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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일요캠페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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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일요캠페인</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Wed, 25 Feb 2026 11:13:46</lastBuildDate>
        <pubDate>Wed, 25 Feb 2026</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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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일요캠페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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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14] 국가무형유산 ‘수영야류’]]></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879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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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5 Feb 2026 11:13:46]]></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사자와 호랑이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최후의 승자를 두고 여러 가설이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전통 탈놀이에서 최후의 승자는 다름 아닌 ‘사자’인 듯하다. 국가무형유산인 ‘수영야류’의 탈놀음에서 사자가 호랑이를 잡아먹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면, 수영야류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5/1771985345164934.jpg"/> 수영야류는 정월대보름에 수영 지방 사람들이 펼치던 토속적인 탈놀음이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수영야류(水營野遊)는 이름 그대로 경상남도 수영 지방(현재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야류(들놀음), 즉 토속적인 탈놀음을 말한다. 야류는 경상남도 내륙지방에서 행해지던 오광대(경남에 전승되는 가면극)가 바닷길을 따라 수영·동래·부산진 등에 전해지면서 형성된 민속놀이다. 들판(野)과 같은 넓은 장소에서 놀기(遊) 때문에 야류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오광대가 전문연예인에 의해 행해진 도시가면극이라면, 야류는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 사람들에 의해 연행되고 토착화된 탈놀이라고 할 수 있다.구전에 따르면, 약 200년 전 좌수영의 관리가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장터)의 대광대패들을 불러다가 놀게 하였는데, 부하들이 이를 보고 배운 데서 수영야류가 시작된 것이라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영 사람들이 밤마리에서 오광대를 보고 배워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수영야류는 정초부터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다. 먼저 탈 제작자들은 부정을 타지 않은 신성한 장소에서 들놀음에 쓰일 탈과 여러 도구를 만든다. 특히 탈 제작이 끝나면, 마당에 탈들을 놓고 간단한 제물을 차려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탈제’라고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5/1771985367436677.jpg"/> 수영야류에서 탈놀음 전에 놀이꾼들이 길놀이를 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놀이 바로 전날인 음력 정월 14일 밤에는 ‘시박’을 한다. 시박은 탈놀음에 출연할 놀이꾼들이 각자 연습한 연기와 춤을 원로들 앞에서 선보이고 심사를 받아서 배역을 결정하는 것으로, 오늘날 오디션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정월 대보름이 되면 놀이꾼들은 풍물패를 대동하고 지역의 산신령을 모신 동제당과 대표적인 우물(먼물샘), 그리고 최영장군 묘에 들러 고사를 지낸다. 이어 마을사람들은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길놀이를 시작한다. 선두에 소등대(새끼줄에 등을 단 소년들의 대열)가 자리를 잡고 다음에 풍물패, 길군악대, 팔선녀, 사자 혹은 거마를 탄 수양반(우두머리 양반 역의 놀이꾼), 탈놀음패 등등의 순서로 화려하고 장대한 행렬이 풍물을 치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이마당으로 향한다.길놀이 행렬이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풍물패의 장단과 가락에 맞춰 덧배기춤(토속 춤의 하나)을 추며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마을사람들은 물론 구경 온 타지방 사람들도 춤판에 나와 집단으로 허튼춤(자유롭게 추는 즉흥춤)을 추며 어울린다. 한마당 춤놀이 판이 펼쳐진 후 개복청(탈놀음 놀이꾼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소)에서 쉬고 있던 수양반이 놀이마당에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탈놀음이 시작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5/1771985413759031.jpg"/> 수영야류의 첫 번째 과장인 양반 과장. 사진=국가유산청탈놀음은 양반 과장(양반춤), 영노 과장(영노춤), 할미·영감 과장(할미와 영감 춤), 사자무 과장(사자춤) 등 4과장으로 진행된다. 과장이란 판소리의 마당에 해당하는, 탈놀음 용어다. 놀이꾼들은 장단에 맞춰 신명나게 춤을 추고 걸쭉한 재담을 주고받으며 극적인 이야기를 차례로 펼쳐낸다.양반 과장에선 양반과 하인인 말뚝이가 대립하여 극이 전개된다. 말뚝이는 양반을 풍자하며 심한 모욕을 주고, 수양반만 남겨둔 채 양반들이 퇴장하면서 두 번째 과장인 영노 과장으로 이어진다. 영노는 천상에서 내려와 양반 아흔아홉을 잡아먹고 하나만 더 잡아먹으면 득천한다(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상의 동물. 영노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대상은 ‘참양반’이다. 수양반은 사대부집안 운운하며 참양반을 자처하지만 결국 영노는 그를 ‘가짜 양반’으로 여기고 잡아먹고 만다. 이는 사람은 혈통과 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됨과 행실이 중요하다는 민중의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세 번째 과장인 할미·영감 과장은 영감과 본처인 할미, 그리고 첩인 제대각시 사이의 갈등과 파국을 그려낸다. 마지막 과장인 사자무 과장은 무언극으로 진행되는데, 사자와 범이 춤추며 싸우다가 범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영 지방이 호환(호랑이로 인한 화)이 있던 곳이라, 사자 가면을 쓰고 호랑이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사자춤을 만들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를 잡귀·잡신을 쫓는 존재로 보고 벽사진경(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함)의 의식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225/1771985465618701.jpg"/> 수영야류의 네 번째 과장인 사자무에서 사자와 범이 다투는 모습. 벽사진경의 의식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4과장의 탈놀음이 끝나면, 구경꾼들이 놀이꾼들과 어울려 한바탕 뒤풀이를 즐긴다. 이어 놀이꾼들은 탈을 한 곳에 모아 태우며 고사를 올리는 ‘탈소각제’를 진행한다. 들놀음을 무사히 마친 것을 감사하고 마을의 태평과 풍요, 각 가정의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이다.일제강점기 때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연희가 중단되었던 수영야류는 광복 후 과거 수양반 역을 맡았던 최한복 선생, 말뚝이 역을 맡았던 조두영 선생에 의해 옛 모습의 탈을 복원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연희자들의 노력과 참여를 통해 놀이가 재연되어 1971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현재 (사)수영야류보존회를 중심으로 김성율 수영야류 예능보유자(연희·가면제작·악사)와 태한영, 문명헌, 강모세, 김영석, 안귀연 전승교육사 등이 전승과 공연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자료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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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13] 국가무형유산 ‘위도띠뱃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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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21 Jan 2026 15:39:41]]></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蝟島)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이상세계로 그려진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 섬이다. 바로 이 섬의 대리 마을에서 매년 음력 초사흘날에 열리는 특별한 전통 의례가 있다.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위도띠뱃놀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373711696.jpg"/> 띠배를 끌고 모선이 먼 바다로 나가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위도띠뱃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놀이다.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띠배란 바닷가에서 나는 띠풀이나 짚 등으로 엮은 작은 배를 말한다.위도띠뱃놀이의 유래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대리마을 앞 칠산바다는 임금에게 진상되는 금빛 참조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했다. 연초가 되면 위도 주민들이 칠산바다의 용왕에게 만선과 평안을 기원하며 어선 모양의 작은 띠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는 풍어제를 지냈는데, 그 전통과 유산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409760942.jpg"/> 띠배에 실리게 되는 7개의 허수아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위도띠뱃놀이는 원당제, 띠배 제작, 주산 돌기, 용왕굿, 띠배 띄우기, 대동마당(뒤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초사흘날 아침이 되면 뱃기(어선의 깃발)를 든 선주와 풍물을 치는 주민들, 무녀와 축관 등이 영기를 앞세우고 원당에 오른다. 이곳에 제물을 차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는 유교식 제례를 거친 후 당굿에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원당제이다.당굿은 성주굿을 시작으로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깃굿, 문지기굿으로 이어진다. 성주굿은 마을사람들의 장수와 복, 풍어를 빌며, 산신굿은 산신에게 올리는 것으로 역시 마을의 평안과 복을 축원한다. 지신굿은 터주신을 위하고 부를 축원하는 지신풀이이고, 서낭굿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에게 마을사람들에 대한 축복, 어린아이들의 무병장수와 복, 그리고 풍어를 기원한다. 그런가 하면 어선을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1년 동안 배에 모실 서낭을 내림받는 깃굿은 어업민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진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687430856.jpg"/> 원당제가 치러지는 원당 안의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당굿을 마친 일행은 제단에 차려놓은 제물을 챙겨 마을의 동쪽 바닷가로 가서 한지에 싼 용왕밥(당밥)을 바다에 던지고 절을 한다. 그 뒤에 마을을 도는 주산 돌기에 들어간다. 주산 돌기란 제관과 풍물패, 뱃기를 든 일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을 말한다.원당제와 주산 돌기가 진행되는 동안 대리 마을 선착장에서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바다에 띄워 보낼 띠배를 제작한다. 띠와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로 배 형태를 만들고, 돛대와 닻을 달아 띠배를 완성한다. 그 안에 소원을 적은 띠지를 비롯해 각종 제물과 함께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7개를 싣는다. 선원 역할을 하는 이 허수아비는 ‘허제비’ 또는 ‘제웅’이라고도 하는데, 액막이를 하고 고혼을 달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446227256.jpg"/> 띠배 제작을 마치고 나면 선착장에서 용왕굿을 벌인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주산 돌기와 띠배 제작을 마치고 나면 선착장에서 무녀를 중심으로 용왕굿을 벌인다. 이때에는 마을의 여자들은 물론 온 주민이 모여 용왕굿을 지켜본다. 용왕굿이 끝나면 여자들은 용왕상에 올려놓았던 제물을 조금씩 떼어 큰 함지에 담아 섞은 뒤 바다에 고수레를 한다. 이때 풍물패의 장단에 맞춰 가래질소리와 배치기(고기잡이배가 떠날 때 부르는 노래), 술비소리(그물을 당기며 부르는 어업노동요) 등을 부르며 한바탕 놀이판을 펼친다.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낸다. 띠배를 모선(母船)에 연결해 바다 가운데로 끌고 나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돌고, 그 뒤에 모선에 연결된 끈을 풀어 놓으면 띠배는 망망대해로 떠나간다. 모선에는 풍물패와 소리꾼 등이 승선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띠배가 무사히 용왕께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476617616.jpg"/> 선착장에 온 주민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모선이 띠배를 이끌고 먼 바다로 향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띠배를 바다로 띄워 보내기 위해 함께 나갔던 모선이 마을로 돌아오면 해변에서는 뒤풀이로 큰 놀이판이 벌어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모여 어깨춤이 절로 나는 풍악 속에서 한 해 동안의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며 밤늦게까지 놀이판을 벌인다.  위도띠뱃놀이는 신명나는 뱃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향토축제로 고기를 많이 잡고 마을이 안녕하기를 기원하는 어민들의 토속적인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굿과 기원의 공간이 산(수호신을 모신 원당)과 마을(주산 돌기), 바다(용왕굿)로 이어지는 것이 특색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6/0121/1768977914524595.jpg"/> 위도띠뱃놀이는 액운을 띠배에 실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며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위도띠뱃놀이는 197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리마을 당제의 한 과정인 ‘띠배 보내기’란 이름으로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사)국가무형유산 위도띠뱃놀이보존회를 중심으로 김상원(장고), 이종순(악사, 창) 보유자, 장춘섭(북, 창) 장영수(상쇠) 명예보유자 등이 전승 활동에 힘쓰고 있다.자료 협조= 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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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12] 국가무형유산 ‘떡 만들기’]]></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500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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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7 Dec 2025 10:49:33]]></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가 펴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 저명한 사전에 모찌(Mochi)는 있어도 떡(Tteok)은 없다. 알다시피 모찌는 ‘찹쌀떡’을 뜻하는 일본어다. 2024년 12월 ‘떡볶이’(Tteokbokki)가 옥스퍼드 사전에 신규 단어로 등재되긴 했지만, 설명문에는 떡을 ‘쌀 케이크’(Rice cake)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간 떡은 해외에서 ‘Rice cake’ 또는 ‘Korean mochi’로 소개되어 왔다. ‘코리안 모찌’라는 표현은 논외로 하더라도, 과연 쌀 케이크라는 단어로 우린 전통 떡이 지닌 맛과 멋, 그리고 정서를 담아낼 수 있을까. 국가무형유산인 ‘떡 만들기’를 통해 우리 고유의 떡 문화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217/1765935931380580.jpg"/> 심온 종가에서 만든 편(떡을 점잖게 이르는 말)과 편청(떡을 찍어 먹는 꿀).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떡은 곡식 가루를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물에 삶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백일·돌·혼례·상장례·제례와 같은 일생의례를 비롯해 설날·정월대보름·단오·추석 등 주요 절기 및 명절에 다양한 떡을 만들고 나누어 먹었다. 또한 떡은 한 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신앙 의례, 상달고사(음력 10월에 집안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와 같은 가정신앙 의례 등에 쓰이는 대표적인 제물(祭物)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시농경이 시작되면서 함께 떡 문화가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시루가 발견되며, 특히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시루로 음식을 만드는 주방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시루에서 익히는 음식인 떡이나 찐밥 등이 당시 보편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217/1765935950767418.jpg"/> 성은 남이흥 종가에서 빚어 찐 송편.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려시대에는 권농 정책에 힘입어 양곡이 증산되면서 쌀밥이 널리 보급되고 떡과 과자류가 발달, 성행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상화병(밀가루를 반죽하여 꿀팥으로 만든 소를 넣고 빚어 찐 떡)이 수입되었고, 고려의 떡이 수출되기도 했다. 원나라 문헌인 ‘거가필용’에는 밤 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다음 꿀물을 축여 쪄 먹는 ‘고려율고’가 소개돼 있다.조선시대에 농업의 발달로 농산물이 증진되면서 조리가공법이 더욱 세분화되고 다양해졌다. 또한 그 기법도 과학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떡을 조리, 가공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떡살(떡을 눌러 갖가지 무늬를 찍어 내는 판) 등 떡을 만들 때 쓰이는 도구들도 더욱 정교해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217/1765935967972185.jpg"/> 떡을 만들 때 쓰이는 다양한 떡살.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제공‘산가요록’,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음식디미방’ 등에는 갖가지 떡의 이름과 만드는 방법이 실려 있다. 이들 문헌을 보면, 떡은 만드는 방식에 따라 증병(시루떡), 도병(절구 따위에 쳐서 만든 떡), 전병, 단자류(찹쌀가루를 쪄서 치댄 다음 고물을 묻힌 떡), 빈자떡(빈대떡), 상화 등으로 분류된다.각종 고문헌에 기록된 우리 떡은 200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생활의 지혜와 창의성이 엿보이는 떡들도 적지 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집대성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 중 정조지(음식요리 백과사전) 제2권에는 화병(불떡) 만드는 방법이 실려 있기도 하다. 메밀가루를 물에 개어 된죽처럼 만들어 장작불에 부어 굽는 방식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217/1765935984230557.jpg"/> 명절 때 떡메로 떡을 찧는 모습.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제공떡은 각종 의례에서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일례로, 백일상에 올리는 백설기는 예로부터 깨끗하고 신성한 음식이라 여겨 아이가 밝고 순진무구하게 자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팥수수경단은 ‘귀신이 붉은색을 꺼린다’는 속설에 따라 아이의 생(生)에 있을 액(厄)을 미리 막기 위하여 올렸다. 백일잔치 이후에는 ‘떡을 백 집에 나누어 먹어야 아이가 무병장수하고 복을 받는다’는 속설에 따라 되도록 많은 이웃과 떡을 나누었다.우리나라의 떡은 지역별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산물을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감자와 옥수수의 산출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감자시루떡’·‘찰옥수수시루떡’ 등이 전승되고 있고, 예로부터 쌀이 귀하고 팥·메밀·조 등 잡곡이 많이 생산돼 온 제주도에서는 ‘오메기떡’·‘빙떡’·‘차좁쌀떡’ 등이 전승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217/1765935999309341.jpg"/>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 청태콩을 소로 넣어 송편을 빚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19세기 말 서양식 식문화의 도입으로 인해 우리 고유의 식생활에 변화가 생겼고, 떡 만들기 문화도 일부 축소됐다. 또한 떡 만들기가 분업화되면서 떡의 생산과 소비 주체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다양한 떡이 지역별로 전승되고 있으며, 떡을 의례, 세시음식으로 활용하고 이웃과 나누는 문화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떡은 한국인이 일생동안 거치는 각종 의례와 행사 때마다 만들어서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나눔과 배려’, ‘정을 주고받는 문화’의 상징이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매개하는 특별한 음식이다. 또한 각종 의례에 사용되는 떡은 저마다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무형적 자산이다.‘떡 만들기’는 2021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는데,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따로 인정되지 않았다. 우리 떡에 관심을 갖고, 떡에 깃든 의미를 떠올려보고 또 함께 나눈다면 우리 모두가 전승자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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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11] 국가무형유산 ‘대금산조’]]></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347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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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9 Nov 2025 17:04:36]]></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일제강점기 때 라디오는 서민들이 접하기 어려운 매체였다. 수신기(라디오) 가격이 비싼 데다 적잖은 수신료까지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수신기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청취자도 크게 증가했는데, 이 무렵 민요, 창 등과 함께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애환을 달래주던 민속 음악이 있다. 다름 아닌 전통 기악곡인 대금산조(大笒散調)다. 당시 ‘조선일보’의 일별 라디오 편성정보에는 대금산조가 자주 등장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119/1763539128698791.jpg"/> 산조 연주에 쓰이는 대금은 지공 간의 간격이 좁아서 빠르게 연주하며 다양한 표현을 해낼 수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대금산조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말한다. 대금은 가로로 부는 우리 고유의 목관악기이고, ‘산조’란 장구 반주에 맞추어 연주하는 독주 형태의 기악곡이다. 산조는 우리 국악 중 궁중의 각종 제례에서 쓰이던 ‘정악’과 달리, 남도 지방의 무속음악인 시나위와 판소리, 그리고 봉장취(새소리를 묘사하는 기악 선율) 계열의 음악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민속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자연의 이치라든지 인간의 삶 속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다양한 연주 기법으로 표현해 낸다.‘천년의 악기’라고도 불리는 대금은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악기다. 고구려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삼족오 옆에 젓대(대금의 우리말)를 불고 있는 선인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이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대금이 널리 연주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궁중 의례에 향악(우리 고유 음악)이 쓰이면서 대금이 길례(경사스러운 예식)와 가례(왕의 성혼이나 세자 책봉 등의 예식) 때 악대 연주에 사용됐다. 김홍도의 ‘무동’, 신윤복의 ‘주유청강’ 등의 풍속화에서 대금 연주 모습을 볼 수 있어 민간에서도 대금이 애용됐음을 알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119/1763539308633475.jpg"/> 대금산조는 장구 반주에 맞추어 대금으로 산조를 연주하는 독주 형태의 기악곡이다. 사진은 고 김동표 선생의 연주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대금의 재료로는 대나무가 쓰이는데, 그중에서도 살이 두텁고 단단한 쌍골죽을 최고로 친다. 