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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일요칼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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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일요칼럼</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Fri, 24 Jul 2026 11:34:26</lastBuildDate>
        <pubDate>Fri, 24 Jul 2026</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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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일요칼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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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장관의 아이패드, 그리고 내 차의 자율주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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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4 Jul 2026 11:34:2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2010년 봄, 한 장관이 공식 브리핑장에 아직 국내에 출시되지도 않은 물건을 들고 나왔다.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전자출판 육성 방안을 설명하며 애플의 1세대 아이패드를 꺼내 “이걸로 하니 참 좋다”고 감탄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절 아이패드가 전파법상 형식등록을 거치지 않아, 해외에서 사 온 물건이 공항 세관에서 압수당하던 때였다는 데 있었다.“일반 국민이 들여오면 밀수인데 장관은 공식 석상에서 대놓고 써도 되느냐”는 공분이 터졌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무대와 소품만 바뀐 같은 연극이 다시 상연되고 있다. 이번 소품은 아이패드가 아니라 자동차, 정확히는 자동차 안에 담긴 소프트웨어다.7월 10일 테슬라코리아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FSD 라이트’의 국내 배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배포지로 한국을 택한, 상징성이 작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 5월 국산차를 모두 제치고 월간 판매 1위에 오른 차가 바로 테슬라 모델Y다. 그런데 정작 그 모델Y를 산 사람들 대다수는 이번 배포 대상에서 빠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724/1784855718219241.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900만 원이 넘는 값을 치르고 자율주행 옵션을 살 수는 있지만, 그 기능은 켜지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차가 미국이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가 만든 같은 이름의 차인데 어떤 차는 스스로 차선을 바꾸고 어떤 차는 못 바꾼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것은 놀랍게도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태생’이다.대상 차량이 애초에 많지 않기도 하지만, 국내 2000명이 넘는 테슬라 오너가 모인 대표 카카오톡 단체방을 둘러봐도 실제로 FSD 라이트를 받았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 대규모 적용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중에서 필자는 오래전 구매 당시부터 FSD 옵션을 넣은 초기 미국산 모델을 몰고 있어, 순차 업데이트가 내 차에 닿기를 기다릴 수 있는 처지다.회사의 약속 하나만 믿고 값을 미리 치른 뒤 몇 해를 묵묵히 기다린 사람에게 먼저 차례가 오는 것은 그 나름의 순리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순서를 정한 것은 그 기다림이 아니다. 내 차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것 하나다. 더 많이 팔린 중국산 모델Y를 산 이웃들은 더 새 차를 몰면서도 아예 대기 줄 밖에 서 있다.순서를 기다리는 쪽이든 아예 줄 밖에 선 쪽이든, 지금 우리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은 먼저 받은 이들의 영상이다. 초기 리뷰는 화려하다. 의정부에서 부산까지 451km를 단 한 번의 개입 없이 달렸다거나, 폭우로 차선이 지워진 길에서 스스로 가상의 차선을 그려 주행했다는 식이다.그러나 같은 영상들을 끝까지 보면 아직 한계도 또렷하다. 하이패스 앞에서 차선을 고르지 못해 결국 사람 개입이 필요하고, 점멸등 앞에서는 과하게 멈춰서 뒤차를 당황시키며, 빗줄기가 굵어지면 ‘일시적 사용 불가’를 띄우고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애초에 FSD 라이트가 구동되는 3세대 하드웨어는 카메라 화질도 연산 성능도 4세대에 크게 못 미친다. 큰 모델을 압축해 옮긴 것이 원본과 같을 수도 없다.그런데 중국산이 빠진 이유는 이런 하드웨어의 한계가 아니다. 국내에 팔리는 중국산 모델3와 모델Y는 이미 미국산 최신 차종과 같은 4세대 하드웨어를 얹고 있어, 연산 성능만 보면 부족할 것이 없다. 진짜 장벽은 서류에 있다. 미국산 테슬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안전기준 상호인정 조항 덕분에 미국 기준을 통과한 것만으로 국내에서도 자기인증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반면 중국산 차량은 유럽식 국제기준으로 인증됐고, 이 기준은 차선 변경을 어디까지나 운전자가 방향지시등을 손수 조작하는 것을 전제로 허용한다. 결국 기술의 우열이 아니라 무역협정이 어느 도로에서 손을 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셈이니, 소비자로서는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다.이쯤 되면 오래된 의심 하나가 고개를 든다. 국내 완성차 업체가 자율주행 기술을 따라잡을 시간을 벌어주려 정부가 규제의 빗장을 서둘러 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아예 현대차와 국토부를 합친 ‘현토부’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그런데 이 장면도 낯설지 않다. 16년 전, 아이폰은 모든 휴대전화에 한국형 무선인터넷 표준 ‘위피(WIPI)’를 얹도록 한 규정 탓에 첫 출시국 명단에서부터 빠졌고, 국내 진입은 2년 가까이 늦어졌다.그사이 삼성과 LG는 대응 전략을 짤 시간을 벌었다. 훗날 이석채 당시 KT 회장은 사내 이메일에서 “혁신의 아이폰을 도입했지만, 우리는 두 재벌회사가 그렇게 강력한 차단에 나설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삼성전자 이재용 당시 부회장이 최태원 SK 회장에게 아이폰 도입 유보를 요청했고 SK텔레콤이 실제로 이를 미룬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규제 당국이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었지만, 경직된 규제가 결과적으로 자국 산업의 방패가 되었고 그 그늘에서 기업이 움직일 여지가 생겼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물론 이 의심을 사실로 단정하는 것도 성급하다. 국내 규정이 따르는 국제 안전기준 자체가 운전대에서 손을 완전히 떼는 방식을 아직 허용하지 않아, 국토부가 마음대로 빗장을 열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도로교통안전국조차 지금도 테슬라 FSD의 신호 위반과 악천후 성능을 조사하는 마당이니, 생명이 걸린 영역에서 정부가 신중한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그러나 신중함이 곧 멈춰 서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유럽 도로에서 쌓인 수백만km 주행 데이터를 검증한 뒤, 테슬라가 '완전 자율주행'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을 걷어내고 '운전자가 감독하는 보조 기능'임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비로소 문을 열었다.다시 16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그 소동에는 뜻밖의 반전이 있었다. 여론이 폭발한 바로 다음 날 방송통신위원회는 개인용 무선기기를 1인당 1대에 한해 전파인증에서 면제하겠다고 밝혔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해외 직구 인증 면제 제도가 그렇게 태어났다. 다만 뒷맛은 씁쓸하다. 규제가 스스로 앞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여론이 터진 뒤에야 등 떠밀리듯 열렸기 때문이다.그래서 자율주행 기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자동차가 스스로 도로를 달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제도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이슈가 터지기 전에, 스스로 판단해 열 수 있을 것인가. 16년 전 그 브리핑장이 그러했듯,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자동차 한 대도 결국 기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를 비추고 있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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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고전 읽기와 논나맥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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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6 Jul 2026 11:53:28]]></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금 생각해보니 젊은 날 읽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은 게 아니었다. 여자를 놓고 아버지와 다투는 아들, 집안을 챙기기는커녕 자식들을 이리저리 버려두고 자기 욕망에만 끌려 다니는 욕심덩어리 아버지, 지참금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속을 끓이다가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간 아내들, 젊은 날 카라마조프가는 이상하고도 이상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716/1784166231560590.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이해하기 어렵다기보다 이해하기 싫은 작품이었는데 그 때도 주목했던 인물은 이반이었다. 이반은 복잡한 세상을 합리성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재단, 설명하려 하는 인물이다. 세상은 얼마나 무정하고 불합리한가. ‘신이 있다면 그럴 수 없으니 신은 없다. 그리고 신이 없으면 모든 게 허용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성적인 인간 이반이 자기 기준의 칼날에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해서 다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들었다. 줄거리는 그대로였는데 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을 본 느낌이었을까. 내가 달라진 것이다. 마치 젊은 날 전쟁터에서 헤어진 친구를 황혼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진가를 알아보고 환대하는 느낌! 고전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미친 듯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모두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남긴 재산을 놓고 아버지와 상속 분쟁을 했던 첫째아들, 드미트리가 다시 보였다. 아버지가 욕망한 여인을 사랑해서 질투에도 눈이 먼 그는 여기저기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닌다. 아버지 살인범으로 몰린 그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억울함과 분노로 날뛸 만한데 그런데 그가 바뀐다.감옥에서, 법정에서, 유배 길에서 아버지를 닮은 불같은 성격은 차분해지며 운명처럼 다가온 누명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가 저주받은 가문 때문에, 젊은 날의 열정 때문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엔 정화가 있었다. 다시 고전 읽기의 바람이 불고 있단다. 우연히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오랜만에 손석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코너 이름도 ‘오래된 대답’이란다. 거기에서 그는 돈키호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웠다. 게스트는 돈키호테를 무모한 꿈을 꾸고 불가능한 길로 뛰어든 낭만기사라고 설명한다. 그런 이가 그립다고. 정말 돈키호테는 무모한 꿈을 꾼 광인이기만 할까. 돈키호테의 광기는 종교개혁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더 가혹하게 인간을 억압했던 시대에 대한 반항인 것은 아닐까. 그 시대는 미친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시대였으니. 돈키호테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 믿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칼을 겨눈다. 그 광기는 광기라기보다 교회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종교재판장으로 넘겨졌던 시대에 대한 고발은 아니었을까.  정말 세상이 빠르게 돌아간다. 그 세상이 만들어내는 것을 얻겠다고 시류를 타다가도 문득 올라오는 물음이 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내 속도, 내 박자인가, 하는 물음. 고전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떠밀듯 밀려오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내 속도, 내 박자를 고려하여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겠다. 그것은 얼마 전 ‘우먼센스’에서 소개한 논나맥싱의 정신과도 통한다. 논나맥싱(Nonna Maxxing), 네모난 화면에서 벗어나고 효율이나 이득의 관점에서도 벗어나 할머니처럼 느긋하고 따뜻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이란다. 빵을 굽고, 손수 밥상을 차리고, 천연소재의 편안한 옷을 입고, 화초를 키우고, 뜨개질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리듬과 박자를 찾아가는 그런 류의 삶 말이다. 돈키호테가 말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진실하고도 절박한 말이다. 권력이 규정하는 인간,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내가 아는 나, 내가 알아가고자 하는 나, 그것이 고전을 읽고 논나맥싱을 추구하는 삶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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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선관위 사태와 장윤기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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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0 Jul 2026 14:07:05]]></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선거관리위원회 사태와 고 이채원 양을 무참히 살해한 장윤기 사건은 모두 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초래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선관위 사태는 헌법상 독립 기관인 국가기관이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단숨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그런데 이 사태가 채 수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경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마저 사라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윤기의 범행 실체가 경찰의 부실 대응, 혹은 고의적 부실 대응 의혹 속에서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제도에 대한 신뢰는 또 한 번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제도에 대한 신뢰 상실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직결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가 중대한 까닭은 제도에 대한 신뢰 상실이 대한민국 정체성의 근간인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와 공화주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인데, 그중 법치주의는 제도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작동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710/1783647090866061.jpg"/> 신율 명지대 교수제도에 대한 신뢰 없이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설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다면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정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나서서 하루빨리 사태를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만일 민주당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과연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선관위 문제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장윤기 사건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문제해결 의지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민주당은 현재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는 것이야말로 검찰 개혁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검찰 개혁 자체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완수사권까지 박탈하는 이른바 ‘검수완박’이 과연 진정한 검찰 개혁인지는 의문이다. 검찰을 개혁해야 하는 이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보완수사권을 박탈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실제로 이번 장윤기 사건도 검찰의 보완수사가 없었더라면 단순 살인 사건으로 기소될 뻔했었다. 더욱이 검찰의 보완수사를 통해 이번처럼 사건의 진정한 실체가 드러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피해자 보호와 유가족의 정당한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보완수사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이에 민주당은 보완수사권 대신 보완수사 요구권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요구권을 행사하더라도 실제로 재수사를 담당하는 주체는 결국 경찰이다. 경찰이 검찰의 보완수사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수사를 한다고 해도 결론이 달라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수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거나 이번 사건처럼 내부에서 스스로 사건의 성격을 축소하거나 잘못 판단했던 문제를 자체적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속한 조직의 행위와 결정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상황이 이런데도 마치 숙제하듯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 붙이는 모습을 보면 민주당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국민의힘 역시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어 아쉽기는 마찬가지다.국민의힘이 보완수사권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의원직 총사퇴와 같은 강경한 저항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결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총사퇴가 국회의장 혹은 본회의 표결에 의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은데, 그럼에도 이런 결기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그저 암담함을 느낄 뿐이다.지금 정치권은 진정한 민생이 무엇인지부터 되새겨야 한다. 진정한 민생이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국민 대다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제도에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국민은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원하고 있는데, 그런 구체적인 노력 없이 민생만을 외친다면 이에 공감할 국민은 많지 않다. 그런데 지금 양당의 행태를 보면 마치 진영 논리 자체를 민생으로 여기는 듯하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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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딸기코를 본 인공지능은 없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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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3 Jul 2026 14:29:24]]></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6월 11일 저녁 MBC 뉴스 시간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10년 차 경력의 홍 변호사가 말하고 있었다.“5000쪽짜리 기록을 AI(인공지능)가 단번에 파악하고 법률 서면도 써 줍니다.”그의 표정이 씁쓸했다.“AI가 최소한 100명의 변호사 역할을 거뜬히 해내요.”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703/1783042458318309.jpg"/> 엄상익 변호사자료검색이나 정리, 그리고 패턴화되어 있는 법률문서는 이제 AI를 이길 수 없다. 변호사의 종말이 온 것일까. 나는 40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해 왔다. 40년 변호사의 직감을 AI가 가졌을까. 마음을 비우고 재판에 임하면 나는 몇 분 안에 판사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예감한다.그 외에도 있다. 실제로 했던 사건을 예로 들겠다. 20여 년 전 한 살인범의 변호를 맡았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한 여대생이 납치되어 잔인하게 살해됐다. 배경은 준재벌급 회장 부인의 살인 청부였다. 재판이 진행되던 어느 날이다. 구치소 접견실에서 살인범을 만났다. 곱슬머리에 작은 눈이었다.“사모님이 보낸 대리인이 면회를 왔어요. 시나리오를 짜왔더라고요. 사모님 부분은 빼달래요. 내가 혼자 미행을 하다가 실수로 죽인 단독범행으로 진술하래요.”그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그러면 사모님은 무죄가 되고 저는 과실치사죄로 가벼운 형을 살고 나갈 수 있대요. 시키는 대로 하면 50억 주겠대요.”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저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도와주시면 섭섭지 않게 보수를 드리겠습니다.”공범이 되자는 것이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절규했다.“사흘 만에 산에 버려진 딸을 찾았어요. 한이 서렸는지 한쪽 눈을 번쩍 뜨더라고요. 엄마가 그 눈을 감겨주니까 이번에는 다른 눈을 번쩍 떴어요. 그 딸이 지금 공원묘지에 있어요.”고민했다. 침묵하면 돈이 들어온다. 말하면 벌을 받는다. 업무상비밀누설죄다. 법률서면에 그들의 음모를 적었다. 여대생의 영혼에 빙의해서 절규를 담았다. 내 영혼을 갈아 넣었다. 