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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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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Wed, 12 Feb 2014 08:57:00</lastBuildDate>
        <pubDate>Wed, 12 Feb 2014</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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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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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마지막회] 에필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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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2 Feb 2014 08:57: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squo;박정희 시대&rsquo; 18년 5개월 동안에 대한민국은 굶주림과 가난에서 해방되었고 전통적인 농경국가에서 중화학공업 수출국으로 발전했다.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자원과 자본, 기술도 없이 오로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여 오늘날 세계 6대 공업 무역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댐 건설과 산림녹화로 물을 관리하고 식량자급을 이룩하였다. 실의와 절망, 나태와 냉소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국민정신을 떨치고 희망과 용기, 도전과 자신감 넘치는 정신혁명을 이룩하였고 기술천시 사상을 딛고 과학기술을 진흥시켰다. <img alt="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무역진흥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수출 목표달성 방안에 관해 장관들로부터 보고받는 모습.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2/1392163024711070.jpg"/> 우리보다 잘 살고 앞섰던 나라를 추월했는가 하면 공산체제와 자유민주체제 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느냐는, 김일성과의 체제경쟁에서도 장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6&middot;25 남침 직전 압록강의 수풍댐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전기를 일방적으로 단전했던 북한에 오늘날 우리가 전기를 보내주고 굶주리고 헐벗은 북녘 동포들에게 식량지원을 해주고 있지 않는가.남들은 70년, 100년 걸려서 이룩한 것을 우리는 불과 20년 만에 이룩하였다. 세계는 이런 우리를 향하여 &lsquo;한강의 기적&rsquo;이라고 칭송하면서 &lsquo;박정희 경제개발 방식&rsquo;을 모델로 삼아 배우고 본떠 따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를 함께 살았던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였다. 그때의 그들은 시련을 도전으로 극복했던 눈물과 개척의 세대인 동시에 성취와 보람을 거둔 자랑스러운 세대였다.유구한 민족사의 도정에 찬연히 빛나는 금자탑을 그 시대에 그 세대들이 쌓아올렸다. 민주주의 실현이 일부에서 강조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시대정신과 소명은 전쟁 방지와 가난 극복, 그리고 경제 건설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룩하기란 불가능하고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극동의 작은 신생 분단국이 6&middot;25 전란의 폐허의 잿더미를 딛고서서 오늘의 부강한 소강국을 이룬 것이 대한민국이다.박정희 시대 이후 1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부패, 김일성의 6&middot;25 남침 이후 가장 큰 고통을 국민에게 안겨준 IMF 사태, 이른바 햇볕정책을 빙자한 대북 퍼주기와 북의 핵개발에 따른 대한민국의 안보 불안.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고 증폭되어 &lsquo;대한민국 깽판화&rsquo; 등 국민적,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있다. <img alt="필자가 소장 중인 박정희 대통령 미공개 휘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2/1392163024711071.jpg"/> 또한 우리 대한민국은 삶의 풍요를 이루었으나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정신문화의 피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영양 과잉과 비만을 걱정하고, 넘치는 자유와 방종을 경계해야 하며 심화되고 있는 이념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자유민주 체제의 안전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 급선무이다.이미 수십 년 전에 실패한 이념이 되어버린 공산주의 환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시대착오적인 &lsquo;김가왕조&rsquo;에 추종과 흠모를 보내고 있는 종북의 무리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성공 역사에 부정과 폄훼와 말살을 일삼는 망국적인 획책에 맞서서 이를 반드시 온 국민의 힘으로 분쇄하고 영광스러운 조국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역사는 저절로 빛나고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모두가 긍지를 가지고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갈 때에만 더욱 영광스럽게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이 연재를 마감하면서 낡은 세이코 시계, 해진 허리띠, 구멍 난 러닝셔츠, 화장실 수조에 들어있던 벽돌 한 장, 에어컨 대신에 든 부채, 침실에 있던 대나무 효자손 등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고 간직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그렇게도 노심초사했던 그때의 모습들이 새로이 떠올라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서울시청 앞 광장에 박정희 대통령 동상이 세워지고 더 이상 갈등과 분열의 광장이 아니라 화합과 숭모의 광장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끝으로 우리 국민이 갖추고 행하여 나아갈 바 규범을 밝힌 박 대통령의 미공개 휘호가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이 휘호는 1974년 하반기 필자가 김정염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발령을 받은 뒤 대통령 부속실을 통하여 소장하게 된 것이다.&lsquo;역사상 위대한 민족은 정직, 근면, 자조, 창의, 과학하는 정신이 강하고 그들의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이 강열하였다. 1971년 1월 1일 대통령 박정희.&rsquo;&lt;끝&hellip;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gt; 박정희에 대한 세계의 평가푸틴 &ldquo;그는 나의 롤모델&rdquo;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세계의 석학과 정치 지도자들의 평가를 소개한다.# 헨리 키신저(미국 국무장관, 하버드대 교수)=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렵다. 러시아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당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윌리엄 오버홀트(카터 미국 대통령 수석비서관)=박정희의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노무현(대통령, 김영아 교수 봉하마을 방문시 대담 중)=외국에 돌아다녀 보니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이야기뿐이더라. 1960~1970년대 그 당시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최악일 수도 있으며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포항제철이나 고속도로가 아닌 농업에 써야 한다며 그 돈으로 먹거리를 수입하자고 말하던 나라가 그 당시 한국이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한국은 지금만큼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게 해외 여러 인사들의 평가였다. 비록 독재의 힘을 빌렸더라도 뛰어난 관치경제를 통해 국가의 기본산업을 발전시켜 놓았고 이러한 기본산업들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제임스 캘러헌(영국 총리)=박정희로 인해서 소련의 남한 공산화 기틀이 좌절되었다.# 아이젠하워(미국 대통령)=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권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오히라 마사요시(일본 총리)=박정희의 업적은 동남아와 전 세계빈곤국들에게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콴 유(싱가포르 총리)=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한국의 박정희를 꼽는다. 동남아 국가들은 1970년대의 한국을 거울삼아 경제발전을 해야 할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박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 등 다른 언어로 씌었든 모두 구해 달라. 박정희는 나의 롤 모델이다.# 아로요(필리핀 대통령)=1965년 필리핀의 1인당 GNP가 270달러였을 때 한국은 102달러였지만 2005년에는 필리핀이 1030달러, 한국은 1만 6500달러로 변하였다. 빈곤의 후진국에서 출발하여 잘 살던 동남아 나라들을 따돌리고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존경스럽다.# 김정일(1999년 정주영 현대 회장과의 대화중에서)=요즈음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게 인식되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유신이니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초기 새마을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음은 훌륭한 점입니다. 나도 영화를 통해 서울을 보았는데 서울은 일본 도교보다 훌륭한 도시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세계의 도시입니다. 서울에 가면 박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허만 칸(미국 허드슨연구소 소장)=당신이야말로 한국의 박정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면 서로 의기투합 할 것이다(허만 칸의 권유로 리콴 유 싱가포르 총리가 한국 방문을 하게 되었다).# 에즈라 보겔(미국 하버드대 교수, 저서 &lt;네 마리의 작은 용&gt;에서)=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장쩌민(중국 국가주석)=중국의 각 성장과 인민대표들은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경제발전 모델을 배워야 한다.# 원자바오(중국 총리)=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은 중국 경제개발의 훌륭한 모델이었다.# 폴 케네디(미국 예일대 교수)=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앨리스 앰스던(미국 MIT 교수)=박정희의 역사적 공헌은 그의 뛰어난 지도력하에 한국을 저개발의 농업국가에서 고도로 성장한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이다.# 카터 에거트(미국 하버드대 교수)=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확고한 철학과 원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제도적 개혁을 감행했다. 매우 창의적이며 능률적이었다.# 카리모프(우즈베키스탄 대통령)=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파키스탄 대통령)=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 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잔라빈 차츠랄트(몽골 총리)=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몽골 엘리트들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고 있다. 많은 몽골인들은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나 또한 그렇다. 한국은 박 대통령의 지도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 안정은 필수 요건이지만 현재 몽골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상태다. 몽골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 몽골에는 박정희식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하티르(말레시아 총리)=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기업을 일으켜 국부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이다.# 다나카 가쿠에이(일본 총리)=박정희의 죽음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날개를 달고 승천하려는 호랑이의 날개가 잘린 것 같다.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2/139216302471107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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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9] 새마을운동과 국민정신문화 개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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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5 Feb 2014 09:2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새마을운동은 오늘날 &lsquo;박정희 시대&rsquo;의 상징 브랜드가 됐다. 농촌진흥과 경제개발을 지향하고 있는 세계 모든 나라에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국가발전 모델이 되고 있으며 그 기록물들은 유네스코(UNESCO)에 등재되어 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 유엔개발계획(UNDP),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원조기구들은 일찌감치 새마을운동을 농촌개발과 빈곤퇴치 및 경제개발을 위한 교본으로 정하여 운용하고 있다. <img alt="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9권에 실린 1972년 경북 청도군의 새마을 운동 모습.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05/1391560116707060.jpg"/> &lsquo;새마을운동 = 한국 경제발전의 원리 = 한강의 기적 성취&rsquo;로 인식되어 중국, 러시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케냐,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르완다, 콩고, 동유럽 등 전 세계 50여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본받아 따라하고 있다.특히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방식을 본뜬 경제정책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근년에는 도시 농촌 간, 도시민 계층 간 빈부격차의 심화가 국가적 현안과제로 떠올랐다. 농촌소득 증대와 생활향상을 위한 처방의 일환으로 근면, 자조, 검약, 협동을 일깨우는 새마을운동방식이 원용되고 있다는 것이다.아프리카 13개국에서는 연수요원을 우리나라 새마을연수원에 파견하여 연수토록 하거나 우리 새마을운동 봉사단이 현지에 파견되어 실습과 지도를 하고 있다. 관정사업, 간이상수도사업, 공동목욕시설사업, 벼농사 지도(볍씨 소독, 모내기, 물 관리, 병충해 구제 등), 소득증대를 위한 특용작물 재배 기술지도(파인애플, 포도, 양봉 등), 주민들의 위생지도(양치질, 목욕, 소독 등), 간이 건축기술 실습, 간이 영농기계 조작 등을 지도할 뿐 아니라 말은 있으되 글자를 갖지 못한 부족에게는 우리 한글을 전수하여 그들 언어에 접목시키는 문화전파사업도 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통한 한글의 국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1980년대 중반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장 재직시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국제도서관장회의에 참석하여 우리 정부기관에서 파견된 공무원이 물이 귀한 고원지대에 우물개발 사업을 지원&middot;지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정부와는 별도로 민간단체와 종교기관에서 선교활동과 아울러 그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활동도 보았다. 이렇듯 국제화된 새마을운동의 단초는 수해와 한해를 극복하는 역경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1969년 8월 경상지역 수해복구현황을 시찰하던 박 대통령은 경북 청도군 신도1리 마을이 다른 지역의 북구상황과는 달리 마을 안길이 넓혀졌고 지붕개량과 담장정리 등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모습을 보았다. 그 연유인즉 정부 지원을 받아 기왕 수해복구를 하는 김에 주민들이 물자와 노력을 보태어서 살기 좋은 마을환경을 만들자는 주민합의가 이루어져서 협동 작업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한해대책 지방장관회의가 열렸을 때 박 대통령은 신도1리의 수해복구 사례를 거론하면서 주민들을 분발케 하여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lsquo;어떻게 하면 내면화되어 잠자고 있는 농민들의 근면, 검약, 자조, 협동 정신을 일깨워서 행동화하고 잘 살게 할 수 있을까.&rsquo; 박 대통령의 골똘한 생각과 고뇌의 결정(結晶)이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박 대통령의 발상에서 시작되어 발전전략까지도 그의 구상에 따라 진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박 대통령의 작사&middot;작곡과 지휘&middot;연주로 이루어진 심포니다.1970년대 중반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며 쌍용시멘트 오너인 김성곤이 청와대당정회의에 참석했다가 생산된 시멘트의 적체로 인한 업계의 자금난 해소와 시멘트 활용방안의 강구를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전국 3만 4000여 부락에 마을당 300~350부대씩의 시멘트를 배정하고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다리 놓기, 우물 개선, 공동빨래터, 공동목욕탕, 지붕개량 등 마을 공동사업을 자주적으로 논의 결정하여 자조적 협동노력으로 해 나가도록 했다.이것이 1차 새마을 가꾸기 운동의 시작이었다. 2차연도에는 1차년도 때 좋은 성과를 낸 마을에 중점 지원하는 등 경쟁심을 유발토록 하여 잠자던 농민정신을 일깨우게 되었고 마을마다 서로 잘하려는 경쟁이 붙었다. 그리하여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마을길이 넓어졌으며 간이상수도와 전기가 들어갔다. 초가집이 없어져서 농촌풍경이 나지 않는다는 걱정 아닌 걱정의 얘기도 이때 오갔다.환경개선에 이어 소득증대사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어 농촌소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TV 전화 냉장고 등 문화생활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새마을운동의 노랫소리가 전국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새마을지도자의 성공사례가 쏟아졌고 새마을부녀회의 절미 저축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1970년 초 시작된 이 운동은 1974년에 이르러 연평균 농가소득이 140만 원으로, 도시근로자 소득을 웃돌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새마을운동 초창기인 1971년 가을 박 대통령은 목욕 중 미끄러져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정양중일 때 새마을운동 노래를 작사&middot;작곡했다. 작사에 대해서는 노산 이은상이, 작곡에는 홍연택 국립교향악단 지휘자가 각각 감수했는데 곡에 대한 홍 지휘자의 부분적인 지적이 있었고 박 대통령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작사에 대한 이은상의 감수평에 관하여 김성진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ldquo;노산 선생이 한참 들여다보면서 두세 번 읽어 보더니 &lsquo;한 자 한 획도 손댈 데가 없다. 국가원수의 철학과 신념이 배어있는 글이다&rsquo;고 격찬했다.&rdquo;&lsquo;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rsquo;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는 4절 &lsquo;우리 모두 굳세게 땀 흘려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조국을 만드세&rsquo;로 끝난다. 이 4절은 1972년 5월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소득증대촉진대회 참석 중인 박 대통령이 호텔 숙소에서 작사한 것으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김 대변인에게 전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명연설을 했다. <img alt="청도군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에 보관된 전시물. 전영기 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05/1391560116707061.jpg"/> &ldquo;새마을운동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행동철학이다&hellip;. 지금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일의 후손들이 더 잘 살 수 있게 내 고장 내 조국을 가꾸고 발전시켜서 물려주는 것이다&hellip;. 후세에 너의 조상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게 하자.&rdquo;새마을 행사 때의 대통령 연설문은 스피치라이터실에서 준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모두 박 대통령의 평소 생각과 신념, 철학을 담은 즉석 연설이었다.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친필메모를 남기기도 했다.&lsquo;근면, 자조, 협동. 이것이 새마을 정신이다. 이것이 있어야 새마을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정신계발 운동이고 정신혁명운동이다. 말만 가지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정신혁명인 동시에 행동철학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농촌은 반드시 잘 사는 농촌이 될 수 있다.&rsquo;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국민정신개발을 위한 또 하나의 중추는 정신문화연구원이다. 한국 철학계의 태두인 박종홍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뒤 한국정신문화의 개발창달에 관한 문제를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즉 물질문명에 발맞추어 정신문화를 개발하여 두 바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전하고 올바른 국가발전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이 무렵 한국 지식인사회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해외파들이 러시를 이루었고 한국 고유전통이나 문화 역사의식보다는 외국문물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해외파들이 곧바로 대학교수 등 지식인사회에 진입하는데 대하여 자주성과 정체성 등 한국인으로서의 가치관확립을 먼저 해야 한다는 준비과정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정상천 청와대 정무2수석비서관이 경기도 일원에 장소물색을 한 끝에 청계산 남쪽 중턱에 터를 잡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박종홍 특별보좌관 사후인 1978년 6월에 준공되었고 초대 원장에 역사학자 이선근 박사가 취임했다.박 대통령은 개원식 치사에서 &ldquo;전통문화 개발과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조상의 빛난 얼과 자주정신을 드높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중흥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rdquo;고 강조했다. 또한 &ldquo;국적 있는 교육, 호국정신 개발선양, 충효사상 고취 등 고유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킴으로서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서로 보완 균형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rdquo;고 말했다.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운동이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를 위한 행동철학이라면 정신문화연구원은 한 차원 높은 주체적 민족사관과 자주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우리 고유의 전통과 가치 등 민족문화 중흥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중&middot;후반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압력과 미 의회의 소위 인권을 빙자한 원조 삭감 압력에 대하여 박 대통령은 안보의 긴박성과 위중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ldquo;안보상 중대 위기에 처한 우리의 실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미 의회 일부가 남의 나라 국정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뿐 아니라 내정간섭이다. 주권국가로서 외국의 국정 간섭만은 절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경제적 어려움이 크더라도 일체 미 의회에 매달려 애걸복걸하지 말고 원조와 차관 삭감에 대해서는 현금 구매나 제3국 차관 등으로 대체해 나가도록하라.&rdquo;그는 뼛속까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주의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05/139156011670706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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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8] 식량자급과 치산·치수]]></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7040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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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9 Jan 2014 13:3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dquo;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rdquo;는 공약을 내걸고 1961년 5&middot;16을 결행한 박정희는 10일 만인 5월 25일 우리나라 농가의 80%가 해당되는 농가고리채 정리를 혁명적으로 단행했다. 이는 해마다 찾아오는 춘궁기의 절량농가(絶糧農家) 발생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보릿고개를 추방하고 수백 년 숙명처럼 이어져온 농촌의 악순환을 단절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였다. 흔히 박 대통령은 농업을 등한시하고 그 희생 위에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고 하는 비판이 많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img alt="1962년 김포지역 모내기에 나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모내기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9/1390969942704070.jpg"/> &ldquo;임자,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시게.&rdquo;&ldquo;네, 형님 명심하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rdquo;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10월 16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생가에 들렸을 때 큰형님(동희)과 나눈 대화였다. 이때 박동희는 땔감나무를 한 짐 지게에 짊어지고 마당에 들어섰고 두 형제는 마루에 앉은 채 막걸리를 마시면서 첫마디 말부터 농촌과 농민 잘 살게 하는 문제에 화제를 집중했다. 필자는 당시 최고회의 출입기자로서 경주에서 대통령선거 결과를 지켜본 뒤 상경하는 박 의장을 수행하여 상모동에 도착해서 형제가 나누는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들었다.박 대통령은 5&middot;16 직후부터 농토의 지력 향상과 농업용수 개발, 경지정리를 역설하고 이를 농촌 근대화를 위한 주요사업으로 추진했다. 지력 향상을 위해 퇴비 증산, 흙 섞어 넣기(객토), 깊이 파기(심경), 가뭄에 대비하여 논 우물 파기(관정)와 영농 기계화를 위해 경지정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식량증산의 토대를 튼튼히 해 나아갔다. 다수확 통일벼를 1967년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고 영농의 과학화와 경지정리 및 영농기계화의 확대로 쌀 수확이 연차적으로 증산되었다.이 과정에서 보리&middot;잡곡 혼식, 분식 등의 계도와 권장이 시행되었으며 청와대도 이에 솔선수범하여 보리&middot;잡곡밥, 국수, 짜장면 등으로 메뉴가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분식이 대부분이었는데 김정염 비서실장과 나는 점심으로 청와대 식당에서 급식해 주는 국수를 수년 동안 먹었다.박 대통령은 1973년 다수확 볍씨 개발과 영농기술 지도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애쓴 농어촌진흥공사 직원 7000명 전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에 해당하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해마다 열리는 모내기 행사 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고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와 점심을 들었던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정부는 매년 다수확왕을 뽑아 시상하는 등 농민들의 증산 의욕과 경쟁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 결과 쌀 수확이 해마다 늘어나 1977년에는 수확량 4170만 섬을 넘어서면서 쌀 자급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쌀 자급은 자주경제의 기반이며 식량 무기화에 비추어 자주적인 안보의 또 다른 대들보를 구축한 것이다.