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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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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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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4 Oct 2012</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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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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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33 마지막회’ 조작설 유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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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4 Oct 2012 13:37: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014/1350189472469370.jpg"/>  ▲ 김현희 기자회견. 사진공동취재단호텔의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현희와 그 여자 탤런트가 마주쳤다. 우리는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가냘픈 몸매에 별로 화장도 안 한 것처럼 보였는데 깨끗한 피부를 지녀 &lsquo;과연 연예인은 다르구나&rsquo;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다른 연예인보다 커 보여 키가 얼마냐고 물으니 그녀가 165㎝라고 대답했다. 당시 김현희의 키는 164㎝ 정도였고 나도 166㎝였는데 내가 봐도 나나 김현희보다 작아보였다. &ldquo;뭐가 165㎝라는 거지? 나보다도 작아 보이는데&hellip;.&rdquo; 김현희가 나중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ldquo;원래 연예인 키와 몸무게는 고무줄이라서 그래.&rdquo; 옆에 있던 수사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김현희와 탤런트를 마주 앉히고 얘기를 하라고는 했지만 자리는 서먹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o;요즘 대학생들은 왜 데모를 하지요? 북한에 비하면 여기가 너무나 살기 좋은데?&rdquo; 어느 순간 김현희가 묻자 그 여자 탤런트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대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안기부 수사관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난처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ldquo;우리 애는 그런 거 몰라. 관심 없어. 호호호.&rdquo;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받아주었다. 그 탤런트와의 대화는 그다지 부드럽게 진행되지 못했다. 김현희와 여자 탤런트는 호텔 밖으로 나와 야외에서 사진촬영을 한 후 헤어졌다.일본의 하야시 마리코라는 여성 작가와의 인터뷰가 잡혔다. 김현희나 우리나 늘 만나던 기자나 수사관들 외에 일반인들을 만날 때면 부담도 적고 흥미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는 인터뷰가 부담스럽지 않았다.하야시 마리코는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를 거쳐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제94회 나오키상, 제8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제32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작품으로는 &lt;첫날밤&gt; &lt;불유쾌한 과일&gt; &lt;거침없는 여자가 아름답다&gt; 등이 있다.초겨울 아침 우리는 안가로 이용하고 있는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만났다.검정 투피스에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일본 여성치고는 덩치도 좋고 개방적이었다. 자유분방한 소설을 많이 쓰는 여성 작가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성격도 활달해 보였다. 그녀는 인터뷰에 앞서 선물을 가져왔다며 김현희에게 주면서 펴보라고 하였다. 김현희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특히 일본에서 온 사람들과 인터뷰를 할 때면 늘 많은 선물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날도 고맙다고 하면서 옆에 가만히 놓아두었다.&ldquo;선물을 열어보세요.&rdquo;하야시 마리코가 웃으면서 말했다.&ldquo;감사합니다.&rdquo;김현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꾸 열어보라고 하여 김현희가 포장을 뜯자 일본 전통 떡이었다.&ldquo;맛이 어떤지 먹어 보세요.&rdquo;그러자 그 작가가 또 먹어보라고 권했다.&ldquo;괜찮습니다.&rdquo;김현희는 조용하게 사양했다. 김현희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먹는 모습에서 어떤 흉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고 인터뷰는 정중하게 격식을 갖춰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거절했던 것이다.&ldquo;아니 왜 자꾸 먹으면서 하자고 그래?&rdquo;인터뷰를 마치고 작가와 헤어지자 김현희는 얼굴을 찌푸리고 못마땅해 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014/1350189472469371.jpg"/>  ▲ 1989년 3월 21일자 &lt;경향신문&gt;에 실린 일각의 KAL기 폭파 조작설 주장과 김현희 진술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한 기사. 최창아 씨는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누가 어떻게 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수사내용이나 김현희 진술 오류의 꼬투리를 잡는 식이라고 지적했다.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안기부를 사직했다. 안기부를 나오면서 김현희와의 생활은 끝났지만 어떻게 나의 연락처를 알았는지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계속하여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사실 안기부를 나오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은 모두 잊는다는 마음으로 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런데 어떤 의도에서인지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은 더욱 부풀려졌고 방송국들마저 이 사건에 대해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내 놓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사건 당시의 분위기, 각국의 반응들은 잊히고 여기저기서 조작이라고 하자 &ldquo;정말 조작일 수도 있겠다&rdquo;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사건 발생 당시 함께 분노하고 슬퍼했던 나의 지인들, 친구들도 슬그머니 사실이냐고 물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ldquo;창아야, 김현희 사건이 조작이라는데 정말이냐?&rdquo;어느 날은 직업군인인 나의 오빠까지 조작설에 대해서 묻기까지 했다.&ldquo;어떻게 오빠까지 의심해?&rdquo;&ldquo;신문이며 방송까지 온통 난리잖아? 게다가 성당에서 기도회까지 하고 있고.&rdquo;성당의 신부님들이 기도회를 하면서 KAL기 사건이 조작이라고 하는 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나중에 통일이 되어서 북한에서 KAL기 납치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이 자백을 하게 되면 신부님들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안기부(국가정보원)에서 이렇다 할 적극적인 해명도 없었다. 물론 안기부에서 김현희 사건 외에도 간첩 사건을 수사하고 나면 수사발표로 그만이지, 그 이후 가끔 있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맞네 아니네 하면서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수사관이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 수사정보기관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조작설 때문에 답답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젊은 시절 국가 정보기관의 수사관으로 나름대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임한 사건이었는데 조작설에 휘말리자 실망스러웠다.사건 발생이 1987년이었고 나는 6년 정도 KAL기 사건의 주역인 김현희와 같이 지냈다. 안기부를 퇴직한 지 20년이 지났고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25년 정도 된다. 내 나이도 어느덧 중년으로 들어섰는데 젊었을 때 자긍심을 갖고 근무했던 안기부 수사관으로서 조작설이 난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조작설이 커지면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몇몇 일본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다.&ldquo;우리는 KAL기 사건이 북한의 공작에 의한 테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김현희가 테러리스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KAL기 사건이 아니라 김현희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것입니다.&rdquo;일본 방송국은 그렇게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가끔 세간의 의혹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잔잔히 인터뷰에 응하던 나도 그 대목에 이르면 저절로 목소리 톤이 올라가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당 작전부 소속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93년도에 귀순하였는데 자기도 김현희(그때 이름은 몰랐지만)와 같은 공작원 양성소인 북한 인민군 695부대(김현희는 금성정치군사대학이라 부름) 출신으로 6년 후배라고 했다. 그는 KAL기 사건이 일어난 1987년도에 입학해 1993년까지 공작원 교육을 받았는데 KAL기 폭파가 북한의 여자 공작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ldquo;우리는 KAL기 사건을 실패한 공작이라고 말합니다.&rdquo;&ldquo;실패한 공작이라고요? KAL기를 폭파시키고 115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데 실패한 공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rdquo;&ldquo;김현희가 체포되어 전향했기 때문입니다. 김현희에게 남한 실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전향을 하여 북한이 많은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까? 득보다 실이 많은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한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rdquo;&ldquo;북한은 자신들이 안했다고 부인하고 있잖아요?&rdquo;&ldquo;당연히 부인하지요. 김현희가 전향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자 그 이유 중 하나가 여자 공작원들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때까지 교육받던 여자공작원을 모두 해산시켰습니다.&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014/1350189472469372.jpg"/>  ▲ 김현희 항소심 첫공판. 연합뉴스나는 북한 공작원도 KAL기 사건을 북한이 한 것이라고 인정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KAL기 조작설에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누가 어디서 어떻게 조작했는지 전혀 언급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기부에서 조작했다면 안기부 누가 조작을 한 것인지, 그 조작에 가담한 사람이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작설을 제기하려면 누가 조작을 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단순히 안기부나 정권 차원에서 조작을 했다고 주장하면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나는 그들이 누가 조작을 했는지 조작자를 제기하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조작설로 내세우는 것은 의혹이다. 안기부가 수사한 내용이나 김현희가 진술한 내용 중에 오류가 있거나 착오가 발견되면 그 점을 지적하여 조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KAL기 테러 사건은 간단한 살인사건이 아니다. 살인사건이라면 한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은폐될 수 있지만 KAL기 폭파사건은 여러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다. 김현희와 김승일을 체포한 바레인 경찰 당국,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조사한 일본과 미국 CIA를 비롯하여 많은 정보기관과 수사기관들이 이 사건을 수사했다. 그런데도 조작이라는 발표를 한 것을 본 일이 없다.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혹을 이야기한다. 안기부의 발표나 김현희의 진술에 오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의혹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혹의 많은 부분이 해소됐고, 또 의혹이 곧 조작은 아니다. 의혹은 수사를 잘못했거나 진술을 잘못한 경우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김현희와 KAL기 폭파에 대해서 두서없이 이야기한 것은 나의 귀중한 청춘을 김현희와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더 잊히기 전에 내가 옆에서 지켜본 그녀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도 역사라고 생각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평가할 때 이 기록이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원고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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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32’ 공작원서 유명인사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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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7 Oct 2012 13:55: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007/1349585714467770.jpg"/>  ▲ 김현희가 1996년 6월 11일 한국체대 강당에서 대학생 초청 통일안보 강연을 했다. 연합뉴스여기에 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5세 때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 교회에 간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부흥회나 기도원 같은 곳은 한번 간 적 없는 평범한 교인이었다. 더욱이 안기부에 들어가면서는 일요일도 근무하는 일이 많아 교회에 발길이 멀어졌다.그러던 중 김현희를 보호하고 감시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자백 후에도 뭔지 모를 불안감과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가 종교를 알면 좀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불현듯 하고는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누군지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교회나 성경을 알 수 있게 하겠는가. 나는 그녀가 기독교 신자가 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기도하던 중 김현희가 종교를, 하나님을, 자기 죄를 진심으로 알게 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한 적이 있다. 설마 내 기도가 이루어지겠나, 하고 의심하면서 그래도 나의 바람을 기도했었다. 그런데 김현희가 마침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이다. 그녀가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 내 기도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할 땐 하나님도 귀를 기울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김현희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ldquo;현희 양은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한 적이 있나요?&rdquo;목사님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ldquo;사람은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지요.&rdquo;김현희는 일반화시켜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은 &ldquo;네&rdquo; 혹은 &ldquo;아니오&rdquo;로 대답하는데 김현희는 달랐다. 그래도 목사님은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놓고 정성껏 성경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lsquo;오늘은 어떤 맛있는 것을 주시려나?&rsquo;수사관들은 은근히 목사님이 주시는 음식을 기다리고는 했다. 목사님이 간혹 외국에라도 다녀올 때면 잊지 않고 김현희에게 초콜릿, 화장품 등 선물을 사다주어 그녀도 목사님을 믿고 의지했다.김현희가 성경공부를 할 때는 남녀 수사관이 1명씩 같이 참여하였는데 지금의 남편인 H 수사관이 같이 갈 때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매우 지루해하여 가끔 졸기도 했다.&ldquo;H 선생은 졸 거면 들어오지 마세요. 공부에 방해돼요.&rdquo;김현희는 H 수사관에게 노골적으로 핀잔을 주곤 했다.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안이숙 여사도 만났다. 안 여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을 당했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lt;죽으면 죽으리라&gt;라는 저서도 쓰고 &lsquo;내일 일은 난 몰라요&rsquo;라는 찬송가의 가사도 쓴 분이다. 성경 공부를 거듭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서 세례(침례)를 받아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고 목사님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텐데 KAL기를 폭파한 북한 공작원이 오늘의 기독교인이 된 경위를 구구절절 말하면서 &ldquo;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rdquo;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큰 호응을 보였다.이렇게 시작하게 된 김현희의 신앙간증은 아는 사람을 통해 한두 교회로 늘어났고 김현희가 간증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간증 한번 와달라는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김현희에게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회도 되고 또 순수한 신앙 간증과 더불어 북한의 실상을 알릴 홍보의 기회도 될 수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한 간증을 원하는 교회는 다 다니도록 노력했다.김현희가 교회로 간증을 다닌다는 소문이 나자 어떤 때는 유가족 모임에서 사람들이 와서 교회 뒤편에 앉아 있다가 간증이 끝나자 김현희가 있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김현희와 만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현희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고 우리 수사관들도 바짝 긴장했다.&ldquo;여기는 교회이고 간증하는 자리이니 이렇게 와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rdquo;우리 수사관들은 유가족들을 정중하게 설득했다. 그들도 교회라는 공간인 탓에 별 소란 없이 그냥 돌아섰다.김현희는  찬송가 중 &lsquo;나 같은 죄인 살리신&rsquo;을 좋아했다. 하기야 &lsquo;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rsquo;라는 구절이 죽었다 살아난 김현희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이 있겠는가.나는 안기부에서 7년 정도 근무했다. 처음 6개월은 훈련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그 뒤 6개월은 김만철 씨 귀순 사건에 매달려 보내다가 김현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김현희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6년을 보냈다.김현희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것 외에도 국가 기관이나 기업체 군부대 등으로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반공 강연이었다. 그 어느 곳도 우리가 요구해서 간 적은 없었고 늘 강연 요청이 쇄도하여 밀려 있을 정도였다.남파 간첩이나 귀순자들의 반공 강연은 그 전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김현희는 이제 폭파범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강연에는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늘 사람들로 넘쳐났고 호응도 좋았다. 정계 재계의 높으신 분들은 김현희를 공개, 비공개로 만나 얘기를 나누고 격려금도 주었다.김현희에게는 남한에서 귀순자에게 주는 정착금도 없었을뿐더러 안기부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도 처음에 옷가지와 생필품 몇 가지를 사주었을 뿐 그 뒤부터는 식대만 지급되었기 때문에 간증이나 강연을 다니며 받는 사례금으로 자기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여기저기서 선물도 많이 받고 해서 자신의 돈으로 물건을 살 일은 별로 없었다.간증 강연을 위해 지방을 다닌 곳 중 김현희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제주도였다. 북한에서는 보지 못한 이국적인 분위기에 바다 구경도 할 수 있어서도 그랬지만 며칠씩 안가가 아닌 외부에서 잘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오랜만에 자유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은 보안문제 때문에 호텔이 아닌 안기부 관사에서 잤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1007/1349585714467771.jpg"/>  ▲ 제주도에 안보 강연을 하러 간 김현희가 잠시 바닷가에 들렀다. 오른쪽은 최창아 씨. 사진제공=최창아 씨제주도에 간다는 계획을 잡자 수사관들은 KAL기가 아닌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KAL기를 폭파한 만큼 대한항공 측에도 미안한 감이 있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 여겼으며 수사관들도 김현희와 함께 KAL기를 타기가 좀 꺼려졌기 때문이다.김현희가 보호 감시를 받는 처지인데도 수사관들로서는 대한항공을 타는 것이 꺼려진 것이다.인천의 한 기업체에 강의를 갔을 때였다. 사람은 좋지만 가끔 짓궂은 농담도 잘하는 운전기사가 인천으로 가는 차안에서 &lsquo;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rsquo;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한번쯤은 불러봄직한 노래지만 정확하게 가사를 읊조리지 못한 채 흥얼거렸다.&ldquo;그게 무슨 노래입니까?&rdquo;김현희가 의아해 하여 물었다.&ldquo;응, 인천에 성냥공장이 많아서 생긴 노래야.&rdquo;기사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노래의 내용을 알고 있는 우리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강연이 끝나고 기업체 간부들과 차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ldquo;인천에는 성냥공장이 많다면서요?&rdquo;김현희가 차를 마시다가 말고 불쑥 물었다. 그들은 갑자기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했으며 우리는 또다시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야기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김현희는 외신 언론들과도 많은 인터뷰를 했다. 어느 일본 기자는 김현희에게 평양에서 살던 집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었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김현희는 자신이 살던 집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서 이야기했다.&ldquo;사실은 내가 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현희 씨가 살던 집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집과 일치합니다.&rdquo;김현희는 일본 기자가 자기 집에 갔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우리도 놀라서 일본 기자의 얼굴을 주시했다.&ldquo;정말이에요?&rdquo;&ldquo;사실입니다.&rdquo;김현희는 자신의 가족이 아직도 살고 있지는 않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ldquo;사람이 살고 있나 해서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습니다.&rdquo;그 기자는 김현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 보았다고 말했다. 김현희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실망하고 슬픈 얼굴을 했다.김현희는 해외의 수사기관들과도 많은 면담을 했다. 어느 날 미국 CIA 한국 담당관과 면담이 있다고 하자 김현희는 다른 기관과 면담할 때보다 많이 긴장했다. 그녀에게 어려서부터 뼈에 사무치게 들어온 미 제국주의에 대한 미움과 공포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CIA와의 면담에서 그들은 여러 장의 북한 인물 사진을 제시하며 김현희에게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중에서 김현희는 김정일 친필지령이라며 KAL기를 폭파할 임무를 부여해 주었던 이 부부장(이용혁)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체류당시 관리해 주던 한 지도원(한송삼)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본명은 몰랐지만 이 부부장, 한 지도원을 정확히 찾아내었고 더욱이 부다페스트에 체류할 당시 묵었던 한송삼 지도원의 숙소에 대해서는 주변의 약도와 집의 구조 등을 정확히 그려내 CIA 측을 매우 만족시켰다.또 다른 날은 마카오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정보원에 대한 자료를 가져와 김현희에게 확인을 요구하였다. 그때 수사관들이 김현희와 김숙희가 마카오에서 현지 실습을 할 때 그들을 관리하였던 북한 지도원이 ○○○ 아니냐고 물으면서 사진을 내놓자 김현희는 매우 놀라면서 이런 것까지 이미 서방세계에 다 알려졌는데 북한은 무슨 공작을 한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어느 날 한 여성 잡지사로부터 김현희의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런데 당시 인기가 높았던 여자 탤런트와의 대담 형식의 인터뷰 요청이었다. 그 탤런트는 단아하고 조용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좋다고 승낙하고 시내 한 호텔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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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31’ 가족·일상·종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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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8 Sep 2012 12:1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28/1348802322466270.jpg"/>  ▲ 김현희가 6촌 외할아버지 임관호 씨와 만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진제공=우먼센스그 무렵 북한의 요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살다가 탈출한 안혁, 강철환이라는 귀순자가 그곳의 생활상을 쓴 &lt;대왕의 제전&gt;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 책은 나중에 &lt;수용소의 노래&gt;라고 재출간되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미국에서 강철환을 만났을 때 감명 깊게 읽었다고 언급한 책이기도 하다. 책이 나오자마자 우리 수사관들 대부분이 읽었다. 그런데 책 내용 중 김현희의 부모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수용소에 끌려와 아마 처형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런 소식을 듣고 나니 새삼 김현희의 기구한 인생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누군가가 읽어보라고 줬다면서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깜짝 놀랐지만 읽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조마조마했다.얼마 후 책을 읽던 김현희가 갑자기 놀라 얼굴을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도 그 부분을 읽은 모양이다. 그녀도 자기의 부모와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실제로 북한사람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lsquo;부모가 비참하게 죽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rsquo; 나는 위로의 말도 못한 채 그냥 있었고 그녀는 읽던 책을 덮고 그대로 앉아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며칠 전 김현희가 해준 꿈 얘기가 기억났다. 그녀가 꿈에 엄마를 봤는데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한국 전통 혼례복 같은 것을 입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른들이 말하는 꿈 해몽에 의하면 그런 옷은 사람이 몸이 아프거나 죽을 때 꾸는 꿈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ldquo;언니, 이게 무슨 꿈일까요?&rdquo;김현희가 나에게 물었다.&ldquo;글쎄 좋은 일이 있으려나?&rdquo;나는 김현희에게 불길한 꿈이라는 말을 못하고 얼버무린 적이 있다. 어쩌면 김현희의 엄마가 마지막으로 딸에게 나타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현희가 남한에 와서 받은 혜택 중 가장 좋아한 것 중의 하나가 치과치료이다. 그녀의 건강검진을 해보니 치아가 매우 안 좋았다. 충치도 많았고 무엇보다 앞니가 약간 어긋나게 튀어나왔고 그 사이에 약간 검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 본인도 그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ldquo;어디 보안이 될 만한 치과가 없을까?&rdquo;김현희의 치과 치료를 고뇌하고 있을 때 안기부 간부가 여의도에 소재한 치과를 소개해 주었다. 의사는 과거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치의로 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치과에서 김현희를 치료하게 했다.&ldquo;아파서 어떻게 치료를 해요?&rdquo;치과 치료는 누구나 불편해 한다. 김현희도 처음에는 아플까봐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치료도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이 걸린다.&ldquo;괜찮아. 아이들도 다 치료를 하는데 무서워할 것 없어.&rdquo;나는 김현희를 달래서 치과 치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충치 치료를 마치고 앞니를 깨끗하게 다듬어서 검은 부분도 없애고 똑바로 교정이 되자 그녀는 안가에 와서도 신기하다며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좋아했다.&ldquo;북한은 의술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어깨에 흉터가 있는데 수술을 잘 못해서 흉터가 더 커진 것 같아요.&rdquo;&ldquo;그럴 수도 있지.&rdquo;&ldquo;남한에서는 어깨 흉터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지 않아요?&rdquo;김현희는 슬며시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안기부가 김현희의 어깨 흉터까지 치료해 줄 수는 없었다.김현희가 여자이기 때문에 미용실도 정기적으로 다녀야 했다. 김현희는 보호와 감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일반 미용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보안이 지켜져야 해서 안기부 직원의 부인이 마포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을 이용했다. 김현희의 이미지가 있어서 머리 스타일을 크게 고치지는 못하고 늘 하는 스타일로 정리만 하거나 가끔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는 정도였다.&ldquo;머리를 다르게 하면 안돼요?&rdquo;김현희는 늘 자신의 머리 스타일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ldquo;어떻게 하고 싶은데?&rdquo;&ldquo;남한 여자들처럼 웨이브 파마를 하고 싶어요.&rdquo;김현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한국 여자들의 머리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싶어했다. 김현희가 아무리 안기부의 보호와 감시를 받는다고 해도 머리까지 제약을 받는 것은 잔인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웨이브 파마를 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파마를 하고 나자 워낙 머리숱이 많고 앞이마가 좁아 그야말로 머리만 한 소쿠리가 되어 무척 답답해 보였다.&ldquo;이게 뭐야? 당장 바꿔.&rdquo;김현희의 변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과장에게 보이니 당장 바꾸라고 지시가 내려와 웨이브를 펴는 파마를 다시 해야 했다. 또 이미 김현희가 대중적인 인물이 된 이상 관리 차원에서 이곳에서 피부 마사지도 받았는데 그녀도 마사지 받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은 한 남자수사관이 부항에 대한 책을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하자 며칠 동안 그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ldquo;언니 부항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우리 부항 사자요.&rdquo;김현희가 나를 졸랐다. 나는 김현희가 원하는 대로 동대문 근처의 의료기 상점에서 부항기를 사가지고 왔다. 우리는 책과 열심히 대조해 가며 등에 커다란 부항자국을 내며 서로 부항을 떠 주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하다 보니 비위생적이라고 느꼈는지 어느 날은 플라스틱 부항을 깨끗이 씻어 식기건조대에 넣고 말렸다.&ldquo;언니, 빨리 와보시라요.&rdquo;몇 시간이 지난 뒤 김현희가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ldquo;왜 그래?&rdquo;내가 놀라서 주방으로 달려가자 김현희가 녹아 쪼그라든 부항을 보여주었다.&ldquo;이게 왜 이래요?&rdquo;나는 김현희가 들고 있는 부항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김현희도 한바탕 웃고 말았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28/1348802322466271.jpg"/>  ▲ 신상옥 감독의 영화 &lt;마유미&gt;. 신 감독은 촬영 전 김현희를 직접 만났다.그 무렵 신상옥 감독이 &lt;마유미&gt;라는 제목으로 김현희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 영화감독 신상옥과 영화배우 최은희는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최은희는 60~70년대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명성을 떨쳤고 신상옥 감독은 영화 &lt;파시&gt; &lt;열녀문&gt; 등 문예성이 짙은 작품을 연출하여 예술성이 높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그가 감독한 &lt;내시&gt;는 3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 감독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신상옥 감독은 부인인 최은희가 납북되자 홍콩으로 가서 최은희를 찾다가 자신마저 북한으로 납치됐고 이후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하다가 오스트리아에서 최은희와 함께 극적으로 탈출했다.&ldquo;신상옥 감독과 영화배우 최은희를 알아요.&rdquo;그 사실이 알려지자 김현희가 놀라서 말했다.&ldquo;그들을 어떻게 알아?&rdquo;&ldquo;신상옥 감독은 북한에서 &lt;돌아오지 않는 밀사&gt; &lt;소금&gt; &lt;불가사리&gt; 같은 영화를 만들었어요.&rdquo;&ldquo;만나지는 못했어?&rdquo;&ldquo;그 사람들을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rdquo;&ldquo;누군데?&rdquo;김현희의 말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ldquo;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당시 &lsquo;당에서 시키는 일을 목숨 바쳐 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rsquo;라고 담당부부장이 물었어요.&rdquo;김현희는 자신을 담당했던 부부장이었던 강해룡을 두 달에 한 번씩 만났는데 최은희와 신상옥 납치를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신상옥 감독은 &lt;마유미&gt;를 촬영하기 전에 김현희를 만나고 싶어했다. 안기부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만나게 해주었다.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영화 주인공인 김현희가 어떤 여인인지 직접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김현희를 만난 신상옥 감독은 빠르게 영화를 촬영했고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다.김현희는 종교인이 되었다. 김현희가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KAL기를 폭파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자백하고 기자회견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안기부장이 안무혁 씨에서 박세직 씨로 바뀌었다. 박세직 씨는 여의도의 한 침례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북한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김현희를 안쓰럽게 생각했는지 김현희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를 소개시켜 주면서 성경 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종교를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처음에는 그저 안기부에서 시키니까 해보자라는 마음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처음 김현희에게 종교 얘기를 하니 북한에는 종교가 없다고 탐탁지 않아 했다.&ldquo;기독교에서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주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부르주아 반동들이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것으로 인민들이 착취를 당하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아편 같은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세상에 신이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는 타락했습니다.&rdquo;&ldquo;그럼 불교는?&rdquo;&ldquo;불교는 옛날부터 타락하여 중놈들이 아래 세상에서 자식을 낳아 놓고 자기 자식을 구별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힌 것이 색동옷의 유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것들을 왜 믿으라고 합니까?&rdquo;김현희는 처음에 종교를 거부했다.성경공부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찾아가서 했는데 한 번 두 번 회를 거듭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ldquo;누구든지 죄를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rdquo;김현희는 그 구절에 솔깃했던 것 같다. 게다가 목사님이 자상하여 김현희에게 늘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 주자 더욱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찬송가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그녀는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신앙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김현희의 간증 내용은 어머니가 여학교 시절 기독교 학교인 호수돈 여고를 나왔고, 자기가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릴 것을 마침 옆집에 놀러온 의사 친척이 고쳐주어 어머니가 &ldquo;하나님이 고쳐주셨다&rdquo;고 말했다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기독교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기까지 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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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30’ 안가에서의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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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3 Sep 2012 14:10: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23/1348377027465110.jpg"/>  ▲ 김현희가 군부대를 방문한 모습. 맨오른쪽이 최창아 전 수사관이다. 사진제공=최창아일요일에는 식당 아주머니가 쉬기 때문에 우리끼리 식사를 준비하여 먹어야 했다. 근무하는 여수사관 2명과 김현희까지 여자는 3명이었지만 남자 수사관과 경호하는 직원까지 합하면 꽤 많은 인원이어서 식사준비가 만만치는 않았다.&ldquo;오늘은 칼국수를 해먹을까?&rdquo;때때로 우리는 색다른 것을 먹기 위해 스파게티나 칼국수 등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는 각자 반찬 한 가지씩을 하자고 하자 김현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북한에서 먹던 무나물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무를 채 썰어 프라이팬에 볶았다. 잠시 후 서로 만든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했는데 김현희가 만든 무나물은 맛이 없는지 다들 손이 안 갔다.&ldquo;왜 맛이 안나나?&rdquo;김현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몇 젓가락 먹은 뒤 먹지 않았다. 그 후로는 직접 반찬은 안하겠다고 하면서 옆에서 도와주기만 했다.김현희와 안가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난 일들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김현희의 성품을 파악하고 그녀가 어떻게 안가 생활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일에 음식을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다고 하면 김현희는 얼굴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ldquo;언니야 양념을 많이 넣으니까 맛이 있겠지요.&rdquo;김현희는 톡 쏘아붙이듯이 말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현희는 북한에서 중류 가정에서 생활하였고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했다. 공작원으로 선발되고서도 북한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지냈고, 공작 활동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북한에서는 일반인이 꿈도 못 꾸는 외국 여행도 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머리나 외모도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남한에 와서도 비록 폭파범이었다고는 하나 언론에서도 그녀의 미모에 대해 늘 보도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ldquo;미인이다&rdquo;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김현희와 같이 있었던 여수사관들도 다들 어려운 과정의 공채시험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들이었고 또 안기부에 여수사관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김현희와 같이 강연을 가든가, 누구를 방문하는 자리에서는 처음엔 김현희에 대해 관심을 갖다가 차츰 여수사관들에게 관심을 돌리기도 했다.&ldquo;안기부에 여수사관이 있었습니까?&rdquo;&ldquo;여수사관도 사격 훈련이나 무술 훈련을 받습니까?&rdquo;사람들은 안기부 여수사관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묻고는 했다.&ldquo;미인이시네요. 안기부 여수사관이라 다르네요.&rdquo;N 수사관이 김현희를 동행할 때면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었다. N 수사관은 우리가 보기에도 미인이었다.&ldquo;성격 좋고 우아하게 생기셨네요.&rdquo;J 수사관이 동행하면 의례적일지는 몰라도 다들 한마디씩 칭찬을 하고는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김현희의 기분이 저조해지고 말았다. 어느 날 그녀가 외출하고 돌아와 말도 안하고 우울해 있어서 같이 나갔던 여수사관에게 물었다.&ldquo;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rdquo;&ldquo;실은 같이 갔던 교회에서 나보고 미인이라고 칭찬을 했어. 그런데 저렇게 기분 나빠하네.&rdquo;N 수사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인격이 성숙한 성인이라면 비록 기분이 나쁘더라도 겉으로 표시를 안 낼 텐데 그녀는 그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여학생 같았다. 그것은 북한에 의해 어린 나이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적인 인간으로 양성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교양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안가 생활은 김현희를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한국 생활에 적응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수사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현희는 한국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한국인들은 누구나 추석과 설날에 고향에 가거나 차례를 지낸다. 북한에서는 고향에 가는 일은 거의 없고 김일성이나 김정일로부터 선물을 배급받는다. 그것이 고기일 수도 있고 쌀과 같은 식량일 수도 있다.한국에서는 직장에서 명절 보너스를 받기 때문에 고향에 갈 때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간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김현희는 수사관들과 함께 안가 생활을 하면서 수사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느 날 자기와 함께 생활하던 수사관들이나 경호원, 식사 담당 아주머니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 명절 때였는지 크리스마스 때인지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ldquo;나도 도와 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요.&rdquo;당시 김현희는 강연하고 난 뒤 사례금을 받는다거나 사회 지도층 인사로부터 격려금을 받았고 각종 선물도 받아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가 되면 자신이 받았던 선물들 중에 필요 없는 것들을 선물하려고 했다.&ldquo;선물은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 남도 좋아하는 거야. 필요 없는 물건들을 주는 게 아니야.&rdquo;수사관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김현희는 그때서야 선물의 참뜻을 이해하고 좋은 물건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23/1348377027465111.jpg"/>  ▲ 1993년 4월 17일 최 전 수사관 생일을 맞아 김현희가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낸 카드. 사진제공=최창아&ldquo;최 언니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철없고 미숙한 저를 6년이란 긴 세월 언제나 친형제처럼 따뜻이 돌보아주고 이끌어 준 사랑에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올해에는 언니가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 중 가장 추억에 남는 해가 되길 기도드리겠어요. 1993년 4월 17일 김현희.&rdquo;김현희는 내 생일에 카드를 써주기도 했다. 나는 그 카드를 지금도 갖고 있다.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많지는 않지만 돈을 내 놓으면서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하여 남자들에게는 양말, 여자들에게는 스타킹이나 커피 잔 같은 것을 선물하기도 했고 생일에는 카드도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풍속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기쁘게 생각했다.김현희는 머리가 영리하였고 공작원으로 일본인화, 중국인화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적응력도 뛰어났다.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여 바꿨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대부분의 여자들이 날씬하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니까 자신도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날씬하게 변했다. 공작원 시절 체력 단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처음 왔을 땐 허벅지와 종아리가 탄탄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이 다리가 날씬한 것을 선호하는 것을 알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두 다리를 들고 돌리기를 하는 등 노력을 많이 하여 나중엔 다리도 꽤 날씬해 졌다. 안가에서 김현희는 여수사관들과 한 방에서 침대를 같이 놓고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그녀가 &lsquo;부시럭부시럭&rsquo; 이불에서 다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 잠이 깨고는 했다.&lsquo;아이고, 잠 좀 자자!&rsquo;그럴 때마다 우리는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했다. 보통 수사관들은 24시간씩 남녀 4명씩 교대 근무를 했는데 김현희는 그렇게 하루는 집으로 퇴근하고 하루는 안가에서 근무하는 수사관들을 부러워했다. 