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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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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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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9 Sep 2002</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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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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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6화 마지막 투혼 - (2) 바덴바덴의 그림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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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9/1033226402303100.jpg" alt=""/>   한국스포츠의 총본산 대한체육회. 일제치하 민족체육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했던 전신 ‘조선체육회’로부터 따지면, 올해로 창립 82주년을 맞는 이 단체의 역사는 곧바로 한국근대사의 모습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정치 격변기, 권위주의의 군사정권을 거쳐 문민 민주화 시대의 도래로 이어지는 영욕의 세월을 ‘체육회’는 그 위상을 유지하며 연륜의 수레바퀴를 굴려왔다.  ‘체육회와 현대사 굴곡’의 관계는 역대 수장들의 면면을 되돌아보면 잘 드러난다. 해방 이후 여운형(11대) 신익희(14대) 조병옥(16대) 이기붕(17대) 이철승(18대) 민관식(22대) 김택수(24대) 박종규(25대) 조상호(26대) 정주영(27대) 노태우(28대) 등 세인의 눈과 귀에 익은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는 것은 체육회장이 단순히 스포츠 단체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체육회’의 위상과 관련, 정주영의 역할과 의미는 돋보인다는 것이 일반적 세평. 전임 조상호 회장에 이어 취임한 정 회장(82년 7월∼84년 10월)은 종래 정치인들의 단골자리를 재계의 거물급 경제인이 맡았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가 올림픽 유치 사절단장으로 그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체육회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은 일로 꼽힌다. 특히 체육회장에 부임하면서 “나는 봉이 아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던 정 회장은 2년3개월의 재임기간 동안 약 40억원의 사재를 투자, 대한체육회가 오늘의 발전적 면모를 갖추는데 확실한 가교역할을 했다는 평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그 ‘역할‘의 핵심인 이른바 ‘바덴바덴 비화’. 그 내막은 어떤 것일까. 88올림픽 유치의 막전막후는 인간 정주영의 ‘마지막 투혼’을 잘 보여준다. 정관계 요로가 거의 모두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때, 정주영이 앞장서서, 결국엔 국가 대사를 성공시키는 역할을 해 냈다는 것이 많은 소식통들의 전언. 당시 고위 관계인사가 전하는 첫 회의의 ‘풍경’은 그때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정부와 체육단체 등의 관련 인사들을 롯데호텔로 모아 첫 회의를 가졌다. 88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 밑에 각부 장관들이 전부 위원으로 들어 있었는데, 롯데호텔에 나왔던 장관은 이규호 문교부장관 한 사람뿐이었고, IOC 위원조차도 불참한 데다 행사주체인 서울시에서는 국장 한 사람을 내보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심스러운 첫회의였다.” 실제 체육회 내부 상황은 어떠했을까. 정주영 본인의 회고다. “정부측 인사들은 적자 행사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당시 우리 나라 형편에 8천억원이라는 경비가 소요되는 올림픽 개최는 사실 부담스러운 액수였던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이 그전 올림픽을 10억달러라는 막대한 적자로 끝냈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경기장은 각 도시나 대학의 것들을 규격에 맞게 개보수(改補修)해서 활용하면 될 일이고, 선수촌은 좋은 부지에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아파트를 지어 미리 팔아놓고 먼저 올림픽에 쓰면 정부의 돈을 한 푼도 안들이고도 숙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바덴바덴 현장 실전 상황은 더 크게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장 책임을 맡은 공직인사들의 미온적 태도를 정주영은 무엇보다 비판한다. 당시 어려움에 대한 그의 이어지는 주장.  “경쟁 대상인 일본의 나고야 시는 일찍부터 시장까지 도착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인 우리의 IOC 위원과 서울시장은 개막일이 지나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세계 각국의 IOC 위원들이 투숙한 브래노스파크 호텔 출입은 IOC 위원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IOC 위원이 빨리 와 투숙해주어야만 그를 만난다는 구실로 드나들며 다른 나라 IOC 위원과 접촉할 수 있는데,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었다. 바쁜 사람 ‘망신 대용품’으로 내세워놓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그 지경인 데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29/1033226402303101.jpg" alt=""/>   이런 상황에서도 정주영의 ‘강행군’은 계속된다. 관계인사의 실화 전언.  “정 회장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서울, 중동, 동남아 할 것 없이 챙겨야 할 회사 일을 전화로 한 바퀴 전부 챙기고는, 그 다음은 어김없이 올림픽 유치 전략 회의를 했다. 투덜대기도 했고 건성건성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꾹꾹 참아 넘기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신신당부를 하고 재삼재사 주지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과 관리들은 정말 달랐다. 관리들은 외곽만 안일하게 빙빙 돌았다. 그래도 정 회장이 그렇게 며칠 하니까 차츰 분위기가 바뀌어 갔다. 아침 회의를 끝내고 나서면 하루 종일 IOC 위원들이 있는 곳이라면 숙소든 별장이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뛰어다니다가, 밤 11시나 돼야 숙소로 돌아오고는 했다. IOC 위원들을 만나기 위해서 고무줄로 묶은 명함 뭉치를 들고 가히 거지들처럼 회의장 밖을 종일 지키고 섰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당시 악조건은 도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특히 현지언론들은 ‘정주영의 로비’가 본격화되자, 음해성 보도를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 다시 관계 소식통의 일화 소개.  “그때 현지 언론은 아주 비정하고 혹독했다. 현장에서 보도하는 신문이나 방송 기자들은 전부가 일본의 나고야가 결정적인 것으로 얘기했고, 그 말대로라면 한국은 가망이 전혀 없는 비참한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한국이 기생을 동원했다’는 외국 신문 기사가 나와 홍보관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미스코리아, 스튜어디스들이 마치 기생처럼 둔갑되기도 했다. 정 회장은 즉각 아들 몽준이한테 홍보관을 맡겨 손기정씨, 조상호씨, 제수씨인 현대고등학교 장정자(張貞子) 이사장 등이 전시실에서 손님을 맞도록 해서 ‘기생설’을 잠재웠다.” 일본의 역공세도 만만치 않았고, 이 틈새를 북한의 방해공작이 파고들었던 것도 큰 암초. 이 소식통의 이어지는 전언이다. “일본은 북한과 남한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서울에서 올림픽을 치를 것인가. 서울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는 것은 88올림픽 자체를 없애는 것과 같다는 논리의 공세를 거세게 폈다. 또 북한은 올림픽 유치 신청국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올림픽 유치 방해를 목적으로 20여 명이나 현지에 파견, ‘기껏 나와봐야 세 표’라고 하며 돌아다니는 등 분위기를 계속 흐리는 공작을 계속해댔다.  정주영측은 북한 IOC 위원에게 같은 백의민족인데 일본을 지원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는 민족적인 공감에 호소해보기도 하고, 우리를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도 보내고, 회의 때는 몇 차례나 유치단 모두에게 대북한 자세를 신신당부했다.”  한반도에 대한 일부 국제언론의 잘못된 신인도, 민족적 대사를 앞에 둔 북한의 방해공작, 우리 관계 공직인사들의 비애국적 공무자세 등은 ‘바덴바덴’이 지금도 일깨우고 있는 ‘우리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병도 언론인   언론인 이병도씨가 연재했던 ‘정주영의 야망과 좌절’은 이번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0월6일자부터는  정선섭 기자가 쓰는 ‘재벌가의 신황태자’가 독자 여러분께 찾아갑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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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3화 지금이 몇시인가 - (5) 오류의 시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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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15/1032016802303080.jpg" alt=""/>    ▲ 지난 92년 한 행사장에서 마주친 YS와 정주영  93년 2월10일 서울 롯데호텔 36층 메트로폴리탄 클럽. 대통령 당선자 YS는 가스공사 사장 이경식씨와 단둘이 만났다.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 그러나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YS는 대선 당시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 후보가 돈을 엄청나게 뿌리면서 나를 몹시 애먹였다. 재벌총수가 대통령후보가 돼서는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선거가 끝난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정씨에 대한 YS의 감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YS와 CY(정주영 회장의 애칭). 정계와 재계의 양대 거목인 두 사람의 인연은 92년 2월 CY가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계에 입문함으로써 악연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 현대그룹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적 탄압’이 시작됐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벌어진 이같은 기류의 경제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비단 문민정권하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자와 재벌의 정치적, 사적 역학관계가 얼마나 한국의 대기업 경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는지를 잘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진단. 그 추이의 실제 진상을 현대그룹 변천사를 중심으로 거슬러 올라보자.  먼저, 5공화국 시절의 이야기. 현대측 주장이다.  “현대는 울산조선소라는 중공업 제작 기지를 활용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대형 공사들을 효과적으로 완수해내면서, 해외 건설과 중공업 제작 역량이 서로 연계해 발전했다. 건설, 자동차, 조선업을 모태로 하는 전형적인 관련 다각화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 ‘현대’의 중공업 체제는 자생&#8226;자주적 국제규모의 구축에 성공해 가고 있었다. 그 결과로 ‘현대중공업’은 국내외의 불경기에도 77년을 기점으로 매출액이 78년 28.1%, 79년 8.8%, 80년 55.75%, 81년 57%의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충분한 경험과 기술력을 기초로 관련 다각화와 해외 수요를 기준으로 중화학 체제의 독자발전에 성공한 현대가 국내 중화학 공업시장의 경쟁력 미숙과 난립을 이유로, 도매금으로 5공 신군부의 중화학 투자 조정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암흑시대에서 시행된 강제적 조정으로 인해 발전 설비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현대는, 그나마‘현대’로 일원화되기로 했던 ‘자동차’까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다원화되는 바람에 일관성 없는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된 정주영 본인의 소회. “나는 어떤 분야건 자유 시장경쟁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신봉하는 사람이다. 나는 5공 당시 국내 시장 규모만 갖고 중복 과잉을 판단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나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은 그 후, 자동차, 전자, 석유, 화학 산업의 자유 경쟁 체제가 수출 산업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한다. 5공화국 동안 어렵지 않았을 때가 별로 기업에 없었지만 창업자였던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푼 못 건지고 창원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는 전쟁 이상의 어려운 고난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전쟁만큼의 고난은 아니었지만 전혀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라는 칼날 아래 기업을 하면서 정변 때마다, 정권 교체 때마다 그때그때 겪은 고난과 고통도 쉽지는 않았다.” 6공화국은 어떤가. 다음은 전문가들의 견해.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정상적 경쟁을 통한 부의 축적이라는 가치관이 확립돼야 한다. 그런데 6공 5년동안 정경유착 등을 통한 부정축재가 만연됐고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좌절감과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노 대통령이 정치 경제 등 국정 제분야에 대한 문제의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부정부패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제도화돼 갔다. 부정부패가 제도화되니 정경유착은 더욱 심화되고 경제사정은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이런 구조에서 공정한 경쟁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성립될 수 있었겠는가.” (홍원탁 교수, 서울대 경제학)  “정주영씨의 정치참여 배경에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 빈곤도 작용했다고 본다. 민주화되고 재벌의 물적 토대가 커지면 재벌에 대한 관리방식도 달라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계속 비시장경제적 권위주의식으로 통제하려 했다. 이 같은 통제에 정주영씨가 반발, 정치자금 제공사실을 폭로하고 노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정치참여를 선언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김호진 교수, 고려대 정치학)  YS 문민정권기도 되돌아 보자. 현대와 정주영에겐, 이 시기는 극심한 시련기로 회자된다. 정권 출범 후 정주영씨는 물론 정몽헌 박세용 음용기 이병규씨등 20여 명의 핵심측근들이 구속됐으며 입건된 사람만도 1백명이 넘었다. 전례없는 자금압박도 뒤따랐다.  당시 현대그룹에 대한 경제제재의 유형은 크게 세가지. ▲산업은행 등의 설비자금 대출중단 ▲해외주식예탁증서(DR)발행불허 ▲기업공개와 장외시장등록 불허가 그것. 제재수단은 금융부문에 집중돼 있었다. 제재주체는 재무부. 한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 임원은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 권력이 어떻게 ‘시장경제’에 기술적으로 침투 왜곡할 수 있는 지를, 문민정권 당시의 ‘현대 사례‘를 인용, 이렇게 증언한다.  “김영삼 정권때 움츠린 현대가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리도 만무하니 산업정책으로는 크게 괴롭힐 것이 없다. 세법이나 공정거래법으로 다스리면 너무 표시가 난다. 반면 금융제재는 밖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조이는 고통은 세다는 특징이 있다. 속으로 골병드는 것이다. 금융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는 사람이 현대 제재를 기획한 것이 분명하다.”  현대는 산업은행에 ▲92년 6천5백23억원 ▲93년 8천3백67억원 ▲94년 1조5천4백10억원의 시설자금 대출을 신청했으나 한 푼도 받지못했다는 것. 설비투자를 못하면서 현대그룹은 서서히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정주영씨가 그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에 관해 토로한 극단적 심회.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더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소도 말도 웃을 후진국적 정치폭력이 백주에 횡행했던 지난 시절이 어이없을 뿐이다.”  심현영(청구부회장) 전 현대그룹종합기획실장도 “YS정권 이후 남들은 교실에서 ‘신경제’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우리만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정작 김 대통령이 내놓고 ‘현대그룹을 죽이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당시 고위 관료들의 일관된 증언. 김영수 전 민정수석은 “김 대통령은 재임기간에 절대 현대를 거론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감(私感)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했다.  또 이경식 전 부총리는 “아랫사람들이 받들어 (제재를) 한 거다. 대통령의 심기를 미리 읽은 거다. 김 대통령은 개별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대 제재와 시장원리의 왜곡은 김 대통령의 이른바 ‘분위기 통치’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특정 기업을 뒷면에서 봐주거나 때리는, 이런 유형의 ‘교묘한’ 시장경제 왜곡 통치행위는 김대중 권력 하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이 많은 재계 소식통들의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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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5화 마지막 투혼 - (1) 브랜드 KOREA]]></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30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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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5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15/1032016802303090.jpg" alt=""/>    ▲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정주영이 주도해 유치한 ‘88올림픽’은 무엇을 남겼는가. 아들 정몽준의 2002월드컵 유치로 ‘현대가(家)’ 총수 1&#8226;2세에 걸쳐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 역사상 양대 국제 행사는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는가. 