이제는 쌀막걸리, 쌀과자 등 쌀 소비를 권장할 뿐 아니라 남아도는 쌀의 보관 문제로 1년 창고료를 수천억 원씩 지출해야 하는 등 골머리를 앓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2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고 지금도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드는 북한 동포들의 참혹한 실정과 비교해 본다면 실로 뜻 깊은 위업이라 하겠다.또한 비닐하우스와 온실 재배의 확대로 겨울에도 야채, 과일, 버섯 등을 생산함으로써 전천후 농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육우, 내수면 양식, 각종 유실수 식재 등 특별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농촌 소득증대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했다. 농촌은 점차 잘 살게 되었고 1974년에 이르러서는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을 웃돌게 되었다. 오늘날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역 귀농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실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게 한다.쌀 증산 계획과 병행하여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일선 공무원과 농민들이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가뭄이 심했던 1967년경 전남지역은 논바닥이 갈라지고 먼지가 날 정도로 물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대 한발의 참상이 일자, 따가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논바닥에 우물을 파고 양수기를 돌리며 지하수를 퍼 올리던 그때의 농민과 공무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도지사, 시장, 군수, 농업지도소장 등 모든 공무원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탔으며 구릿빛이 나지 않는 기관장들은 박 대통령 앞에서 보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들판에서 하는 차트 보고가 비일비재했으며 모든 일선 공무원은 농민들과 함께 들판을 헤매면서 관정작업을 지도하고 독려하면서 일했다.정부는 홍수와 한발에 대한 근본대책으로 196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주류 4대강인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의 수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고 홍수 조절과 농&middot;공업 및 생활용수 확보를 위한 다목적 댐 건설을 연차적으로 추진했다.북한강 수계에는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 팔당댐, 남한강 수계에는 충주댐, 금강에 대청댐, 그리고 영산강종합개발을 위한 장성댐 담양댐 대초댐 동복댐, 낙동강 수계에는 남강댐 안동댐 영천댐 등의 건설이 그것인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모두 착수되었다. 그 결과 1979년 10월 26일 아산만방조제 준공을 끝으로 주요 기간댐 건설을 모두 완성하였고 마침내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되었다.이로써 전국의 수리안전답 비율은 87%에 이르러 하늘만 쳐다보고 짓던 영농방식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5000년 동안 자연에만 의지했던 홍수와 한발을 극복하고 물을 관리하는 치수의 위업을 그 시대에 이룩한 것이다. 1973년 10월 15일 소양강댐이 준공되던 날 박 대통령은 즉석치사 첫머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ldquo;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응전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바위산을 헐고 돌과 흙을 쌓아서 태산을 만들고 강줄기를 막아서 아시아 최대의 사력댐을 건설한 역사적 장거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간 의지의 승리를 보여준 것이다.&rdquo;TV 중계가 안 되던 시절이라 공보비서관실에서 라디오를 듣던 나는 가슴을 울렁이게 한 그 감동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양댐 설계 당시 댐 공사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현지에 지천으로 깔린 바위와 돌, 흙을 쌓아 건설하는 사력댐 공법을 제시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시공사 현대건설)의 기발한 발상에 대하여 일본 기술진이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아울러 이 시대에 이룩한 또 하나의 위업은 산림녹화다. 8&middot;15 해방 이후 혼란기와 6&middot;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의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황폐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5&middot;16 직후 있었던 태풍 사라호에 의한 산사태로 포항, 영일 일대의 국제항공선 통과지역은 산사태 자국이 나라의 수치가 될 정도로 심했다.박 대통령은 이 지역을 최우선 사방식수시범지역으로 정하고 민&middot;관&middot;군을 총 동원해 왕모래 사토질인 산등성이에 물과 퇴비를 밑으로부터 운반하여 계획식수를 하도록 독려했다. 진지구축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업이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이 지역 사방식수작업을 완수하게 되었고 다른 악조건 지역의 사방사업에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박 대통령은 수원의 서울대 농과대학과 임업시험장 등에 사방용 속성수와 장기경제림의 개발육종을 독려하였고 수원은사시나무에 대하여 그 나무를 육종 개발한 현신규 박사의 이름을 따서 &lsquo;현사시나무&rsquo;라고 명명하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나무를 심는 식목일 외에 심은 나무를 가꾸는 &lsquo;육림의 날&rsquo;을 별도로 정하여 나무가꾸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나는 이때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하면서 식목일마다 수원 농촌진흥원에서 현 박사를 비롯한 육종학 교수들을 격려했던 박 대통령을 수행 취재했었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19공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화목 벌채와 낙엽 채취가 현저히 줄어들어 산의 토질개선과 산사태 방지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산림녹화를 가속화했다. 그러나 연탄가스 사고로 목숨을 잃는 참극이 비일비재했는가 하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19공탄 돕기를 하는 등 훈훈한 미담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박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있어서도 선 건설, 후 보완의 고속도로 건설원리를 적용하여 사태방지를 위한 속성수 식목을 우선하되 장기적인 경제림 식재와 밤나무 등 유실수 재배를 병행하여 산림녹화와 소득증대를 기하도록 했다. 밤나무단지에서 대량생산된 밤 소비를 위해 밤과자와 밤통조림을 개발토록 했으며 밤과자 시식회를 청와대에서 열기도 했다.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ldquo;내가 보통학교 다녔던 일제 때에는 집에 간식거리가 없었는데 이제 밤, 대추, 감 등 유실수 재배로 농촌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의 간식거리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rdquo;며 환하게 웃었다. 그 결과 1970년대 하반기에는 전국의 산림이 울창해졌다.박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은 &ldquo;한번 파괴된 산림은 그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려도 어려운 것인데 박 대통령이 20년 미만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것은 고도성장과 수출증대, 중화학공업 건설 등 혁혁한 경제 업적보다 더 어렵고 값진 위업&rdquo;이라고 김정염 주일대사에게 칭송했다.박 대통령은 녹화에 맞추어 자연보호, 환경보호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전국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살기 좋은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박 대통령의 그린벨트 설치는 국가의 먼 앞날을 내다본 형안의 조치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린벨트가 훼손되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9/1390969942704071.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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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7] 과학기술 진흥과 중화학공업 건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997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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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2 Jan 2014 09:1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한국군 월남(베트남) 파병(1964년)에 대한 후속조치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경제원조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존슨 대통령은 추가적인 &lsquo;특별선물&rsquo;을 제의했고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연구소 설립 지원을 희망했다.이는 한&middot;미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동성명 당일까지 양측 실무자간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전격제의한 데 대해 박 대통령이 화답함으로써 공동성명 발표 직전 추가 삽입돼 이루어진 것이다. <img alt="1977년 현대조선소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 영애. 맨 오른쪽은 정주영 회장."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2/1390349485699730.jpg"/>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박 대통령은 이미 일찍부터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은 물론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존슨 대통령의 특별선물 아이템을 즉석에서 &lsquo;과학기술연구소&rsquo;로 정하게 된 것이다.박 대통령은 서울을 벗어나서는 우수한 연구진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홍릉 임업시험장을 방문해 &ldquo;임업시험도 중요하지만 과학기술연구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rdquo;고 강조하면서 임업시험장 면적 2분의 1 이상인 15만 평을 연구소 부지로 할애 조치했다. 1960년대 중반 초근목피와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본 참 지도자의 혜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박 대통령은 해외의 우수 두뇌 초빙을 위해 주거, 병역, 봉급 문제 등에 있어 최형섭 소장이 요구하는 대로 파격적인 지원을 뒷받침했다. 연구원들의 봉급명세표를 받아본 박 대통령은 &ldquo;대통령보다 많이 받는 사람도 많군&rdquo;이라면서 &ldquo;그대로 시행토록 하라&rdquo;고 지시했다. 당시 연구원들의 봉급체계는 국내 교수의 3배 수준으로 해외파에 대한 지나친 우대라는 비판과 함께 국내파와의 불균형 논란이 일었다.박 대통령은 인사와 예산에 있어서 외부의 청탁이나 간섭을 받지 말고 오로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소신대로 연구소를 운영할 것이며, 예산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지 말고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라고 최 소장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연구소를 방문해 관심과 격려를 표했으며 애로사항들을 해결해 주었다. 경제기획원 예산책정보고회의 때에는 연구소 예산에 대한 특별관심을 표명했고 예산당국도 연구소에서 신청하는 대로 반영, 창의적인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됐다.그 결과 한국과학연구소는 단시일에 이론만이 아닌 산업체와의 연계연구와 제품 및 제조기술 연구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산업체로부터의 수탁고는 점증했으며 과학기술 진흥과 공업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후 중화학공업 건설과 병행해 대덕, 창원, 구미 등에 대규모 국가연구단지를 조성하고 선박해양연구소, 표준연구소, 화학연구소, 핵연료개발공단, 기계금속연구소, 전기기기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을 설립해 과학기술 진흥을 뒷받침했다.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성장의 고도화 △100억 달러 수출 달성과 지속적인 수출증대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3대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가적 대과업이었다. 이 전략 목표 중 핵심은 방위산업 육성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더욱 가중된 북한의 남침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대비해 자주국방태세 확립이 긴요했기 때문이다.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했고 1월 말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대한 보고회의를 김종필 총리 등 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4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개최했다. 100억 달러가 소요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은 연 수출 20억 달러 미만의 경제규모에 비추어 엄청난 무리임이 틀림없었으나 박 대통령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이를 밀어붙였다. 고속도로도, 포항제철도 모두 어려운 가운데 무리를 무릅쓰고 &lsquo;돌격 앞으로!&rsquo; 했기에 이루어 낼 수 있었다.김일성의 남침야욕을 꺾고 남북 간 경제전쟁에서의 승리는 물론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길뿐이라는 박 대통령의 신념이 확고했다. 이 회의에서 재원조달에 관해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박 대통령 : &ldquo;오 수석, 돈은 얼마나 드나.&rdquo;오원철 경제수석 : &ldquo;내&middot;외자 합해 100억 달러가 필요합니다.&rdquo;박 대통령 : &ldquo;남 재무. 돈을 낼 수 있소?&rdquo;남덕우 재무장관 :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ldquo;액수가 너무 커서&hellip;.&rdquo;박 대통령 : (잠깐 생각을 가다듬은 뒤) &ldquo;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국민이 잘 따라주지 않았나. 결과는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hellip;. 우리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평화를 지키고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것인데 이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겠나.&rdquo;남덕우 장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전 국민의 참여와 분발을 촉구한 언명이었다. 비장하고 결연한 기운이 감도는 회의장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렇게 해 역사적 발진을 하게 된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의 기본소재가 되는 철강, 비철금속(구리&middot;아연), 정밀가공(기계공업), 전자공업, 조선, 석유화학의 6개 부문을 국제단위로 하되 전략적 수출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군수방위산업과 민수상업용을 연계함으로서 군수 쪽의 수요한계를 극복하면서 수출증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운용의 묘를 기했다.6대 중화학공업기지 건설에 있어서는 안경모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의 노고와 공적이 각별히 컸다고 김정염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지들은 과거 공장부지 중심의 공업단지 조성 개념을 뛰어넘어 국제적 규모로 대형화하고 연관 산업을 집결시켜 경제성과 경쟁력을 제고토록 할 뿐만 아니라 주거, 행정시설 등을 일괄 계획하고 동시 개발하는 개념이었다.특히 창원 탱크수리제작소 건립 때에는 경제성을 염려해 사업 참여를 주저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보너스를 얹어주어 이 사업에 뛰어들게 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형 탱크 개발과 관련해 기동력이 뛰어난 경장갑차 스케치를 직접 작성해 관계자들에게 주기도 했다.방위산업의 집중적인 육성 끝에 1977년 6월 박 대통령은 중부전선 기지에서 삼부요인, 여야 정치인, 외교사절, 한&middot;미 고위 장성 등 2000여 명의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국산무기 화력시범대회를 열고 155㎜ 대포와 발칸포, 장갑차, 헬리콥터 등 국산 병기의 성능을 성공적으로 시험했다. 이 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애석하게도 이석표 방산담당 비서관이 희생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어 1978년 7월에는 서해해상에서 중&middot;장거리 미사일과 다연장로켓, 대전차로켓의 시범발사를 성공리에 마쳤다.그리고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1977년 말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했고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1000달러에 이르렀으며 박 대통령 집권 마지막 해인 1979년 말에는 수출 147억 달러, 1인당 GNP 1546달러를 달성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마지막 일기를 남겼다.&ldquo;오늘 오전 10시 여의도 5&middot;16 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거행됐다. 우리 국군 건국 초부터 공산침략도배들과 혈투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막강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중략) 오늘 행사에 동원된 장비 중 70~80% 이상이 우리 국산 장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지난해 9월 26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다연발로켓과 중&middot;장거리 유도탄이 처음으로 국민들 앞에 선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영을 받았다. 이제 외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우리 군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강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달라졌다. 사기가 문자 그대로 충천하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막강한 국군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리라. 장병들이여 더욱 분발해 조국을 빛내도록 하자. 국군장병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으라.&rdquo;울산 현대조선소 건설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현대가 조선소 건설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앞으로 정부의 정책사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정주영 회장을 몰아붙였다. 정 회장은 사력을 다해 동분서주한 끝에 영국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게 됐고 조선소 건설에 착수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울-울산을 오르내리면서 독려했다.이러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술&middot;기능인력의 대량 양성이 시급했다. 즉 10분의 1㎜ 가공기술을 100분의 1㎜ 정밀가공 기술로 높여야 하며 이런 수준의 정밀가공 기능 및 기술 인력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필요했다.박 대통령은 전 국민의 과학기술화 운동과 국민 1인1기 운동을 제창하고 &ldquo;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국민 모두가 기술을 배워야 국력신장을 가속화할 수 있다&rdquo;고 강조했다. 금오공고가 설립돼 질 높은 우수기술 기능 인력이 배출된 데 이어 전국적으로 11개의 유사한 공고를 증설해 기능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정수직업훈련소 창설을 필두로 각 도청소재지와 창원, 이리, 성남 등에 단기 직업훈련소를 증설해 기능공 양성을 서둘렀다.이렇게 양성된 기능인력들은 중동 진출에서 국위를 선양했고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며 오일쇼크로 인한 외화 부족사태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기능올림픽 대회를 휩쓰는 쾌거가 계속됐고 기술&middot;기능인의 사기는 충천했다. 수백 년 동안 기술을 천시하던 사농공상의 가치관이 이 시대에 확 바뀌었다. &lt;위 내용은 김정염 회고록과 오원철 회고록을 참조했음&hellip;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2/1390349485699731.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6]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960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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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5 Jan 2014 08:2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박정희 시대에 이룬 성취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이다. 그것은 5000년 민족사상 가장 거창한 토목사업이며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자본과 기술, 그리고 우리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완성한 조국 근대화의 신작로이기 때문이다. <img alt="제철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15/1389742199696040.jpg"/> 고속도로 건설의 발상은 1964년 12월, 우리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얻기 위하여 서독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로부터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부흥에 미친 지대한 파급효과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고 강렬한 영감을 얻은 데서 비롯됐다.박 대통령은 본-쾰른 간 왕복 40㎞의 아우토반을 주행하면서 경제학자이자 고속도로 전문가인 의전장으로부터 고속도로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비용, 재원조달 방법, 필요장비, 동원인원 등 고속도로와 관련한 해박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주행 중 몇 번씩 정차하여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인터체인지) 노선 등을 자세히 살폈다.그 당시 우리나라의 재정 규모나 기술 및 보유 장비에 비추어 고속도로 건설은 꿈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 꿈을 간직한 채 실현의 시기를 주의 깊게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2차 5개년계획(1967년~1971년)이 조기 달성됨에 따라 물동량의 급증과 수출증대로 운송수요가 급팽창된다. △취약한 물류체계와 운송능력 부족은 경제성장에 큰 걸림돌이 된다. △기존 국토의 포장과 보수&middot;관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공로운송체계의 일대 혁신을 가져오는 고속도로의 건설이 불가피하다.결국 박 대통령은 1967년 5월 2일, 제6대 대통령선거 기자회견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천, 강릉, 부산, 목포 간 고속도로건설 공약을 발표했다. 야당과 언론, 학자 지식인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만큼의 물동량이 없을 뿐 아니라 자가용을 가진 부유층들의 나들이 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국제유관기관들도 반대했고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는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적 타당성이나 기술력, 재원조달과 장비확보 등 자체능력과 여건을 넘어서서 고속도로, 종합제철 건설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냉소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당시 선진국 기준 고속도로 건설비는 차선과 노폭에 따라 1㎞당 6억~8억 원이었다. 이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경우 총 3400억여 원이 소요되는 것. 1967년 국가 총예산이 1643억 원인 우리 재정 형편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국제개발기금 등에서 장기 저리 차관을 얻고자 했으나 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 검토에서부터 비토되었다.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그 10분의 1인 330억 원의 최소 비용을 책정하고 선 건설, 후 보완 원칙하에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에서 기공식을 거행했다. 선진국형의 완벽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에 우선 우리 형편에 맞추어 건설하고 난 후 사용하면서 하자가 생길 경우 통행료 수입 내에서 보수해 나가면 될 것이라는 독창적 방식이었다.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으로 독도법에 정통했기에 평면지도를 보고도 입체적인 실제 지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경부간 노선구획을 박 대통령이 직접 했으며 토지매수도 10일 이내에 끝내도록 시&middot;도지사들에게 전격적으로 지시하는 등 군사작전을 수행하듯이 했다. 이 과정에서 천안 부근 노선구획이 노출되어 어느 재력가가 그 부근 땅을 대량 매입한 사실이 알려졌고 박 대통령은 그 노선구획을 옮겨 다시 하기도 했다.이후 박 대통령은 2년여 동안 수많은 건설현장을 누비면서 독려와 점검, 지시와 제안들을 했다. 박 대통령의 얼굴이 햇볕에 새카맣게 탔을 정도였다. 청와대에 공사 진척 상황판을 설치하고 수시로 도상점검을 했으며 고속도로망 구상도, 서울-부산 노선 확장도, 용지수매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지시 메모 및 스케치, 인터체인지 스케치, 고속도로 밑 횡단농로 스케치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친필로 작성해 관계기관에 하달했다. 연도의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착근력이 강한 족제비싸리를 심으라는 지시와 그 스케치까지 작성해 내려 보냈다.박 대통령은 공사감독 인력부족에 대하여 육군사관학교&middot;ROTC 출신와 공과대학 토목과 출신들을 투입하여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철저한 공사 감독을 하도록 하였다. 민간업자들이 하기 어려운 난공사에 대해서는 군 공병대를 동원, 군대식으로 밀고 나가도록해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등의 효과를 기하는 한편 민과 군의 협력을 고취했다.이에 발맞춰 건설사들도 회사 이익에 앞서 국가적 대사업을 차질 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연인원 900만 명과 165만 대의 장비 투입, 그리고 77명의 산업전사의 희생(금강휴게소 위령탑 건립) 위에 최소의 비용(1㎞당 1억 원)과 최단 시일에 430㎞의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신기원을 이룬 것으로 민&middot;관&middot;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룩한 불후의 작품이라 하겠다. <img alt="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 내외와 정주영 회장.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15/1389742199696041.jpg"/> 박 대통령은 추풍령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기념비에 &lsquo;경부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의 길이며 조국통일의 길&rsquo;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장차 있을 차선과 노폭 확장에 대비하여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용지 확보를 위한 접도구역 통제와 그린벨트 설치 등은 환경보호와 국토개발의 먼 앞날을 내다 본 박 대통령의 위대한 선견지명이었다.&lsquo;서울-부산 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사, 작곡, 지휘로 이루어진 불멸의 걸작품&rsquo;이라고 한국도로공사 간행물은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박 대통령은 호남, 남해안,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 고속도로를 1967년 5월 공약, 1968년 2월 착공 이래 1977년 말까지 10년 만에 완성하여 전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중 중화학공업의 2대 핵심 사업은 포항제철과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이었다. 문제는 2억 달러 가까운 소요자금의 조달이었다. 국제사회는 개발도상국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부정, 반대하는 추세였으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국제차관단이 구성됐으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했고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은 차관공여를 반대, 거부했다. 국제적 적정규모가 1000만 톤인데 비하여 우리나라가 추진하는 100만 톤 규모는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요 철강을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사다 쓰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박 대통령은 &lsquo;산업의 쌀&rsquo;이라 불리는 핵심 소재인 철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면 공업화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등의 육성발전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차관선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려 교섭하도록 했다. 