공작원이 되어 보호와 감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김현희에게는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관들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지만 우리는 하루 이틀씩 24시간 근무를 하다 보니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약속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한 수사관이 약속은 잡혀 있고 교대해 주기로 한 다른 수사관이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교대할 수사관이 오자 신경질을 좀 냈다.&ldquo;아니 여기처럼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 신경질을 내요? 참 한심하네요.&rdquo;김현희가 옆에 있다가 끼어들었다.&ldquo;아니 이제는 네가 수사관들 머리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려고 하니? 너 주제넘은 거 아냐?&rdquo;순간 나는 두 수사관들보다 끼어든 김현희에게 호통을 쳤다. 김현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때야 내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24시간 누군가가 옆에 붙어있고 마음대로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니 답답한 심정에서 그래도 바깥에 나가 개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사관들이 부러운 심정에서 그랬을 것이다. 김현희는 지방 강연이나 간증이 있는 날이면 그래도 바깥 구경을 해서 괜찮았지만 며칠씩 안가에 있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하루는 안가에서 김현희가 보이지 않았다. 안가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그녀가 보이지 않아 발칵 뒤집혔다. 우리는 어떻게 그녀를 찾을까, 혹시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김현희가 배신을 하고 탈출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지는 않았으나 아무말없이 나간 것이 괘씸했다. 김현희 역시 우리처럼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사람들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공작원교육을 받을 때도 소위 자유주의라 하여 가끔 몰래 외출했다 돌아오곤 했다고 하더니 여기서도 역시 그 기질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우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김현희는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왔다.&ldquo;어딜 갔다가 온 거야?&rdquo;수사관들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ldquo;동네 슈퍼에요. 동네 슈퍼는 자동차로 자주 다녀 거리를 익혔기 때문에 혼자 한번 나가보고 싶었어요.&rdquo;김현희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ldquo;말이라도 하고 나가야지 걱정을 안 하잖아?&rdquo;나는 수사관이나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단단히 감시할 것을 주문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김현희는 동네 슈퍼에 들어갔으나 주인이 알아보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되돌아 나왔다고 했다.&ldquo;혹시 김현희 씨 아니에요?&rdquo;주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 김현희는 대답도 못하고 얼버무렸다고 했다. 김현희는 그 이후에 안가에서 절대로 혼자 나가지 않았다.안가에서 강연이나 간증을 다니다가 앞으로는 사회적으로도 적응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안기부 내 작은 사무실에 나가도록 했다. 사무실에서는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한 원고를 쓰기도 하고, 일본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틈날 때면 책을 읽기도 했다. 안기부의 직원이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것이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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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9’ 남녀 사이는 아무도 모른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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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6 Sep 2012 13:21: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16/1347769284463640.jpg"/>  ▲ 김현희를 담당했던 K 수사관은 그녀가 강연하기 전날 마사지를 하라며 남들 몰래 오이를 챙겨주곤 했다. 사진은 김현희가 강연을 하기 위해 대기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창아김현희는 꽃다운 처녀시절부터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여 결혼에 대한 꿈을 접은 채 몇 년을 살았고, 또 남한에서는 폭파범으로, 사형수로 있다가 이제야 겨우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는 20대의 여자였다. 사면을 받고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면서 결혼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안기부는 김현희가 한국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이름의 주민등록증을 부여해 주었다. 그래도 새 삶을 사는 것인데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며 누군가가 유명한 작명가에게 부탁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왔다. 그리고 김현희에게 한국에서는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사주(생년월일)를 바탕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설명해 주었다.&ldquo;이름이 좀 그렇네.&rdquo;김현희는 자신의 새 이름을 그리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받고서는 몇 번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면서 좋아했다.김현희는 결혼할 때까지 안가 생활을 했다. 안가라고 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어떤 곳인지 얼핏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가와는 전혀 다르다.김현희는 바레인에서 압송된 후 처음에는 안기부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실이래야 작은 간이침대와 취조를 하기 위한 책상, 조그만 소파 등이 사람 다니기도 비좁게 놓여 있었고 한편에는 화장실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조사실은 평소에도 어두컴컴하고 환기가 잘 안 되어서 수사관들이 조사를 하고 나오면 현기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가끔 피부병도 걸리곤 하는 열악한 곳이었다.조사실에서 수사가 이루어져 김현희는 자신이 KAL기를 폭파한 북한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했다. 우리 수사관들도 그녀가 자백을 할 때까지 긴장의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나 수사발표와 기자회견이 끝난 뒤에는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김현희나 수사관이나 좀 넓고 편안한 장소에서 보호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조사실은 다른 사건도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김현희가 출입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ldquo;김현희를 옮기는 것은 좋은데 어디로 옮겨? 다른 곳으로 옮기면 제대로 보안이 되겠어?&rdquo;&ldquo;신변보호도 쉽지는 않습니다.&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를 새로운 장소로 옮기는 문제로 고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보안과 신변 보호였다. 수사관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뒤에 수사국 청사 내 조그맣게 원룸 형태의 방을 만들어 거기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곳은 햇빛도 잘 들고 장소도 넓어 활동하기가 편했고 김현희가 간단히 맨손 체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방을 만든 뒤에 가구를 들이기 시작했다. 침대는 커튼으로 가려놓은 정도였지만 조그만 옷장도 놓았고 TV도 설치했다. 그러나 창문은 여전히 쇠창살로 막아놓았고 출입구도 철창으로 막아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도록 하여 조사실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처음 조사를 받던 방보다는 훨씬 좋았다.김현희는 새로 조성한 시설에서 공작원시절 밀봉교육에 대한 조사를 받았고 가끔 외국 수사기관의 면담, 목사님과의 성경공부를 위해 외출했다. 김현희에 대한 재판도 그곳에 있는 동안 진행되었다. 시간이 나면 그녀는 남한의 교과서나 소설책을 읽었고 나도 일본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일본어 회화 책을 보기 시작했다.한번은 김현희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 내가 물었다.&ldquo;나니오 시마스까(무엇을 합니까)?&rdquo;&ldquo;언니, 그게 아니라 &lsquo;나니오 시테이 마스까(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rdquo;김현희가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러 고쳐주기도 했다. TV도 함께 보았는데 그녀는 특히 뉴스와 드라마 시청을 즐겨했다. 아직까지 한국 가정의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그녀로서는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한국의 생활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같이 붙어서 생활하다보니 사소한 것으로 부딪치기도 했다.김현희는 보통 밤 10시나 11시에는 취침하지만 수사관들은 감시 겸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면 안 되었다. 그녀를 위해 조명도 어둡게 하다 보니 책도 못 읽고 해서 조그마한 소리로 TV시청을 하고는 했는데 잠자리에 든 그녀로서는 그 소리도 귀에 거슬린 것 같았다.&ldquo;어머, 이게 뭐야?&rdquo;하루는 TV시청을 하려고 하자 잠금장치가 되어 있어 켜지지 않았다. 우리는 김현희가 그렇게 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친한 K 수사관에게 말해서 TV에 잠금장치를 했나보다 하고 추측했지만 K 수사관이 우리에게 주의를 주면 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잠금장치를 한 것이 야속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숫자를 조합해 잠금장치를 풀려고 했다.비밀번호는 보통 4자리 숫자로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생일 등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ldquo;비밀번호가 뭘까? 얘 생일인 0127일까?&rdquo;비밀번호를 입력했으나 풀리지 않았다.&ldquo;한국에 올 때 12월 16일이었으니 1216으로 해봐.&rdquo;우리는 이것저것 비밀번호를 넣어보았으나 여전히 안 풀렸다.&ldquo;혹시 북한과 관계된 6&middot;25 아닐까?&rdquo;&ldquo;6&middot;25? 그럼 번호가 세 개잖아?&rdquo;&ldquo;앞에 0을 넣고 0625를 눌러봐.&rdquo;누군가 그렇게 말하여 0625를 누르자 TV가 켜졌다. 우리 수사관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고 다시는 TV에 잠금장치가 걸리지 않았다.김현희와 담당 K 수사관의 사이는 매우 가까웠다. K 수사관은 그녀가 바레인에서 온 이후부터 나와 함께 김현희와 같이 있던 담당수사관으로 나이도 지긋하고 또 성격도 자상하여 김현희와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김현희도 K 수사관을 자신의 대부처럼 믿고 따랐다. 또 K 수사관은 김현희의 가치를 잘 파악하여 그녀가 폭파범으로뿐 아니라 한 여자로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ldquo;자, 운동화다.&rdquo;K 수사관은 언론과의 인터뷰나 강연, 간증이 있을 때면 전날 저녁에 김현희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는데 실은 운동화가 아니라 오이였다. 오이 마사지라도 하라는 뜻인데 다른 사람들이 알면 창피할까봐 그렇게 전달해주곤 했다.K 수사관이 신경을 써주자 김현희도 믿고 의지하면서 따랐다. 그녀는 안기부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나 결혼을 한 후에도 K 수사관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으로 들었다.저녁 식사 시간은 5시에서 6시 사이였다. 일찍 저녁을 먹다보니 수사관이나 김현희나 9시쯤에는 출출해서 야식을 사다먹을 때가 많았다. 그녀는 처음에 올 때처럼 체중이 늘까봐 조금만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수사관들은 밤샘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고 다 먹어치우곤 했다.&ldquo;이게 뭐야?&rdquo;어느 날 청소를 하려고 그녀 책상 옆의 커튼을 들추자 요플레 1개와 치즈 1장이 창문 틈에 숨겨져 있었다. 또 하루는 어디선가 시금털털한 냄새가 나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그녀 침대 밑에 둔 오렌지 상자에서 나는 냄새였다.&ldquo;이것 많이 먹으면 예뻐지니까 미스 김만 먹으세요.&rdquo;김현희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목사님이 오렌지 한 상자를 선물로 주면서 농담 삼아 말했는데 그것을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 먹기도 전에 상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습기도 했지만 북한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는 공작원이라 할지라도 먹을 것이 부족한 땅에서 자란 그녀에게 음식에 대한 욕심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김현희의 재판이 끝나자 안기부 청사 내에 그녀를 계속 보호하는 일이 불편했다. 그리하여 김현희를 서울 시내에 있는 안가로 옮겼다. 안가는 보통 공작원이나 귀순자들이 오면 그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곳으로 일반 주택을 이용한다.안가에는 담당 수사관들과 안가의 경호를 맡는 경호원, 식사를 해주는 아주머니 등이 있었는데 김현희는 수사관들 외의 다른 사람과는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안기부 청사보다 안가에서의 생활은 좀 더 자유로웠다. 보통 하루 일과를 마치면 지하에 체육시설을 준비해 놓고 운동도 할 수 있게 했는데 공작원으로 고강도의 체력 단련을 받았던 김현희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운동은 탁구였다. 남녀 수사관들이 그녀와 편을 이뤄 탁구를 치고는 했는데 그녀는 꽤 잘 치는 편이었고 경쟁의식도 강해 조금이라도 지면 금세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나타났다.식사는 담당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아침식사나 휴일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먹어야 했다. 아침에는 늘 간단히 햄, 달걀, 잼, 우유 등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는데 보통 김현희와 여수사관이 식사 준비를 한 다음 남자수사관을 불렀다.&ldquo;H 선생은 아침 식사를 하려면 세수라도 하고 오셔야지 더럽잖아요?&rdquo;김현희는 H 수사관에게 쌀쌀하게 면박을 주었다. H 수사관도 그때 안가에서 같이 근무했는데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안기부에 입사한 노총각 수사관으로 성격도 느긋하고 말도 느릿느릿하게 하는 여유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침에 식사 하라고 부르면 항상 제일 늦게 나타났다.&ldquo;어째 H 선생은 항상 제일 늦어요?&rdquo;김현희가 으레 H 수사관에게 면박을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희와 H 수사관이 훗날 내가 안기부를 그만둔 뒤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H 수사관에게 그렇게 면박을 주던 김현희가 그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어찌되었거나 H 수사관은 김현희가 면박을 주어도 별 반응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한 뒤에 자리를 뜨곤 했다.&ldquo;H 선생은 노총각이라서 그런지 냄새도 나고 성격도 어찌나 느린지&hellip;.&rdquo;김현희는 H 수사관이 없을 때 은근히 흉을 보기까지 했다. 한번은 그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목사님이 대화 중에 농담을 했다.&ldquo;미스 최는 결혼할 사람 없어요? 혹시 없으면  H 수사관은 어때요?&rdquo;목사님은 나나 H 수사관이 미혼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물었다.&ldquo;최 언니는 그런 타입 싫어해요.&rdquo;김현희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얼른 그 말을 받아서 내뱉었기 때문에 당시 다른 수사관들 모두 김현희가 H 수사관에게 호감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런데 아무리 남녀 사이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만 내가 안기부를 퇴사한 후 1997년 12월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lsquo;H 수사관을 그렇게 비난하더니 어떻게 결혼을 했지?&rsquo;나는 김현희가 H 수사관과 결혼했다는 소식에 납득이 되지 않았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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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8’ 전향 후 생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623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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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9 Sep 2012 13:17: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09/1347164222462360.jpg"/>  ▲ 김현희는 전향 후 신앙 생활을 하며 안기부의 권유에 따라 수기를 썼다. 사진은 95년 4월 24일 &lt;일요신문&gt;과 만난 김현희.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처음엔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지시에 따라 김현희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던 일반 국민들도 자꾸 여기저기서 의혹을 제기하자 &ldquo;진짜 조작한 거 아니야?&rdquo; 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 주변의 친지나 친구들도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는 했다.&ldquo;정말 김현희가 범인 맞아?&rdquo;나는 그들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약에 김현희가 조작된 여자라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바레인까지 가서 그녀를 압송해 왔고, 일본인인 체 위장을 한 그녀를 조사하고 감시하는 일에 참여했다. 압송할 때부터 자그마치 그녀와 6년을 함께 지냈다. 그녀가 조작된 테러범이라면 나도 조작에 참여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소위 안기부가 현장 수사관들조차 모르게 감쪽같이 조작했다는 말인가. 나는 김현희가 아무리 위장에 능하다고 하더라도 6년 동안이나 자신의 정체를 안기부 현장 수사관인 우리들에게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작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은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 사건을 안기부에서 조작했다면 누군가는 양심선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다.조작설이 제기되었을 때 김현희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러한 조작설이 일어나는 것을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작설이 가라앉지 않자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각 방송사가 다투어 김현희 특집을 다루었고 MBC &lt;PD수첩&gt; 은 그녀가 만나는 것을 거절하자 집으로 들이닥치기까지 했다. 김현희의 집은 북한이나 다른 사람들의 테러 위험성이 있어서 절대 보안에 부쳐야 했다. 안기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밀을 생명처럼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는다.안기부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임무를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공개하지 않는다. 김현희에 대해서 나나 우리 수사관 누구도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공개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조작설이 일어나서면서 누군가 그녀의 주소를 MBC &lt;PD수첩&gt; 측에 가르쳐 준 것이 분명했다.&lsquo;김현희의 주소는 극비여야 하는데 어떻게 공개한다는 말인가?&rsquo;나는 김현희의 주소를 공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희는 &lt;PD수첩&gt;이 들이닥친 뒤 아이를 안고 달아났다. 그날 이후 김현희는 공포에 질려서 숨어 다녔다. 그녀는 북한에서 귀순한 이한영이 집 앞에서 괴한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더욱 공포를 느낀 것 같았다. &lt;PD수첩&gt;에 집 주소가 공개되면 북한 공작원에게도 공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나는 그러한 방송을 보면서 아쉬웠다. 김현희가 전면에 등장하여 조작설에 반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자 반박하지 못하는 김현희 입장이 이해되기도 했다.김현희는 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자식도 낳았고 시댁도 있다. 자신보다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김현희가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현희를 사면시킨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불길처럼 번져 가는 조작설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김현희는 이 이야기가 연재되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모 케이블방송에 출연해 조작설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녀의 집에 강제로 침입했던 방송국 사람들이 그녀를 협박했던 이야기까지 공개했다. 그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김현희 사건을 재조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총선거, 올림픽, 대통령선거 등이 이어지면서 곧 잊히고 말았다.&lsquo;정치인들은 정말 한심하구나.&rsquo;나는 김현희 사건이 다시 잊히자 어이없었다.김현희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안기부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전향한 공작원들에게 수사관들이 일차적으로 권하는 일이 종교를 갖게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전향한 사람들에게 종교를 갖게 하여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하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와 대립하게 한다.김현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를 안기부에서 평생 동안 보호하고 감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김현희가 사면 받은 후 가끔 안가에서 수사관들이 모여 앞으로 김현희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ldquo;김현희도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rdquo;&ldquo;김현희가 결혼하려고 해도 늘 신변의 위험이 있을까 걱정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남자가 결혼하려고 하겠어? 결혼은 힘들고 그냥 혼자 사는 게 나을걸.&rdquo;&ldquo;그래도 김현희가 결혼해야 안기부나 경찰의 보호를 벗어나지. 결혼 안하면 평생 보호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rdquo;&ldquo;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그 자식들이 살인범, 폭파범의 자식 소리 들으며 살아야 하는데 그 업보를 자식에게까지 이어주면 좋겠어?&rdquo;안기부 수사관들은 김현희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누가 생각해도 세계적인 테러리스트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ldquo;차라리 중이나 수녀가 되어 혼자 조용히 사는 게 좋겠네. 그렇지만 이미 개신교를 믿고 있으니 그냥 종교에 의지해서 혼자 살면서 강연이나 다니든가 대북방송을 하면서 사는 게 나을걸.&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가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그녀에게 혼자 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김현희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남한에 와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생활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동경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ldquo;나는 곱상하게 생긴 남자보다 듬직하게 생긴 남자가 좋아요. 계집애처럼 생긴 것보다 듬직한 것이 좋지 않아요?&rdquo;김현희는 TV에 남자 연예인이 나오면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김현희의 남자에 대한 생각은 북한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탈북자 출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들도 잘생긴 남자보다 듬직한 남자를 신랑감으로 선호하고 있었다.&ldquo;북한에 있을 때 동네에 살던 할머니가 내 손금을 보고는 &lsquo;너는 신랑이 여기에 없고 외국에 있다&rsquo;고 했는데 내가 남한에 왔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네. 그렇지 않아요? 내가 북한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rdquo;김현희가 웃으며 말한 일도 있었다.&ldquo;결혼하고 싶어?&rdquo;&ldquo;내가 무슨 결혼을 해요?&rdquo;&ldquo;북한에 있었으면 결혼했을 거 아니야?&rdquo;&ldquo;그야 그랬겠지요. 만약 이번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갔으면 당에서 소개시켜주는 사람과 결혼했을 거예요.&rdquo;&ldquo;또 공작에 동원되지 않았을까?&rdquo;&ldquo;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평양을 출발하기 전 담당 최 과장이 이번 과업이 끝나면 김 선생과 김현희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다시는 공작원으로 쓸 수 없다고 했어요.&rdquo;&ldquo;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rdquo;&ldquo;김승일은 KAL기 폭파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면 북한에서 최대의 영예인 인민영웅 칭호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나는 남성공작원과 결혼했을 거예요.&rdquo;&ldquo;왜 하필 남성공작원과 결혼을 해?&rdquo;&ldquo;언니는 그것도 몰라요? 북한은 비밀보장을 위해 집으로는 안 보내고 다른 남자 공작원과 결혼시켜 초대소에 두었을 거예요.&rdquo;나는 김현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작원들은 임무를 완수한 뒤에도 감시를 받는다. 공작원이나 스파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다고 해도 마지막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09/1347164222462361.jpg"/>   김현희는 안가에서 지내면서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안기부에서 권한 것이다. 전향한 사람들에게 수기를 쓰게 하는 것은 반공 교육의 일환이다. 국민들이나 학생들에게 주입식으로 공산당이 나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이 북한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주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김현희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김현희가 하는 일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수기를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김현희에게 수기를 쓰게 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문장이 좋았다. 북한식 말투와 남한식 말투가 달라 그러한 부분만 수사관들이 교정해 주고 대부분 그녀가 직접 썼다.김현희의 수기는 2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고 제목은 &lsquo;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rsquo;였다. 그 책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판매를 시작한 지 불과 열흘 만에 7만 부가 팔렸고 1년도 되지 않아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독자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했다.김현희의 책이 이렇게 돌풍을 일으킨 것은 그녀의 미모도 일정 부분 작용했으나 그동안 여성 공작원이 쓴 수기가 없었던 탓이다. 독자들은 그녀의 수기를 통해 북한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테러리스트가 되어 사형을 선고 받은 그녀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ldquo;감명 깊게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rdquo;학생들이 보낸 편지는 대개 비슷하고 가장 많았다. 그러나 성인 남자들이 보낸 편지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무얼 하는 남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지하게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ldquo;우리보다 김현희가 더 낫네.&rdquo;우리는 김현희에게 편지가 쇄도하는 것을 보고 웃었다. 편지는 각양각색으로 왔다. 김현희를 점잖게 꾸짖는 것도 있었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김현희에게 충고를 하는 편지도 있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듯 자신의 입던 겉옷, 속옷 등을 소포로 보낸 남자도 있었다.&ldquo;이 사람은 정신이 나갔구먼. 뭐 이런 사람이 있어?&rdquo;김현희는 화를 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안기부의 아는 사람을 통해 김현희를 사귀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꽤 성공한 인텔리 남자였다.&ldquo;참 한국 남자들 이해 못할 사람들 많네.&rdquo;&ldquo;얼굴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 맞나봐.&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고 한담을 나누고는 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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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7’ 사형 판결과 사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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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2 Sep 2012 13:20: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02/1346559602461300.jpg"/>  ▲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사면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대통령의 통치 행위이자 고도의 정치 행위다. 7월 17일 제헌절이나 8월 15일 광복절 같은 국가의 경축일과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에 많은 사람들이 사면복권된다. 특히 정치인들과 경제인, 재야인사들이 사면 복권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신문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생활 때문에 범죄자가 된 사람들, 운전면허정지, 벌금 등도 형집행정지나 사면을 시키고는 했다. 그러나 김현희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알 수 없었다. 현장에 있는 수사관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런 식으로 보도를 하자 사면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어느 사이에 그렇게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현희에게는 사면을 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상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말단 수사관인 우리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유가족들은 재판이 벌어질 때마다 법정에서 김현희를 비난했다.&lsquo;김현희도 괴롭겠구나.&rsquo;나는 유가족이나 양심수협회 회원들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김현희가 측은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김현희와 2년을 보낸 것이다. 김현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고 숙소로 데리고 오는 일을 하는 나로서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검찰의 사실심리와 변호사의 반대심문, 그리고 최후 변론까지 끝나자 선고가 실시되었다.&ldquo;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과 참회하는 피고인의 눈물을 합께 보면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피고인은 북한 공산주의 집단의 대남공작원으로 대한항공858편을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이를 실천에 옮겨 115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자로서 이 같은 범행은 동기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도 지극히 잔인하고 악랄한 소행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돼 어떠한 정상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rdquo;정상학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김현희는 울음을 터뜨렸다.&lsquo;죽음이 두려운 것인가?&rsquo;나는 김현희가 통곡하는 것을 보고 착잡했다. 김현희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무엇이라고도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김현희는 며칠 동안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곧이어 항고를 하여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판 준비를 해야 했다.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등법원에서도 사형이 선고되고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었다.&ldquo;나는 이제 어떻게 돼요?&rdquo;김현희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ldquo;글쎄.&rdquo;나는 김현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도 없었다.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의 사형판결이 난 후 한 달이 채 안된 4월 12일 김현희와 안가에서 오후를 보낼 무렵 담당 K 수사관이 환한 얼굴로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ldquo;김현희!&rdquo;나와 김현희는 K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K 수사관은 대통령의 특별 사면장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나는 놀라서 김현희를 응시했다. 김현희도 놀란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사면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지만 사형 확정 이후 많은 TV나 신문 등 언론을 통해 김현희가 사면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에 그녀도 자신이 사면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면이 이토록 빨리 이루어진 것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복권이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김현희의 신병 관리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면복권하지 않으면 사형수 신분으로 계속 구금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으로 보호 관리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K 수사관은 엄숙한 표정으로 김현희에게 차렷 자세를 하게 하고 사면장을 읽어주었다. 사면장을 읽는 그의 목소리도 떨렸다.&ldquo;김현희, 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새로 태어나는 거야.&rdquo;K 수사관이 말하고 사면장을 건네주었다.&ldquo;축하해!&rdquo;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우리도 기뻐해 주었다.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쳐 사형판결을 받은지라 그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죄를 용서받고 벌을 면제받는 것이니 그녀도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비록 그녀가 사형이라는 형벌은 면했다고 할지라도 평생 &lsquo;살인범, 폭파범 김현희&rsquo;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삶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가끔은 그때 죽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최근에도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산다는 얘기를 들으니 사형은 면했어도 그에 못지않은 형벌을 받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902/1346559602461301.jpg"/>  ▲ 영화 &lt;마유미&gt;에서 KAL기가 폭파되는 장면.누군가 농담 겸 진담으로 KAL기 폭파 때 같이 임무를 수행하던 김승일은 독약 앰플을 깨물고 죽었는데 김현희는 살아난 점,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할 운명에서 살아난 점 등을 들면서 명이 길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김현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 북한에서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에 걸려 불구가 될 뻔했는데 마침 이웃집에 의사 친척이 방문해 있어서 그녀의 다리를 고쳐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몇 년 후 김현희가 안기부 보호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녀가 자신의 소형차를 운전하며 가다가 대형 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나서 차는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크게 부숴졌지만 그녀는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멀쩡했다면서 그때도 주변사람들이 &lsquo;김현희가 명이 길긴 긴가보다&rsquo; 말했다고 한다.김현희의 사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115명이란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든 김현희를 사면한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북한은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KAL기 폭파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탄로 나면 목숨을 걸고 자결하여서라도 이 사건이 북한에서 지시한 것이라는 걸 비밀에 부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계속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언론매체와 해외 산하단체를 총동원하여 KAL기 폭파가 남한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김현희만이 사건의 진상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며 이러한 북한의 실체를 알리는데 김현희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 차원에서 오랫동안 실시해온 반공정책이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공작원이 북한의 실정을 폭로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반공 교육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50년대부터 전향한 간첩이나 공작원들을 처벌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강연 등을 하게 했다.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공비 31명이 서울에 침투하여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했을 때 서울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행이 무장공비가 모두 사살되고 유일하게 김신조가 생포되었다.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한 특수부대 출신의 김신조도 처벌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교육의 증인이 되었다. 공작원들이나 공비들을 처형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처형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현희도 그러한 측면에서 사면을 하게 된 것인데 그녀가 사형을 당했다면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형을 시켰다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당시 김현희의 사면을 두고 한 일간신문의 논설에 실린 논평을 보면 김현희야말로 최상의 반공교육이라고 하였다.&ldquo;국민의 반공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텔레비전 앞에 나온 김현희의 얼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국민은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군더더기는 전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반공정책의 당사자들이 늘 하던 방식으로 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시민들은 머쓱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할 때도 됐다.&lt;중략&gt; 여기서 우리는 다시없이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곧 우리가 자유롭게 잘 사는 것 이상으로 효과적인 반공의 무기는 없다는 교훈이다. 우리가 잘 사는 한, 우리는 조금도 북괴의 적화공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래서 김현희는 살려주는 게 좋겠다. 잘사는 나라의 자유로운 생활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우리들 자신이 잊지 않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더욱 아름답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북괴가 얼마나 잔인한 테러의 나라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산증인으로서 오래 살아줘야 한다. 지난 번 랭군 사건에 대해서도 북괴는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이번에도 김현희라는 인물이나 가족은 이북에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고 일본의 일부 저널리즘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한 허망한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잘 살아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줘야 하는 것이다.&rdquo;KAL기 사건이 발생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그 무렵 안기부에서 퇴직해 있었고, 정권도 문민정부, 참여정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때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었나 하는 기억도 희미해질 무렵 김현희가 남한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소설이었다. 나는 소설이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로서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 어쩐지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 것이다.소설이 출간되고 공영방송을 비롯한 각 방송사의 특집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소위 국가 차원의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라는 곳에서 재조사를 하는 등 그 의혹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lsquo;일고의 가치도 없다&rsquo;는 반응을 보였던 국가정보원도 &lsquo;국회의 재조사 요구에 응할 용의가 있다&rsquo;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결국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도 재조사의 결과 &lsquo;항간의 의혹은 많았지만 조사 결과 KAL기 폭파 사건은 북한공작원에 의한 폭파&rsquo;라고 결론지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6’ 법정에서 벌어진 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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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6 Aug 2012 14:01: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26/1345957278460110.jpg"/>  ▲ 1989년 3월 7일 첫 공판에 출석한 김현희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문득 흰 소복을 입은 유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광경을 본 김현희는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솔직히 자기가 115명의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직접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또 폭파를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어서 늘 입으로는 자기가 무고한 생명을 죽여 죽어 마땅하고 유가족에게는 머리 숙여 백번 사죄한다고 했지만 자신의 죄가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TV에서나 보았던 유가족을 눈앞에서 마주 대하게 됐으니 그 놀라움과 당황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김현희가 탄 차량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ldquo;저년, 죽이라&rdquo;고 절규하고 있었다.&lsquo;진짜 간첩 김현희는 살려두고 양심수 조작이 웬 말이냐?&rsquo;양심수 가족협의회 회원들이 경찰관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김현희도 이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유가족들의 모습에 그들의 슬픔이 피부에 와 닿으며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lsquo;나도 만약 내 가족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죽는다면 저렇게 하겠지&rsquo;라는 생각을 하였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긴장감으로 법원에 팽팽한 공기가 감돌았다.&ldquo;우리가 옆에 있으니까 당황하지 마, 유가족들이 저러는 것을 네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해.&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를 안정시키면서 그녀의 양 팔을 끼고 법정 뒤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우리 수사관들과 의사, 간호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거기서도 김현희는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재판은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에 앞서 우리는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김현희에게 청심환을 주었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리고 김현희에게 입장하라고 했으나 그녀는 주저하며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착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한 손에 손수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엔 주머니에서 꺼낸 조그만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며칠 전 목사님이 건네 준 성경 구절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리라.&ldquo;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라.&rdquo;김현희의 손에 쥐어진 쪽지에는 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이 씌어 있었다.김현희가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유가족들이 다시금 울부짖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ldquo;이년아, 내 아들 살려내!&rdquo;어느 나이든 여인이 외쳤다.&ldquo;내 남편 살려내.&rdquo;이곳저곳에서 울부짖듯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현희는 그 소리에 흠칫했다.&ldquo;네가 안했으면 안했다고 그래.&rdquo;방청석에서 호소와도 같은 외침도 들려왔다. 김현희가 안했다고 그러면 누가 했다는 말인가.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ldquo;조용히 하세요.&rdquo;정상학 판사는 계속 정숙을 요구했고 그래도 유가족들의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ldquo;소란이 계속되면 재판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퇴정시키겠습니다.&rdquo;정상학 부장판사가 최후 통고를 하자 겨우 재판정은 진정되었다.첫 번째 재판은 검사의 공소사실유지 진술과 김현희가 자기의 인적사항을 인정하는 절차와 검사의 직접 심문으로 약 6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김현희는 검사의 진술이 계속되는 동안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ldquo;피고는 이름이 무엇입니까?&rdquo;검사의 진술이 끝나자 재판부가 김현희에게 물었다. 김현희는 우느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ldquo;김현희입니다.&rdquo;&ldquo;나이와 생년월일을 말해주세요.