이들 두 사건의 실제 의미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들 국제 행사가 처음에는 ‘KOREA 브랜드’의 신인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대외 경제도약의 실리를 챙겨보자는 ‘계산’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특히 88올림픽 유치와 관련, 정주영은 “88올림픽 유치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박 대통령은 당초 이 행사를 통해 우리 나라의 경제 발전과 국력의 과시, 공산권 및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 관계 수립으로 분단 상황 극복 여건을 조성, 우리경제의 국제경쟁력을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데 활용하려 했다. 그 유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논의는 박 대통령 시대 말기쯤부터 있었고, 제24회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정부 방침 발표도 79년 박 대통령이 직접 했다. 잘만 하면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디딤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과연 그 실제결과는 어떠했나.    우선, 문제는 박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으로부터 꼬여들게 된다. ‘올림픽 유치’를 선언한 같은 해 10월 박 대통령이 불행한 죽음을 당하고, 군부의 권력 다툼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긴장과 불안 속에 1980년도를 맞았던 것. 전두환 정부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정식으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신청, 통보한 것은 상당한 시한이 흐른 80년도 12월. 다음해인 1981년 3월에 NOC(각국올림픽위원회), IOC, GAISF(국제경기연맹) 조사단이 와서 개최 여건 조사를 비로소 하고 가게 된다.  그러나, 그때부터 본격적 내부진통은 벌어진다. 우선 내각총수인 남덕우 총리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 처음부터 ‘계산이 서질 않는 일’이라는 것이 남 총리의 완고한 입장. 당시 관련 인사의 자세한 회고다.  “상황이 매우 고약스러워졌다. 올림픽 관련 주무 부서인 문교부 체육국이 당시 총리에게 유치 활동에 소요되는 예산 및 제반 사항을 상신했다가 올림픽 망국론자였던 남 총리에게 일축당해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거국적인 유치 활동을 벌여도 일본을 제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뭐가 잘못돼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올림픽 때문에 경제 파탄에 빠져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남덕우 당시 총리의 지론이었다. 총리의 인식이 그러니까 국무위원들도 비슷한 자세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김택수 IOC(국제올림픽위)위원 조차도 마찬가지 견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소식통은 “김 위원이 ‘우리가 나가서 세계 IOC 위원 82표에서 몇 표나 얻을 수 있겠는가? 대만 표 하나에 미국 표도 둘 중에 하나는 캐나다 동계 올림픽 유치에 쓰여질 것이니 기껏해야 우리 표까지 합쳐 서너 표일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전했다. 당시 국제외교정세에서 초강국 일본의 나고야를 이기고 외교력이 미숙하기 이를데 없는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해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가 관계인사들 사이에 팽배하고 있었던 것.   따라서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정 회장과 함께 유치주역을 맡았던 또다른 관계 소식통은 당시 상황과 관련,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접수해서 조사단이 개최 여건 조사까지 마쳤고, 더구나 올림픽 개최 추진 의지 재확인까지 받은 상황에서 돌연 올림픽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밀고 나갈 수도 없었다.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정말 서너 표를 얻고 마는 망신으로 끝난다면 그 창피는 어쩔 것이며, 소나기같이 퍼부어질 비난을 어쩔 것인가. 상황과 분위기상, 올림픽 유치 업무 수임에 따른 책임이 두려워 모두 의도적으로 올림픽 유치와 관련되는 것을 기피했다. 심지어는 올림픽 개최 신청 당사자인 서울시장까지도 수수방관하는 지경이었고, 주무 부처로 지정됐던 문교부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꿍꿍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15/1032016802303091.jpg" alt=""/>    ▲ 81년 10월 노태우 정무장관이 올림픽 유치권을따고 귀국하는 올림픽 유치단을 격려하고 있다.[82보도사진연감]  결국 그 ‘임무’는 ‘돈이 있다’는 이유와 ‘전경련 회장’이란 명분으로 정주영에게 떠넘겨 진다. 그때 사정에 관한 정주영 본인의 술회담.  “나한테는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이, 5월 어느 날, 문교부 체육국장이 프린트한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들고 갑자기 나타났다. 내용인즉슨,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정부가 당할 망신을 민간인이 대신 당하게 하자는 발상으로, 유치 관할 시장이 아닌 민간 경제인이 유치추진위원장을 맡도록 했다는 얘기였다. 내가 그때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 경제인들 단체장으로서 망신 대용품으로 뽑혔던 것이다. 올림픽 유치 관계 장관 회의에서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제안으로 결정된 일이라고 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이 네가 당해라’는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문제는 사전 계산서. 다시 정 회장의 말이다.  “당시 우리 나라 형편에 8천억원이라는 경비가 소요되는 올림픽 개최는 사실 부담스러운 액수였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이 그전 올림픽을 10억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로 끝냈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적자가 나게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법이다. 유치 못하는 것이 바보지, 유치만 한다면 우리 형편에 맞춰 적자 안나게 계획해서 얼마든지 치러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유치작전에 뛰어들었다. 모두들 회의적이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투혼이라 생각하고, 벌거벗는 마음으로 한 번 다시 총대를 메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KOREA 브랜드’의 국제적 신인도를 이 행사를 통해 선진국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던 당초의 목표는 과연 실현되었는가. 전문가 ‘결산’을 들어보자. 함재봉 교수(연세대)는 극심한 정치갈등 등 국내 내적인 문제들이 ‘올림픽 과실물’을 일거에 희석시켰다고 비판하면서, 2002월드컵도 이 같은 우를 다시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경고론’을 펼친다.  “올림픽 때 개최 때 우리 국민은 분명 곧 1등 국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후 곧바로 벌어진 5공 청문회, 끊임없는 노동쟁의와 여야간의 한없는 정쟁이 올림픽에서 얻은 감동과 자신감, 일체감을 한 순간에 파괴해 버렸다. 국가 경쟁력은 땅에 떨어졌고 원칙을 저버린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월드컵을 치른 지금도 똑같다. 이제 ‘대~한민국’의 벅찬 함성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변해버렸다. 인사청문회와 이른바 ‘병풍’의 회오리 속에서 하나 됐던 국민은 분열되고 있고, 전세계를 감동시켰던 열기는 식어 가고 있다. 일류 국가로의 도약은 또 한번 일장춘몽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들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엄청난 감동과 성공이, 자신감과 전세계의 찬사가 우리의 정치와 국가경쟁력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과연 이제 무엇으로 우리 대한민국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함 교수의 결론은 88올림픽때나 지금의 ‘월드컵’이나 한마디로 ‘잘못된 국내 정쟁들’이, 한반도가 생긴 후 최초의 세계규모 행사라는 이들 양대행사를 국가경쟁력 강화로 연결시키는데 거꾸로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외치(外治)에 성공하려면, 내치(內治)부터 잘해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올림픽의 역사’는 그렇게 일깨우고 있는 셈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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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4화 지금이 몇시인가 - (4) 국책 갈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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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8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08/1031412002303070.jpg" alt=""/>    ▲ 80년 전경련 정기총회 직후 자리를 함께 한 정주영(맨오른쪽) 등 전경련 임원들  “말을 듣지 않으면 공수부대를 보내 그룹전체를 내쳐 버리겠다!” 80년 5월31일 전두환의 국보위(國保委)가 기업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정주영에게 보낸 막후 최후통첩 내용. 언론통폐합과 함께 경제 산업 구조개편의 구실로 기업에까지 통폐합의 ‘군사 칼날’을 본격적으로 들이 댄 그 전말은 과연 어떤 내용인가.  이해상충와 갈등은 첨예할 수밖에 없었다. 신권력이 쥔, 이른바 ‘국책(國策) 사업권’ 조정을 둘러싸고 누가 더 이익, 더 피해를 보느냐는 것이 당시 재계에 불어닥친 핵심 현안. 정주영은 이때 일을, 두고 두고 억울해 했으며, ‘시장’을 무시한 권력의 무모한 개입선례가 한국경제 구조 전체의 앞날에 오래토록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대표 사례라고 주장한다. 한국산업 변천사에서 특별한 반성과 교훈을 함축한 이 사건, 그 실제는 어떠했을까.  당시 정주영에게 해당된 구조 조정은 승용차와 발전 설비 분야의 일원화문제. 국보위는 둘 중에 최소한 하나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이 사업을 ‘현대’의 양대 주력 사업으로 키워가던 정주영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던 것. 국보위는 마침내 총수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막후 종용 혹은 강압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정통한 소식통이 전하는 그때의 강압 증언.  “정주영이 측근인 정세영 이명박 이현태를 대동하고 국보위에 불려들어갔다. 통폐합 대상 이해 당사자인 대우의 김우중과 대우측 주요인사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경제 산업 구조 개편을 위해서 자동차 산업과 발전 사업을 통폐합하겠다는 설명 끝에 국보위 사람이 먼저 김우중에게 찬성 여부를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예, 저희는 찬성합니다’ 했다. 그 다음은 정주영이었다. ‘정주영 회장도 찬성하시죠?’ 정주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단호한 톤으로 잘라 말했다. ‘나는 찬성 안합니다.’  그러자, 국보위 사람이 안색을 바꿔서 정주영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나라가 비상에 걸려 개혁을 하려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어째서 순응하지 않고 국책(國策)에 대항하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리고는 국책에 협조적인 김 회장을 보라는 투였다. 그 말에 정주영은 다시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내가 만든 사업체를 어렵다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누구한테 넘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누구처럼 수단을 부려 경쟁 입찰 아닌 수의 계약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한 적도 없다. 그런 식의 기업 경영을 나는 증오한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08/1031412002303071.jpg" alt=""/>    ▲ 지난 80년에 추진된 산업 구조조정과 관련, 전두환 국보위원장은 정주영을 직접 만나 ‘자동차 부문은 현대로 일원화하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주영은 김우중의 ‘신권력에 대한 막후 장난’으로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김우중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국보위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국보위를 어떻게 보고 감히 반항하느냐’고 다시 호통을 쳤다. 자동차와 발전 공장 둘 중에 하나를 김우중 보다 먼저 정 회장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만도 대단한 특별 대우인데 불복이 말이 되느냐는 으름장이었다. 그래도 계속 버티자 국보위 관계자들은 수행했던 정세영, 이명박, 이현태를 다른 방으로 각각 떼어놓고 협박하면서 회유하고, 회유하면서 협박을 계속했다.”  그 협박의 요지는 한마디로 ‘말을 듣지 않으면 현대 전체의 문을 통째로 닫게 할 수밖에 없다’ 는 것. 결국 정주영이 무릎을 꿇었다. 발전설비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선택키로 한다. 정주영 본인의 회고담. “끝까지 저항하다가 ‘현대’의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고, 부득이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면 나의 내심은 자동차 쪽이었다. 그러나 당시 통합 대상인 새한자동차는 미국의 GM과 대우의 50:50 합작 회사였기 때문에 통합에는 GM의 지분 포기가 선결돼야 했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중공업은 모르겠으나 자동차 통합은 절대로 국보위 뜻대로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아현동 모처에서 이 문제로 전두환 국보위원장을 직접 만났다. 나는 GM이 50%의 합작 지분 포기를 절대 안할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 통폐합은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두환씨는 상공장관이 이미 GM의 양해를 얻어 결재까지 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틀림없이 GM이 내놓도록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는 자동차를 선택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 후 진행된 ‘반(反) 시장원리적’ 통폐합 후유증도 점점 심각해진다. 새한자동차의 지분을 포기하기로 양해가 되었다던 미국 GM이 80년 9월부터 시작된 협상에서 왜 우리가 손해를 보느냐며 다시 반발하고 나왔던 것. 만일 GM의 요구에 응한다면 자동차 독자 개발은 수포로 돌아가고 까딱하다가는 GM의 조립 하청업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 현대측 입장.  전두환 정부는 그러자, 정주영측에 기아와의 합작을 종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실패하자 마침내 승용차 일원화 조치를 완전 백지화하고 만다. 즉 새한(대우)과 GM의 합작은 존속시키면서 새한에도 승용차 생산을 풀어버리고 만 것. 현대가 대우에 넘기기로 한 ‘창원중공업’의 경우도 뒤틀리긴 마찬가지. 당시 부분적으로만 가동이 되고 있었고, 집중적 추가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정부는 무조건 신속한 인수인계만을 요구했다. 가격 정산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자산 평가에 필요한 제반 서류를 한국감정원에 평가를 의뢰해서 나중에 하면 되니, 일단 국보위안대로 대우에 넘기고 보라는 것이 정부의 거듭된 통지.  결과적으로 정주영 입장에선 신군부 권력의 강압에 못이겨 ‘자동차’는 인수에 실패한 채 그대로 김우중의 대우에 남겨 두면서, 발전 설비 부문은 대우로 넘겨줘야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대측 관계자의 회고담은 이런 불균형 조정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신권력의 당시 압박이 얼마나 드셌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는 대우의 자동차도 못 받는 판에 투자한 돈도 못 받는, 발전 설비 부문의 인계는 못하겠다고 버텼지만, 당장 시행하라는 신군부의 엄포는 계속 날아들었다. 대우가 본사 빌딩을 팔아서 청산해준다니까, 선(先)인수 후(後)청산으로 하자면서 공인 회계사를 내보내 자산 평가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더니 최후에 돌아온 무지막지한 협박은 ‘공수부대 보내서 내치겠다’였다.  별 수 없이 그럼 문서나 한 장 써달래서 받아 들고 ‘창원중공업’을 내주고 말았다. 1원 한 장 안 내고 ‘선인수 후청산’이라는 유례가 없는 특혜로 나로부터 ‘창원중공업’을 가져간 대우는 그러나 결국 힘에 부쳐 이 기업을 다시 정부에 내놓게 되고, 정부는 허둥지둥 한전과 산업은행, 외환은행을 주주로 한국중공업으로 상호를 바꿔 공사화했다.” 결국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공정 자유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틀을 무시한 신군부의 무모한 투자 조정은 불과 몇 해 후의 환경 변화도 적응하지 못하고 완전한 실패로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이 결과와 관련, 타계 얼마전 산업사적 측면에서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5공 초기, 산업구조조정은 해당 기업의 기술력과 기업 구조, 경영 능력 등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 바보 같은 조정안이었다. 만약에 정부가 그때 무리하고 불합리한 투자 조정을 안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본다. 그랬더라면 발전 설비 부문도 자유 경쟁 체제에서 튼튼하게 자라서 1980년대 중반에 찾아왔던 3저 호기에 방대한 세계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고, 발전 설비 산업도 자동차, 반도체에 못지않은 수출 품목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한때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8226;박정희 두 대통령이 죽어라 고생해서 차려놓은 대한민국의 밥상을 5공, 6공이 지저분하게 먹어치우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때는 아예 밥상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겠는가.”  이병도 언론인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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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2화 지금이 몇시인가 - (3) 영욕의 전경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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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Sep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01/1030807202303060.jpg" alt=""/>    ▲ 김우중 전 대우회장은 80년대 초반 정주영 당시 전경련회장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기도  “정경유착이나 부당경쟁, 담합행위 등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지만, 오늘의 경제 발전을 만든 주역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하다.”  