한&middot;일 양국 정부 간 교섭과 병행하여 박태준의 막후 정치적 교섭이 진행되었고 일본 자민당 실력자의 측면 지원에 힘입어 청구권자금과 차관으로 제철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 타결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며 박태준에게 포항제철 건설의 임무를 맡겼다.&ldquo;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충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붙여 봐.&rdquo;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박태준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1970년 4월, 103톤 규모의 본 공장 건설이 착공되었다. 박태준은 직원들에 대한 훈시에서 청구권자금은 조상들의 피의 대가라고 전제하고 포항제철공장을 제대로 못 지을 경우 &ldquo;우리 모두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rdquo;라고 비장한 말을 하면서 독려했다. 시멘트 콘크리트 양생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할 경우 모두 뜯어내고 다시 시공토록 하는 등 철저한 감독을 했으며 직원들에게는 군대 이상으로 엄격한 업무처리를 요구했다.드디어 1973년 1월 포항제철이 준공돼 첫 쇳물을 쏟아냈다. 3년 동안 고생했던 임직원들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만세를 합창했다.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에 대한 외부의 청탁, 간섭, 이권개입 등을 차단하기 위하여 박태준에게 &lsquo;종이마패&rsquo;를 써 주는 등 특별 경계를 했다.박 회장은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했으면서도 평생 동안 그 주식을 1주도 갖지 않았다. 이후 포항제철은 발전을 거듭하여 광양만에 제2 제철기지 건설을 확장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제철회사가 되었다. 지난 1992년 10월 3일 광양제철 건설을 끝낸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찾아 제철산업 건설의 임무완수 보고를 했다.&ldquo;포항제철은 빈곤 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어제 포항&middot;광양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 장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중략) 연인원 4000만 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제철은 이제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했고 우리나라는 세계 6대 철강 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rdquo;&lt;위 내용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 참조&hellip;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15/138974219969604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5] ‘박정희 시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924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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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8 Jan 2014 08:4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squo;박정희 시대&rsquo;는 1961년 5&middot;16에서부터 1979년 10&middot;26까지, 18년 5개월 동안이다.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그룹에서 중진국 선두의 자리까지로 끌어 올렸다.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89달러로, 세계 125개 국가 중 101위였으나 18년 5개월이 지난 1979년에는 1510달러, 세계 49위를 기록했다. 1960년대 초 김일성의 북한은 1인당 GNP 350달러 내외로 세계 59위 중진국 수준이었으나 1979년 말에는 세계 120위의 최빈국 그룹으로 전락했다. <img alt="1976년 한·미 양군이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 출동, 삼엄한 경계 속 도끼만행의 발단인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장면.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8/1389138541692480.jpg"/>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3&middot;15 부정선거에 항거한 4&middot;19 학생의거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후 장면 민주당 정부가 출범했으나 데모 만능, 실업 사태, 학생들의 무조건적인 남북합작운동, 농촌의 피폐와 가난의 악순환 등으로 우리사회는 격심한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하루 수차례씩 거리를 메운 데모가 매일 지속되었고 장면 총리는 데모대 면담 때문에 국정을 볼 수 없었다. 학생 데모대가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하여 국회의장석을 유린하는 무법사태가 벌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곽상훈 국회의장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 정도였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했으나 국가 지도력은 부재 상태였다.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기운이 각계각층에 팽배했다.이러한 때 5&middot;16이 일어났다. 윤보선 대통령마저 &lsquo;올 것이 왔다&rsquo;고 평했다. 박정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건설을 하려고 해도 자원과 자본, 기술이 없었고 국민적 희망이나 의욕도 없었다. 한일회담으로 받아낸 청구권 자금이 국가재건을 위한 &lsquo;씨드 머니&rsquo;가 됐고 상업차관과 재정차관을 과감히 도입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와중에 북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다.1967년 1월 19일 우리 해군경비정이 북한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사건에 이어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특공부대 31명이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고 7월 임자도 간첩사건, 8월 서귀포 무장간첩선 침투(12명 사살) 사건, 11월 2일 강원도 울진&middot;삼척지역에 북한 무장공비 100여 명 침투, 다음날인 11월 3일 소대단위 북괴군 중동부전선 침투 등 동시 다발적인 북한의 무력도발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1968년 한 해 동안 356건에 달하는 북한의 무력도발과 간첩침투 사건이 일어났고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9년 들어서도 3월 강원도 주문진 무장공비 출현, 4월 15일 미 공군 EC121 정보기 격추, 5월 김규남 국회의원 간첩사건, 12월 KAL기(승객 승무원 51명) 납북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격열비도 간첩 침투, 6월 군자만 침투 간첩선 나포 및 동해 간첩선 침투, 해군방송선 피격피랍,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한층 빈번했고 더욱 가중되었다.김일성의 남침 야욕이 점점 노골화 되어가고 있었고 한반도 전쟁 재발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 아시아지역 분쟁에 대하여 △미국 지상군의 불개입 △당사국 자체 방위 원칙을 내용으로 하는 &lsquo;괌 독트린&rsquo;을 발표한 데 이어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1971년 철수 통보를 한국 정부에 전달해 왔다. 그리고 이 철수 계획은 1971년 3월에 이루어졌고 판문점 구역을 제외한 휴전선 155마일 전 구간 방어 경비를 한국군이 전담하게 되었다.이에 박 대통령은 1969년부터 불원간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자주국방 태세의 강화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대미 안보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다. M16 소총 공장 차관 합의를 본 것은 1970년 7월 25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 달 뒤 8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애그뉴 부통령을 맞이하여 점심도 거른 채 무려 6시간 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한미안보협의를 계속했다.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단기간에 걸친 주한미군의 철수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유혹과 오판 유발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4만 명 이상의 한국군 월남 파병, 주둔 △김일성의 도발 증대와 준전시 하에 있는 한국의 입장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군사전략 등에 비추어 한국에 대한 예외조치와 선 한국군 현대화 조치를 논리 정연하게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한&middot;미는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 철수와 1개 사단 계속 잔류를 합의했으나 애그뉴 부통령은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5년 내에 주한미군 모두를 철수 한다고 발표했다.이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위험과 약소국의 비애를 통감해야 했다. &ldquo;자주 국방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rdquo;라고 그는 비장한 독백을 했다.&ldquo;내 집에 불이 났을 경우 먼저 온 가족이 달려들어 전심전력으로 불을 끄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웃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고 이웃들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도와주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도 가족들이 팔짱 끼고 불구경만 한다든지, 성의 없이 한다면 어느 누가 도와주겠는가.&rdquo; <img alt="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 부대기를 수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대비 자주국방 강화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대미 안보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다. 사진출처=보도사진연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8/1389138541692481.jpg"/>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안보외교를 끈질기게 계속토록 하여 △주한 미7사단 1만 8000 병력 철수 △주한 미2사단의 후방배치 △15억 달러의 한국군 현대화 계획(이 중 49% 한국 부담) △한미 외무+국방장관 연례안보협의회 개최 등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박 대통령은 또한 포커스레티나 훈련, 프리덤 볼트 작전, 한미연합 방어 및 합동 공수기동훈련 강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전쟁을 각오한 단호한 응징과 결의 표명, 북한의 남침 시 7일 섬멸&middot;격퇴 작전과 박 대통령의 서울 사수 천명, 향토예비군 및 민방위훈련 강화, 군 사기진작과 국민단결 촉구, 국력 집중과 배양의 가속화 등 북한에 대한 군사적, 비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면서 김일성의 전쟁 의지를 견제했다.이와는 별도로 박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전쟁 방지 및 평화 유지를 위한 다각적인 평화노력을 지속했다. 1970년 8&middot;15 경축사를 통해 △무력도발의 방지 △인위적 장벽의 단계적 철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간의 체제경쟁(전쟁 대신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하고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여건을 만들 것인가를 경쟁하자는 것) 등을 제의 선언했다. 1971년 6월 비무장지대의 평화이용 제의를 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와 상호 불간섭과 평화공존, 신뢰 회복, 단계적 교류확대, 평화통일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7&middot;4 남북공동성명이 1972년에 있었고 1973년에는 대한민국의 대 공산권 문호 개방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제의한 6&middot;23 선언이 있었다.그리고 1974년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박 대통령은 △상호 무력 불사용 △상호 내정 불간섭 △휴전협정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평양과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열렸으나 북한은 이 기간에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1974년 11월 제1 땅굴, 1975년 3월 제2 땅굴 발견됐다. 그리고 비행기 전차 대포 등 공격용 전력을 휴전선 가까이 남진 배치했다.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1&middot;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현충문 폭파사건에 이어 세 번째로 1974년 8&middot;15 경축기념식장에서 박 대통령을 저격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 서거의 폭거를 저질렀다. 이는 박 대통령만 없으면 적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집념의 표시라 하겠다.여기에 더해서 월남 패망과 캄보디아 공산화 등 도미노 현상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극에 달하고 있는 김일성의 호전성과 야만성, 잔인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사건은 판문점 미군 관할지역의 시계 청소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하던 미군을 북괴군이 공격, 도끼로 찍어 살해한 사건이다.박 대통령은 &lsquo;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rsquo;고 규탄했고 미군 대신 한국군이 절단 작업에 나서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한미 양국은 전쟁을 각오하고 항공모함, B52, F111 전투기, 미 해병 상륙대 등 아시아에 배치된 전력을 총동원한 가운데 한국군 특전단 장병들이 들어가서 그 나무를 절단했다.결국 김일성은 꼬리를 내리고 사과와 유감 표명을 했다. 이때 한미 양국은 북괴군의 저항이 있을 경우 이를 초토화시키고 연백평야를 넘어 38선까지 진격하여 황해도 일대를 탈환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었다.한편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남북 간 월등한 국력의 차이가 벌어져 김일성이 감히 전쟁 엄두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라 보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서둘렀다. 국력을 총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배양을 가속화했다. 1976년을 고비로 박 대통령의 예상은 현실로 나타났고 남북의 국력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1961년 대한민국 GNP 89달러, 북한 GNP 350달러 선에서 출발하여 15년 만에 대역전을 이룬 역사적 쾌거였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8/138913854169248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4] ‘김정염의 비서실’의 진면목]]></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902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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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3 Jan 2014 11:33: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대한 종합적 안목과 정무적인 판단 능력, 정책추진 능력 등을 배양토록 했다.매년 총무처로부터 고시 합격 신임 사무관들 중 성적순으로 10명씩 배정받아 2년 정도 비서실에서 근무케 함으로서 업무능력과 공직관, 국가관을 확립케 한 뒤 행정부처로 전출시켰다. 이렇게 훈련, 양성된 엘리트 관료들은 대통령비서실과 행정부서를 순환근무하면서 그 역량을 십분 발휘했고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img alt="1979년 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염 주일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3/1388716436690210.jpg"/> 그중에서도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의 발탁은 자주국방 태세 강화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한 국부 창출을 동시에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한 인사의 백미라 하겠다.1968년 이후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전쟁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방위산업 육성이 긴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고 방위산업 건설을 독려했으나 방대한 재원조달과 기술 문제 등으로 그 진척이 여의치 못했다.이때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가 김 실장에게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연계한 &lsquo;병진건설&rsquo;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두 사람은 곧바로 박 대통령께 그 내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1971년 11월 10일 오 차관보를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전격 임명하였고 이때부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연계 건설계획이 본격적으로 시동되었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른 인사라 할 수 있다.한편 김 실장은 대통령특별보좌관실을 신설하여 다음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각계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비서실 업무와는 차원이 다른 특별보좌를 할 수 있도록 했다.△교육&middot;문화특별보좌관 : 박종홍 서울대 교수 △외교 : 김용식 전 유엔대사, 최규하 전 외무장관, 김동조 전 외무장관 △안보 : 유재흥 전 국방장관, 서종철 전 국방장관, 박원근 예비역 중장 △정치(국내&middot;외) : 이용희 서울대 교수, 함병훈 연세대 교수, 김경원 고려대 교수, 장위돈 서울대 교수 △경제 : 남덕우 전 기획원 장관, 신병현 한국은행 총재, 박진환 서울대 교수, 김명윤 고려대 교수 △법률 :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사회 : 장동환 성균관대 교수, 임방현 &lt;한국일보&gt; 논설위원.이렇듯 1970년대 대통령부(청와대)는 비서실과 특별보좌관실을 합쳐 대한민국의 인재풀 역할을 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 국무총리, 감사원장, 경제부총리, 각 부처 장관 등 역대 정부까지 37명의 장관급 이상 공직자가 그 인재풀에서 배출됐다.김정염 실장은 사실상 &lsquo;경제부통령&rsquo;의 입장에 있었지만 행정부처와의 마찰이나 갈등 및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고 그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이나 말썽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질책을 받을 만한 일에 대해서는 장관들을 대신하여 보고해 주면서 장관이 들어야 할 꾸중을 대신 들었고 칭찬받을 일에 대해서는 장관을 앞세워 보고케 하면서 장관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는 스트레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 바 있다.&ldquo;막중한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을 맡은 대통령께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대통령께서 장관들에게 일일이 꾸중을 하시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는다. 그 대신 비서실장에게는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과 국정운영을 위해 바람직하다.&rdquo;김 실장은 1977~1978년 탈모와 좌골신경통 때문에 오래도록 고생했다. 샤워할 때마다 머리털이 한 줌씩 빠졌고 좌골신경통 때문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보고를 받고 결재했다. 박 대통령의 호출 때에는 절뚝거리면서 집무실로 달려가곤 했다. 이 모든 신체적 장애가 스트레스 때문에 왔다는 진단이었다.물리치료, 약물치료, 한방치료 등 여러 가지 치료와 노력을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증세는 심해지면서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자세로 비서실장 임무를 수행했다. 참으로 놀라운 정신력이었고 극기심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들은 비서실장 퇴임 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저절로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img alt="청와대비서실 민방위발대식에서 김정염 비서실장이 신고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3/1388716436690211.jpg"/> 그는 머리 좋기로 유명했다. 모든 계수는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박 대통령의 하문 시 주무장관보다 더 정확한 답변을 했다. 국정 전반에 관해 분야 별로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박 대통령 보좌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히 완벽한 비서실장이었다. 주요 전화번호도 모두 외우고 있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기억해서 오랜만에 만나는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컴퓨터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그는 또한 극진한 효자였다. 매주 토요일 퇴근하면서 가회동 부모님 댁에 들려 문안드리는 것을 9년여 동안 한 번도 건너뛰는 일이 없었다. 충효동근(忠孝同根)임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그는 대통령비서실 규모를 최소화하고 능률을 최대화했다. 9년여 비서실장 재임 중 비서실 규모를 총계 230명 내외로 운영했다. 이 중 운전수, 여직원 고용원(청소&middot;정원관리) 등 기능직이 120명 선이고 행정요원 비서관, 수석비서관 등이 110명 선이었다.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전문 인력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부실기업 정리사업, 관광 진흥사업, 8&middot;3 사채동결 조치 등이 그것이다.&lsquo;김정염 비서실&rsquo;은 최소의 규모로 최대의 능률을 발휘하여 일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비서실이었다. 그는 최장수 최우수 완전 청결한 대통령비서실장의 모법이며 영원한 사표(師表)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역대 정권에서 보았던 대통령비서실의 과비대나 과직급 상향 현상과 가신그룹의 발호, 문고리 권력의 부패, 대통령 가족&middot;친인척들의 부패와 국정 농단 왜곡 등 비정상적인 운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김 실장은 그의 건강에 대한 박 대통령의 특별배려에 따라 9년 3개월 동안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사임하고 일본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그는 대사 재임 중 1979년 10&middot;26 박 대통령 서거의 비극을 맞이하였고 신군부에 의해 해임, 귀국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1993년 그는 세계은행이사회의 &lsquo;동아시아로부터의 교훈&rsquo; 강좌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에 대하여 기조연설을 하고 질의 응답했다. 세계은행은 &lt;한국 경제정책 30년사-김정염 회고록&gt; 영문판을 세계은행 경제개발원 정책수립 총서 창간호로 출판하여 개발도상국 경제개발 교과서로 활용했다.이에 앞서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92년 초 소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하여 한국 등 네 마리 용을 따라붙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경제개발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중국 관영 &lt;신화통신&gt;은 그의 회고록을 &lt;한국 경제 발전-한강의 기적과 박 대통령&gt;이라는 중국어판으로 번역 출간하여 공산당과 내각 및 국영기업체의 간부용 필독참고서로 활용했는데 김 실장은 한&middot;중 우호증진을 위해 중국어판 회고록에 대한 인세를 사양했다.이처럼 그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했고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의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개혁개방을 하려는 나라들에게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알리는 등대가 되고 있다.그는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뒤 박 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그동안 진전이 없었던 기념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박 대통령 기념도서관과 기념회관 건립을 완성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3/138871643669021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3] 대통령비서실장의 사표 김정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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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4 Dec 2013 17:47: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김정염은 일제강점기 충남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에 있는 오이다고등상업학교에 유학했다. 3학년 재학 중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히로시마교육대에서 훈련 중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경 폭심 2㎞지점에서 원자폭탄을 맞았다. 화상을 입고 출혈과 탈모, 고열 등 원자병에 감염됐으나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한국은행 설립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도교지점과 뉴욕사무소장으로 근무했다. 미국 클라크대학 대학원에 유학했으며 훗날 동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img alt="김정염 비서실장 재임(1969년 10월~1978년 12월)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을 제외하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24/1387874863687410.jpg"/> 그는 자유당 말기 재무부 이재국장 봉직을 시작으로 1978년 말까지 평생을 경제 관료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3선개헌 후 1969년 10월 20일 정일권 내각은 총사퇴하기로 하고 일괄사표를 제출하였다. 1967년부터 2년간 봉직한 김정염 상공장관도 포함되었다.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lsquo;뜻밖에&rsquo;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ldquo;경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정치 등 비경제분야를 포함한 국정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국정운영을 보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많아 적격하지 못하다&rdquo;고 겸양했다.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ldquo;국가경영의 요체는 안보와 경제다. 국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대본인데 최근 북의 도발이 가중되고 있고 국제정세가 격변하는 등 안보 상황이 위중함으로 나는 국방태세 강화와 안보외교에 전념해야 한다. 나를 대신하여 경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rdquo;라고 당부했다. 처음부터 경제에 관해 전폭적인 권한위임을 받은 셈이다.그는 이미 5&middot;16 직후 있었던 화폐개혁의 실무책임과 한일회담 청구권 대표를 맡으면서 박정희 시대의 주요 경제운용에 깊숙이 개입했었다. 이후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을 거쳐 재무장관 상공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수립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는 경제 건설의 기초를 놓았고 1970년대에는 그 발전과 성장을 이끌었다. 1978년 12월 말 퇴임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수출 증진과 중화학공업 건설 등 1970년대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나가는 데 혼신을 다해 헌신했다.나는 1974년 10월부터 1978년 12월, 그의 퇴임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그의 보좌관으로 봉직한 바 있다. 그의 구체적인 업적은 회고록 &lt;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한국 경제정책 30년사&gt;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저서는 한국 경제개발사의 1차 사료적 자료로서 경제학도, 지식인, 정치인뿐만 아니라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발전 과정을 알게 하는 국민 필독의 고전이다. 또한 경제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계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정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img alt="김정염 비서실장의 회고록 &lt;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gt;의 영문판 표지."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24/1387874863687411.jpg"/> 그는 학구적인 경제 관료이며 철저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강직하고 청렴한 원칙주의자이며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였으며 뛰어난 경세가였다. 