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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이 주일의 죽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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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이 주일의 죽음</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Wed, 01 Oct 2014 10:29:00</lastBuildDate>
        <pubDate>Wed, 01 Oct 2014</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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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이 주일의 죽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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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전형준 전 화순군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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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1 Oct 2014 10:29: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heart@ilyo.co.kr | 서윤심 기자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9월 21일 전형준 전 화순군수가 서울 송파구의 한 원룸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향년 58세. 그는 전남 화순군 다산리 &lsquo;깡촌&rsquo;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나고 자라 자수성가해 매출 수백억 원의 중견 건설 회사를 일궜다. 화순군수에 세 번 출마했으나 단 한 번 당선됐고, 그나마도 두 달이 채 안 돼 선거법 위반 혐의로 물러난 비운의 전력도 있다. 남모르게 학생과 노인들을 수년간 도운 독지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6&middot;4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새정치민주연합 구충곤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기자는 그의 &lsquo;과거&rsquo;를 되짚어보기 위해 고향 전라남도 화순군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군민들과 그의 지인들은 &ldquo;정이 많았던 사람&rdquo;이라고 입을 모았다. 저마다 전 전 군수와의 일화 하나씩을 들려주며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지인들이 건넨 전형준 전 군수와의 추억을, 가상의 고향 후배가 그에게 보내는 &lsquo;마지막&rsquo; 편지 형식으로 되짚어 봤다. <img alt="전형준 전 화순군수가 서울 송파구의 한 원룸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지난 6ㆍ4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기를 노렸으나 낙선, 이후 서울의 여동생 집에서 지내다가 최근 원룸을 얻어 혼자 생활해왔으며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한 것으로 전해졌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928/1411897107673617.jpg"/> 전형준 전 군수, 아니 형님! 형님 보내드리고 고향에 내려오니 더 마음이 아파옵니다. 형님께서 아끼시던 고향 화순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마을 어귀마다 있는 큰 느티나무, 은행나무에도 가을 물이 들었고, 형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한 번씩 잡아드리던 노인들의 손은 수확으로 분주해졌습니다. 방앗간에서 풍기는 깨 볶는 냄새가 온 읍내에 퍼져 형님 생각을 더하게 만듭니다.어제는 향청리 앞을 지나는데 할머니 세 분이서 볕을 쬐며 두런두런 형님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중에는 형님께서 붕어빵을 사 안기던 그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군수 출마를 결심했던 2005년 어느 날. 시장 앞에 혼자 앉아 계시던 할머니를 보곤 제게 얼른 천 원짜리를 쥐어주며 붕어빵이라도 사오라고 했었지요. 따뜻한 붕어빵을 할머니에게 안기며 &ldquo;어째 날도 추운디 여기서 굶고 계시다요. 요거라도 드시고 기운 차리소&rdquo;라고 말하던 형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효자군수. 할머니들은 여전히 형님을 그리 부르고 계셨습니다. &ldquo;그래도 형준이가 우리 같은 노인네들한테 효자 노릇했지. 해마다 쌀도 노인정에 주고. 혼자 사는 노인네들한테 반찬 나눠준 것도 형준이가 한 거였지?&rdquo; &ldquo;하몬. 맨날 선거판 엎어져가꼬 선거하느라 돈 많이 들인 거 빼면 잘한 게 많어.&rdquo; 형님은 여덟 살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맏형님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오셨지요. 누가 &ldquo;어떤 인생을 살아 오셨냐&rdquo; 물으면 &ldquo;내 인생은 소설 한 편 쓸 정도다&rdquo;며 너스레를 떨던 형님. 짐짓 허풍인 것처럼 웃으며 말하셨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요. 길쌈에 농사까지 지으시며 7남매 수발하시던 어머니. 중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됐지만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요. 그래도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열여섯 살에 바로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장은 꼭 따겠다고 의지를 다지던 형님. 갓 전역하고 고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며 기뻐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쉰 살의 형님이 대학을 졸업한다는 소식 듣고 내심 감탄했습니다. 졸업식에서는 어머니께 학사모를 씌워주시며 펑펑 우셨지요. 형님께서는 한다면 하는 의지 있는 분이셨고, 항상 어머니를 기쁘게 하시던 분이었습니다.형님의 고향 사랑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 사이에 유명했지요. 상경해 92년에 사업 시작하시면서도 입만 떼면 화순 얘기를 하셨죠. 사업하며 오며가며 만난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동향 사람을 만나면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ldquo;아따, 화순 출신이라요? 내 쩌그 깡촌 다산리 사람 아니겄소. 동향 사람 만난 것도 인연인디 어데 드가서 밥이나 같이 하소&rdquo;라며 팔을 잡아 끌던 일도 기억납니다. 오죽하면 고향 동네 이름을 따서 회사를 다산건설이라 지었겠습니까. 사업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으레 욕심 넘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2004년 자그맣게 신문에 실린 한 교사의 편지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온 모교 이름을 보고 관심 있게 읽기 시작했는데 형님 이름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작은 시골 분교가 돼버린 사평초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줘 고맙다는 인사였습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며 학비도, 생활비도 없어 고생하는 아이에게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던 일화, 태어나 처음 서울을 가본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했다는 얘기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화순군에 있는 초&middot;중&middot;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경로당에는 10년 넘게 쌀을 보내드리고, 화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해왔으면서도 가장 가까이서 형님을 지켜봤던 저도 모르게 하셨지요.2006년 군수에 출마했을 땐 사정 모르는 누군가는 &ldquo;군수 하려고 그깐 돈 썼던 거냐&rdquo;며 손가락질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형님을 지켜봐온 사람들은 알지 않습니까. 형님은 어려운 사람만 보면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분이라는 걸요.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928/1411897138197935.jpg"/> 이제와 고백하건대 형님께서 군수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하셨을 땐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한창 잘나가던 회사를 형님께서 신경 쓰지 못하실까 걱정이었습니다. 또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군수를 하겠다고 나서기엔 선거판은 너무 냉혹하니까요. 형님의 큰형님도 화순군의회 의장까지 하시다가 불명예스러운 일로 옥살이까지 하신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님을 오래 봐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ldquo;베풀기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군수 하긴 힘들다&rdquo;고 조언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군수에 당선되고 형님은 &ldquo;4년 임기동안 수익 전액 사회 환원&rdquo;을 약속하셨지요. 하지만 그 약속은 당선 두 달 만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돼버렸습니다. 선거법위반 혐의로 구속 수사를 받으며 힘겨워하시던 형님 모습은 참 위태로워보였습니다. 그냥 하시던 사업 하고, 군민들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워낙 자존심 강한 성품 탓에 이런 얘기는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집행유예 정도로 사건은 일단락됐고, 그렇게 소원하시던 군수자리는 동생인 완준 형님께서 이어가게 되었지요.형님의 살아오신 길을 돌아보며 &lsquo;왜 불행이 그렇게 한꺼번에 겹쳤을까&rsquo; 생각해봤습니다. 불행이 하나씩 왔다면 형님께서 그리 외롭고 극단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집니다. 형님 사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지난해 말이었습니다. 건설 경기가 계속 좋지 않아 걱정하던 터였습니다. 지난 10월쯤이었을까요, 회사 이름도 바꾸고, 사무실도 옮기셨다기에 &lsquo;괜찮은가보다 &rsquo;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추석 후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더군요.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니 추석 이후에는 사무실 문은 잠긴 채 빚쟁이들만 찾아오고 있다더군요. 지난 지방선거를 치른 여파가 아닌지 내심 생각했습니다. 사실 6월 지방선거 때 군수에 재도전 하신다는 얘기 듣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공천파동이다 뭐다 한참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결국 공천은 지금 군수가 되신 분께 돌아갔고, 형님은 주변 만류에도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셨지요. 형수님께서도 많이 말리셔서 싸우기도 많이 싸우셨지요. 편찮으신 형수님의 만류를 뿌리치실만큼 군수가 하고 싶으셨는지, 왜 그렇게 간절히 군수가 되려 했는지 형님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더 이상 따져 물을 수도 없게 됐네요.예상했던 낙선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고, 형님은 선거가 끝난 그날 홀로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 위로해드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이제야 밀려옵니다. 그 후에도 한동안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서울에서 여동생과 매제와 지내고 있다는 말에 안도했습니다. 형수님과의 불화에 대한 소문도 동네에 파다했던 터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밝고 사람 좋던 형님께서 왜 자살을 택했는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저로서는 형님의 선택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평생을 사랑했던 군민들이 자신에게 등 돌렸다는 배신감이었을까요. 그리 셌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을까요.사업이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지인 중 누구라도 상을 당하면 비행기 타는 것도 마다않고 꼭 위로하고 올라가셨던 게 형님입니다. 형님 가시는 길에도 화순에서는 관광버스 세 대가 출발했습니다. 서울에 마련된 빈소에도 내내 형님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리워합니다. 한때는 모든 걸 다 가졌던 형님, 끝에는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하셨는지요. 모든 게 원망스러워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으셨는지요. 이제는 원망마저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전남 화순=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화순군수 선거 잔혹사민선 3~5기 동안 6번 선거 &lsquo;당선 후 구속&rsquo; 꼬리표2002년 민선 3기를 시작으로 민선 5기까지 선거를 6번 치른 곳. 화순군은 한동안 &lsquo;군수들의 무덤&rsquo;으로 불렸다. 2002년 임호경 전 군수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으나 선거법 위반 혐의(금품제공)로 구속돼 직위 상실됐다. 임 전 군수의 배턴을 이어받은 건 그의 부인 이영남 전 군수다. 2004년 6월 실시한 재보궐 선거에서 구속된 임 전 군수를 대신해 나온 선거에서 당선돼 &lsquo;부부군수&rsquo;라는 별명을 얻었다.  <img alt="2009년 전완준 전 화순군수(전형준 전 군수 동생)가 국제 산삼 심포지엄 환영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화순군청"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928/1411897150030933.jpg"/> 2006년 5월에 열린 민선 4기 선거에서 이 전 군수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전형준 전 군수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전형준 전 군수 역시 당선 두 달이 채 안 돼 선거법 위반 혐의(기부 당비대납 및 사전선거)로 구속돼 사임했다. 전형준 전 군수의 뒤를 이어 출마한 건 그의 동생 전완준 전 군수다. 2006년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며 &lsquo;형제군수&rsquo;가 탄생했다. 2010년 &lsquo;동생군수&rsquo; 역시 재선에 도전하지만 유세 기간 중 선거법 위반 혐의(금품 및 향흥 제공)로 피소돼 구속됐다. 전완준 전 군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 출마해 &lsquo;남편군수&rsquo;인 임 전 군수를 누르고 당선됐으나 결국 2011년 유죄 선고를 받아 군수직을 상실했다. 2011년 재선거에서는 민주당 홍이식 후보가 당선돼 &lsquo;가족군수&rsquo;의 맥을 끊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형제군수와 부부군수 두 집안의 싸움이 이어지면서 당시 항간에는 &ldquo;홍 후보는 특정 집안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것&rdquo;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홍 전 군수 역시 2012년 정치자금법 위반(뇌물수수)으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 중 임기를 마쳤다. [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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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7351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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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17 Mar 2014 10:52: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기자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진보신당의 최연소 여성 대변인이자 젊은 진보 정당인이었던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35)가 지난 8일 새벽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박 부대표 죽음의 원인은 세간에 &lsquo;우울증으로 인한 자살&rsquo;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 부대표가 기간제 교사직과 학원 강사를 거쳐 정계에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그녀가 싱글 맘과 군소 정당에 대한 편견과 얼마나 오랜 사투를 벌여왔는지 짐작케 한다. 박 부대표는 무엇 때문에 &lsquo;꿈을 공유하기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사람들&rsquo;이라 했던 이들을 뒤로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img alt="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죽음의 원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알려졌다. 박 대표의 영결식 모습과 페이스북 사진 캡처(작은 사진). 사진제공=노동당"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16/1394965654735373.jpg"/> &ldquo;미안합니다. 제가 큰딸 박은지 동지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rdquo;지난 9일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로비에서 영면에 든 박은지 부대표를 추모하면서 그녀의 아버지 박덕경 씨가 한 말이다. 유족대표이자 박 부대표의 아버지인 박덕경 씨는 장애인으로서 장애인 인권을 위해 싸웠던 전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장이었다. 밝고 명랑했던 박 부대표는 장애인 인권 운동가인 아버지 박덕경 씨에게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데 힘이 되는 딸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박 부대표의 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20대 중반,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박 부대표는 서울 국사봉중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게 됐다. 계약기간은 1년. 출산휴가 3개월 기간제 자리부터 휴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경기도 어느 공고까지 89통에 이르는 이력서를 쓰고서야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학생운동을 하느라 &lsquo;스펙&rsquo;을 쌓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한 박 부대표에게는 계약직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그러나 박 부대표는 어렵게 얻은 기간제 교사 계약기간 1년 중 6개월도 채 채우지 못했다. 임신 소식을 알리자마자 학교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종료를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있었지만 박 부대표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교조의 일원이 되어 참교육을 실천하고 싶었던 박 부대표는 교사의 꿈을 접고 그렇게 학교를 나와야 했다.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해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박 부대표는 학원 강사를 했다. 학원 강사 수입은 기간제 교사보다는 괜찮았지만 아이의 베이비시터 급여까지 챙겨주기에는 빠듯했다.그런 박 부대표가 진보정당에 희망을 걸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 부대표는 18대 총선 동작을 김종철 후보 수행비서직을 수행하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진보운동가의 삶을 향해 다시 한 번 발을 내딛었다.박 부대표는 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 언론국장으로 일을 시작해 최연소 대변인이 되면서 입지를 넓혀갔다. 박 부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청소노동자 김순자 씨와 지식인 홍세화 씨 등과 함께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노동당(전 진보신당)의 부대표로 당선돼 대변인을 겸직했다. <img alt="사진제공=노동당"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16/1394965709957922.jpg"/> 그러나 군소정당 당직자로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박 부대표는 가스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서 아들과 2층 침대를 쓰면서 학원 강사 시절 모아 둔 돈을 조금씩 생활비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97억 2900만 원으로 책정된 올해 1분기 국고보조금은 새누리당이 44억 4340만 원(45.7%), 민주당 40억 6662만 원(41.8%), 통합진보당 6억 9979만 원(7.2%), 정의당 5억 1980만 원(5.3%)순으로 가져갔다. 진보정당 당직자들의 경우 월급만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실제로 원내 진보정당의 당직자 A 씨는 &ldquo;천진하게 말해서 정말 소신을 위해 &lsquo;버티는&rsquo; 당직자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된다&rdquo;며 &ldquo;사교육 교사로 뛰어드는 당직자들이 많다. 자신들이 거부했던 &lsquo;입시교육&rsquo;이라는 틀로 들어가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rdquo;고 털어놨다.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노동당의 경우 올해 1분기 국고보조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현재 노동당은 100% 당비로 운영금을 충당하고 있다. 당직자에게는 최저임금밖에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5210원을 하루 8시간 기준으로(주말제외) 계산해도 한 달 1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급여다.윤현식 노동당 대변인은 &ldquo;당직이라는 것이 당 활동 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부수입 확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rdquo;며 &ldquo;당직자 중에는 자녀교육이나 건강 문제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눈물을 머금고 당을 떠나는 당직자도 있다&rdquo;고 말했다.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 부대표는 지난 2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ldquo;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rdquo;며 &ldquo;한 해 동안 아이는 키가 9.4cm 컸고, 방과 후 학교 어딘가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방 한 번, 실내화 주머니를 두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고, 꿈을 기관사에서 딱지장사로 바꿨다&hellip;&rdquo;는 글로 아들과 지내는 소소한 일상을 전하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하지만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 계약직 기간제 교사로 싱글맘으로 군소정당 당직자로 세상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온 박 부대표의 &lsquo;본인상&rsquo;이라는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9세가 된 아들의 신고로 경찰과 소방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박 부대표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기자들과 잘 이겨내지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도 원외 정당이었던 노동당을 알리려고 했다는 박 부대표의 바람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검색어 상위에 오르는 씁쓸함을 남겼다.박 부대표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노동당 당직자들을 비롯해 사회단체 활동가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노동당의 이용길 대표는 &ldquo;진보정당에 자신의 젊음을 불사르기로 결심했을 때, 진보정당은 길을 잃고 헤매는 형편이었다&rdquo;며 &ldquo;고인의 밝던 눈빛과 명랑한 웃음소리 그 힘으로 버텨 내겠다&rdquo;며 고인이 된 박 부대표를 떠나보냈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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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안양 초등생 유괴살인사건 혜진 양 부친 이창근 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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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1 Mar 2014 11:10: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기자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7년 전 이웃집 유괴범에게 처참히 납치 살해된 이혜진 양(당시 11세)이 잠들어 있는 안양시립청계공원묘지. 매년 혜진 양이 좋아했던 콜라와 케이크를 사들고 가파른 길을 올랐던 혜진 양 아버지 이창근 씨(53)는 지난 5일 한줌 재가 되어 이곳에서 영면했다. 딸을 잃은 고통에 술로 남은 생을 버텨왔던 혜진 양의 아버지는 지난 3일 오전 4시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img alt="이창근 씨의 유해는 안양시립청계공원묘지 내 혜진 양의 묘 인근에 안장됐다. 가운뎃줄 맨 왼쪽이 이창근 씨, 맨 오른쪽이 혜진 양의 묘.