&rdquo;&ldquo;나이는 스물일곱 살이고&hellip;.&rdquo;&ldquo;출생지는 어디입니까?&rdquo;&ldquo;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hellip;.&rdquo;김현희는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대답하는 김현희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않자 방청석에서 &ldquo;크게 말해&rdquo;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중간에 점심시간이 있어 우리는 도시락을 먹었는데 김현희는 국물만 마실 뿐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판사가 다음 재판 기일을 말하고 재판이 끝나자 다시금 유족들이 웅성거렸다.김현희가 일어서서 재판정을 나오려고 하자 어디선가 신발이 날아와 김현희의 머리를 스쳤다. 당황하긴 그녀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들을 뒤로한 채 재빨리 법원 청사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다시 조사실로 돌아온 후 김현희에게 쉬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침대에 커튼을 치고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녀가 예민해져있으니 더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lsquo;죄를 짓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rsquo;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현희의 죄는 어떠한 상태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KAL기 폭파사건을 저지른 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북한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든 일은 김승일이 주도했다. 물론 그가 죽어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진술만으로 따져 보면 폭발물을 설치한 것도 김승일이었고 운반한 것도 김승일이었다. 그녀는 김승일이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해 수행한 보조 공작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그러나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비행기 테러는 일반 살인사건과 다르다. 보조 공작원이라고 해도 무서운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1989년 3월 21일에 2차 공판이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재판을 받았던 1차 때와는 달리 유가족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본 그녀로선 다시 재판을 받는 일이 공포였을 것이다.&ldquo;재판정에 안 나가면 안 돼요? 모든 처벌을 받을 테니 재판을 받지 않게 해주세요.&rdquo;김현희는 며칠 전부터 담당수사관에게 애원하듯, 항의하듯 말했다. &ldquo;처벌을 받더라도 재판을 받아야 해.&rdquo;&ldquo;그냥 처형을 시켜도 좋다고 했잖아요?&rdquo;&ldquo;이 사건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지 알잖아? 힘들더라도 재판을 받아야 돼.&rdquo;수사관들은 재판을 거부하는 김현희를 설득했다. 2차 공판은 변호인의 반대신문과 검사의 보충신문, 재판장의 신문과 증거조사로 진행되었다.&ldquo;재판 받으러 온 년이 어떻게 머리를 저렇게 곱게 길러?&rdquo;유가족과 양심수가족협의회 등에서는 이날도 김현희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ldquo;왜 죄수복도 안 입고 수갑도 안찼어?&rdquo;&ldquo;네가 안했다고 양심선언 해!&rdquo;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김현희를 압송할 때부터 1년이 넘게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그녀가 가짜라는 생각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양심수가족협의회나 일부 재야단체들은 KAL사건이 조작이라고 생각을 한다. 자국민 115명을 비행기 폭파로 죽게 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안기부가 정권을 위해 우리 국민 115명을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변호인의 신문에 김현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ldquo;안 들려, 크게 말해!&rdquo;유가족과 방청객들은 그럴 때마다 크게 외쳤다. 그들에겐 김현희의 존재가 미움과 저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날도 김현희는 손에 쥔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을 마쳤다. 그 후 3차 공판에서는 검찰에서 신청한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KAL기 폭파당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가 바그다드-아부다비 항공권을 예약하고 바그다드에서 내려 바레인으로 간 것 등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 준 김태환 대한항공 아부다비 지점장과 미얀마로 가서 KAL 858기의 잔해 수색을 한 안상혁 대한항공 정비본부 기체점검부 객실정비소장과 한재기 교통부 서울지방항공관리국 검사과장, 폭파된 KAL기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까지 운항했을 때 당시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직접 기내 서비스를 담당했던 박은미 대한항공 승무원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난 이들을 보면서 김현희가 붙잡힐 수 있고  폭파범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같은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인 것에 고마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26/1345957278460111.jpg"/>  ▲ 1989년 4월 25일자 &lt;경향신문&gt;.2차 공판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을까. 김현희가 잠시 숙소를 비웠을 때 우연히 그녀의 책상 서랍에서 그녀의 일기장을 보았다. 책상이나 개인 물건은 혹시 그녀가 위험한 거라도 감추고 있지 않나 하는 차원에서 가끔 검사하지만 그녀가 일기를 쓰고 있는지는 몰랐다. 잠시 주저했지만 그녀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몇 장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자기의 일상생활이 적혀 있었고 가끔 수사관들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수사관은 좋은 수사관이고 사무적이나 좀 까다롭게 대하는 수사관은 성격이 안 좋은 수사관으로 묘사되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에 대해선 어떨 땐 좋다가 어떨 땐 안 좋게 써 놓았다. 그리고 공판에 대해서도 썼는데 그 내용에는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다.&lsquo;처음 재판에 들어가 유가족들을 보았을 땐 죄스럽고 마음도 아파 눈물이 났는데 계속적으로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니 마음 한구석에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남들 앞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나 하는 생각에 더욱 눈물이 났다. 나중엔 그래, 더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rsquo;김현희는 자신의 심정을 일기에 썼다. 이런 글을 보고 그녀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욕설을 듣고 날아오는 주먹에 머리통을 쥐어 박히고 하면 일순간 그런 생각도 들겠지, 라고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지루한 재판이 끝나고 마침내 김현희에겐 1심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현희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자 당혹스러워하면서 괴로운 표정이었다. 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 &lsquo;앞으로 사면이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rsquo;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는 말로 대신했을 뿐이다.  사실 이 무렵 재판이 끝나면 김현희에게 사면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신문에서 그와 같은 예측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ldquo;한국정부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오는 3, 4월께 재판에 회부한 후 서울올림픽 개최 전인 금년 6, 7월께 특별사면 석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김에 대한 사면 조치는 북한의 비열한 테러 행위에 대한 유일한 산증인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히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세계 각국에 북한의 범죄를 재확인시킴으로서 테러의 재발 방지에도 효과가 있다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rdquo;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1988년 1월27일 보도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1989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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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5’ 마침내 법정에 오르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590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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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9 Aug 2012 14:0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19/1345352589459040.jpg"/>  ▲ 1989년 3월 7일 김현희가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옆의 여인은 최창아 수사관으로 전날 미용실에 들러 머리모양을 업스타일로 하고 자느라 잠을 설쳤다고. 연합뉴스김현희는 영리하고 기억력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북한의 교육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달달 외워야 하는 암기식 교육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녀가 공작원 시절 교육받은 내용도 거의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올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바레인 리젠시 호텔에서 김승일과 김현희에게 아는 척을 했던 일본 여자가 바레인 경찰에 잡혀있을 때 통역으로 와서 다시 만났으며 그 여자의 이름이 오쿠보인 것도 기억해 냈었다.교회에 신앙 간증을 다닐 때도 성경구절과 간증 내용을 거의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암기했다. 심지어 연말이나 수사관 생일에 카드를 보낼 때,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수사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ldquo;누구 말이지?&rdquo;하고 물으면 &ldquo;아 ooo선생 있잖아요?&rdquo;하며 수사관의 본명을 써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도 했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수사관들은 피의자나 외부인 앞에서는 서로 본명은 부르지 않도록 되어 있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다보니 무의식중에 가끔 서로 본명을 부르곤 했는데 그걸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김현희였다.김현희에 대한 사면은 어떻게 하여 결정이 된 것일까. 그녀가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떠나 북한에서 넘어온 공작원들은 자수하거나 귀순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체포되어 전향을 하면 대부분 남한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는 것이 당국의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간첩이나 공작원들, 심지어 무장공비까지 전향을 시켜 북한의 폐쇄성과 적화통일 야욕을 홍보하는 임무를 맡기고는 했다. 예를 들어 1&middot;21사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까지 사형을 시키지 않고 사면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홍보하는 요원으로 활동하게 했다. 김현희의 재판과 사면에 대해서 나는 결정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나는 85년에 안기부에 입사한 햇병아리 수사관이기 때문이었다.KAL 858기에 대한 수사발표와 기자회견이 있은 후 피의자 신분이었던 김현희는 사안의 중요성과 보안 때문에 여전히 안기부 수사관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미국, 일본, 기타 여러 나라의 수사기관들과 면담도 하고 일본과 서방 언론사들과 인터뷰도 하면서 보냈다.우리로선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의 진상을 국내외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우리가 먼저 나설 것도 없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먼저 만나자는 제의가 왔으니 우리로선 다행이 아닐 수 없었기에 대부분 흔쾌히 만남을 허락하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기도 했다.김현희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목사님과 성경공부도 하고 지냈다. 김현희를 보호하는 문제는 안기부의 난제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수사국 내에 가건물을 만들어 거기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원룸형태로 지어 침상과 샤워실을 만들고 커튼으로 칸막이를 했을 뿐이었다. 김현희는 1급 보안을 요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관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89년이 되자 김현희에 대한 재판 문제가 대두되었다. 김현희에 대한 처분은 불기소 처분, 기소유예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김현희에게 재판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다.&ldquo;왜 갑자기 재판을 받아요?&rdquo;김현희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표정이었다.&ldquo;사건이 중대한데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주목하고 있어요.&rdquo;&ldquo;재판을 받기 싫어요.&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19/1345352589459041.jpg"/>  ▲ 당시 &lt;동아일보&gt;에 실린 &lsquo;김현희 첫공판&rsquo; 제하의 기사.김현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지금까지 막연히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어떤 처분이 내려지겠지라는 생각은 하였지만 막상 법정에 나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통고를 받자 불안감이 엄습한 것 같았다. 재판이라 하면 북한에서 인민재판을 연상하여 만인 앞에서 비난을 받고 처형당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안기부가 유용한 정보를 다 빼내자 대중 앞에 세워놓고 재판을 받게 한 다음 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재판이란 소리에 그녀는 매우 흥분해 있었고, 왜 처음부터 재판을 받게 된다는 얘기를 안 해주었냐고 언성을 높였다. 담당 K 수사관은 이런 그녀를 몇 시간 동안이나 앉혀놓고 설득을 해야 했다.  김현희에게 국선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었고 수사기관이 범인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줄 수 도 없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변호사들이었다. 안동일 변호사는 4&middot;19에 참여했던 학생운동권 1세대이며 변호사 개업 이후에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시국사건 등을 맡아왔기 때문에 당시 안기부로서는 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과연 김현희의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줄지 걱정이었다. 우리는 혹시 김현희 변호에 불리하지 않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국선변호인 선임은 사법부의 소관이었다.검찰은 이상형 검사와 차동민 검사를 배정했고 주심은 서울형사지방법원 정상학 수석부장판사였다.&ldquo;김현희 씨, 인민검찰소에서 나온 분입니다.&rdquo;수사관들이 이상형 검사를 김현희에게 소개했다. 수사관들은 검찰을 소개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북한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자 김현희의 얼굴이 굳어지며 표정이 바뀌었다.&ldquo;인민검찰소가 뭘 하는 곳인지 압니까?&rdquo;이상형 검사가 웃으면서 물었다.&ldquo;대남공작원을 검거한 뒤에 무자비한 고문을 가해서 일급비밀을 알아낸 후 죽이는 기관 아닙니까?&rdquo;이상형 검사는 웃었다. 그는 안기부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검찰에 송치되자 검사실에서 조사했다. 김현희가 검찰에 출두할 때 출입기자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어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상형 검사는 출입기자들을 내보낸 뒤에 김현희를 조사했다. 그때 갑자기 &ldquo;김현희를 구속하라&rdquo;는 시위대의 함성이 들렸다. 이상형 검사가 깜짝 놀라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니 연합통신 근로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하라는 시위였다. 그래서 안심하고 김현희를 불러서 창문 밖을 보게 했다.&ldquo;세상에 인민검찰소 앞에 와서 전직 국가원수 부부를 구속하라고 데모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rdquo;김현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현 서울시청 별관)에 있었다.1989년 2월 김현희는 법원에 기소되었다. 이상형 검사는 수사 결과를 발표해야 했다. 그러자 특정 언론사 기자 2명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ldquo;김현희가 북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rdquo;기자는 김현희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형 검사는 당혹스러웠다.&ldquo;기자님, 김현희가 외모나 한국어 능력을 볼 때 한민족이라는 건 인정하겠습니까?&rdquo;이상형 검사가 기자에게 되물었다.&ldquo;그렇습니다.&rdquo;&ldquo;매 시간 별로 김현희 얼굴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고 있는데 만일 김현희가 남한 사람이면 누군가, 어느 오지에서라도 아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rdquo;기자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김현희는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변호인들과는 몇 차례 서울 시내에 있는 모처에서 만났다. 이때 변호인들은 수사관이 참석하지 않고 김현희와 단독으로 만나 면담할 것을 요청했다.&ldquo;좋습니다.&rdquo;안기부는 변호인들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김현희는 두 변호사가 자기를 위해 변호를 해준다는 데 고마움을 느끼며 남한에서 만난 사람들 중 특히 두 사람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에 안동일 변호사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맡은 이 사건이 조작으로 몰리는데 대해 &lt;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gt;라는 책을 펴내 누구보다도 강력히 김현희야말로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이며 KAL기 폭파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증언했다. 정재헌 변호사는 가수 조용필의 이혼관련 변호를 했는데 김현희에게 조용필이 사인한 카세트테이프를 갖다 주어 김현희가 매우 좋아했다. 김현희도 남한에 와서 가요를 많이 들었는데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여 노래방에 가면 &lt;친구여&gt;를 곧잘 부르곤 했다.노래방은 1년에 한두 번 갔었다. 안가생활을 하면서 김현희나 수사관들이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했고 김현희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김현희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lsquo;서울의 종&rsquo;, &lsquo;친구여&rsquo;, &lsquo;사랑의 미로&rsquo; 등이었다. 한 번은 자기가 아는 노래가 다 떨어졌는지 노래책을 뒤적이면서 보다가 &lsquo;백도라지&rsquo;라는 민요제목을 보고는 북한 말투로 &ldquo;여기 백도라지는 어떤가?&rdquo;해서 수사관들이 웃음보를 터뜨린 적이 있다.변호인들이 김현희에 대해 단독면담을 요청한 것은 그들도 김현희 조작설 관련 의혹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변호를 하기 위해 김현희를 면담하면서 그들은 KAL기 폭파범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들은 김현희를 집으로 초대하여 남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89년 3월 7일 1심 첫 재판이 있었다. 나는 김현희가 법정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였다. 수수한 감색 체크무늬의 점퍼와 카키색 면바지였다. 김현희는 전 날 잠을 설쳤는지 얼굴도 부석부석하였다. 나도 부석부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원에 들어서면 분명 많은 언론사에서 와서 촬영을 하고 사진을 찍을 텐데 또 얼굴이 노출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전날 단골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모양을 업스타일로 하고 자느라고 잠을 설쳤다.재판 날 아침 여러 명의 수사관들과 두 명의 여수사관, 의무실 의사, 간호사 등 많은 인원이 함께 법정으로 출발하였다. 김현희와 나는 스텔라 승용차에 탔다. 긴장한 탓인지 춘삼월의 아침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서소문 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자 앞에 법원 문이 보였다. 그 앞에는 이미 언론사 차량과 경찰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대법정 앞에는 KAL기 유가족 30여명이 몰려와 &lsquo;살인범 김현희를 공개 재판하여 처형하라&rsquo;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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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4’ 증언 그리고 고백수기 출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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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2 Aug 2012 14:0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12/1344747966458210.jpg"/>  ▲ 김현희가 1995년 5월 20일 자신의 일본인화 교육을 맡았던 일본 여성 이은혜를 회상하는 3번째 고백수기 &lt;이은혜, 그리고 다쿠치 야에코&gt; 발간에 맞춰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심경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김현희가 김숙희와 같이 교육받고 해외실습을 하다가 김현희는 일본인화 교육을 위해 김숙희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몰랐다고 진술했다. 공작원들은 서로 어떤 교육을 받는지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이므로 가능한 얘기라 생각한다.나는 지무라 후키에의 증언에 따라 김숙희가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공작에 투입되었을지 궁금했다. &lsquo;북한은 공작원들을 철저하게 현지인으로 훈련시키는구나.&rsquo;그 무렵 일본 기자들로부터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이 김현희를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고, 만나는 게 여의치 않다면 편지라도 전해주길 바라지만 김현희와의 연락이 전혀 안 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보도를 통해 들었다.&lsquo;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rsquo;나는 그들이 김현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김현희는 일본을 방문했다. 이은혜 사건이 터진 지 10년이 넘은 뒤의 일이었다. 그녀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몰랐기 때문에 철저한 경호가 이루어졌다. 김현희는 일본에서 결국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을 만났다.이은혜에 대한 신원이 아직 밝혀지기 전에 안가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누군가가 김현희에게 유명한 그리스 여가수인 &lsquo;나나 무스쿠리&rsquo;의 노래 테이프를 주었다. 나나 무스쿠리는 한때 한국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그녀의 히트곡은 &lt;plaisir d&rsquo;amour&gt;, &lt;Amazing Grace&gt;, &lt;The River In The Pines&gt;, &lt;Parapluies De Cherbourg&gt;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김현희는 그녀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하더니 곧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나 무스쿠리는 성량이 풍부하고 서정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ldquo;이 노래가 무슨 뜻이에요?&rdquo;하루는 김현희가 &lsquo;Donna Donna&rsquo;라는 제목의 노래를 듣다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ldquo;왜 그래?&rdquo;나는 의아하여 김현희에게 되물었다.&ldquo;이 노래가 일본 노래인가요?&rdquo;&ldquo;아니야. 나나 무스쿠리가 불렀으니 그리스 노래겠지.&rdquo;&ldquo;일본 노래가 아니었어요?&rdquo;&ldquo;아니야. 왜 그러는데?&rdquo;&ldquo;이은혜가 이 노래를 일본 말로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요.&rdquo;나는 김현희에게 그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ldquo;북한에서 이은혜와 함께 초대소 주변을 산책한 일이 있어요. 그때 이은혜가 초대소 주변 풍경이 자기가 알고 있는 노래 가사와 비슷하다면서 일본어로 된 저 노래를 가르쳐 주었어요. 가사 내용이 처량하여 속으로 &lsquo;이은혜가 자신의 처지를 처량하게 생각하나보다&rsquo;라고 생각했었어요. 나는 이 노래가 일본 노래인 줄 알았어요.&rdquo;어느 맑은 낮에 시장으로 가는 길마차에 딸그락딸그락 송아지를 싣고가네귀여운 송아지 팔려가네슬픈 눈빛으로 보고있네요도나 도나 도나 도-나 송아지를 태우고도나 도나 도나 도-나 마차가 흔들리네가사는 대강 이런 내용이다. 이  나나 무스쿠리에 대한 이야기는 주무수사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됐다. 김현희의 일상은 언제나 상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얼마 후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된 일본의 간사이 TV에서 김현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안기부에서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뒤에 인터뷰를 허락했다. 일본은 어떻게 하든지 이은혜의 신원을 밝히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김현희에게 일본어로 인터뷰를 할 것을 요청했다.&ldquo;왜 일본 말로 인터뷰를 하자는 것일까요?&rdquo;김현희가 의아하여 물었다.&ldquo;김현희 씨가 일본어를 배웠다고 하니까 그렇겠지.&rdquo;김현희는 일본어로 인터뷰를 하게 되자 약간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북한공작원임을 자백한 이후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면서 인터뷰 날이 다가오자 며칠 동안 연습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일본의 간사이 TV와 인터뷰가 시작되었다.&ldquo;이은혜 씨와 친하게 지냈나요?&rdquo;카메라가 돌아가고 진행자가 김현희에게 물었다.&ldquo;네.&rdquo;&ldquo;이은혜 씨가 강제로 납치되었다고 하던가요?&rdquo;&ldquo;본인이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어요.&rdquo;&ldquo;그럼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rdquo;&ldquo;초대소에서 일을 하는 식모에게 들었어요.&rdquo;&ldquo;어떻게 납치되었다고 하던가요?&rdquo;&ldquo;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rdquo;&ldquo;고향을 그리워하던가요?&rdquo;&ldquo;네.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부모님도 그리워하는 것 같았고&hellip;.&rdquo;&ldquo;이은혜가 가르쳐 준 노래가 이 노래가 맞는지 들어보십시오.&rdquo;인터뷰가 시작되고 은혜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간사이 TV의 진행자는 인터뷰 중간에 일본어로 부른 도나 도나 노래를 녹음해 와서 김현희에게 들려주었다. 김현희는 일본 가수가 부르는 도나 도나를 듣자마자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지 눈물을 흘렸다. 카메라 기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연신  셔터를 눌렀다.  &ldquo;이 노래가 맞습니까?&rdquo;&ldquo;맞아요.&rdquo;&ldquo;일본어로 불렀나요?&rdquo;&ldquo;네.&rdquo;&ldquo;이은혜 씨가 김현희 씨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는데 조금만 불러 볼래요?&rdquo;김현희는 머뭇거리다가 진행자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조금 불렀다.&ldquo;다른 것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rdquo;&ldquo;생각나는 게 없어요.&rdquo;김현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행자는 계속 질문을 했으나 김현희의 대답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나는 이은혜의 신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경찰이나 언론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당시 수사를 담당하고 있던 S 부국장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이은혜의 신원을 찾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김현희는 더 이상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하루는 S 부국장이 나를 집무실로 불렀다.&ldquo;김현희는 어떻게 지내?&rdquo;&ldquo;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rdquo;&ldquo;김현희가 정말 이은혜에 대해 그것밖엔 모르는 것 같은가?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해보지.&rdquo;&ldquo;네.&rdquo;나는 대답을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ldquo;자네 혹시 김현희가 일부러 이은혜를 보호하려고 감추는 것 같지는 않나?&rdquo;&ldquo;글쎄요,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rdquo;&ldquo;알았어. 이은혜에 대해서 숨기고 있는지 잘 물어 봐.&rdquo;나는 S 부국장의 사무실을 나왔다. 김현희에 대한 공적인 취조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취조할 수는 없었다.&lsquo;김현희가 정말 이은혜에 대해서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rsquo;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이은혜는 북한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납치되었던 사실이 공개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이은혜의 신상이 공개된 후에 그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은혜의 죽음이 자연사인지 처형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숙청되었으나 북한이 그렇게 발표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면서 김현희는 잊히기 시작했다. 외국 수사기관이나 언론들의 김현희와의 인터뷰 요청도 뜸해졌고 전국 각지 교회의 요청에 따라 돌아 다녔던 신앙 간증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김현희가 이은혜의 가명이 치토세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결국 이은혜의 신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12/1344747966458211.jpg"/>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회사인 안기부를 퇴사했다. 김현희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8년 동안이나 그녀와 함께 생활했으나 이제는 만날 날이 없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2년쯤 지났을 때 김현희가 이은혜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제목은 &lt;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gt;였고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 초대소에서 이은혜와 함께 생활했던 내용이었다. 거기엔 이은혜와의 생활이 상세하게 쓰여 있었고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그녀가 처음 안기부에 잡혀와 이은혜에 대해 자백했던 87년부터 이은혜의 신원이 밝혀진 91년까지 우리 수사관들과 일본 경찰, 언론에서 밝힌 이야기였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한두 개씩 섞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나 일본 경찰이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들로 수사 과정에서, 혹은 일본경찰이 알았더라면 더 빨리 이은혜를 찾을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즉 어머니는 고향이 사토(佐渡)이고 일흔이 넘도록 요리사 일을 하였으며, 아버지는 사회적인 노동이 불가능해서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치질이 심했다는 이야기는 그간 일본 경찰과 언론기관을 비롯해서 많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었다. 또 8남매 중 이은혜는 막내이며 고향인 사토에 좋아하던 사촌오빠가 있었다는 얘기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을 되살리면 잊혔던 얘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의 사실들만으로도 많은 실종자들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다.&lsquo;왜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야 나오는 거지?&rsquo;나는 김현희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종된 이은혜를 찾는 일본경찰 입장에서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과연 김현희는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이며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 사항들이 속속 밝혀지자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은혜가 되살아난 것일까?아니면 이은혜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을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저서에 끼워 넣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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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3’ 일본 경찰의 집요한 수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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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5 Aug 2012 13:59: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05/1344142778457140.jpg"/>  ▲ 1992년 11월 6일 &lt;한겨레신문&gt;에 보도된 북한과 일본의 수교교섭 중단 기사. 북한 측은 &lsquo;이은혜 문제&rsquo; 거론을 거부하며 퇴장했다.이은혜는 북한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김현희가 나중에 초대소 식모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85년경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조사부 소속과의 한 운전수가 술에 취해 이은혜에게 찾아가 누구는 주면서 왜 자기에게는 안 주냐면서 이은혜의 몸을 요구하는 등 소란을 피워 담당지도원과 운전수가 파면되고 다른 운전수들도 혁명화 교육의 일환으로 집체적 체조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lsquo;결국 몸까지 주면서 살게 되었구나.&rsquo;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은혜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자 씁쓸했다. 훗날 이은혜의 납치문제가 일본과 북한의 외교문제로 번지자 북한은 처음에는 이은혜의 존재를 부인하다가 결국 87년에 사망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젊은 여인이 죽었다는 것은 숙청되었거나 북한 사회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김현희의 진술에 의해 북한이 공작원 교육을 위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열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때까지 일본 경찰은 납치 일본인들을 &lsquo;행방불명자&rsquo;나 &lsquo;실종자&rsquo;로 처리했다. 물증이 없어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의 진술로 인해 이은혜가 납치 일본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자나 실종자로 처리된 사람들 중에 실제로는 납치된 사람들이 다수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갖게 되었다.일본 언론은 자국민이 납치되었는데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일본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한에 일본인 납치를 항의하고 납치한 일본인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인을 납치하지 않았다고 강경하게 부인했다. 일본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과의 회담에서 자국민 납치를 문제 삼았다. 마침내 북한으로부터 납치사실을 인정하게 하였고 몇 명의 생존자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김현희의 일본어 교관이 납치된 일본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 수사기관과 여러 언론기관에서는 이은혜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김현희와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일본 수사관들이나 언론기관들과 면담을 할 때는 안가를 공개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했다.&ldquo;이은혜의 일본 이름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rdquo;&ldquo;기억나지 않아요. 그곳에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아요. 나도 초대소에서는 김옥화라는 가명으로 지냈어요.&rdquo;&ldquo;이은혜가 자기 고향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rdquo;&ldquo;고향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없어요.&rdquo;&ldquo;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니 말씀해 주세요.&rdquo;&ldquo;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는 서로의 신분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이 기본 원칙이에요.&rdquo;김현희는 안기부에서 진술한 것 외에는 더 이상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ldquo;몽타주를 작성할 수 있겠습니까?&rdquo;일본 수사관들이 요청하자 김현희가 우리 수사관들을 돌아보았다. 수사관들은 일본 수사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 수사관들은 몽타주 요원을 데리고 와서 김현희와 몇 시간에 걸쳐 작업을 했다.&ldquo;얼굴은 약간 동그랗고 머리는 구불구불 파마를 했으며 눈은 동그란 편이에요.&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805/1344142778457141.jpg"/>  ▲ 김현희 진술에 의해 그린 몽타주와 신원이 밝혀진 후에 공개된 이은혜 사진.김현희의 진술에 의존해서 그리는 얼굴이라 이은혜의 얼굴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몽타주가 완성된 뒤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작업을 마치자 놀랍게도 이은혜와 비슷한 얼굴이 나왔다.&ldquo;이제 비슷해요.&rdquo;김현희가 감탄을 하면서 이젠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후에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몽타주하고 비슷하여 놀랐다.일본 수사관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이은혜의 몽타주를 공개했다. 그러나 이은혜와 비슷한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신고는 없었다. 일본 경찰에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은혜를 찾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다.&ldquo;김현희 씨에게 사진 확인을 부탁드립니다.&rdquo;어느 날, 일본 경찰이 실종된 여성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김현희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김현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종된 것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일본 전역에서 실종된 여성들이라 숫자가 많기도 했으나 대부분 북한이 납치한 것으로 의심이 되는 여성들의 사진이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은혜 즉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은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임을 감지하였지만 혹시 북한에 있는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실종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는 얘기가 있었다.이은혜의 신원은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91년경 어느 날 일본 잡지를 보던 김현희가 일본의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삿포로 국제공항 이름이 치토세라는 내용의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이은혜가 김현희에게 일본식 이름을 지어준다면서 여러 가지 이름을 끄적이다가 무의식중에 자기 이름이 치토세라고 말하고 당황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ldquo;이은혜의 이름이 치토세라고?&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 거듭 확인했다.&ldquo;틀림없어요. 그렇게 말했어요.&rdquo;우리 측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바로 일본 경찰에 통보해 주었다. 김현희가 말한  &lsquo;치토세&rsquo;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비록 &lsquo;치토세&rsquo;가 이은혜의 본명이 아닌 술집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가명이었지만 결국 그것으로 신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일본 경찰과는 4차례의 면담이 있었다.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는 김현희를 붙들고 작은 단서라도 나올까 하여 이것저것 묻던 것을 또 묻고 하는 식으로 면담을 했다. 나는 그들의 집요한 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일본 경찰 3명과 대사관 직원과의 4번째 면담이 있던 날이었다. 그들은 이은혜의 이름이 치토세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가 다시 면담을 요청한 것인데 이번에는 실종된 몇 십 명의 일본 여성들의 사진첩을 가져와 김현희에게 그중에서 이은혜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ldquo;무슨 실종자가 이렇게 많아요?&rdquo;우리는 그 사진첩을 보면서 일본에서 젊은 여성들이 그렇게 많이 실종 되었다는 사실이 놀랐다.&ldquo;이것은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자들의 사진입니다.&rdquo;일본 경찰이 정중하게 말했다. 김현희는 사진 속 인물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ldquo;이 사람도 아닙니까?&rdquo;&ldquo;아닙니다.&rdquo;&ldquo;이 사람은?&rdquo;&ldquo;아니에요.&rdquo;일본 경찰의 질문에 김현희는 계속 아니라고 하다가 거의 마지막 사진 앞에서 멈칫했다. 그녀는 사진 속의 여자를 잠시 가만히 보다가 사진첩을 다시 일본 경찰에게 넘겨주었다.&ldquo;오래전 사진이라 정확치는 않지만 이 여자 같습니다.&rdquo;김현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현희가 가리킨 사진 속 인물을 본 일본 경찰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ldquo;확실히 이 여자가 맞습니까?&rdquo;&ldquo;북한에 있을 때보다 얼굴에 살이 찐 모습이지만 이은혜가 맞습니다.&rdquo;김현희는 보던 사진을 슬며시 내려놓았으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ldquo;잘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rdquo;조사가 끝나자 그들은 우리에게  이은혜의 신원을 이미 확인했으나 마지막으로 김현희에게 확인을 받은 것이라고자 말했다.일본 경찰은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 이은혜의 신원을 발표했다. 치토세는 이은혜의 본명이 아니라 일본 술집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가명이며 실제로 이은혜는 사이타마 현 출신의 다구치 야에코라는 여성으로 78년 22세의 나이로 미야자키 현의 한 호텔에 두 명의 어린아이를 맡긴 채 실종된 여성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들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김현희에게 확인한 것이다.이은혜의 신원이 확인되고, 당시 같은 시기에 열리고 있던 제3차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이은혜 문제가 의제로 떠오르자 북한은 다구치 야에코의 납치사실을 부인하면서 격렬하게 화를 냈고 교섭은 결렬되었다.납치문제가 다시 부각된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20년 전에 니가타 현에서 행방불명이 된 &lsquo;요코다 메구미(당시 13세)&rsquo;라는 여학생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범행으로 일본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이 문제는 일본과 북한의 최대의 정치 현안이 되었다.&ldquo;납치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합작하여 날조한 사건이다.&rdquo;북한은 처음에 납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일본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정일이 &ldquo;5명 생존, 8명 사망&rdquo;이라는 내용의 납치사실을 시인했다. 그 후 생존자 5명은 24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그들의 자녀들도 2004년 5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 후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김현희와의 연관성은 부인했지만 다구치 야에코가 86년 7월 사망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북한은 이은혜, 다구치 야에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으나 많은 증인들에 의해 다구치 야에코가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교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ldquo;북한에 있을 때 아는 운전사가 1986년 가을 평양 시내 백화점에서 다구치 야에코가 쇼핑하는 모습을 보았다.&rdquo;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납치 피해자인 지무라 후키에 씨(1987년 후쿠이 현에서 납치, 당시 23세)가 증언했다.&ldquo;다구치 야에코가 일본어를 가르친 공작원은 &lsquo;오카&rsquo;라는 이름이었다.&rdquo;지무라 후키에가 증언했다. &lsquo;오카&rsquo;라면 바로 김현희가 공작원이 되면서부터 사용하던 가명 &lsquo;김옥화&rsquo;를 말하는 것이다. 지무라 후키에는 또 다른 증언도 하였는데 요코다 메구미도 여성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그 공작원의 이름은 &lsquo;스키&rsquo;라는 것이었다. 스키는 바로 김현희와 함께 광저우와 마카오에서 해외 공작 실습을 하였던 공작원 김숙희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는 김숙희가 일본어 교육을 받은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86년도에 중국 광저우에서 불법체류자들에게 합법적 신분을 부여한다는 정보에 따라 몇몇의 공작원들과 마카오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을 때 사용한 여권의 이름이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 김숙희는 다카하시 게이코였다고 진술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2’ 이은혜는 누구인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556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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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Jul 2012 13:5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29/1343537812455650.jpg"/>  ▲ 이은혜 (실명: 다구치 야에코).김현희는 일본인화 교육이 끝나면 자신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일본에 침투하는 임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ldquo;이은혜가 일본사람이라는 증거가 있나? 