효성의 조석래 회장은 5&#8226;16직후 발족된 전경련의 궤적과 관련, 이같은 소회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매출액 500억원 이상 기업의 대표와 경총(經總) 등 업종단체로 구성돼 ‘재계의 본산(本産)’이라 불리는 전경련. 조 회장의 소회는 곧 이 전경련과 한국 재계가 그만큼 영욕으로 얼룩져 왔음을 대변한다. 그래도 그 위상이 가장 제고된 시기는 단연 정주영씨가 회장으로 일할 때로 꼽힌다. 정 회장의 ‘불도저식’ 경영스타일은 79년 숙원사업이었던 전경련회관 설립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고, 5공초기 군사 정권의 퇴임 압력을 물리쳐 낸 것도 그 상징적 예. 정 회장 재임기가 전경련 최고의 전성시대였다고 회상하는 관계자들이 아직 많은 것도 그런 연유다. 따라서 ‘전경련 시절 정주영 일화들’은 한국재계사의 진통 내용을 역설적으로 더욱  잘 보여준다.     재계 총리로 불리는 전경련 회장은 재계의 불화나 정치권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 때문에 서로가 맡기를 회피, 임기 2년의 선출 때마다 우여곡절을 겪는다. 정 회장의 취임경위도 마찬가지. 전경련 고위 관계자의 회고다.  “4대 김용완 회장(경방 창업주)이 10년간 재임한 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고사의 뜻을 밝히자 홍재선 회장(쌍용계열 금성방직 사장&#8226;전문경영인)과 정주영 회장에게 불똥이 튀었다. 정 회장이 완강히 반대,  ‘오너‘가 아닌 홍 회장이 대타역을 잠시 맡았지만 결국 여론은 정 회장에게로 모아졌다. `동네 이장도 하지 말라’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평소 별다른 직함을 갖지 않았던 정 회장이 반 강제로 회장직을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때 정 회장은 이를 피해 보기 위해 김용완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 회장을 회장으로 재선출하겠다’고 알렸더니 김 회장이 ‘누굴 죽이려느냐’며 전화를 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장을 떠맡게 됐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전경련회장이란 자리는 그만큼 안팎으로부터의 시련이 간단없이 밀려오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시련으로 회자되는 5공 신군부시절, 정 회장 사임압력 경위는 그런 점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부문. 즉 ‘신군부 압력’은 단순한 권력 변환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경련회장으로서 자신의 대정부 자세에 대한 오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 회장의 술회 요지다.  “77년 말쯤부터의 일이다. 정부는 그때 세제를 개선한다고 법인 기업에 대한 배당소득공제 제도를 철폐했다. 그런 조세 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최고 소득 세율 70%에 방위세 20%가 추가되어서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89%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이 안되는 법이었다. 더구나 국민의 자주권과 재산권에 소급해서 예상치 못했던 부담을 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있을 수 없는 폭거이며, 기본 질서를 유린하는 위헌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 달 동안 거의 하루 걸러 회장단을 소집 동원하고 경제 4단체장까지 동참시켜, 부총리와 재무&#8226;상공&#8226;국세청장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가당찮은 법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901/1030807202303061.jpg" alt=""/>    ▲ 신군부의 집권으로 자연 긴장감이 조성됐던 지난 80년 어느날, 전경련 회의에서 정주영이 의제를 발표하고 있다.  국회가 개원되면서는 재무위, 법사위의 각 위원들을 개별 방문, 그 부당성과 위헌성에 강력히 항의했다. 78년 9월부터 시작됐던 재계의 조직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관이나 정치 권력과의 마찰을 겁내지 않았던 내가 눈엣가시였던 것은 당연했다. 이런 배경이 작용하여 1981년 5공 권력은 나한테 전경련 회장직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전경련 지도층 내부에서도 상호간에 심한 분열상이 뒤따른다. 다음은 한 재계 관계자의 전언.  “80년대 초반 신군부 시절, 정주영 전경련회장은 당시 청년 기업인으로 각광을 받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을 불렀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기업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니야.’  정 회장은 당시 ‘전재산 사회 환원’ 발언 등 여론과 신군부의 압력을 의식한 김 회장의 ‘튀는 행동’에 대해 무척 불쾌해했다.  두 사람의 악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정 회장이 애지중지하던 현대양행이 신군부의 서슬퍼런 압력 속에 대우에 넘어갈 때였다. 정 회장은 사석에서 ‘내 사업은 모두 내가 직접 말뚝을 박고 시작한 것인데, 그 젊은 친구(김 회장)는 정치권에 기대어 남의 기업을 인수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김 회장에 대한 원념(怨念)을 곧잘 드러냈다.”  또한 권력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권력변환기에는 정부의 재벌정책을 둘러싼 재계 내부 이해관계 갈등이 특히 증폭되곤 했다는 얘기.  다음은 그 케이스 중의 하나로 정 회장과 한진 조중훈 회장간의 갈등에 대해 또다른 재계인사가 전하고 있는 일화다.  “70년대 말 전경련 회장단회의 때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인 속칭 ‘두부공장 파동’은 아직도 재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당시에도 대기업의 선단식 경영, 중소기업 고유업종 침해에 관해 정부의 제재가 있었는데 정 회장이 조회장을 겨냥, ‘두부공장은 중소 기업들이 할 사업영역인데 왜 대기업이 하느냐’고 말하자 비슷한 연배의 조 회장이 ‘당신은 면장갑ㆍ고무장갑까지 만들면서(당시 현대중공업 근로자용 장갑을 현대가 직접 생산한 것을 비유) 누구에게 하라 마라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당시 조 회장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회의 도중 자리에서 일어선 뒤 자신의 승용차를 기다리지도 않고 택시를 잡아탄 채 전경련 회관을 떠났다는 후문이 나돌았다.” 권력의 입김으로 인한 이해득실을 둘러싸고 발생하곤 했던, 이런 류의 재계 내부 알력에 대해 경제전문 언론인 L씨(54)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단련은 우리나라의 전경련과 성격은 비슷하지만 위상과 기능은 판이하다. 그 차이는 제목소리 내기에서 비롯된다. 경단련은 정경유착이란 비판을 똑같이 받고는 있지만, 당당히 제목소리를 내면서 재계를 결속시키고 경제대국 일본을 유지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국민의 신뢰도 높다. 이에 비하면 한국 전경련의 위상은 참으로 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정권교체기에 책무가 막중한데도 모두가 입을 다물곤 했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혹독했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3공, 5공시절 전경련 회장을 지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때 ‘노’라고 말하며 뱃심을 보였지만 그도 결국엔 권력앞에 어쩔 수 없었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도 한때  ‘업종전문화 시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한마디 했다가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이런 과정으로 왔으니, 어떻게 재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최근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또다른 전경련 관계 인사의 진단. “최근 김홍업씨 문제로 대기업들이 거액의 돈을 건넨 사실이 밝혀지자 전경련은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공식 결의한지 얼마되지도 않아 악재가 터져 무척 난감한 표정들이 되었다. 전경련측은 ‘투명경영 의지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고 걱정했다. 특히 연루된 현대측 관계자도 ‘드러난 16억원이 한꺼번에 지급된 것도 아니고 10여 차례 나눠서 지급된 것인 만큼 정주영 회장의 개인 돈이 아니었겠느냐’며 기업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분명히 정치권과 재계의 관계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 불미스런 사건 탓에 많은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정경유착의 악습이 여전하다고 믿게 되었다는 주장들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기업은 기업대로 투명경영을 재다짐하는 계기가 되고,정치권은 정치권대로 기업에 손을 벌리지 않는 새로운 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 인사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이병도(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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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1화 지금이 몇시인가 - (2) 고래싸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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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5 Aug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정권이 바뀔 때마다 홍역을 치렀던 한국 재벌의 위상. 재계 총본산인 전경련 관계자는 “일반인들은 재벌을 정치권력과 한통속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오히려 정치자금 등의 부담을 지면서도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전경련이 5·16군사쿠데타 직후 ‘부도덕한’ 기업인들의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자의반 타의반 태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도 ‘권력’이 재벌을 시장원리가 아닌, ‘호(好) 불호(不好)의 기준’으로 사실상 분류, 온갖 기법의 관치(官治)로 다스리려 해왔기 때문에 국가 경제구조의 공정한 흐름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재계 불만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 정권변환의 시기, 재계 막후에서는 어떤 일들이 과연 있었을까.  먼저 정주영 본인이 주장한 사례담. 역대 정치권력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5공정권이 치적으로 꼽는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예로 들어보자. 박 대통령이 추진하던 일을 5공은 사전상의도 없이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으로 나를 임명해 놓고 정부측 위원으로는 바덴바덴에서 그냥 여행이나 즐길 사람들을 뽑는 정도였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 성공시켰더니, 오히려 수수방관만 하고 재나 뿌린 5공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으스대더라. 결국 나는 온데 간데 없고, 그들 정권의 몫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이렇게 기업인은 이용만 당했다. 6공 때는 더더욱 기업활동하기가 힘들어졌다. 성금이란 명목의 정치자금은 정권이 바뀔수록 단위가 커져갔는데 미움받지 않으려면 뭉텅이로 돈을 바쳐야 했다. 6공에서는 3백억원의 돈을 정부에 바치고도 90년도의 불공평한 세무조사 이후 나는 정부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자신의 ‘정치불신’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 본인의 계속되는 변. “기업하면서 수많은 정치지도자, 정치인을 만났지만 존경할 만한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만났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권력은 무분별·무경우·무소신·무경험·몰염치·무능력이었다. 나라가 어디로 가든, 밤이나 낮이나 자기네들끼리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걸핏하면 세무조사에 걸핏하면 잡아넣고 걸핏하면 협박에, 걸핏하면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25/1030202402303050.jpg" alt=""/>    ▲ 정주영과 이병철  전경련 회의를 마치고 맨앞에 나란히 걸어나오는 두 사람  그러나, 정주영 스스로도 권력이 강할때는 결탁했다가, 약해지면 ‘공격의 수위’를 높인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 정경구조에 정통한 유력 소식통 L씨의 진단. “요즘(김대중 정권)도 마찬가지다. 98년 전경련을 방문했을 때 김우중 회장 등은 ‘(빅딜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고 잘될 것이며 정부나 대통령의 압력은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정부가 반도체 빅딜을 반대하던 대기업에 여신중단 압력을 가하고 그 재벌총수가 청와대에 불려가 (빅딜을) 강요받고 나와 밤새 통곡했다는 얘기가 당시 공공연히 돌았다. 과거 정주영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어쩔 수 없이 시류에 영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경제인이 시류에 영합할 수밖에 없게 한 정치권력도 나쁘지만 시류에 영합해 놓고 정치를 비하시킨 것도 옳지 않다.”    이와 관련, 한국재계사의 선명한 사례로, 5공 신군부 쿠데타 초기,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이 치열하게 벌인, 두 거두(巨頭)간의 이른바 ‘고래싸움’이 거론된다. 다음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막에 관해 원로 언론인 손광식씨(전 문화일보 사장·현 삼성경제연구소 고문)가 밝히는 내용. “12·12 쿠데타로 분위기가 삼엄하던 지난 80년 3월의 일이다. 당시 한국재계를 양분하고 있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 사이에는 언론을 매개로 한 일대 전쟁이 불붙었다. 발단은 삼성 계열인 중앙일보가 현대건설의 부실공사를 문제삼자, 이에 발끈한 현대의 정 회장이 각 신문사에 이병철 삼성회장과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과거 비리를 폭로하는 광고를 실으려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싸움은 삼성은 중앙, 현대는 동아 등 각자 인연을 맺고 있던 언론매체들을 매개로 한 폭로비방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을 뿐, 싸움의 실제 동기는 신군부와 삼성간 유착으로 현대가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정 회장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신군부 출범 초반에는 삼성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신군부가 모시는 신현확 총리와 이 회장이 밀착되어 과도기 또는 ‘새 시대’의 재벌판도에 어떤 역학관계로 작용되고 자신과 현대는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감을 정 회장은 가지고 있었다고 현대측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밝혔다. 그러나, 국면은 83년 정 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현대쪽으로 유리하게 바뀌어 갔다.”   손씨는 특히 83년에 정주영의 초청을 받아 울산 현대조선 영빈관에서 삼성 이 회장과 현대 정 회장간에 얽힌 ‘애증의 기류’의 일단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인데, 그때 정 회장이 술회했다는 내용. “…우리 둘(이병철과 정주영) 사이가 서먹서먹해져 김용완 회장(경방·전 전경련회장)이 자리를 마련해 신라호텔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내가 쓴 ‘신문과 나’를 보았는지 ‘신문 비판하는 사람 큰일 난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이번에는 김용완 회장 보고 ‘인촌(김성수)은 친일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김 회장이 얼굴이 벌개지면서 ‘무슨 소리요?’라고 하는거야. 그러자 이 회장은 ‘우리 취재하는 애들(도쿄특파원 등)이 정보를 입수해 증거물을 카피해 가지고 있다’고 다시 말하는 거야. 김용완씨는 인촌이라면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준 사람이자 처남 매부간이라 속으로 불쾌했을 거라. 이병철 회장은 얼른 화제를 바꾸어 자기는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고 신문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더니, 민관식이가 까불길래 신문(중앙일보) 방송(동양방송)으로 쳐 국회에 못나가게 했다고 하는 거야….” 당시 두 총수가 ‘정치와 최고권력’를 향한, 얼마나 민감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지, 그리고 권력의 부침과 한국재계 내부가 어떤 역학관계를 맺으며 흘러왔는지를 이 증언들은 잘 시사한다. 결국엔 최고 권력자이자 경영자인 대통령의 덕목이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이 연세대 최평길 교수(대통령학)의 견해. 그는 역사의 예를 인용, 한국의 대통령상에 대해 일침을 던진다. “지난날과 오늘을 보면, 한국의 현 사정은 이제 검소한 대통령 이상의 순교자적 청렴성과 도덕성을 필요로 해야 한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거친 한국은 이제 대통령이 다음 세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는 역사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역대 위대한 선진국 대통령들은 탁월한 리더십 외에 모두 도덕성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1위로 평가받는 링컨도, 독일 초대총리 아데나워도 시종일관 청렴결백한 지도자들이었다. 앞으로 대통령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고통분담의 국민호응과 경제난국 극복, 그리고 재도약을 위한 진정한 국력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권력층 내부에 거듭돼온 ‘부패 관행의 폐습’이 무엇보다 우선 척결돼야 하는 최대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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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70화 지금이 몇시인가 - (1) 암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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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8 Aug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18/1029597602303040.jpg" alt=""/>    ▲ 92년 대선 때 정주영   정경유착. 권재동락(權財同樂)의 세월로 일컬어지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그 격동의 진앙지는 역시 최대의 세력권인 권력과 재벌로, 주요 인사들간의 ‘막후 관계’가 치열하게 맞물리며 흘러온 것이 사실. 이른바 정재계 ‘실세’들이 그 축을 이룬다. 그 곡절의 중심에 언제나 ‘정주영’도 위치했다. 그만큼 숨겨진 비화(秘話)도 많고, 이 비화가 진실에 근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에는 권력과 재벌의 이익 중 누가 우선이냐, 아니면 재벌 중 특정 정권기에 누가 더 이익을 보느냐는 ‘암투의 기류’가 도처에 깔려 있다. 이번 호부터 정주영을 중심각(中心角)으로 한 그 막후의 이야기들을 조명키로 한다. 정주영과 정재계 핵심의 막후 스토리들, 그 실상과 의미는 무엇이며, 지금 한국의 시계는 몇 시쯤에 와 있을까. 첫 번째로 뒷얘기를 통한 시대흐름 전반을 짚는다. “박정희 정권 때도 (청와대 정치자금을) 냈다. 