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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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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Sun, 29 May 2005 00:20:05</lastBuildDate>
        <pubDate>Sun, 29 May 2005</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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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요신문 | 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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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마지막회]  ‘노동자 대모’ 조화순 목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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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9 May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29/1117293605308680.jpg" alt=""/>    ▲ 1990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으로 평화군축을 위한 대회에서 대회사를 하는 조화순 목사. 그는 도시산업선교의 선구자이면서 민주화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의 성직자이면서 모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와 예배와 전도사업의 울타리 안에서만 일하는 전래의 목사들과 달리 이 세상의 불의를 방관하지 못하고 당대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가 갖가지 죄목으로 고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1987년은 6월민주항쟁과 그에 뒤이은 6·29선언, 그리고 양 김(김대중·김영삼) 중심의 야권 분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등으로 곡절이 많았던 격동의 해였다. 특히 전국적인 6·10시위로 시작된 민주항쟁을 통해서 전두환 폭정에 대한 항거가 거세지는 가운데 노사간의 분규 또한 격화일로를 치달았다.그해 9월15일 오후 6시, 서울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 안의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30여 명의 교계 인사들이 모였다. 조화순, 이근복, 이춘섭 세 목사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은 ‘당국의 노동운동 탄압 중단’과 ‘구속 근로자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를 성토했다. 그리고 9월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경련 조규하 전무가 노사분규에 관해서 허위날조된 보고를 한 데 대하여 전경련측이 사과문을 발표할 것과 조규하 전무를 파면할 것을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경련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 18일 낮이 되자 그들은 전경련 회장을 만나 직접 요구사항을 말하기로 작정하고 목사·전도사 등 23명이 전경련회관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검찰은 그들이 전경련 회장실을 점거한 것이라고 했다.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비서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이근복 목사는 “우리는 4일간이나 단식한 목사들이다. 전경련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 국무회의에서 노사문제를 날조 보고한 데 대하여 사과를 받을 때까지 여기서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조화순 목사는 그 자리에서 핍박받은 근로자들을 위하여 다 함께 싸우자는 설교를 하고 기도를 했다. 찬송가도 불렀다. 이춘섭 목사는 ‘우리는 왜 전경련회관에 들어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낭독하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외쳤다.검찰은 앞서 말한 다섯 사람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업무방해죄로 구속기소하였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피고인들이 노사분규를 배후 선동해왔다면서 노동쟁의조정법위반사실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공판의 연기를 신청했다. 이에 항의하여 조 목사는 옥중 단식을 했다.조 목사는 1978년 11월 부산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온 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변호인석에는 나가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그의 앙칼진 법정진술을 들었다.조 목사는 여성 성직자로서 이 나라 도시산업선교의 선구자였다. 뿐인가, 민주화투쟁의 선봉장이었다. 그분은 나이 어린 여공들과 노동현장에서 고락을 함께하면서,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들과 함께 기거했다. 어린 여공들이 내미는 소주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시며 울분을 삭이거나 격려를 하는 그런 어머니 같은 목사였다. 그분의 설교는 웅변 이상의 열정으로 뜨거웠고 법정진술은 막힘이 없이 용감했다. 70·80년대에 나온 기독교계나 재야의 여러 성명서엔 그의 이름이 언제나 버티고 있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29/1117293605308681.jpg" alt=""/>    ▲ 1974년 11월22일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가 연 신앙강좌. 반정부 시국강연회였던 이 집회는 늘 성황을 이뤘다.  1978년에 인천 동일방직 여공 1백24명의 집단해고 사태가 터졌을 때, 조 목사는 똥물세례까지 받은 나이 어린 ‘쪼가니’(어린 소녀를 가리키는 옛말)들을 위해서 참으로 눈물겹고 위대한 싸움을 했다(실은 그 자신도 1966년 동일방직에 취직하여 6개월 동안 여공생활을 했다). 그는 이래저래 수도 없이 경찰에 끌려가고 또 법정에 서야 했다. 그는 1974년 5월, 1978년 12월, 1980년 5월, 그리고 1987년 9월 ― 이렇게 네 번에 걸쳐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연행이나 구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겪었다.어떤 분은 조 목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역사의 뒷바라지를 할 양으로 바닥에 내려갔으나 역사는 그를 앞잡이로 만들어버렸다.”조 목사는 1934년 갑술생이다. 동갑내기 개띠끼리 ‘개판’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니, 조화순, 박현채(작고·경제학자), 이해동(목사), 김중배(언론인) 그리고 한승헌(변호사)이 그 멤버였다.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사건 실록’이 이번 호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간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10여년 전, 우리는 회갑모임을 합동으로 하자는 데 합의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말했다. “행사장 입구에다 반드시 ‘맹견주의’라고 써 붙입시다.” 인천쪽 산업선교활동의 인연으로 여성근로자들이 나서서 조 목사의 회갑축하행사를 따로 치르는 바람에 합의는 깨졌고, ‘맹견’들은 어언 70의 고개를 넘어섰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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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24화 서리 위헌공방 김종필·한승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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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2 May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22/1116688805308670.jpg" alt=""/>    ▲ 98년 3월2일 열린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 투표 도중 국회의원들이 투표함을 몸으로 막는 등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먼저 청구인측의 현경대 의원은 국회의원의 이 사건 청구당사자 적격문제에 관하여 “국회의원은 헌법상 국가기관이므로 신청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헌법(제86조 제1항)에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를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미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합법적으로 투표한 상태(3월2일 투표중단)에서 총리서리를 임명한 것은 국회의원의 헌법상 동의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한나라당측은 또한 총리서리제는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규정된 바가 없으며,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정부조직법에 따라 수석 국무위원이 총리권한대행을 맡으면 된다고 했다.한나라당은 김 총리서리에 대한 임명행위가 무효로 될 경우, 그때까지의 권한 행사의 효력도 무효가 되어 국정에 큰 혼란을 불러들일 우려가 있으니 만큼 권한쟁의심판사건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국무총리서리의 권한행사를 중지시켜달라고 했다. 또한 6공 당시 총리서리 임명 때마다 평민당 등 야당의원들이 위헌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느냐며, 그런 발언 내용이 들어있는 국회 속기록을 헌재에 제출하기도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22/1116688805308671.jpg" alt=""/>    ▲ 98년 3월26일 헌재 공개변론 모습.  이에 맞선 청와대측에서는 심판대리인(이석형 변호사)의 답변서를 통해 청구인들(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당사자 적격성이 없고, 권리보호의 이익도 없어서 신청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청구인들의 신청은 각하되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첫째로, 국가기관만이 권한쟁의 심판청구의 당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회 아닌 개개의 국회의원은 당사자 적격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헌법상 국무총리 임명에 앞선 동의권은 국회에 있는 것이지, 개개의 국회의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또한 총리서리 임명은 오랜 헌법적 관행으로 정착된 것이며, 국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여 국정공백을 초래하는 등의 특수 사정하에서는 대통령의 정치행위로 서리체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역대 국무총리 30명 중 18명이 국무총리 서리를 거쳤고, 그 가운데 3명은 서리로 재직하다가 퇴임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총리임명동의안 처리 지연도 문제 삼았다. 대통령이 국무총리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도 (2월25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도적으로 그 처리를 회피하였고, 3월2일의 투표에서는 한나라당이 국회법을 어긴 채 사실상 공개투표를 강행함으로써 파행에 이르렀다는 것. 이처럼 국회의 국무총리임명동의안 처리 지연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행정부 구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역공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22/1116688805308672.jpg" alt=""/>    ▲ 김종필 당시 총리  국회는 재투표를 하는 방법으로 언제든지 임명동의안을 처리(가결 또는 부결)할 수 있는데도 이런 절차는 밟지 않고 헌재에 제소나 하는 것은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했다.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이재화 재판관)는 7월14일 청구인인 한나라당 국회의원 1백50명이 낸 이 사건 심판청구에 대하여 ‘각하(却下)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권한쟁의 심판청구의 당사자는 국회라는 국가기관이므로 국회의원 개개인은 당사자 자격이 없다”고 판시한 데 이어 “청구인들은 다수당 소속 의원들로서 스스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한 가부를 결정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므로 권리보호의 이익도 없다”고 하였다(국무총리 서리체제의 위헌 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 헌재는 감사원장 서리 임명을 문제 삼은 제소에 대해서도 똑같이 각하 결정을 내렸다.그후 국회는 8월17일 본회의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와 한승헌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을 각각 의결·통과시켰다. 서리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JP는 이런저런 공·사석에서 나를 보고 “한 원장은 나 때문에 덤으로 마음고생한다”면서 “웬 서리가 오뉴월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남아 있느냐”고 했다. 나는 7·8월에 더워지면 서리는 사라질 것이라고 화답했다. 내 예언은 적중(?)했다.이로써 두 사람은 취임(3월3일) 5개월 반 만에 서리를 면하게 되었다. 다수당의 횡포에 청와대가 시달리고 부대낀 ‘불상사’였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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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23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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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8 May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08/1115479205308660.jpg" alt=""/>    ▲ 지난해 3월20일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 나선 시민들.  3월12일 박관용 국회의장은 국회경위들로 하여금 본회의장 의장석 주변에서 농성중인 여당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게 한 뒤, 탄핵안 표결을 강행했다. 재석 1백95명 중 찬성 1백93표, 반대 2표로 탄핵소추안은 가결됐다. 일부 야당의원은 만세를 불렀고 여당의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시민단체들은 전국에서 탄핵 규탄운동을 벌였고, 성명과 집회·시위를 통하여 집단적인 저항을 보였다. 한 일간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탄핵소추는 잘못한 일”이라고 했으며, 63%가 헌재에서 탄핵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공법학회 소속 헌법학자들 중 69%가 소추안은 탄핵사유가 안된다고 응답했다.실인즉, 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흘째가 되는 날부터 ‘탄핵’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 후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제1야당 대표가 “이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나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솔직히 대통령 잘못 뽑았다”라고 그야말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두 달 뒤면 임기가 끝나는 16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회에서 (표결에 걸린 시간을 빼면) 탄핵소추안 심의는 불과 3분 만에 끝났다. 그날 국회의사록에 의하면, 11시22분에 박관용 의장의 “개의를 선언합니다”로 시작해 “의사일정 제1항 대통령탄핵소추안을 상정합니다”, “조순형 의원의 제안설명은 유인물로 대체합니다”, “무기명 투표를 실시합니다” 라는 말이 끝난 때가 오전 11시25분, 국회의장의 입에서 나온 그 네 마디가 헌정사상 초유라는 대통령탄핵소추안 ‘심의’의 전부였다. 이것은 절차위반이 아니라 ‘무절차’라고 해야 맞다.역사적인 대통령 탄핵심판의 첫 번째 변론은 3월30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렸다. 첫날 변론 벽두에 소추위원(국회)측은 노 대통령의 헌재 출석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소추위원측이 정치적, 도전적, 감정적으로 나오더라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맞대응은 하지 말자고 대통령대리인단의 변호사들에게 권했다.소추위원(국회)측 대리인은 정기승(전 대법원 판사, 헌변 회장), 한병채(전 국회의원, 헌재 재판관), 이진우(전 국회의원, 정무수석비서관) 변호사 등 67명의 대군단이었다. 이에 비해서 대통령 대리인단엔 유현석(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한승헌(전 서울지검 검사·감사원장), 하경철(전 서울지법 판사, 헌법재판관), 이용훈(전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등 12명이 포진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08/1115479205308661.jpg" alt=""/>   양측의 공방은 치열했다. 소추위원측에서는 노 대통령을 ‘볼세비키’라고도 하고, 탄핵재판이 ‘망가’가 되었다는 식의 표현도 썼다. 탄핵을 추진했던 야 3당의 지도자들이 총선 정국에서 한결같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탄핵을 강행한 데 대하여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역풍은 여당의 과반의석 확보라는 위력을 보인 반면 야당은 국회의 제1당에서 밀려났다.최종변론(4월30일)의 마무리에서 나는 “국회가 대의기관 본질을 망각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에 반해서 감행된 이 사건 소추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5월14일 오전 10시 헌재 전원재판부(재판장 윤영철 헌법재판관)는 이 사건에 대하여 “탄핵결정에 필요한 재판관 수(6명)의 찬성을 얻지 못해서 청구를 기각한다”라고 선고했다.노 대통령이 두 차례의 기자회견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한 것은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는 것이며, 중앙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선거법위반으로 결정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선거법을 관권선거시대의 유물이라고 폄하한 행위는 대통령의 헌법수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도 했다. 