한승수 당시 국무총리는 덕수궁을 통제한 이유로 소요사태가 우려된다는 뜻을 폈다. 추모제 참석자를 &lsquo;폭도&rsquo;로 본 것이다. 또 당시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ldquo;차벽(전경버스)이 병풍 같아서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분들도 있다&rdquo;고 말하면서 국민적 분노를 부채질하게 된다. &lsquo;이명박 탄핵소추안&rsquo; 발의를 위한 국민 서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집권 6개월 차를 맞이했던 이명박은 &lsquo;탄핵&rsquo;이라는 단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마당에 집권 2년차에 재등장한 &lsquo;탄핵소추&rsquo;는 야당이 이 &lsquo;서거 정국&rsquo;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것이란 걱정을 낳게 했다. 국민이 느끼는 슬픔을 정부가 잘 달래고 있느냐는 물음에도 국민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결과적으론 이명박에게 참 다행히도 당시 야당은 이런 국민적 분노와 증오를 수렴할 능력이 미비했다).정치권에서는 이명박이 &lsquo;조문 정국&rsquo;을 뚫고 나오려면 경제든 정치든 &lsquo;개혁 바람&rsquo;을 일으켜야 한다고 봤다. 가시적인 정국 전환 카드는 뭐니뭐니해도 &lsquo;사람을 바꾸는 일&rsquo;, 즉 개각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던 김경한 법무부 장관, 이상희 국방부 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lsquo;7월 개각설&rsquo;이 제기됐고, &lsquo;정치 수사&rsquo;라는 비판을 받았던 검찰에 대해 임채진 검찰총장 교체설도 제기됐다. &lsquo;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한다&rsquo; &lsquo;한나라당 내 친박계를 포용해야 한다&rsquo;는 등 각양각색의 처방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명박은 &lsquo;정치&rsquo;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해내지 못했다.그해 6월 4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장도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다. 한나라당이 5년 동안 지켰던 정당 지지율이 민주당에 역전당했다는 한나라당 자체 여론조사가 나온 것이다. 한나라당 쇄신특위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정당 지지율 조사 결과, 민주당이 23%, 한나라당이 21.1%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자체 조사에서 1위를 지키지 못한 것은 200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노무현 서거 전만 해도 민주당의 지지율은 10%대 초반 수준이었다. 그러니 또 한나라당 내에서는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느니, 이러다가는 10월 재보선은 필패라느니, 그러면 2010년 6&middot;2지방선거까지 낭패라느니 하는 말들이 새어나왔다. 자중지란이었다.무엇보다 이명박으로선 친형인 이상득을 잃은(?) 것도 큰 &lsquo;마이너스&rsquo;가 된다. 당 쇄신 차원에서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지도부 사퇴론이 이상득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상득 의원은 앞서 6월 3일 한나라당 최고위원&middot;중진 연석회의에서 &ldquo;앞으로는 당과 정무,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처신하겠다. 경제, 자원, 외교, 안보에만 전념하겠다&rdquo;며 &lsquo;2선 후퇴&rsquo;를 천명한다. 친형이 있어서 여의도는 걱정하지 않았던 이명박은 여의도의 &lsquo;반통령&rsquo; 이상득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 직후 또 이명박 정부 개국공신 중 하나인 이재오는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태백산 새벽 산행과 막장체험을 한 뒤 그의 팬카페 &lsquo;재오사랑&rsquo;에 &ldquo;이제 서울광장에는 거짓과 허위의 깃발을 내리고 민주주의 성숙의 깃발을 올리자&rdquo;고 썼다가 역풍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명박으로선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 셈이다. <img alt="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는 국장으로 엄수됐다. 사진공동취재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13/1363133700521091.jpg"/> &ldquo;600만 명의 상주&rdquo;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거센 조문 물결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촛불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49재인 7월 10일까지 살아 있는 대통령 이명박은 자꾸 죽은 대통령 노무현을 떠올리게 했다. 역대 대통령 중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던 노무현 같은 정치인을 죽게 만든 한국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국민도 늘어났다. 그러면서 노무현 개인에 대한 애도를 넘어 노무현 정부에 대한 엄정한 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언론의 관심에서 이명박은 멀어져 간다. 민주당 측은 &lsquo;조문 정국&rsquo;을 어떻게든 야권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했다. 노무현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고,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도록 했다. 6월 임시국회 정국에서 정부와 여당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노무현 빈소에 흩어졌던 친노세력이 다 모이면서 결집하는 모양새였다.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 유인태 전 정무수석, 유시민, 김두관 전 장관들, 노무현의 왼팔 안희정 등 원로와 소장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lsquo;흩어지면 죽는다&rsquo;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사실 모래알 같은 민주당보다 차돌 같은 친노세력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야당은 이명박의 사과와 관계자 문책 등을 요구했다. 6월 임시국회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정치권에서는 이상득의 후퇴에 이어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장다사로 청와대 민정1비서관, 김주성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 &lsquo;이상득 사람&rsquo;의 퇴진도 요구했다.바깥도 이명박을 도와주지 않았다.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에 반발해 우라늄 농축작업 착수를 선언했다. 이명박의 강경한 대북관이 도마에 오른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6월 11일 6&middot;15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 연설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ldquo;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rdquo;라고 비판한다. 일각에서는 대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발언이라고 해석했고, 정가가 발칵 뒤집힌다. 전직 대통령이 국론을 분열한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반대편에서는 전직 국가 원로로서 할 말은 했다고 주장하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충돌한다.그러던 차,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한다. 그러면서 노무현도 김대중도 없는 야권의 앞길은 &lsquo;반 MB연대&rsquo;를 통한 &lsquo;대통합론&rsquo;으로 방향타가 결정된다.특히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ldquo;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며, 야4당과 단합하고, 모든 민주&middot;시민사회와 연합해 반드시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 위기를 위해 승리하라고 하셨다. 이를 유언 중 하나라고 정세균 대표에게 보고했다&rdquo;고 밝힌다. 야권의 대통합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퇴임 후에도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두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어떤 절박함이 민주당의 변신을 꾀하게 됐던 것이다.이명박은 8&middot;15 경축사에서 &lsquo;행정구역 및 선거구제 개편&rsquo;을 이야기했다. 이를 한나라당이 동력을 걸면서 &lsquo;미디어법 날치기 처리&rsquo;에서 벗어나려 했다가 DJ 서거로 동력을 잃게 된다.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등은 국면 전환 카드로는 괜찮은 비책이었다. 국정운영 기조를 &lsquo;중도 실용&rsquo; 노선으로 맞추고, 친서민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려던 이명박 정부는 돌출한 변수 앞에서 행로를 잃는다.한나라당도 그동안 반 DJ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세를 결집하는 수법을 써왔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DJ는 영남권 보수우익진영의 단결을 꾀하는 수단이었다. 그만큼 한나라당은 정치적 반사이익으로 무임승차했던 경우가 많았다. 10&middot;28 재보선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전반부 평가로 해석될 가능성이 컸고, 청와대도 정부도 여당도 재보선 승리를 위해 어떤 방법이든 써보려 했다. 하지만 야권의 두 지도자의 부재는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힘이 세 보였다.최기서 언론인잠깐 - 국장과 국민장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장으로 엄수됐다. 국장과 국민장은 절차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국장은 9일, 국민장은 7일이다. 국장&middot;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보면 대통령직에 있었던 사람이나 국가,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의 장례를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엄수할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은 국장을 엄수하는 것이 관례이며 정부 수립 이후 국장을 엄수한 사례는 재임 중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일했다. 국장 당일은 사실상 공휴일로 지정되고 장례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한다. 국민장은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고, 장례비용은 일부 보조가 원칙이나 전액 지원도 가능하다. 최규하 전 대통령, 백범 김구 선생, 육영수 여사, 장면 전 부통령 등이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1] 노무현을 향한 사정칼날]]></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81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813</guid>
            <pubDate><![CDATA[Wed, 06 Mar 2013 09:05: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2008년 12월 4일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과 관련해 영장 실질심사를 받고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06/1362528300518130.jpg"/> 취임 첫해를 광우병 쇠고기 촛불정국으로 하세월한 이명박 정부는 이듬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조문정국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명박으로선 크나큰 악재의 연속이었다. 노무현의 실정과 그에 대한 실망감이 이명박을 만들었다면, 이명박의 실기(失期)와 실정이 잊혀가던 노무현의 가치를 되살리던 2008년이었다. 그러니 이명박이 있던 청와대와 노무현이 살던 봉하마을은 멀었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쉬이 꺼지지 않았다. 봉하마을을 &lsquo;작은 청와대&rsquo;로까지 불렀으니 이명박으로선 애가 탔을 것이다. 사람들은 봉하마을을 성지순례하듯 찾았다. 노무현은 유일하게 퇴임 후 인기가 더 높아진 전직 대통령이었다.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 대한 &lsquo;이명박의 검찰&rsquo;은 전 정권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한다. 박연차는 어찌 보면 판도라의 상자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박 회장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고, 검찰은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박연차와 노무현의 친형인 노건평은 절친이었고, 노무현 정부 인사들도 크고 작게 얽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검찰은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제기되던 각종 의혹에 대해 칼을 겨눈다. 박연차와 관련해선 2008년 5월부터 축적된 자료들을 들춰보기 시작한다. 국세청도 가세한다. 7월부터는 박연차가 운영하는 신발 제조회사인 태광실업과 골프장을 운영하는 정산개발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정도가 심했다. 경남 김해에 있는 이들 회사에 &lsquo;국세청의 중앙수사부&rsquo;라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직접 나섰던 것이다. 국세청은 10월 말까지였던 조사 기한을 12월 5일까지 연장하면서 조사에 몰두한다. 그러다 검찰 수사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자 11월 21일 박연차를 검찰에 고발했다. 박연차가 해외에 유령 회사를 세워 거래하는 과정에서 200억 원대의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고발의 이유였다. 박연차에 대한 압박은 임채진 검찰총장과 한상률 국세청장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노무현이 임명했던 인물들이었지만, 어떻게든 이명박 정부에서도 입맛에 맡는 선물을 내놔야 했던 것이다.검찰은 그해 11월 18일 세종증권을 압수 수색했고, 사흘 뒤인 21일에는 정화삼 씨와 동생을 체포하면서 일사천리로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면서 여권 내부에서 은밀하게 통용되던 &lsquo;로열 패밀리는 건드리지 않는다&rsquo;는 묵계가 깨져버린다. 검찰의 수사가 노건평의 목을 죄어오자 노건평은 11월 24일 자택을 떠나 잠행한다. 멀리 있는 것처럼 했지만 봉하마을 인근의 지인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27일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만취해 자해소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뜬소문이었다. 언론의 &lsquo;카더라&rsquo;식 보도는 계속된다. 노무현은 자신이 집권 때 취재선진화라며 언론의 입을 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분을 삭힌 언론은 한번 맛 좀 봐란 식으로 노무현의 멱살을 잡는다. 검찰이 수사내용을 조금씩 흘리면서 검-언 유착 이야기가 나온다. <img alt="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대검찰청 입구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06/1362528300518131.jpg"/> 그러면서 검찰의 칼끝이 노건평만 겨누는 것은 아닐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그 칼은 결국 노무현을 직접 겨눌 것이란 이야기였다. 박연차에 대해 파고들수록 어떤 식으로든 봉하마을과 연관이 될 것이란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노무현의 후원자인 강금원이 아니라 박연차를 겨눈 것도 그에게서 구린 냄새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한 측근이 &ldquo;강금원은 그야말로 노무현이 신뢰하고 속내까지 다 주고받을 정도의 측근 중 측근이지만 박연차는 아니다. 노무현은 박연차를 전형적인 장사꾼이라고 생각한다. 1988년 노무현이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지만 노무현이 먼저 손 내민 적은 없다&rdquo;고 밝히지만 박연차에 대한 수사는 계속 된다.하지만 일각에서는 노무현만큼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제기됐다. 사실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은 구설의 한복판에 있었다. 허위 재산신고 등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에다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 특혜 분양 의혹, 서울 도곡동 땅 및 다스 지분과 관련된 공직자윤리법 위반 의혹, BBK 김경준 대표와 함께 주가를 조작한 의혹, 자녀들의 위장전입 및 위장취업, 두 자녀 기부입학 의혹 등등 의혹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구설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검찰이 이명박의 BBK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집권 이후 노무현의 로열패밀리는 건드리지 말라는 모종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검찰이 2007년 12월 초 BBK 주가 조작, BBK 차명 소유, (주)다스 차명 소유 등 BBK 3대 의혹에 대해 이명박 후보는 혐의가 없다고 발표하면서 이런 이야기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대선 승부는 사실 이때 끝났고, 그 혁혁한 공을 노무현이 세웠다는 것이다.그해 11월 26일, 노건평이 한 언론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이때 분을 삭이지 못한 채 &ldquo;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되더라&rdquo;라고 말한다. 이 말이 와전돼 노건평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검&middot;경에 퍼졌고, 자살 시도 장소가 부산의 모 호텔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부산지방경찰청은 경찰병력을 부산 시내 모든 호텔에 투입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전모는 밝혀졌다. 세종증권 대주주인 세종캐피털 홍기욱 사장과 노무현의 오랜 친구인 정화삼 씨가 노건평에게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해 줄 것을 청탁했고, 노건평은 친분이 두터운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세종증권 인수를 부탁했다. 2006년 1월 인수계약이 체결되자 홍 사장은 자신 명의의 통장에 29억여 원을 넣어 도장과 함께 정화삼 씨에게 줬다. 이 돈이 청탁 사례라고 검찰은 밝혔다. 노건평은 4억 정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 박연차는 2005년 노건평이 정대근 당시 회장에게 세종증권 인수 청탁을 하자 세종증권 197만 주를 샀고, 12월 농협이 세종증권 인수 양해각서를 체결하기 전 주식을 팔아 178억 원의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img alt="2009년 4월 30일 검찰 소환길에 오른 노 전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짤막하게 답한 뒤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306/1362528300518132.jpg"/> &ldquo;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가 필요하다&rdquo;고 밝혔던 이명박은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일면서 이명박은 집권 몇 개월 만에 세 번씩이나 대국민사과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명박은 촛불 집회 당시 상황을 점검하면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에게 &ldquo;촛불을 누구 돈으로 샀는지 배후를 밝히라&rdquo;고 지시한 바 있다. 그 배후를 노무현이라 생각했든 그러지 않았든, 이 발언 이후 친 노무현 성향의 기업과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저인망식 수사가 진행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검찰이 수사 내용을 중계방송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노무현조차도 &ldquo;노무현을 잡는 것도 좋지만 수사는 합법적으로 하라&rdquo;고 항변했을 정도였다.이명박은 촛불로 정국이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대반격에 나섰는데 MBC PD수첩팀을 검찰에 고발하고, 민정수석실을 중심으로 촛불 주도 세력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면서 세력 검거에 나섰던 것이다. 