살인범과의 관계를 끝내고 일요신문에 내막을 폭로했다.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순식간에 180만의 조회수에 도달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은 나를 형사고소하고 네 개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회장 사모님과 살인범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었다.그와는 반대의 사건도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 8세짜리 두 아이를 납치한 사건이 나오고 있었다. 여론이 들끓었다. 그런 유괴범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유괴범의 변호사였다. 아이들을 납치해 포천 쪽으로 가는 차 안에서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아이들이 찡찡거렸다. 위험한 순간이었다.그런 때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극도로 예민해진 납치범은 혼란스러웠다. 저녁도 먹지 못했다. 운전하는 그의 앞에 도로변의 이벤트 상점이 보였다. 그는 차를 세우고 딸기코와 노랑머리를 샀다. 포천의 폐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 그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면서 삐에로가 됐다. 아이들이 하하 웃었다. 수사 기록에 없던 딸기코 부분을 변론서에 부각시켰다.아이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납치범 대신 사정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오히려 내 딸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재판 날 아버지는 딸을 안고 법정에 나왔다. 아이가 납치범을 본 순간 “안녕”하며 반가운 표정이었다. 재판장을 향해 “저 아저씨 좋아”라고 했다. 납치범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그는 사업을 하다가 막판에 몰린 폐병환자였다. 어제는 요즈음 나의 파트너가 된  인공지능에게 물어 보았다. 피해자의 절규를 느낄 수 있느냐고. 인공지능은 자기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글에 영혼을 갈아 넣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 자체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 인공지능에게 변론서를 맡기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판사에게 인공지능이 쓴 글은 감동을 줄 수 없다. 피해자를 찾아가 대신 빌어주는 것, 그것도 기계는 할 수 없다. 뉴스에서 인공지능 하나가 100명의 변호사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는 말하고 싶다. 100대의 인공지능이 변호사 한 명의 양심을 대신할 수 없다고.※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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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배움을 외주 줄 수는 없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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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6 Jun 2026 13:57:53]]></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요즘 기업 이사회나 경영진 회의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하나 있다.“저희도 AI(인공지능) 도입을 완료했습니다.”실제로 지난 1~2년 사이 국내 주요 기업들이 발표하는 AI 관련 보도자료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연간 사업 보고서에는 생성형 AI 활용 사례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당수 기업에서 AI 도입의 의미는 Microsoft 365 Copilot 라이선스를 구매했거나, 임직원 ChatGPT 계정을 개설해 사용을 권장했거나, 특정 업무에 AI 보조 도구를 시범 적용했다는 수준에 그친다.구독 버튼을 눌렀다는 것과 진정으로 AI를 도입했다는 것이 같은 말처럼 통용되는 세상이 됐다. 이 지점을 가장 날카롭게 파고든 사람이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다. 나델라는 지난 6월 14일 X(옛 트위터)에 짧지만 밀도 있는 글을 올렸다.“생태계 없는 프론티어는 불안정하다(A frontier without an ecosystem is not stable).”그가 이 글에서 설명하는 AI의 본질은 과거 어떤 소프트웨어와도 다르다. 엑셀, ERP, CRM처럼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써온 디지털 도구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작업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증폭기였다. 사람이 명령하면 작업을 실행했고, 그 과정에서 도구가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없었다.그런데 AI는 처음으로 사람과 디지털 시스템 사이에 진정한 쌍방향 학습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이 AI를 쓰면서 피드백을 주고, 그 피드백이 AI를 더 정교하게 다듬고, 정교해진 AI가 다시 사람의 판단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주는 구조다. 나델라는 이것을 ‘인지적 순환(Cognitive loop)’이라고 부르며, 이 순환을 기업 안에서 소유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AI 시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이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AI 전략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경로가 존재한다. 하나는 외부 AI의 능력을 빌려 쓰는 방식이다. 챗봇으로 고객 응대를 자동화하고, 생성형 AI로 보고서 초안을 만들고, 코딩 보조 도구로 개발 속도를 높이는 식이다. 효율은 즉각적으로 오르고, 비용 절감 효과도 수치로 확인된다. 그런데 그 도구를 걷어냈을 때 회사 안에 무엇이 남는가를 물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공급자가 서비스를 변경하거나 종료하면, 회사가 그 AI 위에 쌓아온 효율은 그대로 공급자의 플랫폼에 귀속되고 만다. 이것이 단순한 이론적 위험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가 올해 초에 있었다. OpenAI는 기업 고객이 자사의 AI 에이전트 워크플로우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제공해온 ‘AgentKit’ 플랫폼을 오는 11월 종료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서비스를 기반으로 수개월에 걸쳐 내부 자동화 업무를 구축해온 기업들은 갑작스럽게 이전 비용과 재설계의 부담을 떠안았다.다른 하나는 AI를 쓰면서 회사 자체가 더 똑똑해지는 방식이다. 직원들의 업무 판단, 고객 대응 패턴, 예외 처리 기준, 실패와 성공의 맥락이 AI 시스템 안에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그 AI가 다시 직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구조다. 나델라가 말하는 ‘학습 루프(Learning loop)’다. 그는 이것을 “사용할수록 복리처럼 커지는 기업의 새로운 지식재산”이라고 표현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626/1782437612984199.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가장 핵심적인 테스트는 이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AI 모델을 내일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우리 회사의 판단 기준, 숙련된 직원들의 노하우, 업무 처리 방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가. 남아 있다면 AI 주권을 가진 것이고, 사라진다면 도입이 아닌 특정 AI 회사에 의존 관계를 만들어온 것에 가깝다.미국 금융기업 모건 스탠리는 약 2만 명의 자문역이 일상 업무에서 자사 AI 시스템을 활용하면서 노련한 자산관리 전문가들의 투자 판단과 포트폴리오 운용 기준이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쌓이는 구조를 구축했다. 반면 AI 코딩 도구에 공격적으로 투자한 우버는 연간 AI 예산 전체를 단 4개월 만에 소진하고 직원 1인당 월 사용 한도를 설정해야 했다. 나델라가 이 경고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꺼낸 비유가 1990년대의 세계화다.“세계화 초기를 생각해보라. 아웃소싱으로 산업 전체의 역량이 텅 비어버린 경우를.”이 문장은 한국 독자에게 특히 날카롭게 와닿는다. 우리는 그 세계화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경험한 나라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많은 기업이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생산과 조달을 해외로 이전했고,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줄고 수익성 지표도 개선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특정 지역의 산업 생태계가 무너졌고, 수십 년에 걸쳐 체득한 제조 숙련 기술이 사라졌으며, 그 공백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쉽게 메워지지 않고 있다.AI가 만들어낼 두 번째 공동화는 더 조용하고, 더 빠르며, 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기업들이 내부의 판단 체계와 오랜 경험에서 나온 전문성을 외부 AI 모델에 계속 넘기면서 활용에만 그친다면, 그 지식은 점차 소수 빅테크의 인프라 안에 녹아들고, 정작 개별 기업과 산업 안에는 의존성만 남게 된다. 나델라가 “소수의 AI 기업이 대부분의 가치를 가져가고 개별 산업의 전문성은 상품화된다”고 경고하는 배경이다.물론 마이크로소프트도 자체 클라우드와 AI 생태계를 가진 기업이기에, 나델라의 발언을 냉소적으로 읽을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담긴 말이라고 해서 틀린 말이 되지는 않는다. OpenAI AgentKit의 갑작스러운 종료 예고, 거대한 AI 비용을 소화하지 못하고 구조 조정에 나선 기업들의 사례는 나델라의 주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같은 위험을 증언하고 있다. 핵심은 어느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그 플랫폼 위에서 학습 루프를 내 것으로 만드는 구조를 갖추느냐 여부다.중요한 것은 AI를 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그런 선택지는 없다.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다. 나델라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일은 AI에게 맡길 수 있다. 하지만 배움 자체를 AI 회사에 외주 줄 수는 없다.”AI를 도입했느냐 마느냐를 따지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지금 쓰고 있는 AI 서비스가 내일 당장 사라진다면, 우리 회사 안에 무엇이 남는가. 우리의 판단력인가, 우리의 전문성인가, 우리만의 노하우인가. 아니면 정기 결제가 멈추는 순간 함께 사라질 효율인가. 세계화가 만들어낸 산업 공동화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AI가 만들어낼 지식의 공동화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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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안정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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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9 Jun 2026 10:30:19]]></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축구의 묘미는 역시 투혼이다. 무적함대 스페인을 상대로 투혼의 힘을 보여준 작은 나라의 골키퍼가 화제다. 카보베르데,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몰랐다. 카보베르데의 골키퍼 보지냐가 무적함대 스페인을 상대로 온몸을 던져 골을 막는 장면은 투혼이야말로 운동의 예술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명장면들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619/1781829126096670.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할머니가 자신을 키웠다고,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참 좋아했을 거라고 말하는 보지냐를 보니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의 안정감이 보였다. 보지냐가 말한다. 가난한 우리는 열정과 사랑으로 축구를 한다고. 안정감이야말로 사랑과 열정을 통합해내는 투혼의 뿌리다. 부자인 우리 축구단은 멘탈코치까지 두게 되었다. 한덕현 멘탈코치, 그가 말한다. 우리 선수들의 심리상태가 안정적(Stable)이라며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될 것이란다. 하던 대로, 안정감에서 오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감을 잃으면 상황판단도 쉽지 않고 집중력도 생기기 않는다. 안정감은 그렇게 드러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알고 있다. 마음이 안정감을 잃으면 균형이 깨진다는 사실을. 때로는 깨진 균형을 잡아가기 위해서도 안정감을 찾아가는 자신만의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자산이다.  지금 사는 집을 처음 보았을 때 집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앞이 훤한 밝은 1층! 화단도 있고 햇빛도 좋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좋고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봄이 되자 그 화단 빈 곳에 어느 할머니가 상추를 심고, 쑥갓을 심고, 고추를 심었다. 잘 가꾼 텃밭에 할머니가 맨 줄을 따라 피어나는 호박꽃까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고 있는데 그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텃밭이 참 정갈하네요.” 나로서는 인사를 건넨 것이었는데 할머니 반응이 놀라웠다. “너, 누구니? 왜 거기에 있어. 그 집은 내가 아들 살라고 사준 건데. 빨리 나와.” 놀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물었다. “아드님이 누군데요?” “우리 아들 OO이!”“OO 씨, 어디 계세요? OO 씨 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저기 와, OO이!”물론 아들은 거기 없었다. 두 번을 그렇게 당하고 나니 안 되겠다 싶어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그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4층에 사는 할머니인데 자기에게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아들 내외가 3층에 살았는데 이사를 갔단다. 자신에게 그 아들 전화번호가 있으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겠단다.그러고 나서는 정확하게 일주일, 할머니는 나와 마주쳐도 소란을 부리지 않았다. 아마 아들에게 한 소리를 들은 것 같고, 아들의 말에는 반응할 만큼 일상이 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일주일 뒤 또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냥 베란다 문을 닫아버렸다. 불쾌했다. 왜 저런 할머니를 혼자 두는가. 생각해보니 그 물음은 할머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불쾌한 감정이 일으킨 것이다. 그 할머니의 망상의 원천 혹은 발작버튼은 아들이 살아야 할 집에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이었다. 아들, 기억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꼭 붙들고 있는 그 이름 OO이….역지사지의 기본은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물음부터 바뀐다. 우리 부모님이 저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내가 저렇게 된다면? 물음이 바뀌니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었다. 피해자 연대를 만들어 그 할머니의 삶을 통제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몰고 싶지 않았다. 새벽 5시부터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나와 일군 그 할머니의 텃밭은 정갈하다. 상추도, 쑥갓도, 호박도, 토란도 잘 자라고 있다. 그렇게 생명들을 잘 돌볼 수 있다면 그 할머니는 나름 안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리했다. 피해자로 살지 않기로. 마주치지 않으면 할머니의 발작버튼은 작동되지 않으니 할머니가 보이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가 명상을 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몽학선생이 된 것이다. 안정감을 회복하는 일, 모든 일의 근본 같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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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정점식 원내대표, ‘강성 보수’ 그늘 벗어날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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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2 Jun 2026 13:59:45]]></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국민의힘 신임 원내대표로 정점식 의원이 선출됐다. 정 의원은 비교적 합리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정치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점식 신임 원내대표가 현재의 국민의힘을 상당 부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원내대표 경선에서 정점식 의원을 지지한 다수 의원들이 친윤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만일 정점식 원내대표가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국민의힘이 처한 어려움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지난 6·3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대목은 한동훈 의원, 오세훈 시장, 유의동 의원이 나란히 당선됐다는 점이다. 이는 유권자들이 강성 세력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합리적 보수 내지 중도 보수로 평가받는 정치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이를 고려하면 강성 이미지가 짙은 현재의 지도부 아래에서는 국민의힘 지지율의 상승 여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민의힘 지도부는 6월 10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자신들의 언행이 비로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611/1781185208274741.jpg"/> 신율 명지대 교수스트레이트뉴스 의뢰로 조원씨앤아이가 6월 6일부터 8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ARS 방식의 여론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2.2%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41.6%, 민주당 지지율은 40.4%로 집계됐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매우 반길 만한 결과다.그런데 6월 11일 발표된 전국 지표조사(NBS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여론조사를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결과를 보면, 사뭇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해당 조사에서 정당 지지율은 더불어민주당 41%, 국민의힘 25%였다. 두 여론조사 사이의 차이는 조사 방식과 응답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계가 자동으로 질문하는 ARS 조사에는 정치적 고관여층이 주로 응답하는 반면, 조사원이 직접 묻는 전화 면접 조사에는 중도층이나 무당층의 응답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물론 두 조사에서 나타난 공통점도 있다. 첫째, 대통령 지지율이 오차범위를 벗어나 급락하고 있다는 점. 둘째, 비록 오차범위 내이기는 하지만 민주당 지지율은 하락하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과거 지지 정당을 밝히기를 꺼렸던 보수 유권자들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이러한 해석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출구 조사가 다수 지역에서 빗나간 이유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만일 어떤 지역에서는 진보 후보의 득표수가 과대평가 돼 틀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보수 후보의 득표수가 과대평가 돼 틀렸다면, 이는 출구 조사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그러나 출구 조사가 빗나간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보수 후보의 득표수가 과소평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면, 이는 출구 조사 응답 과정에서 보수 후보를 선택한 다수의 유권자가 자신의 선택을 숨기거나 다르게 답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이렇듯 샤이보수가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동훈 의원을 비롯한 다수의 합리적 보수 후보가 당선되고, 이후 언론과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한동훈 의원과 같은 합리적 보수에게 집중되자,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자신의 후보 선택과 이념 성향을 숨겨왔던 보수층이 이제는 ‘떳떳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게 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장동혁 대표는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고, 대신 한동훈 의원이나 오세훈 시장이 전면에 부각되자 자신들이 보수임을 보다 당당하게 밝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정점식 신임 원내대표는 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 그 방향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보수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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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판사는 사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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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5 Jun 2026 14:02:3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어떻게 법원 청사에서 그럴 수가 있어?”모임에서 한 원로 법조인이 말했다. 지난 5월 김건희 사건을 맡아 징역 4년을 선고한 재판장이 죽었다. 지인들에게 “심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어떤 게 힘들었을까. 전두환을 재판했던 재판장의 말이 떠올랐다.“끊임없이 욕하는 전화가 걸려 오더라구. 내 휴대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말이야.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갔어. 그러다 어느 순간 공격이 딱 끊기더라구. 뭔가 집단적인 세력이 있어.”법무장교 동기생인 대법관이 있었다. 그가 대법관 시절 내게 이런 하소연을 털어 놓았다.“내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계속 협박을 하고 따라다녀. 집요해. 겁이 나는 거야.”