또한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 역시 대통령의 ‘국민투표부의권’의 위헌적 행사로 헌법수호 의무위반이라고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위법이 대통령직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탄핵소추를 기각한 것이다(권력형 부정부패나 국민경제 파탄 등은 구체적 증명도 없을 뿐더러 ‘직무관련성’도 없어 탄핵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노 대통령은 실로 63일 만에 직무에 복귀했다. 탄핵 추진에 앞장섰던 국회의원들은 총선에서 거의 전멸했다. 그것이 바로 ‘민심’이었다.지난해 3월12일 박관용 국회의장(왼쪽 끝)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언하고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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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22화 ‘경계인’의 수난 송두율 교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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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1 May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01/1114874405308650.jpg" alt=""/>    ▲ 지난 2003년 10월3일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03년 9월, 국가정보원은 송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기 위한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송 교수는 바로 다음날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귀국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그 달 22일 실로 ‘37년 만의 귀국’을 관철했다. 국정원은 송 교수를 몇 번인가 소환·조사한 후,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점이 혐의사실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송 교수 자신은 “후보위원 통보를 받거나 활동한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송 교수는 10월3일 검찰에 처음으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서, 14일 “북한 노동당을 탈당하고 독일국적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1주일 뒤인 22일 검찰이 송 교수를 구속함으로써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1월19일 송 교수를 기소하면서 검찰은 그의 친북행적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용을 담은 공소사실을 공개했다. 1973년 노동당에 가입한 이래 북한의 지시에 따라 유학생 포섭과 주체사상 전파 임무를 수행해왔으며, 그런 활동을 인정받아서 1991년 5월 김일성을 면담한 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서열 23위·가명 김철수)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송 교수와의 인연도 있는 데다 주변의 권고도 있고 해서 변호인단에 참여하기로 했다. 감사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떠났던 법정을 7년 만에 다시 들어가 변호인석에 앉게 되었다.송 교수의 공판은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로 법정은 늘 만원을 이루었다. 재판에서는 송 교수가 과연 노동당 후보위원인지의 여부가 단연 쟁점이 되었다. 여러 차례의 입북은 송 교수 본인도 시인하는 터였고, 공작금 수수 부분은 학술대회 참가비로 7만~8만달러를 받았다는 정도의 입장 차이가 있었는데, 후보위원문제는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 종사’에 걸려 사형까지 과할 수도 있는 중죄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501/1114874405308651.jpg" alt=""/>    ▲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 교수는 지난해 8월5일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다.  2004년 3월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는 송 교수에 대한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7년(검사 구형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다만 남북해외학술회의 개최를 위해 북한에 드나들면서 회합·통신을 한 행위는 북한의 입장만 대변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북한노동당 전 비서 황장엽이 북한에서 들었다는 말과 독일 주재 북한이익대표부 전 서기관 김경필이 작성했다는 ‘대북보고문’을 유죄의 증거라고 했다.이런 판결에 대하여 변호인측은 “…증거능력도 없는 황장엽씨 등의 진술을 토대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부당하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는 “남편은 한평생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몸바쳤는데 40여 년 만에 찾은 조국에서 포승과 수갑으로 묶이다니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검찰과 변호인 양측이 모두 1심 판결에 불복을 한 만큼 항소심은 또 하나의 격전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2일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송 교수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고,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풀려났다.항소심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1심과 견해를 달리했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후보위원 여부, 즉 ‘송 교수가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의 논쟁에서 2심은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즉 “황장엽씨의 진술에 신빙성은 있으나 임동옥과 김용순으로부터 들었다는 말만 가지고 송씨가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미흡하고, 김경필의 대북보고문(디스켓)의 내용 또한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송씨의 저술활동에 대해서도, 1심에서 “친북 편향의 학문 활동을 하고,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고 본 것과는 달리 항소심에서는 “친북편향은 인정되나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명백한 위협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김일성 조문도 1심에서 반국가단체 지배지역으로의 탈출행위로 본 것과는 달리 장례 및 추모행사에 참석한 것은 의례적이었다고 보아 역시 무죄라고 했다. 다만 1991년부터 1994년 사이 다섯 차례 입북한 것은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탈출죄)로 판단했다.재판부는 엄격한 유죄의 증거를 요구하는 한편 국가보안법도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이 사건이 시의부적절한 이념논쟁을 일으켜 남북대화의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내부 갈등을 초래하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덧붙였다.당시 보수세력과 민주·진보진영 사이에선 송 교수에 대한 처벌 문제로 대판 편싸움이 벌어진 터였는데, 앞으로 남은 상고심 최종판결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항소심의 전향적인 판결이 나온 뒤, 인터넷에는 “빨갱이 판사 물러가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아직도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21화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성희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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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4 Ap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24/1114269605308640.jpg" alt=""/>    ▲ 1974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조치 등으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며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사진은 1978년 제 9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이 교수가 일본에 유학을 간 1964년은 아직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도쿄대학 유학기간에 이좌영씨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 사이가 남달리 깊은 정으로 맺어진 것은 당연했다. 이좌영씨는 한국거류민단 안에서 본국 정부(박정희정권)의 유신독재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그룹에 속해 있었으므로 유신정권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중정은 그들을 친북용공세력으로 몰기 시작했다.이씨를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총 두목’으로 설정한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 사건의 용의자로 묶여온 사람은 자그마치 32명이나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의 지령에 의하여 남한 내에서 지하조직을 만들어 박정희정권을 타도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도 그런 도표 중의 한 축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중정은 이좌영씨로부터 정치적으로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느냐며 이 교수를 다그쳤다. 이 교수가 온갖 가혹행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자 ‘이씨가 직접 하지는 않았더라도 다른 공작원이 개입하여 지령을 내린 것이 확실하다’고 말을 바꾸었다.이 교수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1967년 가을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북한을 방문하여 3박4일 동안 체류했던 것이다. 이 교수의 말에 의하면, 내각초대소에서 김일 제1부수상과 면담하고 식사도 함께했다. 조국의 통일에 관한 피차의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이 교수로서는 자신이 그렇게 한대서 당장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그렇다고 외세나 집권자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북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24/1114269605308641.jpg" alt=""/>    ▲ 중정의 고문 속에서 울릉도 간첩단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이성희씨.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그가 당한 고문은 혹독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 교수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지, 이좌영씨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정 수사관들은 막무가내로 이좌영의 지령 입북과 간첩행위를 자백하라며 온갖 고문과 고통을 가했다. 잠 안 재우기나 구타는 기본이고, 술도 주고 담배도 권하는 심리적 수법과 회유책도 동원되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부인하다가 각목으로 얼마나 얻어맞았던지, 죽여달라는 애원을 몇 번이고 했다. 북에서 받아온 무전기와 난수표를 내놓으라는 데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바닥에 장작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어앉히더니 네댓 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둘러싸고 침대각목 세례를 무수히 반복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마침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예, 그렇습니다”라는 식의 문답식 조서가 꾸며졌다. 심지어 육군 장성으로 있는 동생네 집에 가서 일박할 때, 미군 철수에 관한 기밀을 탐지했다는 것과 입북했을 때 남한사람들의 생활상을 그쪽에 말한 것을 묶어서 ‘간첩행위’로 엮어내는 데도 속수무책이었다.검찰(서울지검 공안부)에 넘어와서도 검사의 친절과 신경질을 순차 겪으면서 ‘만일 혐의를 부인하면 다시금 중정으로 불러들이겠다’는 중정측의 협박이 떠올라서, “공소장은 검사님 일하기 좋게 마음대로 꾸미십시오”라고 말해버렸다. 체념의 독백이 되어버린 그 말에 검사의 표정이 금방 환해지더라고 했다. 한때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바에야 모욕적인 교수형보다는 자결을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으나 아내와의 접견에서 마음을 바꾸었다”고 그는 회고했다.필자는 범세계적 양심수 석방 지원기구인 국제엠네스티의 의뢰에 따라 이 교수의 변호를 맡았는데, 통일에 대한 그의 일념과 선비다운 품성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1974년 봄·여름에는 유신정권의 명맥이 걸려 있던 대통령긴급조치의 돌풍이 거세었고,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등의 재판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어서 정권의 독기가 드세어져 갔다. 그런 영향도 있고 해서 그해 7월3일에 있었던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엄청나게 무거운 구형을 쏟아냈다. 1심 재판부는 주범격으로 기소된 전영관 등 3인과 이성희, 최규식 등 5명에게 사형을, 나머지 27명에게 징역 1년 내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해 12월9일 항소심 판결에서 이성희 교수는 최규식씨와 함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그밖의 5명에게 형집행유예가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의 항소는 기각되었다).무기수가 된 이 교수는 그 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91년 2월, 이례적인 가석방으로 수감생활 15년 10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看病) 일을 하며 많은 시국사범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국제엠네스티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압력에 따라 가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울릉도 사건 관련자 구원회’를 중심으로 집요한 구명운동을 전개해온 터였다.이 교수가 옥살이하는 동안 그의 부인은 3평밖에 안되는 구멍가게에서 한 그릇 1백50원하는 국수를 팔기도 했다. 무허가라고 해서 경찰의 시달림을 받아가면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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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20화 전북대 관제데모 규탄 정도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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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7 Ap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17/1113664805308630.jpg" alt=""/>    ▲ 지난 1987년 2월28일 강원도 화천군 구만리에서 평화의 댐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로 남한이 물바다가 될 것이라는 위협은 후일 전두환 정권의 ‘쇼’로 밝혀졌다.    구속영장에 적힌 혐의사실은 몇 번에 걸친 반정부 교내집회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 규탄대회 조작에서 비롯된 총장 승용차 방화 사건이었다. 그 무렵 전두환 정권은 갖가지 반공무드 조성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관련된 겁주기였다. 즉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수문을 열면 서울이 물바다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 63빌딩도 물에 잠긴다며, 공포분위기 조성에 열을 올렸다. 신문·방송 등 대중매체는 연달아 ‘특집’을 쏟아내며 국민들에게 수몰(水沒)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또한 그 무렵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대학생들의 연합집회를 용공으로 몰아 대량 구속하는 가 하면,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설을 퍼뜨려 반공무드를 고조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는 압권이었다.바로 그런 비정상 분위기를 타고 전북대에서 황당한 TV쇼가 벌어졌다. 11월12일 오후 4시경 교련을 한다고 제1학생회관 앞에 학생들을 모아놓고서 거기에 호우회 회원들을 투입시켜 금강산댐 규탄대회를 하게 하고, 미리 와 있던 KBS와 MBC의 TV카메라가 이 장면을 찍는 것이었다. 교련시간이 난데없이 금강산댐 규탄대회로 돌변한 데 대하여 학생들은 격분하기 시작했다.정도상군은 마침 1987년 총학생회장 선거와 관련된 홍보업무 준비를 하다가 분식집에 가서 점심을 때우고 학교로 들어오던 길에 그 장면을 보고 이상히 여긴 나머지 현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겨우 열 명 안팎의 호우회 회원들이 금강산댐 규탄 구호를 외치는데 교련 나온 학생들이 들러리로 이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군은 그날 아침 낯익은 안기부원이 학군단 건물에서 나오는 것을 본 생각이 났다. 흥분한 학생들 중에서 “카메라 뺏어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 와중에 KBS 기자는 교련 교관의 엄호를 받으며 현장을 빠져나갔고, MBC 기자는 학생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학생들은 화를 못 참고 MBC 기자를 발로 차고 카메라를 뺏으려고 했지만 그 기자는 겁먹은 표정을 하고서도 카메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팔로 감싸고 있었다.정군은 마침 총학 총무부장이 나타났으므로 그에게 현장을 맡기고 나서, MBC 카메라 기자를 데리고 총학생회 사무실로 갔다. 그는 학생들의 난폭한 언동을 제지하면서 기자를 어르고 달래어 필름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17/1113664805308631.jpg" alt=""/>    ▲ 소설가이기도 한 정도상은 오랫동안 통일운동에 힘을 쏟아 왔다. 