하나의 대가 천년의 소리를 간직한 악기로 태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먼저 적당한 대나무를 채취해 그늘에서 말린 후 화로 위에서 굽고 구부러진 대를 곧게 펴는 과정을 거친다. 대나무의 진이 빠지고 곧은 모양이 갖춰지면 내경을 파낸다. 내경의 지름은 대금 소리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쓰임에 맞게 크기를 조절한다. 그 다음에는 입김을 불어넣는 입구인 취구를 만든다. 구멍의 각도를 조금만 다르게 해도 음역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에 숙련된 기술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이어서 취구 아래쪽에 음을 연주할 여섯 개의 지공을 판다. 취구와 지공 사이에는 울림의 정도를 조절하는 청공을 파고 맨 끝에 미세한 음정을 조절하는 칠성공을 만든다. 그 뒤에는 온도 변화에 민감한 대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튼튼한 줄로 대금을 여러 번 동여맨다.대금의 형태가 갖춰진 후에는 제대로 제작되었는지 점검하는 조율 과정을 거친다. 끝으로 청공에 ‘청’을 붙여 대금을 완성한다. 청은 음력 단오를 전후해 채취한 갈대의 속껍질로, 이것을 통해 음이 울려 나오면서 대금 특유의 신비한 음색이 만들어진다. 자유로운 음처리와 미분음까지 표현할 수 있는 대금의 표현력은 웅장하면서도 청아하고 흥겨우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전달한다.  산조 연주에 사용하는 대금(산조대금)은 정악 연주에 사용되는 대금(정악대금)과 차이가 있다. 산조대금은 다양한 민속 가락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음의 변화가 없어 합주에 주로 사용되는 정악대금과는 크기, 잡는 방법, 음높이가 다르다. 산조대금은 정악대금보다 길이가 짧고, 지름도 작기 때문에 음높이가 높고 연주하기에 편하다. 또한 지공 간의 간격이 좁아서 빠르게 연주하며 다양한 표현을 해낼 수 있다. 반면 산조대금의 취구는 정악대금의 취구보다 큰데, 이는 취구를 이용해 음정의 차이 등을 표현하는 것을 산조 음악에서 중시하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119/1763539197204890.jpg"/> 이생강 보유자가 창덕궁에서 대금산조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대금산조는 보통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가 이루어진다.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가장 느린 장단인 ‘진양조’다. 그 다음에는 ‘중모리’가 이어지는데, 열두박 한 장단으로 진양조보다 조금 빠른 편이다. 이어 악장은 ‘중중모리’로 넘어간다. 처음에는 중모리의 장단과 엇비슷하나 가락이 지나갈수록 템포가 빨라지고 장단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새소리를 흉내 내며 다채로운 가락을 선보이는데 이는 중중모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자진모리’는 대금산조 장단 가운데 가장 빠른 악장이다. 연주가 최고조에 달해 그 흥겨움은 배가되고 변화무쌍한 대금산조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다.  대금산조는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대금 연주가였던 박종기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20~1930년대에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는데, 당시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온 대금산조의 대부분은 그가 연주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한주환 선생은 오늘날 연주되는 대금산조의 틀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다.1971년 대금산조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대금 시나위의 최고 연주가로 자신만의 대금산조를 완성한 강백천 선생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1993년에는 이른바 ‘강백천류’의 대금산조를 전승한 김동표 선생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맥을 이었다. 현재는 한주환 선생에게서 사사한 이생강 선생이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10] 국가무형유산 ‘승전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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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6 Oct 2025 16:36:14]]></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식후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해운대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바닷가에서 매가 꿩을 사냥하는 것(沈獵雉)을 지켜보는데 무척 조용했다. (사냥에 성공하자) 군관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016/1760599930033108.jpg"/> 통영 세병관 앞에서 펼쳐지는 승전무.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충무공의 ‘난중일기’ 임진년(1592) 음력 2월 12일 기록을 풀이한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망중한의 여가에 진중이나 병선 위에서 장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춤을 추게 하였고, 승전 후에도 이를 축하하여 장졸들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특히 임진란 이후 통영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의 세병관에서는 각종 하례와 군점(삼도의 수군을 집결시켜 사열, 연습 등을 하는 것) 등의 행사에서 장군의 승전을 기리며 북춤과 칼춤을 추었으며, 충무공 탄신제와 기신제 때에도 사당에서 춤을 바쳤다고 한다. 통영 지방에서 이처럼 북춤과 칼춤이 충무공과 관련된 행사에서 연이어 연희되면서 두 춤을 합설하여 ‘승전무’(勝戰舞)라 부르게 되었다.조선시대에 승전무를 연행한 이들은 통제영에 속한 교방청의 기녀와 취고수청의 악사들이었다. 이들은 구한말 통제영문의 해산으로 통영 교방청이 폐지될 때까지 승전무를 계승해 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016/1760598631737479.jpg"/> 승전무 북춤. 원무들이 북틀을 어르는 동안 협무들이 손춤을 추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승전무 중 북춤은 큰 북을 중심으로 원무(주연이 되어 춤추는 사람) 4인과 협무(주연자 옆에서 함께 춤추는 사람) 12인이 함께 어우러져 추는 춤이다. 우리 전통 목관악기인 젓대를 비롯한 피리, 장구 등 삼현육각의 연주와 함께 원무 4인이 중앙의 북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가면서 춤이 시작된다. 원무는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청·백·홍·흑의 몽두리를 입고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팔에는 한삼을 끼고 등장한다.원무가 북을 뒤로하고 절을 한 뒤 ‘손춤’을 시작한다. 손춤이란 팔에 한삼을 끼고 앉아서 추는 춤으로 손목과 어깨를 이용해서 추는 춤동작이 이어진다. 원무 4인이 북을 향해 걸어가면 양쪽에 서 있던 협무 12인이 북 쪽으로 다가온다. 원무가 북을 어르는 춤동작을 펼치는 동안 협무들은 가벼운 입춤(서서 추는 춤)으로 원무들을 에워싼다. 원무가 한삼을 낀 손으로 북을 어르기 시작하면 협무는 두 명씩 짝을 이뤄 껴안듯이 춤을 추는데 이를 ‘쌍오리’라 한다.원무는 한삼 속의 북채로 태극 문양의 북을 품은 북틀을 스치듯이 어른다. 이때 협무는 제자리에 앉아 손춤을 춘다. 입춤, 앉은춤 등에 이르는 동안 악사들은 염불도드리 장단에 맞춰 연주를 한다. 이윽고 원무와 협무는 느리게  ‘지화자’를 외치며 창사(북노래)를 시작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016/1760598591204486.jpg"/> 무용수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연풍대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달노래’ ‘어기야 어기 어기여차’ ‘우리 우리 충무장군 덕택이요’ 등으로 이어지는 북노래가 끝나면, 이번에는 아주 빠른 가락으로 ‘지화 지화 지화자 지화허라 지화자’라는 소리가 24회 반복된다. 원무는 이때 몸을 회전하며 북을 친다. 북을 동동 울리는 힘찬 춤사위는 마치 네 마리의 용이 태극의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과도 같다. 북춤은 원무와 협무가 제자리에 앉아 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북춤은 단아하고 고결한 무태(춤추는 맵시)와 절제된 아름다움, 역동적인 춤사위가 특색이다.통영의 칼춤은 충무공 관련 행사나 제사 때에 북춤과 짝을 이루어 함께 연행된 춤이다. 모두 8명의 무용수가 조선시대 군복을 변형한 차림으로 춤을 춘다. 무용수는 검정색의 쾌자를 몸에 걸치고 그 위에 홍띠를 매고, 머리에는 전립을 쓰고 손목에는 색동한삼을 낀 채 등장한다.무용수는 북춤에서와 흡사하게, 한 쌍의 칼을 손에 쥐기 전에 앉아서 손춤을 춘다. 이때 칼을 앞에 두고 손으로 칼을 어르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이를 ‘칼어름사위’라 한다. 통영 칼춤에 쓰이는 칼은 칼목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부러져 있다. 이는 연희성을 높이기 위해 칼과 손잡이의 이음새 부분인 운두를 세 개의 놋쇠로 이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1016/1760599846481799.jpg"/> 삼현육각의 연주에 맞춰 펼쳐지는 칼춤의 춤사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이윽고 4인의 무용수가 칼을 쥔 채 맞은편의 무용수 4인을 향해 진격한다. 이 춤사위는 병사들이 진격하고 후퇴하는 전쟁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진격태’라고 한다. 진격태가 끝나면 8명의 무용수는 힘 있게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는데 이를 ‘연풍대’라 한다. 이후 칼춤은 잦은사위, 머릿사위, 자반뒤집기, 연풍대 등의 춤사위로 이어진다. 마침내 일자로 늘어선 무용수가 제자리에서 절을 하는 것으로 칼춤은 막을 내린다. 통영 칼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기품을 보여주는 예술적인 춤으로 평가된다.  승전무는 일제강점기 때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승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그러던 중 1961년 시작된 한산대첩제전을 계기로 승전무의 발굴,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초대 승전무(북춤) 예능보유자였던 정순남 선생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노력으로 1968년 통영 북춤이 ‘승전무’란 이름으로 국가무형유산에 먼저 지정되었고, 이후 1987년에 이르러 통영 칼춤이 추가로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오늘날의 완전한 승전무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승전무는 한정자 보유자(북춤)와 엄옥자 보유자(칼춤)를 중심으로 전승 및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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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9] 국가무형유산 ‘옥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50018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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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3 Sep 2025 10:45: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글로벌 인기작으로 등극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적 요소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케이팝과 남산타워, 무당과 저승사자, 민화 속 까치와 호랑이 등 영화 곳곳에서 한국 정서, 한국 문화를 만날 수 있다. 3인조 케이팝 걸그룹 ‘헌트릭스’의 멤버들은 저마다 반바지 바지춤에 노리개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중 조이가 달고 있는 금색 노리개에는 거북 모양의 옥 장식이 달려 있어 특히 눈길을 끈다. 한국적 요소를 담아 낸 애니메이션의 디테일에 대한 경탄과 함께 한국 옥공예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923/1758591524833635.jpg"/> 장주원 옥장이 재현해 낸 조선시대 옥향로.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만약 K-공예의 하나로 실제 ‘옥 거북이’를 만든다면, 아마도 이들의 손을 꼭 거쳐야 하지 않을까.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옥공예 전문가인 ‘옥장’(玉匠)이다. 옥장이란 옥 종류의 돌을 이용해 고유의 전통 기술로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장인을 일컫는다.우리나라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옥석 공예품과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곱은옥(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꿰어서 장식으로 쓰던 구슬), 구슬옥(끈에 꿸 수 있게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작은 공 모양의 둥근 옥) 등은 옥이 상류층의 중요한 장신구였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로 진평왕의 옥허리띠가 꼽히는 데서도 신분 사회에서 옥이 지닌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923/1758591549543540.jpg"/> 옥석 자르기.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려시대에 옥공예품은 조각된 장식품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재료의 확보가 어렵고 귀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옥공예를 다루는 공인의 수를 국가에서 제한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상의원에 10명의 옥장이 배속되어 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옥장이 옥석을 채취하러 지방으로 갈 때 말을 내준 일이 여러 차례 기록돼 있다.은은하고 부드러운 옥의 성질은 바로 끈기, 온유, 은은함, 인내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닿아 옥 제품이 오랜 세월 애용돼 온 것으로 평가된다. 옥은 예기(제사에 쓰는 그릇)를 비롯해 신분을 구분하는 드리개(매달아서 길게 늘이는 장식품 등의 물건) 등 장신구와 아악기인 옥경(옥으로 만든 경쇠), 약재 및 의료용구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옥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품성으로 비견되었고, 때로는 영험이 깃든 보석으로도 여겨져 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923/1758591629333031.jpg"/> 옥석에 도안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옥공예는 대략 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광택 등의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며, 과정에 따라 쇠톱, 활빙개(활비비), 갈이틀, 물레 등 여러 가지 연장이 사용된다. 옥공예품 제작 과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다른 공예품 제작과 달리 옥을 일일이 갈고 연마하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옥공예를 ‘자기와의 싸움’이라 평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먼저 옥돌에서 옥 원석을 채석할 때에는, 옥돌에 정으로 구멍을 낸 뒤 소나무처럼 팽창과 수축이 심한 목재를 이 구멍에 넣고 물을 붓고 말린다. 이러한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면 커다란 옥돌 전체에 균열이 생기는데, 이를 다시 정으로 쳐내어 원석을 채취한다.  채석된 원석은 열처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원석을 햇볕에 내놓으면 자외선의 영향으로 균열이 가거나 조직 내에 변질이 생겨 강도가 약해지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다. 먼저 채석된 원석에 황토를 바른 다음에 가마니로 덧씌워 굴속에 저장한다. 그 뒤 차츰 밝고 온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처럼 천천히 원석을 노출시켜 햇볕에 적응시키는 방식은 천연 석물을 가공할 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923/1758591647003185.jpg"/> 국화, 모란, 불로초 문양 등을 밑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그 다음으로 옥 원석의 크기, 형태 등에 따라 좋은 원석을 선별해 종이에 도면을 디자인한다. 원석이 천연광물이므로 자연 균열이 수없이 많고, 절단 작업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균열이 발견되기에 제작자의 뜻대로 디자인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오랜 수련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안목을 키운 뒤에야 비로소 원석에 숨어 있는 특징을 잡아내어 디자인할 수 있다고 한다.디자인을 마치면 톱, 연마제(탄화규소), 물 등을 사용해 도면의 크기대로 원석을 절단한다. 옥은 경도가 높고 다루기가 조심스럽기 때문에 자르는 과정 자체도 지난하다. 예컨대 옥향로를 만들 경우, 원석의 각 면을 자르는 데 7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923/1758591672856184.jpg"/> 장주원 옥장이 작업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절단 과정 뒤에는 절단된 면에 가는 연필로 도안한 다음 끝이 뾰족한 먹송곳으로 도안된 선을 따라 흠을 내는 과정을 거친다. 홈이 파인 도안 선을 따라 다시 한 번 먹송곳으로 그리면, 먹이 스며들고 그 위를 숫돌로 문지르면 가는 홈의 먹선만 남게 된다.그 후에는 먹선을 따라 외형을 만들어가는 성형 과정, 활비비 등의 도구로 구멍을 뚫거나 갈고 다듬어 도안대로 모양을 만드는 세부조각 과정을 거친다. 이때도 갈고 다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옥 표면을 숫돌과 사포도 갈고 문지른 뒤 광택 과정을 마치면 비로소 하나의 옥공예품이 탄생하게 된다.옥장은 전통 공예기술을 지닌 장인으로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정교한 조각 기능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이 요구된다. 옥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초대 기능보유자인 장주원 선생과 지난해 옥장으로 인정받은 김영희 선생이 현재 전승 및 작품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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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8] 국가무형유산 ‘선소리산타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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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9 Aug 2025 16:29:08]]></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우리 민족이 부른 합창 노래 중 가장 밝고 흥겨운 소리로 꼽히는 노래가 있다. 다름 아닌 선소리산타령이다.선소리산타령이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늘어서서 가벼운 몸짓과 함께 소고를 치며 산천경개를 함께 노래하는 민속가요를 가리킨다. 노래패의 우두머리인 모갑이가 장구를 메고 앞소리를 부르면, 나머지 소리꾼들은 소고를 치면서 여러 가지 발림(손짓, 발짓을 섞은 동작)을 곁들여 뒷소리를 받는다. 산타령의 노래는 느리게 시작하여 뒤로 갈수록 점차 빨라지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819/1755588176518613.jpg"/> 선소리산타령 중 앞산타령. 모갑이가 장구를 메고 앞소리를 부르면 나머지 소리꾼들이 소고를 치면서 뒷소리를 받는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이 민속가요의 명칭은 소리꾼이 서서 노래한다고 하여 ‘선소리’ 또는 입창(立唱), 가사의 내용이 산천의 경치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산타령’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다가 196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선소리산타령’으로 공식화되었다.오늘날의 선소리산타령은 남자들이 부르는 노래로 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여자들이 부르는 사당패 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초에 스님들과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사당패는 판염불 합창으로 시주를 받아 절에 바치곤 했는데, 이러한 판염불 합창에서 산타령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조선시대에 불교의 쇠퇴와 더불어 여성 중심의 사당패는 쇠락해서 남사당(男寺黨)으로 바뀌었으며, 판염불은 소리꾼들에 의해 계승되어 선소리타령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철종, 고종 때의 문신이자 판소리연구가인 신재효의 ‘박타령’ 등에는 사당패들이 나와서 산타령을 부르는 대목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선소리산타령은 사당패의 음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전통음악 가운데 가장 화창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우리 음악으로 평가된다.선소리산타령은 서도 소리꾼들에 의하여 발전된 서도선소리타령과 경기 소리꾼들에 의하여 발전된 경기선소리타령으로 나누어진다. 경기선소리산타령이 서울근교의 산천을 묘사하고 뒷소리꾼들이 소고를 치는 데 비해, 서도 선소리산타령은 평양의 경치를 노래하고 소리꾼들이 손수건을 들고서 발림하며 비교적 빠른 박자로 경쾌하게 진행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819/1755588219959879.jpg"/> 소리꾼들이 늘어서서 가벼운 몸짓과 함께 소고를 치며 산천경개를 노래하는 선소리산타령은 우리 민족의 합창 노래 중 가장 밝고 흥겹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경기선소리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 등으로 구성된다. 첫 곡인 ‘놀량’은 일정한 형식과 장단이 없이 그때그때 박자를 맞춰 부르며, 넓은 음역을 지니고 고음을 많이 쓴다. 시작 부분의 “산천초목이 다 무성한데” 이후는 모두 합창으로 소리를 한다.뒤이은 ‘앞산타령’은 서울에 있는 산 등을 주제로 한 노래로, 일정한 장단이 없고 고음을 많이 쓰는 게 특징이다. ‘뒷산타령’은 ‘중거리’라고도 불리는데, 리듬과 음역은 앞산타령과 같으나 곡 흐름이 조금 빠르다. ‘앞산타령’에 비해 낮은 음역에서 부르는 선율이 많기 때문에 비교적 부드럽게 들린다.끝을 장식하는 ‘자진산타령’은 “청산의 저 노송은 너는 어이 누웠느냐…”라는 사설로 시작된다. 처음은 느리게 부르다가 빠르고 경쾌한 장단으로 바뀐다. 과거에는 “도라지 병풍 여닫이 속에…”라는 사설로도 시작되어 일명 ‘도라지타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자진산타령’에 이어서 선소리를 마감하는 노래로 ‘개구리타령’을 불렀다고 하지만, 현재는 산타령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선소리산타령은 ‘놀량’에서 시작하여 ‘앞산타령’을 거쳐 ‘뒷산타령’에 이르기까지 장단은 점점 빨라지며 ‘자진산타령’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산타령에 맞추어 소고를 치며 춤추는 발림춤도 느린 ‘놀량’에서보다는 빠른 ‘뒷산타령’과 ‘자진산타령’에서 더욱 흥이 나게 마련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819/1755588383621493.jpg"/> 선소리산타령의 끝을 장식하는 자진산타령. 경쾌한 장단에 소리꾼들의 발림도 커진다. 사진제공=국가유산청산타령이 항간에서 본격적으로 오르내린 것은 고종 연간에 서울 오강(한강 용산 삼개 지호 서호) 인근의 소리꾼들에 의해서였다. 이 시기에 ‘의택이’와 신낙택이 선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들이 공연하는 장날에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때 권번의 예인 등을 통해 맥이 이어지던 선소리산타령은 광복 뒤 한국전쟁을 거치며 침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소리 명창인 이창배 선생이 음악적 체계를 잡고 후학 양성에 나서면서 선소리산타령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됐다.1968년 선소리산타령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이창배 정득만 김순태 유개동 김태봉 선생 등 5명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활동하였고, 그 뒤를 이어 최창남, 황용주 선생이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로서 전승 활동에 힘써왔다. 현재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는 공석으로, 4인의 전승교육사와 (사)선소리산타령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수 및 전통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7] 국가무형유산 ‘하회별신굿탈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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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7 Jul 2025 11:10: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한국을 대표하는 탈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하회탈. 그런데 정작 이 탈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하회탈의 내력이 궁금하다면, 국가무형유산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탈놀이에서 쓰이는 나무로 만든 탈들이 바로 하회탈이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717/1752717429505519.jpg"/>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의 탈광대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하회별신굿탈놀이는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이다. 별신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 번 섣달 보름날(음력 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별신굿을 해왔다. 이때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연행했는데 이 탈놀이가 바로 하회별신굿탈놀이다.특히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여 온 안동 하회탈과 병산탈은 고려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마을 하회탈과 이웃 병산마을 병산탈의 원본은 1964년 국보(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로 지정된 바 있다. 