그는 한때 연세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내정된바 있었으나 정부의 부름 때문에 학계 진출을 포기했다. 격무 중에도 틈만 나면 &lt;아사히신문&gt; &lt;요미우리신문&gt; &lt;산케이신문&gt; 등 일본 신문들과 미국 &lt;뉴욕타임스&gt; &lt;US News &amp; World Report&gt;, 홍콩의 &lt;Far Eastern Economic Review&gt; 등을 정독하는 등, 세계 경제동향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는 비서실장이 되면서 주한 미국대사(포터, 하비브, 슈나이더)들과 회합을 갖고 한미 현안에 대해 차원 높은 협의를 지속했다. 특히 카터 행정부 때에는 슈나이더 대사와 월 1회 단독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 자주국방태세 강화를 위한 신무기체계 개발, 소위 인권 문제를 포함한 긴급조치 등 한미 군사&middot;외교 현안 전반에 걸쳐 긴밀한 협의와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요담을 계속했다.그는 대통령 통치자금과 관련하여 &ldquo;대통령께서 돈을 너무 많이 쓰게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께서 풍족한 자금을 쓰게 되면 자칫 부패, 정경유착, 국가부패 풍조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엄격히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rdquo;면서 절약과 절제를 수범했다. 그는 경제인들의 정치헌금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엄격한 원칙을 세워 운용했다.①3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이익을 낸 업체로 제한했다.②비료, 농약, 종자, 사료, 농기구 및 영농 관련 업체와 어구&middot;어선 제조업 등 농&middot;축&middot;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업체는 배제했다. 이들 업체에 대해서는 여유이익분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농&middot;축산 및 어민들에게 되돌려 주라는 의미에서다.일례로 경기농약회사 소유주 권태흥이 정치헌금 제의를 해왔을 때 김 실장은 농어민 관련 기업 배제 원칙에 따라 성금을 접수하지 않았다. 당시 경기농약은 다른 제조업 못지않게 영업이익을 많이 낸 건실한 기업이었다. 이에 권 사장은 그해 연말 고향을 찾아가는 여공들을 위해 방한복을 대량 기증했다.③자발적 순수 성금 원칙 아래 이권이나 청탁거래 등과의 연계를 철저히 배격했다.그의 비서실장 재직기였던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산업기반 조성기를 거쳐 연 12%의 본격적인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발전 지원과 기업육성 및 수출 진흥정책에 힘입어 실적과 이익을 많이 낸 기업들의 자발적인 순수 성금만을 접수했다.어느 한 기업의 과다한 성금 제의나 이권과 관계된 거래 연계 가능성이 있는 성금 제의는 철저히 배제했다. 30개 대상 기업들이 형편대로 골고루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달된 정치자금은 시중은행에 골고루 예금해 두었다가 쓰곤 했다.국방헌금과 새마을성금 등도 함께 접수했으나 국방부와 새마을 관계 기관에 이관, 관리했다. 특히 새마을성금에 있어서는 정부의 새마을사업 외에 비예산 필요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활용되었다.④박 대통령에 대한 기업인들의 사적 접근을 봉쇄함으로써 이권청탁의 길을 차단했다.김 실장 재임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회장을 제외하고는 1건도 없었다. 김 실장도 9년여 동안 경제인들과의 사적 만남이 1건도 없었다. <img alt="포항제철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맨 아랫줄 왼쪽서 세번째)에게 어떤 외부 간섭이나 청탁이 없도록 ‘종이마패’를 써주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24/1387874863687412.jpg"/>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군 재직 시부터 그의 참모로 봉직했던 특수 관계였다. 포철 건설 당시 외부 간섭이나 청탁 등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박 회장에게 써 준 &lsquo;종이마패&rsquo;와 3선개헌 당시 개헌 불찬성 의견을 표명한 박 회장에 관한 정보보고에 대해 &ldquo;그 사람은 개의치 말라&rdquo;고 엄명한 것은 두 사람간의 특별한 신뢰관계의 표시라 하겠다.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현대조선 창설과 관련하여 비교적 박 대통령과 잦은 만남을 가졌으나 독대는 없었고 모두 관계 장관, 김 비서실장 및 관계 비서관 배석 하에 공적업무를 위한 만남이었다.비서실 운용에 있어서도 절제와 검약 겸손과 협조의 기풍을 진작했다. 그는 보리, 잡곡 권장기에는 보리잡곡밥을, 분식 때에는 국수와 짜장면을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 배달해 주는 대로 9년여 동안 점심으로 먹었다.그는 공적 업무수행 이외에 사적인 외부접촉은 철저히 차단 자제했다. 주말 운동도 반드시 수석비서관들하고만 했고 외부인사와의 회식은 없었다. 나는 공화당 당직자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제한적인 인사들과의 주말 운동 또는 회식 등을 조심스럽게 건의했으나 김 실장은 한번 길을 트면 겉잡을 수없이 확대되거나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부접촉을 삼가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설명이었다.그는 대통령부(청와대) 자체가 최고의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주어진 권한의 80% 범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장관급이던 수석비서관제를 차관급으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행정부에 대한 대통령비서실의 월권, 간섭, 군림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했다. 행정부처 간의 협력과 조정의 역할을 권장했다.참모 연구보고와 말씀자료에 대한 대통령의 서명을 근거로 한 지시각서 시달을 폐지시켰다. 이때의 대통령 서명은 읽어보았다는 확인인데 이것이 지시각서로 부풀려 행정부로 하달될 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는 것이다. 이는 상공부, 재무부 장&middot;차관 시절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하여 시정 조치한 것이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24/1387874863687413.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2] 2인자 이후락의 몰락]]></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844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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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8 Dec 2013 09:24: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증대를 내용으로 하는 7&middot;4 남북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했다.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8월 30일~9월 2일)과 서울(9월 18일~9월 20일),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회의(1차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 집, 2차 11월 2일 평양)가 각각 개최되었다. <img alt="1973년 납치됐던 김대중이 구사일생으로 생환해 기자회견하는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8/1387326248684400.jpg"/> 1969년 말부터 세계정세는 엄혹한 동서냉전체제에서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세계적으로 데탕트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군사적 도발과 위협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변화에 즈음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전쟁 예방과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북관계 책임을 맡고 있는 이 부장이 1969년 말 취임하면서부터 북한 내부를 &ldquo;면밀히 들여다보면서(본인의 표현임)&rdquo; 남북 간 긴장완화와 화해협력 방안을 탐색한 것은 현명하고 당연한 일이었다.이 부장은 진행 중에 있던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정홍진 정보부 국장으로 하여금 북한대표단의 실력자 김덕현(노동당 간부)에게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의토록 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고 이후락 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겸 정치위원) 회담 개최합의를 이끌어냈다.이 부장은 1972년 1월 정 국장을 단신 방북케 하여 &lsquo;이+김 회담&rsquo;의 절차와 사전준비 작업에 관해 북측과 협의토록 했다. 이어 5월 2일부터 5일까지 이 부장이 직접 극비 방북해 이+김 회담과 김일성 면담을 통해 역사적인 7&middot;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김일성과의 면담은 방북 마지막 날인 5월 4일까지 이루어지지 않다가 자정을 넘기고 5월 5일 새벽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부장이 이때 주머니에 넣고 있던 청산가리를 만지작거린 탓에 이것이 녹아서 낭패를 보았다는 얘기를 그가 경기도 광주 도요장(도자기 굽는 시설)에 은거할 때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그 도요장에 자주 출입했던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사실 5월 2일 오전 &lsquo;적진&rsquo;을 향한 출발에 앞서 박 대통령은 공산당을 잡는, 대한민국 정보의 총책임자인 이 부장의 신변안전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주한 미국 CIA 책임자에게 방북 사실을 알리고 긴밀한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공조체제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 부장도 인질로 잡힐 경우 자결할 각오로 청산가리를 준비해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밝혔다.당시 정부의 통일정책은 △6&middot;25 남북전쟁의 적대관계 해소와 상호신뢰구축 △휴&middot;정전 체제로부터 평화 정착 △가능한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의 증진 △남북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를 통한 통일이라는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야당 당수가 된 김대중(DJ)은 정부의 통일정책과는 전혀 다른 미국&middot;일본&middot;중국&middot;소련의 4대국 안보보장론, 남북한 UN 동시가입, 연방제 통일론 등을 주장하여 정부를 당혹케 했다.남북대화의 성공적인 진전을 위해 올인하고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으로서는 김일성 유일체제와 고려연방제 통일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내부결속과 체제강화가 긴요했다. 그런 그가 10월 17일 유신을 주도했다. 계획과 세부작업을 정보부에서 했다.남북회담은 1973년 8월 23일 북측의 대화중단 발표가 있기까지 국민과 여론은 남북대치 상항에서 곧 가시적인 그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성급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 기대와 흥분만큼 이후락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주변으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몰렸다. 권력서열 2인자의 위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혔다.성급한 후계자설도 나왔다. 이후락으로서는 지극히 조심하고 몸을 낮추어야 할 계제였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유혁인 정무수석 등 대통령 참모들에 대한 우호적인 사적 만남도 몇 차례 있었다. 2인자에 후계자설까지 나오는 그에게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img alt="1972년 이후락(왼쪽)이 북한 김일성과 악수하는 장면.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8/1387326248684401.jpg"/> 이와 관련, 김성진도 이후락이 사무실로 오라고해서 갔더니 돈을 주기에 받아가지고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다음날 수표 봉투를 내놓고 보고를 드렸다. 대통령께서 듣고 그냥 가져가서 쓰라고 말했다고 10&middot;26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얘기한 바 있다.이후락이 연루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숙청사건이 1973년 초 발생했다. 윤필용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 재임 중으로 박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던 군내 최고 실세였다. 그는 유신 선포 후 유정회 국회의원 선발 시 군 출신의 대거 발탁을 이 부장에게 건의했고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ldquo;맡은 일이나 잘하라&rdquo;고 언짢아했다는 것.그는 이후락 정보부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친밀하게 지냈다. 유신 초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 주최 만찬에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김시진 비서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노쇠 노망 얘기와 이후락 후계론이 설왕설래 되었는데 윤필용이 &ldquo;다음에는 형님이 해야 합니다&rdquo;고 말했다고 한다.한 달쯤 뒤 박 대통령의 뉴코리아 골프 라운딩에 참석한 신 사장이 그늘집에서 쉬는 동안 &ldquo;각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주변 측근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rdquo;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추궁 끝에 신 사장은 만찬 때 있었던 대화내용을 자백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막강한 병력과 전력을 가지고 수도서울의 경비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군부실력자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보와 권력에 대하여 2인자 후계자설까지 도는 정보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하여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분할통제 용인할 달인인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두 사람에 대한 신임은 거두어지고 거세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박 대통령은 강찬성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윤필용 수방사령관을 숙청했다. 박 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잘 헤아린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부장을 정치적으로 견제, 압박했다. 윤필용은 1973년 4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윤필용과 가까웠던 김연준 대한일보사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고(후에 무혐의로 석방), 내가 재직했던 &lt;대한일보&gt;도 폐간됐다.윤필용의 숙청 과정에서 이후락 정보부장도 함께 해임될 뻔했으나 두 권력기관장을 동시 해임하는 것이 정권안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정염 청와대 비서실장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이후락은 위기를 모면했다. 윤필용은 먼 뒷날 박 대통령이 자기를 친 것은 2인자 후계자설 등이 도는 이후락에 대해 &ldquo;까불지 말라&rdquo;는 강력한 경고를 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이후락은 불안 초조했고 박 대통령의 신임회복에 급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무렵, 10월 유신 선포 직전 방일했던 DJ가 일본에 망명하여 미국을 오가면서 극열한 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lsquo;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rsquo;을 만들어 그 의장에 추대되었고 망명정부를 세워 그 수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을 추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img alt="이후락 말년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8/1387326248684402.jpg"/> 박 대통령의 심기가 편할 수가 없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런 상황에서 정보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 부장을 압박했다. 코너에 몰린 그는 8월 8일 DJ 납치를 결행했다. 최고 권력자의 신임 회복을 위한 외곬의 의지가 맹목적 충성으로 표출되었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본인의 파멸은 물론 조총련 소속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서거의 비극을 초래하게 됐다.그날 공보비서실은 김성진 대변인 주재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DJ 납치 외신 전문이 들어왔다. 김 대변인이 그 쪽지를 들고 곧바로 김 비서실장에게 알렸고 이어 박 대통령께 보고됐다. 박 대통령은 &ldquo;어떻게 된 일이냐&rdquo;고 난감해 하면서 △일본 우익 과격분자의 소행 △재일 거류민단 과격분자 소행 △정보부 공작 △DJ 자작극, 이렇게 네 가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어떤 경우든 DJ에게 신체적 위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부장은 자신의 지시로 진행된 DJ 납치 사건에 대해 5일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에 데리고 와서야 보고했다.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JP)를 진사(까닭을 밝히며 사과) 사절로 파견하기로 했다. 김 총리는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을 관저로 예방하고 진사함으로써 한일 경색국면이 풀렸다. 이 과정에서 홍경모 KBS 사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NHK 사장을 움직여 수상 관저 예방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이 부장은 정보부 국장의 민간인에 대한 월권 독직사건과 관련하여 박 대통령에게 직접 국문을 당하고 여러 관련자를 해직하는 사태를 겪었다. 결국 그 해(1973년) 말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10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10&middot;26 사건을 맞이했다.그는 박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공백기인 어느 날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고 JP 후계자 불가론을 주장, 정가에 큰 충격을 불러 오기도 했다. 부정부패 당사자로 지목되자 떡고물론을 주장하여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이후락의 DJ 납치와 관련하여 후일 JP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질러 박 대통령도 어떻게 손 쓸 수 없게 함으로서 공동운명체화하려 했던 꾀였다고 평한 바 있다.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권력상층부 이너서클 간의 알력과 견제 및 충성경쟁이 빚어낸 과잉충성의 결과라고 분석했다.한편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경기도 광주에 도요장을 마련하고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 DJ의 대통령 당선 후 고향 친구이며 DJ의 측근이던 최영근을 앞세워 DJ를 예방 진사했다. 이때 이후락이 많은 재산을 헌납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DJ 재임 중 그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보복 없이 이례적으로 관대하게 넘어갔음은 정치보복 근절 차원에서 다행이라 하겠다.그의 말년 생활이 곤궁했다는 얘기를 그의 지인들로부터 들었다. 권력무상,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lt;위의 내용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을 참조하였음&hellip;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8/1387326248684403.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1] 이너서클의 암투]]></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813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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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1 Dec 2013 09:05: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박종규와 홍종철의 갈등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임명되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에 박종규 최고회의 경호실장(소령 예편 후)이,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 차장에 최고회의 위원이며 군정시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홍종철 대령이 각각 임명 되었다. <img alt="박정희 정권 시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이후락 비서실장은 196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부침도 겪었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1/1386720350681330.jpg"/> 박종규와 홍종철 사이에선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들렸고 상호 알력과 갈등이 심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종철 차장이 문공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홍 장관은 정부의 홍보업무와 언론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그가 장관 취임인사차 기자실에 들렀을 때 일화다. 그때는 중앙청 기자실에서 총리실, 문공부, 외무부 관계 기사를 모두 커버할 때였다. 각 언론사에서 2~3명씩 출입했고 신문사 외에 방송사와 통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각 기자들과 일일이 첫인사를 나눌 때였다. 통신사 기자의 차례가 되었다. &ldquo;○○통신사에서 나오는 아무개입니다&rdquo;라고 자기소개가 되었다. 인사를 받은 홍 장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ldquo;통신사 기자가 왜 여기에 나오느냐&rdquo;고 반문, 좌중을 긴장시켰다. 통신사 기자를 전기통신회사의 기술자로 착각해 일어난 해프닝이다.제3공화국 언론정책에 대한 기자들의 집중적인 질문공세가 계속되자 홍 장관은 &ldquo;살카쥬(살려 달라)&rdquo;를 연발함으로서 첫 상견례를 치렀다. 각 언론사 사장을 예방하는 자리에서도 &ldquo;살카쥬&rdquo;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래서 &lsquo;살카쥬&rsquo;가 그의 애칭이 되었다.공직기강 확립과 부패방지를 위해 대통령직속으로 사정특별보좌관제가 설치되고 그 첫 번째 보좌관으로 홍 장관이 임명되었다. 외국차관 사업이 한창이었고 청와대 비서실장 이하 수석비서관들이 모두 대형 미제 승용차를 각자 요령껏 장만하여 타던 시절이었다.홍 특보가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리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렸다. 박 실장이 그 사실을 알고 홍 특보를 비서실장실로 불러 언쟁을 벌렸다. 급기야 박 실장의 권총이 발사됐고 홍 특보가 발등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홍 특보가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두 사람 간의 불상사는 청와대 기자실에까지 퍼졌다. 그 후 치질 때문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그리고 한참이 지난, 여름 어느 날 홍종철 특보가 팔당댐 아래 미사리에서 밤낚시를 하던 중 의문의 실종 사고를 당했다. 박 경호실장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확인불명이고 다만 그때 박 실장이 홍 특보의 시신 수색을 진두지휘하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김형욱의 반역과 죽음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9년 3선개헌 후 경질됐다. 그는 육사 8기 육군 중령으로 5&middot;16에 가담한 바 있다.김종필(JP) 직계였던 그는 김종필의 추천으로 정보부장이 되어 충성맹세까지 했으나 취임 후 곧바로 김종필 탄압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그는 JP에 대한 24시간 감시를 했다. 전화 도청은 물론 집 앞 골목길에 군고구마 장사를 가장한 정보요원이 상주하여 모든 출입자를 세밀히 들여다보았다.그는 여야를 불문하고 가혹한 정치사찰과 탄압을 자행했으며 경제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 자금과 상업차관 도입이 한창일 때인 1960년대 정치자금 모금을 둘러싸고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장기영 부총리 등과 알력이 심했다.부총리 사무실을 밤중에 뒤졌는가 하면 김성곤과는 내기 골프 끝에 말썽이 생기자 정보부에 보관 중인 그의 좌익 활동 기록을 보내 혼비백산케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냈다. 야당의 김영삼에게는 초산 테러를 자행,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JP 직계인 김용태에게는 이른바 &lsquo;복지회 사건&rsquo;을 무리하게 만들어 정치적 거세를 했다. 김용태의 부인도 정보부에 끌려가서 치도곤을 치르고 낙태까지 했다. 김형욱은 3선개헌 작업이 진행 중인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개헌에 반대 입장에 섰던 김용태에게 권총 협박을 했으며 김 의원도 위축되지 않고 쏠 테면 쏴라 하고 대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이후락 실장이 만류하여 더 이상 분란이 확대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역시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육사 8기 동기생이며 황해도 동향 출신인 오학진 신윤창 등에게 권총을 들이대면서 협박하기도 했다.그는 정보부장 퇴임 후 1971년 전국구 의원으로 제8대 국회에 진출했을 때 국회 구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만지던 김용태를 찾아가 큰절을 하고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의 신분이 국회의원이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소외감과 보복의 공포심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그는 미화 700만 달러를 미국에 옮겨놓았고 그 돈으로 몇 년 동안 호화 방탕 생활을 했다.그는 1977년 6월 하순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대한 반역적인 증언을 했다. 증언에 앞서 중앙정보부와 공화당 국회의원 등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익에 반하는 증언을 만류했지만 끝내 조국과 섬기던 대통령에게 배신과 반역의 칼을 꽂았다.그는 술과 카지노 등 방탕 생활로 돈이 궁해지자 회고록 집필을 미끼로 2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흥정을 걸어왔다. 회고록 원고와 200만 달러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정보부가 만류와 회유를 끈질기게 했으나 응할 듯, 응할 듯하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lsquo;절친&rsquo;이던 혁명주체 동기생이 미국까지 갔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군의 선배이며 고향 선배인 민병권 의원이 미국 뉴욕에서 만나 회고록 출판 중지와 박 대통령의 신변안전 보장 메시지를 전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김형욱은 끝내 듣지 않고 패가망신의 길로 질주했다.그 후 그는 정보부의 유인공작에 걸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국제 살인 청부조직에 의해 사료 공장에서 살해 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이후락의 부침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떨쳤던 인물은 단연 이후락이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창설 멤버였다. 이승만 정권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고 민주당 정부 때에는 장면 총리 직속 정보분석실인 79부대(그의 군번이 79번임)를 창설, 운영했던 정보통이며 정일권과 함께 대표적인 친미 인사였다.5&middot;16 후 한때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서 영자신문사 사장으로 잠깐 있다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에 발탁되어 군정 2년 동안 파란 많던 정국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변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장에 취임, &lsquo;박 대통령 입안의 혀, 박 대통령의 제갈량&rsquo;으로 불리며 꾀보&middot;모사&middot;책사로 1960년대 권좌를 주름잡았다.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ldquo;각하, 저는 생각이 너무 앞서서 미처 말이 따라 나오질 못해 말을 더듬게 되는 것입니다&rdquo;라고 자신의 영리 명석함을 말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ldquo;이후락은 내 의중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내 생각을 앞서는 생각을 한다&rdquo;고 평했다.1969년 10월, 3선개헌 후 6년여 만에 퇴임, 주일한국대사로 전보됐던 그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결정(1970년 10월)에 따라 중앙정보부장에서 1년 만에 퇴임한 김계원의 후임으로 1970년 12월 말 정보부장에 취임, 1년 만에 다시 권좌로 복귀했다.이후락은 정보부장 취임 4개월 뒤에 실시된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와 한 달 뒤의 제8대 국회의원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어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 국회통과에 따른 항명주동자 길재호와 김성곤 및 그 추종 의원들을 정보부에 강제 연행, 가혹한 곤욕과 수모를 가하고 국회의원 사퇴와 정계은퇴를 강요하여 60년대 정&middot;재계를 주름잡던 4인방 권력체제를 일거에 궤멸시켰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1/1386720350681331.