최근에는 소설집 를 펴내고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문 밖에는 경찰병력이 출동한 가운데 총장 차가 교내로 들어오다가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학생들은 교련수업을 빙자해서 학생들을 관제 데모에 동원하게 된 경위를 밝히라며 총장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영문을 모르는 총장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이게 오히려 학생들을 격앙시켰다. “일단 총장님은 보내드리자”는 학생과장의 간청을 밀쳐내며 정군은 말했다. “전국에서 최초로 전북대학교 학생들이 금강산댐 규탄대회를 열었다고 방송에 나가면 좋을 줄 알았어요? 우리 학생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총장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대학본부로 갔고, 총학생회장 김순석군이 현장에 나타나 일장 연설을 하였는데, 얼마 후 총장 승용차가 불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에 불기둥이 솟았다.나중에 여러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정군이 경찰에 붙들려가 보니, 이미 꾸며진 조서에는 정군이 총학생회장 김군과 함께 총장 차 앞에 있다가 차를 전복시키고 불을 지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고, 검찰도 그대로 덮어씌웠다.해가 바뀌어 1987년 2월21일 첫 공판이 열렸다. 학생들로 가득 찬 법정 안은 구호와 노래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총학생회장 김순석군이 피고인석과 방청석을 향하여 인사를 하더니 자못 웅변조로 말했다. “여기는 심판받기 위해서 나온 자리가 아니다. 지금의 법률은 기만적이다.” 학생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공소사실에는 1986년 11월4일 학생의 날 기념행사, 같은 달 13일 전태일열사 16주기 추도식 등 학생들의 행사가 집시법위반으로 얹혀 있었다. 심리를 끝낸 지 일주일 만에 내려진 1심 판결에서 김순석을 제외한 7명의 피고인들은 형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김순석군은 고법 판결로 뒤늦게 석방되었다.피고인 중에는 아버지가 현직 경찰관으로 근무하는데도 시위에 적극 나섰다가 구속된 학생이 있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정도상군은 출감 후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면서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열정을 쏟고 있다. 금강산댐을 이용한 ‘북한의 수공(水攻)위협’이 전두환 정권의 ‘조작쇼’였음은 머지 않아서 밝혀진 대로였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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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9화 금융부정 특종 이원달 기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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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0 Ap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10/1113060005308620.jpg" alt=""/>    ▲ 1974년 5월10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의 배후 보도로 구속되어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이원달 중앙일보 기자.  박영복씨는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신문은 ‘은행돈 주무른 박영복의 어제와 오늘’이니 ‘쇠고랑 차고도 큰소리치는 74억의 사나이’ ‘행장에 권력층 소개’ 등 선정적인 기사제목을 뽑았다.세상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졌다. 하나는 융자와 관련하여 은행측에 돈을 주었느냐, 즉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느냐 하는 뇌물거래 의혹이요, 또 하나는 거액의 부정융자는 누가 밀어주고 봐주었는가 하는 배후관계였다. 바로 이 배후인물을 알아내어 특종을 한 기자가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인  이원달 기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특종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어 거꾸로 자신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박씨 사건의 배후로 몇 사람의 이름이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앞서 검찰 발표의 ‘배후관계’라는 항목에도, ‘배후작용자’ 아닌 ‘부분적 지원자’로서 전 중앙정보부 감찰과장, 전 중앙정보부 수사관 등이 거명되었으나 세론은 그 이상의 배후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굳어져갔고, 검찰의 배후 수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팽배해갔다.법조 출입기자들은 밤낮없이 촉각을 세우고 연일 취재전선을 펴느라고 여러 날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원달 기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한 가지 계책을 꾸며내서 실천에 옮겼다. 검찰의 소환을 받고 출두하는 은행관계자처럼 가장을 하고 검찰청 수위실을 무사 통과한 다음, 대검 특수부 수사실에 들어가는 데 극적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수사관들은 깜짝 놀라서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 기자는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박영복 사건의 배후인물 수사상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여당인 공화당의 이우현 전 의원이 국회 재경위 간사일 때 박씨로부터 돈을 받고 은행에 대출 압력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박씨 소유의 저택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청와대 사정수석실에도 보고되었으며 머지않아 이 전 의원을 구속할 방침이라는 내용도 알아냈다. 또 다른 배후인물로 청와대 경호실의 지아무개란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굉장한 특종감이었다.3월30일치 에는 ‘김보근 전 모 기관 과장, 전 국회의원 이우현씨 구속 방침’이라는 제목이 붙은 특종기사가 1면에 머리기사로 실려나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10/1113060005308621.jpg" alt=""/>    ▲ 74억 부정대출 관계인들에 대한 공판이 열리는 동안 박영복(오른쪽 끝)이 골똘한 모습으로 재판부를 응시하고 있다.   이 기사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큰 재앙을 불러들였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노발대발하여  조동오 편집국장 대리와 기사를 쓴 이원달 법조팀장, 그리고 법조출입 2진, 3진 기자까지 싹쓸이로 불러들였다. ‘경호실 직원 관련설’에 대한 감정적 대응치고는 너무 지나쳤던 데다 박종규 경호실장을 해치려는 타의가 있었나 하는 의심이 풀리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기사를 쓴 이원달 기자만은 무사하지 못했다. 문제의 기사가 나간 지 사흘 뒤인 5월3일, 검찰의 출석요구를 받은 이 기자는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그리고 황재택 검사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이 기자는 기사 내용이 사실에 근거한 취재 결과였음을 주장하고, 그 진부는 대검 특수부 김병리 부장검사나 김치열 검찰총장에게 물어보면 다 밝혀질 것이라고 역습을 했다. 그러나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기사의 구체적인 출처는 함구했다. 검찰은 배후인물로 지목된 이우현씨로 하여금 이 기자에 대한 고소장을 내게 한 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얽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명예훼손 피의 사건의 구속영장이 공안부 검사에 의해 청구된 것이나, 서울지법에서 공안사건 영장을 전담하는 수석부장판사 집까지 한밤중에 찾아가서 영장을 발부받은 것이나, 모두 이례적이었다. 4일 새벽 2시경 이 기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이 기자가 구속되자 법조 출입기자들은 물론이고, 언론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강력한 항의와 규탄의 소리가 빗발쳤다. 외국의 유명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으며,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그리고 국제신문협회(IPI) 같은 언론단체에서도 한국정부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면서 이 기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치열 검찰총장은 “이우현이 박영복으로부터 돈을 받고 한일은행장에게 융자 청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씨가 국회 재경위 간사의 직무와 관련해서 돈을 받거나 청탁을 한 것은 아니므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는 변명까지 했다. 이처럼 검찰의 논리가 궁색한 데다가 국내외의 비판이 거세어지자 검찰은 갑작스레 이 기자를 석방했다. 구속된 지 엿새 만의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에게 역정을 내면서 직접 석방을 명했다는 바로 다음날 이우현씨는 고소를 취소했고, 이 기자에 대해서는 공소권이 없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장본인인 이 기자는 훗날 “나의 필화 사건은 지난날 정부의 대 언론관을 보여준 일단의 사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애석하게도 2000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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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제18화 구국전위 사건의 안재구·정화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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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3 Ap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03/1112455205308610.jpg" alt=""/>    ▲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되기 두 달 전인 1994년 4월 양심수 후원회에 참석한 안재구 교수. 그는 공판에서 ‘구국전위’는 북한의 조선로동당과는 무관한 자주·민주·통일 운동조직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주체사상은 민족의 자주성을 구현하는 운동으로 자주·민주·통일 운동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남한사회에서는 자주적 통일운동은 주사파로 매도당하고 자주성을 갖고 통일을 열어나가자는 논의가 국가보안법위반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안씨는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구국전위는 결코 반국가활동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은 통일운동을 하려고 구국전위를 만들려다가 구속되었으므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또한 금품수수 혐의부분은 1993년 3월 정화려씨(당시 29세·현 유월농장 대표)를 통해서 재일동포로부터 일본돈과 서신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조금도 불온하거나 반국가적인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정화려―그가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그는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반외세·반독재 전국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일이 있다. 이어서 1987년 12월11일, 제12대 대통령선거 직전엔 KBS별관 점거농성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도 했다.정씨에 대한 이번 혐의는 그가 “안재구의 지시에 따라 세차례 일본에 가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중인 백명민과 만나는 기회에 문건과 자금을 제공받아 안재구에게 전달하는 등 구국전위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씨가 일본에 가서 백명민을 만나고 돌아온 뒤 서로 문통을 하고 그로부터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를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고 볼 증거는 없으며, 구국전위는 미처 단체로서의 기본골격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안씨가 창립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기초·검토했다는 점만을 가지고(아직 단체다운 조직과 인적구성 등이 갖추어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단체의 구성’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위의 문건들에도 반국가적인 내용은 없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403/1112455205308611.jpg" alt=""/>    ▲ 1996년 8월 민가협 주최로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 촉구 캠페인에 정화려씨의 딸과 부인이 함께 참여했다.  정씨는 일본에 갔을 때, 백명민에게 국내 정치정세와 운동권 동향에 관해서 이야기를 함으로써 국가기밀을 누설했다고 기소되었지만, 정씨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설령 그런 말쯤 들려주었다 한들 그게 무슨 국가기밀누설이 될 까닭이 없었다.그는 안씨를 도와주었다고 간첩방조행위로 기소되었으나 여기서 ①북한이 우리의 ‘적국’인가 ②안씨가 적국을 위한 간첩인가. ③피고인이 안씨가 간첩인 줄 알고, 나아가서 자신이 전달하는 서신 내용이 간첩죄로 처단될 만한 이적성을 갖고 있는가―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런 간첩방조죄를 인정할 논리나 증거는 없었다. 정씨가 재일동포한테서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금품수수’는 아니었다. 특히 혐의사실에 대한 증거라고는 고문 등에 의해서 강요된 (허위)자백밖에 없으며, 아무런 보강증거도 없었다. 수사관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39통의 수사보고서를 유죄의 증거로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검찰은 안씨가 구국전위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였고, 북의 지령과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활동했다는 논고에 이어 안씨에게 사형을, 정화려씨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안씨는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남겼다. “40대에 대학연구실에서 추방되어 10년간 감옥생활을 하였고, 이제 얼마를 더 어두운 감옥에서 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뒷날, 어떤 수학자가 있어 학문과 민족통일의 길에 그의 온 힘을 다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이어서 11월30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안씨에게는 무기징역이, 정씨에게는 징역 10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들은 항소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고,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94년 9월호에 자기가 일본에서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허위사실 유포에 인한 명예훼손이라고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 승소 판결(위자료 5백만원 지급)을 받기도 하였다.안씨는 1998년 8월에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다음해 광복절에 석방되었다. 정화려씨는 98년 광복절에 석방되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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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7화  ‘국보위법 위헌’ 이끌어낸 임정호 이사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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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0 Ma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20/1111245605308600.jpg" alt=""/>    ▲ 80년 6월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뀜)가 발족, 전두환 상임위원장(왼쪽)과 박충훈 총리서리가 악수하고 있다.      국보위법 부칙 제4항은 입법부 직원들도 “…그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그 직을 가진다”는 참으로 기묘한 조문이었다. 그러니까 공무원 각자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즉 아무런 과오가 없어도 추방시켜버리는) 그야말로 ‘묻지마’해임을 단행했던 것이다.헌법과 공무원법상의 신분보장 따위는 이미 간 곳도 없고, 또 호소할 곳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공직에서 추방된 그들은 백수가 되어 힘든 생활을 하면서 복귀의 그날을 고대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5공화국이 서산에 기울 때까지 복직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6·29선언이 나오고 잠시나마 군부지배의 서슬이 무디어지는 듯하자, 국회해직자들은 복직을 실현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중 선봉격인 임정호 이사관이 나의 고교선배라는 인연도 있고 해서 내가 앞장서서 소송을 떠맡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8년 3월, 서울고등법원에 면직처분무효확인청구소송을 냈다. 그런데 재판은 이상하게도 미루고 건너뛰어 가며 지지부진했다. 1년이 훌렁 지나고 나니 더 참을 수 없어서 담당 재판부에 위헌제청신청을 제기했다. 면직처분의 근거가 된 국보위법(부칙 제4조)이 입법권이 없는 국보위에서 만들어졌으니 무효라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안일하게도 각하 결정을 했다.