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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재벌가의 신 황태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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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재벌가의 신 황태자</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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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5 Feb 200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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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재벌가의 신 황태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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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화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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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5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25/1046100003302930.jpg" alt=""/>    ▲ 신동빈 부회장이 회사관계자들과 함께 롯데 계열 유통업체를 직접 둘러보고 있다.  신동빈 부회장은 보통 가정의 가장처럼 가정적인 남편에 속한다. 그는 한국에 머무를 때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저녁시간에는 반드시 짬을 내 일본에 있는 아내와 전화를 한다. 물론 전화 내용은 그날 있었던 일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있었던 얘기 등 대개 일상적인 것이다. 요즘 신 부회장의 관심은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아들과 막내딸에 쏠려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장남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 신 부회장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길 바라고 있다. 장차 장남이 그룹의 사업을 이어받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반드시 자신을 이어 경영을 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다른 특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진로를 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신 부회장은 아직 아들의 국적문제에 대해 확실한 매듭을 짓지는 못했다. 신 부회장은 아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길 바라지만, 부친인 신격호 회장과도 이 문제를 깊이 상의해야 하고, 부인을 포함해 가족들과도 상의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현재는 가족들 간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오가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문제만큼은 아들의 생각을 우선시해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다.신 부회장의 가정적인 면은 부친 신격호 회장과 대조적이다. 신 회장은 사업에 바빠 거의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 줄곧 1개월씩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지냈다. 때문에 가족에 대해서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신 부회장은 부친의 이같은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국 땅에서 치열한 사업경쟁을 벌여 성공의 문턱을 넘기까지는 가족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신 부회장이 가족을 유난히 아끼고 챙기는 것은 부친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가족에게는 주고싶은 보상심리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 부회장은 부친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신 부회장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부친을 겁낸다. 물론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감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부친은 누구에게도 살갑게 대하는 성격이 아니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격호 회장은 5남5녀의 형제 중 맏이다. 때문에 신 부회장의 4촌형제는 20명에 이른다. 그러나 신 부회장은 4촌형제들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주로 일본에서 살아 가족간에 교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신격호 회장도 이런저런 이유로 형제들과 사이가 친밀하진 않다. 지금은 독자사업으로 재벌대열에 낀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과는 신격호 회장이 한국에서 사업을 벌일 때부터 창업동지 관계였다. 하지만 재산문제와 사업방향 문제로 갈라선 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왕래가 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춘호 회장과 신격호 회장의 마찰은 1970년대 중반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창업동지였던 두 사람은 중국 아서원 부지를 두고 마찰을 빚은 이후 갈라섰다. 그후 신춘호 회장은 식품업체인 롯데공업을 갖고 나가 농심으로 이름을 바꿔 성공했다. 신격호 회장의 형제 중에는 막내 남동생인 신준호 전 롯데건설 회장만이 형과 함께 사업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준호 회장은 얼마전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신격호 회장은 자식들에게도 드러나게 따뜻함을 표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자식들의 문제를 간섭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하지도 않는다. 신 부회장은 어려서부터 부친과 오랫동안 정답게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자식들이 어리광을 부려도 그냥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가족간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는 모친이 알아서 처리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25/1046100003302931.jpg" alt=""/>    ▲ 신격호 회장  신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 나선 지금도 부친과는 별로 만나지 않는다. 부친이 건재하기 때문에 조용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따금씩 부친의 다정다감한 가르침이 그립기도 하다.  부친의 경영수업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심전심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친은 어떤 문제든 처음부터 결론을 짓는 법이 없다. 신사업을 하기 위해 브리핑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몇마디 물어보는 게 전부일 뿐이다. 신 부회장도 장차 최고경영자가 되면 부친과 같은 경영을 해나가고 싶다. 부친은 참신한 생각을 매우 중시한다. 물론 과정과 결과도 중요시하지만, 훌륭한 생각이 앞서야 결과도 좋은 것이다.2000년 이후 롯데그룹이 동양카드를 인수하고, 많은 신사업을 추진하자 주변에서는 신격호 회장이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많았다. 팽창경영을 경계하는 신 회장의 경영마인드에 비춰볼 때 변화가 일고 있다는 시각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점은 신 회장의 경영관을 잘 몰라서 하는 말들이라는 게 신 부회장의 생각이다. 부친은 누구보다 공격적인 경영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신 부회장은 생각한다. 다만 부친은 사업을 추진할 때 남보다 많은 분석을 한다. 부친은 어떤 사업을 시작할 때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같은 예측을 하기까지는 객관적인 데이타와 상황분석을 근거로 한다. 때때로 전문경영인들이 회사업무를 보고할 때 매우 긴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친은 임원들이 경영내용을 보고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몇가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질문은 임원들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임원들이 놀라는 것은 사업전개 과정에서 부친이 던졌던 질문내용이 핵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1994년 무렵 신 부회장이 편의점인 코리아세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신 부회장은 편의점 사업을 만만하게 보았다. ‘백화점도 1등을 하는데, 편의점 쯤이야 거저먹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세븐일레븐은 이미 일본에서 승승장구한 사업이라는 점도 편의점 사업을 만만하게 생각한 이유였다.그러나 당시 이 사업에 대한 보고를 들은 부친은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편의점에 대한 현행 국내 법규상의 문제와 경쟁업체와의 차별성에 대한 것이었다.순간, 신 부회장은 아찔했다. 자신감에 충만했던 그는 그런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이후 지금도 부친이 질문했던 사항과 관련된 문제들로 애를 먹고 있다.신 부회장은 경영참여 이후 부친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고 있다. 때때로 자신도 부친처럼 미래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눈이 있을까 의문을 갖기도 한다. 신 부회장은 경영참여 초기에는 주변에서 부친 신격호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를 들었다. 그 중에는 대개 ‘보수적’이라느니, ‘돌다리 두드리기식 경영’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비판적인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친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내린 결론이라는 게 신 부회장의 생각이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롯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일등주의를 고집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재벌과 비교하면 보수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롯데의 생존방식이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친은 무슨 일이든 급진적인 변화를 싫어한다. 신사업을 하는 데도 그렇고, 임원 인사에서도 그러하다. 부친은 항상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할 수 있는 사업, 기존 사업과 연관된 분야를 중심으로 새 사업을 구상한다. 그렇지만 글로벌 감각을 접목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이 점에 대해서는 신 부회장도 동의한다. 일단 하겠다고 결정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치열한 기업세계에서 2등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게 부친의 가르침이다.1994년 코리아세븐을 인수해 편의점 사업에 뛰어든 것이나 1999년 로손을 인수해 대형화를 꾀한 것이 좋은 예다. 신 부회장은 부친의 가르침대로 유통과 식품사업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롯데의 파워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사업이 편의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편의점이라는 세포조직을 통해 유통업을 혁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해외업체들의 무차별적인 국내 진출을 고려할 때 편의점 네트워크를 대형화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로손을 인수한 배경이다.신 부회장은 디지털 문명시대에도 ‘풍요’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이라고 믿고 있다. 부친은 이것을 리버티(Liberty), 라이프(Life), 러브(Love)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세칭 3L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롯데의 기업이념이기도 하다.이 점에 대해 신 부회장은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3L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고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나름대로의 경영모델도 제시한다. 그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는 기술혁신은 곧 비즈니스로선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는 구체적인 사례로 전자상거래 원조라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들고 있다. “미국의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연간 수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리지만, 이중 20~30%는 배달이 안된다.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의 성패는 역시 어떻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본다.”일부에서 그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경영활동을 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글로벌 경영문화가 기업세계에 정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의 닛산자동차는 르노가 경영하고 마쓰다는 포드가 경영하지만 문제가 없다. 저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미국에서 3년을 공부하고 노무라증권에서 10년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신토불이식 경영을 고집하는 것은 글로벌 경영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이다.” 신 부회장은 오랜 외국생활에서 터득한 글로벌 경영마인드를 장차 한국 롯데 경영에 적극 접목할 생각이다. 물론 롯데가 내수 위주에 치중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어디까지 이루어 낼 것인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롯데의 과거 모습과 미래의 모습은 큰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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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화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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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8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8/1045495203302920.jpg" alt=""/>    ▲ 신동빈 부회장  신동빈 부회장은 정장 차림의 패션을 좋아한다. 평소에도 검정톤 계통의 양복과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다. 백화점 매장을 돌아볼 때도 그의 차림새는 변함이 없다. 신 부회장이 이처럼 의상에 신경을 쓰는 것은 노무라증권에 근무하면서 몸에 밴 체질 때문이다. 특히 런던지점에 근무할 때는 주로 상류층 고객을 대하는 업무를 담당해 정장 차림이 습관화됐다는 것이다. 신 부회장의 성격도 의상만큼이나 깔끔하다. 신 부회장을 잘 아는 재벌 2세 경영인이 전하는 말. “그는 매사에 군더더기가 없다. 심각한 사안도 그는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는 타입이다. 결론을 내리고 나서는 더 이상 토를 달지도 않는다.”  이런 성격 때문에 때로는 주변 사람에게서 ‘차갑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룹 임원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이해심이 많고 따뜻한 품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신격호 회장도 마찬가지다. 신 회장의 경우 외모에서 주는 이미지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싸늘함을 풍긴다. 그를 아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외모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롯데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 회장은 젊어서 타국(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했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역경을 딛고 성공하기까지는 남다른 냉정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재계 원로 경영인이 전하는 신 회장과의 에피소드 하나. “신 회장은 평소 말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언제, 어떤 자리든 필요한 말 이외는 거의 하지 않는 타입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화가 난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한번은 신 회장과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는데 1시간여 동안 단 두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아들인 신 부회장도 평소 말수가 적다. 그같은 모습이 때때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경계심을 갖게 한다. 물론 신 부회장의 표정이나 행동은 부친에 비해서는 한결 부드럽긴 하다. 사업에 대한 신 부회장의 생각은 부친만큼 명쾌하다. 다만 경영관에 있어서는 부친과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부친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라면, 신 부회장은 진보성도 갖고 있다.  이런 점은 그가 신사업 분야에 대해 비교적 공격적인 경영 의지를 보인 데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1995년 그룹 경영에 본격 참여한 이후 적극적으로 신사업 분야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1995년 이후 설립된 롯데로지스틱스, 롯데닷컴, 코리아세븐, 롯데정보통신 등은 그의 신사업 진출 의지가 담긴 회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룹 전체의 포트폴리오를 위해 동양카드, 미도파, TGI프라이데이 등 기존 기업들도 인수했다.  한국 재계와 가까워지기 위한 신 부회장의 행보는 신격호 회장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다. 그는 재벌 총수의 모임인 전경련 부회장으로 참여해 나름대로 한국 재계에 뿌리를 내리려 애쓰고 있다. 신격호 회장의 경우 그동안 국내 재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둬왔다. 신 부회장의 이같은 모습은 장차 한국 롯데의 경영을 맡게 될 것에 대비한 포석임은 물론이다. 미래를 위해 한국 재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인 것이다.  신 부회장이 부친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뿐만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경영인들이 모여 만든 ‘V소사이어티’라는 모임의 멤버로 가입한 부분도 그 중 하나다. V소사이어티는 차세대 젊은 경영인들이 모여 만든 사교클럽형 모임이다. 여기에는 최태원 (주)SK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이홍순 삼보컴퓨터 부회장, 이재웅 다음 사장 등 잘나가는 젊은 경영인들이 멤버로 가입돼 있다.  신 부회장이 이 모임의 멤버로 가입한 점에 대해 구성원들조차 뜻밖이라고 말한다. 신 부회장의 측근은 “콜롬비아대 출신 동창들의 권유로 가입하게 됐다”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신 부회장이 국내 재계의 비공식 모임에 멤버로 가입한 부분은 과거 롯데가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 모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나 이재현 CJ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등 급부상한 기존 재벌그룹 2세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왕보수’라고 할 수 있는 롯데의 차세대 경영인인 신동빈 부회장이 멤버로 가입한 것은 의미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그가 부친과 전혀 다른 경영관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그룹의 신규 사업 진출에 대해 “1, 2등을 할 수 있는 사업에는 적극 뛰어들지만 그렇지 않은 업종에는 섣불리 진출하지 않는다. 생소한 분야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게 되면 결국 사회적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지향한다는 얘기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8/1045495203302921.jpg" alt=""/>    ▲ 신동빈 부회장(왼쪽서 두번째)이 세븐일레븐 점포 개점행사에 참석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현대나 대우를 보세요. 공격적으로 여러 가지 분야에 진출했지만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대우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3년간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그의 사업관은 신사업 진출분야를 롯데가 강점을 가진 레저나 유통 분야에 집중하는 데서도 읽을 수 있다. 특히 편의점을 이용한 전자상거래 분야는 신 부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이다.  유통분야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유통 관련 저서인 라는 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물론 이 책은 여러 사람이 함께 썼지만, 핵심 내용은 신 부회장의 생각이 담겨 있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신 부회장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다. 신 부회장에게는 누이인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과 형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이 있다.  신영자 부사장은 신격호 회장과 노순화씨 사이에 태어났고, 신동주-동빈 형제는 신 회장의 둘째 부인인 시게미츠 하치코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신영자 부사장은 신 부회장보다 열세 살 위이고, 신동주 부사장과는 한 살 차이다. 신격호 회장의 첫 부인인 노순화씨는 신 회장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뒤 신영자 부사장을 낳고 젊은 나이에 작고했다. 때문에 신 회장은 엄마없이 자란 딸(신 부사장)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한국 롯데의 경영권이 신영자 부사장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는 관측도 많았다. 그러나 신 부회장이 그룹경영에 참여한 이후 신 부사장의 역할은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롯데그룹 관계자 역시 “신 부사장의 경우 롯데백화점 경영에만 참여할 뿐 전체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 계열사인 롯데백화점(롯데쇼핑)의 지분도 신동빈 부회장이 21.74%, 신동주 부사장이 21.73%를 보유한 반면, 신영자 부사장은 1.13%만 갖고 있다. 뿐만 아니다. 롯데제과, 롯데칠성 등 나머지 계열사의 지분도 신동빈-동주 형제가 훨씬 높다. 이런 때문인지 재계에서는 신 부사장은 한국 롯데의 차세대 경영인 레이스에서 사실상 처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물론 그룹내에서도 이미 신동빈 부회장 체제로 굳혀져 가고 있다는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신 부회장이 한국 롯데를 맡게 될 것인가 하는 점과 그가 한국 롯데를 맡으면 형(신동주 부사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하는 점에 쏠려 있다. 이에 대해 그룹 관계자들은 현상황에서 보면 ‘한국 롯데=신동빈, 일본 롯데=신동주’라는 경영구도가 굳혀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롯데의 내막을 뜯어보면 모태가 일본 롯데이긴 하지만, 현재는 규모면에서 한국 롯데가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자가 한국 롯데를 맡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차남인 신 부회장이 한국롯데를 맡게 된 부분은 당연히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 롯데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형(신동주 부사장)과 동생(신동빈 부회장)은 생김새와 성격이 매우 대조적이다. 외모가 아버지를 닮은 형의 성격은 학구적이고 소극적인 반면 얼굴이 어머니 쪽에 가까운 동생은 모험적이며 적극적인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사업가 기질면에서 신동주 부사장보다는 신동빈 부회장이 훨씬 적극적이란 말이다. 부친(신격호 회장)도 두 아들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역할분담을 했을 것이란 추측인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두 사람의 결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동빈 부회장은 1985년 6월 일본 귀족 가문 출신인 오고 마나미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의 중매와 주례는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총리가,축사는 나카소네 당시 총리가 맡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반면 형인 신동주 부사장의 결혼식은 조촐했다. 동생보다 7년이 늦은 1992년 3월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예식장에서 재미동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딸인 은주씨와 식을 올렸다. 그러나 식장에는 가까운 친지들만 모였다.  실제 한국 롯데의 경영을 보면 1990년대 중반까지는 신격호 회장이 주도했으나, 그 후부터는 신 부회장이 중심에 서서히 부상했다. 롯데쇼핑, 호텔롯데, 롯데월드,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등 주력 계열사는 아직 신 회장이 직접 챙기고 있으나, 신 부회장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 부회장은 금융과 국제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지난 1996년 초 그룹기조실 산하에 국제부를 신설토록 했다. 그는 현재 그룹의 해외사업과 관련해서는 기획단계부터 추진현황까지 총괄하고 있다. 신 부회장의 영향력이 그룹 안팎에서 가시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2월 그가 전경련 부회장으로 합류한 이후부터. 그는 전경련의 유통산업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차세대 리더로 대내외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이처럼 재계에 얼굴을 자주 내밀면서 그룹 내 활동 영역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러면서 안개속에 가려져 있던 롯데의 미래 경영구도 역시 조금씩 모습을 내비쳤다. 신 부회장에 대해 그룹 관계자들은 ‘실용주의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현실성이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말하기를 좋아한다. 또 공허한 얘기나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점은 부친인 신격호 회장을 빼닮았다는 게 주변의 말이다. 신 회장은 자신의 집무실에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문구를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다. ‘겉으로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충실함이 중요하다’는 의미의 이 글귀는 신 회장의 실용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신 부회장은 금융 분야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MBA를 취득한 후 곧바로 노무라증권에 입사한 뒤 8년동안 일했다. 롯데그룹이 동양카드를 인수한 것도 신 부회장의 생각이 크게 반영된 부분이다. 롯데그룹의 특성상 대부분 현찰 장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금융분야에 대한 그룹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다. 향후 그룹의 금융 관련 사업추진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현되진 않았지만, 한때 롯데그룹은 증권사 인수문제도 심각하게 검토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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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화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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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1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1/1044890403302910.jpg" alt=""/>    ▲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  프로필▲신상명세이름:신동빈출생지:일본본적:서울 용산구 청파동 1가직책:롯데그룹 부회장생년월일:1955년 2월14일부인:마나미(眞奈美)자녀:1남2녀▲학력-1977년 3월 일본 청산학원(아오야마)대학 경제학부 졸업-1980년 12월 미국 콜롬비아대 대학원 졸업(MBA)▲경력1981년 4월 노무라증권 입사1982년 2월 노무라증권 런던지점 근무1988년 4월 노무라증권 퇴사1988년 4월 일본 롯데상사 입사1990년 2월 일본 (주)롯데 이사1990년 3월 호남석유화학 상무1994년 8월 (주)코리아세븐 전무1995년 3월 일본 (주)치바 롯데마린즈 대표이사1995년 5월 호남석유화학 전무, 일본 (주)롯데리아 전무1995년 12월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부사장, (주)코리아세븐 부사장1996년 2월 호남석유화학 부사장1997년 2월 롯데그룹 부회장1999년 5월 (주)코리아세븐 대표이사2000년 1월 롯데닷컴 대표이사롯데가문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매스컴 기피증’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신격호 회장을 인터뷰하면, 그것만으로도 특종’이라는 소리까지 오간다. 이 점은 신 회장의 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롯데그룹의 차세대 경영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도 비슷하다.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 부회장은 지난 1997년 2월 그룹의 부회장에 오른 이후 6년째 접어들면서 재계 안팎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국내외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가진 적이 거의 없다. 몇차례 매스컴에 등장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공식적인 인터뷰는 아니었다. 롯데가 사람들이 왜 이처럼 극도의 매스컴 기피증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롯데 관계자들은 “대중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천성 탓”이라고 설명한다.그러나 롯데의 거의 모든 사업이 대중적이다. 롯데의 기반사업인 껌도, 과자도, 백화점도 모두 대중적인 소비재 품목이다. 그럼에도 정작 이를 만드는 회사의 경영인이 비대중적인 점은 아이러니다.굳이 따져보자면 신 부회장이 매스컴을 기피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한국말이 서툰 때문이고, 둘째는 롯데그룹의 설명처럼 수줍음이 많아서다. 다른 이유를 들자면 아직 부친(신격호 회장)이 건재한 것도 매스컴 기피증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신 부회장은 올해 48세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았다. 그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90년 3월 호남석유화학 이사로 발령난 뒤였다. 그후에도 지금까지 생활의 모든 근거지는 일본이다. 그의 부인과 세 자녀들도 모두 일본에 살고 있다.한국에서 그의 집무실은 소공동 롯데빌딩 26층과 혜화동 코리아세븐 본사 등 두 군데에 있다. 소공동 사무실은 그룹부회장 집무실이고, 혜화동 사무실은 코리아세븐 대표이사실이다.  신 부회장은 태어난 곳도 일본이다. 일본에서 자랐고, 대학까지 다녔다. 그는 지난 1977년 일본 아오야마(靑山)대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그가 전공한 분야는 경제학이다. 때문에 그의 한국어는 서툴 수밖에 없다. 반면 일어나 영어엔 능숙하다. 일본말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그의 영어 실력은 네이티브에 가깝다. 한국어에 서툴다 보니 언론이나 외부 사람을 만나기가 영 어색한 것이다. 그는 올해로 한국에서 경영인으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이제는 임원들이나 주변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이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그의 억양은 여전히 어색하다.신 부회장을 만나면 그가 매우 예의바른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항상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과 흐트러짐없는 옷맵시에서 스마트한 인상을 받는다. 그는 누구에게나 경어를 쓴다. 호텔 종업원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한다. 그룹 임원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신 부회장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일본풍이 배어있다는 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의 이같은 예의바름은 태생적 환경과 연관이 깊은 듯하다.신 부회장은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부인은 오고 마나미씨다. 신 부회장보다 네 살 연하인 마나미씨와는 1985년 6월에 결혼했다. 신 부회장의 결혼은 당시 한일 양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부인 마나미씨는 한때 일본 황실의 며느리 물망에 올랐던 명문가 자제였다. 그녀의 부친은 대형 건설회사인 다이세이건설 오고 요시마사 당시 부회장이었다.마나미씨는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대를 졸업했다. 신 부회장의 결혼은 후쿠다 전 일본수상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결혼식에도 나카소네 당시 수상을 비롯해 기시 전 수상, 후쿠다 전 수상 등 일본 정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해 이목을 모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11/1044890403302911.jpg" alt=""/>    ▲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결혼 당시 신 부회장은 일본 노무라증권 런던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큰아들을 낳았다. 이 때문에 신 부회장의 장남은 아직 한국과 일본, 그리고 영국의 3개 국적을 소지하고 있다. 신 부회장은 현재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는 국적을 하나만 선택토록 할 생각이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주변에 밝히기도 했다.신 부회장의 결혼에 가려진 숨은 얘기 하나. 신 부회장은 친형 동주씨(현재 일본롯데 부사장)보다 8년이나 먼저 결혼을 했다. 동주씨는 1993년에 결혼했다. 