그때는 애국심으로 냈다. (전두환 정권 때) 1차 때는 날아갈 듯이 냈고, 2차 때는 이치에 맞아 자발적으로 냈고, 3차부터는 편히 살자는 생각으로 냈다. 6공 초기에는 20억∼30억원씩 갖다주다 받는 쪽에서 섭섭해 할 것 같아서 나중에는 1백억원을 갖다줬다.” 88년 11월 국회  5공특위의 일해재단 청문회를 비롯, 각종 석상에서 토해내어 지금껏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정주영씨의 ‘권력자금 헌납’ 발언들. 한국 권력사(權力史) 최초로 표면화시킨 ‘최고권력 직접 뒷거래’ 확인 발언들로 당시에는 모두 ‘폭탄성’이었다.역대 어느 정권에서든 권력과 재벌 관계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이 사실. 정권이 바뀌면 재벌은 으레 수난의 대상이었던 것. 박정희 정권 때는 총수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금당하고, 헌납이란 명목으로 재산을 뺏긴 일이 발생했고, 이어 전두환 정권 때는 재계 서열 7위인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된 것이 극명한 사건들로 꼽힌다. 다음은 신생권력이 무소불위의 위상을 보여주던 5공 초기, 권력과 재계총수인 정주영과의 갈등 기류를 보여준 대표적 비화. 정치기자 Y씨의 증언담이다. “정주영씨에게 정치권력에 대한 혐오가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5공 때부터라고 본다. 80년대 초 정 회장을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신군부의 압력은 집요할 정도였다. 자신들의 맘에 드는 인사를 회장직에 천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정 회장은 ‘전경련은 반드시 기업인들이 지켜야 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진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어느날 한 상가(喪家)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실세로 불리던 ‘3허(許)씨(허삼수 허화평 허문도)’ 중 한 사람을 만났다. 정 회장은 눈인사만 하고 나가려는데 만취상태에 있던 그 허씨는 ‘어이, 정 회장’하며 대뜸 반말조로 말을 건넸다. 허씨가 그대로 돌아서려는 정 회장의 다리를 완전히 무시하듯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정 회장은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새파랗게 젊은 친구’에게 수모를 당한 충격이 심해서였는지 정 회장의 시력은 그후 급속히 나빠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18/1029597602303041.jpg" alt=""/>    ▲ 96년 한 행사장에서 만난 세 명의 전직 대통령.  좀더 민주화가 진전되었다는 6공 시절 갈등이 더 심화되어 간 것도 아이러니. 그때 분위기는 노재봉 총리가 관훈클럽 연설에서 “지금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이 일대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공개발언을 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관련 일화로 한 소식통의 전언. “90년 10월 새 관저 준공을 기념해 노태우 대통령이 정주영 조중훈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대했다. 술이 거나하게 돌면서 슬슬 불만이 터져나왔다. ‘물정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정책을 주도하면서 경제가 엉망이다…” 로 시작된 정 회장의 비난의 화살이 슬며시 대통령쪽으로 옮아갔고, 급기야 노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후 노 정권의 정주영및 현대그룹에 대한 진짜 전쟁에 가까운 대립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견해들이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이어 YS의 이른바 문민정권이라 해도, ‘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재벌탄압’의 관행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평가들. 특히 정주영과 현대에 관한 한 이 시기는 가장 큰 수난의 시기였다는 것이 공통된 분석이다. 당시 취재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의 전언 비화. “94년 어느 여름날, YS 가신그룹의 일원으로 서슬퍼런 칼날을 휘둘렀던 한 경제부처 고위관료는 사석에서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전후 50년이 되어서도 나치 전범(戰犯)을 샅샅이 찾아내 극형에 처하고 있다. 역사의 심판을 내리는 거다. 현대도 따지고 보면 기업조직을 가지고 감히 정치권력에 도전했던 역사의 전범 아닌가. 일부에서는 이제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더라도 사형은 집행돼야 한다.’ 자못 섬뜩한 비유였다. 이 실세 관료의 발언은 대선 때 정적이었던 YS의 현대를 향한 미움의 정도가 어느 수위였는지를 확인해주는 대목일 것이다.”또 다른 일화로 한 현역기자가 전대주(田大洲) 당시 전경련 상무의 증언을 인용, 전하고 있는 내용.“96년 초 YS 최측근인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과 전 상무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홍 수석은 ‘현대그룹, 참 대단합디다. 그렇게 밟았는데도 멀쩡하잖아요’라고 했다. 현대 계열사 하나쯤은 부도나는 꼴을 봤으면 하고 기대했던 듯한 홍씨의 넋두리에 전 상무는 정주영 회장에 대한 YS의 구원(舊怨)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권력과 재벌 양측은 공생(共生)의 관계. 권력은 재벌의 국가적 역할을 인정, 초반 ‘군기잡기’가 끝나면 다시 협조관계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 이 과정서 그 원근(遠近)에 따라 보복 또는 검은 돈과 특혜의 정경유착 폐습이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어떻게 봐야 할까. 고려대 이만우 교수(경영학)의 진단. “김대중정권 이후 뇌물을 뿌려가며 권력에 기생한 사이비 기업인들의 온갖 불법행위와 비리도 결국 정권말기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권력에 줄을 대고 뒷돈을 줘가며 정치권력을 최고의 영업권으로 활용하려는 한국특유의 폐습이 여전히 깊이 흐르고있다. DJ정권 초기 정치권력의 힘은 극에 달했다. 특히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 무산, LG그룹의 팔을 꺾은 반도체 빅딜 등이 모두 정치권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재벌기업들이 회사를 팔고 사는 거래를 오너나 전문경영인이 아닌 여당 정책위의장, 공동여당 총재 등이 떠들고 다녔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LG반도체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구본무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던 일도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이었다. 특히 현대 하이닉스반도체등과 관련된 천문학적 공적자금 손실 같은 일은 정권이 바뀌어도 끝까지 추궁돼야 마땅할 것이다.”  이병도 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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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69화 세계화 - (10) 재벌과 국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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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1 Aug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11/1028992802303030.jpg" alt=""/>    ▲ 전경련 회의장에서의 정주영  한국 재벌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이 단체에 대해서는 각종 공과에 대한 시비가 많다. 때로는 불의(不義)한 정치권력과의 유착 및 주도권 다툼, 때로는 갈등과 노조세력으로 부터의 공격 등 온갖 비판과 ‘굴절 역학’속에 자리해온 단체. 그러나, 국력의 진운을 사실상 견인하고 결정짓는, ‘조타수’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확보하려 애쓴 흔적도 많다. 정주영은 이 전경련의 최장수 회장. 77년 2월, 김용완 회장(경방)에 이어 제6대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된 이후 1987년 2월까지 10년 동안 5선을 연임했다. 따라서 전경련 수장으로서, 그의 족적은 재벌과 권력의 역학관계에 대한 굴곡과 교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만의 특수한 ‘재벌경제’ 현실에서 재벌과 국익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가야 할 것인지, 그 방책에 대한 근본 물음도 던지게 한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새길 만한, 실제 흐름을 잡아본다. “전경련 회장은 전경련 회원들이 뽑는 것이지 권력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전두환 정권의 발족 초기인 5공 신군부 시절, ‘권력’으로부터 강제 퇴임압력을 받은 후 정주영이 이를 거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권력핵심을 향해 터트린 말. 전경련은 이 말을 신호탄으로 오히려 신군부에 저항하듯 정씨를 만장일치로 재추대, 지금껏 전경련의 위상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이 일을 거론한다. 역대 권력들의 끝없는 ‘칼자루 공격’ 속에서 재벌과 전경련이 국가 사회적 주도권과 기득권을 놓고 그 공방에 골몰해온, 부침의 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다음은 그때부터 내세워온 정 회장의 ‘방어논리’. 전경련의 위상확보를 위한 것이었지만, 기업인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권력과 정부에 대한 기본 입장으로 보여진다. “나는 전경련 회장 재임중 재계를 좌지우지해보려는 권력의 힘에서 재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고 관철하려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시대는 작은 정부와 경쟁에 의한 자유 시장 원칙의 자유 기업주의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정계와 경제 관료들은 시대에 역행해서 오히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와 간섭을 계속 강화하려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위에 안맞으면 대기업을 하루아침에 공중분해시키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무서운 힘의 행사에도 관계없이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 관료, 경제학자, 정치인 등에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자유 기업주의가 아니면 안된다는 소신을 피력하곤 했다. 경제 관료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을 때도 나는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줄이고 기업의 창의와 자유를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부실 기업은 정치 금융과 관치 금융이 낳는 것이라는 지적을 수차 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간다. 정부권력과 시민단체, 노조 등 일각에서 통상적으로 제기되어온 ‘재벌횡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반 기업주의 풍조’란 용어까지 동원, 거침없이 항변했다. 이 또한 우리사회가 안고 있었던 노·사·정 관계의 갈등구조를 함축하고 있는 부문. “기업(재벌)이 무슨 수든, 이윤만 추구하려 한다는 드센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기업가의 첫째가는 목표는 이윤을 낳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다, 기업이 낸 이윤이 세금으로 정부에 들어가고, 이것으로 사회 복지도 확장하고 분배 정책도 펴고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따라서 기업 이윤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라는 주장은 기업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작은 기업을 일으켜서 중소기업이 되고 중소기업이 커서 대기업이 되는 것이고 대기업이 더 발전해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국민 경제의 발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업이 세계 수준으로 자꾸 커져야만 정부는 이 발전을 토대로 사회 복지와 분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자기 기업을 키우는 것이 기업 본연의 역할이지, 기업으로 발생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시시때때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반 기업주의 풍조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주영은 그때부터 대기업(재벌기업)이 진정한 ‘국익’을 위한 설자리가  ‘세계적 수준의 성장’에 있다는 견해에 확실한 무게를 싣고 있었던 셈. 재벌의 사회적 부작용의 극복은 그 다음 내부 문제일 뿐이란 ‘확대팽창전략 일변도’의 시각이 강하게 엿보인다. 그러나, 그후 정작 나타나고 있는 한국 재계의 냉정한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비판. 심지어 현재 한국 재벌기업의 실태는 ‘자본주의의 원리 및 기반의 위협과 근본적 재검토’로 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 고려대 강수돌 교수(경제학)의 비평을 들어본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11/1028992802303031.jpg" alt=""/>    ▲ 1982년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의 정주영 회장(맨오른쪽). 정 회장은 5공 초기 신군부부터 전경련 회장 강제퇴임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정 회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국 기업들은 얼마나 많은 회계 조작과 탈세,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등으로 이름이 높은가. 최근의 권력형 비리와 정경유착, 코스닥 등록을 위한 벤처기업의 매출액 불리기 등은 한국의 짧은 역사에서도 이미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따라서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외국언론의 비난에 대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듯’한다거나 제법 그럴듯한 개혁안을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고급 코미디를 할 것이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 부정과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토대 자체를 혁파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에 다가서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경제와 경영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근본 원인 해명 및 그 해결책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책임성 있게 이어지길 고대한다.”최고의 현안은 역시 재벌기업의 구조조정 문제. 이 문제에 대한 경제평론가 김동원씨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그는 재벌기업의 해외매각 문제를 비롯한 구조조정과 국익, 그리고 공적자금 문제에 관해 비교적 선명한 분석을 내린다. “부실 대기업을 해외에 매각하자니 헐값으로 팔았다는 여론의 비판이 두렵고, 그대로 두어서는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스스로 헐값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의 잠재매수자를 처음에는 부실기업을 처리해 주는 ‘산타클로스’로 시작해서 우리 식의 계산방식과 맞지 않으면 ‘샤일록’으로 몰아 가는 여론중심의 해외매각 행태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의 매물은 국제시장에서 ‘불신의 왕따’가 될 수밖에 없다. 국익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헐값 시비가 아니라 국제 시장으로부터 한국에서 기업이나 금융을 하고 싶을 만큼 사업여건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온 국가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국재벌의 세계적 신인도 회복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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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68화 세계화 - (9) 종언의 길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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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4 Aug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804/1028388002303020.jpg" alt=""/>    ▲ 현대건설의 사정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지난 2000년 11월 당시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자구안을 발표하고 있다.  건국이후 국가 경제구조 조정을 위해 최대규모로 집행된 이른바 IMF 수습용 ‘공적자금’. 구조조정은 제대로 되지도 않고, 국민부담만 가중시킨 그 천문학적 돈은 다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새나가고, 흘러 갔는가? 그 ‘반(反)국민적’ 정책집행의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문제 제기다. 그 답을 우리는 정주영의 사업생애 주축에 자리해온, 한국최대기업 현대건설의 몰락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 ‘거목’이 뿌리채 쓰러지는, ‘종언의 길목’에서 드러난 한국 정책 수준, 그리고 정경구조의 심부(深部)와 당시 정주영의 경영행로를 점검한다. 1915년부터 2001년과 1947년부터 2001년. 첫번째는 정 회장의 생존기간이고, 그 다음은 현대그룹의 모기업 현대건설의 생존기간. 사업가 정주영 인생의 ‘버팀돌’과도 같았던 현대건설이 54세를 일기로 그의 사주(社主)와 동시에 빚더미만 안은채 명운을 다 한 셈. 그 후의 현대건설은 부실 공기업으로, 신생회사일 뿐이며, 사기업 현대건설의 아버지가 정주영이었다면 공기업 현대건설의 부모는 정부와 채권은행단으로, 국민이 그 실질적 짐을 부담케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채권단의 ‘현대건설 살리기’는 3년여전 ‘기아자동차 살리기’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 당시 정치권과 김선홍 회장이 합세해 ‘기아를 국민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경제논리를 뒤로 한 채 정치적 처리로 일관하려 하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것과 같은, 비슷한 ‘판단오류’를 보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현대건설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대의(大義) 아래 책임을 국민들에게 떠넘기려는 큰 우(遇)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시장원리를 원칙으로 하는 전문가들사이에서 강한 비판흐름으로 나타난다.정운찬 교수(서울대·경영학)의 진단.“현대건설 문제가 한국경제를 뒤흔들면서 그동안 재경부와 금감위, 그리고 외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과 현대건설이 국민에게 내뱉은 말들이 모두 거짓의 연속이었음이 확인됐다. 정부는 2001년 11월, 4억달러 해외 건설자금 지급보증 조치로 현대에 대한 구제를 결정하면서 앞으로 신규자금 지원은 없을 것이고 현대건설 스스로 진성어음을 막지 못하면 즉시 부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말은 계속 뒤집어졌다. 그 후로도 회사채 신속인수와 아파트 분양대금을 담보로 한 자금지원은 물론 대출금 출자전환을 포함하여 모두 2조9천억원의 추가지원 조치까지 해줬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이 완전히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기업의 흥망은 어디까지나 시장(市場)이 판단할 일이다. ‘현대건설 사태’에 관해 이 정부는 명백히 시장 위에 군림하며 현대건설 연명을 깊숙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정교수의 강도높은 해석. “현대건설이 부도나면 채권은행이 흔들린다. 