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09/1394357380091268.jpg"/> 7년 전 세간의 분노를 자아냈던 &lsquo;안양 초등생 유괴살인사건.&rsquo; 성탄절이었던 2007년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마친 뒤 놀이터로 향한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당시 9살)이 한 동네에 사는 정성현(45)에게 유괴됐다. 같은 시각, 혜진 양의 아버지 이 씨는 혜진 양의 성탄절 선물로 딸이 며칠 동안 &ldquo;저거 사줘. 사줘&rdquo; 노래를 부르던 마론 인형을 준비하고 집에서 늦도록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혜진 양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이 씨는 애타게 딸을 찾아다녔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 씨에게 전화를 걸어 &ldquo;아빠 어디야? 아빠 뭐해?&rdquo;라고 묻는 애교 많은 막내 딸 혜진 양을 유난히 아끼던 이 씨였다. 혜진 양이 실종된 안양시내 곳곳에는 관공서와 사회단체에서 내건 혜진이 예슬이 찾기 현수막이 나붙었다. 안양역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전단지가 배포됐고, 아이들이 돌아오길 염원하는 노란리본 운동이 곳곳에 이어졌다. 그러나 이 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혜진 양은 실종 77일째 되던 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이 씨의 시간은 그날로 멈춰버렸다. 이 씨는 10년간 일했던 인쇄공장도 그만둔 채 술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몸을 혹사시킨 이 씨의 허리사이즈는 24인치까지 줄었고, 균형을 잃고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에 성한 이가 다 부서지기도 했다. 주변의 권유로 상담센터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이 씨의 상처는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ldquo;살이 15kg 넘게 빠졌다. 딸 무덤 앞에 가면 엉엉 울기만 하니까&hellip;.&rdquo;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 나주봉 회장(57)은 황망한 얼굴이었다. 매년 12월 24일이면 이 씨와 함께 혜진 양의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청계공원묘지에 올랐던 나 회장은 지난해 추모제가 마지막 추모제가 될 것을 가늠했다. 무엇보다 혜진 양의 아버지가 지쳐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lsquo;혜진예슬이 사건&rsquo;이 점점 잊히면서 추모객의 발길도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씨가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나 회장은 &ldquo;오히려 살려는 의지가 강했다. 겨울이면 전미찾모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 연탄나르기 봉사에도 참여했고, 전국의 전미찾모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했는데&hellip;&rdquo;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씨의 생전 사진을 찾아보던 나 회장은 지난해 추모제 때 이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며 &ldquo;딸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했다. 결국 몸이 술을 견디지 못하고&hellip;&rdquo;라며 말끝을 흐렸다.꽃샘추위가 매섭던 지난 5일 오후, 화장된 이 씨의 유해는 이 씨가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다는 혜진 양 옆자리에 안장됐다. 혜진 양의 오빠(24)와 언니(22)가 눈물을 훔치며 고인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문 이 씨의 부인 이달순 씨(49)는 혜진 양이 잠들어 있는 묘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하늘나라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img alt="지난 연말 딸의 추모제에 참석한 혜진 양의 아버지 이창근 씨. 사진제공=전미찾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09/1394357402525212.jpg"/> 오후 4시, 장지에서 남편 이 씨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부인 이달순 씨의 손에는 흰 천에 쌓인 이 씨의 영정사진만 남았다. 부인 이 씨는 담담하게 슬픔을 삼키며 돌아가는 지인들의 차비를 챙겼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 준 지인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흰 천에 쌓인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장을 벗어난 부인 이 씨는 기자의 인사에도 굳게 입을 다문 채 걷기만 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걷던 부인 이 씨는 한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ldquo;청국장 먹고 가라&rdquo;며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남편이 혜진 양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사이 생계는 고스란히 부인 이 씨의 몫이었다. 부인 이 씨는 식당일을 하며 남은 가족의 생활을 책임졌다. 이 씨가 술을 마시면서부터 부인 이 씨의 잔소리가 늘긴 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을 만큼 금술이 좋은 부부였다.&ldquo;숟가락 하나 없이 시작해 26년을 같이 살았다. 남편이 버는 돈은 저축하고 내가 버는 돈은 생활비로 쓰면서 집까지 장만했다. 집하고 공장밖에 몰랐다. 그 정도로 성실했던 사람이었다.&rdquo;부인 이 씨는 남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ldquo;지난 일요일에 깍두기를 담그는 데 쪽파를 다듬어 주더라. 투박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그날까지만 해도 말도 잘하고 했는데&hellip;&rdquo;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부인 이 씨는 &ldquo;집이 엉망이다. 집 정리를 좀 해야겠다&rdquo;며 악수를 건넨 후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딸이 살해당한 뒤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다 결국 죽음에 이른 이 씨의 사연이 보도되면서 범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을 지원하는 제도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구는 대부분이 정부가 민간에 위탁을 주는 형식이고, 예산도 2009년 116억에서 이듬해 111억 원으로 또 그 다음 해 99억 원으로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연구원은 &ldquo;범죄 피해자나 범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이 법률적인 자문에 그치는 정도&rdquo;라며 &ldquo;법무부가 몇 해 전 설립한 &lsquo;스마일센터&rsquo;가 범죄피해자의 심리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홍보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lsquo;스마일센터&rsquo; 같은 기관이 혜진 양 아버지와 같은 범죄피해자를 염려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번 같은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rdquo;고 설명했다.한편 혜진예슬 양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정성현은 200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서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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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생활고 시달리던 세 모녀 동반자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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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5 Mar 2014 15:04: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강기준 인턴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동반자살해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지난 2월 26일 오후 9시 20분경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어머니인 박 아무개 씨(60)와 큰딸 김 아무개 씨(35), 그리고 둘째딸(32)이 집안에 누운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고, 이를 집주인인 임 아무개 씨(73)가 발견해 신고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할 수 없어 동반자살 해야만 했던 세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따라가 봤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07/1394190000723070.jpg"/>  <img alt="생활고를 겪던 송파구 세 모녀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라는 유서와 현금 70만 원을 남기고 번개탄을 피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래는 다 타버린 번개탄 재로 뉴스 화면 캡처."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307/1394190000723071.jpg"/> 집안 현장은 참혹했다. 집안의 창문은 청테이프로 밀봉되어 있었고, 출입구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려는 듯 침대가 막고 있었다. 집은 방 두 칸과 화장실 한 개의 작은 집이었다. 이들이 주로 지냈던 방은 이불 두 채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고 벽지는 누렇게 변해있었다. 숨진 모녀 머리 위 벽에는 어머니 박 씨의 남편과 함께 네 식구가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외에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편이었다. 가재도구도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들이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도 죽은 채로 발견됐다. 바닥에 놓인 접시에는 다 타고 난 번개탄 재가 있었다. 주인 임 아무개 씨는 &ldquo;일주일째 집안에서 인기척 없이 TV 소리가 이어져 빈집에 불이 날까 봐 걱정돼 경찰에 신고했다&rdquo;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경찰은 &ldquo;밀폐되고 비좁은 공간에서는 번개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살에 이를 수 있다&rdquo;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세 모녀의 유서가 보였다. 유서에는 &lsquo;주인 아주머니께&hellip;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rsquo;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금 70만 원이 담긴 봉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특히 국민들이 세 모녀의 죽음을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자살을 결심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집세와 공과금을 두고 떠났다는 점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lsquo;없어도 구걸 없이 자존심 지키며 사신 것 같다. 이제 편안하게 쉬시라&rsquo; &lsquo;가난해도 주변에 폐 끼치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듯해서 더 안타깝다&rsquo;는 등의 댓글과 함께 &lsquo;빈익빈 부익부의 희생자&rsquo; &lsquo;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희생당한 인재&rsquo; &lsquo;세금 거둬들여서 다 어디에 쓰느냐&rsquo;는 등의 정부 복지정책을 질타하는 내용도 많았다.세 모녀의 비극은 아버지 김 씨가 사망한 뒤 시작됐다. 김 씨는 12년 전 암 투병을 하다 사망했다. 그가 남긴 것은 사업 실패로 인한 상당한 빚과 투병생활로 인해 밀린 병원비뿐이었다. 가정은 어머니 박 씨 홀로 책임졌다. 그는 롯데월드 인근 식당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그동안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8만 원인 집에 9년째 살면서 월세와 전기 요금 12만 원, 건강보험료 4만 9000원가량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납부했다.박 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도 아니어서 정부의 지원금도 받지 못했지만, 주변 친척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스스로 가족을 부양했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집주인이 월세를 50만 원으로 올려 박 씨는 고민이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빙판 길에 미끄러져 팔을 크게 다친 박 씨는 다니던 일도 그만둬야 했다. 그의 큰딸은 7년 전부터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변변한 치료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 큰딸이 혈당 수치를 기록한 수첩이 발견됐으나 병원 처방을 받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둘째 딸이 종종 아르바이트를 하여 박 씨에게 돈을 전달하긴 했으나 고정 수입은 아니었다. 둘째 딸은 생활비와 병원비를 신용카드로 막다가 결국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악재가 겹치면서 세 모녀는 한 달가량 수입이 모두 끊기고 말았다. 생계가 막막해진 세 모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송파경찰서 형사과장은 &lt;일요신문&gt;과의 통화에서 &ldquo;동반자살이라고는 하지만 그 방법을 두고 말들이 많은 것 같다. 어머니가 약물투여를 해서 딸들을 재우고 번개탄을 지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부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정황상 동반자살로 봐야 한다&rdquo;고 말했다.송파서의 또 다른 관계자는 &ldquo;현재 사건은 마무리 단계다.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하고 장례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rdquo;며 &ldquo;친삼촌과 외삼촌 모두 연락이 닿았으나 친가 쪽은 아버지가 오래전에 죽은 관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외가 쪽에서 시신을 수습해 갔다. 그리고 자살 동기를 파악하려면 부검을 실시해야 하나 유족이 반대해서 그 이상 수사 진행은 불가능하다&rdquo;고 말하며 최종적으로 사건은 사실상 동반자살로 마무리됐음을 밝혔다.강기준 인턴기자 rockstars9@gmail.com]]></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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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알바왕’ 이종룡 씨 지상에서 가장 치열한 삶]]></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7111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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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10 Feb 2014 09:54: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기자, 강기준 인턴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하루 20시간 일하고 400㎞를 이동하며 3억 5000만 원의 빚을 갚은 &lsquo;알바왕&rsquo; 이종룡 씨가 사망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최근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씨가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미확인 이야기가 떠돌면서 그의 사망 여부가 큰 관심을 모았다. 지난 2009년 이 씨의 경험을 담은 책 &lt;3억 5000만 원의 전쟁&gt;을 펴낸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 7일 &lt;일요신문&gt;과의 전화통화에서 &ldquo;인세 때문에 이종룡 씨와 연락을 취하다 그의 아들로부터 사망소식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우리도 충격이었다&rdquo;라고 말했다. 하루 2시간여의 쪽잠을 자면서 수억 원의 빚을 모두 갚아 사회에 귀감이 되었던 이 씨의 갑작스런 죽음의 뒤안길을 따라가 봤다. <img alt="하루 2시간여 쪽잠을 자면서 수억 원의 빚을 갚아 사회적 귀감이 됐던 이종룡 씨가 최근 별세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이 씨의 MBC 출연 당시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0/1391993662711170.jpg"/> 이종룡 씨의 사연은 지난 2008년 MBC &lt;시사매거진 2580&gt;을 통해 소개가 됐고 그 이후 2010년 OBS &lt;전설의 시대&gt;, 2011년 SBS &lt;궁금한 이야기 Y&gt;, 2012년 MBC &lt;TV특종 놀라운 세상&gt;에 잇따라 출연하며 그 사연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2012년 5월 KBS1 &lt;강연 100℃&gt;에 출연한 이후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자연스레 이 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으나 최근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하던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 씨가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위 여부를 놓고 네티즌들은 갑론을박을 벌여왔고, &lt;일요신문&gt;에 의해 그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lt;일요신문&gt;은 이 씨가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아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신분공개를 꺼린 아들은 출판사 관계자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만 전했을 뿐 정확한 사망시기와 경위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한다. 또한 취재진은 과거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러 곳들도 수소문했으나 2012년 이후 그를 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 씨를 학원차량 운전사로 고용했던 한 태권도장 관계자는 &ldquo;사망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2012년 그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rdquo;고 말했다.한편 이 씨는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시계도매점의 사장이었다. 잘나갈 땐 월 매출이 3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게다가 막연한 기대감에 빨리 사업을 접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빚은 결국 3억 5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img alt="SBS &lt;궁금한 이야기Y&gt; 출연 당시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0/1391993662711171.jpg"/> 결국 이 씨는 부도를 내고 말았고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를 택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이후 이 씨는 돈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떡 배달, 학원차량 운전, 목욕탕 청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 씨는 2009년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또한 이 씨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lt;좋은 생각&gt;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휴지를 줍는 부지런함도 보였다. 이렇게 그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총 20시간으로 이동하는 거리만도 약 400㎞에 달했다.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도 생겼다. 한 달을 기준으로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80만 원, 떡 배달 150만~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450만 원 정도 생겼고 350만 원을 뚝 떼어내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거의 모든 돈을 쏟아 부은 셈인데 2008년 10월 마침내 그는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이 씨는 빚을 갚고도 돈을 쉽게 생각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고 2009년 이러한 사연을 담아 &lt;3억 5000만 원의 전쟁&gt;을 출판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0/1391993662711172.jpg"/>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씨에게도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었던 것.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자가 제대로 된 직업 갖기는 어려웠다.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할 뿐이었다.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그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바로 음주와 도박이었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간 그는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했다.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간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깨달은 그는 펜치를 가져와 송곳니 두 개를 뽑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lsquo;직장&rsquo;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달 용돈도 2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로 계산하면 약 700원꼴이다. 이렇게 이 씨는 잡생각 없이 혹독하게 일만 했다. 그렇게 &lsquo;알바왕&rsquo; 이종룡 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어렵사리 되찾은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빚을 다 갚던 날 이 씨는 &ldquo;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마련하고 싶다&rdquo;는 바람을 전했지만 고된 아르바이트의 후유증으로 그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결국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강기준 인턴기자 사망이유 추적해보니&hellip;&lsquo;끼니 제대로 안챙겨 탈났을 것&rs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0/1391993662711173.jpg"/> 본지는 이종룡 씨가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 여러 곳에 확인을 했지만 그의 가족들로부터 정확한 사인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커뮤니티사이트 등에서는 그가 대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전문의들에 따르면 대장암은 식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질병으로 과도한 동물성 지방 음식 섭취나 섬유질, 칼슘, 비타민D 등이 부족할 때 발병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병이다. 만약 이 씨의 사망원인이 대장암이었다면 지난 10년간 혹독한 근로로 인해 식사시간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던 것이 직접적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이 씨가 출간한 책 &lt;3억 5000만 원의 전쟁&gt;에 따르면 그는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처음 몇 년은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기 위해 저녁밥도 굶었다. 포만감에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루 스케줄에는 식사시간이 따로 없었다. 늘 굶거나 급한 대로 밥을 물에 말아서 대충 먹었다. 식사를 하느라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굶더라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장에서 공짜로 주는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며 빈속을 채우거나, 심지어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동하는 동안 뛰면서 컵라면을 먹기도 했었다.또한 이 씨는 빚을 전부 청산한 2008년 전까지는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된 상태라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식사는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곧 대장암으로 발전됐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강]  이 씨가 전하는 말&ldquo;빚이 날 강하게 해&hellip; 포기는 없었다&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210/1391993662711174.jpg"/>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종룡 씨의 사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숨길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이 씨는 당당히 치부를 드러내고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쪽을 택했다.