그는 재미교포인 조아무개씨와 서울 잠실롯데월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주씨의 결혼이 늦어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얘기가 있다. 롯데 관계자들에 의하면 동주씨의 경우 당시 아오야마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학업이 늦어져 불가피하게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됐다고 한다. 또 모친인 시게미쓰 하치고씨가 큰며느리는 한국 여성으로 보기를 원해 며느리감 물색에 시간이 걸렸다는 설명도 있다. 롯데가를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동주씨는 결혼문제로 부모와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부친 신격호 회장이나 모친 하치코씨의 큰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깊어 함께 살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신동빈 부회장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로 일본에 있다. 현재 일본 롯데의 전무로 있는 신 부회장은 일이 있으면 한국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출국한다. 부친인 신격호 회장이 한국과 일본에 한 달씩 번갈아 체류하면서 업무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이에 대해 그룹 관계자는 “신 부회장이 직접 경영에 관여하는 회사는 대표이사로 있는 롯데닷컴이나 코리아세븐뿐이다. 기존 그룹 계열사 경영은 현황보고를 받는 정도이기 때문에 굳이 한국에 오래 체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한국에서 머물 경우 시간이 날 때마다 경쟁사의 백화점이나 호텔을 혼자 둘러본다. 경쟁사 호텔이나 백화점의 진열상태나 접객요령 등을 꼼꼼하게 체크해 그룹 임원들에게 참고자료로 제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 부회장은 거의 모든 운동을 즐길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다. 골프는 물론 스키와 테니스 등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의 골프 실력은 보기(규정타수보다 홀당 1개씩 오버하는 것) 플레이어. 신 부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다. 그는 현재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즈의 실질적 구단주를 맡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신 부회장은 최연소 구단주로 꼽힌다.  신 부회장이 존경하는 인물은 소니그룹 창업자인 모리타 전 회장(작고)이다. 모리타 전 회장은 업무적으로 빈틈이 없었지만, 일을 떠나서는 부하직원들의 경조사까지 챙길 정도로 자상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 특히 모리타 전 회장은 전자산업 외길을 걸어 소니를 세계최대 기업으로 일구어 냈다.신 부회장은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 점은 부친에게서 타고난 듯하다. 신 부회장은 한때 독일의 문호 괴테의 시에 심취해 일부러 독일어를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격호 회장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을 따 그룹 명칭을 정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것은 잘 알려진 얘기.신 부회장의 주량은 와인 한잔 정도이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 직장인들이 즐기는 폭탄주에 대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위스키가 가진 고유의 맛이 없어진다는 게 폭탄주를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는 한국말도 익힐 겸 한국 노래를 배우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그가 노래방을 찾거나 회식 때 즐겨부르는 노래는 가수 박강성이 부른 ‘문 밖에 있는 그대’인 것으로 전해진다.신 부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겉보기엔 성격이 부드러울 것 같지만, 매우 강하다고 전한다. 업무처리도 뒷마무리가 완벽하지 않으면 매듭이 지어질 때까지 반복지시를 내릴 정도다. 신 부회장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88년 무렵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했다. 그는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MBA를 받은 후 노무라증권에 곧바로 입사했다. 1981년 4월에 입사해 만 7년을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한 신 부회장은 1988년 2월 퇴사한 뒤 곧바로 일본 롯데상사에 입사했다. 2년 동안 이 회사에서 근무한 그는 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발령을 받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그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호남석유화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는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다. 한국에 온 지 4년 뒤인 1994년 그는 편의점 회사인 코리아세븐의 경영에 참여한다. 평소 유통분야에 관심이 많던 그가 시작한 첫 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재계에서는 롯데의 차기 경영구도와 관련해 딱 부러진 예측을 하지 못했다. 한국 롯데는 동빈씨가, 일본 롯데는 동주씨가 맡을 것이라는 예측만 오갈 뿐이었다. 그러던 상황이 한국 롯데의 차세대 경영인은 동빈씨라는 등식으로 가시화된 것은 1997년 2월 정기인사에서였다. 신 부회장이 그룹부회장으로 선임된 것이었다. 이 인사는 그룹의 차기구도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후 신 부회장의 경영행보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부회장에 오른 이후 롯데닷컴을 설립하고, 이어 미도파, TGI프라이데이, 동양카드 등  굵직굵직한 사업체를 연달아 인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에 앞서 신 부회장이 그룹의 후계자로 세간의 눈길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사건은 또 있었다. 지난 2000년 말 터진 롯데호텔 농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성희롱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30여년 동안 쌓아온 롯데의 이미지를 일순간에 실추시킨 불행한 사건이었다.신 부회장은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살리는 데 앞장섰다. 그는 2000년 10월 그룹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전사적인 윤리경영을 선포했다. 당시 신 부회장은 그룹의 윤리경영을 총괄하는 윤리위원장을 맡으면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당시 재계에서는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의 회장 승계가 임박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사실 이때부터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신 부회장이 총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그러나 그룹 관계자는 이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다. 그룹 고위 관계자는 “아직 신격호 회장이 건재하신데, 신 부회장의 거취문제를 논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신 부회장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10년 전 아버님께서 ‘앞으로 20년은 더 하겠다’고 하신 적이 있으니 앞으로도 10년이나 남았어요”라며 조심스런 반응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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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5화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사장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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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4 Feb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04/1044285603302900.jpg" alt=""/>    ▲ 정의선 부사장(왼쪽)은 어릴 적, 할아버지인 고 정주영회장을 따라 곧잘 산행에 나서곤 했다. 지금은 아버지인정몽구 회장(오른쪽)과 가끔씩 서울근교 산을 오르며긴밀한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정의선 부사장의 가족사진 앨범에는 유독 부인인 정지선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많다. 부인과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이유도 있지만 그의 아내 사랑이 여느 사람 못지 않은 점도 작용한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부를 자주 사진기 앞에 서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정 부사장의 한마디. “연애시절부터 집사람과 함께 여기 저기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난 후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짬이 나는 대로 최대한 가족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요. 제가 원래는 사진 찍기를 즐기는 편이 아닌데, 그렇게 어렵게 낸 소중한 시간이니 만큼 그 순간을 기록하고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사진으로 남기는 게 이젠 버릇처럼 돼버린 것 같습니다.”정 부사장의 사진 속 표정에는 평범한 아빠이자, 가장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인자한 아버지로서, 자상한 남편으로서 행복을 숨길 수 없다는 표정이다.정 부사장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무뚝뚝해 보인다. 그러나 그와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돠는 달리 무척 다정다감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는 태생적으로 겉만 번지르한 형식이나 쓸데없는 격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가정적인 그의 성격도 그런 점에서 연유한다.정 부사장은 작년 12월에는 부인인 정지선씨와 두 자녀를 데리고 강릉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오죽헌에도 들르고 생전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즐기던 초당 순두부의 구수한 맛도 즐겼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그동안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아이들과 겨울바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점이었다. 정 부사장은 “가족들과 함께 자연을 호흡하고 나면 새로운 에너지가 몸과 마음속에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소 정부사장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부인과 함께 영화도 보고, 수영도 하고, 스키도 타는 등 가능한 한 자연을 많이 접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휴일이면 어디든지 떠나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도 생겼을 정도다. 정의선 부사장의 이러한 가족사랑도 현대가의 가풍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매일 아침 가족들과 청운동 자택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식사 자리에는 해외출장이나 사업상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정 명예회장은 언젠가 사석에서 ‘왜 아침식사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서 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아무래도 점심과 저녁은 사업상 밖에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침만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정 부사장은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한다. 그는 “겉보기에 할아버지가 사업에 전념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가족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하고 스스로 아기자기한 가족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고 강조한다. 부친인 정몽구 회장도 가정적인 면에서는 처지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정 회장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꾸준히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정 부사장의 ‘가족사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고 장기 출장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 가족에게 미안한 부분도 많다.그의 가정에 대한 생각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가족이고,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항상 그리운 곳도 바로 가정’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모든 힘의 근원이고 의욕의 원천이라고 그는 믿는다.아내와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도 정겹지만,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과 어머니인 이정화 여사, 그리고 누이 식구들과 함께 하는 나들이도 정 부사장에겐 퍽이나 기대되는 가족 행사 중 하나다. 정 부사장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가까운 계곡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밥도 해먹고, 물장난도 치던 풍경들이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다. 당시는 산에서도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있는 때였는데, 그때 가족들과 함께 구워먹던 삼겹살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정 부사장은 요즘 들어서도 가끔 부친과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을 오르곤 한다. 등산은 할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도 매우 즐기던 운동이자 취미생활이었다. 가끔 할아버지와 함께 등반을 하다보면 평상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어 좋았다. 등산을 하는 시간이 할아버지와 장손자의 대화의 장이었던 셈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204/1044285603302901.jpg" alt=""/>    ▲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아침식사를 매우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마찬가지로 정 부사장은 부친인 정몽구 회장과도 함께 산에 오르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기도 한다.정 부사장은 아버지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고, 존중해 주는 점이다. 일례로 정 부사장이 대학 졸업 후 미국에 가서 공부(샌프란시스코대)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고, 공부를 마친 뒤 현지 일본회사(이토추상사)에 취직해서 근무하겠다고 했을 때도 부친은 두말없이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사실 자식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더욱이나 정 부사장은 정몽구 회장에게 누구보다 귀한 외아들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고 열심히 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정 부사장은 지금도 부친이 자신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간섭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맡겨주지만 그만큼 어깨도 무겁고 책임도 강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방식을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사실 정 부사장은 요즘 아이들이 너무 과잉보호 속에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 그같은 부모들의 그릇된 행동이 자식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도 애들을 너무 감싸지 말라고 부탁하곤 한다.더구나 어른에 대한 공경과 예절을 모르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정 부사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다. 그래서 두 자녀에게도 늘 어른에 대한 존경과 상대에 대한 예절을 주지시키곤 한다.잘한 것은 확실하게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그때그때 지적해서 자신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아이들 스스로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옆에서 잡아주는 것이 부모의 참 역할이라고 그는 믿는다. 지금도 정몽구 회장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식구들이 모인다. 이제 집안에 어린아이들도 생기고 식구들도 많이 늘어 한번 모이면 무슨 잔치나 명절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렇게 식구들이 다 모이면 대화의 주제도 풍부하다. 가능한 한 회사 얘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 부사장은 집안 어른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경영인으로서 배울 것이 많다고 느낀다. 식구들이 모이면 가끔 윷놀이도 벌어진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서로 편을 갈라 윷을 던지고 말을 놓다 보면 각자 의견이 어긋나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궁리하고 상의해서 공동의 의견을 도출하는 것도 윷놀이 재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온 가족이 윷놀이를 즐기는 동안 정 부사장의 어머니인 이정화 여사는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한다. 정몽구 회장이나 정의선 부사장이나 음식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 성격이지만 특히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은 이 세상의 어느 별미와도 비교할 수 없다. 사실 이정화 여사는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정 부사장은 이를 어머니의 성격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정 부사장이 말하는 어머니 이정화 여사는 한마디로 ‘외유내강형’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이지만 그 속에는 범상치 않은 지혜와 소신이 숨어 있다고 정 부사장은 평한다. 정 부사장은 “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 중 한 분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평소 매사에 소신껏 판단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저는 어머니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습니다”고 말한다. 요즘에도 집안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을 챙기는 일로 보낸다는 이 여사는 가끔 출가한 딸들과 함께 외출하는 것이 유일한 나들이일 정도로 가정적인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외부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정 부사장은 시대는 변했지만, 어느 시대이건 어머니와 같은 현모양처형이 존경받을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고 있다.정 부사장이 가진 가정에 대한 소망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아이들이 탈없이 잘 자라 주고, 부모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 자신 역시 이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 건전하고 상식적인 사고와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정 부사장은 요즘 더욱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그는 2003년 1월 정기 임원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경영을 책임지는 핵심 포스트의 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2002년에 현대차그룹은 56조4천억원의 매출을 올려 삼성(137조원), LG(112조원)에 이어 매출 기준으로 재계 서열 3위에 올라섰다. 2000년 8월 현대그룹에서 분리, 독립할 당시 SK에 이어 재계 5위로 시작한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입증한 놀라운 저력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는 전년보다 15.6%나 늘어난 65조2천억의 매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투자규모도 전년 대비 65.5%나 증가한 5조2천3백억원으로 잡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여기에 그치지 않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2010년 세계 5대 자동차메이커 진입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이 원대한 야망의 중심에 정의선 부사장이 서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현대차가 글로벌 톱5로 가는 등정의 가장 중요한 베이스캠프로 정 부사장의 위상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 부사장은 ‘세계 5위의 자동차메이커’라는 목표가 양적 팽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질적인 성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부 의 질적 향상’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기업이 성공적인 외형을 갖추기 위해서는 내부에서부터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정 부사장은 “당장 몇 대의 차를 팔아 우리가 세계 몇 위를 기록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각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라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정 부사장의 경영관은 아직도 수치에 대한 논리로 경영능력을 평가하고 있는 한국 기업의 현실에 비춰볼 때 신선한 시각임은 분명하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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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5화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사장 (3)]]></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28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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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8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8/1043680803302890.jpg" alt=""/>    ▲ 정의선 부사장은 이미 현대차그룹의 운전대를 상당 부분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10월28일. 정의선 부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오토에버닷컴이라는 회사의 사무실이 강남에서 현대계동 사옥 10층으로 옮겼다. 계동사옥 10층은 지난 2000년 현대자동차가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되기 전까지 정몽구 회장의 사무실이 있던 층이다.  이 회사의 계동 사옥 입성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토에버닷컴은 현대그룹 계열사였던 현대정보기술이 담당하던 현대-기아자동차 전산관리 부문을 넘겨받아 만든 회사였다. 이 회사는 인터넷 전자상거래, e-비즈니스 사업 등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현대’는 보수적인 전통 기업이다. ‘현대’라는 이름에서 묻어나는 이미지는 중동의 사막을 누비던 중장비와 거대한 조선소 등 중후장대함이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현대자동차에서도 그런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자동차사업의 특성상 현대의 전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정 부사장은 젊은 경영인답게 현대자동차의 보수적 이미지를 벗는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보수적 경영방식만으로는 첨단화되고, 급변하고 있는 21세기 경영을 주도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동차의 생산에서 판매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첨단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에 나섰다. 현대카드, 캐피탈 등의 금융업, 오토에버닷컴 등 전자상거래 및 정보 서비스업 등을 기존 비즈니스에 접목시키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출범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부분 중의 하나가 IT 관련 사업의 진출이다. 오토에버닷컴 등 전자상거래 및 정보서비스업에 진출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오토에버닷컴은 출범 초기에는 인터넷을 통한 자동차 판매 사업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자동차 판매구조의 벽에 부딪쳐 온라인 판매사업을 포기(회사측은 잠정 연기했다고 밝혔다)하고, 대신 2001년부터 이 회사의 사업 포커스를 IT사업으로 전환했다.  이 회사는 현대자동차의 일반 관리 부문을 비롯해 생산, 구매 시스템에서부터 재무, 회계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모든 IT부문을 전담하고 있다. 현재 이 회사는 이같은 IT부문을 통합하는 ERP시스템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현대차그룹의 IT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정 부사장은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부상한 텔레매틱스에도 본격 참여했다. 그의 이런 일련의 경영활동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IT사업을 자신의 경영 시험무대로 선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부사장의 IT사업에 대한 야심은 원대하다.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오토에버닷컴이 현재는 그룹 계열사를 주고객으로 하고 있지만, 장차 자동차 관련 지식인프라를 바탕으로 사업범위를 협력회사로까지 확대해 세계 최대 자동차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국 사업장을 돌며 직접 몸으로 부딪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컴퓨터에 받는다. 이들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회사의 현업에 적용하며, 향후 IT사업의 전개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조용하지만 광범위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미세한 부분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1970년 10월18일 생인 정 부사장은 올해 만 33세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이지만, 그의 경영수업은 올해로 벌써 6년째에 접어든다. 그는 휘문고를 나와 1993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9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MBA)을 마쳤다.  그 후 그는 곧바로 일본계 회사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1999년까지 2년동안 근무했다. 그런 뒤 20세기가 저물던 1999년 12월 부친 정몽구 회장의 부름을 받아 현대자동차 이사(구매담당)로 정식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그는 입사 직후 구매총괄본부에 몸담았다. 경영을 위해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기초지식이 물품을 어떻게 조달하고, 이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2001년 3월 상무로 승진하면서 영업과 A/S 분야를 거쳤다. 현장을 파악한 뒤 경영 전반을 파악하는 수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같은 초기 수업을 받고나서 그는 2002년 1월 현대자동차 전무와 현대카드 등기이사로 본격적인 경영진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그룹내 주요 업무를 파악함에 따라 그는 2003년 1월 현대자동차 부사장으로 승진, 그룹경영의 전면에 나섰다. 다가올 ‘정의선 시대’를 향한 착실한 행보를 내딛기 시작한 셈이다. 현재 그는 현대, 기아자동차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기아자동차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8/1043680803302891.jpg" alt=""/>    ▲ 지난 2000년 임직원들과 함께 관악산에 올랐던 정 부사장(앞줄 가운데 흰색 셔츠).  그룹의 주요한 포스트를 거의 장악함에 따라 명실상부한 그룹의 차세대 경영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그룹의 금융계열사인 현대카드의 경영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재무, 금융 분야의 경험을 쌓고 있다. 금융분야는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물림인 듯하다. 주변에서는 “너무 많은 업무를 맡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원래 일을 좋아하고 즐기는 집안 내력”이라고 말한다. “일이란 열심히 한 만큼 보상을 받으므로 그만큼 솔직한 것이 없다”는 게 그의 ‘노동관’이다. 이처럼 맡은 업무가 많다보니 정 부사장의 근무지 또한 여러 곳이다.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는 물론이고 여의도 현대카드 사옥, 그리고 계동 현대사옥을 두루 돌며 집무를 보고 있다. 정 부사장의 업무현장은 이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 듯하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사업장을 직접 찾아간다. 부친인 정몽구 회장이 역설한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울산, 아산, 전주 등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은 물론이고, 전국의 A/S 사업장과 지역 판매 사업실, 지점, 물류센터 등을 돌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현장방문 일정에 반드시 직원들과의 대화시간을 마련한다. 오너 2세의 방문으로 잔뜩 긴장해 있던 지방 직원들도 허심탄회한 대화시간을 가지면 금방 자신들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의 이런 현장주의는 평소 부친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있지만, 생전에 할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보여준 경영방식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면이 강하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다녔던 고려대 도서관 건설현장에서 공사모를 쓰고 서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정 부사장은 사업현장의 분위기는 곧 직원들의 생각이므로 현장방문을 통해 직원들의 생각을 읽는 것이 경영의 기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현장에서 듣는 직원들의 소리는 자신이 보고 받은 것과는 일부 차이가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음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직원들의 소리와 보고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최대 공약수를 찾아 자신의 견해를 도출한다. 경영인은 어떤 의사결정이라도 한쪽으로 기우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정 부사장이 이처럼 현장 순회를 중요시하는 것은 현대자동차 특유의 기업 구조와 연관이 있다. 현대자동차는 종업원 5만여 명의 국내 초매머드 기업으로, 전국적으로 약 900여 개의 사업장이 퍼져 있다. 따라서 본사에 가만히 앉아서 생산현장의 경영을 주관한다는 것은 사실상 한계가 있다.  때문에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도 평소 울산공장과 전주, 아산 등 완성차 생산공장은 물론이고, 전국의 사업장을 직접 돌며 꼼꼼히 지시하는 등 현장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정 부사장은 알려진 것처럼 스포츠광이다. 그는 사업장 순회 중 그룹 산하 스포츠단인 전북현대 축구단, 기아타이거즈 야구단, 현대캐피탈 배구단, 현대모비스 농구단 등을 직접 방문하거나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한다.  울산모비스 오토몬스농구단 주장인 오성식 선수는 “바쁜 일정을 쪼개서 농구단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하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정 부사장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정 부사장은 선수들 사이에 최고 인기”라고 전했다. 정 부사장은 스포츠 관람은 물론이고 직접 뛰는 것도 즐긴다. 특히 그의 수영과 테니스 실력은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기간 중에는 가족과 함께 거의 전 경기를 직접 관람했다.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임원이 전하는 정 부사장의 매력. “정 부사장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조직을 하나로 모이게 하거나,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나누는 등 유연성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특성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의선 부사장은 상대를 끌어들이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그것은 상대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먼저 낮추고, 스스로 유연해짐으로써 상대 또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례로 정 부사장이 회사에 입사할 무렵 연구개발 부문과 영업본부 부문의 공동 미팅이 신설됐다. 연구개발과 마케팅은 서로 입장차이 때문에  회의를 가지면 자주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를 감지한 정 부사장은 공동 미팅이 끝난 후 뒤풀이 자리가 끝날 때까지 남아서 일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푸는 데 한몫을 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정몽구 회장은 아들인 정 부사장에 대한 주위의 평가에 대단히 민감하다. 정 회장의 성격이 사옥 주변의 조경까지 조언할 정도로 꼼꼼하다는 점에서 자신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야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정 부사장은 나이 탓인지 아직 외부 사람을 만나는 일에 대해 적잖은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그는 “외부인사를 만나는 일은 늘 긴장해야 하고,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몸조심은 자신에게 쏠리는 가족과 주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신독(愼獨)’의 마음 때문이다. 