이명박의 눈치만 살폈던 사정 기관은 알아서 기었다. 시민단체들에 대한 고립화 작전을 가동했다. 시민단체들에 대한 기업의 후원 내역을 조사하면서 노무현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명박의 노무현 죽이기는 그가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lsquo;도덕성&rsquo;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원치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노무현의 가족 비리는 진보세력이 집권해도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노무현 스스로도 &lsquo;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rsquo;이라는 비판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2009년 4월 30일. 노무현은 퇴임 후 1년 2개월 만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소환된다. 박연차로부터 &lsquo;포괄적 뇌물&rsquo;을 받은 혐의였다.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는 헌정 사상 세 번째였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이후 14년 만이기도 했다. 노무현은 2007년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받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에 대해 빚을 갚고 자녀 유학자금과 생활비 등으로 인한 채무를 갚는 데 집사람이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노건평과 박연차의 구속으로 일단락돼 보였던 수사는 2009년 3월부터 다시 속도를 낸 것이다. 3월 23일 1억 원 수수 혐의로 노무현의 후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붙잡혔다. 3일 뒤에는 &lsquo;오른팔&rsquo; 이광재가 구속된다. 4월 7일에는 집사이자 친구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체포된다. 노무현의 조카사위 연철호가 체포되고, 그 이튿날 부인 권양숙 씨가 부산지검으로 가야 했다. 아들 노건호가 소환되고 처남 권기문과 딸 노정연도 검찰에 불려간다.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횡령 혐의로 대전지검에 구속된다.5월 23일 노무현은 &ldquo;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rdquo;는 유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하게 할 만큼 무리하게 수사한 검찰의 뒤에는 청와대가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을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혐의만 갖고 모욕과 창피를 주기 위해 여론재판을 했다는 비난도 거세졌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서거 직후 &ldquo;노 전 대통령께서 갑작스레 서거하시게 된 점에 대해 충격과 비탄을 금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종료할 것&rdquo;이라는 긴급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서거는 이명박 정부도 청렴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켜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말기에서 보듯 그러지 못했다.최기서 언론인잠깐 - 포괄적 뇌물수수죄란노무현의 혐의에 대해 검찰은 &lsquo;포괄적 뇌물수수죄&rsquo;를 말한다. 포괄적 뇌물죄는 법전에 적시돼 있지 않은 죄명이지만, 뇌물죄의 요소인 대가성에 있어서 대법원이 구체적인 집행행위와 대가관계가 없어도 포괄적인 관계가 있으면 족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나온 죄명.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lsquo;포괄적 뇌물죄 혐의&rsquo;로 수사를 받게 된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인터넷 상에서는 &lsquo;포괄적 ○○죄&rsquo;라는 패러디가 잇따르게 된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0] 노무현과 대립 배경]]></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649</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649</guid>
            <pubDate><![CDATA[Thu, 28 Feb 2013 13:3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2007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백악실에서 이명박 당선인과 만찬을 겸한 회동을 갖고 정권 인수문제를 비롯한 국정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28/1362025877516490.jpg"/>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노무현이 적잖이 기여(?)했지만, 둘의 대립은 이명박의 당선 직후부터 극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노무현은 이명박의 연착륙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의 치적에 무조건 반대할 것으로 예상된 이명박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lsquo;낙향&rsquo;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을 대우해주려 하지 않았다. 마주 서서 뺨을 주고  받는 그런 양상이 광우병 촛불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물밑에서 계속 됐다.대선을 이틀 앞둔 2007년 12월 17일 오후 3시. 당시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이 발의한 &lsquo;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 혐의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rsquo; 즉, &lsquo;이명박 특검법&rsquo;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렇게 &lsquo;이명박-노무현 전면전&rsquo;은 예견돼 있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측은 &ldquo;이명박과 관련한 BBK, LK-e뱅크, 옵셔널벤처스 등에 대한 수사결과를 검찰이 발표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rdquo;며 &ldquo;검찰이 의도적으로 편파 수사나 조작을 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rdquo;고 발의 배경을 밝힌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기대로 그치고 만다.&lsquo;이명박 특검법&rsquo;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법적인 논쟁을 떠나, 대선에 이기든 지든 정치적 보복성이 다분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이명박이 당선이 된다는 가정 하에 차기 대통령을 인수위 가동 기간에 법정에 세운다는 것. 대권 바통을 넘겨받기 전이었지만 당선이 유력시되던 이명박으로선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을 대목이다.2008년 1월 24일이었다. 노무현은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lsquo;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도식&rsquo;에 영상 메시지를 보낸다.&ldquo;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지난날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과 유가족 여러분께 국가를 대신해 다시 한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rdquo;현직 대통령이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한 과거사 대국민 사과였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이명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소 삐딱했다. 대통령직 인수위는 그달 이미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폐지하거나 대폭적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인수위가 당시 &lsquo;점령군&rsquo;으로 회자한 것도 여야가 합의해 만든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리하겠다며 밀어붙였던 까닭도 있었다. 노무현의 사과 발언이 있기 사흘 전인 21일, 한나라당은 9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lsquo;진실화해위원회&rsquo; 하나로 통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내놨다. 제주 4&middot;3사건, 노근리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광주 5&middot;18 관련 사건, 민주화 보상 및 명예 회복 등에 관한 위원회를 모두 폐지하고, 진실화해위 하나로 통폐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명박과 노무현의 불편함은 알려진 것보다 심각했다. &ldquo;노무현이 했던 것은 무조건 안 돼&rdquo;라는 식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명박의 인수위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정부부서의 정책평가서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노무현은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서 &ldquo;지난 5년 정책에 대해서 평가서를 내라는데 반성문 써오라 이 말 아닙니까?&rdquo;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반성문 쓰라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격이었다.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넘어가는 정권 인수인계 과정은 이렇듯 어렵고 힘들었다. 그만큼 국민은 불안했다. 무엇보다 헌법에 대통령과 당선인의 관계를 규정한 조항이 없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몰랐다. 기타 법률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법적 조항이 없으니 협력보다는 갈등관계가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는 대통령이지만 당선인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었고, 당선인도 취임 전이긴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어렵게 할 수 있었다. 노무현이 &ldquo;통일부를 존속시키고 임명직 임기를 채워 달라&rdquo;고 요청했지만 이명박은 답하지 않았다. <img alt="만찬장으로 이동하기 전 악수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28/1362025877516491.jpg"/> 이명박의 다리가 꼬일 때도 있었다. &lsquo;노무현 No&rsquo;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성공했다는 평가지만 &lsquo;청계천 살리기 사업&rsquo;에서 보듯 일단 밀어붙이고 보자는 식의 이명박은 눈에 보이는 성과에 너무 집착했다. 부동산 대책도 그랬다. 노무현은 그의 집권 전략인 &lsquo;수도권 대 지방&rsquo;의 구도에 따라 수도권 부동산은 묶고 지방 부동산은 푸는 투트랙 전략을 썼다. 하지만 지방에 풀린 부동산 개발자금이 오히려 서울 강남으로 유입됐고, 전국적인 개발 열기가 강남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의 부동산 정책은 그렇게 실패한다. 이를 지켜 본 이명박은 나았을까. 이명박은 강남 재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는다. 경기권에 신도시를 추가로 만들겠다고도 한다. 재건축 완화를 통해 강남 중산층들의 마음을 잡고, 신도시 건설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방에서 폭발했다. 경기를 반짝 살리려다 장기적인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거셌다. 아파트 가격 상승은 오히려 소비 심리 위축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반대를 위한 반대,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만 꾀한 결과였다.전방위에 걸친 고강도 수사로 전 정권의 먼지를 털겠다는 이명박의 검찰은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을 투망을 던져 건져 올리는 식으로 건드리기 시작한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서울지검 특수부 등 검찰이 총출동하면서 공기업 비리 수사에 나선 것이었다. 감사원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관계 기관도 총동원됐다. 중수부가 석유공사와 강원랜드를 털었고, 서울중앙지검은 KT와 KTF 비리 수사, 신성해운 세무조사 로비, 그랜드코리아레저 비리, 부산자원 특혜대출 수사에 나섰으며, 서울 서부지검은 프라임그룹 비자금 수사에 집중했다. 서울 남부지검은 애경그룹을 팠고, 대전지검은 VK 수사에 나섰다.하지만 실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까지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영장이 기각되거나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많았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그해 국감장에서 &ldquo;전 정권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차례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국민은 현재 검찰 기업수사를 편파 보복 수사라 생각한다&rdquo;고 비판했는데 검찰 내부에서도 검찰 수사가 정치적이라는 비판에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는 불만 섞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은 그 정도로 전 정권에 분노했다.그 과정에서 노무현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 &lsquo;청와대 자료유출 논란&rsquo;이 제기되면서 &lsquo;이-노&rsquo;가 이번에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노무현이 자신의 재임기간 중 청와대에서 만들어진 각종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옮겼다는 의혹이 일면서 검찰 수사로 이어진 것이다.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도 민감한 내부 자료들을 파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lsquo;차기 정권을 방해하려던 것 아니냐&rsquo;는 이야기도 나온다. 노무현이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민정, 인사 등 민감한 부서의 자료에서부터 청와대 전산시스템인 이지원(e知園) 파일, 컴퓨터 하드디스크까지 모두 파기했다는 논란은 분명 이명박을 화나게 했을 것이다.이렇게 사사건건 대립하던 현-전 정권 일인자는 결국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의 이름이 나오면서 이명박의 우세로 기울게 된다.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는 데 건평 씨가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풀 죽었던 이명박의 표정에 화색이 돈다. 세종캐피탈은 부실한 세종증권을 팔아야 했는데 세종캐피탈 측이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을 상대로 한 로비에 실패하자, 정대근과 친분이 있는 건평 씨를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2005년 4월, 홍기옥 세종캐피탈 대표로부터 &lsquo;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도와 달라&rsquo;는 청탁을 받은 노무현의 고교 동창 정화삼 씨와 동생 정광용 씨는 그해 6월 노건평 씨를 찾아갔다고 밝힌다.노 씨는 2008년 이런 사실에 대해 &ldquo;2005년 5, 6월쯤 정화삼 씨가 전화를 세 번쯤 했다. 정광용 씨가 봉하에 찾아와서 커피도 한잔 했다. 그후 세종캐피탈 홍기옥 사장을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에게 소개해달라고 해 소개해줬다. 이것이 잘못됐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단돈 10원짜리 하나 받은 사실이 없다&rdquo;고 해명했다. 하지만 2006년 1월 농협은 세종증권을 1039억 원에 인수한다. 세종증권 측은 증권사를 인수한 정대근 전 농협회장에게 50억 원을 줬고, 정화삼 씨 형제는 홍기옥 대표로부터 29억 6000만 원을 받게 된다. 이 중 건평 씨의 몫이 있는가에 검찰이 수사를 집중하게 되고, 경남 김해시 내동 상가가 건평 씨의 몫일 것이란 이야기가 언론에 자꾸 흘러나오게 된다. 검찰 수사가 경마식으로 보도되면서 노무현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lsquo;박연차 게이트&rsquo;가 터지면서 노무현을 상대로 한 수사로 번진다. 노무현 자살정국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최기서 언론인잠깐[1] 노건평을 막지 못한 이유노무현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막기 위해 900여 명의 리스트를 집중적으로 관리해 왔다. 그 중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친인척은 따로 분류해 관리할 정도로 엄격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무현의 친조카인 노지원이 성인오락실 &lsquo;바다이야기&rsquo;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일면서 집중 관리의 강도는 더욱 세진다. 하지만 요주의 인물은 바로 노건평 씨였다. 너무 순박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더 노출됐던 사람이었고 실제로 봉하마을 동향을 면밀히 파악했지만 노건평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2] 국민보도연맹 사건은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이승만 정부가 과거 일제하에서 좌익계 독립운동을 했거나, 광복 뒤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와 그 가족 지인 등을 &lsquo;사상 개조&rsquo; 명분으로 가입시켰던 단체다. 하지만 한국전쟁 초기 이들은 후퇴하던 군과 경찰에 끌려가 집단 학살당했다. 수십만 명이 죽었다. 이후 피해 유족에게는 연좌제가 씌워졌다. 오랜 기간 감시당했고, 사찰의 대상이 된다.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하면서 피해를 입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9] 노무현, 인연 혹은 악연]]></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546</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546</guid>