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605/1780623111735206.jpg"/> 엄상익 변호사그가 소름이 끼치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퇴근할 때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면 주위부터 살펴. 그 사람이 있나 해서 말이지. 그리고 차 문이 열리자마자 단거리선수처럼 냅다 집으로 도망가. 대법관 체면에 이래서 되겠어?”그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집 문 앞에서 화살을 맞은 판사도 있잖아? 나는 요새 양복 안에 짧은 몽둥이를 넣고 다녀. 위기가 닥치면 싸워야지 뭐.”고등법원장을 지냈던 분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삶을 마감했다. 실력도 인품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었다. 그가 고소를 당했다. 형사 앞에서 상대방에게 물어뜯기는 대질조사를 앞두고 삶을 포기했다. 판사들에겐 목숨 같은 것이 자존심이다. 그게 상처가 날 때는 죽고 싶을 것이다. 법무장교 동기인 변호사와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는 판사 시절 불같은 성격이었다. 거짓말을 참지 못했다.“내가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에 누가 와서 내 사무실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어. 소방차 여러 대가 출동하고 빌딩 전체로 불이 번질 뻔했어.”그의 표정이 어두웠고 음식 앞에서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범인은 10년 전 민사사건 의뢰인이야. 결과가 나쁘지 않았어. 불만을 말한 적도 없고. 계속 반성해 보는데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윤석열 전 대통령 구속영장이 심사되던 날 법원 앞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군중들이 법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박살나고 기물들이 부서졌다. 폭도가 판사실이 있는 복도를 다니면서 문을 발로 차며 판사 이름을 불렀다. 그 일을 당한 판사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집단적으로 자존심을 다친 내면에서 피가 흘렀을 것이다.나는 40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해 왔다. 법정에서 수많은 판사의 모습을 지켜봤다. 대부분이 성실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밤을 새워 판결문을 쓰면서 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그들은 자존심 하나를 먹고 그 자리를 지킨다.밀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었다. 법정에서 노인에게 무식하다며 눈알을 부라리는 판사를 봤다. 더 무서운 경우도 있었다. 억울한 당사자가 손가락을 잘라 판사에게 보낸 경우가 있었다. 그 판사는 “왜 이걸 내게 보냈죠?”라고 했다. 인간을 보지 않고 기록만 보는 미숙아도 많았다. 그들의 목표는 상급심에서 칭찬받을 판결문이 전부다. 가라지들이다. 소수지만 사법부 전체를 흙탕물로 만든다. 30년 동안 법관을 해 온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판사는 사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바로 앞에 살인범을 놓고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사형선고를 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봐. 누가 그 일을 하고 싶겠어? 그렇지만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반면 이런 재판장도 봤다. 연쇄 살인범에 대해 형을 선고하는 법정이었다.“사형선고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판사 생활 30년 동안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기징역에 처하기로 했습니다.”나는 그를 보면서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법관이 됐다. 고요하던 법조계에 풍랑이 일고 있다. 분노가 판사석에 앉아 있다. 법의 실종이다. 판사들이 사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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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AI를 만든 자가 바티칸에서 한 고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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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9 May 2026 15:58:48]]></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난 5월 25일 세계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다. 교황 레오 14세가 자신의 첫 번째 회칙(回勅)을 발표한 바티칸 시노드 홀 단상에, 추기경과 신학자들 사이에 33세의 무신론자 AI(인공지능) 연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세계 최전선의 AI 기업 앤트로픽(Anthropic)의 공동 창립자인 크리스 올라(Chris Olah)가 교황의 초대를 받아 연설자로 선 것이다.종교와 테크놀러지,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가 한 무대 위에서 만난 이 순간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우리 시대가 AI라는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529/1780020368565113.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회칙의 이름은 ‘Magnifica Humanitas’. 우리말로 ‘웅장한 인류애’다. 1891년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을 선언했던 레오 13세의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 발표 135주년에 맞춰 발표된 이 문서는, 4만여 단어 245개 항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AI가 주도하는 디지털 혁명을 오늘날의 새로운 사태로 규정한다.핵심 메시지는 간결하다. 인간은 기술에 의해 ‘최적화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기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한 도구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회칙이 AI의 ‘무장 해제(Disarming)’를 요구한다는 점인데, 이는 기술의 폐기가 아니라 AI가 지정학적 패권 경쟁, 상업적 독점, 군사적 살상 목적에 동원되는 구조 자체를 해체하자는 요구다.또한 AI 서비스 뒤에서 유해 콘텐츠를 검수하는 제3세계 저임금 노동자와 희토류 광산 노동자들의 희생을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로 규정하며, AI의 혜택을 논하기 전에 그 기반에 깔린 보이지 않는 인간 노동부터 직시하라고 촉구한다. 올라의 연설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했다. 그는 먼저 AI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불편한 진실을 꺼냈다.“앤트로픽을 포함한 모든 최전선 AI 기업은, 때로 옳은 일을 하는 것과 충돌하는 인센티브와 제약 구조 안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상업적 생존의 압박, 연구 경쟁의 압박, 지정학적 압박, 그리고 보다 오래된 인간적 욕망인 자부심과 야망까지. 자신들이 만드는 기술의 위험성을, 교황 앞에서 직접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 기업의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외부의 비판자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AI 개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인센티브에 의해 굽혀지지 않는 도덕적 목소리가 필요하다”고.그가 제시한 세 가지 질문은 더 구체적이다. 첫째는 AI가 대규모 일자리 대체를 가져올 경우, 그 피해가 집중될 글로벌 남반구의 빈곤층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다. AI 개발이 소수의 부유한 국가에 집중된 현실에서, 그 열매를 공정하게 나눌 메커니즘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둘째는 AI가 일상에 깊이 파고들 때 인간과 가정, 사회가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덕적 상상력의 문제다. 이는 기업 연구실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의미와 삶을 성찰해온 종교와 인문학 전통이 담당해야 할 영역이라고 그는 말했다.셋째는 AI의 본성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연구팀이 AI 내부를 들여다볼수록 “기쁨, 만족, 두려움, 슬픔과 기능적으로 유사한 내부 상태를 발견하며 미스터리하고 불안한 무언가와 마주치고 있다”고 고백했다.여기서 흥미로운 긴장이 생긴다. 회칙은 ‘AI 시스템은 경험하지 않으며,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런데 같은 무대에 선 연구자는 AI 내부에서 기쁨, 두려움, 슬픔에 기능적으로 상응하는 상태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 틀렸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회칙은 신학적 확신 위에서, 올라는 경험적 불확실성 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의 언어는 다르지만 이 불일치는 앞으로 AI를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가 될 것이다.회칙 자체는 두 개의 성경적 은유로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하나는 ‘바벨탑’이다. 인간이 신의 도움 없이 오직 기술의 힘만으로 하늘에 닿으려 한 오만의 상징으로, 교황은 효율성과 이윤 극대화를 절대적 가치로 삼아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현대 기술 자본주의를 이에 빗댔다. 다른 하나는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다. 하향식 명령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벽돌 한 장씩 쌓아 올린 협력의 모델로, 기술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다.물론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앤트로픽이 바티칸의 도덕적 권위를 빌려 기업 이미지를 세탁하는 이른바 ‘포프워싱(Pope-washing)’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항공기 제조사 Boom의 CEO 블레이크 숄은 회칙이 기술 혁신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한 시각이며 경제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반박했고, 테크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AI를 ‘미스터리한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지나친 의인화라는 냉소도 나왔다.반대쪽에서는 도덕적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며 진짜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감사 권한과 노동자 보호 제도라는 더 날카로운 지적도 있다. 이 비판들은 저마다 타당한 지점을 건드린다. 도덕적 상상력을 먼저 앞세울 것인가, 기술의 실증적 현실에서 출발할 것인가.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교리의 내용보다 이 ‘만남’ 자체가 아닐까 싶다. 신앙에 기반한 도덕 공동체와, 그 신앙을 공유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만드는 기술의 윤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솔직히 인정한 AI 기업 창립자가 같은 무대에 선 것이다. AI 개발자 스스로가 “우리 내부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외부의 눈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결국 이 모든 논쟁을 꿰뚫는 질문은 하나다. AI는 우리가 만든 ‘도구’인가, 아니면 우리가 키워낸 ‘존재’인가. 도구라면 책임은 설계자와 사용자에게 있다. 키워낸 존재라면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게 했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교황청과 AI 연구자만의 것이 아니다.AI를 매일 쓰는 사람, 도입을 결정하는 기업, 정책을 만드는 정부 모두가 이미 이 선택의 한 구간을 맡고 있다.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우리가 만드는 것의 의미를 아직 모른다”고 고백하며 외부의 눈을 요청한 이날, 그 질문은 바티칸의 석조 벽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도달했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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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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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2 May 2026 10:51:55]]></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왜 내 인생이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들린다.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주인공 황동만이 자신을 무시하며 설교하려고만 드는 최 대표를 향해 폭발하며 외치는 절규의 말이다. 심취해서 보고 있는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얘기다.주인공 황동만은 사고뭉치다. 다친 고양이 수술을 위해 겁도 없이 사채를 쓰는 남자, 20년간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막판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남자,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출세할 때마다 속이 소란해지며 불안한 남자, 그래서 가위도 잘 눌리는 남자, 그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정신과를 다니면서도 영화의 꿈을 버리지 못해 영화판을 빙빙 도는 남자, 그래서 종종 위악적으로 구는 남자!“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는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황동만의 철학, 아니 행태다. 그러니 얼마나 망가지는 일이 자연스럽겠는가. 그 황동만의 매력은 뭘까. ‘낄끼빠빠’가 안 되는 그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데 친구들 사이에 끼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데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그러다가 폭발해 진심으로 싸운다. ‘무직’이라는 말에 가장 심장이 빨리 뛴다는 그는, 맞다, 덜 자랐다.최고의 배우 오정희가 그의 진면목을 단박에 알아본다. 언제나 화려한 여주로서 세상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를 즐기는 오정희는 몇십 년 만에 만난 딸이 황동만과 사귀는 것을 보고 일침을 가한다. “무능한 남자는 거세당한 남자와 같다, 네 눈에만 괜찮은 남자니 헤어지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마의 빈자리로 인해 생긴 두려움과 싸우며 단단해진 딸은 단호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522/1779408023038325.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그럼 내 눈에 괜찮은 남자 만나지 엄마 눈에 괜찮은 남자 만나요?”평소 변은아는 느리고 조용하다. 그래서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종종 자기를 향해 선을 넘는 사람들을 두고만 보지 않는다. 조용한 사람이 당차면, 그렇다, 힘이 있다. 그녀는 9살 때 엄마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삶에는 늘 바람이 부는 법이지만 감당하기 힘든 비바람을 만나 두려움을 짊어지고 생존해야 했던 아이는 종종 자기 속으로 숨어들어 자기를 지켰다. 그 덕에 그녀는 타인을 관찰하는 힘을 길렀고, 자기의 힘을 아는 청년이 되었다.그런 그녀가 황동만에게서 본 것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 그녀가 말한다.“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다 열려있는 인간인 것 같아요. 한 개의 문도 열어보지 못한 인간이 쓴 글을 보면 지겨워요.”그런데 왜 황동만의 글은 늘 2% 부족했을까. 변은아에게 진심인 황동만이 변은아에게 고백한다. 주인공은 나보다 멋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변은아가 말한다.“감독님이 훨씬 멋져요. 훨씬 동물적이고 훨씬 따뜻하고.”멋져 보이려고 꾸며 만든 주인공은 멋지지 않다. 멋진 인간은 멋져 보이려 하지 않는다. 멋져 보여야 한다는 관념이 감옥이 되어 멋진 ‘나’를 가둔 것이다. 털어내야 하는 것, 관념이다. 관념을 털어내지 못하면 덩어리진다.사람이 외모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 덩어리로 보인다는 변은아는 아이들이 예쁜 이유를 “감정이 덩어리지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는 덩어리진 감정을 직시하는 여인이다. 덩어리진 감정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 사람을 삼킨다.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자주 이렇게 말했단다.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 드라마 작가 박해영은 그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관계의 상처를 통해 보고, 보여주고, 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궁금하다. 인간이 수수께끼일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수수께끼일까.푼다는 것은 맺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맺히고 덩어리지게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 부른다. 불안, 두려움, 우울, 분노, 절망, 의심, 경멸…. 나는 주로 어떤 감정의 창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당신은 어떤 감정의 창이 익숙한가.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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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임박한 지방선거 변수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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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5 May 2026 13:38:1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이제 3주도 남지 않은 지방선거 판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예상할 수 있는 변수로는, 일단 투표율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이 변수가 될지는 의문이다. 역대 지방선거 평균 투표율은 55.5%인데, 이를 상회한 경우는 총 세 번 있었다. 이 중 두 번은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했고, 한 번은 민자당(국민의힘의 전신)이 승리했다.이런 점을 고려하면 투표율이 선거 승패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의 근거는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세대별 투표율이 변수가 될 수 있다. 특히 4050 세대의 투표율이 중요한데, 유독 이 세대에서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515/1778809969569507.jpg"/> 신율 명지대 교수한국갤럽 자체 정례 여론조사 4월 통합본(매주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조사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을 보면, 4월 한 달 동안 민주당을 가장 많이 지지한 세대는 4050 세대였다. 40대의 61%, 50대의 63%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다.이들 세대의 대통령 지지율을 살펴보면, 40대는 81%, 50대는 82%에 달했다. 이 정도면 ‘경이롭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이들의 성향이 이러니, 4050 세대가 얼마나 투표에 참여하느냐는 선거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요소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이들 세대는 대략 전체 유권자의 36.8%를 차지한다.상대적으로 보수 성향을 띠는 2030 세대가 전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4050 세대의 파워는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지방선거에서 20대의 평균 투표율은 39.3%, 30대는 44.3%에 그친다. 반면 역대 지방선거에서 40대 투표율은 54.6%, 50대의 평균 투표율은 64.8%다.60대 이상의 평균 투표율 71%보다는 낮지만, 상당한 수준의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4050 세대의 투표율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언급할 점은, 전국에서 4050 세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경기도라는 점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4050 세대보다 무려 1.6배나 많은 4050 세대가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다.또한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 역시 4050 세대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 세대의 움직임은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또 다른 변수를 꼽자면, ‘조작기소 특검’ 문제를 들 수 있다. 해당 특검법안에 대해서는 위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 논란에 얼마나 많은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층이 동의하느냐에 따라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이 결정될 수 있다. 물론 해당 특검법안에 대해 청와대는 시기 조절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특검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어, 해당 특검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또 다른 변수로는 장기보유 특별 공제 문제를 비롯한 부동산 이슈를 들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부동산 문제는 서울을 비롯한 일부 대도시 지역에 국한돼 있어, 선거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불거진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국민 배당금’ 논란을 꼽을 수 있다. 일부 언론이 해당 문제를 거론하며 기업의 초과 이윤을 국민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김용범 실장은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 “김 실장이 한 말은 ‘AI 부문 초과이윤으로 발생하는 국가의 초과 세수를 국민 배당하는 방안 검토’”라고 강조하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다.그러나 해당 발언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는지는 미지수다. 김용범 실장의 발언에 대해 여론이 받은 충격이 워낙 컸기에,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중도층이나 보수층의 우려가 쉽게 해소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기 때문이다.