어느덧 공인의 위치에 올라있는 자신의 현재를 돌이켜볼 때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부담감도 그에게는 있다.   한국 재계도 경영 3세대의 전면 부상이 가시화됐다. 현대뿐만 아니라 삼성, LG, SK, 코오롱 등 대부분 국내 대기업에서 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 낳은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생사와도 연관된 중요한 전환기의 과정이다. 그 중심에 정의선 부사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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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5화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사장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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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21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1/1043076003302880.jpg" alt=""/>    ▲ 현대모비스 울산공장을 방문한 정의선 부사장 (맨 오른쪽)이 관계자로부터모듈라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스포츠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정 부사장이 기아야구단을 찾아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정의선 부사장은 타고난 ‘오토맨’이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동차 랠리에 참가할 정도로 차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는 지난 2001년 현대차가 시판한 ‘투스카니’ 출시 기념으로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벌인 투스카니 레이싱 행사에 참석해 직접 시승했을 정도다. 지난 2002년 현대자동차는 월드랠리(WRC:World Rally Championship) 에서 종합 4위를 기록해 세계 자동차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랠리 참가 3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당시 이 랠리에 참가한 차종은 현대자동차가 직접 개발, 생산한 베르나 월드랠리카였다.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경쟁업체들은 앞다퉈 요인분석에 나섰다. 분석 결과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차량 품질력과 기술력, 그리고 베테랑 드라이버 기용 등이 꼽혔다. 이와 함께 눈길을 끈 것은 정의선 부사장 등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이 개가를 올린 또다른 요인으로 지적됐다는 점이었다.  스포츠에 대한 정 부사장의 관심은 유별나다. 모터스포츠뿐 아니라 축구, 농구, 야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같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마케팅에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정 부사장은 한동안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닌 적이 있다. 청운동 근처 체육관에서 동창들과 농구경기를 하던 중 리바운드 볼을 잡으려고 점프하다 그만 친구와 다리가 엉켜버린 것.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다리가 낫자마자 곧바로 농구장이나 테니스장을 찾았다. 그에게 운동은 생활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학창시절 정 부사장은 수학과 역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의 틀을 습득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을 예측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면에서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심은 현재 회사경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소한 2∼3년 후를 늘 생각하고, 시대흐름에 맞춰 경영의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하는 경영인에게 필요한 기본소양은 논리력와 역사적 간접경험이라고 말한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부사장의 학창시절 모습은 조용하고 과묵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지금도 남 앞에 나서서 떠드는 것보다는 남의 말을 주로 듣는 편에 속한다.  고교 시절 친구들이 전하는 정 부사장에 대한 기억은 ‘아량이 넓은 친구’였다. 정 부사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나중에 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구정중학교로 전학을 가 졸업했다.  오산중학교 때의 일이다. 당시 그가 다니던 오산중학교는 한 반 60명중 절반에 가까운 30명 정도가 생활보호대상자일 정도로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양친이 안 계시거나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려운 학생도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 부사장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한동안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정 부사장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이 불편해했을 법도 하지만 부친(정몽구 회장)이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다. 정몽구 회장은 평소 아들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 부사장의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며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는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지금도 이들 친구와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 때문인지 지금도 정 부사장 주변에는 친한 친구, 선배들이 많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최태원 (주)SK회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터보텍의 장흥순 회장 등도 친한 부류에 속한다. 물론 친구들 중에는 재벌가 자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평범한 샐러리맨 친구도 많다. 친구들과는 시간이 없어 만나기 힘들면 짬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서로 안부를 묻거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정 부사장은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인생의 동반자로서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정 부사장의 고교 시절 단짝 친구가 전한 얘기. “정 부사장은 휘문고 재학 시절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은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테니스, 수영, 스키 등 운동에 소질이 많았고, 특히 클라리넷을 잘 불었어요. 교내 음악서클에 가입해 합주도 몇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 부사장은 의리가 강하고, 리더십이 뛰어나 주위에 늘 친구가 북적댔어요. 저도 정 부사장의 집에서 시험공부도 하고, 농구도 같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정 부사장이 정주영 회장님의 손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21/1043076003302881.jpg" alt=""/>    ▲ 투스카니 출시 기념 레이싱 행사 때 정 부사장은 직접 차에 몸을 싣기도.  한번은 제가 점심 도시락 반찬으로 초당두부를 싸간 적이 있었는데 정 부사장이 자신의 할아버지께서도 초당두부를 좋아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강릉 얘기가 나왔고, 정 부사장이 정주영 회장님의 손자인 걸 알았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죠. 오랫동안 짝으로 지내긴 했지만 정 부사장은 그런 사실을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거든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앞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참 괜찮은 친구다’ 하고 생각한 정도였어요.”  정 부사장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과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인과 아들딸(1남1녀)이다. 특히 그의 아내 사랑은 신세대 가장답게 유별나다. 정 부사장의 부인은 INI스틸(옛 인천제철)과 합병한 강원산업 정도원 회장의 장녀 정지선씨다. 두 사람은 지난 1995년 결혼해 올해로 결혼 8주년이 됐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지선씨는 정 부사장의 친구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두 사람의 연애 기간은 20년 가까이 된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교제를 가진 것은 정 부사장이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때에 지선씨도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오면서부터였다. 지선씨가 미국에 온 걸 안 정 부사장이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고 지내던 터라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졌다. 그 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었다. 본관은 달랐지만, 같은 성(姓)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정 부사장은 이러한 문제가 좀 걸리긴 했지만 집안 어른이자 할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지선씨를 인사시켰다. 지선씨를 찬찬히 살펴보던 정 명예회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동 정씨(정의선 부사장)와 김포 정씨(정지선씨)는 본이 다르니 혼사를 시켜도 괜찮다.” 뿐만 아니라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 자리에서 지선씨의 집에 전화를 걸어 일주일 후 약혼 날짜를 받아내는 등 적극적으로 정 부사장의 결혼에 나섰다. 평소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리면 강하게 밀어붙이던 정 명예회장의 추진력이 장손의 결혼날짜를 받아내는 데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정 부사장이 지선씨를 인생의 반려자로 맞게 된 것은 착하고 바른 그녀의 마음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똑똑한 여자보다 지혜로운 여자’를 동경하던 정 부사장에게 지선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던 셈이다. 정 부사장은 평소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바로 퇴근해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다. 주말에도 가급적 다른 약속을 자제하고 가족들과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든든한 조직”이다.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정 부사장으로부터 가끔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영화나 연극 티켓이 그것이다. 정 부사장이 직접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선물하는 것들이다.  정 부사장은 평소에도 직원들과 회식을 겸한 공연관람을 즐긴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직원들이라도 좋은 영화나 공연을 보면서 정서적인 여유를 가지도록 이런 방법으로 배려한다.  공연티켓은 가끔 그의 부인이나 어머니에게도 전달된다.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은 주부인 만큼 적당한 문화생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여유있고 풍요로운 정서가 생활에 활력이 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바른 생각의 유지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 못지 않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건강한 마음과 몸을 만드는 기본이 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한 정 부사장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MBA과정을 마쳤다. 그 후 뉴욕에 소재하고 있는 일본계 기업인 이토추상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미국과 일본의 문화를 함께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유학기간 동안 정 부사장은 전공 과목인 경영학 외에도 기업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덕목을 많이 배웠다. 그 중 하나가 ‘직원간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직원 상하간 열려 있는 사고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대화를 하는 그들의 문화는 최단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이루어내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기업의 경쟁력과 연결된다고 판단했다. 정 부사장은 어려서부터 자동차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유학기간 동안에도 가능한 한 많은 수입차를 접하며 그들과 현대차를 비교하고 분석했다. 일상생활에서 차를 이용하는 것 외에도 대학시절부터 직접 짐카나(경주용이 아닌 일반차량 경주종목) 경기에 참가할 정도로 자동차에 애착을 보였다. 가끔 입장료를 내고 일반인도 스피드를 체험할 수 있는 투어링카를 시승할 정도였다.  정 부사장은 해외 유명 자동차를 접하면서 품질이나 성능면에서 우리차도 충분히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랬고, 정몽구 회장이 그랬듯이, 정 부사장도 회사내에서 ‘일벌레’로 통한다. 그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에겐 따로 정해진 보고시간이나 회의시간이 없다. 그는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시간을 엄격히 정해놓고, 그것의 구속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회사에서는 일의 진행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급한 일이라면 별도의 보고시간을 마련하기보다는 바로바로 얘기하고, 즉석에서 결재를 받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다. 업무의 융통성,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그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기업 환경이다.  그런 점은 현재 그가 참여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차세대위원회’ 운영에서도 잘 나타난다. 차세대 위원회는 현대자동차 내에 과, 차장급 실무진으로 구성된 일종의 ‘주니어 보드’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회사 운영에 관한 실질적인 의견을 교환하는 임직원 커뮤니케이션의 장이다.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은 최종적으로 사장의 결재를 얻어 실무에 반영된다.  정 부사장이 이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사의 젊은 생각을 직접 듣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젊은 생각’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이가 젊은 직원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야말로 변화를 주도하는 ‘유연한 사고’를 말한다.  물리적 나이는 50대, 60대라도 생각이 젊고 유연하다면 오히려 풍부한 연륜과 경험은 기업경영의 훌륭한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적절한 경험, 거기에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결합된다면 훌륭한 아이디어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창출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이 모임에 직접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이유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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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5화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사장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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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4 Jan 2003 00:20:00]]></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14/1042471203302870.jpg"/>   ▲ 지난해 5월 기아자동차의 신차발표회에 참석한 정의선 부사장이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프로필▲성명 정의선(鄭義宣, Chung Eui-Sun)▲생년월일 1970년 10월18일 생▲학력1986년 2월 구정중학교 졸업1989년 2월 휘문고등학교 졸업1989년 3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입학1993년 8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영학사 학위 취득)1995년 9월 미 샌프란시스코대(University of San Francisco) 비즈니스스쿨 입학1997년 8월 동 대학 졸업(MBA 취득)▲경력1997년 9월~1999년 12월 이토추상사 뉴욕지사 근무1999년 12월&sim;2001년 4월 현대자동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2000년 3월&sim;2002년 12월 현대자동차 정보기술센타 부본부장(겸직)2001년 1월 1일 상무 승진2001년 4월&sim;2002년 2월 현대자동차 영업지원사업부장(겸직)2001년 4월&sim;2002년 12월 현대&middot;기아차 A/S 총괄본부 부본부장(겸직)2002년 1월 1일 전무 승진2002년 2월&sim;2002년 12월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2002년 2월&sim;현재 현대&middot;기아자동차 기획총괄부본부장(겸직)2003년 1월 2일 부사장 승진2003년 1월&sim;현재 기아자동차기획실장가계도조부：정주영(작고)조모：변중석부：정몽구 현대, 기아자동차 회장모：이정화본인：정의선처：정지선자：정성이자형：선두훈(의사)자：정명이자형：정태영(현대카드 부사장)자：정윤이자형：신성재(현대하이스코 부사장)2001년 3월21일 밤. 심야뉴스를 통해 전해진 &lsquo;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rsquo;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은 많은 국민들을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한국 재계에 우뚝섰던 거목 정주영 명예회장.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 건설, 소떼 방북 등은 그의 업적 중 단편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주인공인 그의 타계는 그래서 안타까움을 더했다.그의 타계 소식은 또다른 점에서 국민들의 마음 한편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복잡하게 전개되던 현대그룹 내부의 경영권 내분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정 명예회장이 타계했으니, 현대그룹의 앞날은 안개 속에 휩싸였다. &lsquo;누가 벼랑에 선 현대를 구할 것인가&rsquo;하는 것이 당시 한국 재계의 화두였다.2001년 3월25일 오전 8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나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운구행렬은, 가족과 국민들의 깊은 애도 속에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으로 향했다. 7백여 미터에 이르는 청운동 골목길은 새벽부터 시민들로 메워졌다. 시민들 중에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거나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정 명예회장의 장례행렬이 청운동 골목길을 지나갈 때 세인의 이목은 장례행렬 맨앞에 선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에게 쏠렸다. 침울한 표정으로 고인의 영정을 가슴에 꼭 껴안은 모습의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손이자 정몽구 현대&middot;기아자동차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사장이었다. 평소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아 낯선 얼굴이었지만, 정 명예회장의 영정을 들고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선 그가 현대가의 장자임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현대그룹의 미래를 찾으려 했다.정 부사장의 감회. &ldquo;할아버님의 영정을 들고 나오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장자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까요. 할아버님이 일궈놓으신 집안을 잘 이끌어가려면 아버님(정몽구 회장)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할머님(변중석 여사)께도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rdquo;그의 표정에는 비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ldquo;할아버님께선 평생 기업을 일구시느라 바쁘셨기 때문에 할머님은 적적한 시간을 보내시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사실 일에도 성공하고 집안 일도 완벽하게 건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워낙 효자이시지만, 저도 장손으로서 할머님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합니다.&rdquo;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하면서 무겁게 입을 연 정 부사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현대가의 장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정 부사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이지만, 백부인 몽필씨가 슬하에 딸만 둘을 남기고 작고해 정주영가의 장손이 되었다. 정 부사장의 부상은 어쩌면 운명적인지도 모른다. 현대건설이 매각되는 등 사실상 그룹이 해체된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현대가의 정통성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손주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손자나 손녀를 안아준다거나, 특정 손자를 챙기는 것은 삼갔다. 누구를 편애한다는 주변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정 명예회장도 유교적 전통과 보수적 가문의 풍토를 중요시했던 탓에 장손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다.그래서인지 정 부사장은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중 하나는 강릉에 갔던 일이다. 그는 강릉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테니스도 치고, 산에 오르며 진한 정을 나누었다.정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이는 성격이었다. 정 부사장은 어려서부터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몸으로 체득했다. 정 부사장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의 모습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과감한 추진력과 치밀한 계획성이 할아버지가 한국 최고의 기업 현대를 키워낸 원천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img alt=""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14/1042471203302871.jpg"/>   ▲ 지난 2001년 3월 별세한 고 정주영 회장의 장례 식 때 영정을 들고 청운동 자택을 나서는 정 부 사장. 아래는 생전의 정 명예회장과 함께한 정 부사장 부부.  정 부사장은 &ldquo;기업의 오너로서, 때로는 엄한 상사로, 그리고 때로는 자상한 형님처럼 솔직하고 진실되게 임직원들을 대하는 할아버지의 용인술은 하루 빨리 복제하고 싶은 부분&rdquo;이라고 했다.정 부사장에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할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면서, 기업인으로서는 그가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일 수도 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로서 현재 일선에 나선 현대가의 경영 3세대는 정 부사장을 비롯해 정몽근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작고한 정몽우씨의 장남인 정일선 비앤지스틸 부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이은 현대자동차는 1999년 정몽구 회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현대차는 품질 개선과 미국&middot;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 확보, 월드컵 마케팅을 비롯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바탕으로 2010년 세계 5대 메이커 진입이라는 야심찬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했다.그리고 하나하나 그 디딤돌을 마련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선 부사장의 입지는 더욱 무게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정 부사장은 사실상 그룹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고, 이에 발맞춰 그의 행보 역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정 부사장은 현대&middot;기아차 구매본부와 국내영업본부, A/S 총괄본부, 정보기술 센터 등에서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쌓고 있다. 단지 오너 2세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경영인으로서 자리매김 하기 위한 포석이다.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는 국내마케팅실 임원의 말. &ldquo;3년여 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면서 오너 2세라는 부담감보다는 멋진 파트너를 만났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울 거라 걱정했으나, 상당히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모든 면에서 합리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인간적으로 끌렸어요. 그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자이기 전에 요즘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예절바른 젊은이입니다.&rdquo;국내영업본부 직원이 전하는 에피소드. &ldquo;팀장급 이상 간부들의 회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정 부사장에게 먼저 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임원들을 모두 배웅하고 난 후에야 귀가했어요.&rdquo; 그는 회사내 복도에서 직원들을 만나도 늘 먼저 인사를 할 정도여서, 임직원들은 그를 가리켜 &lsquo;분위기 메이커&rsquo;로 부를 정도다.또 올해로 경영수업 5년째에 접어든 정 부사장은, 가끔 직원들과 구내식당을 이용하지만 대부분 점심은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가 사무실에서 혼자 때우는 경우가 많다. 이런 &lsquo;점심 때우기&rsquo;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미처 식당에 내려갈 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유학시절 몸에 밴 실용적 생활 습관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사실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은 선대인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정몽구 현대&middot;기아자동차 회장을 거쳐 정의선 부사장에게로 이어진 일종의 유전적 가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전의 정 명예회장은 다 해진 바지를 몇 겹으로 덧대어 입고 다니고, 오래된 낡은 구두를 사무실에서 실내화 대용으로 신었을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밴 기업인이었다.정몽구 회장 또한 회사에서는 꼼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지만 사석에서는 금방 허물없는 농담을 할 정도로 옆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푸근함을 가지고 있다. 정 회장은 지방사업장 개소식이나 야유회 등 행사에 참석할 경우, 심심찮게 직원들과 즉석 막걸리 파티를 벌일 정도로 서민적이다.특히 정 회장은 한번 맺은 인연과 의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정도로 신뢰를 중요시한다. 이런 신뢰는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와도 두텁게 이어져 현대차 협력업체 중에는 사업 초기 맺은 협력관계를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정 부사장도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정 부사장은 소주를 즐기고, 냉면과 김치찌개를 무척 좋아한다. 직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격식없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종종 갖는다.정 부사장과 가끔 술자리를 함께 한다는 직원의 한마디. &ldquo;정 부사장과 포장마차를 자주 가요.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오너 2세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정도로 격의 없고 솔직한 성격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좀 실망스럽기도 하지요.&rdquo;대부분 오너 2세라고 하면 뭔가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게 일반인들의 선입견이다. 특히 일부에선 재벌 2세에 대해 &lsquo;특혜받은 사람&rsquo;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 부사장을 아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의 캐릭터는 &lsquo;보통사람&rsquo;일 뿐이다. 모나거나 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얘기이다.정 부사장과 함께 근무하는 또다른 부서원이 전하는 얘기. &ldquo;정 부사장은 본인이 제안한 회식자리의 비용은 절대 회사 공금으로 처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번은 &lsquo;왜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느냐&rsquo;고 물었더니 &lsquo;내가 사는 술을 왜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느냐&rsquo;고 하더라구요. 일견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rdquo;현대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 부사장의 이런 모습은 &lsquo;결코 가장이 아니다&rsquo;고 말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나 정몽구 회장이 쉽게 범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게 된 것도 &lsquo;있는 그대로&rsquo;라는 소탈함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어쨌든 이같은 정 부사장의 소탈함은, 그가 직원들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큰 밑천이 되고 있다. 정 부사장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그와 업무적이든, 사적이든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ldquo;겸손하고 소탈하며 신중한 사람&rdquo; 이라며 신뢰를 보냈다.그의 또다른 특성은 어느 자리에서건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보다는 늘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다는 점이다. 군자의 덕목으로 꼽히는 &lsquo;경청의 미덕&rsquo;을 통해 그는 어쩌면 영원한 평행선으로 남을 수 있는 오너와 피고용자의 관계를 &lsquo;멋진 파트너&rsquo;로 승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최고경영자에 오르기까지 그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수없이 많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갈 많은 &lsquo;아군&rsquo;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대자동차의 향후 경영구도에 큰 힘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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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4화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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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07 Jan 2003 00:20:03]]></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07/1041866403302860.jpg" alt=""/>    ▲ 지난해 3월 과천 본사에서 열린 신입사원들의 ‘코오롱인 입문식’에서 환영사를 밝히고 있는 이웅열 회장.  이웅열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오너십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재벌 3세 경영인으로 꼽힌다. 그가 재벌 총수에 오른 것은 태생적 조건이 앞선다는 얘기이다. 그 역시 “운이 좋아 회장이 됐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특별한 내부 다툼없이 재벌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랐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벌 2, 3세 경영인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오랫동안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경영인처럼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은 그룹 회장에 오르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 회장이 (주)코오롱 사원으로 입사한 것은, 그가 만 21세가 되던 1977년 11월이었다. 당시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을 수료한 뒤, 군대에 입대하던 시기였다. 그는 최전방에서 3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를 했다.   이 회장의 입사 시기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당시 이원만 회장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한국폴리에스텔 사장을 맡고 있던 이동찬 회장과 창업 동지이자 이 회장의 삼촌인 이원천씨간에 경영권을 둔 신경전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동찬-이원천 숙질간의 경영권 다툼은 1972년에 시작됐다. 