            <pubDate><![CDATA[Tue, 19 Feb 2013 08:5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서울시장과 악수하는 모습. "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19/1361231400515460.jpg"/> 이명박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들까.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이명박과 노무현은 &lsquo;종로의 혈투&rsquo;를 벌이게 된다. 이명박은 신한국당, 노무현은 통합민주당 후보였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에 이어 3위였다. 기쁨도 잠시,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 혐의에 휩싸였고 스스로 의원직을 던졌다. 이듬해 노무현이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재선거에 나서서 당선됐다. 이명박의 지역구를 탈환한 셈이다. 이명박은 이후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그로부터 6개월 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과 소통령, 인연이었나 악연이었나. 이명박으로선, 노무현의 존재는 실보다 득이 컸다. 이명박이 박근혜를 물리치고 한나라당 대선 주자가 된 것도 노무현의 실책이 워낙 컸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lsquo;노의 실정&rsquo;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었다. 세간에서 자주 이런 말이 들렸다. &lsquo;기득권 던지기&rsquo;로 위기 때마다 승부수를 던졌던 노무현은 평검사와 대화하고, 임기 중 물러날 수 있다며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야권과의 대연정까지 추진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파격은 잦았고 식상해져갔다.2006년 5&middot;31 지방선거를 보자. 2007년 대선이 있기 한 해 전이니 참여정부의 &lsquo;중후반 평가&rsquo;로 볼 수 있었다. 서울 구청장 25 대 0, 서울시의원 96 대 0, 경기도의원 108 대 0, 인천시의원 30 대 0&hellip;야당인 한나라당이 싹쓸이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낭패감을 금치 못했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ldquo;이만하면 정권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rdquo;라는 말까지 나왔다.서울시장 재임 때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며 타 종교계의 공분을 산 이명박은 &lsquo;황제 테니스&rsquo; 논란으로 타락한 귀족 이미지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국민은 노무현을 향해 더 분노했다. 당시 &ldquo;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rdquo;라는 말은 유행어였다. 아파트값 폭등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정책 실패, 6자회담에서 배제되는 불안한 외교력,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느슨하고 무기력한 대응&hellip;.도덕적 하자보다는 &lsquo;경제를 살릴 것 같은&rsquo; 건설 CEO 출신 이명박은 여러 매체에서 &lsquo;부동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것 같다&rsquo;는 이유로 대권 후보 지지도 1위 자리를 탈환하게 된다. 고건 전 총리의 인기는 &lsquo;고결한 인품만으로 경제를 살릴 수 없다&rsquo;는 비판론이 일면서 사그라진다. 그런 분위기가 쏠림 투표로 나타난 것이 그해 지방선거였다. 그리고 그 파괴력에 정치권이 놀란다. 놀람에는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었다. 유권자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돌아설지 알 수 없게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이명박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2006년 더 커지게 된다. 바로 &lsquo;노무현-이명박 연대설&rsquo;이다. 2007년 대선 막판까지 쉬이 꺼지지 않았던 이유를 살펴보자.사실 노무현이 &lsquo;킹메이커&rsquo;가 돼 정권 재창출을 이루기 위해선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모두 출전해야 했다. 보수표가 갈라지고 영남권이 쪼개지는 것. 거기에다 열린우리당이 영남권 출신 후보를 내면 &lsquo;필승&rsquo;이었다.2006년 8월 6일.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오찬 회동을 한 자리에서 노무현은 이런 말을 한다.&ldquo;당을 잘 유지하면 좋은 선장이 승선할 수도 있다.&rdquo;기존 후보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해석이 나왔고, 좋은 선장을 영입(?)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당시 친노그룹에서는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당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하자는 명분도 분명했다. 필승 인물을 찾겠다는 것이었으니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이명박이 적임자였다.그러면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이 모처에서 만나 교감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노무현의 오른팔 안희정과 이명박의 오른팔 박영준이 나섰다는 설이었다. 둘은 부인했고, 진실은 확인되지 않았다.이-노 연대설이 자꾸만 회자된 것은 이명박과 노무현의 닮은 성격과 유사한 성장 배경도 한몫했다.당시 이명박은 한나라당 주자 중 이념적 스펙트럼이 가장 넓었다. 운동권 출신이었고, 정치와 행정 경력은 짧았다. 이명박은 그 스스로 &ldquo;주택이나 교통정책에 있어서는 나는 좌파&rdquo;라는 말도 했다. 이명박은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문제에 대해 사활을 걸고 반대한 박근혜와는 분명히 달랐다. 실사구시적 성격까지. 노무현은 답답했을 것이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김근태 두 예비후보의 지지율은 5%대를 넘지 못했다. 천정배 유시민 김혁규 김두관 등 친노 직계의 인기는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정치경력을 들여다보면 상식을 깨는 도전과 모험이 많았다. 그는 &lsquo;정치적 상상력&rsquo;이 방대한 사람이었다.2006년 7월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명박은 이재오를 밀었고, 박근혜는 강재섭을 민다. 강재섭이 당대표가 된다. &ldquo;이대로 가면 이후 당내 대권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다&rdquo;는 불안감이 이명박을 음습해 온다. 대중적 지지도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접전이었지만, 당내 세력구도에서는 박근혜가 분명히 우위였던 것이다.노무현으로선 이명박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기회였을 수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분열을 꾀할 적기. 대선 후보를 뽑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박근혜 옹립 분위기로 가면 이명박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명박의 탈당설은 2007년 대선의 주요 변수 중 가장 파괴력이 큰 것이었다. &lsquo;이명박 탈당&rarr;신당 창당&rsquo;+&lsquo;열린우리당 반노세력과 호남계 의원 탈당&rarr;친노 주축의 열우당&rsquo;은 황당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박근혜의 한나라당, 고건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이명박과 열린우리당 3파전 구도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img alt="07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맞이한 후 나란히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19/1361231400515461.jpg"/> 하지만 이명박은 그 같은 다양한 연대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dquo;정치적 음모 아니냐? 나는 조직 생활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항상 질서의 규칙을 지켜왔다. 그런데도 자꾸 그런 얘기가 들리는 걸 보면 바깥에 분열을 좋아하는 세력이 있고, 안에도 그런 세력이 있는지 모른다.&rdquo;&lsquo;이-노 연대설&rsquo;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지만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이명박이 정해진 뒤에도 노무현은 이상하리만큼 한나라당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간다. 노무현의 실책과 무능이 부각될수록 이명박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대선 본선에서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한다.그해 9월이다. 집권 여당의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었지만 대선 본선의 대결 프레임은 이미 &lsquo;이명박 대 노무현&rsquo; 구도로 일찌감치 자리한다. 노무현이 킹메이커를 자처할수록 여당의 발이 꼬이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ldquo;이번 대선은 노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의 대결이다&rdquo;라고 논평하며 &lsquo;이-노&rsquo; 대결구도를 짠다.그런데 노무현의 청와대가 그달 7일 이명박 대선 후보와 이재오 박계동 안상수 등 4명을 &lsquo;청와대 정치공작설&rsquo; 등 허위 사실을 주장해 대통령 보좌진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해버린다. 대선을 석 달 앞두고 청와대가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를 직접 고소한 전대미문의 사건. 곧바로 청와대의 &ldquo;대선 개입 아니냐&rdquo;는 논란이 일기 시작한다.당시 대통령 비서실 명의로 낸 &lsquo;이명박 후보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통령 비서실의 입장&rsquo;이란 글을 보자.&ldquo;한나라당은 최소한의 단서와 근거도 없이 청와대가 배후에서 정치 공작을 하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후보 본인까지 나서서 정권 차원의 정치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도덕성 검증 요구와 불법 의혹을 물타기 하려는 선거용 술수다. 대통령 비서실은 국가 기관에 대한 부당한 정치 공세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rdquo;노무현을 자극(?)해 이 같은 결과를 끌어낸 것은 한나라당이었다. 9월 4일 한나라당 측 관계자가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ldquo;국정원과 국세청이 이명박 후보의 재산 내역을 들여다본 의혹이 있으니 6일 오전 11시에 조사하러 가겠다.&rdquo;정도가 지나치다고 여긴 청와대는 발끈했다. 하지만 그해 6월, 노무현이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비난해 두 차례 중앙선관위로부터 선거 중립 의무 위반 경고를 받은 터여서 &lsquo;청와대의 대선 개입&rsquo;이라는 불씨는 꺼지지 않은 터였다.타이밍을 잡은 이명박 측은 곧바로 &ldquo;청와대가 선거 중립 의무를 지키기보다 대선에 적극 개입해 정권 연장을 기도하고 있다&rdquo; &ldquo;정윤재 신정아 사건이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물타기 의도다&rdquo; &ldquo;정국 자체를 노무현 대 이명박 구도로 가져가 친노 주자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친노 주자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다&rdquo;는 등 고소 배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한다.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 대한 언론의 주목도는 계속 떨어진다.일각에서는 이명박과 노무현의 &lsquo;빅딜설&rsquo;도 나왔다. 청와대가 당선이 유력한 이명박으로부터 노무현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삼성 비자금 특검을 양해 받고, 대신 BBK 수사를 봐주자는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삼성 특검이 이뤄지면 유&middot;무죄를 떠나 노무현 측근이 줄줄이 소환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당시 검찰이 이명박의 아킬레스건인 BBK 사건 수사 발표에서 이명박의 혐의 없음을 인정한 것도 노무현의 작품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최기서 언론인이명박의 대권 도전에-인정하든 하지 않든-도움을 줬던 노무현. 하지만 이명박의 새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서서히 노무현 주위를 포위하며 압박에 들어간다. 다음 호에서 짚어본다.  잠깐! - 정치는 상상력?2007년 대선 정국에 정치권에는 4가지 시나리오가 돌았다.1. &lsquo;고건 대세론&rsquo;: 박원순 변호사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이 야권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지만 고사하면서 시작됐다. 노무현도 싫고 한나라당도 싫으면 &lsquo;나에게 오라&rsquo;. 지난 &lsquo;안철수 현상&rsquo;과 비슷했다.2. &lsquo;박근혜-DJ 연대설&rsquo;: 뿌리 깊은 동서갈등을 푸는 계기가 된다. 박정희 정부 때 핍박받았던 DJ가 박정희의 딸과 손잡으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산업화 브랜드와 민주화 브랜드의 결합.3. &lsquo;손학규-고건 연대설&rsquo;: 둘은 경기고와 서울대 동창이다. 이념적으로는 중도. 둘이 합치면 안정적인 행정이 도모된다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다.여기에 &lsquo;이명박-노무현 연대설&rsquo;까지. 하지만, 상상력은 현실이 되진 않았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8]촛불정국]]></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43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433</guid>
            <pubDate><![CDATA[Wed, 13 Feb 2013 08:5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미국산 소고기 파문’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13/1360713480514330.jpg"/> 흔히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첫해를 &lsquo;잃어버린 1년&rsquo;이라고 한다. 5년이 아니라 &lsquo;임기 4년&rsquo;의 대통령이었다고도 한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까먹은 시간을 두고서다. &lsquo;이명박&rsquo;의 머리글자를 딴 &lsquo;2MB&rsquo;(메가바이트)라는 다소 충격적인 별명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시민들을 막아 줄지어 선 전경차를 두고 &lsquo;명박산성&rsquo;으로 조롱당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의 정치대응 기능을 무조건 &lsquo;아마추어리즘&rsquo;으로 보게 된 것도 당시 촛불집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그의 통치력에 기인한다. 촛불로 기화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 이후로도 정권 내내 &lsquo;촛불민심&rsquo;이 이명박을 괴롭히게 된다.노무현 정부였던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면서 미국산 쇠고기가 국내에 들어오게 됐다. 그러다 그해 미국산 쇠고기 검역과정에서 수입이 금지된 등뼈가 발견됐고, 시중에서 판매되던 미국산에서도 뼛조각이 발견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전면 중단됐다.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그해 4월 한미 간 쇠고기 2차 협상이 개시됐다. 방미 중이던 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초대한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정상회담을 했는데,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위한 공동노력을 위해 한국은 별도의 쇠고기 협상에서 쇠고기 수입 전면 허용이라는 전격 양보안을 꺼내든다. 이명박의 외교 첫걸음은 그렇게 &lsquo;굴욕외교&rsquo;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며 출발하게 된다.광우병 규탄 촛불집회의 서막은 그렇게 올랐다. 4월 29일, 문화방송 PD수첩 팀이 &lsquo;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rsquo;를 방영했다. 5월 13일 재차 &lsquo;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2&rsquo;의 전파를 쏘았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촛불이 들불처럼 이미 피어올랐을 때였다.최근 만난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ldquo;사실, 촛불집회가 없었다면&hellip;이명박 정부는 더 엉망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오만방자해질 수 있는 점령군(인수위를 빗댐)에서 따끔한 자극이 된 계기였다고 본다. 행정을 잘못하면 이렇게 비폭력 시위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줬다.&rdquo;이 인사는 할 말이 많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ldquo;무엇보다, 청와대 민정 분야가 기능을 못 했다. 아무도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민심을 수렴하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돌에 맞을까 먼발치에 서서, 서성이다 돌아갔다. 만약 누군가 시민들의 앞에 서서 요구 사항을 들었더라면, 요구 사항을 듣다 혹 돌에라도 맞았더라면 상황이 바뀌었을지 또 누가 알겠느냐.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rdquo;이명박 정부의 임기 첫해에 벌어진 광우병 촛불집회는 예전의 시위나 집회와는 그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선동자가 없었고, 그래서 중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배후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찰이 종로를 막으면 을지로로, 을지로를 막으면 퇴계로로,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오가며 전경과 맞서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집회를 막느라 피로해진 전경들이 독기를 품었지만, 몰려나온 시민들은 웃고 즐겼다. &lsquo;자발적&rsquo;이라는 수식어가 거의 매일 언론 보도에 오르내렸다.집회에 참여한 인물군도 다양했다. 교복을 입고 등장한 중고생들, 한국말이 서툰 해외 유학생들과 현지 교민들,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들, 종교인,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유모차 부대, 패션이나 육아 등 비정치적 동호회 회원 등이 삼삼오오 운집했다. 전국 17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로지 광우병을 막자며 &lsquo;광우병 국민대책회의&rsquo;를 발족했다. 인터넷에서는 &lsquo;아고라 대학생 연합&rsquo;이 새로 생겨났다. 대안 운동으로 &lsquo;온라인 한우 직거래망&rsquo;이 구축됐다. 깃발과 돌과 화염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폭력에는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할 수 있었지만, &lsquo;조금 달라진&rsquo; 촛불집회에 정부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해 6월,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한 종교행사에 참석해 촛불 집회를 언급하면서 &ldquo;사탄의 무리들이 이 땅에서 판을 치지 못하도록 기도해 달라&rdquo;고 말한 것이 드러나 파문에 휩싸였다. 추 비서관은 &ldquo;그런 표현은 기도나 연설 끝 부분에 통상적으로 쓰는 관행적 용어일 뿐, 특별한 집단을 지칭한 것은 아니&rdquo;라고 해명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lsquo;본심&rsquo;으로 여겨지면서 &lsquo;내상&rsquo;을 크게 입었다.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도 당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제5단체 주최 행사장에서 &ldquo;실직하고 일자리가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과 서민, 어려운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것 같다&rdquo;고 해 논란이 크게 번졌다.사실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새로운 흐름도 만들어냈다. 가장 컸던 것이 바로 무관심 영역이었던 정치가 관심 영역으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광우병 발생 우려가 있는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를, 특정 위험물질까지 포함해 제한 없이 수입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생활 이슈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점차 이어지고, 집회를 문화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정당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고, 대의제에 대한 의구심도 나타냈다.이후 이 대통령의 학교 자율화 추진 계획, 한반도 대운하, 의료보험 및 공기업 민영화, 재벌규제 완화, 한미 FTA, 각종 청문회는 촛불로 깨어난 시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면서 사사건건 발목이 잡히게 된다.또 정치를 조롱하는 소셜네트워크가 뜨게 됐다. 제도 언론을 믿지 못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lsquo;스스로 기자&rsquo;가 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lsquo;프레스&rsquo;가 찍힌 완장을 차고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하지 않던 &lsquo;현장 그대로&rsquo;를 자신의 SNS와 블로그에 실어 날랐다. 전경들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남기면서 힘을 얻었다. 기자 행세를 하던 경찰 프락치를 솎아냈다.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는 꺼리면서 &lsquo;언론도 별것 아니다&rsquo;라는 의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집회는 무겁지 않았다. 전경버스를 뒤집으려 하면 뒤에 있던 시민들은 &ldquo;비폭력!&rdquo;을 외쳤다. 도로에서 행진하면 차량 운행을 방해한다며 인도만 걷는 준법투쟁이 늘어났다. 연인의 데이트코스이기도 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ldquo;세탁비를 돌려 달라&rdquo;고 웃었다. 젖은 옷을 말려야 한다며 모닥불을 피워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보수언론에 광고를 낸 기업들에 대해 광고 철회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무엇보다 제도권 언론이 격렬하게 담론투쟁을 벌이면서 좌우의 대리전쟁이 시작됐다. 촛불집회 보도에 대한 매체의 편향성이 극심했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언론은 정치를 좌우하고 심지어 유도하는 &lsquo;언론 정치&rsquo;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은 신뢰를 잃었다.