은행장이 물러나고 지금까지 현대문제에 관여했던 고위관료들의 책임론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자리유지에 급급한 그들은 현대건설이라는 난파선에 동승하여 이해관계를 계속 같이해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간 돈은 금융기관이 떠맡고, 금융기관이 떠맡은 돈은 공적자금으로 메우고, 공적자금은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돌아갈 테니, 어느 국민이 앞으로 이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겠는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보험기금이 4조원 펑크났다고 장관이 바뀌고 정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마당에, 일개 사기업인 현대건설에 1년간 수조원을 퍼붓고도 모자라는 판국이니, 한국경제를 거덜낸 경제관료들과 공적자금 운영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충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신화적’ 현대그룹 성장사의 축(軸)을 이뤘던 현대건설. 이 기업이 왜 이토록 심각한 ‘기로’에까지 가게되고 만 것일까. 현대건설에 정통한 C은행 한 임원의 경위설명. “현대건설은 지난 97년 1년 동안만 해도 약 2조7천억원의 공사미수금이 발생했다. 국내 주택부문의 과도한 선투자(先投資)가 원인이었다. 이것은 현대건설이 최근까지 겪고 있는 유동성 위기의 뿌리이기도 하다. 당시 공공공사 수주 부진 등으로 경쟁업체인 대우에 50여년간 지켜온 도급순위 1위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정 회장의 경영스타일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불도저식 사업확장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는 리비아처럼 ‘국가 리스크’가 높은 나라의 공사를 수주, 수익성 악화를 자초했다. 또 국내에선 아파트에서 원자력발전소까지 이른바 ‘백화점식 사업’ 행진을 계속해 갔다. 막판에 충분한 계산없이 뛰어든 대북사업도 현대건설의 재무구조 악화를 더욱 가중시켰다.” 더욱이 문제는 공기업화 이후에도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 한 관계인사의 말이다. “채권단은 이 회사가 공기업 전환 후 한해 동안 5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이라고 장담해 왔지만 실제로는 2백40억원에 그쳤다. 이자 갚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해외건설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오래 전에 단순시공은 현지 업체들의 차지가 됐다. 여기에 벡텔 등 세계 유수의 건설업체들이 고도의 기술력으로, 공사대금을 조달해 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현대건설을 압박하고 있다. 자금면에서는 공기업이 된 후에도 회사채 발행도 불가능해 추가자금 지원상황에 빠지고 있다.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해주고도 모자라 다시 공적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 악순환의 확대국면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민부담만 자꾸 커지게 됐다.”  이같은 ‘사태’의 이면에는 정 회장의 고의적 후계구도에 의한 현대건설 공기업화 ‘배수진’과 김대중 권력과의 정경유착이 있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 한 정치 소식통의 전언. “매우 전략적인 흔적이 짙다. 그는 시대가 변해도 빚을 키울대로 키우고, 결국 ‘대마불사’를 통하게 만들었다. 그가 주력기업을 몰아 주는 재벌가의 일반적인 대물림 형식을 피해 기묘한 후계구도로 그룹을 분할, 승계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정씨는 그룹의 공식 후계자로 5남인 몽헌 회장을 지명했다．그러나 내용을 따져보면 장남격인 현대자동차의 몽구 회장이 반석의 출발을 한 데 비해 별로 실속이 없다. 현대건설은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내일을 장담하기 어렵고 현대전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정씨가 사업에 몰두하면서도 정치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같은 상속 구도가 주는 의미는 명백하다. 1차부도를 냈을 때 몽헌회장이 해외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등 버티기를 통해 오히려 정부·채권단을 교란, 현실성 없는 대책만 내놓아 결국 ‘현대건설의 공기업화’를 성공시키려 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권력과의 관계는 또 어떤가. 형평성의 문제만 봐도 그렇다. 현대그룹은 언제나 ‘상시퇴출 원칙’의 예외였다. 정경유착 의혹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김홍업 비리연루와 정 회장의 대북행보 과정에서도 징후가 드러났듯 그런 배경들이 강하게 배어있음을 부인키 힘들다.” 국제적 비판 시각도 마찬가지다. 경청해야할 한 외국인 투자자의 말. “한국정부를 의심하면서 투자를 유보하고 있다. 대우자동차·동아건설의 부도 처리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현대건설과 쌍용양회 등의 처리는 매우 잘못됐다. 장례식장으로 곧바로 가야 할 기업들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몇 번씩 입·퇴원하며 ‘부실 바이러스’를 확산시키고, 국민의 돈만 마구 낭비하고 있다. 그 주범을 수술해야 한국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제69화 ‘세계화 - (10) 재벌과 국익(國益)’편 이어집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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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67화 세계화 - (8) 주체가 누구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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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8 Jul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28/1027783202303010.jpg" alt=""/>    ▲ 아산재단의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정주영(왼쪽서 다섯번째)이 내빈들과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아태재단과 아산재단. 하나는 대통령이 설립한 공공재단이고, 하나는 국내 최대의 재벌총수가 만든 문화재단. 이들 ‘공익재단’은 왜 비판의 도마위에 오르는가. 이 물음은 우리사회 공공기구 경쟁력의 ‘세계화 수위’를 재는 바로미터일 수 있다. 그래서 식자층 사이의 논쟁도 뜨겁다. 초점은 이들 재단이 실질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존재해 왔느냐는 이른바 ‘주체론 시비’. 사실상 권력자와 재벌 그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위장된 존재였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공공의 이익과 국가사회’을 향한 진정한 봉사 기부단체였느냐는 논란이다. 정주영이 기업 이익의 본격적 사회환원이란 ‘기염’을 토하며 출범시켰던 이른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峨山社會福祉事業財團)’. 우리 지도층의 공공재단 풍토란 ‘창(窓)’을 통해 이 기구의 실체와 의미에 다각 접근키로 한다. 먼저 현대측이 내세운 기록.“우리 대기업들은 많은 기업 이윤을 해외도피하거나 사용(私用)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남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재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기업인들이 그 후에 문화재단이나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계기를 만들었다. 아산정신은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막대한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시킨 선구적 역할을 했다.” 아산재단이 설립된 것은 77년 7월1일. ‘현대건설’의 정주영 개인주식 50% 출연을 기초로 설립이 발표됐고, 매년 약 50억원의 배당 이익금으로 사회사업을 하도록 한 것. 본인은 그 배경으로 ‘주체론’까지 언급, 재계 풍토 전반을 비판한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사회, 국가의 주체도 역시 사람이다. 사람을 크게 괴롭히는 것으로 나는 병고와 가난을 꼽는데 이 두 고통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나는 이를 복지재단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일부 재벌들이 복지재단이라고 유명무실한 간판만 달아놓고 절세(節稅) 수단으로 쓰거나 다른 영리 추구를 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던 터다. 나는 그러지 않기 위해 향후 5년 동안 우리가 할 사업을 못박았다. 나는 카네기재단이나 록펠러재단 같은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발표한 사업내용은 의료·사회복지 지원, 연구개발 지원, 장학 사업 등 4개 부분. 최대 역점은 의료사업. 취약지구 중심으로 77년 정읍종합병원 기공식을 가졌던 것을 필두로 79년 영덕종합병원 준공까지 약 1년 반 동안 정읍과 보성, 인제, 보령, 영덕 5개의 종합병원을 완공, 개원시켰고, 89년에는 서울중앙병원이 이 재단을 통해 개원했다. 현대측은 이 병원들을 통해 ‘10만명 이상’을 무료진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3개사업에서는 불과 몇 억에서 최대 몇십 억 수준의 지원금이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핵심은 의료사업 확대인 셈. 따라서 선진국 복지재단에 비교하면 큰 문제점이 발견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기업문화 전문가 차모(42)씨는 빌 게이츠의 경우를 예로 든다. “빌 게이츠는 개인 재산 50억달러를 교육과 의료발전에 써달라고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미국에선 문화재단이나 장학재단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직접 재단을 만들지 않고, 뭘 믿고 이렇게 엄청난 거액을 선뜻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믿을 수 있는 회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회계사들이 꼼꼼하게 평가해서 정기적으로 그 내용을 보내오는 것이다. 결국 한 사회의 건강성과 선진성은 이런 정직성과 투명성에 의해 좌우되어 나감을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결국 정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의료중심의 계열사를 늘린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경제전문 언론인 L모씨의 비평은 더 신랄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28/1027783202303011.jpg" alt=""/>    ▲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통해 지난 89년 건립된 서울중앙병원.  정 회장이 인용한 카네기재단이나 록펠러재단은 노벨재단을 벤치마킹하여 설립된 확실한 공익재단이며, 사실상 우리나라에는 이런 재단이 없다는 것. “한국에서는 이 공익재단 문제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숨이 막힌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거부들이 많다. 포춘지와 포브스지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갑부에 10명 안팎의 재벌총수들이 꼭 포함된다. 그러나 이들이 사재를 진짜로 사회에 환원했다는 기사는 아직 찾아 볼 수 없다. 양대거부는 이병철씨와 정주영씨다. 이씨의 삼성문화재단을 ‘한국의 카네기재단’이나 ‘한국의 노벨재단’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아직 없지만, 정 회장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는 84년 4월 부산대 특강에서 ‘기업주들이 2세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있는 사실은 기업윤리상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고 타 재벌의 관행을 비판까지 했는데, 말과 행동이 너무도 다르다. 그 자신도 2세를 위한 상속·증여의 수단으로 계열사를 편법 운용해간 흔적이 도처에 있다. 그가 설치한 공익재단마저도 결국엔 또다른 계열사로 만들어간 형국이다. 한국에도 공익재단은 많다. 그룹마다 공익재단은 적어도 1개, 많게는 3~4개씩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공익재단다운 공익재단은 과연 몇 개나 되는가. 그룹총수의 상속·증여세 탈세수단으로 설립, ‘사실상의 지주회사’로 운영된 사례가 많다.” ‘한국형 기부문화’에 건강치 못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51) 교수의 전경련 자료를 토대로 한 진단을 들어보자. “한국 기업은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기부를 하고 있다. 전경련 발표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92개 기업이 96년 한햇동안 3천68억원, 세전 이익의 9.4%를 기부했다. 수치로는 미국 기업의 9배나 기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런 것일까. 전경련 자료는 재벌의 대학, 대형병원 설립 등을 기부로 분류해서 일어나는 착시(錯視)현상일 뿐이다. 한국기업의 기부는 사회에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자선이 아니라, 재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또 다른 투자인 것이다.” 실제로 전경련 조사에서 대재벌의 기부 가운데 현대아산재단에서도 드러났듯 병원 건립-운영 등 의료분야 지출의 비중은 지난 91년 13.4%를 기록한 이후 해마다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원윤희(43) 교수는“선진국 기업의 의료 기부는 빈민이나 유색인종, 결손가정 등에 직접적인 지원이 대부분이다. 재벌기업이 의료산업에 진출해 영리추구를 본연으로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기부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정치권의 시각은 어떤가. 한 소식통은 아태재단과 아산재단을 비교, 이런 견해를 전한다. “대통령의 아태재단이 범법부패의 온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시대 대한민국 공공재단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단면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태재단 부이사장인 김홍업씨 구속은 국민적 의혹을 밝혀내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김병호 전 행정실장을 비롯한 아태재단 직원들의 직접적인 돈세탁 가담 의혹부터가 그렇다. 아태재단을 통한 이른바‘DJ 대선자금’은 수사의 가장 큰 뇌관일 것이다. 이곳의 부패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94년 재단 금고에서 도난당한 양도성 예금증서가 김우중 전 대우회장으로 되어 있었던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범죄성 오염원이 이처럼 위로부터 끝없이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공익재단이라고 선진형 모델을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즉, 정주영의 복지재단 문제도 결국 대한민국 정경시스템의 ‘작동 고장’안에서 빚어진 대표적 사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진단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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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6화 세계화 - (7) 불도저의 오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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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1 Jul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21/1027178402303000.jpg" alt=""/>    ▲ 77년 청와대 연무관 준공식에 참석해 박 대통령과 나란히 테이프커팅을 하는 정주영.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압축 고도성장의 그늘’은 정주영과 현대에게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주영은 스스로도 자신을 ‘생각하는 불도저’라고 지칭, 이른바 개발독재 방식으로 온갖 지혜를 동원해 밀어붙여 오늘의 ‘부(富)’를 창출할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특히 60~70년대 정주영이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국가 개발 드라이브’에 힘입어 세계적 재벌로 도약하게 된 배경을 감안하면, 그 그림자가 재계안에서 가장 강하게 드리운 그룹이 바로 ‘정주영씨와 현대’란 측면이 있다는 비평도 적지 않다. 따라서 현대와 같은 불도저식 급속 고도성장의 이면은 어쩔 수 없이 정상적 경영의 투명성과 합리성의 결여, ‘부실’이 수반될 수밖에 없으며, 그 후유증도 곳곳에서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국 정경유착구조의 폐습을 떠나, 명암이 엇갈리는 그 증후군의 현장 실태를 직접 가보자.‘세계가 비웃더니 세계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국제사회가 불가능하게만 보았던, 현대건설의 대표적 ‘20세기 주베일 대역사’가 성공리에 마무리된 후 정주영이 터트린 일성(一聲). 이 ‘신화’를 계기로 정주영과 현대건설은 본격적인 세계화의 발판을 구축, 팽창을 거듭해 나가기에 이른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서 시공 능력을 과시한 현대는 이 업적을 기반으로, 라스알가르 주택항 공사, 알코바, 제다 지역의 대단위 주택 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 확장 공사, 두바이 발전소, 바스라 하수처리 공사 등등의 국제적 대형 공사를 잇따라 수주, 외형을 급속하게 확장하기 시작한 것. 이에 따라 1975년 중동 진출 후 1979년까지 ‘현대’는 대략 51억6천4백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같은 기간‘현대’의 총매출 이익 누계 가운데 60%가 해외 건설 공사의 이익이었을 정도다. 주베일공사는 이렇듯 현대그룹 도약에 결정적 도화선이 된 셈. 무엇보다 다 지어놓은 후 오일쇼크로 극심한 불경기에 시달리던 현대조선소의 회생이란 ‘두마리 토끼’도 정 회장과 현대는 이 공사를 통해 잡아낸다. 그룹 관계자의 경위 설명.“사실 우리가 이런 대규모 공사를 연속적으로 수주하게 된 것은 울산조선소의 제작 능력이 받침이 되어 싼 응찰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경쟁력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공사를 위해 울산에서부터 자켓을 나르고 콘크리트 슬래브까지 나른다고 하니까 세계적인 기업인들이 다 같이 비웃었다. 참모들은 막대한 금액의 보험을 들자고 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바지선이 바다에 빠지면 보험 회사가 건져주는 것도 아니고, 조사니 뭐니 시간만 끌면서 제때 나오지도 않을 보험 같은 건 들 필요가 없다’면서 보험 권유를 일축하고, 보험 대신 태풍으로 사고가 나도 철 구조물이 바다 위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구상하게 했다. 울산조선소에 지시해서 주야 작업으로 1만 마력의 터그보트 3척, 대형 1만5천8백t급 바지선 3척, 5천t급 바지선 3척을 최단시일 안에 만들어내게 했다. 오일 쇼크로 배 만드는 일거리가 없어 침체되어 있던 울산조선소는 주베일 산업항에 들어갈 기자재를 만들어내느라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일은 현대조선이 다시 살아난 것을 비롯 현대그룹의 급성장을 가져온 또 하나의 큰 획이었다.”그러나, 문제의 표적은 대한민국 땅 안에서 벌인 국내공사. ‘해외’를 탈출구로 하여 급성장의 ‘세기적 신화’를 이룩하긴 했으나, 정작 국내공사의 경우 부실의 오명을 곳곳에서 노출하고 만 것. ‘주베일항 신화’와는 반대로 현대의 본거지인 울산항내 부두공사가 부실의 오명을 쓴 것은 대표적 사례. 전문가 K씨의 현장진단은 이렇다. “해외에서는 그렇게 잘하면서도, 현대계열 3사가 완공한 후 국가에 기부채납한 울산항내 부두가 4년만에 침하돼 부실시공 의혹을 산 것은 우연한 일로 볼수 없는 일이다. 