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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정치비화/폭풍전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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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정치비화/폭풍전야</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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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1 Apr 200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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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60화 마지막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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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1 Apr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401/1049124003302710.jpg" alt=""/>    ▲  ‘참여정부’의 기치를 내건 노무현 정부는 늘어진 개혁의 고삐를 조이면서 동시에 화합을 이뤄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사진은 취임사를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이후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은 우리나라가 파란과 격동 속에서 현대 민주사회로의 기틀을 하나씩 다져온 시기라 하겠다. 그리고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한 달째를 맞아 새로운 역사가 씌어지고 있다. 우리 국민의 반은 기대 속에, 또 절반 가까이는 비판적인 눈으로 현 정부를 바라보고 있다. 검찰 개혁은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판정된다. 앞으로 노사 문제, 교육 및 복지 정책, 외교 문제 등 산적한 현안들을 ‘개혁’이라는 잣대로 접근해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커다란 실험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층과 신진 세력 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한판승부다. 당분간은 개혁에 저항하는 부류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체감을 가진 파워의 핵이 있어야 한다. 힘을 동반하지 못한 개혁이란 기존의 체제를 흔드는 한낱 소동에 불과한 것이다. 더 강력한 수권 정당을 만들기 위해 민주당이 분당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검법 제정을 두고 일어난 내분도 심상찮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구주류와 정대철 정동영 등 신주류 사이에 넘기 힘든 벽과 골이 있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는 상황이다. 당내 신진 세력들은 ‘일일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면 어차피 갈라설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구파들은 ‘대통령에 당선된 게 누구 덕분이냐’고 격앙하고 있다. 한나라당 일부에서도 민주당의 분당 움직임을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물론 한나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의 동요도 예상되지만 민주당 내 구주류 중에는 한나라당 내각제 옹호론자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의원들도 있다. 이럴 경우 보수와 진보(개혁) 세력 간의 ‘정계 개편’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땅에 보수와 진보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나이가 많으면 보수고, 그렇지 않다 해서 개혁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이 전임 김대중 대통령에게 기대를 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이념이나 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대 간의 격차가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의 ‘노인 정치’는 힘있는 정권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화시켜 마침내 386세대가 일어나 젊고 힘있는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볼 때 과연 현 정권이 힘이 있는지, 그 힘이라는 것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힘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새로 구성된 청와대 구성원의 자질이나 능력에 대해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대변인이 어떻고 인사보좌관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나온다. 언론을 통제한다느니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다느니 말들도 많다. 하지만 지금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에 한 일을 생각할 때 그렇게 떠들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개혁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그보다 개혁에 저항하는 힘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조직적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성실한 교수들이 대학에서 실제로 존경을 받으면서 우리의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가. 유능하고 부지런한 노동자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가. 청렴하고 투명한 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인이 성공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민중의 힘이 되고자 하는 공직자들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는가. 문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이다. 성실하게 원리 원칙을 준수하는 이들보다 약삭빠르고 편법에 능통하고 이른바 ‘잔머리’를 잘 굴리는 자들이 더 잘되는 게 현실이다. 지난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 사이에 결과만을 놓고 어쨌든 수단 방법을 떠나서 이기고 보자는 식의 논리가 퍼져 있는 것이다.  경기도 일산 인근의 어느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나 어려운 공부 대신에 풀 내음을 맡게 하고 꽃향기를 체험하게 한단다. 이 얘기를 들은 엄마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할까. 겉으로는 지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놓고 뒤에 가서는 ‘그래 쟤네들 놀 때 우리 애들은 열심히 공부시키자’ 이렇게 생각할 엄마들이 더 많을 것이다.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무리를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주식 투자해서 깨지고 있는가. 그도 부족해서 가족들을 미국이나 뉴질랜드로 떠나보내고 가장은 기러기 아빠가 되고 엄마는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누나는 룸살롱에 나가고 심지어 애들까지 학원비 마련 원조교제에 나서는 실정이다.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며, 그렇게 해서 얻어낸 학교 석차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애들에게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가르치지 못하며 유치원 시절부터 몇 십 년 앞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비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사교육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나. 수십조원 규모의 경제 주체가 흔들리게 되며, 다수의 유권자를 잃는 것이며 막대한 정치자금 공급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인가.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401/1049124003302711.jpg" alt=""/>    ▲ 위 사진은 10년여 전 보수 대 개혁의 정계개편을 이뤘던 당시의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총재.  최근 민주당 내의 동교동계와 신주류의 갈등은 또다시 보혁 구도의 정계개편을 예고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나라를 만들 수가 있을까. 단기적 처방은 정치가 바로 서고 그에 따른 법과 제도의 완비가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의식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로 부르고 있다.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국정에 많이 반영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때문에 인터넷과 시민단체를 활용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성격이 강하다. 이를 주도하고 뒷받침하는 세력들은 물론 20∼30대의 젊은층 특히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 중에서 안희정씨와 이광재씨는 39세의 83학번들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정신적 83학번’이라며 동지애를 과시한 바 있다. 우리 나이로 40줄에 막 오르는 이들을 마치 철없는 젊은이로 몰고 있는 노회한 기성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젊은 측근들에게 흠집을 내서 대통령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간 정치 현장에서 터득한 경험과 유권자의 진심을 사로잡는 노하우를 전수해줄 만한 훌륭한 선배들도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다. 후배 입장에서도 ‘그간 우리 정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략과 술수와 흑색 선전 말고는 뭐가 있느냐’는 냉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세대간 계층간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돌던 유머가 생각이 난다. ‘부산 앞바다에 엄지손가락이 떠오르고 있다. 믿고 찍어 줬는데 부산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다. 속았다 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찍은 손가락을 잘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목포 앞바다에도 역시 ‘손가락’ 얘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최근 호남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시큰둥하다는 말들이 있다. 조만간 어느 앞바다에 손가락이 떠올랐다는 말이 안 나올 거란 보장도 없다. 경상도 출신 대통령을 호남 사람들이 밀어서 당선시켰다는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참여정부 출범 한 달을 맞아 그간의 인사를 보니 호남을 배제시키고 타 지역 출신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탓이다. 그만큼 우리네 민심은 성질도 급하고 불신의 골이 깊은 셈이다. 이 상태로는 정권 차원에서 개혁을 밀고 갈 힘도 없고, 설사 모양을 갖춘다 해도 그 개혁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내 상당수 구주류들은 언제 자신들을 쫓아낼까 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신주류들은 구파들이 밀려나지 않으려고 벌써부터 불필요한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최근 이강철씨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무특보 자리에 앉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의 박철언 정책보좌관에 비견되는 자리이다. 이강철 특보의 최근 언행은 정계개편의 회오리가 임박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가 최근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동교동계는 신주류가 자신들을 따돌리려 한다는 등 쓸데없는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동교동계가 빨리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 호남 사람들도 노무현 대통령이 일부러 호남을 무시하면 마음이 달라지겠지만 현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다. 동교동계가 없다고 해서 내년 총선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이에 대한 한광옥 김옥두 박상천 등 동교동측의 반발이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는지 면밀히 분석중이다. 서로를 보완해야 할 입장에서 특정 계파를 매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동교동계는 노무현 대통령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있다. 때가 되면 우리도 입을 열게 될 것이다.”대통령의 몇몇 측근들과 민주당 신주류에서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5월 신당 창당설도 함께 나오고 있다. 이미 물밑에서 상당한 구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10여 년 전 3당 합당이 논의될 당시 제기되던 정계개편의 논리가 어쩌면 다시 테이블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개념상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수’ 대 ‘개혁’의 대 정계개편이 그것이다. 지난 3년간 이 ‘폭풍전야’ 시리즈를 연재해 오면서 화두는 다름아닌 정계개편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차례의 큰 폭풍을 헤쳐나감으로써 우리 정치가 차원 높은 발전을 이루고 민초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폭풍이 몰아칠 역사적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고 있다. 정계개편보다 훨씬 강력한 폭풍은 한반도 통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감격스럽게 맞이할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새로운 세대는 통일의 의미를 얼마나 새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폭풍은 언제나 몰아칠 것이다. 다만 그 폭풍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크기에 따라 바람의 세기를 느끼고 못 느끼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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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9화 백담사의 복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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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5 Mar 2003 00:20:0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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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25/1048519203302700.jpg" alt=""/>    ▲ 89년 백담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낀 전두환 전 대통령. 그는 측근을 통해 6·29선언이 자신의작품이었다는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방식으로 노 대통령에게 ‘복수’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송금 문제를 처리하는 특별검사 관련법을 수용함으로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도 이제 궤를 달리 하게 될 전망이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으로 ‘3김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됐지만 이들이 역사에 드리운 명암은 아직도 짙게 깔려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의 집권기와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의 집권기는 흔히 신군부와 문민 시대로 대비된다. 20여 년 전 상극관계에 있던 이들은 숙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3김씨, 그 중에서도 특히 DJ 김대중과의 ‘만남’은 역사가 빚어낸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불거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5공 초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와 사면 복권을 남북 및 한미 관계라는 시각에서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한 월간지 기자와의 옥중 진술에 나타난 그의 생각을 살펴보자. 먼저 기자의 질문.“81년 당시 주미 안기부 공사 손장래씨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측 협상 파트너 리처드 알렌과의 외교 교섭에서 정부 훈령을 받지 않은 채 김대중씨의 사면 문제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이 동의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한 것이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상당한 작용을 했고 김대중씨의 사면이란 결실을 봤다. 그때 손 공사는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내용의 공한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손장래 당시 안기부 공사의 공한 내용이다. ‘대통령 각하. 만일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김대중씨 문제를 이용한 것이 잘못이라면 각하께서는 본 공사를 파면시키고 교섭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람되나마 본 공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영향력 있는 야당 지도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결코 길조는 아닙니다. 만일 김대중씨를 처형한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김대중씨를 처형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정치 활동을 못하게 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 굳이 김대중씨를 처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그리고 손 공사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구제되었다. (정상회담이) 김대중씨의 사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옥중 진술이다.“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씨를 사면한 게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을 사면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면을 했느냐. 한마디로 나의 정치 철학이 그렇다. 어떤 이유든 사형은 안된다. 더구나 그때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5공화국이 출범하던 시기이다. 그렇듯 경사스러운 때에 내가 어떻게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할 수가 있겠나. 거듭 밝히지만 나는 김대중씨를 죽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 사면을 전제조건으로 이용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인가. 그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기왕에 김대중 사면 문제가 거론됐으니 편지 한 통을 더 공개한다. 김대중의 구명을 간청하는 80년 11월27일자 김수환 추기경의 서한이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오늘은 특별히 간청할 일이 있어서 이 글을 드립니다. 김대중씨에 관한 청입니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긴 하오나 사태의 진전이 매우 우려됩니다. 대통령의 직권으로 최대의 관용을 베푸시와 그로 하여금 극형을 면하게 하여 주시옵도록 간청합니다. 이는 김대중씨 개인이나 그 가족을 위해서뿐 아니라 국내외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국민적 화합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도 소망스러운 일로 사료되옵니다.외람된 말씀이오나 용서와 관용은 하느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각하와 우리나라가 주님의 축복 속에 항구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끊임없이 기도 드립니다. 아울러 광주사태와 관련된 피고들 중에서 1심에서 극형을 언도 받은 정동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도 같은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주시옵길 간절히 청합니다.  각하와 귀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1980년 11월27일 추기경 김수환 드림.’ 그렇게 해서 목숨을 건진 김대중은 결국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년 간의 권좌에서 물러나 지금은 동교동 자택에서 칩거중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맛본 순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먼저다. 그것도 둘도 없는 친구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25/1048519203302701.jpg" alt=""/>    ▲ 백담사 시절 후 94년 다시 화해한 전씨(왼쪽)와노씨.  S대령의 진술이다.“백담사측이 노태우 정권의 일방적인 처사에 대항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이른바 ‘폭탄 선언’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백담사행을 놓고 승강이를 벌일 때에 그랬듯이 6·29선언의 진실과 87년 대선 때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에게 제공한 2천억원에 이르는 정치자금 문제였다.”89년 5월20일. 백담사측이 한 월간지를 통해 발표한 폭탄 선언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전씨 측근들의 폭탄 증언을 부제로 하고 주 제목을 ‘6·29선언 전두환의 작품이다’고 하여 특종한 문제의 기사. 주요 부분을 살펴보자. ‘6·29선언은 제5공화국 정권의 파멸을 막고 선거에 의해 후계 정권을 창출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독재 지배층 내부의 자체적 궤도 수정이었다. 따라서 만일 이 선언으로 지배층의 재집권과 한국의 민주화가 가능했다면 적어도 이 선언을 주도한 사람은 엄청난 결단력과 정치력을 지닌 사람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이 선언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단독으로 결행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6·29선언의 과정이 너무나 잘못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다. 즉, 왜곡된 6·29선언을 근거로 해서 정치인 노태우를 평가하고 그의 지도력을 전망하는 식의 접근법은 전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6·29의 진실을 알고 있는 몇 명 안 되는 6공 핵심 중에 노 대통령의 측근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여자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을 때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비키니를 꼭 벗겨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봤자 여자의 보기 민망한 알몸 밖에는 드러날 끼 없는데…. 신화가 없는 우리 역사에 6·29라는 신화를 하나쯤 남겨 둔다는 입장에서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낍니다.”기사의 내용으로 돌아가자.‘6·29선언의 양지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음지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서있다.  이와 같은 음지와 양지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합쳐질 때에만 6·29선언은 진실된 모습을 찾고 국민은 전·노 두 사람을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투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7년 6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이런 제의를 하고 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자. 내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뒷받침하겠다.’여기서 또 다른 기록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한 또 다른 월간지 97년 1월호에 실린 이순자 여사 회고록이다.‘87년 6월17일 오전 10시. 그분(전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노태우 대표와 마주 앉았다(날짜에 착오가 있다. 이날은 6월17일이 아니라 20일이었다. 모든 관계자들의 증언이 6월20일로 집약되고 있다). 그분의 첫마디는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직선제를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노 대표는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이 부분에 대한 다른 기록.‘직선제를 받아들이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제의에 이날 노태우 대표는 자신이 없다면서 선뜻 응하질 않았다. 다음날 21일 전 대통령은 다시 노태우 대표를 불러 전날 그랬듯이 약 3시간에 걸쳐 노 대표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6·29선언의 핵심 사안인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복권에 합의한 것이다.’다시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에서 보자.‘그분은 자신이 호헌에서 개헌으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신념을 수정한 것과 관련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분은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신념을 비겁해서 수정한 것이 아니라 용기로써 수정하였으므로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겠다는 노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직선제를 고려하게 된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다섯 가지 이유란 무엇인가.‘첫째, 지금의 소요 사태를 물리적으로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비상조치는 정권의 불명예일 뿐 아니라 경제와 88년 올림픽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둘째, 야당이 선거 보이코트를 하면 단일 후보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대외적으로 우스운 꼴이 될 뿐 아니라 당선된다 해도 불안한 집권이 된다.셋째, 야당이 현행 간선제를 이용할 경우 기습적으로 선거에 열기를 올릴 수 있고 직선제에 비해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 설사 현행 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해도 89년 개헌 논의는 불가피하다. 새로운 선거는 새로운 자금을 필요로 하고 국가경제에 큰 타격을 준다. 끝으로 다섯째, 현행 간선제에 비해 직선제는 결코 불리하지만은 않으며 오히려 당선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도 있다.’ 다시 이순자 여사의 진술.‘다음날 아침 10시 마침내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엄청난 환호가 뒤따랐다.  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라이벌이 될 김대중씨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항에 달하는 엄청난 약속을 선언문 속에 담았다. 훗날 6·29선언으로 명명된 혁명적인 선언이다. 모든 언론은 민주화의 요구가 포함된 함량 만점의 선언으로 격찬했다. 40년 헌정사 속에 누적된 과제를 단숨에 해소시킨 명작이라고도 했다. 국민과 야당은 물론 외국 언론들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규제가 풀린 김대중씨도 노태우 대표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느낀다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누가 알랴. 6·29선언은 누가 뭐래도 그분이 이뤄낸 통치의 꽃이라는 사실을….’이 혁명적인 선언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람은 10여 명이 된다. 각자 자기가 그 문안을 기초했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원작자는 과연 누구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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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8화 백담사의 분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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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8 Mar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18/1047914403302690.jpg" alt=""/>    ▲ 89년 5월30일 김윤환 민정당 총무는 전두환 전 대통령(사진)을 찾아가 5공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와줄 것을요구하지만 “정호용부터 세우라”는 말로 거절당한다.  노무현 정부가 검찰 파동으로 첫 번째 시험 무대에 섰다.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에 검사들이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그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 검사들의 주장이고, 그랬기 때문에 이미 권력의 시녀 노릇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걷어내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입장이다.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공개토론을 고비로 큰 산 하나를 넘은 셈이 됐지만 아직도 파격 인사를 둘러싼 물밑 파문은 계속되고 있다. 권력과 검찰. 우리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대표적인 사례는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당시는 검찰뿐 아니라 변호사들조차도 함부로 변론에 나설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의 옥중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먼저 기자의 질문.“81년 초 김대중씨를 사면한 것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는데….”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당시 주미 공사 손장래씨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전혀 다르다. 그 사람이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신 역할을 했는지는 내가 잘 모르지만 미국과의 정상회담은 그 사람이 주도한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당시의 주역은 유병현 합참의장, 김용식 주미 대사였다. 이분들이 이미 큰 틀을 마련해 놓은 상태에서 손장래씨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손장래씨는 유병현 의장이 맡아 하다가 일이 잘 안돼 자기가 나섰다카지만 그런 기 아니다. 어찌 됐든 분명히 말하지만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김대중씨의 사면을 전제 조건으로 논의했다카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다시 기자의 질문.“당시 미국과 일본은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와 관련해서 한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압력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외신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일본에서는 부두 노조원들이 한국 상품의 하역을 보이코트했습니다. 결국 김대중씨의 사면은 한미 또는 한일 관계의 개선을 위해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게 정설인데….”전 전 대통령의 답변이다.“만일 미국측이 그런 식이었다면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나한테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자꾸만 ‘김대중씨 사면에는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고 하지만 참말로 그런 일은 없었다.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김대중 사면과 연계시킨 일도 없었다. 김대중 사면의 효과가 한미정상회담 성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모르지만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씨를 사면한 건 아니다. 나가 그때 그런 식의 정치적 술수를 쓰는 사람이었다카만 좀 더 그럴듯하게 사면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은 나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던 사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했다면 나가 그때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었던 바로 그날 김대중씨를 사면했겠나? 나는 재판을 지켜보는 과정에서부터 사형은 안 된다카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째서 그 사람을 구속해서 재판에 넘겼느냐. 그때는 상황이 불가피했다.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 법원의 판결을 기다렸다가 사면을 단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김대중씨는 결과적으로 나가 살린 것이다.”과연 그랬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 현장 검증을 통해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전두환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와의 만남. 82년 2월 초, 장소는 이 여사의 표현을 빌린다면 청와대 내 조그만 다리를 건넌 곳에 있는 조그만 통나무 집.이희호 여사의 진술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내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남편을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내내 자기 얘기만 했다. 그때 참다 못해 내가 그랬다. ‘대통령 각하. 저희 남편을 속히 좀 석방시켜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전두환 대통령)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그로부터 불과 7년 후.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백담사를 방문한 것은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 부부가 백일기도를 끝낸 지 약 15일 뒤인 89년 5월30이었다. 그런 기록이 백담사 일지에도 나와 있다. .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18/1047914403302691.jpg" alt=""/>    ▲ 청문회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호용’ 답변은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사진은 5공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출두하는 정호용.  ‘89년 5월30일. 이날 서울에서 김윤환 총무가 내려왔다. 임무는 국회 증언과 관련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김윤환 원내총무는 야당측이 요구하고 있는 5공 청산의 핵심 즉, 정호용, 이희성, 이원조, 장세동, 안무혁 및 허문도 이 여섯 명에 대한 처리와 관련한 전 전 대통령의 결단을 요청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내가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에 나가는 거는 문제가 아니야. 공개든 비공개든 그런 거 상관없어. 문제는 그기 아니라 내가 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했다고 해서 과연 5공 청산이 끝나겠느냐, 이 말이야.”김윤환 총무의 질문.“그것만 가지고는 야당쪽에서 5공 청산은 끝난 것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까?”다시 전두환 전 대통령.“먼저 5공 핵심 6인방을 처리하고 그라고 나서 최종적으로 나를 국회로 끌어내서 증언을 시키는 것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하자는 게 야 3당의 계산인데 정호용이를 처리하지 않고 나를 증언대에 세워서는 5공 청산은 끝나는 기 아닌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한테만 청문회에 나오라카고 정호용이는 처리 안하나. 순서로 봐서 정호용이부터 처리가 돼야 내가 청문회에 나가 5공 청산을 매듭지을 거 아니야.” 여기서 진술이다. 전 전 대통령은 이때 무슨 속셈으로 정호용 등 여섯 명, 특히 정호용 의원은 먼저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S대령이다. “진술에 앞서 먼저 상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당시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백담사를 방문한 것은 5월30일, 그러니까 그보다 11일 전인 5월19일에 있었던 여야 중진회의에서 나온 합의 사항, 즉 전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백담사측은 여야 중진회의 결정을 보고 격분했는데 특히 심한 쪽이 안현태 이양우 등 측근들이었다. 안현태 경호실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이야!  야당은 그렇다 치고 민정당이 이런 짓을 하면서 우리쪽에 한마디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노태우, 우리 어르신의 의사를 이렇게 깡그리 무시해도 되느냐 이 말이야’.”다시 S대령의 진술.“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백담사측을 격분케 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전 전 대통령에 의해 합참의장에 임명됐다가 임기도 못 채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옷이 벗겨진 최세창 예비역 대장의 백담사 방문이었다. 결국 최 장군은 경비차 나와 있던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로 백담사 방문을 포기했는데 이때 백담사측이 분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현역 군 장성들의 백담사 방문이 금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심지어는 예편한 옛 부하, 더구나 함참의장까지 지낸 옛 후배의 방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둘째는 보안사의 전화 도청이었다.”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안현태 경호실장 사이에 오간 대화내용이다.  “전화 도청이라니 그기 무신 말이야?”“각하, 지금까지는 용대리 검문소에 보안사 아이들은 나와 있질 않았습니다.”“그랬나?”“예,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쪽 아이들이 나와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최 장군 때문이었습니다.”“최세창이를 못 들어오게 할려고?”“그렇습니다. 아니면 보안사에서 최 장군의 백담사 방문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전화 도청을 했으니까 알게 된 것 아닙니까….”“아, 인자 무신 말인지 알겠구만. 그러니까 어제 아침인가….”“그렇습니다. 최 장군이 백담사를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화로 알려 왔을 적에 이 전화를 도청한 게 틀림없습니다.”“그것 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카더니만 참말로 그러네. 백담사 호랑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카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이다. “백담사측이 행동으로 나선 것은 바로 이 사건 직후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백담사의 분위기가 험악했다는 사실은 노태우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 이유는 노 대통령이 그동안 안부전화나 인편을 통한 편지 한 통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노태우 대통령이 알게 된 것은 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서울의 김아무개 목사가 백담사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달해서였는데 비로소 백담사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태우 대통령이 조치를 취했다.”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이현우 경호실장이 나눈 대화는 이렇다.“경호실장, 다른 기 아니고 내가 시방 김 목사를 통해 백담사 분위기를 전해들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심상치가 않다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경호실장이 그런 것도 파악 못하고 있었나. 저쪽에서 또 폭탄 선언을 할라고 준비중이라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말이야. … 여러 소리하지 말고 빨리 성환옥 경호실 차장을 백담사로 출발시켜. 빈손으로 가서는 안되니까 백담사에 필요한 기 뭔가 알아보고 준비해 가지고 가서 정중하게 안부를 전하라고 해. 나를 대신해서 말이야.”폭탄 선언의 내용이 뭐길래 노태우 대통령이 이토록 다급해진 것일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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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7화 박철언의 밑그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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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1 Mar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11/1047309603302680.jpg" alt=""/>    ▲  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왼쪽)의 명을 받아 정계개편의 밑그림을 그린 박철언 정책보좌관(오른쪽). 실제 ‘노심’과 달리 박철언은 4당 합당의 ‘그랜드 디자인’을 꿈꾸고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조각이 완료됐다. 세대 교체, 남녀 평등, 개혁의 완성 등이 강조된 인선이었다. 신임 각료를 총리가 소개하고 미국식으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인선 배경을 설명하는 기자회견도 가졌다. 이를 두고 여권에서는 새로운 시도라고 부각하고 있고, 야권에서는 검증이 안된 실험이라고 잔뜩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여론의 향배를 보면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시도와 실험들이 상당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새 정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정책이나 정강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여소야대’의 정치 구도 속에서 과연 새로운 실험들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여소야대의 정국으로는 강력한 정책의 실현이 어렵고 매사에 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 정계 개편과 같은 ‘돌파구’가 없는 한 노무현 정권의 개혁 드라이브가 공허한 구호에 그치게 될 공산이 적지 않은 것이다. 2004년 4월의 총선에서 승리해 여소야대 정국을 탈피하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의 복안인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내년 총선은 노무현 정권의 ‘중간평가’ 의미가 담겨 있다. 89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진되던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도 당시의 여권과 야당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진술이다. “사실 중간평가 문제는 내가 관계 부서에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건의를 해서 보류를 시켰다. 물론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긴 해도 공약이라는 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정이 달라지면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노 대통령께 말씀드리면서 일단락을 시켰다.”이 진술 중에 중요한 대목은 대통령을 설득해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귀결시켰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과 관련된 진술을 들어보자. S대령의 분석이다.“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세상이 다 알다시피 정계개편 및 민정, 민주, 공화의 3당 합당을 위한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밑그림에 따라 막후 협상을 진행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데 보고는 거의 사후 보고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는 것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그때 그때 지시를 받아서 협상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 즉, 밑그림에 의거해서 협상을 진행했고 이는 그 정도로 노 대통령의 속마음, 이른바 ‘노심’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자, 그런데 이때 노심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느냐.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의 정책 연합이나 당 대 당 합당 얘기가 나오면 그의 반응은 이랬다.”노태우 대통령의 반응.“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만 과연 그기 가능하겠나. 공연히 우리가 정치 9단 YS에게 놀아나는 게 아니야?”반면에 DJ 김대중의 평민당과의 합당 얘기가 나오면 반응은 달랐다. “되기만 한다면 좋겠제.”‘얼마나 좋겠나’가 아니라 그냥 ‘좋겠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는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겠나 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S대령의 진술. “왜 이처럼 표현이 달랐느냐. 한 마디로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과의 정책 연합이나 합당은 바라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김대중 기피증’이었는데 그렇다면 DJ에 대한 노 대통령의 거부 반응은 애당초 어디서 나왔느냐. 해답은 그렇다. 군이었다. 그리고 당이었다. 즉, 군 내부에 팽배해 있는 DJ 기피증 그리고 민정당 내에 결집돼 있는 김대중에 대한 거부 반응을 두려워한 것이다.” 실제로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과의 합당 얘기가 나오면 단서를 하나 더 붙였다. 혼잣말처럼 되뇌이던 노 대통령의 한마디.“우리가 평민당하고 합당하면 군에서 가만있겠나. 또 당에서도 쉽게 받아들일라고 하지는 않을 낀데 그때는 우짤기고….”문제는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정치 철학이었다. 여기서 진술자를 바꿔 6공 청와대 L비서관이다. “그때 박 보좌관이 정책 연합이나 합당과 관련해서 3단계의 정치 철학을 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혔지만 그 내용은 이랬다. 제1단계 민주화, 제2단계 민족 화합, 그리고 제3단계 통일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제1단계 민주화. 이것은 이미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을 민주화의 구현으로 여겨 이루어졌다고 봤다. 제2단계 민족 화합. 이것이야말로 박철언의 정치철학의 핵인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의 배경이다. 여기서 내각제 개헌을 가미해 왜 정계개편이 필요한가를, 그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11/1047309603302681.jpg" alt=""/>    ▲ 박철언의 내각제 주장의 속내를 꿰뚫은 김영삼 당시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과 박철언 보좌관의 대화 내용이다.“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결국 민족 화합의 골자는 대체 뭐야?”“내각제 개헌 아닙니까?”“내각제 개헌은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족 화합하고 평민당하고의 합당하고 어떻게 연계가 되느냐 말이야.”“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지는 평민당하고의 합당을 주장하고 있는 기 아닙니다.”“아니야? 아니면 뭐야?”“4당 합당입니다.”“4당 합당!”“우리 민정당을 비롯해서 평민당 민주당 그리고 공화당의 4당이 합당해서 일본의 자민당과 같은 집권 거대 여당을 구성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각제 개헌을 단행해서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도약케 하는 것입니다. 각하.”“듣고 보니 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만.”“각하,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아니면 그기 어떻게 가능한 일이야.”“가능합니다. 소외된 호남권을 끌어안으면 됩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끌어안으면 됩니다. 이기 바로 ‘신 TK론’ 아니겠습니까?”“신 TK론?”“지금까지는 대구 경북을 연결해서 TK로 불렀습니다. 신 TK는 T가 대구를 가리키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K가 다릅니다. 경북이 아니라 광주, 즉 신 TK는 대구와 광주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대구와 광주의 연합을 상징해서 신 TK라 한다?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주장했던 신 TK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가. 박 전 보좌관 자신의 해명이다. “내가 그때 구상한 정계개편은 그랜드 디자인이었다. 소외된 호남권을 끌어안아서 4당 합당을 이루어 일본의 자민당처럼 보·혁이 공존하는 집권 대여당을 구성해 내각제 개편으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물론 보·혁 공존이라카지만 그 중에 재야와 같은 색깔에 문제가 있는 인사들은 털어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기 바로 신 TK론인데 대구와 광주를 연결해서 대화합을 이루자는 기 나의 정치철학 제2단계 민족 화합의 골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YS의 통일민주당보다는 DJ의 평민당하고의 정책 연합 또는 당 대 당 합당을 밀고 나간 거다.”그렇다면 박철언의 정치철학 제3단계 통일시대의 개막은 어떤 내용인가.  오병상 기자의 분석이다. ‘박철언의 정치철학 제3단계. 통일 시대의 개막은 정치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후계 구도와 직결돼 있다. 통일시대는 곧 3김 중심의 정치 구도를 청산한 통일세대들의 새 시대를 의미한다. 