이 대통령은 세 차례 고개를 숙였다. 역대 최다 표차(530만 표)로 당선된 그로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었다. &ldquo;청와대 뒷산에서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며 저 자신을 자책했다&rdquo; &ldquo;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겠다&rdquo;.결국 농림수산식품부 정운천 장관이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해 미국에 수출 중단을 요청했다고 밝히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국민적 신뢰 회복은 쉽지 않았다.당시 이 대통령은 &lsquo;실기&rsquo;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수습할 수 있는 때, 사과할 수 있는 때를 놓쳤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랬다.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했지만 &ldquo;송구스럽다&rdquo;라고만 한 점, 쇠고기 문제가 불거진 초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다가 집회 분위기가 느슨해지지 않자 여론에 밀려 움직여 불신을 키웠다, 특히 &ldquo;내가 책임을 진다&rdquo;고 해 결국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정을 펼쳤다. 국민으로선 정부가 미국과의 신뢰는 강조하면서 국민과의 신뢰는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었고, 이명박은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6월 4일, 전국 52곳에서 치러진 재&middot;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서울 강동구청장, 인천 서구청장, 경기 포천시장 등 수도권 기초단체장 3곳을 모두 잃었고, 42곳에 후보를 냈지만 9곳에서만 승리했다.6월 10일. 한승수 국무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쇠고기 파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포함한 내각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청와대 수석들의 일괄 사의 표명에 이은 것으로 이 대통령으로선 손발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꼴이 됐다. &ldquo;공직자는 머슴이다&rdquo;라는 말로 건설 CEO로서의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운 이 대통령은 &ldquo;의식 속의 전봇대를 뽑자&rdquo;면서 집권 한 달까지 아주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지지율은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20%대 지지율로 떨어진다. 치욕적이었다.이 대통령은 촛불 정국 이후 대중주의적인 통치노선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우호 세력을 가까운 거리에 두기 시작했다. &lsquo;3친&rsquo;(親) 즉, 친재벌. 친보수, 친부유층 정책은 그때부터 강화됐다는 지적이 있다. 공기업과 정부 관계기관, 정부투자기관 등에는 자신과 맞는 &lsquo;코드 인사&rsquo;로 채우면서 국민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lsquo;완충지대&rsquo;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을 국정원장으로,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을 다시 국무차장으로 재 발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불법시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처리한다는 &lsquo;공안정국&rsquo;도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이 당시 촛불정국에서 드러난 민심을 그대로 수용해 &lsquo;친국민&rsquo;적이 되었다면, 퇴임을 맞는 요즘 더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최기서 언론인잠깐 - 물로 흥하고 불로 망해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13/1360713480514331.jpg"/>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초, 물불 가리지 않는 공격적인 리더십을 보이며 &lsquo;불도저&rsquo;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물로 흥하고 불로 망하는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다.서울시장 시절엔 청계천 복원으로 인기를 얻었고, 대선정국에선 (논란은 있었지만)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내놓아 얻은 점수도 있다. 그러나 남대문이 불탔고, 용산 참사, 화왕산 산불 등이 일어나면서 그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그는 &lsquo;광우병 촛불집회&rsquo;도 &lsquo;물대포&rsquo;로 응수하며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명박 표 물이 국민들의 불에 꺼진 꼴이 됐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7] 이상득 vs 이재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309</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1309</guid>
            <pubDate><![CDATA[Mon, 04 Feb 2013 10:1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정두언이 이상득에 대해 다소 직접적으로 도발하는 편이었다면, 이재오는 링 위에 본인이 직접 오른 적이 없다. 마치 인형극을 하듯, 이재오의 대 &lsquo;이상득 투쟁&rsquo;은 보이지 않는 실을 묶어 대리인을 앞세웠다는 것이 더 객관적인 총평일 것이다. &lsquo;쌍이 마차&rsquo;는 이명박 정부 탄생의 부정할 수 없는 공신이었지만, 권력을 두고서는 같은 편이 되질 못했다. &lt;7&gt; 이상득 vs 이재오  <img alt="개국공신 이상득(왼쪽)과 이재오는 권력을 두고서는 같은 편이 되질 못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04/1359940200513090.jpg"/>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는 17대 국회 후반, 18대 국회 전반을 양분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의 두 축이었다. 친이계의 덩치가 컸고, 힘도 훨씬 셌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 이후 한 축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친이계가 이상득계와 이재오계로 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9월,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퇴진 논쟁이 일면서 이재오계의 출현이 물 위로 드러났다. 홍 원내대표가 추석 전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려다 무산되자 당내에서 책임론이 일었다. 청와대는 &ldquo;전쟁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rdquo;며 유임에 방점을 찍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권택기 김용태 정태근 진수희 의원이 홍 원내대표를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우연인지 모두 이재오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이재오가 4월 총선 공천에 사사로이 개입했다는 죄목(?)으로 미국으로 가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ldquo;연말로 예정된 이재오의 복귀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아니냐&rdquo;는 의혹을 낳았고, &ldquo;지도부 힘 빼기는 이재오를 살리기 위한 것&rdquo;이라는 비판이 번졌다. &lsquo;홍준표 끌어내리기&rsquo;는 다분히 이상득에 대한 도발적인 측면이 강했다. 당시 박희태 당 대표-홍준표 원내대표 체제는 이상득의 &lsquo;작품&rsquo;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오는 &lsquo;안상수 대표-정의화 원내대표 체제&rsquo;를 그렸지만 안&middot;정은 별 이유 없이 중도에서 하차하게 된다. 힘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이재오가 미국에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박-홍 체제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이재오계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을 흔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추가경정예산 처리는 원내지도부 사퇴까지 거론할 죄목이 아니다. 이상득이 이재오를 괘씸해했던 것은 사사건건 야당이 &lsquo;이상득 배후설&rsquo;을 제기할 때, 아군으로 생각했던 세력이 야권과 힘을 합했기 때문이었다. 이상득계는 사실 당 주류 세력이었지만 충성도는 상당히 떨어졌다. 반대로 이재오계는 적극적이었다. 이상득은 &lsquo;막후 실력자&rsquo;였지만 이상득계에는 눈에 띄는 &lsquo;정치적 구심점&rsquo;이 없었다.  이재오는 반대로 이상득이 참 미워보였을 것이다. 민주투사인 그가 박근혜를 어떻게 보는지 이상득이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상득계와 친박계는 보이지 않는 교감이 있었다. 사정기관이나 정보기관의 정보가 대부분 이상득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힘센 형님이 이재오가 그렇게 미워하는 박근혜와 같은 TK 지역구였고, 친박계도 이상득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10개월간의 귀양살이(?)를 끝낸 이재오는 2009년 3월 28일 귀국한다. &lsquo;박연차 게이트&rsquo;가 조금씩 여권의 권력 지형을 흔들 때였다. 이상득의 &lsquo;형님 리더십&rsquo;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2009년 5월, 결국 이상득은 이재오 세력에 발목이 잡힌다. 그가 정치권에서 두 발 짝 물러난 시발점이다. 원내대표 경선이 촉발제였다. 이재오계가 미는 안상수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후 중립 성향의 황우여 의원이 이상득계의 지원사격을 기대하며 출마를 선언했다. 친박계 최경환을 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면서다. 당시 투표장을 들어가 보자. 최경환은 2차 결선 투표를 앞두고 단상에 나가 이런 말을 한다. &ldquo;1차 투표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그제부터 &lsquo;보이는 손&rsquo;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오더를 내리는 &lsquo;보이는 손&rsquo;은 잠시 외면하고 심사숙고 해 달라.&rdquo; 이 말은 꽤 의미심장했다. 이 &lsquo;보이는 손&rsquo;은 안상수 후보자가 갑자기 등장한 &lsquo;황-최&rsquo; 조에 대해 이상득이라는 &lsquo;보이지 않는 손&rsquo;을 거론한 것을 받아친 말이었다. 원내대표 경선은 &lsquo;보이는 손&rsquo;인 이재오와 &lsquo;보이지 않는 손&rsquo; 이상득의 싸움이 됐고, 이재오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2차 결선 투표에서 출석의원 159명 중 95표가 안-김성조 편을, 62표가 황-최 편을 들었다. 친이계 내부 권력 축이 이상득계에서 이재오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됐다. 그런데 웃긴 것은 경선이 있은 뒤다. 친박계가 맡을 것으로 봤던 사무총장 자리에 친이계 중에서 대표적인 이재오계로 꼽히는 장광근 의원이 맡게 됐고, 김성조 정책위의장 출마로 빈자리가 된 여의도연구소장에는 진수희 의원이 기용된다. 이재오계가 원내사령탑, 당의 조직과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 전략과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싱크탱크까지 장악하면서 &lsquo;이재오 친정체제&rsquo;가 구축된 것이다. 이상득계의 씨를 말리고 싹을 죽이겠다는 의도로 읽혔다.  이재오의 거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6월 2일, 권택기 김용태 임해규 정태근 조문환 차명진 등 초&middot;재선 6명이 박희태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이 이재오 인맥으로 분류됐다. 마침 그날 이재오는 인터넷 포털 블로그에 미국 유학생활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ldquo;선거에 패한 이들은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재오였다.&rdquo; <img alt="２０１１년 ３월 안상수 대표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이상득 의원(왼쪽)과 이재오 특임장관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 일요신문 ＤＢ"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204/1359940200513091.jpg"/> 이제 자신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상득을 겨누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원내대표 경선 이후 노무현 서거에 따른 조문 정국, 이후 당직 개편을 통해 권력 축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서일까. 이상득은 다음날인 6월 3일, &lsquo;정치권 2선 후퇴&rsquo;를 선언하게 된다. &ldquo;지금까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고자 철저히 노력해왔지만 앞으로는 당과 정무,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처신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통의 나날이었다. 정말 고통스럽다. 당 화합에 동참하되 저 자신은 지역구 일과 경제&middot;자원&middot;외교&middot;안보 문제에만 전념하겠다.&rdquo;6월 4일, 이상득은 일본으로 떠나 2박 3일간 머물고서 포항에서 개항을 준비 중인 영일만 신항과 배후산업단지 현장을 둘러봤다. 아군이라 여겼던 동생(이재오)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이재오는 승승장구했다. 6월 10일, 6&middot;10민주항쟁 주역으로서 그 의미를 되새긴다며 이재오는 태백산 새벽 산행에 나선다. 은평을 당협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였다. &ldquo;정상에 오를 때는 정상이 보이지 않지만 올라야 한다. 일단 정상에 오르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려가야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rdquo; 스스로 정상에 올랐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상득과 이재오의 대리전은 2011년 다시 한번 펼쳐지게 된다. 한나라당 5&middot;6 원내대표 경선에서다. 사실 경선이 있기 며칠 전, 이상득과 이재오는 서울의 모처에서 만난다. 당시 원내대표 경선에는 이재오의 측근인 안경률 의원과 이상득계인 이병석 의원이 나선 상태였다. 박근혜계가 지원하는 황우여 의원도 나섰다. 사실 이 쌍이마차의 만남은 위기감의 발로에서였다. 18대 국회의 마지막 원내사령탑을 친박계에 넘겨줄 수 있다는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둘은 진지하게 이야기했고, 몇 차례 엇박자를 내더니 이런 합의안에 이른다. &ldquo;안경률과 이병석이 한 방에 들어가 단일화를 이룰 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다.&rdquo; 이른바 교황 선출 방식인 콘클라베다. 하지만 안경률은 예선에서 자신이 이길 것을 자신했고, 이병석도 마찬가지였다. 이상득과 이재오의 만남을 비웃듯 둘은 각각 출마하고 3파전이 됐다. 여기서 웃긴 일이 펼쳐진다. 1차 투표에서 황우여-이주영 조가 64표를 얻었고, 안경률-진영 조가 58표, 이병석-박진 조가 33표를 거둔다. 과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에 황-이 조와 안-진 조가 2차 결선 투표에 나섰다. 결과는 황-이 조가 90표로 승리한 것이다. 떨어진 이-박 조가 안경률을 지지하면 이기는 선거였는데 이병석을 지지했던 세력이 안경률에게 가지 않고 황우여 조에게 쏠린 것이었다. 이재오는 이후 사석에서 &ldquo;배신은 한 번으로 족하다&rdquo;며 이상득을 향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오로선 이상득과의 독대가 &lsquo;친이계의 원내대표 당선을 위해 서로 노력한다&rsquo;는 암묵적 동의가 깔린 것인데 이상득이 이를 뭉개버렸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후 이상득은 원내대표 경선에 대해 &ldquo;개입한 적이 없다. 억측일 뿐&rdquo;이라고 해명했고, 이재오도 &ldquo;내가 배신감을 느낀 것은 SD(이상득)가 아닌 다른 사람들&rdquo;이라고 비켜갔다. 이상득계와 이재오계의 생각은 사실 근본부터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의 후임으로 이상득계는 &lsquo;박근혜도 괜찮다&rsquo;는 쪽이었고, 이재오계는 &lsquo;박근혜만은 안 된다&rsquo;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재오는 그간의 억측대로 직접 새누리당(한나라당 후신)의 대통령 경선 예비후보로 나선다. &lsquo;박근혜만큼은 안 된다&rsquo;는 것을 직접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친이명박계의 몰락사다. 이후 이상득이 사석에서 이재오를 거론, &ldquo;(자신이 15대 국회의 한나라당) 총무 때 이재오 컨트롤도 안 되고 질질 끌려 다녔다&rdquo;고 말한 것이 기사화된다. 이상득은 &ldquo;와전된 것&rdquo;이라고 바로잡았는데, 이재오는 자신의 트위터에 &ldquo;사람이 젊어서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늙어서는 지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rdquo;는 글을 올렸다. 좀처럼 관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6인회의 운명 이상득과 이재오는 이명박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인 &lsquo;6인회&rsquo;의 멤버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전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의 뜻을 줄곧 따랐고, 이들도 이명박 정부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살았다. 6인회는 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이재오 김덕룡을 뜻한다.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등은 현재 감옥에 있거나 사면을 받은 상태다. 하지만 이들과 등을 돌린 것처럼 비치는 이재오는 살아남아 있다. 6인회는 이념을 매개로 한 가치집단이 아니었다. 동교동계나 상도동계 같은 동지적 유대감으로 뭉친 가신 그룹도 아니었다. &lsquo;이명박 대통령 만들기&rsquo;로 뭉쳤으니 큰 과제를 끝내고 동력을 잃었던 것이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6]이상득-정두언 갈등]]></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88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885</guid>
