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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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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Wed, 11 Sep 2013 09:06:00</lastBuildDate>
        <pubDate>Wed, 11 Sep 201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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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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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 공화국 - [마지막회] 계파갈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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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1 Sep 2013 09:06: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문민정부 이후 지금까지도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에게는 &lsquo;소통령&rsquo;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가 문민정부 2인자로, 국정농단의 배후로 거론되며 비난받은 것은 비단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론조사 연구소를 운영하며 총선의 컨트롤 타워를 자처한 것과 한보청문회로 대변하는 야당의 공세 역시 원인이 됐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자신이 타깃이 된 또 다른 이유로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계파 갈등도 한몫했음을 밝힌다. &lsquo;YS공화국&rsquo; 마지막회, 김현철 교수의 못다 한 이야기를 회고 형태로 정리했다. <img alt="1990년 2월 15일 민자당 현판을 함께 건 박태준, 김종필, 김영삼 최고위원. 3당 합당은 계파 갈등이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11/1378857981631900.jpg"/> 내가 문민정부 2인자로 비친 것은 야당의 공세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 이유는 집권여당 내 계파 갈등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YS는 1990년 3당합당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통합의 후유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갈등을 만들었다. 민주자유당은 노태우의 민정계, 김종필(JP)의 공화계, YS의 민주계라는 세 가지 큰 세력이 합쳐진 것이었기에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가 되기는 어려운 정당이었다.&lsquo;김현철&rsquo;이 이들의 타깃이 된 것은 사실 3당합당 이전부터였다. 내가 처음으로 YS로부터 정치적 동료로 인정을 받았던 것은 &lsquo;황색바람&rsquo;을 예견했을 때부터였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제1야당인 민주당은 1987년 대선 패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리멸렬했던 반면 평화민주당은 재야인사를 적극 영입하며 쇄신을 꾀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여론의 흐름도 DJ의 평민당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던 나는 누구보다 먼저 &ldquo;민주당이 평민당에게 제1야당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겠다&rdquo;는 분석을 내 놨지만 그때마다 당내 시선은 곱지 않았다. 왜 바깥에서 분란을 조장하느냐는 것이었다.이런 시선은 3당합당 직후에도 계속됐다. 초창기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계 세력이 가장 컸고 뒤를 이어 민주계와 공화계 순이었다. 하지만 YS를 주축으로 한 민주계가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가며 급격히 세를 불렸고 결국 문민정부 탄생의 주축 세력이 됐다. 이때부터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이 본격화됐다.문민정부 초반 강력한 사정 개혁은 당내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을 샀다. 슬롯머신 비리, 율곡비리 사건, 동화은행장 비리 수사 등으로 여당 내 민정계나 공화계 출신 인사들이 많이 다쳤기 때문이다. 특정인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울분이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이후 YS가 민주계 인사들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시선은 끊이지 않았다. 계파 갈등에 관해 이렇다 할 반성과 자구책 없이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식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눈길이 나에게까지 왔다.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묻을 수는 없으니 가장 가까운 가족인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img alt="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 손명순 여사, 김현철 씨가 거제도 선영을 찾은 모습(위). 아래는 국민회의-자민련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 서명식."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11/1378857981631901.jpg"/> 당내 소수세력으로 전락한 공화계는 공화계대로 발목을 잡았다. 집권 이후 JP는 내각제 개헌이 아니면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없다는 생각으로 지속적으로 개헌을 요구했다. 내부적으로는 이번 정권에서 개헌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막무가내였다.따지고 보면 내각제 합의가 파기된 것도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세력이 대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바람에 YS로서는 파기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3당합당 조건으로 물밑 합의가 오간 것이 다 알려진 만큼 국민을 설득할 명분도 없었다.사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둔 JP의 탈당은 울고 싶은데 주위 사람들이 뺨을 때려준 격이 됐다. 자유민주연합과의 분당은 나에게는 기회로 여겨졌다. 민주자유당이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으로 당을 바꾼 것은 선거를 앞두고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화계와 민정계 일부가 사라지면서 당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물론 1년 간격으로 &lsquo;지방선거-총선-대선&rsquo;이 연달아 있었기에 각 정파 이해관계가 얽힐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총선 때는 공천을 받아야 하니 다 같이 화합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총선이 끝나고 곧바로 대선으로 직행하려는 욕심은 또 다시 당의 균열을 부르고 말았다. 민정계가 민주계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이회창 당 대표와 손을 잡는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 선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안 좋은 조합이 된 셈이었다.당내 계파 갈등은 정권재창출 실패로 귀결됐다. 여당은 JP의 탈당과 지방선거 참패로 인해 정치권에 완전히 복귀한 DJ에게 내내 주도권을 빼앗겼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물론 DJ 쪽에서는 지방선거 이전서부터 아태재단을 만드는 등 복귀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전면적 복귀를 꿈꿀 수 없는 분위기였다. 새정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야권은 총선 직전 DJ가 복귀하지 않으면 대권에 승산이 없을 것으로 본 것일 뿐이다.지금 정치권도 여권에서는 개헌을, 야권에서는 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 호시탐탐 의회주의를 망가뜨리고 정치적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되짚어본 &lsquo;YS 공화국&rsquo; 비화민중당 출신 영입 김현철 입김 작용 <img alt="왼쪽부터 김문수 지사, 이재오 의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11/1378857981631902.jpg"/> 문민정부는 32년의 군사 정권을 청산시키고 출범한 민주정부였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마무리는 아름답지 못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이끈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전두환&middot;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보다 낮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의아한 대목이다. YS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와의 인터뷰를 되짚어 봤다.하나회 숙정을 빼고 문민정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현철 교수는 &lt;일요신문&gt;과 첫 인터뷰에서 &ldquo;하나회 숙정은 측근 누구도 YS의 정확한 의중을 꿰뚫지 못한 &lsquo;1인 기획&middot;실행 작전&rsquo;이었다&rdquo;라고 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YS는 거사 직전 힌트를 줬다. 군 인사 발표가 있기 3일 전인 1993년 3월 5일, YS는 육사 49기 졸업식 축사에서 &ldquo;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rdquo;고 말했다. 당시 축사는 육사 측에서 준비하는 관례를 깨고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공직자 재산공개를 앞두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YS가 몸가짐을 당부하며 들려준 일화는 오싹했다.&ldquo;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 척결을 위해 본보기로 삼은 사람이 바로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퍼지자 장개석이 집을 급습해 수색을 해 봤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일 이후 장개석은 며느리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바로 권총이 든 상자였다.&rdquo;그런가 하면 김현철 교수는 &ldquo;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인선에 깊숙이 관여했다&rdquo;는 그간의 소문을 적극 부인하면서도 &ldquo;1992년 대선 때 동숭동팀을 이끌었던 선거기획자 전병민과 임기 초반 청와대 사정팀을 담당한 이충범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rdquo;고 털어놨다. 15대 총선에서는 &ldquo;컨트롤 타워를 자처했다&rdquo;고 밝히기도 했는데 &ldquo;이회창 전 총리를 당으로 영입해 총선을 맡기자&rdquo;는 것도 본인 아이디어였음을 고백했다.지면에 싣지 못했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 정태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 이른바 민중당 출신 인사를 당으로 영입한 과정에서도 김 교수의 입김이 미쳤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11/1378857981631903.jpg"/> &ldquo;민중당 출신의 영입은 당내 반발이 많았다. 좌파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수 집권당에 편입되는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스펙트럼 넓히는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당선 가능성에 주목했다. 개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여당 공천을 받아 수도권에 나오면 당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비슷한 선거 전략이 되풀이되곤 한다.&rdquo;이듬해 15대 대선은 &ldquo;질 수 있는 선거에서 졌다&rdquo;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에 이회창 후보에게 당 대표를 맡긴 것은 YS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전하며 &ldquo;사실 YS는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직을 제안하기 전 이한동 전 총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동 전 총리 역시 대권주자였기에 본인의 출마를 위해 YS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rdquo;는 비화를 공개했다.한편 1995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남다른 도전정신도 눈에 띈다.&ldquo;결국 고배를 마셨지만 나에게 끝까지 후보 경선을 요구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서울시장 경선에서 당내 입지로는 상대 후보인 정원식 전 총리와 싸움이 안 됐다. 그럼에도 YS와 내가 휴가를 보내던 청남대까지 전화해 경선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패기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는데 대통령까지 됐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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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2] YS는 못 말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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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4 Sep 2013 09:3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한국 정치사에 가장 화제를 몰고 다닌 정치인이었다. 최연소이자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었음은 물론, 통영중학교 재학 시절 하숙방에 &lsquo;미래의 대통령 김영삼&rsquo;이라고 적어놓았다는 일화는 전설에 가깝다. 하나회 청산의 주역으로, 때로는 IMF 사태의 주범으로, 그는 임기 중 최고와 최저 지지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대통령이다. 최초로 현역 대통령을 풍자한 유머집 &lt;YS는 못 말려&gt;는 출간 한 달 만에 35만 부가 팔려나가기도 했다. YS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가 문민정부 당시 YS에 관한 에피소드를 처음 공개했다. <img alt="1993년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과 새 정부 각료들이 청와대에서 칼국수 점심을 함께하는 모습. 사진출처=94보도사진연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04/1378255197627740.jpg"/> #1. 청와대 불상이 사라졌다?YS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에서 우리 식구들과 주말 예배를 보고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 쪽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 성수대교 참사와 충주 유람선 화재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ldquo;기독교 신자인 YS가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경내 불상을 치워버린 탓&rdquo;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청와대 관저 뒤편 산책로에는 조그만 불당이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 사람들도 그곳에 불상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하지만 소문이 끊이지 않자 YS는 조계종 고승을 초대해 직접 확인까지 시켜줬다. 이들은 &ldquo;불상이 미남형에 단청도 잘되어 있다&rdquo;며 흡족해하며 나갔다. 하지만 며칠 뒤 &ldquo;불상이 너무 새것 같다. 우리가 오기 직전 부랴부랴 만든 것 같다&rdquo;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종교 문제는 임기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YS가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 충현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다. 대통령이 교회에 오니 경호상 문제로 문마다 금속탐지기를 설치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교회에서 검문을 받게 되니 교인들에게 피해가 간 셈이었다.이후에는 청와대 경내에서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충현교회 신성종 목사가 직접 청와대를 찾아 예배를 봤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기독교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종교는 물론 종파를 초월한 자리인데 왜 자기 교회 목사만 부르냐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청와대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회까지, 각 종파 교회 목사를 돌아가면서 부르기 시작했다.그러자 이번에는 &ldquo;왜 대형교회 목사만 부르느냐&rdquo;는 반발이 나왔다. 일요일 조찬예배를 위해 목사를 선정하는 게 일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청와대 참모진들은 교회 크기는 물론 지역 안배에까지 신경 쓰며 목사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영남 지역에서 한번 오면 그다음에는 호남 지역 목사를 부르고 그다음에는 충청 지역 목사를 부르는 식으로 이어졌다. YS로서는 본의 아니게 전국 각지의 유명한 목사들을 한 번씩 다 만나본 셈이 됐다.YS가 꼭 찾고 싶어 한 목사도 있었다. 바로 결혼식 주례를 봐 주신 목사였다. YS는 1951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문창교회 담임목사가 아닌 진해에 있는 다른 유명한 목사에게 부탁했던 터였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주례를 보기로 한 목사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는 휴대폰은커녕 전화도 별로 없던 전쟁 상황이었기에 무리도 아니었다.이에 YS는 급한 대로 &ldquo;혹시 하객 중 목사님 안 계신가요?&rdquo;라고 물으니 제일 앞줄에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이 &ldquo;제가 목사입니다&rdquo;라며 손을 들었다고 한다. 즉석에서 주례를 구한 것이다. 이후 연락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남아 있던 YS는 당선 이후 그를 수소문해 찾았으나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2. 조깅은 YES, 골프는 NO <img alt="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함께 조깅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사진출처=94보도사진연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04/1378255197627741.jpg"/>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도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두 대통령은 조깅을 취미로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어 하루 시간을 내 청와대 내 녹지원에서 조깅을 하기로 했다. 클린턴 대통령과 조깅을 앞두고 있던 YS는 당시 공보비서관인 박진 전 의원에게 &ldquo;니는 그 몸으로 뛰면서 통역이 되겠나. 살 좀 빼라&rdquo;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 전 의원은 실제로 7~8㎏를 빼고 나타나 참모진들을 놀랬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통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YS가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듯 전력 질주해 클린턴 대통령을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 차이를 벌려 앞서 나갔다. 당시 클린턴은 40대, YS는 60대 후반이었는데 아마도 체력을 좀 과시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04/1378255197627742.jpg"/> YS는 조깅을 무척 좋아하셨던 반면 골프에 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모두 골프를 즐겼다면 YS는 임기 중 한 번도 골프를 치지 않았다. 개혁 과정에서 대통령이 골프나 치러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취임 직후 청와대 참모진에게도 한때 골프금지령을 내려졌다.당시 청와대에는 골프연습장이 있었다. 연습장까지는 아니지만 북악산 산책로 입구에 티박스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골프공을 북악산 쪽으로 냅다 날리며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물론 공을 주워오는 건 경호실 사람들의 임무였다. 이런 사정을 들은 YS는 &ldquo;군주 시대도 아니고 이기 뭐꼬&rdquo;라며 경내 연습장을 없애버렸다.그런 YS도 야당 시절에는 간혹 골프를 즐겼다. 1990년 삼당통합 성사 직후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한 골프 회동은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날 YS는 샷을 날리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는데 평소 연습도 안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승부욕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날 이후 YS가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3. YS와 보신탕YS 하면 조깅과 함께 흔히 칼국수를 떠올린다. 