여기에 박철언 자신이 포함돼 있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그가 구상한 내각제 개헌 역시 목표는 수십년간 정치판을 요리해온 3김씨를 밀어내는 데 있었다.  내각제에서는 수상의 임기가 정해져 있질 않으므로 대권 쟁취에 평생의 정치 생명을 걸어온 3김씨로 하여금 단명 총리로서 권력 정상의 맛만 보게 하고 밀어낸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박철언이 5·6공을 통해 동구권 및 대북 밀사 외교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기실 통일 시대에 걸맞는 리더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3당 합당 후 YS가 내각제 개헌에 적극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황태자 박철언의 3김 청산 구도를 꿰뚫어본 데서 나온 경계와 반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 TK론이 실현될 수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6공 정권의 모태인 군부와 김대중 그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골이 있었기 때문이다.’김대중 본인이 회고하는 정황은 어땠는가. 먼저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연루자 37명이 남산 지하실에서 육군본부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었을 때의 상황을 본인의 진술로 들어보자. “계엄령 아래에서도 체포되면 즉시 변호사를 세울 수 있다. 법에 나와 있다. 그래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자 마자 변호사를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변호사 이름까지 가르쳐줬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얘기가 달랐다. ‘법상으로는 그렇게 돼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변호사를 세워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런 일은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검찰부에서도 당했고, 또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도 당했는데 결론은 그랬다. ‘변호사는 세워줄 수 없다.’ 그러다가 군법회의 재판부로 넘어가게 된 단계에서 일면식도 없는, 또 변호 의뢰를 한 일도 없는 변호사 두 사람이 교도소로 찾아와서 도장을 받아갔다. 그리고 나서 누가 면회를 왔다기에 나가봤더니 허경만 변호사가 와서 변호를 맡겠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줬다. 결국 내가 요청한 변호사는 한 사람도 기용되질 못하고 그밖의 사람들이 변호를 맡게 된 거다.”이 부분에 대해 검찰측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당시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과의 한 사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37명이 합동수사본부에서 우리 검찰부로 넘어왔을 때 누구도 이 사건을 맡겠다는 검찰관은 없었다. 잘해봤자 본전, 못하면 검찰관 경력에 오점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군대에서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사건을 맡기는 맡았는데 합수부에서 넘겨준 기록에, 우리가 더 첨가한 부분은 없었다. 합수부 기록을 그대로 기소하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들에게 ‘이 기록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으니 협조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검찰도 기소과정에서 입회 헌병들의 감시까지 받았는데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조사하는지를 꼬박꼬박 기록하고 있었다.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가공할 일이었다. 법도 사법기관도 권력자의 ‘살의’ 앞에서는 모두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당국은 변호인을 선정하도록 허락했으나 누구도 나서기를 꺼려했다. 결국 당국의 종용에 따라 사선 변호인으로 나선 일부와 국선 변호인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선 국·사선 변호인은 모두 해서 15명. 소종팔, 신호양, 고재혁, 권종근, 김숙현 등의 국선 변호인과 허경만, 박영호, 김동정, 강대헌, 이세중, 김항석, 김수룡, 최승민, 김정환 및 김기옥 등이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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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6화 내란음모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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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4 Mar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04/1046704803302670.jpg" alt=""/>    ▲ 80년 신군부는 김대중과 연루자 40여 명에게 내란음모라는 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음모자’들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사진은 옥중의 DJ.  이제 한국 정치사의 ‘굴레’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김대중 정권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3김 시대’라는 한 시기가 저물어 가는 것이다. 북한에 햇볕을 쏟아 부은 대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의혹을 뒤로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평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대중 정권 5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의 역대 정권의 그것처럼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IMF 경제 위기를 타개한 경제적 성공의 이면에 대북 송금 파문이라는 비난의 소지를 남긴 채 3김 시대를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까지 목숨을 걸고 희생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을 잊어버린 듯하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최근의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난 80년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온 것에 대한 평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 암울하던 80년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수사국장 이학봉입니다.”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화다.“나, 사령관이야.”“말씀하십쇼. 무슨 일입니까?”“무신 일이 아니라 김대중이 수사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인자 그만 매듭을 지을 때가 된 거 아니야.”“안그래도 그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질 않습니다.”“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질 않아?”“김대중이는 물론이고 그 밖의 사건 관련자들이 결사적으로 입을 안 열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수사가 좀 지연되고 있는데.”“이것 봐. 수사국장.”“말씀하십쇼. 사령관님.”“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카는 거는 내도 알아. 쉽지 않은 거를 쉽게 만드는 기 이학봉이가 할 일 아니야.”“그거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놈아들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말을 잘 안듣습니다.”“누가 말이야 김대중이가 말이야?”“김대중이도 그렇고 동교동계 전체가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을 해봤는데.”“봐라 봐라. 시방 무신 말을 하고 있나. 그기 설득을 해서 될 수 있는 일 이야?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쪽에서 말을 안들을 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그런 의미의 설득이 아닙니다. 사령관님.”“아니야?”“처음에는 그런 의미의 설득으로 모두 사실을 시인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전혀 효과가 없어서 다음에는 물리력을 가미하는 방법으로 설득해 봤는데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 일 없다. 강요하지 말라. 안한 것을 안했다카지 어떻게 했다고 할 수 있나.’ 심지어 문익환이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애국자다. 김대중이를 죽이면 당신들은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여기서 몇 사람의 진술을 들어보자.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에 관련된 동교동계의 증언이다. 먼저 이해동 목사.“7월12일 37명이 남산 지하실에서 육군본부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었다. 검찰의 임무는 남산 지하실에서 수사한 결과를 확인하는 일이었는데 강압과 고문 속에 진술한 내용을 부인하고 나서자 검찰관은 입회 헌병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인이다. 따라서 상부의 명령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진술 내용을 부인한다 해도 우리는 어차피 시인한 것으로 꾸밀 수밖에 없다. 진술 내용은 법정에 가서 부인하고 여기서는 일단 시인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피차 이로울 뿐 아니라 어차피 검찰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 조서에 도장을 찍으라.’그것이 함정이었다. 검찰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바람에 도장을 찍었는데 법정에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검찰 진술 역시 충분한 증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304/1046704803302671.jpg" alt=""/>    ▲ 남산 지하실에 끌려간 문익환 목사는 DJ의 구명을 호소한다. (왼쪽), 최형우 의원은 남산 지하실 ‘붉은방’에서 극심한 고통을 맛본다.  이전에는 민주당 설훈 의원의 증언이다.“처음부터 담당 검찰관은 애원했다. 남산 지하실에서 진술한 내용을 시인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이 달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검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죽어도 죽어야 하니 나를 살려달라.’ 버텨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진술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이제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 그는 자신보다 오히려 김대중의 구명을 간청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애국자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76년 3월1일 구국선언사건으로 구속되었을 적에 면회 온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미국 대사관에 가서 내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고 이렇게 전하라. 김대중이는 미군 철수를 반대한다.’그 사람은 구국선언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국가 안보에 관한 한 오히려 정적인 박정희를 도와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나. 나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다 써 주었다. 대신 당신들은 김대중씨를 죽이지 말고 살리라. 그렇지 않고 당신들이 만일 그 사람을 죽인다면 역사의 심판이 내릴 때 반드시 준엄한 판정을 받게 될 것이다.”색다른 진술이 있다. 7월12일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연루자 37명을 육군본부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한 합동수사본부는 일주일 만인 7월18일 여야 정치인 17명을 불법 강제 연행, 보안사 서빙고 분실과 태평로 소재 국회 별관에 감금했다. 김현옥, 고재일, 구태희, 길전식, 김용태, 신형식, 장영순, 현오봉, 구자춘, 정해영, 고흥문, 송원영, 김수한, 박영록, 박해충, 김동영 및 최형우 등이다.이중에서 최형우 전 의원의 진술이다. 에서 발췌한다.‘이번에 내가 끌려간 곳은 그 유명한 서빙고 보안사였다. 김재규가 사령관이었을 때 완공한, 그리고 취조를 받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건물이다. 끌려가자 곧바로 어딘가에 처넣어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서빙고 담벼락을 빨갛게 칠한 조그만 방이었다. 그래도 내가 3선 의원이므로 대우를 하느라고 제법 화려한 방에 모시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듯 순진한 생각은 하룻밤을 자고 나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밤이 돼 잠을 청할라카자 사방 담벼락의 빨간 빛깔이 전깃불에 반사되어 마치 화살처럼 내 눈을, 전신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감아봐도 소용이 없다. 와이셔츠를 벗어 두 눈을 동여매도 빨간 화살은 영사기의 빗살처럼 눈동자를 마구 찔러댄다. 환각과 환청이 일어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마침내 나는 비명을 질렀다.’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 속에 세상은 바뀌었다. 누가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89년 4월13일 백담사 일지를 보자.‘오전 11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 정원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다리 가설 공사도 병행했다. 백담사엔 대문 앞 개울에 걸쳐져 있는 통나무 다리와 위쪽으로 화장실 옆에 있는 징검다리 등 두 개의 다리가 있으나 둘 다 제대로 다리 구실을 못했다. 개울 상류에 있는 징검다리를 고치기로 하고 인근 군 부대에서 드럼통을 얻어 오게 하여 엮어 놓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씌워 임시 교량을 가설토록 했는데 이 공사를 직접 구상하고 지휘한 것이다.’다시 S대령의 진술이다. “백담사 일지에 따르면 해가 바뀌어 1989년 백담사엔 거의 방문객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4월이라지만 백담사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다시 또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전두환 전임 대통령 부부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 1월18일. 이날은 전 전 대통령의 59회 생일날이었는데 찾아온 사람은 가족들과 측근들뿐. 외부 손님으로는 유일하게 법정 스님이 방문하고 있다. 그런 것이 서러웠던지 전 전 대통령은 한잔 술에 취해서 18번인 ‘방랑시인 김 삿갓’을 ‘방랑시인 전 삿갓’으로 고쳐 부르며 대성통곡하고 있다. 1월20일.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가 방문하고 LA 교포 민아무개씨가 돈 1천달러를 보내온다. 2월6일. K산업 P전무가 찾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날부터 전 전 대통령 부부는 1백일 기도에 들어간다. 2월22일, 부산에서 불교 여신도 30여 명이 관광을 겸해서 찾아왔는데 이렇게 기록돼 있다.”당시 부산에서 올라온 여신도 30여 명은 용대리 입구에서 초소 경비병들이 가로막자 거세게 항의를 했다. 불교 신자가 절에 가는 것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니 옳은 말이어서 도후 스님이 입구까지 나가 이들을 인도해 들어왔다. 신도들 중 할머니 한 분이 항의하듯 묻는다. “여게 대통령께서 사시지예, 그렇지예?”안현태 경호실장이 맞이했다. “그렇습니다. 할머니.”“찾아오기는 바로 찾아왔네. 대통령께서 어데 계시능교?”“저어기 보이는 법화실에서 사십니다.”“그러만 좀 나오시라카소. 우리는 대통령 만나볼라고 부산에서 여까지 먼 길을 안올라왔능교.”“죄송합니다. 할머니. 어르신께서는 마침 서울에서 손님이 내려오셔서 나오실 수가 없습니다.”“그라지 말고 좀 나오시라 카소. 대통령 만나볼끼라고 여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 있십니꺼? 아니만 쳐들어 간다카고 나오시라 하소.”계속되는 S대령의 진술.“2월26일, 부산에서 올라온 불교연합회 회장단 일행이 백담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봉암사 조실 송서암 스님을 비롯해서 서의현 총무원장, 세민 스님, 홍천 스님, 상진 스님, 효성 스님, 지원 스님, 혜법 스님, 그리고 월정사 주지승 도명 스님 등이 찾아와 환담을 나눈 바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서울에서는 아무도 찾아 온 사람이 없다. 최소한 4월29일까지는. 4월29일, 서울에서 누가 찾아왔느냐? 전 전 대통령에 의해 국회의장, 민정당 대표 등을 지낸 채문식 의원이었다.”그렇다면 그 기간 서울에서는 왜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을까. 꼭 들어맞는 이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사유가 2월9일자 백담사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이다. ‘89년 2월9일. 지난 연말 대통령께 세배를 드리러 왔던 관할 지역 군단장과 사단장이 오늘 기어이 문책 인사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였다고 한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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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5화 YS의 정국 해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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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5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25/1046100003302660.jpg" alt=""/>    ▲ 89년 합당을 권유하는 민정당 김윤환 총무에게 김영삼총재는 “중간평가를 해야 전두환도 살리고 6공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대측의 북한 송금 문제에 대해 해명과 사과를 했다. 여론에 등을 떠밀리기는 했지만 떠나는 최고 권력자로서 후진들의 짐을 덜어 주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새 정권 출범 이후 예상되는 청문회나 특별검사 조사에서 김 대통령이 무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이 또 되풀이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우리는 중간평가 유보-3당합당으로 이어진 14년 전 6공 노태우 정권의 정계개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에게 전두환 전 대통령 문제의 해법으로 중간평가 실행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 와중에 터진 채문식 민정당 고문의 백담사 방문은 노태우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89년 4월29일 채 고문의 백담사 방문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백담사 일지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9년 4월29일. 채문식 민정당 고문이 내방했다. 채 고문은 전임 민정당 대표이자 국회의장을 지낸 분이다. 여권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이 되는 것이다.’ 여권의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 이 말을 뒤집으면 여권에서 채문식 고문급의 인사로는 누구도 백담사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것은 곧 백담사의 출입자 통제가 그만큼 철저했다는 의미도 된다. 쉽게 말해서 6공 정권은 고위급 인사들의 백담사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감시했다는 뜻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을 들어보자. S대령이다. “89년 4월은 백담사 일지의 기록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문제 또는 백담사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거처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던 그런 시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6공 정권으로서는 백담사에 대한 출입 통제 또는 감시망을 더욱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채문식 고문이 백담사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로한 바 있었다.”이현우 경호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경호실장입니다.”“나, 대통령이야.”여느 때보다 낮게 깔리는 노태우 대통령의 음성에 직감적으로 긴장하는 이현우 경호실장이다. “말씀하십시오. 각하. 무슨 일입니까?”“무신 일이 아니야? 그만큼 얘기했는데 백담사 경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백담사 경비는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철저히 하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구멍이 뚫렸나?”“구멍 안 뚫렸습니다.”“안 뚫리긴 뭐가 안 뚫려. 경비를 철저히 했는데 채문식 고문이 어떻게 경비선을 통과했나 말이야?”“아, 그 말씀입니까. 그 일은 보고를 받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노 대통령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경비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런데 뭐 아니라카나.”이현우 경호실장의 항변도 만만치 않다. “경비가 잘못된 게 아니라 경비 초소에서 적극 만류했는데 채 의원이 말을 안 들었습니다.”“뭐야, 채 의원이 말을 안 들었어?”다시 S대령의 진술이다. “채문식 고문은 용대리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초소 경비를 맡고 있는 경찰이 ‘백담사하고 사전에 연락이 됐느냐’고 물어 ‘안 됐다’고 하니까 ‘그럼 전화를 빌려 줄 테니까 여기서 그냥 전화만 하고 돌아가라’, 이렇게 제지를 하니까 채 고문은 버럭 화를 냈다.”“뭐가 어째? 여그서 그냥 전화만 하고 돌아가. 이런 문디 자슥들!이놈들아 내가 이래 봬도 전직 국회의장이야. 여당 대표에다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인데 예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라는 기 대체 무신 수작이야! 너그들이 뭐라카든 나는 들어갈 테니까 어데 너그들 맘대로 해 봐라.”채문식은 누구인가. 아니, 그보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노태우 정권의 철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백담사를 방문했는가.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25/1046100003302661.jpg" alt=""/>    ▲ 89년 4월29일 채문식 당시 민정당 고문(오른쪽)이 백담사를 방문한다. 채 고문은 전두환씨를 찾아가 자신이 당내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며 한탄한다. 한편 노태우대통령은 경비병의 저지에도 불구, 기어이 전씨를 찾은그의 행동에 대로한다.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을 맞은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그것 참 재미있구만. 그랬더니 경비병들이 아무 소리 몬하고 통과시켰다, 그 말이지요?”“아니만 지놈들이 우짤낍니까. 전직 국회의장을 죽일 낍니까, 살릴 낍니까. 안 그렇습니까?”이순자 여사도 거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의장님께서 잘못하신 것 같아요. 상대는 초소 경비병들이 아니라 대통령 아녜요? 대통령이 백담사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오셨으니 무사하겠어요.”“그거는 영부인께서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얘기를 하자면 길어지지만 지가 4·26총선 후에 와 당 대표에서 물러났는지 아십니까?”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신 대답했다. “그거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진 거 아닙니까?”“그기 아니지요. 지가 무엇 때문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진다 말입니까?”안현태 경호실장이 당연한 듯이 지적했다. “당 대표 아니셨습니까? 당연히 책임을 지셔야지요.”“참 모르시는구만. 그러만 운경은 그때 어째서 공천에서 탈락했어요?”운경은 이제는 고인이 된 이재형 국회의장이다. “참 그 말씀은 좀 해 보시지요. 그분은 무슨 이유로 공천조차 못 받았습니까?”“얘길 다 하자면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나도 그렇고 운경도 그렇고 우리 각하께서 자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빌미가 돼서 천대를 받게 되었다….”갑자기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굵은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깼다.“그기 참말입니까? 운경이나 채 대표가 내가 임명한 사람이니까 푸대접을 받았다, 이 말이지요?”그때 채문식 고문은 무슨 마음으로 감시의 눈길이 철저한 백담사를 찾아갔는가. 여기서 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이다.“소급해 올라가보면 그 전해 88년 4·26총선 때 채 고문은 민정당 대표였다. 물론 노태우 대통령이 임명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었는데,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 공천 과정에서 당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소외당했다. 지역구 공천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전국구 공천에서 그랬는데 그 한 예가 이재형 국회의장의 공천 탈락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여기서 당시 민정당의 김윤환 원내총무의 정계개편 뒷얘기에 관한 기자와의 일문일답으로 돌아가자.기자가 물었다. “결국 김 의원께서는 그때 처음부터 민주당과의 통합에 뜻을 두고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때 어떤 방법으로 김 총재를 설득했으며 김 총재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그 전에도 상도동 김 총재 집은 자주 들르는 편이었는데 이 날은 정계개편 얘기를 하기 위해 차남 현철씨 집에서 김 총재를 만났다. 아마 보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김영삼 총재와 김윤환 원내총무 간의 대화.“총재 어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총재께서는 이 나라 대통령이 되는 기 꿈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총재께서 대통령이 되실라카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평민당하고 통합해서 통합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정당하고 통합해서 여당 후보가 되는 방법입니다.”“그래서 내더러 우짜라고?”“제가 보기엔 평민당 김대중 총재하고 합친다는 거는 처녀가 얼라를 낳는 거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뭐 그래. 요새는 처녀도 얼라를 잘도 낳더구만.”“그거는 변칙이지요. 그기 어데 정상적입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리지마는 그렇다면 우리 민정당하고 통합해서 여당 후보가 되시는 기 훨씬 빠르다고 봅니다. 그라고….”“그라고 또 있나?”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간곡히 당부했다. “우리 민정당이 과거의 민정당 같으만 지가 통합하자는 얘기 꺼내지도 몬합니다. 그러나 6공은 국민이 직접 투표해서 출범시킨 정당성 있는 정붑니다. 6·29선언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고 민주화는 우리 민정당의 목푭니다. 총재께서 민정당의 리더가 돼서 민주화를 완성하는 기 어째서 변신이 되겠습니까. 그렇잖습니까 총재 어른?”다시 기자의 질문.“결국 김 의원의 설득은 주효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가 그 즉시 합당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 때 김 총재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그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도 참 어려운 말씀인데 그런 얘길 하셨어요.”‘보소. 김 총무. 내가 무엇 때문에 자꾸만 중간평가를 하라카는지 모르지요?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씨를 살리기 위해 그런 겁니다. 중간평가를 해서 정면 돌파하면 6공도 살고 전두환이도 살리고 다 살아요. 그런데 와 그거를 안 할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정계개편의 기초가 다져지고 궁극적으로 민정/민주/공화의 3당 합당이 성사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평민당이 이 거스를 수 없는 정계개편의 역사적 물결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시 80년 서울의 봄 때에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야 한다.그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이 부분, 먼저 동교동계 가신 중의 한 사람 김옥두 민주당 의원의 진술이다. “80년 5월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밤 10시쯤인가 40여 명의 잘 훈련된 군인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로 보이는 몇 사람이 동교동에 쳐들어 왔다. 군화발로 방에 들어와서는 총칼로 김대중 선생을 연행해 갔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서 김대중 선생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면서 며칠 동안을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이북 가서 김일성이를 몇 번 만났느냐, 군부 내 김대중 인맥은 누구냐, 경제인 중에서 김대중에게 돈 준 사람은 누구냐 등등.’한결같이 터무니없고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나는 죽기를 각오해야만 했다. 그들의 요구를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들은 어서 시인하라고 또다시 몽둥이찜질을 가해 왔다.”당시 고문 전담 수사관들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도 수사관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을 한다’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상부란 어디인가. 아니 누구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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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4화 노태우의 DJ 기피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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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8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8/1045495203302650.jpg" alt=""/>    ▲ 97년 초 국민회의-자민련 의원총회에서 만난 박철언(왼쪽)과 DJ.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출범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당장 대북 송금 의혹과 북핵 파문, 그리고 한·미 문제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여기에 미국-이라크 전운 등 국제 정세와 맞물린 경제 및 외교 대책도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여소야대 구도는 노 정권이 짊어진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다. 대북 송금 의혹 사건 등으로 거대 야당에 발목이 잡힌 당선자와 민주당 신주류측으로서는 개혁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다’는 것이 노 당선자의 거듭된 약속이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정계개편 불가피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노 당선자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묘수를 내놓을까.우리는 지금 5공 청산, 중간평가 문제 등으로 야 3당의 압력을 받고 있던 6공 노태우 정권의 물밑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다. 노 정권이 여소야대 구도의 타개책으로 삼은 것은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개편이었다.“노태우 대통령이 그 언제 정계개편, 즉 3당 합당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누가 3당 합당을 건의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노태우라는 인물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몇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당시 권력 핵심들의 진술과 증언이다.” S대령이 제시하는 권력 핵심들의 진술과 증언.먼저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 의원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에서 크고 작은 정계개편이야 늘 있어 왔지만 아마 내 기억에는 88년 4월 총선 결과 여소야대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정계개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의중을 쉽게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그래서 평소 생각해 오던 우리 정치의 양대 주류인 보수 진영과 진보 개혁 성향을 가진 진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 정계개편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식 양당제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일본식 내각제의 장점을 살린 형태로 4당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진술은 그렇다. 궁극적으로 3당 통합을 염두에 두고 정계개편을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한 것은 88년 4·26총선 직후부터였다. 이에 대하여 또 한 사람의 3당 통합의 주역, 당시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의 증언이다. “아직 날짜도 생생한데 88년 1월9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하고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정계개편을 위한 세 가지 방안을 건의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김윤환 총무가 건의한 정계개편을 위한 세 가지 방안은 이렇다.첫째, 제1야당 평민당과의 정책 제휴. 이 경우 민정당은 주도권을 상실하고 평민당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 공화당과의 합당. 이 경우 의석 수에서는 과반수에서 13석을 넘길 수 있으나 양당의 성격상 유신 본당과 잔당의 통합이라는 국민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공화당과의 합당은 상대적으로 야당을 자극하여 평민, 민주 양당의 통합을 부채질하게 된다.셋째, 민주당과의 합당. 현실적으로 가장 유리한 방향이지만 김영삼 총재(YS)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걸림돌이다.다시 89년 초의 정국 상황으로 돌아가자. 여소야대 구도 하에서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위험천만한 정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소여’, 작은 여당 민정당의 몸부림은 중간평가 유보, 정계개편 그리고 마침내 민정, 민주, 공화의 3당 합당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김윤환 당시 원내총무의 직접 진술이다. “그때 정무장관으로 있다가 선거 끝나고 원내총무를 하라캐서 맡게 됐다. 당시 처음에 평민당과의 정책 제휴를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평민당을 뺀 3당 통합이 됐다.” 김윤환 의원의 처음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김윤환의 구상대로 3당 합당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 의원의 생각은 또 달랐다. 이른바 박철언의 ‘정계개편 그랜드 디자인’이다. 박철언 보좌관과 최창윤 수석이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왔다. “정책보좌관 박철언입니다.”“정무수석 최창윤입니다.”“두 사람은 꼭 이리케 붙어 다니누만. 무신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다만 뭐야?”“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그기 뭐 잘못 됐십니까?”노태우 대통령이 박철언 보좌관을 보면서 말했다.“잘못 됐다는 기 아니라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알고 있나?”최창윤 정무수석이 물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8/1045495203302651.jpg" alt=""/>    ▲ 4당 대통합을 진행하던 박철언에게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을 뺀 3당만의 합당을 하라고 선을 긋는다.  “누가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는 말할 수가 없고 무신 말을 하는지는 말해주지. 최창윤 정무수석은 박철언이 사람이다. 이렇게들 말하고 있어. 무신 말인지 알겠어.”“잘 모르겠습니다.”여기서 박철언의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진술이다. 여소야대 구도 하에서 6공 정권의 중간평가,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그의 구상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는가.6공 청와대 비서실 L비서관이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일찍부터 주장해 온 3단계의 정치 철학이 있었다. 민주화, 민족 화합, 그리고 통일이다. 박 보좌관은 이와 같은 구도에 따라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왔는데 문제는 이 그림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림을 살펴보자. 계속되는 증언.“1단계인 민주화는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과 재임중 6·29 정신의 구현으로 성취된다고 봤으니까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단계인 민족 화합은 이것이 바로 박철언 구상의 핵심으로 내각제 개헌과 정계개편을 배경으로 한 고질적인 지역 감정 해소였는데 여기엔 영호남의 화합 즉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끌어안아야 하는 최대의 과제가 있었다. 이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민정당 평민당 공화당 등 3당 연합이 가능해지고 여기에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까지 끌어안으면 4당 합당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의원들과 색깔이 의심되는 일부 세력을 털어내면 보수 혁신을 망라한 거대 여당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뤄낸다는 것이 박 보좌관의 구도였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구상은 그러나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든 이상이었다. 다시 89년의 청와대.노태우 대통령이 박철언 의원에게 물었다.“내한테 할 얘기가 있다 캤는데 무신 얘기야.”“우선 저쪽하고의 막후 접촉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저쪽이라면 어데야. 평민당이야 아니면 민주당이야?”최창윤 정무수석이 말했다. “평민당입니다.”노태우 대통령은 시큰둥하게 반응을 보였다.“평민당이야?”“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내가 뭘. 그건 그렇고 만난 결과부터 말해봐.”“일단 중간평가는 하지 않기로 합의가 됐습니다.”“합의가 됐어?”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이때 노태우 대통령의 김대중 기피증이다. S대령의 증언. “89년 3월 중간평가, 정계개편 및 3당 합당 등의 정치 이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야 3당 중 제휴 상대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맞부딪치게 된다. 공화당은 이미 3월7일 JP 김종필 총재와의 양자 영수회담에서 JP 스스로 합당하자고 굽히고 들어왔으니까 일단 제외됐다. 따라서 나머지는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DJ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인데 과연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 결과에서 보듯이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선택했다. 왜 그랬느냐….”노태우 대통령이 두 사람을 불렀다.“박철언이, 최창윤이.”“말씀하이소.”“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평민당하고의 제휴는 원치 않아. 제휴를 한다면 민주당하고의 합당을 연구해서 추진해봐.”이 부분과 관련해 우리는 앞에서 김윤환 의원의 진술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가 건의한 정계개편 3개 안 중 제3안의 내용이다. 즉, 세 번째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이 경우 공화당과의 합당마저 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3당 합당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보수 야당의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YS 김영삼에게 있으므로 정치적 색깔에 있어서 문제될 것이 없고 따라서 상당한 상승 작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즈음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는 YS를 만나고 있었다. “총재 어른.”김영삼 총재는 김윤환 총무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다.“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계십니까?”“음? 아니야 아무 것도. 그러니까 시방 내한테 뭐라고 했나?”“그만큼 간곡히 말씀 올렸는데 못들으셨습니까.”“못들은 기 아니라 이해가 잘 안돼. 그래서 그러니까 어디 다시 한 번 말해봐. 그기 대체 무신 말이야.”“말씀 올리겠습니다. 3당 통합입니다.”정계개편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 백담사 전두환을 찾은 한 고위 인사가 있었다. 전임 국회의장 채문식 민정당 고문이었다. 여권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이 되는 셈이었다.‘입산’한 뒤 해가 바뀌어 89년 1월이 가고 2, 3월이 흐르고 그리고 4월. 백담사의 전두환 전임 대통령 부부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백담사 일지에서 확인해 보자. ‘이 무렵 여권 내부에서는 어르신의 거처와 국회 증언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 어르신의 거처를 해외로 옮겨야 한다, 해외로 옮길 것이다 하는 출처 불명의 애드벌룬이 뜨는가 하면 월정사로 옮길 것이다, 연희동으로 돌아온다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뜬소문들이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1백일 기도가 끝나는 5월16일 이후에는 어쨌든 어딘가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르신의 대답은 선문답일 뿐이다.’안현태 경호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채문식 고문이 백담사 경내로 들어섰다. “어르신네,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반가운 손님?”“반가운 손님이 누구예요?”“접니다. 영부인”“어머나, 채 의장님 아니세요?”“채 의장이 누구야.”“채문식입니다.”“채문식이?”반갑다는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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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3화 지각변동의 시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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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1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1/1044890403302640.jpg" alt=""/>    ▲ 88년 연말 김윤환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와 노태우 대통령은 정계개편을 논의한다. 당시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김윤환에게 노태우는 웃음과 함께 정계개편 청사진을 요구한다.  현대상선의 2억달러 대북 송금 의혹사건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특검제 주장에 맞서 ‘국회 비공개 증언’ 카드를 내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여야 모두 진상을 밝히자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지만 방법과 수위를 놓고서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양상이다. ‘의혹 정국’의 해법을 놓고 정치권의 이해가 첨예하게 상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년 총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이라는 화두로 총선을 대비하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와 민주당에게 이번 사건은 하루 빨리 털어버려야 할 구 정권의 유물이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에겐 대선 패배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쥘 수 있는 호재요, 사분오열된 당 전열을 재정비해 총선에 대비할 수 있는 천운의 기회인 셈이다.특검제 도입, 총리 인사청문회 등과 관련해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인 노 당선자와 민주당으로선 ‘여소야대’ 구도가 버겹게 느껴질 만도 하다. 최근 다시 정가 일각에서 정계개편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지금의 정치권 새 판 짜기를 개혁과 보수, 양대 세력의 재편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과연 14년 전 노태우 정권이 여소야대 구도의 타개책으로 삼았던 정계개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정계개편의 서막을 연 것은 바로 노태우 정권의 공약, 중간평가를 둘러싼 정국의 소용돌이였다. 지금 우리는 89년 3월 6공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야 3당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JP(김종필)의 공화당 입장은 확인되었다. ‘중간평가 불가’. 반면에 제1야당인 평민당의 입장은 중간평가를 유보하되 이것을 ‘볼모’로 보다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입장이었다. 먼저 평민당 원내총무, 현 민주당 고문 김원기 의원의 증언이다.“민정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야당인 것은 어떻게 견뎌 보겠는데 작은 여당이 돼가지고 일일이 야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말해서 여소야대 국면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최근 김원기 민주당 고문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정몽준 후보 단일화 협상에 필적할 만한 기억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여소야대 시절인 1989년에 제1야당인 평민당 원내총무로서 민정당과 중간평가, 5공청산 등을 놓고 벌인 협상이 기억에 남는다.당시 5공청문회, 광주청문회 등 이른바 ‘청문회 정국’ 막바지에서 여야간에 대협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내가 그 역사적인 문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평민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나 그리고 한두 사람쯤이고, 그때 민정당에서도 노태우 대통령과 당시 김윤환 원내총무 그리고 박철언 의원 정도다. 나하고 김윤환 총무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협상을 했다. 중간평가와 광주문제에 걸려 있던 정호용씨를 비롯해서 이희성씨 등과 5·18 때 광주에 출동했던 부대장들이라든지 5공 비리에 연루됐던 당시 ‘금융계의 황제’라고 했던 이원조 의원이라든지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와 광주 문제 처리, 전두환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논의하는 일대 협상이 있었다. 중간평가를 연기하는 것까지 포함해서.”다시 기자의 질문.“중간평가와 광주, 5공 비리 문제를 일괄 타결했다는 의미인가.”“그렇다. 일괄 타결을 했다. 나하고 김윤환 의원이.”“그렇다면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공화당은 배제한 상태에서 평민당과 민정당 두 당만 협상을 한 것인가.”“주로 우리하고만 했다. 나와 김윤환 의원이 합의한 서류가 있다. 물론 나는 당시 김대중 총재에게 보고했고, 민정당을 대표해서 김윤환, 평민당을 대표해서 김원기, 이렇게 여러 장으로 된 합의문서가 있다. “아직 공개가 안된 것인가.”“그렇다.”“언제쯤 공개할 것인가.”“이제 공개해도 상관이 없는데…, 사실은 서경원 사건 등으로 공안정국이 형성되고 3당 야합 구도가 발생하고 그러한 역경이 있을 때 그 내용을 공개해서 ‘너희들이 협약을 하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할 수가 있느냐’하는 공격 자료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공개는 안 했다. 사실 공개하고 싶은 유혹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공개함으로써 민정계 내부의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살생부였으니까. 누구는 배지 떼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처리하고, 축출하고 하는 문제까지 사인을 한 거니까. 그것을 공개하면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나는데, 그러나 그때 그것을 영원히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 곤란을 당하면서도 공개를 안했다. 그래서 민정당이나 야당쪽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도 그런 것이 작용한다고 본다.”결국 중간평가 유보를 놓고 뒷거래를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민정당이 중간평가 문제 등으로 물밑접촉을 했던 대상은 평민당만이 아니었다. 당시 김원기 원내총무의 상대역이었던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의 진술을 들어보자.“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하고의 물밑 대화는 그 해 89년 1월 초순께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1월22일인가 그 달 하순께 상도동이 아니고 김현철이 집에서 만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협상을 하게 되는데 그때의 경과는 이렇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1/1044890403302641.jpg" alt=""/>    ▲ 정계개편에 즈음해 평민당은 민정당이 자신들과 단독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김윤환 총무는 민주당과도 물밑협상을 진행했다. 위쪽 사진은 DJ와 김윤환, 아래쪽은 YS와 김윤환.  김영삼 총재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허주 김윤환. “안녕하십니까. 김윤환입니다.”“김윤환이라카는 거는 알고 있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에요. 아직도 내한테 할 얘기가 남았습니까?”옆에 있던 최형우 의원이 귀엣말로 물었다“총재 어른, 김 총무가 뭐라고 합니까?”김영삼 총재가 짜증을 냈다. “가만 좀 있어 봐라. 통화중에 그러만 우짜노.”겸연쩍은 듯 최형우 의원이 소리를 죽였다. “미안십니다. 계속하이소.”