그가 남긴 책 &lt;3억 5000만 원의 전쟁&gt;을 보면 이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전하며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lsquo;빚&rsquo;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ldquo;빚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배운 것 역시 많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아낀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rdquo;며 &ldquo;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내가 3억 5000만 원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비결도 몸과 시간을 활용했던 부분&rdquo;이라고 말했다.책의 에필로그에서조차 그는 자신이 하나의 희망이 되길 바랐다. 이 씨는 &ldquo;절망과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절망과 고통에 쓰러지지 않는다면 기회는 반드시 있다&rdquo;며 &ldquo;절망은 외부적인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절망의 벽에 갇혀 있으면 그 벽은 점점 두꺼워져서 결국 두 번 다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도전만이 절망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최고의 무기&rdquo;라고 조언했다.또한 이 씨는 자신을 사례로 들며 &ldquo;가끔은 열쇠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여는 경우도 있다. 그 열쇠를 발견하기까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헤매는 하루하루가 곧 인생이 아니던가. 그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실패 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rdquo;며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전하려했다. [박]]]></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모창가수 너훈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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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1 Jan 2014 09:0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난 12일 모방가수 너훈아 씨(57)가 2년간의 간암 투병 끝에 숨을 거뒀다. 가수 너훈아의 본명은 김갑순이다. 2년 전 &lsquo;8개월밖에 못 산다&rsquo;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항암 치료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는 김 씨. 평소 &lsquo;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다 죽겠다&rsquo;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김 씨는 지난 2013년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2월 2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lsquo;짝퉁&rsquo;, &lsquo;가짜&rsquo;라는 주변의 편견에 인생마저 가짜라는 생각이 들 때면 최고의 이미테이션(모방) 가수라는 자부심으로 버텼다는 김 씨. 향년 57세의 나이로 팬들의 곁을 떠난 모방가수 김갑순 씨의 &lsquo;진짜인생&rsquo;을 들여다봤다. <img alt="‘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다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김갑순 씨는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사진제공=만수무강엔터테인먼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1/1390262771699830.jpg"/> &lsquo;너훈아&rsquo; 김갑순 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순천향대서울병원 장례식장. 모방가수 세계에서 &lsquo;대부&rsquo;로 통하던 김 씨의 사망소식에 밤실이, 패튀김, 이엉자, 태쥐나, 조형필 등 모방가수 후배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lsquo;너훈아&rsquo;가 아닌 &lsquo;김갑순&rsquo;이라는 이름의 2집 앨범을 그토록 소원했다는 김 씨. &lsquo;김갑순 2집&rsquo;이라는 간절한 바람을 뒤로한 채 김 씨는 영면에 들었다.충남 논산에서 소를 키우며 농사일을 돕던 고등학생 김 씨는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lsquo;아리랑&rsquo;을 부르며 모내기를 할 때면 고된 하루도 금방 저물었다. 김 씨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박수갈채를 받는 &lsquo;가수&rsquo;가 된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김 씨의 어머니는 그런 김 씨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김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소 한 마리를 팔아 어렵게 돈을 마련해 줬다. 김 씨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lsquo;소판 돈&rsquo;을 들고 가수가 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상경했다.1988년, 그토록 소원했던 김갑순이란 이름을 내건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ldquo;이별한 지 몇 해냐 두고 온 원산만아, 해당화 곱게 피는 내 고향은 명사십리&rdquo;로 시작하는 김 씨의 노래 &lsquo;명사십리&rsquo;는 가요무대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김 씨의 청운에 부푼 꿈은 얼마가지 못했다. 신곡을 발표한 이후 앨범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김 씨의 오랜 무명생활이 시작된 것. 무명생활이 길어지면서 김 씨는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lsquo;쫄딱&rsquo; 망한 것이다. 김 씨는 결국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img alt="작은 사진은 김갑순 씨의 영정사진과 그의 동생 개그맨 김철민 씨의 모습으로 OBS ‘독특한 연예뉴스’ 방송 화면을 캡처했다. "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1/1390262771699831.jpg"/> 그러나 김 씨는 가수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갔던 김 씨는 우연한 기회에 &lsquo;나훈아 모창대회&rsquo;에 나가 금상을 수상하게 됐고 그 계기로 가수 나훈아의 모창과 모방을 하게 되었다. 김 씨가 본격적으로 모방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0년 대 초반 개그맨 고 김형곤 씨를 만나면서부터다.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김 씨를 본 김형곤이 &ldquo;나훈아 모방가수를 하면 성공하겠다&rdquo;며 그에게 &lsquo;너훈아&rsquo;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던 것. 그렇게 무명가수 깁갑순은 너훈아로 다시 태어났다.너훈아로 살았던 지난 25년간 김갑순 씨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lsquo;김갑순&rsquo;이라는 이름으로는 중앙무대는 고사하고 밤무대조차 서기 어려웠지만 &lsquo;너훈아&rsquo;는 달랐다. 축제가 빈번한 봄가을 이은 모창가수들에겐 &lsquo;성수기&rsquo;로 통했지만 &lsquo;너훈아&rsquo; 김 씨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김 씨는 4계절 상관없이 하루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미테이션 가수 세계의 톱스타였다. 밤무대에서도 너훈아를 모셔가려는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그야말로 유명인사가 되었다.김 씨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lsquo;나훈아&rsquo;가 되기 위해 나훈아 원곡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하루에 나훈아 노래만 50곡 이상을 불렀다. 나훈아와 조금 더 비슷해지기 위해서 얼굴성형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김 씨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ldquo;내가 나훈아 씨는 아니지만 무대에 서면 팬들이 대리만족을 느낀다&rdquo;라며 너훈아로 사는 인생의 보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훈아로 살았던 지난 25년의 세월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 씨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격려와 환호를 보냈지만 비웃음과 야유를 보내는 관객도 있었다. 특히 밤무대 공연을 할 때면 술에 취한 손님들이 김 씨에게 &ldquo;네가 나훈아야 인마, 가짜 나훈아&rdquo;라며 무대에서 내려올 것을 강요할 때도 있었다. 나훈아의 그림자 인생을 사는 김 씨에게 &lsquo;짝퉁&rsquo; &lsquo;가짜&rsquo;라는 비아냥은 큰 상처였다. 밤무대 사회를 보는 친한 동생이 김 씨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해서 &lsquo;짝퉁&rsquo; 나훈아라고 소개하자 10년간 등을 진 적도 있었다. 김 씨는 언젠가는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생활을 할 것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1/1390262771699832.jpg"/>  <img alt="너훈아 김갑순 씨는 계절 관계 없이 하루 평균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미테이션 가수계의 톱스타였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21/1390262771699833.jpg"/> 하지만 2년 전 김 씨에게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간암 3기 판정을 받은 김 씨는 자신에게 살날이 길어야 4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김 씨는 자신이 투병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무대에 오르지 못할까봐 병을 숨겼다. 몇몇 지인만이 그의 투병사실을 알고 있었다.김 씨와 15년간 무대에서 일했다는 서울코리아나기획 이철웅 대표(52)는 &ldquo;간암진단을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도 &lsquo;무대 위에서 노래하다 죽겠다&rsquo;며 병을 숨기고 끊임없이 공연을 해왔다&rdquo;며 &ldquo;결국 공연 중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지적장애인 보호시설인 은혜로운 집에서 얼굴만이라고 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대에 올랐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무대가 됐다&rdquo;고 말했다.김갑순 씨의 동생 개그맨 김철민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ldquo;형은 투병 중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복수에 물이 차서 튜브를 차고 있으면서도 지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줬는데 그날 눈물바다가 됐다&rdquo;고 전했다.언젠가는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생활을 하게 되는 날을 기다렸다는 김 씨는 지난해 2013년 12월 24일 &lsquo;너훈아&rsquo;라는 이름으로 선 무대가 마지막이 됐다. 자신의 입버릇처럼 노래를 부르다 무대 위에서 쓰러진 김 씨는 결국 지난 12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숨을 거뒀다. 이철웅 대표는 &ldquo;나훈아의 &lsquo;고향역&rsquo;을 가장 즐겨 불렀던 김 씨가 생각이 난다. &lsquo;모방&rsquo;가수였지만 무대만큼은 진짜였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rdquo;고 말했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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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5·16쿠데타 주역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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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13 Jan 2014 08:59: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kulkin85@ilyo.co.kr | 박정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5&middot;16 주역이자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춘 씨(87)가 지난 2일 별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그는 5&middot;16 이후 &lsquo;2인자&rsquo;로 불리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힐 만큼 쿠데타 세력의 핵심이었다. 그는 4&middot;19, 5&middot;16 등 현대사의 주요 시점에서 굵직굵직한 역할을 맡는 등 시대의 변화에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대한 평가도 여러 시각에 따라 엇갈린다.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의 생애를 돌아봤다. <img alt="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안장식이 지난 5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13/1389571173696120.jpg"/>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여파로 전국이 들끓던 1960년 4월 19일. 위기를 느끼던 경무대(현 청와대)는 당시 6관구(현 수도방위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에게 &ldquo;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해 시위를 진압하라&rdquo;는 명령을 내린다. 경무대의 명령이지만 사안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던 김재춘은 고심을 거듭하다 자신과 친분이 깊은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에게 전화를 건다.&ldquo;사령관님 군인들에게 실탄을 공급하라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rdquo;&ldquo;야, 그건 절대 안 돼. 실탄 공급하는 순간 참변이야!&rdquo;김재춘은 박정희 사령관의 답을 듣고 실탄 공급을 하지 않은 채 출동 명령을 내렸다. 경무대의 말을 어긴 항명인 셈. 김재춘은 이 일로 구속돼 사형 선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김재춘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4&middot;19가 성공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자 김재춘과 박정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자주 기울였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끈끈했던 터였다. 김재춘이 육사 5기생으로 입교할 무렵 박정희는 1중대장 겸 전술학 교관을 맡고 있었다. 한마디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셈. 이후 두 사람은 6&middot;25 전쟁에서도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이러한 인연으로 김재춘이 박정희를 도와 5&middot;16 핵심 인물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6관구 참모장이었던 김재춘은 6관구 참모장실을 5&middot;16 핵심 본부로 활용했다.5&middot;16이 실패로 돌아갈 뻔한 위기 상황을 기회로 바꾼 이도 김재춘이었다. 쿠데타 음모가 새어나가자 군 수뇌부는 5&middot;16 주도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를 6관구 사령부로 급파했다. 하지만 김재춘은 헌병 병력을 이끌고 온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을 설득해 5&middot;16 지지로 입장을 돌려놓았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종철 6관구 사령관으로부터 &ldquo;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부대를 잘 장악하라&rdquo;는 명령도 김재춘은 듣지 않았다.쿠데타가 성공으로 돌아가자 김재춘이 권력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김재춘은 당시 &lsquo;2인자&rsquo;로 불리던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혔다. 당시 육사 5기의 선두주자였던 김재춘과 육사 8기 김종필은 쿠데타 성공 뒤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재춘 장군과 35년 동안 인연을 맺었다는 이연현 5&middot;16 민족상 사무처장은 &ldquo;당시 중앙정보부는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없었다. 오히려 김재춘 장군이 실질적인 권력 핵심이라고 봐도 된다. 후에 김재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면서 합동수사본부장의 권한도 가져가게 되는데 실로 &lsquo;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rsquo;이었다&rdquo;고 전했다.김재춘과 김종필의 대립은 &lsquo;민정이양&rsquo;과 &lsquo;군정연장&rsquo;의 견해차로도 극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김재춘이 &ldquo;쿠데타 조항대로 2년간의 군정을 마치고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rdquo;고 주장하는 반면, 김종필은 &ldquo;사회적 안정을 위해 군정을 계속 해야 한다&rdquo;고 주장했기 때문. 이는 곧 육사 5기 김재춘 대 김종필이 주축이 된 육사 8기생들의 대립이기도 했다. 김종필과 육사 8기생은 군정연장을 주장하며 결국 공화당 창설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하지만 창당 자금이 부족했던 이들은 4대 의혹 사건(주가조작으로 인한 증권파동, 일본 파친코 허가로 인한 커미션 수수, 일본 새나라 자동차 수입 허가 후 커미션 수수, 워커힐 호텔 건설 이권 개입)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남으로써 김종필은 정계를 은퇴, 해외로 떠나게 되고 육사 8기생들은 대거 구속되기에 이른다. 쿠데타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육사 5기 출신이 우위를 점한 셈이다.하지만 김재춘이 3대 중앙정보부장에 들어서자 육사 8기생들은 김재춘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육사 8기생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이권에 개입한 8기생들을 몰아내려 공모한 1963년 &lsquo;7&middot;6 친위쿠데타&rsquo; 배후에 김재춘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김재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결국 김재춘은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5개월 만에 내려놓게 된다. 이연현 사무처장은 &ldquo;김재춘 장군은 7&middot;6 쿠데타와 관계가 있지 않았다. 당시 이를 공모한 노태우가 김재춘 장군을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lsquo;7&middot;6 쿠데타를 지지해 달라&rsquo;고 얘기하자 김재춘 장군이 &lsquo;5&middot;16이면 됐지 어디서 쿠데타냐&rsquo;고 혼을 내고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rdquo;라고 전했다.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내려놓은 김재춘은 이전부터 준비해온 자유민주당을 창당하며 최고위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유민주당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로 민정이양을 위해 &lsquo;범 국민정당&rsquo;을 표방하며 만든 정당이었다. 하지만 창당이 완료되자 박정희 의장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은 &ldquo;합류해서 같이 가자&rdquo;는 김재춘의 요청을 뒤로하고 결국 군정연장을 내포한 공화당을 선택하며 김종필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김재춘과 박정희의 갈림길이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김재춘은 이후 권력 외곽으로 밀려났다. 1965년에는 당대 최대 이슈인 한일협정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반대 입장을 펴다 결국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그다지 서운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연현 사무처장은 &ldquo;올바른 말을 하다 투옥된 것일 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만큼 성격이 확고하기도 털털하기도 했다&rdquo;라고 회상했다.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던 그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lsquo;화려한 복귀&rsquo;는 아니었다. 권력 핵심들의 견제로 공천을 받기까지의 과정도 쉽지가 않았던 것.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1987년 대선 당시 &lsquo;군정 종식&rsquo;을 주장하며 YS 진영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공천 문제로 결별을 하게 된다. 이후 정계를 떠난 그는 최근까지 5&middot;16 민족상 이사장 등 5&middot;16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ldquo;5&middot;16이 쿠데타요, 혁명이오?&rdquo;&ldquo;5&middot;16은 쿠데타지 이 사람아&rdquo;수차례 받는 5&middot;16에 대한 질문에 대해 김재춘은 &ldquo;5&middot;16은 쿠데타&rdquo;라고 늘 주저 없이 얘기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질문자에게 김재춘은 &ldquo;5&middot;16 이후 공약대로 민정이양만 제대로 됐다면 5&middot;16은 제대로 된 혁명이 됐을 것&rdquo;이라고 추가 설명을 이어갔다. 평소 고인의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는 이연현 사무처장은 &ldquo;군정연장 쪽으로 입장만 돌렸다면 권력 핵심에서 두고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dquo;며 &ldquo;그만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할 말은 하는 인물이었다&rdquo;고 전했다. 5&middot;16 핵심 주역이면서 자기 나름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평가는 이제 후세에 남겨지게 됐다.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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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파란눈의 6·25영웅 2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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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7 Jan 2014 08:4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는 지금도 1950년 6&middot;25 전쟁 당시의 한국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는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만이 잠시 그 앞에 머물 뿐 대부분의 &lsquo;한국사람&rsquo;들은 사진을 본 체 만 체 지나간다. 60여 년이 지난 &lsquo;옛 일&rsquo;에 대한 무감각일 터. 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바로 그 발전의 또 다른 모태가 되었던 것이 바로 6&middot;25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외국 전사들이었다. 세월은 흘러 외국인 전우들의 기억은 아스라한 추억의 사진전으로 남아있지만 한번쯤 그들의 삶을 반추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2014년 청마의 해를 열면서 한국을 위해 용감히 싸운 외국인 전쟁영웅 2인의 삶을 되짚어본다.# &lsquo;기적의 비행&rsquo;  <img alt="원산전투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한 케네스 셰크터. 지난달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캡처"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7/1389052097692610.jpg"/> &ldquo;앞이 보이질 않는다!&rdquo;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22일 미국 해군 소속 파일럿 케네스 셰크터 씨(Kenneth Schechter&middot;83)로부터 긴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캘리포니아대를 다니다 공군 소위로 임관한 셰크터 씨는 6&middot;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파견됐고 곧장 강원도 원산전투에 투입됐다. 그의 임무는 적의 물자 수송로를 끊어놓는 것. 그날도 셰크터 씨는 철도와 도로 폭격 임무를 띠고 비행을 하던 중이었다.계획했던 15번의 폭격 중 9번째 폭탄을 떨어뜨리려는 그때 갑작스런 적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셰크터 씨가 조종하던 &lsquo;스카이 레이더&rsquo;도 1200피트 상공에서 흔들렸고 전투기 내부에도 파편이 튀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 뜨거운 불빛이 일더니 셰크터 씨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날아온 파편에 얼굴을 맞아 피범벅이 된 것이었다.금방까지 보이던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불빛만 남아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게 됐다. 셰크터 씨와 함께 공격을 받은 다른 동료들은 본부의 지시에 따라 이미 전투기를 버리고 바다 위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역시 비상탈출을 명받았으나 끝까지 어찌된 일인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대신 함께 투입됐던 동료 하워드 테이어 씨를 찾았다. 