실제로 YS는 칼국수를 즐겼고 청와대 오찬에서도 칼국수가 나오는 날이 많았다. 이를 대통령 면전에 대고 불만을 토로한 이가 있었는데 마지막 개성상인 한창수 회장이다.한 회장은 서울 을지로에서 개성상회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정치인들에게 조건 없이 자금을 빌려주며 후원하던 양반이었다. 항상 백구두에 백바지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영락없는 멋쟁이였다. YS가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도 원래 입던 복장 그대로 왔는데 마술하는 사람이냐며 청와대 경호실에서 당황할 정도였다.청와대에서 왜 칼국수를 내느냐며 역정을 낸 한 회장이 주식처럼 매일 먹던 음식이 보신탕이었다. 나도 이분 덕분에 처음 보신탕을 먹게 됐다. YS가 가택에 연금돼 있을 당시 김덕룡 실장을 통해 항상 의문의 음식이 공수되었는데 한 회장이 보내는 것이었다. 어느 날 YS는 대학생이던 나에게 칠면조로 만든 수육이니 한 번 먹어보라며 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신탕이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주일이 지나자 그 맛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YS 측근들은 보신탕을 칠면조로 부르곤 했다.마지막으로 YS야말로 진정한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YS는 호적에는 1927년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는 어머니와 같은 1928년생이다. 출생신고는 1929년에 했다. 당시에도 만 24세부터 국회의원 자격이 주어졌는데 YS는 출마를 앞두고 호적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1년 차이는 정정이 힘들다고 해 1927년생이 됐다. 처음 국회의원 출마 때 상대 후보 진영에서 출생신고를 근거로 &ldquo;YS는 24세&rdquo;라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YS는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손명순 여사 이야기&ldquo;어머니는 진정한 내조의 여왕&rdquo; <img alt="1999년 거제도 선영에 성묘 후 YS 부부가 산을 내려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04/1378255197627743.jpg"/> YS 부인 손명순 여사는 정치부 기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영부인이었다. 지금도 그가 끓여 준 &lsquo;상도동 멸치 시래깃국&rsquo;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손 여사는 YS 당선 이후 &ldquo;부인이 자주 나서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rdquo;며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김현철 교수 인터뷰 중 손 여사 부분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어머니 손명순 여사는 흔히 &lsquo;그림자 내조&rsquo; 스타일로 기억된다.&ldquo;실제 내성적인 성격이신데 정치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 외로운 청와대 생활에 유일한 낙이 꽃을 가꾸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텃밭을 따로 만들어 배나무 감나무를 심기도 했는데 감 수확 때가 되면 청와대에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rdquo;-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ldquo;아버지는 서울대 철학과 4학년, 어머니는 이화여대 법학과 4학년이었다. 당시 장택상 총리 비서로 있던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중매인과 마산까지 갔다. 마산의 가장 유명한 집안 세 여인을 봤다는데 어머니가 맨 마지막이었다. 중매인이 첫 번째 두 번째에서 아버지를 지치게 만든 뒤 가장 괜찮은 어머니를 마지막에 만나도록 나름의 전략을 짠 것이다.&rdquo;―집안과 집안의 만남인 듯하다.&ldquo;외가가 마산에서 제일 큰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다. 외가에서 첫 선거 때 사위를 도와준답시고 큰 배에 고무신을 가득 싣고 마산에서 거제까지 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선거법에 걸리는 것이었기에 YS가 역정을 내 그대로 돌아갔다더라. 그 일 이후 아버지가 한동안 처가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rdquo;―정치인들에게 가족들의 내조가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ldquo;내가 아버지 담당이라면 어머니는 집사람 담당이었다.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일은 집사람이 다 맡았다. 특히 선거 때 절에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전국 각지에 이름난 절은 다 가본 크리스천이 됐다. 생각해보면 야당 대표 시절서부터 뒷바라지를 많이 하셨다. 상도동계 사람들이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면 싫은 기색 없이 밥도 주고 용돈도 쥐어 주고는 했다. 최형우 전 장관은 &lsquo;나는 YS계가 아니라 명순 여사 계보&rsquo;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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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1] 제15대 대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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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8 Aug 2013 09:14: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97년 제15대 대선은 좀처럼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에 맞선 신한국당 잠룡들의 경쟁, &lsquo;준비된 대통령&rsquo;임을 강조하고 마지막 도전에 나선 DJ(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이인제 전 경기지사의 독자 출마 과정에서 여론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최후의 승자는 DJ의 몫으로 돌아갔다. 문민정부로서는 집권여당의 분란을 제어하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정권재창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선거 일선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ldquo;쉽게 이길 수 있는 선거에서 졌다&rdquo;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img alt="1997년 7월 2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 김영삼 대통령(오른쪽)이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이회창 대표의 손을 들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28/1377648868624280.jpg"/> 1997년 대선은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진 경우다. 개인적인 어려움에 부닥친 나에게는 정치권에 대한 환멸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해 초만 해도 여론의 흐름은 신한국당에서 누가 나서든 DJ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신한국당 안에서는 여러 후보가 난립했고 당 지도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다.대선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후보에게 있었다고 본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회창 후보는 집권여당의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앞에서 밝혔던 대로 4개월 만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그를 당에 영입한 것은 내 생각이었다. 당시 이회창 전 총리는 &ldquo;문민정부에서 초대 감사원장에 국무총리까지 했는데 총선 승리에 일정 부분 책임을 맡아야 하지 않겠느냐&rdquo;는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총선에 대한 역할을 주문했던 것인데 그가 이듬해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그런 이회창 후보가 날개를 단 것은 1997년 3월 당 대표 선출이었고 이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크나큰 패착이었다. 나는 이회창 후보가 당 대표를 맡는 것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결코 이회창 후보 개인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었다. 대선을 앞둔 해에 당 대표를 맡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을 얻는 일이었다. 대권에 나가려는 후보가 대표직을 겸임한다는 것은 다른 후보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임이 자명했다.사실 YS는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직을 제안하기 전 이한동 전 총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동 전 총리 역시 대권주자였기에 본인의 출마를 위해 YS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회창 후보 역시 대표직을 맡지 말았어야 했다.이는 YS가 여론과 민정계 목소리에 밀린 탓이기도 했다. 그 해 내가 한보사태에 연루되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당내에서는 수습 차원에서 이회창 전 총리에게 당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가 YS에게 조언한 것은 충청도 출신의 김종호 의원에게 대표를 맡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대권주자도 아니었고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은 김 의원이 적격이라고 여긴 것이다. 몇몇 언론에서도 김종호 의원이 차기 당 대표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일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불현듯 이회창 후보가 대표가 됐다.집권여당 안에서는 내가 구속까지 이른 상황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민정계 출신 의원들은 &ldquo;김현철을 YS와 떼어놓아야 한다&rdquo;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곤 했다. 당시는 매일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내 생각을 청와대와 YS에 전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안부 전화를 나누는 것조차 집중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img alt="1997년 11월 3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회의-자민련 대선후보단일화 합의문 서명식. "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28/1377648868624281.jpg"/> 입당 1년여 만에 당 대표가 된 이회창 전 총리는 여세를 몰아 대선경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민정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민주계 입장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되는 것은 TK(대구&middot;경북)를 중심으로 한 &lsquo;도로민정당&rsquo; 부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에 역행하는 흐름을 막는 차원에서 당내에서는 정발협(정치발전협의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수성 전 총리를 지지하기도 하고 경선 때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네 후보들(이인제&middot;이한동&middot;이수성&middot;김덕룡)이 결선투표에서 자신들의 표를 2위 후보에게 몰아주기로 결의까지 한 상태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대세론은 견고했다.중립적인 경선 룰이 무너진 상황에서 다른 후보들의 반발과 후보 교체 목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것은 8월 불거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었다. 병역 의혹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고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유지하던 지지율이 10%대로 주저앉았다.결국 이를 계기로 대선 석 달을 앞두고 이인제 전 지사가 탈당 이후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아마도 병역 파문 이후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선 것이 결심 계기가 됐던 듯하다. 당시 YS는 이인제 후보를 청와대에 불러 출마를 말렸지만 &ldquo;이회창 후보로는 DJ를 이길 수 없다&rdquo;는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의 판단이 꼭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본다.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이인제 후보의 탈당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상황이 엄중한 만큼 후보 본인이 직접 나서야 했지만 끝까지 측근을 시켜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ldquo;이인제 후보의 탈당은 결국 김심이 작용한 것&rdquo;이라며 YS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이인제 후보에게도 YS에게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한편 DJ 측은 차근차근 대선을 준비하며 김종필 자민련 총재(JP)와 DJP연합을 성사시켰다. 대선의 승패는 정적을 얼마나 끌어안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만일 이회창 캠프에서 JP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충분히 힘을 보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실제 양쪽 모두 JP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호재를 빼앗긴 것은 결국 후보 역량의 차이였다.DJP연합으로 충청권 표심이 야권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PK(부산&middot;경남)는 이인제 후보, TK는 이회창 후보에게 각각 쏠렸다. 당시 이인제 후보는 500만 표(492만 5591표)를 얻으며 선전했는데 PK에서만 100만 표를 얻었다. 당시 DJ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이회창 캠프에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꺼내든 것은 강삼재 사무총장의 &lsquo;DJ 비자금 폭로&rsquo;였다. 이회창 후보는 연일 검찰 수사를 촉구하며 청와대를 압박했지만 그때 수사가 진행됐다면 아마 선거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보다 지역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YS가 야당 후보인 DJ를 수사한다는 것은 대통령 선거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결국 이회창 캠프에서는 YS가 뒤에서 DJ를 돕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다 이긴 선거를 스스로 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문민정부가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것은 후보가 대세론에 휩쓸려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1997년도, 2002년도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꼭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15대 대선 뒷얘기YS, 탈당 후 DJ 먼저 만난 까닭은 <img alt="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0월 1일 계룡대 운동장에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28/1377648868624282.jpg"/> 15대 대선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 것은 YS의 돌출 발언이었다. YS는 15대 총선이 끝난 직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ldquo;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가 있다&rdquo;고 밝히는가 하면 이듬해인 1997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YS에게는 정말 김심이 있었던 것일까.―대선을 앞둔 YS의 발언은 지금도 궁금증을 남긴다.&ldquo;김심은 무심이었다. 신한국당이 총선에서 젊은 인재를 많이 영입해 승리한 것을 빗대 대선에서도 젊고 참신한 후보가 나와야 한다는 뜻에서 한 이야기였다. 너무 직설적인 측면이 있지만 특정 후보를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각 후보가 저마다 &lsquo;김심은 나를 향해 있다&rsquo;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 않나.&rdquo;―YS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이회창 후보보다 먼저 DJ를 접견한 것도 말이 많았다.&ldquo;그건 DJ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요청이 왔기에 응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만나자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YS가 DJ를 만나니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rdquo;―정권재창출은 실패했지만 오랜 라이벌인 DJ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듯한데.&ldquo;어찌됐건 YS와 DJ는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이였다. YS가 당선자인 DJ를 만난 자리에서 &lsquo;어디 당신이 한번 잘 해보시라&rsquo;고 한 것도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환란청문회를 열어 문민정부 관료들을 줄줄이 구속하고 YS에게까지 출석을 요구했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는 필요하겠지만 정적을 제거하듯 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rdquo;―신한국당 &lsquo;9룡&rsquo;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97년 초에는 이회창 후보와 박찬종 후보가 지지율 1위를 다퉜다.&ldquo;박찬종 후보는 한마디로 튀는 정치인이었다.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당내 세력이 없었다. 민정계가 이회창 이한동 최병렬 세 후보를, 민주계가 이인제 김덕룡 이한동 후보를 미는 상황에서 기반이 없었다.&rdquo;―다른 후보들은 어땠나.&ldquo;김덕룡 후보는 지금의 이정현 홍보수석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호남 출신이면서 민주계 핵심에서 오랫동안 YS와 함께했다. 상당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여론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이인제 후보에 비해 부족했던 것 같다. 이한동 후보는 민정계 쪽이지만 합리적이면서 능력이 뛰어나 나 역시 지지했다. 1차 경선에서 3등을 했는데 2위인 이인제 후보와 8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재검표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형우 후보는 뇌졸중으로 쓰려지면서 일치감치 대권 경쟁에서 멀어졌고 최병렬 후보는 &lsquo;9룡&rsquo;에 속하기에는 상대적으로 기세가 약했다. 경선에서도 꼴찌를 했고 4인 연대에도 혼자만 빠졌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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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0] IMF 외환위기 후폭풍]]></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201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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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1 Aug 2013 09:05: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문민정부 초반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를 훌쩍 넘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추락하고 만다. 이런 급격한 지지율 하락은 1997년 대기업의 연쇄부도, 그리고 IMF 외환위기가 결정적이었다. IMF 사태는 한국 경제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대사건이었지만 문민정부 경제 관료들은 &ldquo;한국 경제는 펀더멘탈(기초)이 튼튼해 문제가 없다&rdquo;는 말만 되풀이했다. 문민정부 최대 오점으로 남은 IMF 사태에 대해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정리했다. <img alt="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고건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21/1377043541620150.jpg"/> IMF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한국경제 리스크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한 문민정부에 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IMF를 부른 원흉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 전적으로 문민정부의 잘못이 아니듯 IMF 외환위기 역시 지난 30여 년간 구조적인 문제가 문민정부에서 곪아 터져 발생한 불운이었다.