“보소 김 총무, 내 말 듣고 있지요.”“예. 듣고 있습니다.”“난 또 이 전화가, 전화를 도청하는 사람들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그라만 요새도 총재 어른 전화를 도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그거는 내가 김 총무에게 묻고 싶은 말이네. 요새도 안기부나 보안사 아니면 치안본부 특수부 같은 데서 우리 집 전화를 도청하고 있지요. 그렇지요?”민망한 듯 웃음으로 피해가는 김윤환 원내총무.“총재 어른, 지가 전화를 올린 것은 그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또 지는 그런 일은 잘 모릅니다.”“마, 좋습니다. 나도 김 총무가 그런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말해 보소. 무신 일이지요?”“지가 전화를 올린 거는 시국 상황과 관련해서 총재 어른께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섭니다.”여기서 김윤환 당시 원내총무의 진술이다. 6공 정권의 중간평가, 정계개편 나아가서는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먼저 기자의 질문. “지금까지 알려지기는 89년의 중간평가 유보와 정계개편, 그리고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혁은 그 전해 88년 8월 윤길중 민정당 대표의 마닐라 발언이 신호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윤 대표는 야당과의 연정 가능성과 함께 내각제 개헌을 시사하는 정계개편론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러자 뒤이어 원내총무인 김 의원의 유사 발언이 나왔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그때 여권 핵심부에서는 정계개편 즉 3당 합당의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김윤환 총무의 답변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시나리오는 없었다. 윤 대표의 마닐라 발언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하도 답답하니까 개인적인 소견을 말한 것뿐이고 나는 윤 대표의 발언을 보충설명하다 보니 마치 정계개편이라카는 정치 과제가 대 야당 접촉창구이자 원내 사령탑인 내한테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88년 연말쯤 이 문제를 가지고 노태우 대통령하고 상의를 했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각하.”“말해 보소.”“말씀 안드려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대로는 안되겠습니다. 무신 방법으로든지 정계개편의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어떤 방법으로 말이야? 그럴라카만 구체적으로 개편의 방법이 제시돼야 안되나.”“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각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방법을 찾아볼 기 아니겠습니까.”“아니, 이 무신 말을 하고 있어. 그라만 내가 무신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 총무가 모르고 있다 그 말이야.”“지가 언제 그렇다고 했십니까?”“아니만 뭐야. 그걸 모르니까 결심을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니야.”“죄송한 말씀이지만 각하. 사람들이 각하를 두고 뭐라 카는지 알고 계십니까?”“뭐를 뭐라고 해. 내가 뭐가 어때서?”“사람들은 각하를 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태우가 아니라 ‘물태우’다….”순간 노태우 대통령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면서 눈썹이 치켜 올랐다.“뭐이, 노태우가 아니라 물태우?”김윤환 총무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을 눈앞에 두고 물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그만큼 우유부단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가 어떻게 각하의 결단 없이 일을 추진할 수가 있겠습니까?”감히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윤환 총무는 웃을 심정이 아니었다. “각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정계개편이 아니고는 임기 내내 물태우라는 말을 벗어나지 몬할 낀데 어데서 웃음이 나옵니까!”그러자 미소의 흔적이 채 가시기 전의 얼굴이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결연한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봐라 김윤환이! 나는 물태우가 아니야! 정계개편의 구도를 책임지고 그려와, 알겠나!”]]></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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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2화 전두환과 DJ]]></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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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4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04/1044285603302630.jpg" alt=""/>    ▲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받는 DJ. 당시 그는 사형을당할 위기에서 감찰관의 꼬임에 넘어가 내란음모를 시인했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훗날“그를 사형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인 고건 지명자에 대한 인준에 찬성할 것으로 조사된 한나라당 의원이 5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제 야권도 무조건 여당의 발목만 잡고 늘어져서는 2004년 총선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흔히 정치판에선 영원한 동지도 또 영원한 야당도 없다고 말한다. 명분과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정치 현실이기 때문이다.  89년 3월7일 또 한 번의 영수회담에서 JP(김종필)와 노태우 대통령 사이에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 즉 보혁구도의 정계 개편이 합의된다.  S대령의 진술이다. “그때 JP는 측근 중의 최측근 김용환 정책위의장에게 중책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선 제일 먼저 해결할 문제가 5공 청산이다. 이것이 안되고는 보혁 구도의 개편에 명분이 없다. 앞으로의 문제는 5공 청산인데, 이 문제를 민정당 하고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이나 나는 이목이 있으니 자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저쪽하고 합의를 봐서 우리 쪽에서는 김 의장이 협상 대표가 되고 저쪽에서는 홍성철 비서실장을 내세우기로 양해가 됐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김 의장이 홍성철 실장하고 자주 접촉해서 양당의 합당 문제를 풀어 나가도록 하라. 그리고 또 하나는 시방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중간평가인데 이건 하지 않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도록 하라’.” 이 즈음 김대중 평민당 총재도 김원기 원내총무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나가 시방 김 총무에게 지시하는 것은 그러니까 민정당의 김윤환 총무하고 마지막 담판을 지을 적에 중간평가 때문에 고심할 것은 없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윤환 총무하고 담판을 벌일 적에 중간평가를 받도록 강요하지는 마라 이런 말씀이고, 결국은 중간평가를 안 한다는 것을 담보로 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자는 얘기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지방자치제의 조기 실시였다.  김대중 총재의 언급 내용이다. “5공 청산, 여기엔 우리가 지목하고 있는 5공 핵심들 특히 정호용이 처벌 문제하고 전두환의 청문회 출석 증언 등이 포함되는데, 여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이 지방자치제다.  광주문제보다도 앞서는 것이 바로 지방자치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다 놓치더라도 지방자치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반드시 얻어내야 한다.” 우리는 지금 3당 합당을 전후한 보혁구도로의 정계개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구욱서 부장판사)는 시인 고은씨(69)가 “지난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신군부의 판결은 부당하다”며 제기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청구인은 80년 헌정질서 파괴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긴 했으나 12/12사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에 대한 내란죄가 유죄로 확정된 만큼 5/18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정한 특별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전봉진 부장판사)도 지난해 11월 고 문익환 목사 유족 등 19명이 같은 취지로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인 바 있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재심을 받는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여기서 잠시 80년 신군부의 정치실험 당시 김대중 총재와 신군부와의 만남에 대한 일화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생 동지 이희호 여사가 허화평 정무수석의 호출을 받고 경복궁 미술관 앞에 내렸다. 이 여사의 귓가에 남아 있는 허화평 정무수석의 목소리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경복궁 미술관 아시지요. 그 앞으로 오시면 정 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낍니다. 거기서부터는 그 사람의 말대로 따르기만 하시면 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낍니다.” 목소리는 남아 있지만 정 비서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이희호 여사를 알아본 사내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이희호 여사지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이희호 여사의 눈이 커졌다.  “예. 그런데 누구시지요.” “아,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가 바로 정 비섭니다.” “그, 그렇군요.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시간이 됐는데 안 오시길래 일이 잘못됐나 해서 걱정했습니다. 자, 타시지요.”  “그런데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왜 두려우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약간은….”“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로 모셔 간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없지만 이 여사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라뇨? 그런 곳이 어디죠?” “말씀 안하셔도 다 압니다. 이 여사께서는 지금 내가 혹시 안기부 같은 곳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희호 여사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기부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04/1044285603302631.jpg" alt=""/>    ▲ 한때 죽이려는 자와 죽는 자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전두환 전 대통령. 지난 2000년 청와대 만찬을 함께한두 사람.  “그러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모르니까, 그래서 더욱 두려운 거지요. 혹시….” 정 비서라는 인물은 이희호 여사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곳으로 모셔가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 마시라고. 마음 편하게 먹고 앉아 계시면 곧 도착하실 겁니다.”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증언이다.  “저녁때가 다 돼서였는데 거리는 벌써 캄캄했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인 경복궁 미술관 앞으로 갔더니 정 비서라는 사람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효자동이더라. 비로소 알게 됐다. 허화평이라는 사람이 정무수석이라고 하더니 청와대로 가는구나. 승용차가 청와대 정문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다리를 지났다. 그리고 마치 오두막집처럼 생긴 집 앞에서 차가 멈췄다.” 여기서 진술과 증언이 필요하다. 80년 9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조종하는 계엄 군법회의는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DJ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어 2심 군사 재판은 짜여진 각본대로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81년 1월23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된 것이다.  이때 전두환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선고대로 집행할 생각이었는가. 아니면 선고 직후 국무회의를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듯이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는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증언이다.  “남산 지하실에서 보니까 내란선동죄로는 죽질 않았다.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민통과 관련시켜서 국가보안법 1조 1항으로 걸면 사형이다.  싫어도 사형을 선고하도록 돼 있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런 것을 모르고 참 어리석고 부끄럽게도 무기징역이라도 좋으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검찰관의 꼬임에 빠진 것이다. 그때 담당 검찰관이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말도 안된다. 책임지고 국가보안법은 적용 안할 것이니 다른 부분은 시인해라. 만일 여기서 부인하면 또 한 번 남산으로 돌아가서 당해야 한다.  그런 것보다는 일단 시인하고 법정에 가서 할 말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책임지고 국가보안법으로는 걸지 않겠다. 시인해라.’  나는 그때 검찰에서 진술한 것은 증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검찰관 말대로 법정에 가서 얘기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시인한 것이다. 그게 바로 함정이었다.” 이상의 진술은 김대중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어떤가.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진술하고 있는가.  87년 12월 전두환은 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이 부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기자의 질문.  “81년 1월23일 김대중씨는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자 국무회의는 1등급 감형하여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낮추었다. 그때 김대중에 대한 감형은 언제부터 논의가 되었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 “80년 초 김대중씨를 만나 시국과 관련하여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 증언했다시피 3명의 정치 지도자(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의 이른바 3김씨를 가리킨다)가 있는데 보안사령관이 김대중씨 한 사람만 만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그 뒤에 김대중씨는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어 재판을 받았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할까 생각도 했으나 내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계속 진행된 재판에 대해 나는 한마디도 이래라 저래라 한 일이 없다. 판결은 재판부에서 알아서 해라.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 내가 알아서 하면 될 거 아니냐, 나는 이런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김대중씨 사형은 절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마당에 어떻게 나라의 정치 지도자 김대중씨의 사형 집행서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  그거는 나의 소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무기 형으로 감형되고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면하여 미국에 가서 신병을 치료하고 돌아오도록 허락한 것이다.” 과연 그랬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다시 이희호 여사의 진술로 돌아가자. 정 비서에 의해 안내된 이희호 여사가 허화평 정무수석의 방으로 들어섰다. 허화평 수석은 보이지 않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조금 후에 허 정무수석이 들어왔다.    “아, 오셨군요. 아닙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자신을 보고 일어서려는 이희호 여사를 허 정무수석이 만류하며 재빨리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이 여사께서 만나고 싶어하는 분께서 들어오실 낍니다. 참 여기가 어딘지 아셨습니까?” “청와대로 알고 들어왔는데….” “맞습니다. 청와댑니다. 자 그럼 저는 나가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들어오시면 만나 보십시오.” 이희호 여사의 증언이다.  “오두막집 같은 데서 잠시 기다리니까 허화평 정무수석이 들어 왔다. 잠시 애기를 나누고 허 정무수석이 나가고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자 허화평 정무수석이 말한,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들어왔다.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두환입니다.” 껄껄 웃으며 들어오는 전두환 대통령이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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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1화 공화-민정의 밀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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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8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8/1043680803302620.jpg" alt=""/>    ▲ 초록은 동색 89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준비팀을 꾸린다. 하지만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보혁구도로의 개편을 주장하며, 중간평가를 그만두게하고 비밀리에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을 진행시킨다.  새해 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회오리가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다시 핵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 탄생할 노무현 정권이 몰고 올 개혁의 칼바람보다 더 세차게 밀려오고 있다.  꼭 10년 만이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도 그랬다. 매번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북한은 늘 시끄럽다. 그것도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내면서까지 말이다. 노무현 정권은 지금 갈 길이 바쁘다. 김대중 정부의 부채와 자산을 승계하고 있는 중이다. 부채는 빨리 정리하고 싶을 것이고, 자산은 되도록이면 크게 해서 받고 싶을 것이다.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나갈 묘안 찾기에 한창이다. 일단은 고건 총리 카드를 내세워 안정 보수층을 끌어안겠다는 복안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정 의석’ 확보가 급선무다. 각종 민생 현안과 관련있는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하고 개혁 드라이브를 뒷받침할 법적 제도적 장치도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주목되는 움직임이 바로 정계 개편이다.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은 6공 노태우 정권 초기 상황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88년 4&#8226;26총선으로 여소야대의 4당 체제가 형성될 적에 JP(김종필)의 공화당은 제 4당이자 거대 3야당 중에서는 제 3당, 최소의 정당으로 등장했다. 다음은 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야 3당의 입장, 그중에서 JP 공화당의 입장에 대한 증언이다.  “JP의 내각제 발상이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 그의 구상은 보수&#8226;혁신의 정계 개편과 내각제 개헌이었다. 4&#8226;26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면서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그런 주장은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어가던 양 김씨, 즉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민주당 김영삼 총재, 이 두 사람과의 서로 다른 정견에서 비롯됐다. 야권 공조를 위한 3김 회담을 제의해서 성사시킨 JP는 이 회담에서 3야당 공조에 합의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속마음은 그렇질 않았다.  우선 체질 자체가 여당 체질인 데다 양 김씨보다 훨씬 보수적인 데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항쟁이나 5공 청산과 관련한 김대중 김영삼 양 총재의 완고한 태도에 이질감을 느꼈고 특히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 등에 있어서는 완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L비서관의 진술은 여기서부터 더욱 구체적이다.  “JP의 거부감은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보다도 이념적으로 한발 앞서 있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 대해 더욱 강력했다. 이 같은 거부감이 표면화된 것은 그 해 88년 5월18일 야 3당 총재 회담 직후에 나온 김대중 총재의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제의’에서였는데 그때 DJ는 평민당 비공개 의원 총회에서 이런 제의를 했다.”  그 내용이다. “서울올림픽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적으로 영광이요 명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특이한 상황이 있다. 남북 분단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제의한다.  올림픽을 올림픽 그 자체로 끝나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용하여 남북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올림픽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며 필요하다면 판문점에서 남북 정당간의 회담을 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L비서관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JP의 측근 중 최측근이었던 김용환 의원의 얘기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및 판문점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가 나오자 김종필 총재는 논평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판문점에서 남북간 정상회담을 열자는 제의에 나는 반대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저쪽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마는 결과가 될 우려가 있어서 그렇다.  자, 그렇다면 남북 문제는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것이냐. 아직은 대북 창구를 정부 주관 하에 두고 우리 야 3당은 정부 방침에 협조하는 것이 옳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속되는 김용환 의원의 진술.  “김종필 총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구상을 표면화시킨 것은 그 해 88년 6월 6개국 대사 초청 오찬의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분은 이런 말로써 야 3당의 색깔을 분류하고 보수 연합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김종필 총재의 언급 내용이다. “흔히 야 3당 협조 체제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3야당은 각각 색깔이 다르다. 평민당이 혁신적인 데 반해 우리 공화당은 온건 보수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은 평민과 공화의 중간쯤 되는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정치 판도는 보수와 혁신의 양당 구조로 가게 될 소지가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8/1043680803302621.jpg" alt=""/>   그렇다면 그때 왜 이런 발언이 나왔느냐. 김용환 의원의 진술이다.  “야 3당 공조 체제라고 해서 평민당 민주당과 함께 보조를 맞추다 보니 각 당의 색깔이 서로 달라서 협조가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색깔론인데 색깔에 따라 보수&#8226;혁신으로 정계를 개편해서 보수 진영의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보수 진영의 위기감, 즉 여소야대 정국에서 혁신의 소리는 점차 높아지는데 보수 진영은 민정당과 공화당으로 분할돼 있어서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 김 총재의 생각이었다.”  88년 7월29일 JP 김종필은 광주 문제와 관련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감정과 관련된 발언이다.  김종필 총재의 발언이다. “지역감정에 관한 한 어느 한 정당에서 잘못 나서면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위험이 있다. 특히 어느 특정 정치인이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유아독존적인 발상을 한다면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위험이 있다.” JP는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DJ, 김대중 총재에 대한 비판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진술은 그렇다. 중간평가는 애당초 제 1야당인 평민당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쪽으로 당론을 제시했다. 따라서 민정당은 평민당의 당론을 받아들이고 중간평가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5공 청산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평민당측 협상 창구였던 김원기 원내총무의 진술은 또 다르다.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5공 청산을 위한 여러 가지 반대 급부, 즉 지자제 실시 등을 받아냈다는 주장인 것이다.   과연 어느 쪽 진술이 옳은가. 그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그 해 89년 3월19일의 현장으로 가보자.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이다.  “나가 오늘 이라케 청와대 핵심들을 들어오라 한 거는 다른 기 아닙니다. 우리 김윤환 원내총무가 오늘 중간평가 문제 그라고 5공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평민당 김원기 총무하고 마지막 협상을 시도하기로 되가 있십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먼저 확정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들어오라 한 깁니다.” “각하, 무신 말씀입니까?” 김윤환 원내 총무.  “그러만 두 가지 문제에 변경이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안그래도 나가 그 말을 할라고 했십니다. 여러분 나는 중간평가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십니다.” 89년 3월20일 노태우 대통령은 마침내 중간평가 유보를 공식 선언했다. 87년 대선 기간 중에 자기 자신이 제시한 국민과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계속해서 그 진상을 확인해 보자. S대령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위한 대책 기구를 이중으로 설치하고 당에 대해서는 핵심 당원들에게 중간평가에 대비한 연수 교육을 시키도록 지시해서 당 지도부가 교육에 착수했던 그런 시점이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은 왜 갑자기 중간평가 유보 선언을 해버렸느냐. 89년 3월7일 노태우 김종필의 양자 영수 회담이 있었던 사실은 그 이후에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회담을 마치고 당사로 돌아온 김 총재는 정책위 의장 김용환 의원을 불러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여기서 진술자가 바뀐다. 6공 청와대 L비서관이다.  진술에 앞서 우선 6공 정권의 중간평가에 대한 3야당의 입장부터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JP 김종필의 공화당 입장이다.  “그 해 89년 3월7일 노태우 대통령은 정국 안정책의 일환으로 김종필 총재를 청와대로 불러 민정 공화 양당의 영수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 의제는 양당의 합당이었다.” 김용환 의장이 물었다. “양당이 합친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민정당과의 정책 연합입니까 아니면 양당의 합당입니까?” 김종필 총재의 부연 설명이다. “양당의 정책 연합이 아니오. 당과 당이 합치는 거예요.” 김용환 의원은 놀란 표정으로 김 총재를 한참 쳐다보았다. 김 의원의 진술이다. “그보다 앞서 88년 8월, 정확히는 8월22일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야 3당 총재와 연쇄 개별 영수 회담을 시도했을 적에 첫 번째 상대가 된 JP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민정당은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여소야대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대체 뭡니까. 어쨌든 이대로는 안됩니다. 정치판을 보&#44224;?구도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당의 진의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평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없다기보다 여권에서 하기 어렵다고 보면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평민, 민주 양당이 제동을 걸고 나오더라도 미력하나마 우리 공화당은 각하를 돕겠습니다.’ 다시 김용환 의원의 진술이다. “이때부터 노태우 대통령과 JP 사이에 물밑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의 내용은 물론 보&#8226;혁 구도의 정계 개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당과 당의 합당까지는 얘기가 안되고 정책 연합선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해가 바뀌어 89년 3월7일 또 한 번의 영수 회담에서 JP와 노태우 대통령 사이에 우리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 즉 보혁구도의 정계개편에 합의가 된 것이다.” 다시 김종필 총재와 김용환 의원 사이의 대화로 돌아가자. “김 의장. 내가 말하는 합치기로 했다는 말은 정책 연합이 아니라 합당이에요, 합당.” “합당이라면 저도 반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선행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입니까?” 김종필 총재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우선 제일 먼저 해결할 문제가 5공 청산입니다. 이것이 안되고는 보&#8226;혁 구도의 개편에 명분이 없어요. 그래서 애긴데….” 당시 김종필 총재는 김용환 정책위의장에게 중책을 맡기게 되는데 과연 어떤 임무일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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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50화 노태우의 두얼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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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1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1/1043076003302610.jpg" alt=""/>    ▲ 노태우의 입가에 미소가…  마침내 정계 개편의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최근 한나라당 이규택 원내총무가 내각제 개헌 필요성을 공개 거론한 데 이어, 13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화답했다.  “개인적으로 내각책임제 문제를 거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권력구조 문제는 국민의 변화 욕구와 함께 가야 한다. 야당이 주장하는 내각책임제나 우리가 주장하는 중대선거구 문제는 국회 정치협상을 통해 정치개혁특위에서 결론을 도출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대선거구제는 우리 당의 당론이며, 내각제는 우리가 자민련과 공조할 당시 우리 당의 당론이었다. 여야 합의가 되면 둘 다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느 것이든 둘 중에 하나라도 되는 것이 안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아울러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모든 것을 논의할 수 있다는 원론적 의미이며 우리가 먼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야가 합의하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세대교체에 따른 개혁에 정계개편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회오리바람 속에 또 하나의 태풍이 일고 있다.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한&#8226;미&#8226;일&#8226;러 사이의 치열한 정보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마침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배수진을 응용한 ‘벼랑 끝 외교’의 전형을 다시 연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응수를 타진하기 위한 여지는 남겨 ‘핵무기는 만들지 않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다가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재개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일본과 미국을 다시 긴장시키고 있다.  지난 93년 김영삼 정권이 태동할 당시에도 보여주었던 북한의 초강경 외교술은 이번 노무현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다시 재연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외교를 통해 북한이 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중유 공급을 중단한 미국의 제네바 협상 파기에 대해 파상 공세를 가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명분을 얻으려는 것이며, 둘째는 젊은 세대의 개혁 드라이브와 반미 분위기를 틈타 한반도에 자주적 통일 분위기를 고조시켜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셋째는 지난 5년간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도운 김대중 대통령의 정계은퇴를 앞두고 한반도 평화 유지에 있어서 국제사회에서 공인될 만한 외교적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한은 미국의 보수 언론이 주한 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는 배경을 북한 폭격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북한은 ‘그렇다면 그동안 주한 미군이 지켜온 것이 과연 남한이었느냐 아니면 일본이었느냐’하는 것을 묻듯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일본을 넘겨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한반도의 핵 위기 상황을 놓고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당선자를 바라보고 있다. 과연 햇볕정책의 기조를 유지하여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 것인가.  공약은 항상 수정되게 마련이다. 기업의 경영전략이 수정되듯이 국가의 전략도 주변 국가와의 끊임없는 외교를 통해 항상 유연하게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6공 초 노태우 대통령은 최대의 선거 공약인 ‘중간평가’를 실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박철언 김용갑 이춘구 등 핵심 측근들까지도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에 대한 의중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온 것이다.  측근들의 분위기를 읽은 노태우 대통령은 89년 초 참모들을 청와대로 불러모았다. 그 자리에서 중간평가대책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S대령의 진술이다.  “이보다 훨씬 앞선 그 전해 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은 이종찬 정무장관에게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 준비 작업을 지시한 바 있었다. 그 후 이 장관을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런데 왜 노 대통령이 또 다른 준비 팀을 만들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진술자를 바꾸어 당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이춘구 의원이 이끄는 대책본부가 설치되기 전 노 대통령으로부터 준비 작업을 위임받았던 이종찬 당시 사무총장의 진술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1/1043076003302611.jpg" alt=""/>    ▲ 자신의 중간평가 준비팀을 놔두고 또다른 준비팀이 생기자 이종찬 당시 사무총장(왼쪽)은 박철언 정책보좌관(오른쪽)에게 ‘경고’한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을 처음 받은 것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채 안된 그 해 88년 12월이다.  정책보좌관 박철언이 나한테 수수께끼 같은 발언, 아니 경고를 보내왔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선배께서 중간평가 작업을 필요 이상 서두는 것은 뭔가 개인적으로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까?’  두 번째는 해가 바뀌어 89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당직자 회의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역시 수수께끼 같은 발언이다.  ‘듣자하니 요새 우리 민정당내에 TK에 이어 SK가 등장했다는데, 이거는 누가 봐도 당을 해치는 분파 행위가 분명한데 이래도 되는 건가. 당은 총재를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해당 행위가 당직자들 중에서 나올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수수께끼와 같은 이 사람의 발언을, 그 진의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2개월 뒤인 그 해 3월 초였다. 내가 설치해서 가동중인 당의 공식 기구 외에 이춘구 의원이 이끄는 또 다른 중간평가 준비팀이 출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장난인가를 알아보고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박철언 정책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노태우 대통령의 강력한 신임으로 박철언 보좌관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박철언 보좌관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놓고 어째 말이 없노. 전화 바꿨습니다. 정책보좌관 박철언입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나, 이종찬이오.”  “알고 있습니다. 이 선배께서 무신 일입니까?”  “우선 사실 여부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듣자니까 이춘구 의원이 주도하는 중간평가 준비팀이 가동하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얘기를 어데서 들었습니까?”  이종찬 사무총장의 언성이 높아진다.  “어디서 들었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소. 다 알고 하는 얘기니까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 봐요!”  이종찬 사무총장의 높아진 언성을 아랑곳하지 않는 박철언 보좌관이다.  “이 선배께서 뭔가 잘못된 소문을 들으신 것 같은데….”  “뭐야?”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을 낍니다.”  “없을 끼라는 게 무슨 말이오? 그런 일이 없다는 거요? 아니면 그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거요. 어느 쪽이오.”  박철언 보좌관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종찬 사무총장이 단호히 말했다.  “좋소. 대답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상관없소. 대신 이 말을 좀 전해 주시오. 나는 정석모가 아니다. 지난 대선 때 정석모 사무총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듯이 이종찬이를 바지저고리를 만들 생각은 하지 마라. 이상이오!”  노태우 대통령은 이춘구 의원을 팀장으로 하는 대통령 직속의 중간평가 대책본부를 설치해 놓고선 어째서 결과적으로 중간평가 유보 결정을 내림으로써 대책본부의 기능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는가.  6공 청와대 출신 L비서관의 진술이다.  “89년 6공 정권의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중간평가 대책기구였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같은 성격의 기구를 두 개, 그리고 별도로 전혀 다른 성격의 기구를 또 하나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그 전해 88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이종찬 정무장관을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기용하고 중간평가에 대비한 준비팀을 가동시켰다. 그래놓고 다음해 89년 3월 비밀리에 이춘구 의원을 팀장으로 하는 또 하나의 준비기구를 대통령 직속으로 출발시킨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종찬 총장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됐는데 더욱 큰 미스터리는 노태우 대통령이 이 두 개의 기구 외에 성격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대책기구를 가동시켰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성격이 전혀 다른 대책 기구.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팀장으로 하는 중간평가 대책기구 아니,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 위한 대책기구가 그것이었다.  결론은 그렇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종찬과 이춘구의 두 의원을 팀장으로 하는 같은 성격의 두 개의 대책기구를 가동시킨 것은 또 하나의 대책기구, 즉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주도하는 정계개편 작업을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받지 않음으로써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여권 대다수가 중간평가를 강행,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 돌파할 것을 강력히 원했으나 노 대통령은 정국의 혼란을 이유로 끝내 정치적 모험을 회피한 것이다.  과연 잘한 일인가 못한 일인가? 우선 그 경과부터 알아보자.  89년 4월경 노태우 대통령은 다시 핵심 참모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아이고 다들 모였네. 각하 지가 좀 늦었습니다.”  대통령까지 미리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에 허주 김윤환 의원이 겸연쩍은 얼굴로 들어왔다.  “인자 다 모였지요?”  노태우 대통령이 회의를 시작하려고 하자 홍성철 비서실장이 나섰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아직 안 올라 온 것 같습니다.”  “참 박철언이가 안 보이는구만.”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최창윤 정무수석이 일어서자 노태우 대통령이 만류했다.  “아니야, 내가 연락하지.”  인터폰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책보좌관 박철언입니다.”  “나, 대통령이야. 다들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 올라오고 뭐하고 있나?”  “초안을 작성중인데 되는 대로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초안이라니? 무신 초안을 작성하고 있나?”  박철언 보좌관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김윤환 원내총무가 평민당 김원기 총무를 만나러 갈 때에 가지고 갈 합의문 초안입니다. 각하 김윤환 총무 들어왔지요?”  “들어왔으니까 전화한 거 아니야? 그런데 합의문의 초안이라는 기 대체 무신 소리야.”  홍성철 비서실장이 설명한다.  “문서가 필요합네다. 각하. 구두로 해가지고는 나중에 그쪽에서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서로간에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민당으로부터 문서로 보장을 받는다?”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기 때문에 박 보좌관이 초안을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박철언이가 치밀한 데가 있구만…. 듣고 있나 박 보좌관.”  “예, 듣고 있습니다.”  “기다릴 테니까 초안이 되는 대로 가지고 올라와. 이상이다.”  중간평가 약속을 파기한 노태우 대통령은 곧바로 3당 합당 정계개편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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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9화 민정당의 속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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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4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14/1042471203302600.jpg" alt=""/>   노무현 당선자의 최대 공약은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당선자가 오차 범위이긴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가고 있을 때 내놓은 공약이다. 충청 표심을 확실히 잡기 위해 수도권의 이탈을 어느 정도 감수한 공약이었다. 국민적 합의를 비롯해 앞으로 10년간에 걸쳐서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임기 5년 동안은 그렇다 치고 그 뒤의 5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정치적 연속성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여권에 의한 정권 재창출이 지속될 것인가.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되기가 쉽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여의도 유세장에서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한 것에 대해 측근들은 불만이었다. 선거 기간 내내 유리한 입장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담스러운 공약을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간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중함이 드러난 사례였다.89년 한국정치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정권은 공약으로 내걸었던 중간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민정계 내부에서도 이종찬 의원 등은 국민에게 한 선거 공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당을 분열시키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분파주의적 행동이라고 몰아붙였다. 외부적으로는 김윤환 원내총무를 내세워 야권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핵심 측근들을 청와대로 불러 중간평가에 대한 의중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춘구 의원, 최병렬 문공부 장관,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리고 박철언 정책보좌관과 최창윤 정무수석 등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는데 김용갑 총무처 장관의 차례가 되었다. 다혈질의 김용갑 장관이 마침내 핵심을 건드렸다. 그렇게 물어 보는 의중이 뭐냐. 대통령 자신은 중간평가를 하겠다는 것이냐 안 하겠다는 것이냐 먼저 속시원히 밝히라는 것이다. “시방 내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김 장관의 생각을 묻기 전에 내부터 중간평가를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태도를 밝히라고 했어요?”  김용갑 장관은 아차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중간평가에 관한 한 여러 번에 걸쳐 건의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중간평가를 통해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데 뭡니까?”  “각하께서는 한 번도 명쾌한 답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지한테 중간평가를 받는 기 옳으냐 받지 않는 기 옳으냐 하문 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순간 모인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노태우 대통령이 나섰다. “아, 조용히 하소. 조용히.”  그러자 이춘구 의원이 입을 열었다. “각하.”  “아, 이춘구 의원도 무신 할 말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참석한 전원은 중간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들입니다. 각하의 뜻은 어느 쪽입니까?”  “좋아요. 말해 드리지. 내가 오늘 이 회의를 소집한 것은 중간평가 준비작업을 지시하기 위해섭니다.” 89년 3월9일이었다. 이날 모임에는 위에 열거한 인물들 외에도 홍성철 비서실장, 박세직 안기부장, 현홍주 법제처장 등도 참석했다. 이춘구 의원이 의아한 듯 확인했다. “중간평가를 지시하시기 위해 이 모임을 소집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왜 그 말이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이상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은 중간평가를 받기로 결심하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야. 허, 그러고 보니 이 의원이 대통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구만.” 