당시 감독관청은 부두 사용중단 명령을 내려야할 정도였다. 현대하이스코, 현대정유 등 현대 3사는 지난 88년 건교부로부터 울산시 동구 방어동 예전만 매립면허를 받아 현대건설을 시공사로 선정, 안벽 4백80m 규모의 부두를 지난 98년 3월 완공했다. 그러나 안전진단 용역을 의뢰 받은 한국건설품질연구원(경남 창원)이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일부 지반이 침하돼 바닷물까지 보이는 등 심각한 균열을 보였다. 그 후 울산해양청은 부두 사용을 전면 중단시키고 시급한 보수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현대측 시행 3사에 2차례 보냈으나 오랫동안 현대측 시행사들은 답변조차 보내 오지 않았다. 이로인한 보수보강이 계속 늦어져 큰 피해가 발생했다. 해외에서는 신용을 위해 잘하고, 자기나라 안에서는 이런 부실이 곳곳에서 빚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한국기업 체질에 큰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 최근 준공되어, 성황리에 활용된 울산 월드컵 경기장 공사의 부실의혹도 비슷한 경우. 현지 언론 관계자에 따르면 울산 월드컵경기장은 감사원 감사에서 ‘월드컵경기장 본체의 경우 안전성 검증을 위한 실물 모형검사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콘크리트 양생기준도 지켜지지 않았다’며 부실시공 의혹을 강하게 제기받았다는 것. 특히 당시 감사자료는 ‘현대건설이 국내 최초의 PC공법으로 건설되는 월드컵구장의 실물 모형시험을 거치도록 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 이 때문에 구조물이 앞으로 지붕무게(3천1백93t)를 견딜지 알 수 없어 안전성이 의심된다’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또 이 감사에서 무려 1백58회에 걸쳐 콘크리트 구조물에 대한 양생시간이나 온도 등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적발됐다고 밝히면서, 규정된 공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써 지반침하등 부실시공 후유증의 가능성이 높다고 전하고 있는 실정. 국내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입찰 담합비리에 ‘현대’가 수시로 적발되고 있는 것도 문제사례에 속한다. 지난 한 해 건설교통부에 대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공사담합에 참여한 업체는 현대건설과 대우, 대림, 동아건설, 현대산업개발, 삼부토건, 고려개발, 남광토건 등 굴지의 1군 업체들을 포함해 모두 1백2곳에 달하며 담합으로 공사를 수주한 회사는 43곳, 담합낙찰공사 금액도 6조1천1백17억원에 이르고 있다는 것. 또 서해안 고속도로 등 3건의 대형 공공공사에서도 현대는 담합행위로 입찰 들러리를 선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현대건설의 대한민국 공공시설 부실공사로 일상 국민생활에까지 큰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 지하철 날림 부실공사 사례가 꼽힌다. 시민단체 간부 이모씨(45)의 주장. “현대건설이 시공한 서울 지하철 7호선 11개역이 한때 비 피해로 몽땅 침수, 1천억 가까이의 시민피해가 발생된 일이 있었다. 당연히 피해보상 문제가 제기됐다. 책임소재의 핵심은 집중 호우가 예보됐던 이틀밤 동안 가물막이의 유실과 붕괴책임을 누가, 얼마만큼 져야 하느냐에 있었다. 서울시는 ‘임시운행 버스의 결손액은 원인 제공자인 현대건설에서 보전토록 조치한다’며 사고원인이 시공회사인 현대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려했다. 그러나 현대건설 측은 제방 설계주체가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이기 때문에 설계 자체가 잘못됐다는 주장을 펴 법정소송 논란으로까지 비화된 적이 있다.” 수많은 해외현장에서 세계 최강의 건설기업이란 신화를 자임했던 정주영의 현대건설. 왜 정주영씨와 현대가 해외현장에서 외쳐온 ‘조국과 애국’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이런 부실한 면모를 수없이 노출해야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정주영과 현대가 그룹 세계화의 길목마다 강조해온 이른바 ‘사업보국’의 ‘사각지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속칭 ‘한국병’의 일단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도 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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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65화 세계화 - (6) 기적과 부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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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4 Jul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14/1026573602302990.jpg" alt=""/>    ▲ 영동고속도로 건설이 진행중이던 지난 71년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정주영(오른쪽).  대한민국 책략(策略). 뜻있는 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요즘 나도는 말이다. ‘월드컵 4강 신화’에서 보여준 국민적 에너지를 실질적 ‘국력 4강’으로 승화시킬 방도와 연관해서다. 특히 현대측의 시각과 감회는 남다르다. 월드컵 유치 주역이 정몽준(현대중공업)이란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창업 총수 정주영의 사업인생 자체를 그 가능성의 증거로 주장한다. 한국이란 ‘불모의 후진국’에서 세계최강의 탑을 끝없이 일으켜간, 개척과 ‘신화’의 엄연한 실적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는 것. 한국경제 일선(一線)에서 그와 같은 투혼으로 다시한번 국민적 저력을 결집해 내기만 한다면 ‘국력 4강신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맥락. 그 때 실제 현장은 어떠했을까. 20세기 최대역사 주베일 공사실황은 그 가능성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현대가 무모한 객기로 드디어 사우디 앞바다에 침몰하게 생겼다.” 공사 착수를 앞두고 파다하게 떠돌아 다닌 국제적 소문. 세계적인 건설업체들이 컨소시엄까지 하면서 15억 달러로 응찰했던 공사를 현대가 거의 반값에 떠맡아 곧 망해 넘어질 거라는 얘기였다. 현대 관계자들의 당시 상황 기억담. “현대의 결정은 막무가내식 도박으로 비쳤다. 울산에서부터 모든 기자재를 직접 만들어 나르고 콘크리트 슬래브까지 날라 그 금액에 반드시 이익까지 내겠다고 하니까 세계적인 기업인들이 다 같이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적이 없는 한 어려울 것이라고들 했다.”(J 전 상무) “경쟁은 인간간의 경쟁일 뿐이다. 어느 분야든 선의의 경쟁도 선의의 경쟁자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계가 있는 그저 그 정도의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니 인간사도 그저 그 정도려니 하고 살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를 넘어서서, 사업을 구상하고, 돌파해 나가려 했다. 주베일 공사성공은 그 대표적인 기억이다.”(정주영)  이른바 ‘기적의 열쇠’는 대양 수송 작전. 원가 절감을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통째로 제작,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순의 인도양에서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해 내기로 결단을 내린 것. 핵심골재인 자켓이라는 철 구조물 하나가 가로 18m, 세로 20m에 높이 36m, 무게가 5백50t에 제작비는 당시 개당 5억 원짜리로 웬만한 10층 빌딩 규모. 이런 자켓이 89개가 필요했으니 상상해 볼만한 규모. 단 한 척이라도 사고를 내면, 공기(工期)에 걸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대도박’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14/1026573602302991.jpg" alt=""/>    ▲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의 정주영(맨 오른쪽).  더욱이 이 수송 선박들을 공사 현장에 어떻게 안전하게 접안시키느냐도 막막했던 현안. 해안선에서 12km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닥 복판에 5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정박하는 터미널을 만들어야 했다. 설계내용은 수심 30m에 12km의 연장을 자켓 구조물로 하고, 대형 강관 파일을 해저 지반 30m 깊이로 박아 내부의 흙과 돌을 제거하고 저변을 확대해 파일 지지 면적을 넓힌 후, 철근으로 보강, 시멘트 콘크리트로 채워 구조물을 해저에 고정시키도록 한다는 것. 현대와 정주영도 그때까지 그런 구조물의 시공은 물론, 구경을 해본 적도 없었던 불모의 상황. 국제 건설업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따라서 만약 이 방안이 성공하면 ‘기적’이라고들 했던 것이다.  현대로선 우선 이 터미널 구조물의 전문가부터 수배하는 일이 시급했다, “한국인 가운데 이 분야에서 세계 정상의 기술을 가진 전문가를 어디에서든 끌어 찾아와라!” 정주영의 이른바 강렬한 ‘애국관’이 작동을 시작했다. 수소문 결과 지질학 박사 김영덕씨가 표적인물로 떠올랐다. 1976년 12월, 뉴욕에 본사가 있는 기술 용역 회사 MRWJ에 적(籍)을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회사에 해양 구조물 및 지질 전문 기술 고문으로 파견돼 있던 그가 때마침 주베일 건설 현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당시 서울에 있던 정 회장에게 접수된 것. 정 회장은 즉각 그를 서울로 초청, ‘현대건설’ 입사를 강력히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개인 여건’을 이유로 한 고사와 설득의 밀고 당기기가 거듭된다. 공사성공의 요체를 ‘조국애의 열정, 능력, 그리고 사람(인재)’로 꼽으며 정주영이 밝힌 당시의 김 박사 설득담.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들의 애국심은 그냥 국내에서 살아온 사람보다 훨씬 뜨겁고 순수하다. 나는 그의 애국심을 움직여 반드시 우리 ‘현대’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뉴욕으로 떠나게 돼있는 그를 붙들고 다시 한번 이렇게 말했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각자 나름대로 많은 일을 하다가 죽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만큼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한테는 그런 기회가 와 있다. 이 나라는 김 박사의 조국이다. 그 능력과 지식을 왜 남의 나라를 위해서 쓰는가?’” 김 박사의 합류는 그렇게 성사됐다. 정주영의 불퇴전의 추진력과 김 박사의 치밀함 및 세계적 전문성, 그리고 근로자들이 혼연일체가 된 ‘대도전’은 그렇게 열린 셈. 한 관계자의 당시 상황설명이다. “우리가 울산조선소에서 자켓을 연결하는 빔까지 벌써 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세계는 놀랐다. 빔의 길이는 20m였는데, 그것은 자켓 설치가 완벽했을 때의 길이였다. 수심 30m에서 파도에 흔들리며 중량 5백t이 넘는 자켓을 한계오차 5cm 이내로 꼭 맞아떨어지는 20m간격으로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울산에서 제작한 빔을 바지선으로 실어다가, 단 5cm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끼워넣어, 다시 한 번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쾌거’에 대한 정 회장의 심경록은 경청할 만한 대목. “상식에 얽매인 고정관념의 테두리 속에 갇힌 사람으로부터는 아무런 창의력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때 ‘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가졌을 때 발휘되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 능력과 창의성, 그리고 뜻을 모았을 때 분출되는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이 ‘기적론’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 J씨(S산업대. 경제학)의 총론적 반박. “현대와 정주영이 해외에서는 기적적인 대역사를 이룬 경우가 많았지만, 정작 대한민국 땅 안에서는 부실공사, 부실경영이 많았다는 것이 문제다. 즉 국내 최대재벌로서의 공공적 책임성에도 불구, ‘자사이기주의적 족벌경영’과 급속한 ‘그룹확대 팽창전략’에 지나치게 집착, 국가경제체질에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한 경우가 많으며, 나라안에서의 각종 부실공사, 부실 편법경영 선례를 야기한 구조적 취약점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훈과 반성이 강하게 공존하고 있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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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4화 세계화 - (5) 시련의 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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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7 Jul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07/1025968802302980.jpg" alt=""/>    ▲ 지난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민당 대선후보 정주영이 대규모 유세를 펼치고 있다.  2002 월드컵의 역사적 승전보와 이를 발화점으로 움트는, 정주영의 2세 정몽준의 대권도전 기류. ‘한국 최대재벌 정주영 일가(一家)’의 항로에서 차지하는,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아버지에 이은 아들의 잇딴 대권도전 시도. 이미 아버지 정주영의 ‘대권도전’은 스스로 설정했던 인생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한 경구를 처음으로 좌초시켰던 ‘실패’였을 뿐 아니라, 한국 재계 내부에서조차 ‘거대재벌이 국가 최고권력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면, 한국의 현실적 정경풍토 속성상 나라장래와 공정 시장경제 체질 및 경제선진화에 역기능이 더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자성론(自省論)을 일게 했던 것이 사실. 한국재계사 최초로 재벌 1·2세에 걸친 이같은 ‘대권행보’는 정주영 성장드라마를 수없이 수놓은 ‘시련의 벽’ 실험중 백미(白眉)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벽은 슬기롭게 뛰어넘고, 어떤 벽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는 것이 주변의 대체적 평가. 정주영과 현대가 그룹 세계화의 과정에서 오늘이 있기까지 간단없이 부닥쳤던 굵직한 ‘시련의 벽들’을, 대권도전 결단과 금세기 최대 공사 주베일 현장, 세계최대 조선소 파산위기 등 대표 사례를 중심으로 짚는다.  ‘정치인 정주영’ 에 대한 평가는 ‘경제인 정주영’과는 달리 거의 부정적 측면이 대세를 이룬다. “정 전 회장이 대권에 도전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 전문 경제인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더라면, 더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 이라는 ‘교훈론’이 일반적인 진단.  정 전 회장은 92년 1월부터 93년 2월 정계은퇴 때까지 1년여 동안 짧지만 파란만장한 정치를 했다. 정치권에서 ‘CY’로 불렸던 그는 통일국민당을 창당, 92년 3월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대권에 도전했으나 숱한 시련속에 결국 고배, 본인과 현대그룹 자체에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현직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부터 들어본다.  “정 전 회장은 성공적 기업인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선 실패했다. 정경유착과 정치보복의 문화가 있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기업 등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대권에 도전한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한나라당 의원 김문수)  “경제인도 물론 정치를 할 수는 있지만 정경유착이 큰 문제가 되는 풍토에서 재벌 총수가 대권까지 도전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경제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민주당의원 조순형) 현대측 관계자들의 실토도 유사하며 좀 더 구체성을 띤다. 측근 K전임원의 자성적 고백.  “우리는 대선에서 그룹전체를 동원하고 몰아붙여 당선가능선인 9백만명의 당원을 순식간에 만들었고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은 건설현장의 벽돌처럼 고정돼 있지 않았다. 정 회장이 쌓아온 부(富)와 사업하듯 하는 정치행태에 부정적 시각이 불어만 갔다. 정 회장이 대선에서의 실패를 ‘실패가 아니라 시련’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물론 ‘만약 그것이 실패라 하더라도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는 신조로 임했을 것이다. 이를 실패로 인정치 않았고, 시련 정도로 보았다면, 그것은 아들 몽준씨를 자신이 못다 이룬 대권에의 꿈을 향한 후계자로 계속 상정하고 움직였던 것과 연관이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707/1025968802302981.jpg" alt=""/>    ▲ 아버지 정주영의 유일한 실패였다고 할 수 있는 대권도전의 ‘유업’을 아들 정몽준은 이뤄낼 수 있을까.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했던 정몽준 의원.  이와 관련, 2세인 정몽준씨의 최근 행보도 주목대는 대목. 정통한 한 정치소식통의 전언. “정몽준씨(무소속·국회의원)가 대권도전 의지를 한꺼풀씩 내비치고 있다. 정씨는 최근 이 문제와 관련, 월드컵 이후 여러 사람들과 상의,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고 밝혀 사실상 대권출마의사를 굳히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부친인 정주영씨의 전례에서 보듯 재벌의  대권도전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상당하다. ‘우리의 정치 경제적 현실풍토에서 볼 때 후유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정·재계 지도층내부의 솔직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씨 일가가 세습적으로 이를 관철해 내려는 데는, 국가적으로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부작용이 뒤따를 가능성이 많다.” 정치참여 결심에 이어 정주영의 일생에서 가장 높았던 또다른 ‘시련의 벽’으로는 20세기 최대의 주베일 공사현장 상황. 국내는 물론 국제 건설업계에서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이 난공사를, 아무 경험도 없었던 정주영과 현대는 실제 어떻게 뛰어넘어 갔는가. 이 대역사는 시작부터 시련의 연속이었으며,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경험으로 미지의 공사를 밀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수반됐던 정신적, 기술적 양면의 고초였다고 당시 참여했던 현대측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사우디의 공사발주처와 감독관청은 현대의 기술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인식부족으로 사사건건 감독하고자 했고, 브라운 앤드 루츠사의 장비를 빌려 쓰면서 그 아니꼬움과 울화통 터지는 서러움을 철저하게 맛보았던 것은 공사기간 내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초라는 것. 그보다도 현장에서 더없는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은 기술적 암초. 당시 기술관계자의 대표적 기억담. “제일 큰 현안으로 떠올랐던 것은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바닷속에다가 정확히 박아 넣는 일이었다. 공기를 단축시켜야 그나마 돈이 남는 것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정 회장은 중동 공사현장이 아닌 한국의 울산에서 제작한 철골 구조물을 커다란 바지선에 실어 직접 수송해 오기로 결정했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천 킬로미터, 경부고속도로를 열다섯 번 왕복하는 거리다. 