이동찬 회장이 그룹의 주력이던 한국나일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의 업무통합을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이원천씨가 두 회사의 업무통합을 반대한 것은 이원만 회장이 정계에 진출한 뒤 내심 코오롱의 경영권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회사가 통합될 경우 이원천씨의 기대는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분쟁에는 한국나일롱의 일본 합작선이던 도레이까지 가세한 데다, 임직원들도 편이 갈려 다투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4년 동안 계속된 이 분쟁은 1976년 이원천씨가 한국나일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의 지분을 돌려받고 그룹을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은 경영에서 완전히 퇴진하고, 대신 장남인 이동찬 회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넘겨 받았다. 1977년 1월의 일이었다. 코오롱그룹에서 독립한 이원천씨는 그후 세진레이온(나중에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원진레이온그룹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천씨는 원진레이온이 망하면서 사업에는 실패했다.  다른 얘기지만, 가족분쟁의 후유증 탓인지 이동찬 회장의 이복동생인 이동보씨도 1988년 계열사인 코오롱고속관광을 갖고 독립했다. 그러나 동보씨 역시 2002년 월드컵 휘장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나 사업에 실패했다. 어쨌든 이웅열 회장이 회사에 입사했던 1977년은 코오롱 기업사에서 보면 그룹의 정통성이 재정립된 시기였다. 창업 3총사인 이원만-이동찬-이원천씨간에 얽혔던 경영권 계승작업이 이동찬 회장 가계로 완전히 정리된 때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웅열 회장이 21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회사에 입사한 것은 향후 그룹의 경영권과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불안요소를 방지하겠다는 이동찬 회장의 뜻이 담긴 것이었다. 이는 가족간 경영권 다툼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웅열 회장은 입사 초기부터 경영수업을 받진 않았다. 그는 회사에 이름만 걸쳤을 뿐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들어간 것은 (주)코오롱 이사(뉴욕지사 근무)로 승진한 1985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아메리카대, 조지워싱턴대 등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이 회장은 1989년 7월 그룹기획조정실 실장(전무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룹경영권을 이양받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이후 7년 뒤인 1996년 코오롱그룹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그는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런 수업과정을 감안하면 이웅열 회장의 경영수업은 다른 재벌2세 경영인들보다 매우 탄탄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영인 이웅열’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인 게 사실이다. 그에 대한 재계 인사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의 얘기. “이 회장은 전문성과 결단력, 그리고 소탈함을 겸비한 CEO이다. 디지털시대인 IT분야를 선도할 경영자임에 틀림없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3/0107/1041866403302861.jpg" alt=""/>    ▲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방한한 미 HP사 피오리나 회장과만나 IT사업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정구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회장은 외모나 행동스타일, 사고방식이 후레쉬하다. 젊어서부터 경영에 몸담아온 그는 넓은 시야와 전략적 사고, 견실한 실천력을 지니고 있다.” 이 회장은 주변에서 자신을 ‘미스터 씨브이씨(CVC)’로 불러주길 원한다. CVC란 ‘Chief Vision Creator’의 약자로, ‘비전 창조 경영인’이라는 말이다. 미래를 꿈꾸는 젊은 경영인다운 발상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경영인들이 범하기 쉬운 ‘리스키(risky)’함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전문 경영인들의 뜻에 반해 지나치게 자신의 경영방식을 고집하는 ‘독선적인 면’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코오롱그룹에는 총수는 있어도, 전문 경영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일부의 시니컬한 평가도 그런 점에서 연유되는 듯하다. 이 회장의 강한 개성이 전문경영인들에게 압박감을 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는 이 회장이 ‘끼’를 강조하는 등 신세대적인 경영감각을 중요시하는 반면, 섬유위주로 성장해온 그룹임원들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문화가 남아 있어 신구의 조화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회장 스스로 ‘관료주의 타파’를 선언한 데서도 코오롱 내부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코오롱은 40대 총수에 의해 경영이 주도되고 있음에도 젊고 참신함보다는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이는 코오롱의 태생적인 역사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코오롱은 지난 1954년 고 이원만 창업주가 개명상사(코오롱상사 전신)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출범, 올해로 창립 49주년이 된다.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은 경북 영천의 만석꾼 집 아들이었다. 당시 세간에는 ‘영남 갑부는 이원만, 호남 갑부는 김성수’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원만 회장은 6&#8226;25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나일롱이라는 회사를 세웠고, 이 회사는 전쟁특수를 타고 그를 돈방석 에 앉혔다. 코오롱이라는 이름은 한국(Korea)과 나일론(Nylon)의 영문을 합친 것이다.  코오롱은 4&#8226;19혁명이 일어난 직후 3백20만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받으면서 한단계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코오롱의 신청금보다 40만달러나 많은 DLF차관을 승인해준 사람은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부흥장관이던 신현확씨였다. 이 돈을 발판으로 코오롱은 당시 5&#8226;16쿠데타와 함께 대부분의 재벌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위기를 맞았던 것과는 달리 나일론 원사생산 공장 설립에 투입, 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이 공장은 나일론 경기가 퇴조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까지 코오롱에게 꽃놀이를 즐기도록 만든 밑천이 됐다. 이렇게 쌓은 부를 바탕으로 이원만 회장은 정치에 몸을 담았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다.  1977년 우여곡절 끝에 그룹 경영권을 받은 이동찬 회장은 공격경영을 펼치진 않았다. 그가 공격경영에 나서지 않은 것은 1970~80년대 화섬사업 경기가 워낙 좋았던 데다, 무리한 경쟁을 싫어하는 성격도 작용했다. 여기에 이동찬 회장의 성격도 꼼꼼해 안정과 내실을 전제로 한 ‘마라톤식 경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룹 이미지를 보수적으로 느끼게 했다. 물론 이동찬 회장은 80년대 초반 인조실크 단연사, 극세사 등 신소재 섬유를 개발하고, 스포츠용품사업과 제약사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룹경영 전면에 나선 이웅열 회장에게 주어진 첫째 과제는 그룹의 보수적 구조를 깨는 것이었다. 그룹부회장 시절 그의 주도로 (주)코오롱정보통신이라는 회사가 세워진 것도 그런 부분의 하나였다. 이웅열 회장은 1991년 2월 그룹부회장에 오르자마자 제2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하는 방안을 짰다. 그 결과  제2이동통신 사업자인 신세기통신에 포스코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그룹 내에서는 이 회장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이웅열 회장이 추진한 통신사업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당초 꿈을 갖고 투자했던 신세기통신 지분을 IMF사태로 빚어진 그룹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1조6백91억원을 받고 모두 처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회장의 등장으로 코오롱그룹 내부에 뭔가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한 변화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지금도 그룹의 전통적 사업구조와 틀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젊은 경영인답게 자신의 목표를 21세기의  화두인 IT사업에 맞추고 있다. 그는 재계의 젊은 2세 경영인들 중 최태원 회장과 함께 가장 많은 IT 관련 벤처기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 대기업과 벤처를 묶는 신경영의 틀을 짜야 한다는 게 현재 그의 사업관인 듯하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시대를 열기 위한 경영철학을 수립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창업주 시대의 경영철학으로는 급변하는 21세기의 경영환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 회장이 새로운 환경에 맞춘 철학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는 1997년 말 불어닥친 IMF사태 때문이다. IMF사태는 한국의 모든 재벌에게 신경영 시스템을 요구했다. 이 회장도 그같은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룹회장에 오른 뒤 2년 만에 닥친 IMF는 그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옛 경영의 잔재로 남겨진 1조원대에 이르는 부채는 그룹의 생존을 위협하는 칼날이었다. 그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 남보다 먼저 알짜배기 재산을 팔아야 했다.  IMF사태 직후 몇몇을 제외하면 코오롱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형제와 같던 임직원을 회사에서 내보냈다. 또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알짜 회사를 팔았다. 그는 이런 아픔이 재연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경영 시스템과 신경영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 ‘비전 창조 경영인(CVC:Chief Vision Creator)’이라고 칭하면서, 일등주의인 원앤온리(One&Only), 리치 앤 페이머스(Rich & Famous) 등의 경영철학을 만들었다. 어쨌든 이 회장의 현재 모습은 과거 코오롱의 보수적 이미지와는 다르다. 딱히 그것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새 활로를 찾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의 이런 움직임에 재계가 주목하는 것은 차세대 총수군의 선두격인 그가 어떤 성과를 보이느냐 하는 점이 향후 한국 재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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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4화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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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9/1041088802302840.jpg" alt=""/>    ▲ 임직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고 있는 이웅열 회장. 활달한 성격을 타고난 이 회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도전적인 자세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걸어온 길▲생년월일：1956년 4월18일▲주  소： 서울 성북구 성북동 ▲본  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4▲학  력：1975. 2   서울 신일고 졸업        1977. 3   고려대 경영학과 수료        1983. 2  미국 아메리카대 졸업(경영학 전공)        1985. 2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원 졸업(MBA)▲경  력：1977.11  (주)코오롱 입사        1985.2  (주)코오롱 이사(뉴욕지사 근무)        1986.2  (주)코오롱 도쿄지사 근무        1987.1  코오롱그룹 아주본부장        1987.7 (주)코오롱 상무이사        1989.7 코오롱그룹 기획조정실장(전무)        1991.2  코오롱그룹 부회장        1994.7  (주)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1996.1 코오롱그룹회장 취임가계도▲조부：이원만 창업주(작고)▲조모：이위문(작고)▲부：이동찬(81) 코오롱 명예회장▲모：신덕진(79)▲자：경숙(56)▲자형：이문조(62) 영남대 교수▲자：상희(53)▲자형：고석진(작고)▲자：혜숙(50)▲자형：이동혁(55) 고려해운 사장               ▲자：은주(48)▲자형：신영철(52) 재미 의사              ▲본인：웅열(46)▲부인：서창희(42)▲매：경주(43)▲매제：최윤석(43) 브릿지증권 한국지사 전무▲장남：규호(고3)▲장녀：소윤(중3)▲차녀：소민(중1)‘신구(新舊) 조화’, ‘보혁(保革) 화합’. 이 말들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했던 모양이다. 고대 유물에도 ‘요즘 젊은 것들’이란 표현이 있다고 한다. 최근 한국 재계도 이 문제에 봉착해 있다.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를 지배해온 오프라인 경제활동의 근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른바 e-비즈니스라는 새로운 경제개념이 등장한 때문이다.e-비즈니스의 등장은 전통적 사고를 지닌 경제인들을 궁지에 몰고 있다. 낯선 컴퓨터 용어와 신조어 앞에 옛 사고를 가진 경영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1백원을 투자해 만든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들고 다니며 팔아 1백10원을 버는데 길든 옛 경영이 왠지 시대에 뒤처진 것 같고, 입지가 좁아지는 느낌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도대체 얼마나 벌 수 있는지도 모르는 사업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쾌척하고, 투자금은 또다른 투자로 승수효과를 내며 불어나는 점이다. 옛 경영인들은 번개처럼 내달리는 경영환경의 급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심각한 박탈감에 빠졌다.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이같은 변화의 선두에 선 신경영인으로 꼽힌다. 이 회장의 올해 나이는 46세.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그의 경영마인드는 글자 그대로 ‘첨단 신세대’다. 그는 재벌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에서도 ‘e-비즈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사실 이웅열 회장이 신경제의 첨단에 서 있는 점은, 코오롱의 기업 역사성에 비춰보면 매우 아이러니해 보인다. 코오롱은 비록 규모면에서 재벌 서열 20위권이지만, 한국 재계의 대표적인 전통 재벌에 속한다. ‘나일론’ 화학섬유를 팔아 부를 축적했고, 지금도 섬유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코오롱의 사업 구조상 이 회장이 ‘e-비즈’를 주창하는 게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지금도 코오롱의 경영인들 중에는 이 회장의 e-비즈론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없지 않아 보인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이 회장은 ‘청바지와 곡괭이론’을 들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주)코오롱이 원사를 만드는 회사라고 해서 인터넷과 관련이 없습니까. 원료 구매과정만 해도 인터넷을 이용하면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습니까. 미국의 골드러시 때 금광을 갖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청바지와 곡괭이를 만드는 회사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청바지와 곡괭이 제조회사가 바로 인터넷과 IT사업인 것입니다.“  신경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웅열 회장의 집안은 대대로 남자 손이 귀한 편이다. 코오롱그룹 창업주이자, 이 회장의 조부인 이원만 회장도 외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만 두었고, 자신 역시 1남5녀의 외아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회장은 스스로 자신이 그룹을 물려받은 것에 대해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외아들이라는 행운 때문”이라고 자주 말한다.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다섯명의 누이들과 자랐지만, 오히려 그의 성격은 여성적이기보다는 남성적인 것을 좋아했다. 특히 구기운동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축구, 야구, 테니스, 탁구 등 운동이라면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운동광이었다. 그는 커서도 당구, 골프 등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한번 시작하면 웬만한 프로 수준이 될 때까지 끝장을 볼 정도로 열심이었다.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 198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 이 회장은 골프에 흥미를 느껴 일주일 동안 미국 PGA 선수들이 훈련받는 골프 스쿨에 입학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매일 새벽 5시반에 일어나, 하루 3천~4천개의 연습공을 쳤다. 1주일간 2만5천개 가량의 공을 쳤으니 손바닥이 갈라져 진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반창고를 붙이고 계속 연습했다. 이런 탓인지 이 회장의 요즘 골프 핸디캡은 ‘3’. 웬만한 프로선수에 못지 않은 실력이다. 이 회장은 재계 내에서 골프를 잘치는 재벌총수 3인방 중 한 사람에 꼽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9/1041088802302841.jpg" alt=""/>    ▲ 지난 96년 회장 취임식에서  아버지인 이동찬 명예 회장과 함께 손을 맞잡아 들어보이는 이웅열 회장.  그는 골프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업무와 관련해서도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면 상대방을 몇날몇일동안 지겹도록 붙들고 늘어져 성공하고 만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의 별명을 ‘3박4일’이라고 붙였을 정도다.그의 학창 시절 친구들은 “웅열이는 짠돌이였다”고 기억한다. 재벌집 아들임에도 그는 친구들에게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이 회장 집안의 가훈이 ‘근검, 절약, 약속’인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부친 이동찬 명예회장은 이 회장이 학교에 다닐 때 한번도 용돈을 풍족하게 준 적이 없었단다. 모친 신덕진 여사도 외아들인 이 회장에게 “남자가 돈을 쓰고 바보 소리는 듣지 마라”며 돈의 귀중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가훈인 근검, 절약, 약속의 세 가지 덕목은 장성한 지금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회장은 지금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약속을 잘 지키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통한다.이 회장의 성격은 한마디로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도전적이다. 그의 이런 사교성과 승부를 보는 도전적인 성격은 사업을 해나가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부친 이동찬 명예회장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명예회장은 평생 경영에서도 ‘인정과 의리’를 중요시했다. 부친이 ‘내실위주 경영’을 중시했다면, 이 회장은 ‘도전경영’에 초점을 둔다.그의 이런 성격은 조부 이원만 창업주(1992년 작고)의 성품과 매우 닮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참의원을 지냈던 이원만 창업주는 호방한 성격으로 대외 활동을 많이 했으며, 당시 박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동찬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웅열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하여 할아버지(이원만 창업주)를 많이 닮았다”고 술회했다.이 회장은 효심이 깊기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도 그는 이원만 창업주 시절부터 살아온 성북동 자택에서 부친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출장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식사는 반드시 부모님과 함께 할 정도이다. 1956년 생인 이 회장은 원숭이띠다. 또 혈액형이 O형인 그의 별자리는 양자리. 그의 별자리는 ‘천부적 재능과 함께 거칠고 격렬한 모습과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함께 지녔다’고 한다.신일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이 회장은 2학년을 마치고 현역으로 군에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하면서 그는 (주)코오롱에 입사했다. 그는 최전방 일선에서 사병으로 3년 동안 복무했다. 제대 후 1979년 대학에 복학했으나, 때마침 터진 10·26사태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해 가족과 상의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아메리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조지워싱턴대에서 MBA를 받았다. 그후 1985년 (주)코오롱 이사로 승진한 뒤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도쿄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그룹기조실장으로 본격 경영수업에 들어간 그는 1991년 그룹부회장, 1994년 (주)코오롱 대표이사, 1996년 그룹회장에 올랐다. 그룹회장에 취임할 당시 그의 나이는 만 40세였다.이 회장은 아메리카대를 졸업하던 1983년 벽지 전문 생산업체인 동남갈포 서병식 회장의 외동딸인 서창희씨와 결혼했다. 창희씨는 이 회장보다 4살 아래였다. 창희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결혼 후 창희씨는 대외 활동보다는 조용히 집에서 자녀 교육과 남편 내조를 하고 있다. 이 회장 부부의 만남은, 이 회장의 큰 누나인 경숙씨 소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주례는 신병현 전 총리가 맡았는데, 신 전 총리는 이 회장의 넷째 누나인 은주씨의 시아버지였다.이 회장은 장남 규호, 장녀 소윤, 차녀 소민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남과 장녀는 현재 영국에 유학중이어서 막내 딸과 살고 있다. 이 회장은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부친으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인 ‘근면, 절약, 약속’의 세 가지 덕목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자녀들의 용돈도 철저하게 중류가정 이하 수준으로 주고 있다. 본인이 그렇게 자라왔듯이 아이들에게도 돈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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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3화 LG그룹 구본무 회장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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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2/1040484002302830.jpg" alt=""/>    ▲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HP사 피오리나 회장을 접견하고 있는 구본무 회장.  미국 경제잡지 는 1996년 8월12일자에 구본무 회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특집기사를 실었다. “구본무 회장은 1995년 2월 한국 3대 재벌인 LG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전 그룹의 이름을 현대적인 이름인 LG로 바꾸었고, 취임 후에는 그룹의 임원들을 GE나 모토롤라에 파견시켜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배워오도록 했다. 그는 취임 후 임원들이 매출뿐 아니라 자금융통에 관해 힘든 목표를 달성토록 촉구했다. 그리고 옛날식 안이한 경영스타일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골프와 탐조를 즐기는 구 회장은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관리자들과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기를 즐긴다. 하지만 때론 필요에 따라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실례로 구 회장은 몇몇 계열사에서 경영계층을 10단계에서 3단계로 대폭 축소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의 이 기사는 구본무 회장의 경영관과 성격, 스타일을 압축한 것이었다. 그는 ‘컨트리스타일’의 털털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경영과 관련해서는 단호하고 과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의 장점은 남을 속이는 상혼(商魂)이나 상술(商術)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LG그룹의 회장에 오른지 만 5년이 된 2000년부터 자신의 경영관을 정도경영과 일등주의라는 두 가지로 압축했다. 물론 이같은 경영관이 그에게 새삼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룹회장에 오른 이후 줄곧 이같은 경영관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다시 이를 강조한 것은 IMF사태를 거치면서 겪은 쓰디쓴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IMF사태가 몰아친 직후 다른 재벌과 마찬가지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는 등의 끝없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다. 당시 그는 그룹의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김기영 연세대 경영학과 석좌교수의 구본무 회장에 대한 회고.  “과거 LG그룹의 이미지는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IMF 사태를 겪으면서 LG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LG는 유연한 기업문화를 새롭게 창출하면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바로 그 변화의 중심에 구본무 회장이 서 있다. 구 회장은 소탈하며, 꾸밈없이 담백하고 말과 행동이 한결같은 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성장의 모멘텀을 만드는 능력과 위기를 관리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구 회장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언제나 한결같다.”  구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외양만 번지르하게 포장하는 위선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말한 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가 ‘약속을 꼭 지킨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그의 정도경영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정을 배격하고,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그의 정도경영은 ‘규칙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Rule)’이 요체다. 이 원칙은 경영정책 결정의 민주화, 형식주의의 배격, 인본주의 경영 등 세 가지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본무 회장이 금성사 임원으로 재직할 때 함께 근무했던 경영인이 전해준 얘기. “처음에는 그룹회장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대하기가 거북했지만, 털털한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허물없이 지내게 됐다. 특히 부하 직원들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실수를 잘 감싸줘 직원들 사이에서는 ‘본무 이사 밑에서 일하면 편하다’는 농담까지 오갈 정도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22/1040484002302831.jpg" alt=""/>    ▲ 연구개발현황 보고회에 참석한 구 회장이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구 회장은 2002년 신년벽두부터 계열사 임원들에게 ‘일등주의’라는 새로운 경영모토를 제시했다. 구 회장이 강조하고 있는 ‘일등주의’는 글자그대로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등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최근 산업 추세는 시장 점유율 상위 3대기업이 시장을 좌우하는 빅3 구도가 뚜렷해지고 있다. 계열사별로 경쟁회사를 제압해 시장에서 일등으로 평가받는 ‘이기는 경영’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물론 어느 기업이든 ‘최고’가 된다는 것은 지상목표이자 과제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독 구 회장이 주창하고 나선 ‘일등주의’가 관심을 끄는 것은 LG그룹의 기존 이미지가 도전적이거나 모험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것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구 회장의 일등주의는 과거와 다른 도전정신과 모험주의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LG그룹의 기업사를 보면 모험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재계 관계자들 중에는 LG그룹을 가르켜 ‘행운의 기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LG그룹은 초기부터 묘하게도 손댄 사업마다 독점적 성격이 강했고, 개발한 제품이 히트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럭키크림의 탄생과 크림원료 독점 신화, 플래스틱 용기제품 대박, 럭키치약 빅히트, 진공관식 라디오의 성공 등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들과 맞물려 그때마다 LG그룹을 돈방석에 올라앉게 했다. LG그룹은 창업 10주년이 되던 1957년에 재벌순위 10위권에 들었고, 20주년이던 1967년에는 재계랭킹 1위에 올랐다. 당시 막강한 재력을 자랑하던 삼성그룹, 한국화약그룹, 삼호그룹, 개풍그룹 등을 제친 것이다. LG그룹이 재계랭킹 수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호남정유를 수중에 넣은 것이었다. 1965년 제2정유공장 공모경쟁에서 LG그룹은 한국화약, 롯데, 한양학원, 판본방적 등 당시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은 재벌들을 물리치고 행운을 잡은 것이다. LG그룹이 호남정유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지목됐던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사건’이라는 한비사건에 휘말려 수주전에 나서지 못한 것이 LG그룹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제2정유업자 신청에 나선 LG그룹이 정유공장 부지를 여수에 마련한 점이었다. 이는 당시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남지역 푸대접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당시 재계에서는 LG그룹이 제2정유사업자로 선정된 배경에 서정귀 전 호남정유 사장의 물밑지원이 있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실제 서정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후배로 나중에 5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당시 재계의 막후 실력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재계 관계자들은 LG그룹이 막강한 재벌들을 제치고 제2정유사업권을 따내자 “남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손댄 사업마다 행운을 잡는 재복(財福)있는 기업”이라며 부러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이같은 성공은 LG그룹의 기업문화를 보수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는 평가가 많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LG그룹은 재계서열 5위권 밖으로 벗어난 적은 없다. 그러나 LG그룹은 1980년 재계랭킹 1위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수위자리를 재탈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현대나 대우 같은 신흥재벌이 급부상한 것도 원인이지만, 독과점에 익숙했던 LG그룹의 보수적 사업성향이 더 큰 원인이었다. 독과점에 가까웠던 비누와 치약사업, 라디오와 TV사업, 그리고 정유사업으로 막강 재벌이 됐으나, 주력사업 부문에서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면서 흔들렸다. 특히 삼성그룹이 전자사업에 진출한 것은 LG그룹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전자부문 시장을 두고 LG그룹이 30년 가까이 삼성그룹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LG그룹의 보수성은 독점적 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강한 ‘수성(守城)’심리에서 비롯됐다는 게 재계의 해석이다. 1981년 발효된 독점규제법은 모든 사업에 대한 거센 도전을 불러와 LG그룹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구본무 회장의 ‘일등주의’는 바로 이같은 과거의 경영정책을 탈피하는 것이다. 그가 ‘과거의 안이한 경영관행에서 벗어나 도전적인 경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배경이다. 구 회장의 경영목표는 LG그룹이 ‘세계 빅스리’의 대열에 드는 것이다. 그는 2002년 신년 인사에서 이 목표를 자신의 취임 15주년이 되는 2010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런 야망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강한 승부욕과 치열한 도전정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이지 않다. 구 회장은 이미 자신의 목표를 향해 뚜벅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구회장과 형제들] 구본무 회장은 두 명의 여동생과 세 명의 남동생이 있다. 희성그룹 회장인 본능씨, LG필립스LCD 사장인 본준씨, 희성정밀 부사장인 본식씨, 그리고 여동생인 훤미씨와 미정씨 등이다. 남동생 중에 구 회장을 측근에서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셋째동생인 본준씨뿐이다. 본능씨는 구 회장이 그룹회장에 오른 직후인 1996년 희성그룹을 이끌고 독립했다. 