원본 하회탈은 주지(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 등 10종 11개가 전해지며, 병산탈은 총각, 별채, 떡다리 탈 등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현재 대감, 양반 탈 2개가 남아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717/1752717380610723.jpg"/>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탈광대들과 연행자들이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안동 지방에는 하회탈의 제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허도령’의 전설이 전해진다. “허도령이 꿈에 신으로부터 탈의 제작을 명받게 된다. 그는 작업장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하여 전심전력으로 탈을 만들어간다. 그러던 중 그를 사모하던 한 여인이 애인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몰래 휘장에 구멍을 뚫고 허도령의 작업을 엿본다. 이 일로 부정을 탄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숨지고 만다. 그 후 마을에서는 허도령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서낭당 근처에 단을 지어 제를 올렸다.” 하회탈 중 10번째인 이매탈은 턱이 없는 미완성의 모습인데, 그 이유는 허도령이 미처 작업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717/1752717479826390.jpg"/>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중과 부네가 등장하는 파계승 마당. 사진=국가유산청 제공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먼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대내림(내림대에 서낭신이 내리는 것) 과정을 재연한다.탈놀이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婦女)·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이 대사의 주내용이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으로 시작된다. 서낭신의 대역인 각시 광대가 각시탈을 얼굴에 쓰고 무동(목말)을 탄 채 걷고 춤을 추며 신명을 풀어낸다. 신이기 때문에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 광대들은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걸립(재주를 부리고 곡식 등을 구하는 일)을 하고 명과 복을 주는 과정을 연행한다. 뒤이은 주지마당, 백정마당 등 다섯 마당은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서낭신에게 봉헌하는 탈놀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혼례마당에서는 서낭 각시의 혼례식을 올리는데 동네사람들 중 아들을 원하는 사람이 선비탈을 쓰고 신랑 역을 맡았다고 한다. 신과의 결혼에 의하여 마을공동체의 풍요다산을 기원한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717/1752717610827415.jpg"/> 양반과 선비 마당(왼쪽)과 백정마당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매우 엄격하게 관리돼 왔다. 별신굿 외에는 평상시 각시탈을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 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했다.하회탈에서 주지탈은 악귀를 내쫓는 벽사탈이고, 나머지 탈들은 인간의 얼굴을 표현한 예능탈이라 할 수 있다. 표정은 양반탈처럼 실눈의 웃는 탈과 선비탈과 같은 고리눈의 성난 탈로 양분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로 버드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 겹 칠해 정교한 색을 내었다. 특히 양반, 선비, 중, 백정의 탈은 턱이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717/1752717673353196.jpg"/> 나무 탈에 한지를 붙여 하회탈을 만들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일반적으로 한국의 가면은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하기 어려우며, 그해의 탈놀이가 끝나면 태워버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목조 탈을 쓰는 데다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뒤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탈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굿놀이에 써왔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전할 수 있었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 데 귀중한 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80년 국가무형유산 목록에 올랐으며, 별신굿탈놀이의 원형을 재연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고 이창희 선생이 초대 예능보유자(각시 역)로 활동했다. 현재는 이상호(백정 역), 김춘택(할미 역), 임형규(초랭이, 상쇠 역)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유자와 (사)국가무형유산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및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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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6] 국가무형유산 ‘고성농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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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at, 21 Jun 2025 11:44:51]]></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우리네 24절기 중 망종이나 하지 무렵은 예부터 모내기를 하는 시기였다. 모내기란 모(따로 기른 벼의 싹)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일이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기에 ‘모내기 때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621/1750473677079261.jpg"/> 고성농요에서 모찌기를 재촉하며 짧은 등지 소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모내기 같은 고된 농사일을 하는 동안 농민들이 한 가닥 위안을 삼았던 것은 다름 아닌 농요(農謠)였다. ‘들노래’라고도 불리는 농요는 농부들이 농사의 고달픔을 달래고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부르던 노래를 말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경상남도 고성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성농요’(固城農謠)는 전통 농요의 묘미와 향토적인 정서를 맛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고성농요는 하지 무렵부터 시작되는 농사소리(농사 노래)가 주축을 이룬다. 고성 지역에서는 이를 ‘등지’라고도 하는데, 등지란 모내기소리(모내기 노래)라는 뜻의 경남 사투리다.고성농요는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타작 등의 농사일 순서에 맞게 노래가 구성되어 있다. 모판에서 모를 찌면서(한 줌씩 뽑아내면서) 부르는 모찌기소리, 모를 논에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 보리타작하며 부르는 도리깨질소리, 김맬 때 부르는 상사소리 및 방아타령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 부녀자들이 삼을 삼으면서(비벼 꼬아 이으면서) 부르는 삼삼기소리, 물레질하며 부르는 물레타령 등이 포함되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621/1750473709762872.jpg"/> 모를 심으면서 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성농요를 마당놀이로 공연할 때는 모내기소리, 도리깨타작소리, 삼삼는소리, 논매기소리, 물레소리 등 5과장(다섯 마당)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제1과장 모내기소리에서는 모찌기소리와 모심기소리를 부른다. 이 중 모찌기소리는 남녀 농부들이 덧배기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며 나와 모찌기 작업을 하며 부르는 노래다. 작업이 지루할 때 부르는 ‘긴 등지’와 일손을 재촉, 독려할 때 부르는 경쾌한 가락의 ‘짧은 등지’가 있다.모심기소리로는 모내기가 지루할 때 부르는 ‘긴 등지’, 점심을 기다리며 부르는 ‘점심 등지’, 해가 기울었을 때 부르는 ‘해거름 등지’가 있다. 이 가운데 점심 등지에는 점심참을 재촉하는 해학적 내용이 담긴다.제2과장은 도리깨타작소리다. 모를 다 심고 나면, 논매기를 시작하기 전에 보리농사의 수확을 위해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한다. 농부들이 앞소리 ’어화’, 뒷소리 ‘어화’ 등을 주고받으며 도리깨질을 힘차고 경쾌하게 하는데,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621/1750473734337814.jpg"/> 고성농요 중 도리깨타작소리. 농부들이 도리깨를 들고 보리타작을 하며 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제3과장 삼삼는소리에서는 부녀자들이 서로 마주 앉아 두레삼을 삼으면서 노래한다. 밭매기 같은 낮일에 지치고 고달픈지라 노래로나마 심신을 달래는 것이다. 임·사랑이 주된 소재가 되며 가정의 화목과 이웃 간의 협동을 노래하기도 한다.  제4과장은 논매기소리, 논에 자란 잡초를 뽑으면서 부르는 노래다. 논매기꾼들이 논을 매며, 그 고됨을 달래기 위해 오전에는 상사디야소리, 오후에는 방아소리를 부르는데, 그 소리들이 매우 우렁차고 씩씩하다. 묵묵히 농사일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논매기가 끝나면 가을 추수 때까지 농사일을 한숨 돌릴 수가 있다. 이때 농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일을 잘한 사람을 뽑아 괭이자루에 태우고 행렬하면서 신나게 ‘치기나칭칭’을 부른다. 치기나칭칭은 여름 농사를 짓느라 애쓴 농부들을 위로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노래로, 선소리꾼이 앞소리를 메기면 모든 사람들이 ‘치기나칭칭’의 뒷소리를 받으면서 흥겹게 부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621/1750473761895826.jpg"/> 아낙네들이 물레질을 하며 노래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제5장 물레소리에서는 물레를 든 부녀자들이 춤을 추며 등장하여 각기 자리를 잡고 물레질을 하며 물레노래를 부른다. 가사의 주 내용은 시집살이의 고달픔이므로, 그 가락도 애조를 띠고 있다.고성농요의 노랫말에는 이 고장 농민들의 생활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향토적인 정서가 물씬 풍긴다. 또한 고성농요는 투박하고 억센 경상도 특유의 음악성을 간직한 경상도 노래이지만, 전라도가 가까운 지리적 영향으로 육자배기 시김새(주된 음의 앞과 뒤에서 꾸며 주는 꾸밈음)가 끼어 있어 꿋꿋하면서도 매우 처량하게 들린다.고성농요는 현전하는 가사가 200여 장이나 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농요다. 원래 우리나라 농요는 고성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래하였으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1940년대에 거의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그 후 농경의 기계화와 농민 생활의 현대화로 인해 그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됐지만, 고성 출신 김석명 선생 등의 노력으로 그 맥을 이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지방의 농요를 발굴, 채록하고 고성농요전수회를 창립하는 등 고성농요 전승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고성농요는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상수, 유영례 선생이 초대 예능 보유자로 활동하며 농요 보급에 앞장섰다. 김석명 선생의 경우 1992년부터 고성농요 예능 보유자로서 농요의 전승과 전파에 헌신해 오다 건강상의 이유로 2023년 명예보유자로 물러난 상태다.자료 협조 = 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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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5] 국가무형유산 ‘각자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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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4 May 2025 13:59:02]]></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514/1747198187638762.jpg"/> 각자를 할 때에는 글자의 획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일요신문]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벽한 형태의 불교 대장경판으로 꼽힌다. 법문을 한 자 한 자 나무판에 새겨 놓은 경판의 수가 무려 8만 1258판. 과연 팔만대장경판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경외심이 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물론 불경 내용을 정리하고 경판을 검수한 승려들을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의 손길이 녹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직접 목판에 글자를 새긴 장인들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이처럼 나무판에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것을 각자(刻字) 또는 서각이라 하며, 그 고유한 기술을 지닌 장인을 일컬어 각자장(刻字匠) 또는 각수(刻手)라 한다. 우리나라는 1996년 각자장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문헌상으로 우리나라의 목판 인쇄가 어느 시기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8세기 중엽에는 목판 인쇄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514/1747198222840715.jpg"/> 걸이용 목판에 각자를 한 뒤 색을 칠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 인쇄술이 더욱 발달하였다. 당시 사찰마다 각자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 각수들이 있었고, 이들은 종교적 정성으로 각자를 하여 뛰어난 인쇄문화를 꽃피웠다. 고려대장경판도 이들 승려 각수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과 의학 서적 및 개인의 시문집 등 각 분야의 책들도 목판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널리 간행되었다.조선시대에도 목판 인쇄에 대한 수요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초기에는 왕실의 보호 아래 불교 경전 간행이 이루어졌고, 이외에도 ‘훈민정음’ ‘삼국사기’ ‘시용향악보’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목판으로 찍어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교서관(인쇄 등을 관장하는 관서)에 14명의 각자장을 배치해 목판 제작 등을 담당하게 한 것으로 나타난다.각자장의 역할은 비단 목판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 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현판을 거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몫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514/1747198297403864.jpg"/> 초대 각자장인 오옥진 선생이 생전에 작업하던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조선 후기까지 성행했던 목판 인쇄는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위태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급기야 일제강점기 무렵에는 사진술과 새로운 인쇄술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목판인쇄가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각수들 또한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광복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목판인쇄술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사라지다시피한 각수 기술을 되살린 이는 1996년 초대 각자장 보유자로 지정된 오옥진 선생이었다. 1970년대부터 선대의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전통 각법을 재현하여 그 맥을 잇게 되었다. 각자장 현 기능보유자인 김각한 선생은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전통 각자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인쇄를 목적으로 목판에 글자를 좌우 바꾸어 새기는 것을 ‘반서각’이라 하고, 궁궐 건물이나 사찰, 재실 등에 거는 현판용으로 목판에 글자를 그대로 새기는 것을 ‘정서각’이라 한다.각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를 마련해 ‘치목’을 해야 한다. 치목이란 나무를 선별하고 건조한 뒤 크기에 알맞게 자르고 다듬는 작업을 일컫는다.그 다음 작업은 ‘배자’(配字), 각자할 글씨 원본 또는 사본을 나무판에 붙이는 과정을 말한다. 붓으로 글자를 쓸 때에는 일일이 자로 재서 쓸 수 없으니, 쓰다 보면 행간과 자간이 달라지게 마련인데, 이를 재조정하여 균형과 통일감을 꾀하는 것도 각자장의 일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514/1747198232042820.jpg"/> 글자를 새기는 각법 중 양각은 글자를 돌출시켜 입체감을 표현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원본의 글자를 바로 나무판에 새기면 되는 현판용 정서각과는 달리 인출용 목판의 경우, 글자의 좌우가 바뀌도록 반서각을 해야 인쇄 때 글씨가 제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배자를 할 때 글씨 원본이나 사본을 뒤집어, 즉 앞면이 뒤로 가도록 판목에 붙인다. 이를 말린 뒤 유채기름 같은 맑은 기름을 바르면, 바로 밑의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배자에 이어 본격적으로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 작업이 진행된다. 현판용으로 각자를 할 때에는 어떤 각법이든 글자 선을 살려주고 글자의 문체를 입체적으로 살려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반면 인출용 목판의 각자는 작은 획의 탈락도 조심해야 하는 칼놀림의 정교함과 함께 글자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가 뛰어나야 한다. 서예와 한자에 대한 조예가 깊어야 진짜 각자를 할 수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아무리 뛰어난 각자장이라 하더라도 한 번의 새김질로 완성되는 각자 작업은 없다. 인출용 각자의 경우 매번 먹칠을 해 종이에 찍어 보면서 여러 번 다듬고 교정해야 비로소 좋은 글자가 나온다. 오랜 시간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는 정성과 인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서각을 할 때에는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주며 글자를 새기는데, 그러다 보니 각자장의 왼손 엄지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다. ‘혼을 담아 새긴다’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닐 듯하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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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4] 국가무형유산 ‘살풀이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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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5 Apr 2025 10:23: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5년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우리 민속춤을 도안으로 한 10종의 시리즈 우표를 발행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우표를 통해 우리나라의 독특한 민속 무용을 해외에 널리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이 민속예능 우표 시리즈에서 제일 처음으로 다뤄진 것은 다름 아닌 살풀이(춤)와 무당춤이었다. 이 가운데 살풀이춤은 1990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무대 위에 올라 많은 관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415/1744679818680037.jpg"/> 무속음악의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추는 살풀이춤은 예인들에 의해 교방춤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살풀이란 재난을 소멸시키고 행복을 맞이하고자 하는 종교적 바람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무속신앙에서 살풀이는 굿판에서 무당이 그해의 나쁜 기운 즉 살을 풀기 위해 추는 춤을 뜻한다. 이러한 무속음악의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추는 즉흥적인 춤이 바로 살풀이춤이다. 경기 지방에서는 ‘도살풀이춤’이라 불리기도 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추는 흐트러진 춤이라는 의미에서 ‘허튼춤’이라고도 한다.살풀이춤은 무속이 음성적인 신앙으로 치부되던 조선시대에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 무격(무당과 박수)이 예인 집단에 합류하면서 대중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이 굿판이 아닌 공연 무대에 오르면서 살풀이의 종교적 의례성과 주술적 성격이 사라지게 되고, 광대나 교방의 기녀 등 예인이 자유롭게 추는 예술적인 춤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 온 셈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415/1744680068941753.jpg"/> 고 김숙자 선생의 도살풀이 춤사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무속의 제례에서 무당이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또는 부정 낀 사람의 액을 씻어주기 위해 옷가지나 지전 등을 들고 춤을 췄다면, 예인들은 옷가지 대신 명주 수건을 손에 쥐고 즉흥적으로 멋을 부리며 춤사위를 펼쳤다. 이런 연유로 살풀이춤은 한동안 ‘수건춤’, ‘즉흥무’라고 불렸으나 전설적인 춤꾼 한성준이 1936년 극장 공연에서 ‘살풀이춤’이란 용어를 쓰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속인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살풀이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그 맥이 이어져 오늘날 대표적인 한국춤으로 정착하였다는 시각도 있다.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과 한을 환희와 자유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내면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이다. 살풀이 가락은 8/12의 규칙적인 리듬(3박, 4박)으로 이루어진다. 반주에는 가야금을 비롯해 피리, 아쟁, 대금, 해금, 장고 등 삼현육각이 주로 쓰이며, 때에 따라 장고 가락에 애간장을 저미는 듯한 구음(입소리)으로 된 음악이 쓰이기도 한다.살풀이 가락은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고요하고 슬프게 연주되다가 중간에 굿거리장단으로 옮겨졌다 빠른 가락으로 변하고, 다시 느려진 가락으로 끝을 맺는다. 따라서 춤사위도 처음에는 느릿하고 고운 춤으로 시작되어 점차 빨라지면서 무수한 곡선을 그리며, 마지막에는 다시 고요하고 고운 춤으로 표출된다. 살풀이춤을 원과 선율의 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415/1744680092193289.jpg"/> 고 이매방 선생이 살풀이춤을 추며 명주수건을 허공에 흩뿌리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예인들이 펼쳐 내는 살풀이춤은 일정한 격식 가운데서도 자유롭게 표출되는 예술적 창조성이 돋보인다.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춤꾼이 무대에 선 모습을 떠올려 보자. 춤꾼은 하얀 수건을 손에 들고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허공에 흩뿌린다. 몸을 움츠리고 서서히 움직이며 마치 세속적인 속박을 털어 버리듯 맺고 어르고 푸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춤꾼. 너울거리는 춤사위는 보는 이들을 신비와 환상의 세계로 이끌고 마침내 우리 춤 특유의 멋과 흥을 자아낸다.살풀이춤의 특징 중 하나는 정중동(靜中動) 즉,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아름다움이다. 제자리형의 ‘멈추는 사위’를 바탕으로 하여 ‘어르는 사위’와 ‘뿌리는 사위’로 전개된다. 살풀이춤이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우리 민족의 심성이 춤으로 형상화된 예술이라는 평가도 있다. 즉 춤에서 팔사위는 천(天), 발사위는 지(地), 호흡은 인(人)이라 볼 수 있는데, 살풀이춤의 춤사위는 팔과 발과 호흡,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형상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풀이춤은 경기도 당굿의 도살풀이 장단을 비롯해 호남 지역 등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장단과 춤사위를 보인다. 이러한 춤 중에서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기형 김숙자류의 도살풀이춤과 호남형 이매방류의 살풀이춤이다. 김숙자, 이매방 선생은 초대 살풀이춤 예능보유자이기도 했다. 현재는 김숙자류를 이어받은 양길순, 김운선 살풀이춤 보유자와 이매방류를 이은 김정녀 명예보유자를 중심으로 살풀이춤 전승 및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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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3] 국가무형유산 ‘구례향제줄풍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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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1 Mar 2025 10:03:05]]></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전남 구례는 예부터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워 ‘삼대삼미(三大三美)의 고장’이라 불렸다.