바지선 한 척이라도 전복, 또는 다른 배와의 충돌 사고라도 나면 계획은 완전히 치명적인 실패로 끝날 것이고, 정주영의 무모함은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사업자체가 종막을 고할지 몰랐다. 그러나 정 회장은 무모하면서도 치밀했다. 결국 현대는 이를 오차없이 실행해냈다.”또다른 ‘시련의 벽’으로는 제3공화국의 범국가적 개발프로젝트로 성공한 현대조선 건설 이후의 오일쇼크로 인한 파산위기. 1973년 10월, O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가를 17% 올리면서 세계 경제를 강타했다. 각국의 자원무기화는 일제히 벌어졌고, 세계 경제의 침체는 국가간 교역 물량을 격감시켜 세계 해운업계에 최악의 불황을 몰아왔다. 이는 곧장 세계 최대 조선소를 자임했던 현대조선에 밀어닥쳤다. 이로 인해 현대조선이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던 것. 결국 이 위기는 수주계약 취소에 대한 현대측의 끈질긴 국제소송 제기와 승소, 그리고 자체 물량소화를 위한 해운업진출 결단으로 겨우 벗어나지만, 정주영과 현대의 진로에 더없는 고통을 안겨준 중대 고비로 회자된다. 정주영의 일생에 벌어졌던 절체절명의 굵직한 시련의 벽들. 그 벽들에 대해 정주영은 이런 말을 남긴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체득한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연속되는 시련과 싸우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공인 정주영이 남긴 업적에는 이같은 시련과 도전의 강도 만큼, 한국사회와 그 자신의 ‘어둠과 빛’이 그 누구보다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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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3화 세계화 - (4) 애국과 매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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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30 Jun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30/1025364002302970.jpg" alt=""/>    ▲ 소떼 방북에 앞서 환송 나온 인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정주영. 전 세계의 시선을 한반도로 끌어모은 민족사적 ‘이벤트’였지만 비판론자들은 이 또한 북한 정권의 장단에 춤을 춘 순진한 행위로 치부한다.  매국이냐, 애국이냐.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 정주영의 인생항로에 대한 ‘매국론’의 대두는 주목되는 부문이 아닐 수 없다. 정주영을 비판하는 이른바 ‘매국론자’들의 주장은 그가 종국엔 북한 독재정권의 사술과 국제적 안전 장치없는 김대중 정권의 무모한 ‘햇볕정책’ 흐름에 편승, 북한국가 전체를 향한 범그룹적 대북지원 프로젝트를 전개함으로써 적대적 북한정권을 이롭게 했기 때문에 ‘매국적 행보’란 비판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정주영 일대기를 입체 조명키로 한 본 기획물은 대한민국 정체성 관점을 중시한, 이  ‘매국론’의 주장과 근거를 이번호에서 주요사안으로 다룬다. 국내에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기준으로 강한 비판론을 제기하고 있는 대표적 인사는 이철승씨(건국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그 논리의 요지는  “현 북한정권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 정통성을 유린했던 소련 스탈린의 하수세력에 불과할 뿐 아니라 한반도 북쪽에서 기상천외한 세습왕조를 만들어놓고, 2천만 동포들의 인권을 억압 유린하고 있으며, 아직도 원칙적으로 대남 적화통일 전술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반민족 집단인데, 김대중 정권과 정주영씨의 대북행보는 결국 이 반민족 정권을 이롭게 하는 매국적 결과를 야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철승씨의 ‘비판론’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 소개한다. ─김대중씨의 이른바 ‘햇볕정책’과 정주영씨의 대북행보를 어떻게 보는가. ▲북한을 뼈저리게 잘 알고 반공 건국을 이끌었던 전문가와 원로들은 김대중정부의 통일정책 수립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북한의 대남정책의 핵심은 한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 대북정책의 ‘실질적 집행자’가 되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공식 석상에서, 수백만 북한동포를 죽음의 기아상태로 몰아넣은 김정일을 ‘효심많은 예의바른 장군님’이라고 불러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정신적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시행하면 북한이 개혁 개방에 나설 것이라고 섣부른 단정을 내리고 국회에서 일언반구 논의조차 없이 엄청난 혈세를 쏟아부어 붕괴 직전의 김정일 정권을 되살려 주었다. ─햇볕정책과 정주영씨의 대북투자 같은 일이 북한문호를 개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는 의견도 많다. ▲북한을 너무 모르는 말이다. 오직 인도주의와 인권의 유린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김정일 유일 신격체제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를 고리로 세계적 연대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을 우리 대북정책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 의회조사연구소도 한 보고서에서, 한국에서는 ‘국민적 합의가 없이 햇볕정책이 전개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 국회와 야당도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대북 지원이 미사일과 잠수함으로 되돌아오는 사태에 대해 철저히 조사,심의하지 않는다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30/1025364002302971.jpg" alt=""/>    ▲ 이철승씨  ─좀 더 실질적인 근거로 본다면.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백 마리를 이끌고 북한을 다녀왔고, 정씨 일행에 의해 북측과 합의된 금강산 관광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 잠수정이 동해안에서 또 발견됐다. 이 사건은 북한에 쌀을 지원해준 직후 일어난 일이었고 소를 보내준 직후였다. 그 쌀과 고기를 모두 보내주는 남한에 그들이 보답한 것은 잠수정 도발이었다. ─금강산사업의 성과는 어떻게 보는지.  ▲북한정권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봤다. 우선 송금되는 외화를 쉽게 갈취할 수 있었고, 체제안정과 홍보에도 크게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그룹과 정주영씨의 전체 대북지원 규모를 보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까지 우리가 지원해 준 효과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다. 이것이 IMF 위기이후 아직도 수십만의 결식아동이 있고, 식량수입에까지 어려움을 겪게 될 상황인  대한민국에서 엄연한 적대국가를 향해 벌인 일인 것이다. ─결국 대북지원이 북한동포가 아닌 북한정권만 이롭게 하고 있다는 얘긴가. ▲우선, 금강산 사업의 경우 우리가 입산료로 지불하는 3백달러씩의 돈은 만성적인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김정일 병영의 국방비에 보태져 북한 동포들이 그 폭정에서 더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는 애국·애족 인사는 정녕 없는 것인지, 안타깝다. 특히 우리 정부가 심각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역대정권들의 대북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비단 김대중 정부뿐 아니라 김영삼 정부는 물론 역대 군사정권들조차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정식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다. 그들 또한 이후락 장세동 박철언씨 등 밀사를 비밀리에 보내면서 정상회담 성사와 같은 한건주의에 매달렸다. 이러한 한건주의는 자기 정권의 비정(秕政)을 호도하려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볼모로 삼고 반민족 전범세력인 김일성 부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북한 잠수정 사건, 미사일·인공위성 사건 등에서 주변국보다도 더욱 모호하고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다. 우리가 나서서 대응무기를 개발하고 세계 여론을 이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오히려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묵인해 줬다.  이철승씨의 ‘대한민국 정체성 위기론’ 보다 비판 강도는 약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對)한반도정책에 강력한 입김을 행사하고 있는 미 서부 민간 싱크탱크 태평양위원회의 ‘코리아 리포트’도 마찬가지 시각. 이 위원회는 지난 2001년 11월5일 서울에서 한미양국 전문가 공동으로 한국프로젝트 최종보고서인 ‘한국개편론(the reshaping of korea)를 최초 발표한바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의 내용중 김대중 정주영씨 등의 대북지원과 관련된 요지. “북한변화에 관한 김대중 대통령의 낙관적인 견해가 오히려 남남갈등(남한내부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 아울러 서울의 언론기관 여론지도자들의 대북비판을 김 대통령이 용납하지 않으려 한 점도, 남남갈등을 심화시킨 요인이다. 2000년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해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현 상황에서 한국이 (정주영씨와 같은) 대북지원사업을 계속하려면, (남한내) 사회 복지문제와의 충돌을 우선 해결해야만 한다. 또 북한이 상호주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는 총체적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만약 동시적인 상호주의를 지키기 어렵다면, 전향적인 비동시적인 상호주의 움직임이라도 보여주어야 대북지원과 남북경협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주영 본인의 ‘애국론’은 무엇일까. 다음은 본격적 세계화 전략으로 발을 내디딘 중동진출, 그리고 20세기 대역사라는 주베일공사를 통해 막대한 외화획득을 기록했던 시점을 중심으로 자신과 현대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점을 스스로 밝힌, 실물경제차원의 ‘애국관’ 내용.  “중동은  우리나라의 외채 부도를 해결해준 한국 건설업체들의 구국(救國)의 건설 시장이었다. ‘현대’는 주베일 산업항 근처 공사까지 합쳐서 17억5천만달러 어치의 공사를 맡아 국가 외환 사정을 좋아지게 하는 것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평소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만큼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당시 오일 쇼크로 정신없이 늘어나는 외채를 갚을 길은 중동 건설 공사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길밖엔 없었고, 그것을 나와 현대는 해냈다. 나는 애국을 위해 근로자를 동원하고, 사람을 썼으며, 기업을 했고, 외화를 벌어들였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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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2화 세계화 - (3) 주베일의 눈물바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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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3 Jun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23/1024759202302960.jpg" alt=""/>    ▲ 정주영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주베일공사를 따낸 일을 일생일대의 작품으로 여길 만큼 긍지를 나타냈다.  세계 최대 공사 ‘주베일 드라마’에 얽힌 곡절은 숱한 화제를 뿌린다. 정주영과 현대는 국제 메이저 건설업체들과 치열한 끝에 10개 응찰자격 업체중 한 자리에 겨우 끼어들었으나, 최종 입찰과 후속 수주에 얽힌 이야기는 더 많은 막후 일화를 남기고 있다. 정주영의 회고다. “입찰 결과 발표를 하는 소회의실로 정문도 상무를 들여보냈는데, 그렇게 들어간 정문도는 3시가 돼도 나오지를 않았다. 정문도뿐만이 아니라 다른 회사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표가 지연되는 이유도 모르는 채 피가 마르는 2시간이었다. 나보다도 열 배, 백 배는 더 불안하고 초조했을 전갑원 상무가 결과를 조금이라도 빨리 알기위해 마침 입찰실로 들어가는 커피 쟁반을 따라 재빠르게 들어가더니 몇십 초도 안 돼 이내 쫓겨 나왔다. 그런데 쫓겨 나오는 얼굴이 허옇다 못해 퍼랬다. ‘틀렸구나.’ 커피 쟁반 꽁무니를 쫓아 들어갔다 쫓겨 나오는, 그 짧은 동안에 전갑원 귀에 들린 소리가 ‘미국 브라운 앤드 루트사, 9억4백40만달러’라는 한마디였다고 했다. 무참했다. 무릎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전갑원이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사라졌고, 내 옆에 있기가 민망하고 전 상무 걱정도 됐던 김광명도 전갑원 상무을 찾는다고 자리를 떴다. 연 잃어버리고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격이었다.” 그러나 입찰 결과가 발표되자, 이런 우려는 환호로 뒤바뀐다. “현대는 우리가 제시한 네 개 공사를 내역으로 한 주베일 산업항 건설을 9억3천1백14만 달러로 입찰했다. 모든 서류는 완벽하다. 특히 44개월의 공사 기간을 조건 없이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제의에 감명을 받았다.” 사우디측의 최종 발표 골자였다. 그 순간에 관한 관계자 기억담. “모두들 나쁜 조짐들에 기가 죽어있는데, 입찰에 들어갔던 정문도씨가 갑자기 날아갈듯 환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빅토리 V를 만들어 치켜 들고 입찰장을 뛰어나왔다. ‘됐습니다! 회장님. ‘되다니, 뭐가 돼?’정 회장이 물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가 우리 ‘현대’로 낙찰됐습니다!’고 그는 소리쳤다. 전갑원 상무가 잠깐 들어가 들었던 브라운 앤드 루트사의 9억4백44만달러는 해양 유조선 정박 시설에만 국한된 응찰 가격이었고, 그것은 무효 처리되었다고 했다. 그 때의 감격은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갑원, 김광명씨는 소회의실 모퉁이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두 사람이 ‘역시 우리 회장이 귀신인데…’ 하면서 철철 울기까지 했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의 낙찰은 당시 최악의 외환 사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우리 정부에도 낭보 중의 낭보였다. 우리의 사기는 정말 하늘을 찌를 듯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23/1024759202302961.jpg" alt=""/>    ▲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의 야경. 낙찰가 9억3천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이 공사를 따내면서 한국의 외환보유액도 사상최고치를 기록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공사 최종 낙찰가격은 9억3천만달러. 당시인 1976년 2월5일 현재로 사우디 왕국 전체 건설 수주고가 10개 업체 23건에 총 7억8천만달러였으니, 이 단일 공사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잘 말해준다. 마지막 남은 입찰 자격 한 자리를 따낸 것부터 입찰 보증금을 만들어내느라 노심초사했던 과정, 전갑원의 애사심(愛社心)으로 당초 정 회장이 정했던 입찰지시 가격을 어기는 바람에 공사 자체를 날린 줄 알았다가 6천만달러를 더 벌면서 낙찰자로 반전되기까지, 이 이야기는 ‘한국재계 한편의 거사’로 오래토록 일컬어지고 있다.정주영은 팔십을 넘기면서까지 이 ‘거대한 쾌거’를 거론하며, 자신의 인생과 이를 결부시키곤 했다. 그 요지는 ‘시간과 자본의 활용’에 관한 그의 인생관을 잘 보여준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베일 공사 낙찰은 지금도 잊지못할 내 일생일대의 작품이다. 지금 내 나이 어느덧 팔십을 넘어 중반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오직 ‘일’에 빠져 사느라 나이 같은 걸 의식할 틈도 여유도 없는 과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또 나이라는 것에 별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언제나 내 앞에 놓여 있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무슨 일로, 얼마만큼 알차게 활용해서 이번에는 어떤 ‘발전과 성장’을 이룰 것인가 이외에는, 실상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나는 대단히 바빴기 때문에, 나이 대신 ‘시간’만이 있었던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베일공사같은 세계 최대 공사를 수많은 국제 유수의 기업들을 제치고, 우리가  따낼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하나도 자화자찬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조선소 건설 중 바다에 빠졌을 때 그때 그것이 내 명 (命)이었다면 그 후에 내가 해놓은 많은 일들이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이었을 테니, 그때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쩌다가 잠깐 하기도 한다. 그때는 서울에서 울산, 울산에서 서울, 다시 서울에서 울산, 그런 식으로 조선소를 건설하며 울산에서 반 자고 서울에서 반을 잘 때였다. 울산에서 잘 때는 새벽 4시면 숙소에서 나와 2시간 동안 현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한 바퀴 돌아보고 6시면 간부 회의를 소집하곤 했다. 이런 정신자세가 없었다면, 나와 현대의 세계적 도약은 없었을 것이다.”실제 ‘주베일 드라마’의 과정은 ‘산넘어 산’이었음을 각종 기록이 전한다. 현대그룹 관계자가 전하는 내용. “정작 공식낙찰은 되었으나, 사우디 발주처에서는 어쩐 일인지 ‘네고(계약 이전의 협의)’를 언제 시작하자는 연락이 없었다. 경쟁 입찰에 실패한 경쟁업자의 에이젠트들이 왕족들을 동원, 방해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는 절대로 공사를 해낼 수가 없다는 등, 한국은 아직 후진국이고 현대의 기술, 자본, 경험이 아주 유치하다는 등, OSTT(외항 유조선 정박 시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 값을 써낸 것이라는 등, 현대가 도대체 해양 공사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느냐는 식으로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발주처가 찜찜하게 생각한 이유는 역시 현대의 OSTT 시공 능력에 대한 불안과 회의였다. 사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OSTT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30미터 심해저 암반에 30미터의 기초 공사를 12킬로미터나 하는 난공사는 전혀 해본 일이 없었다. 마침 브라운 앤드 루츠의 깁슨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OSTT 부문을 하청하자는 이유였다. 브라운 앤드 루츠사와 현대가 기술 협약을 체결했다는 공문이 사우디 체신청에 접수되자 비로소 네고조차 않고 있던 그들이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선수금 받아내는 데도 서류 제출 후 30~40일이 예사 통례였고 특히 공사 선수금은 50일은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발주처 관리들은 선수금 액수 사상 최대 2억 달러에 배가 아픈 것인지 고의적으로 지급 서류 서명에 늑장을 부렸다. 서류가 거쳐야 할 사무실이 30여 군데였고 서명해야 할 사람은 50여 명이었다. 7억리알짜리 단일 현금 수표를 받아내던 날, 외환은행장이 정주영에게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정 회장님, 오늘 우리나라 건국 후 최고의 외환 보유고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세계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다.”