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1989년 2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무렵 사건 당사자인 해직공무원 여러분이 소송에 기대를 걸고 자주 내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나는 위헌 판단을 받아내는 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면직처분의 근거라는 국보위법은 입법권이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헌법 제1조와 제40조에 위반된다. 뿐더러 그 법 부칙 제4항은 그 내용이 구 헌법 제6조 제2항과 헌법 제7조 제2항에 위반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국보위법에 “이 법은 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국회의 최초의 집회일 전일까지 그 효력을 가진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헌법소원 제기 시점에서는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국가(법무부)는 바로 이 점을 들어 실효된 법률은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또 한 가지 난점은 면직공무원인 헌법소원 청구인 중 장아무개 등 6명을 제외한 나머지 청구인들은 이미(1989년 6월) 원래의 직급으로 복직(재임용)되어 근무중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이른바 ‘소(訴)의 이익’이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런 논쟁에서 헌재는 청구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보위법 전부의 위헌론은 비켜가면서도, 어쨌든 면직의 근거조항인 부칙 4항은 위헌이라고 했으니, 그만 해도 통쾌한 승리였던 것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20/1111245605308601.jpg" alt=""/>    ▲ 80년 8월23일 전역하는 전두환. 당시 정권을 장악한 그는 국보위법을 만들어 국회 직원들을 집단 해임시켰다.    ‘폐지된 법률이 위헌여부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이 점에 대한 헌재의 판단은 이러했다. “…폐지된 법률에 의하여 권리침해가 있고, 그것이 비록 과거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로 인하여 발생한 국민의 법익 침해와 그로 인한 법률상태도 재판시까지 계속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경우에는 헌법소원의 권리보호이익은 존속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다음으로, ‘이미 복직한 사람들에게 소송의 이익이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론을 취했다. 즉 재임용한 사람들도 9년 전 직급으로 신규채용되어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면직처분의 무효를 전제로 한 복직이 아니기 때문에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 또한 면직기간 중의 보수·급여 등 경제적 손실도 회복할 수 없어 청구인들에 대한 권리침해의 현재성은 의연 존속하며, 따라서 소의 이익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또한 국보위법 부칙 제4항 후단에 “…그 소속 공무원은 이 법에 의한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그 직을 가진다”고 한 것은 공무원을 귀책사유의 유무를 불문하고 면직시킬 수 있기 때문에 헌법상의 공무원 신분보장 규정에 어긋나므로 위헌이라고 했다.1989년 12월18일에 나온 헌재의 이 판단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울고법에서는 금방 시원한 판결이 나오지는 않았다. 담당 재판부가 바뀌는 등 사정이 겹쳐 시일을 끌다가 헌재 결정 후 10개월 만인 1990년 10월24일에야 ‘면직처분 무효확인’ 승소판결을 받았다. 국가측이 모질게도 상고를 함으로써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8개월이나 지난 뒤인 1991년 6월, 피고(국가)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옴으로써 10년이 넘게 별러온 복직의 길이 열렸다. 소송을 처음 제기한 때로부터 3년 3개월 만의 때늦은 승리였다.그러나 정작 국회측은 이들 해직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냉대를 했다. 인사, 급여, 보직에서 지능적으로 규정을 악용함으로써 계속 불이익을 주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서기관 2명과 이사관 1명에 대해서는 5년간이나 무보직상태로 두면서 봉급만 주었다. 국가가 아무 잘못 없는 공무원들에 대하여 이처럼 참으로 잔인무도했으니, 그 정권이 어찌 ‘저주’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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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6화 군사분계선 넘은 문규현 신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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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3 Ma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13/1110640805308590.jpg" alt=""/>    ▲ 1989년 8월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땅을 밟은 임수경양(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오른쪽에서 세 번째)를 파견했다. 사진은 북에서 열린 환송회 모습.     한국정부가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를 불허하고 철통 같은 봉쇄망을 치고 있을 때,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홀연히 순안공항에 나타났으니 이때 남한 공안당국은 물론 일반 사회의 놀라움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임양은 북한에서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환영도 받고 연설도 했다. 어쨌든 임양의 방북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가 남으로 귀환 후에 닥칠 가혹한 처벌은 불문가지였다.이때 사제단에서는 미국에 유학중인 문규현 신부에게, 북에 들어가 임수경 ‘수산나’와 동행하여 귀환하도록 요청을 한다.당시 문 신부는 여러 사정으로 방북이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평양행을 결심한다. “수산나에게 보내는 짐을 지고 평양에 다녀와 달라”는 사제단의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7월26일 사제단은 상임위원 일동의 이름으로 문 신부의 북한파견을 공식 발표한다.“…우리 사제단은 문 신부를 7월25일자로 북한에 파견하였고 …임양의 원하는 바에 따라 귀환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제로서 신앙적 양심에 입각한 결단이며, 목자로서 양떼의 고난을 함께 겪으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것입니다….”사제단에 대한 비난이 일부 언론과 친정부단체에서 쏟아져나왔다. ‘좌경용공’이라는 색깔론은 그들의 ‘18번’이라 치고, 이번에는 한국천주교주교단에서조차 ‘유감’을 표명하는 담화문이 나왔다.임양이 의도한 7월27일 판문점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문 신부와 함께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도착한 임양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북측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자칫 정전협정 위반으로 문제가 커지거나 남북의 긴장이 고조될 것을 원치 않아서인지 한사코 판문점 통과를 저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제3국을 거쳐서 귀환하라는 북측의 권고를 뿌리친 채 통일각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단식 6일 만에 북한당국은 임양을 평양 외국인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으며, 두 사람은 장충성당 미사 참석, 기자회견, 군중집회 참석 등으로 2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8월15일 오후 1시30분 판문점에 도착, 오후 2시20분 문 신부는 임수경양과 함께 기어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남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칼날이었다. 당장 서울시경찰국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장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고나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13/1110640805308591.jpg" alt=""/>    ▲ 지난 2003년 5월26일 이라크전 반대와 새만금 보전을 위해 3보1배를 하는 문규현 신부(오른쪽)와 형 문정현 신부.  그들의 첫 공판은 그해 11월13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1부(재판장 황상현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렸다.재판부는 공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법정 내의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그러나 방청객들은 피고인 두 사람이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박수를 치고 장미꽃 송이를 던지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석방하라”라는 구호도 외쳤다.재판장은 개정 5분 만에 휴정을 선언했다. 다시 속개된 공판에서 10명의 방청객이 퇴정명령을 받았다. 법정 안밖에는 3천여 명의 전경과 3백여 명의 학생·시민이 대치하는 긴박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경찰의 과잉경비에 항의하고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임양과 문 신부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재판연기를 요청했다. 법정 안에도 자유총연맹 등 우익단체 회원 50여 명이 이른 아침부터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방청객들의 구호나 박수에 맞서 고함을 지르고 야유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그 소란 속에서도 피고인들의 모두진술이 있었다. 임양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청년·학생들의 독자적 결단이었으며, 정부도 7·7선언이나 대통령연두기자회견에서 남북학생교류와 평축 참가 문제를 언급해놓고서, 나의 평축 참가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기소한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검찰과 맞섰다.한편 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북한에 갔다. 실정법상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상의 판결을 내리기 전에 통일의 정신으로 이 사건을 보아야 한다….”다음해 2월5일, 1심 판결이 떨어졌다. 임수경 징역 10년, 문규현 징역 8년이었다. 항소심에서는 두 사람 다 징역 5년이었다. 문 신부의 친형인 또 한 사람의 문(정현) 신부가 선고 직후 외쳤다. “징역 5년만 살면 되니까 우리 모두 북한에 다녀옵시다.”임수경양은 법정에서 내 변호를 받은 후, 서강대(언론대학원)에서 내 강의(저작권법)를 들었는가 하면, 결혼 때에도 내가 주례를 섰다.나의 주례사 한 토막은 이러했다.“이 혼인은 어느 한 쪽이 먹거나 먹히는 흡수통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쪼록 두 사람이 서로 찬양·고무·동조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5화 억압된 역사 서술의 타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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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6 Mar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06/1110036005308580.jpg" alt=""/>    ▲ 지난해 10월27일 ‘좋은친구산업복지재단’ 임원들과 조찬을 한 뒤 자리를 함께한 조승혁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사건- 조승혁목사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이사장 박형규, 원장 조승혁)에서는 1983년 1월 이사회를 열고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연구’를 그해의 연구조사사업으로 채택했다. 논의과정에서는 정부당국이 그런 사업을 문제 삼을 수도 있으니 보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부 이사들이 적극론을 펴는 바람에 그대로 가결되었다.3월부터 사업이 시작되었다. 연구책임은 김용복(목사·부원장), 실무간사는 이미경(현 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 ‘혹시라도’ 하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해 12월15일, 연구교사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유상덕이 연행된 것을 신호로 연구팀 교사 9명이 모두 경찰에 연행을 당했다.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12월30일에는 그 연구사업을 지도하던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가 경찰에 붙들려 갔다.12월31일 기사연의 종무예배와 식사가 끝난 뒤인 오후 4시쯤 대공수사단의 건장한 경찰관 세 사람이 와서 조 목사를 연행해갔다. 박처권 단장은 간부들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조 목사에게 “기독교기관에서 이런 강의를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다그치면서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의 강의 요지를 적었다는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강만길 교수; 6·25는 전쟁이 아니며 내란이다.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다. 리영희 교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민주적인 면에서 보면 대민족회의 등 우리나라 통일방안보다 월등히 낫다”라고 쓰여져 있었다.박 단장이라는 사람은 리영희 교수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라는 책 때문에 조사를 받고 2년간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그런데 이번에 또 걸려들었다. 그는 확신범이므로 사형당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조 목사는 기사연의 책임자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한다.그때 조 목사는 자기를 담당한 수사관들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사팀장인 조한경 ‘상무’는 장로교 신자였다. 고문을 담당한 악연은 홍 ‘부장’ 이었는데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담당 계장인 홍승상 ‘전무’는 조 목사가 1976년 서울시경 대공실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조사받았을 때 담당자였는데, 고문까지 가하면서 모질게 굴던 자였다.수사관들은 조 목사가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에게 이러저러한 강의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느냐며 다그쳤다. 사실, 조 목사는 강의를 부탁한 사실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으므로 처음엔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조사관은 두 교수가 그렇게 시인했다면서 조여들어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06/1110036005308581.jpg" alt=""/>    ▲ 강만길 교수(왼쪽), 리영희 교수  1984년 1월5일 밤, 박 수사단장이 조사실로 와서, 이해구 치안본부장한테서 신년 초부터 조 목사를 연행해서 왜 교계를 시끄럽게 하느냐면서 사실대로 조사해서 조 목사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대충 조사하고 내일 아침 내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두 교수는 구속되고 혼자만 풀려나갈 수가 있는가’라는 자책감에 조 목사는 괴로웠다. 그는 두 교수가 문제의 강의를 한 것은 전적으로 조 목사 자신의 부탁에 따른 것이라고 (사실과는 다른) 진술서를 써냈다. 그랬더니 수사단에서는 그것을 근거로 삼아 오히려 조 목사까지 구속해버렸다. 뿐인가 북괴찬양, 이적행위를 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조 목사는 두 교수의 석방을 위해서 자신이 적절한 사과를 하고 교계에서 정부에 석방 진정을 하는 선에서 사태를 해결하도록 제의했으나 성사되지 않은 채 검찰로 송치되었다.1월29일 밤, 그는 보도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방한복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에 올랐다. 검찰청에 가서 인정신문만 받고서 곧 서울구치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1주일쯤 지난 어느날, 검찰에서는 구속된 세 사람이 출소할 때 TV인터뷰에 응하여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겠다고 하면 상부에 석방 건의를 하겠다고 했다.그 무렵 나는 이돈명, 홍성우 두 변호사와 함께 구속된 세 분을 접견했다. 강, 리 두 교수는 조 목사가 뭔가 잘못 진술한 것 같다는 말을 했고, 우리 변호인들은 그 말을 조 목사에게도 전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조 목사는 “나는 그때 두 교수님께서 쓰신 자필 내용은 경찰수사관들이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 추측에 의한 진술(두 교수님을 유리하게 한다는 조건에서의) 때문에 두 교수님이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심했다”고 회고했다.TV인터뷰 문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은 2월14일 새벽에 서울구치소 문을 나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KBS-TV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각본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검찰이 요구한) 공산주의 찬양, 이적 운운의 내용은 빼고, 다만 물의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사과한다는 취지의 말로 얼버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 기독교계와 민주화운동권에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의미있는 계기가 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306/1110036005308582.jpg" alt=""/>    ▲ 지난 2003년 1월, 6·15공동선언 기념 남북공동행사 실무자 접촉을 위해 북에 간 민화협 관계자들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승환 민화협 정책위원장.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사건-이승환씨1988년 12월에 발간된 의 저자 이승환은 다음해 10월 뒤늦게 국가보안법위반(이적표현물의 제작·배포)으로 구속되었다. 