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삼미는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크고 수려한 고장, 구례에는 아름답고 우아한 전통음악이 전해지는데, 바로 ‘구례향제줄풍류’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311/1741654807065753.jpg"/> 수락폭포에서 구례향제줄풍류를 연주하는 연주자들. 사진=국가유산청‘풍류’(風流)란 원래 조선 초기에 ‘나례’라는 궁중 축제에서 ‘영산회상불보살’이라는 불교 교리를 담은 노랫말을 얹어 부르던 성악곡이었다. 풍류를 일컫는 ‘영산회상’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는 동안, 영산회상은 불교 색채의 가사가 빠진 기악곡으로 변하였고, 선비를 중심으로 애호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다른 기악곡이 덧붙여져 방대한 조곡(모음곡)으로 발전하면서 영산회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합주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풍류는 곡을 이끄는 악기의 성격에 따라 두 갈래로 구분된다. 관악기가 중심이 되는 풍류를 대풍류 또는 관악영산회상이라 하고,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풍류를 줄풍류 또는 현악영산회상이라 한다. 줄풍류는 서울에서 전승되는 것과 지방에서 전승되는 것이 어느 정도 다르게 연주되었는데, 이 가운데 지방에서 전승되는 줄풍류를 ‘향제(鄕制)줄풍류’라 한다. 서울에서 전승되는 줄풍류인 ‘경제(京制)줄풍류’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따라서 구례향제줄풍류란 구례 지방에서 전승되는 현악기 중심의 풍류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 후기에 줄풍류는 주로 실내에서 연주하는 기악곡으로 발전하였다. 줄풍류에 편성되는 악기로는 거문고, 가야금, 양금, 세피리, 대금, 해금, 단소, 장고가 있다. 줄풍류는 방안에서 조용히 연주하는 음악이므로 거문고와 가야금, 양금과 같은 현악기가 중심이 되고 관악기는 현악기를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관악기는 되도록 음량을 적게 해서 연주하는데 피리는 가늘어 음량이 작은 세피리를 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311/1741654826038631.jpg"/> 줄풍류 연주에서는 현악기가 중심이 되고 관악기는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국가유산청줄풍류를 연주하면 거문고의 은은하고 꿋꿋한 음이 드문드문 대점(줄을 세게 내리 타는 기법)을 쳐주는 가운데 피리, 대금, 해금이 장식적인 선율을 수놓으며 길게 뻗는다. 그 음이 조용하고 우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이른바 신선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구례향제줄풍류는 다스름(음률을 고르게 맞추기 위한 짧은 곡조)을 시작으로 상영산, 중영산, 세영산, 가락덜이, 삼현도드리, 도드리, 하현도드리, 염불도드리, 타령, 군악, 계면가락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 굿거리 등의 15곡으로 구성되는 방대한 모음곡이다.다스름에서 중영산까지를 ‘본풍류’라고 하고 세영산에서 군악까지를 ‘잔풍류’라 이르며, 계면가락도드리에서 굿거리까지를 ‘뒷풍류’라 한다. 본풍류는 한없이 느려 은은하고 유유자적하며 잔풍류는 약간 빨라서 유장하고 꿋꿋하며 뒷풍류는 밝고 화창하다. 이 음악을 모두 연주하는 데 약 70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경제줄풍류’에는 다스름과 굿거리가 없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311/1741654855833080.jpg"/> 신상철 구례향제줄풍류 명예보유자가 해금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조선시대에 풍류가 선비의 음악으로 발전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이미 영산회상이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궁중 축제의식으로 전승되었고, 영산회상에서 가사가 빠져 종교적 신성성이 사라지면서 이후 궁중이나 관아, 민간 음악에 두루 쓰이기에 이른다. 더욱이 조선 사회에서 음악은 선비의 여섯 가지 교양을 뜻하는 육예—예(禮),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에서 예절 다음에 꼽힐 정도로 중요시되었던 과목이었다. 선비들은 마음과 몸을 수양하고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수단의 하나로 음악을 연주하고 들었던 것이다. 자연을 벗하며, 화려함보다는 질박하고 검소한 가치를 존중했던 선비의 정신이 풍류에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국립국악원을 통해 비교적 전승이 잘 이루어진 서울의 줄풍류와는 달리, 지방의 줄풍류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급격히 쇠퇴하여 한때 단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비교적 전통이 잘 유지되어 온 구례와 이리(현 익산)의 줄풍류를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향제줄풍류’로 지정하였고, 1987년에는 두 지방의 줄풍류를 분리하여 구례향제줄풍류, 이리향제줄풍류를 각각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구례향제줄풍류는 단소의 명인으로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김무규 선생을 시작으로 조계순(가야금), 이순조(대금), 김정애(거문고) 보유자 등이 맥을 이어왔다. 지난해 이철호(단소) 보유자가 별세하면서 구례향제줄풍류의 예능보유자는 공석인 상태로, 전승교육사 출신인 장명화, 신상철 명예보유자와 (사)구례향제줄풍류보존회를 중심으로 공연 및 전승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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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2] 국가무형유산 ‘사직대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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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2 Feb 2025 11:26:36]]></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단어가 있다. 여기서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왕실’을 뜻한다. 또 사직에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하는데,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사직이란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종묘사직’은 왕실과 나라를 함께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00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사직대제(社稷大祭)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874656590.jpg"/>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품격을 갖춘 국가적인 제사를 말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품격을 갖춘 국가적인 제사를 말한다. 임금이 직접 농사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했다. 사직에 대한 제사는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는데,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역사서 ‘양서’에는 “고구려는 살고 있는 (곳) 좌편에 큰 건물을 세우고 겨울에 사직에 제사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성종 때에는 왕성에 사직을 세워 종묘와 사직이 유교적인 제사 의례의 한 형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을 마련했다.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지방에도 사직단을 두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사직은 동쪽의 사단(社壇)과 서쪽의 직단(稷壇), 두 개의 단으로 구성되는데, 사단에는 ‘국토의 신’인 국사(國社)의 신주를, 직단에는 ‘오곡의 신’인 국직(國稷)의 신주를 모셔 놓았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왕이 친히 행하는 사직제의 의식은 제사 전부터 그 일정이 이미 시작된다. 왕은 제사가 시작되기 전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했다. 제사 3일 전부터는 제사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차려놓고, 제사 하루 전에는 왕이 사직단으로 향하기 위해 거가(임금의 수레)를 타고 궁을 나섰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930099003.jpg"/> 사직대제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사직단에서 거행되는 사직제의 본 의례는 축시, 즉 새벽 1시경에 시작된다.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이 각자의 정해진 자리에 서고, 각종 제기(祭器)에는 제사를 위한 음식을 담아 놓는다. 각각의 절차에 따라 등가(노래나 현악 위주의 소규모 아악 편성), 헌가(북과 종을 갖춘 아악 편성), 그리고 줄을 지어 추는 춤인 일무(佾舞) 등 악기 연주와 노래, 춤을 연행한다.사직제에서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제사 지낸 술과 고기를 나누는 음복수조(飮福受곞)에 이어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徹憐豆), 그리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는 망예(望績) 절차가 이어진다. 이러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면 왕의 거가는 다시 궁으로 향한다.왕이 궁으로 돌아오면 궁의 정전에서 이를 경하하는 의례, 즉 하의(賀儀)가 열린다. 하의에 이어서는 제사 지낸 술과 음식을 나누는 음복연(飮福宴)이 열리는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의빈, 제관(祭官) 등이 모두 참석하여 음복연까지 행하면 사직제는 마무리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6957302339.jpg"/> 사직대제는 국가적 제사에 사용되는 음악과 무용, 의복 등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무형유산이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초헌관으로 참여한 왕이 제사 지낸 술, 즉 복주(福酒)를 마시는 절차가 음복연의 중심이 된다. 왕이 복주를 마시고 나면 제사에 참여한 관원이 이어 복주를 마신다. 제사 지낸 제주(祭酒), 즉 복주를 골고루 나누어 마시는 행위는 제사를 잘 치른 후에 내리는 복을 고르게 나눈다는 의미를 지닌다.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천체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종대의 ‘세종실록오례의’를 비롯해 성종대의 ‘국조오례의’와 ‘국조오례서례’,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서례’, 정조대의 ‘국조오례통편’ 등에 사직제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정조대에는 오례서가 아닌 의궤에 사직제를 기록한 ‘사직서의궤’가 처음 편찬되기도 했다.조선시대에 종묘와 사직단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이어(移御)해야 했고, 종묘와 사직단이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기도 했다. 그 후 이를 복구하였지만 정유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다시 신주를 옮기는 일이 빚어졌다. 사직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시절과 순종 초기에도 행해졌으나,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사직단 또한 공원을 만든다는 구실 아래 훼손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212/1739327021966729.jpg"/> 사직단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제공80여 년간 중단됐던 사직제는 1988년 종묘제례의 보유자였던 고 이은표 선생의 고증을 통해 복원하여 봉행되어 왔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내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와 예능보유자(제의집전)인 이건웅 선생을 중심으로 사직대제 보존 및 계승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1] 국가무형유산 ‘광주칠석고싸움놀이’]]></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8563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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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5 Jan 2025 15:26:45]]></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후반부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고놀이’였다. 냉전 시대에 동서 양 진영의 국가들이 대거 참여한 올림픽이었던 만큼 무엇보다도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가 중요했다. 그 결과 우리 고유의 ‘고싸움놀이’에서 ‘싸움적’인 요소를 빼고 화합의 모습을 강조하여 ‘고놀이’가 되었던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115/1736922158408770.jpg"/> 광주칠석고싸움놀이의 한 장면. 고끼리 맞부딪치며 격렬한 대결을 벌인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그렇다면 고놀이의 원형 격인 고싸움놀이는 과연 어떤 민속놀이일까. 국가무형유산인 ‘광주칠석고싸움놀이’를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광주칠석고싸움놀이는 주로 전라남도 일대(현재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전후에 행해지는 격렬한 남성집단놀이다. 일반적으로 ‘고’란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둥그런 모양으로 맨 것을 의미하는데, 거대한 2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 해서 ‘고싸움’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고의 주재료는 볏짚이다. 한 편의 고싸움놀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보통 400~500다발의 볏짚이 필요하다고 한다.먼저 볏짚으로 세 가닥의 줄을 꼬아 놓고 이 줄들을 다시 함께 꼬아 어른 팔뚝만큼 굵은 동아줄을 마련한다. 그 후 동아줄의 한 쪽에 통대나무를 대고 칭칭 감고 둥글게 구부려 타원형의 고머리를 만든다. 그런 다음 줄 끝을 다른 줄에 대고 두 줄을 묶어 고몸체를 만드는데, 그 속에도 통나무를 대고 칭칭 감는다. 고머리나 고몸체는 사람이 걸터앉아도 두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크고 굵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115/1736922191228975.jpg"/> 거대한 고머리.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의 몸체에는 7, 8개의 통나무(일명 가랫장)를 가로로 묶어 사람들이 메고 떠받칠 수 있게 한다. 고가 크고 무거우므로 가랫장 하나에 예닐곱 사람이 매달려 들거나, 메고 행진을 하고 대결을 펼치게 된다.고가 만들어지면, 고싸움을 벌일 윗마을(동부)과 아랫마을(서부)이 공동으로 마을 앞에서 간단한 고사를 지내고 농악대를 앞세워 집집마다 돌며 마당밟이굿을 한다. 마당밟이는 땅을 다스리는 신령을 달래어 연중 무사를 비는 민속놀이의 하나다.정월 열엿새 날 해가 지고 달이 솟을 무렵, 고싸움놀이의 본격적인 막이 열린다. 먼저 횃불을 선두로 동부, 서부의 장정들이 고를 메고 농악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시위를 하고 기세를 올린다. 싸움터로 나아갈 때 행렬 맨 앞에서 횃불잡이가 길을 인도한다. 그 뒤로 ‘동부는 청룡기, 서부는 백호기’의 마을기와 농기(농촌 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 등을 든 기수들, 농악대가 서고, 고를 멘 장정들이 뒤따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115/1736922220677677.jpg"/> 놀이꾼들이 고를 들어 기세를 올리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 위에는 줄패장과 부장 두세 명이 올라탄다. 줄패장은 고줄을 가지고 싸우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그의 지휘에 따라 싸움이 전개된다. 따라서 줄패장은 마을에서 영향력 있고 고싸움놀이를 잘 알 뿐만 아니라 힘이 센 사람으로 선정된다. 줄패장을 보좌하는 부장들은 영기를 들고 휘두르는데, 그중 한 사람이 선소리(민요 등을 부를 때 한 사람이 앞서 부르는 소리)를 메기면, 가랫장을 멘 장정들 즉 놀이꾼(일명 몰꾼)들이 ‘받는 소리’로 “사―아 어듸허 어뒤―허” 하고 합창을 해서 기세를 올린다.놀이꾼들은 노래에 발동작을 맞추고 전의를 돋우어 사기를 높인다. 양쪽의 고가 서로 접근하면 고를 높이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기세싸움을 벌인다.고싸움의 승부는 한 쪽이 상대방의 고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 기회를 노린다. 줄패장이 “밀어라” 하고 외치면, 놀이꾼들은 고줄을 높이 들고 전진해서 상대방 고를 덮치게 된다. 이에 맞서 상대방 줄패장 역시 “밀어라” 하고 외치면 해당 놀이꾼들이 함성을 지르며 고를 들고 밀어붙인다. 고끼리 부딪쳐 고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내려오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일단 고를 풀어서 줄로 만들어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승부를 내기도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5/0115/1736922248563048.jpg"/> 고싸움놀이는 밤늦도록 치열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싸움에서 이긴 편은 고를 메고 의기양양 자기 마을로 돌아가 마을을 돌면서 승리를 자축한다. 그때 잘사는 집에서는 음식과 술을 준비하였다가 일행을 환영하고 위로를 한다. 동시에 농악놀이가 시작되고 노래와 춤으로 한때를 즐기게 된다.고싸움은 놀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일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경의식으로 전승되었다. 고싸움에서 동부의 고줄은 남성을 상징하는 ‘수줄’, 서부의 줄은 여성을 상징하는 ‘암줄’이라 하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고줄을 만들 때도 서부가 유리하도록 암줄을 수줄보다 더 크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고싸움은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식의 한 형태로, 놀이를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다지는 집단놀이로서 의의를 지닌다. 1970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광주칠석고싸움놀이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고싸움놀이 예능보유자는 공석이며 전승교육사 이성만, 김선엽, 이영재 등이 전승교육사로 활동하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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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00] 국가무형유산 ‘화각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8385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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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3 Dec 2024 11:48:06]]></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우리 전통 공예에서 가장 희귀한 공예기법을 꼽는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쇠뿔 위에 그린 그림’ 화각(華角)이다. 한자로 ‘畵角’이라고도 쓰는 화각은 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목재 기물 위에 붙여 장식하는 공예 기법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전통 화각 기능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가리켜 화각장(華角匠)이라 부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213/1734057681585812.jpg"/> 화각공예로 장식한 문갑.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문헌상 우리나라에서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발달했던 대모(거북의 등과 배를 싸고 있는 껍데기) 공예에서 그 관련성을 찾는 시각이 있다. 대모 공예란 대모를 얇게 갈아서 그 뒷면에 그림을 그려 목공예품의 표면에 장식하는 기술이다. 고려 중기 이후 수입품인 대모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모 공예는 점차 쇠퇴하였고, 그 후 대모가 투명도가 더 높은 쇠뿔(우각)로 대체되면서 조선 중기부터 화각 공예가 성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에 ‘전주 화각기’를 남겼는데, 이 글이 화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워 주로 양반 귀족층의 기호품이나 애장품, 특히 부인과 어린아이의 공간인 내실의 각종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현재 전해지는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농·사방탁자·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바느질자, 경상(경을 올려놓는 책상), 연상(벼루 먹 붓 연적 따위를 담아 두는 작은 책상), 반짇고리, 부채, 붓대 등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213/1734057691348075.jpg"/> 뜨거운 불 위에서 쇠뿔을 펴서 각지를 만든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화각공예는 크게 ‘골각 작업’과 ‘채화 및 옻칠 작업’, 두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골각 작업은 3~4년생 젊은 황소의 뿔을 잘라 쇠뿔의 각질 부분을 펴서 평평한 뿔판(각판)으로 만들고, 이 판을 다시 깎고 갈아서 종잇장처럼 얇고 투명한 ‘각지’(화각지)로 가공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박타기’(한쪽 면을 톱질하여 펼칠 수 있도록 가르는 작업)한 쇠뿔들을 부대에 담아 2년 정도 보관해 두었다가 가공해 각지로 만든다. 2년 정도 묵히지 않은 것은 뿔의 원상태로 말리어 오르는 성질이 강해 쓰기에 좋지 않고, 2년 넘게 경과한 것은 거스러미가 일어나 각지의 품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골각 작업과 함께 ‘우골 계선’을 제작하는 작업도 병행된다. 쇠뿔로 만든 각지는 크기가 작아 화각공예 때 몇 개의 각지를 목재 기물 표면에 연속해 붙여 사용한다. 이때 각 각지의 경계에 쇠뼈를 가공해 만든 상아색의 오리(가늘고 긴 조각)를 박아 넣는데 이것이 바로  우골 계선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213/1734057702406630.jpg"/> 화각공예에서 밑그림에 먹선을 넣는 모습(왼쪽)과 밑그림에 채색을 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다음으로 채화 작업이 진행된다. 화각의 무늬 그림은 투명한 각지의 뒷면에서 비쳐 보이도록 하는 복채화 기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보통 그림을 그리는 순서와 반대 순서로 그려 나가게 된다. 반투명지에 연필이나 세필로 그려놓은 무늬 그림에 먹선을 넣은 후 이 먹선화(밑그림)를 뒤집어 놓은 상태에서 그 위에 각지를 맞추어 덮고 밑그림의 무늬나 문양 등 그림을 전사하여 채색하는 방식이다.채화 작업을 마치고 각지를 부레풀로 목재 기물에 붙인 뒤 각지 이외의 부분에 옻칠을 하고 기물의 표면에 윤을 내면 하나의 화각공예품이 마침내 완성된다. 기물의 종류에 따라선 여기에 경첩, 들쇠 등 장석을 부착하는 별도의 공정을 거치기도 한다. 쇠뿔로 각지를 만들기까지 2년의 기다림이 필요하고, 작은 예물함 한 개를 만드는 데 적어도 한 달 이상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하니 화각이 얼마나 어려운 인고의 공예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213/1734057714223828.jpg"/> 채색이 완료된 그림. 자세히 보면 여러 장의 각지를 이어붙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진=국가유산청화각공예는 색채 및 문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실용공예로서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 화각공예품에 묘사된 무늬나 그림은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십장생과 운룡·운봉 무늬, 길상 문자 무늬를 비롯해 모란 천도 석류 국화, 나비 잠자리 벌 등 민화에 등장하는 각종 동식물 등 다양하다. 또한 적·청·황·백·흑의 오방색을 기본으로 한 여러 가지 간색이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미술평론가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 최순우 선생은 언론에 쓴 칼럼에서 “노랑 연두색 빨강 등으로 그려진 화각장의 무늬에는 순정과 동심의 천진스러운 아름다움이 깃들어 비할 데 없는 치기미(稚氣美)를 발산해준다”고 평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0년 2월 5일자 참고).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213/1734057738366644.jpg"/> 이재만 화각장 기능보유자가 화각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조선후기를 풍미했던 화각공예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화각공예품에 매료된 몇몇 일본인 사업가들이 국내 화각 공방에 셀룰로이드 판을 공급해, 쇠뿔로 만드는 각지를 대용하게 하면서 화각 모방품을 양산시켰기 때문이다. 값싼 모방품이 전국 시장에 대량 유통되면서 화각공예품의 희소가치와 품위가 떨어져 결과적으로 상당수 화각 공방들의 몰락을 가져왔다.맥이 끊겨가던 화각공예 기술은 한말부터 3대째 각질장으로서 가업을 이어온 고 음일천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이재만 선생이 1996년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으로써 지금까지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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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9] 국가무형유산 ‘전통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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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2 Nov 2024 14:02: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581325883.jpg"/> 십장생 문양을 넣은 죽전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일요신문] 우리나라는 자타공인 활의 강국이다. 