편대비행을 하던 테이어 씨는 교신을 통해 앞이 보이지 않는 셰크터 씨를 안내했고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동행은 무려 45분 동안 이어졌다.오로지 손 감각에 의지해 전투기를 조정하던 셰크터 씨는 다행히 미군 기지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오른쪽 눈을 정통으로 관통한 파편으로 인해 일시적인 실명상태였으며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됐다. 한쪽 눈으로는 더 이상 전투기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달은 셰크터 씨는 의병으로 전역할 수밖에 없었다.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군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셰크터 씨였지만 그의 마지막 비행은 영화로 제작될 만큼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감독 앤드루 마튼은 셰크터 씨를 포함해 당시 전우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해 할리우드 영화를 기획했다. 그 결과 1954년 영화 &lt;멘 오브 더 파이팅 레이디&gt;가 탄생했고 셰크터 씨는 &lsquo;기적의 비행&rsquo;이라는 평을 받으며 영웅대접을 받았다.하지만 셰크터 씨의 여생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학업에 매진한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까지 수료했다. 이후 보험사에서 근무하며 평범한 삶을 살다 1995년 6&middot;25전쟁에서의 용맹한 활약을 인정받아 미 정부에서 수여하는 공군 수훈십자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기적을 보여준 셰크터 씨도 전립선암은 이기지 못해 지난달 11일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음 불사한 고지 사수 <img alt="420고지 전투에 참여한 로돌포 에르난데스. 지난달 향년 82세로 눈을 감았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4/0107/1389052097692611.jpg"/> 1951년 5월 강원도 원통지역 420고지 전투는 생지옥이었다. 미군의 투입에도 불리한 전세는 역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월등한 전력의 적군에 맞서 한걸음씩 후퇴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그 속에는 갓 성인이 된 로돌포 에르난데스 씨(Rodolfo Hernandez&middot;82)도 포함돼 있었다. 멕시코계 이민자의 아들로 불과 17세에 군에 입대했던 에르난데스 씨는 187공수 연대전투단 G중대 소속 상병으로 한국전쟁에 파병된 상황이었다.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였지만 에르난데스 씨의 용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박격포 포탄과 중화기 총알, 수류탄 파편에 쏟아지는 속에서도 그는 절대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결국 철수 명령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결국 전우들이 모두 떠난 420고지에는 에르난데스 씨만이 홀로 남았고 그는 소총이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그런 에르난데스 씨의 모습은 바닥에 떨어진 동료들의 사기를 돋워 주기에 충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기에 감동한 소대원들이 철수 명령을 뒤로하고 총공격을 감행했고 곧 기적이 일어났다.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고지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한 것. 모두가 기쁨에 얼싸안은 순간이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에르난데스 씨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누구보다 앞장서 적군 6명을 사살한 에르난데스 씨였으나 수류탄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바로 곁에서 수류탄이 터졌고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에르난데스 씨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을 예상하는 순간 또 한 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무려 30일 만에 눈을 뜬 것.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에르난데스 씨는 1952년 4월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무공훈장인 &lsquo;명예훈장&rsquo;을 수여받았다.이후 미국 보훈처에서 근무하던 에르난데스 씨는 1980년 은퇴를 하고도 여전히 한국을 잊지 못하다 2010년 6월 방한했다. 한국전쟁 60주년 행사 참석차 방한한 그의 모습은 &lsquo;노병&rsquo;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때 그 시절 못지않았을 터.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국 땅을 밟았던 에르난데스 씨는 지난달 21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6&middot;25 전쟁 당시 유엔군 측 사망자 및 실종자는 4만 3000여 명, 부상자가 11만 5000여 명이었다. 먼 이국에서 진정한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준 전쟁영웅 2인의 죽음을 추모한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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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최연소 사단장 백인엽 장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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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4 Dec 2013 17:4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참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동시에 논란도 있는 인물이었다. 창군 원로이자 최연소 사단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군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육자라 칭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론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동생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기도 했다. 백인엽 예비역 중장.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며 여러 수식어만큼이나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그의 90년 인생을 되돌아봤다. <img alt="12월 14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백인엽 예비역 중장의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조문을 하고 있다. 뉴시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24/1387874596687520.jpg"/> 본래 백인엽 장군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메이지 대학교 경제학과와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5년 평양에서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경호대장을 맡으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조만식 선생이 소련군으로부터 감금을 당하자 형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함께 38선을 넘었다.남한에서도 군인이 되고자했던 백 장군은 곧장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임관해 2년 뒤 육군 제17연대장에 임명됐다. 평범하게 흘러갈 것만 갔던 그의 군인생활은 1950년 6&middot;25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쟁이 3개월째 지속될 무렵 우리 수도사단은 경북 청송 부근에서 북한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묻고자 사단장 교체를 결정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ldquo;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임명하라&rdquo;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백 장군을 추천했고 그의 나이 27세에 수도사단장에 올랐다. 국군 역사상 최연소 사단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이후 지휘관으로서 백 장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북한군 12사단을 타격해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지역을 사수하는 한편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입돼 수도권 탈환에 앞장섰다. 사실 백 장군 입장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백 장군은 사단장이었으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선 연대장으로 직급이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방장관도 이 부분에 대해 염려스러워하며 본인에게 의사를 물었는데 그는 &ldquo;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떤가. 중대장도 괜찮다&rdquo;라고 답했다고 한다.자신의 명예보다는 조국의 승리만을 생각했던 백 장군은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북한군의 퇴로 차단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전쟁 내내 어떤 상황에서도 용맹함을 잃지 않아 &lsquo;천생 군인&rsquo;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유별나게 엄격하고 융통성 없었던 그의 성격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시간이 흘러 휴전이 선언되면서 백 장군은 새로운 인생을 계획했다. 군인으로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백 장군이 뜬금없이 1958년 현역 장성 신분 최초로 교육 사업에 뛰어든 것.하지만 교육자로서의 백 장군은 결코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다. 경영난을 겪던 성광학원을 인수한 백 장군의 교육 사업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1961년 부정부패 척결사업의 강도 높은 조사에 결국 구속돼 무기징역 및 추징금 7000여만 원까지 선고받은 것. 그러나 백 장군은 불과 10개월 만에 재단으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형 백선엽 장군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1948년 박 대통령이 이른바 여순사건 당시 좌익 혐의로 체포돼 사형이 구형되자 이를 구해준 바 있다.짧은 수감생활 이후 백 장군의 교육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1965년 형과 본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선인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교육과정에 손을 댔다. 덕분에 선인재단에 소속된 학교만 14개에 이르렀으며 국내 최대 사학재단으로 성장했다. 당시 인천시민들 가운데 선인재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백 장군은 두 번째 구속을 당했다. 이번엔 사립학교법, 건축법, 중기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였다. 다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경우에는 어떤 판결을 받을지 몰랐던 그는 엄청난 결심을 한다. 당시 기준으로 1000억 원대에 이르는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 덕분에 백 장군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사실 백 장군의 두 번째 구속은 박정희 정권이 물러나면서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배경이 있었던 그는 교육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무지막지한 경영을 펼쳤다. 일례로 선인학원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시 남구 도화동은 본래 중국 화교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한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이기도 했다. 학교를 지을 터가 필요했던 백 장군은 주민들에게 협상이 아닌 불도저를 들이댔다.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중장비로 밀어버리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 장군은 인천대학교 및 전문대 학생들에게 정장 차림을 의무화하고 교사들을 제멋대로 해고하는 등 납득하지 못할 행동들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그의 &lsquo;기행&rsquo;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된 것이다.하지만 백 장군은 불사조와 다름없었다. 국가에 재단을 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문위원이라는 미명 아래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인천대학교 학생들은 크게 반발했고 해방 이후 학내 분규 최초로 휴교령이 내려지는 심각한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백 장군과 학생들 사이의 싸움은 계속됐고 결국 또 다시 정권이 바뀌고서야 그는 선인재단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1994년의 일이었다.물론 이마저도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선인재단 부정부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1994년 백 장군은 시립대학과 유치원, 초&middot;중&middot;고등학교 14개를 인천시와 인천시교육청에 기증하며 교육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이후 백 장군은 바깥활동을 자제한 채 지내다 지난 12월 14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길을 걸었지만 교육자로서는 여러 뒷말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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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포철 신화 만든 재일교포 공학자 김철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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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7 Dec 2013 09:00: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73년 6월 9일, 온 국민의 시선이 포항제철소 1호기 용광로로 집중됐다. 점화로에 불을 붙인 지 21시간 만에 쇳물이 흘러나왔다. 착공한 지 3년, 한국에 제철소를 세워야 한다는 구체적 구상이 나온 지 8년 만에 제철소 설립의 꿈이 이뤄졌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서 받은 대일보상금으로 지은 제철소다. 가난한 나라가 중공업의 핵심인 제철소를 짓는다니 아무도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제철소 건설에 참여한 이들은 &ldquo;선조들의 피 값으로 짓는 것&rdquo;이라며 &ldquo;실패하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투신한다&rdquo;는 각오로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고 싶어도 기술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엄명을 받은 당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이 도쿄대의 한 연구교수를 급히 찾았다. 바로 재일한국인 금속공학자 김철우 씨였다. 김철우 씨는 포항제철의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1호기 용광로를 설계했다. 직접 발로 뛰어 기술자들도 영입했다. <img alt="공학자 김철우 씨"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7/1387238403684740.jpg"/> 조국과 쇠를 사랑했던 공학자 김철우 씨가 지난 7일, 도쿄에서 87세로 별세했다. 고인이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사)한국테크노마트 관계자는 &ldquo;건강했던 고인이 한 달 전 갑자기 쓰러져 부인과 딸들이 있는 도쿄의 병원에 입원했다&rdquo;며 &ldquo;약 1주일 전부터 의식이 없었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rdquo;고 안타까워했다.김 씨는 1926년 시즈오카의 가난한 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경상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한인 1세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김 씨는 공부에 매진해 도쿄공업대학과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쿄대에 연구교수로 임용됐다. 당시 외국인은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력 하나로 국립대 교수가 되면서 많은 한인에게 희망을 줬다.고인은 지난 2006년 포스코 사보에 기고한 글에서 &ldquo;1964년에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서 처음 조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hellip;&rdquo;라고 적었다. 일본서 나고 자란 그가 가난한 조국의 실상을 보고 기꺼이 자신의 재능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같은 글에서 고인은 청와대에 들어갔던 일화도 언급했다. 철광석 성분 분석 차 강원도의 한 탄광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내리자 청와대의 경제비서가 그를 맞았다고 한다. 남산의 외교구락부로 가서 박태준 사장, 박충훈 상공장관, 윤동석 박사를 만났다. 박 대통령은 베트남 대통령 방한 일정이 겹쳐 만나지 못했다. 기술문제가 제기되자, 그는 교육을 시키면 한국인은 머리가 좋으므로 빨리 익힐 것이라고 말했다.그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중공업 연구실장을 맡아 일본과 국내를 오가며 제철 전문가들을 만나고 GEP(일반기술계획)를 검토했다. 1971년부터는 포스코의 간곡한 요청으로 도쿄대를 휴직하고 건너와 기술담당이사와 270만 톤 계획위원장을 겸임하는 등 제철소 건립을 주도했다.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영광만을 주지 않았다. 1973년 제철소 준공을 한 달 앞두고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6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70년에 북송된 형제들을 만나고 왔다는 혐의였다.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북으로 건너갔지만 북 정권은 그를 황해제철소로 데려갔다. 공정 개량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음에도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 씻을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앞서의 글에서 고인은 &ldquo;반공법, 국가보안법을 모르고 살아온 나의 실수가 그토록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은 분명히 극단적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rdquo;며 &ldquo;나로 인해 졸지에 고생한 고향 친척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떳떳해져야 했다&rdquo;고 담담히 적었다.그는 고문을 동원한 강압 수사로 &lsquo;간첩 혐의&rsquo;를 자백하고 억울한 마음에 구치소에서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포항제철 준공식이 열리던 날에도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1979년 가석방 후 다음해 사면됐으나,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무죄 선고를 받고 39년 만에 간첩 혐의를 벗었다. 1980년 그가 군사 정권의 권유로 영구 귀국할 때 동료들이 한국에서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왜 다시 돌아가느냐며 말리자 그는 &ldquo;나는 철을 사랑하네&rdquo;라고 짤막하게 답했다고 한다.고인은 귀국 후 1989년 포항제철 부사장대우로 정년퇴임했다. 별세 전까지 국내와 아시아지역의 중견&middot;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 기술이전기관을 설립, 기술지원을 해왔다.한편 (사)한국테크노마트 관계자는 고인에 대해 &ldquo;베푸는 것을 좋아했다&rdquo;며 &ldquo;항상 본인보다 남이 잘 되는 것이 먼저였고 이득을 바라고 남을 도와준 적은 없다&rdquo;고 전했다.신상미 프리랜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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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발달장애 아들과 동반자살한 아버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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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1 Dec 2013 09:2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dquo;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rdquo; 연말 분위기로 들뜬 12월, 비극적인 소식 하나가 뒤늦게 전해졌다.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40대 가장의 이야기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지만 모두 &lsquo;부자&rsquo;의 안타까운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던 가장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란 이웃들의 탄식도 흘러나왔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10여 년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다가 결국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따라가 봤다. <img alt="동반자살한 부자가 주말이면 오르던 청룡산. 이웃 주민은 “유난히 사이가 좋은 부자로 보였다”고 전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최준필 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1/1386721565681420.jpg"/> 사랑스런 아내와 딸 하나, 아들 하나.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던 강 아무개 씨(49)에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법무사 직원으로 바쁜 삶을 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면 늘 가족과 함께였다. 하지만 이토록 소소한 행복조차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ldquo;장애가 있습니다.&rdquo;막내아들 강 아무개 군(17)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 씨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조금 느릴 뿐이라 생각했던 아들에게 발달장애 진단이 내려진 것. 강 씨는 순간적으로 절망에 빠졌지만 아빠만 바라보는 아들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좋다는 게 있으면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치료에 최선을 다했고 그저 아들이 평범하게만 살 수 있길 기도했다.하지만 강 씨의 지극정성에도 아들의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내 자폐성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강 군의 증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무언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옷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기 일쑤였고 주변 사람들의 옷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가족들이나 교사, 낯선 사람들에게도 때리고 할퀴고 꼬집고 머리채를 잡는 등의 공격적인 행동을 보여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결국 강 군은 지난 6월 다니던 특수학교마저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그를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가족들의 몫이 됐다. 그러나 몸만 훌쩍 자란 강 군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밥을 먹이고, 화장실을 보내고, 예고 없이 행하는 공격적인 행동과 자해를 막는 일까지 한시도 강 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휴식시간이라곤 강 군이 스스로 지쳐 잠드는 겨우 몇 시간 남짓이었다. 모두가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강 씨는 아들이 답답할까 주말이면 손을 잡고 집 근처 산을 오르는 등 최선을 다했다.그런 강 씨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 이웃주민은 &ldquo;유난히 아들과 사이좋은 아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아들이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걸 보고 아프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빠가 단 한 번도 크게 화를 내지 않더라. 사람들에게 &lsquo;죄송하다&rsquo; &lsquo;미안하다&rsquo;며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누가 봐도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rdquo;고 말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11/1386721565681421.jpg"/> 하지만 강 씨에게 또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가족들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아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10월부터 다시 강 군을 맡아줄 시설을 찾아다녔으나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던 것. 