그 무렵엔 ‘신공안정국’이 세상을 긴장시키고 용공과민이 공안파문을 부추기고 있었다.그 해 가을 이승환은 서울대학교의 에 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일부 언론은 그 글이 용공이라고 공박했다. 문제된 는 종전의 역사서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금기(禁忌)를 무너뜨린 저술이었다. 그때까지는 항일무장투쟁사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정치상황의 제약으로 사실의 규명과 역사의 해석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해석이 하나의 사상투쟁의 내용으로 화한 것이 장애요인이었다. 그런데 이씨는 대담하게도 이 금지선을 넘어섰던 것이다.이 책에 대하여 (1988. 9.8.)는 ‘북한편향적 시각’이니 ‘항일독립운동의 주류를 30년대 만주의 게릴라전투에 귀결시키려는 억지’라는 등으로 공격했다.저자는 위와 같은 비난에 답할 겸 이 책을 썼다면서, 그 책 서문에서 자신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어용역사관 대신 3·1운동→노동자·농민운동→항일무장투쟁을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서 정당히 복원시키는 한편, 남한 매판세력의 역사적 뿌리가 김구·장준하와 같은 애국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 객관적으로 논증하고 학문적으로 검증하려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일부 역사연구자들의 잘못된 서술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라는 미명하에 민족해방운동세력을 ‘공비’로 매도하고 김일성이 가짜라는 등 일제식민지사관을 답습하는 일부 관변사가들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축소·왜곡하고 타율적 해방론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부분에 대한 내적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마침내 그는 묶인 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박원순 변호사와 나는 변호인석에서 이씨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검사와 피고인 간의 논전은 북한에 대한 ‘반국가단체론’에서부터 각이 맞섰다. 물론 검사는 “북한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냐”고 전단(戰端)을 열었다. 이승환씨는 검사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즉 “북한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우리 민족 이천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또 하나의 주권정부로서, 이를 반국가단체라고 하는 규정하는 것은 현실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도 맞지 않는 70년대의 냉전논리적 북한관”이라고 맞섰다. 다음으로는 피고인 저술의 ‘이적목적’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씨는 자신의 연구·저술활동이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거나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 역사관의 오류를 극복하고 민족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항변했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이 사실이어서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로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알려진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고 했다.이 단계에서 나는 검사에게 석명을 구했다. “필자의 주장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적이 되는가, 아니면 사실이 아닌 것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날조했기 때문에 이적이라는 것인가.” 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는 묘한 답변을 했다.셋째는 김일성의 정체 논쟁 즉 가짜 김일성 시비였다. 변호인들은 이 문제를 객관성 있게 밝혀내고자 한국역사연구회에 사실조회를 해달라고 재판부에 신청을 했던 바, 그 연구회에서는 피고인의 역사 서술을 모두 긍정하는 회답을 보내왔다.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항일무장투쟁도 사실이라는 견해였다.이씨는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을 삭제, 변조하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항일투쟁의 한 장을 말살하여 그 진상을 흐리게 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그러나 서울지검 공안1부 이귀남 검사는 1990년 4월23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승환씨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이씨는 최후진술에서 “책의 내용이 북한 역사학계의 주장과 다른 부분이 많고 일제 관헌 및 중국쪽 자료를 중시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1930년대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평가했는데도, 냉전시대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는 것은 정권의 무분별한 탄압”이라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도 “피고인의 학문적 열의와 저술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관계가 상당부분 사실로 인정된다”는 말을 덧붙였다.이 사건은 종래 한국근현대사의 연구 저술에서 도사리고 있던 금기를 타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김일성 사망 후의 언론보도에서도 그의 약력과 생애를 소개할 때 그가 만주에서 벌인 항일무장투쟁을 사실대로 언급할 만큼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이씨는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중 유신반대시위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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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4화 민주화운동에 나선 두 문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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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7 Feb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27/1109431205308570.jpg" alt=""/>    ▲ 지난 93년 4·19혁명 33주년을 맞아 재야인사들이 4·19묘지 앞에서 함께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병걸씨, 네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  문학평론가 - 김병걸1979년의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궁정동의 안가 술상머리에서 사살되자 바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악명 높은 유신헌법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의 반감을 샀다. 뿐인가 조속한 민주화 이행을 주장하는 각계 인사들을 계엄포고령으로 걸어 잇달아 구속하는 시대역행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서울 명동 YWCA강당에서 ‘위장 결혼식’사건이 발생하여(11월24일) 대량 검거사태로 번졌다.“신랑 홍성엽군과 신부 윤정민양의 결혼식이 있다”는 명함형 청첩장(?)까지 돌려서 많은 하객(?)을 모아놓고 나서 함석헌 선생 주례로 결혼식을 빙자한 집회를 하려 한 것이었다. 이 거사 모의에는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씨 등과 함께 문학평론가 김병걸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김씨는 해방 후 단신 월남하여 영어교사를 하던 중 1962년 에 이란 평론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후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왔다. 1963년부터 경기공업전문대 교수로 강단에서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던 중 1974년, 반유신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가 해직을 당한다. 그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하고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나서는 문단의 선배로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왔다.결혼식을 위장하여 시민들을 모아놓고 거행하려던 집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라는 긴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소위 신군부가 기도하는 ‘최규하 대통령 만들기’를 저지하기 위한 집회였다. 11월24일 오후 5시경 서울 명동 YWCA강당에는 1천 명이 넘는 인파가 출렁였고 건물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결혼식을 내세운 이상 배역이 정해져 있어서, 주례 함석헌, 사회 김정택, 신랑측 안내 최열, 신부측 안내 강구철 ― 이렇게 짜여져 있었다. 김병걸씨는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씨와 함께 진짜 행사인 국민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식이 시작되어 사회자가 “신랑입장”이라고 외치며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박종태씨가 단상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박수가 터졌는가 하는 순간 장내에서는 “유신잔당 물러가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거국내각 수립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대회장 밖에 포진하고 있던 전경들이 출입문에 쌓아 놓았던 걸상바리케이드를 무너트리고 장내로 쳐들어와서 마구잡이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의 강제연행이 한창일 때 김병걸씨는 백기완씨 등과 함께 용케 현장을 빠져나온 뒤 밤늦게 집으로 향했다. 자정 무렵 집 앞에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에게 붙잡혀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승훈, 이호철, 임채정씨도 끌려와 있었다. 다음 날 그들은 오랏줄에 굴비처럼 한 줄로 묶여 트럭에 실려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입구에서 한 사람씩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네댓 명의 건장한 군인들이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들고 서 있었다. 옷을 벗으라기에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더니 “이 개새끼, 5초 내에 벗어!”라고 고함을 쳤다. 이어서 “엎드려”하는 구령과 함께 야구방망이와 각목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야만적인 고문은 ‘레퍼토리’를 바꾸어 가며, 말로 다할 수 없이 잔인했다.미국을 비롯한 외국 언론에 보안사의 고문사실이 보도되면서 세계여론의 들끓는 비난에 봉착한 전두환 등 계엄당국은 구속 20일 만에 김씨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석방했다.이 위장결혼식 사건은 윤보선 전 대통령쪽의 작용이 빚어낸 결과로 알려졌다. 윤씨는 재야세력이 대통령보궐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벌이도록 주문을 했다. 그러는 중에 현역 대령 한 사람이 안국동 윤씨 집을 찾아와 그런 목적으로 집회를 갖는다면 협조하겠다는 말을 하고 갔는데, 이 대령의 말에 속아서 마음 놓고 집회를 추진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돌았다.YW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사람은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 최민화, 이우회, 김정택, 최열, 홍성엽, 이상익, 권진관, 강구철, 김윤환씨 등이었다. 그리고 윤보선, 함석헌, 박종열, 김병걸씨 등은 불구속 기소, 문국주, 이명준, 이신범, 조성우, 이석표, 김경남씨 등 비교적 젊은 세대는 피신을 잘하여 수배자로 남아 있었다. 보안사에 붙들려 간 사람은 기소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김씨는 군법회의 1심에서 징역 2년,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실인즉 이 사건은 내가 변호한 사건이 아니다. 당시는 나도 필화사건 유죄 확정으로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무직자였기 때문이었다. 정작 내가 김병걸씨를 변호한 것은 나의 복권 후에 1987년 4월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서 있었던 집회사건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임채정씨와 함께 또 구속됐다. 집시법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을 거부하면서 투쟁하다가 3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그는 1984년 여름 해직 교수들에게 복직의 길이 열렸을 때 안기부 직원이 찾아와 복직을 종용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출감 후 (1989년), (1994년) 등 저서를 냈으며, 내가 그의 문학평론집 을 받아본 것은 그가 지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뜬(2000년 10월26일) 직후였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27/1109431205308571.jpg" alt=""/>    ▲ 지난 87년 6월10일 오후 7시 성공회성당에서 6·10국민대회를 마친 뒤 정문을 지나 세종로로 향하는 행진을 이끌고 있는 유시춘씨(맨 오른쪽). 이들은 세종로에 도착하기 전 모두 경찰에 연행되었다.  소설가 - 유시춘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숨졌다. 고문치사라기보다는 살인사건이라고 해야 할 이 천인공노할 만행은 “‘탁’ 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 하고 쓰러지더라”는 유치한 둘러대기에 의해 더욱 큰 분노를 샀다. 한 의사의 용감하고 양심적인 결단(발언)으로 박군의 고문사망이 밝혀지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에 의하여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경악했고 전두환정권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른바 ‘4·13호헌선언’을 발표하여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고수하며 국민적 요구를 걷어찼다. 바로 이 4·13조치는 많은 국민의 저항을 자초했고, 학계, 종교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 재야세력과 야당에서는 연달아 반대성명을 내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5월27일, 재야 각계 인사와 통일민주당이 동참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다. 국본은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상임공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상집) 및 각 분과위원장이 조직과 활동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그 산하에는 경향 각지에서 자진 참여한 수많은 민주화운동단체, 직능단체들이 있었다. 험한 일은 주로 ‘상집’들의 몫이었다. 그런 상집 중에 여류 작가인 유시춘씨가 들어 있어 주목을 받았다. 유씨는 동생인 유시민씨가 서울대 재학중에 구속된 바 있어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맡아 고역을 감당하는 등 헌신을 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집권측은 4·13선언에 뒤이어 6월10일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국본측은 이에 정면대결하여 같은 날 전국적인 집회·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찰의 미행·감시를 피하여 장소를 바꾸어가며 상집들은 치밀한 계획을 진행시켰고, 그런 자리에 유시춘씨의 모습은 빠지지 않았다. 유씨는 6월항쟁의 점화 지점인 서울성공회 안에 들어가서 현수막, 피켓, 전단, 성명서 등 대회 진행에 필요한 것을 챙기는 한편 외부와의 신속한 연락 등을 맡기로 자청했다.6월8일, 국본은 ‘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6월10일 오후 6시를 기하여 전국 20개 지역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이를 폭력에 의한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덮어씌우고, 갑호비상령까지 내리면서 그 저지에 혈안이 되었다. 거사의 날 6월10일 새벽, 성공회 입구에는 이미 중무장한 경찰이 철통 같은 저지선을 펴놓고 있었다.유씨는 성공회 성당의 박종기 신부의 측근인 한 청년과 짜고 쇼를 했다. 그가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예상대로 경찰이 제지를 했다. 유씨는 시나리오대로 “왜 내 교회를 내가 못 들어가요? 큰일났네, 나 없으면 새벽 예배 못 본단 말이오. 신부님한테 크게 야단맞겠네…”라며 표정 연기를 했다. 그때 안에 들어가 있던 그 청년이 쫓아나와서 “이제 오면 어떻게 해요! 피아노 반주가 없으면 예배 못 보지 않아요?”하면서 유씨의 손목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운명의 시각, 6월10일 오후 6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하기식이 끝나는 것을 신호 삼아 거리에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일제히 울리고, 교회와 사찰에서는 타종이 잇따랐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고, 부상자, 연행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그날 성공회 안에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국민대회’를 거행한 국본의 간부들은 시위 초반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들은 장안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실려가서 갇힌 몸이 되었다. 그 중에는 물론 유시춘씨도 있었다. 나흘 뒤 6·10 구속자들 일부는 강동경찰서로 옮겨졌다. 박형규, 금영균, 오충일, 양순직, 김명윤, 이규택, 송석찬, 김병오, 제정구, 지선, 진관 등 6·10 구속자 일행(?)은 서울 시내 몇 개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었다. 유시춘씨는 강동서에 제정구씨와 함께 갇혀 있었다. 그때 나는 각 경찰서를 돌며 이들을 접견했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서울 거리, 전경과 ‘닭장’ 사이를 뚫고 투석전의 현장을 달리면서 마치 야전군의 장교나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에 이어 6월26일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종전 시위와는 달리 6월항쟁 때는 넥타이부대, 의료계, 교사들, 중산층 일부까지 가세하여 말 그대로 전 국민적인 궐기를 기록했다. 