막내인 본식씨도 둘째형을 도와 희성그룹 계열사인 희성정밀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형제들 중 유일하게 LG그룹에 몸담고 있는 본준씨는 세계 LCD(액정표시장치) 시장점유율 1위(전체시장의 16% 점유)를 차지하고 있는 LG필립스LCD의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한 본준씨는 시카고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1951년생인 본준씨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잠시 미국 AT&T사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후 본준씨는 반도체 빅딜로 사라진 LG반도체 부장으로 1986년에 합류했으며, LG전자, LG화학 등 주력사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98년 반도체 빅딜 당시 LG반도체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형인 구본무 회장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넘어가고 나서 2000년부터 현재의 LG필립스LCD를 이끌고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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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3화 LG그룹 구본무 회장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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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5/1039879202302820.jpg" alt=""/>    ▲ 지난 2월 LG CNS 신사명 선포식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왼쪽서 세번째)  구본무 회장이 걸어온 경영인의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나, 경영인으로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두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구 회장에게 가장 큰 개인적인 아픔은 아들을 잃은 것이었다. 그는 그룹 회장에 오르기 전이던 1994년 외아들 원모씨를 잃었다. 당시 원모씨는 성남에 있는 서울국제학교(SIS)를 막 졸업할 무렵이었다. 원모씨의 갑작스런 죽음은 구 회장에게뿐만  아니라, LG그룹 오너 일가 전체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LG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원모씨의 죽음이 가족이나 그룹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구 회장 본인뿐 아니라 그룹의 경영구도를 흔들어 놓았다는 게 재계 인사들의 분석이다.  원모씨는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 3대 회장인 구본무 회장의 다음 대를 이어갈 주인공이었다. 이는 LG가의 가풍이 장자 중심의 유교 전통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에서 예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잠시 LG가의 가풍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LG가에는 1947년 구인회 회장이 락희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 세가지의 전통이 생겼다. 첫째는 그룹의 대표권은 구씨 가문에서 맡되 적장자로 이어지며, 둘째는 구씨와 허씨의 역할을 7대3 비율로 분할하고, 셋째는 여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전통은 1969년 말 구인회 회장이 작고한 이후 적장자인 구자경 회장이 경영권을 이었고, 다시 1995년 구본무 회장이 3대 총수에 오르면서 확인됐다. 또 LG가의 적장자에 대한 가문 내 예우는 여느 집안보다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을 이어갈 적장자는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교육받고 가문의 어른이 아니면 어떤 경우도 외부인에게 큰절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LG그룹의 사시(社是)가 ‘인화’인 것은 가족의 연대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같은 LG가의 가부장적 의식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안전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적극성이나 진취성에서 약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 LG그룹 고위 경영인 출신 인사의 말에 의하면 구자경 명예회장은 장손인 원모씨에게 항상 “가문의 대통을 이어갈 장손”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원모씨의 죽음은 사적으로 구본무 회장 부부와 LG가의 큰 슬픔이기도 했지만, 공적으로는 그룹의 경영구도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이어온 LG가의 특성상 종손인 원모씨의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없었다. 원모씨가 죽은지 2년 뒤 구본무 회장이 51세의 늦은 나이에 막내딸을 얻은 데서도 아들을 잃은 구 회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LG그룹 안팎에서 오간 얘기를 종합해보면 당시 구 회장 부부는 남다른 지극 정성을 들여 늦둥이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드시 원모씨의 요절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구본무 회장이 경영권을 받은 이후 그룹 내부의 소유 및 경영구조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재계에서는 LG그룹이 다른 재벌에 앞서 지주회사 구조를 만들고, 구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소유구조를 개편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LG그룹의 소유 및 경영구조에 가시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LG그룹은 LG화학을 축으로 한 석유화학 계열과 LG전자를 축으로 한 전자 계열 등 크게 두 줄기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 창업 동지이자 경영 동반자인 허씨 집안과 구본무 회장의 형제 및 친족들이 하나둘씩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나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구본무 회장의 당숙인 구자훈 회장과 삼촌인 구자학 회장이 LG화재와 LG유통의 단체 급식사업인 아워홈을 갖고 각각 독립했고, 조부(구인회 회장)의 형제인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회장이 LG전선, LG닛코동제련,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등 4개사에 대한 계열분리로 사실상 그룹에서 독립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5/1039879202302821.jpg" alt=""/>    ▲ 지난 98년 12월 당시 LG반도체 구본준(구본무회장의 둘째 남동생) 대표이사 부사장이 빅딜과 관련한 LG측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형제들 중에는 현재 구본준 LG필립스 사장만 형과 함께 경영을 맡고 있을 뿐이다. 첫째 동생인 구본능 회장은 1996년 희성금속, 희성엘겔하드(자동차용 촉매 생산)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희성그룹을 맡아 독자경영에 나섰다. 막내인 구본식씨도 구본능 회장이 이끄는 희성그룹 계열사인 희성정밀 부사장으로 현재 재직중이다.  허씨 집안도 하나둘씩 LG그룹에서 독립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허씨 집안 경영인들이 LG그룹의 우산 속에 머물고 있지만,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허경수 코스모산업 사장 등도 독자 경영을 하고 있다. 1998년 이후부터 허씨 집안은 건설, 유통, 정유 등의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대비하고 있다. LG그룹의 경영구조는 2003년 벽두부터 엄청난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구 회장이 그룹총수에 오른 이후 단계적으로 추진해온 경영구조 개편작업이 2003년부터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미 분가했거나 독자경영에 나선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의 소유구조는 2003년 3월에 출범할 (주)LG라는 지주회사를 정점으로 한데 묶이게 된다.  이 작업이 끝나면 LG그룹의 소유구조 및 경영구조는 지주회사인 (주)LG와 각 자회사가 줄기를 중심으로 매달린 포도송이처럼 전체 그룹이 수직적으로 연결되는 단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소유 및 경영구조의 개편은 계열사간 상호보증이나 지급보증으로 동반 부실화되는 부작용을 막을 뿐 아니라, 계열사간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그룹측은 내다보고 있다.  사실 이같은 소유 및 경영구조를 형성할 경우 LG그룹의 예상처럼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주회사를 통한 계열사 지배는 이상적인 소유구조이긴 하지만, 오너의 계열사 지배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수 재벌들은 변형된 지주회사 개념을 도입하거나 도입 자체를 망설이고 있다. 구 회장이 경영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슬픔은 1998년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긴 일이다. 구 회장은 지금도 그와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다.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이른바 반도체 빅딜이 처음 공개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 뒤인 1998년 6월10일이었다. 최초로 빅딜을 공개한 주인공은 김중권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이날 김 비서실장은 서울 시청앞 조선호텔에서 열린 능률협회 주최 강연회에 참석해 “대기업의 사업조정을 위한 빅딜이 있을 것이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김 실장의 이 발언은 정&#8226;재계를 들쑤셔 놓을 정도로 폭발력이 대단했다. 빅딜정책이 모습을 드러내자 재벌들은 아연 긴장했다. 어떤 재벌의 사업이 빅딜 대상 1호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와 함께 재벌들 사이에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느냐’는 색다른 의문도 고개를 들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재계에서는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다. 빅딜 대상에 LG반도체, 삼성자동차, LG PCS, 현대석유화학, 삼성석유화학 등이 오르내리면서 재벌끼리 치고받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빅딜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난상토론으로 이어지던 빅딜은 시간이 지나면서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1호 대상으로 압축되고 만 것이었다. 당시 LG그룹 고위 경영진에 있었던 관계자의 회고.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LG반도체는 미국 인텔사로부터 투자유치를 협상중이었는데, 빅딜 대상으로 거론되면서 협상이 중단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구본무 회장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반도체 빅딜은 석달이나 공방전을 벌인 끝에 1998년 10월7일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 결정을 발표한 사람은 당시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전경련의 이 결정에 대해 구본무 회장은 펄펄 뛰었다. 당시 회장비서실 직원이 전하는 얘기. “전경련 모임에 다녀오신 회장님께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찬물 한컵을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자리에 앉지도 않으신 채 두세 시간을 상기된 표정으로 분을 삭이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당시 LG반도체는 상당한 흑자를 남기고 있었고, 일시적으로 반도체값이 떨어지긴 했지만 사업특성상 금방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빅딜 파트너인 현대전자는 달랐다.  현대전자는 이미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는 데다, 반도체 가격이 급락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에 합병된다면 모를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구본무 회장의 생각이었다. 더욱 구 회장을 괴롭게 한 것은 선대회장 시절부터 잘해오던 사업을 자신의 대에서 잃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한 부친의 충고를 수없이 되뇌었다. 구 회장은 그때부터 전경련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던 골프 회동에도 구 회장은 불참했다. 그는 한동안 재계 관계자들을 만나길 꺼렸다. 구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재계 고위 인사의 얘기. “빅딜이 있은지 얼마 안돼 구 회장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식당에 있는 TV에서 반도체 빅딜과 관련된 뉴스가 나왔는데, 갑자기 구 회장이 깊은 한숨을 쉬고는 ‘그만 먹고 나가자’고 했다. 구 회장이 이 문제로 인해 얼마나 가슴에 못이 박혔는지 알 수 있었다.”  재계 인사들은 구 회장이 이런 모습을 보인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구 회장은 반도체 빅딜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빅딜 추진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LG가 불리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던 점에 대해 그는 분노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구 회장은 1999년 1월6일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LG반도체를 넘기기로 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 강유식 구조조정본부장은 1999년 1월7일 기자회견에서 반도체 빅딜을 수용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빅딜이 국가적인 관심사이고, 정부의 구조조정 문제를 결정짓는 문제라 그렇게(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정부의 압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구 회장은 LG반도체를 넘기는 대신 통신회사인 데이콤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중에 구 회장의 뜻은 성사되긴 했지만, 데이콤을 인수하기까지는 적잖은 우여곡절도 있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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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3화 LG그룹 구본무 회장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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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ue, 10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0/1039447202302810.jpg" alt=""/>    ▲ 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한적한 교외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는 구본무 회장. 구 명예회장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해온 “70세까지만 회사일을 하겠다”는 약속을그대로 지켰다.  구본무 회장의 자택은 한남동 단국대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어릴 적 성북동에서 살았으나 결혼 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옮겼다가, 현재 살고 있는 한남동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구 회장은 한남동 집을 무척 좋아한다. 남산이 마주 보이고, 멀리 한강이 내려다 보이기 때문이다. 여의도 LG트윈타워까지 출퇴근하기가 편한 점도 그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기와지붕으로 된 단층 양옥인 구 회장의 자택 넓이는 80평 정도다. 집에 들어서면 잔디가 깔린 마당 주변에 소나무, 단풍나무, 원추리, 비비추 등 주로 국내 자생 초목들이 죽 심어져 있다.  집안 인테리어는 구 회장의 소박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내 색깔은 특별히 화려하거나 눈길을 끄는 장식이 없는 수수한 느낌의 화이트톤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깔끔하고 심플하다. 구 회장은 조부 구인회 회장이 그룹의 모기업인 락희공업사(나중의 (주)럭키)를 설립하기 2년 전인 1945년 2월에 태어났다. 구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의 성격이 거침이 없고, 주변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면 어떡하든 도움을 주어야 할 정도로 동정심이 많은 것은 이런 성장환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의  유난스런 자연사랑도 그런 연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유교 교육을 받았다. 층층시하의 대가족 틈에서 자라면서 그에겐 예절과 자기절제가 몸에 배었다. 구 회장이 지금도 비공식적이든, 공식적이든 ‘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는 구 회장의 심성은, 현재 LG그룹의 경영 모토인 ‘고객감동’의 배경이 됐다. ‘고객감동’ 경영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품을 만들고 팔아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경영론이기도 하다. 평소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고객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강조해온 그는 “기업이든, 사람관계이든 공정하고 철저한 경쟁을 통해서만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타협없는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한 ‘정도경영’의 실천”을 경영의 최고 덕목으로 꼽는다. 그같은 경영관을 확립하기까지 구 회장은 젊은 시절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다. 고교 시절엔 여느 10대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를 심하게 앓으며 정신적인 방황을 하기도 했다.  당시 명문고였던 서울고에 진학했지만 졸업하지는 않았던 것이나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병으로 자원 입대한 것도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다. 1964년 연대 상대에 입학한 구 회장은, 그해 추운 겨울에 훈련소로 향했다. 그의 군 입대는 부친 구자경 회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부친은 장차 그룹의 경영을 이어갈 아들을 보다 강하게 키우기 위해 현역 입대토록 했다. 구본무 회장은 2년6개월 동안의 군생활을 마치고 1967년 만기 제대했다. 군제대 후 복학한 구 회장은 1년 정도 다니다 미국 애쉬랜드대 경영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애쉬랜드대를 졸업하던 1972년 부인 김영식씨와 결혼했다. 이어 구 회장은 클리블랜드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치고 1975년 귀국했다. 구 회장이 LG그룹에 입사한 것은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1975년 11월이었다. 당시 (주)럭키에 특채 형식으로 입사한 그는 대학원 졸업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심사과장의 보직을 받았다.  그후 그는 입사 1년반 만에 수출관리 업무담당 부장으로 승진했고, 입사 4년 뒤인 1979년 이 회사의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본부장으로 승진한 1년 뒤인 1980년 그는 (주)럭키에서 금성사(LG전자의 전신)로 회사를 옮겼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금성사의 경영진에는 LG그룹 경영인맥의 또다른 중심 축인 허씨 집안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구 회장이 금성사로 옮기던 무렵 최고 경영인은 허신구 사장이었다. 구 회장이 금성사로 옮기자 재계에서는 부친 구자경 회장이 자식의 경영교육을 확실하게 시키기 위해 허씨 집안에 맡겼다고 해석했다. 구 회장은 금성사로 옮긴지 1년 만에 이사로 승진했지만, 1983년 상무 승진명단에서 제외되는 설움도 맛보았다. 금성사 재직 당시 허신구 사장은 구 회장이 맡은 부서가 실적이 부진하다며 동료 임원들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질책을 했었는데, 이 얘기는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구 회장이 그룹의 차세대 경영인으로 본격 부상한 것은 1989년부터였다. 당시 그룹부회장에 오른 그의 나이는 마흔네살이었다. 구 회장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룹부회장으로 오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룹을 이끌고 있던 구자경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퇴진할 뜻을 비춘 때문이었다. 구자경 회장은 평소 “나는 70세까지만 회사에 몸담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엔 경영에서 손을 뗀 뒤 초야에 묻혀 지내고 싶다는 것이 구자경 회장의 뜻이었다. 이에 따라 가족들은 경영 후계를 논하게 됐고, 장손인 구본무 회장의 조속한 경영수업에 착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구 회장은 부회장이 된 지 6년 만에 LG그룹의 3세 경영인으로 회장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고, 부친 구자경 회장의 나이는 70세였다. 구자경 회장은 평소 “70세까지만 회사일을 하겠다”고 한 말을 실천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10/1039447202302811.jpg" alt=""/>    ▲ 허신구 전 LG석유화학 회장  구본무 회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LG그룹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자경 회장의 퇴진과 함께 허준구 당시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 회장 등 창업공신들이 대거 퇴진했다. 이는 구본무 회장을 필두로 한 젊은 경영인들이 그룹경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을 터주기 위한 원로들의 배려였다. 구본무 회장은 회장에 취임하기 직전, 그룹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꿨다. 구 회장은 소탈한 성격 만큼이나 음식도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을 가리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구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묵은 김치를 넣어 끓인 김치찌개다. 그는 여의도 LG트윈타워 내 일식당과 중식당을 자주 찾는다. 가끔 삼청동 수제비집이나 혜화동 칼국수집에서 밀가루 음식을 즐기기도 한다. 해외 제휴사나 협력사의 최고경영자가 그룹을 방문하면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 양식당을 이용한다.  구 회장은 해외 출장 중 기내에서 제공하는 빵과 포도주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대개 장거리 여행을 하다보면 빵이나 포도주를 마시고 그대로 잠을 자게 되는데, 이럴 경우 살이 찌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구 회장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술은 소주 반병 정도가 주량이다. 그의 음주 스타일은 절대 과음하는 법이 없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술을 권하지도 않는다. 구 회장의 패션은 평일과 주말로 나누어진다. 평일에는 회색 및 감색계열의 싱글 정장스타일을 주로 입지만, 주말에는 가벼운 스타일의 콤비를 착용한다. 옷은 맞춤복이 아니라 계열사인 LG상사의 LG패션에서 나오는 닥스 브랜드의 기성복을 즐겨 입는다. 주말 등 가족과 나들이할 때 입는 옷은 화려하거나 튀는 색상보다는 은근한 느낌의 캐주얼을 좋아한다. 물론 집에서 지낼 때는 편한 티셔츠 차림이다. 구 회장은 회사 일과 가정 일을 철저히 구분한다. 집안 일은 거의 부인에게 위임하는 편이다. 구씨 집안의 전통이 ‘바깥 일은 남편이, 집안 일은 부인이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약속은 꼭 지키라’는 자기의 신조를 강조하고 있다. 집안의 가풍인 ‘근검절약’을 강조하면서도 “가치있는 일에는 돈을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가르침도 준다. 구 회장은 평소 아침 6시면 기상한다. 전날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기상시간은 거의 변함이 없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산책을 한 뒤, 오전 8시를 전후해 여의도 집무실에 출근한다. 구 회장은 출근 후 제일 먼저 조간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글 읽기를 좋아하는 구 회장은 종합 일간지뿐 아니라, 시사 흐름이나 세태를 알기 위해  등 시사 주간지나 잡지도 빼놓지 않고 탐독한다. 그가 요즘 주로 읽은 서적은 국내외 경제동향이나 신경영기법 및 첨단기술 동향을 담은 분야의 책이다. 경영서적 외에도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은 만큼 환경보호와 관련된 자연서적도 읽는다.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 강한 승부근성을 요구한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구 회장과 골프를 함께 친 외부 인사가 “회장께서 너무 골프를 잘 치기 때문에 골프실력이 모자라는 사장이나 임원들이 라운딩하기를 부담스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구 회장은 “골프를 잘 못치거나 점수를 가지고 누구를 탓해본 적이 없으나, 성의없이 대충대충 치는 것은 싫다. 뭐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요즘 그룹에 입사하는 신세대들은 이같은 승부근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구 회장은 신세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요즘 신세대들은 매우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개성주의와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료애와 희생정신이 부족하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조금 해보고는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역경을 딛고 뜻한 바를 이루어내는 인내와 강한 의지가 요구된다.” 구 회장은 이런 점에서 신세대가 갖춰야 할 세 가지 덕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편협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질 것, 둘째는 창의적인 생각을 가질 것, 셋째는 기본에 충실하고 도전의식을 가질 것 등이다. 이는 구 회장이 평소 가진 인재관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현재 그가 경영에서 추구하는 ‘일등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강조하는 ‘일등주의’는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개념이다. 그는 2002년 신년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일등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고객이 신뢰하는 기업, 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있는 기업, 경쟁사들도 배우고 싶어하는 기업, 누구나 인정하는 기업이 우리가 추구하는 일등기업의 목표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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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3화 LG그룹 구본무 회장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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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Dec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01/1038669602302800.jpg" alt=""/>    ▲ 지난 5월 경영혁신 공유행사인 스킬올림픽에참석한 구 회장이 격의없이 사원들과 어울리고 있다(위).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의 고희연에 모친 하정임 여사와 자리를 함께한 네아들(뒷줄 왼쪽부터 구본준, 구본무 회장, 구본능, 구본식).  ▲생년월일:1945년 2월10일(57세) ▲1964년 3월 연세대 상대 입학 ▲1968년 미국 애쉬랜드대 입학 ▲1972년 미국 애쉬랜드대 졸업 ▲1975년 LG화학 심사과장 입사 ▲1977년 LG화학 수출관리 부장 ▲1980년 LG전자 기획심사 본부장 ▲1981년 LG전자 이사 ▲1984년 LG전자 일본 동경주재 상무 ▲1985년 LG회장실 전무 ▲1986년 LG회장실 부사장 ▲1989년 LG그룹 부회장 ▲1995년 LG그룹 회장 ▲병역:육군병장 만기제대 ▲취미:골프 ▲하루일과:오전6시 기상, 자정 취침 ▲담배 및 주량:담배는 피우지 않고,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 ▲좌우명:약속은 꼭 지킨다, 근검절약하는 생활자세를 갖는다 ▲가족관계:부인 김영식(50) 사이에 2녀 ▲건강관리:규칙적인 생활,  골프 등 야외운동  ▲구본무 회장 가계  조부: 구인회(LG그룹 창업주&#8226; 별세) 조모: 허을수(별세)  부친: 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8226;77세) 모친: 하정임(78세)  딸: 구연경(24세) 연수(6세)  여동생: 훤미(55세) 미정(47세)  남동생: 본능(희성그룹 회장&#8226;53세) 본준(LG필립스LCD 사장&#8226;51세) 본식(희성정밀 부사장&#8226;44세)   ‘울고넘는 박달재’‘번지없는 주막’을 구성지게 부르는 재벌총수, 누구보다 ‘새’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인상의 회장님. 한국 재계의 거함 LG그룹 구본무 회장이다.  올해 57세(1945년 2월10일생)의 나이로 해방둥이인 구 회장은, 7년 전인 1995년 2월 만50세의 나이에 LG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나이로 보면 그는 재계 총수들 가운데 장년 축에 속한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재계 관계자들은 구 회장을 아직도 ‘재벌 3세 경영인’이라며 젊은 재벌총수로 여기고 있다.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이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6년 전인 1996년 쉰이 넘은 나이에 막내딸을 얻었을 정도로 부부금실이 좋다. 구 회장은 가끔 부인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를 찾아 음악 공연이나 오페라를 감상하곤 한다. 임원들이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구 회장은 공연장 등을 찾을 때면 동부인하여 자상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부인사랑이 끔찍하다고 한다. 부인 김영식씨는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나중에 내외경제신문 사장도 역임했다)의 딸이다. 김태동 전 장관의 집안은 충북 괴산의 수재집안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구 회장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던 1972년 무렵 중매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구 회장은 외모에서 풍기는 소탈한 인상처럼 형식주의와 격식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그는 1995년 그룹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기존의 딱딱한 느낌을 주던 합동이사회의 명칭을 ‘임원세미나’로 바꿨다. 그는 그룹의 모든 임원회의에 회의 시작 10분전 반드시 도착해 임원들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이다. 회의에서도 자신의 생각은 길어도 3분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간결하게 정리해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해외출장 때도 수행비서와 출장목적과 관련된 담당임원 한사람만 동행하고, 출장지에 도착했을 때도 공항에 주재원이 마중나오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지금은 회장이 되어 행동이나 활동에 제약을 받지만, 구 회장은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 격의없이 술자리를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직원들과 술자리를 하면 농도짙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어 놓기도 한다. 구 회장은 유머의 소재도 매우 풍부해 다른 사람에게 한번 들려준 내용은 상당기간 동안 다시 반복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구 회장의 농도짙은 유머는 장인(김태동 전 장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평소 구 회장의 장인은 농담을 잘해 곧잘 좌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 그를 쉽게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겉인상과 달리 그는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이고, 성격이 매우 급할 뿐 아니라 불 같다. 평소 화를 잘 내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수가 틀어지면 쉽게 풀어지지도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 회장의 핵심 참모역을 맡았던 이문호 인화원 부회장(그룹 연수원, 전 회장실 사장)도 공개한 적이 있다. “구본무 회장은 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성격이 급해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종종 있다. 한번은 LG건설이 시공한 아파트 벽에 금이 갔다는 보고를 받고 ‘당장 헐고 다시 지으라’고 호통을 쳤다. 구 회장이 화가 났을 때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좋다.” 성격이 급한 것은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구자경 회장도 과거 전경련 회장 시절, 술자리에서 정부의 재벌정책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 소동이 일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 역시 화가 나면 다소 억양이 높아지면서 직설화법으로 생각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나머지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구 회장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오래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가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상무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구 회장은 임원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회의에서 임원들이 신용장 네고업무를 경리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를 듣고 있던 구 회장은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와 경리부장을 불러 신용장 네고업무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경리부장이 경리부 이관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구 회장은 곧바로 회의실로 돌아와 “그 일은 다 해결됐다”고 말하며 즉결처리했다는 것이다. 그후 신용장 네고업무는 경리부로 모두 이관됐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201/1038669602302801.jpg" alt=""/>    ▲ 지난 95년 구자경 명예회장으로부터 총수 자리를 물려받은 구 회장이 회장 이취임식에서 그룹깃발을들어보이고 있다.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과 약속하면 항상 20분 내지 30분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평소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이같은 습관은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구자경 회장은 구 회장이 어릴 적부터 ‘약속시간 만큼은 철저히 지켜야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과 약속한 사람이 “차가 막혀서 늦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면 매우 싫어한다. “차가 막히면 더 일찍 출발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평소 임원회의 시간에도 거의 대부분 그가 먼저 도착해 기다린다. 구본무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집념이 강한 사나이라고 평한다. 그는 일단 어떤 문제에 흥미를 갖거나 일을 성사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의 새에 대한 사랑과 골프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꼽을 수 있다. 구 회장의 집무실은 여의도 LG트윈타워 30층 한강변 쪽에 위치하고 있다. 