기껏 수소문한 시설도 강 군의 자폐증세가 심하다는 걸 알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가족의 품에 남겨졌던 강 군은 지난달 9일 돌연 자신의 집 안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좀처럼 가만있지 못했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천장을 보고 이불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채였다.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항상 아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아버지 강 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죽은 강 군의 곁에 강 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 A4용지 3~4장 분량의 유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아내와 딸에게 &ldquo;바람 좀 쐬고 오라&rdquo;며 등 떠밀어 내보냈던 강 씨가 자살을 택한 것이었다.아내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유서 내용과 강 군의 목에서 발견한 흔적을 바탕으로 아버지 강 씨가 아들을 목 졸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주변을 수색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비까지 오는 궂은 날씨 탓에 수색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날이 밝은 이튿날 오전 9시 무렵에야 서울 관악구 청룡산을 오르던 등산객의 신고로 나무에 목을 맨 강 씨를 발견했다.마지막 순간에도 아들과의 추억이 담긴 집 근처 산을 찾아 목숨을 끊은 강 씨의 곁에는 집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내용의 유서가 놓여있었다. &ldquo;이 땅에서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rdquo;며 정부의 장애정책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내용과 함께 &ldquo;힘든 아들은 내가 데리고 간다. 아들과 함께 묻어 달라&rdquo;는 부탁도 수차례 반복했다. 평소 아픈 아들을 돌보느라 소홀히 했던 딸과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강 씨와 아들이 늘 오르던 등산로 입구에서 만난 한 이웃주민은 &ldquo;두 사람의 생전 모습이 떠오를 때면 아직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17년을 키운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다는 생각을 누가 감히 하겠느냐. 차라리 본인만 생각했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rdquo;이라며 &ldquo;늘 가족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라 아들의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그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조금만 덜 사랑하지&hellip;. 불쌍한 사람이다&rdquo;라며 안타까워했다.아픈 강 군을 끔찍이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아내에게 &ldquo;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아들을 데리고 가자&rdquo;고 말하던 강 씨. 정말 그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마지막까지 아들의 두 손을 잡은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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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동반자살 노부부 안타까운 사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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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4 Dec 2013 09:51: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kulkin85@ilyo.co.kr | 박정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2011년 개봉한 영화 &lt;그대를 사랑합니다&gt;에서는 70대 노부부가 달동네 허름한 방에서 연탄을 피워 세상과 이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치매에 걸려 힘들어 하는 아내를 본 남편이 &ldquo;내가 떠나면 누가 아내를 돌볼까&rdquo; 하는 생각에 결국 가슴 아픈 선택을 한 것이다. 최근 이 영화와 비슷한 선택을 한 노부부의 사연이 회자되고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서로를 의지하다 &ldquo;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rdquo;며 결국 함께 마지막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이 사연은 영화보다 더 애처롭다. 노부부의 죽음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단한 노년기가 현실적으로 반영되어 있어서다. <img alt="목포시 죽교동의 달동네에 위치한 노부부의 집."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04/1386118262678140.jpg"/> &ldquo;할배, 어디 가시는갑소?&rdquo; 11월 22일 낮 전남 목포시 죽교동의 한 달동네. 동네 골목길을 느릿느릿 걷던 김정택 씨(가명&middot;82)를 보고 이웃주민이 말을 걸었다. 김 씨는 그러나 별다른 반응 없이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축 처진 어깨와 절뚝대는 한쪽 다리가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멀어져가던 김 씨의 뒷모습은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아울러 사라져 가고 있었다.김 씨는 이곳 동네에 6개월 전쯤 이사 온 &lsquo;신입 주민&rsquo;이었다. 이웃주민에게 김 씨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않았다. 그저 동네 통장만이 김 씨의 이사 소식을 알았을 뿐이다. 온통 노인들이 사는 이곳 동네에서 김 씨 역시 한 명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더불어 &lsquo;좀 더 싼 집&rsquo;으로 이사를 온 가난한 노인 중 한 명으로 짐작될 수도 있었다. 목포시에서 대표적으로 낙후된 곳으로 손꼽히는 이 동네는 전세금 700만 원 정도를 주면 방 두 칸의 아담한 집을 구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김 씨의 이전 형편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다. 김 씨는 죽교동으로 이사 오기 전 목포시에서 &lsquo;피난민촌&rsquo;으로 불린 대성동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대성동 일대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지를 조성하면서 피난민촌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곳의 낙후된 주택들은 실향민들이 터를 닦기까지 삶의 고단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여든이 넘는 나이를 먹고 죽교동으로 삶의 터를 옮긴 김 씨도 하루가 고단하긴 마찬가지였다. 김 씨의 부인 신순자 씨(가명&middot;69)는 어느 순간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점점 심해지던 허리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신 씨는 9개월 전 급기야 디스크 수술을 받고야 말았다. 아내를 끔찍이 여기던 김 씨에게 아내의 아픈 모습은 퍽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5남매를 힘겹게 키우느라 없는 형편에 고생만 시킨 것 같아 수술 후 안쓰러운 마음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젊은 시절 김 씨는 5000여 평에 달하는 땅에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김 씨의 소중한 생명줄이었다. 아내는 김 씨와 함께 이곳에서 온 힘을 다해 일을 도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허리를 굽혀가며 자식 같은 농작물을 보살피곤 했다.&ldquo;그때 무리만 하지 않았더라면&hellip;.&rdquo;김 씨의 넋두리는 지나간 세월에 가려져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드넓은 땅은 어디가고 조그만 방에 두 노부부는 그나마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장성한 자식들은 스스로를 건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아픈 아내의 병간호는 오로지 김 씨의 몫이었다. 죽교동으로 이사를 한 이후부터 신 씨는 바깥 출입을 거의 할 수 없었다. 김 씨는 이런 아내를 위해 필요한 것을 인근 구멍가게에서 사다주곤 했다.사실 김 씨의 몸도 성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가 디스크 수술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 역시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몸의 반이 마비되는 큰 후유증을 앓았다. 쉽게 움직이기도, 혼자서 목욕을 하기도 힘이 들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긴 했지만 아픈 아내를 제대로 간병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김 씨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두 노부부의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img alt="김 씨가 쓴 유서. 노부부의 영정 사진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204/1386118262678141.jpg"/> 초겨울 날씨가 엄습했던 11월 20일. 노부부는 옆 동네에 사는 큰아들에게 &ldquo;방이 차갑다&rdquo;며 연탄보일러의 불을 피워달라고 했다. 큰아들은 곧바로 부모의 집으로 와서 보일러를 가동시켰다. 방이 따뜻해지자 아들은 한결 안심이 들어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 다음날에는 &ldquo;방이 아직도 따뜻하냐&rdquo;며 안부 전화를 드리기도 했다. &ldquo;아직도 따뜻하다&rdquo;는 김 씨의 말을 듣고 큰아들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아들이 다녀간 11월 20일. 김 씨는 A4 용지 한 장에 굳은 결심을 쓰기 시작했다.&ldquo;집사람 몸이 점점 나빠져 죽고 싶다고 할 때 내 몸도 좋지 않고 해서 같이 죽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멀다싶어 몇 달 경과를 본 뒤에 생사를 결심하기로 하고 오늘날까지 왔었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좋지 않고 집사람이 눈물바람하면서 같이 죽자 할 때 이제는 너의 엄마의 소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용서해라. 미안하다.&rdquo;김 씨는 꾹꾹 눌러 써내려간 유서를 새하얀 편지 봉투에 담았다. 이윽고 자신과 아내의 영정 사진을 액자에 고이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영정 사진과 유서를 가지런히 놓은 채 거실을 깨끗하게 정돈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김 씨는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11월 23일 오후 3시. 근처에 살던 막내 사위가 김장김치를 들고 노부부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불길한 마음에 닫힌 방문을 억지로 열었다. 노부부는 마치 곤히 자는 모습으로 이불을 반쯤 덮고 누워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연탄 두 장이 들어있는 연탄 화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놀란 사위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연탄가스가 새 나갈까 노부부는 창문도 테이프로 꽁꽁 봉한 상태였다.&ldquo;사람이 죽어 놓으니까 이제야 뭐했냐고 얘기 나오는 거여.&rdquo;마을 통장은 한숨을 길게 쉬며 얘기했다. 기초수급자가 대부분인 이 동네에 김 씨 부부만은 기초수급자에 해당되지 않았다고 한다. 슬하에 3남 2녀, 5남매가 있고 일부 자식들이 경제활동을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노부부를 돌보기에 5남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두 아들은 예전에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을 알 수 없어 장례식에도 오지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연탄보일러를 켜주던 큰아들은 당뇨 등 불치병으로 1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던 어려운 상황이었다.노부부의 수입이라곤 매달 노령연금으로 받는 15만 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픈 몸을 한 노부부가 치료비는커녕 매일 밥 세 끼도 꼬박꼬박 챙겨 먹기에 턱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살아생전 서로를 끔찍이 아꼈다는 노부부의 죽음 뒤에는 병든 아들의 힘없는 넋두리만 남았다.&ldquo;전혀 낌새도 없었고 별 말씀도 없으셨어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픕니다. 못해드린 것이 제일 후회됩니다.&rdquo;목포=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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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국가 위해 청춘 바친 김인원 일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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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6 Nov 2013 09:2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kulkin85@ilyo.co.kr | 박정환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시위대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고 김인원 일경이 지난 15일 끝내 숨졌다. 광주보훈병원에 마련된 고 김인원 일경의 장례식장에는 이성한 경찰청장을 비롯해 전석종 전남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100여 명과 김 일경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 대원들이 찾아와 조문을 이어갔다. 국가를 위해 청춘을 바친 고 김인원 일경의 죽음 앞에 많은 이들은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 김인원 일경의 아버지 김정평 씨는 &ldquo;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rdquo;며 흐느껴 주변을 숙연케 했다. 고 김인원 일경의 숭고한 희생은 남겨진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11월15일 오전 4시 20분쯤. 김인원 일경의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 염증 수치 상승과 혈압 저하로 이미 몇 차례 약물투여 등 치료를 받은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뜨거웠던 심장은 점차 맥박을 잃어가고 있었다. 끝내 심폐소생술이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에 아버지 김정평 씨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향년 37세. 김 일경의 시간은 1996년 20세 그때로 멈춰있었다. <img alt="이성한 경찰청장이 지난 15일 17년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광주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김인원 일경의 장례식장에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6/1385425414674940.jpg"/> 1996년 6월 14일 오후 4시 광주 조선대 정문. 곳곳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득하고 대학생들의 고함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500명 남짓 되는 대학생들은 이날 &lsquo;조선대 총학생회와 북한 김형직 사범대의 자매 결연식&rsquo; 개최를 외치며 정문과 노천극장 주변을 점유하고 있었다.경찰은 시위를 저지하고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전&middot;의경 병력 1800여 명을 투입했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화염병과 돌이 난무하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최전선에 김인원 일경(당시 20세)도 투입되어 있었다. 입대한 지 6개월 된 김 일경은 방패를 들고 땀범벅이 된 채 두려운 마음을 애써 이겨내고 있었다.당시 전&middot;의경들은 매일 이어지는 시위에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그때 후미를 지키던 기동9중대 의경 30여 명이 사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 대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쇠파이프와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전&middot;의경들은 교내에서 정문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lsquo;퍽&rsquo;. 밀려나는 대원들 틈에 있던 김 일경이 갑자기 고꾸라졌다. 시위대가 투척한 화염병에 왼쪽 발목을 맞은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불길에 놀란 김 일경은 불을 끄려 고개를 숙였다. 시위대의 쇠파이프가 뒤통수를 강타한 건 그때였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 일경은 시위대 속에 질질 끌려가 또다시 집단 구타를 당했다.1996년 6월 14일 밤. 김인원 일경의 아버지인 김정평 씨의 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ldquo;아들이 곧 죽을 수도 있다.&rdquo;김정평 씨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광주 조선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은 머리가 삭발된 채 숨을 헐떡거리고 한 곳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ldquo;시위를 막다 저렇게 됐다&rdquo;는 관계자의 말에 김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심한 장출혈과 뇌출혈 증세. 화염병에 맞은 왼쪽 발목은 큰 화상을 입어 엉덩이 살을 이식해야 할 정도였다.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2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7차례나 수술을 시행했지만 의식불명 상태는 여전했다. 김정평 씨는 &ldquo;둘째 아들의 몸이 오래 누워 있으면서 괴사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웠다. 어느 날 갑자기 &lsquo;아버지&rsquo;, &lsquo;어머니&rsquo;를 부르며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rdquo;며 그날의 괴로운 기억에 눈물을 훔쳤다.김정평 씨에게 둘째 아들은 애틋한 아들이었다. &ldquo;아들이 셋 있는데 세 놈 중 가장 온순하고 자랄 때도 여성스러워 가장 정감이 가는 아들이었다&rdquo;고 한다. 김정평 씨는 온순했던 아들이 늠름해진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1996년 1월 8일에 입대한 김인원 일경은 3개월 만에 3박 4일 휴가를 나왔다. 김 일경은 오랜만에 집에서 식사를 하며 아버지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드렸다. 늠름한 아들의 모습에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군 생활에 걱정도 앞섰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아들이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웃어주길 아버지는 가슴 깊이 소망했다. 하지만 1997년 아들은 결국 뇌사 판정을 받고 17년간의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img alt="김인원 일경의 아버지 김정평 씨가 아들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6/1385425414674941.jpg"/> 광주보훈병원 62병동 11호실. 어머니 김복임 씨는 2011년부터 요통과 고혈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아들을 간병하면서 얻은 후유증이었다. 김복임 씨와 김정평 씨는 한시도 아들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김복임 씨가, 대학에서 행정직원으로 근무하던 김정평 씨는 주말에 병실을 들러 아들을 지켰다. 산소공급기를 장착한 탓에 행여나 갑자기 호흡을 멈추지는 않을까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다.혹시나 의식이 돌아오진 않을까 뱀장어, 가물치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고아 먹였다. 바지락, 홍합, 뱀장어를 삶아 쌀가루와 함께 갈아서 코와 위를 연결한 음식섭취용 관을 통해 넣어주는 식이었다. 김정평 씨는 &ldquo;투병기간이 길어졌다고 해도 늘 그 가느다란 호스를 통해서 음식물을 마련해서 넣어줬을 것이고 물수건으로 열을 내려주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그래서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rdquo;라고 말한다. 그 때문인지 김 씨 부부는 한 차례도 간병인을 두지 않았다.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의식불명의 아들을 누가 제 자식처럼 간병해 주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여수 집에서 병원까지 오가는 2시간의 긴 시간도 김 씨 부부에게는 긴 시간이 아니었다.1998년 11월 16일. 김인원 일경은 병상에서 임기 만료로 만기 전역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아버지 김정평 씨는 아들을 생각하며 시를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그 시가 엮어져 2012년 7월 시집 &lt;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gt;가 출간됐다.&ldquo;질풍노도로 달려든 광풍과 천둥 번개 뇌성벽력으로 나의 살점들이 찢겨져 뒹굴던 1996년 6월 14일. 내 눈물강은 홍수로 범람했고 하늘도 무정하여 땅을 치던 그 눈물강이 시방 서서히 메말라 가고 있다.&rdquo; -김정평 시집 &lt;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gt; 전역 그 후&middot;13 중 김정평 씨는 이 시집을 전남경찰청장에게 보냈다. &ldquo;아들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에 충실하다 사고를 당한 만큼 국가가 훈장을 안겨 줬으면 좋겠다&rdquo;는 생각에서다.이후 전남경찰청은 2012년 10월 김 씨를 위문하고 십시일반 모은 성금을 전달했다. 정부는 지난 5월 김인원 일경에게 옥조근정 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지난 경찰의 날에는 그를 명예경찰로 임용하기도 했다. 김정평 씨는 가슴 속 깊이 위로와 감사를 느끼면서도 한켠에서는 허망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아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시위대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컸다.김인원 일경의 청춘은 그렇게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ldquo;술 한 잔 먹고 거나하게 취해보지도 못하고 연애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아들의 지나간 청춘&rdquo;이 가장 애통하다고 했다. 아들의 꿈에 대해서 충분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아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20세의 꽃다운 나이의 아들은 어느덧 37세가 됐고, 중년의 아버지는 머리가 희끗해졌다.지난 16일 고 김인원 씨는 유가족의 오열 속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투병 기간만 17년 5개월. 김정평 씨는 &ldquo;부모와 자식 간의 질긴 인연을 끊는 데 1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것&rdquo;이라며 &ldquo;17년을 함께 있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rdquo;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추운 겨울 아들을 떠나보낸 빈자리엔 김정평 씨의 간절한 바람만이 남았다. &ldquo;우리 아이 같은 사고가 또 발생될까 싶어 가슴 졸이며 산 시간들이었다. 아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희생됐으며, 이 같은 불행은 내 아들에게서 끝나야 한다.&rdquo;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lsquo;죽을 고비&rsquo; 넘기는 전&middot;의경 많다&ldquo;아이들 방패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rdquo;전&middot;의경이 각종 시위진압에 투입되면서 한때 희생자가 속출했었다. 전경의 경우 지난 42년 동안 시위진압 등으로 322명이 순직했다. 전경은 지난 9월 25일 마지막 기수가 모두 제대하면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위 진압 중 순직한 사건으로는 1989년 5월 발생한 부산 동의대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위 학생들은 사복경찰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화염병을 던졌고, 큰 화재로 번지는 바람에 전경 3명 등 경찰관 7명이 사망한 바 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6/1385425414674942.jpg"/>  <img alt="2008년 쇠고기 수입 재협상 요구 시위(왼쪽)와 2011년 한미FTA 반대 시위.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일요신문 DB"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6/1385425414674943.jpg"/> 고 김인원 씨처럼 의경의 경우는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공무 중 부상(찰과상 등 가벼운 부상 제외)으로 처리된 경우만 249명에 달한다. 고 김인원 씨와 비슷하게 공무 중 부상으로 전역 후에도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의경은 현재 전국적으로 2명이 더 있다고 한다. 두 의경은 음주운전 차량을 단속하다 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당했다고 전해진다.경찰청에 따르면 매해 100명 가까운 경찰관이 음주운전 단속 중 다치거나 숨진다고 한다. 