            <pubDate><![CDATA[Sun, 27 Jan 2013 15:03: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2012년 7월 8일, 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과 개국공신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이 사실상 금품수수의 &lsquo;공범 관계&rsquo;라고 보도했다. 저축은행비리 합동수사단은 이상득이 2007년 말 임석 솔로몬 저축은행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는 자리에 정두언이 동석했다고 밝혔다. 받은 돈의 사용처를 수사하고 있지만, 이 둘이 공범으로 얽힌 것은 참 아이로니컬하다.&lt;6&gt;이상득-정두언 갈등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27/1359266593508850.jpg"/>  ▲ 2010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상득 의원(왼쪽)과 정두언 의원이 나란히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행사에 참여했다. 일요신문 DB사실 이상득과 정두언은 &lsquo;가깝고도 먼&rsquo; 관계였다. 17대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주역들로 &lsquo;옥상옥 실세&rsquo;로 통했다. 하지만 둘은 18대 국회에서 번번이 갈등을 빚었다. 대부분 이상득을 향한 정두언의 도발이었는데, 승패를 요약하자면 &lsquo;4전3승1무&rsquo;로 이상득 쪽이 더 셌다.2008년 2월 대통령 취임 직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은 곧 4&middot;9 총선을 향한 공천 정국에 돌입한다. &lsquo;공천은 상왕 손에 있소이다&rsquo;. 왕 위에 군림하는 왕, 살아 있으면서 자리를 물려준 왕은 다름 아닌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이었다. 공천과 관련한 아무런 당직이 없음에도 공천 정국에서 그는 &lsquo;상왕&rsquo;으로 불렸다. 이방호 당 사무총장에게도 가지 않던 공천 예비 후보자들의 발길은 이상득에게 향했고, 줄을 대려 했고, &lsquo;SD라인&rsquo;에 들어가야만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 사무총장 위에서 내리누를 사람은 이상득 당시 국회 부의장밖에 없다는 말이 회자했다.물론 일부 공천심사위원들이 &ldquo;3선 이상의 중진과 고령은 공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rdquo;는 때마다 등장하는 물갈이론을 폈고, 개혁 공천의 상징으로 &lsquo;3&middot;4선 이상 중진, 70대 이상 고령, 영남권&rsquo;은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는 분위기도 컸다. 하지만 이상득은 정면돌파해 공천을 받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개혁 공천은 물 건너갔다. 이상득의 덕을 본 이들도 많았다.당시 이상득의 불출마를 앞장서서 외쳤던 인물이 정두언이다. 인수위에서 자기 사람을 심는 데 실패하면서 소위 &lsquo;끗발이 죽은&rsquo; 정두언은 여의도 챔피언에게 도전하면서 &lsquo;정치 덩치&rsquo;를 키우고자 했다. 취지는 반듯했다. 이상득이 앞으로 야당과의 관계에서 &lsquo;보이지 않는 손&rsquo;으로서 거중조정 역할을 하게 된다&rarr;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 씨 등 직계가족 비선조직을 가동하면 정권 말로가 좋지 않다&rarr;막판에 이들의 비리로 정권이 흔들렸다&rarr;형통령(兄統領)을 내보내야 한다&rsquo;는 논리는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대통령의 형으로 친이명박계의 대부였지만 사실상 이상득은 친박근혜계와 꽤 가까웠다. 정두언의 도발이 힘을 받지 못한 것은 친이계를 공격하면서도 친박계의 협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득은 당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에게 적대적인 이재오와는 달랐다. 그는 온화했다. &lsquo;정치적 완충지대&rsquo;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5선에다 당시 일흔셋이었던 고령의 이상득이 공천을 받으면서 친박계 여럿이 살아났다. 정두언을 주축으로 한 소장파가 한나라당의 축이었던 영남 주류를 대체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포항 남구와 울릉군이 지역구였던 이상득이 방패막이가 됐다.지난 이야기지만 공천심사위가 이상득의 공천 여부를 놓고 고민했을 때에도 &ldquo;공천을 받아야 한다&rdquo;는 쪽은 친박근혜계였다. 총선 정국에서 탈당했던 친박계가 복당하려 하자 이상득은 &ldquo;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복당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결단하면 총선 이후 다 같이 함께하리라고 본다&rdquo;고 했다. &ldquo;복당은 없다&rdquo;던 이방호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와는 다른 스탠스였다. 이상득은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나 친박계의 수장 홍사덕 등과 친하다. 박근혜 당대표 시절에는 사무총장을 지냈다.거기에다 이상득은 &lsquo;스스로&rsquo; 아주 강한 사람이 돼 있었다. 2인자 이재오에 빗대 &lsquo;1.5인자&rsquo;로까지 불린 이상득에겐 든든한 아군이 여럿 있었다. 11년간 자신을 모신 박영준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었고, 같은 보좌진 출신인 장다사로는 청와대 정무1비서관에 앉아 있었다. 오랜 친구인 최시중은 방송통신위원장이었고, 코오롱 후배인 김주성 씨는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된 상태였다. 청와대, 언론정책 기관, 정보기관 삼각편대에 측근이 두루 포진해 있던 이상득이 골리앗이었다면 정두언은 다윗에 불과했다.정두언은 분했을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다. 정두언 주도로 대선준비팀이 만들어졌고, 이를 모태로 선거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개국 선봉대에 있던 그인데 인수위 인선에서부터 물을 먹더니, 청와대 구성과 내각 인선에서 번번이 발목 잡혔고, 공천에서 힘 한번 쓰지 못했다. 그의 절친이 낙천했을 때, 정두언이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27/1359266593508851.jpg"/>  ▲ 2011년 5월 &lsquo;3D 산업 글로벌 강국 도약의 길&rsquo; 전시회에서 3D TV를 시청하고 있는 정태근&middot;정두언&middot;이상득 의원(왼쪽부터). 뉴시스2008년 3월, 정두언 등은 55명의 한나라당 의원으로부터 &lsquo;이상득 공천 반대&rsquo;의 동의를 받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lsquo;55인의 선상 반란&rsquo;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상득이 공천을 받으면서 정두언 패(敗).그로부터 석 달 뒤다. 정두언은 &lt;조선일보&gt; 인터뷰에서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lsquo;이상득 의원,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장다사로 정무1비서관이 권력 사유화 4인방&rsquo;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모든 언론이 이를 받아썼고 정치권은 이를 &lsquo;정두언의 난&rsquo;으로 불렀다. 하지만 류우익과 박영준이 물러나는 선에서 마무리됐고, 이상득은 건재했다. 정두언의 연패가 이어진다.이로써 범이명박계 내부도 분화하게 된다. 이상득-이재오-소장파의 삼각축이 헝클어지면서 한나라당은 계파와 파벌 싸움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 우위는 이상득에게 있었다.2008년 그 해, 이상득 작품으로 보이는 박희태 당대표-홍준표 원내대표 조가 소장파들이 민 안상수 당대표-정의화 원내대표 조와 붙었는데 안-정 조가 포기하게 된다. 박희태는 이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으로 6인회 멤버였고, 박 전 대표의 러브콜에도 이명박 캠프로 향했던 대표적인 이명박 사람이었다. 이상득에 힘이 더욱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이상득과 정두언의 &lsquo;파워게임&rsquo;은 조용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급속화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다. 정두언과 함께 친이직계인 권택기 김용태 임해규 정태근 조문환 차명진 7인은 &ldquo;이명박 정부는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을 중단하고, 이상득 의원은 2선으로 후퇴하고, 박희태 당대표는 퇴진하고, 박근혜 전 대표는 전당대회에 출마하라&rdquo;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명 &lsquo;7인의 사무라이&rsquo;였다.그런데 이상득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해 6월 3일이었다. &ldquo;2선으로 물러나 자원외교에만 집중하겠다&rdquo;고 밝히고 이상득은 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이 승부가 왜 무승부로 회자하는지는 이상득의 추후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지역구 활동에 집중하고 해외에서 막후 외교관으로 선전하면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가 소장파들에게 한마디 한 적이 있다.&ldquo;참 나쁜 사람들이야. 치고 빠지고&hellip;전형적인 운동권식이야. 에이 그런 말 안 할래, 대응해봤자 같은 사람이 되고, 참아야지.&rdquo;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득으로선 격정 토로다.정치권에 좀처럼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이상득이지만 물밑에서는 일한 듯하다. 2010년 8월 31일.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lsquo;정&middot;남&middot;정&rsquo;(정두언 남경필 정태근) 트리오가 당의 쇄신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남정은 &ldquo;청와대와 국정원에 의해 (불법) 사찰이 이뤄진 것을 이상득 의원이 알고 있었다&rdquo;는 의혹을 제기했고, &ldquo;(사찰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분이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겠다&rdquo;며 배후설을 내놨다.당시 이상득계인 장제원 의원은 트위터에 &ldquo;공개석상에서 새까만 후보가 선배를 정면 공격하는 것은 패륜&rdquo;이라는 글을 올렸을 정도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사실 이상득은 원치 않았던 많은 구설에 휘말렸다. 당시에 불거진 &lsquo;영포회&rsquo; 논란은 총리실의 불법사찰 의혹과 인사전횡 의혹이 결합된 양태였는데 그 배후에 이 대통령 고향인 포항 출신과 포항에 통합된 영일 출신 고위공직자 모임인 영포목우회가 개입했다는 야당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정두언은 그 이후에도 이 대통령이 &lsquo;공정한 사회&rsquo;를 화두로 내놓자 그와 관련한 간담회 등을 주최한다. 그러면서 정두언은 &ldquo;(공정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정책보다 중요한 것이 자기 개혁이다. 공공기관에서 법적 근거도 없이 민간인과 정치인을 대상으로 사찰을 하고 컴퓨터도 파괴했는데 실무자만 구속되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외교부에서는 특채 파동으로 인사기획관이 징계받고, 기조실장이 직위 해제되고, 차관도 인사권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두 기관의 사후처리가) 과연 공정하게 비칠 수 있겠는가?&rdquo;라며 이상득을 사사건건 겨눈다.이상득은 소장파들의 공격에 대해 이런 회한을 내놓았다.&ldquo;그 사람들은 나에게 많이 후배고, 내가 그래도 자기들보다는 나이와 선수도 많은 사람인데,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데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어요. 법적으로 잘못됐다면 법에 호소해서 나를 고발하면 되고. 기업인과 정치인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느낀 건데, 여론에 의해서 결국은 진실이 밝혀지더라고.&rdquo;소장파의 반란에 빠지지 않았던 김용태는 우연히 이상득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ldquo;회사에서 오래 일해 본 사람은 알거야. 아랫사람들은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하다 보니 회사를 자기가 세운 것처럼 생각하지. 그런데 오너는 종업원의 차에다 마일리지 기록계를 달아놓는단 말이야. 회사의 주인은 오너 일가이고, 종업원은 오너의 감독 하에 열심히 일할 뿐이야. 그리고 오너의 판단에 따라 보상을 기다릴 따름이지.&rdquo;결국 오너는 이명박과 그 가족이며, 나머지는 종업원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최기서 언론인잠깐! 이상득과 박영준박영준은 이상득을 11년간이나 모신 보좌관 출신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영준의 득세는 곧 이상득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상득이 박영준에 대해 꺼낸 말이 있다. 2010년 8월 13일 단행된 차관급 인사에서 박영준이 총리실 국무차장에서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옮겨갈 때다.&ldquo;(박영준이 차관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은 거지. 대통령이 필요하면 언제든 쓸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한테 박영준 좀 시키지 말라고 하는데 박영준 시키는 사람이 대통령이지 나인가요? 내가 대통령 보고 시키라, 시키지 마라 할 수 있나요? 내가 그렇게 말할 바보가 아닙니다. 대통령도 형님 말 듣고 친인척 말 듣고 인사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 간다고 해서 내게 이득도 손해도 아무 것도 없어요.&rdquo;이상득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박영준의 이명박 정권 &lsquo;출세기&rsquo;를 보면 두 사람은 철저하게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5] 정두언-박영준 매치]]></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48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483</guid>
            <pubDate><![CDATA[Sun, 20 Jan 2013 15:0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이명박 대통령은 정치꾼이 되질 못했다. 일이 터질 때마다 &ldquo;정치적 사고가 모자라기 때문&rdquo;이란 말이 나왔다. 거중조정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정무적 기능이 중요했는데, 제대로 받쳐주어야 하는 이가 잘 하지 못했다. 그 주변부가 항상 갈등과 반목, 마찰과 싸움의 소용돌이가 된 이유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핵심부에 &lsquo;끼어들 공간&rsquo;이 커 보였기 때문에 실세들의 갈등이 항상 일었다. 이명박의 심복인 정두언 의원과 왕실세로 통했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이명박 주최 &lsquo;권력 링&rsquo;에 가장 먼저 오른 선수였다. 특히 박영준은 이명박 시대의 &lsquo;앙팡 테리블&rsquo;(무서운 신예)로 불리며 무섭게 치고 올라오게 된다.&lt;5&gt;정두언-박영준 매치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20/1358661660504830.jpg"/>  ▲ 2010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신임당직자들과 가진 조찬 간담회에서 정두언 지방선거기획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lsquo;이명박 대통령 만들기&rsquo;를 놓고 볼 때 정두언은 &lsquo;핵심 4인방&rsquo;(이상득 최시중 이재오 정두언)으로 꼽혔고, 박영준은 실무 &lsquo;십이지신&rsquo;(十二支神) 중 하나였다. 실세가 될 가능성이 큰 둘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수 보듯 한 것은 아니다.정두언은 2000년 16대 총선에 낙선하고서 야인이었다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불러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된다. 박영준이 서울시 정무부국장(비서관)으로 있을 때였다. 둘은 친했다. 그리고 &ldquo;시장님을 대통령으로 만들자&rdquo;는데 의기투합한 뒤 &lsquo;호형호제&rsquo; 하는 사이가 된다. 정두언이 세 살 위다.그 뒤 정두언은 이명박의 두뇌로, 박영준은 손과 발로 활약한다. 정두언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경선 캠프에서 상황실장을, 박영준은 네트워크팀장을 맡는다. 본선에서는 정두언이 전략기획총괄팀장으로 발탁되고 박영준도 같은 일을 한다. 그렇게 둘은 힘을 모았다.껄끄러워진 것은 당선 이후다. 인수위원회 인선과 첫 조각을 두고 둘 간의 힘의 균형이 깨졌다. 박영준은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이 됐고, 정두언은 당선인 비서실 보좌역이 됐는데 보좌역은 이 당선인이 임의로 만든 직책이었다. 정두언은 이렇다 할 할 일이 없어 보였다.그로부터 몇 달 뒤인 6월, 정두언은 박영준을 겨눈다. 청와대 실세참모 3명이 &lsquo;전리품 챙기기&rsquo;에 나섰다는 것인데 박영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ldquo;A 수석보다 더 문제 있는 사람이 B 씨(박영준을 뜻함)입니다. 역대 정권의 실력자들을 보면 노태우 정부의 박철언,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노무현 정부의 안희정 이광재 씨가 있었죠. B 비서관은 이 사람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그는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음해하고 모략하는 데 명수입니다.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그런 분야에서는 정말 &lsquo;엑설런트&rsquo;해요. 대통령의 말이라며 호가호위한 거죠. 누가 대통령이 진짜 그렇게 말했나 확인할 수 있겠어요?&rdquo;정두언은 6월 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ldquo;인사 실패의 책임자는 그대로 있고, 실패한 인사의 결과만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rdquo;고 따졌고, 12일에는 &ldquo;끝을 보겠다&rdquo;고 했다.호형호제하던 둘 사이가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사실 정두언과 박영준의 싸움은 정부와 청와대 요직 인선을 하는 과정이 &lsquo;힘겨루기&rsquo; 양상을 띠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인수위 인사를 주무르던 정두언이 정부와 청와대 인선에서 약발을 잃는다. 화약고는 정치권과의 가교역할을 하던 청와대 정무1비서관(여당 담당)과 정무2비서관(야당 담당) 자리였다. 정두언은 이 자리에 전직 의원 보좌관 출신인 L 씨와 당시 한나라당 한 의원 보좌관인 다른 L 씨를 추천했는데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자리에는 장다사로 전 이상득 국회부의장 비서실장과 김두우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앉는다. 박영준과 같은 출향인사란 점에서 정두언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앞서 정두언이 추천한 L 씨는 다른 자리로 가게 되지만 정부 출범 한 달 만에 돌연 사표를 써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분노한 정두언은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이 문제를 &lsquo;공론의 장&rsquo;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가 불붙고 있던 때였다.박영준은 억울했다. &lsquo;조직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rsquo;란 생각에 경선과 본선 때 전국 243곳 선거구를 6번 이상 돈 그였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당원 투표에서 진 것에 충격을 받은 이명박 당시 후보는 박영준에게 조직 정비를 지시했고, 그는 수행했다. 박영준의 선진국민연대가 회원 수 463만 명을 채우고, 이 후보가 집권 여당 후보를 530만 표 차로 이긴 것의 연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박영준은 드러난 수치에서 볼 때 분명한 &lsquo;개국공신&rsquo;이었다. 김영삼의 &lsquo;민주산악회&rsquo;나 김대중의 &lsquo;연청&rsquo;과 같은 조직을 만들었고 이를 인정받았으니 &lsquo;이명박의 남자&rsquo;라는 소릴 들었던 정두언으로서는 박영준이 &lsquo;눈엣가시&rsquo;였을 것이다.1차전은 정두언의 승리였다. 박영준은 &ldquo;너무나 억울하다&rdquo;고 주위에 항변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한 시간 동안 면담을 한 뒤 청와대에서 짐을 싼다. &ldquo;대통령께 누가 된다면 청와대에 한시라도 더 머물 수 없다&rdquo;며 당시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사표를 냈다. 나오는 길에 그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됐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영준도 좌시하지만은 않았다.&ldquo;청와대 참모 인선 과정에서 정두언 의원은 50여 명가량의 명단을 (인선 팀에) 전달했다. 나중에 보니 그중에서 30명 정도가 관철됐더라. 정 의원이 추천한 사람이 청와대에 제일 많이 들어왔다. 정 의원이 청와대 인사에서 배제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20/1358661660504831.jpg"/>  ▲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8월 16일 장차관급임명장 수여식에서 박영준 지경부 2차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박영준은 그렇게 외쳤지만, 실세의 울타리 밖에서 내는 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2차전은 권토중래하던 박영준이 청와대로 귀환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유럽과 동남아 등을 방문해 지인들을 만나 왔던 박영준은 국내에서도 흩어져 있던 중도세력을 모았다. 선진국민연대를 해체하고, 이를 지역 현안이나 녹색 성장과 관련한 단체로 바꿨다. &ldquo;대통령의 의중과 정책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몸을 던질 때&rdquo;라고 했는데 그 스스로 바로 적임자란 이야기였다. 2009년 1월, 청와대에서 물러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박영준은 총리실 국무차장으로 돌아온다.정두언은 바로 쏘아붙이지는 못했다. 이 대통령과는 &ldquo;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rdquo;는 이야기가 나왔고, 촛불정국에서 이 대통령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지적이 제기된 때였다. 사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초기 인사가 고&middot;소&middot;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강부자(강남 땅 부자)+S라인(서울시청 출신)으로 된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가 S라인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정권 초기 난맥상의 단서를 제공해놓고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한 격이었으니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이 대통령 자신도 너무 위축돼 있었는 데다, 새 인물로 진용을 다시 구축해야 했음에도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당시 여의도정가에서는 &ldquo;미국산 쇠고기 파동 이후 이 대통령이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손발을 맞춰 일할 사람이 없더라&rdquo;는 말도 나왔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박영준이 저지른 사건이 많았다. 