활쏘기, 궁시장, 전통장 등 활과 관련된 국가무형유산을 세 가지나 보유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중 ‘전통장’의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전통(箭筒)이란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 화살을 담아서 가지고 다니던 화살통을 말하는데, 이러한 화살통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일컬어 전통장(箭筒匠)이라 한다.예부터 활과 화살은 수렵과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로 취급되었고, 화살을 온전히 보관하는 전통 또한 그 궤를 함께하며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의 유산에서도 다채로운 전통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쌍영총의 기마도와 수렵도 등의 벽화에서 등에 매고 다니던 화살통을 발견할 수 있고, 신라와 백제 고분에서는 화살통을 장식하는 꾸미개가 출토되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궁술 훈련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통 또한 필수적인 군수품으로 자리잡게 됐다. 또한 무인들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심신수련을 위해 평소 활쏘기를 즐기게 되어 각종 재료로 치장된 화살통이 등장했다.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 공전에서는 화살통과 같은, 활과 화살의 보조도구를 만드는 장인을 ‘통개장’(筒介匠)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궁시장(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과 함께 통개장 즉 전통장의 일이 중요 영역으로 다뤄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세종 때의 기사를 보면, 전통이 왕의 하사품이나 포상용으로도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194388386.jpg"/> 화살통에 문양을 조각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총포와 화약의 발달로 활의 군사전략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화살통을 만드는 장인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활쏘기가 취미생활의 하나가 되었고 전통 역시 점차 미술적 아름다움을 지닌 공예품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전통적인 화살통은 쓰이는 재료에 따라 그 명칭이 다양하고 만드는 방식이나 쓰임새도 달라진다. 대나무로 만드는 죽전통, 한지로 만드는 지전통, 오동나무로 만드는 오동나무전통, 거북 껍질을 이용해 만드는 대모전통, 벚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 투갑상어 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 나전으로 문양을 내는 나전칠전통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중 오동나무전통은 습기와 좀을 막아주는 기능이 뛰어나 전쟁과 수렵 때 많이 사용되었고, 모습이 미려한 나전칠 전통은 예부터 매우 값이 나가는 고급 장식품으로 취급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237517056.jpg"/> 담비 모양의 고리목을 붙이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전통 중에 가장 널리 쓰였던 죽전통의 제작 과정을 보면, 하나의 화살통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인고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전통 만들기는 사실상 대나무 채집으로 시작된다. 2년 이상 된 왕죽의 크기와 색깔을 따져보고 표면의 색깔이 맑고 투명한 것을 골라 밑동을 잘라낸다. 채집된 대나무는 지하 50cm 정도 깊이를 파고 땅에 2년 이상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하에 묻어 두는 이유는 대나무의 절(마디)을 삭히기 위해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264850837.jpg"/> 오동나무전통의 덮개를 만드는 모습(왼쪽)과 용머리 모양의 화살통 덮개.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절을 삭힌 대나무는 특별히 제작된 드럼통에 넣어 3일간 삶아 진을 뺀다. 대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 처리 과정이다. 이렇게 재료가 마련되면 비로소 본 공정에 들어간다. 먼저 문양을 설계하여 초(밑그림)를 잡는데, 가는 붓으로 대나무 표면에 다채로운 문양을 그려 넣는다. 이어 밑그림의 선을 따라 조각칼로 칼금을 주고 골을 파내어 문양의 형태를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새기는 문양은 대개 십장생, 사군자, 문자 등 장수와 구복의 염원을 구현한 것들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318804516.jpg"/> 십장생을 조각한 화살통에 옻칠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화살통의 본체가 만들어지면 이어 마개와 덮개를 제작한다. 마개는 그늘에서 30일 이상 말린 물푸레나무 등 여문 것을 골라 재료로 쓴다. 그 다음으로 고리목(끈 등을 연결할 수 있도록 고리 역할을 하는 나무)을 만들어 붙인다. 주로 대추나무를 자르고 조각해 민어풀로 본체에 붙인 뒤 실로 묶어 풀이 완전히 굳을 때까지 하루쯤 기다린다. 이어 주칠을 하여 그늘에서 하루 이상 말리게 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112/1731387357173540.jpg"/> 김동학 전통장이 화살통에 다양한 문양을 조각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뒤이은 작업은 장석 만들기. 놋쇠 판을 펴서 못 구멍을 낸 다음 톱질을 하여 마개의 테두리를 만든다. 작업 사이사이에 칠이 마른 전통에 솔질을 하여 윤기를 내고 습기 방지를 위해 옻칠 등을 한 다음 건조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된다. 여기에 열쇠를 겸하는 덮개장석을 만들어 장착하면 마침내 하나의 죽전통이 완성된다.1989년 전통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김동학 선생은 죽전통 지승전통(종이를 꼬아 만든 화살통) 화피전통 나전칠전통 등 다양한 전통적인 화살통을 현대에 재현해 낸 주인공이다. 여러 가지 전통을 만들려면 각기 다른 재료와 도구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예술적 안목과 고도의 기술도 지녀야 한다. 그는 4대째 내려온 집안의 기예를 이어받고 또 연구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때 생계를 위해 전통이 아닌 가구를 제작해야 했던 그의 사연은 무형유산을 잇고 지켜 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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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8] 국가무형유산 ‘염색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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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Wed, 16 Oct 2024 15:16: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쪽빛’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즐겨 쓰는 시어 중 하나다. ‘내 영혼 속에 잠든 바다/쪽빛 물발로 깨워서’(송수권의 시 ‘쪽빛’의 한 구절),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나태주의 시 ‘사는 일’ 중에서)…. 시인들이 노래한 쪽빛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시마다 상징적 의미가 다르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닮은 푸른빛을 쪽빛이라 불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016/1729059149451288.jpg"/> 쪽물을 들여 완성된 모시, 삼베, 명주, 무명천.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만약 쪽빛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전통 염색의 세계를 한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가무형유산인 염색장(染色匠)이 현재 전문적으로 구현해 내는 색상이 다름 아닌 쪽빛이기 때문이다. 염색장이란 천연염료로 옷감을 물들이는 전통 기술을 지닌 장인을 말한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염색 문화가 발달했다. ‘삼국지’(오환선비 동이전 제30권) 부여조에는 부여족이 자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실을 물들이고 염색한 옷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때에는 염관에 11인의 염장(染匠)을 두고, 염곡전(染谷典)에서 염료 식물의 재배와 수확 등을 관장하도록 했다. 고구려의 염직 문화는 주, 적, 황, 녹청 등 다양한 색채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표현된 당시의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016/1729059171109837.jpg"/> 쪽밭에서 베어온 쪽풀을 독에 담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고려 때에는 도염서에 전문 장인인 염료공과 염색공을 두고 염색을 담당하게 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공장에 청염장, 홍염장, 황단장 등 염색 장인을 색깔별로 분업화시켜 염색 기술이 보다 전문화·고도화됐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국가 관청에서 관리하던 염색 기술이 민간 수공업으로 퍼지면서 가내 비법으로 다양한 전통 염색이 전수, 발달됐다.옷감을 물들이는 데는 천연염료가 사용됐다. 식물, 광물, 동물 등에서 채취한 원료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의 가공을 통해 만든 염료를 썼다. 전통 염색은 원료, 염료 등에 따라 여러 종류로 구분되는데, 그중에서 ‘쪽염색’은 염색 과정이 매우 어렵고 까다로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꼽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016/1729059208832651.jpg"/> 쪽염료를 만드는 중요한 과정인 꽃물 만들기.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쪽염색이란 ‘쪽’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가지고 옷감 등을 물들이는 염색 기술이다. 특히 쪽빛을 면에 입히는 작업은 여간 어렵지 않아 오래전부터 쪽염색이 귀하게 여겨졌다. 고려시대에는 쪽빛을 ‘천년의 빛깔’이라고 하였고, 조선 초 태종 시절에는 경천사상으로 인해 하늘빛을 물들이는 쪽염색을 많이 하기도 했다. 화가들이 쪽 염료로 그림을 그릴 정도였는데,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의 ‘화조도 병풍’에는 꽃과 새가 쪽빛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사실상 쪽염색은 한해살이풀인 쪽을 재배해 염료를 채취하는 작업으로 시작된다. 팔월 초순경  60~70cm 정도 자란 쪽을 베어 물이 담긴 항아리에 넣고 삭힌다. 쪽을 담은 지 2일쯤 지나면 쪽대 밑에 우러난 초록색 물이 보이는데, 여기에 굴·조개 껍질을 구워 만든 석회를 넣으면 색소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침전쪽’이 생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016/1729059237008437.jpg"/> 쪽물을 들인 후 빨랫줄에 널어 말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침전쪽에 잿물을 넣고 다시 7~10일 동안 발효시키면 색소와 석회가 분리되면서 거품이 생긴다. 이 과정을 ‘꽃물 만들기’라고 하며, 여기서 분리된 색소를 염료 물감으로 사용하게 된다.  옷감이나 천에 쪽물을 들이는 과정에도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꽃물이 마련되면 우선 옷감을 ‘정련’한다. 정련 작업은 잿물에 옷감을 넣어 삶아, 천을 짤 때 사용했던 호료나 기름때를 빼고 염색이 고르게 되도록 섬유 올과 올 사이의 모공을 넓혀주는 과정이다. 정련한 옷감을 물에 적신 뒤 쪽물에 차례차례 담가 넣고 다시 전체를 들추어가며 골고루 물이 잘 들도록 착색시킨다. 착색 후 옷감을 건조시키고 다시 물들이는 작업을 최소 8회 이상 반복해야 진한 쪽색을 얻을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1016/1729059256422462.jpg"/> 정관채 염색장이 쪽물 들인 천을 말리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면 등의 옷감을 처음 꽃물에 넣으면 연녹색을 띠었다가 공기 중에 펴면 녹색, 파랑으로 변화해간다. 옛 문헌에서는 쪽염색으로 물들이면 나타나는 색깔을 벽색, 청색, 아청색, 남색, 갈매색, 검푸른색, 반물색, 심청색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쪽빛은 한마디로 푸른색 그 너머의 빛깔까지 아우르는 색깔이다. 쪽빛으로 물든 천이 때론 신비롭고 때론 청아하며 또 때론 소박하게 비치는 이유이기도 하다.염색이 끝나면 맑은 물에서 염색된 천을 반복해서 씻어 잿물을 완전히 빼서 건조시킨다. 이렇게 염색한 쪽물은 옷이 훼손될 때까지 탈색되지 않는다. 명주나 무명, 면일 경우에는 염색된 천을 다듬이질하여 보관한다.전통 염색은 19세기 중반 합성염료가 출현하고 근대화 이후에 화학 염색이 급격히 도입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때 중단되기도 했던 쪽염색은 1970년대 후반 몇몇 장인들의 노력으로 그 맥이 되살아났다. 2001년 함께 초대 염색장으로 인정받은 고 윤병운 선생과 현 기능보유자이기도 한 정관채 선생은 모두 전남 나주에서 쪽염색을 가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평생 쪽밭을 일구고 전통 염색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써온 명인이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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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7] 국가무형유산 ‘송파산대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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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0 Sep 2024 11:34: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지금의 서울 잠실아파트와 석촌호수 일대는 불과 100년여 전만 해도 송파진이라는 큰 나루터가 자리했던 곳이다. 한강을 오르내리는 수운이 발달해 강원도까지 배가 내왕하였고, 육운으로도 다양한 지방 상품이 집결하는 서울, 경기 일원의 상업 근거지였다. 장날이면 270여 호에 이르는 객주집이 성업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루터를 찾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런 송파진을 더욱 유명하게 했던 고유의 놀이문화가 있으니 바로 ‘송파산대놀이’가 그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910/1725935312295486.jpg"/> 옛날 송파장터에서 펼쳐진 송파산대놀이.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송파산대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다. 산대도감놀이란 탈을 쓰고 큰길가나 빈터에 만든 무대에서 연행하던 복합적인 구성의 탈놀음을 일컫는다.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백중·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고, 큰 장이 열릴 때면 어김없이 탈놀이패들이 장터를 휘저었다.송파산대놀이는 200년여 전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때에 성행하여 오늘날의 놀이 형태로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송파에서 탈놀음이 형성되어 발달, 전승된 데에는 상업적 배경이 큰 영향을 끼쳤다. 상인들과 거부들이 장꾼들을 모으고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부금을 추렴해 놀이판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지닌 다른 지방의 유명 연희자들까지 초빙해 산대놀이를 벌이면서 탈판의 규모도 커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910/1725935367505311.jpg"/> 길놀이에 나선 탈꾼들이 행진하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산대놀이가 펼쳐지는 날이면 인근 공터는 축제 마당과 다를 바 없었다. 먼저 탈놀음을 하기 전에 앞놀이로 씨름, 소리판, 땅재주와 같은 민속놀이와 창, 곡예 등이 벌어졌다. 그 뒤에 탈놀이판을 알리고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길놀이가 행해졌다. 송파산대놀이기를 앞세워 악사들이 피리, 징, 장구 등을 연주하며 선두에 서고, 그 뒤에 탈과 의상을 갖춘 연희자들이 행렬을 이뤄 마을을 돌며 공연 장소까지 행진했다. 길놀이는 흥행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잡귀를 쫓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송파산대놀이는 탈놀이 열두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연희자들이 탈을 배열해 놓고 연희를 무사히 마치도록 고사를 지낸 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다. 연희 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삼현육각(장구, 북, 피리 2, 대금, 해금)으로 음악을 반주하는데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 등을 중심으로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910/1725935549022071.jpg"/> 송파산대놀이에서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탈들을 배열해 놓고 고사 지내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놀이가 시작되면 첫 상좌 역의 연희자가 탈을 쓰고 등장하여 사방에 절을 올리고 둘째 상좌가 나와 함께 춤을 춘다. 송파산대놀이의 첫 마당 상좌놀이다. 이어 옴중(옴이 오른 중)과 먹중(먹장삼을 입은 중)이 등장하여 서로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흠을 잡는 내용의 옴중먹중놀이(둘째 마당), 양반들의 못된 행태를 풍자하는 연닢눈끔재기놀이(셋째 마당)가 펼쳐진다.넷째 마당은 북놀이. 먹중들이 북을 가지고 놀다가 애사당(왜장녀의 딸)을 등장시켜 법고(북)를 치게 한다. 수도자가 여색을 탐하는 것을 풍자하는데 그 대사가 촌철살인이다. “니가 ‘법고’ 친다고 해서 훌러덩 벗고 치는 줄 알았더니 그래 이게 ‘벗고’ 치는 거냐?” 애사당이 북을 연타하다가 북을 들고 있는 먹중의 머리를 북채로 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910/1725935431962431.jpg"/> 송파산대놀이의 넷째 마당 북놀이.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수행자들의 게으름을 꼬집는 다섯째 마당 곤장놀이, 부정직한 의술을 비꼬는 여섯째 마당 침놀이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런데 모든 마당이 신랄한 현실 풍자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홉째 마당 취발이놀이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열두째 마당 신할애비 신할미 놀이에서는 신할미가 죽자 극락왕생을 비는 굿을 벌이며 살아 있는 자를 위로하는 무속적인 마당이 펼쳐진다.송파산대놀이의 춤사위는 여타 춤보다 우아하고 섬세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리춤(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등 춤의 유형에 따라 40여 종의 춤사위가 세분화되어 펼쳐진다. 연주도 가락이 섬세하고 여타 가면극과 다른 형태를 띠어 춤사위의 멋을 한층 높여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910/1725935462699601.jpg"/> 송파산대놀이에서 신할애비와 신할미가 부딪히는 장면.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송파산대놀이의 탈들은 주로 바가지와 종이로 만들어진다. 신분과 극중 성격에 따라 눈, 눈썹, 입술 등이 다르게 묘사되는데 투박하지만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탈 모양은 사실적이지만 요소요소를 과장하여 해학미를 더해준다. 놀이에 쓰이는 탈의 수도, 우리나라 탈놀이 중에서도 가장 많은, 33개에 이른다.  조선 후기에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송파산대놀이는 송파진의 성쇠와 명암을 같이했다. 구한말 경인·경부 철도가 부설되어 교통수단이 다양화되고 일제강점기에 다른 상업지들이 발달하여 송파진의 경기가 쇠잔하면서 놀이 문화도 타격을 받게 됐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25년 한강대홍수를 맞아 송파진의 옛 모습이 사라지게 되자 송파산대놀이 또한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옛 마을 주민들이 간간이 탈놀음을 하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보호와 전승의 길이 마련됐다. 현재 송파산대놀이는 이병옥 명예 예능보유자와 함완식 보유자를 중심으로 전수 및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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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6] 국가무형유산 ‘승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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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3 Aug 2024 14:07:07]]></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조지훈의 시 ‘승무’(僧舞)는 이른바 ‘국민 시(詩)’라 할 만하다.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오랜 세월 애송해 온 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승무’ 그 자체의 경우는 어떨까. 시인이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던 전통춤 승무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813/1723525358191702.jpg"/> 승무는 장삼과 고깔을 걸치고 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다. 사진=국가유산청승무는 장삼과 고깔을 걸치고 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다. 장삼은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 승려의 웃옷을 의미하고, 고깔은 승려나 무속인 등이 쓰는, 위쪽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를 뜻한다. 무용가의 복장이 승려의 옷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중춤’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과는 사뭇 다르다.승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불교문화사적 입장에서 본 불교 유래설과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서 나왔다는 설, 탈놀음 중에서 노장춤과 파계승의 번뇌에서 비롯된 춤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다만, 현존하는 승무를 검토해 보면, 지난 시대의 승무 전수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광대나 기녀들에게 춤을 전수받았고, 주된 춤사위 또한 ‘기녀무’인 살풀이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승무는 조선 후기의 광대, 교방 예술인들이 이미 그 이전부터 행해졌던 사찰에서의 승려 무용과 남도 살풀이 춤 또는 궁중무와 탈춤의 한삼춤에 영향을 받아 교방 예술로 재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교방이란 조선 시대에 기녀들을 중심으로 가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구한말에 교방청이 폐지되면서 광대, 기녀 등 예인들이 기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예술적으로 형식을 갖춘 민속춤으로 발전된 것이 오늘날의 승무라 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813/1723525415393115.jpg"/> 고 이매방 선생이 승무를 추는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승무는 무용수가 흰(때론 검은)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흰 고깔을 착용한 채 양손에 북채를 쥐고 홀로 춤을 추는 독무(獨舞)다. 피리, 젓대, 해금, 장고, 북 등 삼현육각으로 반주하는 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동작으로 고뇌와 염원을 표현한다. 특히 장삼소매를 뿌리는 동작이나 장삼자락을 휘날리게 하는 팔동작은 공간을 아름답게 수놓는 춤의 백미로 꼽힌다.승무는 무대 안쪽 중앙에 놓인 북틀 앞에 무용수가 무대를 등지고 엎드린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이다. 정면을 등지고 양팔을 서서히 올릴 때 생기는 유연한 능선, 긴 장삼을 공간으로 뿌리는 춤사위가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어깨춤은 긴 장삼자락까지 수면에 이는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파장이 다시 허리와 다리를 타고 버선코 끝으로 표출된다.염불 장단에 이어진 타령,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던 무용수는 양손으로 북채를 어르다 이내 북치기를 시작한다. 리듬을 타며 북을 연타하는 모습에 마치 주술에라도 홀린 듯, 관객은 저마다 몰입해 숨을 죽인다. 잠시 후 북소리가 멎고 다시 긴 장삼이 허공에 뿌려진다. 무용수는 연풍대(한 발을 내디디며 유연하게 회전하는 춤사위)를 돌고 어깨춤에 사뿐한 걸음이 이어진다. 점차 춤은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깃드는 동중정(動中靜)의 상태로 수렴된다. 마지막으로 무용수가 합장을 하며 춤이 끝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813/1723525453798154.jpg"/> 승무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고 한영숙 선생의 춤사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승무는 달고 어르고 맺고 푸는 리듬의 섬세한 표현과 초월의 경지를 아우르는 춤사위의 오묘함이 조화된 춤이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고 승화시킨 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무용 특유의 ‘정중동·동중정’의 정수가 잘 표현되어 민속무용 중 가장 예술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1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한국인 학교인 인성학교는 부족한 운영 경비를 입장료와 기부금으로 보충하기 위해 신년음악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 당시 영국의 무도 등 여러 가지 춤과 노래를 선보였는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전통춤으로 무대에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승무였다. 