이에 집권세력은 이른바 ‘6·29선언’을 내걸고 몇 가지 민주화조치를 약속했다. 구속자들도 기소되지 않고 풀려나왔다. 유시춘씨는 1973년에 소설가로 문단에 나왔고  등 창작집을 냈으며, 이 사건으로 고생을 하고 나온 후에도 변함없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가 2001년 11월부터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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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3화 ‘장례식 방해’로 구속된 두 변호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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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0 Feb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20/1108826405308560.jpg" alt=""/>    ▲ 노무현  노무현 - 변호사1987년의 6월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기(氣)를 꺾고 나서 이른바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그 해 8월, 경남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造船)에서 대규모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장승포읍 옥포관광호텔 앞 네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시위 노동자 이석규씨(당시 21세)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8월22일).노조 집행부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부산본부에 진상 조사와 이석규씨 부검 참여를 요청했다. 이에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에서 거제도로 건너간다.노 변호사는 당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일하는 한편, 국본 부산본부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부산·경남 일원의 6월민주항쟁을 이끌어온 주역이었다.그는 8월23일 오전 옥포에 도착하여 노조 집행부(위원장 양동생)와 이석규씨의 장례절차를 협의하였는데, 특히 장지 문제는 유족들이 처음엔 화장을 원했으나 노동자들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그대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노 변호사는 24일 오전에는 서울에서 온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마산지검의 이석규씨 부검에 입회하였다.그런데 그 날 오후 유족대표라는 현역 육군 소령이 나타나 장지를 남원 선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 변호사는 25일 오후 2시경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유족들을 만나 “(장지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보아 달라”는 간청을 하였다. 그는 장례 전 임금협상 문제에 관하여 노조 집행부와 협의를 하였으나 특별히 개입한 바는 없었다.그런데 며칠 뒤 노 변호사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식(葬式) 방해,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라고 했다. 형법 제158조에 ‘장식방해’라는 죄명이 있기는 하나 그 조문을 적용해서 처벌한 전례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사문화된 ‘장식방해죄’를 갖다 붙인 것이 희한했다. 또한 (1)그 해 2월7일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한 고문조작 및 은폐규탄대회 (2)최루탄 사망자 이태춘씨에 대한 영결미사와 장례행렬 (3)그 해 6월28일 부산가톨릭센터 토론집회 등 묵은 사건을 이석규씨 장례문제에다가 얹어서 구속영장을 떼었다.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 조항도 끼워 놓았다.노 변호사 구속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변협 진상조사단(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안동일 네 변호사)이 현지조사를 하고 온 뒤에 충무와 부산으로 향했다.9월7일 충무서에 가서 이상수 변호사를 만나고 그날로 부산으로 가서 해운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노무현 변호사를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가 구속영장에 기재된 것처럼 장례를 방해하거나 제3자 개입의 죄책을 질 만한 잘못을 범한 일은 없었다. 대한변협의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노무현 변호사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속하고자 하는 편집(偏執)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범죄사실화한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왜냐하면 노 변호사는 1981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핵심인사 22명이 용공혐의로 구속된 ‘부림사건’의 변호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래 시국사범 변호,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2·7 박종철군 추도행사에 관련하여 부산지검은 노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아무런 증거 보완도 없이 네 차례나 법원측에 영장 발부를 종용한 사실이 알려져 비판을 받은 바도 있었다.노 변호사는 10월29일 앞서의 구속영장 죄명(집시법위반, 장식방해, 노동쟁의조정법위반) 그대로 기소되었다(신병은 9월24일 구속적부심사에서 석방). 서울과 부산의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99명의 대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노 변호사 자신은 해운대경찰서에서 쓴 자필 기록에서 “나는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독재집단의 잔재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탄압이 있고, 그 장단에 춤추는 검찰과 법원이 있을 뿐, 진실과 정의를 밝히려는 검찰도 법원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노 변호사와 같은 법률사무소 멤버이던 문재인 변호사는 변론에서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공소사실에 대한 구성요건 부합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각 행위의 사회적 의미 또는 사회적 정당성의 평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사건 집회·시위들은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시위가 아니었다. 또한 집회 신고의무가 있는 주최자도 아니었다”고 기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장식 방해’의 점을 보면, 노 변호사는 장례 이틀 전인 6월26일 정오 무렵 현지를 떠난 후로는 일체 거기에 간여한 바 없었다. 현지에 가서 장례에 관한 의견 제시는 했으나 누구에게 강요한 바는 없었다.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행위도 없었다.그러나 1988년 2월22일 부산지법은 노 변호사에 대한 공소사실을 유죄로 보고(다만 장지 결정 방해 부분 제외) 벌금 1백만원을 선고했다. 노 변호사는 항소했으나 1991년 7월에 항소를 취하했다. 그는 이 구속사건으로 전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20/1108826405308561.jpg" alt=""/>    ▲ 이상수  이상수 - 변호사1987년 8월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대우조선에서 발생한 노사분규에서 노사협의 결렬 후 농성·시위 근로자들과 진압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이석규씨가 경찰의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음은 앞서 노무현 변호사 구속 사건에서 본 바와 같다.이 소식을 접한 서울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조문단을 보내기로 하고 민권위원장 이상수 변호사를 국본 간부인 김도현, 유동우씨와 함께 옥포 현지에 파견했다.조문단 일행이 8월23일 옥포에 내려간 지 1주일 만인 31일 이 변호사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보내어 사태파악에 나섰다. 나는 이 변호사와 함께 국본에 참여하여 6월 민주항쟁 때는 6월10일과 26일 두 번에 걸쳐 30여 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서울 도심지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거기에가 국본의 상임공동대표라는 입장도 있고 해서 9월7일 충무경찰서에 가서 이 변호사를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와 9월10일자 변협조사단의 조사보고서는 경찰의 구속영장신청서상의 범죄사실(훗날 검찰의 공소사실)과는 많이 달랐다.9월18일자 마산지검 충무지청 검사의 공소장에 의하면, 죄명이 (형법상) 장식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위반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장식방해로 기소되기는 우리나라 형법이 시행된 후 첫 케이스가 아닐까 싶었다. 변호인단으로는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 안동일(이상 변협 진상조사단 참가), 김은집(대구), 이돈명, 한승헌 강명득, 하죽봉, 조경근(이상 서울) 등 10명의 변호사가 선임되었다.공소사실 중 장식방해 부분을 요약하면 “망 이석규의 장례를 주관하여야 할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른 장례절차 진행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망 이석규의 장식을 방해하고 …”라고 되어 있다.그러나 이 변호사는 장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한 일이 없었다. 8월24일 오후 노조 집행부와 이 변호사를 비롯한 서울·부산·마산에서 온 재야단체 인사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장례는 민주국민장, 5일장, 장지는 광주, 장례위원장 이소선(고 전태일군의 어머니)으로 확정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족측은 장례절차를 노조 집행부측에 일임하는 한편 보상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는 부산에서 온 노무현 변호사와 상의하여 이석규씨의 부검을 반대하는 유족과 조합원들을 설득하여 검찰의 부검 실시에 협조하였다(부검 입회도 하였음). 그런데 그 날 오후 이아무개라는 현역 육군 소령이 나타나 유족대표를 자처하면서 장지는 광주 아닌 남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유족측도 그와 같은 생각으로 기울게 되었다.이처럼 장례, 장지 문제로 유가족측과 노조, 재야의 의견이 서로 맞서는 바람에 노조측도 갈팡질팡하다가 28일 오전 10시50분 장례위원회 주최로 유가족들이 불참한 가운데 이 변호사를 비롯한 국본 관련자 및 노조 주도하에 이석규씨 유해의 발인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그 후 장례행렬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향하여 가던 중 오후 5시30분경 경남 고성군 고성읍 월평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경찰 15개 중대, 2천여 병력의 포위·제지를 받았다. 경찰은 영구차와 운구위원 차에 탄 노조원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유족 3명을 태운 뒤 경찰관이 영구차를 운전하여 남원으로 향하였다. 이 사태 속에서 이 변호사는 차에서 내려 경찰에 항의하다가 오히려 고성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충무경찰서로 이송되어 구속되었다.소위 ‘제3자 개입’ 혐의에 대해서 보면, 이 변호사가 노동자들에게 조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조위원장이 발표한 6개항의 요구조건은 대우조선 노사분규의 조속한 타결을 돕고자 집행부에 권고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비민주악법인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으로 처벌할 사안은 결코 아니었다.이 변호사는 기소된 후 한 달쯤 있다가 법원의 보석결정이 났으나 검찰이 이례적으로 즉시 항고까지 하는 등 끝까지 반발을 보였다. 결국 그는 구속된 지 49일 만에 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함으로써 석방되었다(그 후 사건은 검찰의 공소 취하로 끝남).그는 그후로는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가 간혹 뜻밖의 핀잔을 먹곤 했다. “장식(장례) 방해로 구속까지 된 사람이 여기 오면 어떻게 하나?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 압제와 분규로 절박해진 상황 속에서 변호사다운 역할에 충실했던 한 법조인을 이런 허황된 죄명으로 잡아넣던―그런 세상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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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2화 엇갈린 두 사형수의 운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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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7 Feb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17/1108567205308550.jpg" alt=""/>    ▲ 지난 2003년 10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여정남씨와 함께 활동했던 학교 후배들과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운영위원들이 대구에 있는 여씨의 묘를 찾았다.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이가 여씨의 조카 여상화씨. 사진제공=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인혁당 사형수 - 여정남박정희 정권은 1인 영구집권용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4월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사건을 꾸며 군법회의에 걸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소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종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연루자들은 모두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인혁당사건에서 7명과 민청학련사건에서 1명은 끝내 사형대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이라는 항의가 빗발쳤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하루도 채 안되는 20시간 만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의문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1975년 4월9일 새벽의 일이었다.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02년 9월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고 발표했다.그렇다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고귀한 목숨과 그들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국가기관이 공식으로 조작사건임을 인정한 인혁당사건은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법살인’의 본보기가 되었다.사형수 8명 중 민청학련그룹에 속한 피고인은 단 한 사람, 경북대학교 학생회장이던 여정남이었다. 그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으로 조작되어 사형까지 당했다. 바로 이 비운의 젊은이를 내가 변호했다. 1974년 새해가 밝자마자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유신반대에 나선 종교인, 지식인, 청년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2005년 1월16일자 제661호 18~19쪽 참조).1월8일의 긴급조치 1호에 이어 4월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 관련자의 대량 검거에 나섰다. 그리고 그 달 25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이란 것을 발표했는데, 체포된 사람들은 주로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혁신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10년 전인 1964년 중앙정보부에 검거되어 이른바 ‘인민혁명당사건’으로 처벌된 바 있는데, 바로 그 인혁당을 재건해가지고 민청학련의 유신반대 운동을 배후 조종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 중 정상복, 이직형, 나상기, 서경석, 안재웅, 황인성 등 기독청년그룹과 유근일의 변호를 맡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 변론이 문제되어 강신옥 변호사가 구속되는 바람에 그가 맡았던 여정남의 변론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다.그는 ‘인혁당 재건위’ 쪽의 도예종(50·삼화건설 회장), 서도원(52·무직), 하재완(43·무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등과 함께 1심(1974. 7.13.)에서 이미 사형을 선고받고 난 뒤였다.여정남은 경북고 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정외과 재학 중 1965년에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였고, 1971년의 ‘정진회’ 필화사건, 다음 해의 포고령위반 등으로 연달아 구속된 바 있었다.그에 대한 1974년 사건의 혐의사실도 완전한 조작이었다. ‘북괴노동당 사업총화보고문’은 본 일조차 없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게 했다든가, 이철, 유인태에게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든가,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느니 하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었다. 하재완과의 자금 수수관계,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지도부 구성과 학원조직책 담당 등 모두가 터무니없는 날조였다.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에 의해서 진술서나 각종 조서는 사전 시나리오대로 조작되었다. 여정남은 항소이유서에서 몸서리치는 고문 협박의 일면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조사 때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전기고문, 물고문, 심한 매질 등으로 몸이 극도로 피폐해져서 주사를 맞아가며 겨우 재판에 나왔다. 