자신을 도와주려는 취지로 말문을 연 이춘구 의원이 수세에 몰리는 것으로 판단한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편들고 나섰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하.”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아는 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전원은 지난 대선 때 각하의 당선을 위해 전력투구한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  “내가 그런 사실을 모른다캤습니까?” “그런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다만 저희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하께서는 이미 저희들이 아닌 다른 팀에 중간평가 준비 작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뒤늦게 저희들에게 중간평가 준비 작업을 지시하신다 하니 그게 좀 이상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 중간평가 준비팀입니까?”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14/1042471203302601.jpg" alt=""/>    ▲ 89년 민정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던 허주 김윤환. 당시 ‘소여’의 어려움에 직면한 그는 야권과 만나겠다는 생각을 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구만. 이 의원.”  “예.”  “중간평가에 대비해서 대통령 직속으로 대책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간평가 대책본부라고 하셨습니까?”  “기구 명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이 의원이 대책위원장을 맡고 나머지 분들은 위원으로 들어가서 힘을 합해 중간평가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기 바랍니다.  그라고 사무실은 청와대 뒤편 안기부 안가 있지요? 박세직 안기부장에게 지시해서 그 집을 쓰도록 했으니까 그리케 하시고 중간평가를 단행하는 디데이는 오는 4월입니다. 한 달밖에 안 남았어요. 시간이 임박하니까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참석자들이 뭔가 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 중간평가와 관련한 김원기 당시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의 분석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수세 일변도에 있던 여당이 애초의 공약과는 달리 5공 청산이라는 멍에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한 것이 중간평가였다. 그리하여 국민 투표에 승리함으로써 5공 청산을 할 뿐 아니라 여소야대 정국을 한꺼번에 뒤집어 보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협박성 무기가 바로 중간평가였다.” 이와 같은 평민당 시각에 대하여 수세 일변도에 있던 소여의 주장은 어떤가.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 김윤환 전 의원의 설명이다.  “그래 가지고 야 3당이 합심을 해 가지고 중간평가를 하자고 공세를 펼쳐 오고 있었는데, 민정당 혼자서 안 하겠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국민투표를 해도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중간평가를 받고 안 받고 그런 거는 어찌 보면 어려운 것은 아니고 야 3당이 합쳐서 사사건건 반대를 하겠다고 나서면 앞으로 국정 운영이 제대로 안되겠다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어찌 됐건 여당의 원내총무로서 야권을 방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제일 초점이 정호용 의원 처리 문제였는데 정호용이 문제는 곧 5·18 문제이고 5공 청산의 문제였다. 당시 야권에서는 5공 핵심 여섯 사람의 공직 사퇴를 요구해 왔는데 청와대에서는 정효용 의원의 공직 사퇴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뭐 도리가 있나. 그 당시에 세 야당이 힘을 합쳤는데 못할 게 뭐 있었겠나.”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허주 김윤환은 누구인가. 88년 5월 그가 소여의 민정당 원내총무로 취임했을 적에 도하 모든 언론 매체는 묻고 있다.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에 그는 대답하고 있다. “여야가 공존하는 동반 정치 풍토를 이룩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당시 J일보 허아무개 기자와의 일문일답이다.  “이번 4·26총선의 의미를 어떻게 보나.” “이제는 힘의 정치, 대립의 정치를 지양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다운 정치를 펴 달라는 국민 여망의 표출로 본다. 이 같은 여망을 여야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노력한다면 처음으로 맞이하는 원내 구도이긴 하지만 정치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의 정착을 앞당길 수 있는 큰 전기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거대 야당이 쥐고 흔들면 소여의 민정당은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시각이 있다. 또한 청와대쪽은 정국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은데….”  “반드시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노 대통령의 6·29선언은 민주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고 우리 민정당이 이 선언을 그대로 실천해 나간다면 무슨 장애가 있겠나.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 상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없는 거는 아니지만 국민의 성숙된 역량과 그에 부응하려는 정치인의 노력이 충분히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대야 협상은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가.”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점을 찾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당은 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만큼 야당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야당 인사들과 접촉해서 허심탄회하게 정국 운영 방안을 논의해 나갈 것이다.”  “상당히 장신이다. 신장이 얼마인가.”  “별명이 ‘펜슬’이다. 연필처럼 길쭉하다는 뜻인데 1m81cm이다. 체중은 73kg.” 당시 김윤환 원내총무는 취미가 ‘홀로 여행’이고 골프 핸디는 14. 주량은 두주불사하다가 간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 가차없이 끊었다. 가족은 아들 없이 딸이 둘이고, 정계 은퇴 후엔 둘째 딸이 프로 골퍼 지망생인데 따라다니면서 캐디 노릇이나 하고 싶다고 했다. 허주 김윤환의 별명은 ‘하회탈’이다. 이제 새로 탄생할 노무현 정권도 야권과의 공조가 필요하다. 국무총리, 국정원장 등 이른바 ‘빅4’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최초에 한해서 실시하지 말자는 첫 번째 사안에 대해 야권에서 제동을 걸고 나와 무산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대야 협상 창구를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야말로 국민 통합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협상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한나라당도 오는 2004년 총선에서 다수당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반대나 제동만을 일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새천년민주당이나 한나라당 공히 개혁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한나라당 젊은 의원들 지역구에서는 민주당의 개혁 노선에 합류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200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1년이 못가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일반론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비롯한 민주당 주류들은 사실상의 정권 창출이나 대통령 선거 승리는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노무현 당선자를 중심으로 개혁 그룹들이 헤쳐 모일 것인가. 정계개편의 폭풍은 다시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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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8화 비밀회의 소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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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7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07/1041866403302590.jpg" alt=""/>    ▲ YS는 부총재 경선에 나가려던 최형우의원을 말려 원내총무를 맡겼다. 5공청산을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논공행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자리는 한정돼 있고 생색내는 사람들은 많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개혁의지는 확고하다. 각종 인사 청탁을 하거나 이권에 개입하면 ‘패가망신’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섭섭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노무현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때문에 당선됐다고 믿지는 않을까. 심지어 막판에 정몽준 대표가 사퇴를 해서 짐을 덜어 준 것도 오히려 당선에 도움이 됐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논공행상에 부담이 많았다. 30여 년 가까이 동고동락을 해 온 동지들을 외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욱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동지에 대한 부담은 적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5공 정권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정권부터 정치적 기득권 세력들이 이제 노무현 대통령 시대 도래로 완전 물갈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월 하순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바닥을 밑돌고 있을 때 한 인기 탤런트의 지지 연설을 들으면서 노무현 후보는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지지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당시 그 탤런트는 우리 역사가 바라는 개혁을 이뤄낼 마지막 유일한 리더가 누구냐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 흘린 노무현 후보의 눈물은 그간 정치적 고뇌의 순간에 느꼈던 외로움과 좌절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흘려야 할 눈물은 어떤 눈물이어야 할까.  필연적으로 있게 될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될 정치적 동지들을 처단해야 할 ‘읍참마속’의 눈물이리라.  40년지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눈 덮인 백담사로 유배를 보내고 노태우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을까.  1988년 국내 정국은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5공 비리 청산의 핵심인 정호용 의원 처리 문제, 그리고 백담사에 은둔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문제 등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YS 김영삼의 상도동측 움직임을 살펴보자.  최형우 전 의원이 상도동을 찾아 왔다.  “총재 어른,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예? 알고 계시다니오?”  “아니면 총재가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 당 부총재 경선에 나가겠다는 얘기하러 온 거 아니야?”  “예,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안돼.”  “어째서 안됩니까?”  “어째서 안되긴 뭐 어째서 안돼! 여기 김동영이나 최형우가 시방 한가하게 부총재 경선에 나갈 때야!”  최형우 전 의원도 만만찮았다.  “한가해서 나갈라카는 기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거보다는 부총재라도 해서 총재 어른을 좀 더 실질적으로 보좌해 드릴라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김영삼 총재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어이 김동영이 니가 좀 설명해 줘라. 내 잠깐 다녀올 테니까?”  김영삼 총재가 나가자 김동영 전 의원이 입을 열었다.  “최 의원. 총재 어른께서 최 의원에게 원내사령탑을 맡기려는 생각이신 것 같소.”  “원내사령탑? 아니, 그럼 내 보고 원내총무를 하라고!”  “그래가지고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5공 청산 그라고 전두환이를 국회 증언석에 끌어내는 일 등을 관철시키도록 밀어붙인다는 생각이신 것 같소.”  여기서 자서전 에 나타난 최형우 전 의원의 진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백담사행 이후 정국은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문회 파동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89년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5공 청산이라는 신조어를 되뇌이는 한 해가 된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07/1041866403302591.jpg" alt=""/>    ▲ 89년 7월2일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가운데) 등이 침통한표정을 짓고 있다.            [대한매일]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야3당 총재는 합동 회의를 열어 5공 특위 및 광주 특위의 마무리를 다짐했다. 그리하여 의정사상 최초로 1월26일 최규하와 전두환의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동행 명령장이 발부된 것이다.’     부총재 경선 출마 대신에 원내총무가 된 최형우 전 의원은 첫 번째로 평민당의 김원기 원내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나, 최형웁니다.”  김원기 의원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구, 이 통일민주당 신임 원내총무시구만. 안그래도 내가 최 의원이 원내사령탑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전화를 올리려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최 총무가 먼저 전화를 하셨구만.”  “뭔가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 나는 축하 인사 받으려고 전화한 거 아닙니다. 우쨌든 내가 야3당의 한 축이 됐으니까 공화당의 김용채 총무하고 같이 만나서 상견례라도 해야 안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야3당뿐 아니라 민정당의 김윤환 총무까지 끼워서 넷이서 만나도록 내가 주선하겠습니다.”  여소야대의 4당 체제 하에서 각당 원내 총무들의 ‘샅바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민정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던 당시 김윤환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4&#8226;26총선으로 여소야대의 정국 구도가 형성됐다. 선거 다음날인 4월27일이었다. 노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와서 지역구에서 올라왔더니 원내사령탑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원내총무 자리였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여소야대 구도하의 소여 원내총무에 취임했다.  개원 국회 다음날인 7월2일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처리했는데 이기 그만 부결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참말로 그때 심정은 울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당시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반드시 여소야대 국회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거대야당의 세를 과시하는 데 합의하여 백지투표를 강행함으로써 반대 표결에 성공했지만 제3야당인 공화당은 정기승 내정자가 김종필 총재와 같은 충남 출신인데다 전부터 교류가 있어왔던 인연으로 사실상 동의안 가결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당시 김종필 총재의 발언.  “내가 말 안해도 의원 동지들께서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국회의 관행은 인사 문제에 관한 한 토론 없이 무기명 비밀 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오후 본 회의에서 치르게 돼 있는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에 대해서는 총재인 나로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은, 나하고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하고는 같은 충남 출신인 데다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어 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임명 동의안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순간 국회 본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이와 같은 김종필 총재의 발언은 사실상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을 가결시키라는 총재의 지시와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다 민정당과 공화당 사이엔 이미 물밑 교섭을 통해 가결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은 가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왜 표결 결과는 과반수에 7표가 모자라는 부결로 나타났는가. 이 부분 또 다른 진술자가 있다. 사태 당시 제1야당인 평민당 원내총무 김원기 현 새천년민주당 개혁위원회 위원장의 증언이다.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이 야3당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민정당과 연합 전선을 펼쳤기 때문에 숫자상으로는 가결선에서 일곱 표가 남았다. 그런데 개표 결과는 일곱 표가 남은 게 아니라 오히려 일곱 표가 모자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의 임명 동의안은 부결됐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그때 민정당은 공천 과정에서 5&#8226;6공 차별화에 따라 초선 의원이 많이 배출됐다. 이 사람들이 투표 때 기표 방법을 잘 몰라 가지고 ‘가할 가(可)’라는 찬성 표시 대신 ‘찬성할 찬(贊)’자로 기표하고 또 내정자 정기승의 이름을 한글이나 한문으로 기표하는 바람에 이 표가 다 무효표가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쓰지 못하는 표가 된 것이 14표가 나왔는데 숫자상으로 일곱 표가 남아야 할 것이 오히려 일곱 표가 모자라는 결과가 된 것이다.”  김원기 당시 사무총장의 기억은 사태 당시에도 그랬듯이 파안대소 통쾌한 웃음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소여의 원내 사령탑 김윤환 원내총무의 기억은 쓰라린 것으로 남아있다.  상황은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89년 3월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즉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를 하지 않게 되는 의문의 과정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즈음 노태우 대통령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들만 비밀리에 청와대로 불렀다.  최창윤 정무수석이 보고했다.  “각하, 정무수석입니다. 이춘구 의원을 비롯해서 최병렬 문공장관,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라고 박철언 보좌관까지 다 모였습니다.”  “아, 그래. 오늘 모임은 비밀로 하라 캤는데 보안 조치는 잘 돼 있겠지.”  “예, 연락하면서 보안을 지키도록 전달했으니까 누설은 안됐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직자들이 알면 안돼요. 무신 말인지 알겠지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직자라면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는 듯이 쳐다보는 노태우 대통령.  “사무총장이 알아서는 안 돼. 이종찬이 말이야.”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 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89년 3월9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극비리에 이춘구 의원을 비롯해서 최병렬 문공장관,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리고 박철언 보좌관 등을 청와대로 소집했다.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측근 중의 측근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를 내렸다.”     회의실로 들어오는 노 대통령을 보자 다들 일어섰다.  “아, 다들 모였구만. 내, 오늘 여러분을 들어오라고 한 거는 중간평가와 관련해서 지시를 하달하기 위해섭니다.  먼저 이춘구 의원. 이 의원은 중간평가를 하자는 쪽입니까, 아니면 하지 말자는 쪽입니까?”  그날 노 대통령은 모인 사람들에게 일일이 찬반 여부를 물었다. 저마다 정답을 알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자 다혈질의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나섰다.  “각하, 대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기 아니라 각하께서는 중간평가를 받으실 생각입니까, 받지 않을 생각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과연 노태우 대통령의 의중과 명분은 무엇이었을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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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7화 민정당 내의 갈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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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Mon, 30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30/1041175202302580.jpg" alt=""/>    ▲ 이종찬을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해 중간평가를추진하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그러나 얼마 후이종찬의 ‘사심’에 대해 강한 공격을 날린다.  각본 없는 한편의 드라마, 아름다운 퇴장, 인터넷 세대의 선택 등 이번 대선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다. 다시 여소야대 정국이다. 견제와 균형을 바라는 국민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수 여당을 선택했다. 국회의원 1백50여 명의 한나라당 독주를 견제한 것이다. 한 마디로 수준 높은 정치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권은 노태우 정권시절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에 대응하는 3김 연합에 의한 거대 야당이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이라는 비상수단으로 다시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 거대 여당의 후보가 지난 97년의 이회창 후보였고 2002년에는 거대 야당 한나라당의 후보였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가의 그 어떤 자질이나 덕목 보다 ‘오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번에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2007년에는 어떤 후보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 것인지 벌써부터 관심의 대상이다.  88년 말 6공 노태우 정권은 선거 공약인 중간평가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백담사 전두환 전 대통령과 5공 세력과의 단절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는 믿었던 친구의 배신이라는 참담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승려들조차 하기 어려운 1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S대령의 증언이다.  “그 해 그러니까 89년 1월12일 청와대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됐고 잇달아 15일 뒤 1월27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또한 6공 검찰에 구속됐다.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 부부에겐 이 두 가지 사건이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진 것이다. 물론 위협을 느끼기 이전 먼저 감정의 폭발이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내가 백담사에 들어 온 지가 벌써 얼마야. 한겨울이 가고 어느덧 봄이 올라카는데 안부 편지는 고사하고 전화 한 통이 없어. 전에는 무신 날만 되면 쫓아와 알랑방구를 뀌더니 대통령이 됐다캐서 이래도 되는 기야? 대통령을 누가 만들어 줬는데 이렇게 우리를 배반해도 되나 이 말이야. 표리부동한 놈 같으니!”  다시 S대령의 회상.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 한 분이 백담사를 찾아 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현임께서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다하다 보니 시간도 없고 또 현직 대통령으로서 백담사까지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부인이 계시질 않습니까? 직접 찾아오기 어려우면 영부인을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도 없었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반응이다.  ‘난 또 무신 얘기라고. 그런 얘기는 노태우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거야 인간된 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나 할 수 있는 얘긴데 그 사람이 어디 그런 사람인가요.’  K목사는 이때의 대화 내용을 서울로 올라가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이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는가.  “각하, 원내총무 김윤환입니다.”  어려운 일을 상의할 때 자주 김윤환 원내총무를 찾는다.  “다른 기 아니고 김 목사 알지요? 그 사람이 백담사엘 다녀왔는데, 그쪽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기 아닌 거 같애.”  “그거야 각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던 일 아닙니까?”  “알고야 있었지만 누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줄 알았나?   어때요, 김 총무가 한 번 백담사에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닌가?”  “백담사에 가서 전임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드리라 이 말씀입니까?”  “아니지. 우리가 어떻게 풀어주고 말고 할 수 있겠나?”  “그러면 지가 뭐 하러 백담사엘 갑니까?”  “심기가 불편하다는 거는 다른 의미에서 그만큼 마음이 약해졌다는 증거가 돼.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 바로 전임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가서 한 번 잘 설득해 봐.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해서 증언하는 것으로 5공 청산 문제를 마무리하도록 말이야.”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신 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그쪽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백담사에 전화해서 한 번 찾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두 분께서 1백일 기도에 들어가 있어서 때가 좋지 않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기 언제야?”  “2월6일인가 시작했다 캤으니까 끝나는 거는 5월 중순쯤 될 것 같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낭패로구만. 그렇게 되만 5월 중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야.”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30/1041175202302581.jpg" alt=""/>    ▲ 88년 말 중간평가 실시를 서두르던 이종찬 당시 민정당사무총장(왼쪽)에게 박철언 정책보좌관(오른쪽)은제동을 건다.  이순자씨의 진술이다.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1백일 기도를 시작한 뒤로 그분은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하루 빨리 마음의 편안함을 찾아 그분을 도와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했지만 좀처럼 편안함은 찾아지질 않았다.  그런데다 기도에 들어간 지 50일째가 되자 갑자기 식욕이 떨어지면서 빈혈증과 함께 메스꺼운 증세가 나타났다. 무슨 큰병에나 걸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는데 그렇기는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채식 후에 일어난다는 비윗병이었다. 이때가 바로 1백일 기도의 한 고비였는데 이윽고 70일째를 맞이하자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참기 어려웠던 증상들이 사라져버렸다. 증오와 배신감 그리고 억울함과 분한 마음이 마음속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듯한 큰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윽고 5월16일 1백일 기도가 끝나고 회향하던 날 전국에서 수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몰려와 축하해 주셨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생각하고 남을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에 오는 충만감은 나에게 하나의 큰 축복이었다.”  여기서 백담사 일지 기록을 보자. ‘89년 5월30일. 선박용 발전기 한 대를 설치했다.’  그때까지는 경운기용 엔진 5㎾짜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전등 몇 개도 밝히기 어려웠고 텔레비전 시청도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가능했다. 선박용 엔진은 퉁퉁거리는 소리가 좀 시끄럽긴 했지만 출력이 10㎾나 돼 전 대통령 내외의 백담사 생활이 크게 문명화된 듯했다.  이날 서울로부터 민정당 원내총무 김윤환 의원이 찾아왔다. 그의 임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관련 그 동안 여권에서 조정한 결과, 즉 1회에 한 해 비공개로 서명 질의를 하고 각 정당에서 한 명씩 보충 질의를 한다는 내용의 조정안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5공 청산을 마무리하는 증언이라면 공개 비공개와 관계없이 나가서 증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6공 정권의 중간평가 및 정호용 몰아내기로 돌아가자. 6공 청와대 비서실 L비서관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이종찬 사무총장은 절대 금기인 대권의 꿈을 숨기지 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것을 알고 있었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그렇지 않아도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던 차에 이것을 계기로 이 총장 견제에 나선 것이다.”  이종찬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의 회상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분명히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했다. 그 결과가 12월8일의 당정 개편으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을 정무장관에서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이동 기용하는 인사가 바로 그 것이다.   12월8일의 당정 개편 인사를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당을 장악해서 중간평가 준비 작업을 추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당 조직 강화책으로 지역구 행사와 당원 연수 등 눈코 뜰 새 없이 뛰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제동을 걸고 들어 온 것이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박철언 보좌관의 진술.  “중간평가는 법적으로 무신 근거가 있는 기 아니지 않은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고 또 한다캐도 천천히 상황을 봐 가면서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이거를 갑작스럽게 밀어 붙일라고 하는 거는 대체 무신 이윤가.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기엔 중간평가를 이용해서 뭔가 다른 목적을 이룰라카는 엉뚱한 의미가 담겨 있는 거 아니겠는가.”  여기서 진술자를 바꾸어 이 말의 의미를 풀어보자.  6공 청와대 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박철언 보좌관의 그 말은 한마디로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이 불신은 박 보좌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권 핵심부, 나아가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이 의원에 대한 의혹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여권 핵심부의 의심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이종찬 의원의 대권에 대한 야망이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 의원의 꿈을 분수에 넘치는 야망으로 본 것이다. 그런 내용의 노 대통령의 뜻이 처음으로 이종찬 의원에게 전달된 것은 해가 바뀌어 89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당직자 회의에서였다.”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노태우 대통령은 당직자 회의실로 들어섰다.  “모두 앉으소. 박 대표, 전원 참석했습니까?”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보고했다.  “예, 전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할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먼저 듣자니까 지난 번 당직 개편 후에 민정당 내부가 크게 소란해졌다카는데 이유가 뭡니까?”  “무신 말씀인지 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데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어데서 들었는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박 대표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당내엔 조금도 소란스러운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노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졌다.  “없기는 뭐가 없습니까? 당 조직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일부 당직자 중에 자기 조직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있다카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과연 당의 화합이 유지되겠습니까?”  이종찬 사무총장이 나섰다.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내가 오해를 해요?”  “유사시에 대비해서 당 조직을 정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의 조직을 정비 강화한다는 구실로 일부 당직자들이 자기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 노태우 대통령이 탁자를 내리쳤다.  “이보시오, 이 총장! 시방 당 총재를 허수아비처럼 여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겠소. 지금까지 우리 당에 TK가 있다 카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SK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어 봤어요. 그런데 이 총장 취임 후에 갑자기 SK가 등장했십니다. 바로 이 SK가 이 총장을 축으로 하는 별도 조직이 아니냐 말이요!”  SK란 서울 경기 지역 출신 의원 모임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만일 이러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때 노태우 대통령은 왜 이종찬 의원을 당 사무총장으로 기용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중간평가 준비작업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는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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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6화 중간평가 둘러싼 대립]]></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25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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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4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4/1040656802302570.jpg" alt=""/>    ▲ 88년 당시 중간평가를 위해 야권의 ‘정호용 퇴출’ 요구당시의 김용갑 총무처 장관(왼쪽)은 이를 논의하던 관료들에게  “당신들이 먼저 공직에서 물러나야 가능할것”이라고 맞선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그동안 외쳐온 각종 ‘청산’과 ‘교체’를 완성하는 21세기 벽두의 한반도 운명을 개척해 나갈 새 대통령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내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선거 혁명을 이뤄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강국의 면모에 걸맞게 사이버 선거 혁명을 이뤄낸 것이다.  종래 흔히 볼 수 있던 길거리 현수막이나 대규모 군중 집회도 사라졌다. 돈봉투나 빨래비누, 고무신 돌리기도 옛날 얘기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 됐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5년 후 다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이번에 우리 유권자들의 수준 높은 의식에 맞춰 한 걸음 진보한 모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간 많은 바람이 있었다. 병풍, 청풍, 단풍, 핵풍 등 크고 작은 회오리바람들이 우리 정치 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중에서 바람의 세기가 가장 컸던 것이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도풍’이었다. 바로 이 ‘도풍’이 이번 선거에 있어서 태풍의 핵이었다는 분석이다.  이 중에 많은 바람들은 근거가 없는 비방이거나 흑색 선전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선거에는 유언비어와 인신공격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선되면 승자의 아량으로 잊어버리고 패자는 말이 없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등 언뜻 보기엔 아름다운 일로 비친다.  새 대통령은 무엇보다 지역감정을 청산하고 국민통합의 새로운 길로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야 할 사명이 부과됐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정치인의 전형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선거 기간이다. 이제 우리 정치 현장에도 더 이상 ‘너 죽고 나 살자’는 막가파식 거짓말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정치인이든 언론이든 ‘아니면 말고’식의 폭로 비방전에 동원된 사람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먼저 깨끗해야 할 것이다.  6공 노태우 정권이 5공과의 단절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5공 핵심 6인방을 사법처리하기로 한 적이 있다. 당시 그 중의 한 사람 허문도 전 통일원장관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왜 그랬을까. 대통령의 비리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섯 사람 중의 핵으로 지목된 정호용 의원은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88년 어느날 정호용 의원이 박세직 안기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세직 안기부장입니까? 나 정호용이오.”  며칠 전 정호용 의원 처리문제로 회동을 한 뒤라 박세직 안기부장은 당황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이구, 정 선배께서 우짠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정 의원이다.  “바쁘실 테니까 묻는 말에 대답만 하소.”  “무신 일인데 그라십니까?”  “시방 우리 집에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와 있어요. 이 사람이 오늘 아침에 사표를 냈다카는데 그기 사실이오?”  “김 장관이 그런 말을 합니까?”  정호용 의원 옆에서 김용갑 장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선배님, 박세직 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무신 대답이 그래요. 묻고 있는 사람은 난데 오히려 그쪽에서 나한테 묻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김용갑 장관이 전화기에서 거리를 띄우면서 정호용 의원에게 물었다.  “아니, 그러만 박 부장이 그런 일 없다고 합니까?”  전화기를 손으로 막으면서 정 의원이 나무라듯 말했다.  “좀 기다려 봐라. 시방 확인하고 안 있나?”  “아, 답답하니까 안 그랍니까? 그러만 내가 사표도 내지 않고 선배님에게 사표 냈다고….”  김용갑 장관의 넋두리를 무시하고 전화를 받고 있는 정호용 의원.  “뭐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예. 말씀드리기가 좀 뭣해서 그랬는데 김용갑 장관은 아침에 사표를 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지요? 알았소.”  당시 상황에 대한 김용갑 장관의 진술.  “내가 그때 정호용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홍성철 비서실장하고 박세직 안기부장이 형님을 인민재판에 붙일라캐서 제가 그랬습니다. 정 의원 문제는 놔두라 내가 해결하겠다.’  그리고 형님을 찾아가서 우리 깨끗하게 물러나자고 제의를 했다.  또 그때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박세직 안기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들이 정호용 의원을 진짜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생각이거든 먼저 당신들부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라.”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4/1040656802302571.jpg" alt=""/>    ▲ 중간평가 실시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던 이종찬 당시 사무총장(가운데)에 대해 박철언 보좌관(오른쪽)과노태우 대통령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보낸다.  진술은 계속된다.  정호용 의원의 공직 사퇴와 관련하여 6공 정부 초대 총무처 장관, 현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다.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구 뭐구 따질 것도 없다. 당신들은 다 좋은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서 그 사람한테만 물러나라칸다면 말이 되느냐. 말이 안될 뿐 아니라 우선 설득력이 없다.  설득력이 없으니 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정호용 의원의 사퇴 문제는 백날 가봐야 해결될 리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당신들이 먼저 사표를 써라.  그러고 나서 정 의원에게 ‘우리는 물러났다. 당신도 물러나라’ 이렇게 설득하라. 그러면 잘은 모르지만 정 의원의 기질로 봐서 종전의 공직 사퇴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당신들이 정 의원을 설득해서 사퇴시킨다카는 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89년 당시 여권의 정호용 밀어내기는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와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이다.  “그 사람들이 분명히 그때 그렇게 말했다. 홍성철 비서실장, 박세직 안기부장, 최창윤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다. 이제 곧 중간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정호용 의원이다. 야 3당, 특히 제1야당인 평민당에서 요구하는 대로 정 의원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켜서 광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중간평가를 받을 수가 없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시점. 즉 89년 3월 6공 정권은 약속대로 중간평가를 받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전제 하에서 이른바 정호용 밀어내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는 실행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먼저 사태 당시 6공 정부 정무장관 이종찬 전 의원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한 달쯤 뒤인 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을 독대하면서 ‘우리가 살 길은 정권을 걸고 중간평가를 받는 길이다’라고 건의를 했던 일은 이미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은 그때 얼굴을 찌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6&#8226;29선언 때 한 번 걸었으면 됐지. 또 걸라고 하느냐. 내 팔자는 무슨 걸라는 팔자냐’. 이렇게 말이다.”     당시 대화 장면이다.  이종찬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 길은 중간평가뿐입니다. 그리고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서울올림픽을 잘 치러내고 했으니 각하께서 ‘이제부터 일 좀 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직접 호소한다면 국민들이 표를 안 주겠습니까?  방금 내 팔자는 무슨 걸라는 팔자냐 하셨는데 한 번만 더 거십시오. 그렇게 하면 앞으로 남은, 4년 반의 임기를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게 운영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반신반의한다.  “그 말이 틀림없십니까? 시방 그랬지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를 통해서 하게 되면 틀림없이 이긴다?”  “아니면 각하께서는 우리가 진다고 보십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그러나 옛부터 말이 안 있습니까. 돌다리도 먼저 두드려 보고….”  “건너가라 이 말씀입니까?”  “아니지요. 두드려 보고 마음에 안 내키만 건너지 말라.”  “그렇다면 처음부터 두드려 볼 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건너가지도 않을 것을 뭐 하러 두드려 봅니까?”  “그래도 두드려는 봐야제. 두드려 보지도 않고 건너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결국 이날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받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이종찬 전 의원의 회상이다.  “그 결과가 88년 12월8일의 당정개편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 해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삼청동 안가에서 중간평가 대책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좀 보자고 했다. 그래서 마주 앉았는데 이런 말을 했다.”  “이 선배.”  박철언 보좌관은 이종찬 전 의원을 선배라고 불렀다.  “내가 보기엔 이 선배께서 중간평가를 너무 서두시는 거 같습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이 전 의원이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박 보좌관은 당황했다.  “아, 아니 오해하진 마십시오. 제 말은 중간평가를 하되 좀 천천히 하는 방법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안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 박 보좌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상황에 따라서 중간평가를 안 할 수도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얘기요?”  “중간평가를 안 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중간평가는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오.”  “압니다.”  “알아요?”  “내가 말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고 이 총장이 중간평가를 서두는 이유 말입니다. 거기에 혹시 이 총장 자신의 어떤 숨겨진 목적이 있는 거 아닙니까?”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구만. 그러니까 내가 중간평가를 정권을 위해서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그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서두르고 있다 그 말이구만.”  진술자를 바꾸어 보다 객관적인 증언을 들어 보자.  6공 청와대 L비서관이다.  “당시 박철언 보좌관이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해가 바뀌어 89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은 당직자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대신한 노 대통령의 대답이 나온 것이다.”  청와대 회의석상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박준규 대표에게 물었다.     “박준규 대표.”  “예, 각하.”  “내가 벌써부터 좀 물어볼라캤는데 기회가 없어서 물어보질 못했는데.”  “각하께서 저한테 무신 물어볼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으시면 퍼뜩 물어 보이소.”  박준규 대표가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시방 농담으로 하는 줄 압니까?”  “죄송합니다.”  “다들 들으소. 