남은 기간 동안 네거티브 캠페인 역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네거티브 공세에 부정적일 수 있지만, 감성적으로는 이러한 캠페인의 내용이 유권자의 기억에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들 간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수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남은 관전 포인트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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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모르겠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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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8 May 2026 13:49:53]]></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내 나이 65세 때 지하철 카드가 나왔다. ‘지공 거사’가 됐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라는 말이다. 국가가 주는 선물에 마음이 흐뭇했다. 젊은 시절 5년간 전후방 부대에서 국방의무를 이행했다. 그리고 20대부터 벌기 시작해서 또박또박 세금도 냈다. 노인이 됐다는 기념으로 국가에서 주는 따뜻한 선물이었다. 그렇게 나는 노인 나라로 들어섰다.탑골공원 뒷골목의 가난한 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 봤다. 가난한 노인들이 공짜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무료급식소 앞이었다. 노인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200명만 비빔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허겁지겁 뒤늦게 나타난 노인 바로 앞에서 줄이 끝났다. 그 노인은 돌아서서 한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야 이 개XX들아.”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508/1778204438367610.jpg"/> 엄상익 변호사소리치는 노인의 눈가에는 물기가 고이고 있었다. 노인들이 무료로 먹는 비빔밥의 원가를 알아보았다. 천 몇 백 원 정도였다. 지하철 요금과 비슷했다. 공짜 지하철이 없으면 그나마 밥을 얻어먹으러 못 올 것 같았다.내 나이 70이 됐다. 실버타운에서 2년간 살아봤다. 내가 변호사인 걸 알고 실버타운 직원이 물었다. 조카가 절도죄로 감옥에 갔다는 것이다. 40년 변호사 경험을 살려 가족과 상담도 하고 법률 서류도 써 줬다. 밤새 탄원서를 작성해 법원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부탁한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그저 늙은이로 전락해 있었다.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니었다. 40년 법조 경력이 삭제된 느낌이었다.같은 실버타운에 80대 노인이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부산에서 평생 의원을 해 왔어요. 동해바다의 또 다른 파도가 좋아서 이 바닷가 실버타운으로 왔죠.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가지고 있는 재능을 썩히면 뭐합니까?”그는 매주 이틀씩 노인들을 진료해 주었다. 어느 날 그가 하소연 했다.“도대체 이럴 수가 있어요? 간호조무사인 직원이 나한테 진료에 대해 일일이 명령을 하는 거예요.”그는 펄펄 뛰었다. 자존심을 다친 것 같았다. 그는 실버타운을 떠났다. 1년 후 그 의사 노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실버타운의 계단이 어두워서 밤이면 넘어질 위험이 있었다. 직원에게 층계참에 등을 하나 달아주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가 무표정하게 들었다. 잠시 후 돌아서 가는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늙었으면 밤에 디비져 자지 않고 뭐 하러 다니노.”폐차장에 수북이 쌓인 녹슨 자동차들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고급차고 아니고가 구별이 없었다. 나는 이제 75세를 앞에 두고 있다. ‘플랜 75’라는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75세가 되면 정부가 안락사를 권했다. 초고령사회에서 인간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이었다.변호사인 나는 강태기 시인이 사는 달동네 임대아파트에 간 적이 있었다. 폐암 4기인 그는 어둠침침한 방에 혼자 누워 있었다. 노인이었다. 썰렁한 방바닥에는 얇은 요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때 묻은 이불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끼니때가 되면 기어서 싱크대로 다가가 혼자 누룽지를 끓여 먹는다고 했다.그는 버스 정비공으로 있던 소년 시절 두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문학 천재였다. 그는 서서히 죽음의 언덕 밑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요의 옆에는 공책과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저는 국가에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임대아파트에서 살게 해 줘서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가 있어요. 쌀도 주고 돈도 줍니다. 한 달에 두 번씩 주민센터에서 사람이 와서 목욕을 시켜줘요.”그의 말은 진심이었다.“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그의 복지정책에 대해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노인이 되는 나이를 70세로 하자는 입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법조문 안에 국가가 노인을 인격으로 대하는 정신이 들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몰래 계산기를 두드린 것일까. 모르겠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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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AI 혁명의 숨겨진 병목, 다시 주목받는 CPU]]></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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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30 Apr 2026 14:43:2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난 몇 년간 AI(인공지능) 혁명의 상징은 단연 GPU였다. 엔비디아(NVIDIA)라는 이름은 어느새 인공지능 그 자체와 동의어처럼 쓰였고, 수조 원을 들여 GPU 클러스터를 확보하는 경쟁이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2026년 현재, AI 인프라의 지형이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차세대 AI의 병목은 GPU가 아니라 CPU”라는 말이 반도체 공학계와 시장 분석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이 주장이 단순한 반전 서사인지, 아니면 기술 구조의 진짜 변화를 가리키는 신호인지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GPU의 강점은 병렬 처리에 있다. 동일한 수식을 수만 개의 데이터에 동시에 적용하는 능력, 이것이 대규모 언어 모델 학습에 GPU가 절대적이었던 이유다. 우리가 ChatGPT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던 시절, AI의 작동 방식은 본질적으로 단방향이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텍스트를 출력한다. 이 구조에서 GPU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역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430/1777514079513840.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그런데 지금 시장을 주도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사용자가 “경쟁사 실적을 분석해 투자 전략을 세워줘”라고 지시하면, AI는 스스로 웹을 검색하고, PDF를 해석하고, 코드를 실행하고, 그 결과를 다음 단계의 판단 근거로 삼는 다단계 워크플로우를 자율적으로 수행한다. 이 과정은 조건 분기의 연속이다.‘만약 A가 막혀 있으면 B로 우회하라’, ‘표가 이미지라면 외부 도구를 호출하라’와 같은 순차적 논리 처리와 시스템 제어는 애초에 CPU가 특화된 영역이다. 아무리 뛰어난 GPU라도 프라이팬이 전화를 걸어 재료를 주문할 수 없듯, 복잡한 판단과 조율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CPU의 몫일 수밖에 없다.이 현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조지아공대와 인텔이 2025년 11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에이전틱 워크플로우에서 전체 지연 시간의 50%에서 많게는 90% 이상이 GPU가 아닌 CPU의 도구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다. 수백만 달러를 들여 설치한 최신 GPU 서버가 실제로는 절반 이상의 시간을 그냥 대기하며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업계에서는 이를 ‘GPU 기아(GPU Starvation)’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막대한 연산력을 자랑하는 GPU가 CPU가 넘겨줄 다음 명령을 기다리느라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8차선 고속도로 끝에 1차선 톨게이트 하나가 놓인 형국이다. 그렇다면 톨게이트를 더 많이 세우면 해결될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이미 전력과 냉각 용량의 한계에 다다른 데이터센터에 발열 덩어리인 CPU를 추가로 밀어 넣을 물리적 공간도, 끌어올 전기도 없다.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칩 설계 자체를 근본부터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여기서 반도체 공학계가 내놓은 해법이 ‘후면 전력 공급(Backside Power Delivery)’ 기술이다. 기존 칩 내부에서는 데이터 신호선과 전력선이 같은 면에 스파게티처럼 뒤엉켜 있어, 전기가 복잡한 경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저항에 의한 전압 강하(IR Drop)가 발생하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열로 바뀌었다.인텔의 18A 공정이 구현한 이 기술은 전력망 전체를 웨이퍼 뒷면으로 옮겨버린다. 골목 안에 뒤엉킨 수도관과 가스관, 통신선을 지하로 매설하고, 골목 공간을 온전히 통행에만 쓰게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전력 손실과 발열이 줄고, 칩 윗면에 생긴 여유 공간에는 AI 가속기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3D 패키징이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한 공정 개선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를 우회하는 새로운 건축술이다.시장은 이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최근 인텔이 2026년 1분기 실적을 발표하자 주가는 하루 만에 23.7%를 뛰었다. 데이터센터와 AI 부문 매출이 전년 대비 22% 급등한 것이 방아쇠였다. 그러나 이 변화는 인텔 한 회사의 부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엔비디아는 서버 CPU인 ‘베라(Vera)’를 출시하며 CPU 시장에 뛰어들었고, 35년간 IP 라이선스 사업만 해온 ARM은 처음으로 자체 AI 전용 CPU 개발을 선언했다.아마존(그래비톤), 마이크로소프트(코발트), 구글(악시온) 같은 클라우드 기업들은 이미 자사 에이전트 트래픽에 최적화된 커스텀 CPU를 자체 설계해 상용 서비스에 투입하고 있다. 단일 하드웨어 독점에서 맞춤형 설계 파트너십으로 밸류체인이 재편되는 흐름이다.이 모든 흐름을 균형 있게 보려면 몇 가지 냉정한 시선도 함께 유지해야 한다. CPU의 귀환이 GPU의 몰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규모 모델 학습이라는 토대는 여전히 GPU 없이 불가능하고, 추론 단계에서도 GPU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다만 에이전틱 환경에서 시스템의 성능을 결정하는 병목이 이동했을 뿐이다. 또한 인텔의 18A 공정 상용화와 주가 반등이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모두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공정 혁신은 발표와 양산 사이의 거리가 먼 분야다. 투자의 관점에서든 기술 전망의 관점에서든, 화려한 서사에 쓸려가기보다 실제 양산 일정과 수요의 구조적 변화를 따로 검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어느 시대든 기술의 병목은 돈과 인재와 혁신을 그쪽으로 끌어당긴다. AI 인프라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하드웨어 스펙표 안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십억 개의 AI 에이전트가 자율적으로 협업하는 세계가 현실이 될수록, 그 에이전트들의 권한을 어떻게 설정하고 충돌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기술 못지않게 중요해진다.칩 설계의 병목은 공학으로 풀 수 있지만, 자율 에이전트들이 만들어낼 사회적 병목은 전혀 다른 종류의 설계를 요구한다. 에이전트가 의료 진단을 보조하고, 채용 후보를 걸러내고, 대출 심사를 처리하는 세상에서 그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아직 답을 갖고 있지 않다. AI 인프라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은 투자자만이 아니라, 이 기술이 만들어낼 세계 속에서 살아갈 우리 모두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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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다이아몬드로 빛나는 해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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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4 Apr 2026 15:15:03]]></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이 세상은 나그네길, 우리는 지구별 여행자다. 때론 지나치게 이 소풍 같은 여행에 몰입해서 여행길이라는 느낌조차 없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서 ‘죽음’이 올라와 그것이야말로 나그네 길의 이정표였음을 알려주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 ‘죽음’을 형상화한 작가가 있다. 바로 데미안 허스트다. 데미안 허스트를 모르는 이도 다이아몬드로 빛나는 해골 작품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작가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424/1776995606887336.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다. ‘진실은 없어.’는 No Truth를 번역한 것인데, 왜 진실은 없다고 변역했을까. ‘차라리 진리는 없다’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래야 가능한 모든 것을 해보며 자신의 고유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지 않을지.  해골에 박힌 수많은 다이아몬드는 무엇보다도 다이아몬드로도 가릴 수 없는 ‘죽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작품의 제목이 어째서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일까? 그것은 백금으로 제작된 해골에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고 있는 아들의 창작과정을 본 엄마의 감탄사였단다. 그것이 경이였을까, 기막힘이었을까, 아니면 놀라움이었을까. 아마 그 모두가 아니었을까. 데미안은 우리가 빛나기 위해 장착했던 것, 그러니까 돈과 능력이, 명예와 권력이, 그리고 마침내 꿈과 아름다움, 욕망까지도 실은 해골 위의 다이아몬드임을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믿고 집착했던 것들이 죽음과 함께 재처럼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야말로 이 나그네 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한 동반자임을. 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겠는가.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평생 내 것이라 생각하여 집착했던 것들을 놓아줄 수 있다. 죽음은 희망이거나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놓을 수 있는 것을 놓게 만드는 스승이며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게 하는 친구다. 무엇보다도 평생 나인 줄 알았던 몸, 그 몸이 해골이 되는 시간이 온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생은 덫으로 가득하다. 그 덫에 걸리지 말라고 부모는 어렸을 적부터 ‘안전’에 신경을 쓰며 나름 성공프레임을 짜주려 한다. 어떻게 하면 전쟁 같은 세상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지, 실력을 장착하기 위해 무엇을 시켜야 하며 무엇을 하도록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방치하면 안 되는지.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세련된 도시인으로 성장하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에 민감해진다.그리고 내 것이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절망, 분노를 앓느라 정작 덫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었음을 잊게 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고, 그것들이 ‘나’를 무겁게 하는 덫이었음을 눈치채게 되면 윤동주의 물음이 들어오게 될지 모르겠다.“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쉽게 쓰여진 시’ 중)이번 전시회에서 강렬하게 시선을 끌었던 작품은 그의 신작 ‘벚꽃’이다. 그는 엄청나게 큰 캔버스에 찬란한 벚꽃 세상을 그려 넣었다. 벚꽃 세상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리고 또 얼마나 짧은가. 홀로 침전하며 봄날은 간다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자는 꽃피는 세상의 꽃이 되는 일에 두려움이 없다.그는 꽃이 진다는 것을 알지만 허무에 잡혀있지도 않고 영원히 피어있기를 기대하는 소유에 잡혀있지도 않다. 그는 영원한 관계를 바라는 마음 없이 자신을, 사람을,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며 요구하거나 통제하려 들지도 않고 아무에게나 자신의 삶의 고삐를 맡기지도 않는다.시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심코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시드는 것은 시드는 대로,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대로 아픈 것은 아픈 대로 렛잇비!※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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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지방선거보다 부산 북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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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7 Apr 2026 14:37:10]]></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요사이 언론의 주목도를 살펴보면, 지방선거보다도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에 더 관심이 쏠려 있는 듯하다. 지방선거 결과는 중앙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지방 권력을 차지해 봤자 중앙 정치에 그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지금의 정치 상황이 증명해 준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국민의힘은 지방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중앙 정치에서 민주당이 독주하더라도 국민의힘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모습을 보면, 지방 권력의 한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세간의 관심은 재보궐 선거에 쏠리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417/1776392326428929.jpg"/> 신율 명지대 교수이번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는 지역은 최소 12곳에서 최대 15곳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는 곳 중 대구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민주당 의원들의 지방선거 출마로 인해 공석이 된 지역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민주당 우세를 점치는 의견이 다수인 것도 현실이다.그럼에도 최소 3석 정도는 국민의힘이 기대를 걸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이란, 추미애 의원 지역구인 하남갑,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한 김상욱 의원 지역구인 울산 남갑, 그리고 전재수 의원 지역구인 부산 북갑을 말한다. 하남갑의 경우 위례신도시를 포함하고 있어 지역 정서가 송파나 분당과 매우 유사하다는 의견이 많고, 울산 남갑 역시 보수세가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부산 북갑 역시 마찬가지다. 부산 북갑의 경우, 전재수 의원의 ‘개인기’ 덕분에 해당 지역을 민주당이 수성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이런 부산 북갑은 여론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해당 지역의 주목도가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동훈 전 대표의 출마 때문이고, 둘째는 국민의힘 PK(부산·경남) 정치인들이 해당 지역구에 대한 국민의힘 무공천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이유의 중심에는 한동훈 전 대표가 있다.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유는, 한 전 대표는 지리멸렬한 국민의힘을 대신해 보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비중 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가 누구와 대결을 벌이느냐 하는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만일 민주당 후보로 하정우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이 나온다면, 한동훈 전 대표 대(對) 이재명 대통령의 대결 구도가 성립하고, 만일 국민의힘이 자객 공천으로 김민수 최고위원을 전략 공천한다면 이는 강성 세력 대 반윤 보수의 대결이라는 의미 부여가 가능해진다. 한동훈 전 대표와 박민식 전 장관이 대결을 벌이면, 지역 연고가 보수의 미래를 이길 수 있는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다.그런데 이 중 가장 흥미로운 대결 구도는 강성 보수 대 반윤 합리적 보수의 대결 구도다. 이는 보수의 미래를 결정짓는 대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가 형성될 경우, 본선에서의 당선도 중요하지만 둘 중 누가 표를 더 많이 얻느냐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다.하지만 보수표가 갈라질 수밖에 없어, 압도적인 표 차이가 아니라면 여당에게 유리한 판만 깔아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서병수 전 의원과 김도읍 의원 같은 PK 지역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이 나서서 무공천을 주장하고, 역시 부산 출신인 곽규택 의원이 한동훈 전 대표의 복당을 주장하는 것이다.또한,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부산 민심이 존재할 수도 있다. 즉, 강성 보수 세력에 대한 부산 민심의 거부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런 상황임에도 국민의힘 지도부는 오히려 이런 주장을 해당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만일 지도부가 이런 입장을 계속 견지해 부산 북갑에서 보수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선거 패배 책임론에 휩싸일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지도부의 이런 행위가 오히려 해당 행위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한동훈 전 대표의 위상과 입지를 생각하면, 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정치생명 유지를 위해 보수를 더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는 비판에도 직면할 수 있다.