회장실 구석에는 큼지막한 고성능 망원경 세트가 한강으로 향해 고정돼 있는데, 렌즈의 초점이 맞춰진 곳은 한강 중앙에 위치한 밤섬이다. 그 곳에 날아드는 새를 관찰하기 위한 목적이다. 새에 대한 그의 지식은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사급 못지 않다는 게 임직원들의 전언이다. 그는 2000년 12월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LG상록재단을 통해 ‘한국의 새’라는 조류 전문 서적을 발간하고 직접 발간사까지 썼다. 국내 최초의 그림으로 된 조류도감인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구 회장은 서울대 이우신 교수 등 전문가들과 4년 동안 6억원을 들일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 구 회장은 자신이 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산에 갔다가 다친 새 한마리를 발견하곤 집에 데려와 정성껏 치료를 한 뒤 돌려보내주었다. 그 뒤로 새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새의 몸짓이나 날갯짓, 울음소리만 들어도 어떤 새인지 자연스럽게 구분이 될 정도이다.” 그가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해둔 또다른 이유는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 복잡한 머리가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경영과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휴식을 취할 겸 장시간 망원경을 통해 한강을 관찰하곤 한다. 이럴 때면 급하지 않은 결재사항은 잠시 미뤄진다. 그는 집무실에서 망원경으로 밤섬을 관찰하다가 새알을 훔치는 사람을 관계당국에 고발한 적도 있다.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여의도 트윈타워에 둥지를 튼 사실을 알고는 빌딩관리인에게 특별보호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해외출장에 나서면 새와 관련된 외국 전문서적을 구입해 올 정도다. 지금은 싱글 핸디캐퍼인 구 회장의 골프에 얽힌 얘기는 그의 강한 집념을 엿보게 하는 또다른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그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금성사 기획심사 본부장으로 재직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동료 임원들에게 “우리 집안에는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우리 집안에서 골프를 제일 잘 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공언을 했다는 것. 그러나 이 말에 대해 동료 임원들은 반신반의했다. 그 이유는 당시 젊은 구 회장이 다이내믹한 운동을 즐기는 데다 낚시와 사냥을 좋아해 정적인 성향의 운동인 골프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동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구 회장은 자신이 살던 성북동 인근 인도어 골프연습장에 등록을 한 뒤 무려 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할 정도로 골프연습에 열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도어에 나갈 동안에는 단 한차례도 필드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연습장에서 완벽하게 자세를 배웠다고 결론을 내린 뒤, 필드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동료들과 한양골프장에서 머리를 얹었다(필드에 처음나가는 것을 말한다). 첫 라운딩에서 그는 보기플레이(기준 타수보다 1타가 많은 것으로 90타)를 기록해 동반자를 놀라게 했다. 그후 그는 골프를 시작한 지 2년반 만에 싱글 수준이 됐다. 그의 호언대로 지금은 LG가에서 골프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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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2화 SK그룹 최태원 (주)SK회장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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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4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24/1038064802302790.jpg" alt=""/>    ▲ 세계경제포럼(WEF) 아시아지역 공동의장으로 활동중인최태원 회장이 지난 10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회의폐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SK그룹 오너 일가 2세들은 1989년 12월 ‘5인 협의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멤버는 그룹 창업자인 최종건 회장의 세 아들(최윤원, 신원, 창원)과 최종현 회장의 두 아들(태원, 재원)이었다. 이 모임에 대해 주변에서는 ‘5인방 협의체’니, ‘선경패밀리 협의회’니 하는 여러가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이 모임의 공식 명칭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4촌 형제들이 모인 것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임이 재계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구성원들이 모두 SK그룹 내부에서는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업주의 아들과 당시 경영을 맡고 있던 최종현 회장의 아들이 주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모임이 구성된 배경은 SK그룹 경영승계 구도가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다른 재벌과 달리 창업자의 동생이 경영을 승계했기 때문에 차기 구도와 관련해 복잡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의 직계와 최종현 회장의 직계가 모두 승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최종현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대한석유공사 인수 등으로 그룹규모가 크게 신장된 부분도 작용했다. 이 때문에 비록 최종건 회장 직계 아들이 경영승계를 위한 기득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최종현 회장 직계 아들보다 우선순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1989년의 5인협의회는 이런 복잡한 차기구도를 사전에 정리하기 위한 내부조율 창구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신원 SKC 회장은 “후계구도와 관련해 이 모임에서 논의했으며, 당시 누가 그룹을 맡든 형제들이 힘을 모아주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이 모임은 그후 최종현 회장이 타계하던 1998년 8월까지 계속 존속했다. 이 모임의 마지막 결정은 최종현 회장이 타계한 직후인 1998년 8월30일 최태원 회장에게 대주주 대표권을 몰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후 5인협의회는 사실상 없어졌다. 대신 2세들은 1999년부터 새로운 가족모임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2세들의 모임인 ‘선가회(鮮家會)’가 그 것이다. 선가회 멤버는, 과거의 5인협의회와는 달리 4촌 형제들이 모두 회원으로 가입했다. 최태원 회장이 차기 경영권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은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직계들이 기득권을 포기한 데 힘입은 바가 크다.  물론 이같은 결과는 가족들이 최태원 회장의 경영능력을 높이 산 이유도 있지만, 경영권 승계 1순위로 지목돼온 최윤원 전 SK케미컬 회장(최종건 회장의 장남)의 건강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최윤원 회장은 평소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2000년에 작고했다.  어쨌든 최태원 회장이 4촌 형제들의 양보에 의해 경영승계자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4촌 형제들이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가족간 불화가 가져올 해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신원 SKC 회장은 “형제들이 서로 자신의 이해만 따진다면 모두 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현재 가족들의 지원 아래 그룹 경영권 장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당면과제가 있다. 첫째는 경영권 안정이고, 둘째는 그룹의 장래에 대한 확실한 경영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첫째 과제인 경영권 안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촌 형제들간의 이해관계를, 최대 이익을 위해 풀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이는 최 회장 자신이 그룹 창업주의 직계가 아니라, 대주주인 가족들로부터 대표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최 회장이 그룹에 대한 소유권을 강화하더라도, 오너십은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최 회장이 가시적 경영 성과를 보이지 못할 경우 가족 내부의 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고 최종현 회장의 경우 창업주가 아님에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대한석유공사와 제2이동통신의 인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종현 회장의 이같은 업적은 창업주 직계들이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상황이 다르다. 사촌 형제들 중 맏형격인 최윤원 전 SK케미컬 회장이 이미 작고(2000년 8월 작고)하긴 했지만, 최신원 SKC 회장, 최창원 SK글로벌 부사장 등 최종건 회장의 2세들이 건재하다. 게다가 최태원 회장은 아직 그룹의 경영권 전체를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데다, 아직 대표권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의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다. 따라서 최 회장은 4촌 형제들과의 관계설정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어떤 모양새로 그룹 경영을 이끌어 나가느냐가 경영권 안정의 최대 관건인 것이다. 현재 SK그룹의 경영판도를 보면 최태원 회장이 SK(주)를 중심으로 그룹 전체를 관장하고 있고, 그의 친동생인 최재원 부사장이 SK텔레콤의 경영을 맡고 있다. 또 현재 4촌 형제들 중 최고 연장자인 최신원 회장이 SKC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고, 그의 동생인 최창원 부사장은 SK글로벌 경영을 맡고 있다. 이 중 최신원 회장의 경우 SKC를 중심으로 사실상 독립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최창원, 최재원 부사장은 아직 나이가 30대인 탓인지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최창원, 재원 두 사람은 구조조정본부 부사장도 겸직하면서 최태원 회장이 현재 그룹 전문경영인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SK사장 겸직)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로선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들 두 사람은 최태원 회장이 그룹경영 전체를 접수하면서 친정체제에 들어가는 시점을 전후해 계열사를 맡아 독자경영에 나설 공산이 커 보인다. 이와 관련해 오너 일가의 핵심 관계자는 “계열사를 맡아 경영을 펼 수는 있겠지만, SK그룹이라는 우산속에서 서로 공통된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자경영을 하더라도 여느 재벌가처럼 재산권을 분리한다든지, 딴살림을 차려 분가하는 형태의 핵분열현상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최태원 회장에게 주어진 또다른 과제는 확실한 경영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영 일선에 나선 지 4년이 넘은 상황이고 보면 그룹의 미래 청사진을 내놓아야 할 시기가 임박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 부분에 대해 서두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24/1038064802302791.jpg" alt=""/>    ▲ 지난 4월 ‘신임 임원과의 대화’ 자리에 나온 최태원 회장.  다만 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중동의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최 회장은 자신의 역량을 신규 사업분야와 e-비즈니스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SK(주)를 중심으로 e-비즈니스 분야에 대한 투자를 통해 대기업과 벤처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델을 찾아내겠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 최 회장은 “대기업은 커다란 항공모함과 같으며 벤처기업은 이 항공모함의 항로를 결정하는 정찰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해 경영구상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 회장은 SK그룹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석유화학과 이동통신 사업은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두 사업을 기반으로 미래형 사업을 접목한다는 게 그의 전략이다. 그는 자신의 미래사업을 신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 시장을 통해 한발짝씩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2001년에 중국 상하이 발전 자문위원회(International Business Leaders’ Advisory Council For The Mayor Of Shanghai) 위원에 오른 것도 이같은 전략의 하나였다. 최 회장은 이에 앞서 그룹의 기존 사업모델을 전면 수정하는 구조조정에도 집중하고 있다. 2002년 10월 제주에서 열린 그룹구조조정회의에서 그는 수익성이 불확실한 계열사의 비즈니스모델을 전면 개편하는 방안을 밝혔다. 이 회의에서 최 회장은 “장기적인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룹의 주력이자 초우량 기업인 SK텔레콤마저 퇴출시키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구조조정에 대한 그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그의 현실 경영관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국경 개념의 실종, 글로벌 마켓화, 소비자 욕구의 다양화 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영방식으론 불가능하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불확실한 경제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변신도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기존 사업모델만으로는 미래에 대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정유사업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SK(주)의 사업구조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총괄하는 종합 마케팅기업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OK캐쉬백 등 온-오프라인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그는 SK(주)의 사업모델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요하다면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는 벤처기업과도 제휴하겠다는 윈-윈전략을 짜고 있다. 이에 따라 SK(주)는 1999년말부터 2002년 10월 현재까지 1백50여개의 벤처기업에 1천6백억원을 투자했다. 앞으로도 부가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사업에 지속적인 투자에 나설 작정이다. 최 회장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경영전략은 무형자산의 상품화이다. 과거의 자본집약적, 노동집약적 사업모델에서 탈피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집약적 산업으로 그룹 사업구조를 변화시킬 계획이다. 물론 이같은 경영구상은 SK(주), SK텔레콤 등 현재의 주력사업 토대 위에 가능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기존 비즈니스의 경쟁력을 최대한 강화해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한 뒤 여기에서 나온 모든 형태의 무형 자산을 신사업과 연계하는 선순환의 사업구조를 가져가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최 회장의 이같은 경영구상은 철저한 자기 공부와 넓은 인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평소 차 안에 경영 관련 국내외 서적을 싣고 다니며 탐독할 정도로 많은 책을 읽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그는 젊은 경영인답지 않게 넓은 인적교류도 쌓고 있다. 국내 벤처 경영인이나 재계의 젊은 경영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고 실제로 이런 교류를 통해 경영 학습이나 사업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현재 국내 대다수 기업들은 투입(Input)에 비해 산출(Output)이 낮은 저효율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같은 저효율 경영구조를 탈피하려면 무엇보다 기업의 경영구성 요소인 경영시스템과 경영진의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경영철학을 만들어야 하고, 성장과 생존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더 나은 회사(Better Company)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경영 일선에 참여한 이후 최종현 회장 시절 확립된 ‘SUPEX 운동’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만든 ‘SUPEX 2000’으로 전환한 것도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존 ‘SUPEX 운동’의 목표가 초일류라면, 그가 주창하는 ‘SUPEX 2000’은 기업 가치의 제고를 목표로 하는 ‘TO-BE 모델 경영’이다. 비교적 단기간이라 할 수 있는 2년 내지 3년 기간에 추진되는 ‘TO-BE 모델경영’은 빠르게 변화하는 최근의 경영환경에 적절히 대비하는 경영전술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는 10년 후 SK그룹의 미래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굳이 10년 뒤 SK그룹의 모습을 정리한다면 고객과 주주, 종업원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적인 기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이상적 기업’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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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2화 SK그룹 최태원 (주)SK회장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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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7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7/1037460002302780.jpg" alt=""/>    ▲ 월드컵대회 열기로 뜨겁던 지난 6월 최태원 회장이 회사임직원들과 함께 붉은악마로 깜짝 변신, 시청앞 광장에모여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최태원 SK(주) 회장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별로 말이 없는 데다 말투도 그리 상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안면을 트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그는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정다감하다. 이같은 성격은 집안 내력이어서 4촌인 최신원 SKC 회장이나 최창원 SK글로벌 부사장,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 등도 비슷하다. SK그룹 관계자들은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경천동지할 긴급사안이 아니면 최태원 회장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게 불문율로 돼 있다. 긴급 사항이 발생해 연락을 취해도 연결이 잘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가급적 공휴일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의 가족사랑은 여느 가장 못지 않다. 주말이나 공휴일까지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게 최 회장의 생활관이다.  최 회장은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서 농구를 즐기거나 등산을 한다. 부친 최종현 회장처럼 그도 골프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가끔씩 아이들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 있는 가족농장을 찾아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포켓몬이나 디지몬 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이들과 영화   등을 보고 미래사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장시간 토론하기도 할 정도다. 1남2녀의 아버지인 최 회장은 평소 자식들에게 세 가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기본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원칙은 첫째 진정한 능력은 재물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것, 둘째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셋째는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부친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이기도 했다. 최종현 회장은 “내가 물려주고 싶은 것은 재산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따라오지만, 지식없이 재물만 있으면 그 재물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이 1남2녀의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습관은 ‘기록’과 ‘책읽기’라는 두 가지다. 그가 말하는 ‘메모’는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나중에 데이타로서의 가치를 가질 정도로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적는 것을 의미한다. 최태원 회장의 가족사랑은 그에게만 두드러진 것은 아니다. SK가(家)를 아는 사람들은 고 최종건 회장이나 최종현 회장도 가족의 화합에 대해서는 남달랐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업상 일이 바빠도 가족 행사는 반드시 참석할 정도였다. 1973년 작고한 최종건 회장은 생전에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는 조카들 선물까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챙길 정도였다. 최종현 회장도 생전에 조카들을 친아들보다 더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가풍 때문인지 지금도 2세들은 ‘화목’을 가장 먼저 앞세운다. 이에 대해 최신원 SKC 회장은 “형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집안의 가풍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두 사람을 든다. 부친 최종현 회장과 시카고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지도교수였던 게일 존슨 교수다.  그는 이들을 꼽는 이유에 대해 “아버지(고 최종현 회장)는 내 인생의 정신적 스승이고, 존슨 교수는 내게 살아가는 방법과 인생의 진정한 가치관을 정립시켜준 분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인생관과 경영관에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1990년대 미국 경제계에 리엔지니어링 붐을 일으켰던 마이클 해머의 와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가 저술한 을 꼽는다. 특히 그는 기업경영 혁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해머의 ‘아젠다’는 몇번이나 반복해 읽었을 정도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SK(주)와 그룹에서 발간하는 회사내 사보에 연재해 임직원들이 모두 읽도록 권유했다. 재계에는 ‘SK그룹 오너 일가족은 전통적으로 부인에게 약하다’는 우스개가 있다. 최 회장 집안의 가족사랑이 남다르다는 뜻이다.  사실 최종현 회장도 부인 박계희 여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박 여사는 남편을 간호하다 병이 도져 1년 앞서 작고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최 회장은 작고할 때까지 부인을 못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태원 회장 역시 부인 노소영씨에 대한 사랑이 여느 부부 못지 않다.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맡고 있는 부인과는 주말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함께 외식 등을 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얼마전 항간에 최 회장 부부에 관해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았던 적이 있다. 당시 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 소문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는 “최 회장의 성격이나 가풍을 알면 그런 얘기는 나올 수 없을 것”이란 설명이었다.  최 회장의 사고방식은 오랜 미국 유학생활 탓인지 합리적이며, 효율성을 중시하고 있다. 비생산적이거나, 형식적 요소는 배제하고 철저히 논리와 효율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가 경영에 몸담은 후 임직원들에게 캐주얼 복장으로 근무하도록 권장한 것도 이같은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꽉 조인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는 것은 창의력과 사고를 경직시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그는 공식적인 행사 때가 아니면 가급적 양복을 입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이 번뜩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7/1037460002302781.jpg" alt=""/>    ▲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초빙교수로 출강중인 최태원회장이산업현장의 생생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룹 임원회의에서도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다.  치밀함과 판단력을 갖추되 과거를 답습하기보다는 과감히 위험에 도전(Risk Taking)하는 정신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1998년 3월 SK텔레콤 주총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SKC&C의 지분 30%를 SK텔레콤에 무상증여한 것은 그가 경영에서도 합리적 판단을 중시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실례였다. 당시 참여연대는 최 회장의 지분과 관련해 경영투명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SKC&C의 지분이 계속 문제되자 그는 전격적으로 지분포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지분 취득 과정에 문제는 없지만 주주들의 요구를 존중한다”고 그같은 결정을 한 배경을 밝혔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도 “주주를 중시하는 결단”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최 회장은 1960년 12월3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최종현 회장은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2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최종현 회장이 부인 박계희 여사(1987년 작고)를 만난 것은 1958년 봄이었다. 박 여사의 부친은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이었다. 그녀는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베네트칼리지, 미시간주 칼라마주대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 미대 응용미술과를 다니고 있었다. 홍사중 전 서울대 교수는 최종현 회장 회고록인 ‘나는 한없이 살았다’에서  “최종현-박계희 커플의 만남은 박 여사의 친구 소개로 이뤄졌으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최종현 회장은 박계희 여사를 만난지 1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 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던 1960년 말 미국에서 첫 아들인 최태원 회장을 얻은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1979년 신일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부친이 다녔던 시카고대 경제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에서 그가 대부분의 재벌 2세들이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것과는 달리 물리학과를 택한 것은 과학적 사고력을 갖춰야 한다는 부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아들이 진학문제로 고민하자 “자신의 진로는 자신이 선택한다.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갖든 합리적 논리를 펼 수 있는 객관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과학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학과를 택하라”고 말했다. 이같은 조언은 최태원 회장은 물론 그의 동생 최재원 SK글로벌 부사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재원 SK글로벌 부사장은 미국 브라운대 물리학과를 거쳐 다시 스탠포드대 재료공학과를 다닌 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최태원 회장은 시카고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실리콘 밸리에 있던 메트라(Metra)라는 외국계 회사에서 1년반 정도 일했다. 그가 공부를 마친 뒤 곧바로 귀국하지 않은 것은 당시 맏딸 윤정양의 출산을 앞두기도 했지만, 국내로 들어와 그룹 경영에 합류하기 전 미리 경험을 쌓자는 이유였다. 최 회장이 국내로 귀국한 뒤 터진 외화 밀반출 의혹 사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 이 사건은 당시 신혼이던 1990년 1월 최 회장 부부가 19만달러를 세관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미국내에 반입한 혐의로 미국 검찰에 의해 피소되면서 벌어졌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스위스은행 계좌설까지 나오면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최 회장 부부는 처음 이 사건이 불거진 이후 1994년 사건이 끝날 때까지 무려 4년동안 시달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최 회장은 1991년 SK상사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SK상사 이사 겸 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장, SK상사 상무, SK(주) 상무 등 착실히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최 회장이 그룹경영에 본격적으로 몸담은 것은 1996년 SK(주)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였다. 그는 SK(주)에 근무하면서 e-비즈니스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인터넷, 통신분야가 미래 경제를 이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는 SK(주)로 옮기자마자 OK캐쉬백 , 엔카닷컴, 텔레메틱스 등의새로운 서비스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998년 8월 부친이 작고하면서 한때 흔들렸다. 부친의 죽음은 최 회장뿐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당시 IMF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경제난이 닥친 점도 최 회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부친이 없는 빈자리는 최종현 회장의 고명을 받은 손길승 회장이 메워 주었다. 최 회장은 직접 그룹의 구조조정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는 1999년 1월 미국 엔론사로부터 2억4천3백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SK엔론(주)라는 한미합작법인을 설립했다.  그 결과 최 회장은 1998년 12월 WEF(World Economic Forum)가 선정하는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 회장은 2002년 8월 WEF의 동아시아지역 공동의장에 선임돼 국내외 경제계에서 착실히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원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실전 경영론을 강의하기도 하고, 2002 월드컵 경기 때는 붉은악마가 되어 거리응원에 직접 나서는 등 자신의 이미지 구축에 열성적이다. 젊은 경영인들의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V Society)라는 모임을 주도적으로 구성해 또래의 CEO들과 경영의식을 교류하는 데도 열심이다. 그의 경영수업은 회사 업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교와 거리와 사교모임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선섭 기자]]></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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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2화 SK그룹 최태원 (주)SK회장 (2)]]></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27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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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0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0/1036855202302770.jpg" alt=""/>    ▲ 지난 5월 대기업과 벤처기업 경영인들의 모임인 ‘V 소사이어티’ 회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이 정보통신 관련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최태원’이라는 이름이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무렵이었다. 그의 이름이 관심을 모은 이유는 그 즈음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딸 소영씨(현 아트센터 나비 관장)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때문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최종현 회장의 장남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최태원 회장의 결혼 발표는 세간의 최대 화제거리였다. 최고 재벌가와 당대 최고의 실세 정치인 집안이 혼사를 맺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기에 충분했다.이 사실이 전해지자 세간에선 이들의 결혼을 ‘정략 결혼이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씨의 결혼은 세간의 추측과는 달리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진 결실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결혼을 하기 3년 전(결혼은 1988년 9월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있었다)이던 1985년 무렵이었다. 