엄밀히 말하자면 IMF 사태는 일시적인 외환유동성 위기였다. 금융위기도 경제위기도 아닌 외환보유액이 일시적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당시 아시아권에 도미노처럼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한국도 똑같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전망으로 국내외 채권자들이 단기간에 돈을 빼면서 일시적으로 외화가 부족해진 것이었다.문민정부 입장에서는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어떤 식으로든 때우고 문제를 다음 정권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실제 일부 관료들은 YS에게 &ldquo;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rdquo;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대선과 맞물리면서 국가보다는 집권여당의 미래를 더 신경 쓰는 몇몇 관료들의 요구가 집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업정치인인 YS는 &ldquo;우리 손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rdquo;며 고려하지 않았다.문민정부 초만 해도 재벌기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해 메스를 많이 댔다. YS는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그들이 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지 직접 묻거나 보고서를 작성케 해 받아보기도 했다. 재무제표가 통용되기 시작했고 전문경영인(CEO) 체제가 본격 도입된 것도 문민정부였다. 하지만 관치금융에 젖은 대기업의 습성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았다.따지고 보면 IMF 체제를 부른 근본 원인은 지난 30년 군사 정권에서 정경유착과 관치경제가 지속된 탓이 크다. 기업들이 돈이 필요하다면 부실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거액의 대출이 이뤄졌다. 로비하는 것이 연구개발보다 값싸고 손쉬운 방법이었기에 재벌들은 너나 할것없이 정치권에 줄을 댔다.금융권은 금융권대로 관치금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문민정부가 적극 추진했던 것이 금융개혁법이었다. 금융개혁법은 자본자유화를 통해 국내 증권거래에 숨통을 틔우고 은행을 대형화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발판이었다. 문제는 야당이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이는 1995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동관계법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각에서는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강행 처리를 두고 개악이라 비판하지만 실상 그 내용을 보면 IMF에서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민정부는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고자 했지만 야당은 마치 정부가 노동자를 다 죽이는 것처럼 정략적으로 몰고 갔고 결국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갔다. 그때 야권이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협조했다면 IMF 사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img alt="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는 청와대에서 주례회동을 갖고 국제통화기금 협약이행을 위한 후속조치와 금융위기 타개방안 등에 관해 협의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21/1377043541620151.jpg"/> IMF 체제 아래 국민의 정부 역시 노동시장 유연화와 자본자유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갔다. 그러면서도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환란청문회를 통해 지난 정권과 단절을 꾀했다. 전 정권의 경제 수장인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구속하고 심지어 YS마저 청문회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IMF 사태는 어느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야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했던 일은 무엇인가. 나는 그가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기아부도 처리를 결사반대하고 IMF 협상이 타결되자 재협상론을 제기해 국정운영에 혼선을 초래한 것이 먼저 떠오른다. YS가 책임이 있다면 DJ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그저 IMF 체제에서 빨리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바람에 부작용도 양산했다. 외환은행을 론스타 같은 곳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일은 문민정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특히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놓였을 때 야당은 이를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풀려고 했다. YS는 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부도처리함이 옳다는 생각이었지만 정치권은 수조 원의 세금을 들여가며 기아자동차를 살려 놓았다. 야권에서 &lsquo;국민기업&rsquo;이라는 이름으로 결사투쟁 했기 때문이다. 아마 해외 투자자의 눈에는 한국이 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물론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문민정부 관료들의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IMF 측과 협상을 주도하던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전격 경질되자마자 집에서 칩거하는 바람에 후임으로 온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전혀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갑작스레 참모진이 바뀌다 보니 함께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대세가 DJ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한 일부 경제 관료들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듯 야권의 눈치를 살폈다. YS 입장에서는 모든 게 어려운 상황이었다.마지막에는 집권여당마저 등을 돌렸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 여권은 YS의 탈당을 요구하며 연일 거리두기에 나섰다. 당시 TK(대구&middot;경북)지역에서는 YS의 인형을 불태우고 몽둥이찜질을 하는 등 의도적인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와 YS를 때릴수록 표가 올라가는 상황이기에 그랬을 테지만 결국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정치권에서는 흔히 YS를 가리켜 &ldquo;정치는 9단이지만 경제 분야에는 무능력했다&rdquo;고 말한다. 대통령은 기본 바탕이 경제인이 아닌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꼭 경제의 디테일을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 국가 운영에 있어 방향을 제시하고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지시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경제 역시 통치의 영역이기에 YS는 본인이 직접 경제를 주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경제 관료들이 다음 정권과 그 다음 정권에도 계속 발탁돼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문민정부에서 충분한 역량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예전처럼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요즘 박근혜 정부의 경제 상황을 IMF 당시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전 세계가 불황인 상황에서 수출 주도형인 우리나라는 더욱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이미 가격 경쟁력에서도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역효과라고 본다. 경제민주화는 그저 재벌들 손봐주겠다는 이야기로 비치고 창조경제는 정확한 개념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경제민주화는 규제에 방점을 두고 창조경제는 성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도 모순된다. 대통령이 방향타를 잘못 잡을 경우 경제의 흐름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문민정부에서 IMF 사태가 없었다면 정권재창출은 물론 YS의 인기도 사뭇 달랐을 것이다.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됐다는 평가가 나올 때만 해도 YS의 경제적 능력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과오는 아프게 지적하되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현철 구속에 대한 심경&ldquo;나만 계속 희생양 만들어&rdquo;&ldquo;같은 죄로 김한길 대표는 무죄, 나는 유죄&rdquo;IMF 사태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당시 김현철 교수는 영어의 몸이었다. 1997년 5월 한보사태에 연루돼 구속된 김 교수는 6개월 뒤인 11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사이 정국은 무척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구속되기 전과 후 세상이 많이 달라보였을 것 같다.&ldquo;안에서도 문민정부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바깥에서 보니 더욱 어수선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기였기에 특히나 그랬던 것 같다. 40년간 의회주의자로 살았던 YS가 난생 처음 탈당해 당적이 사라졌고 주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없었다. 나 역시 재판에 시달리느라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었다.&rdquo;―한보사태와 IMF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ldquo;YS는 IMF 사태에 대한 책임을 구태여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내 경우는 다르다. 10여 년간 한보사태에 대한 억울함을 피력해 왔지만 여전히 나는 한보사태로 인해 구속된 김현철이다. 이제는 그냥 대법원 판결문을 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rdquo;―김 교수는 2004년 총선 직후에도 구속됐다.&ldquo;그때도 97년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당시 대선잔금 일부를 한솔그룹 부회장인 조동만에게 맡겼는데 그동안의 이자소득이라며 나에게 준 돈이 문제가 됐다. 같은 내용을 검찰은 한 번은 조세포탈로, 또 한 번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걸었다.&rdquo;―검찰 수사가 김 교수에게 가혹했다는 것인가.&ldquo;당시 &lsquo;조동만 리스트&rsquo;가 나오면서 정치권이 떠들썩했지만 구속된 것은 나와 조동만 둘뿐이었다. 지금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그에게 돈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또 나만 희생양으로 삼고 끝낸 것이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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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9] 한보 사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161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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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4 Aug 2013 09:05: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squo;변화와 개혁&rsquo;을 표방했던 문민정부의 위상은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로 급격히 추락했다. 재계 서열 14위인 한보그룹의 해체는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융권 특혜 대출과 맞물려 권력형 비리로까지 비화됐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섰다. 한보사태의 몸통이 된 것. 김 교수는 한보사태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것들이 너무나 많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보사태에 대한 김 교수의 회고다. <img alt="1997년 김현철 씨가 한보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14/1376438718616190.jpg"/> 한보라는 두 글자는 가능하다면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 나는 한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한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당시에도 정태수 회장이 노태우 정권 말기 수서택지특혜분양으로 인해 구속된 전력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았을 뿐이었다.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는 이석채 경제수석(현 KT 회장)의 몫이었다. 지방의 중소기업이 무너져도 영향이 미치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부도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경제 논리로는 당연히 부도를 내야했음에도 이 수석은 혹시 정권 차원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폈다. 전 정권의 집권여당 대표이기도 했던 YS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나 역시 하루빨리 한보그룹을 부도 처리해야 한다는 이 수석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대통령에게 &ldquo;한보를 부도처리하고 정태수 회장을 수사하는 데 있어 큰 문제가 없겠느냐&rdquo;고 직접 묻기도 했다. 당시 YS는 통상적으로 기업들에게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던 것 이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청와대와 사정당국은 한보그룹과 관련해 나와의 연관성을 예견하거나 비슷한 낌새조차 알지 못했다.회사 부도 직후 특혜대출에 관해 검찰 조사를 받게 된 정태수 회장의 입에서 정치인들 이름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DJ의 비서실장인 권노갑 의원과 YS의 측근으로 통하는 홍인길 의원까지 나왔다. 일이 심상치 않자 청와대도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YS는 단호하게 처리할 사안이라는 입장이었다.야당에서 나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은 2월서부터였다. 한마디로 내가 한보그룹 부실대출의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의혹의 발단이 되고 야당에 빌미를 준 것은 홍인길 의원의 &ldquo;나는 훅 불면 날아가는 터레기(털의 경상도 방언) 같은 사람&rdquo;이라는 한마디였다. 홍 의원의 이른바 &lsquo;깃털론&rsquo;은 실제 거대한 배후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불만을 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야당은 실체 없는 몸통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한보사태와 관련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나 많다. 처음 검찰에 출두했던 나는 고소인 신분이었다. 당시 나는 야당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 상태였다. 국민회의 대변인(정동영)을 비롯해 한영애 설훈 의원의 주장은 하나같이 거짓말이었다. 나에 대한 야당의 흠집 내기는 신한국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한보사태에 대해서만큼은 그들이 한참 잘못 짚었기에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처음 고소인 조사에서도 검찰은 아무런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img alt="서울구치소에서 열린 한보청문회에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모습.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14/1376438718616191.jpg"/> 더욱 가관은 임채정 의원의 리베이트설이었다. 임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내가 한보그룹 불법대출에 대한 리베이트 명목으로 수천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고 이는 주요 신문 1면을 도배했다. 이후 야당에서는 정권과 결탁한 검찰을 믿을 수 없으니 특검을 해야 한다고 여론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하나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이 나서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태도다.야당의 각종 허위비방이 난무함에도 한보사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이 재점화된 것은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의 &lsquo;비디오테이프&rsquo; 파문이었다. 박경식이 어떻게 YS의 자문의사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들은 바로는 1992년 대선 당시 그가 우리 쪽을 돕겠다며 어머니 주치의를 자처했고 그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박경식은 주치의가 아닌 주치의 밑에서 자문을 해 주던 사람이었다.1995년 1월 대전에서 병원을 하던 박경식은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YS 주치의인 고창순 박사는 &ldquo;병원 개업식에 김 소장이 대신 가 줄 수 없겠느냐&rdquo;고 부탁해 내가 참석하게 됐다. 당시 전화 통화는 개업식에 갔다가 원장실에서 찍혔던 것이다. 박경식은 개업식 손님으로 간 사람의 영상을 2년간 간직하다 묘한 시점에서 폭로했다. 당시 박경식은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권 하나를 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었다. 앙심을 품은 그가 야권과 결탁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앞서도 밝혔듯 내가 총선 과정에서 공천에 관여한 것은 확실하다. 내 의도는 집권여당에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권에 젊고 개혁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하면 문민정부 개혁 작업에 더욱 탄력이 붙고 결국 정권재창출에도 이로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시도들은 야당은 물론 민주계 중진들조차 나를 견제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는데 박경식의 폭로는 여당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기폭제가 됐다.비디오테이프 파문 이후 야당은 나에게 청문회 출석을 강하게 요구했다. 나갈 이유가 없었지만 YS는 일단 청문회에 나가서 사실대로 말한다면 불씨가 꺼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나가면 그 자체가 또 다른 파문을 낳고 언론에서도 분명 나쁜 쪽으로 여론을 몰아갈 것이 자명했다. 나는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YS의 간곡한 부탁을 연거푸 거절할 수는 없었다.불행하게도 일은 내 예상대로 돌아갔다. 간판은 한보청문회였지만 실상은 김현철의 국정 농단에 대한 성토의 장이었다. 어느 의원은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한보철강이 인수한 당진제철소에 간 적이 있다고 소설을 썼고 또 다른 의원은 내가 한보 사람들과 식사한 장소라며 식당 사진을 들이밀기도 했다. 그냥 식당 전경이었다. 더 이상 진실은 중요치 않았다. 청문회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의 70~80%는 &ldquo;김현철이 한보사태에 관련이 있다&rdquo;고 생각했다. <img alt="1997년 3월 13일 경실련 관계자들이 김현철 씨의 비리 의혹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14/1376438718616192.jpg"/> 수장이 교체된 검찰의 소영웅주의도 나를 수렁에 몰았다. 박경식의 폭로 이후 급히 교체된 심재륜 중앙수사부의 수사 초점은 김현철과 한보의 관계가 아닌 그냥 김현철을 잡아넣는 것으로 맞춰졌다. 당시 검찰이 쓴 공소장이나 이후 법원 판결문을 살펴보면 &lsquo;한보&rsquo;라는 단어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한보사태로 인해 구속된 대통령의 아들이 돼 있다.그때 나는 별건으로 구속됐다. 죄목은 알선수재와 조세포탈죄였다. 심재륜 중수부장이 수사관 300명을 동원해 내 주변 1000여 명을 이 잡듯이 뒤져서 찾아낸 것이었다. 변호사도 없이 조사에 응했던 나는 조사 막바지에서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결국 문제가 된 것은 1992년 대선이 끝나고 남은 대선잔금이었다. 이 돈은 나라사랑운동본부 총무 역할을 했던 동창생 박태중이 관리하다 이성호 대호건설 사장에게 맡겨졌다. 이성호는 돈을 맡으면서 이자 개념으로 나에게 매월 활동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동문 선배들은 대통령 아들로서 돈 문제에 휩쓸리지 말라며 아무 조건 없이 활동비를 지원했다. 이 외에 나는 다른 금전적 지원을 받은 적은 없었다.물론 돈을 개인적으로 쓴 것도 아니었고 사무실 운영과 여론조사 비용 등 실제 활동비로 사용했다. 