거기에다 법정 방청석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정보부원의 감시를 받으면서 재판을 받게 되어 공포와 위축감은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상군법회의라 한들 법이 있을 터인데 재판 진행이 법절차를 정면으로 무시한 채 위법하게 진행되었다. 조작사건이 아니라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억누르고 입을 막고, 재판절차를 무시하는 짓을 했을 리가 없다. 피고인측이 신청하는 증인은 모조리 기각하는가 하면, 재판장은 “긴급조치 1호에 따라 당 법정에서는 변호인들의 발언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위협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검찰측의 증인도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신문을 해버리고, 이에 대한 변호인의 이의 제기도 묵살했다. 군법회의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처사를 밥먹듯이 되풀이했다.오죽하면 이 사건이 나중에 대법원에 올라가서 어이없이 기각되는 와중에서도,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판결문에다 밝혔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 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절차상의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참으로 소신과 용기가 있는 법관다운 의견이었다.나는 이 사건 상고중인 1975년 3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내가 상고심을 맡은 여정남이 갇혀 있는 서울구치소 한지붕 밑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 원한의 1975년 4월9일 새벽,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0.75평짜리 감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 여정남군!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17/1108567205308551.jpg" alt=""/>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이 지난 95년 5월17일 15주년 기념 모임을 가졌다. 아랫줄 가운데가 김대중 전 대통령,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다.  대통령 된 사형수 - 김대중1980년 5월17일 밤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투쟁을 이끌어 오던 김대중이 계엄사 합동수사부 요원들에 의해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민주진영의 여러 재야인사들이 속속 검거되어 고행(苦行)의 장정(長征)길로 들어섰다.계엄사는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의 수사결과라는 것을 발표했고 남산 지하실에서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온갖 고문·협박 끝에 만들어 낸 시나리오에 따라 군법회의라는 ‘연출’을 시작했다. 전두환 등 소위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김대중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 나도 ‘조연급’으로 스카우트되어 함께 구금되고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네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내란음모도 엄청난 범죄지만 그 죄명만으로는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으니까 김대중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로 얽어놓았던 것이다.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에 항거하여 귀국을 거부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중 일본에서 한민통을 조직하고 그 의장 취임을 승낙하였다는 혐의였다. 이에 대하여 김씨는 한민통 결성 전에 일본에서 한국기관원들에게 납치되었으며 의장직 수락도 한 일이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았다.첫 공판이 열린 것은 그 해 8월14일이었다. 육군본부 법정 안은 살기마저 감돌았다. 김대중에 대한 공소장 낭독만도 오전 8시부터 시작하여 1시간27분이 걸렸다. 오후에 속개된 공판에서 나머지 23명의 공소사실 낭독은 5시간 만에 끝났다. 하루 종일 공소장 낭독만 한 셈이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범죄 혐의를 부인했다(한두 사람이 사실과 다른 묘한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판관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역습을 하기도 했다. 9월11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관은 김대중에 대하여 사형을 구형했다. 그 다음 날에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김대중의 최후진술은 9월13일에 열린 18차 공판에서 있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감동적인 발언이 계속됐다. 한 신문은 “마치 유언을 하듯 비장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어지는 김씨의 최후 진술은 법정을 완전히 압도하였다”고 썼다.“나는 그저께 구형을 받았을 때 의외로 차분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날은 평소보다 더 잘 잤습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재판부를 통해 나를 죽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국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주의가 살아날 것을 확신합니다. 이번에 다시 구속돼 성경을 읽고 더 한층 하느님께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합니다.”끝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 앉아 계신 피고인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약 두 시간에 걸친 유언 같은 최후진술이 끝나자 방청석의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민주주의 만세, 김대중 만세를 외쳤고, “오, 자유여…”로 시작된 ‘민권의 노래’를 불렀다. 사흘 뒤인 9월17일 아침 10시, 군법회의 재판장 문응식 소장의 입에서는 (우리가 걱정했던 대로) “피고인 김대중, 사형”이란 말이 떨어졌다.항소심(11월3일)에서 항소가 기각되고 나서 그때까지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던 일부 피고인들(주로 계엄법 위반)이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어 김대중을 비롯한 내란음모 피고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해가 바뀌어 1981년 1월23일, 대법원 또한 상고기각으로 그 위법투성이인 군법회의 판결을 ‘합격’으로 판정했다. 이제 형 집행만 남았다. 우리는 감옥 안에서 가슴 조이며 숨막히는 긴장에 휩싸였다. 그러던 우리에게 ‘감형’ 소식이 날아들었다. 죽음을 면한 김대중은 그 후 계속된 파란만장·우여곡절을 잘 극복하여 마침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0년 6월 역사적인 평양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해 겨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고문과 투옥으로 김대중 일당(?)을 말살하려 한 전두환·노태우는 각기 대통령까지 지내고 나서도 구속 피고인이 되어 내란 및 군사반란죄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이던 우리는 특별재심에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를 저지·반대한 행위”로 인정되어 무죄판결을 받았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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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1화 온몸으로 나선 성직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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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Thu, 10 Feb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10/1107962405308540.jpg" alt=""/>    ▲ 지난 90년 8월15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출정식 당시의 강희남 목사(오른쪽 한복 입은 이).  [범민련 통일운동] 강희남 목사1994년 7월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 온 세계에 전해졌다. 남한의 언론들은 이를 그야말로 대서특필하고 특집보도에 열을 올렸다. 더구나 열흘 뒤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되어 있는 그 시점에서 갑자기 부보(訃報)가 날아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에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범남준)에서는 애도 성명을 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일대 전환점이 될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이러한 비보를 접한 데 대해 놀라움과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범남준은 조문단을 구성하여 임진각을 향하여 떠나기로 했다. 이어서 조문단의 북행에 관련된 협조공문을 팩스로 통일부에 보냈으나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범남준 위원장인 강희남 목사(본명 강재우)는 출발을 결행하기로 하고, 그 달 16일 오전 범남준 사무실에서 “판문점을 통해서 입북코저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강 목사는 그날 정오 무렵 범남준 사무실 앞에서 택시를 타고(안희만 사무처장 동승) 판문점을 향하여 출발했다. 차가 구파발을 거쳐 고양시 삼송동을 지날 때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그러나 “북에 조문 간다. 길 비켜라”라고 쓴 널따란 종이를 펴들고 계속 달리다가 13시20분경 고양시 내유동 검문소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검찰은 과거의 범민련 활동과 김일성 사망 애도 성명을 문제 삼아 ‘이적단체 구성, 반국가단체 찬양’으로, 조문 방북 기도는 국가보안법상 탈출예비죄로 강 목사를 범남준 부의장 전창일씨와 함께 구속 기소하였다.첫 공판은 그 해 10월28일 오후 3시, 서울형사지법 423호 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에는 신창균, 조용술, 한상렬, 김병걸, 남정현 등 민주·통일운동부문의 인사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강 목사가 입정하자 법정 안은 방청석의 뜨거운 박수소리로 덮였다. 인정신문에 이어서 강 목사의 모두진술(冒頭陳述)이 시작되었다.“죄가 없다든가 안된다든가 하고 변명하는 입장은 아니다. 양심의 법 즉 자연법과 세상의 법이 대립되면, 세상의 법 버리고 하느님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맹자 말씀에 생(生)과 의(義)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고난당하는 민중을 생각할 때, 역사의 방관자로 살 수 없고, 죄 없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민중 위해 죽지 못하며, 외세 강압으로 그어진 38선, 분단 반세기의 조국, 그 통일 위해 죽지 못하면 감옥이라도 가야지…. 75세의 환자이지만 민족사에서 위선자와 방관자로 살아왔다면 감옥 안에서 푸른 옷 입고 죽어가는 것이 옳은 길 아니겠는가.”“이렇게 주목받는 통일운동, 왜 하느냐? 통일원 있지만 통일과 정반대의 일만 하고 있다. 대북 창구 일원화 운운하는데 (정부) 신임할 수 있으면 일원화 좋으나 통일원 하는 짓이 틀렸다. 그래서 통일 위한 민간운동단체가 필요하다.”이어서 그는 조문 방북의 당위성에 대해서 심경을 고백했다“내가 북에 가려고 한 것은, 김 주석이 안 죽었으면 7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이 북에 가서 반갑게 만나 만찬하고 민족의 장래 논의할 상대가 죽었는데, (안면) 싹 씻고 누구 하나 간다는 사람 없고 해서 내가 판문점 통해서 간다고 했다. 그렇지만 갈 수 없지 않느냐? 남한에서 누군가 가려고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YS가 죽으면 북에서 온다고 안했겠느냐? 내가 남한의 체면이라도 세우자고 한 일이었다. 갔다 오지 않았으면 그뿐 아닌가. 그 전에 범민련 한 것.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그래서 괜찮은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와서 그것을 문제 삼아 기소하다니, 이것은 권력의 횡포다.”오후 4시18분에 강 목사의 모두진술은 끝났다.12월2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 황교안 검사는 강 목사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했다.먼저 공동변호인인 이덕우, 임종인 두 변호사가 변론을 했고, 이어서 내가 변론을 했다. 나는 이적단체 구성, 이적표현물 제작, 반국가단체 찬양 등 혐의의 전제가 되는 반국가단체론 즉 북한이 반국가단체인가―라는 점에 대한 법리와 현실론을 자세히 언급한 다음, 김 주석 사망 조문행차에 관해서 언급했다. 우선 영업택시 타고 평양 간다는 것 자체가 불능범이라는 것, 국내 이전(移轉)의 자유가 있는데 임진각을 향해 가던 도중에 붙들린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반국가단체론을 두고 대법원 판례에 기속당한다고 숙명론처럼 말하지 말고 종래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시킬 만한 과감한 판결을 해주기 바란다. 이런 요지로 말했다.해가 바뀌어 1995년 1월6일, 재판부는 강 목사에게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2년 6월에 4년간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고인측은 굳이 항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승복 아닌 불신 때문이었다.강 목사는 1977년 11월에도 반공법, 긴급조치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1987년 7월에도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바 있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210/1107962405308541.jpg" alt=""/>    ▲ 김해성 목사(가운데 양복 입은 이)가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연수생제도 철폐 시위에 참가하던 모습. 사진제공=외국인노동자의 집  [외국인노동자‘대부] 김해성 목사1996년 6월3일, 경기도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 있는 주민교회 앞에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 진료상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곳에 찾아온 네팔인 로잔 구릉씨(34) 부부를 체포하여 차에 실었다. 경찰은 5백여 명의 무장병력을 투입하여 현장에서 연행을 저지하려던 노동자의 집 실무자와 주민들을 강제해산시키고, 그 노동자의 집 소장인 김해성 목사를 공무집행방해로 긴급 구속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김 목사를 접견하러 간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 양혜우씨까지도 구속해버렸다. 소위 ‘문민정부’를 표방한 YS정권 아래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인지 모두들 분개했다.나는 구속 직후인 7월9일 성동구치소에 가서 김 목사를 접견했다.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김 목사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차량이 골목을 차단하고 검문을 한 끝에 외국인 노동자 2명을 연행한다는 말을 듣고 주민교회 앞으로 쫓아갔다. 네팔인 노동자 부부가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부인이 소파수술을 받은 환자여서 노동자의 집과 치료비 감액협정을 맺은 병원에 가기 위해 도장을 받으러 온 참이었다.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마구 네팔인 부부를 끌어가는 것은 교회의 입장, 목사의 입장에서는 방관할 수가 없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교계 단체에서는 김 목사 등의 구속에 항의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실인즉, 국내에 들어와 취업중인 외국인 노동자의 근무환경과 인권은 매우 열악하여 진즉부터 사회문제가 되었고, 교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들의 인권 보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악용하여 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가 횡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교회는 그들의 어려움을 돕고 인권을 지켜주는 일을 새로운 선교 차원의 과제로 설정했다. 그 중에서도 성남주민교회(담임 이해학 목사) 안에 있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소장 김해성 목사)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의지하고 찾는 곳이었다. 김 목사는 성남의 산자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전국 외국인 노동자대책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주변에서나 언론에서는 그를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로 일컫기도 했다. 기독교계를 비롯한 각계의 석방요구에도 불구하고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그를 양혜우 사무국장과 함께 구속 기소하였다. 공소장에 의하면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네팔인 부부를 체포하여 차량에 태우자 양혜우씨 등이 프라이드 차량을 몰고와 연행차량 앞을 막고 진행할 수 없도록 했는가 하면, 김 목사 등은 출입관리사무소 차량 밑에 드러누워 출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그날 오후 2시15분부터 9시10분경까지 약 7시간 동안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이 사건은 실정법의 잣대만 들이댄다면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할 만도 했다. 그러나 김 목사를 비롯한 교회측은 사태의 원인과 본질문제를 중요하게 보았다. 외국인 노동자, 특히 그 중 불법체류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먼저 생각하면서 국적을 초월한 사랑의 정신으로 문제해결에 접근하고자 했다.합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 하더라도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린다. 김 목사가 그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나서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그는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다닐 때부터 성남 주민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빈민 문제와 노동자 문제를 파고들었다. 