그만큼 최근에는 시위보다는 음주운전에 따른 사고가 더 많다는 것. 경찰병원 관계자 역시 &ldquo;현재 시위로 인해 부상을 당해 입원해 있는 환자는 없다&rdquo;라고 전했다.하지만 시위로 인한 전&middot;의경들의 부상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middot;의경부모모임 강정숙 회장은 &ldquo;시위를 막는 전&middot;의경들의 부상이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최근에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특히 심각하다&rdquo;라고 전했다. 이전에는 죽창과 투석, 화염병 등으로 큰 물리적 부상을 당했다면 최근에는 심리적 부상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2006년 농민집회 당시 죽창에 허벅지와 옆구리를 관통당한 한 의경은 &ldquo;치료기간만 1년이 넘게 걸렸다. 공무수행 중 부상으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얻긴 했지만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남아있다. 이렇게 큰 부상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너트와 돌 때문에 눈에 부상을 입거나 실명 위험까지 겪는 동료 대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rdquo;라고 전했다.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의 기억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의경들도 상당했다. 강 회장은 &ldquo;2008년 촛불집회 당시 시위를 막던 한 의경은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폭행을 당해 전역을 한 현재까지도 그 당시 트라우마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rdquo;이라며 &ldquo;국가유공자 자격을 얻고 싶어도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괜히 정신병원에 보냈다가 상태만 더 악화될까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rdquo;라고 전했다.결국 이러한 전&middot;의경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는 전&middot;의경들을 보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강 회장은 &ldquo;폭력 경찰이라고 보기보다는 전&middot;의경들도 한 가족의 아들이자 소중한 청춘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rdquo;며 &ldquo;방패 안에서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전&middot;의경을 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rdquo;라고 주장했다.한편 전&middot;의경뿐만 아니라 공무수행 도중 부상을 입어 현재 전국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1746명에 달한다. 이들은 6.25, 4.19, 월남전 고엽제 등으로 부상을 당해 지금까지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다. 국내에서 공무수행을 하다 사고를 당해 입원한 공무원들도 388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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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인천 기러기 아빠]]></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6714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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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0 Nov 2013 09:27: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한 아버지가 무거운 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4년간 &lsquo;기러기 아빠&rsquo;로 생활하던 이 아무개 씨(53)는 최근 1년 동안 전기기사를 하며 미국에 있는 부인과 아들 2명을 뒷바라지 했다. 그러나 최근 업계 불황 탓에 이 씨의 일감은 턱없이 부족했고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lsquo;용돈&rsquo; 정도만 송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씨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결국 이 씨는 가족과 함께 살았던 인천 계양구 작전동의 18평 남짓한 빌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씨는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에서 &ldquo;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참으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rdquo;라고 적었다. 이 씨의 죽음은 이 시대 가장들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img alt="미국에 있는 유가족들은 항공비를 못구해 이 씨의 장례식마저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출처=YTN 캡처"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0/1384907228671400.jpg"/> 지난 8일 저녁 9시 43분 인천 계양구 작전동의 한 빌라. 같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 씨의 40년 지기 친구 김 아무개 씨(54)는 이 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이 씨의 빌라로 향했다. 20일 전 이 씨는 김 씨와 통화를 하며 &ldquo;죽고 싶다&rdquo;는 말을 했던 터라 김 씨는 신호가 가지 않는 이 씨의 휴대전화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이 씨의 빌라에 도착한 친구 김 씨는 작은 방이 불이 켜진 채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 씨는 방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인천 계양경찰서 형사팀 관계자는 &ldquo;문이 잘 열리지 않아 발로 밀고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문에 테이프가 발라져 있는 상태였다&rdquo;고 말했다.이 씨의 사인은 가스중독이었다. 이 씨는 작은방의 창과 문틈을 테이프로 막고 번개탄을 피웠다. 당시 이 씨는 연소하다 만 번개탄 옆에 앉아서 숙인 자세로 발견됐다. 무엇이 이 씨로 하여금 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을까.숨진 이 씨의 부인과 아들들은 2009년 유학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부인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 2명과 함께 자신의 이모가 거주하는 미국 유타주로 떠날 계획을 준비했다. 당초 이 씨의 부인은 이 씨도 함께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씨는 자신은 한국에 남겠다며 부인과 아들만 미국으로 떠나보냈다.이후 홀로 남은 이 씨는 &lsquo;기러기 아빠&rsquo; 생활을 하며 미국으로 생활비를 송금했다. 이 씨는 최근 1년간은 전기기사를 하며 지속적으로 미국에 있는 가족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일감이 많지 않아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고 아들의 용돈 정도만 근근이 송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아들들의 유학비용과 미국 생활비 대부분은 이 씨의 부인이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이 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4년 동안 부인과 아들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에 10남매인 이 씨의 형제들은 지난 8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이 씨의 미국 항공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4년 만에 드디어 이 씨가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씨는 이마저도 직장문제로 포기해야만 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20/1384907228671401.jpg"/>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의 재회가 물거품이 되면서 이 씨는 점점 지쳐갔다. 이 씨는 자신의 처지를 오랜 친구인 김 씨에게 털어놓으며 힘들어했다고 한다. 결국 이 씨는 부인과 아들이 함께 살았던 집에서 4년간의 외롭고 힘든 &lsquo;기러기 아빠&rsquo;로서의 삶을 마감했다.이 씨의 유서는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집안 내 탁자 위에서 발견됐다.&ldquo;가족들 OO, △△,(아들 이름) OO엄마 그리고 형제분들한테 죄송합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OO, △△ 끝까지 책임 못 지어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들께 죄송합니다.&rdquo;이 씨는 평소에 가족이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서에 오롯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씨는 생을 마감하고서도 그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하지 못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이 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계양서 형사팀 관계자는 &ldquo;유족이 미국에 있는 부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가 겹쳐 이 씨의 부인과 아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상황으로 알고 있다&rdquo;고 말했다. 결국 이 씨의 발인은 인천의 한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지인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이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지만 가정 불화 같은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러기 아빠들은 가족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lsquo;기러기 아빠 희망을 향해 날다&rsquo;란 주제의 간담회에 참가했던 채정호 가톨릭대 의과대학 교수는 &ldquo;기러기아빠들이 각종 문제점 중 정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한다. 남성은 강력한 스트레스에 비해 반복적으로 미약하게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정서적 표현보다 충동적 행동표현이 많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네트워크 중심의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하다&rdquo;고 설명했다.한국건강가정진흥원 박경은 사업기획팀 팀장은 &ldquo;현재 기러기 가족과 관련된 건강가정지원센터의 프로그램은 매우 소수이며 2011년도에 준비한 프로그램도 원래 취지로 운영되지 못한 상황&rdquo;이라고 지적하며 &ldquo;기러기아빠가 건강가정지원센터와 같은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전예방적인 관점에서 기러기가족에 미리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rdquo;고 진단했다.경찰은 &ldquo;이 씨에게서 우울증 전력이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씨가 신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 중이다&rdquo;라고 말했다.해마다 2만 2000가구의 기러기 가족이 생겨나고 있다. 이 씨의 허망한 죽음으로 기러기 아빠의 어두운 단면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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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종묘공원 ‘박카스 할머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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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3 Nov 2013 09:32: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쌀쌀한 11월 가을 날씨에도 종로 일대 공원은 수많은 노인들로 북적였다.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는 전날 비가 내린 탓에 환경미화원들이 낙엽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탑골공원 옆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종묘공원 중앙 광장에서는 &lsquo;어버이연합회&rsquo;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종묘공원 입구에는 &lsquo;종묘공원 일대 호객행위 집중단속&rsquo;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lsquo;호객행위&rsquo;에는 종묘공원 일대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도 단속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뜻한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박카스 장사를 하던 김 아무개 할머니(70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lsquo;반찬값이라도 벌어야지&rsquo;라며 종묘공원을 배회하던 김 할머니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떨어져 지내던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img alt="종묘공원에서 일명 ‘박카스 아줌마’가 노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으로 김 할머니와는 무관하다. 구윤성 인턴기자"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13/1384302772667930.jpg"/> 종묘공원 밖 화단을 따라 늘어선 선술집 근처에는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을 찾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자양강장제를 팔며 성매매를 유도하는 일명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들이다.원래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종로 3가에 위치한 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의 &lsquo;탑골공원 성역화 사업&rsquo; 이후 탑골공원은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가 잘 찾지 않는 장소가 됐다. 서울시의 &lsquo;탑골공원 성역화 사업&rsquo;은 공원 내 음식물 반입과 돗자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노인들과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들은 종묘공원으로 밀려나게 됐다.종묘공원으로 몰려든 노인들과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의 접촉은 의외로 대범하게 이루어졌다. 단골이 있는 할머니들은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면 자신이 깔고 앉아있던 돗자리를 선뜻 내어주며 &ldquo;사장님, 여기 앉아&rdquo;라고 말을 건넸다.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아는 얼굴이 보이면 박카스를 주며 어깨나 팔을 한 번씩 만지고 지나갔다. 일종의 &lsquo;신호&rsquo;였다.기자가 종묘공원 일대의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한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일행 중 한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러자 곧 옆에서 &ldquo;여기서 이러지 말고 둘이 저기 가서 연애해&rdquo;라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잔을 들은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할머니는 &ldquo;나 맛나는 것 사준다고 하네&rdquo;라는 새침한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이들 할머니가 말하는 &lsquo;연애&rsquo;란 성매매를 뜻한다.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가 1회 성매매 대가로 받는 돈은 2000원에서 5만 원. 멀리 온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면 10만 원도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 할머니가 하루 버는 돈은 2만 원 남짓. 일행 중 한 명이었던 강 아무개 할머니는 &ldquo;지하철역에 있는 젊은 아줌마들이 잘 벌지 우리는 공칠 때도 많다&rdquo;고 볼멘소리를 했다.종묘공원 일대 할머니 대부분은 생활고 때문에 박카스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김 할머니를 기억하는 최 아무개 할아버지는 &ldquo;이곳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날 안 보이면 그냥 죽었으려니 한다&rdquo;며 &ldquo;(김 할머니가) 한참 안보였는데 얼마 후 암으로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rdquo;고 말했다.김 할머니는 4~5년 전쯤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70줄에 들어선 김 할머니는 다른 50~60대 할머니들에 비해 벌이가 좋지 못했다. 남편이 있었지만 어려운 생활 탓에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단다. 앞서의 최 할아버지는 &ldquo;그 사람(김 할머니)한테는 1000원도 큰돈이었다. 반찬값이라도 벌어야지 하더니 1000원으로 콩나물 한 봉지씩 사갔었다&rdquo;고 기억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13/1384302772667931.jpg"/> 김 할머니의 남편이 나타난 것은 김 할머니가 암 진단을 받고 나서였다. 앞서의 강 아무개 할머니는 &ldquo;김 할머니가 한참 안보였다. 나중에 아들이라는 사람한테 김 할머니가 부천 인근 병원에서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아들이 있으니까 기초생활수급비도 못 받았나보더라&rdquo;고 말했다. 당시 김 할머니의 남편은 김 할머니가 종묘공원 근처에서 박카스 장사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김 할머니를 기억하는 유 아무개 할머니는 &ldquo;김 할머니가 생활이 어렵다 보니 빌린 돈이 200만 원이 넘었다. 김 할머니가 입원한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돈 받으러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편이 이자라도 갚겠다면서 몇 십만 원 주더란다. 그제야 남편도 김 할머니가 어떻게 산지 안 거다&rdquo;라고 털어놨다. 결국 김 할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서야 남편과 아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대부분의 &lsquo;박카스 아줌마&rsquo;들이 생활고로 성매매에 내몰리지만 김 할머니처럼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자격을 얻지 못하는 노인도 상당히 많다. 또 노인 여성의 경우 복지서비스 기관에 대한 정보에 어둡고, 노인 남성에 비해 학력과 체력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도 어렵다. 생의 사각지대로 몰린 할머니들은 필사적으로 성매매에 매달린다.&lsquo;박카스 아줌마&rsquo; 실태를 연구한 이호선 서울 벤처대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는 &ldquo;이미 집창촌 형태의 성매매가 이루어졌던 우리나라에서 노인 성매매가 나타난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rdquo;라며 &ldquo;젊은 시절 성매매와 관계없는 사람이 생활고로 인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lsquo;생계형 성매매&rsquo;라는 것이 기존 성매매와 다른 점이다&rdquo;고 말했다.한국노인상담센터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초반 200~300명 정도로 추산되던 노인 성매매 인구는 현재 400명 가까이 급격히 늘어났다.이호선 교수는 &ldquo;노인 여성은 일반 성매매 종사자와 달리 성병검사를 거의 하지 않아 성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노년에 들어 성매매를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삶의 지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심리적 취약함도 높다&rdquo;며 &ldquo;이것은 노인복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다. 노인들의 복지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과 노인들을 위한 문화 콘텐츠 개발이 요구된다&rdquo;고 지적했다.종묘광장관리소 김진수 단속반장은 &ldquo;단속 위주로 대응하다 보면 성매매가 음지로 더욱 숨어들 뿐&rdquo;이라며 &ldquo;노인 성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건전한 성문화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프로그램 도입이 시급하다&rdquo;고 말했다.박카스 할머니 김 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말해주는 씁쓸한 상징이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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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아들 손에 죽은 가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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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06 Nov 2013 08:4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존속살인 사건은 다른 범죄에 비해 드물게 발생하는 편이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08년 44건의 존속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매년 10여 건씩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존속살인 건수는 무려 195건으로 폭등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전체 살인사건 중 5%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다.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4~5배가 넘는 수준이다. 올해 역시 거의 매달 존속살인 사건이 보도되고 있는 실정으로 지난 19일에도 아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한 아버지의 죽음이 알려졌다. 존속살인의 대부분은 돈 때문에 벌어지는 참극이다. 때문에 살인범에게는 &lsquo;금수만도 못한 놈&rsquo;이란 비난이 따르지만 이번 사건에서만큼은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에 많은 이들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106/1383695286664320.jpg"/> 혹자는 말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이다. 하지만 조대성 씨(가명&middot;62)의 일생은 그야말로 평범했다. 학업을 마친 뒤 누구나 그렇듯 일자리를 구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나이가 들자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했다. 본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자란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들과 딸을 차례로 낳아 그럭저럭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이웃사람들에게도 조 씨는 그저 동네 아저씨였을 뿐 크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 씨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밖에서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현관문만 열고 들어오면 가족들을 벌벌 떨게 하는 폭력가장이었던 것이다.어느 순간부터 조 씨는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 곳이 없자 눈앞에 보이는 아내를 상대로 분풀이를 했다. 폭언으로 시작된 분풀이는 시간이 갈수록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됐다. 하루는 조 씨에게 맞아 아내의 치아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렸던 아이들은 방구석에서 울음을 터뜨릴 뿐 작은 몸집으로 아버지를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이런 조 씨의 폭력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퍼질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진 아이들. 성인이 되자 자연스레 아버지로부터의 탈출을 꿈꿨다.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우선 자신들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혹 부모만 남으면 서로 의지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녀들의 독립 이후에도 조 씨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 급기야 지난 9월엔 부부싸움 끝에 아내가 집을 나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 씨를 피해 집을 나온 아내는 딸을 찾아갔고 둘의 동거는 한 달이나 지속됐다.상황을 지켜보던 조 씨의 아들(32)은 어머니가 불쌍한 마음에 직접 중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지난 19일 광주 서구 광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고 있던 아버지 조 씨를 찾아간 아들은 부모의 화해를 위해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조 씨는 아들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끝내 고성이 오갔고 아들의 뺨까지 후려친 조 씨.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었던 아들은 조 씨를 밀쳐 넘어뜨려버렸다. 