혹시 재일교포는 아니야?&rdquo;수사관들은 김현희를 심문하면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ldquo;은혜 선생은 일본사람이 틀림없습니다.&rdquo; 김현희는 단호하게 말했다.&ldquo;어떤 점에서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볼 수 있어?&rdquo;&ldquo;이따금 리은혜는 일본에서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자신이 살던 동네에 조선인들이 몇 가구 살고 있었으며 학급 친구들 중에도 조선아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rdquo; &ldquo;또 다른 것은?&rdquo; &ldquo;조선 사람들은 식사 후에 물을 입에 넣고 입가심을 한 뒤 그 물을 그대로 삼켜 더러워, 이런 말도 했습니다.&rdquo; 이은혜는 김현희와의 대화 도중에 가끔 조선사람 흉을 봤다는 것이다.&ldquo;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 먹어서 지저분해 보여.&rdquo;&ldquo;물건 크기를 표시할 때 손으로 팔뚝이나 손목을 잡고 크기를 나타내기 때문에 망측스러워.&rdquo;김현희는 이은혜가 했다는 말을 하면서 일본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은혜가 말했던 이런 내용들은 후에 김현희가 우리에게 잡혀온 직후 일본인으로 거짓 행세를 할 때 그대로 수사관들에게 했던 말들이었다.&ldquo;아무리 공작원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외국인인 일본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어 교육을 시킨 것은 지나치지 않아? 죄의식이나 미안함이 없었나?&rdquo;&ldquo;공작원 교육을 받을 당시에는 워낙 사상교육이 철저했던 때여서 우리나라의 분단에는 일본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임 있는 일본인이라면 한반도 통일을 위한 혁명 사업에 그 정도의 대가나 희생은 마땅히 치러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rdquo;김현희가 대답했다. 우리는 납치마저 합리화시켜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말하는 김현희를 보며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윤리의식마저 말살된 모습에서 섬뜩함과 동시에 가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북한 사람들이 저 정도까지 의식이 세뇌되어 있다면 과연 통일 후 남과 북의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29/1343537812455651.jpg"/>  ▲ 김현희가 2009년 3월 11일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이은혜)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와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그 후 우리는 김현희에게 일본인화를 위해 이은혜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지속적인 심문에 들어갔다.김현희가 이은혜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일본인화 교육 내용을 보면 우선 초대소 내에서 모든 일상용어는 일본어로만 사용하고, 매일 일본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며, 그것을 받아 적고 일본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는 초대소에 비치된 녹화기(비디오)로 보거나 평양 보통강 구역 서장동에 있는 공작원 전용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또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신문들과 주간요미우리, 주간아사히, 주간포스트 등 일본 잡지들도 보았는데 보통 신문이나 잡지들은 일본에서 가져오는 시간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기일이 지난 것들이었고, 일본 잡지에는 야한 사진들이 많이 있어 김현희에게 보내 올 때는 야한 사진을 미리 오려 낸 잡지를 주었는데 가끔은 미처 오려내지 못한 사진들도 있어 매우 민망했었고, 그런 사진을 보면서 &lsquo;자본주의가 과연 타락하였구나&rsquo; 하고 느꼈다고 했다.또 일본의 일상생활에 대한 교육으로는 밥공기나 국그릇은 손에 들고 먹는다는 등의 식사 예절부터 여성들의 화장법, 옷 입는 법과 함께 특히 술시중 드는 법도 배웠는데 이것은 일본에 침투하여 정착하려면 가장 쉬운 곳이 술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매우 빡빡한 교육 일정 속에서 하루 5시간 정도만 잘 뿐 하루 내내 이은혜와 같이 있으면서 일본어로만 대화하고 생활해야 했다. 공작원 교육이 아무리 규율이 엄격한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1983년 3월까지 1년 8개월간 늘 같이 붙어 지내면서 둘은 매우 친해졌다.생각해 보면 나는 김현희와 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같이 지냈지만 이은혜와 김현희의 관계와는 또 달리 우리는 수사관과 범인과의 관계였다. 나는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늘 긴장 속에서 감시와 보호를 해야 했고, 비록 곁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었다고는 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친구처럼 편하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김현희 역시 자신의 처지가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가끔은 흉허물 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나에게 결코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나와의 5년보다 이은혜와의 1년 8개월간의 기간 동안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친밀감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김현희는  담당 지도원으로부터  이은혜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이기 때문에  속까지 다 주면 안 되니 지킬 것은 지키라고 하여 서로 개인적 신분에 대해선 비밀에 부쳐 말하지 않았지만 초대소에서 일을 도와주는 식모를 통해, 또 가끔은 이은혜의 입을 통해 그녀의 신상에 대해 알았다고 했다.김현희가 말하는 이은혜의 신원은 일본 도쿄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결혼하여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뒤 이혼했고, 그 후에는 아마도 술집 같은 데서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 1979년 경 해변을 거닐다가 북조선으로 납치되었다고 했다. 납치당한 직후에는 한동안 울며불며 밥도 안 먹고 반항했지만 곧 체념하고 적응해 갔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lsquo;이은혜라는 여자가 불쌍하구나.&rsquo;나는 강제로 납치되어 북한에서 살고 있는 이은혜를 생각하자 동정심이 일어났다. 이은혜의 옷장에는 일본에서 납치당해 올 때 입었던 옷이 걸려 있었는데 이은혜가 말하길 작은 배를 타고 올 때 멀미가 심해서 무척 고생하였다고 했다.또 이은혜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테니스 선수였으며 그때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김현희와 있을 당시 테니스 선수 시절 다친 허리가 재발하여 보름 정도 공작원 전용 병원인 9&middot;15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이은혜는 음식 조절을 안해서인지 살이 쪘는데 남한에 와서 일본경찰이 보여준 이은혜 사진을 보니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와 비슷하게 살찐 모습이었다고 한다.평소 초대소에서 이은혜는  아침에 아주 적은 양의 식사와 블랙커피를 마셨는데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으나 나중에 그것이 다이어트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고 김현희 자신도 따라서 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서 속이 쓰려서 블랙커피를 덜 먹었다고 했다. 김현희는 나와 함께 조사실과 안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블랙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았고  달콤한 자판기 커피를 좋아했다.&ldquo;이은혜에게 신체적 특징이 있었어?&rdquo;&ldquo;어떤 거 말이에요?&rdquo;&ldquo;몸에 점이 있다든가&hellip;.&rdquo;&ldquo;그런 것은 없어요.&rdquo;김현희는 이은혜의 몸 전체에 잔털이 많았는데 일본여자와 서양여자는 솜털이 많아 대부분 면도를 하는 편이라고 하면서 가끔 얼굴 면도를 했다고 말했다. 김현희에게도 얼굴을 면도할 것을 권했는데 북한 여성들은 얼굴 면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거절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얼굴 면도를 하면 화장이 잘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도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은 얼굴 면도를 하지 않는다.김현희는 이은혜의 신체에 대해 묘사해 주었다. 그녀는 이은혜와 함께 가끔 목욕한 적이 있는데 몸에 비해 허리가 굵고 유두가 검고 컸던 걸로 봐서 신체적으로 아기를 낳은 여성의 몸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ldquo;이은혜가 가족들 이야기는 안 했어?&rdquo;&ldquo;안했어요. 아이들이 있다고 했는데&hellip;.&rdquo;이은혜는 가끔 멍하게 창밖을 응시하는가 하면 술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아마 아이들이 보고 싶어 그런 것 같다고 했다.&ldquo;이은혜와 술도 마셨나?&rdquo;&ldquo;가끔이요.&rdquo;&ldquo;술자리에서 행동은 어땠어?&rdquo;&ldquo;술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듯 술도 잘 먹고 지도원들과도 술을 먹으면서 잔이 비면 얼른 따라주고 음담패설 같은 농담도 잘했어요. 지도원들과도 잘 어울렸어요.&rdquo;나는 김현희의 진술을 들으면서 이은혜의 모습을 막연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북한 땅에 납치되어서 지도원들과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이은혜에게 그것은 생존 방법일지도 몰랐다.김현희는 이은혜가 갈증 해소에는 맥주가 좋다고 권해서 같이 맥주를 마신 일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우리와 대화하는 중에 이은혜가 술집에 나갔기 때문인지 행동이 단정하지 못했고 화장도 너무 진하게 하여 천박해 보였다고 은근히 얕보는 느낌의 말을 하곤 했다. 명절인가 어느 날에는 쉬면서 술을 먹고 취한 이은혜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는데 이은혜는 취중에 자기가 김정일 생일 축하연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최혜옥이라는 공훈가수가 옷 벗기 게임에 계속 져서 옷을 벗게 되어 민망했으며, 그 자리에는 자기처럼 끌려온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 부부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절대 비밀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애원했다고 했다. &lsquo;지도자 동지가 그런 지저분한 행동을 할 분이 아닌데&hellip;.&rsquo;김현희는 이은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긴가민가했다고 했다.또 일본어 교육을 위해 일본 잡지를 보던 중 &lsquo;야마구치 모모에&rsquo;라는 여자 가수가 나오자 이은혜는 자기가 이 여자 가수를 좋아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과 결혼하는 바람에 싫어졌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김현희의 이 진술이 일반에 공개되자 누군가가 김현희에게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 테이프를 선물로 주었다. 김현희는 매우 좋아하면서 안가에서 카세트로 자주 들었는데 자꾸 듣다보니 나 역시 그 중 몇 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자 김현희는 &lsquo;언니는 어느 노래가 좋으냐&rsquo;고 하면서 노래 가사를  적어 주어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야마구치 모모에는 1975년에 방송된 &lt;붉은 의혹&gt;(赤い疑惑)에서 백혈병을 앓는 소녀로 등장해 최고 시청률 30.9%에 이르는 인기를 끈 배우 겸 일본의 1세대 아이돌 가수다. 일본에서 시청률 30%라면 한국에서 50%나 마찬가지다. 1982년 중국에서 처음 방송된 드라마 &lt;혈의&gt;(血疑)는 그녀를 중국에서도 일약 스타로 만들었을 정도다.이은혜는 일본의 가수이자 탤런트인 사와다 겐지라는  남성 연예인을 매우 좋아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던지 초대소에서 기르던 누렁이 개에게 사와다 겐지의 &lsquo;쥬리&rsquo;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고 했다.김현희는 이은혜로부터 일본인화 교육을 받으며 각별한 정을 나누며 지내다가 83년 3월 중순, 어느 정도 일본인화 교육이 끝났다고 판단하였는지 다른 초대소로 옮겨지면서 이은혜와 헤어지게 되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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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1’ 기자회견 그 후]]></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545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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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Jul 2012 13:2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22/1342931001454530.jpg"/>  ▲ 김현희가 2009년 3월 부산 벡스코에서 자신에게 공작원 교육을 가르쳤던 다구치 야에코 씨(한국어 가명 이은혜)의 오빠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기자회견이 나간 다음부터 TV와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들은 김현희 사진과 사건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신문사들은 1면에서 5면까지 지면을 가득 채웠고 사회면에 또 다시 기사를 실었다. 방송은 하루 종일 기자회견 장면을 반복하여 내보냈다. 그런데 국민들의 반응은 우리도 놀랄 만큼 비난보다 동정의 목소리가 높았다. 또 그녀의 미모에 대한 말들도 끊이지 않았다.&ldquo;공작원이 어떻게 저렇게 미인이지?&rdquo; &ldquo;미인계로 공작 활동을 하나?&rdquo;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 대립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당시 반공 교육을 받은 국민들로서는 북한에 대해 무섭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공작원들도 우락부락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회견장에 나타난 김현희는 지극히 여성적이고 단아하기까지 하여 놀란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국민들은  이번 사건을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김현희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의 시사통신은 김현희의 기자회견이 일본에 알려지자 프러포즈 전화와 편지가 쇄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ldquo;너무 불쌍하다. 저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나.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rdquo;시사통신은 관계 소식통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김현희의 기자회견으로 북한에 대한 비난과 성토대회가 연달아 일어나고 세계적으로도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로선 이보다 더 훌륭한 반공교육이 없었고 김현희는 북한에서 온 어떤 인물보다 가장 강력한 반공교육의 산 증인이 되었다.&ldquo;무엇보다 민간비행기에 대한 공격은 비열한 행위다. KAL기가 테러리스트의 폭탄 장치에 의해 파괴됐다는 확고한 이유가 있다. 구조신호가 없었고 잔해가 별로 발견되지 않은 점이 고공에서 잡자기 폭발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rdquo;미국 백악관의 피츠워터 대변인이 발표했다.&ldquo;그 여인(김현희)의 자백을 입증하는 독자적인 정보는 있는가?&rdquo;기자들이 피츠워터 대변인에게 물었다.&ldquo;우리의 독자적인 분석이 그녀의 자백을 입증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rdquo;피츠워터 대변인이 대답했다. 미국도 김현희의 자백을 인정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미국 하원에서는 청문회까지 열고 조사했다. 미정보국에서는 김현희 일행이 동구권에 있는 북한 대사관과 통화한 내용도 녹음되어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또한 미국, 일본, 마카오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사기관에서도 면담 요청을 해왔고 언론매체에서도 그녀의 진술을 듣고 싶어 했다. 각국의 수사기관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많았다. 미국은 북한의 전반적인 공작원 양성 실태와 공산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ldquo;김현희를 만나고 싶습니다.&rdquo;마카오 수사기관에서도 외교 경로를 통해 면담 요청을 했다.&ldquo;무엇 때문입니까?&rdquo;&ldquo;김현희가 마카오에서 직접 활동하였던 만큼 구체적인 활동 내용과 마카오에서 활동하는 북한 인물들과 공작원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rdquo;안기부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했다. 김현희와 면담이 이루어지자 그들은 북한 요원들의 사진과 이름을 보여주면서 김현희의 확인을 요청했다.&ldquo;이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rdquo;김현희도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그 내용 중엔 우리의 조사 과정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까지 있어서 수사관들도 적잖이 놀랐고 미국의 정보력에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수사발표와 기자회견이 끝나자 수사는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수사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수사팀이 해체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김현희로부터 북한의 대남, 해외 공작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과 신병을 보호하는 일이 남아 있으므로 주무 부서였던 우리 과가 김현희를 전담으로 맡게 되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22/1342931001454531.jpg"/>  ▲ &lsquo;김현희를 가르친 일여인도 납북됐다&rsquo;는 제하의 1988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그때부터 김현희에게 담당 주무수사관으로 수사 초기부터 참여했던 고참인 K 수사관이 배정되었다. 김현희로서는 그를 만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는 성격이 자상하여 여자수사관들보다도 더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대화도 거의 K 수사관과 이뤄졌다. 가끔은 여자수사관을 통해 하면 좋았을 일들도 직접 챙기곤 해서 여수사관들끼리는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희에게는 남한에서 의지할 유일한 사람이었고 K 수사관에게만큼은 자신의 속내도 털어놓았다. 또 K 수사관은 김현희를 어떻게 활용해야 효과적일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지금의 김현희 인생에 큰 길잡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ldquo;큰일은 이제 마무리 되었네.&rdquo;기자회견이 끝나자 수사관들은 어느 정도 안심을 했다.수사가 끝나자 여느 간첩 사건들처럼 이번 사건에 대한 공적 상신이 있었다. 공적 상신이라는 것은 수사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공적을 보고하여 국가로부터 상훈을 받는 것이다. 다른 기관은 모르겠고 안기부 수사국에서도 고위 간부부터 현장수사관에 이르기까지 몇 명의 이름이 후보로 올랐다.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사에 참여한 수사관들 중에서는 나만이 국무총리상을 타고 나머지 상훈은 외무부 등 다른 기관으로 돌아갔다. 워낙 이 사건과 관계된 기관이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들의 공적을 높이 산 것 같았다.&ldquo;축하해요.&rdquo;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으나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수사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나보다 더 고생한 수사관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나만이 유일하게 상을 받은 것이다.&ldquo;어떻게 해요. 제가 상을 받아서&hellip;.&rdquo;나는 수사관들에게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른 수사관들이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안기부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 같고 나는 내가 한 일보다는 일반에 공개된 안기부 여자수사관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건 수사에 열과 힘을 아끼지 않고 일한 다른 수사관들에게 미안하기만 했다.&ldquo;이은혜에 대해서 자세하게 조사해 봐.&rdquo;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일본도 이은혜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김현희에게서 이은혜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난 후 북한에서의 공작원 교육에 대해 조사를 할 때였다. 김현희는 자신이 일본인으로 위장한 것은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ldquo;누구에게서 교육을 받았어?&rdquo;수사관이 김현희에게 물었다.&ldquo;리은혜라는 여자 선생입니다.&rdquo;김현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사관들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이은혜라는 선생이 북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ldquo;이은혜는 어떻게 일본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rdquo;&ldquo;일본사람이니까 잘 알지 어떻게 잘 알겠습니까?&rdquo;김현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뜻밖의 진술이었기 때문에 수사관이 어리둥절했다.&ldquo;일본사람이 어떻게 북한 공작원들에게 교육을 시켜?&rdquo;&ldquo;리은혜는 데려온 일본 여성 같습니다.&rdquo;김현희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데려왔다니? 수사관들은 처음에는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ldquo;데려왔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납치했다는 거야?&rdquo;수사관들이 긴장하여 물었다.&ldquo;네.&rdquo;김현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북한이 공작원의 교육을 위해, 특히 어학 교육을 위해 외국인을 납치한다는 정보는 들어왔지만 실제로 김현희의 진술을 통해 눈앞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김현희가 이은혜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또 어떤 교육을 받아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심문했다.실제로 북한 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북한은 납치한 일본인의 인적사항을 이용해서 만든 위조 여권으로 대남 침투공작을 활발하게 벌였고, 납치된 일본인들은 공작원들의 일본인화 교육교사로 이용되었다.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들을 &lsquo;행방불명자&rsquo;나 &lsquo;실종자&rsquo;로 처리했다. 확실한 물증이 없어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북한에 의한 납치라는 의혹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김현희가 자신의 일본인화 교육을 위한 교사가 &lsquo;리은혜라는 일본여성이고 일본에서 납치했다&rsquo;라고 진술하면서 일본이 발칵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은 북한과 일본 사이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김현희는 1980년 3월경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중앙당(노동당)으로부터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전문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다가 이듬해인 1981년 7월 4일 자신의 담당 지도원으로부터 새로운 공작임무에 따라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로 옮기게 되었는데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보통 특각 3호 초대소라고 불렸다.김현희는 그곳에서 81년 7월 4일부터 83년 3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수용되어 밀봉교육을 받으면서 이은혜를 만나 함께 생활했다.지도원으로부터 앞으로 일본인화를 위해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지도원이 김현희에게 그녀를 &lsquo;리은혜&rsquo;라고 소개하여 처음에는 재일교포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은혜가 일본인이고 김일성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여 &lsquo;리은혜&rsquo;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ldquo;리은혜 선생이오.&rdquo;김현희는 초대소에 도착하여 훤칠한 키에 서구적으로 생긴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옷을 입은 이은혜를 처음 만났다.&ldquo;김현희 동무는 앞으로 리은혜 선생에게 일본어 교육을 배우시오.&rdquo;담당 지도원은 김현희에게 이은혜로부터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의 풍습이나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익혀서 완전한 일본인처럼 될 것을 지시했다. 그때부터 김현희는 이은혜로부터 강의록에 따른 일본어 교육을 받고, 그녀와 함께 녹화한 일본 드라마, 영화와 각종 신문, 잡지를 보았고 일본 노래도 배우기 시작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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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20] 터져 나오는 울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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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Jul 2012 14:0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15/1342328590453640.jpg"/>  ▲ 김현희(오른쪽)와 최창아 씨. 사진제공=최창아 씨김현희가 진술서를 다 읽고 난 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안기부 수사관들도 바짝 긴장했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 때 피의자가 참석해 기자회견까지 한 것은 김현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ldquo;시한폭탄은 어떻게 장치하고 밖으로 나왔습니까?&rdquo; 기자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ldquo;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함께 간 최 과장으로부터 폭탄이 든 라디오와 양주병을 들고 호텔에서 구입한 비닐 백에 넣고 바그다드로 왔습니다. 바그다드 공항에서 1차 검색 때 내가 가지고 있던 폭파용 배터리가 직원에게 체크됐는데 옆에 있던 김 선생이 항의해 무사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2차 검색 때는 이 배터리를 김 선생에게 건네주어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검색 통과 후에는 홀에 들어가 김 선생이 폭파용 라디오에 배터리를 넣고 9시간 후에 폭발하게 스위치를 조작했습니다. 탑승 후에는 라디오와 양주병을 비닐주머니에 넣은 채 선반위에 올려두고 아부다비에서 내릴 때 가지고 내리지 않았습니다.&rdquo;김현희가 북한 특유의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로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ldquo;그동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해 오다가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rdquo;&ldquo;저쪽(북한)을 떠날 때 비밀을 보장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보장하기 위해 끝까지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있는 동안 차를 타고 시내를 다니면서&hellip; 시내 전경과 남한 인민들의 잘 사는 모습을 보고&hellip; 또 TV에 나타난 여기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쪽에서 받은 교육과 내가 생각한 것이 상반된 현실을 보면서 점차 무엇이 진실인지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만당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에 배신감을 더 느끼게 되었고 통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이 사건으로 희생당한 유족들에게 속죄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rdquo;김현희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ldquo;현재의 심정과 앞으로의 각오, 그리고 남한에 와서 보고 느낀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rdquo;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ldquo;처음에는 죄를 지은 몸으로서 이번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과 가족들, 충격을 받았을 이곳 인민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했고 그저 제 한 몸 죽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rdquo;김현희는 다시 말을 멈추고 흐느꼈다. 여기저기서 계속 플래시가 터지며 회견장이 어수선했다. 김현희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ldquo;그러나 이곳에 와서 본 발전된 모습과 인민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에서 자기의 의사에 따라 각기 대통령을 투표하는 것을 TV를 통해 보고, 남한이 미제 식민지이고 민족성이 말살된 외세가 판치는 세상이라는 저쪽 말이 전적으로 사실과 상반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죄를 지어 백번 죽어 마땅하나 이런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돌아가신 분들과 가족들, 이곳 인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앞으로 이번 사건과 같은 무의미하고 헛된 일로 죄 없는 많은 인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rdquo;기자회견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녀는 만인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정신적인 긴장과 계속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거의 탈진한 것 같았다.기자회견장 옆 건물에서는 김현희와 김승일의 소지품을 비롯하여 KAL기 잔해 등 증거품을 공개하였는데 기자들은 소지품의 대부분이 외제 화장품이어서 김현희가 미용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현희는 일본인으로 행세하기 위해 외제 화장품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물자가 워낙 부족한 북한에서 제대로 된 화장품 구입이 어려워 공작원 신분을 이용하여 필요한 화장품을 구입한 것이다.&ldquo;이 소지품들이 김현희 씨 것이 맞아요?&rdquo;바레인 경찰에서 넘겨받은 소지품을 확인할 때였다. 나는 김현희에게 일일이 확인하게 했다.&ldquo;네. 내 것이 맞으니 돌려주세요.&rdquo;&ldquo;이것은 증거품이니 국가에서 압수할 수밖에 없어요.&rdquo;김현희는 소지품을 돌려받지 못한다고 하자 무척 아까워했다. 한편 수사의 보충설명을 위해 이례적으로 3명의 수사관들이 직접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했는데 신분노출을 피하기 위해 질문에 앞서 내외신 기자의 TV카메라도 끄게 하고 녹음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대공 수사관들의 얼굴이나 음성이 노출될 경우 북한 테러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있고 대공 수사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김현희와 함께 얼굴이 공개될 수밖에 없었다.&ldquo;김이 결정적으로 북괴 공작원이란 심증을 굳힌 근거는 무엇인가?&rdquo;기자들이 수사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15/1342328590453641.jpg"/>  ▲ 김현희는 72년 남북조절위 2차 회담 당시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네준 화동(1988. 1. 15일자 매일신문)이 자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ldquo;김이 정확한 평양 말투를 구사하고 있으며 진술하는 내용이 이제까지의 수사 자료결과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의 말대로 지난 72년 11월 우리 남북조절위 대표단이 평양에 갔을 때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김이 대표단의 장기영 씨에게 꽃다발을 건네줬다는 진술에 따라 그때의 사진을 대조해 본 결과 사실임이 확인됐다. 또 죽은 김승일의 시체부검 결과 김승일의 치아가 모두 의치로서 그 방식이 납북귀환 어부들에게 북괴가 해 준 치아와 동일했다.&rdquo;수사관들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기자들 앞에 직접 나서서 답변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긴장되고 떨리는 것 같았다.&ldquo;처음에 완강하게 진술을 거부하다가 자백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rdquo;&ldquo;바레인에서 서울로 호송되어 온 직후 상당히 탈진상태였던 김은 음식도 먹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어와 일어로만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던 김은 자신의 진술에서 허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자백하기 시작했다. 김은 중국에서 살 때 주로 무엇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호떡이라고 대답했으나 호떡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부자가 먹는 것이며 김이 자신의 말대로 가난하게 살았다면 먹어 보지 못했을 음식이다.&rdquo;&ldquo;수사관들은 어떤 방법으로 수사했나?&rdquo;&ldquo;김은 처음에 불안해했다. 여자 수사관들이 24시간 함께 지내면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바레인에서 음독을 기도한 후 넘어져 생긴 다리 상처를 마사지해주고 함께 목욕도 하고 머리에 빗질을 해주는 한편 음식도 입에 맞는 것을 권하는 등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했다. 그러자 8일째 되던 날 &lsquo;언니 미안해&rsquo;라며 처음 한국말을 사용하고 이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뒤에 &lsquo;마음이 가볍다&rsquo;고 했다.&rdquo;&ldquo;앞으로 김에 대한 법적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rdquo;&ldquo;적법한 절차를 따를 것이다.&rdquo;&ldquo;북괴공작지휘부가 왜 이들을 사건 뒤 살리려고 했는지 아는 대로 말해 달라.&rdquo;외신기자의 질문이었다. 북한에서 KAL기를 폭파시키면서 공작원들인 김승일과 김현희를 무엇 때문에 비행기에서 함께 죽게 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는지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ldquo;김과 죽은 김승일을 비행기에 탄 채 죽게 했다면 완전 범죄가 됐을 것이다. 북괴에서 완전범죄를 노려 그런 방법이 검토되기는 했겠지만 왜 이들을 살리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김의 말로는 자신이 일본어를 잘하기 때문에 살아 돌아간다면 아마 일본에서 활동했을 것이라고 했다.&rdquo;&ldquo;바그다드 공항 당국이 폭발물 반입을 막았다면 이번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rdquo;&ldquo;그런 것 같다. 이들도 바그다드 공항에서 폭발물 반입이 막혔을 경우를 대비해 제2의 테러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다.&rdquo;기자회견은 긴장된 가운데 계속되었다.&ldquo;김이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됐을 때 독극물을 먹었는데 죽지 않은 이유는 진실로 죽으려고 했다기보다 죽는 흉내만 낸 것이 아닌가?&rdquo;&ldquo;아니다. 김은 당시 실제로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이 독극물 앰플이 든 담배를 입에 무는 순간 공항여자경찰관이 빼앗는 바람에 앰플이 끝 부분만 터져 치사량에 못 미친 탓이었다.&rdquo;&ldquo;김이 북한에서 출발할 때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았다는데 확인되었는가?&rdquo;&ldquo;김정일의 친필 지령이 내려진 것은 이번 공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상부기관에 의해 친필지령 사실이 구두로만 전해졌을 뿐 본인에게 직접 전달된 것은 아니다.&rdquo;수사관들의 기자회견도 끝났다. 기자회견을 마치자 우리는 잘했다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다시 차에 태워 안기부 조사실로 돌아왔다. 수사관들은 김현희를 쉬게 해 주었다. 우리도 한동안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김현희 못지않게 피로한 것이 우리 수사관들이었다. 저녁이 되어 뉴스시간이 되자 수사관들이나 김현희나 기자회견이 어떻게 보도되었을까 궁금하여 TV를 틀었다. TV에서는 아나운서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기자회견 모습을 보도하고 있었다.&ldquo;어유, 참.&rdquo;김현희는 자신의 모습이 TV 화면에 비치자 제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김현희는 바레인에서 서울에 올 때와 기자 회견 때  입었던 하늘색 트레이닝복은 그 후 절대 입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초라한 모습이 만인에게 공개될 때 입었기에 그 옷만 보면 그때가 생각나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김현희는 일본어, 영어 등 어학공부를 하라며 소형 카세트플레이어를 선물로 받았는데 어느 날 보니 직접 손바느질로 그 트레이닝복을 잘라 끈이 긴 카세트플레이어 주머니를 만들어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ldquo;웬 지뢰탐지기를 차고 다니는 거야?&rdquo;나는 그녀의 바느질 솜씨에 감탄하면서 놀렸다.&ldquo;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요.&rdquo;김현희가 톡 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처음 서울에 도착하여 남산 조사실에 생활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조사실에 들어갈 때면 활동하기 편하도록 갈색 점퍼를 입었었다. 1년 쯤 지난 뒤 내가 다시 그 옷을 입고 나타나니까 김현희가 얼굴을 찡그렸다.&ldquo;어휴! 언니 그 옷 입지 말라요. 처음 서울 왔을 때가 생각나서 싫어요.&rdquo;김현희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자회견 때 발표한 내용 중에는 오류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수사를 자백이나 진술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확인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화동이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는 장면을 김현희가 자신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현희가 아니었다. 그 바람에 조작설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모든 사건을 완벽하게 수사할 수는 없으나 김현희 진술을 중심으로 시간에 쫓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이후 재조사에서 김현희는 당시 꽃을 건넨 화동이 아닌 3번째 줄에 있던 소녀였던 것으로 정정됨-편집자 주)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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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19] 마침내 기자회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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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8 Jul 2012 14:3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08/1341725637452860.jpg"/>  ▲ 김현희는 1988년 1월 15일 안기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압송될 당시와 똑같은 체크무늬 옷을 입고 나왔다. 연합뉴스안기부는 1988년 1월 15일 김현희의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현희가 한국으로 압송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자백에 따라 KAL858기가 북한의 지령에 의해 폭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안기부의 발표만으로 많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KAL기 폭파사건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우리나라뿐 아니라 김현희와 김승일이 일본인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민간 항공기에 가해진 테러라는 점에서 전 세계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KAL기를 폭파한 주범 김승일이 죽었기 때문에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김현희였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증언하면 KAL기 폭파의 진상을 국민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북한에 대한 경각심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남한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북한의 여자 공작원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ldquo;김현희 씨, 아무래도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좋겠어요.&rdquo;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기자회견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완강히 기자회견을 거부하거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엉뚱한 말이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ldquo;기자회견이요?&rdquo;김현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ldquo;그래요. KAL기 폭파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혀야 돼요.&rdquo;&ldquo;내가 이미 자백을 했는데 왜 기자회견을 해요? 나는 못하겠어요.&rdquo;김현희는 이미 자백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기자회견을 하느냐면서 거부했다.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녀를 차분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공산국가에서는 일방적으로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민주국가에서는 어떤 큰 사건이 터지면 반드시 기자회견을 한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유가족에게 진상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고, 이러한 테러를 자행하는 북한이 얼마나 위험한 국가인지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설득했다.&ldquo;기자회견은 한 사람하고 합니까?&rdquo;&ldquo;아니에요. 우리나라의 기자들을 비롯해 일본과 미국 등 여러 나라 기자들과 회견을 해야 돼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해요.&rdquo;&ldquo;많은 사람들과 기자회견을 할 수 없어요.&rdquo;&ldquo;김현희 씨가 유가족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면 회견을 해야 돼요. 진실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잖아요?&rdquo;김현희는 결국 기자회견을 승낙했다. 이미 자백을 한 이상 기자회견을 거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녀도 인지하고 있었다.&ldquo;김현희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해할지 모르니까 더욱 감시를 철저하게 해.&rdquo;수사국장이 우리 수사관들에게 지시했다. 김현희의 기자회견이 결정되면서 안기부도 바짝 긴장했다. 그녀가 기자회견장에서 &lsquo;김정일 만세&rsquo;를 부른다거나 &lsquo;KAL기 폭파는 북한의 소행이 아니다&rsquo;라고 하면 수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ldquo;예.&rdquo;&ldquo;한순간도 김현희에게서 눈을 떼지 마. 그렇다고 그녀를 압박해서 불안하게 만들지는 마.&rdquo;상부에서 그녀를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 지시했다. 그렇잖아도 나는 김현희에게 바짝 신경을 쓰고 있었다. 김현희는 자신이 기록한 진술서를 훑어보는 등 기자회견 준비를 하고 있지만 걱정스럽고 심란한 빛이 역력했다.&lsquo;나는 어떻게 하지?&rsquo;기자회견이 다가올수록 나도 걱정이 되었다. 기자회견장까지 내가 김현희를 데리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안기부 수사관인 내 신분이 노출될 뿐 아니라 얼굴까지 공개되는 것이다. 안기부 수사관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분을 노출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입사 초기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서 가족들 외에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에게조차 안기부에 입사한 것을 알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김현희를 바레인에서 압송해 오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내 모습이 TV나 신문을 통해 비춰지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걸어 &lsquo;혹시 너 아니냐&rsquo;고 물어와 곤혹스러웠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ldquo;비행기에서 내릴 때 김현희 옆에 있던 여자가 너 맞지?&rdquo;평소에는 자주 연락을 하지 않던 외삼촌이 급하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내가 어쩔 수없이 인정을 하자 안기부에 들어간 것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그 외삼촌은 미국에 살고 있었다.한번은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하면서 회사 후문 쪽에서 택시를 탔다.&ldquo;이렇게 무서운 데 앞에서 왜 택시를 타세요?&rdquo;택시기사가 의아해 하면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빙긋이 웃었다.&ldquo;그런데 어디서 본 분 같은데 혹시 TV에 나오지 않았어요?&rdquo;나는 깜짝 놀라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기자회견에도 김현희의 팔짱을 끼고 들어가면 나 역시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에 더 얼굴이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입사한 지 2년 정도 지난 나로서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얼굴을 숙이든지 머리 모양이라도 바꿔 변장을 해야 했다. 나의 이러한 걱정은 그 후 재판장에 갈 때도 계속되어 그때마다 머리스타일을 바꾸곤 했다.  마침내 1월 15일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날 아침이 밝았다. 김현희는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면서 내내 침통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ldquo;별 이상이 없겠지?&rdquo;안기부 간부들도 잔뜩 긴장하여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김현희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ldquo;네.&rdquo;나는 김현희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김현희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폭파범으로 얼굴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 싫었을 것이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것과 그로 인해 가족들이 입을 피해도 두려웠을 것이다.우리는 그녀가 바레인에서부터 입고 와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입었던 의상인 하늘색 트레이닝복 위에 바레인에 같이 김현희를 압송하러 갔던 채명희 수사관의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나가게  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국민 앞에 나가게 한 것이다. 남산에서 차를 타고 안기부 내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1월 15일은 한겨울이었다. 날씨는 쌀쌀한 편이었고 차창으로 분주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자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졌다. 기자회견장으로 쓰이는 강당 주위에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와 있었다. 우리는 강당 뒤편으로 갔다. 기자들 눈에 띄어 본격적인 회견을 하기도 전에 플래시 세례를 받고 싶지 않았다.강당 뒤편에 도착하자 벌써 안기부 이상연 1차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려왔다. 김현희는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ldquo;지난해 11월 29일 하오 2시 5분경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발하여 115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킨 대한항공858편 폭파사건은 수사결과 북괴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자행된 가공할 만행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그동안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인을 위장했던 북괴대남공작원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범인 중 일본인으로 행세하다가 바레인 공항에서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는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북괴노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조사부 특수공작원 김승일이며 현재 조사 중인 하치야 마유미 역시 북괴노동당 조사부 소속 특수공작원 김현희로 밝혀졌습니다&hellip;.