이권개입과 청탁대가성 돈이 전혀 아니었지만 검찰은 믿지 않았다. 나에게 활동비를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이 기업인이었기에 &lsquo;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rsquo;는 심정으로 수사를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결정적인 것은 이성호의 허위 진술이었다. 이성호는 검찰 조사에서 나에게 온갖 청탁을 했지만 들어준 것은 하나도 없었노라고 진술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검찰은 &ldquo;청탁을 했다&rdquo;는 말과 대선잔금을 연계시켜 나에게 알선수재 죄명을 씌웠다. 나는 이성호와 대질 심문을 원했지만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검찰은 대선잔금에 대한 이자소득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세포탈죄를 적용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없었던 사례다. 당시 대선잔금은 어차피 다음 총선과 대선 때 쓰일 돈이었기에 사조직이 관리하고 있었다. 실제 이성호에게 맡겼던 대선잔금 50억 원은 총선 과정에 대부분 쓰였고 이후 조동만 한솔그룹 부회장에게 맡긴 70억 원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수사 과정에서 김기수 검찰총장은 나에게 역제안을 하기도 했다. &ldquo;일단 정국이 시끄러우니 조그만 건으로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어떻겠느냐&rdquo;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그맣든 크든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범죄자가 되고 감옥을 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사실은 YS 역시 내가 구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측근들로부터 잘못된 보고를 받고 내가 기업인들로부터 부당하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날, &ldquo;이틀 조사 받고 인사드리러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rdquo;는 나에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ldquo;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rdquo;고 할 뿐이었다. 참으로 비정한 부정이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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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8] 대통령 비자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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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7 Aug 2013 09:2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5&middot;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middot;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한 국회의원의 폭로가 도화선이 됐다. 1995년 10월 16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 원의 실체를 공개했다. 하도 액수가 커 정치권도 쉽사리 믿지 못했다. 하지만 검찰수사 결과 비자금은 사실이었고 국민들은 정치권의 검은 속살과 직접 마주해야 했다. 다른 대통령들 역시 퇴임 이후 비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YS(김영삼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의 소회를 정리했다. <img alt="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과 관련 검찰에 구속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07/1375834955612160.jpg"/> &ldquo;신한은행 302-38-001672. 잔액 128억 2700만여 원. 이 계좌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비자금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이 돈은 4000억 원에 이르는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일부에 불과합니다.&rdquo;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장의 예금계좌 사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실체가 공개된 순간이었다. 박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4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한 뒤 이를 100억 단위로 쪼개 여러 은행에 차명으로 예치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 달 뒤인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격 구속됐다.여당인 민주자유당은 박 의원의 폭로가 일종의 해프닝에 그칠 것으로 봤던 모양이다. 당시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은 처음에 &ldquo;박 의원이 폭로한 돈은 사채시장의 검은 돈일 가능성이 크다. 야당이 헛발질을 하고 있다&rdquo;고 반박했다. 당사자인 노태우 씨는 &ldquo;수사로 억울함을 밝혀 달라&rdquo;고 읍소했다.이 느긋한 반응은 박 의원과 같은 주장이 이미 언론을 통해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폭로가 있기 두 달 전, 한 일간지에 &lsquo;전직 대통령 중 한사람 4000억 비자금&rsquo;이란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말실수를 한 것이 그대로 실린 것이었다. 이후 서 장관은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정가에 떠도는 &lsquo;카더라 통신&rsquo;을 사석에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뒤늦은 해명이었다.그러고 보면 &lsquo;4000억 원&rsquo;이란 액수는 여권에서 먼저 나왔던 셈이다. 이 때문에 박계동 의원의 폭로가 청와대와 연관됐을 것이라는 의심도 있었다. 야당 초선 의원의 폭로라기엔 증거가 너무나 명확해 청와대가 민주계 세력을 키우기 위해 역으로 정보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뒤에 박 의원과 예금계좌 주인이 고교 동창 사이였고 그가 직접 전해줬다는 인터뷰까지 나왔지만 정치권은 &lsquo;청와대 연관설&rsquo;을 더 믿고 싶어 했다.당내 사정(事情)이야 어떻든 노태우 비자금 수사는 문민정부 사정(司正)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미 임기 초반 슬롯머신 사건, 율곡비리 감사 등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문민정부 검찰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미 검찰은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두 대통령이 그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나 치러 다니는 수준으로 생각했지, 설마 수천억 원씩이나 되는 비자금을 쌓아두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폭로 소식을 접한 YS 역시 &ldquo;이건 비자금이 아니라 부정축재 사건&rdquo;이라고 강조했다.검찰 수사는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1월 8일, 검찰은 현대 정주영,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대우 김우중, 롯데 신격호, 동아 최원석, 6명의 총수를 한꺼번에 소환했다. 어느 정권의 검찰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각 그룹에서는 대검찰청과 시청 인근 호텔 등에 비밀팀을 꾸려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대응했지만 검찰은 거침없이 6공화국 지도자의 부정축재 경위를 밝혀 나가기 시작했다.당시 보도를 보면 이들은 재벌그룹을 규모에 따라 4등급으로 분류해 자금을 걷었다. A 그룹은 300억 원 이상, B 그룹은 200억 원, C 그룹은 150억 원, D 그룹은 100억 원 전후였다고 한다.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은 &ldquo;일국의 원수인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20억 원을 주머니에 넣고 청와대 춘추관에서 혼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dquo;고 말했다. 불과 20년여 전에 있었던 일이다. <img alt="1995년 11월 1일 열린 노태우 전 태통령 비자금 의혹 관련 시위.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07/1375834955612161.jpg"/> 당시 정치권은 비자금 조성에 너나 할 것 없이 관대한 분위기였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에서 어떻게 자금을 모으는지는 불문율이었다. 대부분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금을 댄 것이다. 1992년 대선이 끝나고 YS는 &ldquo;이렇게 선거를 치르다간 나라가 거덜나겠다&rdquo;고 판단했고 취임 직후 &ldquo;앞으로 어떠한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rdquo;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1992년 대선은 돈으로 치르는 마지막 대선이었다.선거가 끝나고 남은 돈은 정당 운영이나 다음 선거를 위해 쓰였다. 일부는 엉뚱한 일을 꾸미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직전, 김복동 박태준 박철언 의원 등 6공 세력을 중심으로 &ldquo;도저히 이 상태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 YS를 믿을 수 없다&rdquo;며 독자적으로 후보를 세울 움직임이 있었고, 1995년 지방선거 직후에는 TK(대구&middot;경북)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당을 세우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누군가의 자금 지원이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개인적으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을 떠올리게도 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YS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지 모임들이 열리곤 했다. 초원복집의 모임도 매한가지였다. YS는 부적절한 모임을 주도한 김기춘 법무장관에게 &ldquo;선거가 잘 흘러가고 있는데 아군이 재를 뿌리면 되겠느냐&rdquo;며 진노했다.초원복집 사건은 결과적으로 상대 캠프의 불법 도청 문제가 이슈가 됐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이루어진 섣부른 폭로가 역풍을 맞은 것이다. 상대 캠프의 도청으로 인해 영남이 YS 쪽으로 결집했듯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 역시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초강수로 이어지면서 이듬해 총선에서 승리를 안겨 준 셈이었다.폭로는 또 다른 폭로를 낳기도 한다. 박계동 의원의 폭로 이후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ldquo;나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0억을 받았다&rdquo;고 스스로 고백했다. 검찰 수사가 들어가게 되면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YS에게도 덧씌우고 싶었던 것일까. 실제로 사람들은 &ldquo;DJ가 20억 원을 받았으면 YS는 최소 200억 원은 받았을 것&rdquo;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고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YS가 맞장구쳤다면 정권은 수렁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하지만 폭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노태우 씨는 회고록에서 &ldquo;YS에 수천억 원의 대선자금을 지원했다&rdquo;고 밝혔다. YS가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 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찌 되었건 검찰 수사 때 명명백백히 따지지 않고 뒤늦게 YS가 자신과 같은 비자금을 조성한 것처럼 말한 것은 부적절한 처사였다. YS는 퇴임 이후 노 씨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1992년 대선자금에 관해 내가 YS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솔직히 대선 직전 YS의 요구로 당을 떠났던 노태우 씨가 그런 액수를 지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분명한 것은 1992년 대선이 끝나고 YS는 대선자금이 어떻게 운용돼 왔는지를 알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정치자금 수수 근절을 선언하고 통합선거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이제 대통령 통치자금이라는 것은 없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썼을 경우 어떤 말로를 겪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YS가 &ldquo;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rdquo;고 한 약속을 현재까지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lsquo;YS 상대적 박탈감&rsquo; 느끼는 까닭&ldquo;퇴임 후 YS 품위유지도 쉽지 않아&rdquo; <img alt="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 자택. 사진제공=경향신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807/1375834955612162.jpg"/> 두 전직 대통령은 불법 비자금 조성으로 법의 처벌을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호화로운 생활을 자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사저,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반면 YS와 DJ는 퇴임 이후 비교적 조용하고 검소하게 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김현철 교수는 &lsquo;상대적 박탈감&rsquo;에 시달렸음을 고백했다.―두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ldquo;두 사람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다들 떵떵 거리며 살았다. 그에 비하면 YS는 초라한 수준이다. 대지 100평의 상도동 자택이 재산의 전부다.&rdquo;―상도동과 DJ의 동교동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ldquo;동교동과 비교해 봐도 우리가 더 초라하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자택에 청와대 못지않게 집무실을 차려 놓고 손님도 맞고 하는데 상도동은 그런 공간도 없다. 10명이 넘으면 앉을 자리가 없고 신년하례 때 손님이 몰리면 추운 마당에 나와 떡국을 나눠먹어야 할 정도다. 한 번씩 상도동에 가면 너무하다 싶은 때가 있다.&rdquo;―대신 대통령 연금이 있지 않나.&ldquo;연금이 나오는데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지만 챙겨야 할 식구도 많고 경조사도 끊이지 않는다. 경호 비용 역시 나라에서 모든 걸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YS가 바깥출입이 드문 것도 어디 나가면 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품위유지도 쉽지 않다.&rdquo;―믿을 수 없다.&ldquo;해외여행 한번 나가기도 버겁다. 가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초대를 받기도 하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체재비가 나오느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저쪽에서 난색을 표하고 당황해 한다.&rdquo;―체재비 문제로 초청이 취소된 적도 있었나.&ldquo;있었다. 그 이상은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이야기 못하겠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7] 역사바로세우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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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31 Jul 2013 09:4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95년. 파란의 해였다. 문민정부 2인자를 자처했던 JP(김종필 전 총리)는 집권여당을 떠나 자유민주연합을 세웠고 DJ(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지방선거 이후 정계 복귀를 선언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대권 채비에 나섰다. 그 해 연말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들고 나온 카드는 &lsquo;역사바로세우기&rsquo;였다.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만들어 낸 역사바로세우기는 YS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사건이었다. YS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를 &ldquo;단절의 역사를 끊어내고 잘못된 관습을 청산한 일&rdquo;이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img alt="1996년 1월 3일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정부가 추진한 ‘역사바로세우기’ 휘호를 쓰고 있다. 사진출처=&lt;변화와 개혁&g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31/1375231307607600.jpg"/> 역사바로세우기는 문민정부 중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임기 3년차인 1995년 광복절,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 물결은 그 해 12월 5&middot;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middot;18 특별법) 제정으로 완성됐다. 이를 통해 문민정부는 일제 강점기부터 제5공화국,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결별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는 과정은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대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인 1994년 10월, 사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2&middot;12 사태 관련자 35명을 기소 유예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지검 공안1부장(현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은 &ldquo;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rdquo;는 유명한 말로 논란을 확산시키기도 했다.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때 YS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바로 직전 대통령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3당합당을 통해 5공 세력까지 모두 끌어안았던 그였기에 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엉뚱한 곳에서 물꼬가 터졌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lsquo;노태우 비자금 폭로&rsquo;였다. 정국을 수렁 속으로 몰아넣은 비자금 파문 때 YS는 해외 순방(캐나다에서 열린 UN총회) 중이었다. 전화 통화를 통해 대강의 내막을 전해들은 YS는 &ldquo;성역 없이 수사하라&rdquo;고 지시한 이후 긴 침묵에 잠겼다. 일반 정치자금 문제가 아닌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부정축재사건이기에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던 YS였지만 중차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노태우 비자금 수사와 별도로 5공 군부 세력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나온 것이 5&middot;18 특별법 제정이었다. 귀국 이후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을 청와대로 부른 YS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며 &ldquo;이 땅에 정의와 법이 살아있음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rdquo;고 당부했다.5&middot;18 특별법 제정 당시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계 일부에서는 공소시효와 소급입법에 관한 위헌 소지를 문제로 삼기도 했지만 사실 별로 문제가 안 됐다. &lsquo;헌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 국민정서법&rsquo;이라는 말이 있듯이 두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거스를 수 있는 곳은 어디도 없었기 때문이다.노태우 씨는 이미 구속된 상태였지만 전두환 씨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12월 2일 검찰 소환 요구에 그는 &ldquo;내가 범죄자라면 그런 세력과 야합한 김영삼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rdquo;는 &lsquo;골목성명&rsquo;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내려갈 때 차량 속도가 시속 140㎞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검찰에 전광석화로 체포된 그는 안양구치소에서 기나긴 수감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전직 대통령이라는 &lsquo;범털&rsquo;에 맞서 검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씨는 수감 첫날 단식을 선언하는가 하면 &ldquo;나는 내가 다이얼을 눌러본 적이 없다&rdquo;며 전화번호조차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검찰도 만만치 않았다. 