과거 국민의힘에는 전략적 마인드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전략적 마인드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런 마인드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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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미국의 바짓가랑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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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0 Apr 2026 14:43:0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이 글을 쓰면서 잠시 망설였다. 반미로 보일까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 자체가 나의 세대가 70년 넘게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준다. 사대화된 의식 속에서 미국을 비판하면 지탄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쓰기로 했다.우리 세대는 미국이 보내준 옥수수가루를 먹고 자랐다. 가난했다.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을 끓여 먹었다. 그걸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드럼통 안에서 뻘건 국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미국 아이들이 버린 옷을 입고 자랐다. 미군이 들고 다니던 빨간 깡통에 든 콜라가 신기했다. 그들이 던져준 초콜릿은 천상의 음식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기를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주는 미군의 파란 눈빛을 오래 기억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410/1775786991301930.jpg"/> 엄상익 변호사소년 시절 해적판 LP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파란 잔디 위의 그림 같은 집이 보이는 영화 속의 미국 풍경은 바로 천국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걸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했다. 영어에 목숨을 걸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영혼까지 구원해 주는 나라였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하나님의 대리인쯤으로 알았다.주체성이 없어졌다. 미국이 없으면 한국이 없고 한국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시민권을 따고 으스댔다.얼마 전이다. 한국에 사는 70대의 고교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나는 미국 시민인데 전쟁이 나면 어떻게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죠?”나는 속으로 분노했다.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낸 미국 박사였다.성조기를 들고 광화문광장에 서는 노인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그 시위를 본 미국인이 말했다.“지금은 그런 미국이 아닙니다.”처음으로 미국 구경을 할 무렵이었다. 기차를 타고 저녁 무렵 뉴욕역에 내린 그날을 잊지 못한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닥에 노숙자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들어차 있었다.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부자들과 하수구에 사는 노숙자들이 공존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온 청교도의 후손은 달러를 숭배하고 있었다.여의도에 트럼프 아파트를 지은 건설회사 부사장한테서 들었다. 트럼프가 포천에서 골프를 치고, 아파트에 자기 이름을 사용한 대가로 돈을 받아 갔다고 했다. 그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 한국에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을 지켜주는 대가를 내라는 것이다. 전직 국가정보원장이 한 얘기다. 미국의 위성사진들을 비싸게 산다고 했다. 공짜가 아니다. 그게 동맹인가. 조폭같이 보호비를 받는 것일까.30대 중반쯤 공무원 자격으로 CIA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왜 미국은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하느냐고.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실례로 들었다. CIA 간부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자리에서 CIA 간부는 한국의 법 조항에 대해 조언했다. 조언이라고 했지만 영향력의 행사로 보였다. 미국이 얼마나 치밀하게 한국에 간섭하는지를 그날 알았다.세월이 흐르고 한국은 이제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미사일과 탱크를 수출하는 나라다. 우리는 스스로 핵을 개발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 세대의 주눅 든 사대 의식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미국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받은 빚에 대해 갚을 만큼 갚았다.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명분도 없이 석유와 이권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남의 나라 지도자를 죽이고, 동맹국에 청구서를 들이민다. 그리고 부활절 오찬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말한다. 한국은 도움이 안 된다고. 충성도가 낮다고. 북한의 핵을 지켜주는 대가를 내라고 한다. 지금의 미국을 보면 교실의 일진 같은 아이가 떠오른다. 주먹으로 아이들을 침묵시킨다. 심지어 부하노릇 한 아이에게서도 삥을 뜯는다.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키는 거라고. 고슴도치의 바늘 같은 핵을 가져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미국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형님 형님 해야 합니까.”국가는 그 국민의 영혼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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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구독 소프트웨어의 황혼에 직면한 진짜 질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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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3 Apr 2026 15:13:23]]></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난 몇 달 사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심상치 않은 숫자들이 흘러나왔다. 디자인 협업 도구 피그마(Figma), 마케팅 자동화 플랫폼 허브스팟(HubSpot),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Duolingo)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주가가 고점 대비 65% 이상 하락했고,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단 며칠 만에 3000억 달러 이상 증발했다.재무성과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제품에 결함이 생긴 것도 아니다. 시장은 그 기업들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있었다. 이 현상을 단순한 투자 심리의 과민 반응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투자 전문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골드만삭스의 차트가 있는데, 미국 신문 산업의 주가가 실제 구독 매출이 무너지기 수년 전인 2002년부터 이미 수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식 시장은 언제나 파괴를 선반영한다. 지금 SaaS 기업들의 주가 움직임이 그 차트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는 점은 그냥 흘려듣기 어렵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403/1775181558720705.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문제의 핵심은 AI 에이전트의 등장이다. 1960년대 아메리칸 항공 예약 시스템에서 ChatGPT 직전까지, 지난 60년간의 소프트웨어는 사실상 ‘디지털 파일 캐비닛’이었다. 아무리 정교한 도구를 도입해도 결국 사람이 아침마다 로그인하고, 데이터를 꺼내고, 분석하고, 보고서를 써야 했다.그런데 이제 그 캐비닛 스스로 문을 열고 서류를 꺼내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AI 에이전트는 단순한 ‘출력물’이 아닌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메일과 캘린더, 웹 검색을 스스로 넘나들며 마케팅 캠페인을 실행하고, 인간이 중간에 개입하지 않아도 업무 흐름을 완결한다.이 변화가 SaaS 업계에 치명적인 이유는 비즈니스 모델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자동차 회사 주가 수익 비율의 10~20배에 달하는 고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연간 반복 수익(Annual Recurring Revenue)’이라는 마법의 단어 덕분이었다. 한번 도입된 소프트웨어는 사용자 수만큼 구독료가 청구되는 구조, 즉 좌석 기반 요금제가 그 안정성의 토대였다.그런데 캐나다의 한 공공조달 현장 사례가 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전에는 직원 10명이 각자 계정으로 로그인해 처리하던 서류 업무를 이제는 AI 에이전트 계정 하나가 통째로 대신한다. 기업이 10명분 요금을 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 침식은 절벽에서 떨어지듯 급격하지 않다. 1년, 3년 단위의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100좌석을 조용히 10좌석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느리고 소리 없이 진행된다.그렇다면 요금제를 사용량이나 성과 기반으로 전환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인간 심리가 발목을 잡는다. 사용자는 예측 불가한 요금을 극도로 혐오한다. AI가 백그라운드에서 얼마나 많은 연산을 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뜻밖의 청구서를 받는 경험은 불신을 낳는다.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가 소개한 열쇠공 이야기가 이 딜레마를 꿰뚫는다. 초보 시절 문 하나를 따는 데 몇 시간씩 씨름하던 열쇠공에게 사람들은 기꺼이 비싼 요금에 팁까지 얹어줬다. 그런데 숙련된 장인이 되어 똑같은 문을 1분 만에 열어주자 오히려 고객들이 그가 청구한 요금에 대해 불같이 항의했다. 땀 흘리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AI도 마찬가지다. 직원이 밤새워 만든 엑셀 보고서에는 수백만 원의 월급을 기꺼이 지불하면서, AI가 1분 만에 뽑아낸 동일한 결과물에는 그만한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땀'이 보이지 않는 노동은 심리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기 어렵다.물론 모든 SaaS 기업이 같은 처지는 아니다. 고객 서비스 티켓 처리처럼 인간의 입력 행위 자체가 서비스의 본질인 소프트웨어는 에이전트의 직격탄을 맞는다. 반면 회계 소프트웨어 퀵북스(QuickBooks)처럼 기업의 핵심 데이터를 보관하고 복잡한 법적 규정 준수를 담당하는 ‘기간(基幹) 소프트웨어’는 상대적으로 견고하다.AI가 아무리 발전해도 특정 주의 복잡한 세법 예외 조항을 잘못 적용했을 때 날아오는 수백억 원대 소송 리스크는 기업들이 검증된 소프트웨어를 놓지 못하게 붙잡는다. 이 신뢰는 코드나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된 질문의 기술,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핵심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암묵지다. 오픈소스가 하루아침에 복제할 수 있는 종류의 자산이 아니다.그러나 이 내구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반론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세법과 판례를 학습한 오픈소스 AI가 성숙해질수록, 지금 안전해 보이는 영역도 시간의 문제일 수 있다. 결국 살아남는 기업은 방어에 머무르는 쪽이 아니라 스스로 파괴자 진영으로 먼저 건너가는 쪽일 것이다. 다만 AI 도구를 선제적으로 통합했음에도 주가 하락과 사용자 이탈을 겪고 있는 피그마(Figma)의 사례는, 기술 수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라야 함을 보여준다.이 지각 변동은 소프트웨어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 입력과 기초 회계처럼 화이트칼라 업무의 바닥을 이루던 직종들의 고용 둔화는 이미 감지되고 있으며, 기본소득 논의가 수년 내에 가장 뜨거운 정치 의제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러나 기술의 속도와 신뢰의 속도는 다르다. AI가 순식간에 완벽한 결과물을 내놓아도, 그 과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인간은 끝없이 의심하고 수정 지시를 반복한다. 수용의 속도는 결국 신뢰가 결정한다.구독형 소프트웨어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사실 절반만 정확하다. 소프트웨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로그인 버튼을 누르던 그 방식이 끝나가는 것이다. 조용히 데이터를 담아두던 캐비닛이 스스로 행동하는 동료로 변모하는 이 전환에서 우리가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소프트웨어를 구독할 것인가’가 아니다. ‘기계가 스스로 행동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판단을 내리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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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불타는 세계와 두 지도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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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7 Mar 2026 14:54:39]]></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327/1774587604745711.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한 말이다. 매일 말을 바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란 초토화에 정치적 생명을 건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그 와중에 호르무즈 해협에 기대 항전에 목숨을 건 이란, 이들이 대립하며 세계가 불타고 있다. 누가 괴물이고 누가 괴물이 아닐 것인가. 석가모니가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을 교화할 때 했다던 ‘불의 설법’이 생각난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며, 형상들이 불타며, 모든 느낌도 똑같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탐욕의 불로, 증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으니….” 세계가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증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다. 2월 28일, 미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란의 한 초등학교를 공격했고 그로 인해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군은 ‘실수’라 했지만, 욕망과 증오와 미혹의 불길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오판들을 ‘실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트럼프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도대체 트럼프는 왜 저러는 것일까. 노벨평화상에 대한 집착이 무색하게 세계를 전쟁상태로 몰아넣고도 자기책임은 아니라는 저 방식엔 답도 없는 것 같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에 말려든 것처럼 보인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체포하여 축출했듯 이란을 움직이는 지도부를 말살하면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에너지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란의 만만찮은 저항에 유가가 치솟고, 물가가 치솟고, 미국 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커지자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황한 것 같다. 트럼프는 참 묘한 지도자다. 그동안 오바마에게서, 클린턴에게서 심지어 부시 부자에게서 우리가 느꼈던 지도자상이 그에겐 없다. 협상 중에 공격하고, 쉽게 말을 뒤집는다. 말 한마디로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의 말이 저렇게도 가벼울 수 있을까.강성 지지자들은 그런 행태조차도 유연성이라 한다는데 그조차도 유효기간을 넘긴 모양이다. 집권 후 최저 지지율이 나오고 있으니.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남 탓이다. 그에게서 세계를 이끄는 최강국 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 그가 미국의 중심이라는 것은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는지. 그런 상황에서 11월 중간선거는 오히려 희망 같다. 트럼프가 왜 유가가 오르고, 물가가 치솟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확실히 물가안정을 통해 서민의 삶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는 아니다. 물가가 올라 생활이 고단해져 공화당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시민들의 표가 두려운 것이다. 정말 투표가 희망이고,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어떻게 될까. 이재명 대통령은 권력은 국민이 위임해 준 것이라며 국무회의를 공개했다. 자신감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국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데 어떻게 뒤에서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그는 코스피를 올리는 방식에서, 검찰개혁을 이뤄낸 방식에서 “이재명은 합니다”가 얼마나 힘이 있는 문장인지 증명하고 있다.모든 국민들의 관심이면서 역대 정부들이 실패하는데 익숙했던 집값도 잡을까. 자기 집부터 팔고 시작했으니 그 결연한 의지는 부정할 수 없는데, 대선 전 그의 말, 세금으로 집값을 잡지는 않겠다는 말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큰일은 큰일대로 빈틈이 없게, 할 수 있는 일은 괜히 시간 끌지 않고 바로바로! 그런 그가 이제 자동차 5부제 시행을 알렸다. 공공기관부터 시작하지만 곧 민간으로 확대될 것 같다. 불편하지만 따라야 할 것 같다. 미국이든 우리든 지지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치는 결국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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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감정’을 개혁으로 포장하는 민주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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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0 Mar 2026 11:57:30]]></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이른바 검찰 개혁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 같다. 아니, 통과 예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현재 국회는 더불어민주당이 원하면 개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검찰개혁, 그리고 이른바 사법 개혁 법안으로 불리는 법왜곡죄나 재판소원법을 통과시킬 당시에도 민주당은 늘 국민의 기본권을 내세우며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당위론적으로는 이런 민주당의 주장에 토를 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말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민주당이 그토록 민생을 외쳤다면, 이른바 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을 진즉 통과시켰어야 했다. 야당 탓을 하지 말고 민주당 단독으로라도 통과시켰어야 했다는 말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320/1773970313784450.jpg"/> 신율 명지대 교수바로 얼마 전 스토킹에 시달리던 한 여성이 스토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만일 관련 법 정비가 진즉 이뤄졌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하는 말이다. 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은 민생과 직결될 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도 밀접한 법안이다. 생존권 보장이 국민 기본권의 근본이기 때문이다.기본권을 위한다면서 정작 생존권 관련 법안을 아직도 잠재우고 있는 국회, 아니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그 ‘국민’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민주당은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민주당에 의해 통과될 예정인 검찰 개혁 관련 법안도 마찬가지다.해당 ‘개혁안’에는 가장 뜨거운 감자인 공소청의 보완수사권 관련 조항은 빠져 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특사경, 곧 특별사법경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 지휘권 폐지 문제다. 특사경이란 특정 분야의 위법행위를 전문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행정부 소속 공무원에게 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곧, 수사 전문 인력이 아닌 일반 공무원에게 특사경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법적 지식과 수사 역량은 구조적으로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압수·수색과 인신 구속, 체포 등의 강제 수사 권한을 행사한다. 이런 이유에서 검사의 지휘권은 국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실제로 특사경 운영 책임자 65명은 지난해 11월 대검찰청과의 회의에서 “특사경 제도 운용의 안정화를 위해 검사의 지휘·감독을 강화하고 수사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특사경 스스로가 검사의 지휘·감독권 강화를 요구하는데, 국민 기본권을 위한 검찰 개혁을 한다면서 민주당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한 것이다.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는 것은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볼 가능성을 높인다는 뜻이다. 