성인이 된 아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힘없이 쓰러진 조 씨는 실신까지 했고 순간 이성을 잃은 아들은 아버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아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조 씨의 목숨은 끊어진 뒤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아들은 일단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담았다. 무게 때문에 쉽게 이동할 수 없어 친구에게 전활 걸어 &ldquo;버려야 할 헌책이 있다&rdquo;며 차를 태워 달라 부탁했다. 조 씨의 시신은 인근 야산에 버려져 낙엽으로 뒤덮였다.광주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아들도 정상적으로 출근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 친척들로부터 조 씨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고야 실종신고를 했을 뿐이었다.이처럼 겉으로는 멀쩡하게 지내는 듯 보였던 아들은 사실 밤만 되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매일 밤 조 씨가 꿈에 나타나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 자식 손에 죽은 게 억울했던 것인지 아니면 하루 빨리 자수해 아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아들은 범행 일주일이 되던 날 광주 서부경찰서를 찾아가 &ldquo;아버지를 죽여 시신을 유기했다&rdquo;며 자수를 선택했다. 아들은 &ldquo;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아버지 생각이 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rdquo;며 &ldquo;무섭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rdquo;는 말을 되풀이했다. 경찰은 아들의 증언을 토대로 여행 가방 속에서 부패된 조 씨의 시신을 찾아냈고 이 소식은 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조 씨의 사망소식도 충격이었지만 아들이자 오빠가 살인범이란 사실에 더 큰 절망감을 느낀 가족들. 이렇게 끝까지 조 씨는 가족들에게 비극적인 존재가 돼버렸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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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명예교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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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30 Oct 2013 09:2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ilyohk@ilyo.co.kr | 배해경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squo;한국학의 거장&rsquo;이라 불리던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22일 타계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21일, 그날 오후를 오롯이 &lsquo;아흔 즈음에&rsquo;라는 제목의 글을 퇴고하는 데 썼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며 살았던 김 교수는 평생 70여 권의 책과 한국학, 민속학 연구의 족적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저서인 &lt;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gt;에서 김 교수는 &ldquo;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명료하게 정신 및 영혼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여행 목적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rdquo;표현했다. 고인은 자신의 바람대로 밝음과 환함으로 끝을 맞이했을까. <img alt="김열규 교수는 혈액암 투병생활을 하던 중에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만큼은 어디서 기운이 펄펄 나는 건지 청춘이 돌아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30/1383092894660590.jpg"/> 국문학과 민속학 분야의 권위자로 일컬어지는 김열규 교수는 한때 &lsquo;약골&rsquo; &lsquo;병골&rsquo;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학창시절 김 교수는 워낙 병약한 체질 탓에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어울려 노는 것조차 어려웠다. 김 교수는 그때를 &lsquo;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던 시절&rsquo;로 표현했다.어릴 적 김 교수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lsquo;책벌레&rsquo;가 그것이었다. 학교조회나 체조시간 때면 대신 책을 읽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주류도매업 사업을 했던 아버지 덕에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생전 김 교수는 &ldquo;병약한 시절이 없었더라면 제 자신의 오늘날 인생이란 없었을 것&rdquo;이라고 그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lsquo;책벌레&rsquo; 김 교수는 1963년 &lsquo;김정반&rsquo;이라는 필명으로 &lt;조선일보&gt; 신춘문예에 평론 &lsquo;현대시의 언어적 미망&rsquo;을 출품해 당선되면서 데뷔하게 된다. 김 교수는 자신이 글을 쓰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lsquo;죽음의 글&rsquo;이었다고 했다. &lsquo;죽음의 글&rsquo;은 경남 서부에 존재하는 &lsquo;언문 제문&rsquo;이라는 풍속을 뜻한다. 이는 시집간 딸들이 친정 집 초상에 와서 &lsquo;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렇게 사시다 돌아가셨다&rsquo;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 와서 제문을 읽는 풍속이다.김 교수는 &lsquo;고성의 여자 문필가&rsquo;로 일컬어지기도 했다는 어머니의 &lsquo;언문 제문&rsquo;을 &ldquo;슬픔, 고통, 회한을 풀어나가던 죽음의 글이 드디어는 달램의 웅얼거림으로 끝맺곤 했다&rdquo;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김 교수가 2002년 &lt;동아일보&gt;에 1년간 연재한 &lsquo;웃음의 인생학&rsquo;이라는 칼럼에는 &lsquo;죽음&rsquo;과 &lsquo;웃음&rsquo;의 코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ldquo;하고많은 사람 죽고는 저승 갔지. 한데 돌아오는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았던가? 그 세계가 얼마나 좋으면 다들 안 돌아오겠나&rdquo;라는 농을 소개하며 &ldquo;죽음을 웃음으로 대하는 마음의 여유면 연옥 아니라 지옥에 가서도 천당을 누릴 수 있을 것&rdquo;이라 한 것은 김 교수가 생각하는 &lsquo;죽음론&rsquo;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예다.김 교수의 어머니가 김 교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면 평생을 연구에 매진한 민속학,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할머니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던 김 교수는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민속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해 전국 팔도와 해외를 누비고 다니며 만난 각 지역의 사람들과 풍습,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도 민속학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그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집필했다. 회갑을 한 해 앞둔 1991년, 김 교수는 30년간 몸담았던 대학 강단을 뒤로하고 아내 정상옥 씨(76)와 귀향했다. 그 뒤로 고인은 70권 가까이 책을 썼다. 귀향기인 &lt;빈손으로 돌아와도 좋다&gt;, 욕의 풍속사와 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한 &lt;욕:그 카타르시스의 미학&gt;, 사라져가는 우리네 풍경과 정서를 담은 &lt;이젠 없는 것들&gt;,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lsquo;올해의 청소년 도서&rsquo;로 꼽은 &lt;독서&gt;는 고인이 경남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쓴 책들이다. <img alt="김열규 교수는 고향 경남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썼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30/1383092894660591.jpg"/> 고인과 함께 선뜻 귀향을 따라준 부인 정 씨는 &lt;한국일보&gt; 신춘문예 출신의 수필가다. 김 교수가 부인 정 씨를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애틋했다고 한다. 오하룡 도서출판 경남 대표는 &ldquo;김 교수의 부인께서 시산문집을 준비 중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으셨다&rdquo;며 &ldquo;김 교수는 혈액암으로 투병을 할 당시에도 일주일에 두 번, 부인의 글을 일일이 다 읽어보셨다&rdquo;며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했다.고향으로 돌아간 김 교수는 주민들을 위해 매달 문화강좌를 열었다. 강의는 문학과 건축, 농사법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김 교수와 함께 20여 년간 고향에서 문학 활동을 한 정해룡 시인은 &ldquo;고인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고 난 후 고성 땅에 그야말로 &lsquo;문화의 기적&rsquo;이 일었다. &lsquo;고성문화사랑&rsquo;을 시발점으로 각종 문화단체가 태동했다&rdquo;고 평가했다.정해룡 시인은 숨을 거둔 김 교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지인이다. 정 시인은 김 교수를 &lsquo;투병 중에도 생에 대한 활기가 넘쳤던, 니체와 괴테와 릴케를 사랑했던 분&rsquo;으로 기억했다. 정 시인은 &ldquo;혈액암 완치판정을 받고 6번 중 2번의 항암치료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날(사망하기 하루 전)도 함께 병원에 들렀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항암치료를 다 마치면 같이 책을 한 권 공동으로 집필하자는 말씀도 하셨다&rdquo;고 말했다.사망하기 하루 전인 21일 김 교수는 아픈 아내를 대신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하지만 22일 아침 여느 때처럼 정 시인이 김 교수의 집을 찾았을 때 김 교수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정 시인은 &ldquo;집안 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 얘길 들어보니 21일 점심을 먹은 후부터 계속 집필에 몰두하셨다고 하더라. 아침에 방을 돌아보니 A4용지에 초고가 휘갈겨져 있었다. 혹시나 컴퓨터로 작업을 하셨나 싶어 PC를 켜보니 전날 A4용지 71장 분량의 초고 퇴고 작업을 하셨더라. 나도 젊지는 않지만 A4용지로 10매 탈고하기도 힘들다. 안정을 취하셔야 했는데&hellip;&rdquo;라며 말을 줄였다.삼천포의 한 이비인후과에서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갔던 김 교수는 10월 22일 아침 생을 마쳤다. 김 교수는 암 판정 이후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을 가장 답답해했다고 한다. 매일 새벽 5시 반쯤이면 책상 앞에 앉았다는 김 교수는 생의 마지막까지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그는 한 인터뷰에서 &lsquo;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rsquo;라는 질문에 &ldquo;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연구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그 덕에 책을 자그마치 70권도 넘게 썼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rdquo;라고 말했다. 평생의 좌우명이 &lsquo;오직 일하라&rsquo;였다는 김 교수는 이제 평생의 과업이었던 글을 놓고 영면에 들었다. 김 교수의 장례미사는 지난 25일 서강대 성당에서 이루어졌다.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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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47년 문화선교 ‘진짜 한국인’ 임인덕 신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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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3 Oct 2013 09:0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inwg08@ilyo.co.kr | 민웅기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기자가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자부하던 때가 있었다. 비디오 가게들을 전전하며 거장들의 오래된 흑백영화들을 찾아다녔다.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명작을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함을 느꼈다.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 등이 그 당시 만난 거장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영화를 비디오로 볼 때마다 보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lsquo;베네딕도 미디어&rsquo;.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아 영화를 구하기 힘든 시절, 영화광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제작사였다. 잊고 지내던 이 이름을 얼마 전 다시 볼 수 있었다. 어느 독일인 신부의 부고 기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1966년부터 한국에서 47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세바스티안 신부, &lsquo;한국인&rsquo; 임인덕의 삶과 죽음을 리플레이 해봤다. <img alt="임인덕 신부는 한국에서 47년간 훌륭한 책과 영화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88657180.jpg"/> 1935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Heinrich Sebastian Rhotler) 신부는 196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자청해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그가 원래 가려던 곳은 아프리카였다. 그러나 수련기에 만났던 요셉 쳉글라인 신부가 영향을 줬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수용소에 억류돼 있다가 가까스로 귀환한 쳉글라인 신부는 &ldquo;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하다&rdquo;면서도 한국인들이 가진 마음씨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그렇게 1965년 9월 경북 칠곡군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에 파견된 그는 &lsquo;임인덕&rsquo;이라는 한국이름을 지었다. 나무의 의미가 있는 독일 본명을 따라 성은 수풀 림(林)으로 하고, 한국인 정서에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에서 &lsquo;인&rsquo;과 &lsquo;덕&rsquo;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임인덕 신부는 경북 성주 본당과 점촌 본당에서 주임으로 10개월간 사목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출판,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려 했다. 문화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친 베네딕도 선교회에서도 임 신부를 적극 지원했다. <img alt="1966년 한국 왜관에 도착한 임인덕 신부(오른쪽 두번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88657181.jpg"/> 1972년부터 임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산하 &lsquo;분도출판사&rsquo;의 사장을 맡게 됐다. 군부 정권 억압이 심하던 시절, 그는 가톨릭 서적뿐만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출간하며 한국사회에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lt;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gt;와 &lt;몽실언니&gt;, 이해인 수녀의 시집 &lt;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gt;, 쉘 실버스타인의 &lt;아낌없는 나무&gt; 등을 출판했다. 또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lt;해방신학&gt;, 장학근의 &lt;현실에 도전하는 성서&gt;, 헬더 카마라 대주교의 &lt;정의에 목마른 소리&gt;, 김지하의 &lt;검은 산 하얀 방&gt; 등도 출간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1970~1980년대 당시 군부 정권의 미움을 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정보기관의 담당 형사가 붙는 등 감시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ldquo;전화 도청을 피하기 위해 독일인 신부끼리 라틴어로 통화했다&rdquo;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임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럼에도 그가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1982년 분도출판사에서는 사진작가 최민식 씨를 지원해 빈민층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펴냈다. 그러자 당시 문화공보부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담당자는 임 신부에게 &ldquo;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왔다. 많이 잘라내든 불태우든 해야겠다&rdquo;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임 신부는 &ldquo;그렇죠? 좀 어둡게 나왔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인쇄를 할 참이었습니다&rdquo;라고 웃으며 응수했다고 한다. 결국 최민식의 사진집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해 외국에서 판매될 수밖에 없었다. 임 신부는 1993년 분도출판사의 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400여 권의 책을 펴내 한국 출판계에 많은 기여를 했다. <img alt="보좌신부로 처음 부임한 성주 본당에서 젊은이들과 야유회를 하는 모습."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88657182.jpg"/> 임 신부는 출판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평소 신학이 가르칠 수 없는 신의 섭리와 영성, 그리고 정의와 자유의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임 신부는 &lt;사계절의 사나이&gt;, &lt;무방비도시&gt;, &lt;나사렛 예수&gt; 등 16㎜ 필름을 한국어로 더빙해 직접 영사기를 들고 전국 본당과 대학가에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상영을 했다.1994년에는 &lsquo;베네딕도 미디어&rsquo;를 담당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유럽 거장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 출시하는데 앞장섰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lt;솔라리스&gt;와 &lt;잠입자&gt;,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lt;십계&gt; 시리즈, 잉마르 베리만의 &lt;제7의 봉인&gt; &lt;산딸기&gt; 등이 모두 베네딕도 미디어를 통해 한국에 처음 출시된 작품들이다.그의 영화에 대한 신념은 지난 2005년 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에서 공로패를 받았을 때 말한 소감에서 잘 나타난다. <img alt="출판과 시청각 교육 등을 담당할 당시 그의 집무실 풍경."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23/1382486588657183.jpg"/> &ldquo;종교 영화가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는 인간의 품위, 삶과 죽음, 구원, 올바른 가치관, 양심, 평화, 인권 등의 메시지와 영성을 충분히 발전하게 해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최상의 영화는 그저 암시만 줄 뿐 정곡을 찌르되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주의 영화와 예술영화는 신앙이라든지 신을 주제로 삼지 않고도 종교적 체험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rdquo;&lsquo;금강산 내산전도&rsquo; 등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이 담긴 화첩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임 신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금강산 여행 도중 반해 구입한 이후 화첩은 그동안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 신부의 설득 끝에 2005년 겸재 정선의 화첩은 한국으로 반환됐다. 현재 화첩은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다.31세의 나이로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임 신부는 2년 전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위해 45년 만에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 몸 상태가 호전되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돌아오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13일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지병으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임인덕의 장례미사는 지난 16일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봉헌됐다.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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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부산 1세대 판화가 이용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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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6 Oct 2013 09:4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inwg08@ilyo.co.kr | 민웅기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판화 중에서도 목판화는 나무판에 선을 새기기 때문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또한 종이를 대고 인쇄를 했을 때 찍혀나고 안 찍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목판화 장르의 성격과 닮은 작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부산 1세대 원로 판화가인 이용길 화백이다. 이 화백은 평생 부산을 지키며 강직하고 끈질긴 집념 하나로 부산 지역 미술 사료를 모으고 기록했다. 그런 그가 지난 6일 지병으로 인해 부산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75세.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새기고 떠났을까. <img alt="부산 1세대 판화가로 평생 지역 미술사 연구와 우리말 사랑에 앞장선 이용길 화백이 지난 6일 지병으로 부산대병원에서 별세했다. 사진제공=국제신문"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6/1381884483652990.jpg"/> 1938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인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넘어온 이용길 화백은 좌우가 나뉘어 싸우던 혼란의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인 1948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이 화백은 제1회 부산미술전에 가게 됐다. 당시 부산미술전은 국가에서 개최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보다도 1년 먼저 열린 한국 최초의 미술전람회였다. 선과 색의 화려함에 매료된 이 화백은 그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부산상고에서 목판화를 시작한 그는 부산교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부산 동성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교사직을 하면서도 이 화백은 화가로서 판화 작업을 이어나갔다. 부산 1세대 판화가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는 부산 하야리아 미군 부대의 요청으로 이례적으로 부대 내에 작업실까지 제공받아 작품 활동을 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그러나 이 화백은 1990년대 초 작품 활동의 중반기라고 부를 수 있는 50대 후반부터 작품 수를 많이 줄였다. 대신 미술 서적과 도록, 팸플릿, 포스터, 평론, 기사 등 부산 미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료를 모으고 정리&middot;연구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자료 모으기 활동을 더욱 본격적으로 해나간 것이다. 부산시나 시립미술관 등 공공기관은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한 작업을 이 화백 혼자서 끈질긴 집념만으로 해나갔다. 그 결과 그는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의 부산 미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당연히 이 화백이 살고 있던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에 위치한 2층 주택은 미술 관련 자료로 발 디딜 곳이 없다. 그의 2층 화실은 물론 거실, 복도, 계단 등 집 곳곳에 자료가 박스째로 쌓여있다. 