영일 포항 출신들의 모임인 &lsquo;영포목우회&rsquo;와 선진국민연대의 국정농단 사례가 등장했고, 이슈가 됐던 민간인 불법 사찰의 배후로 박영준이 지목됐다.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과 관련해 매장량이 과장됐다는 의혹의 배후에도 박영준이 지목됐고, 이곳저곳에서 게이트가 발발할 조짐을 보였다. 국정지지율은 추락해 정체됐으며 여권은 적잖게 동요했다.2010년 7&middot;14 전당대회에서 당 최고위원이 된 정두언은 당선 다음날인 15일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ldquo;정부의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또 대통령 주변에서 충성을 빙자해 호가호위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rdquo;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영준에 대한 일종의 구두 경고장이었다. 그는 &ldquo;(영포목우회 행태에) 통곡하고 싶은 심정&rdquo;이라고도 했고, &ldquo;선진국민연대의 국정농단 사례가 100가지도 넘을 것&rdquo;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그뒤 박영준은 &ldquo;선진국민연대 출신 인사들이 메리어트 호텔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공기업 등 정부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rdquo;는 민주당 전병헌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 그러면서 &ldquo;허위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검찰에서 밝혀야 한다&rdquo;고 말했는데, 여권 내 제보자가 있음을 우회적으로 경고한 것이다. 사실상 정두언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었는데 정두언과 달리 직접적이진 않았다. 그의 성격 탓이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박영준은 정두언을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깜냥이 정두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해 총선 정국에서 박영준은 대구 중&middot;남구에 공천을 신청했다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여러 차례 정두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ldquo;아무 일도 아니다&rdquo;라고만 했다. 따지고 보면 정두언이 일방적으로 펀치를 날렸고, 박영준은 맞다가 한 번씩 팔을 뻗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두 실력자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같다.정두언은 저축은행사태와 관련, 관계자로부터 4억 4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는데 최근 검찰은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1억 4000만 원을 구형했다. 박영준은 서울 양재동 복합유통센터 &lsquo;파이시티&rsquo; 인허가와 관련해 금품을 받고, &lsquo;민간인 불법사찰&rsquo;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최기서 언론인잠깐-이명박 대통령의 용인술한번 믿은 사람은 믿고 오래 쓴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신임을 얻기 어렵지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간다. 하지만 호불호도 아주 강하다. 특히 그 스스로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홀로 공부해 대기업 임원과 대표까지 지내서 그런지, 곱게 자란 도련님 스타일은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특히 자기 머리만 믿고 말 많고 게으른 타입을 딱 질색이라 한다. 그가 집권하고서 여의도 정치인을 가급적 기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정무형보다는 실무형을 선호했다. 정두언과 박영준 중 누굴 더 신뢰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4] 인수위 사람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130</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130</guid>
            <pubDate><![CDATA[Sun, 13 Jan 2013 14:4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13/1358056138501300.jpg"/>  ▲ 이명박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식에 참석, 이경숙 인수위원장 등 인수위원들과 함께 현판을 걸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사실 &lsquo;이명박 정부&rsquo;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시작해서 인수위로 끝났다. 인수위원과 이를 돕는 전문위원, 파견 공무원까지 182명이 나선 &lsquo;매머드급&rsquo;이었고, 이명박은 이들을 두고 &lsquo;보은 인사&rsquo; &lsquo;회전문 인사&rsquo; &lsquo;낙하산 인사&rsquo;를 하는 통에 만사를 실패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인수위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이명박 정부를 장악하고 점령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lsquo;인수위 사람들&rsquo;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ldquo;아륀지(오렌지)&rdquo; 파문에다 언론사 사찰까지, 크고 작은 해프닝과 구설이 여럿 터지면서 이명박 정부가 희화화되기 시작한다.&lt;4&gt; 인수위 사람들이명박 대통령은 &lsquo;점령군(?) 인수위&rsquo;의 수장(위원장)으로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을 임명했다. 10여 명의 위원장 후보가 있었던 것을 반추하면 &lsquo;아주 이례적&rsquo;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 후보들이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위원장은 체급이 조금 달렸기 때문이었다.16대 한나라당 대선 캠프의 원로회의 격이자 이명박의 멘토 모임인 &lsquo;6인회&rsquo; 멤버들 중 최시중 전 한국갤럽 회장, 박희태 경선 선대위원장, 김덕룡 의원, 이재오 의원이 거론됐다. 박관용 선대위 상임고문(전 국회의장),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선대위 일류국가비전위원장), 안상수 원내대표, 이방호 사무총장,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도 당내 인사로 거론됐다. 윤여준 정운찬 손병두 어윤대 안병만 박세일 윤진식 한승주 류우익 송정호 이석연 등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인물 후보군도 많았다. 이명박의 고심이 얼마나 컸을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하지만 이명박은 여러 후보 중 &lsquo;누가 가장 적임자냐&rsquo;가 아닌 &lsquo;누가 되면 가장 말들이 많을까?&rsquo;를 염두에 둔 듯 후보 한 명 한 명을 솎아내게 된다. 그게 실수였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해야 하는데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모양새였다. 한승주 류우익 송정호 등은 본인이 고사했다. 어윤대는 같은 고려대 인맥이라는 점, 정운찬은 &ldquo;정체가 모호하다&rdquo;(대선전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후보가 정 전 서울대 총장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 최시중은 70세의 고령이었고, 박희태는 국회의장직을 원했으며, 박세일은 당내 반대가 극심했다는 점이 고려됐다. 이명박 주변인의 입김도 작용했지만 그 스스로 정치인 출신 위원장은 &lsquo;친정체제&rsquo; 내지는 &lsquo;당권장악&rsquo;이라는 비판의 소지까지 있어 부정적이었다 한다. 결국, 이명박은 이경숙 손병두 안병만 중에 골랐는데 이경숙은 &lsquo;대학 CEO&rsquo;로서 개혁성과와 업무능력에 좋은 점수를 받았다. 손병두는 재계와 학계를 두루 거쳤다는 장점도 있지만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출신으로 &lsquo;친재벌적 이미지&rsquo;가 강했다. 하지만 이경숙의 낙점은 &ldquo;같은 소망교회 장로(이명박)와 권사(이경숙)로서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게 큰 배경 아니었겠느냐&rdquo;는 반응을 낳으면서 &lsquo;고소영&rsquo; 논란의 시발점이 된다. &lsquo;빨리빨리&rsquo;라는 초고속 성장 기류 속에서 &lsquo;건설통&rsquo;으로 큰 이명박은 인수 작업도 재촉했다. 2007년 12월 27일, 대선이 불과 8일 지났을 때 이명박은 인수위를 발족했다. &ldquo;일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정해 중요한 일은 될 수 있으면 1개월 내에 마무리해달라&rdquo;고 주문한다. &lsquo;박근혜 정부&rsquo;가 해를 넘겨 2013년 1월 4일 인수위원을 발표한 것과 대조되는 모양새다. 박근혜 당선인은 &lsquo;소규모 실무형&rsquo;을 모토로 삼고 있다.이명박 인수위는 2008년 1월 3일 금융감독위의 업무 보고를 받고서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현행 소유 10%, 의결 4%)를 높여주는 &lsquo;금산분리 완화&rsquo; 방안을 제시했다. 이틀 뒤인 5일, 공정거래위원회 업무 보고 이후에는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폐지하고 지주회사 요건을 푼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친기업을 넘어 친재벌적이란 평가로 이어졌다. 금산분리 완화는 특히 삼성 총수 가문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이었는데 &lsquo;기업하기 좋은 나라&rsquo;라는 구호 속에서 민생보다는 기업환경을 우선시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 사실 이명박의 인수위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두는 &lsquo;트리클 다운(물 흐름)&rsquo; 효과를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보는 듯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대기업이 잘돼야 중소기업의 일거리가 늘고 전체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명박의 논리였고 계산이었던 것이다.&ldquo;&lsquo;프레스 후렌들리&rsquo;하게(언론친화) 하겠다 했더니 모든 신문 방송에 &lsquo;프레스 프렌들리&rsquo; 이렇게 써놨거든요. (미국에서) &lsquo;오렌지&rsquo; 달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lsquo;아륀지&rsquo; 이러니까 &lsquo;아 아륀지&rsquo; 이러면서 가져오더라고요.&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13/1358056138501301.jpg"/>  ▲ 이경숙 위원장이 이명박 당선인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이 한마디가 이 위원장을 &lsquo;아륀지 이경숙&rsquo;으로 만든 대목이다. 전국은 &lsquo;영어 공포&rsquo;에 벌벌 떨게 됐고 전문가와 학부모의 아우성격 인터뷰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진다. 이 위원장은 1월 22일 &lsquo;대입 3단계 자율화방안&rsquo;을 브리핑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일반 과목 수업도 영어로 한다는 &lsquo;영어 몰입 교육&rsquo; 추진을 시사했다. 고교 영어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하고, 수능에서 영어 과목을 제외하고 영어능력평가시험을 도입하며,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조기 영어 교육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ldquo;차라리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rdquo; &ldquo;영어가 우리의 국어?&rdquo;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28일 인수위는 긴급 브리핑을 열고 &ldquo;영어 몰입 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할 계획은 없다&rdquo;고 한발 물러선다. 하지만 이동관 대변인은 &ldquo;국외 유학생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활동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rdquo;이라고 덧붙이면서 &lsquo;선무당 인수위&rsquo;로까지 번지게 된다. 학교 현장에 대한 인수위의 현실 파악이 부족했고, 우리 교육에서 영어가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는데 따른 부작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여기에다 이명박 인수위가 언론사를 &lsquo;사찰&rsquo;했다는 파문이 일면서 전국 언론을 적으로 만든다. 언론사를 은근히 엿보면서 언론인의 정치적 성향과 동향을 파악하고, 우호 언론인지 비우호적 언론인지 분류했던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lsquo;1도 1사&rsquo; 체제로 언론을 통폐합하고 이를 관리하면서 한국 언론에게 사찰은 분노와 공포의 트라우마를 가져왔다. &lsquo;죽은 언론의 시간&rsquo;이 부활한 것이었다. 2008년 1월 12일 자 모 일간지는 문화관광부에서 파견된 인수위 전문위원이 문화부에 공문을 보내 언론사 사장단과 편집국장, 정치부장, 문화부장은 물론 광고주, 산하 단체장 등의 약력과 성향을 보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인수위는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 몰아갔다. 문화부가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 10대 광고주와 광고회사 매출자료까지 인수위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고, 사찰행위는 일부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가 광고를 통해 언론을 압박하려 한다는 설에 무게가 실렸다. &ldquo;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rdquo;이라며 여러 인수위 인사들이 이야기했지만, 언론으로부터는 이미 신뢰를 잃은 뒤였다.이명박 인수위는 20여 개의 국정 전략 목표와 200여 개의 세부 국정 과제들의 실익을 점검하면서 &lsquo;2008~2012&rsquo; 시나리오 작성을 마쳤다. 하지만 그들은 차기 정부로 가져가서는 안 될, 꼭 버려야 할 살림살이에도 신경을 썼는데 특히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 하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자체 규명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또 일었다. 특별위원회나 조사팀은 아니지만 인수위 일부 분과에서 기존 업무와 별개로 &lsquo;권력형 비리&rsquo;와 관련한 정보수집과 검증을 진행했다는 것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과 각 기업 등에 투입된 공적자금과 대북지원 사업,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등을 들여다봤다는 것이 골자다. 인수위가 한나라당이 대선을 앞두고 구성한 &lsquo;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rsquo;에서 수집된 팩트를 확인하는 정도였다고 해명했지만 &lsquo;정치적 보복&rsquo;이란 오해는 꽤 오래갔다.이명박은 정치보다 경제를 우선시했다. 행정 경험은 있었지만 정치 경험은 적어 &lsquo;풋내기 정치인&rsquo;이란 비판은 임기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기업 조직이 정부보다 혁신적&middot;효율적&middot;생산적이라는 판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제와 비교해 정치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라 생각했으니 실이 꼬여도 풀 길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이후 사사건건 정치권과 갈등을 빚었던 것도 이명박이 모든 것은 경제로 풀 수 있다고 자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 &lt;신화는 없다&gt;에서 &ldquo;군대가 20세기 중반 가장 앞선 조직이라면, 기업은 20세기 후반 이후를 이끌고 있는 프런트 조직&rdquo;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는 정치인 중심이었고. 노무현은 학자 중심인 반면 이명박은 경제전문가 중심으로 꾸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됐다.그렇다면 인수위 사람들을 한번 보자. 삼성 등 대기업 출신 인사가 많았다. 재경부나 금융감독원 출신 관료나 학자 가운데 미국식 &lsquo;친기업 시장주의자&rsquo;로 분류되는 사람도 포진했다. 사공일이나 엘던 두바이 회장이 대표적이다. 강만수나 윤증현도 대표적인 시장주의자들. 삼성 출신의 황영기나 지승림은 투자유치 TF에 배치됐다.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을 인수위원장 자문위원으로 뒀다. 미국에서 경제학 석&middot;박사 과정을 마친 관료나 학자, 정치인이 많았다. 미국식 자본주의 이론이나 시장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셈이었다. 이명박의 첫 조각에서 이동관 대변인과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등 청와대 1기 수석 중 5명이 인수위 출신이었다. 청와대 2기 수석에는 맹형규 정무수석, 정동기 민정수석, 박형준 홍보기획관 등이 중용됐다. 윤진식 곽승준 이주호 이영희 유인촌 이달곤 현인택 등도 모두 인수위 사람들이었다. 최시중은 방송통신위원장이 됐다. 조해진 권택기 백성운 강승규 등 안국포럼 출신과 김효재 진성호 박준선 조전혁은 모두 금배지를 달았다. 인수위를 넘어 &lsquo;이명박의 사람들&rsquo;이 청와대와 정부, 국회까지 점령한 것이다.최기서 언론인친재벌 논란 시발점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의도동에 들어선 것은 1979년이었다. 그해 11월 16일 회관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키로 돼 있었으나 10.26 사태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신 참석했다. 회관 준공식 이후 전경련을 찾은 대통령은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은 한 번도 찾지 않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전경련의 대표격인 4대 그룹 회장들을 국회 식당에서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단골 음식점에서 전경련 회장단을 맞이했다. 정경유착을 의식한 탓이다. 이명박은 대선 직후 9일 만에 전경련을 전격 방문하면서 관례를 깼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나 노동계 파트너인 경영자총협회 등을 두고 재벌 회장단 중심의 전경련을 첫 방문지로 잡으면서 말을 키웠다. 노동자 관련 단체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3] 경선과 대선 다리를 건너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837</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837</guid>