최태원 회장의 회고.“미국 시카고대 경제과에 유학 중이던 1985년 무렵 처음 만났다. 당시 소영씨는 런던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시카고대로 진학했는데, 이 즈음 한국 유학생들의 테니스모임에서 만나게 됐다.”두 사람이 첫 대면한 것은 소영씨가 시카고대 대학원 진학을 위해 런던에서 시카고로 오던 날 시카고공항에서였다. 당시 재미 시카고대 유학생 대표를 맡고 있던 최태원 회장이 소영씨를 마중나간 자리였던 것이다.그 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유학생들의 테니스모임에서 어울리면서 가까워지게 됐다. 이것이 이들이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었다.두 사람이 양가 부모에게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한 것은 만난 지 2년 뒤인 1987년 6월10일이었다. 당시 최태원 회장의 부친 최종현 회장과 박계희 여사는 직접 미국까지 건너가 소영씨를 만났다. 소영씨를 만나 본 최종현 회장과 박계희 여사는 매우 흡족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해 계열사 사장들 중에는 걱정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최종현 회장은 미국에서 소영씨를 만나본 뒤 귀국해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아들의 결혼 문제를 처음 공개했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그룹 경영인의 회고.“당시 사장단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최종현 회장이 아들 결혼 얘기를 꺼냈다. 참석자들은 상대자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딸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일부 사장들이 ‘혹시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말을 했다. 그때 최 회장은 ‘뭐 지들이 좋다고 하니’라고 말했다.”일부에서 이 결혼을 걱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80년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석유공사 인수 이후 SK그룹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여전히 따가웠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SK그룹은 석유공사를 인수하면서 한진, 쌍용, 효성 등 당시로선 쟁쟁한 재벌들을 제치고 재계 서열 5위로 치솟았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여러가지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같은 시각에 대한 SK그룹 관계자의 반박. “석유공사를 인수한 것은 정부의 엄격한 심사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경쟁사들도 이를 납득했다.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씨가 결혼한 것은 석유공사 인수건과는 전혀 무관한 가족의 일이었다.”그러나 재벌가와 정치인 집안의 결혼에 따른 후유증은 의외로 컸다. 나중의 일이지만 1992년 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그 중 하나였다.당시 SK그룹은 포철, 코오롱, 쌍용, 동부, 동양 등 내로라하는 재벌들과 함께 인수전에 뛰어들어 사업권을 따냈다. 그러나 SK그룹은 인수자로 선정된 지 한달 만에 사업권을 반납했다. 당시 김영삼 민정당 대통령 후보까지 나서 SK그룹의 사업권 반납을 요구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그 후 제2이동통신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뒤인 1994년에 재입찰에 부쳐져 SK그룹이 지분 31%를 매입하면서 인수에 성공하긴 했다. 그러나 SK그룹이 이같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최태원 회장의 결혼과 무관하진 않았다.최태원 회장이 경영의 중심에 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곳은 ‘경영기획실’이라는 조직이었다. 경영기획실은 최종현 회장이 그룹경영권을 이어받은 1974년에 설립한 신설 조직이었다. 당시 다른 재벌들도 대부분 이같은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삼성그룹의 회장비서실, 현대그룹의 종합기획실, LG그룹의 회장비서실 등이 SK그룹의 경영기획실과 비슷한 조직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10/1036855202302771.jpg" alt=""/>    ▲ 94년 제2이동통신 지배주주에 오른 직후의 최종현 회장(작은 사진 가운데)  SK그룹의 경영기획실은 대한석유공사, 제2이동통신 등을 인수하는 작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룹을 대표하는 전문 경영인인 손길승(그룹회장), 김창근(SK사장), 조정남(SK글로벌 부회장), 김항덕(전 SK 부회장) 등이 경영기획실 출신이다. 경영기획실이 최태원 회장을 경영 중심에 올려놓는 작업은, 1991년 말 최 회장이 (주)선경(현재의 SK글로벌) 부장으로 막 입사한 때부터 착수됐다. 그 무렵이던 1991년 4월 SK그룹은 계열사인 (주)SK와 (주)선경건설이 전액 출자해 선경텔레콤이라는 낯선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듬해인 1992년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이 회사는 원래 최태원 회장이 제안해 만든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향후 경제의 축이 통신업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최종현 회장을 설득해 이 회사를 세웠던 것이다.출범 당시 보잘것 없던 이 회사는 제2이동통신 인수의 주체로 나서면서 나중에 가공할 위력을 가진 회사로 컸다. 이 회사는 1995년에 선경정보시스템을 통합했고, 이어 (주)SK의 통신망 부문이었던 SK-네트를 인수하면서 알짜회사로 거듭 태어났다. 그런 뒤 이 회사는 이름을 다시 현재의 (주)SKC&C로 변경했다.SKC&C는 급성장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소유권과 관련해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제2이동통신을 인수한 직후 대한텔레콤의 지분은 최태원 회장에게 70%(70만주), 매제였던 김준일 대한텔레콤 이사(최태원 회장의 여동생 최기원씨의 전 남편)에게  21%(21만주)가 넘어갔다.문제는 이들에게 넘어간 지분의 주식가격이었다. 당시 SK그룹은 두 사람에게 주당 4백원에 주식을 매각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SK그룹이 SKC&C와 SK텔레콤(제2이동통신)을 합병하려고 했을 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편법증여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사안이 커지자 최태원 회장은 1998년 자신이 갖고 있던 SKC&C 지분 79% 가운데 30%를 SK텔레콤에 무상증여했다. 2002년 10월 현재 이 회사의 주식소유 현황은 최태원 회장 49%, SK텔레콤 30%, 최기원 10.5%, SK에너지판매 10.5%로 돼 있다.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2000년 5월까지 2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김준일씨(당시 SKC&C 전무)가 빠진 대신 최기원씨와 (주)SK에너지판매가 새로 대주주 명단에 등장한 점이다. SK텔레콤은 최태원 회장이 무상증여하면서 30%의 지분을 갖게 됐다.SKC&C(대한텔레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이 회사가 그룹의 지주회사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2002년 10월 현재 SKC&C는 SK텔레콤의 4대주주 회사일 뿐 아니라, (주)SK의 주요 주주가 됐다. SK의 소유구조를 보면 (주)SK를 축으로 SK글로벌-SK텔레콤-SK증권-SK건설 등의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주)SK의 지배권을 SKC&C가 장악하고 있어 이 회사가 실질적인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SKC&C의 최대주주가 최 회장과 최기원씨(두사람의 지분합계는 59.5%)이고, 최 회장이 거의 모든 지분을 가진 (주)SK에너지판매가 10.5%를 가지고 있으니 그룹의 지배권은 최 회장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다.최태원 회장은 최종현 회장 작고 이후 (주)SKC 주식 3백92만주(24.8%), (주)SK 4만주(0.06%), SK글로벌 1백28만주(5.27%) 등을 상속받았다. 최 회장은 또 SK상사(SK글로벌), (주)SK, SKC&C, SK건설, 쉐라톤워커힐, SK텔레콤 등의 계열사에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2000년 당시 그룹 지주회사로 부상한 SK글로벌의 지분에 변화가 생겼다. 최태원 회장의 지분율은 높아진 반면, 최윤원 회장 형제의 지분율은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또 최태원 회장이 대주주로 있던 (주)SK가 99%의 지분을 가진 SK에너지판매와 SK유통이 합병되면서  SK글로벌의 지배구조는 최태원 회장 중심으로 만들어졌다.SK글로벌 출범과 함께 (주)SK의 자회사로 입지를 끌어내려 결국 전 계열사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소유지배력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당시 SK상사와 SK에너지판매를 1대0.52주의 비율로 합병해 (주)SK가 SK상사의 지분 38%를 소유하게 했다. 이후 SK상사는 상호주식보유금지 규정에 따라 (주)SK의 주식을 매각해야만 했다. SK상사가 매각한 (주)SK의 주식은 최태원 회장이 모두 매입해 2002년 6월 현재 최 회장은 SK글로벌의 지분 3.31%(3백18만8천6백94주)를 갖고 있다.이 결과 (주)SK는 SK상사와 SK에너지판매, SK유통 등 3개사를 합친 SK글로벌의 지분 38.68%를 가진 최대주주가 되는 한편 SK건설, SKC, SK케미컬 등 주요 계열사들도 지분을 골고루 갖게 됐다.최태원 회장의 그룹 지배권은 SKC&C를 정점으로, (주)SK를 통해 각 계열사를 지배하는 사슬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소유구조 형성을 통해 그는 사실상의 그룹오너가 돼 있는 것이다.                   정선섭 기자]]></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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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2화 SK그룹 최태원 (주)SK회장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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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3 Nov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103/1036250402302760.jpg" alt=""/>    ▲ 최태원 회장  걸어온 길▲崔泰源 (Chey Tae Won)▲1960년 12월3일생▲1979년 서울 신일고 졸업▲1983년 고려대 물리학과 졸업▲1989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1989년 METRA사 근무(Business Development Manager)▲1991년 SK상사 부장▲1993년 SK 아메리카 이사대우▲1994년 SK상사 이사대우(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1995년 SK상사 이사(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장)▲1996년 SK상사 상무, SK(주) 상무▲1997년 SK(주) 대표이사 부사장▲1998년 9월~현재 (주)SK 대표이사 회장신상명세▲혈액형: B형 ▲신장: 179Cm▲체중: 85Kg  ▲종교: 없음▲존경하는 인물: Dr. Gayle Johnson(고 최종현 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시카고대 스승)▲좌우명: ‘승부에는 최선을 결과에는 승복을’▲인재관: Multi Functional▲주량: 소주 1병 ▲담배: 비흡연▲스스로 평가하는 성격: 합리와 효율 중시▲승용차: 체어맨▲기호식: 일식▲특기: 스포츠(테니스)▲취미: 만능 스포츠맨▲별명: 없음▲IMF 시대 경영자에게 필요한 자세: 지식경영1998년 8월26일 오전 7시40분. 아차산 끝자락에 위치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 옆 최종현 SK그룹 회장 자택은 깊은 슬픔에 휩싸였다. 최 회장이 숙환으로 작고한 것이었다. 이날 새벽 최 회장은 지병인 폐암 증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을 찾았으나, 병세를 호전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국 가족들은 최 회장의 뜻에 따라 이날 새벽 자택으로 돌아왔고, 몇시간 뒤 최 회장은 6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최 회장은 오랫동안 폐암으로 고생해오다가 1998년 초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그해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대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말기 판정을 받은 병세를 돌리지는 못했다. 최 회장의 사망은 한국 경제계에 큰 슬픔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외유내강의 성격인 그는 1993년 전경련회장 재임 당시 정부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선비형 기업인이었다.최 회장이 작고한 뒤 지인들은 부인 박계희 여사가 최 회장의 병간호를 하다 일년 앞서 작고한 것과, 최 회장보다 25년 앞서 폐암에 시달리다가 48세(1973년)에 작고한 친형 최종건 회장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최 회장의 죽음은 한국 경제계에 큰 손실이기도 했다. 그는 수원의 한 작은 직물공장에서 출발한 SK그룹(모기업은 선경직물)을 국내 4대재벌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신경영시스템과 소유-경영의 분리를 실천한 선구적 경영인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1973년 그룹 창업자이자 맏형인 최종건 회장의 뒤를 이어 44세의 나이에 회사 경영을 이어받았다. 이후 그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면서 SK그룹을 재계의 강자로 부상시켰다. 당시 삼성그룹과 맞붙은 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서 재계는 막강한 자금력과 로비력을 가진 삼성그룹이 우세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SK그룹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인수전이 끝난 뒤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석유공사를 인수하지 못한 데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인지 지금도 삼성그룹과 SK그룹의 사이는 그리 친하지 않다. 2002년 5월에 있은 KT 지분 매각에서도 SK그룹은 강력한 라이벌이던 삼성그룹을 따돌리고 대주주로 올라서 또다시 삼성그룹을 울리기도 했다.  최종현 회장은 재벌의 총수이기 이전에 학자였다. 생전에 최 회장은 항상 연구하는 경영인의 자세를 견지해 SK그룹의 참신한 기업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설립한 SK장학회는 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지식의 보고(寶庫)’ 역할을 했다. 그룹총수에 오른 뒤 SKMS(SK-Management System:선경경영관리시스템)라는 독특한 경영시스템을 만들어 그룹의 경영기반을 다졌다. 또 치열한 경쟁서 살아남기 위해 사업분야별 최고를 지향하는 ‘수펙스(Supex: Super Exellent)운동’을 전개했다.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시대정신을 담은 SKMS와 수펙스운동은 황제경영에 길들여진 한국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시스템은 한국 기업들이 지향해야 할 소유와 경영의 조화라는 목표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기업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최종현 회장이 작고한 지 엿새 후인 1998년 9월1일, 한국 재계는 ‘최태원’이라는 30대 후반의 한 재벌 2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SK그룹의 새로운 오너로 등장한 그는, 최종현 회장의 장남이었다.최태원 (주)SK 회장이 SK그룹의 경영 승계자로 확정된 것은 고 최종현 회장의 오일장 절차가 끝났던 1998년 8월30일 밤 열린 가족회의에서였다. 이날 가족회의는 최종현 회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던 서울 광장동 워커힐빌라 에머랄드홀에서 있었다.이날 회의에는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전 회장의 직계인 최윤원 SK케미컬 부회장과 최신원, 최창원씨, 그리고 최종현 회장의 직계인 최태원(당시 (주)SK 부사장)과 재원씨 등 다섯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SK그룹 계열사의 대주주들이자 SK가문의 차세대 5인방으로 꼽혀온 사촌 형제들이었다.이날 열린 가족회의에서 다섯명의 사촌들은 최태원 당시 (주)SK 부사장을 그룹의 경영권 승계자로 정하는 데 합의했다. 사촌형제들 중 맏형인 최윤원 부회장이 “최태원 부사장에게 대주주들의 대표권을 위임하기로 결정하자”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가족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룹회장에 오르진 않았다. SK그룹은 이틀 후인 1998년 9월1일 오전에 열린 계열사 사장단회의 격인 수펙스(SUPEX)회의에서 손길승 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선임하고, 최 회장은 (주)SK의 회장을 맡았다.그런 결과는 재계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재계는 당연히 최태원 회장이 그룹회장으로 경영권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대주주들이 그에게 대표권을 이양했고, 사실상의 오너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선택에 대해 재계에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오갔다. 그 중 지배적인 해석은 “재벌 2세의 경영 대물림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여론을 의식한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손 회장 체제는 과도기에 그칠 것이라고 해석했다. 어쨌든 이 결정은 한국 재벌사에서 처음으로 오너경영인과 전문경영인의 ‘동거시대’를 열었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의 시발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오너 경영체제에 길들여진 재벌들의 시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이 체제에 대해 SK그룹 내부에서는 한동안 혼란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신사업 투자나 임원인사 등 중요한 경영사안을 두고 누구로부터 최종 결재를 받아야 하는지 우왕좌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같은 혼란은 정리가 됐다. 그룹 구조조정본부 고위관계자는 “신규투자 등 주요 사안은 최고경영자 회의를 통해 이뤄지고, 인사 문제 등은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회장이 협의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스티어링(STEERING)회의는 최고 경영인들과 대주주들이 모여 경영 현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예컨대 2002년 5월에 있은 KT 지분 인수문제 등도 이 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 회의 의장은 손길승 회장이 맡고 있다.그렇다면 SK그룹의 이같은 경영체제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딱 부러지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향후 10년 이내에 황제식 경영은 사라진다”며 기존 경영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이는 현재의 경영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반면 손길승 회장은 “최 회장이 충분한 경영실습 과정을 거친 뒤 그룹총수에 오를 것이다”는 입장을 수차례 공개했다. 현재의 경영체제가 한시적이며, 자신은 언제든 물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분명한 것은 이같은 동거체제가 출범 5년을 맞으면서 경영의 무게 중심이 조금씩 최태원 회장에게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 3월에 단행된 SK그룹 정기 임원인사는 이같은 징후를 엿보게 했다.2002년도 그룹 정기인사가 단행되기 직전이던 2002년 2월25일 SK그룹 내부에서 벌어진 (주)SK 유승렬 사장의 갑작스런 사표제출도 그 중 하나였다. 유 사장은 40대 후반에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았고, 이어 주력사인 (주)SK 사장에 발탁될 만큼 고속승진 가도를 질주하던 전문경영인이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자 재계에는 최태원 회장과의 불화설이 제기됐다. 불화설의 배경이야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중요한 것은 유 사장이 퇴임하는 것을 기점으로 SK그룹 경영진에 새 얼굴들이 대거 부상했다는 점이었다.(주)SK 사장으로 최태원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52)이 겸직 발령났고, 박주철 SK글로벌 사장, 홍지호 SK케미컬 부사장 등 50대 초의 신진 세력이 주요 계열사의 최고 경영자로 등장했던 것이다.특히 (주)SK 유정준 전무(40)의 발탁은 최태원 회장이 사실상 SK그룹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주)SK의 등기이사 명부에까지 오른 유 전무는 그동안 최태원 회장이 가장 신뢰하는 경영인 중 한 명이었다. SK그룹은 신진 경영인의 등장에 대해 ‘신구의 조화’라고 스스로 평했다. 하지만 2002년 말 현재 60세 이상의 원로급 경영인은 손길승 회장, 황두열 (주)SK 부회장,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 김승정 SK글로벌 부회장 등 네명에 불과한 것은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최태원 회장이 최고 경영진에 합류한 직후인 1999년과 2000년 정기 인사에서 친인척을 주력사의 핵심 포스트에 대거 포진시킨 부분도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이다. 표문수 SK텔레콤 사장(고종사촌),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친동생), 박장석 SKC 부사장(고종사촌), 최창원 SK글로벌 부사장(사촌) 등이 줄줄이 경영의 핵심 포스트에 입성했다.이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손길승-최태원의 동거체제는 향후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손길승 회장이 오프라인에서 캐쉬카우(Cash-Cow)역할을 맡고, 최태원 회장은 신규사업, e-비즈니스를 진두지휘하는 사업구조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체제도 한시적일 것이란 게 SK그룹 안팎의 지배적인 견해다. 손길승 회장도 “최 회장이 경영능력을 갖추면 그룹회장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SK그룹 고위 관계자들도 최태원 회장 체제로의 전환은 시간문제로 내다보고 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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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화 삼성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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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7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7/1035645602302750.jpg" alt=""/>    ▲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왼쪽)  윤종룡 삼성전자 부회장   2002년 9월21일, 이재용 상무보는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기도 전에 그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미국 GE그룹에서 실시하는 최고경영자 양성과정(EDC:Executive Development Course)의 연수를 받기 위함 때문이었다.그가 추석 연휴를 가족과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은 경영에 막 참여한 2001년에 이어 두번째였다. 지난해 추석 때는 삼성전기 인도네시아 공장을 방문하는 바람에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추석 연휴를 반납해야 하는 GE연수는 뉴욕에서 북서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오시닝 지역에 있는 GE크로톤빌연수원에서 있었다. 2002년 9월23일부터 10월15일까지 3주 동안 실시된 이 연수에 이 상무보가 참가하게 된 것은 제프리 이멜트 GE회장의 특별초청 덕분이었다.이멜트 회장은 GE그룹 회장으로 선임된 직후인 2001년 10월 한국을 방문, 이건희 회장과 한남동 승지원에서 만나 이 상무보의 최고경영자 연수과정 참가를 제안했다. 이 상무보는 연수에 참가하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했다.이 상무보의 GE연수 참가 사실이 알려지자 재계는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 상무보의 경영자 수업이 어느 정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느끼게 해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국내 재벌의 경우 대부분 후계 경영승계의 초점을 재산을 넘겨주는 데 집중하거나, 해외 유학이나 고속 승진을 통한 내부입지 강화 정도에 국한돼 있다. 이러다 보니 경영자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한 경영수업은 매우 부족한 게 사실이다.그러나 삼성그룹의 이재용 상무보에 대한 경영자 수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재계가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점 때문이다.사실 이 상무보는 이건희 회장이 약관 26세에 동양방송 이사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시작한 것에 비하면 시기상 상대적으로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이 상무보에 대한 경영수업의 강도는 부친이 받았던 것보다 더 엄격하고,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이 상무보에 대한 경영수업은 그룹경영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 구조조정본부가 주관하고 있다. 구조조정본부는 이 상무보가 첫 출근한 2001년 4월2일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경영수업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 상무보가 40세가 되는 2007년까지 강도높게 진행될 예정이다.이 상무보의 집무실은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25층에 자리잡고 있다. 이 층에는 윤종룡 삼성전자 부회장,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의 사무실도 함께 있으며, 건물 중앙의 엘리베이터 맞은편에는 이 상무보가 소속된 경영전략실이 위치하고 있다.이 상무보의 집무실이 있는 삼성본관 25층은 삼성그룹을 움직이는 헤드쿼터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다. 바로 윗층인 26층과 27층에는 삼성그룹의 싱크탱크 집단인 구조조정본부가 자리잡고 있고, 28층에는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이 있다. 25층은 삼성그룹의 최고 경영자를 향해 올라가는 첫 계단인 셈이었다.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내부 인사는 이건희 회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윤종룡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 황영기 삼성증권 사장 등이다. 그 중에서도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윤종룡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은 크게 네가지 방향에서 진행됐다. 첫째는 최고 경영자가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을 쌓는 것이고, 둘째는 전자를 중심으로 한 첨단기술에 대한 이해와 흐름을 읽는 능력을 높이는 것이고, 셋째는 그룹 전체의 경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며, 넷째는 글로벌 경영감각을 체험 위주로 익혀나가는 것이다. 이 상무보는 이같은 네가지 방향을 전제로 먼저 경영 총론을 파악한 뒤, 경영 각론을 체험적으로 익혀나가는 단계별 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돌발상황에 대비한 비상 경영체제 가동이라는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다. 비상경영 체제는 경영공백이나 과도기에 대비해 짜여진 것이다.이 상무보는 경영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쌓기 위해 그룹의 최고 전문경영인들과 25층 회의실에서 수시로 대화와 토론을 갖고 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 전문 연구원, 국내외 경제 흐름 및 금융시장 동향과 관련한 국내외 금융기관의 경영, 경제 관련 연구원들과도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자주 마련하고 있다. 그룹 경영 전반에 대한 흐름은 구조조정본부가 수시로 전하는 보고서와 국내외 사업현장을 방문하는 등의 체험을 통해 직접 익히고 있다. 그는 ‘권위적인 조직문화보다는 원활한 의견교환을 하는 챌린저 문화’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업무적으로 모르는 사항이 있으면 직접 실무 담당자를 찾아가 격의없는 토론을 가졌다.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업현장을 직접 방문해 보고듣는 체험학습이었다. 2001년 4월 그가 첫 출근한 이후 매년 일년의 절반 이상을 국내외 공장 방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그는 경영참여 직후인 2001년 5월부터 1백일 동안 삼성의 가장 오지 사업장인 브라질 마나우스공장을 포함해 말레이시아, 영국, 독일, 스페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공장을 순례했다. 귀국한 직후에는 곧장 수원, 기흥, 구미, 부산, 천안, 온양 사업장을 둘러보는 강행군에 나서기도 했다. 이 상무보의 사업장 방문은 단순한 견학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이 상무보의 사업장 방문을 직접 수행했던 삼성그룹 관계자가 전하는 얘기. “이 상무보는 국내외 공장을 방문하기 전, 해당 공장의 역사에서부터 생산품, 시장동향, 장점과 단점 등에 대해 며칠 밤을 새워가며 꼼꼼히 체크했다. 현장 방문에서는 주로 임직원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편이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글로벌 경영감각을 익히는 과정이다. 그의 글로벌 경영감각은 국제 경제, 정치 분야의 리더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했다. 이 과정을 통해 확고한 경영관과 세계관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이에 따라 그는 경영참여 이후 제프리 이멜트 GE그룹 회장, 니시무로 다이조 도시바 회장, 잭 웰치 전 GE그룹 회장 등 세계적인 기업인과 만났고, 주룽지 중국 총리, 자크 로게 IOC 위원장, 앨빈 토플러 등과도 만났다.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은 별다른 안팎의 저항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의 경영수업은 삼성그룹의 특성처럼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착실한 내실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그의 해외 출장이나 사업장 방문, 외부 인사들과의 접촉 등 주요 일정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알려지고 있는 것도 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경영참여 이후 이 상무보에 대한 삼성그룹 안팎의 시각은 매우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재산증여 문제로 제기됐던 비판적 시각은 수그러들었고 삼성그룹 오너에 대한 디그니티(Dignity)도 회복되고 있다.그러나 이 상무보가 순탄하게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게 삼성그룹 안팎의 시각이다. 그 중에서도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것과 삼성그룹의 확고한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할 수 있다.특히 그가 직면하고 있는 당면 과제는 현재의 경영수업을 통해 그룹의 미래전략을 확고하게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삼성의 경영이 개인플레이보다는 시스템에 의해 이뤄지고 있지만, 그룹 경영에서 차지하는 이 상무보의 좌표가 절대적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건희 회장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반도체사업에서의 성공과 자동차사업에서의 쓰라린 경험은, 최고 경영자의 의사결정이 기업 경영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상무보도 자신의 역할과 의사가 그룹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그는 경영참여 당시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자본시장에서 저평가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해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켜 나가는 데 일조할 계획이다.”이 상무보는 삼성그룹이 안고 있는 현안이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경제계가 이 상무보의 경영수업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정선섭 기자]]></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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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화 삼성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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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0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0/1035040802302740.jpg" alt=""/>    ▲ 지난 98년 6월 세간의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진 이 상무보의 결혼식 장면.  이재용 상무보는 1968년 6월23일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이건희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다. 부친은 앞서 1966년 중앙일보, 동양방송(TBC)에 입사해 경영수업도 함께 받고 있었다. 이 상무보가 태어난 워싱턴시 알링턴에는 당시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이던 봉두완  전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친동생인 이성호 당시 평화여행사 대표 등도 살았다. 바로 옆집에 살았던 봉 전 의원은, 그 때 맺은 이건희 회장과의 인연으로 나중에 TBC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4월 부친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 커플의 결혼은 세간의 최대 화제거리였다. 이－홍 커플의 결혼은 최고 재벌총수와 관계 출신 명문 집안이 사돈을 맺는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 상무보는 부친의 유학 생활이 끝난 뒤 귀국해서는 조부모와 함께 서울 장충동 집에서 살았다. 장충체육관 건너편 주택가에 위치한 이병철 회장의 자택에는 이병철 회장, 박두을 여사, 그리고 이 상무보 가족이 함께 지냈다. 당시 이 상무보의 백부(이맹희씨)와 둘째 숙부(이창희씨)는 분가한 상태였다. 다행히 백부가 선대 회장의 장충동 자택 바로 옆에 살았기 때문에, 이 상무보는 사촌 누나인 이미경씨와 이재현씨(제일제당 회장)와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이 상무보는 조부와 함께 살면서 어려서부터 경영인으로서 갖춰야 할 산교육을 받았다. 이 상무보는 방학 때는 사촌들과 함께 삼성그룹 계열사 공장을 견학하기도 했다. 그가 기업경영자의 자질을 닦은 것은 그 때부터였던 셈이다.이 상무보를 잘 아는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의 얘기. “이 상무보는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3대 기업이념과 이건희 회장의 질중시 경영에 대해 수십년간 배워온 우리보다 더 깊게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가 평소 어느 정도로 집안에서 철저하게 경영자 교육을 받았는지 느낄 수 있다.”지금도 이 상무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로 이병철 회장을 꼽는다. 이 상무보를 잘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는 ‘이병철 회장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종교에 가깝다”는 것이다.