듣자하니 우리 민정당에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십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조직을 강화한다카면서 기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조직을 강화하기에 열심인 사람이 있다카는데 그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이종찬 사무총장을 겨냥한 질책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후보로서 자신의 최대 선거 공약인 중간평가를 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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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5화 ‘의리’의 사나이 장세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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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2/1040484002302560.jpg" alt=""/>    ▲ 5공과 6공의 유착관계를 폭로하려 했던 장세동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류로 순순히 구속을 당한다.  ‘기호 3번 권영길이 찍어버릴랍니다.’  대선 후보자 TV 토론회를 보고 난 어느 유권자의 얘기다. 농담으로 하는 얘기라면 아직 부동층이고 진짜로 하는 얘기라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의미로 들린다. 기호하고 후보자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회창 후보에 대한 이인제 의원의 지지선언 발표 여부와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후보 지지 TV 연설 출연 여부가 가장 폭발력 있는 변수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두 유력후보자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군소후보자들의 선전이다. 흔히 들리는 얘기는 권영길 후보가 선전하면 노무현 후보가 불리하고, 장세동 후보는 이회창 후보 표를 잠식할 것이라는 것이다.   장세동 후보는 얼마전 어느 길거리 유세에서 빗자루를 들고 ‘낡은 정치를 확 쓸어버리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80년의 신군부 5공 핵심세력의 한 사람인 장 전 안기부장이 낡은 세력을 청산하겠다고 나왔다.  이러한 명분과 함께 또 하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5공 세력들의 명예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장 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출마를 의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곧이 들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장세동 후보는 89년 초 5공 핵심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기 전 백담사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하소연을 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친인척들의 구속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며 답장을 보내 위로했다.  요즈음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다 한다. 사나이들의 의리와 폭력을 미화한 내용이다. 우리 사회에 의리라는 것이 자취를 감추게 되자 그 조직이나 집단의 성격과 목적을 떠나서 일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보여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의리’ 또한 좋은 사례이다.  최근 이회창 후보가 선전하고 있는 경상도 지역에서 장세동 후보가 상대적으로 더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 경상도 사나이들이 의리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야인시대〉의 시청률 또한 경상도에서 더 높게 나오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신의라고 하는 덕목은 점점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심화시킨 것이 정치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한다.  89년 초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인터뷰를 한 기자의 회상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나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거리낌없는 자신감에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국민들이 뭐라고 하든 5공화국의 치적을 평가받을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좋지만 그 모든 것이 국가 발전에 장애 요소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인터뷰 답변 내용이다.  “기자가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5공화국 때의 정치 이면사를 알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장세동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자 하는 것인지 이미 구상이 돼 있겠지요.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같이 즐기는 잠자리라도 그것이 거리로 나왔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게 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사람은 밝히지 못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부각시켜 달라는 주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자가 알아야 할 것은 국가의 정보 책임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운이 융성할 때는 모두가 화합해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국론이 분열되고 그리하여 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가게 돼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진술이다. S대령이다.  “구속되기 며칠 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위 윤상현을 통해 백담사에 모종의 편지를 전달한 사실은 알려져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전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답장을 써서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윤상현을 통해 장 전 안기부장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다. 그렇다면 이 편지엔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느냐….”  이즈음 청와대에선 비상이 걸렸다.  이현우 경호실장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각하 경호실장입니다.”  “어떻게 됐나. 장세동이가 백담사에 보낸 편지 그라고 백담사에서 장세동이에게 전달된 편지 내용을 알아 봤나?”  노 대통령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내용까지는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편지가 어떻게 전달됐는지 경위는 파악이 됐습니다.”  작아지는 이현우 경호실장의 목소리에 반비례해 노 대통령은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2/1040484002302561.jpg" alt=""/>    ▲ 노 대통령을 ‘협박’해 위기를 넘긴 허문도씨(오른쪽). 사진은 청와대 비서관 당시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김충립보안사 소령과 대질신문하는 모습.  “그거는 경비병들의 태만 아니야. 경위는 무신 놈의 경위야?”  “경위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위?”  “윤상현이가 경찰 경비병을 가장해서 백담사로 들어갔습니다.”  “윤상현이? 아, 그 집 사위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경비선을 통과했을 리가 없습니다.”  “경비선을 통과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오고 간 편지의 내용이야. 거기에 혹시 엉뚱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거 아니야.”  “엉뚱한 내용이라면 어떤 내용입니까.”  “검찰에서 장세동이를 구속한다 캐서 내가 제지를 했어. 그런데 장세동이가 이거를 알고 백담사에 지원을 요청한 거 같은데 혹시 그런 거 아니야. 영장이 집행되면 5공과 6공간의 유착관계를 몽땅 폭로하겠다 뭐 이런 거 말이야.”  “그런 내용이라면 그대로 놔둬서는 안됩니다. 제가 나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야 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서울과 백담사, 그리고 백담사와 서울을 오고 간 편지와 답장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추측은 그렇다. 서울에서 백담사로 전달된 편지에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취할 모종의 조치에 대해 윤허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백담사에서 서울에 전해진 답장에는 장세동의 강경대응을 만류하는 간곡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세동아, 모든 일이 다 내 탓이다. 안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네 편지를 보니 더욱 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용서해라. 세동아….’  편지를 받아든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오열을 터뜨린다.  ‘아닙니다. 각하…. 아닙니다. 각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류로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고 검찰의 소환에 순순히 응한 것이다.  이와 달리 소위 3허씨 중의 한 사람인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다른 행동을 보였다.  “정무수석 최창윤입니다.”  “나 박철언입니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허문도 전 장관의 얘기를 듣고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했다.  “아, 박 보좌관 무슨 일입니까.”  “내가 지금 각하로부터 크게 꾸중을 받았어요.”  “또 무슨 일로 꾸중을 들었습니까.”  “허문도 알지요.”  “통일원 장관 허문도 말입니까.”  “그 사람이 야 3당이 요구하고 있는 5공 핵심 멤버 6인 중에 들어 있는 거 알고 있지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기 아닙니다. 사법 처리의 대상으로 지목된 여섯 사람 중에 들어 있어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 사람이 그 문제와 관련해서 항의라도 해 왔습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또 모르겠는데 각하께서 별도 보고를 받은 바에 따르면 간접적으로 협박을 하고 다닌다는구만.”  최창윤 정무수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협박을 하고 다닌다면 누굴 협박하고 다닙니까.”  “참 못 알아듣네, 아 누군 누굽니까 각하지요.”  “각하를요? 그렇다면 허문도씨가 아니 허문도 그 사람이 대통령 각하를 협박하고 다닌단 말입니까!”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해가 바뀌어 89년 1월 5공 청와대 이학봉 민정수석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학봉 민정수석의 경우는 5공 핵심 6명의 사법 처리하고는 별도의 케이스였다.”  별도의 케이스란 그 해 89년 1월24일 야 3당 총재 회동, 즉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야 3당 총재 회동에서 사법 처리를 요구하기로 합의한 5공 핵심 6명과는 별도로 처리된 경우라는 뜻이다.  참고삼아 이때 야 3당 총재가 지목한 6명의 5공 핵심은 광주 문제와 연루된 정호용 당시 특전사 사령관.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이희성. 5공 정권의 정치 자금과 관련된 이원조 의원. 4&#8226;26부정선거와 관련된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 일해재단 설립 등과 연관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 그리고 80년 언론 대학살을 주도한 허문도 전 문공부 장관 등이다.  다시 L비서관의 진술.  “따라서 이 6명에 대한 6공 정권의 사법처리는 1월27일에 구속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시간적으로는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5공 6공 비리와 관련해서 정호용 이희성 이원조 안무혁 장세동 등 거의 전원이 사법적 심판을 받았는데 꼭 한 사람 언론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5공 핵심 인물이 있었다.  바로 허문도 전 문공부 장관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처벌 대상에서 벗어났느냐….”  다시 최창윤 정무수석과 박철언 정책보좌관 사이의 통화 내용이다.  “박 보좌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허문도 그 사람이 대통령 각하를 협박하고 다니는 내용이 대체 뭡니까.”  박철언 보좌관이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거야 뻔하지.”  “뻔해요?”  “6&#8226;29선언의 진상이라든가 아니면 5공과 6공간에 주고받은 정치 자금의 내역이라든가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최창윤 정무수석이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아 그것을 미끼로 해서…. 그래서 각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한테 전화를 걸어서 정책보좌관이 그런 것도 모르고 뭐하고 있었느냐, 꾸중을 하신 뒤에 이렇게 지시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 내용이다.  ‘어쨌든지 허문도의 입은 막아야 해.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자고 하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놈아가 또 무신 수작을 하고 나올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무신 수를 쓰든지 조용하게 두 번 다시는 대통령을 공갈 협박하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처리해 봐. 이상이야.”  그러나 허문도씨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제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당황한 6공 청와대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허문도의 입을 좀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어쨌든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5공 핵심으로 지목된 여섯 사람 중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정치에서 신의나 의리보다는 다른 자질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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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4화 DJ의 결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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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5/1039879202302550.jpg" alt=""/>    ▲ 월남전 참전 당시의 전두환  30여 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양강 구도로 정착됐다. 기호 1번 이회창 후보 대 기호 2번 노무현 후보. 이회창 후보는 지난 선거 때도 1번이었다. 이번 선거는 3김 정치의 종식 측면에서 신 구 세대간의 대결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 땅의 유권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람 안 보고 일단 1번만 찍는 부류와 반대로 무조건 2번만 찍는 부류이다. 지난 97년 대선까지는 1백% 기호 1번이 당선됐다. 2번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이다. 그만큼 2번을 찍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일까.  그러나 이번 2002년 대선에는 여권 후보가 2번이고 야권 후보가 1번이다. 유권자들이 이러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어낸 데 대해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너무나 다른 사람 둘이 정치적 목적으로 합쳤다고 비난하고 있으나, 노무현 후보는 ‘정치도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상당히 고무돼 있다.  두 후보간의 단일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은 과연 어느 한 쪽이 순순히 승복할 것인가였다. 이인제 의원의 사례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서명이 있다. 지난 80년 ‘서울의 봄’을 앞두고 전두환 사령관은 김대중 총재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물론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보안사 이학봉 중령이 악역을 맡았다.  김대중 당시 총재의 회상이다. 이학봉 중령을 꾸짖는 김 총재.  “당신들은 오늘 나한테 몇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는 전두환 사령관과의 회동을 약속했는데 전 사령관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 김대중이를 우롱한 것이다.”  이학봉 중령은 꼿꼿한 자세로 반박을 했다.  “오실라캤는데 긴급한 사항이 발생해서 못오신다고 안 했십니까. 그래 양해를 구했으면 됐지 뭐 말이 많십니까.”  옆에 있던 이용희 의원이 참다못해 끼어 들었다.  “뭐야 이런 뻔뻔한….”  불필요한 다툼을 막으려고 김대중 총재가 나섰다.     “마,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들이 나한테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은 바로 이 서약섭니다.”  권정달 대령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약서가 뭐 잘못됐십니까.”  “잘못된 게 아니라 여기에 보니까 서로 협력해서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노력하자는 아주 좋은 말이 있어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나하고 같이 협력해서 정국을 안정시키자고 한다면 당신들은 내가 이런 서약서를 쓴다고 해도 말려야 합니다. 그게 협력을 구하는 쪽의 취할 태도인데 당신들은 지금 나한테 서약서에 서명 날인할 것을 강요하고 있어요. 내 비록 사면 복권이 안되더라도 이런 서약서에 서명을 할 수는 없소. 가지, 이 의원.”  여기서 진술이다. S대령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해프닝은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날 게 아니라 80년 초 ‘서울의 봄’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정국 현황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극히 중요한 한 순간이었다.  어째서 그러냐. 그때 만일 김대중씨가 문제의 서약서에 서명 날인을 했더라면 그후의 정국 현황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권정달 대령의 증언이다.  “그날 우리는 김대중씨로부터 꼭 서명 날인을 받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대중씨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한 우리로서는 확실한 상황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김대중씨를 한 번 만나보자 이리케 된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과열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하기에 따라서는 진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래봤자 더욱 시끄러워질 테니까 대응책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한테서 상당한 것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대중경제론 등에 대해 얘기해 본 결과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문제의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단초를 만들었던 신민당 동교동계 이용희 의원의 진술은 또 다르다.  “11월 말, 그러니까 79년 11월 말이다. 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 중령을 만났을 때 이 중령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함께 잘해보자는 얘기가 여러 번 오고 갔다. 그런 것으로 봐서, ‘아, 이 사람들이 우리 김대중 선생이 워낙 비중 있는 인물이니까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해가 바뀌어 80년 2월, 그러니까 12&#8226;12사태 두 달 뒤였다. 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바로 서명 날인을 강요한 서약서가 그것이다. 그때 우리가 서약서에 서명 날인을 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공존의 방법을 찾는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지만 김대중 선생은 군부 특히, 신군부와 야합할 수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5/1039879202302551.jpg" alt=""/>    ▲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재판 모습  다시 김대중 당시 총재 본인의 회상이다.  ‘사건 당시 이용희 의원을 통해 나한테 전달된 그들의 메시지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때 신군부측과의 접촉을 해보고 서울대 한완상 교수를 중간에 세워서 노태우 수경사령관하고도 회동을 요청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전두환 합수본부장쪽에서 먼저 회동을 요청해 왔으니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나한테 보낸 메시지는 본심이 아니었다. 집권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80년 2월. 어쩌면 이루어질 뻔한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가 곧바로 5&#8226;17사태로 그리고 DJ 김대중을 또 한 번 죽음의 벼랑끝으로 몰아간 것이다.  결국 신군부의 유화 제스처에 순순히 응했더라면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랬더라면 우리 정치는 얼마나 선진화 될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하다. 다만 미래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할 뿐이다.  어쨌든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89년 1월12일 5공 핵심 이학봉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구속되었다. 죄목은 직권남용죄.  S대령의 진술.  “이학봉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곰’이다. 6척 장신의 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80년 초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에서 그는 언론으로부터 구 소련 KGB 의장 베리아와 비교해 ‘한국의 베리아’로 통했다. 합수부의 수사국장으로 대한민국의 수사권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5&#8226;17 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발표된 김대중 등의 내란 음모 사건, 김종필 등의 권력형 부정 축재자 처리, 그리고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시킨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된 지 15일 뒤인 1월27일 검찰은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구속했다.  구속되기 약 두 달 전, 장세동씨는 몇몇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안기부장 사임 후 언론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의 진술 몇 대목을 인용해 보자.  당시 분위기에 대한 기자의 묘사.  ‘멀리 창 밖으로 우면산이 바라다 보이는 서초구 서초동 그의 자택. 응접실엔 운보 김기창, 소정 변관식 등의 산수화 소품이 양 벽면에 장식돼 있고 다른 한쪽엔 그가 수경사 30경비단을 떠날 때 부하들이 만들어 준 기념패가 놓여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응접실과 이층 서재, 그리고 그가 서초동 카페로 부르는 서재 밖 베란다로 자리를 옮겨가며 진행되었다.  이층 서재 한쪽 벽면엔 훈장 20여 개가 장식돼 있어 화려했던 그의 전력을 말해 주고 있다.  기자의 질문.  “요즈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안기부장을 그만둔 후엔 비교적 한가합니다. 책도 읽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만나서 원망의 소리, 한풀이하는 것도 들어 주고 옛 전우들도 만나고 합니다.”  “필드엔 자주 나가는 편입니까.”  “골프장 말입니까. 근래엔 자주 못 나가는 편입니다. 국회 5공특위 준비를 위해 자료도 정리하고 민정당 관계자들과 만나느라 좀 바쁩니다.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정도 나갑니다.”  “그렇다면 국회 5공비리특위 증언엔 출석한다는 얘기군요.”  “물론 출석해야죠. 며칠 전, 5공특위 문서검증반의 초대장에도 응할 생각이었는데 민정당에서 문서검증반엔 나와라 말아라 할 권한이 없으니까 나갈 필요가 없다고 그래요. 정당간에 이견이 있는 자리엔 굳이 나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나가지 않았는데 정당간에 합의가 된다면 언제든지 나갈 겁니다.”  다시 기자의 질문.  “5공 비리 문제로 세상이 크게 시끄럽습니다. 5공화국의 핵심 인물로서 심경이 어떻습니까.”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올림픽이라는 동서화합의 상징이자 우리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 현실에 원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진통으로 생각합니다. 전두환 대통령께서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계시고, 맞을 이유가 없는 돌팔매를 맞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그분에게 올바른 평가와 성원을 보내드릴 날이 올 것을 믿고 있습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단기필마의 자세로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유권자들이 올바른 평가와 성원을 해 줄 것인지 의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는 품위 있는 싸움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디를 봐도 이전투구 일색이다.  국가정보원의 감청 문제를 놓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상호간에 정치 생명을 건 진검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이웃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호메고로시’라는 차원 높은 전술이다. 일본어의 ‘호메루’는 ‘칭찬하다’라는 의미다. ‘고로스’는 ‘죽이다’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칭찬을 해서 죽여버린다’는 뜻이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두고 말들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산 경남 지역 민주계 의원들의 노무현 지지 선회를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를 앞두고 나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이회창 후보로 하여금 구시대적인 정치인으로 비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오히려 노무현 후보를 도와주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것이다.  결국 YS의 지지가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를 깎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제 의원과 손잡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마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게 되면 이른바 ‘반창 연대’는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을 ‘반(anti) 창’과 ‘비(non) 노’의 싸움이라고 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언론에서 만들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누가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누구가 더 싫기 때문에 찍는다’는 부정적인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과연 21세기 ‘한국’호의 선장은 누가 될 것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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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3화 전두환의 등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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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0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0/1039447202302540.jpg" alt=""/>    ▲ 왼쪽은 전두환, 오른쪽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2002년 대선을 앞둔 최대의 정계개편, 노무현 정몽준 후보단일화가 이뤄졌다. 이제 대선 구도는 친창과 반창으로 양분되어 보수와 개혁간에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 판 승부가 예상된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되자 도하 언론은 일제히 30여 년만에 양강 구도라 보도했다. 일부 신문은 ‘양자’구도라 표현하여 나머지 군소 후보들의 가슴에 상처를 안기고 국민들의 선택의 폭을 임의로 축소시켜버렸다.  과연 이번 선거가 보수와 개혁, 젊은이와 늙은이의 대결로 가겠는가. 그 경우 한국 정치사의 궤적을 돌아 볼 때 개혁이 승리한 경우가 있었는가. 특히 신세대가 이긴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특이한 것이 대학 부재자 투표소를 마련할 정도로 젊은이들이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폭풍은 어디에서 몰아칠 것인가.  80년 서울의 봄을 앞두고 당시만 해도 대통령으로서 요구되는 자질 중의 큰 것이 ‘반공’이었다.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야심을 숨긴 채 우회적으로 자신이 적임자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강창성씨(현 한나라당 의원)와의 대화를 살펴보자.  전 사령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정국이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십니다. 선배님께서 혹시 현 시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안을 가지고 계신 거 아닌가 모르겠십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답변이 나왔다.  “10&#8226;26이라는 갑작스런 정변 사태가 있었으니 일시적인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높아진 국민 수준을 믿고 인내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안정시켜 나간다면 잘 수습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전두환 사령관이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3김이, 저것들이 분수 없이 설치고 있는데 저 사람들 가지고 되겠십니까. 김종필이는 흠이 많고 경솔합니다. 김영삼이는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이는 사상적으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십니다. 그렇잖십니까.”  “그래도 좀 시간을 두고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봐야지요. 3김씨가 되든 누가 되든 상관없지만 어쨌든 이번만큼은 국민들이 직접, 자유롭게 뽑은 문민 정치인에게 정권을 맡겨 줘야 합니다. 그것이 현명한 길 아니겠소.”  매우 위험한 발언을 강창성씨가 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선배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이리케 말합니다. ‘당분간 군이 정권을 맡아줘야겠다.’ 심지어는 지도급에 있는 몇몇 야당 정치인들까지 나를 찾아와서 내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박종규 실장 같은 사람은 나를 찾아와서 이리케 말합니다. 만약 전 사령관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 섣불리 정권을 잡겠다고 나선다카만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 이리케 말이지요.”  매우 조심스런 행보였다. 전두환 사령관이 동교동 김대중 총재와의 만남을 추진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였다.  80년 2월, 서울의 봄을 기다리는 그 시점에서 전두환의 신군부측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에서 동교동과의 접촉을 시도했나.   “많은 이들이 나를 찾는다” S대령의 진술을 들어 보자.  “그것을 알기 위해 여기서 잠시 80년 2월20일 보안사령부가 주선한 전두환 사령관과 언론사 간부들의 간담회 형식의 10&#8226;26 수사 브리핑 현장으로 가 볼 필요가 있다. 신라호텔에서 열린 이날의 간담회는 10&#8226;26사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처음으로 언론 앞에 모습을 나타낸 자리이다.  약 4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날의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 사령관의 발언 내용이다.  ‘10&#8226;26으로 국가적 불행을 당했는데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김재규를 민주회복 열사 운운하면서 철없는 짓들을 하고 있어 신경이 쓰인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클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동기생 중 밑바닥에서 기던 자를 박 대통령이 잘못 키운 것이다. 차마 그럴 수 없는 자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 후손들에게 정신적 유산을 말하고 군대에서 정신 교육을 시킬 적에 뭐라고 말할 것인지 심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또 정승화 참모총장은 간사하고 비굴하며 소신도 철학도 없는 행동을 했다. 뭐 한자리 얻어 하겠다고 그런 처신을 했으니 한국 사람들에 대한 내외의 평가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다행인 것은 12&#8226;12 이후 군 내부가 불안하지 않느냐 하는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 군은 사기가 충천해 있다는 사실이다. 10&#8226;26 혐의자들을 철저히 조사해서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힘으로써 상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지휘 계통이 확립된 것이다.  우리 군은 지금 건군 이래 가장 사기가 높고 단합하여 최고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 보안사측 배석자는 남응종 참모장을 비롯하여 정도영 보안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및 이학봉 수사단장 등이다.  언론사 간부 중에서 나온 첫 번째 질문, 군이 정치에 참여하는가.  전두환 사령관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낍니다. 안심하이소.”  좌중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농담으로 듣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외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두환 사령관을 신군부의 리더로서 새로운 실력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전두환 사령관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이리케 답변하겠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촌놈이 텔레비에 두 번씩이나 모습을 나타내고 보니 실력자로 잘못 보인 것이 아니겠나.  그러나 나는 비상계엄 하에서 합수본부장을 맡아 각 기관간의 조정 책임을 맡고 있는 것뿐이고 10&#8226;26 수사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자신은 직무에 충실할 뿐이라는 얘기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0/1039447202302541.jpg" alt=""/>    ▲ DJ와 만난 신군부측 인사는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었다. 지난해  5공 인사들의 모임 ‘평생동지회’에 참석한 권정달.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이 나온다. “우리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앞으로 누가 정국을 이끌어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관심의 초점은 김대중 김영삼 및 김종필의 이른바 3김씨의 거취인데 이 부분에 대한 전 사령관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말해 달라.”  전두환 사령관은 이제서야 질문 같은 질문이 나온다는 표정이다.   신군부, 동교동에 직격탄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다면 우리 군은 상관할 바 아니다. 다만 우리 군이 염려하는 것은 반드시 반공주의자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용공성이 있어서 군의 장교도 될 수 없는 사람이 국가 최고책임자가 된다면 군과 국가를 위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다른 거는 다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우리 군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 밝혀 둔다.”  그 시점에서 군의 시각으로 본 사상적인 혐의자는 동교동 즉 김대중 총재이다. 따라서 이 발언은 동교동에 대한 신군부의 직격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군부측은 김대중 총재와 전두환 사령관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김대중 총재와 이용희 의원이 전두환 사령관과 만나기 위해 보안사를 찾아가고 있다.  이에 앞서 검은색 지프가 급회전하여 태평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보안사 서울 분실 건물이다. 그러나 정작 김대중 일행을 맞이한 것은 전두환 사령관이 아니라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었다.  S대령의 진술이다.  “결과부터 말해서 이날 전두환 보안 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이 DJ를 맞이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10&#8226;26 수사 과정에 모종의 돌발 사태가 발생해서 나올 수가 없게 됐다.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하나는 그들의 해명대로 뭔가 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신군부측은 전두환과 김대중의 회동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무엇 때문에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기극을 연출했느냐.”  김대중 총재 본인의 기억이다.  “보안사 서울 분실에 도착하자 권정달 대령이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자리엔 못나오게 되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속았거나 아니 당했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일어나서 되돌아 나올 수는 없어서 그대로 눌러 앉아 1시간 반쯤 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화제는 아무래도 시국과 관련된 내용에 경제 문제가 곁들여졌다. 그쪽에서는 이학봉 중령이 주로 응답했는데 이 중령은 내가 박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데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그래서 인상이 별로 안 좋았는데 권정달 정보처장은 생각한 것보다는 부드러웠다. 신사적이었다.”  전두환 사령관과의 만남이라는 의미 부여로 김대중 총재를 만난 신군부의 핵심 두 사람은 모처럼의 만남에 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DJ 우롱한 전씨의 제의  김대중 총재의 회상이다.  ‘그 당시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 그리고 수사 1국장 이학봉 대령은 그때 각서인가 서약서인가 하는 것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권정달 대령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냉기가 느껴졌다.  “김대중씨.”  뭐라 김대중씨?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순간적인 반응에 권정달 대령도 놀란다.  “참, 김대중씨가 아니라 김대중 선생.”  “무슨 말인지 해 보시오. 권 대령.”  “오늘 우리가 김 선생을 여기 보안사 서울 분실에 모신 거는 김 선생에게 협조를 구하기 위해 그런 겁니다.”  김대중 총재의 눈빛이 빛났다.  “당신들이 나한테 협조를 구할 일이 다 있습니까.”  “대신 김 선생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사면복권이 이루어져서 정치 활동을 재개할라카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말이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정달 대령은 문서를 내밀었다.  김대중 총재의 회상.  ‘그것은 각서가 아니라 일종의 서약서였다. 별로 성의를 다한 것 같지도 않은 서약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 시국 안정에 적극 협력한다. 둘째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소란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 최소한 금년 말까지는 해외에 나가지 않는다.’  김대중 총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나더러 여기다 서명을 하라는 거요. 권 대령.”  “보소, 김대중 선생.”  지켜보고 있던 이학봉 대령이 끼어 들었다.  “서명날인을 안하면 당신의 사면복권은 기대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안 할 깁니까.”  김대중 총재의 회상.  ‘내가 그때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오늘 나한테 몇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는 전두환 사령관과의 회동을 약속했는데 전 사령관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 김대중이를 우롱한 것이다….’  일찍이 한국 정치사에는 많은 각서가 있었다. 각서는 약속을 깨기 위해 서명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정치판에 신의가 상실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단일화 과정은 우리 정치에 신뢰를 회복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김대중 총재는 각서에 서명을 할 것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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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142화 5공을 단죄한 6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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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01/1038669602302530.jpg" alt=""/>    ▲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사법처리하지 않기로한 전두환-노태우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않았다. 사진은 김대중 대통령취임식장에서서로를 외면한 두 사람.  정계개편을 앞둔 88년의 상황도 올해처럼 안개 정국이었다.  그러한 안개 정국 속에서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이학봉 전 민정수석에 대한 6공 검찰의 사법처리는 백담사측을 상당히 자극했다.  S대령의 증언이다.  “이학봉 민정수석의 구속도 충격이었지만 더욱 충격이 컸던 것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구속이었다. 왜 그랬느냐. 이학봉 민정수석은 몰라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현직 두 대통령 사이에 사법처리는 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이 6공 청와대가 요구하는 백담사행을 받아들여 결심을 굳히게 되는 11월15일 밤의 전화 통화가 문제였다.”  여기서 말하는 11월15일은 88년 11월15일. 즉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기 8일 전, 11월15일 밤에 있었던 두 사람간의 전화 통화를 가리킨다.  “이 전화 통화에서 전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친인척들에 대한 더 이상의 사법처리는 없다는 보장과 함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또한 사법처리는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인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간의 전화 통화 내용을 알아보자.  “그러만 우리 친인척들에 대한 사법 처리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라 그 말입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모처럼 경어를 썼다.  “말씀드렸지만 기환이 형님이나 우환이 순환이 그라고 이창석이 등에 대한 사법 처리는 우리 검찰에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래가지고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집행을 했십니다. 그러나 그 밖의 친인척들에 대해서는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사라진 백담사행의 대가 후임자에 의한 단죄의 전통은 전두환 대통령 이후 두드러진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간의 전화 통화 내용 중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어쨌든 노태우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직전인 11월2일 역시 전화 통화에서 전 전 대통령에게 같은 내용의 약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11월14일 전 전 대통령이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처남 이창석이 검찰에 연행된 데 이어 22일 하늘처럼 여기는 집안의 어른, 형님 전기환이 구속된 것이다.  이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당부를 했다.  “우쨌든 우리 친인척들에 대해 그리케만 해준다면 고맙겠고 그라고 기왕에 부탁을 하는 바엔 내 한 가지만 더 당부 하겠십니다.”  “지한테 부탁할 일이 또 있습니까?”  “5공 청산과 관련해서 모든 책임은 내한테 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백담사로 가기로 결정한 거니까 책임은 다 내한테로 미루고 그 외의 측근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십니다. 이기 바로 마지막 부탁이자 내가 당부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각하께서 백담사로 가시는데 그 정도의 약속이야 못하겠십니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일단 약속하겠십니다.”  일단 약속하겠다. 과연 이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이날 밤 두 사람의 전화 통화는 밤 11시부터 약 30분간에 걸쳐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30분 동안 노 대통령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해명하고 사과했고, 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해명과 사과에 5공과 6공이 공멸할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6공 청와대가 요구하는 백담사행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약속은 지켜지질 않았다.  89년 1월12일 이학봉 민정수석을 구속한 검찰은 잇달아 27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대한 사법처리를 강행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오랜 친구의 부탁을 저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정치 세계에서 약속이란 어쩌면 깨져버리기 위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와의 신의도 저버릴 수 있는 것이 정치다. 아니 저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까.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간의 단일화가 매듭을 짓게 된다고 양측이 밝혔다. 방법과 기준을 놓고 일단 약속을 했다. 그러나 솔직히 국민들은 아직도 이 약속이 지켜질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후보를 위해 정몽준 선거대책본부장이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임해줄 것인가,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동교동과 전두환의 만남 어쨌든 결과야 어찌 됐건 최후에 대통령으로 뽑힌 사람이 얻게 될 지지율은 적어도 40%는 넘을 전망이다.  최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기권표를 제외하면 전 국민이 만장일치로 연임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지지도 또한 이에 못지 않는다.  우리 대통령 중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보인 대통령이 있다. 간접투표 방식이긴 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지지율은 공산국가의 그것에 비견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여기서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사령관의 만남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 2월 전두환과 동교동의 만남을 먼저 제의한 것은 신군부쪽이다. 신민당 동교동계 핵심이었던 이용희 의원과의 접촉에서 신군부측 합수부 수사 1국장 이학봉 중령은 이렇게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01/1038669602302531.jpg" alt=""/>    ▲ 전&#8226;노 대통령의 신의가 깨진 결정적 원인이 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  ‘김대중씨를 우리 전두환 사령관과 만나게 할 용의가 있다. 그쪽 생각은 어떤지 의사를 타진해서 결과를 알려 달라.’  이용희 의원은 이런 사실을 곧바로 동교동에 보고하고 있다. ‘전두환이 김대중 선생과의 회동을 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동교동측은 ‘좋은 일이다. 이학봉이와 계속 접촉해서 전두환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그 시점에서 전두환은 왜 동교동과의 회동을 원했을까. 또 동교동은 무엇 때문에 전두환 사령관과의 회동을 좋은 일, 즉 바람직한 일로 판단했을까.  S대령의 진술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두 사람이 만나서 통성명이나 하자는 것이 아닌 이상 전두환 사령관은 전두환 사령관대로 김대중 총재는 김대중 총재대로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만나야 할 필요가 문제가 되는데 먼저 전두환 사령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해 80년 1월 하순, 유정회 최영희 의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본부장을 방문해서 태평로에 있는 보안사 안가에서 전 사령관을 만난 적이 있다.”  최영희 의장의 기억이다.  “답답해서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국회에서는 헌법특위에서 개헌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국의 앞날은 그야말로 안개 속이었다. 그래서 전 사령관을 만나서 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찾아갔다.”  다시 S대령의 진술.  “최영희 의장은 60년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예비역 3성 장군으로 전두환 합수본부장하고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2군사령관 시절 전 합수본부장의 장인인 이규동 3형제가 모두 최 사령관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이규동은 관리 참모부장, 이규성은 수송과장, 그리고 이규광은 헌병 부장이었다. 그런데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전 합수본부장과 이순자씨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것이다. 물론 주례만 섰을 뿐이며 워낙 계급의 차이가 커서 사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최 의장의 기억.  “내가 그때 전 사령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장군, 계엄 당국이 시국을 지금처럼 끌고 나가서는 안된다. 하루 빨리 가닥을 잡아서 수습을 해야 하는데 유일한 대안은 JP뿐이다.”  전두환 사령관이 물었다.  “JP라면 김종필이 말입니까?”  “공화당의 김종필 총잽니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가지고 되겠습니까?”  “공화당의 기반이 살아 있으니까 행정부에서 밀고 군부에서 도와주면 야권의 세력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 사령관이 나서서 JP를 밀어 주시오,”  전두환 사령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최 선배께서 내 말을 잘 몬알아 들으신 거 같은데 그거는 최 선배의 생각이고 국민들은 그렇질 않십니다. 국민들은 JP를 그런 인물로 평가하고 있질 않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부패 또는 비리의 흠집이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밀어줄 수 있겠십니까?”   시국을 수습할 대안은… “그렇다면 군의 선택은 뭐요. 김영삼이나 김대중이요?”  “김영삼이도 안되고 김대중이는 더더구나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군의 선택은 둘 중 하나가 아니겠소. 3김씨가 아닌 누군가를 찾아내서 옹립하든가 아니면 직접 나서든가. 전 장군이 직접 나설 생각이오?”  조금 전까지도 단호한 표정이었던 전두환 사령관이 겸연쩍게 말했다.  “선배님, 실은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십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여러 가지로 생각중입니다.”  최영희 의장은 순간적으로 눈치를 챘다.  ‘아, 이 친구가 직접 나설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군.’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 의장이 말했다.  “쓸데없는 얘길 늘어놔서 미안하오. 이만 가겠소.”  “아, 저 선배님, 선배님….”  전두환 사령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최 의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같은 내용의 또 다른 진술이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 의원이다.  “80년 3월인가 해운항만청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땐데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강 선배하고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좀 들러 달라 이렇게 부탁하길래 찾아갔다.”  삼청 교육까지 받게 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에게 과연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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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1화 6공의 과거 청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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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4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24/1038064802302520.jpg" alt=""/>    ▲ 89년 초 겨울의 찬바람 속에 5공의 실세들이 하나둘씩스러져 갔다. 백담사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사진)는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정치는 장사다. 그것도 큰 장사다. 빅딜을 잘해야 한다. 덜 잃고 더 얻기 위한 판단력과 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만났다. 두 사람은 97년 대선에서는 서로 맞은편에 서 있던 관계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 기반이 영남권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박태준 전 총리의 영향권도 영남권이다. 이회창 후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영남권 표심의 이탈을 미연에 방지해 보려는 계산이고, 박 전 총리 입장에선 총리 자리에서 석연치 않게 물러나게 한 민주당을 지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의 만남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논의는 어떻게 결론이 날 것인가.  과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론 조사상의 지지율과 당선 가능성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 어쨌든 단일화가 이루질 경우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어낸 양 진영은 오차 범위 내에서 각축을 벌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소위 군소 후보 중에서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약진을 나타내고 있다. 장 전 안기부장의 출마와 관련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사전 조율 여부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모이고 있다. 88년 말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각하, 장세동입니다. 상황이 급해서 용건부터 말씀 올리겠습니다. 6공 검찰이 극비리에 저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영장이 발부될 것이라는 보고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며칠 내에 영장이 집행될 것인데 제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순응해서 구속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5공과 6공의 관계를 사실 그대로 세상에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5&#8226;6공이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 나라 정치판은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제가 취할 방법은 과연 어떤 방법인지 급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편지를 구겨버리자 이순자씨가 물었다. “아니 장 부장이 편지에 뭐라고 했어요?” “믿을 수가 없구만. 안현태, 아니 윤 서방, 장세동이가 이 편질 언제 가져왔나? 직접 가져왔나?” 연희동 집을 지키고 있던 전 전 대통령의 사위 윤상현씨다. “예. 장 부장이 직접 연희동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영장이 발부됐으만 미행이 붙었을 긴데….”  “노태우한테 또 속았다구”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끼어 들었다. “미행은 벌써부터 붙어 있었습니다. 어르신네.” 이순자씨가 안현태 전 실장에게 물었다. “미행을 어디서 붙여요? 검찰에서 붙였어요?” “어디서 붙였든 그런 것이 문제겠습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핵심을 물었다. “윤 서방이 말해 봐라. 장세동이가 집으로 찾아와서 뭐라고 하면서 편지를 주더나?” “자신은 미행이 붙어서 백담사까지는 갈 수가 없다.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나와 있는 보안사 요원들이 통과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윤상현씨 당신은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보안사에서 통과시키지 않을 이유도 없을 테니 내 대신 편지를 급히 좀 어르신께 전해 달라. 이런 부탁이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뒤섞인 안색으로 모두를 물렸다. “다들 좀 나가 있거라. 내가 세동이한테 편지를 써야겠다.” “장 부장한테 편지를 쓰는데 우리가 왜 나가 있어요?” “나가시죠. 장모님” 사위에게 이끌려 나가는 이순자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또 속았어요 당신이. 노태우한테 또 속았다구요!” 3당 합당의 사전 작업으로서 89년 정계개편이 한창 진행중일 때 노태우 대통령의 관심은 정호용 의원 처리 문제에 모아져 있었다. 그 즈음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정호용 의원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정 의원을 찾아 왔다.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정 의원은 김용갑 장관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술병을 꺼내왔다. “자, 들지.” “형님 이기 뭡니까?” “몰라서 묻나. 미국 술 아니야.” “미국 술이라카는 거는 지도 압니다만 밖에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이래도 됩니까?” “누가 할 소릴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리케 말하는 김 장관은 여기 뭐하러 왔노. 공무원이 근무 시간에 근무 안하고 나 같은 사람 찾아다녀도 되는 기야.” 나 같은 사람이란 5공 청산의 핵심 인물로 꼽히고 있는 것을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형님이 뭐 어때서 그라요?” “이 사람이 뭐 자꾸만 따지고 있어. 마실 끼가 안 마실 끼가.” “좋십니다. 마시지예. 대신 이 김용갑이 앞날을 위해 건배 하셔야 됩니데이.” “김용갑이야 장관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앞날이 뭐 어때서….” 김용갑 장관은 정호용 의원을 잠시 쳐다보았다. “참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뭐 어째?” “김용갑이가 실직자 안됐습니까. 선배라는 분이 그런 것도 모르고 뭐하고 있습니까?” “그러만 니가 사표냈다는 기 참말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호용 의원이 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이 정호용이가 니 말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쑥맥인줄 알아. 내가 누고 정호용이 아이가 정호용이….” 정호용, 그는 누구인가. 89년 3월 그는 왜 5공 청산의 표적이 되어 거대 야당의 몰아내기 작전에 걸려들었으며 마침내 여권의 밀어내기에 휘말렸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색다른 증언이 있다. 89년 11월 광주사태 청문회에서 정호용 의원을 신문했던 통일민주당 김광일 의원의 신문 내용이다. 청문회 장면이다. “증인은 자신의 저서 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휘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모든 지휘관은 이를 경건하게 받아들여 엄정하게 행사해야 한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좋습니다. 신문하겠습니다. 7공수 전투 상보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소요 진압에 특전 부대를 직접 투입하는 것은 신중한 고려 끝에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건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태 당시 시위대가 과격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계엄군의 초기 진압이 지나치게 강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증인은 이 점 동의합니까.” “계엄군이 진압 작전을 과격하게 펼친 잘못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비군 무기고를 파괴해서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 대항한 시위대도 잘못은 있습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24/1038064802302521.jpg" alt=""/>    ▲ 왼쪽부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호용 전 의원, 이학봉전 청와대 민정수석  “전교사 교훈집에 보면 지역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는데 계엄군은 해산보다는 체포에 주력해서 도피하는 군중을 끝까지 추적, 과잉 진압을 했고 이런 진압에 대해 광주지역 기관장들은 군이 사과해야 사태가 해결된다고 건의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객관적으로 냉담하게 지켜보던 시민들이 이 과잉 진압에 격분해서 방화, 파괴, 약탈 및 인명 살상 등으로 확대돼 발포 사태로까지 악화됐다는 것입니다.”  정호용 “광주진압 나는 몰라” 이에 정호용 의원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긍이 간다고 했다. 그때까지 정호용 의원은 다른 의원들의 신문에 대해 군을 너무 모른다며 꾸짖듯 답변했다. 그러다가 민주당 김광일 위원이 하나 하나 논거를 들이대며 신문하자 ‘모른다’는 대답은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은 못했다. 그러자 김 위원은 사태 당시 정호용 장군의 광주 체류기간을 문제삼아 따지고 들었다. 계속되는 김광일 위원의 질문. “10&#8226;26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첫째 사건 현장 부근에, 둘째 그것도 잠시, 셋째 김재규 부장의 초청을 받고 명분 있게 현장에 갔으며, 넷째 10&#8226;26으로 인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불과 몇 사람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과하고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증인은 광주 현장에 내려가 첫째 진압 부대 지휘 본부에 체류했으며, 둘째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사태가 진행되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체류했으며, 셋째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려갔으며, 다섯째 광주사태로 인해서는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래도 증인은 부대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직접 지휘한 일이 없으니 책임이 없다, 이렇게 계속해서 주장하겠습니까.” 다시 김용갑 장관과 정호용 의원의 대낮 술자리로 돌아가자. “이 무신 허튼 수작이고? 김용갑이.” 정호용 의원이 호통을 쳤다. “무신 말씀입니까.” “니 참말이가. 니가 총무처 장관 사표 냈다는 기 참말이가 말이야. 다 쇼 아니야 쇼!” 김용갑 장관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쇼라? 아니 그기 지금 무신 말입니까.” “아니만 니가 무엇 때문에 사표를 내나. 여야가 한통속이 돼가 나를 몰아낼라카는데 니가 무엇 때문에 총무처 장관을 그만두나 말이야.” 김용갑 장관의 얼굴이 딱하다는 표정에서 화난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니 형님, 여태까지 이 김용갑이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왔십니까. 좋십니다. 그렇다면 경과를 말씀드리지요. 아침에 홍성철 비서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김용갑 장관과 홍성철 비서실장의 통화 내용을 보자. “나, 비서실장 홍성철입네다. 내가 지금 삼청동 안가에 와 있는데 김 장관하고 상의할 일이 있습네다. 중요한 사안이니까 지금 당장 와주셨으면 고맙겠습네다.” 김용갑 장관이 홍성철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때는 이미 최창윤 정무수석과 박세직 안기부장이 도착해 있었다. 당시 김용갑 장관은 정호용 의원 처리를 둘러싼 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그런 논의 자체가 노태우 대통령의 뜻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홍성철 비서실장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봐야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말렸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던 정호용 의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어데다 전화를 할라고 그럽니까.” “어데긴 어데야. 노태우지.” “참 형님도. 지금 그 사람이 시방 형님 전화를 받을 리가 있습니까.”  경악하는 전두환 한편 89년 초 무렵만 해도 백담사에 전해 오는 서울 소식은 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1월12일 5공 청와대 이학봉 민정수석이 구속되었다. 잇달아 보름 뒤인 27일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집행되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6공 검찰의 사법 처리가 백담사의 전 전 대통령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S대령의 진술은 다음호로 이어진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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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40화 88년 겨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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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7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7/1037460002302510.jpg" alt=""/>    ▲ 지난 94년 11월16일 박정희 전 대통령 15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두 사람의 모습.  정몽준 의원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 만나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다.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다. 민주당의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정계개편이 본론으로 접어들고 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회창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 항간에서는 그래도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이 있는데 이처럼 무력하게 당하고 말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정치적 수완이 한 번쯤은 발휘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대로 힘없이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마치 ‘폭풍전야’라는 느낌이 든다.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이승만 정권 이후 후계 대통령들은 전임자를 뛰어 넘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만의 추세도 아니거니와 오늘날의 현상만도 아닌 듯하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고 후계자는 전임자를 극복해야 자신의 터전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문화인류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발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 문제로 고심을 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극복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 또한 5공의 공포정치를 비난했고, 김영삼 문민정부는 노태우 6공 정권까지를 군사독재로 규정했다. 김대중 정부는 문민정부 태동을 완전한 정권 이양으로 보지 않고 국민의정부야말로 반세기만의 첫 여야간 정권교체로 구분을 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차별화 정책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 중에서 만약 대통령이 나온다면 김대중 국민의정부는 또 어떻게 단죄될 것인가.  이번 겨울은 무척 빨리 다가왔다. 오는 12월19일의 대통령 선거라는 폭풍이 몰고 올 추위를 마치 예고라도 하는 것 같다.   유배지가 된 백담사 88년의 겨울도 무척 추웠다. 특히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씨 부부에게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최세창 합참의장이 백담사를 방문하려다가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제지를 당한 사실을 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추위에 떨었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몸서리를 친 것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6공 청와대와 백담사의 갈등, S대령의 진술이다.  “최세창 합참의장이 백담사를 방문했다가 청와대 경호실과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로 자그마치 4시간이나 실랑이를 계속하다가 돌아간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절치부심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을 격분케 하는 또 하나의 자극제였다.  특히 이 사건이 백담사의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만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6공 청와대가 백담사를 고립무원의 유배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옛 부하들조차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분통을 터뜨리며 내뱉은 말이다.  ‘야! 노태우 어데 말 좀 해 봐라! 내가 여그서 역적 모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옛 부하들조차 못 만나게 한다는 기 무신 짓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니가 내한테 이래도 되나 말이야. 이 나쁜… 으흐흐.’  다시 S대령의 진술.  “그런데다가 더욱 전 전 대통령의 심기를 자극한 것은 보안사가 백담사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점이었다. 백담사를 방문하기 전날 최세창 장군은 백담사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최세창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도 못하고 참말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정은 각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 말씀 안 드리겠고 내일은 꼭 찾아뵙고 사과도 드리고 문안도 올리고 하겠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이소.’  그리고 다음날 백담사를 방문했는데 청와대 경호실과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를 받아 사과는커녕 문안도 못 드리고 되돌아간 것이다.”  최세창 장군이 돌아가고 나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전 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각하, 확실한 것은 모르겠으나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순자씨가 끼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안 실장.”  “지금 이곳에 백담사 경비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과장급이 나와서 지휘하고 있지만 실제 병력은 강원도 경찰에서 차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세창 장군이 찾아 온 날은 예외로 경호실과 보안사 아이들이 나와 있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7/1037460002302511.jpg" alt=""/>    ▲ 전씨 부부가 머물렀던 백담사의 방 내부  “인자 무신 말인지 알겠구만. 경호실이나 보안사에서 최세창이가 찾아 온다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이제?”   “새삼스러운 일 아니야” 그때까지도 이순자씨는 도청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보안사에서 우리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으니까 알았을 거 아니야!”  전 전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번에는 이순자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안현태 전 실장이 의아한 듯 이순자씨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백담사에 들어와서 며칠도 안됐을 때였어요. 인제에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그리고 뭐라는지 알아요. 오늘밤 자정부터 이 전화에 도청장치가 설치된다. 조심하라.”  어찌 보면 당시만 해도 도청은 상식이었다. 지금 야당 일부에서 국정원의 도청과 감청에 대해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이 여권에 있을 때는 더 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노태우 정권은 철저하게 이전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태생적 한계’라고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89년 3월 정국은 정부 여당의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양분되었다. 중간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정면 대립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김용갑 총무처장관, 홍성철 비서실장, 최창윤 정무수석, 박세직 안기부장이 모였다.  김용갑 장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칫하다가는 정국이 홀랑 뒤집혀 버릴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인데 이거를 누가 지시했는지 한계도 모르고 어떻게 일을 진행합니까?”  모인 사람들은 헛기침만 하고 있다.  “헛기침들 그만하고 누가 말 좀 해 보소.  정호용 의원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킨다 카는 거를 노태우 대통령도 알고 있지요. 알고 있다면 그분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 아닙니까.”  홍성철 비서실장이 이북 사투리로 대꾸했다.  “이보시오, 김 장관. 기리니까 말해 보나마나 우리가 시방 꼭 기런 걸 따져야 하갔습네까.”  최창윤 정무수석.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기 무신 말이야.”  “김 장관이나 우리나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김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들입니다. 그런데….”  “오라 그러니까 대통령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박세직 안기부장이 거들었다.  “그런데 꼭 대통령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거를 따질 이유가 있겠소.”  참모들의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의중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종찬 당시 정무장관의 진술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뒤의 일이었으니까 아마 88년 11월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집무실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연락을 받고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그해 4월 4&#8226;26총선 때 하마터면 민정당 공천에 탈락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래 가지고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갔다가 자구 노력으로 되살아난 일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급히 상의할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이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의문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 12월8일, 12&#8226;5개각에 이은 12&#8226;8당직개편 때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한 것이다.”   노태우의 의중은 무엇일까 노태우 대통령은 그로부터 한 달 전인 그해 11월 초 이종찬 정무장관을 불렀다.   “아, 이 장관,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십니다. 앉으소.”  “예.”  “바쁘신 분이니까 곧바로 용건으로 들어갑시다.”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내가 보기엔 우리 민정당에서는 가장 바쁜 사람 중의 한 사람 같은데.”  “한때는 그런 때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제는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픈 곳을 찌르는구만. 아무튼 그때의 일은 그때의 일이고 오늘은 내가 이 장관하고 상의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불렀어요.”  이종찬 정무장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각하께서 이 사람하고 상의할 일이 있습니까. 어떤 일입니까.”  노태우 대통령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이 장관이 알다시피 올림픽이 끝나자 야 3당은 총공세를 취하고 나왔습니다. 5공 청산과 관련해서 전임 대통령의 친인척 문제 그리고 전임의 청문회 출석문제 등이 다 그긴데 여기에 곁들여서 야 3당은 중간평가를 받을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얘긴데 이 중간평가를 받아야 하겠십니까, 안 받아야 하겠십니까. 이 장관의 의견은 어느 쪽입니까.”  이종찬 정무장관의 회상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건의했다.  ‘각하,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꼭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정권을 걸고 중간평가를 받아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12&#8226;8당직개편 때 나를 사무총장으로 중용하는 예상 밖의 인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끝내 중간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 진영에서는 세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박태준 전 총리, 박근혜 대표 영입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고, 노무현 후보는 탈당파를 붙잡고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6&#8226;29선언이라는 획기적인 발표로 기반을 잡고 시종 유리한 분위기였으나 중간평가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진영이 그러한 형국이다.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당선될 것으로 낙관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지율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묘안을 짜내야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확실한 공약이냐 정계개편이냐, 후보들의 선택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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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9화 노태우와 중간평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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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0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0/1036855202302500.jpg" alt=""/>    ▲  정호용 전 의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간에 피비린내 나는 정치 공세가 횡행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기피를 끝까지 입증하려는 민주당과 정형근 의원이 제기한 불법 도청 등 현 정부의 실정을 파헤치는 한나라당 간의 죽기살기 식의 정치 투쟁을 보면 선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는 거래(?)가 사라져 버렸다. 흥정이나 절충 과정도 없이 갈 데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최대의 정치적 거래는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중간평가의 실시 여부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정호용 의원의 사법처리 면제를 중간평가 거부로 흥정을 했다. 평민당에서 중간평가를 보류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보시오 거산, 듣고 있습니까?”김영삼 총재의 난데없는 전화에 김대중 총재는 당황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난 또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중간평가를 어떻게 한다고요?” “다른 기 아니고 내가 시방 우리 김동영 원내총무에게 이상한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볼라고 전화를 드렸는데 민정당에서 중간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하는 소문이 바로 그깁니다. 후광은 혹시 그런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옆에 있던 김동영 원내총무가 김영삼 총재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민정당이 아닙니다. 평민당입니다. 총재 어른.’ 그러자 김영삼 총재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막은 채 김동영 원내총무에게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그렇다고 대놓고 평민당에서 중간평가를 안하기로 했다고 물어 볼 수 있나?’ 순간 김동영 원내 총무는 역시 정치 9단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죄송합니다. 전 또 총재께서 제 얘길 잘못 들으신 줄 알고 그만….’ 김영삼 총재의 질문에 김대중 총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만 이 후광께서 어째서 말씀이 없으신가. 이보시오. 후광 내 말 들었지요?” “예 들었습니다.” “들었으면 뭐라고 말씀을 해 주셔야지, 잠자코 계시면 어쩝니까.” “거산의 말이 잘 이해가 안가서 그럽니다. 아닌 밤의 홍두깨라더니만 민정당에서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만 이렇게 물어 보지요. 만일 민정당에서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한다면 평민당에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시 중간평가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호용 의원의 사퇴 문제와 맞물려 있었는데, 그렇다면 애당초 노태우 정권의 1년 치적을 평가하는 이른바 중간평가 문제는 어떻게 해서 제기되었는가. 87년 대통령 선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노태우 대통령 후보 선거본부격인 국책조정위원회 사무실의 전화 벨이 울렸다. A의원이 전화를 받았다“국책조정위원횝니다.” “여기 한가람기획입니다. 전병민이라고 합니다“아, 전병민씨 무슨 일입니까?” “우리 한가람기획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요! 어떤 내용입니까?” YS는 DJ를 슬쩍 떠봤다“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하고, 만나서 말씀드리지요.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런 일이라카만 시간이 문젭니까. 만사 제쳐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오소.” “어허 몹시 다급하셨구만. 알았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빨리 오소 빨리. 알았지요.” 한가람기획의 전병민은 김영삼 정부 초대 정책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학력 문제에다가 장인이 고하 송진우 암살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임명된 지 얼마 안돼 청와대를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 아이디어를 노태우 캠프에 전달만 했을 뿐 실제로 아이디어를 창안한 사람은 따로 있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풍자문학가 백성남의 진술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생각을 했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약점은 국민들의 불신이다. 민주주의 한다고 했다가 당선되면 같은 뿌리인 전두환 대통령처럼 군사독재 하는 게 아니냐 하는 국민들의 의구심이 가장 큰 약점인데 어떻게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문득 떠오른 것이 올림픽이 끝난 뒤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중간평가였다. 딴에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평가해서 한가람기획 전병민에게 넘겨주었다.” 중간평가 아이디어는 그렇게 해서 한가람기획으로 넘겨졌다. 한가람기획은 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캠프를 지원하는 몇몇 기획팀 중에서 가장 신임을 받았던 아이디어 뱅크. 그리하여 중간평가안은 곧바로 노태우 선거대책본부인 국책조정위원회로 넘겨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국책조정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최병렬 의원의 진술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가람기획에서 올라 온 중간평가안은 당선을 위한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니라 죽을 꾀였다. 스스로 파놓은 함정이었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 올림픽이 끝난 뒤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 하는 이른바 중간평가안이 한가람기획 전병민을 통해 올라 왔는데, 이 안은 민정당 선거대책본부에서는 채택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춘구 본부장을 비롯한 대책본부 지도부가 그런 내용의 극약 처방 없이도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간평가안은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이 됐는데 문제는 한가람 기획 전병민이었다. 연희동에서는 선거 상황이 지푸라기라도 붙들어야 할 만큼 다급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평가안에 미련을 두고 전병민이 연희동 노태우 후보 집을 방문해서 이 안을 이병기 보좌역을 통해 노 후보에게 전달한 것이다.” 중간평가안을 노태우 후보에게 건의한 전병민씨의 진술이다. “우리 한가람기획에서 올린 중간평가안이 독성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결정적인 득표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노태우 후보의 최대의 약점이 무엇인가. 국민의 불신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 한다지만 당선되고 나면 같은 뿌리인 전두환이 그랬듯이 군부 강압 통치를 펼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것이 국민들의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다수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간평가안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다시 최병렬 의원의 진술. “그가 이병기 보좌역을 만나 중간평가안을 제시하면서 그렇게 설득한 것이다. 이른바 중간평가안이 독성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득표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노태우 후보의 최대 약점인 국민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간평가안을 공약으로 내걸어 국민들의 의심을 풀어 줘야만 한다, 이렇게 설득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태우 후보의 판단이었는데….” 이병기 보좌역의 보고를 받은 노태우 후보는 중간평가안에 대해서 검토를 해보라고 지시를 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0/1036855202302501.jpg" alt=""/>    ▲ 지난 90년 4월29일 기원법회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  며칠 후 최병렬 의원을 불렀다. “아, 최 의원 앉으소. 그래 전병민의 중간평가 공약안을 검토해 봤습니까.” “예, 대책회의에 올려서 검토해 봤습니다만, 토의 결과 역시 채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그래요.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그렇습니다. 이런 식의 극약 처방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뭣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요?” “약점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규정에도 없는 중간평가안을 공약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자칫 우리가 열세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그렇게까지 안 해도 이길 수 있는데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이런 주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단 말이지요?” “결정이 잘못됐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아니 대책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했으면 결정에 따라야지. 알았으니까 나가 보소.” 일단 중간평가안은 그렇게 해서 일단 폐기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노태우 후보의 이중적 특성이 드러난다. 12월10일 여의도 유세에서 대책본부와 상의도 없이 중간평가안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것이다. 노태우 후보의 흥분한 목소리다. “국민 여러분, 이 노태우 새로운 공약을 하나 발표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보통 사람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주신다면 내년 가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에 6·29선언에서 공약한 것을 비롯하여 이번 선거에서 공약한 것을 충실히 이행했는지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정호용이 공직에서 사퇴해야당시 유세장의 열광하는 환호가 노태우 대통령에겐 족쇄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공약은 그렇게 해서 대선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왜 이 공약이 2년 뒤 89년 3월 실시 여부를 에워싸고 6공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등장했는가. 중간평가 공약을 내걸고 나서 2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그러나 5공 청산이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평가란 노태우 정권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의 실시 여부를 놓고 대책회의가 자주 열린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김용갑 6공 초대 총무처 장관, 박세직 안기부장, 홍성철 비서실장, 최창윤 정무수석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호용씨 문제? 그기 무신 말이요? 박세직 안기부장.” 김용갑 총무처장관이 물었다. “뭐가 무슨 말이요?” “방금 그러지 않았소. 중간평가를 하는 데 제일 걸림돌이 정호용씨 문제다.” “그러니까 광주사태가 있지 않소?” “광주사태?” “그것을 해결 못하면 중간평가에 이긴다는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일 급한 게 광주 사태를 해결하는 일인데 이거를 해결하자면 정호용씨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된다 이 말이오.” 김용갑 장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 보시오. 안기부장!” “아 와 또 소리를 지르고 이럽네까.” 홍성철 비서실장의 평안도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김용갑 장관은 홍 실장에게도 언성을 높인다. “홍성철 비서실장도 같은 생각입니까.” “기러니까 이렇게 같은 자리에 모인 거이 아닙네까.” 김 장관은 잠자코 있는 최창윤 수석도 쳐다본다. 딱하다는 듯이 최 수석이 입을 열었다. “김 장관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대답만 하세요. 그러니까 세 사람이 시방 정호용씨 사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여 앉았다 이 말이지요.” “제가 모이자고 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의 지시가 있었어요.” 중간평가와 정호용 사건은 그렇게 연계가 된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이제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많은 변수가 있고 어느 후보도 마음을 놓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국이 혼탁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 마련이다. 훌륭한 지도자란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뽑기 위해서는 훌륭한 국민이 필요하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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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138화 전-노의 갈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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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3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03/1036250402302490.jpg" alt=""/>    ▲ 5공 핵심인물의 사법처리문제가 불거지자 노태우 대통령(왼쪽)은 정호용씨(오른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간평가 묵살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앞서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포함되는 TK 세력이 끝까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을 위해 서슴없이 감옥까지 갈 정도로 의리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장 전 부장은 호남 출신 인사이다. 그러나 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5공 핵심 세력들로서 영남권 인사들이다. 장 전 부장이 대선에 나오기까지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과의 조율은 불가결했을 것이다. 장 전 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심려를 끼쳤다는 말로서 사전에 조율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했지만 과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회창 후보의 영남권 아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인가.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함께 또 한 사람의 영남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5·18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호용 전 의원이다.정호용 전 의원은 8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정호용 사건의 주인공이다. 정호용 사건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3김씨가 이끄는 야당이 지목한 5공 핵심 인물 6인에 정호용 전 의원이 포함돼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정호용 전 의원을 빼줄 것을 요청한 사건이다. 89년 초 청와대로 돌아가자. 노태우 대통령이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를 호출했다. “김 총무, 아무래도 일이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꼬여가는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야 3당 총재들의 합의 말씀입니까?” “이제까지는 우리가 백담사 전임을 청문회에 끌어내는 것 때문에 고심해 온 것 아니야.” “전임을 청문회에 내세울 겁니까?” “내세우든 내세우지 않든 양쪽 다 고민 아니야. 내세운다카만 백담사를 설득하는 기 고민이고, 내세우지 않는다카만 야 3당을 설득하는 기 고민 아니야 그렇잖아?” “그거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임을 설득하는 거 보다는 야 3당을 설득하는 기 안 낫겠습니까?”  “그거는 김 총무가 뭘 잘 모르는구만. 나는 시방 그 얘길 하고 있는 기 아니야.”  “아니면….”  “야 3당 총재가 5공 핵심 여섯 명을 사법처리하기로 합의를 안 했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는 뭘 알고 있어. 여섯 명 중에 정호용이가 포함돼 있다카는 것도 알고 있나?” 그제서야 김윤환 총무가 알아들었다. “안 그래도 명단을 보고 일이 좀 어렵게 되겠다 싶었습니다.”  “정호용이는 내가 후계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이제 와서 사법 처리할 수 있나.” “방법은 있을 낍니다.” “무신 방법?”  “연구해 봐야지예.”  “연구할 시간이 어데 있어. 일이 코앞에 닥쳤는데.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대선 때 공약한 중간평가 안 있나. 이거를 이용해서 한 번 정면 돌파해 보면 어떻겠나 이 말이야.”  “중간평가를 이용한다면 중간평가를 조기에 단행해서….”  “아니야 그 반대야.”  “반대요?”  “중간평가를 묵살하는 거지. 그러만 정국의 초점이 5공 청산에서 그쪽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겠어.” 89년 당시 혼란한 정국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가 약속한 중간평가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결과적으로 중간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문제와 정호용 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한편 노태우 대통령이 한창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첫 번째 생일과 겨울을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89년 1월18일. 영하 16℃. 전두환 전 대통령의 59회 생일이다. 이순자씨가 일어나 보니 이른 새벽에 이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가고 없었다. “이상하네. 이분이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아침부터 어딜 가셨지.” “추운데 뭐 하러 나오노.” “어머나 거기 계셨네. 거기서 뭘 하고 계세요?” “서울서 누가 내려올 거 같아서 기다리고 안 있나.” 이순자씨가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걸어 왔다. “아이구머니나 눈이 허리까지 빠지네. 이렇게 눈이 쌓였는데 내려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특별한 날 아니야. 아이들도 그렇고 그래도 사람들이 안 내려오겠나.” “용대리에서 들어오는 길이 막혔어요. 저렇게 눈이 쌓였는데 어떻게 차가 들어와요?” “그럴 거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경호원들을 안 시켰나.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올 정도면 되니까 어떻게 길을 좀 내보라고 말이야.” “그래서 새벽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군요. 그래 경호원들이 길을 냈어요?” “그러니까 기다리지. 아니만 뭐 하러 이러고 있어. 인자 첫 번째 손님이 도착할 때가 됐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다행히 용대리로부터의 진입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트였다. 