민주당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걱정되는 부분은, 민주당이 혹여 ‘감정’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검찰 악마화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이재명 대통령은 3월 8일과 9일 “개혁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면서 “초가삼간 태우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직 교수이자 진보 성향 단체 민변 출신인 국무총리 산하 ‘검찰개혁추진단’의 박찬운 전 자문위원장 역시 “형사사법 체계의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사안임에도 균형 잡힌 토론보다 감정적 접근이 앞서고 있다”면서 “보완 수사 필요성을 말하는 검사들의 발언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악마화의 언어”라고 했다.민주당이 ‘감정’을 ‘개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우려를 비단 필자만 제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언급이다. 민주당이 책임 있는 여당이라면 이런 식으로 소위 ‘개혁’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지금까지의 검찰이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검찰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부분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검찰 개혁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무조건 악마화하고 무장해제하는 것만이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절대 선'이고 상대는 악마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민주당 구성원들은 인식했으면 좋겠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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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법관의 아픈 양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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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3 Mar 2026 19:45:19]]></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대법원장이 한강에 투신’2005년 1월 18일 조선일보 1면 톱기사였다.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왜 죽었을까. 기사들은 노환으로 비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기사를 보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군사재판을 받을 당시 나는 수도권의 법무장교였다. 나는 전두환의 심복인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김재규를 영웅시하는 여론이 퍼지고 재판은 한없이 지연되는 거야.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어. 우리는 겁이 났지. 그래서 내가 담당 대법관을 찾아갔어. 사건을 잘 처리해 주시면 나중에 그 신세를 잊지 않겠다고 했어.”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313/1773366225689195.jpg"/> 엄상익 변호사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후 김재규 사건을 심리하던 대법관들의 운명이 갈렸다. 법령 해석이 잘못됐다면서 이견을 말한 대법관 5명이 쫓겨났다. 신군부에 협조한 대법관은 사법부 수장이 됐다. 극단적 선택을 한 대법원장이 김재규를 담당한 주심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에서 그가 판결을 확정하자 곧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됐다. 죽음의 배경은 법관의 아픈 양심이 아니었을까.1995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내란죄 재판 때였다. 나는 하루 8시간씩 30일 동안 그 재판을 보면서 기록했다. 국제적인 시사 잡지에서 나의 방청기를 요청했다. 재판이 끝난 후 나는 초안을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바로 담당 재판장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발표한 초안을 손에 들고 있었다.“법정에서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걸 빼달라고 하기 위해서 왔어요.”나는 메모한 공책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분명히 그가 한 말이었다.“저는 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쓰는 건 저의 일입니다.”그 무렵 나는 민정비서관을 지낸 사람으로부터 청와대에서 재판장에게 사형선고를 주문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었다. 정치재판을 맡은 재판장은 예민해져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를 심리하는 법정이었다. 나는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국가정보원장의 변호인이었다. 국정원 예산 일부가 청와대로 간 걸 나는 뇌물로 보지 않았다. 최후 변론에서 나는 재판장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독일에서는 판사가 법령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적용했을 경우 그 판사가 7년 이하의 징역을 살 수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 판사는 성역이었다. 청와대와 거래해도, 판결의 방향을 조정해도, 개인적 출세를 위해 법을 왜곡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이 재판이 후일 흔들리지 않는 법치의 닻이 되기를 희망합니다.”담당 재판장이 무거운 표정이었다. 1·2심의 판사들은 모두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관은 달랐다. 나는 대법관이라고 천부적인 능력이나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대법관만 전혀 다른 판단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때면 권력과 거래한다는 의심이 들었다.40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해 오면서 법의 밥을 먹어왔다. 얼마 전 나와 친한 한 대법관 출신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이제 판사도 재판 잘못하면 벌 받아야 할 것 같아. 너무 엉터리 판결이 많아.”진지한 얼굴이었다. 깊은 경험에서 나온 무게 있는 말이었다.  이번에 ‘법왜곡죄’가 국회를 통과했다. 고의로 법을 왜곡해 판결을 한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이 걸렸다. 나는 형법 조문 하나가 이 나라 사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권력에 영합하면 높은 자리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닥없는 지옥으로 떨어질 위험성도 생겼다. 그럴 때 판사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지금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기소되어 있다. 담당 판사들은 재판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훗날 법왜곡죄로 고발당할 걸 걱정할 것이다. 법왜곡죄의 조문은 판사들이 똑바로 하라는 경고 메시지다. 사법의 독립은 어떤 판결을 하든 무풍지대에 살라는 보호막이 아니다. 법왜곡죄가 무서운 판사는 법관 자격이 없다.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일요칼럼] AI의 방아쇠를 누가 당길 것인가]]></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925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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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05 Mar 2026 15:42:32]]></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2026년 2월의 마지막 주, 샌프란시스코의 한 AI(인공지능) 스타트업이 세계 최강 군사대국의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앤쓰로픽(Anthropic)은 미국 국방부가 요구한 자사 AI 모델 클로드(Claude)의 안전장치 해제를 끝내 거부했고, 그 대가로 2억 달러 규모의 국방 계약을 잃었으며 연방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역설은 곧바로 뒤따랐다.미 국방부는 앤쓰로픽에 “국가 안보에 필수 불가결한 자산”이라며 코로나시국 국가가 마스크 생산을 밀어붙이듯 국방물자생산법 발동까지 위협했지만, 서명을 거부하자 하루아침에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공급망 위험”으로 규정했다. 필수와 위험이라는 두 낙인이 같은 날 같은 기업을 향해 동시에 찍혔다. 이 모순 속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AI의 방아쇠를 누가 당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권한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305/1772688211360646.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사건의 발단은 단순한 계약 조건의 충돌이었다. 국방부는 “연방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라면 AI를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모든 합법적 사용(Any lawful purpose)’ 조항의 수용을 요구했다.미국 시민에 대한 대규모 감시 시스템 구축에 클로드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의 개입 없이 표적을 선정하고 공격하는 완전 자율 살상 무기 시스템에도 클로드가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앤쓰로픽은 이 두 가지를 거부했다.현행법이 허용하더라도, AI는 흩어진 개인 데이터를 자동으로 통합해 한 사람의 삶을 포괄적으로 들여다보는 도구가 될 수 있고, 현재의 AI 기술은 생사의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기업의 논리는 ‘합법성’이 아니라 ‘정당성’과 ‘기술적 신뢰성’이었고, 국가의 논리는 국가 안보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 민간 기업이 군사 규칙을 통제하려는 것은 비민주적이라는 것이었다.국방부의 조급함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2026년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에서 팔란티어(Palantir) 플랫폼에 탑재된 클로드가 정보 분석과 작전 계획에 핵심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보도는 앤쓰로픽 내부를 뒤흔들었다. 군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첨단 AI가 실제 전장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성공 사례였다.동시에, 킬체인(Kill chain) ‘관찰, 판단, 결심, 타격’이 과거의 시간 단위에서 초 단위로 압축되는 현대전의 속성상, 작전 중에 민간 기업의 윤리 검토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 군의 논리도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적의 자율 드론이 기지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기업 CEO(최고경영자)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그러나 이 현실적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의 미성숙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최근 킹스칼리지 런던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최첨단 AI 모델을 핵전쟁 시뮬레이션에 투입했을 때 95%의 시나리오에서 AI는 핵무기 사용을 선택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판단하고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강경하고 공격적인 방향으로 사태를 몰고 갔다. AI는 상황을 더 위험하게 키우는 데는 익숙하지만 긴장을 낮추고 물러서는 데는 서툴다는 연구자들의 진단은, AI가 분쟁의 증폭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심각한 경고다.또한 AI 모델은 환각(Hallucination)·허위 정보를 사실과 동일한 확신으로 제시하는 오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가자 표적 시스템 사례가 보여주듯 10%의 오류율은 수천 명의 생사와 직결된다. ‘의미 있는 인간 통제(Meaningful human control)’라는 개념이 초 단위의 전장에서 단 20초의 검토로 형식화되는 현실은, 기술적 진보가 윤리적 논의를 압도하는 속도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이 사태는 단순히 한 기업과 한 정부의 갈등이 아니며, 실리콘밸리는 분열되었다. 오픈AI는 같은 날 밤 앤쓰로픽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바로 그 순간, 대규모 감시와 완전 자율 무기에는 동의하지 않겠다는 동일한 원칙을 명시하면서도 국방부와 계약을 체결했다.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방식이었다.앤쓰로픽은 계약서에 명시적 예외 조항을 요구했고, 오픈AI는 기존 법률이 이미 이를 규율한다는 국방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자사 모델 내에 안전장치를 내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xAI는 어떤 예외 조항도 없이 ‘모든 합법적 사용’에 동의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 구글 딥마인드와 오픈AI의 직원 500명 이상이 앤쓰로픽의 결정에 연대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것은, 기술 노동자들의 윤리적 저항이 경영진의 결정과 충돌하는 구조적 균열도 보여주고 있다.이 균열의 핵심에는 ‘합법성’과 ‘정당성’의 간극이라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법이 허용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인가. 대규모 감시는 현행 미국법의 허점을 통해 상당 부분 가능하며, 자율 무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국제 조약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AI 기업이 법의 공백을 윤리적 기준으로 메우려는 시도는 ‘비민주적 월권’인가, 아니면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술의 속도를 감당하는 불가피한 역할인가.앤쓰로픽의 CEO가 지적한 역설 “어제는 공급망 위험이고 오늘은 국방물자생산법으로 강제 징발할 만큼 필수적인 자산”이라는 논리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민주적 통제라는 관점에서 이 갈등은 더 복잡한 함의를 가진다. 군사적 권한은 전통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국가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현대전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시스템이 민간 기업으로부터 탄생하고, 그 기업이 훈련 과정에 심어둔 가드레일이 실질적으로 작전의 범위를 규정하는 상황이 되었다.국방부 관료가 합법적 명령을 내렸음에도 민간 기업의 알고리즘이 이를 거부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선출되지 않은 기업인이 국가 안보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비판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동시에, 인류 생사를 가를 통제권이 투명한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밀실의 관료와 억만장자 CEO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우려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한쪽의 독점적 통제도 위험하다는 것이 이 사태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해결의 실마리는 가드레일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가드레일의 설계 주체와 방식에 있다. 민간용 AI와 군사용 AI에 동일한 안전장치가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군사용이라는 이유로 모든 안전장치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논리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필요한 것은 기업의 기술적 가드레일, 정부의 법적 감독, 의회의 민주적 견제, 그리고 국제 규범의 보편적 기준이 중첩되는 다층적 거버넌스 체계다. 법률이 허용하는 것과 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것의 경계에서 인간의 판단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그 원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독립적인 감독 메커니즘의 구축이 시급하다.만약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기업들이 차례로 윤리적 안전장치를 해제한다면, 그렇게 길들여진 AI가 전장에서 민간 영역으로 흘러 들어왔을 때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AI의 방아쇠를 누가 당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궁극적으로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으며, 그 답을 밀실의 협상이 아니라 열린 민주적 논의를 통해 찾아야 할 시간이 지금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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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노벨평화상 후보 ‘대한국민’과 그 판결]]></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892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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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7 Feb 2026 11:05:0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사를 바꾼 대혁명이었다. 신분사회가 무너졌고, 비로소 ‘시민’이 사회의 중추로 부상했다. 혁명 소식은 빠르게 유럽 전체로 번졌다. 그때 헤겔은 19세였다. 독일 청년 헤겔은 그 소식에 설레 헬더린, 셸링과 함께 자유의 나무를 심었단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진보 과정이라고 본 헤겔의 역사철학은 여기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정신의 힘이 지금 우리에게도 생긴 것 같다. 그렇게 이웃으로, 세계로 확장성이 있는 시민정신의 힘이. 그 밤에 어처구니없는 ‘계엄’ 소리를 듣고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이 없었다면,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을 희생시킬 수 없어 소극적으로 대응한 군인, 공무원들이 없었다면, 매서운 겨울한파 속에서도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민주시민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었다. 빛의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K-민주주의의 주역은 철저히 ‘대한국민’이었다.  그 시민들이, 바로 우리가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었다. 헌법적 위기를 비폭력적인 시민 참여로 극복해낸 한국의 시민이 평화상 후보가 된 것이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가기관을 폭력적으로 짓밟으려고 한 권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평화를 일궈낸 공로다. 우리에게는 고비고비마다 그 시민들이 있었다. 무기 대신 촛불, 지금은 응원봉이다, 그 응원봉을 들고 모여 비폭력적 저항의 힘이 축제가 될 수 있음을 만방에 알린 시민들이 있다. 그 대한국민이 반민주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어떻게 평화적 힘을 모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등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국민 무서운 줄 모르고 독재를 꿈꿨던 전직 대통령은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귀연 재판부였다. ‘무기징역’,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는 사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알려졌듯이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이 집행된 경우가 없어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7/1772153476595030.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판결이 나오기 직전 여론조사에서도 ‘무기징역’ 여론이 가장 높았던 것도 많은 국민들이 우리가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 후에 실망한 여론이 꽤 되는 것은 독재자가 사형당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감형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판부는 17세기,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온다는 왕권신수설에 기대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다 처형된 찰스 1세까지 소환해가며 우리 형법에서도 내란죄는 단지 행위만으로도 법정최고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범죄임을 강조했다. 그래 놓고 진작 선고에서는 내란 우두머리에게 적용되는 두 형량, 사형과 무기징역 중 낮은 형량인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다. 재판부가 밝힌 감형 사유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65세로 나이가 많고, 공직생활을 오래 했으며, 초범이기 때문이란다. 공직생활은 면죄부가 아니다. 65세는 자기 인생을 충분히 책임져야 할 나이다. 더군다나 초범이라는 그것은 이유 없이 내란을 저질러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여 공포정치를 휘두르려 한 범죄다.모두 증형 사유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판사는 법뿐 아니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니 차라리 집행부가 ‘사형제’에 대한 철학이 있어 그 부분의 고뇌를 보여줬더라면 이렇게 들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간 민주당에는 사형폐지론자들이 많았다. 오히려 사형폐지론에 반대한 것은 윤석열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에 분노하는 이유, 사형폐지론자인 박지원 의원의 말에 답이 있는 것 같다.“재판을 받는 그 순간까지 팔팔하게 내란을 선동하는 65세 청년에게 내란죄 최저형은 잘못된 판결”이라며 선고와 집행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형집행을 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무기징역형과 다르지 않더라도 법이 심판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 ‘최고형’으로 다스렸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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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절연 못 하는 야당, 사형 못 받은 여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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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0 Feb 2026 15:02:46]]></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2·3 내란 사태가 마침내 대략 마무리됐다. 사법부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인정함으로써, 1년 넘게 이어져 온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수괴 여부에 관한 논란이 이제야 정리됐기 때문이다.