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0] 비서실장 보좌관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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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4 Dec 2013 09:4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ldquo;그런 중책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rdquo;라고 사양했다. <img alt="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을 초청,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04/1386118121678200.jpg"/> 김 실장은 &ldquo;말조심만 하면 된다. 비서실장 보좌관의 말은 비서실장의 말로 외부에 비칠 수 있고 나아가 대통령의 의중으로도 확대 전달 될 수 있기에 무엇보다 말조심이 중요하다&rdquo;며 &ldquo;만약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온다면 접선 5순위에 보좌관이 포함된다. 비서실장실, 보좌관실 자체가 2급 비밀&rdquo;이라며 재차 말조심을 강조했다.그렇게 중책을 맡게 된 나는 보좌관 4년여 동안 언론계 친구, 대학 친구, 기타 외부 인사들에게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다. 나는 이 4년 동안 점심은 잔치국수 짜장면으로 일관했다. 청와대 본관 근무자 중 부속실장, 비서실장, 의전수석비서관, 나, 그리고 본관 경호과장 등에 대해서는 청와대 본관 식당으로부터 점심식사를 배달받았다.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점심이 잔치국수, 짜장면이 대부분이고 간혹 짜장밥, 볶음밥이 나올 때도 있었다. 김정염 비서실장은 9년 동안 이 점심을 먹었다. 나는 가끔 김 실장이 좋아하는 일식 생선국을 외부에서 시켜드리곤 했다.비서실장 보좌관 4년여 동안 나는 이른바 대통령 통치비자금과 비밀 문건들을 보관 관리했다. 10&middot;26 후 남은 자금 9억 5000만 원은 박근혜 큰영애에게 전달했고 비밀문건 등은 청와대 보일러실에 던져 불태웠다는 얘기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있던 무렵 나는 점차 꼬여가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백두진 국회의장을 희생양으로 하여 여야 간 대화국면을 모색하는 방안을 대통령께 진언하도록 김계원 실장에게 건의했다. 김 실장의 진언을 들은 박 대통령은 그러나 &ldquo;백두진 의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rdquo;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김 실장이 전했다.나는 김 실장에게 민관식 국회부의장을 만나 백 의장의 자진사퇴 유도와 여야 관계호전 방안을 의논해 보도록 건의했다. 김 실장이 오케이 했다. 나는 민 부의장에게 연락하여 두 분의 만남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일이 되니 대통령의 안가 만찬이 있어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또 다른 날을 잡아 약속을 했다.당일이 되니 또 만나러 나갈 수 없는 사유가 생겼다. 역시 대통령 관계 행사 때문에 김 실장이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사유를 기다리고 있는 민 부의장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음 만날 일정을 협의 조정하는 중에 10&middot;26 사건이 일어났다. 일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국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 내가 겪고 들은 얘기를 토막별로 정리한다.△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권오병이 중증 위암치료차 경희의료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위문금 봉투를 준비해 문병을 갔다. 박 대통령의 위로 말씀과 위문금 봉투를 전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박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산삼을 먹었더니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들 말에 의하면 산삼 한 뿌리에 900만 원을 주고 샀는데 더 사달라고 조르니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한 번 더 문병을 갔다. 나중에 서울중학 옆에 있던 한옥 자택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산삼 때문이 아니었는지&hellip;.△심의환 총무처 장관이 위암 투병을 할 때도 세 번 문병과 위문금을 전달한 바 있다. 삼선교 근방의 자택이 공기가 나쁘고 시끄러워 공기 좋고 조용한 성북동으로 이사했으면 하는데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달라고 하여 받아주었다. 그는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 대통령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장관 자리를 유지하도록 했고 부인에게 위문편지를 썼으나 10&middot;26 사건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친필서신이었다. 10&middot;26 한참 지나서 전달됐다.△강문봉은 박 대통령과 군 동기생으로 오랜 친구 사이었다. 반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고 있었다. 박 대통령 앞으로 탄원 서신이 왔다. 내용은 결백 주장과 충성맹서였다. 그는 며칠 뒤 석방되었다. 그밖에 군 원로 반혁명 반정부 군 동료들에 대해 처벌과 별도로 그들 가족의 생계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1970년대 중반 국회의사당이 신축 개관된 뒤의 일이다. 정일권 국회의장이 감사의 인사를 표한 뒤 청와대 건물이 너무 낡았으니 새로 짓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국회가 서둘러 예산 반영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ldquo;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청와대 신축을 하지 않겠다&rdquo;라고 사양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청와대 건물은 일제강점기 총독관사로 지었던 목조 건물로, 낡고 협소하고 삐걱거렸다. 천정에는 쥐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결국 박 대통령 서거 후 8년이 지나서 신축되었다.△야당의 거물 정치인 유진산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부인이 박 대통령에게 탄원 편지를 보내왔다. 상도동 자택이 은행 경매에 넘어갈 처지인데 이를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ldquo;사람이 죽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rdquo;라면서 선처 조치를 했다. 유진산은 생전에 이 집을 담보로 은행융자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썼는데 살아 있을 때는 별말이 없다가 사후 이자를 못 내게 되자 경매절차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lsquo;왕사쿠라, 정상배&rsquo; 등으로 억울한 매도를 많이 당한 정치인이었으나 사후에는 빚만 남긴 깨끗한 정치인이었다.△어느 날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내려갔다. &ldquo;내 대구사범 동기생 석 아무개가 폐암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이라는데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서 상태를 상세히 알아보고 오라&rdquo;는 지시였다. 나는 즉시 병원으로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 진료 상태와 전망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명했다. 나는 그가 나을 때까지 진료비를 부담토록 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매달 병원에 가서 진료경과를 듣고 진료비를 정산한 뒤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6개월여 만에 사망했다. <img alt="항명파동 핵심 김성곤.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04/1386118121678201.jpg"/>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항명파동의 주동자가 된 김성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는 수모와 심한 곤욕을 치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자유당 국회의원일 때 &ldquo;국회의원은 백수건달&rdquo;이라는 말을 했으며 그로인해 &lsquo;백수&rsquo;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공화당 재정위원장인 그는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lsquo;4인방&rsquo;을 만들어서 반 김종필 세력을 구축, 돈과 권력을 활용해 여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활동으로 1960년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다. 그는 길 총장을 포섭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수표를 주었는데 수표를 받은 길 총장이 깜짝 놀랐다는 말이 은밀하게 떠돌았다.1971년 6월 개각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오치성 내무장관이 임명되면서 반 김종필 전선의 길재호,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4인방세력에 대한 정치적 거세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 지역구의 경찰서장, 시장&middot;군수를 모두 인사교체 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뿌리를 베어 버렸다. 권력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대회전이었다.이에 4인방은 강력히 반발했고 1971년 10월, 급기야 박 대통령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 주동자와 추종 의원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일대 곤욕과 수모를 당했다. 1960년대를 주름잡던 이들 4인방체제는 일거에 궤멸되고 말았다.김성곤의 항명파동의 파장이 유난히 컸던 것은 박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무시한 것 외에 그의 내각제 개헌 구상 의혹이 조기 포착됨에 따라 사태의 폭발성이 상승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최후의 만류 메시지를 김성곤에게 보내면서 &ldquo;돈과 권력을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어느 쪽이든 한쪽만을 택해야 한다&rdquo;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이 최후 경고를 받은 김성곤은 주춤하면서 항명의 발길을 돌리려 망설였으나 추종자들의 떠밀림에 버티지 못한 채 밀려 버리고 말았다.정계를 은퇴한 그는 미국 보스턴으로 가던 중 하와이에서 장문의 편지를 박 대통령께 보내왔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때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여 어떻게 썼다는 것과 경제 활동을 통해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김진만 후임 재정위원장에게 정확히 인계했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께서 보시고 내려 보낸 이 편지를 모두 읽어 본 뒤 파쇄기에 넣었다.김성곤의 정치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나는 쌍용양회 상무를 지냈던 우 아무개로부터 토지거래 양도세를 대납해 달라는 의외의 요구를 받았다. 내용인즉 우 씨가 쌍용양회 임원 재직 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 땅을 사고 팔 때 김성곤 위원장이 자기의 인감을 편의 사용하고 양도세를 미납한 채 미루어 왔다.10년여가 지나고 김성곤 사후 그 양도세 고지서가 자기 앞으로 나왔는데 이것은 정치자금 조달 관계로 생긴 문제니 청와대가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강남 개발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거래했던 일로 그가 생전에 처리했어야 했다. 청와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04/138611812167820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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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9] 육영수 여사 서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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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7 Nov 2013 08:50: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72년 공보비서관 피명 3개월 만에 나는 7&middot;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맞이했다. 남북적십자회담은 흥분과 환호 속에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고 박 대통령은 박성철 부수상 등 북측 조절위원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남북화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전쟁 위협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 기간 중 북한의 항공기, 전차, 대포 등 전술전력이 휴전선 일대로 남하해 전진배치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침투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나는 북한학 전공학자와 국제정치학자들로 좌담회를 열고 남북관계의 추이와 전망, 국제정세 등에 관한 토의 내용을 정리,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글타자로 작성된 A4용지 5매 내외의 이 보고서들을 밑줄을 처가면서 정독하는 한편 건의된 후속조치에 대한 지침까지 달아주셨다. 이어 8월 3일 사채동결조치인 &lsquo;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rsquo;이 내려졌다. 사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을 회생시키는 획기적 조치였다. 이것은 김용환 비서실장 보좌관이 극비리에 진행한 것으로 경제수석비서실도 모르게 작업을 완료했다. <img alt="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이 일어난 현장.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사진제공=&lt;조선일보&g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7/1385509803674910.jpg"/> 그리고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었다. 격동의 계절이었다. 원래 유신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3선개헌 구상 과정에서 정권연장의 한 방안으로 발상했던 것으로 당시 주(朱) 아무개 비서관으로 하여금 인도네시아 체제와 대만의 총통제를 연구하도록 했었다. 나는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주 비서관이 총통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과 비밀리에 현지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유신은 △남북대화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내부체제 정비와 강력한 대북태세 강구의 필요성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야당과 선거 때마다 수십만의 군중동원에 따른 불의의 사고 위험과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행태 지양 △도약 단계로 접어드는 경제 건설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마무리하려는 강한 집념 △북한의 증강된 전쟁도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주한미군 철군에 대비한 방위산업 육성과 미사일, 핵, 신무기 개발 등 자주국방태세 완비를 위한 사명의식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단된 것이다.나는 유신선포 이틀 전부터 준비 작업에 투입됐다. 남산 중앙정보부 인쇄공장에 가서 김영광 판기국장의 안내를 받아 인쇄 중인 유신 관계 문건을 점검, 인수해 청와대로 가져왔다. 10월 16일 유신선포를 위한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한편 유신선포문을 기초로 한 유신헌법 초안과 해설서 집필을 위해 헌법학자 한태연, 갈봉근과 함께 반도호텔(롯데호텔의 전신)에 투숙하여 작업을 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프랑스 드골 헌법의 대통령 비상대권과 권력의 인격화 등 이론적 근거를 체계화했다.나는 이틀 뒤 바깥바람에 목말라하는 이들과 함께 무교동으로 나가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밤공기를 쐬게 했다. 언론계 중견기자 몇 사람에게도 비밀리에 신문&middot;방송용 해설서 집필을 의뢰하고 함께 반도호텔에서 지냈다.유신 기간 동안 일부 자유의 유보, 반정부 투쟁의 격화, 정치 실종 등 갈등이 극심했으나 경제면에서는 연평균 11.2%의 고성장을 했고 특히 중화학공업은 22%의 유례없는 경이적 성장을 했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 대한민국의 기반을 그때 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972년 11월경부터 스피치라이터실은 &lsquo;중화학공업 건설 선언&rsquo;을 하는 박 대통령의 1973년 연두 기자회견 준비에 몰두했다. 그때만 해도 중화학공업의 개념이 생소하고 막연했다. 중화학공업 기획단장을 겸한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실로부터 자료와 내용설명 등을 들어가면서 연설문을 작성했다.제철, 비철금속, 조선, 중기, 석유, 전자, 비료 등 총규모 100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당시 연 수출 20억 달러 미만의 경제 여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출주도형 경제적 자립 외에 무기 국산화와 자주국방 완성이라는 두 가지 국가목표를 지향하는 프로젝트였다.평시에는 일반 산업체제로 원자재 및 부품생산과 수출에 주력하고 유사시에는 군수산업체제로 전환, 무기 생산으로 대처하는 &lsquo;병진정책&rsquo;이었다. &lsquo;모든 기계는 부품 생산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무기는 부품 조립으로 완성된다&rsquo;는 오원철 수석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연두기자회견 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파아랗게 펼쳐지는 환상을 보았다.중화학공업 선언이 있고 난 뒤 3월경 박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을 마치고 일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 &lt;합동통신&gt; 조성천, 동아방송 최종철, &lt;경향신문&gt; 이용승 기자들을 위하여 축하송별 만찬을 베풀었다. 김성진 대변인, 유혁인 정무, 선우연 공보비서관, 필자 등이 배석했다.박 대통령은 국민의 저축성과 근면성에 대해 일본 등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을 비교, 설명하면서 환경과 조건의 유&middot;불리보다는 국민의 근면성 도전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풍부한 자원과 유리한 환경임에도 국민의 나태성 때문에 선진국이 못 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자원도 빈약하고 남북대치의 악조건 하에서도 저축을 증대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도 부강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저축 증대를 특별히 강조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각국의 국민 저축률과 국민성을 비교 분석한 책자 한 권씩을 출입기자들에게 선물했다.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병진정책이 추진되던 1977년, 나는 우리 경제가 20년 내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경제와 새마을운동, 민생문제에 대해 활력과 자신감이 넘쳤다. 핵 개발과 관련해서는 &ldquo;우리가 파키스탄보다는 앞설 수 있을 것&rdquo;이라는 얘기도 수석비서관들 사이에서 오갔다.나는 스피치라이터 1년 수개월이 지났을 때 김성진 대변인과 협의하여 박찬세를 스피치라이터로 초빙했다. 그는 나와 대학 동기생으로 &lt;고대신문&gt;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4&middot;19 전야 4&middot;18 고대학생의거 격문을 썼던 뛰어난 문장가였다.나는 공보비서관 재직 시인 1974년 대통령 가족들의 저도 여름휴가에 수행했다가 육 여사로부터 인간 영혼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다. 영혼과의 대화 등 심령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영혼과 대화를 한다는 안(安) 아무개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육 여사는 서울에 돌아와 8&middot;15 경축식장 참석 중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흉탄에 숨졌다.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TV를 통해 이 끔찍하고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육 여사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정일권 국회의장과 양탁식 서울시장이 그 의자 밑으로 숨었다.육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박 대통령은 중단했던 경축사를 다시 계속해 끝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리고 연설을 끝낸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육 여사의 고무신을 주어서 들고 퇴장했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여준 박 대통령의 담대, 의연한 모습은 초인적이었다. 경악과 존경을 금할 수 없었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되고 내면화된 의지이고 인격이며 투철한 사생관의 발현이었으리라.나는 사무실에서 육 여사가 가료중인 서울대학병원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원하면서 기다리던 중, 오후 4시경 갑자기 주위가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청와대 본관 지붕 위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있었고 그 위로 붉게 물든 석양노을이 찬란하게 비쳤다. 황홀하고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심령학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닥쳐올 앞일을 예언한 듯, 그때의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나는 육 여사 장례행렬을 따라 국립묘지까지 가면서 연도에 운집한 국민들의 슬픔과 울부짖음,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애도와 추모의 깊은 정을 보았다. 그것은 민심인 동시에 천심이었다.나는 육 여사 묘비 건립을 하명 받았다. 충청남도지사에게 보령산 최고의 오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문은 &lt;서울신문&gt;에 게재된 모윤숙의 조시가 좋을 것 같아 대통령 재가를 받은 뒤 모(毛) 시인의 승낙을 받았다. 글씨는 육 여사와 두터운 친분을 가졌던 한글 궁체의 대가 이철경 금란여고 교장이 써주었다.각자(刻字)는 망우리에 있는 묘비 제작의 1인자를 찾아가 부탁했는데 그의 조수가 군복무중이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국방부에 연락하여 그 조수에게 2개월간 특별휴가를 내도록하여 묘비 제작 작업을 완성토록 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7/1385509803674911.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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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8] 출입기자에서 비서관으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712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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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0 Nov 2013 09:33: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지난호에 이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에피소드 몇 토막을 더 소개한다.1968년 후반기 무렵 어느 날 나는 육 여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대통령 가족들만의 자리로 단독 초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만 근영 근혜 학생들은 먼저 식사를 뚝딱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 내외분과 나, 셋만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단은 소박했다. 나물무침 몇 가지와 된장찌개, 생선구이, 막걸리가 전부였다. 나는 어릴 때 먹었던 비름나물 무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img alt="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영애.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0/1384907613671230.jpg"/> &ldquo;청와대 식탁에 어떻게 이런 나물이 나옵니까.&rdquo;박 대통령이 자세히 설명했다.&ldquo;내가 소학교 다닐 때다. 몇 십리 길 학교를 다녀서 오후에 집에 도착할 때에는 배가 고파 허기가 졌다.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면 밥은 없고 어머님이 이 비름나물을 된장에 무쳐 바가지에 담아 부뚜막에 놓고 들일을 나가셨다. 나는 이것을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 허기를 채웠다.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청와대 채전에 조금 심어 생각날 때 가끔 먹는다.&rdquo;나도 6&middot;25 동란 이후 시골에서 된장에 무친 이 나물을 많이 먹었다. 그날 나는 대접과 고추장, 참기름을 더 부탁해 여러 나물들로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두 분의 눈길이 부드럽게 느껴졌고 따뜻한 정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다음날 나는 이 비름나물 얘기를 기자실에 전파했고 김종신 비서관이 그의 저서에 인용했다.1970년 초가을 무렵 나는 청와대 기자실에 있다가 육 여사의 부름을 받고 본관 영부인접견실에서 뵈었다. 이런저런 얘기도중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인 근혜 큰영애의 얘기를 한 뒤 내 의견을 물었다.&ldquo;근혜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대통령 가족 입장에서 이것을 받아야 할지 다른 학생에게 양보해야 할지&hellip;.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rdquo;&ldquo;장학금은 공부를 잘한 모범학생에게 주는 상이고 명예입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고 더욱이 다른 학생에게 양보할 성질의 것도 아닌 줄 압니다. 일단 장학금은 그대로 받도록 하시고 그 돈의 열 배쯤의 장학금을 학교에 기부 하시면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rdquo;그렇게 처리된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또 한 번은 육 여사가 근혜 근영 두 영애의 성격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다.&ldquo;작은아이(근영)는 활달한 편이지만 큰아이(근혜)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큰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고 마음이 놓인다.&rdquo;이런저런 얘기 끝에 &lsquo;어느 집의 누구는 신랑감으로 좋다더라&rsquo; 하면서 시장 아들, 장관 아들 등 서너 명을 거론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을 가진 보통 엄마의 모습이었다.박근혜 큰영애의 결혼과 관련, 나는 1984년경 한 사립대학 설립자로부터 자기 아들과의 간곡한 혼담 희망 제의를 전달한 바 있다. 그러자 박근혜 큰영애는 아버님의 기념사업과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 만드는 유지를 계승 실현하는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나는 이 뜻을 그 설립자에게 전달했으며 그는 &ldquo;기념사업에 자기도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는데&hellip;&rdquo;라며 아쉬워했다.1969년 3선개헌을 앞두고 박 대통령은 청와대기자단과 오찬을 함께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 무력도발 위협의 고조, 경제건설 등 국가보위와 부국강병을 위한 3선개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나를 지목하면서 &ldquo;권 기자는 3선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rdquo;고 물었다. 나는 &ldquo;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시면 되겠습니다&rdquo;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1971년 말, &lt;조선일보&gt; 김윤환, &lt;동양통신&gt; 문태갑 등 선배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 출입기자를 마감하고 각기 내근 데스크로 승진했다. 박 대통령은 연말연시가 끝난 1월 하순경 청와대 출입을 그만두게 된 우리들을 위하여 전별 만찬을 베풀었다. 김정염 비서실장, 김성진 대변인도 동석했다.만찬이 끝나고 전별금과 선물로 만년필 세트를 받았다. 송별만찬을 끝내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박 대통령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면서 &ldquo;이 친구, 권 기자 출세 좀 시킬 수 없나&rdquo;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다. 나를 포함해 김 비서실장, 김 대변인 모두 흘려들었다. 어느 누구도 주의하여 듣지 않은 것이다.이 때 내가 받은 전별금 봉투는 빈 봉투였다. 대통령이 봉투를 만들면서 내용물 넣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며칠 뒤 나는 새 전별금 봉투를 전해 받았는데 &lsquo;지난번에 빈 봉투를 주어서 미안하게 되었다&rsquo;라는 추신까지 들어있었다. 색다른 기념물이 생긴 셈이다.박 대통령 전별 만찬에 앞서 나는 육영수 여사의 위로와 선물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ldquo;정부에 들어와서 일하라&rdquo;는 육 여사의 권유를 받았다. 나는 그 후에도 몇 차례 육 여사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img alt="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괴군이 도끼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야만적인 살인난동을 벌인 현장장면.