아침 일찍 서울로부터 가족들과 측근들이 내려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축하 전보가 4백 통. 여러 종류의 서적들이 10여 권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저녁 무렵 뜻밖의 손님이 도착했다. 법정 스님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지 백담사에서 처음 맞이하는 생일날 전두환씨는 만가지 감회가 교차했다. 절에서 차리고 서울에서 차려 온 푸짐한 음식을 앞에 놓고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측근들이 부르고 가족들이 부르고 절에 있는 사람들도 한 곡씩 불렀다. 마침내 전씨의 차례가 됐다. 약간 취기가 도는 목소리다. “아니 다들 우째 내를 보고 박수를 치노. 어이 안현태?” “각하 오늘은 59회 생신이십니다. 한 곡조 안 뽑으실 수 있겠습니까.” 좌중이 박수로 노래를 청했다. “아니 그럼 내더러 창가를 하라 이 말이야?” “백담사 주지승도 파계하고 유행가를 불렀으니 어르신께서도 한 곡조 하셔야지요.” 이순자씨도 좌중과 함께 재촉을 했다. “그렇게 하세요. 당신 왜 18번 있잖아요.” 좌중이 더욱 힘을 얻어 박수를 쳤다. “참,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카더니 마누라까지 그쪽 편이네. 좋다. 주지 스님께서 청하는데 안 부를 수 없지. 대신 조용히 들으셔야 합니데이.” 전두환 전대통령은 그의 18번인 ‘방랑시인 김 삿갓’이란 노래를 불렀다. ‘김 삿갓’이란 대목에선 ‘전 삿갓’으로 바꿔 부르는 여유도 보였다. 그러나 일절이 끝나갈 즈음에 전두환씨는 마침내 울먹이고 말았다. 순간 좌중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현태 경호실장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각하….” “현태가.” “예” “말해 봐라. 다들 어데 갔노.” “누가 말씀이십니까.” “다 어데 가고 이양우 민정기 김정기 이놈아들만 이 자리에 남아 있나 이 말이야.” “모두들 생신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각하.” “이양우도 민정기도 그렇고 김병훈이도 그렇고 여기 남아서 고생할 이유가 없다. 내가 이 사람들한테 뭐 해준 게 있나. 청와대에서 진급도 못 시켜 줬는데…. 진급 시켜준 놈들은 한 놈도 안 보이고 와 이것들만 남아서 내 때문에 고생하나. 대통령 시켜준 놈은 어데 가고 장관 한자리도 시켜주지 못한 이것들만 남아서 고생을 하나 말이야, 앙!” 마침내 전두환 절대 군주의 참았던 노기가 폭발했다. 술상을 엎어 버린 것이다. S대령의 회상이다. “89년 초 백담사의 불만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배된 지 3∼4개월이 지난 시점에 6공 청와대와 백담사간의 갈등은 갈수록 격화됐다. 원인은 6공 청와대가 추진하는 5공 청산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백담사측의 불신이다. 40년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을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백담사일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88년 12월1일.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들어간 날이 11월23일이었으니까 12월1일은 약 일주일 뒤의 일이다. 인제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익명의 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백담사로 통하는 모든 전화에 도청장치가 설치됐다. 오늘 12시부터 작동된다. 조심하라. 이 전화가 백담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88년 12월31일. 한 해가 가는 마지막 쓸쓸한 날이다. 오후 7시40분 관할지역 군단장과 사단장이 미리 세배를 드린다면서 군단 보안대장과 함께 군용차가 아닌 봉고차를 타고 찾아왔다. 오리털 파카로 신분을 감춘 민간인 복장이었다.’ “그들이 왜 민간인 복장을 하고 군용차가 아닌 봉고차를 타고 왔느냐. 말할 것도 없이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 군단장이나 사단장이 백담사를 방문한 사실을 숨기자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전 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더욱 화를 돋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전 대통령을 찾아간 다음에 결국 군단장은 예편해서 옷을 벗었고, 사단장은 좌천됐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심기가 몹시 사나와진 터에 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해 겨울 백담사로 통하는 길목에 세워진 검문소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사복 차림의 두 사람이 검문을 하고 있다. “실례합니다. 어디 가십니까?” “나는 합참의장 최세창 대장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최세창 대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알고 있으면 통과를 시켜야지. 어째서 차를 세우나.” 두 사람의 청년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되물었다. “묻고 있잖습니까. 어디 가십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너희들에게 말해야 되나. 도대체 너희들 소속이 어디야?” “청와대 경호실입니다.” “청와대 경호실? 백담사 경비를 경호실에서 맡고 있나.” “백담사에 가십니까.” “이렇게 멀리 와 계신데 한 번도 찾아뵙지를 못했다. 그래서 연말 연시를 맞이해서….”최세창 합참의장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검문 요원의 단호한 어조에. 백담사엔 못 가십니다.” “뭐, 뭐야?” 군 최고 책임자인 합참의장의 행동까지도 제약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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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7화 김대중과 전두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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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7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7/1035645602302480.jpg" alt=""/>    ▲  장세동(왼쪽)과 정호용(오른쪽)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두고 여야간에 정치 생명을 건 설전이 한창이다. 한쪽에선 돈을 주고 샀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쪽에선 정치적 음모라고 반박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어쨌든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이 크게 작용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햇볕정책은 김대중의 인생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독재와 절대 권력에 항거하는 데 할애했다. 80년 5월, DJ 김대중은 신군부와의 첫 만남을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서 갖게 된다. 당시 신군부의 핵심 이학봉 중령은 DJ에게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버려야 살 수 있다고 충고했다. 결국 그 말은 죽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미였다. 당시 남산에서 조사를 받은 K씨의 기억이다. “80년 5월 남산 지하실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남산 지하실은 그때가 세 번째였는데 그런 식으로 가혹하게 당하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살아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재미있었던 일은 저녁 식사에 소시지 등 메뉴가 푸짐하면 다음 날은 반드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저녁상에 소시지가 올라오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7월14일 남산에서 검찰에 송치돼서 구치소로 이감이 됐는데 어찌나 기뻤던지 마지막 식사로 설렁탕을 먹으면서 설렁탕 국물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80년 5·17사태에 동교동계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가. K씨의 진술에 이어 현 민주당의 S의원.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저격수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5월17일에 일단 체포되지 않고 모면했는데 한 달 뒤인 6월18일 은신처인 반포의 친구 아파트에서 체포됐다. 그 자리에서 권총을 들이대며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가했다.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자, 온 몸을 묶고 팔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매단 뒤 천장을 향한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거듭된 고문으로 몸이 어찌나 망가졌던지 치안본부 특수대에서조차 신병 인수를 거절할 정도였다.” 모두가 그랬다.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이신범 조성우 이해동 등등. 특히 작가 이호철의 경우는 가혹한 고문 끝에 정신 이상 상태에 빠져 버렸다. 고문을 가하러 들어오는 수사관을 엄마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 본인은 어떠했는가. “한줄기 햇빛조차 비치지 않는 지하 취조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체적으로 고문은 안 받았다. 위협은 수없이 당했다. 옷을 발가벗기고 고문을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잡혀간 지 50일쯤 되는 어느날 계엄사 합동 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이 찾아 왔다.” 이학봉 중령은 짧게 말했다.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소. 죽는다는데 두렵지도 않아요.” “나는 죽음과의 대면을 수없이 되풀이해 온 사람이오.” “아 그래서 이래 초연하구만. 그래도 아직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을낀데. 죽어버리면 대통령의 꿈이고 뭐고 다 일장 춘몽 아니요.” “아직도 할 말이 남았소.” “아니오. 내일 모레 다시 오겠소. 그때까지 아까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 계속되는 김대중 본인의 회상이다. “이학봉 중령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죽는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버려라. 그리고 우리한테 협력을 해라. 그게 바로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날 밤 정보부 직원 한 사람이 지난 50일 동안 보지 못했던 신문을 넣어주었다. 신문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됐다.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는 것과 내가 엄청난 누명을 쓰고 있고 이미 신군부에 의해 공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뜬 눈으로 묵상을 했다. 내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의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다가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했다. 내가 사는 길은 그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을 했다. 이틀 뒤 이학봉이가 다시 찾아 왔다.” 지하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 온 이학봉 중령이 말했다. “아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구만. 그런데 불과 이틀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 같은데….” 김대중은 애써 위엄을 갖추고 물었다. “나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이 중령.” “알고 싶은 기 있으면 물어 보소.” “당신은 나한테 대통령의 꿈을 버리라고 했소.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 같은데, 대체 그게 누구요?” “아니 그러면 아직도 그 분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요?” “모르겠소.” “이거 야단났구만. 세상 사람이 다 몰라도 김대중 선생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몰라요?” 여기서 흥미 있는 진술을 들어 보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강창성 의원이다. “내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난 것은 80년 3월4일이다. 내가 보기엔 그때 이미 그는 대통령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5·17사태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니까 그 시점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다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 “이 중령, 당신이 시방 나를 찾아온 거는 나가 어떤 결심을 했느냐. 다시 말해서 대통령의 꿈을 버려라. 그리고 당신들한테 협력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이냐 이것을 알고 싶어서 온 거지요?” “거절은 못할 겁니다. 거절하면 곧바로 죽음인데 그럴 수 있겠소?” 이학봉 중령은 흰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얼굴엔 비장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가서 전하시오. 나 김대중이는 당신들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소.” 5·17사태에 전두환과 김대중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다. 그러나 이학봉 중령을 통한 두 사람의 간접 대면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과연 결과는 어떤가.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과 마찬가지로 총탄에 희생당했고,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스스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YS 김영삼은 아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DJ 김대중 또한 급기야 두 아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말았다. 이미 지난 사람은 오히려 낫다. 올 대선도 이제 60여 일 앞으로 다가 왔다. 날이 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물어뜯기 강도가 더해가고 있다.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문제는 결국 한인옥씨의 소환 얘기까지 나오고 있고, 청와대는 현대상선의 4억불 지원설과 관련하여 계좌추적까지 해 보자는 주장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다시 한국 현대 정치사의 최대의 정계개편인 3당 합당으로 돌아가자. 89년 정국 최대의 현안인 5공 비리 청산, 즉 전두환 전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관련하여 여야간의 줄다리기. 그해 1월24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야 3당 총재는 5공 비리 청산과 관련해서 3당간의 합의를 도출했다. 먼저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 “노태우 정권은 지금의 우리 정국을 한마디로 난국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반대다. 지금의 정국을 난국으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도대체 정국 현안의 문제가 뭔가. 5공 비리 청산이다. 이것을 하면 되는데 안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 놓고 난국이다 난국이다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모든 것은 노태우 대 통령 하기에 달렸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내가 들으니까 민정당에서 이런 얘길 한다는데, 야권 3당이 여소야대 정국을 이용해서 지나치게 과거사에 얽매일라고 한다, 일이 산적해 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5공 비리 청산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냐…. 그래서 내가 우리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거 말 한번 잘 했다. 내가 일이 산적해 있는데 언제까지 5공 청산을 미루고만 있을 것인지 가서 좀 물어보고 오라.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씨는 반드시 국회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야 한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 “전두환 전임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하고, 5공 핵심 여섯 사람을 사법 처리해야 한다 하는 데 대해서 우리 야 3당 총재가 합의를 봤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평소 나의 소신 한가지를 말씀드리겠다. 애당초 5공 비리가 왜 발생했느냐. 내각책임제를 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내각책임제를 서둘러 실시해야 한다.” 당시 청와대 최창윤 정무수석은 야 3당의 이러한 움직임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야권에서는 5공 청산 문제를 두가지 사안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두환 전임의 5공특위 청문회 출석이고, 다른 하나는 5공 핵심 6인에 대한 사법처리 건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섯 사람이 누구야?” “장세동 안무혁 두 전 안기부장,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이원조 의원, 허문도 전 통일원장관, 정호용 전 특전사 사령관입니다.” “뭐이 정호용 의원!”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정호용 의원은 5공 핵심에 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안되겠구만. 정무수석. 원내총무 연락해서 급히 들어 오라카소.” 1월24일 야 3당 총재 회동에서 합의된 5공 비리 청산 부분은 두 가지 항목으로 돼 있다. 하나는 이미 앞에서 밝힌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특위 및 광주 특위 청문회 증언 출석. 그리고 다른 하나는 5공 핵심 식스 멤버에 대한 사법처리 부분이다. 첫 번째 항목은 그렇다치고 두 번째 부분의 여섯 명 즉 식스 멤버는 어떻게 해서 5공 핵심으로 분류되었는가. S대령이 밝힌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5공 비리의 대명사격인 일해재단 기금 조성 비리를 비롯해서 청남대 관련 의혹,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 신개축 및 주변 공원화 관련 비리, 전국의 시장, 도지사 공관 내 대통령 전용 시설 관련 비리 등과 연관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장 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 팔이었던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5공 핵심으로 본인도 불만은 없었다. 다만 각종 비리와 관련해서 사안에 따라서는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예컨대 청남대 비리와 관련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반박이다. “청남대 내가 했다. 청남대 자체 건물에 60억 정도 들어가고 도로 닦고 주변 정리하고 이래저래 한 1백억 들었을 거다. 그렇게 해서 번듯한 대통령 별장 하나 지어놨더니 이걸 가지고 5공 비리 운운하는데 참 한심한 일이다. 그게 어디 전두환 대통령께서 혼자 쓰자고 세운 건가? 아니면 청남대가 장세동이 소윤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그렇다 치고 식스 멤버 중 가장 문제가 된 사람은 5·18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호용 의원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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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6화 전두환과 김대중의 만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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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0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0/1035040802302470.jpg" alt=""/>    ▲ 지난 1979년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던 김대중씨(오른쪽)와 부인 이희호씨  2002년의 가을 정국을 휩쓸고 있는 회오리바람은 그 세기가 점점 강해지고 방향 또한 가늠하기 어렵다. 과연 영남권의 표심은 끝까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어차피 갈라서게 돼 있다면 친노와 반노 진영의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올해의 정국 상황은 지난 90년의 3당 합당을 앞둔 상황과 여러 부분에서 대비되고 있다. 다만 커다란 변화는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국에 대한 재야나 지식인 계층의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정치권에 대한 냉소와 비난은 있지만 건전한 비판과 기대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당시 3당 합당을 앞두고 한 월간지가 소개한 K대학 Y교수의 정치권에 대한 직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당면한 최대 정치 과제인 5공 비리 청산과 관련, 여야가 크게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여당은 할 만큼 했다는 시각에서, 앞으로 대처해야 할 국가적 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언제까지 과거지사에 매달려 국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야 3당 및 재야는 그 정도로는 미흡하므로 재수사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정경유착으로 표현되는 대기업과 권력 핵심간에 거래된 정치자금의 흑막 등은 기피한 채 몇몇 사람의 사적 비리를 수사하는 것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지을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치권이 가야 할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87년 6월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올바른 길을 선택한 바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노태우씨는 그때의 결단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제2의 6·29선언을 단행함으로써 5공 청산의 핵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을 성사시켜야 하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아름다운 한국 동산을 훼손한 5공의 토양을 바꾸고 가지를 치고 다듬는 역할을 맡은 정원사다. 치자가 정원사에 비유되는 것은 인류문명 발생 이래 늘 그랬던 일이다. 신은 에덴동산을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을 아담에게 맡겼다. 아담이 계율을 위반했을 때 신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몰아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극을 통해 영국의 왕을 정원사에 비유하였고 그 이후 왕이나 통치자는 국가라는 동산의 정원사로 비유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치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이 위임한 정원사의 역할을 다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89년 초 정국은 그런 상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 3당은 여소야대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정부 여당에 대해 5공 청산을 강력히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정부 여당은 역부족인 채 야 3당의 공세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 출신 L비서관이다. “그 시점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5공 비리 청산과 관련해서 이중 삼중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우선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그 하나였고, 둘째는 1월24일 이른바 3김씨,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3자 회동에서 결정된 전두환 전임 대통령의 국회 청문회 증언과 5공 핵심 6인의 사법처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백담사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다.” 한편 이에 앞서 87년 6월 마침내 6·29선언으로 김대중씨가 장장 7년 간에 걸친 정치연금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0/1035040802302471.jpg" alt=""/>    ▲ 전두환씨가 80년 당시 전역식의 사열대에서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는 모습.                    [81보도사진연감]  김대중씨는 왜 정치적으로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됐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80년 5월 이른바 5·17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80년대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은 언제쯤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다. 적어도 그 이전, 즉 10·26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김대중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 그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었을까. 이 부분 증인이 있다. S대령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질 뻔한 것은 10·26사태가 일어난 지 약 한 달 뒤인 79년 11월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뻔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어쨌든 79년 11월, 정확히는 11월27일이다. 신민당 내 동교동계 핵심인 이용희 의원이 국회 예결위에서 김대중씨의 연금 해제 문제를 거론했다.” 이런 내용이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연금은 즉각 해제돼야 한다. 참된 국가 안보가 이루어지려면 국민 총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71년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해서 5백60만 명의 지지를 얻은 민족 지도자 김대중 선생은 안보적 차원에서도 연금이 해제돼야 한다. 만일 김 선생이 연금 해제 상태에 있었다면 ‘YWCA 위장결혼사건’과 같은 소란 행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다. 본 의원이 이 자리에서 김 선생의 연금 해제를 거론하는 것은 오늘 아침 김 선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얘기인가. ‘나를 이렇게 연금 상태에 둘 생각이면 그러지 말고 차라리 재수감하라고 전해 달라. 그렇게 하면 나 한 사람만 교도소에 가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인데 연금을 당하다 보니 식구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우리 식구들이 무슨 죄가 있으며 심지어는 비서들과 운전기사까지 바깥출입을 통제당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과연 무슨 죄가 있나. 오늘 국회 예결위에서 이 발언을 하게 되거든 이 문제를 꼭 좀 거론해 달라. 부탁이다.’ 이용희 의원의 발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분을 사면 복권하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면과 복권을 점진적으로 고려하더라도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연금 상태인 만큼 풀어줘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S대령의 증언이다. “당시 신민당 동교동계는 총재인 김영삼씨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해 5월30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가 이철승씨하고 당권 경쟁이 붙었을 적에 동교동계는 김대중씨의 지시에 따라 YS를 밀었다. 그래서 당 총재로 복귀했다. 그러자 공작정치로 이철승씨를 지원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씨를 연금 상태로 가두면서 족쇄를 채워버렸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금 상태가 10·26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씨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거론을 안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만 표출의 한 방법으로 이용희 의원으로 하여금 예결위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도록 지시했던 것인데 이 발언에 대한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국회의사당 로비를 걸어가고 있는 이용희 의원을 의사당 소속의 한 여직원이 달려와 불렀다. “이 의원님, 이용희 의원님!” “날 불렀나.” “예, 전화 좀 받아 보세요. 아까부터 이 의원님을 찾고 있는 전화가 걸려와 있어요.” “나를 찾는 전화가. 누구한테서.” “모르죠. 말을 안 하니까. 어디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근데 좀 이상해요. 경상도 말씬데 어쩐지 군인 냄새가 나지 뭐예요.” “군인 냄새? 그렇다고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전화가 어디로 걸려 왔어….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전화 좀 퍼뜩 퍼뜩 받으소. 전화 한 번 받는 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농담입니다. 나 이학봉입니다.” “이학봉? 잘 모르겠는데….” “어허 이거 안되겠구만.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입니다. 인자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습니까.” “아,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중령이 나한테 무슨 일입니까.” “다른 기 아니고 오늘 이 의원의 국회 예결위 발언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 내하고 얘길 좀 해야겠습니다.” “그 문제라면 어떤 문제 말입니까.” “어떤 문제는 뭐 어떤 문젭니까. 김대중 선생의 연금 해제 문제지요. 어쨌든 나쁜 얘기는 아니니까 지금 곧 맨하탄호텔 커피숍으로 건너오소.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8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5월17일 밤 동교동에서 체포되어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김대중씨는 그로부터 50여 일 뒤 현장에 나타난 이학봉 중령과 만나게 된다. 신군부와의 첫 번째 만남이다. “김대중, 아니 김대중씨.” “듣고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당신은 죽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어째서 그런지는 잘 알고 있지요?” “모르겠소.” “몰라요?”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가 살아있어 가지고는 당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당신을 놔두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말했어요.” 신군부와의 첫 만남, 당시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회상이다. “지금도 기억이 새롭지만 그때 남산 지하실을 찾아온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지난 2월 각서에 서명을 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결국 오늘의 이 상황은 자초한 것이다.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됐다…. 이렇게 말이다.” 당시 이학봉 중령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당신들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다 죽인다는 말인가.” “그거는 다르지요.” “어떻게 다른가.” “내가 말한 것은 김대중이 당신에 한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와 확대해서 해석을 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잠을 좀 자야겠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오.” 돌아누우려고 하는 김대중씨에게 이학봉 중령이 말을 걸었다. “아, 잠깐.” “또 뭐요.” “그런 말이 있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어쩌면 이 말이 당신에게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죽을 사람이지만 살 수 있는 길이 꼭 한 가지가 있어요. 혹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나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퍼런 신군부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김대중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과연 살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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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135화 전두환씨에 대한 평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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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3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13/1034436002302460.jpg" alt=""/>    ▲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90년 정계개편의 핵심인 3당 합당에 대해 살펴 보았다. 금년 대선을 앞두고 전개될 정계개편의 향방을 짚어 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대선은 이회창 후보의 독주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 복원, 정몽준 후보의 조직력 장악 여부 등이 정계개편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텃밭인 TK지역에서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재결집이 또 하나의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올해 초 광주지역에서 일기 시작한 ‘노풍’은 삽시간에 전국을 뒤덮었고, 연이어 발생한 대통령의 아들들이 연루된 ‘홍풍’은 순식간에 노풍을 잠재웠다. 지금은 ‘병풍’ ‘신북풍’ 등의 태풍들이 쉴새 없이 정국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지적인 태풍들은 이번 11월 본격적으로 몰아닥칠 메가톤급의 폭풍에 비하면 그 세력들이 미미하다. 그만큼 지금이 ‘폭풍전야’라는 사실을 의미한다.이회창 후보의 집권은 이념적으로는 보수 회귀를 의미한다. 노무현 후보의 집권은 기본적으로 진보 세력에 힘이 실릴 것이다.정몽준 후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재계 판도의 변화 등 대대적인 지각변동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이후 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우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엇갈린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격동 50년 폭풍전야에서는 이들 두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 평가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영남권과 TK지역 유권자들의 표심과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지난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의 사면 복권 조치로 2년여의 교도소 생활에서 풀려난 두 전직 대통령은 개선장군이었다. 특히 전두환 전직 대통령, 그의 언행은 스스로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이자 현세의 영웅이었다.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밝힌 전두환 대통령의 짧은 대국민성명엔 곳곳에 김영삼 정부에 대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가시가 돋쳐 있었다. ‘최근 뜻하지 아니한 경제 대란을 맞이하여 우리 국민 여러분들께서 얼마나 놀라고 불안하며 내일에 대한 걱정 속에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 상황을 정부에서는 갑작스런 위기 국면이라, 이리케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기 국면을 맞이하여 관록있고 믿음직한 정치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 대해 본인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대통령 당선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다른 거는 다 놔두고 우선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른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전력해 달라 하는 것이고, 아울러 정치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여야를 막론하고 화합해서 최선을 다해 경제를 살리는 데 전력 투구해 달라 하는 거를 부탁드립니다.우리가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 국민과 기업과 정부가 일심동체가 돼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중심으로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다 하는 거를 말씀드리면서 본인도 미력하나마 일조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한 전두환 전직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다. ‘국가적 위기 국면을 맞이하여 관록있고 믿음직한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축하한다.’반면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한 또 한 사람의 전직대통령 노태우씨는 어땠는가. ‘먼저 이 추운 날씨에 이 사람 때문에 고생하는 기자 여러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국민 여러분께 그동안 많은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짧은 인사말을 통해 드러난 두 대통령의 스타일의 차이였다. 앞에서 정계개편 3당 합당의 과정을 살펴본 88년 말에서 89년에 이르는 기간, 정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청문회 출석 문제를 에워싸고 숨가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고 있는 국회 특별위원회는 5공비리특위와 광주특위였다. 이중 5공비리특위는 11월30일과 12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증인 출석을 요구하는 서한을 띄웠으나 전 전 대통령은 아무 통보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 89년 3월10일 동 위원회는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 3월13일 오전 10시까지 일해재단 설립 배경 및 정치자금 조성 관련 비리조사 청문회에 동행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측은 여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석을 거절하고 5공특위 이기택 위원장에게 회신을 보냈다.동행명령장을 접수한 그날의 회신이다. ‘본인은 89년 3월13일에 개최되는 귀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 증언할 것을 요구하는 귀하의 동행 명령장을 수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부득이 출석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귀하와 귀 위원회 위원들의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한편 광주특위 즉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88년 11월10일 동 위원회는 1차 출석 요구서를 보낸 데 이어 12월10일과 23일 그리고 해가 바뀌어 89년 1월12일과 20일 등 4번에 걸쳐 전 전 대통령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으나, 전 전 대통령측은 88년 12월17일 등 3번에 걸친 답신에서 특위 활동에 가능한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헌정사의 관례나 국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합리적인 방법의 모색을 위해 특별위원회와의 협상을 제의하고 나온 것이다.이에 대해 89년 1월12일 5·18광주 특위는 전 전 대통령측의 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는 동행 명령장과 함께 서한을 발송했다. ‘보내주신 귀하의 서한은 잘 받았으나 귀하의 뜻은 이미 지난번 서한에서 숙지한 바 있었습니다. 본 광주특위에서는 국민들의 요청에 따라 귀하가 본 위원회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출석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귀 증인은 국민의 이름으로 발부하는 증언 요청에 응하셔서 5·18광주특위 청문회 증언대에서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증언할 것을 거듭 요청하는 바입니다.’이에 대하여 연희동 전 전 대통령측은 어떻게 대응했는가.89년 2월22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약칭 광주특위가 발부한 동행 명령장에 대한 전 전 대통령측의 같은 날짜 답신의 내용이다. ‘본인은 수차에 걸쳐 귀 위원회에 보낸 답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태와 그 과정에서 야기되었던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참으로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로 인한 한과 응어리를 하루 빨리 아물게 하여 국민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능한 모든 노력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그 어떠한 행동도 그것이 새로운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거나 아니면 불신과 증오의 골을 깊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귀 위원회가 본인에게 요구하고 있는 협력의 방법 또한 원내 각 정파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귀 광주특위가 이와 같은 원칙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구실로 청문회 참석을 거절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이러한 전두환 전 대통령측의 답신에 대해 특위의 반응은 어떠했나.황명수 특위 연석회의 공동의장과 신기하 평민당측 간사간의 대화 내용을 보자.“이런 빌어먹을. 혹시 이거 짜고 하는 것 아니요?”황명수 의원의 불만이다.“짜고 하다뇨? 뭘 짜고 한단 말입니까?”고 신기하 의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 “모르겠거든 전두환이 보낸 답신 내용을 잘 좀 분석해 봐요. 말은 오리 궁둥이처럼 돌려댔지만 원내 각 정파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결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청문회에 나와 증언할 수 있겠다, 이건 결국 수작 아니요?”“여야가 합의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나오지 않는 한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을 못하겠다, 이 말이구만.”“민정당은 당론에 따라서 간사회의에조차 참석을 안했어요. 그런데 우리 야 3당이 무슨 수로 여당과 합의를 하겠소.”당시 5공 청산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은 어떠했나. 5공 청산의 연내 종결 원칙은 여소 야대 국회에서 여야 4당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먼저 노태우 대통령의 국회 연설 내용이다. ‘5공 문제는 그동안 국회 특위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본다. 따라서 정부는 공정한 수사를 통해 엄정하게 사법처리함으로써 매듭을 지을 것이다. 다만 혹시라도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면 수사를 계속하여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처리할 것이지만 여기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5공 문제는 여야 합의하에 연내에 완전무결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대하여 야 3당 총재들의 생각은 어떠했나.먼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5공 청산 문제를 연내에 매듭을 짓자는 노태우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정부 여당이 이 문제 해결에 성실하지 못할 때에는 태우 정권의 옳지 않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중간평가와 국민투표의 방향으로 밀고 나가면서 단호하게 싸울 것이다.’김영삼 민주당 총재.‘5공 청산을 마무리 하기 위해 우리 민주당은 야 3당 총무간의 합의 사항을 존중할 것이다. 그래가지고 야권 공조 및 단일화 마련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의회 내에서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5공 청산을 연내에 마무리 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공화당 김종필 총재. ‘5공 청산 문제는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야가 다같이 좌고우면하지 말고 구국적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야 3 재들이 합의한 대로 조속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5공 청산을 연내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데는 합의가 돼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89년 초 정국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바야흐로 우리의 정국은 커다란 분기점에 서 있다. 민주화와 국민 화합을 이룩하는 가운데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기여하는 발전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 극좌와 극우가 판을 치는 가운데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과 갈등만이 팽배하는 퇴보의 길을 택할 것인가?’그해 89년 3월호 한 월간지에 게재된 어느 정치학과 교수의 직언이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임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 일반 서민들의 발목을 잡고 오히려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무더위를 몰아내는 서늘한 바람은 한차례의 폭풍이 되어 과연 누구의 깃발을 펄럭이게 할 것인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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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134화 합당의 전제조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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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6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06/1033831202302450.jpg" alt=""/>   “89년 여름, 7월이었다. 나는 여권에서 정계개편 3당 합당을 위해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 도쿄에 가 있었다.”육사 12기 박희도 박세직 등과 함께 ‘스리 박’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민정당 박준병 의원의 진술이다. 3당 합당의 물밑 교섭이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던 그해 89년 7월의 상황이다.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해서 받았더니 평소 가깝게 지내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그때 박 보좌관의 말이 ‘각하의 지시로 전화했다. 지금 당장 항공사에 연락해서 서울행 2시 비행기에 좌석을 예약 하라. 도쿄에서 서울까지는 약 2시간 반쯤 걸리니까 김포공항에 4시 반쯤 도착한다고 보고 늦어도 6시까지는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라는 각하의 명령이다.’  그래서 지시대로 6시 안에 청와대 현관 아닌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여기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비로소 정치권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박준병 의원의 대화 내용이다.  “박 장군, 아니 박 의원.”  “예.”  “내가 박 의원을 급히 돌아 오라칸 거는 시방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일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입니까.”  “정계개편, 3당 합당 말이야.”  “3당 합당이라면….”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말이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민정당 박준병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서 급히 돌아온 것은 그해 89년 7월이다. 그리고 박철언 정책보좌관과 함께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교섭에 참여한 것은 8월,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시간적으로 이때는 양당의 합당 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을 때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박 의원을 추가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해답을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으로부터 들어 보자.  “박준병 의원은 어땠는지 몰라도 내 경우는 솔직히 겁이 났다. 무엇이 겁이 났느냐. 처음 김영삼 총재로부터 특명을 받고 물밑 교섭에 들어갔을 때는 물론 그런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막상 합당을 위한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는데 우리(황병태 의원 자신과 박철언 정책보좌관)가 시방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3당 합당, 물론 그때는 3당이 아니라 양당 합당이지만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정치판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만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다시 말해서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냐 아니만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고 욕을 먹을 것이냐. 이런 생각 때문에 겁이 난 것이다. 그래서 김영삼 총재에게 누구 한 사람 더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그래서 들어온 사람이 김덕룡 의원이었다.”  부연하면 그렇다.  