&rdquo;이상연 1차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발표했다. 잠시 후 사건 발표가 끝나고 그녀의 회견 순서가 다가왔다. 나와 다른 여수사관이 그녀의 팔짱을 끼자 그녀는 안 가려는 듯 발을 땅에 붙인 채 몸을 뒤로 뺐다.&ldquo;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해? 빨리 들어가.&rdquo;나는 달래듯, 또 명령하듯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간 담당 수사관도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열린 문 사이로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걸음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어 강하게 팔짱 낀 손에 힘을 주고 그녀를 끌다시피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김현희는 마지못해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기자회견장으로 걸어 들어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시종일관 고개를 떨어뜨렸다.기자들은 비록 같은 옷을 입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과 표정의 그녀를 보고 놀란 듯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그녀가 입은 옥색 추리닝은 바레인에서 그녀의 조사를 담당했던 경찰 핸더슨의 부인 마리아가 준 것이었다.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이어지자 그녀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ldquo;얼굴을 들어주세요.&rdquo;사회자가 그녀를 향해 주문을 했다. 그녀가 비로소 얼굴을 들자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ldquo;먼저 김현희의 진술서 발표가 있겠습니다. 이 진술서는 그녀가 스스로 작성한 것입니다.&rdquo;사회자가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기자회견이래야 그녀가 진술서를 읽고 일문일답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빨리 말문을 못 떼어서 바라보는 수사관들의 애간장을 바짝 태우고 긴장시켰다. &ldquo;남조선 비행기 KE858기 폭파로정(爆破路程)에 대해 말씀 드리면&hellip;.&rdquo;마침내 김현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원래 크지 않은데다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크게 말해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김현희는 그럴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준비해 간 진술서를 빠짐없이 읽는 모습에서 역시 김현희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김현희의 진술서와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는 큰 차이가 없었다.&ldquo;맹세문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어떤 내용입니까?&rdquo;어떤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ldquo;지금 온 나라가 80년대의 속도로 사회주의 대 건설에 들끓고 있고 남조선 혁명이 고조에 이르고 있으며 적들의 &lsquo;두 개 조선&rsquo; 조작 책동이 악랄해지고 있는 조건에서 전투임무를 받고 적후로 떠나면서 우리는 맹세합니다. 우리는 적후에서 생활하며 행동하는 기간 언제나 당의 신임과 배려를 명심하고 3대혁명 규율을 잘 지키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습니다. 1987년 11월 12일 김승일 김옥화.&rdquo;김현희가 김승일과 함께 폭파 임무를 띠고 떠나기 전에 읽은 &lsquo;적후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rsquo;도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옥화는 김현희가 북한에서 위장하고 있던 이름이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18] 계속되는 심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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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Jul 2012 14:29: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01/1341120577452170.jpg"/>  ▲ 1988년 1월 15일 안기부에서 김현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김현희의 진술을 들으면서 나는 착잡했다. 내가 만약에 북한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철저하게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김정일의 지령을 받는다면 KAL기 폭파를 거부할 수 있을까. 나는 세뇌를 받는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ldquo;왜 바레인에서 사흘을 머물렀어? 한시 바삐 평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았나?&rdquo;&ldquo;KAL기가 폭파되고 나면 탑승자 중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사람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지만 실은 아부다비공항에서 암만-로마로 가서 비엔나를 거쳐 평양으로 갈 계획으로 그곳 비행기 표를 구입해 두었어요. 그런데 아부다비공항에 내리자마자 공항직원이 우리에게 직접 체크인을 해주겠다면서 비행기 표를 달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가 타고 온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비행기 표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바레인까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rdquo;&ldquo;바레인에서 바로 로마로 갈 수 없었나?&rdquo;&ldquo;바레인에서 로마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려 했지만 첫날은 공휴일이었고 또 다음 날은 비행기 표가 없다고 하여 이틀을 바레인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바레인 공항에서 발각되어 우리는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독약 앰플을 깨물었어요.&rdquo;김현희가 진술했다. 그들은 우연하게 바레인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ldquo;독약 앰플은 언제부터 갖고 있었어?&rdquo;&ldquo;그것은 이번 임무를 준비하고 떠나기 일주일 전 최 지도원이 최악의 경우 비밀 보장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고 하면서 준 것이에요.&rdquo;&ldquo;담뱃갑이라고 했는데 무슨 담뱃갑이야?&rdquo;&ldquo;말보로 담뱃갑에서 한 개비 필터 속에 앰플을 넣고 필터 위에 작은 담배가루를 묻혀 표시해 두었어요.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것을 깨물게 될 줄은 몰랐어요.&rdquo;&ldquo;정말로 깨문 것이 맞아? 어떻게 김승일은 죽고 너는 살 수 있었지? 혹시 무서워서 안 깨문 거 아냐?&rdquo;&ldquo;나는 분명 깨물었습니다. 내가 안 죽은 걸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나도 왜 안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rdquo;김현희가 발끈하고 화를 냈다. 그녀는 어떤 일을 수행할 때는 인내심도 있었지만 누가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하면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성격이었다. 북한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공작원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분명 자존심과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을 텐데 남한에서 비록 폭파범으로 잡혀있다 할지라도 쉽게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ldquo;북한에 보고하지는 않았어?&rdquo;&ldquo;김승일이 빈의 북한대사관에 전화로 대한항공 항공권과 복귀하기 위한 항공권을 구입했다는 내용의 전화보고를 했어요.&rdquo;&ldquo;전화번호는 어떻게 외웠어?&rdquo;수사관의 심문에 김현희는 소지한 수첩에 금전출납내역을 적은 것처럼 위장한 숫자와 점자 암호로 오스트리아 빈과 유고의 베오그라드 주재 북한 대사관의 전화번호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85년도에 검거한 간첩 신광수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암호였다.김현희에 대한 심문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과 세계 각국의 언론이 그녀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만간 기자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심문을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그녀의 건강도 중요했다. 기자회견을 할 때 그녀의 건강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김현희의 건강 체크는 안기부 의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공작원 훈련을 받았고 젊었기 때문에 그녀의 건강은 비교적 양호했다. 그녀가 자백을 하지 않았을 때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가냘팠다. 그러나 자백을 한 뒤에는 음식을 잘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루는 몸무게를 재어보니 60㎏이 넘었다.&ldquo;어떻게 젊은 여자 몸무게가 60㎏이 넘을 수 있냐? 백두산에서 온 백곰 같구나.&rdquo;하루는 수사관들이 웃으면서 김현희에게 농담을 했다. 그러자 김현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김현희는 그날 이후부터는 밥을 적게 먹으면서 체중 조절을 하기 시작했다.김현희는 강인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자였다.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조사실에서 몇 시간씩 앉아서 심문받고 하던 말 다시 해보라고 하고 써보라고 해도 지친 기색 없이 응했다. 또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암기력이었다. 북한에서의 교육이 김일성 교시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외워야 하는 등 암기식 교육이기에 그러하기도 했겠지만 후에 김현희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간증을 다니면서도 성경말씀이나 간증 원고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외우는 걸 보면서 새삼 그녀의 암기력에 감탄했다.&ldquo;성이 김 씨라고 그랬지? 어디 김 씨야?&rdquo;하루는 수사관들이 김현희에게 물었다.&ldquo;어디 김 씨요?&rdquo;&ldquo;본관이 어디냐고?&rdquo;&ldquo;본관이 뭐예요?&rdquo;수사관들은 본관을 모르는 김현희에게 놀랐다. 수사관들이 본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김일성은 경주 김씨라고 하자 자신도 경주 김씨일 것이라고 대답했다.김현희로부터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그녀는 어려서부터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고, 중신중학교 1학년인 72년 11월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남북조절위 2차 회담 때 남한 측 대표들이 헬기를 타고 비행장에서 내릴 때 화동으로 선발되어 남한 대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701/1341120577452171.jpg"/>  ▲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lsquo;KAL 858기 폭파사건&rsquo; 중간조사에서 발표한 문제의 화동 사진 중 일부. 하기와라 료가 &lsquo;서울과 평양&rsquo;에 공개한 사진으로 3번이 김현희라 밝혔다. 연합뉴스&ldquo;누구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어?&rdquo;&ldquo;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어려서 이름은 모르지만 자기에게 지시하기를 두 번째 내리는 사람에게  주라면서 그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했어요.&rdquo;김현희의 진술이 나오자 수사관들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72년 11월에 평양에 간 사람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대표단 단장이었던 장기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장기영은 부총리를 역임했고 한국일보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수사관들은 당시 동행 취재한 언론사를 통해 사진을 입수했다.&ldquo;이 아이가 너야?&rdquo;수사관들이 장기영 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화동 사진을 보여주면서  김현희에게 물었다.&ldquo;워낙 어렸을 때라서 잘 기억을 못하지만  맞는 것 같아요.&rdquo;김현희가 대답했다. 그리하여 문제의 사진이 유출되었다. 북한에서는 사진을 찍고 인화하기가 쉽지 않아 사진 찍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어려서의 자기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사가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하다보니 생긴 착오였다.&ldquo;장기영 씨에게 꽃다발을 걸어 준 화동은 김현희가 아니다.&rdquo;그 후 북한에서 반박했다.&ldquo;내가 진짜 사진 속 인물입네다. 남조선에서 KAL기 사건도 이번 사진도 조작한 것입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김현희입니까?&rdquo;정희선이라는 여자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KAL기 폭파사건이 남한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도 화동 사건을 가지고 KAL기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그 후 일본의 &lt;요미우리위클리&gt;에서 당시 찍은 다른 화동 사진을 제시하며 그중 한 아이를 지목하여 김현희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당시 안기부에서 입수하지 못했던 사진이었다. 우리가 봐도 귀나 얼굴 생김새가 훨씬 김현희와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김현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입가의 점이었다. 김현희가 우리와 함께 북한의 생활을 이야기 하던 중 자기가 원래는 입가에 기미(점)가 있었는데 동네에 사는 관상을 좀 본다는 할머니가 자기를 보고 그 점은 나쁜 점이니 빼라고 하여 뺀 적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물론 나중의 김현희 사진이 나오기 전 얘기다. 우리는 그냥 가볍게 듣고 흘려버렸었는데 후에 나온 사진에서 입가에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에 김현희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북한은 김현희의 존재를 부인했다. 김현희는 죽음으로써 북한에 충성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이 완전히 자기의 존재를 부인하자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김현희는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적극적으로 북한에 대해 비판도 하고 실상을 얘기하기도 했다.&ldquo;북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무리 못살아도 정말 그럴려구?&rdquo;나는 김현희에게 그렇게 말했다.&ldquo;언니는 그런 것 모르지요?&rdquo;김현희는 신이 나서 수사관들에게 북한생활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초등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는 각기 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 학급 학생이 학교 가기 전 약속 장소를 정해놓고 아침에 일단 거기서 모여 일일이 복장검사를 한 다음 줄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 행진한다고 했다. 한때 뉴스를 보면 실제로 학생들이 줄을 맞춰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평양 시내에서 여자들에게 바지를 못 입게 한 일도 있었다. &ldquo;누구와 함께  교육을 받은 거야?&rdquo;김현희에 대한 심문은 계속되었다.&ldquo;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동북리 10호 초대소에서 김숙희라는 여자공작원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와는 장장 7년 8개월간 같이 생활했습니다.&rdquo;김현희가 생각에 잠기면서 대답했다.&ldquo;김숙희는 몇 살이야?&rdquo;&ldquo;나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rdquo;&ldquo;어디 출신이야?&rdquo;&ldquo;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좌급 군관인 아버지와 식료품 상점 판매원이었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평양 경공업대학 일용학과 1학년에 다닐 때 소환되었습니다.&rdquo;&ldquo;김숙희가 본명인가?&rdquo;&ldquo;아닙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김순애라고 했습니다.&rdquo;안기부에서는 김현희와 함께 교육을 받은 공작원이나 그들을 훈련시킨 교관들까지 모두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심문은 계속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국으로 압송된 지 한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것이다.안기부 수사관들은 기자회견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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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17] 누구의 지령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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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4 Jun 2012 13:4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24/1340513304451520.jpg"/>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24/1340513304451521.jpg"/>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24/1340513304451522.jpg"/>  ▲ 1990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lt;마유미&gt; 스틸 사진.해가 높이 떠 있었다. 김현희와 김승일은 늦잠을 잔 탓에 아침식사도 못하고 체크아웃을 한 뒤 서둘러 택시를 타고 공항을 향해 달렸다. 바레인 수도 마나마는 아침부터 찌는 듯이 더웠다. 그러나 바레인을 속히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운 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먼저 체크인을 하고 출국카드를 썼다. 공항을 세밀하게 살폈으나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ldquo;아침은 안에 들어가서 먹지.&rdquo;김승일이 김현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들은 출국 검열대 앞으로 줄을 서서 걸어갔다. 공항에는 흰옷을 입고 히잡을 쓴 아랍인들이 많았다. 검열대에 여권을 제시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검열대의 직원이 여권과 김승일을 번갈아 살폈다.&ldquo;기다리시오.&rdquo;검색대 직원이 여권을 압수하고 차갑게 말했다. 김승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김현희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출국검열대 주위에는 공항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ldquo;하치야 신이치 씨&hellip;.&rdquo;이윽고 일본대사관 남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김승일과 김현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ldquo;예.&rdquo;김승일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ldquo;당신들의 여권은 위장여권입니다. 이 여권으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대사관에 가서 조사를 받은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rdquo;일본 대사관 직원의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여권을 정밀하게 위조했기 때문에 그동안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ldquo;착오일 것입니다. 여권을 돌려주십시오.&rdquo;김승일이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ldquo;착오가 아닙니다. 이미 하치야 신이치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시오.&rdquo;일본 대사관 직원은 냉랭하게 말하고 여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으나 공항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달아날 곳이 전혀 없었다. 김현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김승일과 김현희는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ldquo;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본에 보내도 우리는 이래저래 고생하다가 죽을 거야. 잘못하면 고문을 당하니까 여기서 약을 먹어야 해.&rdquo;김승일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김현희는 천길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이때 바레인 경찰이 와서 김현희와 김승일을 데리고 각각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김현희는 그들에게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바레인 경찰은 김현희의 몸수색을 철저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서 수상한 물건이 나올 까닭이 없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김승일과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ldquo;침착하라우.&rdquo;김승일이 담배를 피우며, 김현희에게도 담배를 한 대 주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경찰이 김현희의 핸드백을 압수하겠다고 말했다. 김현희는 담뱃갑을 꺼내 들고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여자 경찰관이 담배검사를 잊은 것이 생각났는지 담배를 달라고 요구했다. 김현희가 김승일을 쳐다보자 주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김현희는 결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빼앗기면 자살을 할 수 없게 된다. 김현희는 여자 경찰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필터 부분을 깨물었다. 여자 경찰관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곧 정신을 잃었다.김현희가 자술서에 쓴 내용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자술서를 바탕으로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김현희는 체념했는지 묻는 대로 차분하게 진술했다. 그러나 바레인 공항에서 앰플을 깨무는 장면을 진술할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ldquo;진짜로 앰플을 깨물었어? 혹시 안 깨물고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야?&rdquo;수사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ldquo;정말로 깨물었다잖아요.&rdquo;김현희는 그 부분에서 기이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레인 경찰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김현희의 담배에만 정신을 쏟아 그것을 빼앗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김승일은 제대로 앰플을 깨물어 죽을 수 있었으나 김현희는 경찰이 앰플을 깨무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확실하게 깨물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ldquo;가족에 대해서 얘기해 봐.&rdquo;수사관들의 심문은 계속되었다.&ldquo;고향이 함경남도 풍산인 아버지 김원석(당시 앙골라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과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임명식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후에 남동생 범수가 87년 5월에 피부암으로 죽었는데 이 사실을 말하기 싫어 남동생이 한 명이라고 거짓말 했다고 말했다)로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태어났어요. 동생은 김현옥과 김현수가 있고 갓난아기 시절 아버지가 쿠바대사관으로 가게 되어 67년까지 쿠바에서 생활했습니다.&rdquo;김현희는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가장 출신 성분이 좋다고 하는데 그것은 해방 이전에 남한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곳이고 또 지주 출신들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개성 출신이라는 것은 북한에서도 말하길 꺼리는데 그것은 해방 전까지 개성이 남한 땅이어서 지주들이나 반동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 한두 사람은 남한으로 내려간 가족들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김현희는 개성에서 내려온 어머니의 친척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친척들은 대부분 남한에서 성공하여 잘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북한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번도 남한에 친척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쿠바에서 살았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했다. 북한에서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것은 특권이었고 무엇보다 먹을 것이 풍족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좋아했다. 쿠바에 있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후에는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해 쿠바에서의 생활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김현희는 쿠바에서 지낼 때 지나가는 아이스크림장수를 &lsquo;엘 라데로&rsquo;라고 부르던 것과 바다 건너편에는 미국 놈들이 살고 있다고 하여 무서워 울었던 일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김현희는 67년 북한으로 돌아가서 평양 하신유치원, 하신인민학교 4년, 중신중학교 5년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생물과에 1년을 다니다가 외국어를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대학 2학년인 80년 3월 갑작스런 중앙당 간부의 면접을 거쳐 노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지금까지 공작원으로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24/1340513304451523.jpg"/>  ▲ 1990년 7월, KAL기 폭파범으로 사형이 확정됐다 특별사면된 김현희가 외재종조부(6촌 외할아버지) 임관호 씨와 극적으로 상봉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제공=우먼센스나는 김현희와 함께 5년 동안을 지냈다. 그녀와 함께 지냈던 다른 여자 수사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그녀와 생활하는 동안 그녀의 출생 및 성장 과정, 그리고 공작원으로서 지낼 수밖에 없던 그녀의 인생을 속속들이 알게 되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녀는 KAL기 폭파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고한 시민을 115명이나 죽인 테러범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북한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운명의 가혹한 장난으로 평생 동안 테러리스트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5년 내내 미움과 동정이 함께했던 생활이었던 것 같다.&ldquo;KAL기를 폭파한 이유가 뭐야?&rdquo;&ldquo;87년 10월 말경 마카오에서 불법 체류 중국인에게 마카오 영주권을 준다는 정보에 따라 함께 공작원 훈련을 받으면서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던 김숙희와 중국 광저우에 머물던 중 긴급 복귀하라는 명령에 따라 평양으로 급히 와보니 전에 함께 해외여행 실습을 한 적이 있던 김승일(하치야 신이치)과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대외정보조사부 이아무개 부장으로부터 88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rdquo;KAL기 폭파에 대해서 김현희가 진술한 말이었다.&ldquo;이 아무개 부장이 한 말 그대로 해봐.&rdquo;수사관이 김현희에게 말했다.&ldquo;말한 그대로입니다.&rdquo;김현희가 대답했다.&ldquo;제끼라는 게 무슨 뜻이야?&rdquo;&ldquo;처음엔 나도 어떻게 제끼라는 것인지 의아해 했지만 곧 그것이 폭파하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rdquo;&ldquo;누가 시킨 거지?&rdquo;&ldquo;부장이 김정일 동지의 친필지령이라고 꼭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dquo;즉, KAL기 폭파는 한국이 안전하지 않다,  KAL기는 위험하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었다.&ldquo;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해 KAL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후 김승일은 계속 노정연구를 했습니다. 가끔 중동지역은 전쟁 중이어서 폭발물을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등 이번 노정에는 문제가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rdquo;김승일은 노련한 공작원이었다. 노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지도자 김정일의 지시였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 같았다.&ldquo;비행기를 폭파할 계획이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런 여유가 있었나?&rdquo;&ldquo;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진 촬영을 한 것입니다.&rdquo;&ldquo;쇼핑도 했잖아?&rdquo;&ldquo;쇼핑을 하기도 했지만 늘 누가 우리를 의심하지는 않을까, 주변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늘 조마조마하였습니다. 바그다드공항의 검색대에서 라디오의 배터리를 비행기에 못가지고 간다고 수거해 쓰레기통에 버려 당황하기도 했지만 얼른 주워 라디오에 넣어 틀어 보이면서도 이상이 없는 배터리 아니냐고 항의하여 다시 배터리를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계획대로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라디오에 시한장치를 한 후 KAL기에 탑승하여 선반에 올려놓고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림으로써 일단 임무는 완수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KAL기에서 내릴 때도 누가 우리더러 짐을 놓고 내린다고 말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rdquo;&ldquo;비행기가 폭파되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나?&rdquo;&ldquo;나는 떨리는 마음에 무조건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온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조국통일을 위해선 그런 희생쯤은 감수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서로 얼마 만에 한국에 간다는 등 조선말로 얘기하면서 즐거운 모습을 하는 것을 보고 일순간 조금 마음에 안됐기도 했습니다.&rdquo;김현희가 말했다.      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16] 잡히느냐 마느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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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7 Jun 2012 14:1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17/1339910322450920.jpg"/>  ▲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17/1339910322450921.jpg"/>  ▲ 같은 해 &lt;동아일보&gt; 3월 7일자 신문은 통곡하는 KAL기 유가족들의 모습을 실었다.11월 28일 밤 11시 35분에 KAL기는 바그다드를 이륙했다. 김현희는 보통석 앞에서 왼쪽 두 번째 줄 가운데 앉고 왼쪽 옆에는 서구인 여자 1명, 오른 쪽에는 김승일이 앉았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김승일은 그의 여행용 가방 1개와 폭파용 라디오와 액체 폭약을 넣은 약주병이 들어있는 비닐주머니를 선반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내릴 때 여행용 가방은 꺼내고 비닐 주머니는 그대로 남겨 놓기 위한 것이었다.&lsquo;이 비행기가 9시간 후면 폭발할 텐데 사람들은 모르는구나.&rsquo;김현희는 노동자들이 들뜬 표정으로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 임무가 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김현희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폭약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자신도 모르게 선반으로 눈이 자주 갔다.&ldquo;선반을 쳐다보지 마.&rdquo;김승일이 짤막하게 말했다. 김현희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잠시 후 음료수와 식사가 나왔다. 김현희는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발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양인과 김현희가 먼저 화장실을 갔다가 오고 10분 후에는 김승일도 화장실에 다녀왔다.한국인 노동자들은 여행이 지루했는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현희는 긴장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김승일은 태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바그다드를 이륙한 비행기가 마침내 아부다비에 착륙했다.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폭발물이 든 비닐 주머니를 선반 위에 그대로 남겨둔 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행용 가방만 들고 내렸다.비행기를 내릴 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객들 중 누군가 폭탄을 가지고 내릴지도 알 수 없었고 승무원들이 발견하여 치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었다.&ldquo;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rdquo;김현희는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제부터는 아부다비를 탈출하기 위해 환승 홀에서 기다려야 했다.김현희는 일단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 비행기가 하늘을 날다가 폭발해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무사히 탈출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면 인민영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비행기에서 내려서 아부다비 공항으로 나오자 공항안내원이 환승행 비행기 표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베오그라드&sim;바그다드&sim;아부다비&sim;바레인행 비행기 표를 보여주었다. 아부다비는 일본 여권으로는 통과밖에 할 수 없고 출국도 비자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비행기 표도 통과하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다른 비행기 표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 아부다비에 착륙했던 KAL기는 이륙하여 서울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아부다비 공항에서는 친절을 베풀어 여권과 비행기 표를 자기들이 간직했다가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바레인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체크인해서 보딩카드를 내주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위장 여정으로 설정되었던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ldquo;어쩔 수 없이 위장 여정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겠어.&rdquo;김승일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마를 거쳐 빈으로 가는 여정이 불발이 된 것이다.&ldquo;오늘 로마로 못 가요?&rdquo;&ldquo;갈 수 없어.&rdquo;김승일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김승일도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까지만 무사히 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29일 아침 9시 바레인행 비행기를 타고 2시간 후인 11시경 마나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표 때문에 바레인에서 로마로 바로 갈 수 없었다. 공항에서 30달러를 내고 3일간의 임시 사증을 받았다. 김승일은 생각이 많았다. 예정과 달라졌기 때문에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머물기 위해 공항에 있는 전화로 호텔을 찾았으나 좀처럼 통화가 되지 않았다.&ldquo;도와 드릴까요?&rdquo;그때 공항경찰 한 사람이 다가왔다.&ldquo;호텔을 잡아주면 고맙겠소.&rdquo;공항경찰은 여러 호텔에 전화를 걸어 리젠트호텔을 찾아 연결을 시켜 주었다. 김현희는 지은 죄가 있어서 공항 경찰이 두려웠다.김승일이 전화로 방 예약을 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리젠트 호텔로 달려갔다.&ldquo;이제 어떻게 하지요?&rdquo;김현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승일에게 물었다.&ldquo;괜찮아.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할 테니까 우리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들이 눈치를 채려면 적어도 2, 3일은 걸릴 거야. 그때는 우리가 이미 평양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소용없는 거지.&rdquo;김승일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바레인은 중동국가라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김승일은 자주 시계를 보았다. 점점 비행기가 폭발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그다드에서 시계를 9시간 후에 맞춰 놓았기 때문에 2시가 넘어야 폭발할 것이고 KAL기는 지금쯤 태국 근처를 날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나먼 중동 국가에서 비행기가 어찌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ldquo;여기는 너무 덥군.&rdquo;김승일은 호텔에 도착하자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날씨가 더웠고 여행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KAL기 폭파에 대한 긴장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은 11월 30일이었다. 호텔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관광을 하기로 했다. 빈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 리젠트 호텔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부다비는 빈이나 베오그라드처럼 아름다운 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번화가에 상점들이 즐비했다. 김승일은 관광을 하면서 와이셔츠를 산 뒤에 알리아 항공사에 가서 전에 예약했던 아부다비&sim;로마행 비행기표를 1일 출발 바레인&sim;암만 경유&sim;로마행으로 바꾸었다.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바레인을 관광하며 사진을 찍었으나 날이 어두워져서 바깥에서 빵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호텔 음식이 맞지 않아 빵으로 저녁식사를 대신 했다. 그러나 저녁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첫 번째는 호텔 카운터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여권의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 번호 등을 물었다. 김승일이 영어로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ldquo;무슨 전화예요?&rdquo;&ldquo;호텔 카운터에서 온 전화야. 여권번호와 이름을 물었어.&rdquo;김승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30분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한국인이 전화를 걸어왔다.&ldquo;KAL기를 탔었지요? 바그다드에서 KAL기를 타고 아부다비에서 내리지 않았습니까?&rdquo;한국인이 물었으나 김승일은 한국말을 모르는 체했다. 한국인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몇 마디 질문을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ldquo;아무래도 이놈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아.&rdquo;김승일이 전화를 끊고 방안을 서성거리면서 말했다. 한국인이 전화를 걸어왔다면 무엇인가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김현희는 김승일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ldquo;걱정할 필요 없어. 내일이면 우리는 로마에 가 있을 테니까.&rdquo;김승일이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전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대사관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여권번호와 이름에 대해서 물었다. 김승일은 긴장한 목소리로 여권 번호와 이름을 알려주었다.&ldquo;위조 여권이 발각된 게 아니에요?&rdquo;김현희는 더욱 불안했다.&ldquo;그럴 리가 없어. 우리 여권을 일본에 조회한다고 해도 2, 3일이 걸려.&rdquo;김승일은 그렇게 말했으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와 한국인이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김승일은 거절했으나 한국인은 외교관이라면서 중요한 일 때문에 찾아오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ldquo;한국 외교관이 온다고 하니까 침대에서 자는 척하고 있어.&rdquo;김승일이 불안에 떨고 있는 김현희에게 말했다. 잠시 후 한국 외교관이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김승일은 문을 반쯤만 열고 일본인인 체하면서 한국 외교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위장했다. 한국 외교관은 일본 말에 영어까지 섞어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일본 말이 서툴렀고 김승일은 영어에 서툴렀다. 한국 외교관은 KAL858편이 추락했기 때문에 그 비행기에 탄 동양인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김현희는 김승일의 지시대로 등을 돌리고 누워서 자는 척했다. 한국 외교관이 침대에 누워 있는 김현희를 살피려고 했으나 김승일이 막았다.&ldquo;KAL기가 분명히 폭발한 것 같다. 우리 임무는 성공했다.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아. 걱정 말고 잠을 자. 내일 떠나면 되니까.&rdquo;한국 외교관이 돌아가자 김승일이 말했다.&ldquo;내일 비행기를 탈 수 있겠어요? 우리가 체포되는 게 아니에요?&rdquo;김현희는 걱정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 외교관이 호텔까지 찾아왔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ldquo;누가 우리를 체포해?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rdquo;&ldquo;우리의 정체가 발각된 것 같아요.&rdquo;김현희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승일은 한국 경찰이 바레인까지 올 수 없고 바레인 경찰은 KAL기 추락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공작원들을 체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 직원이 아무리 설쳐도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김현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김승일의 말을 믿고 싶었으나 한국 경찰이 그들을 체포하러 오는 모습이 자꾸 연상되었다. KAL기가 추락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바그다드에서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KAL기에 탔었다. KAL기가 추락했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12월 1일 아침 7시경에 일어나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김승일이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담뱃갑 하나를 김현희의 핸드백에 넣어 주었다. 김현희는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담뱃갑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은 김승일도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ldquo;조국과 인민을 위해서&hellip;.&rdquo;비상시에 앰플을 깨물어서 자살을 하라는 뜻이었다. 초대소에서 교육을 받을 때 공작원들이 활약을 하는 영화를 수없이 보았었다. 영화의 내용은 임무를 마친 공작원이 위기에 몰리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렬하게 자살하는 것이었다.&lsquo;그래. 발각되면 자살할 거야.&rsquo;김현희는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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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5] KAL기에 탑승하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503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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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0 Jun 2012 13:32: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10/1339302758450330.jpg"/>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에코 씨(이은혜)의 아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11월 21일. 김현희는 오스트리아 빈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쇼핑을 했다. 쇼핑이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공작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옷가게에 들어가 여름용 원피스 한 벌과 겨울용 양말을 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 귀금속 상점에 들어가 목걸이와 귀걸이도 샀다. 중동지역은 더운 나라였고 북한에서 가지고 온 옷은 여름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현희는 빈의 화려한 상점과 거리를 구경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자들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밝고 화사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옷차림이 화려했을 뿐 아니라 자유분방해 보였다. &lsquo;이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 같구나.&rsquo;김현희는 때때로 오스트리아 여자들이 부러웠다.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특히 빈은 예술의 도시답게 극장이 많고 거리에서도 음악회 등이 자주 열렸다. 쇼핑을 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뜨고 한편으로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밤이 되자 호텔의 창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평양과는 다르게 빈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김현희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오고 스쳐갔다. 임무를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패하면 죽어야 할 것이고 성공하면 평양으로 돌아가 영웅 칭호를 받게 될 것이다.공작은 김승일이 주도하고 그녀는 보조원에 지나지 않았다. 김승일은 나이가 많았으나 오랫동안 공작원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었다. 그의 지시대로 따르면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다.김현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고 밤이 늦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세수를 하고 호텔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초대소에 있을 때도 음식은 잘 나왔지만 호텔에서 먹는 식사도 흡족했다. 북한에서 호텔은 특권층만 이용을 하는데 김현희는 자신이 마치 특권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lsquo;호텔 식사는 깔끔해.&rsquo;호텔의 조찬 식사는 대개 계란 프라이, 빵, 우유, 주스, 베이컨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북한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2일 오전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오후가 되자 김승일이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최 과장과 통화했다. 최 과장은 본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작 지도를 해온 사람이 분명했다. 김승일은 최 과장에게 비행기 표를 구입한 사실에 대해서 보고하고 27일 저녁 7시 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ldquo;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인가요?&rdquo;김현희는 김승일이 통화가 끝나자 물었다.&ldquo;그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지.&rdquo;김승일이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일체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김현희가 가족에 대해서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lsquo;정말 수수께끼 같은 공작원이구나.