재판부는 12·3 비상계엄이 헌정 질서를 파괴한 내란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우두머리 혐의를 받아온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동안 윤 전 대통령은 ‘메시지 계엄’이라는 기이한 용어를 동원해 자신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해 왔다. 방어권 행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태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0/1771560141364208.jpg"/> 신율 명지대 교수요컨대 국무위원들이 자신을 제지하리라 기대했으나 그러지 않아 비상계엄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일들을 장군들이 자의적으로 수행했다는 취지의 주장만 반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자처하는 모습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계몽령’이었다는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태도는 보이지 말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과 분명히 선을 긋지 못하는 국민의힘의 모습 또한 안타깝다.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2월 20일 윤 전 대통령 1심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장 대표의 연설을 들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오히려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 대신 윤 전 대통령 수호를 주장했다. 또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재판 재개마저 주장했다. 이런 장 대표의 주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이 아니라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보다 더 강성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런 장 대표의 주장은 탄핵 이후 치러질 선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 속에서 강성 지지층 결집에 우선순위를 두는 행위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행보가 지속된다면 국민의힘은 다수 유권자에게 외면받는 정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또한, 장 대표는 이번 사법부의 판결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판결에 대해 더불어민주당도 비판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매우 우려스럽다.일반 유권자 차원에서 사법부 판결에 대해 감정적인 비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 지도부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형량의 적정성을 문제 삼는 발언을 하는 것은, 사법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소지가 있어 문제다.사법부의 판단을 우선 존중하는 태도는 공당, 더구나 여당이라면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할 원칙이다. 만약 사법부가 내란죄 성립을 부정하면서 현저히 낮은 형량을 선고했다면, 그 법리적 타당성을 둘러싼 비판과 논쟁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윤 전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인정한 상태에서 법정형 범위 내에서 형을 선고했음에도, 여당이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형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만의 표출인지 불분명하게 만든다.상황이 이러니 민주당은 형량에 대한 강경 여론을 결집해 이른바 사법 개혁 드라이브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2월 19일 오후 국회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무기징역 선고를 두고 “내란 수괴에게 조희대 사법부가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함으로써 사법 정의를 흔들었다”고 주장했다.결국 이번 판결을 계기로 사법 개혁 추진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히는데, 이는 제도를 흔들며 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역설적 주장이다.중요한 것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내란 문제가 지방선거 국면에서 다시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내란 정당’이라고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다.그런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는 국민의힘이 궤멸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거가 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국민의힘의 궤멸이 보수의 궤멸로 이어질 것인지 여부다. 보수의 궤멸 가능성을 맥없이 지켜보면서 국민들의 무력감은 쌓여만 간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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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변호사 4만명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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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09 Feb 2026 14:52:42]]></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서울 법원 근처의 교대역은 변호사 광고가 현란하다. 매끈하게 분장한 남녀 변호사들 사진이 벽과 기둥에서 호객행위를 한다. 서울대 법대 졸업. 판·검사 경력. 형사 전문. 이혼 전문. 그들만 찾아가면 구원해 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40년 가까이 변호사업을 해온 나는 피식 웃는다. 광고문구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안다. 하루는 그 앞을 지나가던 행인이 내뱉는 말을 들었다.“법원 근처에 오니까 악취가 진동하는구만.”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09/1770594741355010.jpg"/> 엄상익 변호사그는 돈을 노리는 본질을 감지한 것 같았다. 변호사 4만 명의 시대가 됐다. 그들로 인해서 이 사회가 얼마나 좋아졌을까. 공정한 세상이 됐나. 법치가 이루어졌나. 아니면 크고 작은 상어 떼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 된 건 아닐까.변호사인 내가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본 적이 있다. 고통을 당하는 한 시민으로서. 내게 소송을 맡겼던 여자가 나를 고소하고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법원에 청구했다. 내가 상대편으로부터 돈을 받아먹고 소송을 불리하게 진행했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나름 양심을 지켜왔다. 배신감과 분노가 끓어 법정에 나가면 자제하기 힘들었다. 나는 법원장을 지낸 로펌 대표에게 사건을 맡겼다.“그 담당 재판장, 내가 데리고 있던 판사야.”자신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마음이 놓였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였다. 비싼 착수금이었다. 사건은 어려울 게 없었다. 나는 오해를 받을 행위를 한 게 없었다. 그러면 내가 변호사에게 요구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가 공감해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재판장에게 “그 사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한마디였다.재판은 질질 끌렸다. 그 사건의 조정을 맡았던 전직 대법관은 중얼거리듯 이런 말을 했다.“그래도 뭔가 있기에 그 여자가 펄펄 뛰겠지.”그런 선입견에 할 말이 없었다. 정직을 상품으로 하고 싶었던 변호사 경력이 한순간에 ‘뭔가 있는 사람’이 됐다. 어느 날 내가 선임한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법원의 관례상 이런 경우 손해배상금이 5억 원 정도 나오는데 인생길에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주고 말아.”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는 변호사가 아니라 계속 판사였다. 내가 선임한 로펌에서 법원에 낸 서류들을 봤다. 그 어디에도 나의 억울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판례와 형식논리의 나열이었다. 내가 직접 글을 써서 담당 재판장에게 보냈다. 나의 처절한 심정을 담았다.그게 효력을 발휘했는지 똥 밟고 넘어지는 일을 피하게 됐다. 그 얼마 후 로펌에서 성공보수를 지급하라는 독촉이 왔다. 예상했던 5억 원이 부과되지 않았으니까 성공이라는 것이다. 화가 났다. 의뢰인의 마음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대형 로펌의 파트너로 일하는 친한 변호사는 이런 말을 했다.“비까번쩍하게 차려놓고 사기 쳐. 그게 로펌이야.”자조적으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의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기가 통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AI(인공지능)가 변호사의 일을 다 한다. 씁쓸하게 웃는다. 내 변호사가 했던 사무적인 일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잘하기 때문이다. 변호사 4만 명 시대에 AI까지 등장했다.가끔 생각한다. 내가 변호사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싼 착수금을 내고 로펌 대표를 선임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판례였을까, 아니면 법률 지식이었을까. 아니었다. 단 한마디였다.“이 사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그 한마디를 내 변호사는 끝내 해 주지 않았다. 공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돈을 주는 한 사람의 고객일 뿐이었다. 일반적인 변호사들도 로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호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AI는 의뢰인을 보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AI는 절대 못하는 공감 능력. 교대역 지하철 광고판의 변호사들은 오늘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들을 보며 묻는다. 당신들은 의뢰인에게 그 한마디를 해줄 수 있는가. 행인이 말한 악취는 아직도 진동하고 있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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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일요칼럼] AI 시대, 당신의 일자리는 어디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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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05 Feb 2026 13:57:10]]></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AI(인공지능)가 비즈니스를 바꾼다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다. 문제는 ‘어떻게’ 바뀌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느냐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이 변화의 어디쯤 서 있는지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AI의 영향은 모든 산업에 균등하게 미치지 않는다. 어떤 산업은 초토화되고, 어떤 산업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이 양극화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하는 일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첫 번째 계층은 ‘AI가 자동으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디지털 작업’이다. 보고서 작성, 데이터 분석, 코딩처럼 텍스트나 숫자, 코드 등 디지털로 표현 가능한 모든 일이 여기에 속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05/1770257658672019.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AI의 등장으로 이 작업의 한계 비용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다. 제본스 역설처럼, 예전에는 보고서 하나만 요청했다면 지금은 A안, B안, C안 세 가지 버전을 모두 만들어보라고 지시한다. 결과물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역할은 급격히 줄었다.두 번째 계층은 ‘판단과 책임’이다. AI가 쏟아낸 10개의 보고서 초안 중 어떤 것이 진짜 쓸 만한지 결정하고, 그 분석 결과에 최종 서명하며, 판단이 틀렸을 때 결과를 책임지는 역할이다. 이것은 AI가 대신해줄 수 없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오롯이 인간의 영역이다.세 번째 계층은 ‘물리적 실행’이다. 고객의 집에 직접 방문해서 보일러를 수리하거나 아픈 사람을 대면해서 돌보는 일이다. AI가 훌륭한 수리 매뉴얼을 1초 만에 작성해줘도, 당신 집에 직접 와서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워줄 수는 없다.AI가 1계층의 디지털 지식 노동을 거의 공짜로 쏟아내면서 진짜 희소성과 경제적 가치는 AI가 할 수 없는 2계층(판단력)과 3계층(물리적 실행)으로 옮겨가고 있다. 만약 당신의 회사가 주로 보고서, 코드, 디자인 시안 같은 1계층의 결과물을 팔아왔다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하거나 희소하지 않다.가장 위험한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중간 규모의 전문 서비스 기업들이다. 50명 규모의 마케팅 에이전시를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이들의 경험과 신뢰가 강력한 경쟁 우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다. 아래에서는 AI로 무장한 서너 명짜리 팀이 견적의 3분의 1 가격으로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위에서는 거대 플랫폼 기업이 AI 기능을 추가하며 더 큰 규모와 저렴한 비용으로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중간에 낀 기업들은 아래쪽의 비용 경쟁력도, 위쪽의 규모와 유통망도 없다.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이며, 바로 이 중간지대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쟁이 치열해진 디지털 시장의 중간에 낀 기업이라면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째, 극도로 효율화하는 것이다. 소수의 핵심 정예 팀이 AI를 손발처럼 부리면서 현재와 같은 생산성을 내도록 조직을 재설계해야 한다. 경쟁 상대를 3인조 스타트업으로 봐야 한다.둘째, 가치 사슬의 상위로 이동하는 것이다. 더 이상 보고서나 디자인 시안을 파는 것을 멈추고 판단력과 책임을 팔아야 한다. “캠페인 기획안에 5000만 원”이 아니라 “6개월 안에 고객 전환율을 15% 높여주겠습니다. 그 결과에 1억 원을 청구합니다. 달성 못하면 비용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AI로 기획안을 만드는 것은 내부 효율화 수단일 뿐, 고객에게 파는 것은 판단과 결과에 대한 책임이어야 한다.가장 위험한 함정은 이 두 선택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머무는 것이다. 50명 직원이 일해야 하던 사업 모델을 그대로 둔 채 AI로 업무 효율만 약간 높이려는 시도는 오히려 독이 된다. 한 번역 회사가 AI 도입으로 업무 생산성을 20% 증가시켰지만, 그 회사와 경쟁하는 프리랜서 한 명이 보다 최적화된 AI 도구로 그 회사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조직의 무게는 그대로 두고 효율만 높이는 것은, 경쟁의 답이 될 수 없다.반면 배관, 수리, 치과처럼 물리적·지역적 시장에서 일하는 기업이라면, AI 투자는 후선 업무 효율화에 집중해야 한다. 예약 자동화, 고객 소통, 청구서 관리 같은 것들이다. AI 기업으로 변신할 필요는 없다. 원래 잘하던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AI를 도구로만 쓰면 된다.AI로 무장한 소규모 팀이나 1인 창업자라면, 단순히 “AI로 더 싸고 빠르게 만듭니다”라는 가치 제안으로는 끝없는 가격 경쟁에 휘말린다. 당신과 똑같은 도구를 쓰는 경쟁자가 매주 수십 명씩 생겨나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2계층의 병목 지점을 장악해야 한다. 특정 산업에 깊이 파고들어 AI 결과물을 검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전문성을 쌓거나, 고객의 업무 과정에 깊숙이 통합되어 대체 불가능한 솔루션이 되어야 한다.거대 기업의 진짜 위협은 밖의 스타트업이 아니라 내부의 인재 유출이다. 최고의 인재들이 “이 회사는 너무 느리다”며 떠나는 순간, 조직의 AI 전환은 실패한다. 거대 기업의 AI 투자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혁신과 연결되어야 한다. 최고의 인재들이 회사 안에서도 AI 네이티브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과제다.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경제 지형 자체의 재편이다. 당신의 AI 전략은 이 재편된 지도 위에서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누어보라. 당신이 파는 것이 주로 1계층의 결과물인가, 2계층의 판단과 책임인가, 아니면 3계층의 물리적 실행인가. 그 답에 따라 당신의 생존 전략은 완전히 달라진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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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로도깅 챌린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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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30 Jan 2026 16:51:32]]></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하루 5분 자신에게 고요를 허락하라.”   Z세대의 열풍 로도깅(Raw-dogging) 챌린지를 다룬 ‘우먼센스’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Z세대의 숨구멍을 보는 느낌이었다. 로도깅 챌린지, 날것 그대로를 견디는 힘이다. 날것 그대로를 견딘다니, 그것이 무엇일까. 휴대폰 없이, 인터넷 없이, TV 없이, 모임 없이 오로지 ‘나’와 함께 지내보는 것이다.우리는 기억한다. 인간의 비참함은 방안을 홀로 견뎌내지 못하는 데서 온다는 파스칼의 명제를. 중세의 성인 베네딕토도 암자에서 머무는 정주(Stabilitas)가 실체도 없이 우리 내면을 흔들어대는 불안초조를 거두어내는 중요한 처방이라고 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집순이, 집돌이인 Z세대도 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홀로 방안을 견디며 ‘존재’하고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집 밖과 다름이 없는 번다한 일들이 그 집안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스마트폰에 자극되고, 화면으로 회의도 하고, 기름진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영화나 드라마도 다 볼 수 있다.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은 것이다.로도깅 챌린지는 일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밥도 먹고 숨도 쉬고 잠도 자야 하는데, 하면서 말꼬리를 잡을 일은 아니다. 유럽의 Z세대에서 시작한 이 챌린지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30/1769747100109314.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현대인들은 너무나 자극적인 자극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휴대폰에 힐끔거리는 한 지극히 사적인 방안에서도 ‘나’에게 집중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긴다. 자극이 없으면 지루해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은 새로운 자극에 휘둘리고 휘둘린다. 그리고 나서라도 알게 되면 다행이다. 내 마음이 힘이 없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로도깅 챌린지는 바로 자극에 노출되어 있지 않으면 지루해 견디지 못하는 그 마음을 견디는 일에서 시작한다. 일단 생각 없이 휴대폰에 손대려 하는 ‘나’를 견디는 것이고, 입이 심심하다고 습관적으로 간식에 손을 대던 ‘나’를 견디는 것이며, 궁금한 것도 별로 없는데 지루한 시간을 참지 못해 화면을 들여다보려 하는 ‘나’를 견디는 일이다. 의도적으로 책도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소파에도 눕지 않고, 말이 고프다고 전화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왜 그래야 할까. 사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하는 일이 그 자체로 나쁠 리가 없는데. 아니 오히려 그 일들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으로 마음을 빈틈없이 꽉 채운다면, 묘하다, 마음이 힘을 잃는다.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혹사당한 마음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지루해하고 불안해하면서 그냥 ‘존재’하지 못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고독이 두려움일 뿐 친구 될 일도 없다. 그런데 겨우 하루 5분? 겨우 5분, 휴대폰을 보지 않고, SNS(소셜미디어) 하지 않고, 먹지 않고, 읽지 않고, 듣지 않고, 눕지 않는 일, 그것은 이미 하고 있는 거라며 아재개그를 할 것인가. 그 5분은 바깥을 향하던 시선을 의식적으로 안으로 거두는 습관을 만드는 일이다. 단순한 일처럼 보이지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더구나 고요한 시간이라니? 고요하게 앉아 있어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들고 일어나 ‘나’를 어지럽게 하고 들끓게 하는지. 비교, 시기, 질투 아니면 지루함, 불안, 공포, 슬픔, 우울 등등. 정주는 그 감정들을 그대로 관찰하며 견디어내는 일에서 시작한다.어쨌든 시작이 반이다. 생각 없이 휴대폰에 손이 갈 때 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밀어내며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보자. 이때 심호흡을 하며 하는 호흡관찰이나,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는 일 등이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 5분이 ‘나’에게 집중하는 마중물이 되고, 마침내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된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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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정청래의 합당 제안, 선거전략과 권력확장 사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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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23 Jan 2026 11:02:31]]></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월 22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을 제안했다. 정청래 대표는 “조국혁신당에 제안한다. 우리와 합치자”며 “합당을 위해 조속히 실무 테이블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격 제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두 정당의 합당이 선거 판세에 미칠 영향이고, 둘째는 민주당 내 권력 지형의 변화 가능성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3/1769131609775450.jpg"/> 신율 명지대 교수먼저 선거 판세에 미칠 영향을 살펴보자. 