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0/1384907613671231.jpg"/> 1972년 3월 5일경 신문사에서 석간 마감을 끝내고 있는데 김성진 대변인이 급히 만나자고 해 사무실로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ldquo;내일부터 당장 공보비서관실로 출근하여 근무하시오&rdquo;라고 느닷없이 말했다.나는 어리둥절하여 &ldquo;어떻게 내일부터 당장 청와대로 출근할 수 있겠느냐&rdquo;고 반문하며 &ldquo;회사에 사표처리를 해야 하고 또 공무원 임용이 되려면 신원조회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 않겠느냐. 며칠 시간을 달라&rdquo;고 말했다.김 대변인은 고려대와 언론계 선배로서 내가 청와대 출입기자 때 공보 비서관으로 피명, 홍보와 취재관계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는 청와대 출입 5년을 마감하고 내근으로 들어왔고 그는 대변인으로 승진했다.그 무렵부터 정부는 경제부처의 시책업무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변인제를 신설하고 그 대상자를 언론계로부터 스카우트했다. 그때 김 대변인은 경제부처 대변인 자리를 나에게 제의 한바 있는데 1차 사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경제부처의 대변인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또 사양했다.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다. 김 대변인의 내용 설명인즉 아래와 같다. 박 대통령과 김 대변인의 대화다.&ldquo;권숙정 기자의 자리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rdquo;&ldquo;경제부처 등 몇 군데 알아보고 있습니다.&rdquo;&ldquo;공보비서관 자리가 비어 있지 않는가. 그 자리로 발령 내라.&rdquo;김 대변인은 나에게 &ldquo;그러니 내일 당장 출근하고 신원조회 등 임용절차는 근무하면서 하라. 회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라&rdquo;고 말해 나는 꼼짝없이 다음날 청와대 공보비서관(2급갑)으로 출근했다.김 대변인은 나에게 공보비서관 제의를 하는 자리에서 &ldquo;진작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렸어야 했는데&hellip;.&rdquo; 하면서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고 처리하게 됐다고 송구해 했다. 박 대통령은 공보비서관 한 자리가 공석 중에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한 아무개 공보비서관이 강원도 파로호 근처에 땅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개발하여 방갈로 여러 채를 짓고 낚시꾼들에게 임대하는 영업을 했다. 이 일대가 군 작전지역임에 따라 군으로부터 건축허가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군단장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그 김 아무개 군단장이 육사 2기, 박 대통령과 동기생이었다. 그는 서울에 출장 나왔다가 박 대통령의 골프 초대를 받고 라운딩 하던 중 전혀 고의 없이 &ldquo;한 비서관의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rdquo;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골프를 마친 박 대통령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무슨 일인지 사실 확인을 지시했다. 박 실장의 사실 확인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ldquo;청와대는 돈벌이 하는 곳이 아니다. 장사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도록 하라&rdquo;고 지시했다. 박 실장은 그날로 그 비서관을 면직 처리토록 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기강이 이렇게 엄정했다. 공석이 된 그 자리가 비어 있다가 내 자리로 된 것이다.나는 공보비서관(대통령 스피치라이터) 2년 7개월 동안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고심했다. 연설문은 기승전결(起承傳結)이 맞아야하고 정확한 메시지 전달과 이를 위한 정확한 용어 선택이 요체다.더욱이 대통령의 연설문은 정확한 메시지 외에 당시로서는 국민 계도적인 내용의 필요성이 요구됐던 시대였다. 정부 시책과 국정운영을 대통령이 앞장서 강력히 이끌고 추진했던 때였다. 연설 횟수도 많았다. 대통령의 연설은 곧 국민에 대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연설문은 간결 정확하면서 알기 쉽고 힘이 꽉 차있어야 했다.나는 이러한 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대통령 연설문은 그의 생각과 그의 할 말을 정확히 다듬어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수준의 생각과 그의 언어를 찾아야 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8&middot;15 경축사와 육군사관학교 유시 때에는 북한에 대한 경고, 제의, 국민에 대한 촉구 등 국가 보위와 안보에 관한 대통령의 결의와 지침 등을 담았다.유신 때는 &lsquo;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국력배양의 가속화&rsquo; 등이 강조 되었고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태 때에는 &ldquo;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rdquo;라는 단호한 연설이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lsquo;미친개&hellip;&rsquo;라는 대목은 박 대통령이 점잖은 표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직접 써넣은 것으로 김 대변인 이하 스피치 라이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0/138490761367123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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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7]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일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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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3 Nov 2013 09:3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나는 1960년 겨울 &lt;대한일보&gt; 견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사회부(경찰서) 경제부(한국은행)를 거쳐 5&middot;16 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다가 민정이양 뒤 제6대 국회를 출입하면서 야당 담당 취재 활동을 했다. 또 1966년 10월경부터 1971년 12월 말까지 5년여 동안 &lt;대한일보&gt;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들은 일화 하나.1961년 5&middot;16 후 9월경 민주당 구파 지도자인 김준연은 북한 김일성의 거물 밀사 &lsquo;황태성&rsquo;이 군사정부 보호 아래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가뜩이나 사상 문제로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던 군사정부 수뇌부는 당혹과 긴장에 휩싸였다. <img alt="1973년 3월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주월군 개선 환영식에서 사열하는 박정희 대통령.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13/1384303182667830.jpg"/>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친형이자 김종필 정보부장의 장인이 되는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며 좌익사상의 동지 관계였다. 해방정국 속에서 일어났던 대구 10&middot;1 사건 때 박상희는 경찰에 사살되었고 황태성은 서울로 도피했다가 월북했다. 그는 북에서 무역성 차관을 지낸 거물이었다.황태성은 박정희 의장을 만나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을 타진하기 위해 김일성의 밀사를 자청하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잠입, 박 의장 면담을 모색하다가 중앙정보부에 검거됐다. 빠른 재판 절차 끝에 그는 10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됐다.중앙정보부는 황태성으로부터 공작금 미화 25만 달러를 압수했다. 정보부는 이 돈을 KBS TV 방송국 창설 자금으로 썼다는 사실을 먼 뒷날(1981년) 정보부 경제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이 작업에 참여했던 김용태로부터 들었다.또 당시 KBS 방송과장으로 재직했다가 문공부 방송국장을 역임했던 윤 아무개로부터도 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은 바 있다. KBS 방송국은 1961년 12월 사옥 준공, 개국됐다. 결국 김일성의 돈으로 세운 KBS TV 방송국인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나와 함께 취재활동을 했던 각 언론사 기자들 중에는 5&middot;16 후 군정 시 최고회의 때부터 출입했던 이들과 국회, 여야를 담당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lt;경향신문&gt; 김경래 정재호 윤상철, &lt;서울신문&gt; 오전식 이한수, &lt;대한일보&gt; 전병성 김준환 권숙정 조창화, &lt;동아일보&gt; 이만섭 유혁인 박경석 이진희, &lt;동양통신&gt; 문태갑 노철용, &lt;중앙일보&gt; 김동익 이억순 심상기, &lt;조선일보&gt; 이종식 선우연 김윤환, &lt;한국일보&gt; 임삼 송효빈, &lt;부산일보&gt; 송정제, KBS 이석희, 동아방송 서병현 최종철, &lt;동아통신&gt; 곽지용 고의구 전신병 박용근 &lt;합동통신&gt; 김광택 조승천 김영일.시대가 시대인 만큼 아슬아슬한 일도 적지 않았다. 나도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1971년 2월 6일 미국은 한국군 월남 파병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미 한국군 현대화 계획 합의에 따라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증강 특별 군사원조를 공여키로 했다. 암호명은 &lsquo;식목계획&rsquo;이었다.나는 이 특종을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으로부터 듣고 사안의 중대성과 기밀성을 감안, 외무부 출입 임한순 기자에게 참고로 알고만 있으되 기사화하지는 말라고 하면서 일러주었다. 그런데 내가 박 대통령 지방시찰 수행 출장 중 임 기자가 이를 기사화하고 말았다. 1면 톱 특종으로 대서특필됐다. 중앙정보부의 강력한 항의로 신문은 모두 회수됐고 임 기자는 정보부에 끌려가 출처 추궁과 함께 심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이틀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기다리고 있던 정보부 요원과 함께 남산 정보부 조사실로 갔다. 지하실 복도에 들어서자 음습한 분위기 속에 여기저기서 구타와 신음소리가 들렸다. 임 기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저만치에서 지나가는 모습도 보았다.나는 독방으로 안내되었고 잠시 후 수사관이 들어왔다. 165㎝의 작은 키였지만 그의 눈매가 사람을 얼어붙게 했다. 싸늘하고 잔인한 살기가 내 눈 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수사관의 심문이 시작되었다.&ldquo;우리 괜히 시간 끌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신사적으로 일을 끝냅시다.&rdquo;&ldquo;나도 바라는 바요. 그렇게 합시다.&rdquo;&ldquo;누구로부터 들은 얘기요?&rdquo;&ldquo;이후락 비서실장한테서 들었소.&rdquo;내가 서슴없이 답변하자 수사관은 잠시 주춤했다.&ldquo;그렇게 고위층은&hellip;, 우리로서는 어떻게&hellip;, 그러면 그것을 듣게 된 경위를 기술해 주시오.&rdquo;나는 취재원인 강상욱 대변인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비서실장을 내세우며 거짓말을 했다. 설마 비서실장을 상대로 확인조사야 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수사관의 요구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거짓 진술서를 써 주었다.&lsquo;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때때로 비서실장을 만나 환담한다. 그 과정에서 주요 문제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비보도) 전제하에 말하기도 한다. 이 식목계획도 그때 들은 것이다.&rsquo;조사관은 같은 진술서를 세 번씩 되풀이해서 쓰라고 요구했다. 마지막 진술서를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수사관이 긴장된 모습으로 통화했다.&ldquo;아&hellip;, 예. 지금 거의 다 끝났습니다&hellip;. 알겠습니다.&rdquo;그리고 여기 들어와서 조사받은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고 하고 설렁탕 한 그릇을 내놓았다. 나는 그들이 내준 검은 지프차를 타고 밤 10시경 신문사에 돌아왔다. 5시간 만이었다. <img alt="육영수 여사.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13/1384303182667831.jpg"/> 임 기자도 다음날 풀려나왔는데 출근은 못한 채 집에서 약 1주간 후유증 요양을 했다.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출처를 밝히지 않다가 매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내 이름을 댔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조사받는 동안 &lt;동양통신&gt; 청와대 출입기자 문태갑 선배가 강 대변인에게 알렸고 강 대변인은 군 동기생 친구인 문학림 정보부장 비서실장에게 전화 당부하여 무사히 빨리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중앙정보부의 횡포와 악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나는 육영수 여사와 단독 면담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정보부에 대한 원성과 여론을 설명하고 김형욱 정보부장의 경질을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그 얼마 후 김 부장은 3선개헌 전야, 신라호텔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의 공개적인 비난 사퇴 성토와 이에 대한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등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렸다.의원총회가 끝나고 정보부는 이만섭 의원을 연행하려했고 이 의원은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당 의원들이 둘러싸서 간신히 무사 탈출케 하는 한편 청와대에 구원요청을 보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누구든 이만섭 의원에게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엄명, 강력한 보호막을 쳐주었다. 김 정보부장은 1969년 10월 3선개헌 후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경질됐다.나는 청와대 출입 동안 육영수 여사의 행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취재했다. 공보비서관 때도 계속했다. 그중 육 여사의 한센병환자촌 방문행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그 때만 해도 그들은 천형의 문둥병자로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외인들이었다. 육 여사는 그들의 마을을 찾아가 퀴퀴한 냄새, 남루한 옷, 흉측한 몰골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마디가 없는 손을 덥석 잡고 위로, 격려했다. 육 여사는 그들에게 원조로 받은 비타민제 폐결핵 치료제 등 의약품을 보내고 양계, 양돈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나는 육 여사의 한센병환자촌 방문 수행 취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와서 전염병 위험이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육 여사는 &ldquo;한센병균은 햇볕만 쪼이면 곧 죽는다고 하니 걱정할 것 없다&rdquo;면서 밝게 웃었다. 육 여사의 &lsquo;자비심 넘치는 보살행&rsquo;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lt;다음호에 계속&gt; 박정희와 해외 출장 비화&ldquo;1인당 GNP 2천달러 전엔 해외여행 안해!&rdquo;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상외교 취재기자로 아래와 같이 6회 해외 출장을 했고 별도로 월남 시찰을 두 번 했다. △1966년 10월 월남 참전 7개국 필리핀 마닐라 정상회담에 이은 월남 시찰 △1967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방미 △1967년 12월 홀트 호주 수상 장례식 참석 △1968년 4월 18일 박 대통령과 존슨 미 대통령 호놀룰루 정상회담 △1968년 9월 18일 박 대통령과 호주&middot;뉴질랜드 수상 정상회담 △1969년 8월 20일 박 대통령과 닉슨 미 대통령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1968년 9월 박 대통령과 호주&middot;뉴질랜드 수상 정상회담 취재 수행 때 나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을 들었다.&ldquo;이렇게 잘 사는 나라에는 공산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다. 우리도 하루 빨리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공산주의가 침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저소득 빈민층에 침투해 갈등과 증오를 조장, 확대, 재생산하고 사회와 국가를 분열시키는 암적인 존재다. 앞으로 나는 우리나라 1인당 GNP(국민소득)가 2000달러가 될 때까지는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rdquo;그 후 박 대통령은 1969년 8월 닉슨 미국 대통령과의 샌프란시스코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했을 뿐 10&middot;26 사건으로 서거 때까지 10년 동안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다.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13/138430318266783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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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6] 청와대 금고의 비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642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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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6 Nov 2013 08:39: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었다. 그 금고는 내가 6년간 관리했다. 금고 안에는 비서실장의 판공비도 있었다. 나는 분기별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대통령으로부터 자금을 타 와서 금고에 보관하면서 월정 지출과 지시에 따른 지출을 집행했다. <img alt="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과 큰딸 근혜 양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 일일이 악수로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06/1383694774664210.jpg"/>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경제인들의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1970년대는 국가 경제 기반이 구축되는 시기로, 아직 빈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국가재정이 어려웠다. 대통령 통치자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예산에 책정된 정보비, 판공비, 기밀비, 접대비 등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업인들의 성금에 의한 충당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던 셈이다.문제는 얼마를 어떻게 성금으로 받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통치자금이 되기도 하고 부정축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마시면 생명수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순수한 성금이냐, 인&middot;허가나 이권과 관련된 거래냐. 위협과 협박에 의한 억지 기부냐, 공적 루트를 통한 성금 접수냐. 비선을 통한 접수냐, 대통령 직접 수수냐. 성금으로서 적정한 액수냐, 천문학적인 액수냐. 공적 또는 국가&middot;사회적 필요에 대한 사용이냐, 사적 호화 지출 내지는 축재형 유용이냐. 유산이 있느냐, 없느냐 등에 따라 통치자금과 부정축재가 구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박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확신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행태를 본다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시 김정염 비서실장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고 성금을 운용했다.△정부시책에 힘입어 이익을 많이 낸 매출 순위 20대 기업으로 한정한 자발적인 성금△농민, 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료 농약 사료 등 농수산 관련업체 제외(이익을 가급적 농어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20대 기업 내에서도 이익이 나지 않은 기업은 제외△인&middot;허가 및 이권 관련 대가성과 강제성 철저 배격△대통령 가족 친지 등을 통한 비선 헌금 철저 봉쇄△헌금에 따른 혼선과 잡음 방지를 위해 비서실장 단일 창구 유지.김 실장은 &ldquo;대통령의 통치자금이 너무 풍족하면 자칫 국가 부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절제되어야 한다&rdquo;고 나에게 강조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이 원칙에 따라 썼다. 일상생활의 근검절약 그대로였다. 김 실장 재직 9년 동안 돈 문제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 많았던 대통령 지방출장비용도 정부 예산이 아닌, 내가 관리했던 자금에서 지출되었다. 각 수석비서관실의 특별활동비도 이 자금에서 나갔다. 각종 하사금, 격려금, 부처에 대한 특별지원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산국회 때는 그 대책비가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하달되었고 세수 확보 격려금도 국세청에 주어졌다.과학재단, KAIST 등 나라의 주요 재단이 발족될 경우는 그 발기 출연금이 기부되었다. 문교부의 학원대책비, 새마을지도자 격려금, 군인 경찰 등 안보 관계자에 대한 격려금도 여기에 포함됐다. 새마을&middot;국방 성금도 마찬가지였다.1970년대 섬유재벌이었던 대농 박용학 회장의 개인 수표가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그 처리지침을 상신했다. &ldquo;요즘 그 회사 어렵다는데 도로 돌려주라&rdquo;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박 회장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대통령 성금에 대해 부도(?)를 낸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1977년 어느 날 김정염 비서실장이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나에게 주면서 &ldquo;집으로 보내온 것인데 마음만 고맙게 받겠으니 정중히 돌려주라&rdquo;고 해 동양그룹 이양구 회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는 김정염 실장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 수사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img alt="시해사건 전모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사진출처=80년보도사진연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06/1383694774664211.jpg"/> 보안사는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김종필, 김용태, 박종규 등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구속 수사했다.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주일대사로 나가 있던 김정염은 해임되어 귀국, 칩거 중이었다. 어느 날 이원조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제일은행 상무 출신인 이원조는 전두환&middot;노태우와 친구 사이었고 10&middot;26 이후 전두환의 경제비서관을 거쳐 노태우 때에는 금융감독원장으로 재직하면서 &lsquo;금융황제&rsquo;로 행세했다. 다음은 이원조와 만나 나눈 대화.&ldquo;김 실장의 자금이 명동사채시장에 유통되고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rdquo;&ldquo;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혀 근거 없는 모략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생사람 잡지 말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rdquo;우리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김 실장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필시 모략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며칠이 지나서 그의 요청으로 또 만났다. 다시 대화 내용.&ldquo;권형(필자를 지칭) 큰일 났다. 조사를 해 보았는데 전혀 나오는 게 없다. 머리가 정말 좋더라. 뭐는 언제 무슨 명목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소상히 기억하고 있더라. 정보가 있으면 좀 알려 달라.&rdquo;&ldquo;거 봐라.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속히 석방하고 잘못을 반성하라.&rdquo;역시 두어 마디 대화 끝에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나와 친구 사이인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효자동 입구 한식집에 나갔더니 보안사 이학봉 수사처장과 함께 나와 있었다. 이번엔 이 처장과의 대화내용이다.&ldquo;큰일 났다. 조사를 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rdquo;&ldquo;처음부터 당신들이 잘못 짚은 것이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청백리다. 부친이 은행 두취(은행장)를 지낸 유복한 가정이다. 돈을 탐할 분이 아니다. 빨리 없던 일로 하고 석방하라.&rdquo;&ldquo;그럴 때는 지났다. 이제 체면 문제다.&rdquo;&ldquo;과오를 과오로 덮을 생각을 말아라. 그분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제발 전두환 사령관께 말씀드려 선처해 달라.&rdquo;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일어섰다. 골목을 나오면서 나는 친구 권정달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들은 그분에게 손찌검까지 했다는 험한 얘기를 먼 훗날 들었다.이무렵 소위 신군부의 이너서클에서 나에 대해서도 조사대상으로 거론했다고 한다. 우연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청와대 경호실 김영호 통신처장(육사 12기)이 &ldquo;권 아무개는 반듯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rdquo;라고 변호했다는 사실을 10년이 지난 뒤에 전해 들었다. 김 처장이 LG그룹 통신회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 내 친구인 김민희 광고회사 사장에게 전한 얘기였다.나는 1986년까지 청와대 사정비서실의 감시와 도청을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그들은 수많은 산업기지 건설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책임자였던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에 대하여 일찌감치 부정축재 혐의를 씌워 수사를 벌이면서 강압과 학대를 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이 국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산업기획 설계자이며 군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책임자로 효율성과 경제성에 맞추어 열심히 일한 청백리였다.무도한 폭거였다. 그들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축재로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온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었다.앞서 밝혔듯 박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 통치자금의 잔금이다. 대통령께서 남긴 유산인 셈이다. 당연히 유족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엄격히 분별한다면 이중 4억 원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자금이었다. 김 실장이 1년 동안 쓸 판공비적 성격이었다. 나는 이 자금을 김 실장에게 돌려주기보다는 전체를 대통령 통치자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전액을 유족에게 전달했다.큰 영애 박근혜는 그중 3억 5000만 원을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비에 보태 쓰라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했다. 3억 5000만 원을 받은 전 사령관은 계엄업무 수행지원금조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1억 원,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5000만 원을 전하고 2억 원은 자신이 썼다. 나머지 6억 원은 후원금이 끊겨 경영이 어려워진 무료 노인한방병원 운영비로 쓰였다는 사실을 뒷날 알았다.이 9억 5000만 원을 둘러싼 말썽은 박 대통령 서거 후 30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5공 청산을 하면서 이 9억 5000만 원이 다시 문제가 된 바 있다. 나는 검찰에 불려가 사실 확인을 위한 참고인 진술서를 다시 써준 일이 있었다. 이때 검찰과 나는 &lsquo;국고에 환수되어야 할 돈&rsquo;이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청와대 금고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란 진술을 강요받기도 했다. 통치자금 사용 사례△한 재벌이 미화표시 100만 달러의 수표를 성금으로 보내왔다. &ldquo;재향군인회가 어렵다는데 그 기금으로 쓰도록 전하라&rdquo;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이 수표를 외환은행에서 교환, 재향군인회장에게 전달한 바 있다.△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발생된 뒤 프랑스를 중심한 서유럽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북한 매수 차단 대책이 시급할 때 이들을 위한 장학기금(윤석헌 주불대사 건의) 설립금으로 1차 30만 달러를 보낸 데 이어 연차적으로 지원했다.△사우디 근로자가 5만 명에 이르는 등 중동 특수가 절정일 때 원활한 공사 및 수주 지원과 근로자 지원을 위한 특별활동비로 5만 달러를 유양수 대사에게 송금했다.△군 출신 C 대사의 자녀 학자금 지원 요청을 받고 3만 달러 송금했다.