&rsquo;김현희는 김승일이 노련한 공작원이라고 생각했다.23일 오전 11시경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에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김승일의 표정은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빈과 북한을 비교해 보았다. 북한의 순안 비행장은 남루했으나 오스트리아 빈 공항은 깨끗하고 관광객들이 많았다.김현희는 공작을 수행해야 할 장소가 가까워지자 점점 긴장이 되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출국수속을 마치고 14시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빈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8시경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약 4시간 정도 비행기를 탄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어느 사이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메트로폴리탄호텔로 달려갔다. 베오그라드는 수백 년이 된 고색창연한 도시였으나 빈과는 달랐다. 거리의 풍경들이 어쩐지 잿빛으로 음울해 보였다.24일 김현희는 전차를 타고 시내관광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혹시라도 서방 정보원들의 의심을 받을까봐 관광객 행세를 한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유럽과 발칸 제국 사이에 있는 도시로 하얀 성채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 동쪽의 도나우 강변 언덕 위에 있는 &lsquo;칼레매그단 성채&rsquo;는 3~4겹의 방어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했다. 20세기에 거의 20년마다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고 허물어진 건물이 아직도 있었다. 성 입구에는 19세기에 사용되었던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ldquo;이곳은 전쟁이 많은 나라야. 외세의 침략을 자주 겪었지.&rdquo;김승일은 간간이 베오그라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자신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독재자가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과는 다르게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최 과장과 약속한 27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lsquo;공작 임무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rsquo;김현희는 때때로 자신이 순수한 관광객이었으면 싶었다.25일에도 김현희는 베오그라드의 번화가와 사원들을 관광하며 스웨터 1개를 샀다. 최 과장과 약속한 날이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베오그라드는 날씨가 쌀쌀한 편이었다. 이미 가을이 깊어 있었다. 26일에는 베오그라드에 있는 오스트리아 항공사에 가서 로마에서 빈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 공작원들에게 시간이 남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시간이 남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7일도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김현희는 낮 동안에 거리 구경을 했다. 저녁 7시가 되자 호텔 정문으로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찾아왔다.&ldquo;동무들, 수고가 많소.&rdquo;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김승일과 악수를 나누었다. 김승일이 주위를 살핀 뒤에 그들을 데리고 호텔방으로 올라왔다.&ldquo;이 라디오에 폭약이 들어 있소. 동무가 시간을 조절하면 정확하게 터질 것이오.&rdquo;최 과장이 김승일에게 폭약이 들어 있는 라디오 사용법을 설명했다.&ldquo;플라스틱 폭약이오?&rdquo;김승일이 최 과장에게 물었다.&ldquo;그렇소.&rdquo;&ldquo;이 작은 것으로 비행기를 폭파할 수 있소?&rdquo;&ldquo;충분하오. 플라스틱 폭약은 공항 검색대도 통과할 수 있소. 약주병은 액체 폭약으로 비행기를 산산조각 낼 것이오.&rdquo;최 과장은 가지고 온 폭파용 라디오와 액체 폭약이 들어있는 약주병을 김승일에게 넘겨주었다. 김현희는 그들이 폭발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나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ldquo;필요 없는 짐은 우리가 가지고 가겠소.&rdquo;최 과장과 최 지도원은 10분쯤 호텔에서 머물러 이야기를 한 뒤에 김현희와 김승일이 가지고 다니던 여행용 가방 1개를 가지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 가방에는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lsquo;내일은 남한 비행기를 타야 하는구나.&rsquo;김현희는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바짝 긴장되었다. 비행기를 폭파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28일 오전 11시경에 체크아웃을 한 뒤에 공항으로 나갔다.&ldquo;긴장할 필요 없어.&rdquo;김승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현희는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이라크 항공으로 바그다드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라크 비행기에 탑승하자 승무원들이 탑승객들의 소지품을 검열하여 배터리를 압수했다.&ldquo;배터리를 압수했으니 어떻게 하지?&rdquo;&ldquo;공항에 내리면 돌려준다잖아요?&rdquo;김현희는 김승일이 긴장하는 것을 보고 낮게 말했다. 비행기는 예정된 대로 오후 14시35분에 이륙했다. 비행기는 베오그라드를 떠나 3시간 30분간 비행하고 저녁 7시경에 바그다드에 착륙했다. 배터리는 바그다드에 착륙한 다음에야 돌려주었다.&lsquo;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rsquo;김승일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이제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야 했다. 공항의 의자에 앉아 잠깐 기다리면서 김승일이 라디오에 배터리를 넣었다. 그런데 공항 여자 안내원이 환승객을 데리고 환승홀로 가서 남녀 각각 모든 휴대용 가방과 몸수색을 했다. 이때 김승일이 가지고 있던 라디오 안의 배터리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ldquo;배터리를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rdquo;여안내원이 김승일의 배터리를 압수하려고 했다.&ldquo;왜 배터리를 압수하는 거요?&rdquo;김승일이 다급하게 항의했다.&ldquo;우리 바그다드공항의 규칙입니다. 승객들은 이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rdquo;여자 안내원이 배터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ldquo;왜 바그다드 공항만 개인 물건을 검열하고 압수하는 거요? 라디오도 들을 수 없다는 말이오?&rdquo;김승일이 배터리를 주워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했다. 여자 안내원은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배터리를 압수하지 않았다. 검열이 끝난 후 비행기 표를 체크하러 가는 도중 두 번째 검열을 받았다. 그때는 다행히 라디오 배터리를 압수하려고 하지 않았다.티켓 체크를 마치고 보딩카드를 받은 후 홀에 들어가 앉아서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탑승 20분 전에 김승일이 라디오의 동작스위치를 고정시간인 9시간 후로 맞추었다.김현희와 김승일은 마침내 바그다드발 김포행 대한항공 여객기인 KAL858기에 탑승했다. 그곳에는 중동지역에서 일을 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여객기에 탑승했다.&ldquo;어서 오세요. 대한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dquo;승객들이 탑승을 마치자 승무원들이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김현희는 악센트가 달랐으나 낯익은 한국말을 듣자 반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있었고 KAL858편에 탄 승객들은 비행기와 함께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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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4] 나는 북한공작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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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3 Jun 2012 13:38: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03/1338698296449800.jpg"/>  ▲ 1992년 김현희의 모습. 십자가 목걸이가 눈에 띈다. 사진제공=우먼센스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심문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주무수사관들이나 우리가 통역을 거치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ldquo;한국 사람이 한국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한국 말하니까 더 예쁘잖아?&rdquo;주무수사관이 말하자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흘리던 김현희가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lsquo;참 감정 기복도 심한 여자구나.&rsquo;나는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렇게 생각했다. 심문 조사에는 자술서라는 것이 있다. 수사관들이 심문한 뒤에는 자술서를 쓰게 하고 이에 대해 확인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고 그녀가 오갔다는 중국이 미수교 국가여서 그녀의 진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도 자술서를 쓰게 했다. 다음은 KAL기 폭파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평양 출발부터 바레인에서 체포될 때까지 과정을 김현희가 직접 작성한 자필 자술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김현희는 외교관인 아버지 김원석과 교사인 어머니 림명식 사이에서 1962년 1월 27일에 평양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쿠바로 갔다가 4세 때 평양으로 돌아왔다. 여동생 김현옥(남편은 심장마비로 사망), 남동생 김현수와 김범수(15세 때 피부암으로 사망)가 있었다.김현희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비교적 상류층 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는 &lt;사회주의 조국으로 돌아간 영수와 영옥&gt; &lt;딸의 심정&gt;이라는 영화에서 아역으로 출연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남한을 비난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으며 풍족하게 살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김현희는 이후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고, 80년 4월부터 7년 8개월 동안 대남공작원 양성기관인 금성정치군사대학 동북리초대소, 용성초대소 등에서 훈련을 받았다. 특히 공작에 투입되기 전에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로 추정되는 이은혜로부터 개인적으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ldquo;동무는 이제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하오.&rdquo;1987년 11월 오랫동안 공작원 훈련 과정을 마친 김현희에게 마침내 임무가 부여되었다. 노련한 70대 공작원 김승일과 함께 한국의 항공기 KAL기를 폭파하라는 임무였다. 김현희는 그때 가슴이 철렁했다. 훈련을 받을 때 언젠가는 공작원으로 투입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막상 임무를 부여받게 되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명령이 내린 이상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작원들은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 앞에서 선서를 한다. 60년대 남파 간첩들에게는 김일성이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의 전화를 받은 공작원들은 감격하여 자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ldquo;우리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지도에 따라 남조선 비행기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실패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습니다.&rdquo;1987년 11월 12일 아침 김현희와 김승일은 공작원 초대소에서 공작지도원인 최 과장과 함께 선서를 했다. 선서는 김현희가 읽었다. 선서가 끝나자 김현희 등은 초대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평양의 순안 비행장으로 향했다.&lsquo;아아 내가 마침내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구나. 위험하지는 않을까?&rsquo;김현희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차는 평양의 번화가를 지나 순안 비행장을 향해 달렸다. 공작이 실패하면 죽게 될 것이고 다시는 평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lsquo;내 운명이 가혹해.&rsquo;비행장에는 부부장이 차를 타고 나와 있었다.&ldquo;동무들은 긴장하지 마시오. 이번 공작은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서 친필로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니 지도자 동지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소. 지도자 동지를 실망시키면 안 됩니다.&rdquo;부부장이 웃으면서 김승일과 김현희에게 말했다.&ldquo;지도자 동지가 지시한 과업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rdquo;김승일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최 지도원이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오자 네 사람은 부부장의 배웅을 받으면서 비행기에 탑승했다.&ldquo;승객 동지 여러분, 이 비행기는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동베를린을 운항하는 노선을 개통해 첫 번째로 운항하는 비행기입니다. 동베를린 취항을 기념하여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rdquo;예쁘게 생긴 여승무원이 트럼프, 열쇠고리, 돈지갑을 승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김현희는 선물을 살폈으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내 비행기가 순안 비행장을 이륙했다. 김현희는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훈련을 마치고 공작에 투입된다는 사실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내내 긴장 상태로 있었다. 비행기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1월 12일 오후 6시경이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이었다. 김현희는 몹시 피로했다. 모스크바 주재지도원이 마중을 나와 차를 타고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의 초대소로 향했다.김현희는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모스크바는 평양과 확실히 달랐다. 건물들은 고색창연했고 길도 넓었다. 그러나 밤이라 자세하게 살필 수 없었다.&ldquo;부다페스트행 비행기는 오늘밤 12시에 있습니다. 이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rdquo;모스크바 주재 지도원이 말했다. 김현희는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쉴 수가 없었다. 김승일은 지도원들과 밀담을 나누었다.&ldquo;우리는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해. 부다페스트로 갈 거야.&rdquo;김승일이 김현희에게 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든 일정은 김승일과 지도원들이 짜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사관 지도원의 안내로 밤 11시쯤에 초대소를 떠나 모스크바 비행장으로 다시 갔다. 출국 수속은 까다롭지 않았다. 김승일을 따라 소련 여객기에 탑승했다. 밤 12시에 이륙한 여객기는 11월 13일 새벽 4시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김현희는 비행기에서 내내 잠만 잤다. 그녀가 김승일의 동반자 역할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부다페스트 북한 대사관 지도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초대소로 데리고 갔다. 김현희 등은 그 초대소에서 여장을 풀고 쉬었다.&ldquo;우리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갈 것입니다.&rdquo;부다페스트 대사관의 지도원이 말했다. 김현희는 왜 이렇게 긴 여정을 짜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나중에 의심받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오기 위해 행적을 숨기는 것이라고 막연히 알았을 뿐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사흘을 머물렀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라고 하지만 동유럽과 다른 서방이었다. 그들은 빈으로 입국할 계획을 세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일은 부다페스트 지도원과 김승일이 했기 때문에 김현희는 시내를 관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헝가리 말도 잘 몰랐고 임무 수행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부다페스트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시 곳곳에 중세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고 공산국가인데도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김현희는 탈출 경로까지 상세하게 계획을 세웠으나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ldquo;동무들, 처음 계획은 비행기로 빈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계획이 바뀌어 자동차로 들어가기로 했소.&rdquo;11월 17일 비행기를 타고 빈으로 입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지도원과 김승일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상의했다.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리하여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은 기차로, 김현희와 김승일은 자동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들어가기로 했다. 계획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김현희는 더욱 불안했다. 부다페스트 북한 대사관 지도원의 차 벤츠를 타고 국도를 달렸다. 지도원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좋은 차를 탈 수 있었다. 지도원이 운전하는 벤츠는 쾌적하고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헝가리가 동유럽의 가난한 나라이기는 했으나 남루한 북한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 같았다.이내 오스트리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검문소가 보이자 김현희는 다시 긴장이 되었다.&ldquo;동무,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rdquo;김승일이 김현희를 돌아보고 말했다. 국경검문소의 입국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들은 여권만 확인하고 바로 통과시켰다.&ldquo;이제 북한 여권을 반납하시오.&rdquo;부다페스트 지도원이 말했다. 김승일과 김현희는 북한 여권을 반납했다.&ldquo;여러분의 여권이오.&rdquo;부다페스트 지도원이 나누어 준 여권은 그녀의 이름이 하치야 마유미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김현희는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면서 더욱 긴장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달랐다. 헝가리는 가난한 동유럽 국가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부유하고 아름다웠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가까이 갈수록 집들이 아름답고 주민들도 행복해 보였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603/1338698296449801.jpg"/>  ▲ 1988년 1월 15일자 &lt;동아일보&gt; 보도. &lsquo;마유미는 북한외교관 딸 김현희&rsquo;라 알리고 있다.11월 18일 오후 1시에 그들은 오스트리아 빈의 남역에 도착했다.&ldquo;나는 이제 돌아갑니다. 동무들의 건투를 빕니다.&rdquo;부다페스트 지도원이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주고 말했다. 김승일이 그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김현희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ldquo;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호텔을 예약하고 올게.&rdquo;김승일은 김현희를 역에서 기다리게 하고 호텔을 예약하러 갔다. 김현희는 빈의 남역 앞에서 기다렸다. 역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빈은 예술의 도시답게 건물이 고풍스럽고 사람들이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옷차림이 화사하고 얼굴 표정도 근심 하나 없이 밝았다. 김현희는 마치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ldquo;암팍크링호텔을 예약했으니 가지.&rdquo;이내 김승일이 돌아왔다. 김현희는 김승일을 따라 암팍크링호텔로 갔다. 호텔에서 보는 빈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김현희와 김승일은 긴장과 피로 때문에 오후부터 휴식을 취했다.11월 19일 아침 10시 김현희와 김승일은 오스트리아 항공사에 가서 빈발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발 바그다드 경유, 아부다비 경유, 바레인으로 이어지는 항공권 예약을 했다. 이것은 위장 탈출을 위한 경로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일본인 행세를 했다.11월 20일에는 알 이탈리아 항공사에 가서 아부다비발 요르단 암만 경유, 로마행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 이것은 실제로 탈출하는 경로였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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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3] 드러나는 진실들]]></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491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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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7 May 2012 14:37: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27/1338097063449150.jpg"/>  ▲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방 안에서 심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긴장으로 침이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ldquo;이름이라도 알아야지. 성이 뭐야?&rsquo;수사관이 심문을 계속했다.&ldquo;긴(金).&rdquo;그녀의 입에서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치 않은 발음이었다.&ldquo;뭐라고, 김이라고?&rdquo;수사관이 재차 물으면서 종이에 써 보였다.&ldquo;옳지. 쇠금자 말이지? 음&hellip; 김. 그리고 이름은?&rdquo;&ldquo;켄(賢).&rdquo;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말인지 한국말인지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다.&ldquo;그래 현이라고?&rdquo;주무 수사관이 흥분하여 묻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ldquo;다음은?&rdquo;&ldquo;희.&rdquo;그녀에게서 다시 대답이 흘러나왔다. 수사관은 종이에 김현희라고 쓰고 그녀에게 확인했다.&ldquo;김현희, 이게 맞지?&rdquo;김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12월 23일. 그녀가 서울에 온 지 1주일 만의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한없이 초조하고 길었던 기간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수사관으로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심문을 하던 수사관은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라고 하면서 방을 나오고, 나와 몇 명의 수사관만 들어가게 했다. 내가 다시 심문실로 들어서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안한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ldquo;어머 얘가 한국말을 하네?&rdquo;나는 웃으면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슬쩍 내 팔을 친 다음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이제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찾은 것이다. 이런 극적인 모습이 언론에 나가면서 당시 유행어였던 &lsquo;언니, 미안해&rsquo;가 되었다.그날 밤 우리 수사관들에게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자백을 하고 난 후에 허탈감이나 후회로 자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관찰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심문실에 온 이후에도 수사관들은 24시간 감시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잠드는 10시경 이후에는 실내조명을 낮추고 남녀 수사관 각각 1명씩 침대 옆 소파와 책상 의자에서 계속 감시해야 했다.안기부 수사관이 화려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처럼 남모르게 고생을 하는 일도 많다. 자백 이후로는 더욱 경계를 갖추고 그녀를 감시해야 했다. 새벽 2~3시경이면 쏟아지는 졸음과 함께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올리고 있으려니 견디기 어려웠다. 안기부 생활은 어떻게 보면 고난의 생활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오히려 잠을 자고 있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때 당시 내 눈가의 잔주름이 지금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졌다. 수사관들은 그녀에게 다시 서울 구경을 시켜주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직접 차에서 내려 시내를 걷기도 하고 쇼핑도 하는 등 서울 체험을 시켜주기로 하여 나는 바짝 긴장했다. 이런 서울 구경은 남파간첩이나 귀순자들이 오면 흔히 있는 절차다. 그들이 아무리 사상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 깜짝 놀라면서 전향하는 일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한국의 실상을 그대로 교육하지 않고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서울구경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김현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는 일은 신변 보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이미 텔레비전에 얼굴이 공개되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 무렵 명동으로 차를 타고 나가 적당한 곳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나와 다른 남자수사관은 마유미 옆에서 같이 걸었고 많은 수사관들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함께 주위를 경계하면서 동행했다. 그녀를 마음으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 번화가로 나갔지만 솔직히 누가 알아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연말연시라 거리는 들떠 있고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명동의 롯데백화점도 연말을 맞아 물건들을 휘황찬란하게 전시하고 있었으나 사방을 경계하느라고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지날 때마다 점원들이 가까이 다가와 물건들을 소개하며 매장으로 들어오라고 인사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깜짝깜짝 놀라는 기색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ldquo;사고 싶은 것 있으면 사.&rdquo;김현희에게 권하자 그녀는 망설이면서 스카프를 하나 샀다. 롯데백화점에서 나와 남대문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남대문시장에는 상인들이 물건을 산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거나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김현희는 남대문시장의 흥청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구세군 자선냄비도 보았다.&ldquo;저 사람은 거지예요?&rdquo;김현희가 구세군 자선냄비를 보고 물었다.&ldquo;저건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는 거야.&rdquo;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김현희는 다시 남산의 조사실로 돌아왔다. 서울의 발전한 모습을 본 그녀는 말도 없었고 표현도 안했으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자백 이후로 수사는 급진전을 띠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이 누구나 궁금해 하는 KAL기에 대한 진실이었다. 도대체 KAL기는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심문에 들어간 수사관은 우선 그녀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에 대해서 조사했다.&ldquo;북한 주소가 어떻게 돼?&rdquo;&ldquo;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rdquo;&ldquo;언제 태어났어?&rdquo;&ldquo;62년 1월 27일이요.&rdquo;&ldquo;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야?&rdquo;&ldquo;북한 정무원 외교부 지도원이었어요. 아버지 성함은 김원석이고 어머니 성함은 림명석이에요.&rdquo;&ldquo;형제는?&rdquo;&ldquo;2남2녀 중 장녀예요.&rdquo;&ldquo;어릴 때 어디서 살았어?&rdquo;&ldquo;내가 한 살 때인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게 되어 쿠바에서 살았어요.&rdquo;&ldquo;쿠바에서 언제 북한으로 돌아왔어?&rdquo;&ldquo;네 살 때인가 다섯 살 때 돌아왔어요.&rdquo;김현희는 북한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것 같았다. 그녀는 67년에 북한으로 돌아와 68년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하신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4년제인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성구역 중신동 중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77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다니다가 78년 9월에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ldquo;그럼 언제 공작원이 되었어?&rdquo;&ldquo;80년 3월에 중앙당에 소환되어 80년 4월 7일 공작원양성소인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어요. 공작원 속성정보반 소속으로 81년 4월 17일까지 1년 동안 교육받았어요. 그리고 거기서 83년 4월 중순까지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본에서 납치된 일본 여인인 이은혜와 합숙하면서 교육을 받았어요.&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27/1338097063449151.jpg"/>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에서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 씨(이은혜)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 씨와 만나 포옹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김현희는 8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때 북한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녀는 84년 7월까지 사상 재교육을 받고 84년 7월 초순경 대외정보조사부 1과의 사업을 도와주라는 지시에 따라 동북리 2호초대소 2층에 수용되어 당시 70세였던 김승일을 만났다. 그녀의 임무는 김승일과 일본인 부녀지간으로 위장하여 김승일의 서울침투공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도와주는 것이었다.김현희는 84년 8월 15일부터 10월 2일까지 해외실습공작을 했다. 85년 1월부터는 약 6개월 동안 김숙희와 함께 중국어 학습을 받았다. 85년 7월부터 86년 8월까지는 중국 광주에서 해외 어학 실습을 실시했다. 86년 8월부터 87년 1월까지는 마카오에서 실습했다. 87년 1월 20일 평양으로 돌아와 87년 9월 초순까지 사상 재무장 교육을 받았다.87년 9월 20일 마카오에서 밀입국 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준다는 정보에 따라 김숙희와 함께 마카오로 갔다. 이때도 28세의 현존인물인 우잉으로 위장했다.87년 10월 김현희에게 단독으로 입국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동북리2호 초대소로 돌아와 김승일과 함께 수용되어 일본인 부녀지간으로 위장하여 KAL기를 폭파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87년 11월 12일까지 폭파 계획을 수립했다.수사관들은 김현희가 북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국 조사2과 소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가장 중요한 KAL기에 대해 심문에 들어갔다.&ldquo;너도 알다시피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 KAL기에 관한 것이므로 먼저 KAL기에 대해 물어보겠다. KAL기는 어떻게 했지?&rdquo;김현희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ldquo;자 이제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진행시키자. 어서 말해봐.&rdquo;&ldquo;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으로&hellip;.&rdquo;김현희는 가느다랗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ldquo;폭약을 라디오로 위장했군? 그걸 어떻게 했지?&rdquo;수사관은 흥분으로 고조되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물었다.&ldquo;하치야 신이치라는 가명을 쓴 김승일과 함께 KAL858기에 탄 후 9시간 후 터지도록 장치한 라디오와 액체폭약을 비행기 선반위에 놓고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렸습니다.&rdquo;김현희의 자백이 이어졌다. 혹시라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묵비권을 행사할까봐 심문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수사관들은 이 상황을 위에 긴급히 보고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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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2] 피말리는 진실게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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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0 May 2012 15:4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20/1337496209448520.jpg"/>  ▲ 제주도에 안보 관련 강연을 하러 갔을 당시 김현희와 최창아 씨. 둘은 몸집이 비슷해 최 씨가 옷을 사다 주면 김 씨에게 잘 맞았다고 한다. 사진제공=최창아 씨1987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이 들뜨게 된다. KAL기 폭파사건과 대통령선거 등으로 1년 내내 어수선했으나 1987년도 며칠 남지 않게 되었다. 개신교 신자인 나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마유미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도 없고 크리스마스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마유미의 진술은 진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중국인이고 중국에서 살았다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은 그녀를 심문하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나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마유미와 같이 지내면서 문득 그녀의 생리가 걱정이 되었다.&ldquo;얘 생리는 언제 하지? 준비해 둬야 하잖아?&rdquo;나는 후배인 채명희 수사관에게 물었다.&ldquo;세이리?&rdquo;채명희 수사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반문했다. 마유미도 놀랐지만 나와 채명희 수사관도 깜짝 놀랐다.&ldquo;금세 알아듣네.&rdquo;그러나 생리라는 한국말과 세이리라는 일본 말이 비슷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ldquo;생리일이 언제야?&rdquo;나는 마유미에게 물었다. 마유미가 생리일을 가르쳐주어 나는 생리대를 사다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ldquo;중국 것보다 질이 좋네.&rdquo;마유미는 생리대를 살피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생리일이 지나도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다. 조사실뿐 아니라 안기부 내에서의 쓰레기는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여 모두 소각시키기 때문에 쓰레기를 수거했지만, 그녀가 사용한 생리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더니 책상 서랍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다.&ldquo;이거 변기에 버리면 안돼요?&rdquo;마유미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변기가 막히면 안 되니 쓰레기와 함께 버리면 소각장에서 태운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마유미는 그제야 슬그머니 사용한 생리대를 내놓았다. 후에 들으니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는 일일이 조그맣게 찢어서 변기에 버렸다고 했다. 조사실에서도 처음 몇 개는 찢어 변기에 버렸다고 했다.&lsquo;원 세상에&hellip; 어떻게 생활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rsquo;나는 어이가 없었다. 마유미는 바레인에서 트레이닝복만 입고 왔기 때문에 그녀에게 옷이 필요했다. 아직은 그녀를 데리고 외출할 수가 없었다. 부국장이 나에게 그녀의 옷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녀와 체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과의 행정담당 직원과 함께 명동의 백화점에 가서 무난한 검정색 모직투피스와 흰색 블라우스, 점퍼와 바지, 속옷 등을 구입했다. 신발도 샀다.키는 내가 조금 크지만 그래도 얼추 우리 둘의 체격이 비슷하고 발 크기도 같았기 때문에 그녀의 옷과 신발 등은 내가 입어보고 신어보고 사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 그녀의 옷은 내 취향에 맞춰 사게 되었는데 보수적인 안기부 분위기 때문에 늘 옷도 점잖은 것에 익숙해있던 내 탓에 그녀도 점잖고 어두운 옷만 입게 되었다.&ldquo;새 옷을 사왔으니까 입어 봐.&rdquo;나는 조사실로 돌아오자 그녀에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산 옷이지만 맞춤처럼 잘 맞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감사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20/1337496209448521.jpg"/>  ▲ 김현희가 최창아 씨에게 보낸 카드. &lsquo;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rsquo;는 김 씨의 덕담이 눈에 띈다. 사진제공=최창아 씨마유미가 중국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중국정세에 대해 잘 알고 북경어와 광둥어에 능통한 분에게 그녀를 심문하게 했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을 김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유미가 살았다고 말하는 동네와 그곳에서의 생활상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고 마유미는 그에 대해 대답했다. 대화가 오갈수록 서로의 언성이 높아져갔다. 김 선생이 그녀의 진술에 모순된 점을 지적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커지면서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고아로 자랐다고 하면서 주식으로 호떡을 먹었다고 했다.&ldquo;호떡은 상류층들이 주로 먹는 음식이야. 너는 흑룡강성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너의 중국어 억양은 흑룡강성이 아닌 광둥성 억양이야.&rdquo;김 선생이 날카롭게 추궁했다.&ldquo;아니에요.&rdquo;마유미는 아니라고 언성을 높였다.&ldquo;얘가 거짓말을 하는데?&rdquo;김 선생이 우리 수사관들을 향해 말했다.&ldquo;거짓말 아니에요.&rdquo;마유미가 대뜸 중국말로 반박했다. 차츰 그녀의 거짓 진술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수사국의 부국장은 오랫동안 일본에 파견되어 근무했던 사람으로 일본에 정통했다. 부국장이 한 번은 이런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ldquo;우소 바까리(거짓말이야)&rdquo;라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긍정하는 모습인 듯했다. 하루는 그녀의 책상 서랍에서 연필 깎는 도구와 연필을 발견했다. 그때는 아직 심문을 하기 전이라 그녀가 글을 쓸 일은 없었다. 수사관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런데 아침에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가 연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문틈으로 살피니 거울을 보면서 정성스럽게 눈썹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여권사진과 바레인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모습을 보면 그녀의 눈썹은 정리를 하다못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가끔 수사관끼리 그녀의 눈썹에 대해 말했고 그 당시 한국여자들은 눈썹을 짙게 칠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아마도 자신을 담당하던 여수사관들을 보고 자기 눈썹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어 그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저 상태에서 눈썹 그릴 생각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여자의 본능이었다.우리는 차츰차츰 KAL기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은 이라크 주재 총영사 부부, 기장 4명, 부기장 4명, 항공기관사 4명을 포함한 대한항공 직원 20명, 외국인 2명 그 외에는 모두 돈 벌어 가족들을 호강시키겠다면서 열사의 나라에서 고생을 하다가 돌아오던 노동자들이었다. 심문실에도 TV를 설치해놓고 당시 상황이나 가족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사건이 얼마나 처참하며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것인가를 이야기했다.그녀의 심정이 흔들리는 것같이 보였다. 중국어로 한참 심문하는 도중에 그녀가 갑자기 중국말로 뭐라고 물어왔다.&ldquo;오! 얘가 배신자에 대해 물어보는군.&rdquo;김 선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말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면서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산으로 치면 9부 능선쯤에 도달한 기분이었다.&ldquo;네가 말하는 배신자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배신자가 아니라 용기 있는 자야. 배신자라는 말은 깡패집단에서나 자기들 조직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쓰는 말이야.&rdquo;주무수사관이 김 선생에게 말하고 통역하게 했다. 김 선생이 그대로 통역했다.&ldquo;자기의 의지가 아닌 강요에 의해 한 일은 잘못이 없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밝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너도 한국에 와서 봤으면 알겠지만 북한에 속아 살아오지 않았나?&rdquo;우리는 긴장하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리는 답답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ldquo;내가 사실을 말하게 되면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되나요?&rdquo;다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물론 중국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자백하면 북한에 있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그녀에게 절망적인 답변을 해 줄 수는 없었다.&ldquo;이미 사건이 일어났고 네가 말을 안 하면 북한은 사건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가족들을 다 해칠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오히려 가족들을 처치할 경우 북한은 자기네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차마 가족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rdquo;주무수사관은 억지 설득을 했다. 사건이 밝혀지면 북한에서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가 자백을 하도록 설득해야 했다.&ldquo;북한은 모든 사람을 집단 최면에 걸리게 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어. 너도 젊은 나이에 속아서 이런 일을 벌였으니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너도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지 않아? 지금 여기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많은 간첩들과 귀순자들이 잘 살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만나보게 할 수 있어.&rdquo;주무수사관은 은근히 그녀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이 기회였다. 다그치듯 물었다.&ldquo;그래 네 이름이 뭐지? 성이라도 알자.&rdquo;그녀의 입이 열렸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목 안에서만 자그마한 소리가 맴돌았다.&ldquo;뭐라고?&rdquo;주무수사관이 재촉했지만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주무수사관은 그동안 수고한 김 선생과 우리들을 모두 옆 조사실로 나가 있게 했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온 그녀로서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한테만 쏠려있어 속내를 털어놓기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옆방은 수사관들이 수사상황을 정리하고 보고하는 방으로 그녀의 방에 설치해 놓은 CCTV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CCTV를 통해 계속 심문상황을 지켜보았다.김현희가 마침내 입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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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1] 당신은 누구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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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3 May 2012 14:04: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13/1336885468447910.jpg"/>  ▲ 지난 2009년 김현희가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 씨와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를 만나는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김현희에 대한 수사는 대부분 자백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강압 수사를 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자백에 대해서 확인 절차를 소홀히 하거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실 자백을 반드시 확인하고 물증을 찾아야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불가능했다. 안기부라고 해도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북한 사회에서 그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서 자백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는 공작원으로 상당 기간 동반자로 활동을 했다. 동유럽이나 중국에 이르렀을 때는 부녀지간으로 위장하여 한 방을 사용했다. 수사관들은 그 점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김현희는 바레인 경찰의 신문에서도 그렇게 진술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과학적인 조사를 해야 했으나 그녀의 자백을 그대로 믿었다.다시 목욕을 하던 그날로 돌아간다. 목욕을 시키면서 그녀의 어깨를 살피자 흉터 하나가 눈에 띄었다. 3~4㎝ 정도 크기에 피부가 울룩불룩 튀어 올라와 있어 보기에도 매우 흉했다. 내 눈에는 수술자국 같았다. 나는 이 사실도 주무 수사관에게 보고했다.&ldquo;어깨의 흉터는 어떻게 하다가 생긴 거야?&rdquo;주무수사관이 마유미에게 물었다.&ldquo;중국에 갔을 때 불량배를 만났는데 그들에게 찔렸어요.&rdquo;그녀가 흠칫하면서 대답했다.&ldquo;뭐에 찔렸어?&rdquo;&ldquo;칼에 찔렸어요.&rdquo;그녀는 당시 상황을 손짓까지 해가면서 설명했다. 그러나 공작원들이 불량배들을 만나 칼에 찔리는 것은 드문 일이다. 미심쩍었으나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무지 칼에 찔린 상처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체격은 좋은 편이었다. 특히 어깨가 발달되어 있었고 허리는 잘록했지만 허벅지는 근육으로 탄탄했고 종아리는 알이 배어 튼튼해 보였다. 