이병도 언론인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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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 61화 세계화 - (2) 주베일 비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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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6 Jun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렸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 9억 3천만달러라는 공사 금액은 계약 당시인 1976년도 환율로 4천6백억원. 그것은 그해 우리나라 예산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돈으로 계산한 공사 규모말고도 육상과 해상에 걸친 토목 부문의 거의 모든 공정과 건축, 전기, 설비 부문까지가 총동원된 종합 건설공사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일. 50만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해상 터미널 공사는 구조물 제작에서부터 수송, 하역, 설치까지 마쳐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공사였다. 그 비화를 소개한다. 1975년 가을. 정주영이 주베일 산업항 입찰 정보를 입수한 것은 입찰 7개월 전. 사우디 국왕의 주베일 산업항 계획을 입수, 영국 용역 회사가 제작한 설계도의 검토를 시작한다. 미국과 영국, 서독, 네덜란드의 건설업체들은 이미 일찍부터 수주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고, 공사 구상 단계에서부터 여기저기 강력한 입김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16/1024154402302950.jpg" alt=""/>    ▲ 당시로선 대역사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서 정주영(맨 오른쪽)이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당시 정황에 관한 정주영의 회고담. “중역들은 누구 하나 ‘된다’는 말은 안 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안 된다’뿐이었다. 정식입찰 참가는 고사하고 입찰 참가 자격을 얻는 일부터가 지난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무슨 수가 있어도 입찰 참가 자격을 따내야 한다. 나는 런던 지사(支社)의 음용기 이사에게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그 자격을 따낼 것을지시했다.”그때만 해도 사우디의 건설 시장 역시 완전히 선진국의 독무대. 그 해 12월, 공사의 주관 부처 사우디 체신청이, 설계를 맡았던 영국의 항만 및 해양 구조물의 명문 회사인 윌리엄 할크로우 사의 심사, 추천으로 10개의 입찰 초청 회사 중에 9개 회사를 선정 발표했다. 선정 기업은 미국의 브라운 앤드 루트, 산타페, 레이몬드 인터내셔널, 영국의 코스테인, 타막, 서독의 보스카리스, 필립 홀스만, 네덜란드의 볼카 스티븐, 프랑스의 스피베타놀 등 모두 9개 사. 일본의 건설 회사마저 탈락할 정도로 1차 선정경쟁은 치열했다. 10개 중에 9개가 채워지고 마지막 1개만 남아있었던 상황. 이 남은 한 자리를 향해 정주영이 지시를 내린 것이다.  현대는 어떻게 이 막차를 탈 수 있었는가. 당시 관계자의 비화 소개. “느닷없는 명령을 받은 음 이사가 윌리엄 할크로우 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요지는 ‘우리는 지난 10월에 중동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바레인의 아스리 조선소가 첫 케이스이다. 이 머나먼 미지의 땅에서 하는 첫공사의 동원 준비를 1개월 만에 완전히 끝낸 우리의 기동성에 유의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사우디의 해군 기지 건설도 하고 있다. 또 우리는 세계 제일의 울산조선소를 당신네 영국의 협력으로 건설사상 최단기간 안에 건설한 실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안다. 조선소 건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애플도어와 버클레이즈 은행의 정보 자료도 큰 도움이 되어 우리는 마침내 열번째 입찰 자격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난관은 또 닥친다. 당시로선 거액인 입찰 보증금 2천만달러의 현찰을 확보하는 일. 정주영의 한 측근은 당시의 막막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입찰 자격자가 되긴 했지만, 2천만달러를 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에서 조달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게다가 입찰 보증금 2천만달러는 누설해서는 안되는 철저한 보안 유지의 딱지까지 붙어 있었다. 입찰 보증금의 정보 누설은 응찰과 낙찰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가 있었다. 액수 비밀 보장까지 해주면서 2천만달러를 빌려줄 곳도 없었다. 정 회장과 경영수뇌들의 비상대책은 그야말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결국 숨통은 열렸다. 그 숨통은 조선사업과 관계된 업체로부터 나왔다. 그것도 우리가 지난날 이룩해낸 땀의 결실인 셈이었다. 1억3천8백만달러짜리 아스리 조선소 공사와 거래를 트고 있던 바레인 국립은행이 우리의 신용을 인정, 국제적 대형 금융기관과 극비리에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나섰다. 자본금이 1천5백만달러밖에 안되는 바레인 국립은행 자체로서는 2천만달러짜리 지급 보증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 바레인 국립은행은 사우디 국립 상업은행과 연결, 입찰 참가 4일 전에 우리는 입찰 보증금 지급보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일단 현대가 입찰자격 고지를 선점하자, 국내외 건설업계에도 큰 파장이 일어난다. 정 회장 본인의 회고. “우리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입찰 참가가 알려지자 경쟁사들의 우리의 입찰 저지 시도와 회유도 있었다. 컨소시엄 멤버로 참여시켜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고 상당한 현금 보상을 해줄 테니 손을 떼라는 제의도 받았다. 프랑스의 스피베타놀사에서는 대한항공 조중훈씨를 통해서 컨소시엄 멤버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아주 적극적으로 했었다. 조중훈씨는 파리에서 리야드까지 와서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경쟁 업체의 의사 전달자로 온 조중훈씨에게 솔직할 수가 없었다. ‘뭐… 굳이 컨소시엄에 들어갈 생각까지는 없고… 입찰 보증금 4천만달러를 만들 재간이 없어 그냥 돌아가게 생겼는데…’ 나는 어물어물하고 그대로 조중훈 씨와 헤어졌는데, 파리로 돌아간 조중훈 씨가 예상대로 내 말을 곧이 곧대로 프랑스 사람들한테 전했던가 보다. 입찰 보증금 4천만달러는 곧 20억달러에 응찰할 생각이었다는 뜻이었고, 조중훈씨에게 4천만달러라는 말을 흘렸던 것은, 말 한마디가 다 정보였던 그 상황에서 경쟁 업체들을 의식한 나의 역정보 작전이었다. 조중훈씨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때 조 회장은 ‘적군(敵軍)’이 보낸 전령이었으니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정작 본격적인 최종 입찰 경쟁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당시 현장 전략팀에 참여했던 간부의 일화소개. “주베일 산업항 견적팀은 입찰 1주일 전부터 리야드 여행자 숙박소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찰 준비에 전심 전력을 쏟아부었다. 심지어 응찰을 앞두고는 통상적으로 여러  징크스가 나돌아왔던 것이 관행화되다시피 되어있었다. 목욕은 물론 이발도 하면 안되었고 손톱 발톱도 건드리면 안되었다. 우리는 배달시켜 먹은 음식 그릇들도 밖으로 안 내보내고 1주일 내내 그대로 차곡차곡 방안에 두었는데, 무더위 속에서 그 악취는 코를 찌를 지경이었다. 1백 페이지가 넘는 견적서와 종합된 정보들을 세밀하게 비교, 검토해 전체 공사 실비 12억달러에서 25%를 깎았다가 5%를 다시 더 깎아 8억7천만달러로 응찰 가격을 정했다. 정 회장은 이미 10억달러 이하의 응찰자는 없다고 확신했다. 전갑원 상무가 너무 싼값이라고 불만을 토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입찰에서 2등은 꼴찌일 뿐이란 점을 거듭 강조하며 맞받았다.” 입찰일자는 그해 2월16일. 오전 9시30분을 전후해서 입찰 초청 10개 회사 대표들이 사우디 체신청 회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식 입찰경쟁 당시에 대한 정 회장의 이어지는 회고다. “응찰 가격을 써내고 투찰실에서 나오는 전갑원 상무의 얼굴이 어째 개운치 않아보였다. ‘뭐, 입찰 금액을 잘못 쓰고 나온 거야?’ 혹시나 뭔가 실수를 하고 나온 게 아닌가 불안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는 기색이 역시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래서 ‘쓰라는 대로 썼지?’ 했더니 ‘아닙니다. 그대로 안 썼습니다.’ 기절초풍할 대답이 돌아왔다.‘이 녀석이 죽으려고 용을 쓰나, 아니면 너무 더워 정신이 돌았나?’ 내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얼마 썼는데?’ ‘9억3천1백14만달러로 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산출했던 실제 공사 경비 12억달러에서 25%를 깎은 가격이었고 전 상무가 마지막까지 고집했던 금액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8억7천만달러는 너무 싸서, 낙찰이 안되면 걸프 만에 빠져 죽을 생각으로 6천만달러 더 썼습니다.’ 큰일을 저지른 전갑원은 내가 무서워 저만큼 멀리서 빙빙 돌고 임원 김광명, 정문도도 기가 있는 대로 죽어서 내 눈치만 슬슬 보았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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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 60화 세계화 - (1) 열사의 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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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9 Jun 2002 00:20:02]]></pubDate>
            <category><![CDATA[야망과 좌절 - 정주영 편]]></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09/1023549602302940.jpg" alt=""/>    ▲ 1974년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 중동으로 출국하고 있는 현대건설 직원들. 당시 중동시장은 한국인에게 미개척지였다.  정주영과 세계화. 혹자는 정주영이 한국기업과 경제의 세계화 전략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내리는 반면 혹자는 정 회장의 경영스타일이 결국엔 한국경제 체질의 ‘세계화’에 역기능을 초래했다는 시각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 이번 호에선 현대그룹과 정주영의 본격적 세계화 전략의 계기로 일컬어지는 ‘열사의 땅’ 중동진출 결심을 긍정적 관점을 중심으로 입체 진단해본다.먼저 정주영의 중동진출 결심당시 심경에 관한 회고. “그때는 오일쇼크가 국가는 물론 현대그룹 운영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을 때였다. 특히 ‘현대조선’의 위기로 인해 전체가 어려워진 ‘현대’를 살리기 위해서도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중동밖에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곳은 전세계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신나게 기름 장사를 하고 있는 중동밖에는 없었다. 막대한 오일달러가 중동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시기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누구든 하루라도 빨리 뛰어들어 발판을 만들고, 경제적 교류를 확대하고, 그 많은 재원을 상대로 무역을 열고 건설 시장을 개척하는 사람이 세계화 전략에서 이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한국의 경제구조에 대해 비교적 강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온 이필상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도 이 같은 정주영식 세계화 전략의 긍정론을 인정한다. “정 회장과 같은 창업 1세대는 황무지같은 경제를 세계 12위권으로 끌어올린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기업가 정신을 발휘,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을 일궈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들 창업세대의 공이다. 산업화 사회의 창업세대가 갖고 있었던 도전과 개척의 정신, 과감한 결단력은 오늘의 정보화 사회의 사업가들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가치다.” 그렇다면, 오늘의 벤처기업가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벤처업체 정철흠 사장(야인소프트)의 실물경제적 측면에서 정 회장의 세계화 전략에 대한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선 지금의 한국 상황이 재벌창업주들의 무대였던 산업화 초기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정 회장과 같은 재벌1세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건설 조선 자동차 중공업 등 국가 기반산업을 일으킨 공은 오늘날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의 기반기술이 외국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벤처기업가들이 소프트웨어 생명공학 반도체 등에서 자사 제품을 세계화하려는 노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시대상황이 달라졌다곤 하지만 재벌 창업주들의 기업 정신은 오늘날 벤처기업가들의 그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최근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벤처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청운동 자택 집무실의 검소한 모습은 벤처기업가들에게 큰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정 회장의 이 같은 세계화 전략성공에 관한 보다 심층적 시각도 있다. 다음은 문화계 원로 이어령 전 교수(이화여대)가 인터뷰에서 밝힌 기업문화적 측면의 주장. 그는 이 인터뷰에서 정주영씨와 현대그룹을 포함, 한국경제의 세계화 경쟁력 문제를 문화적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2/0609/1023549602302941.jpg" alt=""/>    ▲ ‘세계 최대의 역사’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의 정주영.  ─정주영씨의 중동진출사업을 어떻게 보는지.▲한국인들은 문화지향적이다. 지연 혈연 학연이 중시되는 사회풍토 또한 정서와 감정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 탓이다. 문화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문명이라는 ‘싸늘한 세계’와 융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문화라는 자양분을 동시에 키우지 못하면 영속할 수도 없고 경쟁력을 높일 수도 없다. 정주영씨가 현대 특유의 기업문화를 만들지 못했다면 사우디 주베일 항만 같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를 일굴 수 있었겠는가. ─정주영씨의 기업문화를 말했는데, 기업들은 어떻게 문화적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는가.▲문화의 힘은 ‘매력’이다. 동시에 나눌수록 즐거움이 커지는 ‘체험’인 것이다. 물질이 제공하는 만족은 유한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주영씨도 문화를 평소 매우 좋아했다. 문화인식은 실제 오늘의 첨단시대에 기업경영과도 연결된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컴퓨터는 원래 단순한 계산기였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통신과 게임 등의 콘텐츠를 만나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린 ‘엔터테인먼트’의 도구가 됐다. 컴퓨터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체험’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컴퓨터는 ‘체험을 파는’ 기계다. 이렇게 보면 기업들이 나아갈 길은 자명하다. 소비자들에게 소프트 파워, 문화적 콘텐츠를 판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기업의 미래 비전에 대해 조직원들이 성취와 체험을 나눠 갖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 양질의 기업문화로 소비자와 직원들을 즐겁게 하면 그 행복이 기업에도 돌아온다. 요즘 말하는 고객감동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바람직한 기업인의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기업인들은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스스로 시장과 수요를 창조하려는 열정을 갖고 있다. 마치 시인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독자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기업인들은 제품과 서비스로 소비자들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기업인이 세끼 밥먹자고 그렇게 고단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창조적 열정이야말로 기업인의 자양분이다. 포드가 자동차를 대중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단순히 돈을 벌겠다고 그랬겠는가? 포드는 유럽귀족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보다 싼 값에 가까운 이웃들도 타게 하겠다는 ‘열정’에서 그 유명한 컨베이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고용이 늘어나고 임금도 올라갔다. 그 결과 미국은 노동자가 자동차 구매력을 갖춘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됐다. 포드가 이 모든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세상을 한 번 바꿔보겠다’는 창조적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세계화 전략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부의 편재는 심각하다. 어떻게 보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고 여러 갈래로 비뚤어진 경쟁양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니 정보화니 하는 단어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사회의 5분의 1만이 수혜계층이라고 해서 5분의 4 위주로 사회 시스템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2 대 8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선 5분의 1이 5분의 4를 도와주고 지원해 줘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겠는가.─이런 혼돈의 시대에 정부는 무엇을 해야하나. ▲1960년대에는 ‘잘 살아보자’는 프로젝트가 있었고 1980년대는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놀라울 정도로’ 국가 프로젝트가 없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진행하는 대계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은 행복과 체험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이 즐거움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를 구축해야 합니다. 정주영씨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주변의 반대가 많은 상황에서 중동진출을 결심, 근로자들과 한마음 한몸의 네트워크를 형성, 국부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이병도 언론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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