            <pubDate><![CDATA[Sun, 06 Jan 2013 16:5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06/1357458704498370.jpg"/>  ▲ 이명박 당선인이 대선 다음날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후 방명록을 작성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자신의 대권시간표대로 착착 준비해 온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승리가 예견돼 있었다. 이명박이 둘째 형(이상득)의 전폭적 지원으로 정치권 안팎의 인적 재산을 그러모은 덕을 톡톡히 봤다면, 박근혜는 당 대표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풋워크 하지 못하고 하세월한 탓을 톡톡히 치렀다. 하지만 후보 검증 과정에서 이명박은 깔수록 새로운 것이 튀어나와 벌거벗겨졌고, 박근혜는 드러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상처를 입지 않고 선방했다. 당시 대통령직에는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가 가장 근접해 있었으므로 둘의 &lsquo;검증 공방&rsquo;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올랐다. 그래서 더욱 이명박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2004년이다. 당시 한나라당에는 한 지붕 아래 &lsquo;헤쳐 모여&rsquo;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3선 삼총사로 회자한 &lsquo;홍&middot;이&middot;김(홍준표 이재오 김문수)&rsquo;이 소장파 리더인 &lsquo;남&middot;원&middot;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rsquo;의 &lsquo;수요조찬 공부모임&rsquo;에 맞서 &lsquo;국가발전전략연구회(국발연)&rsquo;를 창립한다. 국회의원만 48명. 당내 모임 중 몸집이 가장 컸다. 이들은 &ldquo;복수의 대권 후보를 보장해야 한다&rdquo;는 논리로 &lsquo;단일성 집단지도체제&rsquo;를 주장했다. 이대로 박근혜 대표 체제로 갔다간 &ldquo;2002년 이회창 꼴 난다&rdquo;는 논리였고, 이면에는 이명박 대권 플랜이 잠재해 있었다. 이명박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대안으로서의 이명박을 조금씩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이면을 지적하는 언론에 &lsquo;홍이김&rsquo;은 펄쩍 뛰었지만, 이재오가 2002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선거대책본부장이었고, 홍준표는 유세본부장이었음을 감안하면 무리한 추리가 아니었다. 이명박은 그때부터 당내 &lsquo;2인자&rsquo;로 부상해 박근혜의 대권행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2006년 7&middot;11 전당대회는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치러졌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lsquo;대리전&rsquo;양상이었던 탓이다. 친이계에서는 이재오가, 친박계에서는 강재섭이 나섰다. 당이 깨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일 정도로 과열됐다. 강재섭이 당 대표가 된다.당시 일화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일곱 번째 연사였던 이재오가 연설을 시작하자 연단 건너편에 있던 박근혜 전 대표가 연단 오른편 기표소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카메라 플래시가 엉뚱한 곳에서 터지면서 이재오의 연설에 흐름이 끊겼다. 박근혜의 &lsquo;자리 이동 사건&rsquo;이다. 이재오는 낙선 뒤 배신 운운하며 &ldquo;내가 원대대표를 할 때 그렇게 잘 모셨는데, 한마디로 배신행위 아니냐&rdquo;고 성을 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있는 연단 오른편으로 옮겨달라는 사진기자들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다. 촌극으로 마무리됐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정치 공방으로 비화되던 때였다. 대립은 날카로웠다.이런 첨예한 갈등과 반목은 이명박이 자초한 셈이었다. 전당대회가 있기 전 서울시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이명박은 &ldquo;개혁적이어야 할 것 같다. 보수당, 부자당, 영남당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미지여야 한다. 지난 대선의 김대업 사건 같은 공작정치를 막을 수 있는 뱃심, 야성, 개혁성을 골고루 갖춰야 한다&rdquo;며 당대표 감을 설파했다. 사실상 이재오 당 대표론에 힘을 실은 것이다. 박근혜가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지난 이야기지만, 이명박은 실상보다 많은 &lsquo;특수&rsquo;를 누렸다. &lsquo;청계천 특수&rsquo;, &lsquo;버스중앙차로제 특수&rsquo;에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으로 &lsquo;안보에 강한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rsquo;이라는 &lsquo;성별 특수&rsquo;까지. 무엇보다 먹고살기 어렵다, 일자리가 없다, 집값이 너무 올랐다는 민생 하소연이 들끓으면서 &lsquo;경제CEO 특수&rsquo;를 가장 크게 누렸다. 그가 이뤄낸 성과이기도 했지만 포장이 잘됐고, 시류에 들어맞았으며, 당시의 시대정신이 그러했다. 대세는 &lsquo;경제&rsquo;였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이명박과 박근혜는 2007년으로 넘어가면서 &ldquo;루비콘강을 건넜다&rdquo;는 말로 남이 보기에 남보다 더한 남남이 된다. 박근혜 대세론을 뛰어넘은 이명박이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압도하면서부터다. 이명박의 황제테니스 사건 등 박근혜 측의 네거티브와 검증이 본격화됐는데 지지율이 추락해 하방경직화한 박근혜 쪽에서는 벼랑 끝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 둘의 후보 검증 갈등은 결국 이명박과 한나라당 지지도가 동반추락하는 사태를 빚었고, 잘 나가던 한나라당은 &lsquo;환(患)나라당&rsquo;으로 불리게 된다.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보좌관 출신이던 김유찬 씨의 폭로 기자회견은 파괴력이 컸다. 김유찬은 이명박이 자신에게 선거법 위반에 관한 위증을 교사하며 20여 차례에 걸쳐 1억 2000만 원을 주었고, 해외 도피 자금으로 거액의 달러도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명박 측은 처음엔 &ldquo;고소하겠다&rdquo;고 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ldquo;상대하지 않겠다&rdquo;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다. 명예훼손과 무고로 고소하게 되면 위증 교사나 금전 제공 여부를 조사받아야 하는데 만에 하나 작은 것이라도 사실로 드러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분위기였다. 특히 김유찬은 1996년 총선 당시 &ldquo;개인적으로 충당한 선거 비용 1억 원을 갚아달라&rdquo;고 요구했으나 이명박이 이를 거부하자 선거 자금 의혹 등을 폭로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재산이 수백억 원대로 추정되는 이명박이 1억 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의 돈과 사람 관리가 입방아에 올랐다. 하지만 김유찬이 공개한 자료 중 일부는 진술에 일관성이 없거나, 기억에만 의존하면서 증거능력 여부 논란이 일기도 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06/1357458704498371.jpg"/>  ▲ 친박계 강재섭이 친이계 이재오를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됐다. 이종현 기자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106/1357458704498372.jpg"/>  ▲ 이명박-박근혜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진 2006년 7월 전당대회. 이종현 기자배다른 형제와 병역 면제 의혹은 그의 자서전 &lt;신화는 없다&gt;에서 출발한다. 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 씨가 1935년(당시 29세), 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목축 일을 했고, 이후 돈을 모아 반야월 채씨와 결혼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작은 형 이상득이 1935년생이다. 또 현대 입사 3년 전 이명박은 고위험 수위의 기관지확장증으로 병역을 면제받고 악성 축농증과 폐결핵을 앓았지만, 현대 입사 후 그의 체력은 불사신에 가까웠다. 술은 장사였고, 밤낮없이 일했다. 그의 건강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당시 열린우리당 윤원호 의원은 &ldquo;미국 전역 교포신문에서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lsquo;에리카 김&rsquo; 이야기가 신문마다 다 나왔다&rdquo;고 의혹을 제기했다. 에리카 김은 이명박과 서울에서 사업을 같이하다 공금을 갖고 미국으로 달아난 김 모 씨와 남매였다.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은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 씨가 열다섯 차례나 주소를 이전했다고 폭로했다. 강남에서만 열네 차례였는데 이명박도 이 부분은 시인하고 사과했다.BBK 주가 조작 사건은 다시 떠오를 가능성이 큰 진행형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경준(미국명 크리스토퍼 김)이 1999년에 설립한 회사인 BBK를 통해 주가 조작으로 수백억 원의 부당이익을 남기고 이 돈을 횡령한 것으로 김경준은 &ldquo;이명박이 BBK의 실제 소유주이며 나도 피해자&rdquo;라고 주장했다. 이명박은 자신도 김경준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특검은 김경준을 기소하고, 이명박은 무혐의 처분했다. 하지만 김경준이 2001년 12월 미국으로 도피하기 전인 2001년 7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횡령한 옵셔널벤처스 회사 자금 384억  원 가운데 200억 원가량이 10개의 국내 계좌로 송금된 의혹이 있다. 수신자 중 국내 법인은 다스(이명박의 맏형 이상은 씨 회사), 심텍(이명박 고대 후배 회사), 오리엔스(이명박 대학 동문 회사) 등 BBK에 투자한 기업들이었다.처남 김재정 씨와의 이상한 부동산 거래도 도마에 올랐다. 이명박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대지 64평과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을 1994년 12월 대부기공㈜에 팔았다는 내용인데 이 회사는 이명박의 맏형인 이상은 씨와 처남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BBK 금융 사기 사건과 관련해 이명박이 실제 소유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받는 회사이기도 했다. 시가로 땅과 건물이 32억 3000만 원 정도였다.이명박이 1977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16일대 임야 37만여 평을 샀다가 1982년 7월 처남에게 팔았다는 의혹도 있었는데 이 땅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할 때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당시 현대건설은 이 인근에서 대청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투기 의혹이 아니냐는 내용이 나왔다. 김재정 씨가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전국 47곳의 부동산을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는 부동산 매입 직후 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땅값이 급등한 곳이 있다는 의혹도 있었다.그런데 당시의 범여권은 가만있었다. 까도 까도 끝이 없었지만 이명박을 거세게 공격하지 않았다. 왜일까. 여권은 한나라당 본선 후보로 이명박을 원했다. 제기할 의혹이 너무 많으니 &ldquo;검증을 통해 한방이면 날릴 수 있다&rdquo;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당시 박근혜는 한 인터뷰에서 &ldquo;후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한꺼번에 바뀔 수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면 어떻게 나라를 이끌지 볼 수 있는데, 그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나는 당 대표를 지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흑색선전을 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검증돼 있다. 검증을 잘못해 대선에서 패배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rdquo;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명박은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이명박은 대선 후보 등록을 마친 2007년 11월 25일 &ldquo;국민 여러분이 오는 12월 19일 유권자 혁명을 일으켜 달라. 국민성공시대가 열리고 이명박의 실용정치, 희망정치가 시작된다&rdquo;고 목청을 높였다. 경선보다도 재미없는 밋밋한 대선을 치르고 나서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최기서 언론인MB의 재산당시 이명박은 큰 재산가였다. 소유 재산의 주류는 부동산. 이명박은 근린생활시설 2건, 상가 1건, 대지 1건, 단독주택 등 모두 5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부동산 신고가액 합계가 171억 원을 웃돌았다. 14, 15대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역임하는 동안 재산 신고 대상인 공직자 중에서는 늘 수위권이었던 그는 2006년 6월 30일 서울시보를 통해 공개된 재산등록 사항에 모두 179억 6750여만 원을 써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영포빌딩의 재산신고 가액은 62억 8700여만 원었는데 29년 전 구입원가는 4527만여 원으로 땅값이 무려 139배나 뛰었다. 이명박은 강남 요지 알짜 부동산 4건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특히 서초구 양재동 영일빌딩은 32년 사이에 1968배가 폭등해 218만  5000원에 산 것이 43억 원이 됐다. 이명박은 이 부동산의 경우 당시 &ldquo;서울시 지하철 공채 체비지&rdquo;라고 주장, 서울시가 지하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명박이 구매 요청을 받았고, 이후 정책이 바뀌어 공채 원리금 중 일부를 현금이 아닌 대지로 대신 돌려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전체 재산은 부동산 가격을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일부에서는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하면 100억 원이나 더 늘 수 있다고 주장했다. &lsquo;가차명 재산까지 8000억 원&rsquo;이라는 이야기도 회자했지만 증명되지는 못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2] 서울시장 시절]]></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55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553</guid>
            <pubDate><![CDATA[Sun, 30 Dec 2012 17:3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30/1356856751495530.jpg"/>  ▲ 청계천 복개구조물을 점검하고 있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명박은 민선 3기의 &lsquo;서울시호&rsquo; 선장이 된다. 당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은 물론 25개 구청 중 22곳을 싹쓸이하면서 순항이 예고됐다. 하지만 &lsquo;살기 좋은 경제대도시&rsquo;를 슬로건으로 한 이명박을 두고 &ldquo;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lsquo;왕 초보&rsquo;&rdquo;라는 비판도 적잖았다. 대한민국 대표 &lsquo;건설통&rsquo;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추진이 예고됐다. 그의 공약들도 대부분 &lsquo;건설&rsquo;에 초점을 맞추면서 수도 서울의 &lsquo;완전 개조&rsquo;가 예견됐다.&lt;2&gt; 서울시장 시절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명박은 당선이 확정된 2002년 6월 13일 밤, 알고 지내던 기자들과 만난다. 승리를 만끽할 새도 없이 예의 그 일사불란함으로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ldquo;서민촌인 개포동 재건축 단지의 용적률을 재검토하겠다&rdquo; &ldquo;지하철을 연장 운행하겠다&rdquo; &ldquo;종로 을지로 등 도심 주요 도로의 일방통행화를 추진하겠다&rdquo;는 등의 공약 외 시정 방침을 설명하며 지도 &lsquo;편달&rsquo; 협조를 당부한다. &ldquo;주사는 맞는 순간 잠시 아플 뿐&rdquo;이라며. 서울시장 재직 내내 그를 따라 다녔던 &lsquo;불도저 시장&rsquo;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순간이었다(뒷얘기지만 이명박은 &lsquo;불도저 리더십&rsquo;이란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개발 독재 시대의 밀어붙이기식 리더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이명박은 취임 4개월 만인 그해 10월, 서울시정 관련 계획을 마구 쏟아낸다. &lsquo;비전 서울 2006&rsquo;이라는 이름으로 마곡지구 개발, 강북 뉴타운 개발 등 &lsquo;서울시정 4개년 계획&rsquo;을 한꺼번에 내놓는다. 서울을 개조하겠다는 불도저 시장의 야심찬 계획. 그는 비판이 일자 직접 기고문을 써 일간지에 게재하기도 한다. &lsquo;개발이 아니라 균형발전&rsquo;이란 제목의 글에는 &ldquo;지역균형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변화는 고통스럽다.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민의 성원이 있는 한 서울시는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dquo;라고 썼다. 대선이 있던 그 해(2002년), 이명박의 &lsquo;비전&rsquo;은 행정 절차를 무시한, 인기를 의식한 선심성 발언이라며 당시 여당으로부터 뭇매를 맞는다. 하지만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30/1356856751495531.jpg"/>  ▲ 히딩크 전 감독이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 공적인 자리에 반바지 차림의 아들 시형 씨를 불러 기념촬영을 하게 해 논란이 일었다.사진제공=오마이뉴스사사건건 비판이 제기됐지만 실망감이 큰 사건도 여럿 있었다. 아들 시형 씨의 히딩크 감독 사진 사건, 인사 살생부 소동, 버스 지하철 요금 인상 번복 등은 무소불위의 CEO로 군림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한일월드컵 4강 진출 직후인 2002년 7월 3일, 서울시청에서 히딩크 감독에 대한 명예시민증 수여식이 열렸는데 이명박의 아들 시형 씨가 운동복과 슬리퍼 차림으로 와 히딩크 감독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논란이 됐다. 네티즌들은 이명박과 이시형 둘을 놓고 &lsquo;예의범절이 없다&rsquo;고 비판했다.사실 이명박은 &lsquo;CEO 근성&rsquo;을 쉽게 버리진 못했다. 서울시장에 이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도드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한 약점이 있었다. 자신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식의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상명하달식 건설회사에서 몸에 밴 부하(직원)를 윽박지르는 모습이 곳곳에서 연출됐다.정치적 사고도 부족했다. 각종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명박 시장의 말이 길어지면 공보 담당자가 &ldquo;다른 일정이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hellip;&rdquo;이라고 말을 잘랐다. 이명박은 &ldquo;내가 실수라도 할까봐 그러냐?&rdquo;면서, 할 말은 다 했다.하지만 이명박의 장점도 많았다. 복지나 환경, 문화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 행정은 아마추어다라는 수군거림에도 그는 &lsquo;청계천 복원&rsquo;이라는 분명한 화두를 던졌고, 해냈다. 직접 동분서주하며 &ldquo;청계천만 복원하면 우리가 투자하겠다&rdquo;는 세계 각지 투자자로부터 확답을 받아냈다. 서울시 개발 과정에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청계천 주변을 국제 금융기관과 다국적 기업을 위한 인텔리전트 인프라로 만들겠다고 했다. 관료형이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ldquo;개발시대 공사판으로 만들거냐?&rdquo;는 세간의 비판에서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이명박 스스로 그런 비판에 대해선 &ldquo;개발시대 최고 경영자로서 자신에게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가 편견을 낳고 있을 뿐&rdquo;이라고 여겼다 한다.이명박은 취임 초기부터 공무원 행태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제기한 바 있는데 종합하자면 이런 투였다. &ldquo;민간 기업에서는 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데 공무원은 시민이 낸 세금도 제대로 써야 할 데 쓰지 못하냐? 왜 책임경영 정신이 없느냐? 공공 분야에서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 내가 개조하겠다.&rdquo;그는 시청 간부회의를 오전 8시로 앞당겼고, 간부회의 때는 6, 7급 직원까지 불러 자유토론을 시켰다. 현대건설 회장 때 일과도 고스란히 지켰는데, 새벽 4시 45분쯤 기계적으로 일어나 그날 회의록을 검토하고, 운동을 한 뒤 7시에 출근준비, 지하철을 타고 시장실에 도착한 7시 30분부터는 &lsquo;30분 단위&rsquo;로 업무를 하는 식이었다. 모든 저녁 약속에 참석했고, 특히 국제행사에는 호스트로서 빠지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밤 11시나 12시쯤. 서너 시간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 때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밝혔는데 당시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에 공개된 재산은 186억 원이었다. 이에 재산 형성 과정을 묻는 인터뷰가 많았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ldquo;못 밝힐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 입사 이후 떠날 때까지 재산 관리를 회사에서 해줬습니다. 현대그룹 1년 매출이 8억 원일 때 입사해 50조 원으로 키웠습니다. 종업원이 100명 남짓에서 16만 명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 나왔으니 재산 186억 원이 너무 많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YS가 집권해 재산 많은 공직자를 막 몰아낼 때 제가 SBS에 나가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lsquo;나는 깨끗하게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희망하고, 남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다. 가난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깨끗한 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게 자본주의다&rsquo;.