처음엔 몰랐지만 합당 교섭 마무리 단계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엄청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겁을 먹고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진술이 있다.  박철언 당시 정책보좌관이다.  “사실 그 3당 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 김영삼 총재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이면서 황병태 의원과 함께 김덕룡 의원까지도 합당 논의의 파트너로서 지정해 주었다.”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이상 두 사람의 진술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황병태 의원은 사안의 중대성에 겁이 나서 협상 대표를 한 사람 더 추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반면에 박철언 의원은 가신 그룹이 즐비한 통일민주당과의 협상에 황병태 의원 한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바로 이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은 과연 무슨뜻이었을까. 박철언 의원 자신의 간접 진술로 들어 보자.  “그 대목은 내각책임제 개헌과 연계가 된다. 3당 합당의 전제 조건이 내각책임제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통일민주당쪽에서도 처음에는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태도가 이상해졌다. 그래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문서화해서 서명을 받기로 했는데 황병태 의원의 서명만 가지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속력이 약해서 자칫하면 YS가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 딴소리를 못하도록 YS를 대리해서 서명할 수 있는 측근 중의 최측근을 협상 대표로 추가해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통일민주당측은 협상을 마무리할 대표를 확정했다. 반면에 민주정의당, 민정당측은 어떻게 되고 있었나. 다시 노태우 대통령과 박준병 의원의 대화.  “각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여권에서 엄청난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하고 저한테 급히 돌아오라고 한 것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박 장군, 박 의원. 갑자기 돌아와서 얘길 들으니까 상황 판단이 잘 안되겠지만 박 의원이 맡아줘야 할 중대한 임무가 있어요.”  “어떤 임뭅니까.”  ‘내각제는 합당 위한 방편’ “박철언 정무 정관을 도와서 3당 합당에 따르는 여러 가지 절차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3당 합당의 전제가 되는 내각책임제 개헌문제를 반드시 성사시키는 일이오.”  ‘내각책임제 개헌을 성사시켜라.’ 지상 과제였다. 3당 합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분명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서가 작성되었고 그 내용을 제1항에 명기했다. 그럼에도 통일민주당측은, YS는 각서에 명기된 합의내용을 부인함으로써 양당간의 갈등의 소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내용의 각서가, 3당간에 합의된 각서에그런 내용이 과연 명기돼 있었는가.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06/1033831202302451.jpg" alt=""/>    ▲ 합당을 논의하고 있는 민주당 김덕룡의원(왼쪽)과 황병태 의원(가운데)  이제 중요한 진술을 들을 차례다. 3당 합당 각서에 내각책임제 개헌 조항이 명기돼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서로 다른 주장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언.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3당 합당을 위한 협상 과정에 내각책임제 개헌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논의가 있었고 합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논의했고 합의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각책임제에 대한 YS의 근본적인 시각이었다.  박철언 정책보좌관, 나중에 정무장관이다. 그쪽에서 집요하게 요구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합의하도록 지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각책임제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당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진심으로 내각책임제를 수용할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YS가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해서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을 허락했느냐….”  진술자가 바뀐다. 정계 원로 C옹이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다. YS가 그때 왜 합의한 내각책임제를 뒤집었느냐. 아니 그보다 애당초 무슨 생각으로 내각제를 받아들였느냐. 3당 합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아니지 그때는 3당이 아니라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양당 합당인데, 이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논의만 있었던 게 아니다. YS가 대통령이 돼서 집권을 하면 내각책임제를 한다 하는 합의가 있었고 이것을 각서로 해서 각당 협상 대표들이 도장까지 찍었는데 그래놓고 YS가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이래서 정치판의 신의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모든 증언 진술이 그렇다.  3당 통합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 대전제가 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이 부분 3당 총재들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합의를 도출했다. 뿐만 아니라 구두 약속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어서 각서를 작성했으며 서명 날인까지 받은 것이다.  의문은 여기서 제기된다.  3당 합당 과정에서 있었던 최대의 의문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철두철미 대통령 중심제 신봉자인 YS가 그때 왜 내각책임제를 받아들였는가. 다시 정계 원로 C옹의 진술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이미 김영삼 총재는 확고한 신념이 서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합당해서 여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당의 대전제인 내각책임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되는 데 못할 일이 무엇이이냐.”  결국 90년 1월의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은 ‘정치적 사고’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여기서 3당 합당을 정치적 사고로 표현하는 것은 결과를 기준으로 한 모든 평가가 부정적인 데서 연유한다. 결과뿐 아니라 그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이제 정계개편 3당 합당의 마무리 작업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그 시점에서 3당 합당이 왜 필요했는가. 사고 발생의 원인부터 확인해 보자.  황병태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이다.  “87년과 88년 YS에게는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 그리고 다른 하나는 4&#8226;26총선에서의 제2야당으로의 전락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중에 어느 쪽이 더 충격이 컸느냐. 88년 4&#8226;26총선 결과였던 것이다. 대통령 후보 문제로 당을 깨고 나간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패배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이다.”  당시의 몇몇 진술을 종합해 보면 YS는 87년 대선에 대통령이 될 준비 없이 선거에 임한 것이 된다. DJ는 끝까지 색깔 지켰다  뒤집어 말하면 대선 승리를 위한 확신은 고사하고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출마하여 국민민을 우롱한 것이다.  이처럼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YS와는 달리 DJ 김대중 총재는 정계 개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입장을 확인해 보자.  “의도는 좋다. 취지도 좋다. 뿐만 아니라 영호남간의 지역 감정을 타파하는 문제는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아주 적절하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위해 나 김대중이가 여당과 제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40년에 가까운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투쟁의 역사가 용서하질 않는다. 대신 나가 약속을 하겠다.  앞으로 계속해서 제1야당의 자리를 지키되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합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여소야대 정국하에서 집권 초반기의 권력 기반 확보와 퇴임 후의 안전을 위한 준비가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통해 집권의 꿈을 이루기 위해 3당 합당이 필요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는 군사정권의 맥을 끊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키자는 목표에서 고심 끝에 3당 합당을 결심한 것이다. 다만, 김대중 총재는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분명히 한 것이다. 앞으로 한 세대 정도가 지나가면 3당 합당은 새롭게 평가될 것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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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3화 ‘DJ정국’의 회오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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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9/1033226402302440.jpg" alt=""/>    ▲ JP는 YS와 골프회동을 갖고 그의 마음을 돌려 놓기로 한다.  89년 여름 이른바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을 보면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의 시각이다.  ‘8월12일 검찰은 마침내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김원기 원내총무를 국가 보안법 위반 불고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로써 정국은 또 한 차례 회오리 속에 휘말려들 것으로 전망되는데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이 김대중 정국으로 표현이 바뀌어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찰 발표를 놓고 긴장하고 있는 것은 평민당뿐만 아니라 여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검찰 조사 결과에 따라 정부나 평민당 중 어느 한쪽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검찰 발표대로 김대중 총재가 지난 4월 서경원 의원의 밀입북 사실을 인지했고, 서 의원이 북쪽에서 받아온 5만달러 중에 1만달러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면 이를 부인해온 평민당과 김대중 총재는 사법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도의적인 면에서 회복 불능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반면에 검찰 발표가 평민당 주장대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 없이 유야무야 돼버린다면 정부 여당으로서는 평민당의 대역전 공세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다. 양측이 다 사활이 걸린, 전면전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당시 사건에 대한 일선 기자들의 인식이다. 여기서 다시 의문이 제기된다. 민정 민주 양당이 극비리에 합당을 위한 물밑 교섭을 진행하고 있던 89년 6월과 7월 및 8월, 제1야당 평민당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해답은 그렇다.  그해 3월에 발생한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에 이어 6월 또 다시 발생한 서경원 사건으로 안기부 및 검찰과의 전면전에 돌입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두 당이 합당하든 3당이 합당하든 그런 일은 알지도 못했고, 알았다 해도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진술이다.  “서경원 밀입북 사건이라는 돌풍 속에서 김대중 총재가 여권과의 정치적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능하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조기에 협상을 통해 해결되기를 바랐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청와대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그런데 왜 타협이 안되었느냐. 박 보좌관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권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노태우 대통령이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말해 봐. 아까 전화로 한 얘기가 무신 얘기야. DJ를 어떻게 해.”  “각하. 김대중 총재는 제1야당의 총재입니다.”  “내가 그걸 모르나.”  “그런 데다가 지금 평민당하고의 합당 교섭은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그러니까 서경원이 사건을 조용히 끝나게 하자, 그 말이가.”  “서경원 사건이 엄청난 파장으로 번지고 있다카는 거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사건이라 해도 정계개편이나 합당에 비할 수는 없는 기 아니겠습니까.”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박철언이. 남의 걱정말고 자기 처신이나 조심해. 무신 말인지 알겠어.”  다시 Y비서관의 진술이다.  “박철언 보좌관의 한계는 군부와 여권 핵심부의 제동이었다. 이 무렵 군부나 여권 핵심에서는 박 보좌관이 북방 정책의 총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특히 군부로부터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돼 있었다. 또 여권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해 집중적으로 건의가 들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서경원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김대중 총재를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와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평민당과의 합당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뭐 그라고 있어. 알았으면 그만 나가 봐.”  “각하.”  “또 할 말이 있어.”  “그러면 평민당하고의 합당은….”  “평민당하고는 제휴 안한다고 안했나. 그런데 뭐 자꾸만 평민당, 평민당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무소불위의 ‘황태자’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계개편의 결말은 과연 어떤 것일까. 당시의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구상을 고려할 때 일부 TK 세력이 민주당과 연합하는 시나리오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3당 합당은 처음에 민정 민주계의 양당 합당에 DJ와 JP가 있는 것이다.  한편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먼저 기자의 질문이다.  “지난 7월10일 청와대 회담 뒤에 나온 정계 개편 문제와 관련해서 청와대의 발표는 극히 포괄적이라는 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에서는 노태우 김종필 중심의 보수연합설이 나오고 있는데 진상은 무엇입니까.”  “그런 내용의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다. 그동안 우려했던 대로 우리 사회가 이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과 소련 등 공산주의 종주국들마저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판국에 뒤늦게 잘못된 진보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이념 문제로 혼선을 빚고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이냐.  따라서 우리는 보수적인 위치에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급진이든 완속이든 간에 진보는 진보대로 자기 빛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나눈 것뿐이다.”  “회동 후 김 총재께서는 정계개편에 앞서 먼저 5공 청산이나 광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여야간의 중재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그러면서 4당이 다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을 강구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차선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답변하고 있다.  “내가 말한 차선책은 앞으로 얘기해서 정리가 돼야 하니까 지금 당장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9/1033226402302441.jpg" alt=""/>    ▲ 서경원 밀입북 사건으로 불구속 입건된 DJ.  첫째, 광주 문제는 그동안 자그마치 9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 데도 아직까지 해결이 안된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 당시의 생각들을 지금에 와서 완전하게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국회 청문회를 했는데 이것 역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난 것으로 봐서 상황을 너무 크게 잡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셋째, 사법적 처리든 정치적 처리든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제한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 그렇다면 이런 현실 상황들을 도외시하고 그냥 밀어붙인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아무 것도 없다. 진짜로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다 하는 말을 한 거다.”  다시 기자의 질문.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는 것은 정치권이나 국회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잘 안되니까 나온 얘깁니다. 그렇다고 안할 수는 없으니까 차선책이라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건 정치권의 생각일 뿐 국민의 뜻은 아닙니다. 최선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납득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할 말이 없다. 내 얘기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도출해 낸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런 인식 하에 차선책이라도 찾아보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이 문제는 사실상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둘이서 만나보고….”  여기서 둘이란 두 정당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이다.  “그런 뒤에 셋이서, 또 넷이서…. 이런 식으로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내가 김대중, 김영삼 총재에게 3자 회동을 제의했는데 만나서 얘길 해 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최선은 아니라도 그 다음 정도의 결과는 얻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있는가.”  그즈음 YS와 JP의 이른바 골프 회동이 있게 되는데, 골프 회동을 놓고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김종필 총재와 김용환 의원의 대화 내용이다.  “어젯밤에 황병태 의원을 만났습니다.”  “황병태. 아,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말이요.”  “그 친구가 저하고 고시 동깁니다. 그래서 가끔 어울리는데 어젯밤은 그 친구가 엉뚱한 얘길 꺼냈습니다.”  “무슨 얘길.”  “총재님하고 YS하고 골프 회동을 한 번 마련하면 어떻겠느냐….”  “골프 회동요.”  “저희들이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의미 있는 표현 아닙니까.”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YS는 골프를 못 치잖소.”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골프가 목적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뭐가 목적이오. 둘이서 잔디밭을 산책이라도 하라는 게요.”  “그것도 좋지요. 비로소 알게 됐는데 그동안 청와대 쪽에서 연락이 없었던 것은 YS가 틀었기 때문에 그랬답니다.”  “YS가 뭘 틀어요?”  “민정당하고 우리 신민주공화당의 제휴에 강력히 제동을 걸었다는 얘기죠. 그랬기 때문에 청와대 쪽에서는 결단을 못 내리고 주저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골프 회동을 통해서 YS의 마음을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  황병태 의원과 김용환 의원이 서로 먼저 골프 회동을 제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황병태 의원의 진술.  “사실은 골프 회동을 먼저 제의한 것은 통일민주당 쪽이었고, 3당 합당 교섭 과정에 김용환 의원은 참여한 일이 없다. 당연했다. YS는 신민주공화당이 참여하면 민정당하고 통일민주당의 합당은 절대 불가라는 조건을 내놓고 있을 때인데 김용환 의원이 어떻게 들어오나.  그렇다면 골프 회동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나. 89년 9월, 그러니까 정기 국회가 열렸을 때쯤으로 생각이 된다. 그때 JP는 상당히 외로웠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민정당하고의 합당을 제의해놓고 있었지만 진척은 잘 안되고 또한 국회에서는 신민주공화당의 애매모호한 입장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김용환 의원에게 JP 기 좀 살려주자 해서 YS하고의 골프 회동을 제의한 거다.”  그즈음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당의 박준병 의원을 급히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박준병입니다.”  “아, 박 장군. 일본에서는 언제 돌아왔어요?”  “박철언 보좌관이 지시한 대로 도쿄에서 2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박철언이가 지시를 했어요?”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각하를 대신해서 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박철언이가 지시한 기 아니지. 내가 지시한 것 아니오.”  “어쨌든 그래 가지고 김포에 도착해서 곧바로 들어왔는데, 홍 실장 지금 몇 십니까.”  “6시5분 전입니다.”  “시간은 뭐 할라고.”  “박 보좌관이 그랬습니다. 각하의 지시가 늦어도 6시까지는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보던 일도 다 못보고 들어왔는데 혹시 서울에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 아닙니까.”  “큰일이야 났지. 어쨌든 앉읍시다.”  “박 장군, 아니 박 의원. 인자부터 내가 하는 얘길 잘 들으소.”  박준병 의원의 증언 진술이 이어진다.  노태우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3당 합당 협상 과정에 박 의원을 추가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을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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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2화 야당의 분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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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2/1032621602302430.jpg" alt=""/>    ▲ 89년 7월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단독회담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신당 창당설, 후보 교체설, 대안론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한 대통령 후보를 놓고 찬반 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나라당 일부에서도 병풍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가시화될 전망이다. 앞으로 전개될 정계개편은 지난 89년 3당 합당 과정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지켜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89년 당시 세 야당, 즉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야 3당은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을 앞두고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계파 분열의 양상을 보면 앞으로 있게 될 우리 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합종연횡하게 될지를 예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술이다. 세 야당 총재들 사이에 나타난 분열의 조짐. 당시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세 야당 총재간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7월10일 청와대 단독 회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김종필 총재가 말한 이른바 차선책 발언이었다.  당시 JP는 ‘가능하면 야 3당 총재들이 합의를 본 사항은 지켜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상대가 있는 것 아닌가? 경우에 따라서는 차선책을 강구해서 최선에 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냐. 뒤늦게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노태우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야 3당 총재들이 전직 두 대통령의 국회 증언을 결정한 배경은 나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거는 야 3당 총재들의 사정이고 나는 입장이 좀 다르다. 서교동은 몰라도….’  서교동은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입장이다.  “백담사에 가 있는 또 한 사람의 전임은 내가 그 사람을 국회 증언대에 끌어낸다카는 거는 인간 노태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의 자리를 걸고 나는 이 일은 못하겠다. 김 총재께서 좀 이해해 달라.”  이에 대해 김종필 총재의 답변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심정은 내가 이해한다. 그러나 전임 두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정호용 의원 등 5공 핵심으로 분류된 6명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는 정국 상황에 진전이 없을 것이 뻔하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정호용이하고 내하고의 관계는 새삼스럽게 말씀 안드리겠다. 다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호용이는 내 손으로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킬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러길래 나는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 시절에 나는 시국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도 했고, 또 자리에서 물러나 혼란을 수습하고 그랬다. 그런데 시방 대통령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다시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이다.  “JP의 차선책 발언은 여기서 나왔다. 이미 민정당과의 합당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은 노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와주자는 결심 하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을 강구할 수도 있다. 이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JP의 생각이고 김대중 총재나 김영삼 총재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야 3당 총재들이 합의사항 파기다 해서 반발하고 나섰는데 뜻밖에도 신민주공화당측이 역공을 하고 나섰다.”  당시 신민주공화당 김용환 의원의 격앙된 목소리이다.  “청와대 회담에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것은 JP가 아니라 DJ하고 YS다. DJ는 중간평가 위헌론을 제기했고 YS는 여권에서 기대하는 5공 핵심들의 국회 고발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그래 놓고 어떻게 합의사항 파기의 책임을 JP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나!”  이 같은 내용의 목소리가 JP 본인한테서도 나왔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아느냐. 노태우 대통령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5공 청산과 관련해서는 DJ나 YS가 이미 양해를 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느냐.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DJ나 YS가 청와대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이러한 상황에서 평민당은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화근이 되어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게 되는 것이다.  안기부 출신 P국장이다.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은 한마디로 여권 핵심부, 여기엔 물론 노태우 대통령도 포함되지만, 여권 핵심부로 하여금 김대중 총재에 대한 거부감을 확인케 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김 총재의 진보적 성향에 의구심을 느끼고 있던 우익 보수 세력들, 특히 군부와 군부 출신들이 마치 확증을 잡은 것처럼 느낀 사건이 바로 문 목사 밀입북 사건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김 총재가 문 목사의 밀입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여비로 3백만원을 보태주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생활비든 여비든 그런 것은 그후 김 총재의 대응에서 충분히 밝혀졌다. 평민당측은 적극적인 대응은 못했다. 방어적이며 수세적으로 극히 소극적인 대응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이 터지자 김대중 총재는 정부측에 몇 가지 유화적 제스처를 쓰고 있다. 문 목사와 자신과의 통일관이 다르다는 입장 표명과 함께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갈등을 빚고 있던 노사분규, 학생 시위 등에 대해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등이 그 것이다.  그러나 파격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끝내 김대중 총재를 소환 조사했다.  김 총재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바로 그 직후. 6월3일 광주교육대학에서 있었던 대중 연설에서 김 총재는 5공 청산과 조속한 민주화 일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연설 내용이다.  ‘광주 학살의 책임자를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처벌해 억울하게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한을 풀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요구합니다. 5공 청산은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 일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2/1032621602302431.jpg" alt=""/>    ▲ 김대중 총재의 모습  그렇지 않고 이유 없이 지연시킬 때는 나는 노태우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이 위기 상황으로 몰릴 때 통일민주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이 자신과의 합당만 추진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공화당도 참여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김영삼 총재와 황병태 의장의 대화다.  “이, 참 무신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황 의장.”  “말씀하이소.”  “말씀하이소가 아니야. 황 의장 이 시방 뭐라 캤나. 신민주공화당이 참여한다 캤나.”  “아직은 꼭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감으로 그렇게 느껴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얘기 아니야. 저쪽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거 같애서. 참 내가 저 쪽에다 전달하라고 한 거는 전달했나.”  “합당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 말씀입니까?”  “거기에다가 내가 학실하게 표시했어. 합당은 우리 통일민주당하고 민정당하고 두 당에 한한다. 그 밖의 정당들, 특히 유신 잔당인 신민주공화당은 절대로 참여시킬 수 없다. 이렇게 말이야.”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나. 신민주공화당을 참여시킨다는 얘기가 어떻게 나오나 말이야.”  “지가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아직 공식적으로 제의가 들어 온 것은 아니고 박철언 보좌관하고 얘기를 진행하는 중에 언뜻 감을 잡았다….”  “박철언이가 뭐라고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애당초 자신이 구상한 것은 양당 합당이 아니라 4당 합당이었다.”  “뭐가 어째? 4당 체제에서 어떻게 4당이 합당을 하나? 그건 합당이 아니라 통합 아니야. 완전 사기구만 사기. 황 의장.”  “예.”  “나가서 당장 박철언이한테 전화해. 아니야 그럴 거 없어 여기서 당장 전화해. 이번 합당에 신민주공화당을 참여시킨다면 우리는 빠지겠다고 말이야.”  여기서 진술이다.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총재에 대해서 왜 그렇듯 강경했는가.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김영삼 총재가 신민주공화당에 대하여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신민주공화당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JP 김종필 총재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한마디로 인간적인 불신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나가 말이야. JP한테 두 번 속았어.  한 번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87년 대선 때 일이야. JP는 내 손을 들어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막상 선거가 임박해서는 약속을 어기고 내한테 식언을 한 기라. 나가 제일 싫어하는 기 뭔지 알아. 돈과 관련된 스캔들, 그리고 정치인의 거짓말이야.  또 한 번은 83년의 경험인데 목숨을 걸고 23일간의 단식을 감행할 때 일이야. 그러다가 싸우기 위해서 단식을 중단하고 나와 민추협을 발족시키는데 JP 문제가 제기됐어.”  민추협. 즉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정계 원로 C옹이다.  “민추협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종로 네거리 보신각 뒤편의 대왕빌딩이다. 여기가 바로 그해 84년 5월에 발족한 민주주의의 산실 민추협 사무실인데 정확히는 종로구 관철동 45번지의 1호 대왕빌딩 13층 2호실이다. 그래봤자 몽땅 합해서 한 20평 됐나. 비좁은 사무실에 식구나 적은가. 들어서기만 하면 꼭 한증막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승강기가 12층밖에 안 올라가. 그래서 13층 사무실에 가자면 한 층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JP에 대한 김영삼 총재의 기억이다.  “이 사람을 가입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건데 솔직히 JP는 대상이 안 돼. 민추협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건데 거기에 어떻게 5&#8226;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을 참여시키나. 그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내가 우겼어. 이제는 고인이 된 김창근 민추협 상임운영 위원을 통해 참여하도록 권유했는데 일단 동의를 받았어. 그런데 막상 민추협 결성 단계가 되니까 이 사람이 일언반구 말도 없이 미국으로 날아가 버린 기라. 가면 간다고 말이나 하고 떠날 일이지. 그런 식으로 떠나 버리는 데가 어데 있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는 김종필 총재에 대해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누구를 불신하든, 그리고 그 불신의 결과가 어떻든 유권자들은 아무것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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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31화 평민당의 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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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정치비화/폭풍전야]]></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15/1032016802302420.jpg" alt=""/>    ▲ 단독회담을 갖고 있는 김영삼-노태우.  89년 6월의 시점에서 동교동측은 청와대와 상도동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계 개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당시에는 3당 합당이 아니라 양당 합당이었지만 편의상 3당 합당으로 호칭한다.  이 3당 합당을 위한 물밑 협상의 진상을, 아니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점에서 3당간의 이른바 공조체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안기부 출신 P국장으로부터 정보 당국에서 파악하고 있던 세 야당의 협조 체제를 살펴보자. “89년 들어 세 야당 총재들은 두 번에 걸쳐 모임을 가졌다. 이른바 ‘3야당 총재 회담’으로 1월24일 그리고 3월4일이다. 이 3야당 회담의 결과를 바탕으로 5월16일부터 26일까지 여야 4당 14인 중진회의가 열렸는데 주된 의제는 5공 청산이었다. 내용은 그 전해 5월 3야당 총재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 그대로였다.  첫째 5공 비리 조사 특위 구성, 둘째 광주 사태 진상 규명 특위 설치, 셋째 안기부 보안사 및 검찰과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법률 개폐 특위 등 5개 특위 설치, 넷째 80년 5공 특위의 출범을 합리화하기 위해 희생된 모든 해직자들의 전원 복권.  이상과 같은 합의안은 그러나 하나의 윤곽이었을 뿐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5월16일부터 26일까지의 4당 14인 중진회의에서 이를 실천 방안으로 구체화시킨 것인데 세 야당 총재간의 공조 체제는 여기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  진술자가 바뀌어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증언이다.  “7월10일 노태우 김종필 청와대 단독 회담이 있었다. 이 회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김종필 총재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지금 막 아이를 가졌는데 아들인지 딸인지 어떻게 아나. 그러니까 그것은 좀 기다려 주고 대신 내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다. 에, 오늘 대통령 각하를 만나 뵙고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눈 끝에 알게 된 것은 우리 세 야당 총재들의 합의 사항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5공 청산 안할 거냐 그건 아니다. 해야지. 반드시 한다. 다만 우리 세 야당 총재들의 합의 사항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부득이 차선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김종필 총재의 답변에 기자들이 많은 질문을 했는데, 김 총재는 특유의 선문답으로 피해 나갔다.”  김종필 총재의 선문답은 여러 가지 억측을 낳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의 발언은 항상 측근들의 부연 설명을 필요로 했다. 정계 개편을 위한 막바지 물밑 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89년 6월 시점,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와 김용환 정책위 의장의 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당사에 나와 총재실을 찾은 김용환 의장.  “일찍 나오셨습니다. 총재님”  “아, 김 의장 무슨 일이요?”  “오늘 아침 따라 너무 일찍 나오신 것 같아서 들러 봤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질 않은데…. 3야당 총재간의 합의안을 내가 변질시켰다 해서 김 의장이 언론으로부터 매를 맞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나한테 항의라도 하려고 들어온 거 아니에요?”  “역시 총재님은 대단하시군요. 제가 아예 말을 할 수가 없게 만들어 버리시네…. 사실은 제가 기자들을 설득하느라고 진땀을 빼긴 했습니다. 뭐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지요.  세 야당 총재들간의 합의 사항을 제일 먼저 변질시킨 사람은 김종필 총재가 아니라 평민당 김대중 총재다. 당신들도 알지 않느냐. 김대중 총재가 지난 3월10일날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뭐라고 했느냐. 정권의 신임이 연계된 중간 평가는 헌법 위반 사항이므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게 바로 세 야당 총재의 합의를 변질시킨 것인데 이제 와서 합의 사항 변질의 책임을 우리 김종필 총재에게 덮어씌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김종필 총재의 선문답에는 항상 주석이 따랐다.  이에 앞서 노태우 김영삼 청와대 회담에서 김영삼 총재가 요구한 합당 방안은 무엇이었나. 당시 김영삼 총재는 방법은 오로지 합당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책 연합도 안되고 연정도 안되고 양당의 합당만이 오직 하나뿐인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삼 총재가 이렇듯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통일민주당 정책위 의장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이다.  “그거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 당시 김영삼 총재는 이른바 합당을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자선으로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먼저 민정당 간판을 내려라. 그러면 도와주겠다 이렇게 나온 거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합당의 주역은 당신이 아니라 나다. 따라서 당신은 내가 걸어 들어가는 길에 마땅히 꽃길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이런 뜻이다. 그것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으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박철언 보좌관은 평민당의 김원기 원내총무와 만나고 있었다.  김원기 총무가 말했다.  “결국 얘긴즉 이렇게 되는 것 같소. 민정당하고 통일민주당이 합작해서 평민당을 죽이기로 작심했다. 그렇지요. 박 보좌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박철언 보좌관이 대답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시방 뭐라고 했습니까, 김 총무?”  “몰라서 묻소?”  “그러니까 우리 민정당하고 통일민주당이 합작해서 평민당을 죽일라고 한다, 그 말입니까?”  “평민당이 아니라 물론 평민당도 그렇지만 우리 김대중 총재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김 총재가 죽으면 평민당은 따라서 죽게 돼 있는 거 아니겠소.”  박철언 보좌관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더욱 알아듣기 어렵네.”  “알아듣기 어려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습니다. 내가 시방 김 총무를 뭐하러 만나고 있습니까.”  김원기 총무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치미 떼지 마시오. 박 보좌관! 증거가 있어요. 그런데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 겁니까.”  “증거라니 무슨 증겁니까.”  “끝까지 실토를 안할 생각이구만. 그렇다면 나가 말해 드리지. 안기부에서 우리 김대중 총재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소.”  소환장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박 보좌관이다.  “안기부에서 소환장을 발부해요? 안기부에서 무신 일로 김 총재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습니까?”  “아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요? 알고 이러는 거요?”  “대통령이 모르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탁자를 내리치는 김원기 총무.  “다른 곳도 아닌 안기부에서 서경원이 밀입북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제1야당 당수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는데 이게 대통령이 모를 수 있는 일입니까?”  여기서 진술이다. 89년 6월21일 노태우 김영삼 단독 회담이 있었던 그 무렵의 정국 상황. 안기부 출신 P국장의 증언이다.  “6월19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를 초치해서 청와대 단독 회담을 열었다. 주의제는 역시 김 총재의 소련 방문의 경과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질적인 토의 내용은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이었다.  김영삼 총재가 소련을 방문하고 있는 약 20일 동안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정무수석실이 중심이 돼서 정계 개편 3당 합당의 세부적인 검토가 진행됐다. 그렇게 해서 작성된 정계 개편 방안 검토 보고서는 김 총재가 귀국할 무렵인 6월17일 경 홍성철 비서실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첫째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 이는 여소야대 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신민주공화당의 대국민 이미지에 문제가 있고 구 여권과의 합당이라는 면에서 또한 문제가 있다.  둘째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실현 가능성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실현될 수 있다면 국민 정서면에 명분이 있다.  셋째 평민당하고의 합당. 지역 감정 해소 측면에서 긍정적이며 바람직하다. 다만 두 당의 구성원 사이에 너무나도 큰 이질감이 있어 합당이 되더라도 융합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런 보고를 받고 노태우 대통령은 상당히 고심을 했다.”  여기서 진술자가 바뀌어 최창윤 당시 정무수석의 진술이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해서 노태우 대통령은 6월21일 김영삼 총재와의 청와대 단독 회담에서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통합을 제의했다. 보고서의 두 번째 항목은 실현되기는 어렵다. 단 실현될 수만 있다면 국민 정서면에서 명분이 있다. 이런 내용에 의거한 제의였다. 그런데 문제는 양당 제휴의 방법이었다.  노 대통령은 일단 양당간의 정책연합이나 연정, 연립정부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하고 있었다기보다 그것은 정계 개편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청와대 핵심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총재가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은 난감해졌다. 실제로 양당 합당의 경우 문제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민정당은 민정당대로 그리고 통일민주당은 또 그들대로 각기 반발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은데다 지난날의 여야, 여야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대치하는 적대 세력이 어느날 아침 합당을 해서 동지의 관계로 변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이래서 노태우 대통령은 번민에 빠진 것이다.”  다시 박철언 김원기 담판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나온 안기부 소환장 대목에서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김원기 총무는 사실 면담 처음부터 상기된 표정이었다.  “나가 오늘 박 보좌관을 만나자고 한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지난번에 박 보좌관이 민정당하고 우리 평민당의 합작을 제의했을 적에 양당간의 제휴가 왜 불가능한지를 충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나도 그랬고 우리 김 총재도 그랬어요. 그렇지요?”  박철언 보좌관은 왜 김 총무가 자기를 보자고 했는지 살피고 있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김대중 총재께 요청했지요.”  “무슨 요청이요?”  “그렇다고 이 일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계속해서 대화가 필요하니까 김 총재님을 대신할 수 있는 측근 중에서 누구 한 사람 지명해 달라.”  “그랬더니 김 총재께서 나를 지명했다 이 말이지요.”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대화를 해 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통일민주당하고 합작해서 평민당을 죽일라고 한다, 김대중 총재를 죽일라고 한다, 이기 대체 무신 말입니까?”  “그래 죽일라고 하는 기 아니면 명색이 제1야당 총재에게 소환장을 발부할 수 있는 겁니까? 당신 말대로 지금까지 우린 상당한 기간 양당의 합작 문제와 관련해서 대화를 해 왔어요. 비록 물밑에서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얘기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돌변해서 평민당 죽이기, 김대중 죽이기가 시작됐소.”  정치란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비록 김대중 죽이기, 평민당 죽이기로 비쳤지만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탄생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정계 개편의 주체들은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누구의 눈이 정확했는지는 금년 12월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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