△남베트남(월남) 패망 후 현지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무사귀환을 위해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격려의 서신과 함께 비상 활동금을 보냈고 이 공사를 돕고 있던 현지 교민회장 등 관계자에게 활동 격려금을 보냈다.△그밖에 나는 중병으로 입원 중인 장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문병 및 위로금 전달 심부름을 몇 차례 했다. 어려운 군 원로들의 생계비를 지원했고 대구사범 동기생인 석광선의 폐암 치료비도 지원했다. 나는 폐암 치료 경과를 매달 대통령께 보고했고 치료비를 정산했다. &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06/138369477466421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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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5] 압박해오는 국내외 정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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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30 Oct 2013 09:31: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한미 관계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방위력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 증강계획을 합의 추진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였다. 뿐만 아니라 KIST(현 KAIST의 모체)와 구미공업학교 설립 지원을 약속, 실행했다.이처럼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최상의 밀월관계를 지속했다. 그러나 카터 정부 출범 후 한미 관계는 냉각되기 시작, 급기야는 최악의 갈등 관계로 치달았다. 1977년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한국 정부와 박 대통령을 맹비난하기까지 했다. <img alt="1979년 6월 30일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미국 대통령이 여의도 시민환영대회에 참석, 오픈카에 나란히 탑승해 육해공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30/1383093081660510.jpg"/> 남베트남(월남) 패망 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도미노 현상의 불안이 고조되었고 북한의 무력시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북한 인민군의 공군, 전차부대, 포병부대 등이 휴전선 가까이로 전진 배치되었으며 각종 도발이 기승을 부렸다.1974년 북한 함정이 백령도 근해 상에서 우리의 어선들을 납치, 침몰시켰다. 우리 해군 초계정이 피격, 침몰된 것도 이때였다. 땅굴이 발견되었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때에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발표되었고 미국 정부의 유신 반대와 인권 압력은 더욱 심해졌다.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미 의회와 정부 및 언론 등에 로비를 벌였고 급기야 박동선 불법 로비사건이 터졌다. 미국의 청와대 도청 사건은 또 하나의 불편한 관계로 작용했다. 카터의 철군 압박과 인권 압력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거칠어졌다.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무기체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고 핵 개발도 유력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1978년 11월이었다. 한반도 평화유지에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했다.1979년 6월 19일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방한 공항 영접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참모들이 강권해 공항에 나섰으나 끝내 탐탁해 하지는 못했다. 카터 대통령도 영접 행사가 끝나자마자 미군 헬기를 타고 동두천 미군부대로 가서 거기서 1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한-미 정상회담에 임했다.박 대통령은 철군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실무자 합의를 무시한 채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해 휴전선 지도까지 보이면서 2시간 동안 점심도 거르고 철군 불가의 당위성을 설득했다. 카터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인사와 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만나 그들의 일방적인 하소연과 불만을 경청했고 그들에게 고무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었다.한편에서 카터 미국 정부는 의회 일부 반한 세력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다각적인 파상공세를 계속했다. 미국 의회에는 프레이저 청문회 등 반한 무드가 고조된 반면 친한국 의원들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다.미 국무성의 하비브 차관은 한국정부의 유신체제와 인권탄압이 국기(國基)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함병춘 주미 한국 대사에게 망명을 권유했다. 박 대통령은 함 대사의 이러한 보고를 받고 대로했다. 함 대사는 자신에 대한 하비브 차관의 망명 종용 사실을 공개 비난하면서 미국 정부에 항의했다.미국 정부의 대한국 정책노선은 미국 주요 언론 논조에 반영돼 한국 비판과 반한 무드 조성을 주도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 노선이 한국주재 미국 CIA(중앙정보국) 지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당시 미국 CIA 서울지부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정기적인 주례회동을 통해 시국 사태를 협의하고 한미 간 현안 문제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 이 같은 주례회동의 반복을 통한 세뇌 가능성과 미국의 잘못된 메시지에 대한 오해, 그리고 국내 정치 정세와 소요 사태 등에 대한 확대 해석과 오판 등이 박 대통령 시해의 범의(犯意) 조성에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국내 정세1972년 10월, 유신 선포가 있었다. 그 해 7&middot;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은 남북적십자 회담 서울 개최, 본격적인 남북교류와 대결이 현실화되었다. 북한의 강력한 군사력 우위와 김일성 유일체제에 대결하기 위한 강력한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유신의 명분이었다. 휴전 이래 김신조 등 무장특공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KAL기 납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및 EC121 정보수집항공기 피격 침몰, 간첩과 무장공비의 대량 침투 등 북한의 군사도발은 증강일로였다.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오글 목사 등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 종교인들의 인권운동과 반체제 활동, 공장 여공들에 대한 의식화 활동, 야당 의원의 극단 언행(성남의 산모가 먹을 것이 없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삶아먹었다는 김한수 야당 의원의 본회의 발언, 김대중의 예비군 폐지, 남북교류, 중립국론 등) 등이 선을 넘는 상태였다. <img alt="1972년 유신헌법 공포식이 중앙청 중앙홀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출처=87년보도사진 연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30/1383093081660511.jpg"/> 이에 대항해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 선포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여기에는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배양을 가속화함으로써 남북대결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유신 선포 8년 동안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며 중화학 공업을 건설했다.그 대신 의회 활동은 위축되었고 정치는 실종됐다. 야당과 재야 및 학생, 종교계의 반정부 반체제 활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8년 12월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68석, 야당인 신민당 61석, 무소속 22석이 되어 사실상 여당이 패배한 결과가 되었다.야당인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정부가 바랐던 이철승이 패배하고 김영삼이 당 총재로 당선되어 극단적인 대 정부 강경 노선으로 치달았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공 200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하여 농성하였는데 경찰의 강제해산 도중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YH무역은 동일방직과 더불어 내실이 착실하고 사내 복지가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업체였다. 그런데 도시산업선교회가 침투, 여공들을 의식화하고 처우 개선과 복지 확대 요구를 내세우며 연일 시위를 했다. 결국 두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나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 자료를 보았다. 자료에 의하면 도시산업선교회는 영등포에 본부를 두고 구로공단 주변의 열악한 여공들의 환경에 침투하여 인권 세뇌와 권리투쟁 시위를 사주했다.그들은 이와 같은 노동투쟁, 거리투쟁을 격화하여 이를 보도한 자료들을 수집,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시사업선교회 세계 본부에 보내서 활동보고를 하고 그에 따른 활동비를 지원 받았다. 10년여 동안 당시 돈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수령했다는 자료였다.한편 초강경 노선의 김영삼은 미국이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을 더 이상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lt;뉴욕타임스&gt;와 했다. 여야는 사대주의의 표본이라고 격분, 대소동이 벌어졌다. 급기야 김영삼은 의원직제명을 당하게 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원 총사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공화당에서는 일괄 반려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뒤늦게 선별사퇴수리론이 나오면서 야당은 더욱 격앙되었다. 앞서 밝혔듯 이 선별수리론은 강경론을 내세웠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밀어붙인 것이다.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부산대학교에서 제일 먼저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시민 시위 사태로 번졌다. 이어 마산으로 번져 이른바 부마민주항쟁으로 확대 발전했다. 계엄령과 위수령이 내려지고 군부대가 진주하는 과정에서 10&middot;26이 발생했다. 격동의 시대였다.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무기체계 개발과 유신시대는 마감되고 새로운 혼미와 갈등의 &lsquo;신군부와 삼김의 시대&rsquo;가 열렸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30/138309308166051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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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4] ‘청와대 셰퍼드’ 차지철]]></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593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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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3 Oct 2013 09:0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middot;15 경축식장에서 일본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총격으로 육영수 여사는 서거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해임됐고 후임에 차지철이 임명됐다. <img alt="1961년 5월 18일 박정희 소장이 육사생도의 5·16 지지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맨 오른쪽이 당시 차지철 대위.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25659350.jpg"/> 당초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주체 출신 아무개 예비역 해병대 중령을 내정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김정염(한자는 김정렴이 맞고 그동안 그렇게 표기해왔으나 본인이 &lsquo;김정염&rsquo;으로 불리길 원했음-편집자 주)에게 경호실장 후임에 누가 좋겠느냐고 하문했고 김 실장은 차지철을 추천했었다고 뒷날 나에게 말한 바 있다. 김 실장은 차지철의 충성심을 샀다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차지철은 5&middot;16 당시 공수특전단 육군 대위로 혁명군에 가담, 박정희 소장과 함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남겼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자택과 경호실 내에 별도의 기도실을 개설 운영했다. 또한 매사에 결벽일 정도로 정리 정돈을 철저히 했다.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대통령이 언짢거나 불편해 할 소지를 사전에 철저히 예방, 차단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인권 압력과 주한미군 철수 위협, 김대중 납치 후 일본의 반한 무드, 국내의 야당&middot;재야&middot;학생&middot;종교계의 반정부 및 반체제 투쟁,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에 고군분투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차 실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고 강하게 다짐했을 것이다.그래서 정치인 등 외부인사의 접근을 규제하고 안가 만찬의 횟수를 늘리도록 한 것은 아닐까. 안가 만찬은 차 실장 때인 1979년 들어 부쩍 늘어났다. 박종규 실장 때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국회의원의 경험을 살려 경호실장 본연의 임무 외에 시국과 정치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김정염 실장 재직 중 청와대에는 알력이나 갈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차 실장이 들어오고 나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영역 침범, 야당에 대한 정치적인 업무를 둘러싸고 갈등과 불화가 계속됐다. 시국 정보와 그 대처방안에서 차 실장은 강경노선, 김 부장은 온건노선이었는데 대개의 경우 차 실장의 판정승으로 기울었다.실례로 이철승과 김영삼의 신민당총재 경선에서 김 부장은 이철승의 당선을 기대하면서 온건한 방법으로 대처했으나 차 실장은 직접적으로 강경한 대처를 해 대야 업무에 혼선을 빚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했다. 그 결과 김영삼이 야당 총재로 당선됐고 대여 초강경 노선으로 선회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김 부장의 실책으로 귀결됐고 그를 분노케 했다.신민당사를 점거 농성 중인 YH 여공 200명의 강경진압을 밀어붙여 여공 1명 사망 등 정국 불안을 증폭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차 실장이다.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지원 중단을 강조한 김영삼의 &lt;뉴욕타임스&gt; 회견과 이에 따른 사대주의 논쟁, 뒤이은 그의 국회의원직 제명, 이에 항의한 야당 의원 일괄사퇴안 제출과 선별수리론 등 초강경 정국이 조성됐다.차 실장은 여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선별수리론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행을 초래했다. 중진의원 S, 소장의원 L 등 야당 비주류가 차 실장과 빈번히 접촉했고 이를 목격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증언도 있었다.이와 같은 정치 간섭과 정보 선점을 위해 차 실장은 경호실 직제 밖에서 별도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헌병감 출신 예비역 장군 이규광이 팀장이었는데 일과가 끝날 무렵인 오후 6시경 차 실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퇴근 때 몇 차례 보았다. 이는 중앙정보부의 정보수집 업무와 정면으로 중복되는 것으로,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됐다.또한 때로는 김재규 부장을 경호실장실로 불러 정보부의 정보 활동내용을 사전 문의, 탐지하거나 정보의 내용을 자신의 방향과 유사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한 김 부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을 찾아 하소연했고 때로는 분개하는 모습을 나도 몇 차례 보았다.김재규는 사실 무모하고 저돌적이며 비이성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육군 사단장 시절, 부대 대항 축구시합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자 부대 트럭 수십 대를 동원, 헤드라이트를 켜서 운동장을 밝혔던 그다.김 부장의 보안사령관 시절 일화 하나 더. 태릉 골프장에서 앞이 밀려 내가 세컨 샷을 기다리고 있을 때 뒤에서 볼이 날아와 내 옆에 멎었다. 알고 보니 김재규 사령관이 친 볼이었다. 불과 몇 분의 짧은 순간을 못 기다리고 앞 팀이 세컨 샷을 하기도 전에 티샷을 한 것이다.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육군 중장 대 육군 대위, 10년여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차 실장에 대해 모멸감을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최고권력자에 대한 경쟁에서는 누가 먼저, 얼마나 자주 만나 보고하느냐로 판정이 나는 법.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면 항상 차 실장이 제일 먼저 들어갔다. 비서실장은 그 다음이었고 정보부장은 그 다음이었다. 김계원 실장도 이 점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차 실장은 언론기관장과 국회의원 등 외부 인사를 초청해 국기 하기식을 월례행사로 주관했다. 청와대 앞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경비사 부대에서 했는데 여기에 초대됐던 D 언론사 회장은 하기식을 마치고 차 실장 각하라고 호칭,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차 실장은 종래 육군 소장으로 임명했던 경호실 차장에 육군 중장 이재전 장군을 임명, 한층 위세를 떨쳤다. 나아가 시국 불안을 이유로 수도경비사령부의 지휘권을 경호실장 휘하로 이관했다. 대통령의 안위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거부할 수없는 명분을 내세웠다.별도 사설정보팀 운영, 국기 하기식 주관, 육군 중장의 경호실 차장 임명, 수경사 지휘권 이관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앙정보부와의 마찰, 갈등을 심화시켰고 군부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 무렵 차 실장의 친위쿠데타설, 2인자설이 소문으로 퍼지기도 했다. 군의 원로인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이에 대한 시정 요청이 빗발쳤다.이런 와중에 7월 중순경 나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 간에 벌어지고 있는 파워게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김 실장에게 설명하고 업무영역과 역할에 대한 교통정리와 정보부장 교체 등 인사쇄신을 대통령께 건의 조정하라고 진언했다. 얼마 후 김 실장이 &ldquo;큰일 났다&rdquo;고 걱정하면서 그 하회를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해주었다.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정보부장 경호실장이 합석한 만찬 자리에서 &ldquo;여기 있는 세 사람은 이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 기관의 장이다. 일을 시키다 보면 업무영역을 넘어 시킬 수가 있을 것이나 그것 가지고 서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 충성심을 가지고 열성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 달라&rdquo;고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비서실장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실장의 2차, 3차 건의가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이철승을 야당 당수로 밀었던 대야 업무의 실패와 간경화로 인한 건강악화 상태인 김 부장의 교체는 시급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인사쇄신은 차일피일 늦어졌고 연말 개각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용인술의 귀재요, 의표를 찌르는 선제조치로 기선을 제압해왔던 박 대통령의 조치가 아쉬웠던 시기였다.뒷날 대통령 서거 후 나는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lsquo;아! 국운이었구나&rsquo;라고 혼자서 한탄했다. 이후 김 실장은 국기 하기식을 중단시켰다.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의 군 복귀도 매듭을 지어 향후 육군 인사 때 반영하기로 하고 대기 중에 10&middot;26이 일어난 것이다.부마민주항쟁이 터지고 계엄령과 위수령 선포에 따라 시위 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실시할 때인 1979년 10월 21일의 얘기다. 군부대 이동을 위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김용휴 육군 참모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과 함께 식당에서 만찬 중이었다.나는 김 실장에게 육군 참모차장의 전화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는데 그때 차 실장이 일어서서 식탁을 손으로 치면서 김 부장을 힐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대통령을 모신 자리에서 저렇게 오만방자할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0&middot;26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최고권력자의 사랑과 고무 격려를 받아, 분수와 절제를 잃은 권력은 권력 그 자체의 본성과 관성에 의해 더욱 단선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을 발휘하게 됐고 월권은 더욱 상승적으로 작용했다.당시 군의 원로이며 박 대통령과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이종찬 장군(유정회 국회의원)은 &ldquo;전에는 대통령과 가끔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청와대 셰퍼드가 너무 사나워 접근할 수 없게 됐다&rdquo;고 박 대통령 말기의 상황을 개탄한 바 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25659351.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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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3] 아! 김계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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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6 Oct 2013 09:48: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어났던 그 광란의 총성이 멎고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현장에서 빠져 나갔다. 혼자 남은 비서실장 김계원은 유혈이 낭자한 대통령을 현장 경비요원에게 업혀서 보안사 옆에 있는 국군통합병원 분원으로 모시고 갔다.김 실장은 당직 의무장교에게 &ldquo;반드시 살려야 한다&rdquo;고 몇 번씩 강조를 하면서도 신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비상 연락을 받고 달려온 분원장 김병수 준장은 대통령 주치의를 겸하고 있어서 대통령의 신체적 특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서거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그가 가장 먼저 안 사람이었다. 보안사 참모장이 &lsquo;Code 1(코드 원)&rsquo;이냐고 암호전화를 해 왔을 때 정확히 답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보안사 수뇌부가 가장 먼저, 거의 실시간대에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img alt="10·26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건과 관련해 그의 연루 여부에 대해 조사받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6/1381884496652900.jpg"/> 현대는 정보화 시대, 정확한 정보의 선점은 승패의 관건이다. 전쟁이건 비즈니스건 모든 경쟁은 정확한 정보의 선점에서 판가름 나는 법. 대통령 서거 사실을 대통령 경호실이 알기도 전이고 국무총리도 모를 때 이미 보안사는 알고 있었다.김재규가 육군 벙커에서 체포될 때까지 무려 3시간 동안 국가비상 사태에 대한 정보를 보안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국군통수권자가 부재한 위급한 공백상태였다. 보안사는 기민한 초기대응으로 국가 운용의 주도권을 잡았다. 즉각적인 합동수사본부 설치와 중앙정보부장 겸임으로 국가의 모든 수사력과 정보 기능을 일거에 장악했다.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때부터 사실상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됐다.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린 것이다. 대통령 서거 후 불과 이틀 만의 일이었다.29일 오후 국군통합병원 김병수 준장이 내 방에 들렀다. 대통령 시신을 확인하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정보부 요원과의 대결, 엑스레이 원판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다. 박 대통령의 낡은 혁대와 시계, 신체부위의 반점, 탄환의 존치부위, 탄도, 정보부 요원의 감시와 위협을 무릅쓴 보안사 참모장과의 암호전화 통화 등 긴박했던 상항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보자. 대만 대사 9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후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경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당초에는 1978년 12월에 있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하고 지역구(영주&middot;봉화&middot;울진) 다지기 활동을 했다.이 선거구는 김창근 의원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불신임안 가결을 둘러싼 &lsquo;김성곤 항명 파동&rsquo;에 연루돼 공화당에서 제명당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곳이다. 선거구 개척을 위해 몇 달 동안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임자의 기반이 너무나 튼튼해 뜻대로 되지 않았다.그는 이 같은 사정을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하소연했고 이어 대통령에게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은 9년 수개월을 봉직한 김정염 비서실장(한자로는 김정렴이 맞고 그동안 그렇게 표기해왔으나 본인이 &#39;김정염&#39;으로 불리길 원해 그렇게 바꿈-편집자 주)에게 주일본 대사 통보를 했다.김계원은 지역구 활동 중 밤중에 상경 통보를 받고 야간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 박 대통령을 단독 면담했다. 단독 면담을 마치고 나온 그는 비서실장과는 만나지도 않은 채 나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ldquo;앞으로 잘 부탁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rdquo;고 말한 뒤 돌아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비서실장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적격 인사였다.이 점은 본인도 인정했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통보를 받았을 때 본인도 깜짝 놀라면서 국내 사정이 어두워 중책 수행에 자신이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ldquo;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고&hellip;,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나와 말동무나 하면서 지내면 된다&rdquo;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했다고 뒷날 나에게 들려주었다.신임 김 실장은 나의 영주국민학교 대선배로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반갑고 믿음직했다. 그러나 9년여의 해외 생활과 어려운 국내 사정을 감안할 때 과연 청와대 비서실장의 중책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그는 9년 전 정보부장 1년 미만 퇴임의 1차 검증을 거쳤다. 박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로 금의환향, 권좌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서실장 10개월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img alt="1979년 6월 19일 김계원 비서실장(왼쪽)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를 영접하는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6/1381884496652901.jpg"/> 취임 초기 그는 박 대통령의 결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새 부인을 맞이하여 가정을 안정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이를 박 대통령에게 직접 진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ldquo;다 큰 딸아이가 있는데 무슨 결혼을&hellip;&rdquo;이라면서 말도 못 꺼내게 했다.박 대통령의 재혼 문제와 관련해서는 1977년부터 국내외에서 일방적인 편지 프러포즈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유럽의 수녀 편지와 남미에서 온 것도 있었고 국내 것도 여럿 있었다.당시 30대 초반의 이혼녀 J 씨는 풍만한 한복 사진을 동봉하는 등 간곡하면서도 유혹적인 편지를 두세 차례 보내온 경우가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가 소장한 각종 문화재 중에는 국보급 일본 문화재가 많이 있는데 이를 대일 외교에 활용하도록 헌납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대통령의 고독을 달래줄 수 있는 향기를 담은 꽃바구니를 보내고자 한다는 등의 내용을 편지에 담았다.