공판을 앞두고 검찰은 전 씨에 대한 심문에 대비, 역할극까지 해 보는 등 치밀하게 준비해 5공 세력을 조금씩 무너뜨려 나갔다. 그 주역 가운데 한 명이 지금의 채동욱 검찰총장이다. <img alt="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이 5·18특별법 제정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아래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 관련 기사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31/1375231307607601.jpg"/> 적은 구치소 안에만 있지 않았다. 5&middot;18 특별법 제정에 대해 수구세력들은 끊임없이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제15대 총선을 앞둔 이벤트라는 해석은 기본이었고 5&middot;18 특별법 제정의 도화선이 된 박계동 의원의 폭로가 청와대와 여당이 주도한 역공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민자당은 JP의 탈당과 지방선거 참패로 당 수습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부정축재라는 엄청난 일을 터트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인가.결과적으로 5&middot;18 특별법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는 12&middot;12 쿠데타와 5&middot;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법의 평가는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인 1996년 8월, 전두환 씨는 사형을, 노태우 씨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그 해 12월 항소심에서 전 씨는 무기징역, 노 씨는 17년형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됨).두 전직 대통령은 문민정부 임기가 끝나기 직전 사면복권 됐다. 많은 이들이 YS와 DJ가 의견을 모아 두 사람을 석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YS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본인이 두 사람을 구속한 만큼 결자해지 측면에서 문민정부 임기 내 사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는 당선자인 DJ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DJ의 가장 큰 약점은 오랫동안 이념 공격을 받으면서 군부세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민정부가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고 DJ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국민의 정부가 이념을 넘어 5공 세력과도 화합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 셈이 됐다. YS보다 먼저 DJ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하나회는 청산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DJ는 끊임없이 군과 갈등을 겪고 타협하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YS는 늘 &ldquo;죄는 철저히 묻되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rdquo;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나 국민들이나 두 전직 대통령을 똑같은 크기로 용서할 수 있을까. 노태우 씨는 추징금의 90% 이상을 내고 지금도 나머지 추징금 납부를 위해 법에 호소하고 있는 반면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05억 원 가운데 24%(533억 원)만 내고 있다. &ldquo;29만 원밖에 없다&rdquo;는 전 씨가 지금까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에 국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YS조차 전 씨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꺼린다. 일국의 대통령이지만 어찌 구원이 없을 수 있을까.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금 전두환 씨의 비자금 추징에 나선 것도 개인들의 악연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10&middot;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이후 전두환 정권은 전 정권의 잔재를 악착같이 지우려했다. 워낙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다 보니 박정희 정권을 깎아내리면서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에 대한 추모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오랜 기간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번에 불거진 추징금 환수 문제도 그런 개인적 악연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든, 현 정권의 전두환 추징금 특별수사든 우연한 요소로 인해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있다는 목표만은 동일한 듯하다. 군부 세력만큼은 문민정부를 통해 확실히 청산됐다고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워져도 국민들은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도 이번에 확실하게 추징금을 환수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얻고 이 땅에 더는 대통령 부정축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조선총독부 철거 비화&ldquo;한 보수언론사 극렬히 반대&rdquo; <img alt="1995년 8월 15일 구 조선총독부의 첨탑이 철거되고 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31/1375231307607602.jpg"/>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철거는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시작점이었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는 이벤트로 전국에 생중계되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조선총독부 철거마저도 YS와 청와대는 말 못할 압력과 고충을 겪었다고 한다. 다음은 김현철 교수와 일문일답.―조선총독부 철거도 중요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었다.&ldquo;모든 방송사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컸다. 하지만 이런 명분이 분명한 일에도 극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결정된 일이었지만 그 사이 엄청난 반대가 쏟아졌다.&rdquo;―반대한 이들의 근거는 무엇이었나.&ldquo;한마디로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초대 정부에서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기도 한 만큼 보존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가 먹히지 않자 수구세력들은 건축학과 교수들과 학생을 동원해 반대를 하고 청와대에 엄청난 투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뛰어난 건축물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린트양식이라나 뭐라나. 건물 잔해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rdquo;―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나.&ldquo;지금처럼 시민단체에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 특히 한 보수 언론사에서 너무 극렬하게 반대를 해 청와대가 직접 경고를 하기도 했다. 철거 직전까지 그야말로 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rdquo;―반대에 직면할 당시 YS의 반응은 어땠나.&ldquo;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철거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관광을 오면 꼭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정이 포함됐다. 사실 문민정부 초반에는 수도권의 모든 일제 상징물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옛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 한국은행 본점(현 화폐박물관), 옛 서울역사(서울역문화관)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반대가 심하니 청와대에서는 조선총독부 철거 이외 다른 건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할 수 없을 정도였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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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6] 신한국당 탄생과 15대 총선]]></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305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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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4 Jul 2013 09:2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ilyohk@ilyo.co.kr | 김임수,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방선거 참패 후 집권여당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자유민주연합의 탄생으로 충청과 영남의 지지가 크게 줄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지지율은 30%대로 내려앉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태풍 제니스 상륙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폭로로 정국은 요동쳤다. 모든 게 집권여당에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1년 뒤 민주자유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 화려하게 부활한다.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얻으며 제1당을 유지했다. 그때 김현철 교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청했다. 1996년 15대 총선의 숨 가빴던 순간을 김 교수의 인터뷰와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img alt="김영삼 대통령은 자신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던 이회창 전 총리를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사진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24/1374625200630550.jpg"/> 15대총선 준비는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곧바로 시작됐다. 민자당 안에서 주요 세력을 형성하던 민정계와 공화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대거 흡수되면서 크게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어쩌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민정계 중에서도 박철언 이건개 의원 등 끝까지 화합해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떠나고 김윤환 사무총장을 비롯한 민정계 주축 세력은 여전히 당에 남았기 때문이다. &lsquo;공화계-민정계-민주계&rsquo;라는 계파 이해관계가 많이 약해진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남는 일은 빈자리를 새로운 인물로 채우는 일이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쭉 사용한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이 의미가 없어진 시점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큰 선거를 앞두고 집권여당이 이름을 바꾸고 개혁을 꾀하는 것을 우리 정치의 나쁜 특징으로 꼽기도 하는데 당을 환골탈퇴태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므로 꼭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임했기에 신한국당의 목표는 대통령 중심의 강한 집권여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계파 갈등에 좌우되지 않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싶었다.15대 총선은 크게 세 팀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을 중심으로 한 &lsquo;청와대팀&rsquo;과 강삼재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lsquo;정당팀&rsquo;,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lsquo;광화문팀&rsquo;이었다. 광화문팀은 주로 당 외부 인사 영입과 지역구 여론조사를 맡았다. 세 팀이 각자 역할을 맡아 활동했지만 당 전면에서 총선을 지휘해 줄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다. 나는 이회창 전 총리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총리직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청와대와 대립하며 불명예 사퇴한 이 전 총리였기에 청와대와 여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YS 역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그를 끝까지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나는 이회창 전 총리와 무소속으로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박찬종 변호사 등을 범여권으로 집결시켜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YS에게는 &ldquo;이 전 총리를 재신임하는 모습을 통해 포용력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다&rdquo;며 직접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총선 이후 당 대표가 되고 대선 후보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결국 내 고집대로 이 전 총리는 다시 정치권 전면에 나서게 됐고 15대 총선 전국구(비례대표) 1번과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 전 총리는 감사원장 시절 특별히 신임하던 부하 직원을 전국구에 배치해 줄 것은 요청하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황우여 현 새누리당 대표다.이후 나는 과거 중앙조사연구소를 운영하며 선거를 지원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적당한 인물을 선별해 옥석을 가려내고자 했다. 1년 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났던 시기였다. 여론조사가 아닌 실제 지역구 득표력이 있는지 궁금하면 현지에 사람을 보내 민심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당시 신한국당 공천의 원칙은 개혁성, 합리성, 참신성, 세 가지였다. 물론 당선 가능성도 중요한 요소였다. 아무리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역구 안배가 중요한 일이기에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지도가 약한 학계 인사들은 일치감치 지역구에 내려 보내 표밭을 다지도록 권유하기도 했다.또 총선 때 정당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lsquo;세모(△&middot;경합) 지역구&rsquo;다. 15대 총선은 수도권 대부분이 세모지역구들이었다. 그만큼 여야 모두 인적&middot;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으며 총력전을 준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재야에서 활동하던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SBS 앵커 출신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검사 출신 안상수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었다. <img alt="1996년 4월 12일 새벽, 강삼재 선거대책본부장이 15대 총선 개표 결과 신한국당이 서울에서 예상외로 선전한 것으로 나타나자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24/1374625200630551.jpg"/>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예측이 불가능한 세모지역구는 청와대 출신이 대거 차출됐다. YS가 특별히 아끼던 김영춘, 이성헌 두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그 주인공이었다. 김영춘 비서관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성헌 비서관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두 사람 모두 민주계에 청춘을 바친 이들이었다. YS 역시 선거기간 내내 특별히 격려하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두 사람 모두 고배를 마셨다.당시 선거 과정은 피를 말릴 정도였다. 매일 여론조사를 돌리며 지지율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웠다. &ldquo;오늘은 ○○동 아파트 단지를 공략하라&rdquo; &ldquo;○○초등학생 학부모를 만나라&rdquo; &ldquo;○○시장에서는 이런 인사를 하라&rdquo;는 등 하나하나 지도했을 정도였다. 개인 능력이 아닌 여론조사 데이터가 전략보고서로 쓰인 것은 15대 총선이 처음이었다.이 같은 노력으로 수도권 세모지역구가 &lsquo;동그라미(○&middot;당선유력)지역구&rsquo;로 변하기 시작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서울 47개 지역구 가운데 24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직선제 이후 수도권은 언제나 야권 강세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예상치 못했던 성과인 셈이었다.15대 총선 승리는 여론조사와 같은 데이터를 적극 이용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는 공천심사위원회라는 별도 기구를 두지 않고 당 사무총장이 공천 전권을 갖고 휘두르던 시기였다. 대부분 지역구에서 전략공천이 이뤄졌기에 선거를 앞두고 로비와 청탁이 기승을 부렸다. 15대 총선 역시 전략공천이라는 측면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에서 객관적인 여론조사 데이터가 사용됐다는 것이 큰 차이였다.일각에서는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이긴 것은 야권분열 탓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한국당 역시 자민련의 탄생으로 분열된 채 선거를 치렀다. 신한국당 단독 의석만도 과반수에서 11석이 부족한 139석이었고 자민련 의석까지 합할 경우 189석이었다. 반면 야권은 구호만 있을 뿐 전략은 과거 총선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국회에 초선의원 비중이 절반(45%)에 가까워진 것도 문민정부가 만든 변화였다. 이후 정권에서 초선의원의 비중은 계속 늘었지만 그때만큼 개혁 전도사들이 대거 유입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이다. 15대 국회 당시 신한국당 초선의원들은 자기 전공분야에 있어서만큼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당 차원에서도 분위기를 조성했다.그 덕분인지 신한국당이 영입한 정치인 상당수가 현 정치권에서 상당한 거물이 됐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도 여럿 있다. 반면 지금 집권여당 초선의원들은 계파 이해관계와 여야 대치 정국 속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총선 승리에 기여한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선거가 끝나고 낙천자들을 만나는 것은 고통이었다. 공천을 신청한 사람 10~20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나를 적으로 대하는 기분이었다. 낙천자들은 하나같이 내가 본인들을 떨어뜨렸다는 듯이 &ldquo;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rdquo;, &ldquo;이렇게까지 나를 무시할 수 있느냐&rdquo;고 따져 물었다. 그럼에도 군부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 호랑이 굴로 들어간 YS가 15대 총선을 기점으로 뜻을 이뤘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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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7 Jul 2013 11:0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ilyohk@ilyo.co.kr | 김임수,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95년 전면 실시된 지방자치제, 그리고 그에 따른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6월 지방선거는 문민정부 3년차에 치러지면서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다. 결과는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참패. 흥미로운 점은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대립한 사안들이 2013년 정치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6&middot;27 지방선거에 관해 김현철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img alt="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종필 민자당 대표.