이 상무보는 1984년 서울 청운중을 졸업했다. 청운중은 당시 명문가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지금은 매제가 된 김재열 제일기획 상무보(이 상무보의 둘째 여동생 서현씨 남편)도 이 상무보의 청운중학교 동창이다. 김 이사와 서현씨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도 이 상무보였다. 이 상무보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복고에 진학했다. 경복고는 남다른 인연이 있던 학교였다. 사촌형인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이 이 상무보의 경복고 8년 선배다. 이 상무보의 중, 고교 학업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특히 그는 영어와 수학 과목의 성적이 우수했다. 그의 고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적혀 있다. 고교 시절 친구가 전하는 이 상무보에 대한 기억. “이 상무보의 집안이 삼성가라는 사실을 생일날 초대받고 가서 알았다. 평소 이 상무보는 명문가 자제라는 걸 전혀 티내지 않았다. 이 상무보는 평소 별로 말이 없었고, 친구들이 얘기를 하면 가만히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이 상무보의 고교 시절 선생님이 전하는 기억.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무슨 일을 시작하면 마무리를 지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학과는 수학 과목을 유난히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조부 이병철 회장이 이 상무보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도 이 상무보의 좌우명 중 하나가 ‘경청(傾聽)’인 것도 조부의 가르침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는 것이 조부의 당부였다. 이 상무보가 대학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조부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전공 선택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병철 회장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영이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때문에 교양을 쌓는 학부 과정에서는 사학이나 문학과 같은 인문과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은 외국 유학을 가서 배우면 좋을 듯하다”이 상무보는 조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울대 인문대 동양사학과로 진학했다. 이 상무보의 외국 유학은 부친 이건희 회장과 유사한 과정으로 진행됐다. 이 상무보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 경영대로 진학해 MBA를 취득했다. 부친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를 나와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공부했다.이 상무보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추세였음에도 일본에서 MBA를 마친 것은 이건희 회장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을 앞둔 이 상무보에게 이렇게 충고했다.“우리가 앞으로 배워야 하고 사업을 많이 해야 하는 나라는 일본과 미국이다. 미국을 먼저 보고나서 일본을 나중에 보면 일본 사회의 특성, 일본 문화의 섬세함과 일본인의 인내성을 알지 못한다. 유학을 가려면 일본에 먼저 가라.” 이 상무보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91년 12월 공채 32기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이 상무보는 경영자 수업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 상무보는 일본 게이오대 유학 시절 기업경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일본 유학 시절 이 상무보는 이병철 회장의 ‘무한탐구’ 정신과 이건희 회장의 ‘기술중시’ 정신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R&D(연구개발)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방학 때가 되면 미국과 일본의 첨단 R&D센터를 방문, 그 곳 기술진과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였다. 이때 이 상무보를 가까이서 도와준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최고 경영인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윤우, 이기태, 진대제 사장 등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20/1035040802302741.jpg" alt=""/>    ▲ 이 상무보와 부인 임세령씨가 결혼식을 올리기 반년 전인 98년 1월 어느날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 상무보는 1995년 게이오대 경영대학원에서 ‘일본 제조업 산업공동화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MBA를 취득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일본 제조업이 엔고 등으로 비용구조가 높아지자 해외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데 대한 연구였다. 이 논문은 당시 인건비 부담 증가, 물가상승 등 고비용구조로 바뀌고 있던 한국 경제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이 상무보는 1996년 무렵 일본을 떠나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케네디스쿨은 행정학을 전공하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경영학을 전공하는 비즈니스스쿨로 옮겼다. 비즈니스스쿨에서 그가 연구한 분야는 당시 신경제 붐을 타고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던 컴퓨터 분야였다.이 상무보는 5년동안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이 상무보와 함께 유학을 했던 이현승 메릴린치 서울지점 이사(재경부 서기관 출신)의 회고. “이 상무보는 통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할 정도로 검소하고 성실했다. 예의가 무척 바르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이 상무보는 미국 유학 시절 세계 저명인사들과도 얼굴을 익혔다. 당시 그가 만난 사람 중에는 데이비드 코만스키 메릴린치 회장, 잭 웰치 GE그룹 전 회장 등도 있었다. 그는 특히 시간이 날 때면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인 미국 월스트리트를 자주 찾아 금융시장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이 상무보의 외국어 구사능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다. 일본과 미국을 유학한 덕분에 영어와 일본어 구사능력은 수준급에 올라 있다. 한자에도 능통해 중국과 한국의 고문을 독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이 상무보는 1998년 6월 자신보다 아홉살 아래인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맏딸 임세령씨와 결혼을 했다. 이 상무보가 부인을 만난 것은 일본에서 MBA과정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1997년 초였다. 그후 두 사람은 1998년 1월 세간의 관심 속에 약혼식을 올렸고, 6개월 후 결혼했다.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이 상무보의 모친 홍라희 여사와 장모 박현주 여사가 불교도 모임인 ‘불이회’ 멤버로 서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임세령씨는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재원으로, 명문가에서는 ‘최고의 며느리감’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혼사는 홍라희 여사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상무보와 임세령씨의 결혼은 영호남 재벌가의 혼인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화제를 뿌렸다. 이 상무보는 운동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그는 성격이 차분하고 집중력이 높은 탓인지 골프를 유난히 좋아한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시작한 골프는 핸디캡이 싱글 수준이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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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화 삼성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2)]]></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27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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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3 Oct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재벌가의 신 황태자]]></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13/1034436002302730.jpg" alt=""/>    ▲ 위는 컴퓨터에 열중하고 있는 이재용씨.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상설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 1월 초였다. 당시 2000년 1월3일 이 회장의 모친 박두을 여사가 별세했음에도 미국 출장중에 있던 이 회장이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당시 대부분의 삼성그룹 출입기자들은 이 회장의 건강 문제는 물론 이 회장이 미국 출장을 떠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회장이 건강이상으로 진료를 받기 위해 출국한 것은 1999년 12월12일이었다. 그러나 삼성그룹이 이 회장의 출국 사실을 밝힌 것은 닷새가 지난 뒤인 12월17일이었다.나중에 이 회장의 출국 사실이 확인되자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12월12일 미국으로 출국,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고 첨단산업 육성책 등을 협의한 뒤 연말쯤 귀국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이같은 설명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결국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삼성그룹의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연말에 귀국한다던 이 회장은 삼성그룹이 밝힌 귀국 시기보다 한 달이 더 지난 뒤인 2000년 1월26일 저녁이었다. 당시 언론사 기자들이 이 회장의 출국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회장은 출국하기 열흘 전인 12월3일 오가 노리오 소니그룹 회장을 한남동 승지원에서 접견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이 회장의 출국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가 IMF사태가 터진 1997년 말부터 2년 가까이 해외 출장을 가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삼성그룹 안팎에서 전개된 복잡한 사정에 비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이 회장은 1999년 초부터 시작된 언론사 세무조사로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구속되는 슬픔을 겪었고, 아들(이재용 상무보)의 증여문제로 정기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집중 공격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삼성자동차 법정관리에 대한 책임론마저 불거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때문에 이 회장이 20세기가 저무는 시점에 해외 출장길에 오른 점은 별다른 의심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13/1034436002302731.jpg" alt=""/>    ▲ 지난해 3월 신임 임원 승진 축하연에 부인 임세령씨와 함께 참석한 이재용 상무보.    이 회장의 신상에 모종의 변화가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3일 모친 박두을 여사가 별세한 직후였다. 당시 이 회장은 모친상을 당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귀국하지 않았다. 모친의 발인일인 1월5일에도 이 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회장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미국 휴스턴에 있는 세계적인 암전문 의료기관인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있었다. 이 사실이 국내 언론에 알려졌고, 이 뉴스는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삼성그룹은 펄쩍 뛰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얘기는 사실로 확인됐다. 삼성그룹은 나중에 이 회장의 건강이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 회장은 1999년 9월 삼성의료원에서 정기 신체검사를 받던 도중 오른쪽 폐 부근의 임파선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 종양으로 알았으나, 정밀 조직검사 결과 좌우폐 사이 림프절에 초기 암세포가 자라고 있음이 확인돼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진단을 받게 됐다”이 회장의 건강이상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그룹 임직원뿐 아니라, 재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재계 관계자들은 “선친도 암으로 고생하셨는데, 이건희 회장마저…”라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이건희 회장의 건강이상이 확인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재용씨에게 집중됐다. 삼성그룹은 불의의 상황을 예견이나 한 듯 수년전부터 재용씨에 대한 승계작업에 착수한 상황이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갑작스런 건강이상이 삼성그룹 전체에 패닉현상을 불러오지 않을까 우려했다. 바로 직전, 4대 재벌의 하나였던 대우그룹이 김우중 회장의 경영공백으로 급속히 침몰했던 악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삼성그룹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기업답게 표면상 흔들리지는 않았다.더욱이 삼성가와 삼성그룹 전체에 다행스러운 것은 이 회장의 암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2000년 1월27일 모친의 묘소 참배를 위해 일시 귀국했던 이 회장은 나흘 후인 1월31일 미국 휴스턴으로 다시 출국했다. 이 회장은 그 해 4월6일 귀국할 때까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부인 홍라희 여사의 손을 꼭 잡고 공항에 모습을 나타낸 이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더이상 치료를 받을 게 없다는 병원의 통보를 받고 귀국했다”며 “그동안 걱정을 끼쳐 미안하며, 염려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소감을 덧붙였다.이 회장이 병마를 이겨내고 있을 즈음, 삼성그룹에서는 경영 승계를 위한 작업이 더욱 발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더이상 경영 승계작업을 미룰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삼성그룹은 먼저 재용씨에 대한 여론 환기작업에 착수했다. 이 상무보에 대한 언론 보도에 알레르기 반응으로 일관하던 삼성 홍보관계자들은 “여론이 어떠냐” “경영참여 시기가 언제면 좋을 것 같으냐”고 진지하게 묻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2000년은 그렇게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는 숨막히는 한 해였다. 최대 현안이었던 이 회장의 건강에 대한 우려는 그가 활짝 웃는 모습으로 귀국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여기에 삼성구조조정본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재용씨의 경영참여작업도 가닥을 완전히 잡아가고 있었다. 이 회장도 치료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달라진 행보를 보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사장단회의를 주재하고, 삼성자동차 부채처리 차원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채권은행단에 내놓는 결단을 내렸다. 이같은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움직임과 함께 재계의 관심을 끈 것은 재용씨가 보여준 뜻밖의 행보였다. 아직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재용씨가 국내에서 인터넷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음이 감지된 것이었다.삼성그룹 출신 인사들에 의하면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닷컴열풍이 몰아치던 1999년 말부터 착수됐다. 재용씨의 사업에는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의 직·간접적인 조언과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2000년 5월 자본금 1백억원으로 e삼성이 설립되면서 얼굴을 드러냈다. 2000년 말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e삼성을 중심으로 16개사(개인적인 투자회사 포함)에 달했다. e삼성인터내셔널, 오픈타이드(웹에이전시), 가치네트(금융), FN가이드(증권), 웰시아닷컴(금융), 뱅크폴(인터넷대출), 이니즈(자동차 매매), 인스밸리(생보), 크레듀(교육), 엔포에버(게임), 트랜스메타(CPU제조), 배틀탑(게임), 시큐아이닷컴(보안), 올앳(인터넷 카드) 등이었다.재용씨가 인터넷사업에 나선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었다. 재용씨가 닷컴사업에 나선 것은 개인적인 관심분야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컴퓨터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때문에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뜨겁게 불던 닷컴열풍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또다른 배경은 경영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 증여의혹 등으로 재용씨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빴다.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재용씨의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 입증이 필요했다. 인터넷사업이 성공한다면 재용씨의 경영승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잠재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이에 대해 삼성그룹은 “재용씨의 인터넷사업 투자는 닷컴 열풍을 타고 삼성에서 고급 인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e비즈니스의 경험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그러나 인터넷사업은 결과적으로 그룹 계열사나 본인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재용씨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e삼성의 지분 75%를 제일기획에 넘겼고, 삼성인터내셔널 지분 60%를 삼성SDS와 삼성SDI에 팔았다. 가치네트, 시큐아이닷컴 등 나머지 인터넷기업들의 지분도 삼성그룹 계열사로 모두 넘겼다.재용씨가 계획했던 인터넷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재용씨는 사실상 인터넷사업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어쨌든 재용씨의 경영참여에 대한 시그널은 2000년 12월 무렵 외부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삼성증권 입사설, 삼성전자 입사설 등이 삼성그룹 외부에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재용씨의 경영참여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2001년 초반부터였다. 그 해 1월9일 호텔신라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59회 생일잔치에서 재용씨는 계열사 사장단과 첫 공식 상견례를 나눴다. 이어 1월10일에는 이건희 회장이 1년2개월 만에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참석했고, 삼성그룹의 2001년도 정기 임원인사도 삼성전자의 정기주총이 열리는 2001년 3월9일 이후로 미뤄졌다. 마침내 이건희 회장은 2001년 2월28일 저녁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각중 전경련 회장의 희수연에 참석해 “재용이가 올해부터 (회사에)나올 겁니다”며 아들의 거취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회장의 이 말은 1995년부터 시작된 삼성그룹의 경영 승계작업이 사실상 마무리됐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선언인 셈이었다. 정선섭 기자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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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1화 삼성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1)]]></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27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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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6 Oct 2002 00:20:02]]></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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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1006/1033831202302720.jpg" alt=""/>    ▲ 지난해 4월 태평로 삼성본관으로 첫 출근하고 있는 이재용 상무보.  어떤길 걸어왔나 ▲1968년 6월23일 서울생 ▲1984년 2월 서울 청운중 졸 ▲1987년 2월 경복고 졸 ▲1992년 2월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학사) ▲1991년 12월 삼성전자 입사 ▲1995년 3월 일본 게이오대 경영대 경영관리연구과 졸(석사) ▲1997년 8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학) 석사과정 이수 ▲1998년 6월 임세령씨와 결혼 ▲2000년 12월 장남 지호군 출생 ▲2001년 3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경영학 박사(D.B.A.) 과정 수료 ▲2001년 3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재벌그룹의 세대교체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로 반세기를 넘긴 한국 재벌은 1980년대에 접어들어 창업 2세로 경영권이 이양되기 시작했고, 2000년을 기점으로 신경영 인맥 구축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 재벌인 삼성을 필두로 롯데,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제일제당, 신세계그룹 등 상당수 재벌들이 차세대 경영인에 대한 경영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SK나, 한솔, 태평양그룹 등은 세대교체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수순에 돌입했다. 재계도 2010년 이전에 현존 재벌의 대부분이 차세대 경영인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있다. 현재 경영 현장에서 실습에 돌입했거나, 실제 경영 전면에 나선 신경영인의 면면을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이들은 창업세대, 혹은 창업 2세 경영인들과 달리 좋은 생활 여건 덕택에 대부분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경영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이론적으로 경영자의 자질을 수업받은 셈이다. 때문에 이들은 금융, IT, 엔터테인먼트 등 신경제에 대한 지식이 선대 경영인에 비해 풍부하다. 이는 향후 한국 재벌들의 사업전개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창업 세대나 선대에 비해 도전정신이나 동물적 비즈니스 감각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소액주주운동 등 주주들의 권익이 강화됨에 따라 선대 경영인 시대에 누렸던 카리스마를 가지는 데 한계도 있다.  잭 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경영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고, 경영자는 고독한 심판자”라고 술회했다. 고독한 심판자의 대열에서 한국 재벌의 미래를 짊어질 신 황태자들의 현주소와 그들이 펼쳐갈 미래 경영은 어떨지 진단해본다.    2001년 3월10일 오후, 태평로 삼성본관 25층 삼성전자 회의실. 이날 이 곳에서는 삼성전자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사회에는 일본 출장길에 오른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 13명의 이사(사외이사 7명 포함)가 전원 참석했다. 이사회에 참석한 사람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사장,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부사장 등 76명과 정기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새로 선임된 김석수 전 대법관, 이갑현 전 외환은행장, 요란맘 Icon Mdialab 사장 등이었다. 삼성전자의 이사는 사외이사를 포함해 2000년 말까지 21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긴축 경영의 일환으로 이사진을 30% 축소키로 하면서 2001년부터 이사수가 14명으로 줄었다. 이날 이사회가 열린 것은 전날 정기주총을 통과한 2001년 임원승진안을 최종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윤 부회장이 의사진행을 맡은 이사회는 이재용 상무보가 포함된 정기 임원 승진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사회는 또 이 상무보를 삼성전자의 경영기획팀에 배치하고 경영전략업무를 담당토록 하는 세부 인사도 확정했다. 이로써 그동안 많은 추측과 논란을 빚었던 이재용 상무보의 경영참여 문제는 일단락됐다.  한국의 재벌사를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동양의 유교적 사고에서 출발한 장자상속이라든지, 아들에게 경영권을 대물림하는 남성 중심주의라든지, 선대의 낙점을 받은 자식이 경영권을 이어받는 지명상속의 전통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에 이르러 동양의 관습 중 하나는 깨졌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의 3남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항목은 유교적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직후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대물림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상인(商人)으로서 당대 최고의 경영인인 이병철 회장이 선택한 인물이었으니 새삼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을 맡은 이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이병철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새삼 삼성그룹의 경영 대물림을 상기하는 것은, 누가 경영을 이어가느냐 하는 부분이 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경영 환경이 바뀌어 전문 경영인의 중요성이 커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 재벌의 현실에서는 오너 경영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삼성의 현 위상에 비춰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에 주목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며, 그에게 모아진 재계의 기대와 관심은 비단 삼성그룹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의 선택은 장차 삼성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고, 한국 경제에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상무보가 장차 삼성의 경영권을 이어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추측은 다분히 흥미성 가십거리에 불과해 보인다. 이 상무보는 숙명적(宿命的)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어 가야만 할 입장에 있다. 그의 태생적 조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계승과 관련해 이 상무보의 가족관계는 부친 이건희 회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의 적자 3형제(맹희, 창희, 건희) 중 막내라는 운명을 극복해야 했다면, 이 상무보는 적어도 부친과는 차이가 있다. 삼성의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의 직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할 때 외동 아들인 이 상무보 이외의 다른 선택은 가능치 않아 보인다. 이 상무보의 4촌 형제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그룹에서 독립한 상태인 데다, 이미 삼성의 경영 지배권은 이건희 회장의 직계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3월10일은 삼성그룹뿐 아니라 이 상무보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삼성그룹은 이 상무보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자 수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이건희 회장은 2001년 1월 공식 석상에서 아들 이재용 상무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재용이가 기업 경영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재용이는 경영인으로서의 자질도 엿 보이는 것 같다.”  이 회장의 이 말은 아들에 대해 가급적 말을 아껴왔던 그의 과거 태도에 비춰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그룹의 미래 경영 계승과 관련해 그의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는 다음과 같은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기업 경영은 고민과 결단의 과정이고,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행위이다. (재용이가) 이를 감내할 사명감이 없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이 회장의 말은 이 상무보가 일단 경영에 참여해보고, 경영인으로서 자신이 없으면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경영 참여를 앞둔 아들에 대한 충고 이상은 아니었다. 이 회장이 약관 26세이던 1968년 중앙일보 이사로 그룹 경영에 참여한 이후 30여년 동안 체험해온 경영인으로서의 소회를 아들에게 전해준 것뿐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이례적으로 2001년 초 아들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 상무보의 경영 참여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회장이 아들에 대해 언급하기 전부터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이 상무보의 경영 참여에 대해 많은 예측을 했다. 예측을 종합하면 ‘이 상무보가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가 언제 경영에 참여할 것이냐 하는 시기 문제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상무보에 대한 경영 승계작업이 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것은 1995년 중반 무렵으로 파악되고 있다. 승계작업은 삼성그룹의 헤드쿼터격인 회장비서실(현재의 구조조정본부)에서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1995년 당시 비서실은 현명관 비서실장(사장급), 이학수 비서실 차장(부사장급. 재무팀장 겸임)이 최정점에 있었다. 승계작업을 실무에서 주도한 것은 비서실 재무팀이었다. 재무팀은 예나 지금이나 비서실의 핵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룹 내에서는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1995년부터 착수된 비서실 재무팀의 경영 승계작업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이 상무보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작업이었고, 두번째 단계는 이 상무보를 경영에 참여시키는 작업이었다. 당초 비서실은 두 작업을 1995년부터 2000년 말까지 6년에 걸쳐 진행할 작정이었다. 시한을 2000년으로 못박은 것은 이 상무보의 미국 유학이 끝나는 시점과 연관이 깊었다. 첫 단계인 소유권 강화작업은 1995년 이 상무보가 당시 비상장 기업이던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매입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후 이 상무보는 중앙개발 전환사채, 삼성SDS 전환사채, 제일기획 전환사채 , 삼성전자 전환사채 매입 등 일련의 계열사 유가증권을 사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결과 2001년 말 현재 이 상무보는 지주회사격인 중앙개발(에버랜드) 지분 25.1%를 확보하는 한편 삼성전자 지분 0.8%도 보유하게 됐다.  1997년 말까지 3년에 걸쳐 진행된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비상장 계열사 주식과 유가증권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절차상, 혹은 인수가격 등의 문제가 불거져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삼성그룹의 정보력과 상황 판단력을 감안해 볼 때 시민단체의 이같은 저항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삼성그룹이 무리라고도 보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까지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에 나섰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당시 시민단체, 법률학자 등은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 방법이 세금없는 부의 상속이라는 점을 들어 공평한 과세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국내 최대 재벌 삼성가의 후계자인 이 상무보가 굳이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 세금을 줄여 재산 늘리기에 나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때문에 이 상무보의 지분확장은 재산증식보다는 경영권 확보를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삼성그룹은 소액주주나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지분확보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들어갔던 것이다.     삼성은 1997년 말까지 이 상무보의 계열사 소유권 강화작업을 마무리한 뒤 두번째 단계인 경영권 진입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작업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화된 경영기류 탓에 멈칫 했다. 재벌의 경영권 대물림에 대한 사회여론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여기에 1998년부터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이 상무보의 재산문제에 시비를 걸고 나온 부분도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같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은 이 상무보의 경영참여라는 두번째 작업도 강행했다. 삼성그룹이 이 상무보의 경영참여를 강행하게 된 이면에는 1999년 말 불거진 이건희 회장의 건강 이상이라는 뜻밖의 사건이 터진 것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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