타향에서 펼쳐진 승무의 춤사위는 한인 교포들의 심금을 울리고 중국 사람들의 박수갈채까지 받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24년 1월 14일자 기사 참조). 이 일화는 승무가 단순한 민속춤을 넘어, 우리 민족이 사랑하고 또 나라를 빼앗긴 한을 위로받던 상징적 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간 승무는 지역마다 조금씩 특징을 달리하여 전승되어 왔는데, 1900년 이후 무용가 한성준의 노력으로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경기·충청 지방의 승무와 무용가 이대조에 의하여 발전된 호남지방의 승무로 구분된다. 한성준의 승무는 한영숙에게, 이대조의 승무는 이매방에게 전승되어 각각 한영숙류와 이매방류로 발전했다. 한영숙류는 이애주와 정재만이 계승하여 승무 예능보유자로 활동했으며, 이매방류는 현 승무 보유자인 채상묵에게 이어지고 있다.자료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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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5] 국가무형유산 ‘사기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7548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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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Fri, 12 Jul 2024 12:05:51]]></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09년 12월 4일자 영국 주간신문 ‘더 그래픽’(The Graphic)에는 한국을 방문했던 사진기자 톰 브라운이 한국인의 다양한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렸다. 그중에서 ‘서울에서의 쇼핑’(Shopping in Seoul)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그림에는 한 서양인이 도자기를 손에 든 채 상인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110여 년 전, 국운이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에는 외국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상품’이 별로 없었겠지만, 그래도 우리 도자기에 영국 사진기자의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우아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712/1720753129863415.jpg"/> 사기장이 만든 백자청화초문사발.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도기’(陶器)와 ‘자기’(瓷器)로 나누어진다. 장독으로 쓰이는 옹기가 도기의 일종이라면, 청자와 백자는 대표적인 자기라 할 수 있다. 자기는 흔히 ‘사기’(沙器)라고도 불리는데, 백토(고령토) 등을 혼합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말한다. 이처럼 사기를 만드는 전통 기술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가리켜 사기장(沙器匠)이라 하며,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사기장이란 조선시대에 사옹원(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을 일컫던 말이다.예부터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천하제일의 비색 청자로서 그 명성을 국외에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기관인 사옹원에서 자기를 만들었는데,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기의 경우에는 경기도에 따로 설치된 분원에서 특별히 제작했다. ‘경국대전’ 공전에는 사기장 380명이 사옹원에 배정돼 일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712/1720753155573122.jpg"/> 사발의 굽을 깎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받기를 청하는 대목이 나와 우리 자기의 우수성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세종 때에 명 황제 인종의 요구에 따라 10탁분의 백자 그릇을 광주의 요(기물 등을 굽는 가마)에서 만들어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는 관요(정부 관리하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실력 있는 장인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민요(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번창하게 됐다.전통 자기를 만드는 제작 과정은 크게 여덟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흙을 선별해 채취하는 일이다. 보통 도자기 흙으로는 고령토와 사토(모래가 많이 섞인 흙)가 적합하다. 두 번째는 도자의 밑감이 되는 흙(태토)을 만드는 과정으로 ‘수비’(水飛) 과정이라고도 한다. 점토와 원료를 물에 풀어서 가라앉혀 이물질이 제거된 앙금만 걷어서 쓴다. 세 번째는 앙금에서 얻은 보드라운 흙에 물을 부어 반죽하는 ‘꼬박 밀기’ 과정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712/1720753177501644.jpg"/>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네 번째는 물레를 이용해 사발 등의 그릇을 성형하고 건조하는 과정이다. 이때 나무로 만든 물레를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며 모양을 잡는데, 이렇듯 왼발로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 도자기 장인들의 고유한 기술이다. 다섯 번째로, 건조된 사발 등의 그릇 굽(밑바닥에 붙은 나지막한 받침)을 깎고 서서히 말리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여섯 번째는 그릇을 가마에 넣고 800℃ 전후의 온도로 굽는 초벌구이 과정, 일곱 번째는 유약을 만들어 초벌한 그릇에 입히고 건조시키는 과정이다. 초벌구이 후에 그릇에 문양이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유약은 도자기에 액체나 기체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며 겉면에 광택이 나게 한다. 여덟 번째로 1200℃ 이상에서 마지막 단계인 재벌구이 작업까지 마치게 되면 하나의 도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712/1720753208571475.jpg"/> 가마에서 나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 그릇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이 모든 과정 중 하나라도 모자란 것이 있으면 결코 제대로 된 자기가 나올 수 없다고 하니, 사기장의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서민적이면서도 활달한 조선분청사기와 단아한 선비의 향을 담고 있는 조선백자와 같이, 도자기 장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걸작들은 한국적 정감과 멋을 나타내는 전통 도자의 백미라 할 수 있다.초대 사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정옥 선생은 경북 문경에서 210여 년간 7대에 걸쳐 전통 민속 사기를 빚어 온 명가의 후손이다. 선생의 아들(김경식)도 사기장 전승교육사로 활동하고 있으니 8대가 도자기 외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흙이 가마 속 불을 통과해야 아름다움을 얻듯, 김 사기장의 집안도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의 요업이 일본 상인들의 하청 수준에 머무르면서 도자 장인들의 삶도 지극히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고, 광복 이후에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대량 생산되는 다양한 그릇에 밀려 우리 도자기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712/1720753233148587.jpg"/> 김정옥 사기장이 물레를 사용해 주둥이를 다듬는 모습(왼쪽)과 그가 제작한 백자청화초문병. 사진=국가유산청·국립무형유산원 제공김 사기장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선조들의 전통 도자 기술을 그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우리 도자기를 부활시킨 주인공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빚어낸 분청사기와 백자 찻사발, 다기류, 청화백자 항아리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와 명장들이 표방했던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과 멋이 그대로 재현돼 있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4] 국가무형유산 ‘완초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7404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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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8 Jun 2024 09:47:23]]></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1932년 5월 6일 ‘동아일보’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대구 성당동 일대에서 부업으로 ‘완초 슬리퍼’를 만들고 있는데, 프랑스 무역상에게서 그 품질을 인정받아 10만 족의 주문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완초란 전통 자리의 재료로 쓰이는 왕골을 달리 이르는 말. 원래 외국에서 들여오던 슬리퍼를 우리 재료, 우리 손으로 만들어 해외로, 그것도 슬리퍼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수출하게 되었다는 낭보였다. 비록 일제강점기 때의 뉴스이기는 하나, 당시 우리 왕골공예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618/1718671473028184.jpg"/> 왕골로 합을 만드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실제로 우리나라는 예부터 왕골을 재료로 다양한 기물을 만드는 전통공예로 유명했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로 완초, 용수초, 현완, 석룡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골을 이용해 자리(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바닥에 까는 물건), 돗자리, 방석, 송동이(작은 바구니), 합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만들어졌는데, 이처럼 왕골로 기물을 만드는 전통 기술 또는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일컬어 완초장(莞草匠)이라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이미 귀족층을 중심으로 왕골 제품이 쓰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5두품, 6두품이 밖에 다닐 때 완초 자리를 쳤는데, 그 테두리를 견직, 가죽 등 어떤 재질로 만드느냐에 따라 등급을 구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때에는 왕골 제품을 귀히 여겨 왕실에서 주로 사용하였고, 사직신의 신위에도 왕골 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짠 품이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고 고려 자리의 품질을 평하기도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618/1718671498937155.jpg"/> 왕골 공예 과정 중 글자를 엮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조선시대 들어 왕골공예는 더욱 발전하였고 쓰임새 또한 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영을 내려 왕골을 키우도록 지시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조선 초기에 왕골 제품은 궁중이나 상류계층에서 귀중품으로 취급되었는데, 백성이 키운 왕골을 강제로 취하는 일들이 빚어지자 태종이 이를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 또한 왕골 돗자리와 방석 등은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 사용되었고, 외빈에게 주는 답례 선물로도 쓰였다. 조선의 용문석(용의 무늬를 놓아 짠 돗자리), 화문석(꽃무늬 돗자리)이 아름답고 우수해 중국 황실은 물론 사신들이 여러 차례 선물로 요구한 사실이 실록에서 확인된다.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완초장에 해당하는 석장(席匠, 돗자리를 만드는 장인)을 지방 관아에 소속시켜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왕골 제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각 지방의 석장들은 왕골공예의 전문가로 지역별로 특색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순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에는 경기도 강화 교동을 비롯해 영남 예산, 황해도 백천과 연안의 화문석이 유명했던 것으로 기재돼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618/1718671523748096.jpg"/> 왕골공예로 완성된 삼합. 사진=국립무형유산원한 줄기 왕골이 하나의 공예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째는 왕골을 선별하여, 실 가닥처럼 쪼개어 가공하는 과정, 둘째는 왕골 실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처리 과정, 셋째는 색을 입힌 왕골 실을 적절히 배열하고 씨줄과 날줄로 엮어 미적 요소를 살려내는 과정 등이다. 완초장은 이 모든 과정에 능해야 하니 왕골을 다루는 기술과 감각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미적 안목까지 지녀야 한다.  전통 왕골공예의 제작 기법으로는 도구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과 손으로 엮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날줄(자리를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왕골 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도록 성글게 짜는 ‘노경소직’이고, 다른 하나는 날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촘촘히 짜는 ‘은경밀직’이다. 일반적으로 자리와 방석 등은 노경소직으로, 돗방석과 돗자리는 은경밀직으로 제작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618/1718671539631639.jpg"/> 초대 완초장인 고 이상재 선생의 작업 모습. 사진=국가유산청손으로 엮는 방법은 왕골 4날(자리 등을 엮을 때 세로로 놓는 왕골 실)을 반으로 접어 총 8개의 날줄을 정(井)자형으로 엮은 후, 두 개의 씨줄을 엮어 만드는 방식이다. 이 기법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손 감각이 필요하며, 8각 및 원형의 방석을 비롯해 삼합, 송동이 등 다양한 제품을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완초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초대 완초장인 고 이상재 선생이 바로 손으로 엮는 왕골공예의 대가였다. 선생은 고드랫돌, 돗틀과 같은 제작 기구를 다루는 데도 능했지만, 기구 없이 갈구락지(왕골 가닥을 꼬아 날줄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나 골방망이 같은 기초 도구와 손만으로 작품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가 완성한 왕골 공예품은 올이 매우 고르고 안팎이 정연하며 문자나 꽃, 학 등의 무늬와 구도도 매우 자연스러워 평론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사가 오랜 생활문화유산인 왕골공예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었다. 한때 왕골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다채로운 현대 물품이 자리나 방석을 대체하면서 설 자리를 점차 잃고 있다. 생전에 이상재 초대 완초장이 모자 가방 액세서리 등 과거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왕골 제품을 만들어 대중과 소통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현재 완초장은 기능보유자가 없는 상태로, 그의 아내인 유선옥이 전승교육사로, 양인숙이 명예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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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3] 국가무형유산 ‘두석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7255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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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1 May 2024 14:49:46]]></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우리 전통 목가구에는 가구로서의 기능과 미적 가치를 높여주는 작지만 특별한 금속장식이 있다. 가구의 결합 부분을 보강하거나 문을 여닫고 잠그기 위해 부착하는 금속인 장석(裝錫)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장석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가리켜 두석장(豆錫匠)이라 불렀는데, 이는 과거에 장석을 ‘두석’ 즉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황동(놋쇠)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521/1716269479441875.jpg"/> 국화문 장석을 제작하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우리나라에서 금속장식의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시대의 금관, 귀걸이 등을 보면 그 세공 기술이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투조화형’(金銅透彫花形) 장식이나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관모 등을 보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장석을 만드는 전문적인 장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화려하고 세련된 금속장식 문화가 발달했다면,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면서 실용성에 중점을 둔 장석 문화가 자리잡았다. 가령 목가구를 만들 때에도 장석이 화려한 꾸밈의 용도로 쓰이기보다는 경첩, 고리, 들쇠(반달 모양의 손잡이) 등 꼭 필요한 부분에 주로 기능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목가구 등에서 장식성이 강조되고 여성 취향에 따른 금속장식이 유행하면서 세련된 장석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521/1716269507817936.jpg"/> 왕비비와 못비비로 장석에 구멍을 뚫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4명의 두석장이 배속되어 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적 행사나 왕실에서 쓰이는 기물을 제작할 때에 금속장식 전문가인 두석장이 함께 참여하였고, 이들의 손끝을 거치며 기물의 품격이 한층 높아질 수 있었다. 영조가 계비인 정순왕후와 혼례를 치르는 가례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는 당시 기물 제작에 8명의 두석장이 동원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장석의 재료로는 주로 두석(황동)이 쓰였으며, 보다 화려하게 장석을 꾸미기 위해서 백동도 사용되었다. 또한 민간에서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만들 때에는 철판을 쓰기도 했다. 특히 두석은 금과 은에 비해 값이 저렴하고 색상이 매우 아름다워 귀중품을 보관하는 함과 궤를 비롯해 왕실의 각종 장식용 기물을 제작하는 데 널리 사용됐다. ‘승정원일기’에는 제빈(여러 빈) 이하의 탈것(가마)은 두석으로 장식하였는데 색이 금과 같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521/1716269541714415.jpg"/> 자물쇠와 열쇠를 제작하면서 열쇠 구멍을 맞춰보고 있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전통 장석의 제작 공정은 구리 합금 가닥을 두드려 펴서 정으로 쪼고 줄로 쓸고 다듬는 수공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주석이나 백동을 넣어 가열해 녹이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0.5mm 두께의 판철로 늘이고 면을 반듯하게 다듬는다. 여기에 본(밑그림)을 따라 작도와 정으로 오리고 줄로 다듬고 활비비(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활 모양의 도구)와 정으로 문양을 새긴 뒤 사기분말을 묻힌 천으로 문질러 광택을 내 완성한다. “장석이 아름다울수록 두석장의 손은 거칠어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긴 시간과 공을 들여 손품을 팔아야 하는 작업이다.      장석의 종류는 금속장식을 붙이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옷을 걸 수 있는 장)장석, 벼락닫이(위짝은 붙박이고 아래짝만 오르내려 여닫는 창문)장석, 모반(여섯 또는 여덟 모로 된, 음식을 담는 나무 그릇)장석, 전통장석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장석의 문양으로는 나비, 박쥐, 붕어, 학 등 다산과 부귀영화, 수복강녕을 상징하는 동식물, 복(福)과 수(壽) 같은 문자, 기하학적 무늬 등이 쓰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521/1716269571584635.jpg"/> 김극천 두석장이 반닫이에 장석을 부착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대표적인 장석 중 하나인 자물쇠의 경우에는 형태와 문양에 따라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 다양하게 분류된다. ‘쇠통’이란 쇠로 만든 통을 지칭하는 말로 자물쇠를 뜻한다.장석만으로는 하나의 완성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두석장은 각종 기물을 만드는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기물에 맞는 장석을 특별 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목재 기물 제작에서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장석이다. 기물의 기능에 맞게 들쇠, 경첩 등이 만들어지고 부착되어야 비로소 해당 기물이 완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두석장을 목가구에 ‘화룡점정’하는 장인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석장은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초대 보유자인 김덕룡 선생을 거쳐 현재 김극천, 박문열 두 명장이 보유자로 활동하며 작품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김 두석장은 통영 두석의 전통을 4대째 이어받은 토박이 장인으로 김덕룡 초대 두석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박 두석장은 전래되는 다양한 우리 비밀 자물쇠를 재현해 내 이름을 널리 알린 바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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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2] 국가무형문화재 ‘윤도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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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9 Apr 2024 14:00:23]]></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풍수지리에 의거해 묏자리나 집터를 잡곤 했다. 지형이나 방위의 좋고 나쁨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풍수설 때문이었다. 풍수가 또는 지관에게는 결코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윤도(輪圖)이다. 윤도란 24방위를 원 형태로 그려 넣은 우리 전통 나침반인데, 이러한 윤도를 제작하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가리켜 ‘윤도장’(輪圖匠)이라 부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409/1712638585530192.jpg"/> 윤도에 글자를 새겨넣는 각자 작업. 고도의 집중력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사진=문화재청 제공윤도는 여러 개의 동심원이 그려진 원반에 24방위를 새기고 그 한가운데에 지남침을 장치해 방향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윤도의 동심원에는 음양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이십사절기가 담겨 있으며, 이 중에서 팔괘 십간십이지를 조합해 각각의 방위가 배치된다. 윤도를 동양의 우주관을 품고 있는 나침반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주역과 역법이 전해지고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방위를 살필 수 있는 윤도가 제작돼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풍수 지남침’은 신라 후기부터 발달하였고, 고려 전기에는 풍수음양지리와 연결되어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되었다.‘윤도’라는 명칭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선조실록’(선조 33년 9월 23일 기사)에는 지리에 밝은 명나라 사람이 나경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윤도처럼 생겼다고 기록돼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409/1712638677514489.jpg"/> 자연자석에 자침을 붙여 자력을 입히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윤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풍수가뿐만 아니라 뱃사람이나 여행자, 일반인들이 방향을 파악하는 데 이용되는 등 생활과학 도구로 널리 쓰였다. ‘일성록’(정조 14년 7월 29일 기사)에는 표류해 온 유구국(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윤도를 주어 돌아갈 뱃길의 방향을 파악하도록 했던 일화가 담겨 있다.조선시대에 윤도는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 하여 지남철(指南鐵), 몸에 차고 다닌다 하여 패철(佩鐵), 부채에 매달고 다녔다 하여 선추(扇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사대부들은 선추 표면에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실용적인 멋을 뽐내기도 했다.  