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7/1374026579597160.jpg"/> 1995년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었다. 물론 지방자치가 문민정부에서 태동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장면 정부 때 지방자치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노태우 정부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풀뿌리 민주주의로 굴러가던 시기였다.정치권에서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가 실현된 것은 1995년 3월 통합선거법 제정이었다. 통합선거법은 개별적으로 적용되던 대통령, 국회의원,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선거를 하나의 법으로 흡수&middot;통합한 것이다. 통합선거법 시행 후 선거 비용을 나라에서 보전하면서 음성적으로 조성되던 선거자금이 획기적으로 줄기 시작했다. 통합선거법은 훗날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으로 명칭과 내용이 바뀌었지만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1995년 지방선거는 통합선거법이 적용된 첫 번째 선거였다. 여야는 문민정부 출범 이전부터 지방자치에 따른 선거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판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당의 열세로 기울었다. 민주자유당 내부에서는 &ldquo;이제 여당 공천장 필요 없어졌다&rdquo;, &ldquo;지방자치는 선거 하지말자는 이야기&rdquo;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 한마디로 지방자치를 하면 정권이 사는 대신 정당은 망한다는 것이었다.선거가 다가오면서 지방자치는 본연의 의미를 잃고 점차 정쟁의 도구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통합선거법 제정이 마무리되자 여야는 행정구역 개편과 기초의회 정당공천 문제를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자당에서는 읍면동을 없애고 시군구를 통합해 인구 100만~200만 명 규모의 광역 행정단위로 재편하는 2단계 행정개편안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lsquo;서울분열론&rsquo;도 들고 나왔다. 서울이 지방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하니 행정구역상 동서남북으로 나눠 사람을 뽑자는 것이었다. 다분히 선거를 의식한 논의들이었기에 청와대로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img alt="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7/1374026579597161.jpg"/> 지금 뜨거운 감자가 된 기초의회 및 기초자치단체장 정당공천 문제도 이때 처음 대두했다. 당시 여야에서는 광역의회와 광역단체장은 정당공천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서울시장이나 도지사는 덩치가 크고 중요한 위치이니만큼 정당의 도움이 필요한 자리다. 반면 기초의회와 기초단체장에 관해서는 주장이 엇갈렸다. 기초의회 의원은 지역민들과 생활 속에서 부딪쳐야 하는 자리고 이곳까지 정당공천을 하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가 아니라는 것이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생각이었다. 지금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당시에도 똑같이 나온 것이다.YS가 기초의회 정당공천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지방자치를 실시했지만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강하게 예속돼 있었는데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자는 것이었다. 정략적으로 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지만 정치권은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도리어 야당인 민주당은 정당공천이 없으면 기초의회에 지방 토호들과 연계된 여권 쪽에 표가 몰려 지방자치의 실현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민자당과 논의 끝에 기초의회 공천배제를 확정하려 하자 이를 &lsquo;공천배제파동&rsquo;이라 명명하며 국회 보이콧까지 선언하며 맞섰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아예 지방자치를 연기하려고 한다는 음모론마저 나왔다. 지방자치 실시에 대한 합의는 노태우 정부 4개 정당이 모두 입을 모은 데 따른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여야 대립이 심각해지자 YS는 여당이 주장한 행정구역 개편과 야당이 요구한 기초의회 정당공천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 문제를 정리했다.결과적으로 1995년 지방선거는 민자당의 참패로 귀결됐다. 당시 시대상황도 집권 여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로 촉발된 쌀 시장 개방의 여파가 여전했다. WTO(세계무역기구)체제 출범 이후 관세 철폐는 세계화에 발맞추는 과정이었지만 쌀 시장 개방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감은 그대로였다. <img alt="1995년 이명박 의원의 서울시장 후보 접수 모습. 당시 민자당에선 형식적인 경선을 거쳐 정원식 전 총리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지만 결국 민주당 조순 후보에게 패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7/1374026579597162.jpg"/>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 당시 미국산 소고기 파동처럼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지지 않았다. YS가 국민을 막아서기보다 적극 대화에 나서 쌀 시장 개방만큼은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일 것이다.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남북한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기에 쌀 시장 개방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민정부가 쌀 시장 빗장을 풀었다는 야권의 공세는 임기 내내 YS를 괴롭혔다.지방선거 패배의 직접적 원인은 선거 직전인 1995년 2월 9일 김종필 민자당 대표(JP)의 탈당이었다. 당시 선거를 목전에 둔 민자당에서는 김종필 대표 체제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다. 세계화와 문민개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명분이었지만 간단히 말해 구세력이니 비켜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민주계의 요구가 집요했다. 민주계의 뜻이 곧 YS의 뜻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탓인지 YS와 민주계, JP의 공화계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YS는 JP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정권을 유지하고 안정 속 개혁을 추진하는데 중요하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YS와 JP는 정치적 노선이 매우 달랐지만 궁합이 꽤 잘 맞았다. YS는 야당 시절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갈등 관계를 유지했지만 JP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탈당 직전 JP와의 만남 때 YS는 &ldquo;이건 결코 내 뜻도 아니고 지금 당에서 너무 나가고 있다&rdquo;며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JP가 탈당한 이유는 민자당에 남아있으면 내각제 개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YS는 내각제 합의는 3당 합당의 근간이 되긴 했지만 민정계가 정략적인 이유로 합의 문서를 공개한 순간 그 합의는 깨졌기에 내각제는 국민의 동의를 얻은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JP는 내각제 합의에 대한 불씨를 여전히 살려 놓고 있었던 것이다.JP의 탈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은 정치권을 강타했다. 충청권은 말할 것도 없었고 TK(대구&middot;경북) 지역에서도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민정계가 크게 선전했다. 선거가 끝나고 언론에서는 권력이 PK(부산&middot;경남)의 민주계에서 다시 TK의 민정계로 넘어갔다는 분석마저 내놓았다. 집권 여당이 분열된 셈이니 예견된 참패였다고 할 것이다. 1995년 지방선거의 패배는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순간이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95년 서울시장 선거 비화&ldquo;MB가 집요하게 경선 요구&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7/1374026579597163.jpg"/> 서울시장 선거는 &lsquo;대선 축소판&rsquo;으로 불릴 만큼 국민적 관심사다. 특히 1995년 서울시장 선거는 관선 체제가 막을 내리고 첫 번째 민선 서울시장을 뽑는다는 측면에서 더욱 화제였다. 결과는 민주당 조순 후보의 승리였다. 김현철 교수는 1995년 서울시장 선거의 불리한 판세를 예견하고 있었다.―1995년 지방선거 중 서울시장이 가장 뜨거웠을 것 같다.&ldquo;인구의 50% 가까이 모여 있고 대권으로 향할 수 있는 자리이니 당연할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히 수도권 여론조사에 공을 들였는데 매번 민주당을 상대하기 쉽지 않겠다는 결과가 나왔다.&rdquo;―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정원식 전 총리는 민주당 조순 후보보다 약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ldquo;후보가 정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7년 대선 때 &lsquo;9룡&rsquo;이 난립했던 것처럼 1995년 서울시장 선거 역시 자천타천으로 후보가 난립했다. 당 밖에서는 이회창, 정원식 두 전직 총리와 고건, 박찬종 의원 등이 있었고 당내에서도 이세기 의원, 최병렬 당시 서울시장, 김덕룡 사무총장 등이 거론됐다.&rdquo;―김 교수가 특별히 마음에 둔 후보가 있었나.&ldquo;나는 반드시 경선을 거쳐 뽑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경선을 통한 컨벤션효과(정치 이벤트 직후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가 상당하지 않나. 우리도 그런 그림을 통해 정당 지지율을 끌어 올리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정원식 전 총리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기도지사에 이인제 의원이 나왔으니 그에 맞는 젊고 개혁적 인물이 나와야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을 것으로 봤다.&rdquo;―그 당시에도 당내 경선을 하긴 했다.&ldquo;형식적으로 경선을 거쳤을 뿐 사실상 추대한 것이었다. 당 안에 후보가 너무 많다 보니 사전에 조정하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가겠다는 당내 우려가 컸다. 또 경선을 하면 파가 나뉘는 등 시끄러워질 것으로 생각해 추대로 간 것이 패착이었다.&rdquo;―이명박 전 대통령도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다.&ldquo;나에게 끝까지 경선을 요구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14대 국회 전국구 의원으로 들어왔는데 1987년 대선에서 정주영 회장이 출마하자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그를 영입해 타격을 입히려는 목적이었다. 많은 서울시장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경선에 참여한 이명박 의원이었지만 당시 당내 입지로는 정 전 총리와 싸움이 안 됐다.&rdquo;―결국 나중에 서울시장이 되고 대통령까지 당선됐다.&ldquo;하여튼 휴가 때 청남대까지 전화해 경선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패기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는데 결국 대통령까지 됐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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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4] 인사파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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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0 Jul 2013 09:24: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dquo;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rdquo; <img alt="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중단없는 개혁에 앞장설 것을 당부했다. 사진출처=&lt;변화와 개혁&g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0/1373415843630540.jpg"/>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의 인사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이는 또한 인복이 많은 정치인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민정부는 &ldquo;인사는 만사&rdquo;보다 &ldquo;인사는 망사&rdquo;라는 말이 더 회자된다. 보안 인사, 밀실 인사가 이뤄지다보니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잦은 내각 개편으로 국무총리는 6명, 장관은 118명이나 &lsquo;배출&rsquo;했다. 장관들은 훗날 &ldquo;대통령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다&rdquo;는 후일담을 쏟아냈다. &ldquo;YS 차남 현철 씨가 인사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rdquo;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문민정부 초대 내각에 대한 김현철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문민정부 인사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과거 군부정권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당시 청와대가 보관하고 있는 존안자료(인사자료)들은 쓸모가 없었다. 당시 안전기획부와 보안사령부 같은 권력기관들을 상상해 보라. 편향되거나 구태의연한 인사들에 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문민정부에 걸맞은 참신한 인물을 내부 자료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결과적으로 YS는 공적 채널보다 사적 채널에 의존하게 됐다. 대선이 끝난 직후 YS는 자신의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사람과 직접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본인 성격상 직접 내각 인선에 관여해 근사한 작품 하나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지역별 안배였다. 문민정부 첫 내각은 영남 8명, 호남 6명, 충청 4명으로 지역 안배가 최우선으로 이뤄졌다. 당시 지역감정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호남 출신 &lsquo;모시기&rsquo;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전북 무주 출신 황인성 국무총리였다. 황 총리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으로 초대 내각에 어울리는 개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징성이 강하고 지역 안배가 크게 작용했다.이회창 감사원장은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이회창 씨에 관해서는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감사원장 시절 그의 활약상은 국민적 지지를 얻기에 충분했다. 황 총리와 이 감사원장은 전형적인 발탁 인사로 YS와 정치적으로 인연이 있었거나 선거 때 공을 세웠던 사람들은 아니었다.YS는 인선 과정에서 지역 안배뿐만 아니라 연령과 성별까지 고려할 것을 주문해 실무진들은 어느 자리하나 쉽게 맞출 수 없었다고 토로하곤 했다. 기준에 맞춰 몇 사람을 추천해도 조금이라도 개혁 이미지와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img alt="김무성, 김기섭"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0/1373415843630541.jpg"/> 이 과정에서 학자 출신, 특히 서울대 출신이 많이 등용됐던 것은 일견 사실이다. 문민정부에서 학자들이 많이 발탁됐던 것은 그만큼 청렴성과 전문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기성 정치권에서는 대통령과 발맞춰 개혁전도사 역할을 맡을 인물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YS는 임기 내내 새로운 인물 발굴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당 총재 시절 미리 인재를 발굴&middot;육성하지 않았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어렵사리 초대 내각을 조직하고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속속 등장했다. 문민정부에서 시작한 공직자 재산공개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상철 서울시장은 그린벨트에 땅을 사고 집을 지은 것이 드러나 재임 7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박희태 법무부 장관과 박양실 보건사회부 장관은 각각 자녀 편법 입학과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경질됐다.당시는 인사청문회 제도라는 것이 없어 청와대로서는 또 어디서 구멍이 생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문민정부 초반 인사를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인사청문회와 같이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진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낙마한 박근혜 정부와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이 끊이지 않고 지적되는 것과 달리 YS는 누구와도 소통하는 대통령이었다. 이는 박상범 경호실장을 뽑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통령 경호실장은 막중한 사명감이 부여되는 자리이기에 전문성과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 필요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군사정권 때부터 일한 군 출신이 많아 경호실장만큼은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YS는 박상범 경호실장을 끝까지 고집했다.잘 알려졌듯 박 실장은 10&middot;26 사태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유일하게 살려준 부하였다. 처음에 그는 경호실장 자리를 고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YS는 박 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청와대로 불러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그를 경호실장으로 앉혔다. 10&middot;26 때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박 실장은 아버지가 조깅을 할 때마다 제대로 뛰지 못해 경호상 문제점이 계속 지적됐지만 그때마다 YS는 &ldquo;박 실장은 아부하고 욕심 부리고 그런 게 없다&rdquo;며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img alt="황인성, 이회창"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10/1373415843630542.jpg"/>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ldquo;김현철이 내각 인선에 부당개입했다&rdquo;는 이야기다. 이 기회를 통해 내가 문민정부 인사에 관여했다는 세간의 오해를 풀고 싶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진실처럼 굳어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ldquo;김현철이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내정돼 있던 김무성 의원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측근인 김기섭을 앉혔다&rdquo;는 것이 사실인 양 보도된 바 있다. 김무성 의원은 나라사랑실천본부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본인 스스로 청와대행을 원했다. 당시 YS가 &ldquo;김무성은 똘똘하고 기업가 자제라 돈 욕심이 없어 크게 문제될 것이 없겠다&rdquo;고 말한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김기섭 기조실장은 나보다 아버지가 먼저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김 실장은 신라호텔 총지배인 시절부터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어 왔고 YS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안기부장으로 김덕 교수를 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조실장 역시 외부 인사가 필요한 찰나 정치력과 자금운영에 대한 감각이 있는 그가 자연스럽게 물망에 오른 것이다. 김 실장 역시 대선이 끝난 이후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가고 싶다고 YS에게 직접 요청했다.물론 내가 직접 추천해 청와대로 들어간 이가 없지는 않다. &lsquo;동숭동팀&rsquo;을 맡으며 선거에 공을 세웠던 전병민 실장과 청와대 내 사정팀을 이끌었던 이충범 비서관은 내가 직접 추천한 인사였다. 1992년 대선이 끝난 뒤 전 실장은 &ldquo;대통령 지근거리에서 개혁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rdquo;는 바람을 나에게 전했다. 대선 때 공헌을 했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심정인 것 같아 흔쾌히 도움을 준 것이었다.물론 그런 오해들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지금은 알 것 같다. 