박 대통령 서거 후 한때 이 여인과의 염문설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으로 퍼트린 얘기일 뿐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나는 그때 자료를 들어 반박할 생각도 해 보았으나 오히려 흥미와 물의가 확대 재생산되어 결과적으로 돌아가신 분께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 침묵하고 있었다.이 여인은 훗날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형 경제 사고를 일으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권정달도 이 사고와 때를 같이하여 민정당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러한 편지들을 비서실장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모두 내 선에서 차단하여 폐기했다. 대통령의 심기를 흩뜨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김계원 실장의 새 권력을 향한 재벌들의 촉수는 기민했다. S 재벌은 전임 김정염 실장 재직 중에는 강경상업학교 출신의 그룹 사장을 청와대 연락창구로 하더니 김계원 실장이 취임하자 재빨리 동향의 그룹 사장을 연락창구로 변경했다. 그리고는 신임 축하 선물을 하고자 하니 그 의향을 알려달라는 연락이 나에게 왔다.나는 그 연락사항을 그대로 전했다. 2~3일 후 김 실장은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를 지정해 주었다. 그 그림은 고가의 국보급 수준으로 그 재벌 총수가 아끼는 것이었는데 10여 일 후 김 실장 집 거실에 걸려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박 대통령 서거 후 그 그림은 그의 다른 부동산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에 압수되어 경매 처분되었고 그 재벌이 다시 매수해 간 것은 뒷날의 일이었다. 그림에도 기구한 운명이 있나보다.그리고 김 실장이 대만에서 귀국하여 마련했던 서울 서초동의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과 과천 농장도 압수당했다. 그 전원주택은 김상철 변호사가 법원 경매를 통해 매수했으나 김영삼 정부 때 그린벨트 내의 그 집이 빌미가 되어 서울시장 피명 1주일 만에 낙마했다. 순탄치 못한 그 집의 내력 때문이었을까.D 그룹은 김 실장의 배재중학교 동문 후배를 앞세워 사무실 접촉이 아닌 자택 출입을 했다.1979년 들어서면서 박 대통령의 만찬 횟수가 잦아졌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행위도 심해졌다. 염 실장은 처음부터 박 대통령의 안가 만찬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때는 박 대통령, 차지철 실장, 김재규 부장, 이렇게 세 사람만의 만찬이었으나 차 실장은 술을 입에도 대지를 못했고 김 부장은 간경화를 앓고 있어 실은 박 대통령 홀로 마시는 연회였던 셈이다. 흥이나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김계원 실장 때에는 김 실장이 반드시 참석하여 박 대통령의 술동무가 되었다. 두 분의 주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편하고 분위기도 더 좋았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lt;다음호에 계속&gt;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6/138188449665290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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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2] 그날 이후 청와대 3일]]></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492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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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0 Oct 2013 09:12: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0&middot;26 다음날인 27일 새벽 4시 20분이 지나면서 김종필 등 20여 명의 친인척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장관들이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대접견실의 빈소 마련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대통령의 시신은 소접견실에 그대로 모셔져 있었다.모두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김종필은 관 뚜껑을 열고 고인의 존안을 한참 들여다 본 뒤 &ldquo;표정이 편안하시다. 그렇게도 크신 분이었는데&hellip;&rdquo;라고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김종필은 이어 비서실장실에서 김계원 비서실장과 30분쯤 요담했다.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면서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잘못된 보좌를 준열히 질타했다. <img alt="고 박정희 대통령 유해가 청와대를 출발, 영결식장인 중앙청 광장으로 운구되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0/1381363930649240.jpg"/> 한편 청와대 전속 사진기사인 국립영화제작소 김 아무개 기사와 KBS 카메라맨 정 아무개 기사가 대통령 시신의 사진 촬영을 요구하고 나섰다. 나는 촬영을 못하게 했다. 두 기사는 &lsquo;역사의 기록&rsquo;을 내세우며 거듭 촬영 요청을 했는데 나는 잠시 망설이면서 생각했다.&lsquo;역사의 기록이냐, 아니면 믿었던 심복의 반역으로 가신 불행한 모습을 남기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과연 바람직한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인가. 시대 변화에 따라 악용될 소지는 없을 것인가&hellip;.&rsquo;끝내 사진 촬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주검의 모습이 한 장면도 남아있지 않음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10월 27일 오전 6시 30분경, 이른 아침 식사로 해장국이 나왔다. 식사 중 친척 누군가가 &ldquo;우리는 곡(哭)하는 부대냐. 평소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hellip;. 육 여사 때도 그랬고 이럴 때만 불러들이고&hellip;&rdquo;라며 서운한 속내를 터트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철저한 친인척 관리 때문에 불편을 겪었던 불만이리라. 김종필은 해장국밥을 먹으면서 착잡한 심정과 독백을 이렇게 토로했다.&ldquo;영웅답게 돌아가셨다. 혁명가답게 가셨다. 내 손발이 다 잘리고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hellip;.&rdquo;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서종철 안보 특별보좌관은 &ldquo;김재규가 차지철만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 꿇어앉아 잘못을 빌 일이지 어떻게 형님 같은 대통령께 총구를 겨눌 수 있단 말인가&rdquo;라고 하면서 개탄했다.앞으로의 정국 혼란과 안보 문제에 대한 걱정들이 많았다. 정국 추이를 주시하면서 박 대통령의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이념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성급한 애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ldquo;흘러간 물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법&rdquo;이라고 한 대목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신직수 전 정보부장의 말이었다.불안 초조 비통 허망의 시간이 지나고 27일 아침이 되었다. 오전 9시경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다른 장관과 수석비서관 몇몇이 모여 있는 비서실장실에 들렸다. 구 장관은 간밤에 김재규를 취조 수사한 상황을 긴급뉴스로 전했다. 얼음 욕조 목욕을 시켰다느니, &ldquo;8군 쪽에서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rdquo;는 김재규의 반문이 있었다느니, 등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27일 오전 11시경 나는 김계원 비서실장과 단독 면담했다. 국가 안보와 향후 정국 대책, 차기 정권 문제 등에 대해 국무총리, 안보관계 장관, 공화당 수뇌(김종필 등)들과 협의하라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김 실장은 &ldquo;내가 뭐 지금 그런 거 할 수 있나&hellip;&rdquo;며 맥 빠진 중얼거림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누구와도 대화를 않은 채 사무실만 지키고 있었다.낮 12시 30분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를 끝낸 김 비서실장은 집에 가 있겠다면서 논현동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이 귀가 했는데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 요원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20분쯤 지나서 전화가 왔다. 보안사에서 경비하고 있으니 경호실 요원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가택연금이 된 것이다. 외부 인사의 출입금지는 물론 부인과 가족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사실 김 비서실장은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 가담할 만큼 대담하거나 모험적이지 못했다. 그렇게 무모하고 저돌적인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으로 천성이 온화하고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가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대인 관계가 모나지 않으며 친화력이 뛰어났다. 군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여러 요소를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전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중앙정보부장 단명 퇴임 후 주 대만대사 9년 만에 김재규의 주선으로 귀국, 비서실장에 임명됐던 것이다.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로 미루어 보아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 상의하고 위로와 협조를 나누는 우호적인 사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의 정보부장에 대한 월권, 대통령의 차 실장 편애 등으로 인한 갈등과 긴장, 김재규의 내면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의 강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김 비서실장이리라. 그리고 그 분노의 폭발 가능성과 폭발의 강도에 대해서도 김 비서실장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간과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img alt="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지만과 근혜·근영 삼남매가 슬픔에 잠겨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0/1381363930649241.jpg"/> 정권의 핵심 두 권력기관장의 불화와 반목 갈등, 그 폭발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가 정권 안보와 국가 안위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보다 신중한 검토와 대응을 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두 기관장의 업무 영역과 역할 분담 교통정리를 1차 조정&middot;건의한 것으로 족한 것인가.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2차, 3차 건의를 해야 하는 것이 비서실장의 책무요, 사명일진대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통한의 비극을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예방됐어야 했다.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김계원 비서실장이 가택 연금된 27일 오후 1시 30분경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에서 비서실장실을 조사하겠다고 우 아무개 대령 등 수사관 3명이 나왔다. 비서실장실과 보좌관 방, 부속실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별로 조사할 것이 없었다.원래 비서실장실에는 서류 같은 조사 대상물이 없다. 대통령의 재가 또는 보고 서류는 모두 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 보관 관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시는 전화로 처리했다. 수사관들은 전화통화 기록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실에서는 하루 수십 통 내지 백여 통의 전화를 하기 때문에 통화기록부를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굳이 필요하다면 청와대 전화교환실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비서실장실과 붙어있는 내 방도 조사했다. 내 책상 옆에 있는 대형 금고를 조사하겠다며 금고를 열 것을 요구했다. 금고 안에는 대통령의 통치와 관련된 기밀문건, 자료, 군사외교에 관한 비밀문건, 대미 의회비밀 로비와 관련된 문건, 대통령의 비자금 등 최고 기밀사항들이 보관되어 있었다.수사관들이 이것을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통치기밀임을 들어 단호히 거절했다. 합수부에서 끝내 조사하겠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에게 내가 직접 설명하겠다고 버텼다. 그들은 금고에 봉합 딱지를 붙이고 돌아갔다. 금고 조사는 이후에도 실현되지 않았다.그날 오후 5시경 나는 참고인 진술 차 삼각지 국방부 옆에 있는 합동수사본부로 연행, 구금되었다.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갈등관계, 10&middot;26 당일의 시간대별 상황 등을 진술조서로 작성해 달라고 해서 그 작업을 몇 번씩 되풀이 했다. 이틀 밤을 묵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죄를 짓고 이렇게 들어와 있으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굳게굳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담당했던 수사관, 소령이 김 비서실장 가택 수색을 나가야 한다면서 논현동 자택 약도를 그려 달라고 하여 그려 주었다.다음날 참고인 조서를 다시 쓰라고 해서 같은 내용을 옮겨 쓰고 있는데 그 수사관이 지금 곧 보안사령관실로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모든 것을 중지하고 그와 함께 청와대 옆 보안사령부로 갔다. 전두환 사령관과는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안면이 있었던 터라 수인사를 나누고 위로의 말과 차 대접을 받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다음날 금고 안에 보관 중이던 9억 5000만 원을 박근혜 큰 영애에게 전달하였다.남은 문제는 금고 안에 있는 기밀서류의 처리였다. 비서실장이 연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한 채 내 책임 아래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물 중 관계기관에 이관할 것은 이관하고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할 것들만 따로 골라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 유족 대표 자격으로 대통령 장조카 박재홍과 합수부 서 아무개 중령이 입회한 가운데 보자기를 내 손으로 청와대 보일러실에 던져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이로써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통령의 통치기밀 자료는 영원한 비밀에 묻힌 것이다. 10월 29일 오후 6시경이었다.&lt;다음호에 계속&gt; 연재를 시작하며역사의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0/1381363930649242.jpg"/> ▶필자 권숙정은?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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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정희 비서실’ 권숙정의 현장실록 10·26 그해 겨울 - [1] 그날 밤 비서실에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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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2 Oct 2013 09:06:00]]></pubDate>
            <category><![CDATA[정치]]></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권숙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그날 밤 내가 청와대 본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0분경이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오후 3시 10분경 청와대로 돌아오셨다. 4시경 유정회 최영희 의원이 김계원 비서실장을 방문 면담했다.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함께하기로 예정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4시 30분경 대통령의 안가 만찬 계획이 김 비서실장에게 통보되었기 때문이다. <img alt="&lt;1&gt;&lt;3&gt;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lt;2&gt;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당시 상황을 현장검증하는 모습. MBC 방송화면 캡처.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02/1380672402645590.jpg"/> 김 비서실장이 5시 35분경 궁정동 안가로 출발했고 약 20분 후 박 대통령께서 출발했다. 나는 그 직후 퇴근했다. 오늘은 나를 찾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해방감을 갖고 평소대로 남산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다. 거기서 대학 동기생인 재무부 이용만 기획관리실장을 만났고 저녁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나는 그의 차로 함께 움직이기로 하고 내 차를 퇴근시켰다.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통령의 삽교천 행사 소식을 전하는 9시뉴스를 시청하고 일어났다. 집에 도착하니 10시 30분경, 청와대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다고 했다. 자동차와 호출기로도 여러 번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 자동차는 퇴근시켰고 호출기는 사무실에 두고 퇴근했기 때문이다.침실에 들자마자 또 경비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의전수석실 정기옥 행정관이었다.&ldquo;수석비서관 전원이 나와 있는데 지금 곧 나와야 합니다.&rdquo;&ldquo;비서실장은 어디에 있습니까?&rdquo;&ldquo;국방부에 가 있습니다.&rdquo;나는 휴전선이 터졌거나 서해 5도가 북의 침공을 받은 것으로 직감했다. 곧바로 나갔으나 제일 늦게 도착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잿빛처럼 침울했다. 전등의 조명마저 가스등처럼 침침하게 느껴졌다. 수석비서관(의전 최광수, 정무2 고건, 경제1 서석준, 경제2 오원철, 공보 임방현, 민정 박승규) 전원이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모여 있었다.유혁인 정무1수석비서관은 김계원 비서실장을 수행하여 국방부에 가 있었다. 누구하나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위기가 너무나 무겁고 가라앉아 있어 &ldquo;무슨 일이 일어났느냐&rdquo;고 물어 볼 수조차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근무했던 내 자리에 앉아 있건만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어색하고 황량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비서실장이 국방부에 가 있다는 사실은 비상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서해 5도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는 것으로 추단하였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라면 이렇게 침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일 수가 없다.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이 약 30분쯤 흘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수석비서관들도 같은 짐작을 했을 것이나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국가원수의 신변에 대하여 공식 확인되지 않은 짐작은 발설할 수는 없는 것. 모두 국방부에 가 있는 비서실장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것이 밤 11시경의 청와대 본관 비서실장실의 긴박, 초조, 답답, 침울했던 10&middot;26 사건 당일의 초기 상황이다.대통령 시해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대통령 수석비서관과 경호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냈다. 밤 11시 30분경부터 수석비서관들의 말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상황분석이 시작됐다. 첫 번째로 무장공비 침투 의견이 나왔으나 곧바로 논의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두 번째로 안가 만찬 중 사고로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다는 것은 수석비서관 모두가 알고 있던 터라 이러한 추론이 의외로 생각되지는 않았다.만찬 중 차 실장과 김 부장 간에 언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총격사태에까지 이르러 김 부장이 쏜 유탄에 대통령이 피격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이견이 없었다. 두 사람 간의 갈등, 암투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유탄을 맞은 대통령의 상태에 대한 가상분석이 이어졌다. 부상이 어느 정도냐, 가료 중이냐, 어디에서 가료 중이냐, 가료상태는 어떠냐 등 각인각설이 오갔다. 서석준 수석이 단편적인 분석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ldquo;대통령이 부상 상태에 있다면 최우선이 가료다. 그리고 그 가료의 현장에는 비서실장이 반드시 옆에서 지켜보면서 최선의 가료를 독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각 현재 비서실장은 국방부에서 열리고 있는 국무회의에 참석중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대통령에 관한 상황은 이미 끝났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느냐.&rdquo;누구도 여기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침묵이 계속될 뿐이었다. 아무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밤 11시 45분경 나는 국방부에 가 있던 비서실장 수행비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국무회의가 진행 중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국방부에 가 있기는 하지만 그 시각까지 사태의 내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비서실장 신변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막연한 당부를 했을 뿐이다. 27일 새벽 1시경 김 비서실장과 유 정무1수석이 청와대로 돌아왔다. 즉각 수석비서관 회의가 시작되었다.김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으로 밝혔다. 김재규가 쏜 총에 돌아가셨다는 말뿐,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가 설명이 없었다. 참석한 수석비서관들도 아무런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신음과 울먹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비통과 허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불러 당부했다.&ldquo;지금 경호실장이 지휘 불능 상태에 있으니 경호실을 장악하고 경거망동하거나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rdquo;이재전 경호실 차장이 사태의 내용에 대해 질문했으나 김 실장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김 실장은 대통령 부속실의 전석영 비서관을 앞세우고 박근혜 큰 영애를 만났다. 박근혜 씨는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파리 유학을 접고 귀국, 어머니 육 여사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img alt="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보도한 &lt;경향신문&gt; 1979년 10월 27일자 호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02/1380672402645591.jpg"/> 근혜 씨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의 외부 만찬이 있는 경우 그는 늘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취침을 확인한 뒤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비서실장실 옆방인 퍼스트레이디 비서실에서 만났다.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김 실장이 보고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아버지의 부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통과 울분의 암흑순간이었으리라.지금은 전설이 된 &ldquo;휴전선은요?&rdquo;라고 국가 안보를 제일 먼저 걱정했으니 참으로 침착하고 당차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 밤 안에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의 수습정리에 착수하였으니 실로 초인적인 정신력의 발현이라 하겠다. 대통령 침대 머리맡의 대나무 효자손과 변기 절수용 벽돌 한 장은 이때 발견된 것이다.10월 27일 새벽 3시경, 대통령의 시신이 국군통합병원분원에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10월 하순, 쌀쌀한 새벽공기를 뚫고 대통령의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나는 비서실장과 함께 나가 영접했다. 정식 빈소가 마련될 때까지 우선 소접견실에 임시로 모셨다. 쓸쓸하고 허망했다.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권위와 위엄이 하늘같던 대통령이 5척 단구의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여 말없이 돌아오신 것이다. 수석비서관들은 손을 나누어 대통령 장조카 박재홍과 대통령 누님들, 김종필, 육인수 등 대통령 친인척들에게 부음을 알리고 야간통행금지시간(자정~4시) 해제 즉시 청와대로 들어오도록 연락했다.나는 이날 밤 최고의 긴장과 초조, 비통과 허망을 느꼈으며 깊은 심연에 가라앉았다. 5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그 밤에 두 갑을 피웠다. 그리고 3개월 전에 들었던 주술 같은 대통령 신변이상설이 불현듯 생각났다. 내용인즉 한강에 다리가 11개 놓이면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 나의 고등학교 동기생인 김 아무개가 위와 같은 예언(?)을 하는 스님이 있으니 참고로 만나 예기를 들어보라고 하여 세종로 근처에서 만났다.나는 그 스님으로부터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헤어졌다. 김 아무개 동창생을 통하여 불손한 얘기로 혹세무민하지 말 것과 경우에 따라서는 중대 범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두 번 다시 발설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10&middot;26 사건 3개월 전쯤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새벽 그 스님의 얘기가 불현듯 생각나서 한강의 교량수를 세어보았다. 성수대교 준공을 포함해 모두 11개임을 확인하고 내심 깜짝 놀랐다.내가 스님의 괴담을 들었던 그 무렵 비슷한 내용의 대통령 신변 이상발생설이 유정회 간부회의에서 제기된 바도 있었다고 했다. 경호실에 알리느냐의 여부를 논의했으나 사안이 너무나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여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 처리를 백두진 의장에게 일임하기로 했다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유정회 정책위의장 이해원 의원이 전두환 정권 때 나에게 그 내용을 들려준 바 있다.그 외 내가 들은 대통령 서거와 관련된 후일담들.내가 신문기자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 아무개 예비역 대령(육사 5기생)은 10&middot;26 사건 전 평소부터 교류가 깊었던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을 만났을 때 엄지손가락을 세웠다가 아래쪽으로 돌려 누르면서 당분간 서울을 떠나지 말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는 것, 그러나 며칠 뒤 고향에 갈 일이 있어 정읍에 내려가 있는데 대통령 유고 방송을 들었다는 것이다.이 얘기도 전두환 정권 때 그 김 아무개로부터 들었다.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고 박 대통령 말기 무임소 장관을 지낸 김용태는 평소 주한 근무요원 외에 별도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 안보관계 요원 30여 명이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27일 새벽 오산 미공군기지에서 출국했다는 이야기를 전두환 정권 때 들려주면서 깊은 의문을 표시한 바 있었다.&lt;다음호에 계속&gt; 연재를 시작하며역사의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img alt="권숙정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02/1380672402645592.jpg"/> 나는 1961년 5&middot;16과 때를 같이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60~1972년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군정, 한일회담, 학생데모, 대학휴교, 3선개헌 등 역사적 파동들을 취재했다. 나는 올챙이 기자 시절부터 군사정부 최고회의를 출입, 취재했고 민정이양 후에는 국회 출입기자, 정당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도 4년 동안 했다.나는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이후 나는 문교부 기획관리실장(1980~1984년), 국립중앙도서관장(1984~1988년), 국립천안공업대학 학장(1988~1992년)을 거쳐 한국장학재단 이사장(1992~1995년)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나는 이제 팔십 노령에 이르러 주변의 이삭들을 주워 모으려고 이 연재물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 이삭들이 역사의 빈 틈새들을 메울 수 있는 작은 조각이 된다면 보람으로 삼겠다.2013년 9월 서울 상도동 우거에서 권숙정 쓰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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