&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30/1356856751495532.jpg"/>  ▲ 2002년 9월 &lsquo;다시보는 월드컵&rsquo; 사진전 개막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사실 이명박의 &lsquo;야망의 계절&rsquo;은 그에게 시나리오가 있었는지, 쪽대본식으로 이뤄졌는지 알 수 없지만 꽤나 성공적이었다. &lsquo;취임 1주년: 청계천 복원 사업과 강북뉴타운 건설 착수, 2주년: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 3주년: 청계천 복원 완성, 4주년: 용산 시민공원 착공&rsquo; 순서였던 것이다. 그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해나갔다. 이명박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기업 목표(시정 목표)를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예산 절감)하며, 부하직원(시 공무원)과 함께 언제나 현장에 있되 세간(여론)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lsquo;20대 사원, 30대 임원, 40대 CEO&rsquo;가 된 그가 체화한 것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서울을 통치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닌 경영하는 모습, 그는 항상 &ldquo;쓸 수 있는 예산을 다 쓰면서 하는 사업은 어떤 시장이든 할 수 있다&rdquo;고 했다.이명박의 &lsquo;대권 길 닦기&rsquo;는 취임 2년이 지난 2004년부터 본격화한다. 당시 이명박 시장과 이재오 한나라당 사무총장,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의 커넥션 의혹이 일었다. 실세 재선 의원이자 친분이 두터운 이 총장과 홍 위원장을 지렛대 삼아 당내 우군화 정치 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쏟아져 나왔다. 본인들은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이었다.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명박은 박근혜 대세론을 의식해 &lsquo;2등 전략&rsquo;을 구사해 왔다. 2007년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으니 경쟁에 일찍 나설수록 경쟁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발언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박근혜 당시 대표를 조용히 따라 가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이명박은 강경하게 치고 나갔다. 그래서 대권 야욕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명박은 &ldquo;서울시민 70%가 반대하는데 서울시장이 가만있으란 얘기냐&rdquo;는 논리를 폈고, 박 대표가 행정수도 이전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에둘러 지적하고 나선다.이명박의 용인술은 한번 연을 맺은 사람은 치명적 결함이 없는 한 내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여의도 시절에는 정치 인사들에 대한 인맥지도를 그렸고, 서울시장 시절에는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시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개척하는 데 공을 들였다. 당시 한나라당의 좌장이었던 친형 이상득 의원은 의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항상 이명박이 거론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는다. 여의도 정가에 대한 풍향, 기류, 전망 등을 수시로 주고받았다. 정태근 정무부시장은 시 의회와 시청 출입기자들을, 조해진 정무보좌관은 이명박의 정치적 입장을 정치부 기자들에게 전달했으며, 박영준 정무 담당 국장도 가세한다. 당시에도 한나라당 소장파로 분류된 원희룡, 남경필 의원이 이끈 &lsquo;새정치수요모임&rsquo;도 이 시장 주변에서 세력 모으기에 나선다. 강만수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과 백용호 이화여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브레인 그룹을 형성해 나간다.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는 문화계 창구 역할을 했다.이명박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되는 후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lsquo;3김 시대&rsquo;와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고, 2007년 대선에서는 국민이 분명 새로운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고 점쳤다. 실행에 옮긴 것이다.최기서 언론인정주영, 박정희와의 관계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30/1356856751495533.jpg"/>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사진제공=새누리당&ldquo;사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정 회장) 아들이나 형제들도 잘 모른다. 나만 (2002년) 민자당으로 가니까 기자들이 우리 둘의 관계를 취재하기 바빴지만 정 회장이나 내 입에서 둘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그때 나는 돈을 많이 가진 기업주가 권력까지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굽히지 않을 건 굽히지 않았다. 1만 원짜리 내기 골프할 때다. 퍼팅에서 기브(컨시드)를 인심 좋게 주지 않았다. 정 회장이 기브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캐디들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내기가 끝나봐야 10여만 원 왔다 갔다 하는 정도지만 정 회장이나 나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rdquo;이명박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한다.&ldquo;박 전 대통령을 경제인 입장에서 평한다면 아주 뛰어난 지도자다. 학창시절에는 반 박정희를 외쳤는데, 재계에서 일하면서 &lsquo;이 사람이 이 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rsquo;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rdquo;최기서 언론인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 유년 시절부터 정계 입문까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28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9285</guid>
            <pubDate><![CDATA[Sun, 23 Dec 2012 17:4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최기서 언론인 ]]></author>
            <description><![CDATA[제15대 국회의 어느 날이었다. 신한국당 이명박 의원은 네 살 아래인 이재오 의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경부운하에 대한 구상을 늘어놓았다. 당시 이명박 의원은 대정부질문에서도 서울과 부산의 운송비용이 부산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이의 해상 운송비보다 많이 든다고 지적할 정도로 운하에 빠져 있었다. 토목건설 CEO 체질을 쉽게 벗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lsquo;한반도 대운하&rsquo; 구상의 시작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lsquo;4대강 사업&rsquo;으로 명명된 해상 운송 길 개척. 그때 이재오 의원은 이렇게 답한다.&ldquo;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합니다. 제가 볼 때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까 형님은 고마 대통령 하소.&rdquo;&ldquo;어? 뭐라고?&rdquo;&ldquo;형님, 대통령 하소.&rdquo;이명박 정부의 서막은 15대 국회 때 한 사담(私談)에서 이렇게 싹이 트고 있었다.&lt;1&gt; 유년 시절부터 정계 입문까지이명박(李明博:1941년 12월 19일~) 대통령의 꼬리말에는 항상 &lsquo;신화(神話)&rsquo;가 붙는다. &lsquo;샐러리맨의 신화&rsquo;로 불렸던 그는 경북 포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lsquo;청계천의 신화&rsquo;를 이룬 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 된다. 그의 5년을 대변하는 4대 강 사업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lsquo;4대 강의 신화&rsquo;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지금까지의 그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양대 축인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최고 자리에 우뚝 서 본 유일한 인물임엔 틀림없다.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이충우 씨와 어머니 채태원 씨 사이에서 5남인 이명박은 자신이 기억하기로 네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선이 쓰시마 섬 앞바다에서 가라앉아 맨몸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시장통의 가난, 그는 정말 지독한 빈곤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ldquo;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설 때까지도 떨어질 줄 몰랐다&rdquo;고 썼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명박은 영덕, 흥해, 안강, 곡강 등 포항 근처의 장터를 돌며 아버지의 옷감 장사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무덥고 지루한 여름. 귀애 누이가 칭얼대던 막내 상필이를 등에 들쳐 업고 마당에 나가 달래던 사이 전투기가 투하한 포탄에 목숨을 잃는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정신없이 산으로 달려가 쑥을 캐어 와선 누이와 동생의 온몸에 바르면서 기도를 올린다. 너무 가난해서 약을 구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명박은 가난 속에서도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매일 새벽 4시에 아이들을 깨워 새벽 기도를 올렸다. 공부를 잘했던 큰 형 상은과 집안의 희망이었던 상득은 공부에 전념했지만 이명박은 부모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이웃에 경사나 불상사가 있으면 봉사를 하러 가야 했다. 그 어떤 대가도 받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가난해도 자존심은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머니의 국화빵과 뻥튀기 장사를 도왔는데 하필 여고 앞이었다. 그는 밀짚모자를 구해와 푹 눌러 쓰고 쌀을 튀겼다. &ldquo;사내 녀석이 뭐가 부끄럽다고 이 한겨울에 밀짚모자냐?&rdquo;이명박은 똑똑했다. 포항중학교에서 줄곧 2등이었고, 집안의 반대를 설득해 동지상고 야간반에 다닌다. 3년 내내 주&middot;야간 통틀어 1등을 했다.&ldquo;그때를 생각하면 명박이가 늘 들고 다니던 단어장이 떠오른다. 영어 단어와 숙어 사전을 가지고 다녔는데, 궂은 날 장사를 하면서도 볼 수 있도록 표지를 비닐로 두껍게 입혀 놓은 것이었다.&rdquo;(동지상고 동기 김창대),&ldquo;명박이는 이른 새벽부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레에 채소를 싣고 포항의 골목골목을 배회하며 채소를 팔았다. 남다른 성실함은 한 학년 위인 우리 반에도 유명했다.&rdquo;(동지상고 동창 이무진)이명박의 부모와 누나는 둘째 형 상득의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한다. 이명박과 여동생만 포항에 남는다. 부모님이 쌀값은 보냈지만 한창 커갈 때였다. 폐 종이로 봉투를 서른 개 만들어 양식을 똑같이 넣고는 하루에 하나씩으로 때웠다. &ldquo;꼭 죽을 것만 같았다&rdquo;고 이명박은 회고한다. 고3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으로 이명박도 서울을 찾는다. 전체 수석자에게 주는 재단 이사장 상을 친구인 김창대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하고서였다.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중고 수험서를 사 공부한 끝에 1961년 고려대 상대에 합격한다. 대학 내내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학비를 마련해 대학을 다녔다.이명박은 허약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갖은 고생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5&middot;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듬해 이명박은 자원입대했는데 논산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ldquo;너 인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 도대체 나이 스물밖에 안 된 놈이 몸을 어떻게 굴렸기에 이 모양이야?&rdquo;군의관은 이명박을 돌려보냈다. 기관지 확장증에 축농증이 겹쳐 있었다.그 시대 수많은 대학생이 그랬듯 이명박의 대학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혔고 4학년 때는 한&middot;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한다(이곳에서 중앙대의 이재오와 조우하지만 깊은 관계로는 발전하지 않는다).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을 &lsquo;거듭나게 한&rsquo; 시간으로 회고한다. 전공 서적 이외의 책들을 읽었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존에 매달려 왔던 지난 20여 년을 되돌아보고 인간과 사회를 생각했다. 당시 면회를 왔던 어머니는 이명박에게 &ldquo;나는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rdquo;고 했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그가 석방된 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난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23/1356252553492850.jpg"/>  ▲ 현대건설 재직 시절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하는 모습. 정주영 회장의 대권도전을 그가 여러 차례 만류하면서 둘 사이는 멀어졌다.이명박의 신화 쓰기는 그 이후부터다. 학생운동 경력으로 지원하는 기업마다 번번이 떨어진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학생운동의 전력을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했으며 사회의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ldquo;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rdquo;그는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 96명의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1965년 6월 면접에서 정주영 사장이 이명박의 이력서를 보다 묻는다.&ldquo;건설이 무엇이라 생각하나?&rdquo;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이명박은 &ldquo;창조라고 생각합니다&rdquo;라고 답한다.&ldquo;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rdquo; 이 말을 들은 정 사장은 &ldquo;요즘은 말만 번지르르한 건달들이 많아&rdquo;라고 하지만 그를 합격시켰다.이명박은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빠따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의 경리사원으로 가는데 당시 임금을 받지 못한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금고를 지킨다. &ldquo;경리 사원 이명박이 목숨을 걸고 혼자서 금고를 지켜냈다&rdquo;는 말이 본사에 퍼진다. 말단 사원의 무용담이 신화로 증폭됐고, 그는 작은 영웅이 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정 사장이 타이 현장에 자주 머물렀다. 이때 이명박은 당시 사업이 큰 수익이 나지 않는 손실 사업임을 입증했는데 그 자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다. 정주영의 &ldquo;능력 우선주의&rdquo;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2년 만에 대리가 되고 29세에 이사가 된다. 사장에 오른 것은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로, 입사 12년 만이었다.이명박은 1970년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윤옥 씨를 만나 결혼했다. 부인 김 씨는 &ldquo;부모님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정 큰오빠가 주위의 도움 없이 혼자서 현대건설 이사까지 된 사람이라며 부모님을 적극 설득했다&rdquo;고 밝힌 바 있다. 이명박은 결혼식 당일에도 &ldquo;토요일이라 오전 근무를 하고 나와야 한다&rdquo;고 했다 한다.이명박은 이후 현대건설 입사 23년 만인 1988년 회장이 된다. &lsquo;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rsquo;의 신화를 쓴 순간이었다. 당시 그는 공휴일도 없이 하루 18시간을 일했으니 남들보다 승진이 빨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1990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대건설의 1000억 원 탈세 의혹이 제기되면서 회장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1991년 12월 31일이었다.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첫 가족여행이었다. 그리고 1992년 1월 3일 서귀포에서 돌아온 다음 날 그는 회사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이명박 회장은 그와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정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을 세 번 만류했다. 그의 정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인 반발 심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쓴다.&ldquo;지연이나 학연 등 사적인 감정이나 관계로 사람을 써서 재벌 총수가 된 사람은 없다. 중소기업에서 대재벌이 된 경우는 예외 없이 사람을 가장 과학적으로 쓴다. 사적 감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나 또한 정주영 회장을 위해 일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오직 일이 있어 그곳에 있었다. 기업을 떠난 사람들은 대개 그 기업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에 매달린 결과이다. 현대와 정 회장에 대한 원망이나 실망, 섭섭함이 없다.&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23/1356252553492851.jpg"/>  ▲ 김영삼의 러브콜을 받아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사진제공=새누리당1992년 이명박은 정치인의 길을 택했다. 정주영 회장 곁에서가 아니라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대표 김영삼 전 대통령 옆에서였다. &ldquo;우리 당 전국구에 전문경영인이 한 사람도 없다. 이 회장이 필요하다&rdquo;는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민자당 후보로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명박은 그러나 재산공개 과정에서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국민적 비판을 받는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벌이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1996년 총선거에서 우리나라 &lsquo;정치 1번지&rsquo; 종로에서 노무현 통합민주당,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붙어 승리한다. 정치계에서도 그는 오뚝이로 발돋움한다.최기서 언론인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223/1356252553492852.jpg"/>   김윤옥(金潤玉:1947년 3월 26일~) 여사는 1947년, 공무원 출신인 부친 김시구 씨와 모친 최덕례 씨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대구로 왔다. 대구 수창초, 대구여중, 대구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보건교육과를 졸업. &lsquo;메이퀸&rsquo;에 오를 정도로 미모가 빼어났다. 김 여사 오빠와 이명박 대통령의 고교 은사의 소개로 이명박을 만났다. 당시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이명박은 김 여사와의 데이트를 수차례 펑크 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김 여사의 관상이 좋아 이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이야기도 있다.최기서 언론인 ]]></description>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