새로운 인물이 청와대로 갈 때마다 여당 내 민정계와 공화계, 심지어 민주계조차 시선이 곱지 않았다. 특히나 전병민 실장은 원래 없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었기에 민주계 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김기섭 실장 역시 민자당 총재 특보로 정치권 입문하는 과정에서 다들 나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직접 확인해 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당 안에서 세력이 단단하게 굳어진 상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전병민 실장이나 김기섭 기조실장이었고 자연스럽게 나와 연결시키는 분위기였다.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지만 민주계 인사들조차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원통하다. 내가 아는 정치권 인사들은 대부분 그들도 알고 있었고 나는 따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시간이 지나면서는 내가 주말마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오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건 가족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임에도 유독 나에게만 십자포화가 가해졌다. 대통령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인수위 &lsquo;효자프로젝트&rsquo; 비화&ldquo;청 개방&middot;안가 철거&hellip;다 여기서 나와&rdquo;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lsquo;대통령직인수위원회&rsquo; 제도는 문민정부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다. 문민정부 인수위는 지역별로 1명씩 인수위원을 뽑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현철 교수에게 첫 인수위원회 비화를 물었다.―인수위원회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도 문민정부에서다.&ldquo;민자당에서 미국이나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 만들었던 것이 지금의 인수위원회다. 과거 대통령들은 사실상 인수인계라는 게 필요 없지 않았나. 지금처럼 정부조직개편안을 만들거나 대통령 공약을 하나하나 따지기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분위기였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기자들이 인수위 복도 앞에 장사진을 친 것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rdquo;―인수위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당의 견제도 심했다고 들었다.&ldquo;당시 김종필 지도부가 틈틈이 당 우위를 주장하곤 했다. 너무 견제가 심해 어느 날은 정원식 인수위원장이 김종필 총재를 만나 &lsquo;부처별 업무파악과 취임식 준비만 하겠다&rsquo;며 달랬을 정도였다고 한다.&rdquo;―막판에는 &lsquo;효자 프로젝트&rsquo;라는 것은 무엇인가.&ldquo;효자 프로젝트는 정부 출범 이후 100일 동안의 청사진을 그린 일정표였다. 당시 인수위가 효자동에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청와대와 인왕산 개방, 경복궁 내 30경비단 이전, 궁정동 안가 철거와 같은 아이디어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국민들에게 문민정부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본다.&rdquo;―인수위와 관련해 본인이 맡은 역할이 있었나.&ldquo;엄연히 인수위원들이 따로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김무성 의원이 인수위 행정실장은 맡고 있어 간간히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정도였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바로잡습니다&lt;일요신문&gt; 1103호 &lsquo;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lt;3&gt; 금융실명제&middot;재산공개&rsquo; 기사 본문 중 &lsquo;김용민 세제실장&rsquo;은 &lsquo;김용진 세제실장&rsquo;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3] 금융실명제·재산공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881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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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3 Jul 2013 09:36: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정이 인적개혁이라면 제도개혁의 꽃은 금융실명제였다. 안정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김영삼 대통령(YS)이었지만 이 두 가지만큼은 반격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는 서민들에게는 은행에 갈 때 신분증을 꼭 소지해야 하는 정도의 변화였다면 검은 돈이 일상화된 정&middot;관계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조치였다. 김현철 교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당시 상황을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03/1372811765588100.jpg"/> 지난 1993년 8월 12일 밤 9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하나회 청산에 이은 &lsquo;또 하나의 혁명&rsquo;이었다. 역대 정부에서도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금융실명제를 거론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가까운 일본조차도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으로 금융실명제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럼에도 YS는 대선 때 &ldquo;자금의 투명성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정치&middot;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정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런 악순환을 반드시 끊겠다&rdquo;고 목소리를 높였다.물론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정부 출범 이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언론이 문제였다. 보수 언론들은 &ldquo;문민정부가 개혁을 부르짖지만 금융실명제만은 결코 하지 못할 것&rdquo;이라며 바람을 잡고는 했다. 정작 8월 12일 금융실명제가 전격 시행되자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는데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금융실명제를 깜짝쇼 하듯 진행했다며 각종 비난을 쏟아낸 것이었다. 꼭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너무 다른 아이 같았다.이런 상황에서 드러내 놓고 일을 도모한다면 배가 산으로 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강경식 부총리 역시 &ldquo;금융실명제 문제는 국회에서 논의한다거나 공청회를 여는 식으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rdquo;고 주장했다. 나 역시 아버지께 &ldquo;가장 중요한 개혁은 임기 1년차에 해치워야 한다&rdquo;고 자주 말씀드리곤 했다. 취임 이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첫 휴가 때도 YS는 금융실명제에 관한 고민에 잠겼다. <img alt="1993년 8월 금융 실명제 실시를 앞두고 국민은행 직원이 고객의 통장과 신분증을 대조해 보고 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03/1372811765588101.jpg"/>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확신을 한 것은 6월 말이었다. 이후 YS는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밝혔다. 이 부총리가 총괄을, 홍 장관은 실무 책임을 맡았다. 6공 당시 외환은행장이었던 홍 장관은 YS가 무척이나 신임한 경제관료 가운데 한 분이다.홍 장관은 &ldquo;보안이 첫째&rdquo;라는 대통령의 당부를 고려해 차관보 이상급에는 일절 알리지 않은 채 실국장급에서 실무진을 차출했다. 차관급 이상이 참여하면 보안 유지가 힘들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재무부 소속 김용민 세제실장이 팀을 이끌었고 김진표 전 민주당 원내대표 역시 팀에 포함됐다. 당시 재무부 세제심의관으로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하고 있던 차였다.7월부터는 보안 유지를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강남 대치동 빌딩에 비밀 사무실을 구해 KDI(한국개발연구원) 측과 초안 작업을 진행했고 이후 재무부팀은 과천 주공아파트에 모여 실무 작업을 계속했다. 한 달 넘게 집에도 가지 못한 채 붙잡혀 있으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생겼다. 공무원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기자들이 의문을 품을 수 있어 일부 직원들은 하와이 해외출장 핑계를 대기도 했다. 트렁크를 끌고 공항에 나갔다 비행기에 타지 않고 곧장 숙소로 오는 식이었다. 가족들에게 해외에 머무는 것처럼 안부 전화도 잊지 않았다.8월에는 대략적인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고 실무진도 조금씩 늘어났다. 모두들 다음 순서는 알지 못한 채 계속 준비만 하는 상황이었다. YS는 하나회 숙정 때와 같이 어느 누구에게도 D-Day(디데이)를 알리지 않았다. 황인성 총리도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고 청와대 내에서는 박재윤 경제수석조차 잘 몰랐다고 한다. 박 수석은 금융실명제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별도로 알리지 않았던 듯하다. <img alt="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03/1372811765588102.jpg"/> 당시 청와대 분위기는 &lt;일요신문&gt; 기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박재윤 경제수석은 &ldquo;금융실명제는 시기상조로 경제를 먼저 튼튼하게 한 다음에 해야 한다&rdquo;는 &lsquo;외과수술론&rsquo;을 주장했다. 이에 맞서 김용민 세제실장은 &lsquo;목욕탕수리론&rsquo;을 들고 나왔다. 목욕탕은 성수기인 한겨울 대신 손님이 뜸한 여름에 수리하듯이 경제 역시 나쁘다고 이야기할 때 개혁적인 조치를 해야 별로 잃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홍재형 장관은 두 가지의 절충안인 &lsquo;뒤주론&rsquo;을 거론했다. 뒤주를 둥근 바가지로 퍼내면 귀퉁이에 쌀이 조금씩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예외적인 조항들을 남겨 놓자는 것이었다.YS가 채택한 것은 목욕탕수리론인 셈이었다. 금융실명제에 관한 대통령의 의지가 측근들의 반대 여론에도 꺾이지 않은 것이었다. 6월 말 처음 지시를 내린 이후 한 달 보름가량 진행된 금융실명제는 8월 12일 밤 9시에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전격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10월까지 가&middot;차명으로 된 계좌에 대한 유예기간을 주면서 다음날부터 창구가 북새통을 이뤘고 결과적으로 90% 이상 실명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middot;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 추징을 가능케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금융실명제와 함께 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공직자 재산공개 역시 문민정부 히트작 중 하나다. YS는 취임 이틀 뒤인 2월 27일 본인의 재산 18억여 원과 함께 청와대 내각 인사들의 재산 역시 국민들에게 전격 공개했다. YS는 당선인 시절 가족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재산공개에 대해 미리 언질을 줬다. 앞으로 취임을 하게 되면 투명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자진해 재산공개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가족들에게도 특별히 몸가짐을 당부했는데 이때 들려준 에피소드는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ldquo;잘 들어봐래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본보기로 잡은 게 며느리였다카이. 정치권에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개석이가 집을 급습해가 수색을 했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나왔다는 거 아이가. 그날 이후 장개석이 며느리를 불러가 &lsquo;이게 마지막 식사&rsquo;라며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나. 권총인기라 권총.&rdquo; <img alt="1993년 9월 24일 홍재영 재무장관(맨 왼쪽)과 이경식 경제부총리(가운데)가 금융실명제 제2차 후속 조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703/1372811765588103.jpg"/> 가족들도 더 이상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5월에는 공직자윤리법이 제정되면서 국회의원들 역시 재산공개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미 1차 공개 때 김상철 서울시장을 비롯해 몇몇 장관들이 낙마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기에 정치권은 긴장감으로 팽배했다.국회의원 재산공개 후폭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타격이 컸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다치기 시작하자 YS도 무척 괴로워했다. 그 중 기억에 남아있는 분이 김재순 전 국회의장(현 샘터 고문)의 정계은퇴였다. 김 전 의장은 5대 국회에서부터 YS와 동고동락한 30년 지기나 다름없었다. YS는 조병옥 박사가 이끄는 민주당 구파, 김재순 의장은 장면 총리가 주축인 민주당 신파로 나뉘었지만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김 전 의장이 재산공개 파동으로 정계를 떠나며 남긴 유명한 말이 &lsquo;토사구팽&rsquo;이다. 여기에 대한 YS의 답은 &lsquo;선공후사&rsquo;일 것 같다. 개인적인 미안함과는 별개로 개혁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의 부정입학 문제로 민자당을 떠나야 했던 최형우 사무총장 역시 기억에 남는다. 삼당합당 때도 YS 곁을 묵묵히 지켜준 김동영 장관이 YS의 대선 승리를 보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최형우 장관 역시 YS 곁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 &lsquo;좌동영 우형우&rsquo;로 불린 이들은 군사 정권 당시 YS의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그 무렵 민주계뿐만 아니라 민정계와 공화계 역시 문민정부 초대 내각 인선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안정 속에서 개혁을 추진했던 문민정부는 초대 내각 인선 과정에서도 살얼음판을 걸었다. &lsquo;황인성 총리-이회창 감사원장&rsquo; 카드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진행됐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lsquo;YS 집사&rsquo; 장학로 실장 비리사건 막후&ldquo;아버지 연금 시절 먹 갈던 그가&hellip;&rdquo;대통령 취임식 당시 &ldquo;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rdquo;며 청렴성을 강조했던 YS에게 1996년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구속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당시 장 실장은 기업과 정당 관계자 40여 명으로부터 27억 6000만 원을 받은 것이 드러나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김현철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장학로 부속실장 구속은 문민정부 도덕성에 오점을 남겼다.&ldquo;특히나 총선을 앞두고 터진 사건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투표 한 달을 앞둔 3월에 구속됐는데 당시 선거를 위해 뛰던 민자당 의원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rdquo;―장학로 실장은 &lsquo;YS의 집사&rsquo;라 불린 인물이었는데.&ldquo;아버지(YS)께서 가택연금 중일 때 먹을 갈거나 먹지를 손으로 누르고 있는 등 그야말로 잡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업무 특성상 자연스럽게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갔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그만큼 당시 청와대 부속실 위상이 강했던 것인가.&ldquo;군사정권 때 청와대 부속실은 사실상 각종 기업을 통한 통치자금 조성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부속실 사람들로서는 비자금을 대형금고에 맡기거나 차명계좌로 돌리는 역할이 당연시됐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를 했었어야 했다.&rdquo;―총선을 앞둔 정치 공세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ldquo;장 실장의 비리 폭로를 주선한 오길록 당시 국민회의 종합민원실장은 국민의 정부 때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회사의 자금조성과 관련해 사법처리됐다. 또 비리를 제보한 백 아무개 씨는 &lsquo;오 실장이 폭로 대가로 현금 1억 원과 공원 매점 운영권 등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rsquo;며 손해배상소송을 내기도 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폭로 정치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돌아봐야 한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2] 동숭동팀·광화문팀 실체]]></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826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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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6 Jun 2013 09:26: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2000년 10월 19일 열린 민주산악회 현판식.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26/1372206378582640.jpg"/> 문민정부 초반 개혁 과정엔 베일에 싸인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대권 책사로 활동한 동숭동팀을 이끈 전병민 실장이다. 전 실장의 동숭동팀은 1992년 대선 전략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문민정부 내각 인선을 포함한 초반 개혁 과제를 비밀리에 입안하고 준비했다. YS의 차남인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당시 이와는 별도로 광화문팀을 이끌며 선거 일선에서 활동했다. 김 교수는 두 팀의 업무 영역이 서로 달랐기에 마주할 일은 별로 없었다고 회상한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아버지(YS)는 민자당 대표 시절부터 &lsquo;대권 수업&rsquo;을 받아 왔다. 민주화 투쟁 등으로 오랫동안 굳어진 야당 이미지를 벗고 국가지도자로서의 덕목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는 대선후보로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이었다.수업은 정치&middot;경제&middot;사회&middot;문화&middot;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때 내가 맡은 역할은 분야별로 교수들과 법조계, 언론계 등 인맥을 동원해 하나의 싱크탱크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인 이들은 문민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분야별로 점검하고 의논해 나갔다.선거가 다가오면서는 경제 분야에 대한 집중 레슨이 시작됐다. 달변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경제인 출신인 정주영 후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정책자문교수단이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줬는데 이들은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소속해 YS를 계속 도왔다.1992년 대선을 떠올리는 이들은 전병민 실장의 &lsquo;동숭동팀&rsquo;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 하는 것 같다. 동숭동팀은 전병민 실장이 만든 정치컨설턴트 회사 &lsquo;임팩트 코리아&rsquo;가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전 실장은 원래 YS 사람은 아니었고 대선 직전에 인연이 되어 함께했다. 그 전에는 노태우 정부 당시 이영호 체육부 장관이 만든 한국정책연구원 기획실장으로 있었다. 지금도 그가 전 실장으로 불리는 이유다.당시 동숭동팀의 주된 역할은 분과별로 전문가들을 모아 정책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 실장은 분과별 회의가 끝나고 캠프 측에 보고해야 할 때 일종의 연락간사 역할을 담당했다. 분과별 회의는 동숭동보다 시청 인근에 위치한 호텔을 옮겨 다니며 이루어졌다. 선거 전략과 함께 집권 이후 개혁안들이 논의되는 자리였기에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동숭동팀 멤버들은 다른 분과위에서 어떤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당시 언론에서 &ldquo;자신들이 동숭동팀인지도 모른 채 활동했다&rdquo;는 식으로 보도한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싶다.