상당 기간 동안 훈련을 받은 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양 볼 주변은 눈에 띄게 기미가 끼어 있었고 손톱에는 건강이 안 좋으면 생긴다는 흰 줄이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부터 그런 건지, 독약 앰플을 깨물고 바레인 병원에 있으면서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ldquo;얘가 병이 있나? 손톱에 흰 줄이 있네.&rdquo;나는 그녀의 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슬며시 자기의 손을 들여다보았다.마유미는 북한 공작원이 확실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그녀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감했다. 수사관들이 다른 사건보다 3배나 배치되고 수사관 회의가 자주 열렸다. 어떻게 하든지 그녀의 입을 열어야 했다.처음 마유미를 심문할 때 KAL기가 폭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을 다물거나 자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였다.&ldquo;어느 나라 사람이야?&rdquo;마유미에 대하여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심문은 그녀의 신상에 대한 것부터 시작되었다.&ldquo;중국.&rdquo;마유미는 바레인에서 가짜 여권을 가진 것이 탄로나 더 이상 일본인으로 행세하기 어려웠다고 느껴 자신을 중국인으로 진술했다. 바레인에서 체포된 후 바레인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는 진술이었다.&ldquo;나이는?&rdquo;&ldquo;1962년생이에요.&rdquo;&ldquo;일본 여권에는 60년생이라고 되어 있는데?&rdquo;&ldquo;정확하게 말하면 64년생이에요.&rdquo;&ldquo;왜 진술이 엇갈리는 거야? 자꾸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해?&rdquo;심문을 하는 수사관과 그녀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위조 여권에는 1960년 1월 27일생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62년생이라고도 했다가 64년생이라고도 하는 등 수사관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ldquo;누가 거짓말을 해요?&rdquo;&ldquo;나이를 거짓으로 말하고 있잖아? 이렇게 자꾸 거짓말을 하면 너를 상대할 수 없어.&rdquo;수사관이 화를 벌컥 내면서 그녀를 다그쳤다.&ldquo;그럼 나를 죽여요.&rdquo;마유미가 갑자기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수사관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문이 중단되고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마유미의 반발에 나도 놀랐다.&ldquo;네가 솔직히 말해야만 우리도 너를 도울 수 있다.&rdquo;수사관이 언성을 낮추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62년생이라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그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13/1336885468447911.jpg"/>  ▲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영화 &lt;마유미&gt; 스틸 사진.나는 그녀가 심문을 받을 때 외에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지냈다. 채명희 수사관도 항상 붙어 있다시피 했다. 심문을 하지 않을 때 때때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이야기는 주로 일본어로 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고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게 일본어였기 때문이다.&ldquo;선배, 쟤가 하는 일본어가 일본 사람들하고는 다른 것 같지 않아?&rdquo;일본어를 잘하는 채명희 수사관이 나에게 물었다.&ldquo;일본말이 유창하지만 악센트는 좀 다른 것 같아.&rdquo;&ldquo;내가 들으면 북한 악센트인 것 같아.&rdquo;마유미는 일본어가 유창했지만 억양은 아무리 들어도 북한의 억양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위장 진술이었다.식사는 주로 밥이었다. 처음 그녀는 식사를 조금밖에 안했는데 그나마 김치는 맵다고, 된장은 냄새 난다고 하면서 잘 먹지 않았다. 구운 김을 보고는 종이를 태운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일본에서 생활했다면서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김을 모른단 말이야? 우리는 의아해했지만 심문이 계속될수록 이런 일은 점점 늘어났다.&ldquo;일본 수상이 누구야?&rdquo;&ldquo;나카소네.&rdquo;우리는 일본에서 살았다는 그녀의 말에 따라 일본에서의 생활을 자세히 물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수상은 다케시타였는데 그녀는 전 수상인 나카소네라고 대답하는 등 진술에 신뢰성을 보여주지 않았다.&ldquo;일본의 자동차 핸들은 어느 쪽에 있지?&rdquo;&ldquo;왼쪽에요.&rdquo;마유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동차 핸들은 오른쪽에 있었다.&ldquo;일본에서 무슨 텔레비전을 보았어? 텔레비전 이름이 뭐야?&rdquo;&ldquo;즈쯔시.&rdquo;그녀가 즈쯔시라고 하는 바람에 채명희 수사관의 눈이 커졌다. 즈쯔시는 일본 말로 진달래라는 뜻인데 북한에서 생산하는 텔레비전 상표가 진달래였다.&ldquo;즈쯔시는 진달래란 말이지?&rdquo;채명희 수사관이 기회를 포착하고 물었다.&ldquo;잘 기억나지 않아요. 소니인 것 같기도 하고 후지인 것 같기도 해요.&rdquo;&ldquo;즈쯔시라고 했잖아?&rdquo;그녀는 당황하여 얼버무리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피곤하다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심문을 받다가도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이 나오면 말을 멈추고 피곤하다면서 심문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수사관들도 쉴 수밖에 없었다. 수사관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가고 상부에서는 빠른 심문을 재촉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강압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녀가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여 그녀가 살던 집까지 그리게 했다. 정확한 주소도 말하라고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루한 줄다리기였다.&ldquo;중국에 있을 때 한국 노래를 아는 게 있어?&rdquo;&ldquo;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조금 알아요.&rdquo;&ldquo;한번 불러봐.&rdquo;그녀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고향의 봄을 부르라고 하자 역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그녀가 부르는 고향의 봄을 따라 불러주었다. 그녀는 더욱 흥이 나서 고향의 봄을 불렀다.&ldquo;이 노래들을 어떻게 알지?&rdquo;&ldquo;흑룡강성에서 조선족이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요.&rdquo;심문은 지지부진했다. 12월 22일 오후, 수사관들은 그녀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녀를 거리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경호 문제로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그러나 남파 간첩이나 귀순자들에게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수사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방법이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상부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사관들이 구두회의를 하여 일단 차 안에서 거리 모습만 보여주기로 했다. 며칠 동안 하루종일 조사실에서 살아야 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심문에 응하기를 바라는 고육책이었다. 그녀가 북한 공작원이라면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고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자동차를 타고 남대문, 시청, 여의도와 잠실, 압구정동을 돌았다.&ldquo;여기가 남대문이야. 대한민국 국보 1호지.&rdquo;나는 물론 그녀와 동행하여 차창으로 지나가는 건물을 설명했다. 그녀에게는 처음 보는 서울 풍경이니만큼 충격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치를 살폈다.&ldquo;저기는 서울시청이야.&rdquo;마유미는 내가 손가락질을 하면 쳐다보기는 했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ldquo;여긴 압구정이야. 70년대까지는 명동이 최고로 번화했지만 이제는 부자들이 압구정동에 많이 살아.&rdquo;나는 서울에 아파트 붐이 일어난 것을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북한에서 훈련을 받은 마유미에게 설명을 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그녀는 크게 놀란 모습이 아니었다.김현희는 훗날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한 후에 이때 한국의 발전한 모습에 놀랐지만 그것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상점의 광고판도 영어로 되어 있어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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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10] 심문이 시작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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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6 May 2012 13:39: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06/1336279171447320.jpg"/>  ▲ 신문에 실린 마유미, 김현희에 대한 기사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오열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출처=경향신문김현희를 무사히 압송했으나 투표를 하러 잠깐 들렀을 뿐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반 사건이라면 집에 돌아가 쉬고 나와서 심문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KAL기 폭파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테러리스트였다. KAL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안기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론도 안기부 내의 지인들을 활용하여 그녀에 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KAL기 추락으로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이었다. 언론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가족들의 슬픔을 다루고 있었다. 방송과 신문에 연일 유가족들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아팠다.마유미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전에 그녀가 강제 압송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쉬게 해주어야 했다. 나와 채명희 수사관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사국장은 일단 그녀에게 쉬게 해주라고 지시했다. 압송으로 지쳐 있기도 했지만 심문을 하지 않아 초조하게 만드는 심문 기술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쉬게 하기 전에 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과 침으로 더러웠고 머리도 부스스했다. 우리도 바레인의 호텔에서 좋지 않은 물로 머리를 감았기 때문에 샤워를 해야 했다.&ldquo;목욕할래요?&rdquo;내가 물었으나 마유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기다리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마유미는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사관들의 질문이나 대화에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자 우울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인내력에 놀랐다. 공작원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았겠지만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ldquo;마유미가 목욕을 해야 하니 남자 분들은 밖으로 나가세요.&rdquo;나는 남자 수사관들에게 말했다.취조실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남자 수사관들이 밖으로 나가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마유미는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ldquo;얼굴이 더러우니 목욕하고 쉬어요. 미리 말해 두지만 어디에서도 우리와 떨어질 수 없어요.&rdquo;채명희 수사관이 손짓을 하면서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유미는 망설이지 않고 채명희 수사관을 따라 들어갔다. 여자 수사관들이 그녀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 것은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의 나신을 자연스럽게 살피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자라고 해도 몸의 형태를 보고 어떤 훈련을 받은 공작원인지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나도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다.&ldquo;선배, 저 여자 거기 체모가 없어요.&rdquo;내가 욕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채명희 수사관이 입구에서 나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채명희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로 그녀의 등에 물을 뿌려주었다.&ldquo;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목욕하면서 편히 쉬어요.&rdquo;나는 그녀의 등을 밀고 비누칠까지 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ldquo;며칠 동안 씻지 못해서 때가 둥둥 뜨네.&rdquo;욕조는 금세 더러워졌다. 바레인에서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공작원 생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유미는 욕조의 더러운 물을 보고 창피한지 물만 휘휘 저었다. 그녀에게 물을 뿌려주면서 하체를 살피자 역시 체모를 밀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모는 겨우 5㎜ 정도 자란 상태라서 민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나는 목욕을 마치자 고참 수사관인 신영철(가명) 수사관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일반인들이라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주무 수사관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 상태로 어떤 종류의 공작원인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ldquo;왜 그랬을까?&rdquo;신영철 수사관이 나에게 물었다.&ldquo;모르겠어요. 상태로 봐서 바레인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요?&rdquo;나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 그녀가 수사에 협조하기 시작했을 때 수사관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바레인 육군병원에 체포되어 있을 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바레인 육군병원에서 왜 그랬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그것이 의문이다.  마유미가 자백한 후 바레인에서 압수당한 그녀의 소지품을 확인시키는 절차가 있었다. 옷에서부터 사소한 물품까지 모두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조그만 주머니가 있어서 열어보니 손톱 조각이 들어있었다. 그녀에게 물어보니 바레인 육군병원에 있을 때 간호하던 중국계 간호사가 손톱을 깎았다고 했다.&ldquo;뭘 이런 것까지 넣었담?&rdquo;김현희는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그들이 손톱을 깎은 이유는 체포 당시 청산가리가 든 앰풀을 깨물고 쓰러졌기 때문에 그녀의 몸에서 청산가리 반응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고 바레인 경찰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손톱에서 청산가리 반응이 나온 걸로 되어 있었다. 같은 이유로 그녀의 체모를 깎았다면 그 체모도 증거품으로 보냈을 텐데 바레인 경찰이 보낸 증거물에는 없었다.마유미를 서울로 압송한 첫날은 일체의 심문을 하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뒤에 그녀를 쉬게 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저녁시간이 되자 안기부 식당에서 식사가 배달되어 왔다. 식사는 직원들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일본인으로 위장을 했으나 한국식 식사였다. 마유미는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lsquo;초조하니까 식사를 조금밖에 할 수 없겠지.&rsquo;나는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 그녀를 이해했다. 내가 그녀의 처지라고 해도 식사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나는 맛있게 식사를 했다.&ldquo;오늘은 심문이 없으니까 편히 쉬어요.&rdquo;나는 마유미에게 한국말로 했다. 마유미는 내 말을 못들은 체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시선이 부딪치는 일은 자주 있었다. 나는 테러리스트의 눈에서 무엇인가 읽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했고 냉정을 잃지 않았다.마유미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잠을 잤다. 심문실에는 책상과 침대가 있었다.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는지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나 곧 잠이 들었다. 나와 채명희 수사관은 그녀가 잠이 든 뒤에도 감시를 해야 했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안기부로 돌아오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이 풀어져 있었다. 긴장감이 풀어진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lsquo;쟤는 잠이 올까?&rsquo;나는 잠을 자고 있는 마유미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서운 테러리스트였다. 바레인 공항에서 남자는 자살했고 그녀는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앞으로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것은 나로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506/1336279171447321.jpg"/>  ▲ 군부대를 방문한 김현희(왼쪽 두 번째)와 최창아 씨(맨 오른쪽). 비행기를 추락시킨 테러리스트에서 안보강연을 하러 다니기까지 그의 인생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 사진제공=최창아 씨나는 12월 15일자 경향신문을 보았다. 신문에 마유미 압송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lsquo;KAL기 폭파사건의 용의자인 하치야 마유미가 15일 하오 2시 10분 KAL8351 특별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우리 측 공안관계기관에 인도됐다.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사체를 태운 특별기는 이날 하오 2시6분쯤 김포공항 국내선 남쪽 계류장에 착륙했다. 하오 2시 25분쯤 호송요원 6명과 함께 트랩에 모습을 드러낸 마유미는 시종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매우 지친 표정이었다.마유미는 하늘색 트레이닝 상하의에 짙은 회색 재킷을 입었고 입에는 대형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남녀 1명씩의 관계 직원에 이끌려 트랩을 내린 마유미는 계단조차 내려다보기 힘겨운 듯 그동안의 수사과정에 지친 탓인지 고된 표정이었다.마유미는 하오 2시 28분쯤 국립경찰병원 소속 서울7노 2586호 앰뷸런스에 실려 관계기관으로 이송됐다.이에 앞서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의 사체를 담은 밤색관이 화물 출입구를 통해 내려져 경찰병원 소속 서울7노 5529호 앰뷸런스에 실렸다.마유미 일행의 도착에 앞서 김포공항에 국내선 계류장 주변에는 또 다른 테러행위에 대비, 무장군인들과 공항 보안요원들이 삼엄한 경비를 폈다.공항에는 마유미의 한국 인도를 취재하려는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이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기도 했다.&rsquo;나는 신문을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문 1면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내일로 닥쳐 온 대통령선거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내일 밤이면 투표가 끝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나는 다시 잠을 자고 있는 마유미를 보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마유미가 내 앞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KAL기의 추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비행기의 파편은 아직 찾지 못했고 블랙박스도 회수할 수 없었다. 대한항공현지조사단은 태국 일대에서 부유물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12월 14일 상오부터 나콘담 섬 부근 해안을 수색하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사단 단장은 대한항공 조중건 사장이었다. 그가 직접 현지에 날아가서 수색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인도와 미얀마, 태국도 비행기의 파편이나 부유물을 수색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넓은 바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KAL기가 공중에서 폭발하여 추락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KAL기의 잔해는 1990년 5월 22일이 되어서야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의 선체에는 서울 1988이라는 글자와 올림픽마크, 태극 문양이 선명하여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비행기의 잔해를 찾는 작업은 수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115명을 죽음으로 이끈 테러리스트. 그녀가 내 앞에서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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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9] 대통령선거와 마유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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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Apr 2012 13:34: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29/1335674069446660.jpg"/>  ▲ 첫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진 1987년 12월 16일 하루 전에 마유미가 서울로 압송돼 왔다. 노태우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lsquo;여권 김현희 사건 조작설&rsquo;이 돌기도 했다. 경향신문&middot;보도사진연감나는 공항에 그렇게 많은 기자들이 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외신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마유미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계속 &lsquo;발 조심해&rsquo;를 연발했다. 그녀가 듣고 있는지 듣지 않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이 기자들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ldquo;그때 김현희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rdquo;여러 해가 지났을 때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언론사에서 김현희를 인터뷰하면서 나에게도 질문을 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lsquo;발 조심해&rsquo;라는 말을 했다고 대답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당시 김현희 못지않게 내 머리도 부스스했다. 기자들이 그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바레인 호텔에서 머리를 감았을 때 물이 나빠 머리카락이 엉겨 붙던 일을 생각했다. 머리를 감았으나 빗질이 되지 않았고 비행기 안에서도 내 자신에 대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사진이 찍혔으니 나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내 얼굴이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날의 주인공은 마유미였다. 그러나 마유미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사진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방송에까지 나갔다. 신문을 보고 누구보다 놀란 것은 우리 부모님이었다.마유미는 고의로 넘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해나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갈랐다.현장에서는 인터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유미에 대해서는 우리도 조사조차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나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현장에 있던 안기부 수사관들이 우리를 차로 인도했다. 우리는 서둘러 대기해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뒷좌석 가운데 마유미를 앉히고 왼쪽에는 내가, 오른쪽에는 남자 수사관이 같이 탔다.&ldquo;출발해.&rdquo;한영수 과장이 지시했다. 우리 앞에 있던 차가 먼저 떠나고 다음에 우리 차가 출발했다. 경호를 하는 차들과 호송 팀 차들도 뒤따라왔다. 우리를 태운 차가 출발하자 여러 대의 방송국 차량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젠 우리가 기자들의 보도차량을 피해서 달아나야 할 형편이었다.승용차는 빠르게 공항을 벗어나 올림픽대로로 들어섰다. 한강과 행주산성이 차창으로 지나가자 비로소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마유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ldquo;서울이야. 한번 쳐다봐.&rdquo;나는 여유가 생겨 마유미에게 말을 건넸다. 마유미는 서울에 관심이 없는지, 수사관들에게 저항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차는 한강변 올림픽대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이제야 들었기 때문인지 겨울이지만 따뜻한 서울 오후의 햇살이 나에게는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방송국 차량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차가 시내로 들어서고 조금 더 달리자 저만치 안기부 출입문이 보였다. 우리는 여느 피의자들을 호송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김현희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혹시 정문에는 미리 기자들이 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남산 쪽으로 난 후문으로 들어갔다. 도착하자 수사국 조사실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수사팀이 미리 준비해놓은 조사실로 그녀를 데리고 가도록 인도했다. 마유미는 시종일관 힘을 빼고 우리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왔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체념이 아니라 강한 저항의 표시로 느껴졌다. 안기부에 도착하자 나는 집에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조사실은 세 평 남짓 되었다. 일인용 침대와 책상 2개, 작은 소파 세트,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는 눈물과 침을 흘리고 있는 마유미를 침대에 앉혔다. 새로 꾸려진 수사팀 중 몇 명이 조사실로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고 상부에서는 그녀가 안정할 수 있도록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당분간 그대로 두라는 지시를 내렸다.나와 채명희는 바레인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곧장 수사에 투입되었다.잠시 후 의무실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 그녀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건강상 특별히 이상은 없었으나 그녀의 무릎이 문제였다. 아픈 표시를 하는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리자 무릎이 멍들고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가 바레인에서부터 도착할 때까지 엉거주춤해 있었던 것은 바로 무릎의 통증이 원인이었다. 의사가 안티푸라민 연고를 주었다.&ldquo;이걸 무릎에 바르고 뜨거운 물로 찜질해 주면 좋아질 거야. 대수롭지 않아.&rdquo;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29/1335674069446661.jpg"/>  ▲ 김현희가 최창아 씨에게 보낸 여러 카드들. 김현희는 바레인에서부터 자신을 호송했던 최 씨와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제공=최창아 씨간호사가 마유미의 무릎에 안티푸라민 연고를 발랐다. 수갑을 풀어주고 그녀의 입에 붙였던 마우스피스도 제거했다. 오랜 시간 붙여놓았기 때문에 마우스피스를 고정시키기 위해 붙였던 반창고를 떼기가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제거하자 입술 주변과 양 볼이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마유미도 슬며시 자신의 뺨을 만져보았다. 나는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의 발 아래에서 무릎 찜질을 해 주었다. 몇 번 반복해주자 시원한 듯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ldquo;물을 줄까?&rdquo;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유미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ldquo;그럼 우유를 마셔요. 목이 마르지 않아요?&rdquo;그녀는 조금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입에 물을 갖다가 대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못 이기는 체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ldquo;어느 나라 사람이오?&rdquo;&ldquo;기왕에 이렇게 된 거 쉽게 갑시다. 버텨봐야 서로 힘들지 무슨 소용이 있소?&rdquo;수사관들이 다투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ldquo;수고들 했어. 밥도 못 먹었다면서? 우선 밥부터 먹어.&rdquo;호송 팀은 비행기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불과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밥을 보자 너무나 기뻤다. 몇 시간이 지나가자 수사국장의 호출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국장실로 들어갔다.&ldquo;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 같아?&rdquo;국장은 우리에게 다짜고짜 그 질문부터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ldquo;최창아 씨도 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어?&rdquo;수사국장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ldquo;북한의 공작원이 틀림없는데 북한 사람인지는 조사를 하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rdquo;나는 그때까지도 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면 비행기에서라도 조사를 시작했을 것이다.&ldquo;모두들 수고했어. 당분간 퇴근하지 말고 조사를 해야 할 거야.&rdquo;수사국장은 몇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더니 돌아가라고 지시했다.수사관들은 보통 격일이나 이틀 간격으로 24시간 수사를 하고 교대로 하루씩 쉬지만 KAL기 사건은 워낙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처음 일주일은 교대조차 할 수 없었다. 수사에 투입된 인원도 보통 사건의 3배 정도나 되었다.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수사뿐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신문에 보도되는 기사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추측성 기사도 많았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흘린 기사도 있었다.&ldquo;마유미가 딸기를 좋아한다고? 이게 말이 돼? 이런 기사가 어떻게 신문에 실린 거야?&rdquo;그런 기사가 나갈 때마다 우리는 상부로 불려가 호되게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수사 상황을 누설한 일이 없었다. 조사실 분위기가 비슷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안기부에서 흘러 나간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자 뜻밖에 안기부 수사국이 아니라 최상부에서 흘려보낸 것이었다.나는 때때로 안기부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그것은 음지에서 국가를 위하여 묵묵히 일을 하는 요원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김현희 조작설 논란이 많은 것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대통령선거 하루 전에 서울로 압송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유미의 압송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훗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에서 김현희 사건을 재조사하고 그녀의 압송이 여당의 선거 전략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는 경악했다. 정치권이 마유미를 선거일 전에 압송을 해오라고 인기부에 압력을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레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얽혀 있고 대형여객기 폭파사건은 국제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어서 단순하게 한국 정치권의 요청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요원들은 대형 참사를 일으킨 범인을 하루빨리 압송하여 조사를 하고 싶었다. 대통령후보를 위하여 우리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사 임무를 맡고 있는 요원들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유미를 압송해 온 것은 12월 15일이었고 다음 날이 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였다. 우리는 서로 교대로 집에 가서 투표를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도 집에 가서 투표를 했다.&ldquo;네가 마유미 데리고 온 거야? 신문에도 네 사진이 나왔어.&rdquo;집에서는 부모님들이 나를 보고 난리였다. 사실 대부분의 신문 1면에 마유미의 팔짱을 끼고 있는 내 얼굴이 실려 있었다. 가족들이 이것저것 물었으나 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투표소로 가서 선거를 했다. 투표를 한 뒤에는 다시 안기부 조사실로 돌아왔다. 대통령선거에는 우리도 관심이 많았다. 무엇보다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뽑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조사실에서도 선거 이야기를 자주 했다. 노태우 후보와 3김의 대결로 선거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 밤 개표가 시작되었다. 어느 때보다 비상한 관심 속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게 되었다. 밤 10시가 지나자 노태우 후보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후보의 분열로 야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마유미의 국내 압송이 대통령 선거에 도움이 됐을 거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당시 그것이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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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8]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460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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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Apr 2012 14:1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22/1335071771446080.jpg"/>  ▲ 1995년 &lt;일요신문&gt;과 만난 김현희. KAL기 폭파범이라는 꼬리표가 어울리지 않게 곱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우태윤 기자마유미를 서울로 호송하는 것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비행기 안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유미는 수사관들의 말에 추호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우스피스 때문에 호흡이 어렵고 침까지 흘러내렸다. 마유미는 눈을 감은 채 수갑을 찬 손으로 침을 닦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수갑이 자꾸 손목을 조였다. &ldquo;과장님, 수갑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rdquo;나는 한영수 과장에게 말했다.&ldquo;괜찮겠어? 자해를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rdquo;&ldquo;잘 살펴보고 있을게요.&rdquo;나는 한영수 과장의 허락을 받아 마유미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수갑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더욱 세밀하게 감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비행기에는 바레인 공항에서 자살한 신이치의 시체도 관에 냉동 보관되어 실려 있었다. 마유미와 신이치의 소지품들도 증거물로 인도 받았다.&lsquo;시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네.&rsquo;나는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솔직히 당시에 나는 노련한 수사관이 아니었다. 시체를 실은 관 뚜껑이 열리고 신이치가 살아 나와서 비행기를 폭파시키는 유치한 상상도 하고, 북한에서 테러리스트를 사주하여 비행기를 저격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마유미의 운명도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이제는 죽을지 살지 모르는 서울로 압송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저런 처지가 되었다면 어떤 심정일까. 똑같은 공작원들인데 신이치는 죽고 마유미는 살았다. 삶과 죽음이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는 하지만 마유미의 초췌한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졌다.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뜻밖에 기내에 먹을 것이 없었다. 바레인에 도착하자마자 마유미의 신병을 바로 인도해 올 줄 알고 KAL기 측에서 식사를 하루 분만 준비하였는데 하루를 더 바레인에서 체류하게 되다보니 음식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호송 팀은 컵라면과 스낵, 음료수 등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서울로 오는 동안 라면을 한 번밖에 먹지 못했다. 나와 채명희는 바레인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내내 마유미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ldquo;식사를 하셔야 하니까 이쪽으로 잠깐 오세요.&rdquo;남자 승무원이 나를 승무원실로 불렀다. 다른 수사관에게 자리를 부탁하고 남자 승무원을 따라 가자 컵라면과 기내에 있던 음료용 올리브절임을 몇 개 곁들여서 식사를 하게 해주었다.&ldquo;감사합니다.&rdquo;나는 특별한 배려를 해준 남자 승무원에게 인사를 하고 컵라면을 맛있게 먹었다.&ldquo;마유미에게도 무얼 먹여야 하지 않아?&rdquo;나는 마유미에게 컵라면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탈수를 우려해 잠시 마우스피스를 떼어 내고 컵에 빨대를 꽂아 마유미에게 음료수를 마실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lsquo;역시 공작원이라 다르구나.&rsquo;일반인들이라면 음식은 먹지 않아도 음료수는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유미가 탈진하여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의료진도 그 점을 걱정했다. 의료진과 한영수 과장이 상의하여 포도당을 주사하기로 결정했다. 마유미를 간이  침대에 눕히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몸을 뒤틀면서 강하게 저항했다. &ldquo;걱정하지 말고 안심해요. 포도당을 투여하는 거야.&rdquo;나와 수사관들이 번갈아 설득했으나 그녀는 계속 저항했다. 결국 수사관들이 팔다리를 잡고 의료진이 억지로 마유미의 팔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잠시 후 마유미가 포기했는지 저항을 멈췄다. 나는 마유미의 얼굴을 살폈다. 마유미가 눈을 감고 있어서 자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ldquo;바레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느라 몸이 지쳐 있었어요. 게다가 서울로 가는 것도 불안했고&hellip;.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있다가 누워서 주사를 맞는데&hellip;.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웬일인지 잠이 들고 말았어요.&rdquo;훗날 김현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피곤할 때 발에 이불을 덮으면 잠이 잘 온 경험을 기억하고 누워있는 그녀의 발에 기내용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녀를 동정해서라기보다 무사히 서울까지 호송하기 위해서였다.&ldquo;소변을 보게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 겁니까?&rdquo;의료진이 우리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녀의 소변 문제로 회의를 했다. 비행기 화장실을 살폈으나 비좁아서 수사관들과 함께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 혼자 들어가게 되면 혹시라도 자해를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ldquo;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수 없으면 비뇨기과적 방법으로 소변을 빼내는 방법이 있어요.&rdquo;여자 의사가 말했다. 우리는 여자 의사의 말에 동의하고 비뇨기과적 방법으로 소변을 빼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단어 하나가 흘러나왔다.&ldquo;어, 엄마아&hellip;.&rdquo;나는 마유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채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ldquo;너도 들었지? 엄마라고 한 말&hellip;.&rdquo;나는 채명희에게 물었다.&ldquo;분명 엄마라고 한 것 같았어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귀에도 그렇게 들렸어요. 하지만 엄마라고 그런 것도 같고&hellip;. 마마라고 그런 것도 같고&hellip;. 외국도 엄마 발음은 다 비슷하잖아요?&rdquo;채명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ldquo;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네.&rdquo;나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비행기는 점차 서울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면서 누군가가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내릴 준비를 하라고 하자 기내가 분주해졌다. 서울이 가까워진다는 말에 마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내릴 것인지 의논하다가 나와 남자 수사관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내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갑자기 계단에서 구른다든가 외부의 공격 등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근접 경호를 하기로 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22/1335071771446081.jpg"/>  ▲ 김현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입었던 체크무늬 코트는 원래 채명희의 옷이었다. 당시 김현희 호송 임무를 맡았던 수사관 최창아 씨(오른쪽)는 얼굴이 노출되고 말았다. 보도사진연감마유미의 옷도 문제였다. 서울은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바레인에서 입고 온 얇은 트레이닝복과 스웨터로는 추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채명희가 벗어 놓은 체크 모양(전문용어로는 하운드투스 체크라고 함)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호송책임자인 한영수 과장은 그녀의 옷을 마유미에게 걸쳐주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마유미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이 뉴스 화면을 통해 일제히 보도되면서 그해 겨울에 이 체크 옷이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채명희는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았다.마침내 비행기가 착륙했다. 우리가 부산하게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수사국장을 비롯한 몇몇 안기부 간부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다.&ldquo;모두들 수고했어.&rdquo;수사국장이 우리 호송 팀을 격려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안도했다. 마유미는 여전히 가늘게 떨면서 울고 있었다.&ldquo;좋은 데 왔는데 울긴 왜 울어?&rdquo;수사국장이 마유미에게 말하고 바깥에 많은 기자들이 와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처음에 비행기에서 내리면 곧바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차량으로 옮겨 타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lsquo;아니 입사 초기부터 신분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라고 하고서는 이제 와서 기자들 앞에 내 얼굴을 드러내란 말이야? 앞으로 나는 수사관 생활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rsquo;나는 그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마유미는 나와 남자수사관이 양팔을 잡고 있는데도 몸에 힘을 주고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바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몸으로 시인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에 오기를 그렇게 거부할 수 있을까. 나와 남자수사관은 그녀를 잡아끌듯이 비행기 문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lsquo;아.&rsquo;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비행기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계단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수많은 기자들이 촬영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서울의 오후는 햇살이 화창했으나 뺨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추운 줄도 모를 정도였다. 수사관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없는 나로서도 당황스럽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마유미는 아직도 다리에 힘을 주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도무지 걸으려는 의지가 없는 모습이었다. 저러다가 분명 죽으려고 별 짓을 다할 것 같았다. 만약 계단을 내려가다가 일부러 뒹굴든가 다리를 헛디뎌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ldquo;계단이니까 발 조심해.&rdquo;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듣든지 말든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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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7]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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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Apr 2012 13:21: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15/1334463714445440.jpg"/>  ▲ 1987년 리젠시 호텔 앞에서 김현희. 사진출처=MBC PD수첩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15/1334463714445441.jpg"/>  ▲ 1987년 리젠시 호텔 앞에서 최창아 씨. 사진제공=최창아 씨공기는 건조했고 바람도 후텁지근했다. 바레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고 하자 김영호 과장은 당황했다. 그러나 마유미가 바레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김영호 과장은 보안 때문에 호송 팀을 대사관에 묵게 하려고 했으나 호송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대사관이 좁았다. 비밀 엄수가 철저한 안기부 요원들과 의료진이 인근의 작은 호텔로 가고 나머지 인원이 대사관으로 갔다. 호텔은 규모가 작았으나 냉방이 서늘할 정도로 잘 되어 있었다. 바레인에 머물러 외무부를 지원하던 한영수 과장은 요원들에게 호텔에서 푹 쉬라고 했다. 그러나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창으로 거리를 내다보자 터번을 쓰고 흰옷을 입은 남자들과 히잡을 쓴 여자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레인은 석유 때문에 부유하게 살고 있는 나라였다. 