윤도의 재료는 주로 오래된 대추나무를 사용하는데, 이는 목재 결이 곱고 단단하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윤도는 쓰임새에 따라 만드는 방식이 다소 다르지만, 크게 ‘모양 만들기’, ‘층수 정하기 및 그리기’, ‘분금’, ‘각자’, ‘색 입히기’, ‘자침 만들기’, ‘자침 얹기’, ‘주사 입히기’, ‘자오 맞추기’ 등 여러 공정을 거쳐 제작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409/1712638634383399.jpg"/> 윤도를 만드는 과정 중 하나인 주사 입히기.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위명에 주사를 입힌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대추나무를 원통형으로 깎아 뚜껑과 몸체를 만드는 과정이 ‘모양 만들기’이다. 이어 몸체(윤도판)에 중심점을 잡고, 새겨 넣을 글자 수를 고려해 바깥쪽부터 걸음쇠로 차례로 동심원(층)을 그려나가는 작업이 ‘층수 정하기 및 그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각 층별로 칸을 계산해 선을 긋는 것을 ‘분금’이라 하고, 분금해 놓은 각 칸에 조각칼로 해당 글자를 새기는 것을 ‘각자’라 한다. 특히 표면에 작은 글씨를 새겨야 하는 각자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윤도장의 핵심 공정이다.  ‘색 입히기’는 윤도판 전체에 먹칠을 해 말린 뒤, 자침이 들어갈 중앙원을 손질하고 이후 고운 옥돌가루를 판에 칠해 분금과 각자에 흰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뒤이어지는 ‘자침 만들기’는 쇠바늘을 불에 달구고 다듬어 자침의 모양을 만들고 중앙에 구멍을 내어 균형을 맞춘 뒤, 자연 자석에 붙여 자력을 입히는 공정이다.그 다음으로 주석으로 만든 받침대를 윤도판 중앙에 박고 그 위에 자침을 얹는 게 ‘자침 얹기’, 윤도판에서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글자에 붉은색 주사를 입히는 과정이 ‘주사 입히기’이다. 끝으로 자오(남북)가 맞는지 확인하는 ‘자오 맞추기’까지 마치면 비로소 하나의 윤도로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409/1712638700812765.jpg"/> 김종대 윤도장 명예보유자가 제작한 윤도를 점검하는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전통 윤도는 근대화를 거치며 서구 문물이 보급되고 풍수지리설이 쇠락하면서 그 쓰임새가 크게 줄게 되었다. 근래에는 일부 풍수가나 소장가들에 의해 주문 제작되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북 고창군 성내면 낙산 마을은 조선시대에 흥덕현에 속했던 곳으로 ‘흥덕 패철’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길 정도로 윤도 제작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 마을에서 33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 윤도 기술은 현 윤도장 기능보유자인 김희수까지 4대째 전승되고 있다. 김희수 보유자의 아버지 김종대 선생은 윤도장 명예보유자이자 초대 보유자(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기도 하다.윤도장의 해질 대로 해진 손끝은 전통 윤도를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이제는 공장에서 나침반을 찍어 내고, 스마트폰 앱으로도 방위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의문이 하나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들 부자는 대체 왜 이리 지난한 일을 대를 이어 해내고 있는 걸까. 김종대 명예보유자의 말마따나, 아마도 윤도에는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람의 길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자료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1]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6885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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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4 Mar 2024 10:40:15]]></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단청(丹靑)은 청색·적색·황색·백색·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사찰·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뜻한다. 단청장(丹靑匠)이란 이처럼 단청을 하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몇 가지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능히 만들어 낼 정도로 색감이 뛰어나고, 다양한 무늬와 문양을 구성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미적 안목도 필요한 일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314/1710380193364710.jpg"/> 건물 대들보에 용을 비롯해 다양한 그림과 문양이 단청되어 있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우리나라의 단청은 삼국시대의 고분 등에서 그 기원을 살필 수 있으며,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었다. 고구려 고국원왕 때 조성된 황해도 안악의 안악3호분은 석실 벽면과 천장이 각종 그림으로 채화돼 있다. 그중에 주두(기둥의 맨 윗부분)에 칠해진 귀면문(도깨비 얼굴을 형상화한 문양)과 천장의 연화문(연꽃 모양의 무늬) 등은 당시의 수준 높은 단청 양식을 보여주는 실례로 꼽힌다.우리 고대 문헌사료에서는 ‘삼국사기’의 ‘솔거조’에 ‘단청’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왕왕 새들이 날아와서 앉으려고 허둥대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후에 채색이 낡고 바래자 절의 스님이 ‘단청’으로 보수하였는데 그만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다.고려시대에 단청 문화는 더욱 꽃피웠다. ‘고려사’의 ‘유승단편’에는 “경도(서울)의 호수가 10만 호에 이르렀으며, 거리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큰집들이 줄을 이었다”라는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이는 당시 단청이 일반 민가에까지 크게 유행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조선시대에는 극단적인 배불정책으로 인해 일반 사찰의 단청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왕실 사찰의 경우는 화려한 단청 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궁궐과 사찰의 단청 양식은 서서히 간소화되기 시작한다. 당시 단청에 사용된 진채 안료의 상당 부분이 중국으로부터 고가에 수입되는 것이었다.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관료들은 이를 사치로 규정하였고, 궁궐의 단청까지 호화스럽게 치장하는 데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314/1710380236420015.jpg"/> 타분이 잘 되도록 도안에 대침으로 구멍을 뚫어둔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조선시대에 단청 업무를 맡았던 관청은 국가와 왕실, 사대부에게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였다. 도화서의 화원은 궁중에서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비롯해 궁궐단청, 의궤화, 교화서의 도설(圖說) 등을 그리는 한편 능묘 비석 인장 예복 등의 장식이나 무늬를 도채하는 일을 했다. 단청장이 화사, 화공 등으로도 불렸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전통 단청을 하는 과정은 먼저 단청을 올릴 건축물의 바탕을 닦는 데서 시작된다. 전통 아교를 넣고 묽게 끓인 물을 바탕에 바르고 거기에 가칠을 다섯 번 반복한 뒤 초지(草紙)를 마련한다. 초지에 단청할 초안 그림을 그대로 옮겨 도본을 만들고, 문양의 윤곽선에 대바늘로 구멍을 뚫는다.그 다음에는 초지 무늬를 건물에 올리기 위해서 바탕의 전체 면에 청록색 흙을 바르는 청토바르기를 한다. 그 후 도본(圖本)을 해당 면에 대고 분주머니를 두드리면 본의 무늬에 나 있는 구멍으로 가루가 나와 바탕에 무늬가 박히게 된다. 이렇게 타분작업(打粉作業)이 끝나면 그 본에 따라 광물성 안료로 청·적·황·백·흑의 오색을 입히는데 각기 맡은 색을 찾아 그리며 칸을 메워 단청을 끝내게 된다.목조 건축물에 단청을 하는 이유는 우선 목재 표면이 갈라지거나 비, 바람 등 자연현상으로 인한 부식과 충해를 방지하고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잡귀를 쫓아내는 벽사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단청이 쓰였다. 또한 건축물의 격을 나타내거나 특수한 건물의 용도에 맞는 장엄성과 위엄을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314/1710380269523141.jpg"/> 시분 즉, 문양의 테두리에 분선을 긋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일례로 궁궐에서 국왕이 정사를 돌보는 가장 상징적이고도 웅장한 건물인 정전에는 국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장식되었다. 대개 정전의 단청 양식은 정적이고 웅건한 멋을 지니는데, 독특하고 권위적인 상징무늬와 색채가 호화로우면서도 은근한 기품을 보여준다.정전의 머리초(보, 도리, 서까래 따위의 끝부분에만 넣는 무늬)에는 연화·주화·모란·국화 등의 문양을 단청했는데, 각기 군자·만사형통·부귀·장수를 상징했다. 정전의 내부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 무병장수를 뜻하는 학·모란 등의 무늬로 장식했다.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했던 한국·중국·일본에서 유행했으나, 오늘날까지 단청문화의 전통이 계승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단청장은 197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유병순 기능보유자를 비롯해 양선희 최문정 이욱 전승교육사 등이 후학 양성과 단청문화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자료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90] 국가무형문화재 ‘안동차전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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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0 Feb 2024 14:38:23]]></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격렬한 모의전투 놀이가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펼쳐지던 ‘안동차전놀이’가 그것이다. 차전(車戰)놀이는 마을 청장년들이 동부, 서부로 패를 갈라 ‘동채’를 서로 부딪쳐 승부를 겨루는 집단 놀이다. 동채란 굵고 긴 참나무를 지겟다리 모양으로 엮어 만든 커다란 놀이 도구이다. 양편의 대장이 각각 동채에 올라타 대결을 진두지휘하고 상대의 동채를 눌러 먼저 땅에 닿게 하는 쪽이 이기게 된다. 그래서 차전놀이를 ‘동채싸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220/1708406910827544.jpg"/>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펼쳐지던 ‘안동차전놀이’는 마을 청장년들이 동부, 서부로 패를 갈라 ‘동채’를 서로 부딪쳐 승부를 겨루는 집단 놀이다. 부산 광복로에서 공연된 차전놀이. 사진=연합뉴스‘양반의 고장’ 안동에서 차전놀이가 대대로 이어져온 까닭은 무엇일까. 정확한 연원은 확인되지 않으나,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펼쳐진 양군의 대결에서 왕건이 견훤을 물리쳤으며 이로 인해 집단 모의전투 놀이인 차전놀이가 유래했다는 것이다.조선 후기의 학자인 임만휘가 남긴 ‘만문유고’에는 동채싸움 장면을 묘사한 한시가 수록돼 있다. ‘벼락치듯 빠른 놀림 이길 틈 엿보며 / 엎치락뒤치락 좋은 날 좋은 시비’라는 구절로 시가 시작되는데, 이는 당시 안동차전놀이가 좋은 볼거리요 즐거운 축제놀이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차전놀이의 준비 작업은 동채를 만들 나무를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고을 어른들이 결전의 날을 정하면, 주민들은 동부, 서부로 패를 나눠 안동은 물론 멀리 영양 청송 봉화까지 가서 좋은 목재를 구해왔다. 길이 10m쯤 되는 곧고 튼튼한 참나무를 으뜸으로 쳤다. 산신에게 고사를 지낸 뒤 나무를 베어 안동으로 운반해 보관하고, 이 과정에서 부정한 사람이 근처에 오는 것을 막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220/1708407042667202.jpg"/> 양 진영이 결전을 하기 위해 동채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동채를 만들 때는 특히 보안에 신경을 써서 다른 사람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그고 작업을 한다. 동채의 크기, 견고성 등에 따라 맞대결 때 작전이 달라질 수 있고, 승패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동채는 두 개의 굵고 긴 나무를 X자형 사다리꼴로 서로 묶어 연결시키고, 아래쪽은 2m쯤 사이가 벌어지도록 만든다. 그 중간에 몽둥이 두 개를 가로로 대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설 수 있도록 널판때기를 대어 튼튼하게 묶어 완성한다.동부 서부, 두 패의 대장은 동채의 널판때기에 올라타 왼손으로는 동채 앞부분과 연결된 줄을 잡아 균형을 유지하고 오른손으로는 동채꾼들을 지휘한다. 동채꾼이란 동채를 어깨에 메고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연희자를 말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220/1708407073670759.jpg"/> 원동채를 메고 가는 동채꾼과 팔짱을 낀 채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머리꾼.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등채 앞에는 돌격대이자 전위대 격인 머리꾼들이 포진해 선두에서 맹렬한 어깨싸움을 벌인다. 머리꾼은 기운이 센 장정들로 구성되는데,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팔짱을 끼고 어깨로 미는 이른바 ‘밀백이’로만 상대 진영을 흩어놓고 격퇴시켜야 한다. 특히 수백 명의 동채꾼, 머리꾼들이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동채 앞머리를 높이 쳐들고 전진하는 모습은 진취적 기상이 있어서 관중들을 감동시킨다.안동 고을 사람들을 두 패, 동부 서부로 나누는 방법도 이채롭다. 일반적으로 집단놀이에서는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패를 가르지만, 안동차전놀이에서는 태어난 곳을 위주로 편을 나눈다. 때로는 부부간에도 편이 다를 수 있어 남편은 동부에서 동채를 메고 아내는 서부 쪽에서 응원하는 일도 빚어진다. 마을 청년과 장년들은 놀이에 직접 참여하고 부녀자들은 응원으로 힘을 보태는데, 고을 양반들은 가담하지 않고 관전만 하였다고 한다.  안동차전놀이는 주로 강가의 너른 백사장이나 보리밭에서 펼쳐진다. 동부 서부 양편이 대치한 가운데 풍물놀이로 흥을 돋우고 동채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서로 기세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동채 위에 있는 양편의 대장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격돌이 시작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220/1708407181354008.jpg"/> 민속학자들은 안동차전놀이를 안동 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이 깃들어 있는 세련된 집단놀이로 평한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승리하는 지역에 풍년이 든다는 민간의 믿음 때문에 양측의 대결은 한 치 양보 없이 팽팽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싸움 도중에 아무리 자기편이 유리한 순간이라도 꼭 지켜지는 불변의 규칙이 있다. 상대편의 머리꾼이 쓰러져 위기에 처하면 즉시 동채를 후퇴시켜 먼저 구출을 하고 다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야말로 호탕하고 당당한 대결이다. 승리보다 사람을 앞에 뒀기에 안동차전놀이는 민속놀이이자 고을 축제로 이어져 올 수 있었다. 민속학자들은 안동차전놀이를 안동 지방 특유의 상무정신(무를 중히 여기고 외부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세련된 집단놀이로 평하기도 한다.안동차전놀이는 일제강점기 때 연행이 엄금되었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1966년 안동중학교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교사들이 김명한(차전 초대 예능보유자)의 도움을 받아 약식 동채싸움을 복원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안동차전놀이(동채싸움)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연이어 수상하였고 이를 계기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차전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선생과 (사)안동차전놀이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및 공연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자료 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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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9]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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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6 Jan 2024 17:16: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116/1705392570887966.jpg"/> 태평무는 바닥에 발이 붙어 있지 않는다고 표현될 정도로 발동작이 화려하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일요신문]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춤을 즐겼던 흥의 민족이다. 요즘 K컬처가 지구촌을 들썩이게 하는 것도 이러한 ‘흥 DNA’가 우리 핏줄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 왕조 시대의 왕들은 어땠을까. 그들도 과연 춤을 췄을까.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는 왕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정종 2년, 1400년 3월 4일)이 남아 있다. “연향을 베풀고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세자가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종실록’(1418년 12월 15일)에도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베푼 잔치에서 “두 분 상왕(태종과 정종)이 서로 붙잡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적혀 있다. 흥의 DNA는 결코 왕들도 비켜 가지 않았다.만약 왕들이 추던 춤이 궁금하다면,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太平舞)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평무는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뜻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구한말의 이름난 고수(鼓手)이자 무용가였던 한성준이 경기 무속춤을 재구성하여 추었던 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성준은 고종과 대원군 앞에서 멋진 춤사위를 펼쳐 ‘참봉’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전설적인 춤꾼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116/1705392586712847.jpg"/> 태평무는 왕과 왕비의 춤이다. 무용가가 왕과 왕비의 복장을 갖추고 궁중풍의 웅장하고 화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경기 무속춤 중에는 ‘왕꺼리’라는 춤이 있다. 이 춤은 무속인들이 왕을 위해 추던 춤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왕꺼리가 조선의 임금이 추었다고 해서 생긴 ‘옛날 춤’에서 유래했다는 게 한성준의 주장이다. 한성준은 일종의 궁중 무용이었던 이 옛날 춤이 변하고 변해서 전해 내려와 ‘왕꺼리’가 된 것을 자신이 옛 장단도 찾아내고, 형식도 훨씬 고전에 충실하도록 고치고, 춤 이름도 ‘태평춤’이라 바꿔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태평무라는 이름에서는 빼앗긴 나라에 살던 춤꾼의 숨겨진 염원이 엿보인다(조선일보 1931년 11월 8일 ‘조선춤 이야기’ 코너, ‘조선음악무용연구회 한성준’ 기사 참고).  태평무는 왕과 왕비의 춤이다. 무용가가 왕과 왕비의 복장을 갖추고 궁중풍의 웅장하고 화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한성준은 이를 두고 “그야말로 팔 하나 드는 것과 다리 하나 떼어놓는 것을 점잖게 유유하게 추는 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116/1705392594688702.jpg"/> 태평무 군무 중 도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손동작을 펼치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태평무의 춤장단은 경기도 도당굿(도당에 모여 그 마을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굿)의 장단을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주 음악은 징, 장고, 꽹과리, 바라, 대금, 해금, 피리로 연주한다. 춤장단은 낙궁(무대 앞으로 나갈 때의 장단), 진쇠(8분의 12 박자로 율동성이 강한 장단), 터벌림(8분의 15 박자의 무게감 있는 장단), 도살풀이(4분의 6 박자의 흥겨운 장단)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다른 춤장단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고 까다롭다.이러한 장단의 변화에 맞추어 독특한 장단사위(발동작)가 펼쳐진다. 태평무를 출 때는 바닥에 발이 붙어 있지 않는다고 표현될 정도로 발동작이 화려하다. 겹걸음, 잔걸음, 무릎 들어 걷기, 뒤꿈치 꺾기 등 디딤새의 기교가 현란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절제미를 보여준다. 태평무는 춤추기가 굉장히 어려운 춤으로 꼽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엇박자를 타는 것처럼 장단 사이로 동작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장단 사이를 노니는 듯한 발동작은 태평무만이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4/0116/1705393057125481.jpg"/> 양성옥 예능보유자가 태평무를 추는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태평무의 춤사위는 섬세하고 우아하며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다. 태평무는 춤을 추고 또 이어받은 이들의 기질에 따라 그 색깔과 느낌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동안류의 춤은 서민적인 소박함과 귀족적인 정서가 혼합된 형태로 흥과 멋, 장중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강선영류의 춤은 엄숙함과 장중함이 배어 있고, 율동이 크면서도 팔사위(팔의 동작)가 우아하고 화려하여 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영숙류의 춤은 장단에 맞게 춤동작이 변화하며, 민첩하면서도 세밀한 발디딤새가 특징이다.태평무는 우리나라 춤 중에서 가장 기교적인 발짓춤이라 할 수 있는 공연예술로서 민속춤이 지닌 특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 자락과 함께 펼쳐지는 현란한 발동작과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손동작은 세계 유수의 춤에 견줄 만큼 예술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8년 한성준의 제자인 강선영이 태평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재 이명자 양성옥 박재희 세 명인이 예능보유자로서 활발히 공연 및 전수 활동을 펼치고 있다.강선영과 한영숙(한성준의 손녀)에 따르면 한성준은 태평무를 너무 사랑해 자신이 죽은 뒤 태평무 의복으로 수의를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영원한 춤꾼인 그는 어쩌면 땅속에서라도 나라와 국민의 평안을 위해 춤을 추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자료 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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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8] 국가무형문화재 ‘누비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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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2 Dec 2023 15:07:44]]></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패딩”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오래전 누군가는 “규방 예술의 극치”라고 평가하기도 했던 우리 옷이 있다. 바로 전통 누비옷이다. 누비옷은 누벼서 만든 옷 즉, 누비 기법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누비’란 옷감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 털, 닥종이 등을 넣고(때론 아무 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이 죽죽 지게 규칙적으로 한 땀 한 땀 꿰매어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이러한 전통 누비 기능, 또는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누비장’이라 일컫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212/1702360902517112.jpg"/> 김해자 누비장은 각고의 노력 끝에 명맥이 거의 끊긴 전통 누비를 되살렸다. 사진=문화재청 제공우리나라에서 누비 문화는 고려 말 면화 재배 이후 적극적으로 활성되었다. 이때부터 누비의 주요 소재인 목화솜이 널리 보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상고시대부터 명주솜이나 동물의 털, 식물성 섬유 등을 이용한 누비 기법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경 조성된 고구려 고분벽화인 감신총 서벽의 무인상에서도 사선과 횡선으로 누벼진 갑주를 찾아볼 수 있다.‘누비’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정약용은 우리말 연구서 ‘아언각비’에서 기워 꿰맨 옷을 가리키는 ‘납의’(衲衣)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자를 잘못 옮겨 ‘누비’라고 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납의는 청빈한 삶을 사는 승려들이 산중에서 수도하면 낡고 해진 옷을 오랫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처럼 천을 덧대어 바느질하는 방식이 점차 누비 기법으로 발전하였고, 그 방한 효과와 실용성 때문에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212/1702361048095124.jpg"/> 누비 기법으로 애기노랑저고리를 만드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실제로 누비는 오래전부터 방한용, 호신용, 종교용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돼 사용되었다. 