이 화백과 친분이 있던 미술평론가 옥영식 씨는 &ldquo;당시에는 부산 미술과 관련된 자료를 보려면 이 화백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rdquo;고 회상했다.그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책을 저술했다. 1928년부터 1979년까지의 자료를 정리해 1995년 출간한 &lt;부산미술 일지&gt;와 그 이후의 사료를 정리한 &lt;부산미술사료&gt;, 각종 부산 미술 관련 기사, 평론 등을 스크랩한 &lt;가마골 꼴아솜 누리&gt; 등이 그것이다. <img alt="1968년 1월 21일 부산 하야리아 부대 내 작업실에서 미군과 군인 가족이 실크스크린 판화 작업을 하는 이용길 화백을 지켜보고 있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6/1381884483652991.jpg"/> 이 화백의 방대한 자료들은 수집가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수집가들은 그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자료를 팔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화백은 그의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과 그가 모아온 미술 관련 자료 대부분을 부산 예술 발전을 위해 선뜻 내놓았다. 그는 지난 2009년 3월 27일 50여 년간 모은 부산 미술 관련 자료 일체를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서적 1만여 권, 부산 미술 관련 기사 스크랩 100여 권, 전시 팸플릿 수천 부, 포스터 500여 점 등 그 양만해도 10톤 트럭 1대분이었다. 또한 이 화백은 지난 2월 부산 하야리아 미군 부대에서 당시 제작한 판화 19점과 작품 활동 현장 모습을 담은 사진 12점 등을 부산시민공원에 기증하기도 했다.이 화백을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앞서의 미술평론가 옥영식 씨는 &ldquo;이 화백은 빙 둘러서 말할 줄을 몰랐다. 늘 직접적으로 바른 소리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그의 성격이 작품에도 반영된 것인지, 그의 작품들은 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rdquo;고 설명했다.그래서 이 화백은 사회 현안에도 자주 앞에 나서며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인 것이 낙동강보존회 활동. 그는 1978년 만들어진 낙동강보존회 창단 멤버로 합류해 나중에는 부회장까지 맡았다. 그는 사회적 &lsquo;사건&rsquo;이 터질 때마다 낙동강보존회 회원의 이름으로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쳐댔다. 그러니 공안정국에서 경찰들이 보기에 이 화백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군사 정권 시기에는 그의 집 앞에 형사들이 자주 찾아와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그는 낙동강 보호와 관련된 그림대회나 걷기행사 등 각종 문화 행사를 추진했다.또한 이 화백은 순우리말 쓰기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lsquo;서클&rsquo;이라는 말 대신 지금은 흔히 사용하고 있는 &lsquo;동아리&rsquo;라는 순우리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 이도 이 화백이었다. 앞서 소개한 그의 저서 &lt;가마골 꼴아솜 누리&gt;라는 제목도 &lsquo;부산 미술계 반세기&rsquo;라는 말을 그가 순우리말로 바꾼 표현이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의 &lsquo;미적기술&rsquo;을 줄여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lsquo;미술&rsquo;이라는 단어도 &lsquo;아름다운 솜씨&rsquo;를 줄인 &lsquo;아솜&rsquo;, 회화를 &lsquo;실그림&rsquo;, 조각을 &lsquo;깎새&rsquo;, 판화를 &lsquo;찍그림&rsquo;이라 부르는 등 2만 개가 넘는 순우리말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하지만 예술계 일각에서는 이 화백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무대에 대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부산 미술을 강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옥 씨는 이 화백을 떠올리며 그는 일꾼이었다고 회고했다. 옥 씨는 &ldquo;그는 1970~1980년대 열악했던 부산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앞장섰다. 후배들을 돕기 위해 부산판화미술협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1975년부터 1993년까지 부산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rdquo;며 &ldquo;부산 미술의 자존심&rdquo;이라고 강조했다.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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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이봉갑 6·25참전소년병중앙회 이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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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0 Oct 2013 09:1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mmjj@ilyo.co.kr | 박민정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ldquo;댕댕&rdquo; 장날을 맞아 북적거리던 마을 한복판에 울리던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 살던 이봉갑 씨도 종소리에 가던 길을 멈췄다. 뒤이어 &ldquo;청년들은 빨리 모이라&rdquo;는 방송이 장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호기심에 이 씨도 인근 초등학교로 향했다. 순간의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img alt="6·25참전 소년병은 1만여 명으로 전체 군인의 30%에 달했다. 앞줄 오른쪽이 고 이봉갑 씨. 사진출처=&lt;우리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g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1010/1381364182649370.jpg"/> 그저 산불이 난 줄만 알고 청년들의 행렬에 합세한 이 씨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겨우 17세에 불과했던 그가 청년방위군들의 소집행렬에 끼어있었던 것. 무장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고야 자신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씨는 &ldquo;나는 방위군도 아니고 나이 어린 소년이니 집으로 보내달라&rdquo;고 경비병에게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건 무지막지한 폭력뿐이었다. 신장 150cm의 소년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슴팍을 얻어맞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어떠한 예고도 없이 입대하게 된 이 씨 때문에 집안도 발칵 뒤집어졌다. 갑자기 사라진 아들을 찾아 어머니는 길거리를 헤맸다. 며칠이 흘러 이 씨와 함께 징집됐으나 신체검사에서 요령껏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가한 청년이 그의 소식을 전해줬다. 그날부터 이 씨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고 집에서도 밤낮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그저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게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같은 시각 이 씨는 밀양역에서 무개화차에 실려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제야 군복 일습을 지급받고 머리를 깎은 이 씨는 평범한 소년에서 &lsquo;소년병&rsquo;이란 이름의 군인이 됐다. 그의 목에는 0200309라고 적힌 군번줄도 걸렸다. 곧장 속성으로 10일간의 교육이 진행됐는데 당시 배웠던 군가는 이 씨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단 한 글자도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훈련이 끝나자마자 이 씨는 바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경북 영천시 신녕읍까지 북상해 처음으로 M1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았다. 이 씨는 1사단 12연대 2대대에 소속돼 당시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준장과 같은 공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이 씨의 삶은 철저히 &lsquo;전쟁터의 군인&rsquo;일 뿐이었다. 그가 머물던 낙동강전선엔 이 씨와 같은 처지의 소년병 1만여 명이 있었는데 이는 전체 군인의 30%에 달했다. 총을 들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연약했던 소년병들은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하며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수도 없이 전우가 죽어나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이 씨는 &ldquo;내 나라 내가 지켜야 한다&rdquo;는 일념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전쟁이 극에 달할 무렵 이 씨는 최후의 격전지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에도 투입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lsquo;여기서 무너지면 끝&rsquo;이라는 생각이 또 다시 총을 쥐게 만들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전투는 승리로 끝났고 시간은 흘러 휴전이라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소년으로 입대한 그는 이제 어엿한 청년이 돼있었다. 휴전에도 이 씨는 어수선한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계속했고 1954년 5월 15일 일등중사로 제대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 씨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시기 소년병으로 전장을 누빈 터라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이 씨는 가정을 꾸려 평범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워낙 어린 나이에 겪은 참상에 몸과 마음에 후유증이 남았던 것.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전우들이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잊히는 게 가슴 아팠다. &ldquo;낙동강과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지켰다&rdquo;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누구 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았고 환갑이 넘어서자 하나둘 소년병들이었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자 &ldquo;더 이상 마냥 있을 수만은 없다&rdquo;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이 씨와 뜻을 함께하던 동료들은 1996년 소년병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일념 아래 &lsquo;6&middot;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rsquo;를 결성했다.이곳에서 이사로 활동했던 이 씨는 &lsquo;6&middot;25 참전 소년병(정규군) 보고서&rsquo; 펴내는 등 수많은 노력 끝에 차츰 소년병의 존재를 알려갔다.그러나 4년 전 갑작스러운 병마가 그를 덮쳤다. 반신불수의 상태로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던 이 씨는 &ldquo;어린 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입대한 우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rdquo;는 소박한 바람을 간직한 채 지난 9월 29일 전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떠났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교과서나 한국국방전서 등 공식적인 기록 어디에도 &lsquo;소년병&rsquo;이란 용어가 등재되지 않은 상황이다.이 씨와 함께 활동했던 박태승 6&middot;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회장은 &ldquo;병으로 인해 몇 년간 활동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항상 함께했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더 이상 힘들게 눈 감는 소년병들이 없도록 국가에서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rdquo;고 전했다.박민정 기자 mmjj@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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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이 주일의 죽음 -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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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30 Sep 2013 09:51: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shin@ilyo.co.kr | 신상미 ]]></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lsquo;작가에게 최고의 작품은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작품이다&rsquo;라고 자서전 &lt;말&gt;(1964)에서 썼다. 작가는 항상 최고의 기량으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길 원한다.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일수록 초기작보다 최신작이 더 좋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 한다. 지난 9월 25일 타계한 소설가 고 최인호도 항상 평단의 인정에 목말라 했다. 젊은 시절부터 상업적 성공을 이룬 작가인 만큼 평단의 인정은 더욱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내내 상업 작가로 평가 받았고, 이러한 낙인에 평론가 김현에게 &ldquo;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rdquo;라고 한 뒤 평단과 인연을 끊기도 했다. <img alt="최인호 소설 중 영화화된 작품들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총 32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원작을 제공하는 등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합뉴스"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30/1380502315645750.jpg"/> 최인호가 20대 시절 이룬 대중적 성공은 문화사 및 영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지만, 대중문학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최인호는 후기로 갈수록 역사 및 종교를 다룬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lt;길 없는 길&gt; &lt;잃어버린 왕국&gt; &lt;상도&gt; &lt;소설 공자&gt; &lt;소설 맹자&gt; &lt;유림&gt; 등은 평단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 작품들이 대부분 이야기성이 강한 대중 소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가들은 그의 초기 단편과 청년문화를 다룬 중기의 대중소설 외엔 그의 후기 작품들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사실상 대중작가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 다녔고, 소설이 갖고 있는 대중적 요소로 인해 소설 자체도 상품화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최인호를 본격문학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글쟁이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대표작인 &lt;별들의 고향&gt; &lt;바보들의 행진&gt;은 대중소설이었음에도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물화 현상을 날카롭게 짚어낸 작품이었다. 대중적 재미뿐 아니라 비판의식도 잊지 않았던 셈이다.최인호는 긴 분량의 대하역사소설을 여러 작품 집필했고 수십 편의 장편을 남길 만큼 다작의 작가였다. 술자리에서 동료 문인들에게 밝히길 초기 대표 단편인 &lt;술꾼&gt;은 앉은 자리에서 단 몇 시간만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화된 &lt;별들의 고향&gt;과 &lt;바보들의 행진&gt;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lt;걷지 말고 뛰어라&gt;로 직접 연출을 맡아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과 함께한 &lt;고래사냥&gt;은 동명 주제곡의 가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그는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개의치 않았고, 다방면에 걸쳐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덕분에 호스티스 작가, 퇴폐 작가라는 비난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 대해 배창호 감독은 &ldquo;독자와 관객에게 진정한 삶의 위안을 주고, 깊은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창작했다&rdquo;고 전했다.최인호 작가는 1945년 해방 직후 서울 중구에서 변호사 집안의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 세대의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지방 출신이었던 것에 비해 최인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고 살아온 &lsquo;도시의 아이&rsquo;였다. 1980년대 황석영이 계급을 소재로 한 민중문학의 대표자였다면 최인호는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과 청년문화의 아이콘을 자처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30/1380502315645751.jpg"/> 최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단편 &lt;벽구멍으로&gt;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가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수상식장에 나타나니, 관계자들이 아연실색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수필집 &lt;인연&gt;(2010)에 의하면, 1966년엔 단편을 수십 편 써서 모든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떨어지자, 조선일보에 직접 찾아가 자신의 응모작이 확실히 접수된 것이 맞는지 묻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군 복무 중이던 다음해 그는 22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한 번 도전하면서 아예 &lsquo;당선소감&rsquo;을 동봉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이때 조선일보의 심사위원이 &lt;소나기&gt;의 작가 황순원이다. &lt;인연&gt;에서 작가 스스로 밝힌 것에 의하면, 최인호는 황순원의 막내 아들과 고교동창으로 늘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처음엔 황 선생이 자기 아들이 악동인 자신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등단을 하면서부터는 친아들처럼 아껴주었다고 한다. 결혼 당시 주례를 서주기도 했으며 첫 딸이 태어났을 때 &lsquo;다혜&rsquo;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황 선생이었다. 이 이름은 후에 &lt;겨울 나그네&gt;의 여주인공 이름이 된다. 1972년 26세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lt;별들의 고향&gt;을 연재한 것도 황순원의 추천 덕분이었다. 원래 &lt;별들의 무덤&gt;이었던 제목을 &lt;별들의 고향&gt;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도 황순원이었다고 한다.문학평론가 김형중 조선대 교수는 &ldquo;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온 농촌 아가씨들이 직업을 얻지 못하는 상황 등 시대의 흐름 및 풍속을 잘 이해한 작가&rdquo;라며 &ldquo;상업적인 감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대와 감수성의 변화를 읽는데 능했다. 지금 읽으면 재평가할 만한 대목이 많다. 당대의 문화사적인 사료로 읽으면 좋겠다&rdquo;고 평가했다.이어 김 평론가는 &ldquo;산업사회 인간소외 문제를 최인호처럼 빨리 포착해 낸 작가가 없다&rdquo;면서 &ldquo;동시에 문학을 영화, 드라마 같은 인접 영역으로 확장시킨 선구자적 작가였다&rdquo;고 의미를 부여했다.최 작가는 악필로 가득한 육필 원고로도 유명하다. 신문사마다 그의 전담 교열기자가 있을 정도였다. 나이 든 작가들이 뒤늦게 컴퓨터를 배워 자판으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에도 그는 끝내 펜을 고집했다. 작가들이 늦은 나이에도 자판을 익힌 것에 대해 한 원로 소설가는 &ldquo;손으로 쓰면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아주지 않기 때문&rdquo;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lt;길 없는 길&gt;(2008) 같은 불교를 소재로 한 책도 100만 부를 넘게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 때문에 육필 원고도 출판사에서 불평 없이 받아준 것이다.실제로 그는 이문열, 조정래, 황석영, 박범신, 신경숙 등과 함께 판매량 및 인세에서 항상 최고 대우를 받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특히 1997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lt;상도&gt;는 300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동명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에서도 출간된 소설은 200만여 부의 공식판매를 기록했다. 출판계의 한 관계자는 &ldquo;해적판이 정본보다 5~10배 더 팔리는 중국시장의 특성상 1000만 부 정도 팔리지 않았을까 추측한다&rdquo;고 귀띔했다.한편 최 작가는 첫 장편소설 &lt;별들의 고향&gt;(1973)이 영화화되면서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총 32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원작을 제공했다. 사실상 최인호는 197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img alt="지난 9월 25일 타계한 최인호 작가의 빈소에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3/0930/1380502315645752.jpg"/> &lt;인연&gt;에 의하면, 영화 &lt;고래사냥&gt;으로 인연을 맺은 배창호 안성기 김수철 등과 친하게 지내다 한 주간지에서 스캔들 기사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술자리에서 &ldquo;노총각들끼리 몰려다니다가 동성애자라고 기사가 날지도 모른다&rdquo;고 농담하기도 했다.최 작가와 배창호 감독은 &lt;고래사냥&gt; &lt;적도의 꽃&gt; &lt;깊고 푸른 밤&gt; &lt;황진이&gt; &lt;안녕하세요 하나님&gt; 등 7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배 감독은 &ldquo;성품이 열정적이고, 따뜻해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rdquo;며 &ldquo;촌철살인의 유머가 있어서 만나면 즐거웠다&rdquo;고 고인에 대해 추억했다.이어 배 감독은 &ldquo;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작업실 책상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곤 하셨다&rdquo;며 &ldquo;탈고가 끝나면 원고지 위에 성경책을 놓고, 내 손과 형의 손을 포개고 함께 기도했다. 그것이 우리에겐 작품을 끝내는 의식이었다&rdquo;고 말했다.최인호에게 종교는 문학의 가장 주요한 소재였다. 그는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2008년 침샘암 판정을 받은 후 초기의 실험적인 스타일로 회귀한 작품인 &lt;낯익은 타인들의 도시&gt;를 발표했고, 그 후 암과 싸우며 &lt;인생&gt;을 내놨다. &lt;인생&gt;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간 소식지인 &lt;서울주보&gt; &lsquo;말씀의 이삭&rsquo;란에 실은 자신의 투병기와 신앙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lt;인생&gt;에선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창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과 신에게 의지하려는 겸손하고 소박한 종교적 감정을 엿볼 수 있다.배 감독은 &ldquo;암 투병 소식 이후엔 주보에 연재한 묵상록을 통해 근황을 확인했다&rdquo;며 &ldquo;작년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육체적으론 쇠약했지만 창작의욕은 매우 컸다. 당시 내게 &lsquo;21세기에도 대중적 감독의 명성을 유지하라&rsquo;며 &lsquo;나도 아직 쓸 게 많다&rsquo;고 의욕을 보이셨다&rdquo;고 말했다. 이어 그는 &ldquo;우리가 안 간 게 아니라 인호 형 스스로 많이 안 만나셨다. 사색과 인내의 시간을 가지시며 묵상록을 집필하신 것&rdquo;이라고 덧붙였다.최 작가는 &lt;인생&gt;에서 &ldquo;5년에 걸친 투병 생활 중에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다.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중략) 나는 내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다. 나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rdquo;고 썼다. 시대를 예민하게 읽고 자기 세대의 거대한 풍속화를 그렸던 소설가 최인호는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글을 쓰며 작가로 살고 있을 것이다.신상미 기자 shin@ilyo.co.k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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