나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무슬림의 나라 중동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호텔까지 오는 동안 땀을 흘렸기 때문에 샤워를 했다. 그러나 물이 뻑뻑하여 머리카락이 엉켜 붙어 빗질을 해도 잘 풀어지지 않았다.&lsquo;세상에! 뭐 이런 물이 다 있지?&rsquo;나는 중동이 물이 귀한 사막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외국에 처음 나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그날 밤을 호텔에서 묵었다. 날이 밝았으나 마유미를 언제 인도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마유미의 인도 협상은 외무부에서 했기 때문에 무작정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ldquo;호텔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으니 나가서 시내구경이라도 해. 오늘 처음 외국에 나온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rdquo;한영수 과장이 우리에게 100달러씩을 나누어주면서 말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거리로 나왔다. 나와 채명희는 모직 투피스 상의를 벗어 팔에 걸치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사람들을 따라 시내관광에 나섰다. 그러나 특별한 물건을 살 수는 없었다. 간호사들은 페르시아 카펫을 샀다. 그러나 채명희와 나는 마유미를 호송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물건들을 살 수 없었다.&lsquo;명색이 페르시아 카펫인데&hellip;.&rsquo;나는 임무 때문에 그런 물건을 사지 못해 아쉬웠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데 나도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한영수 과장은 바레인에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수도인 마나마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시내를 관광했다. 겨울복장이었던 우리는 모두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있었으나 땀을 쉴 새 없이 흘렸다.&ldquo;여기가 리젠시호텔이야. 마유미와 신이치가 머물렀던 곳이지.&rdquo;한영수 과장의 말에 놀라서 호텔을 쳐다보았다. 리젠시호텔은 크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마유미와 신이치가 묵었던 리젠시호텔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김현희도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현희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두 시간 남짓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ldquo;이게 뭐지?&rdquo;채명희가 침대 옆에 둘둘 말아서 세워 놓은 돗자리를 보고 나에게 물었다.&ldquo;카펫 아니야? 침대 담요거나&hellip;.&rdquo;&ldquo;무슨 카펫이 이렇게 작아?&rdquo;채명희가 의아해 했으나 나도 용도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으나 그것은 무슬림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씩 기도를 할 때 까는 돗자리였다. 나는 그때서야 무슬림 문화의 독특한 면을 이해했다.바레인은 인구가 당시 약 55만 명이었고 입헌군주국이었다. 수도는 마나마였는데 한때 영국 보호령으로 있다가 독립했다. 마나마는 석유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부가 넘치고 있었다. 마나마는 해안가에 있어서 중동지방이라고 하지만 비교적 아름다웠다. 호텔에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뜻밖에 마유미를 즉시 인도해 가라는 바레인 당국의 요청이 대사관을 통해 전달되었다.&ldquo;마유미가 인도된다. 즉시 짐을 정리해.&rdquo;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우리는 명령을 받자 황급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어느 사이에 밤 9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사막의 밤바람은 건조하면서도 약간 쌀쌀했다.공항 경계를 따라 빙 둘러 조명이 켜져 있었으나 공항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항의 경비는 여전히 삼엄했다. 오히려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많은 특수부대 복장을 한 군인들이 공항 주변에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우리를 태운 차량은 공항 내에서도 계속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던 차가 멈추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는 태극 마크가 선명한 비행기가 트랩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전세기였다. 어두운 활주로 100미터쯤 저쪽에 미등만을 켠 채 서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이 보였다.&ldquo;저기에 마유미가 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유미를 비행기 트랩 앞에서 넘겨받기로 했습니다.&rdquo;누군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마 대사관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가방을 비행기에 싣고 다시 내려와 비행기 트랩 앞에서 기다렸다.우리와 함께 왔던 특수부대 요원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대기했다.&ldquo;마유미를 인도 받으면 즉시 양쪽에서 팔짱을 끼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입에 마우스피스를 채워. 다들 긴장해.&rdquo;김영호 과장이 지시했다. 나는 긴장 때문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잠시 후 우리 쪽으로 차량들이 서서히 이동해왔다. 차량들을 바레인 군인들이 삼엄하게 감시하면서 따라왔다. 나는 마른침을 꿀컥 삼켰다. 이내 서서히 달려오던 차량들이 멎었다. 여러 대의 차량 중에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여자가 내렸다. 하늘색의 트레이닝 복장에 어깨에 걸친 국방색 스웨터는 흘러내리지 않게 양 소매로 대강 묶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눈을 감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무릎도 구부리고 거의 들리다시피 하면서 와서 그런지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왜소해 보였다.김영호 과장이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는 남자수사관과 함께 재빨리 그녀를 낚아챘다. 그녀는 거의 저항하지 않고 있었다. 나와 남자수사관은 그녀의 양 팔을 잡고 동시에 다른 수사관은 준비해 간 마우스피스를 그녀의 입에 끼우고 여러 겹의 반창고를 붙였다.&ldquo;빨리 태워.&rdquo;우리는 어떤 긴박한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마유미를 거의 번쩍 들듯이 팔짱을 끼고 트랩을 올라가 비행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유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계단에 걸려 넘어지거나 비행기 좌석 손잡이에라도 부딪칠까봐 최대한으로 조심했다.마유미를 비행기에 태우자 특수부대 요원들도 재빨리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리는 기내에 오르자마자 그녀를 가운데 좌석에 앉히고 수갑을 채웠다. 마유미 옆에는 여자 수사관들인 나와 채명희가 양쪽에 앉았다. 마유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배려였다.마유미 주위에는 몇몇 수사관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좌석에 떨어져 앉게 했다. 마유미는 인도받을 때부터 줄곧 눈을 감고 있었고 우리들 이야기에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유미를 호송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녀가 혹시라도 자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여자 수사관인 나와 채명희가 양쪽에 앉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행동을 주의해서 살폈으나 특별히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마유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눈을 감고 수갑을 찬 두 손을 마주잡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우스피스를 부착한 입에서는 자꾸 침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계속 닦아주어야 했다.이내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더욱 긴장했다. 마유미를 무사히 인도받았으나 공중에서 공격당할 염려도 있었다. 나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비행기가 이륙을 마치자 나는 비로소 마유미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표정은 초췌해 보였고 젊었다.나는 마유미가 긴 비행 시간 동안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신발을 벗기고 기내 양말을 신겨 주었다. 가끔 발걸이에 발을 얹어 주기도 했다.마유미를 비행기에 태우자마자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는 모두 한국말만 하라는 것이었다.&ldquo;목이 마르면 물 갖다 줄까요?&rdquo;나도 그녀가 듣는지 못 듣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야기를 했다.&ldquo;양말 신기게 신발 벗어요.&rdquo;마유미는 내 말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함께 갔던 다른 부서의 직원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마유미를 자세히 살폈다. 트레이닝복을 입어서인지 몸매가 잘 드러났는데 어깨와 하체, 특히 허벅지는 꽤 발달한 듯 보였지만 몸집에 비해 자그마한 얼굴에 눈썹은 거의 다 뽑은 듯이 손질되어 있었고 양 뺨은 기미자국이 두드러져 보였다. 피부색도 누렇게 떠 있었으며 파마기가 있는 머리는 부스스했다. 좁은 이마가 답답해 보였는데 이마만 더 넓었으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의 얼굴이었을 것 같았다.&lsquo;과연 저 여자가 북한공작원일까 아니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제3국의 여인일까?&rsquo; 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위에서부터 훑어보던 내 눈길은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손이었지만 손마디가 억세고 여기 저기 상처가 있었다. 나에게는 고된 단련으로 굳어진 손으로 보였다. 후에 그녀에게 물어보자 훈련을 받아서라기보다 학생시절 농촌 모내기와 군사훈련에 동원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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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6] 호송팀 바레인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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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8 Apr 2012 15:5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08/1333868215444810.jpg"/>  ▲ 1987년, 한국으로 압송된 후 기자회견을 하는 김현희. 연합뉴스12월 13일 나는 아침 일찍 안기부로 출근했다. 전날 밤 겨우 부모님께 내일 출발한다고 넌지시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셨다. 그러나 안기부 요원으로서 할 일은 해야만 했다.나는 부모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에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오늘은 마유미를 호송하러 특별전세기를 타고 바레인으로 날아가는 날이었다. 마유미의 정확한 정체와 KAL기 추락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유미를 한국으로 압송해 취조를 하고 KAL기 추락의 실체를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는 바레인에 먼저 나가서 활동을 하고 있는 한영수 과장의 보고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에서 폭파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겨울이지만 날씨는 좋았다. 거리의 가로수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하늘은 잿빛으로 우중충했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선거는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가열되고 있었다. 17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직선제 선거였다. 본격적인 선거유세가 시작되어 신문의 일면이 항상 선거 소식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선거보다 마유미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호송 팀에 소속되자 나는 마유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런 여자가 북한의 공작원이 되어 민간 여객기를 폭파할 수 있을까. 마유미가 일본인이라는 것은 위장이 확실했다. 이미 그녀의 여권이 위조여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는가.&ldquo;미모의 테러리스트라니&hellip;.&rdquo;나는 무기를 다루는 법은 배웠지만 폭탄까지 설치할 자신은 없었다. 물론 명령이 내려온다면 어쩔 수 없이 실행을 해야 할 것이다.&lsquo;KAL기 폭파가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한 것일까?&rsquo;나는 어둠 속에서 마유미의 하얀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대통령선거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ldquo;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은 모두 사무실에 두고 개인적으로 소지하지 않는다. 여권은 요원들이 관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rdquo;수사국장이 호송 팀을 모아놓고 지시했다.&ldquo;외부에도 연락하지 말고 기자들에게 노출되어도 안 된다.&rdquo;수사국장의 잇단 지시에 나는 상황이 상당히 긴박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호송 팀은 안기부 버스로 김포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호송 팀에 여자라고는 나와 후배 여수사관 채명희(가명)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중대한 사건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채명희는 일본어를 전공하여 마유미와 대화할 때 필요하다고 상부에서 판단하여 합류한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는 귀빈실로 가게 됐다. 귀빈실은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다. 행정부처에서는 장관 이상, 입법부는 국회의원들, 사법부는 검찰총장이나 대법원 판사 이상, 그리고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공항에서 버스에서 내리자 곧바로 귀빈실로 가게 되어 나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외국을 여행한 일이 없었다. 외국 여행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비행기를 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출국 수속이나 여권을 만드는 일도 번거로웠는데 안기부에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귀빈실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ldquo;조용히 대기해.&rdquo;호송 팀장인 김영호 과장(가명)이 우리에게 지시했다. 우리는 기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눈치 챌까봐 더욱 긴장했다. 우리는 출국 수속조차 하지 않고 귀빈실에서 대기했다. 출국수속은 공항에 파견되어 있는 안기부 직원이 대신했다. 나는 바레인으로 출국할 때나 돌아올 때 내 여권을 보지 못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당시에는 안기부가 권력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ldquo;자 비행기 타러 가자고.&rdquo;귀빈실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자 호송 책임자인 김영호 과장이 지시했다. 우리는 김 과장을 따라 활주로로 나갔다. 활주로에는 특별전세기인 맥도넬더글러스 DC-10이라는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미국 연방항공국 규정에 따라 개발되었는데 에어버스의 A300, 록히드마틴의 L-1011, 보잉의 747과 경쟁을 하던 비행기였다. 그러나 설계 당시부터 화물칸 도어 등 여러 곳에서 기체 결함이 발견되었는데 무시하고 생산하는 바람에 사고가 빈발해 1989년 단종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론 당시 안기부의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탑승하자 안기부 수사국 호송 팀뿐만 아니라 의무실의 의사와 간호사들, 다른 부서에서 온 직원들도 여럿이 있었다.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에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도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들 누구나 그런 불안감을 갖지만 나 역시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몸을 떨었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추락하면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KAL기가 추락했으니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ldquo;선배님,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요.&rdquo;탑승을 마치자 채명희가 나에게 속삭였다.&ldquo;대공부서겠지.&rdquo;&ldquo;저기 있는 사람들은 군인 같아요. 체격이 건장하고 눈빛이 날카로워요.&rdquo;채명희가 계속 나에게 속삭였다. 나도 그들을 살펴보았는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탔기 때문에 귓전이 먹먹했다. 기압 차이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리자 무사히 이륙을 마쳤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창을 내다보았다. 비행기의 창으로 김포공항 일대의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들판은 추수가 끝나 황량했다. 비행기에는 여자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고 남자 승무원들만 있었다.&ldquo;두 분은 통역입니까?&rdquo;비행기가 이륙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짧은 머리의 사내들이 나와 채명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채명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가능하면 외부인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었다.&ldquo;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rdquo;나는 한참이 지나 김영호 과장에게 물었다.&ldquo;경호담당 특수부대 요원들이야.&rdquo;김영호 과장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마유미를 경호하기 위해 배치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보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비행기는 어느덧 구름 위로 날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가 구름 위로 날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ldquo;음료수 드시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rdquo;남자 승무원들은 나와 후배 여수사관인 채명희에게 기내 음료수와 스낵을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말도 붙이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ldquo;여자 승무원은 없나요?&rdquo;나는 여행이 지루하여 통로를 지나가는 남자 승무원에게 물었다.&ldquo;상부 지시로 남자 승무원들만 탔습니다.&rdquo;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마유미 같은 테러리스트를 호송하는데 여자 승무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울 것이다.김포공항에서 바레인까지는 직행으로 가는 데도 10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기내 식사를 하고 억지로 잠을 청하는 등 시간을 보내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나는 그때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주기도문도 외웠다. 다른 요원들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긴장을 하고 있는 빛이 역력했다. 비행기는 어느덧 태국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덜컹하고 내려앉으면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ldquo;왜 이래?&rdquo;누군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으나 나는 의자를 꽉 쥐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고 불안감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안기부에 입사하여 훈련을 받을 때 공수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공동묘지까지 갔다가 오지 않았는가. 다행히 2, 3분이 지나자 비행기가 난기류를 빠져 나와 안정을 찾았다.바레인이 가까워졌다. 짧은 머리의 사내들이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총기를 점검하고 테러 진압 때 사용하는 눈과 입만 뚫린 검은 모자를 썼다. 나는 그들이 무장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새삼스럽게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여러 해가 지나 김현희가 사면되고 안보강연을 나간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 돌아가려고 할 때 한 남자가 김현희를 경호하던 나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ldquo;나 기억하시겠습니까? 김현희 씨를 호송하러 바레인에 갈 때 특수부대 요원으로 함께 갔었지요. 지금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rdquo;나는 그때서야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비행기 여행은 지루했다. 더욱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10시간 내내 나는 긴장해 있어야 했다. 나뿐이 아니라 우리 요원들 모두 긴장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 마침내 바레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트랩에서 내리자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끼쳐왔다. 서울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두꺼운 모직 투피스를 입고 왔는데 사막의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ldquo;어떻게 해? 너무 덥네.&rdquo;채명희가 중동지방의 열기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ldquo;여름옷 준비 안했어?&rdquo;나는 이국적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주변을 돌아보았다.&ldquo;네. 그런 지시는 없었잖아요?&rdquo;&ldquo;나도 준비하지 않았어. 조금 참으면 되지 뭐.&rdquo;우리가 도착한 곳은 공항이 아니라 군 비행장이었다.&ldquo;오늘 호송은 못할 것 같아. 바레인에서 내일 출발하래.&rdquo;한영수 과장이 비행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하면서 말했다. 비행장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열기가 더욱 사납게 휘몰아쳐 왔다. 비행장 주변에는 TV에서 보았던 중동지역 대테러진압 복장을 하고 총을 들고 순찰을 하는 바레인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lsquo;내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하러 왔구나&rsquo; 하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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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5] 안기부에 간 신출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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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Apr 2012 12:06: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01/1333249604444180.jpg"/>  ▲ 1988년 카메라 앞에 선 국정원 최초 여 수사관 최창아 씨, 박세직 당시 안기부 신임 부장 부부, &lt;내일 일은 잘 몰라요&gt;의 저자 이인숙 씨, KAL기 폭파범 김현희 그리고 여의도침례교회 한기만 목사(맨 왼쪽부터). 박 부장이 김현희에게 이인숙 씨를 소개하고, 이 씨 권유로 김현희는 종교에 귀의하게 됐다. 사진제공=최창아 씨이 글을 쓰면서 김현희의 얼굴을 자주 떠올렸다. 운명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다. 그녀는 젊었을 때 북한 공작원이 되었던 일로 평생 동안 회한과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에 의해 테러리스트가 되어 죽는 것 못지 않게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게다가 조작설로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나 역시 때때로 그런 질문을 받는다.김포공항에서 비행기 문이 열리며 트랩에서 마유미가 내릴 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 쏠렸지만 차츰 그녀의 팔짱을 끼고 내리는 다른 여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사람들은 김현희의 팔짱을 끼고 내린 나를 KAL기 승무원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대공수사관이었기 때문에 나의 신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안에 부쳤다. 언론사들도 그 때문에 나의 얼굴을 전체가 아닌 반쪽만 나오게 해 주었다. 후에 김현희가 인터뷰한 여러 나라의 수사관이나 언론도 처음에는 김현희에 대한 인터뷰에 집중했으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이면 은근히 나를 향해 수사관이냐고 묻고, 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는 했다. 그 외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관심을 보이며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ldquo;정말 안기부 요원입니까?&rdquo;사람들은 내가 안기부 여자수사관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는 했다.&ldquo;네. 수사관입니다.&rdquo;&ldquo;권총도 가지고 다닙니까?&rdquo;어떤 사람들은 내 가방을 흘끔거리며 이상한 표정으로 묻고는 했다.&ldquo;아니요. 특별한 상황이 아닌데 왜 권총을 가지고 다니겠어요?&rdquo;&ldquo;훈련도 받았습니까?&rdquo;&ldquo;네. 받았습니다.&rdquo;&ldquo;훈련으로 다져졌으니 특공대원 같은 몸을 갖고 계시겠군요.&rdquo;사람들은 나를 슈퍼우먼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그런 질문을 받던 생각을 하자 새삼스럽게 나의 안기부 입사 시절이 떠올랐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85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IST)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육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연히 같이 수강하던 연세대를 나온 한 친구가 자기는 안기부에 입사원서를 냈다고 했다.&ldquo;안기부가 뭘 하는 곳이야?&rdquo;나는 친구에게 물었다.&ldquo;인기부도 몰라? 안전기획부&hellip;.&rdquo;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뀐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나는 그때까지 정보부와 안기부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안기부가 중앙정보부라고 말했다.&ldquo;게다가 월급도 다른 공무원들보다 많대.&rdquo;나는 월급이 다른 공무원들보다 많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ldquo;그럼 나도 한번 지원이나 해볼까?&rdquo;나는 친구의 말에 안기부 입사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러나 서류 마감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지금처럼 전산화된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자니 며칠이 걸린다고 하기에 대학시절 받았던 성적표로 대신하는 등 부랴부랴 원서제출을 마쳤다. 원서를 접수하면서 알게 된 것이 안전기획부 여자수사관을 선발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사무직이겠거니 했던 나로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여자수사관이 뭐하는 걸까? 부모님이나 주변 친지들에게 물어보아도 딱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ldquo;그거 혹시 밀봉교육 받고 북한에 파견되는 거 아니야?&rdquo;안기부 수사관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안기부는 모든 것이 비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알지 못한다. 친지들 중에는 북한에 파견되면 위험하니 시험을 보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ldquo;간첩인가? 무슨 밀봉교육을 받아요?&rdquo;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오빠에게 안기부 수사관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오빠는 당시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오빠는 중령으로 예편했다.&ldquo;하는 일은 형사들이나 다를 바 없지만 대공수사를 전문으로 한다고 하더라.&rdquo;오빠가 어딘가에 알아보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오빠의 말을 듣고 필기시험을 보았다.필기시험은 평소 취직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그럭저럭 볼 수 있었다. 이후 면접시험은 2차에 걸쳐 계속되었다.&ldquo;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지?&rdquo;당시에 수사국장이었던 사람이 면접을 보면서 질문을 했다.&ldquo;부모님이 계시고 오빠가 있습니다.&rdquo;나는 긴장하여 대답했다.&ldquo;아버님은 상업을 하신다고 되어 있군.&rdquo;그가 서류를 살피면서 말했다.&ldquo;네. 장사를 하고 계십니다.&rdquo;&ldquo;최창아 씨, 최창아 씨는 자신이 수사관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rdquo;수사국장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답변을 잘못하면 불합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ldquo;아직 안기부 수사관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집에서 엄마나 식구들이 놔두고 못 찾는 물건이 있으면 제가 찾아냅니다.&rdquo;나의 답변에 면접관인 수사국장이 웃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합격을 통지받아 나는 마침내 안기부 여자수사관이 된 것이다. 1985년 9월의 일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그날 합격한 여자들은 소위 안기부에서 처음으로 뽑은 여자수사관이었다. 안기부는 그때까지 남자 수사관들만 뽑았기 때문에 여성 피의자들을 수사할 때는 기능직 여사무원들을 동원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그 무렵 북한 대남공작조직에서 여성공작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그에 대응할 여성 수사요원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여 선발한 것이다.안기부는 1년에 한 번씩 정규과정으로 직원을 선발하여 1년간의 교육을 거쳐 현장에 배치하는데 우리는 신속하게 실무에 투입하자는 의도에서 특별여자수사과정이라는 명칭으로 6개월 단기 교육을 거쳐 곧바로 수사국으로 배치되었다. 나중에 김현희를 심문하면서 그녀도 북한의 대외정보조사국에서 뽑는 공작원 양성 과정 중 단기반으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으로 비슷한 점이 많은 우리였다.단기반이었지만 안기부의 여자 수사관 훈련은 혹독했다. 무엇보다 대공수사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이론 교육과 함께 실전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ldquo;우리는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안기부 부훈처럼 음지에서 일을 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국가에 목숨을 바치고 내 부모님과 내 형제를 지키는 첨병이 된다.&rdquo;교관들은 투철한 국가관을 강조했다. 이론은 세계의 유명한 정보기관과 스파이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암살범을 다룬 &lt;자칼의 날&gt;이라는 영화도 보았다. 남파 간첩들의 특징, 그들의 은신법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6개월이라는 단기반은 어떻게 생각하면 고된 훈련을 받는 우리에게는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을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재기 발랄한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내가 받은 훈련은 대부분 안기부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실시되었는데 구보, 합기도와 사격 훈련 등이었다. 공수부대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공수부대의 훈련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격렬하다.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6개월 동안 잘 인내하면서 훈련을 마쳤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다녀오던 일이다. 경기도 어느 공동묘지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공동묘지에 올라갔다가 오는 것은 입이 마르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lsquo;무서워도 견디자. 이런 훈련을 거쳐야 현장에 투입되어도 이겨 나갈 수 있는 거야.&rsquo;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공동묘지를 오르내리는 것은 영화나 만화에서만 보았던 일이다. 어쩌면 안기부 교관이 그런 훈련을 시킨 것도 영화나 만화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매일같이 고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한동안 일반 회사에 들어갈 것을 공연히 안기부에 들어왔다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6개월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실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401/1333249604444181.jpg"/>  ▲ 최창아 씨의 첫 해외 출장지였던 바레인 리젠시 호텔 앞에서. 박 씨는 마유미를 압송하는 신병인수팀에 뽑혀 그를 호송하는 중대임무를 맡았다. 사진제공=최창아 씨안기부에 입사하여 내가 처음 맡았던 임무는 김만철 씨 일가족 귀순 사건이었다. 귀순자들이라도 위장 귀순인지 아닌지 조사도 해야 했고 그들을 보호도 해야 했다. 나는 김만철 씨 사건을 다루면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80년대 중반인데 북한 주민들은 너무나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KAL기 사건이 터져 나도 신병인수팀에 투입된 것이다.바레인과 협상이 잘 이루어져 마유미를 압송하는 신병인수팀이 구성되자 나도 바빠졌다. 나는 그때까지 해외여행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권도 준비해야 했다. 안기부 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마유미를 호송하기 위해 준비했던 자해 방지 기구들도 점검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이었다. 마유미를 호송하는 일이 워낙 중대했기 때문에 다른 부서 직원들은 물론 어머니 아버지에게조차 내가 마유미의 호송을 위해 바레인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ldquo;해외 출장이에요. 어딘지는 말할 수 없어요.&rdquo;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겨우 그렇게만 말했다. 안기부 요원들의 교육 중에 비밀 엄수 교육은 철저하다. 워낙 기밀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에 대부분 안기부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키고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간다.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이철희 차장은 운전기사에게조차 자신의 집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신상을 비밀에 부쳤던 것으로 유명하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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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씨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 [4] 마유미 극비 호송 작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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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5 Mar 2012 12:33:00]]></pubDate>
            <category><![CDATA[사회]]></category>
            <author><![CDATA[webmaster@ilyo.co.kr | 일요신문 ]]></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325/1332646387443450.jpg"/>  ▲ 13대 대선을 하루 앞둔 1987년 12월 15일 김포공항. 김현희(일본 가명 하치야 마유미)가 마우스피스를 물고 입에 흰 반창고를 붙인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오른쪽이 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 씨. 사진출처=보도사진연감바레인에서 박수길 차관보가 마유미의 신병인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안기부는 측면 지원을 했다. 국제적인 범죄인의 수사와 재판 관할권에 대한 순위에 따르면 범죄행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국제관례는 영토관할권이 최우선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범인을 체포한 나라의 권한이 최우선적인 효력을 갖고 있고, 그 다음이 범인의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세 번째로 국익 손상을 입은 나라에 보호관할권이 주어진다. 더욱이 우리와 바레인과는 상호 범인을 인도할 수 있는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만약 바레인 정부가 마유미에 대한 수사는 물론 재판까지 주장할 경우 우리로서는 손을 쓸 방법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우리는 &lsquo;몬트리올 협약(민간항공의 안전에 대한 위법행위 억제를 위한 협약)&rsquo;과 &lsquo;동경협약(항공기의 등록국은 항공기내에서 범해진 범죄와 행위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rsquo;의 규정을 들어 바레인 정부 측과 범인 인도 교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외교부를 도왔다. 만약에 인도가 어려울 경우 바레인 국내에서의 형사 절차가 모두 끝난 뒤에 추방 형식으로 신병인도를 요청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안기부는 경찰과 협조하여 일본인 두 남녀, 마유미와 신이치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국경찰에 보내줄 것을 인터폴 142개 회원국에 긴급 요청했다. 인터폴의 협조에 의해 마유미와 신이치에 대해 조금씩 중요한 정보가 입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방국이 아닌 바레인이 얼마나 협조해 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안기부 수사관의 입국을 거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러나 안기부와 외교부의 집요한 노력으로 결국 마유미는 한국으로 인도되었다. 이는 항공기 테러사건 사상 처음으로 범인의 국적과 관계없이 피해국이 범죄인을 인도받은 것은 국제 외교사상 처음 있는 일로 민간항공의 안전에 있어서도 이정표가 되었다고 높게 평가받고 있다.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작이니 하는 마당에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그 시시비비를 밝히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사건의 중심에서 긴 시간을 지내왔던 나로서 한 번쯤 뒤돌아봐도 괜찮을 시기가 된 것 같았다. 그저 내가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적고 싶고, 판단은 읽은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기억을 되새기며 한자 한자 적으면서 오히려 어떻게 이런 상황이었는데 조작이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그래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높아진 것은 88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였다. 그런데 87년 아직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인터폴과 세계 각국을 끌어들이면서까지 조작극을 꾸밀 수 있었을까. 사건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나는 조작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조작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싶다.당시 일본도 겉으로는 KAL기 사건에 일본인이 직접 간여했다는 정보는 없다고 말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비록 위조여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이들이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인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일본인이 간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여 출입국 상황에 대한 체크나 관련 주변인물에 대한 신상파악 등에도 지나치게 신중을 기했다.그럼에도 사건발생 직후 바레인은 일부 일본여행자들에 대해 관례적으로 발급해온 72시간 체류비자 발급을 거부하였고 JAL항공은 일본인들이 미리 발급된 비자 없이는 바레인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돌리기까지 했다. 더욱이 나중에 김현희의 자백에 의해 그녀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선생이 납치된 일본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과 북한이 치열한 외교전에 휘말리는 결과가 되었다.안기부의 조사는 수월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12월 4일 바레인으로부터 신이치와 마유미의 지문을 넘겨받아 경찰과 공조하여 350명에 가까운 감식과 직원들이 철야로 내국인과의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아무도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내국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실 내국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추측대로 이들이 조총련이나 북한공작원이 분명해 보였으나 입증할 만한 단서가 없었을 뿐이었다.바레인 당국도 마유미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했다. 마유미는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었으나 다행히 중상이 아니었다.&ldquo;나는 중국인이다.&rdquo;바레인 경찰의 조사가 계속되자 마유미는 북한에 우호적인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중국은 우리와 수교를 맺기 전이라 중국 공산 정권이 협조를 해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마유미는 자신이 흑룡강 성 출신의 백취혜(百翠惠)이며 마카오에서 신이치를 만났다고 했다. 그녀는 신이치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가사 일을 도우며 함께 살다가 여행을 같이 하자는 신이치의 제의를 따라 바레인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ldquo;당신이 KAL기를 추락시킨 것이 아닌가?&rdquo;바레인 경찰은 당혹스러워하면서 마유미를 신문했다. 그러나 마유미는 KAL기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여 신문이 어려웠다. 영국인이면서 바레인 CID 대장인 핸더슨은 더 이상의 신문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바레인 정부에 한국으로 그녀의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건의했다. 바레인 국적기나 바레인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면 조사가 더욱 치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나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이 너무나 온순하게 이루어졌다. 고도의 공작원 훈련을 받은 마유미로부터 어떤 자백도 받을 수 없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12/0325/1332646387443451.jpg"/>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와 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다구치 야에코 씨는 김 씨가 북한에 있을 당시 김 씨의 일본어 교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안기부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기부는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자 즉시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과뿐이 아니라 수사국 전체가 공조하여 수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마유미의 신병인수팀이 조직되었을 때 불과 2년차인 내가 포함된 것은 마유미가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 수사관이 필요했던 것이다.우리는 마유미의 신병인수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북한 공작원이나 중동 지역의 테러리스트들로부터 저격을 당하거나 자해를 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공작원이라면 무사히 서울까지 데려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ldquo;마유미가 자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rdquo;수사국장의 지시에 우리 요원들은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ldquo;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환자들이 사용하는 깁스 같은 것을 착용시키는 게 좋겠습니다.&rdquo;&ldquo;혀를 깨물지 못하게 권투 선수들이 사용하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려야 돼요.&rdquo;요원들이 낸 의견들이었다.&ldquo;좋아. 당장 그 장비들을 구입해.&rdquo;수사국장의 지시에 의해 나는 동료 요원들과 광화문 일대 의료기구 파는 곳을 돌아 다녔다. 우리는 장비의 용도를 살피기 위해 직접 착용을 해본 뒤에 그중 몇 가지를 구입했다. 이 중 플라스틱 마우스피스는 나중에 마유미를 바레인 경찰로부터 인수받자마자 입에 물려 반창고로 붙여 두었는데 서울에 도착하여 축 늘어진 채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그녀의 모습에 내외신 기자들이 놀라기도 했다.일본 경찰도 치열하게 수사를 했다. 그들에 의해 마유미와 신이치가 소지한 도쿄 시내 긴자 소재의 저팬 투어리스트클리닉이라는 병원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 예방접종증명서(옐로카드)도 확인 결과 의사 서명과 확인 도장이 모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마유미는 점점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기자들의 열화 같은 성화로 인해 바레인 경찰이 마유미의 사진을 공개했다. 안기부 요원인 우리도 신문에서 마유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나는 사진을 본 순간 한동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유미가 상당한 미인이었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치고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에 거의 밀다시피 한 눈썹, 부스스한 파마기의 머리는 도무지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당시 서울의 여자들은 눈썹을 짙게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우리 눈엔 그녀가 일본보다도 동남아 여성처럼 보였다.&ldquo;테러리스트 같아 보이지 않네.&rdquo;&ldquo;상당한 미인이잖아? 이런 여자가 폭탄 테러를 했을까?&rdquo;신문을 본 한국인들은 놀라서 말했다. 안기부 요원들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훗날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 역시 감탄한 것이 그녀의 코다. 앞모습보다도 옆에서 보는 그녀의 코 선은 처음엔 정말 &lsquo;수술한 거 아냐&rsquo; 할 정도로 깨끗하게 잘빠진 모습이었다.한 국제문제 평론가는 북한에는 10만 명 이상 되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의 대남공작 조직이 있는데 이들 조직에는 모란꽃 소대라 불리는 여성공작원도 다수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북한의 여성 공작원이 전면에 등장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번 사건에 북한 여성 공작원이 관련됐다면 아마 그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lsquo;마유미가 최초의 북한 여자 공작원인가? 나는 안기부 최초의 여자수사관인데&hellip;.&rsquo;나는 기분이 미묘했다. 마유미가 한국으로 인도된다는 것이 결정되자 이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맹렬히 비난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의 중앙통신은 &lsquo;바레인은 마유미의 한국 인도조치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rsquo;이라고 경고하면서 북한은 KAL기 실종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우연이었을까? 전면에 등장한 첫 번째 북한 여성 공작원과 첫 번째 남한 여성 수사관.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동시에 전 세계에 얼굴을 내놓게 되었다.정리=이수광 작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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