동절기에는 방한을 위해 누비옷을 지어 입었고, 추위를 막기 위해 누비 기법으로 침구류를 두툼하게 만들어 쓰기도 했다. 또한 무관들이 착용하는 호신용 갑옷의 심감으로 무명 누비를 두세 겹 받치기도 했다. 중요민속자료인 정충신(조선 인조 때의 무신)의 갑옷을 보면 두정갑(안감에 작은 철판들을 대고 못으로 고정해 누빈 갑옷) 안쪽에 무명을 두세 겹으로 누빈 것을 볼 수 있다.누비는 복식 이외에도 중요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됐다. 일례로 벼슬아치들이 예복에 두르는 띠(품대 또는 각대)를 넣어두던 각대집을 들 수 있다. 품대는 금속이나 가죽, 뿔, 종이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명주에 솜을 넣어 누빈 기다란 각대집을 만들어 품대를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이 밖에 음식을 담는 그릇을 보호하고 음식물이 식지 않도록 솜을 넣고 누빈 그릇덮개, 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덮어 둘 수 있도록 명주와 기름종이를 사용해 누빈 보자기 등도 조상의 지혜가 엿보이는 생활용품이라 할 수 있다. 장식용으로 누비가 활용된 사례도 적지 않다. 첫돌에 아기가 착용하는 타래버선(돌 전후의 아기가 신는 수가 놓인 누비버선), 다채로운 색상으로 다양한 무늬를 표현한 누비주머니 등은 특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누비의 색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212/1702360994708046.jpg"/> 누비 기법으로 만든 치마저고리.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오래전 누비옷이 각광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실용성이 높다는 데 있었다. 우리 민족은 사계절의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모시나 삼베, 광목, 명주나 비단 등 여러 가지 소재로 솜옷, 누비옷, 겹옷, 홑옷 등을 다양하게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겹옷이나 솜옷 등은 세척할 때마다 다시 재단 상태로 뜯어서 빨고 꿰매서 입어야 했다. 반면 얇은 누비옷이나 누비이불 등은 완성된 상태로 세척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반복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숙달된 장인도 누비옷 한 벌을 만드는 데 20여 일이 걸릴 정도로, 누비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지만, 실용성 덕분에 수많은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그 기법이 전해질 수 있었다.누비는 누비는 간격에 따라 잔누비(0.3cm), 세누비(0.5cm), 중누비(1cm 이상)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볼록누비·납작누비로 구분된다. 옷감 2겹만을 누벼주어 겉모양이 오목오목하면 오목누비라 하고, 솜을 여유 있게 두고 누벼주어 겉모양이 볼록한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볼록누비라 한다. 또 옷감만으로 누벼주어 평면적이면 납작누비라 구분하였다. 누비용 실은 먼저 길이를 일정하게 잘라 초를 먹인 다음 다려 놓고 썼는데, 이는 바느질 과정에서 솜이 묻어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활의 지혜이기도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212/1702361022319021.jpg"/> 누비로 만든 두렁치마의 주름을 잡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우리 선조들은 단순한 기법의 누비를 점차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미적 감각을 더해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했다. 조선 순조 때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문신 김노상의 ‘부연일기’에는 세누비로 만든 옷감이 우수해 청나라에서 공물로 요구하였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우리 전통 누비는 세계에서 유일한 재봉 기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에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재봉틀이 보급되면서 옷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라져갔다.명맥이 거의 끊긴 전통 누비를 되살린 이는 초대 누비장이자 현 누비장인 김해자이다. 그는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유물을 스승 삼아 누비를 공부하고, 구전으로 전해진 전통 기법을 아는 이들을 찾아가 배우는 각고의 노력 끝에 전통 누비옷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누비장 기능보유자로 선정된 그는 자신이 복원한 전통 누비 기법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누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시킨 다양한 누비옷을 만들어 누비의 생활화에 기여하고 있다.자료 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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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7] 국가무형문화재 ‘대금정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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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09 Nov 2023 14:15: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오래전 신라는 ‘피리의 나라’였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을 통해 전해지는 ‘만파식적’ 설화도 용이 보내준 대나무로 만든 영험한 피리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신라에서 쓰이던, 세 종류의 가로로 부는 대나무 피리를 일컫는 ‘신라 삼죽’(대금·중금·소금)이란 명칭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109/1699506597563537.jpg"/> 대금정악 연주회.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신라 삼죽 중에서 가장 긴 관악기는 대금(우리말로 젓대)인데, 바로 이 대금으로 우리 국악 중 ‘정악’을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켜 ‘대금정악’(大笒正樂)이라 한다. 정악’이란 우아하고 바른 음악이라는 뜻으로, 궁정이나 관아 및 풍류방(각 지방의 풍류객들이 모여서 음악을 즐기던 장소)에서 연주하던 음악을 말한다.대금의 변화무쌍한 음색만큼이나, 대금정악의 가락도 변화난측하다. 대금정악은 영롱하나 가볍지 않고 부드러우나 유약하지 않으며, 섬세하나 천박하지 않은 오묘한 맛의 가락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는 이 독특한 전통음악을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대금은 대대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전통악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곡이 324곡에 이를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은 물론 왕까지 대금을 직접 불며 즐겼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우왕이 손수 취적(피리를 붊)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충렬왕 때에 대금을 잘 불어서 요행히 관직에 나아간 벼슬아치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109/1699506607182681.jpg"/> 대금 연주.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조선시대 전기의 기록물에서는 ‘악기’ 대금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성종 때의 음악 서적인 ‘악학궤범’에는 대금을 만드는 방법과 운지법까지 설명돼 있다. 조선 초에 대금의 재료로 쓰이는 대나무 ‘적죽’은 지방에서 왕실로 올려 보내는 중요한 진상품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는 적죽의 무늬, 무게, 마디 모양을 직접 언급할 정도로 대금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 초의 문신 맹사성과 아악을 정리한 학자 박연 등은 관료 중에서 대표적인 대금의 명수였다고 한다.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유교적 이념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대금의 위상도 달라진다. 향악과 향악기에 관한 지배층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대금은 거의 전문 연주자의 전유물로 남게 되었다. 향악이란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당악(당·송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의 속악)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대금은 관악기 중에서도 가로로(옆으로 쥐고) 부는 횡취악기에 속한다. 따라서 단소, 퉁소 등 세로로 부는 악기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대금을 구성하는 대나무 관대를 보면, 한쪽 끝은 막혀 있으며, 첫마디에 나 있는 취구(입김을 불어넣는 구멍)를 시작으로 지공(손가락 끝으로 짚는 구멍), 청공(취구와 지공 사이의 구멍), 칠성공(악기의 아래 끝에 있는 몇 개의 구멍)이 차례로 뚫려 있다. 이 중에 청공에는 갈대로 만든 청(얇은 막)을 발라 맑은 떨림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고, 칠성공은 높은 음을 조절할 때 쓰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109/1699506622014459.jpg"/> 대금 연주를 위한 운지법.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악학궤범’에는 대금을 만드는 재료로 누런 색깔의 대나무인 황죽이 언급된다. 그러나 대금의 고수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재료는 쌍골죽이다. 쌍골죽은 대나무 수천 그루 가운데 한둘 정도 나오는 일종의 돌연변이체인데, 두께가 두껍고 단단하며 속이 차 있어 대금을 만들기에 제격이다. 쌍골죽으로 만든 대금은 음정이 정확하고 음색이 맑기로 정평 나 있다. 일반적으로 대금은 ‘대나무 진을 빼고 곧게 펴기 - 내경(대나무 속) 뚫기 - 취구 뚫기 - 지공 뚫기 - 청공 뚫기 - 줄 감기 - 청 붙이기 - (청을 보호하기 위한) 청가리개 씌우기’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대금은 저취와 역취를 적절히 오가며 손가락을 움직여 연주를 한다. ‘저취’는 낮은 음이나 은은한 소리가 나도록 여리게 부는 연주법이고, ‘역취’는 높은 음이나 청아한 소리가 나게 힘주어 부는 연주법이다. 안정적으로 호흡이 이어져야 연주가 가능하므로 허리와 어깨를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대금이 바닥과 수평을 이루도록 옆으로 들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대금이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쪽 끝에 쌀이 든 자루를 묶어서 연습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대금은 다른 국악기에 비해 음량이 풍부하고 음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서 독주악기로도 자주 쓰인다. 대금으로 연주하는 정악 곡에는 궁중음악과 함께 영산회상, 가곡 등 일부 민간 음악까지 포함된다. 영산회상은 궁중의 나례의식에서 처용무 행사에 쓰이던 음악이 궁궐을 벗어나 민간에서 연주되며 기악곡으로 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현 대금정악 예능보유자인 조창훈 선생은 국악사양성소 1기생 출신으로 초대 대금정악 보유자였던 고 김성진 명인의 제자이다. 조 보유자는 반세기 넘게 대금정악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수년간 단소를 가르친 이력도 있다.자료협조=문화재청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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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6] 국가무형문화재 ‘석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6051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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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2 Oct 2023 10:43:4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조선 후기의 화가 강희언이 그린 ‘돌깨기’(석공공석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선비 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석공도’를 본떠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실려 있는 ‘화원별집’에는 “공재의 석공 그림을 배워 그리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기도 하다. ‘돌깨기’는 개울 옆에 있는 바위에 정을 대고 내리쳐 돌을 깨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정을 잡고 있는 왼쪽의 나이 든 석공은 몸을 반쯤 젖힌 겁먹은 표정이고, 무거운 망치를 든 젊은이는 정확한 타격점을 잡으려는 긴장된 모습이다. 화가가 석공이 돌을 깨는 모습을 풍속화로 담은 것은 당시 석조 문화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012/1697074682383057.jpg"/> 강희언이 그린 ‘석공공석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제공실제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석조문화유산이 전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을 ‘석장’(石匠)이라 일컫는데,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에 남아 있는 불상, 석탑, 석교(돌로 만든 다리) 등이 이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더 크게는 돌을 재단하고 쌓아 성벽을 짓거나 석조 건축물을 만드는 것도 이들의 영역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인 석공 집단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시기로 여겨진다. 미륵사지 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석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석조문화는 더욱 수준이 높아지는데, 이 시기에 제작된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 석굴암 석굴 등은 우리 석조형물의 정수로 평가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012/1697074766960752.jpg"/> 도드락 다듬 작업을 하고 있는 이재순 석장.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불교문화가 꽃피었던 고려시대에는 사찰의 건립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석탑과 석등, 석불 등 석조형물이 더욱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왕사나 대사 등의 석조부도(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 건립에 중앙에서 ‘국공’(조정에 소속된 장인)을 파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민간과는 별개로, 국가에서 솜씨 좋은 석장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조물의 조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소실된 사찰의 건물, 불상 등의 복원에 나서고, 성이나 궁궐, 왕릉 등에 석조건축물이 건립 또는 복원되면서 석조문화의 발전을 이어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012/1697074795909121.jpg"/> 이의상 석장이 작업하는 모습.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일례로 ‘화성성역의궤’에는 수원 화성의 건축 당시 동원되었던 석장 642명의 이름과 출신지역, 맡은 일뿐만 아니라 사용된 도구까지 수록되어 당시의 발달된 석조기술을 짐작케 해준다. 우리 석공예의 재료로는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을 비롯해 납석과 청석, 대리석 등이 활용되어 왔다.그렇다면 전통적인 석장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석조물을 제작했을까.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장은 석구조물과 석조물, 크게 두 분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중 석구조물의 제작 과정은 크게 석재 채취, 운반, 가공, 석축·성곽 쌓기의 순서로 진행된다. 석재를 채취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석재의 결과 절리를 찾아서 구멍을 뚫고 할석(돌 깨기)하는 것이다. 함부로 할석하게 되면 석재가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쪼개지게 된다. 따라서 석장은 무엇보다도 결과 절리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012/1697074815808129.jpg"/> 석조각품 마무리 작업 중인 이재순 석장. 사진=문화재청 제공석재 가공은 석재를 마름질(치수에 맞도록 자르는 일)한 뒤 이를 다듬는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다듬는 과정은 메다듬(불필요한 부분을 쇠메로 쳐 떼어냄), 정다듬(거친 표면을 정으로 평평하게 다듬기), 줄다듬(정의 방향이 일정하게 줄을 이루도록 다듬기), 도드락다듬(도드락망치로 표면 다듬기), 잔다듬(평면을 평탄하게 다듬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석조물의 제작은 작품을 구상해 그 초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 기본도면 작성, 모형 제작, 모형 본뜨기(모형과 실제 구상한 형상의 비율을 계산해 석재에 표시하는 것), 다듬질(메와 털이개를 사용해 형태를 잡아가는 것)을 거쳐 제작한 석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1012/1697074840136037.jpg"/> 성곽 보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의상 석장. 사진=문화재청 제공전통적인 방식으로 모형 본뜨기 등을 하면, 현대 석조각물 제작에 쓰이는 기계를 사용했을 때보다 정확도가 떨어지며 시간도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석장의 영감과 기술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작업을 손으로 직접 하는 전통 방식을 거침으로써, 석조형물은 정형화된 기계식 석조각물과 달리 생명력 있는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우리 정부가 석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유는 시대가 변하고 다양한 기계가 도입되면서 전통 석조제작 기법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석구조물 분야에서 이의상 석장이, 석조물 분야에서 이재순 석장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기술의 전수와 후학 양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자료 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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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85] 국가무형문화재 ‘금박장’]]></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45888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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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2 Sep 2023 15:46:00]]></pubDate>
            <category><![CDATA[일요캠페인]]></category>
            <author><![CDATA[chance@ilyo.co.kr | 채찬수 기자]]></author>
            <description><![CDATA[[일요신문]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많은 이가 익히 알고 있는 국민 가곡 ‘그네’(김말봉 시, 금수현 곡)의 노랫말 중 일부다. 그런데 그네를 타는 어느 처자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에서 ‘금박물린 저 댕기’란 구절이 눈길을 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912/1694500343605100.jpg"/> 댕기에 금박을 박아넣는 작업.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댕기는 길게 땋은 머리끝에 드리는 장식용 헝겊이나 끈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에 금박 장식을 입힌 것을 두고 시인은 “금박물린”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가 광복 직후인 1946년에 나온 점을 감안하면, ‘금박’은 우리 복식 문화에 꽤 오래전부터 이름을 올렸던 전통공예 중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실제로, 우리 전통 복식에는 화려하고 품격 있는 금박이 많이 쓰여 전문 장인을 따로 두었는데, 이처럼 얇은 금박을 이용해 직물 위에 다양한 문양을 찍어내는 기술과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일컬어 ‘금박장’(金箔匠)이라 한다.삼국시대 왕릉이나 분묘에서는 금박을 입힌 유물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를 통해 금박 장식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당시 금박 기술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일례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 두침(머리 부부의 받침대)과 족좌(발받침 장신구)에는 테두리를 금박으로 두르고 육각형 문양을 금박으로 꾸민 장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금박장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염색 일을 맡아보던 관서인 도염서에 금박장을 두어 금박 관련 일을 관장하게 한 것으로 나타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912/1694500366209115.jpg"/> 금박장 보유자 고 김덕환 선생이 작업하는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조선시대에는 금박 일이 전문적으로 세분화되어 금박장, 도다익장, 부금장, 니금장 등 금박과 관련된 다양한 직급을 두었다. 가령 금박장과 니금장은 금박의 재료인 얇은 금판과 니금(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을 만들던 장인이고, 도다익장, 부금장은 금박 등을 옷감에 올려 금문(금박으로 만든 문양이나 글자)을 박아 내는 일을 맡은 장인을 뜻했다. ‘경국대전’에는 상의원에 4명, 본조에 2명의 금박장을 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기계로 금박을 만들게 되면서 금박장의 일이 축소되었고 그 기법마저 단절되면서 현재는 부금장의 기능만 남게 된 상태다.조선시대에 금박 장식은 주로 왕실에서 사용됐으며,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쓸 수 있는 문양도 엄격히 제한됐다. 당시 직물에는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글자나 무늬가 많이 사용됐는데 금박 문양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부귀, 장수, 공명, 평안 등에 대한 기원을 문양에 담아 다양한 형태로 금박 장식이 만들어졌다. 그중 봉황문은 용과 함께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으로 사용됐으며, 복(福)·수(壽)·희(喜)·만(卍) 등 길상 문자를 도안으로 사용하는 문자문과 난초 모란 국화 연꽃 등을 묘사한 화문도 유행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912/1694501023858752.jpg"/> 문양판에 부레풀 바르기.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전통 방식의 금박 장식은 크게 금박 만들기(칠지 만들기-금박 만들기), 금 올리기(금박판 만들기-금박풀 만들기-금박 올리기-건조시키기-금 털어내고 뒷손질하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선 장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새긴 문양판(금박판)을 만드는 것이 첫 단계. 그 뒤 문양판에 아교나 부레풀(금박풀)을 발라 직물에서 문양을 넣고자 하는 위치에 찍게 된다. 직물에 묻어난 아교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금박(지)을 붙이고 문양 바깥 부분의 금박은 떼어내는 것이 다음 단계. 직물에 찍힌 문양을 세밀히 수정해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이 마무리에 해당된다.금박장 기술은 사용자에 따라 옷에 어울리는 문양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문양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 주 재료인 아교와 금박의 물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특히 판에 문양을 제대로 새기려면 십 년 이상의 숙련된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나뭇결의 방향과 성질을 살피고 조각칼의 힘을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문양판이 나오기 때문이다. 장인이 꼬박 매달려도 문양 하나를 완성하는 데 열흘 이상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기능보유자인 김기호 금박장은 조선 철종 때 고조부 김완형을 시작으로 5대에 걸쳐 왕실 장인 가문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완성도 높은 금박 작품으로 우리 전통기술을 세상에 알렸던 고 김덕환 선생이 그의 선친이자 전임 보유자다. 김기호 금박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산업용 로봇 설계를 맡았던 엔지니어였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과감히 전직해 사반세기 동안 전통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부인 박수영 씨 또한 금박장 이수자로서 부부가 빛나는 금박 인생을 살고 있다. 두 사람은 금박 기술을 현대 공예에 접목시키고 조형예술로 확장하는 등 새로운 전통기술의 시대를 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자료협조=문화재청]]></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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