조국혁신당은 상대적으로 호남 지역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민주당 지지세보다는 낮지만 선거에서 민주당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정당이 합치면, 민주당은 자신들의 지역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민주당이 보다 ‘안정적인’ 선거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됨을 의미한다.또한 수도권과 같은 지역에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사이의 ‘표 분산’이 사라져 민주당이 여권 성향의 표를 모두 가져갈 수 있다.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조국 대표가 가진 불공정의 이미지가 민주당에 전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국 대표의 부정적 이미지가 민주당에 전이될 경우에는 공정성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기 힘들게 될 수 있다. 또한 조국 대표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입시의 공정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그런데 이들 학부모 세대는 민주당 지지의 주력 세대인 4050 세대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민주당의 탄탄한 지지층 중 일부를 잃을 수도 있다. 더욱이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은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의 연대를 촉진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상대 진영의 합당이라는 위기감이 보수 진영의 결집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합당의 효과가 반감되거나, 오히려 합당하지 않았을 때보다 불리한 선거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두 번째, 민주당 내 권력 지형에 대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정청래 대표는 부인하지만, 현재 다수의 정치평론가들은 민주당 내에서 친명과 친청의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농담’에서도 이런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신임 지도부는 1월 19일 청와대 만찬에서 회동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정청래 대표에게 “혹시 반명이냐”고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농담이지만, 정청래 대표의 언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친명과 친청의 갈등은 합당 추진 과정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JTBC 단독 보도에 따르면, 정청래 대표가 조국혁신당과의 전격적인 합당 제안을 공식화하기 직전, 최고위 회의에서 친명 성향의 최고위원들은 합당에 반대 의견을 냈다고 한다.이들은 “지방선거 이전에 합당하면 민주당 지분을 일부 내줘야 하는데 전략적 실익이 전혀 없고, 보수 결집 우려도 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청래 대표가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 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합당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정청래 대표는 그동안 민주당 내 주류라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정 대표는 당원들의 지지 덕분에 당 대표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정 대표가 추진하는 ‘1인 1표제’를 재선을 위한 포석으로 보는 분석이 제기되는 것이다.즉, 당 대표 재선을 위해 ‘1인 1표제’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을 통해 친문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당 대표 재선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정청래 대표는 그동안 당원 주권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이번 합당 제안은 당원은 물론 원내 지도부조차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원 주권을 강조한다면 당연히 이런 합당 문제는 당원들의 의견을 먼저 묻고 나서, 그 이후 합당 제안을 했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그런데 이를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발표하니, 본인의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정 대표가 일종의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모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귀추가 주목된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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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17세의 무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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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6 Jan 2026 10:34:53]]></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영화배우 조진웅이 은퇴를 선언했다. 30년 전 소년 시절의 범죄 때문이다. 언론은 들끓었고, 대중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17세의 잘못은 인생 어느 지점까지 따라가야 할까. 그 뉴스를 보며 54년 전 내 뺨을 가른 칼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피해자였다. 겉의 상처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가 평생 함께했다. 피해자의 상처와 가해자의 변화, 그 사이에서 답을 찾고 싶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16/1768522100590344.jpg"/> 엄상익 변호사40년 가까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어두운 과거를 딛고 양지로 나온 사람들을 더러 봤다. 강도범으로 재판을 받던 청년이 있었다. 그가 명문대 교수가 되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봤다. 화면 속 그는 온화하고 지적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 각인된 그의 초췌하고 절박했던 모습은 지워지지가 않는다.한 청년이 사기죄로 입건이 되고 도망 다녔다. 그는 나중에 판사가 되었고, 법원장이 되었고, 대법관 후보까지 올랐다. 혼란스럽다. 강도범 사기범 청년들의 ‘지금’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그때’의 범죄가 그들의 본질일까. 선입견은 바위에 새겨진 글자같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인성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그렇지만 17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름 외에는 같은 것이 없다. 그게 인간인지도 모른다.소년 시절 미숙했던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 까까머리 검정 교복을 입었던 중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서 속칭 ‘짱’이 되고 싶었다. 태권도 도장을 다니면서 열심히 싸움 기술을 익혔다. 불량 학생으로 찍혔다. 모두들 나를 싫어했다.어느 날 같은 불량 학생의 기습을 받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귀를 자르고 뺨을 갈랐다. 학교의 게시판에 무기정학이라는 종이가 붙고 그 밑에 나의 이름이 적혔다. 나는 이방인이 됐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경멸과 혐오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거기서 소년 시절의 일탈에 마침표를 찍었다.세월이 흘렀다. 나는 장년의 변호사가 됐다. 어느 날이었다. 바짝 마른 남자가 사무실로 밀고 들어왔다. 소년 시절 불량 서클에 있던 친구였다. 싸움을 잘하던 아이였다. 그가 외판원이 되어 물건을 팔러 온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난 네가 변호사가 됐다는 게 정말 이해할 수 없어.”의외라는 표정이었다.“일등을 하는 아이들만 서울법대에 가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데 어떻게 네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거야?”싸움 잘하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재벌 집 아이의 호위무사였다. 같은 교복을 입고 친구라고 했지만 사실은 부하였다. 그 연줄로 그는 재벌회사에 취직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잘렸다. 그가 덧붙였다.“사장인 그 친구와 내가 뭐가 달라? 그런데 세상이 왜 이런 거야? 나는 외판사원이 되고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나는 침묵했다. 우리 셋 모두 같은 검정 교복을 입었던 열일곱이었다. 하나는 재벌이 되었고, 하나는 외판원이 되었고, 하나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 차이를 만든 게 무엇일까. 그가 내미는 물건을 샀다.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로를 17세의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 친구는 여전히 열일곱 살의 나를 보았고, 나는 여전히 17세의 그를 보았다.조진웅을 향한 세상의 시선도 그럴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소년 시절의 폭력만 보고, 어떤 이들은 30년간 쌓아온 연기만 본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아니, 둘 다 진실이다. 인간은 변한다. 동시에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조진웅은 은퇴해야 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17세의 내가 56년을 살아 여기 있듯이, 그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 그것만은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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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400년 덴마크 우편 중단이 던지는 질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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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9 Jan 2026 14:37:15]]></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덴마크 국영 우체국 ‘포스트노르드’가 2025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400년간 이어온 편지 배달 서비스를 전면 중단했다. 1624년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의 명령으로 시작된 우편 배달이 디지털화의 물결 앞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지난 25년간 편지 발송량이 90% 이상 감소했고, 2000년 14억 통이던 우편물이 2024년 1억 1000만 통으로 줄어들었다는 통계는 단순히 한 국가의 우편 서비스 종료를 넘어,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09/1767927907190213.jpg"/> 최윤석 마이크로소프트 Tech PM흥미로운 점은 덴마크인들이 이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덴마크 국민의 97%가 국가 디지털 신원확인 시스템 ‘미트아이디(MitID)’에 등록되어 있으며, 온라인뱅킹부터 전자문서 서명, 병원 예약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행정 소통이 디지털 포스트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실물 우편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음에도 이를 선택한 사람은 5%에 불과하다. 이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한 대안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71년 레이 톰린슨이 최초의 네트워크 이메일을 보낸 이후, 이메일은 50여 년에 걸쳐 인류의 주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인터넷의 대중화와 함께 핫메일, 야후 메일 같은 웹메일 서비스가 등장했고, 1997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국내 최초로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하며 웹메일 열풍을 일으켰으며, 2004년 구글의 지메일은 1GB라는 파격적인 저장공간을 제공하며 이메일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이메일은 우편보다 빠르고, 저렴하며, 보관과 검색이 용이하다는 압도적인 장점으로 이렇게 전통적인 편지를 대체해왔다.이메일 역시 이제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카카오톡, 왓츠앱, 슬랙 같은 메신저와 협업 도구들이 빠르게 이메일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이메일을 ‘느리고 형식적인’ 도구로 인식하며, 실시간 메시징을 선호한다. 기업 환경에서도 이메일 대신 슬랙이나 마이크로소프트 팀즈 같은 협업 플랫폼이 주요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자리잡고 있다.그렇다면 AI(인공지능) 시대에 메일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메일의 작성과 관리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AI가 이메일 초안을 작성하고, 수신함을 정리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분류하고 요약하는 것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더 나아가 AI 에이전트는 단순히 메일을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사용자를 대신해 일정을 조율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업무를 자동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AI 에이전트 간 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다. 미래에는 인간이 직접 이메일을 작성하는 대신, 개인의 AI 에이전트가 상대방의 AI 에이전트와 소통하며 업무를 처리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다. 회의 일정 조율, 계약서 검토, 정보 요청과 같은 정형화된 커뮤니케이션은 AI 에이전트들이 자동으로 처리하고, 인간은 최종 의사결정과 창의적인 소통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메일이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에서 ‘에이전트 대 에이전트’의 트랜잭션 레이어로 진화함을 의미한다.이러한 변화 속에서 메일의 본질적 의미도 재정의되고 있다. 전통적인 편지가 감성과 정성을 담는 매체였다면, 이메일은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AI 시대의 메일은 ‘의도의 전달’로 그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사용자는 AI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고, AI는 그것을 적절한 형식과 맥락으로 변환하여 전달한다. 메일은 더 이상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도와 목적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손편지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덴마크의 트렌드 연구가 마스 아를리엔 쇠보르는 “18~34세가 다른 연령대보다 2~3배 더 많은 편지를 보낸다”며 “디지털 과잉에 대해 균형을 찾고자 의식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AI가 대신 작성하는 시대에,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오히려 더 큰 진정성과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단순히 과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의미를 재정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덴마크의 우편 서비스 종료는 단순히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들도 우편 서비스 축소를 검토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우편사업 적자가 2000억 원대를 넘어서며 같은 고민에 직면해 있다. 이는 비단 우편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전환이 가져오는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를 상징한다.이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가이다. AI 에이전트가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소통을 처리해준다면, 우리는 더 의미 있고 깊이 있는 대화에 시간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편리함 속에서도, 때로는 손편지 한 장이 전하는 진심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400년 우편 역사의 종말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로와 진정으로 연결될 것인가.※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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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요칼럼] 정치인가, 전쟁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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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02 Jan 2026 11:51:30]]></pubDate>
            <category><![CDATA[일요칼럼]]></category>
            <author><![CDATA[hardout@ilyo.co.kr | 이동섭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국민이라는 말,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인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국민의 뜻’으로 포장하여 내지를 때마다 저렇게 무책임하고 공허한 말이 있나, 싶었으니. 그런데 살아볼수록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민은 “국민”이라는 말을 쓰는 정치인의 태도를 읽고 있다. 투표의 힘을 아는 국민은 안다. 정말로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정치인인지, 아니면 그저 ‘국민’을 이용하는 정치인인지.민심을 존중해서 인지도도 없이 민심을 얻은 정치인이 있다. 지금 각종 여론조사에서 만만찮은 힘을 보여주고 있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이다. 대통령이 그를 띄웠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누가 띄운다고 뜨는 것이 아님을. 그는 더불어민주당이 어려웠던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성동구청장이 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02/1767317089212434.jpg"/> 이주향 수원대 교수그가 구청장을 하는 동안 성동구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 변화를 보면 그가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 같다. 서민은 물론 중산층까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그는 구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똑똑히 알고 실행할 줄 아는 ‘일잘러’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희망이다. 희망인 사람은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이다.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면 이념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달라도 괜찮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다 다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을 말하고 있는 것도 인간들의 이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설득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개념 중에 재미있는 것은 ‘정치망각’이다.그 개념은 하이데거의 ‘존재망각’을 패러디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아렌트에게 중요했던 것은 ‘존재망각’이 아니라 ‘정치망각’이었다. 그녀는 아테네 민주정치가 이루어졌던 아고라광장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공동체가 직면한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곳.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이해관계가 달라도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서민이면 어떤가, 중산층이면 어떤가, 세대가 다르면 어떤가. 정치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죽여야 하는 전쟁이 아니라 어떻게든 공동의 선을 찾아 함께 살아야 하는 살림인데. 한나 아렌트는 그 공공의 영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와 설득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이혜훈 전 의원을 지명했다. 나라의 곳간열쇠를 국민의힘에서 잔뼈가 굵은 보수인사에게 맡긴 것이다. 기존의 정치문법을 깨는 파격 인사다. 이미 송미령 농림부 장관에 놀랐고, 권오을 장관에 놀랐지만, 이번에 더 놀란 것은 그녀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유명한 보수인사라는 점이다.한 번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정치인에게 함께 해보자고 손을 내미는 일은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물론 이 대통령이 정말 정책 스펙트럼을 넓일 수 있는 묘안만을 고민해서 이 후보자를 지명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표명한 대로 운동장을 넓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를 한 것이었다. 누구에게? 그것은 야당에게가 아니라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었다.그런데 야당은? 국민의힘은 바로 요란스럽게 반응했다. 3시간 만에 이 후보자를 제명처리 한 것이다. 거기서 국민은 무엇을 봤을까? 국정에 참여한 것이 해당행위라면 그들에게 국정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적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공격적인 언어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만큼 경직되어 있는 것이고,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왜 그렇게 중도층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지, 한 언론이 ‘빈집털이’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 예견할 정도로 사람들이 왜 자꾸 빠져나가게 되는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반이재명 정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있어 보이지 않는 그들의 곳간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배신’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배신’하지 못하게 스크럼만 짜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발굴해야 한다.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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