문민정부 초반 동숭동팀은 청와대 내 민정&middot;정무&middot;총무&middot;교문사회&middot;공보 등 각 수석실에 골고루 배치돼 계속 호흡을 맞췄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돈식 정무수석, 박재윤 경제수석,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등이 있다. 뒤에 들어온 김영수 민정수석도 동숭동팀의 일원으로 볼 수 있고 내각에 들어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실제 정책기획을 주도하기도 하고 금융실명제와 같은 큰 아이디어를 실행시키기도 했다. <img alt="동숭동팀을 이끌었던 전병민은 청와대 정책수석 임명 3일 만에 낙마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26/1372206378582641.jpg"/> 전병민 실장 역시 청와대 정책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실제 그는 문민정부 출범 이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정부조직개편안과 &lsquo;돈을 묶고 입을 푼다&rsquo;는 통합선거법을 제도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계속 있었다면 문민정부 초반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초대 정책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된 전병민 실장은 장인이 항일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의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지면서 3일 만에 물러났다).동숭동팀이 막후에서 활동한다는 인상을 깊게 남긴 것은 아마도 선거를 직접 뛰거나 YS를 직접 만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당선 직후 YS가 동숭동팀 사람들을 초청해 오찬을 가진 것은 한두 번뿐이었다.반면 내가 주축이 됐던 &lsquo;광화문팀&rsquo;은 앞에서 뛰는 조직이었다. 광화문팀은 주로 대선 일정을 조정하고 언론 대응을 맡았다. YS는 틈틈이 광화문 사무실에서 TV토론을 대비하기도 했는데 실전과 똑같이 카메라를 미리 세팅해 놓고 질문을 맞춰보곤 했다. 당시 광화문팀이 대통령 연설에 프롬프터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정책자문교수단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광화문팀과 식사를 하면서 모임을 가졌다. 지금으로 치면 정치인 공부모임이었던 셈이다.동숭동팀과 광화문팀 멤버들이 청와대와 내각에 들어갔던 것은 정책의 연속성을 위해서였다. 5년 단임제의 한계 때문에 2년 안에 모든 개혁 내용을 제도화하지 못하면 통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과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며 동고동락한 민주계 인사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는 않았다.1992년 대선의 또 다른 핵심 축이었던 민주계 인사는 &lsquo;민주산악회&rsquo;와 &lsquo;나라사랑실천본부&rsquo;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민주산악회가 야당 시절부터 함께한 올드 멤버들로 이루어졌다면 나라사랑실천본부는 선거를 위해 새롭게 구성된 젊은 조직이었다. 나와 함께 김혁규 전 경기지사, 김무성 의원, 김영춘 전 의원 등이 핵심에서 활약했다.이런 사조직들은 선거가 끝나고 대부분 해체됐다. 불편부당한 정권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나로서는 아쉬운 면도 있었다. 특히 이들을 사후 관리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게 됐다. 나름대로 모두 YS 당선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기에 불만이 쌓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때문에 사조직 사람들의 불만을 듣고 그 일부를 청와대에 전달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청와대 내각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당에 있는 사람들조차 대통령에게 직접 하기 힘든 부탁을 나를 통해 하려고 들었다.그 무렵 나는 공개적으로 정치권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나는 YS에게 &ldquo;박준규 국회의장 비서실에 들어가 직함을 갖고 당당하게 일하고 싶다&rdquo;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말았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청와대에 대한 첫인상&ldquo;대형금고 용접공 불러 분해&rdquo; <img alt="김영삼 대통령이 1998년 1월 7일 문민정부의 역대 총리들을 초청해 만찬을 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26/1372206378582642.jpg"/> 문민정부 출범 당시 김현철 교수의 청와대 거취 문제가 반짝 이슈가 됐다. 당시 언론들은 &ldquo;기혼인 대통령 자식이 청와대 안에서 지낸 선례가 없다&rdquo;며 김 교수의 청와대행을 우려하는 보도를 내 보냈다. 김 교수는 &ldquo;원래부터 그 안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rdquo;고 한다. 그에게 청와대 첫인상은 어떻게 남아있을까.―청와대에 처음 입성했던 날이 생생할 것 같다.&ldquo;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어 청와대에 살지는 않고 주말마다 가족들을 동반해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했다. 당시 청와대는 건물부터 권위적인 느낌이 강해 구중궁궐 같았다. 아버님 역시 외로워했고 &lsquo;절간 같다&rsquo;는 말씀을 자주 했다.&rdquo;―YS가 취임 직후 청와대 집무실 금고를 보고 엄청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ldquo;나도 직접 봤다. 대형 금고가 청와대 집무실에도 있었고 대통령 관저에도 있었다. 은행에서 쓰는 대형 금고를 상상하면 될 거다. 그 존재만으로도 전 정권의 통치자금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물건이었다. 문민정부가 정치자금에 있어서만큼은 깨끗한 정부가 되겠다고 밝힌 만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원래는 그대로 옮기려고 했는데 크기가 너무 커 용접공들을 불러 분해해 버렸을 정도다.&rdquo;―첫 휴가 때도 궁금한데, YS와 함께했나.&ldquo;물론이다. 청와대에서 헬기를 띄워 청남대까지 날아가는데 대통령이 헬기를 타면 똑같은 모양의 헬기 여러 대가 함께 뜨는 게 장관이다. 북한 공격을 대비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전방에 있는 초계기들이 함께 뜨기도 한다.&rdquo;―지금 청남대는 일반인도 갈 수 있게 됐다.&ldquo;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전용 별장을 없애고 일반에 공개한 것은 정말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은 쉴 때는 확실하게 쉴 수 있어야 한다. 쉴 곳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면 주변에 민폐만 끼친다. 경호로 인해 아무 호텔에서 묵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외에 나가면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쏟아져 자칫 휴가가 스트레스가 된다.&rdquo;―청와대에서 기거하지 않으니 경호가 문제였을 텐데.&ldquo;원래 청와대 측에서 경호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차량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경호 차량이 따라다니면 일상이 불편하기도 하고 경호원도 4명이나 필요하다.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경호원 1명만 내 차에 동행시켜 다녔다.&rdquo;―청와대 관저에는 취사시설이 없다는 것도 사실인가.&ldquo;영부인이 직접 요리하는 시스템은 아니다. 원래부터 상도동 자택에는 요리라는 개념이 없었다.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오가고 하루에 많게는 100명까지 식사를 대접할 때도 있어 요리를 할 수가 없다. 김치나 멸치볶음과 같이 몇 가지 밑반찬을 미리 준비해 놓고 내는 정도였다. &lsquo;민주멸치&rsquo;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도동 식구가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rdquo;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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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 하나회 숙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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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8 Jun 2013 09:3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imsu@ilyo.co.kr | 김임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18/1371515444576770.jpg"/> &lsquo;하나회 숙정&rsquo;1993년 3월 대한민국에 &lsquo;별&rsquo;이 우수수 떨어지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진행된 개혁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30년간 이어진 군부 정권의 종말 선언과 같았다. 지금까지도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하나회 숙정을 꼽는 이들이 많다.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ldquo;측근 누구도 YS의 정확한 의중을 꿰뚫지 못한 &lsquo;1인 기획&middot;실행 작전&rsquo;이었다&rdquo;라고 전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한다.&lsquo;하나회&rsquo;는 육군사관학교 동기(11기)인 전두환&middot;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군대 내 사조직이다. 군내 사조직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를 암암리에 묵인해 왔고, 결국 하나회 출신들은 12&middot;12 사태를 일으킨 뒤 정권을 찬탈했다.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의 당면 과제였다.김영삼 전 대통령(YS)이 하나회 숙정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이 1990년 삼당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총재를 맡으면서부터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lsquo;더 오래된 생각&rsquo;이었다. YS는 정치 입문 때부터 군에 대한 개혁적 마인드를 가졌다. 1954년 3대 국회 때 자유당 공천을 받은 뒤 처음 배정된 상임위가 국방위원회였다. 이후에도 국방위와 자주 인연을 맺었다.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보문동에 살던 때였는데 옆집에 지체 높은 군 장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누군가 장성 집 안으로 기름통을 실어다 나른 것이다. 알고 보니 군용 기름을 몰래 빼내 팔아먹고 있었다. YS가 이를 국회에서 문제 삼았는데 당사자가 집으로 찾아와 거의 빌다시피 해 사태가 커지진 않았다.1986년 &lsquo;폭탄주 사건&rsquo;도 빼 놓을 수 없는 계기였다. 그 해는 전두환 정권 치하, 직선제 개헌 이전이었기에 정치군인들의 위상이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특히 하나회 출신들은 주기적으로 여야 중진들과 국방위 소속 의원을 요정에 불러들여 술판을 벌이곤 했다.고 김동영 정무장관이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을 때다. 김 전 장관은 내가 &lsquo;아저씨&rsquo;라 부르며 어린 시절부터 따르던 분이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면서 동영 아저씨가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한마디하고 말았다.&ldquo;거물은 안 보이고 똥별들만 왔구먼.&rdquo;실언이었다. 당시 참석자를 떠올려 보면 12&middot;12 주역인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과 성질이 불같기로 유명한 정동호 전 육군참모차장, TK(대구&middot;경북) 출신 이대희 인사참모부장 등 전두환 사단의 핵심 멤버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설상가상 이세기 민정당 원내총무가 한 시간이 넘도록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이들의 심기는 더 불편해졌다. <img alt="93년 5월 긴급소집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왼쪽)와 1997년 단행된 군 정기 인사."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18/1371515444576771.jpg"/> 그때 이 총무가 이미 취한 상태로 술자리가 나타났다. 동영 아저씨의 실언과 이 총무의 지각으로 약이 오른 장성들은 &ldquo;여야가 사이좋게 정치 잘해야 우리가 나라만 열심히 지키지&rdquo;라며 되받아쳤다. 이에 발끈한 남재희 민정당 의원이 벽에다가 술잔을 던지고, 그 유리 파편이 장성 얼굴에 튀면서 피범벅이 되고, 육탄전이 전개됐다. 남 의원은 그 자리에서 실신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YS는 &lsquo;의회를 무시한 처사&rsquo;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폭탄주 사건 이후 YS는 하나회 숙정에 대한 더욱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됐다. 오랜 측근인 민주계 인사들 역시 YS의 하나회 숙정 의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과 거사일자는 철저히 불문에 부쳤다(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훗날 &ldquo;YS의 군 개혁구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이 넘지 않았을 것&rdquo;이라고 말했다).개혁의 전조는 1993년 3월 5일 육사 49기 졸업식으로 기억한다. YS는 축사에서 &ldquo;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rdquo;며 개혁 의지를 슬며시 드러냈다.당시 축사는 육사 측에서 써 보내는 관례를 깨고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군 수뇌부 역시 YS의 복심을 읽기 위해 기무사령부를 적극 가동하기 시작했다. YS는 한 발 빨랐다. 불과 3일 뒤인 3월 8일, YS는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과 독대한 자리에서 &ldquo;내가 오늘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려고 한다&rdquo;고 선언했다.공교롭게도 3월 8일은 내 생일이다. 저녁에 지인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김진영 당시 육참총장은 영내에서 사열을 받던 중 갑작스럽게 옷을 벗었을 정도였다. 같은 날, 김진영 육참총장과 함께 경질된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오전에 월례회의를 주재해 &ldquo;새로운 대통령을 맞아 기무사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rdquo;는 훈시까지 했던 터였다. 두 장군 모두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하나회 숙정을 실무적으로 진두지휘한 것은 김희상 국방비서관이었다. 김 비서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국방비서관실에 있으면서 군내 사정을 잘 아는 학구파였다. YS는 청와대 입성 후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김 비서관을 발탁한 뒤 군내 정보 수집 및 동향 보고를 맡겼다. 하지만 그런 김 비서관조차도 정확한 실행날짜는 몰랐을 것이다. <img alt="하나회 태동의 주역들인 육사 11기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부터 노태우, 전두환 생도.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18/1371515444576772.jpg"/> 일각에서는 내가 하나회 숙정의 비밀 조언자라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정확한 날짜는 모른 채 앞서 말한 대로 생일축하 파티 중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다만 하나회를 제압하지 못하면 문민정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앞으로 개혁에 있어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1992년 대선 직후 많은 외신에서 &lsquo;대한민국은 육사 17기가 주축이 될 것이고, 김영삼 대통령 역시 군부와 타협할 것&rsquo;이라고 평가한 것도 숙정을 앞당긴 계기가 됐을 것이다. YS는 대선 과정에서 군 원로들의 조언도 귀담아들었다.하루 저녁에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한 YS는 다음 타깃으로 안병호 수방사령관(육사 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육사 19기)을 전격 경질했다. 12&middot;12 당시 수도권 세력이 반란에 대거 동원됐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는 사단장급에 이어 영관급까지도 정리를 해 나가면서 두 달 사이 &lsquo;별&rsquo; 40여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하나회 출신은 배제하니 새로운 사람을 임명하는 문제가 남게 됐다. 주목할 것은 기무사령관으로 ROTC 3기 출신 임재문 장군을 앉힌 것이다. 당시 군에서는 육사 출신이 아니면 진급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ROTC 출신을 발탁하면서 앞으로의 비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임재문 장군은 문민정부 내내 기무사령관으로 일하면서 권영해 장관과 함께 핵심 참모가 됐다.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영관급까지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진행되면서 비 하나회 출신 인사들마저 피로를 호소했다. 나 역시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 대통령께 직접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 도중에 백승도 대령이 하나회 출신 명단을 언론에 공개한 일이 있었다.백승도 대령이 청와대와 교류해 의도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언론에 명단까지 공개된 마당에 완전히 뿌리 뽑지 않으면 안 됐던 부분이었다. 당신 성격상 한번 시작한 일이니만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셨던 것 같다.YS는 훗날 인터뷰에서 &ldquo;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middot;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rdquo;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ldquo;하나회 숙정은 YS가 군을 잘 몰라서 한 일&rdquo;이라며 전투력 약화, 삼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 사건 등 부작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회자됨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현철 교수가 밝힌 &lsquo;사찰 피해&rsquo;&ldquo;회사에서 나에 대한 &lsquo;일보&rsquo; 안기부에 제출&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618/1371515444576773.jpg"/> 하나회 숙정을 비롯한 문민정부 초반을 이야기하던 중, 김현철 교수는 &ldquo;국정원 개혁 역시 하나회 때와 같이 전광석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rdquo;고 조언했다.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 수사는 오리무중. 그에게 국정원 개혁 문제에 대해 잠시 물었다.―문민정부 당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개혁은 어떠했나.&ldquo;당시 안기부는 지금의 국정원보다 정치개입이 더 심했다. 문민정부에서도 정보기관 개혁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외국어대 출신 김덕 교수를 안기부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랐던 인사였고 당시 안기부도 초긴장했다. 김덕 안기부장을 통해 북한정보 수집기능을 강화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조직 장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rdquo;―본인 역시 안기부 사찰에 의한 피해를 봤던 것으로 알고 있다.&ldquo;MBA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87년 9월 쌍용증권에 막 입사했을 때였다. 하필 3개월 뒤가 대선이었다. 불가피하게 휴직을 하고 대선을 도왔다. 대선이 끝나면 다시 복직을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인사과에서 나에 대한 데일리리포트(일일 보고)를 안기부에 제출하고 있었다고 하더라.&rdquo;―때마다 불거지는 정보기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ldquo;대통령 의지만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30년 권위주의 정권 이후 &lsquo;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rsquo; 15년간 정보기관 내부가 상당부분 리빌딩(재건)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국정원이라는 곳이 워낙 세고 비밀스런 조직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사안이다.&rdquo;하지만 문민정부의 안기부 운영은 실패로 평가된다. 1995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lsquo;안풍&rsquo;, 또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인 &lsquo;북풍&rsquo; 공작엔 어김없이 안기부가 등장했다. 대선을 열흘 앞두고 안기부 감찰실 직원이 양심선언을 하려고 하자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를 감금하기도 했다. 만일 문민정부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있었다면, 20년 뒤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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