졸업 후 노동체험을 위해서 동원광학이란 기업에 취직했다가 1년도 못 가서 ‘위장취업’이 드러나 해고되었다. 그후 성남시 하대원동 공단 입구에 아주 작은 규모의 ‘산자교회’를 세우고 노동자들의 임금체불, 산업재해, 노조결성 등 문제를 돕기 시작했다.1992년경부터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찾아와서 애로사항을 털어놓고 해결방안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의 애로를 해결해주고자 뛰어다니다가 과로로 자신이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김 목사를 문병 왔던 목사, 변호사, 교수들이 뜻과 힘을 모아 1994년 4월에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문을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법원은 7월6일 양혜우 사무국장을 석방한 데 이어, 16일에 김 목사도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달 25일 징역 8월에 1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는 석방 후 “중국교포 노동자들의 집단 연행에 가슴 아프다”면서, 한국소비자연맹이 애완견보호법 제정을 위해 입법 청원을 서두르고 있다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애완견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오랜 노력의 결실로 2003년에는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입법화되어 18만명의 외국인이 불법체류의 ‘위법상태’에서 풀려나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은 이제 성남뿐 아니라 서울, 안산, 양주 등에도 센터를 두고 노동상담, 무료진료, 한국말 교육, 쉼터 제공 등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연간 3만~4만명의 외국인들이 이곳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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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0화 악용되는 선거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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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30 Jan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30/1107012005308530.jpg" alt=""/>    ▲ 1974년 11월2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김대중씨의 대통령선거법 위반사건 담당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맨 왼쪽이 김대중씨,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다.  선거법  위반사건김대중 씨1971년 대통령선거 때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는 부정선거에서 패하고 해외로 나가 있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 선포 소식을 듣는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철폐 등 박정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73년 8월8일 대낮 일본의 한 호텔에서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당한다. 그리고 닷새 후인 8월13일 밤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이 같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알려지자 국내외 여론은 놀라움과 충격을 드러내며 박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주목하고 일부에서는 사건의 성격을 ‘정적 살해기도’라고 규정했다. 일본정부는 자국 내 납치는 주권침해라고 주장하면서 김씨의 원상회복, 즉 출국의 자유를 요구했다.이때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김씨에게 대통령선거법 및 국회의원선거법위반 사건의 공판기일 소환장을 보낸다. 1974년 6월 초순의 일이었다. 납치당한 피해자가 오히려 재판을 받게 된 셈인데, 정부는 바로 이 재판을 이유로 김씨의 출국 불가를 합리화하려 했다.문제의 선거법위반 사건은 오래 묵혀둔 사건이었다. 1967년과 1971년, 그러니까 7년 전과 3년 전의 선거(대통령, 국회의원) 때 입건했던 것으로, 공소사실은 이러했다.①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윤보선 야당후보의 대변인으로서 민주공화당(박정희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여당)이 유권자의 가슴에 리본을 달고 집단적으로 투표소에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②같은 해 6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여당의 김병삼 후보가 “김구 선생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연설을 함으로써 역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③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등록하기도 전에 ‘미·소·중·일 4대국에 의한 한반도 안전보장’ 등 선거공약을 국민에 제시하여 사전선거운동을 했다. 또한 선거기간 중 “박 대통령은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 ④같은 해 대선 후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1백20만 표의 부정투표를 하고 있다”고 연설을 하여 역시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재판은 6월5일부터 시작하여 12일, 19일―이렇게 1주일마다 한 번씩 강행돼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이에 순응하면서 선거 때 자신의 발언은 모두 근거가 있으며, 사전선거운동에 해당되는 일을 한 적도 없다고 시종 자신의 ‘무죄’를 역설했다. 1971년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 대통령과 맞붙어 격전을 벌였다. 그는 독재정치 반대, 중앙정보부 해체, 향토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 남북한 대화·교류 등 과감한 정책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 정권은 중요 국가기관을 동원, 부정선거를 감행해 94만 표 차로 겨우 ‘승리’를 했던 것이다.이때 혼이 난 박정희 대통령은 그 후 온갖 수단을 다하여 김대중씨를 제거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김씨의 일본 납치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선거법위반 사건의 김씨 변호인으로는 박세경, 유택형, 이택돈, 한승헌 네 변호사가 나섰다. 나는 공판이 있는 날 동교동 자택에 가서 그날의 공판대책을 협의한 뒤 함께 법정으로 나가곤 했다. 8회 공판(6월19일)에서 검찰은 당시 여당 중진 등 1백71명의 증인을, 변호인측은 윤보선 정일형씨 등 야당인사 15명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재판부가 이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모두 1백86명의 증인이 채택되었다.김씨는 6월29일에 열린 제9회 공판에서 재판부의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재판부를 기피하겠다고 하여 법정을 긴장시켰다. 재판부 기피신청에 대하여 서울고등법원이 그 해 12월18일, 서울형사지법 합의8부 박아무개 부장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이 이유 있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법원은 사건을 합의6부(황석연 부장판사)에 재배당했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새 재판부는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진 지 3개월이 다 되도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판을 열지 않았으므로 우리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공판기일을 빨리 지정해서 재판을 계속하자고 신청을 했다.그리고 2주일 만인 (1975년) 3월21일 나는 갑자기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김씨의 선거법 위반 사건 변호를 할 수 없게 되었다.중단됐던 재판은 내가 구속된 지 나흘 뒤인 3월25일 아홉 달 만에 다시 열렸다. 17회 공판이었다. 이날 김씨는 대통령선거제도가 바뀌어 공소장에 기재된 적용법조가 모두 폐지되었음을 이유로 공소취소를 요구하여 검찰과 논쟁을 했다. 김씨는 이 공소장의 유일한 목적은 정치보복이라고 맞섰다. 변호인단은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법관 기피신청을 냈으나 모두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 해 9월12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이창우 검사는 김씨에게 금고 5년을 구형했다. 1967년 기소된 후 전후 27회 공판까지 가는 대장정이었다. 선고공판은 결심 후 3개월 만인 그 해 12월13일에 열려 금고 1년이란 판결이 나왔다. 김씨는 이에 불복,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이 사건 재판을 하지 않은 채 13년을 미제사건으로 방치하다가 1988년 2월5일 “검사의 공소제기(1971. 7. 26.) 후 확정판결 없이 15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냈다.그때 김씨는 제1야당인 평민당의 총재였는데, 이 사건은 ①불공정 재판을 이유로 한 법관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져 재판부가 바뀌었고, ②기소 후 1심만도 27회 공판에 8년이나 걸렸고 ③항소 후 13년을 방치하다가 기소 후 15년을 그냥 넘겨 면소판결이 나오는 등 희귀한 기록을 남겼다. 그 이유나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는 점을 족히 알고도 남을 만한 현상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30/1107012005308531.jpg" alt=""/>    ▲ 1995년 12월 프레스센터에서 4·19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전대열씨. 그는 4·19 직전 전북대생들의 4·4 시위를 주도했다. 사진제공=전대열씨  선거 무효소송 전대열 씨1985년 2월12일에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 전대열 후보는 서울 제6선거구(도봉지구)에서 출마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역구 선관위에서 ‘국회의원 후보등록 무효’ 통고가 날아왔다. 그것도 투표일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그랬으니, 어이가 없었다. 선관위의 주장인즉, 전씨는 국회의원선거법 제12조 2항에 의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후 형 실효선고를 받은 사실이 없어서 피선거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씨는 1977년에는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복역하였고, 1980년 계엄포고령위반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특별사면으로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그 후 1984년 8월14일 복권령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그런데 선관위측은 위 복권은 1980년의 계엄포고령위반 부분이므로 1977년의 긴급조치위반 부분의 복권은 안된 것으로 봤다. 하지만 만일 선관위의 견해처럼 사건별로 복권조치가 따라야 한다면, 1984년 8월14일자 복권조치는 아무런 의미도 실익도 없게 된다. 더구나 전씨는 후보등록서류를 제대로 갖추어 적법하게 후보등록을 하였으니,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후보자격을 문제 삼은 것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전씨는 선거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인 자기에 대한 탄압이라고 보고 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선거 무효사건의 단심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은 ‘원고 청구기각’으로 나왔다. 원고인 전씨의 입장은 분명했다. 즉 “원고가 1984년 8월14일자로 복권이 된 이상 비록 원고에게 위의 계엄포고령위반으로 인한 수형 사실 이외에 (전술한) 긴급조치위반 등 죄로 형의 선고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복권기준일 이전에 있었던 수형사실로서 원고의 피선거권에는 아무런 장애사유가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 선거위원회가 이를 이유로 원고의 후보자 등록을 무효로 처리한 것은 위법이며, 이와 같은 위법은 동 선거구의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므로 동 선거구의 선거는 무효”라고 선거무효 사유를 밝혔던 것이다.그러나 대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권은 어디까지나 계엄포고령위반 부분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지 그전의 긴급조치위반 부분에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원고에게는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의 피선거권이 없다는 요지였다.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고 탄압을 받는 가운데 피고인의 몸으로 법정에 서서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씨처럼 두 번 이상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한 번의 사면·복권으로 석방되거나 자격을 회복하여 선거에도 나가고 공직에 취임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맨 나중의 수형사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 그 전의 수형사실도 당연히 복권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그러므로 전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복권의 법리에도 맞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전씨는 1980년 봄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많은 재야인사들이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나와 같은 사동(舍棟)에 갇혀서 함께 고생을 하였다. 전씨는 오랫동안 줄기차게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정치정화법의 굴레가 씌워졌던 데다 유죄판결에 이은 실형의 전과 때문에 공직선거의 피선거권이 박탈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 서울 도봉구에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을 감당할 만한 자금이 없었지만 고대생을 비롯한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나와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투표일 바로 전날, 지역 선관위에서 전씨의 ‘후보등록 무효’ 통보가 우편으로 날아왔던 것이다. 그 날 오후 늦게 열린 중앙선관위에서도 역시 긴급조치위반 부분의 복권이 안되어 후보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그의 딱한 호소를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다는 심경에서 몇 사람의 변호사가 선거무효소송을 돕기로 뜻을 모으고 그 중 이원형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이 되어 수고해주기로 했다. 대법원은 전원재판부로 넘겨 심리했으나 시일을 끌기만 했고 전씨는 이를 참지 못하여 탄원서를 냈고 마침내는 대법원장을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그는 4·19 직전 전국 최초의 ‘전북대 4·4데모’를 주도한 것을 비롯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민주통일당 대변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를 역임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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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9화 독재에 맞서 싸운 여성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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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3 Jan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23/1106407205308520.jpg" alt=""/>    ▲ 지난 2003년 3월24일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 중단 한국군 파병 반대 기자회견에 나온 이미경 의원(오른쪽 두 번째). 과거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던 그는 여성 사회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오다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유신반대 - 이미경 간사1972년 12월, 박정희정권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절차를 무시한 채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의 레일을 깔았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의 저항은 거세어져갔고, 유신헌법 반대·개헌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박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 1호라는 위헌적 명령을 가지고 반유신·개헌운동을 처벌했다.첫 번째로 장준하·백기완 두 분에 이어 기독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 ‘개헌서명촉진시국선언기도회’를 열었다가 15년 또는 10년 징역을 선고받은 사실 등은 지난 호의 ‘반유신 싸움 나선 성직자들’에서 살핀 바와 같다.이처럼 전례 없는 젊은 목사 전도사들의 수난은 기독교계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구속된 성직자들의 고난을 널리 알리기 위한 유인물을 작성 배포했다가 역시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 젊은 크리스찬들이 있었다. 김동완(당시 32·약수형제교회 전도사), 권호경(32·서울제일교회 목사), 이미경(23·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회 간사), 차옥숭(2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박상희(29·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4년), 김매자(22·이화여대 의학과 3년), 김용상(24·무직), 박주환(25·한국신학대학 신학과 4년) 등 8명이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교단 또는 그 연합기관에서 일하는 젊은이거나 신학대학생들로서, 그 중 절반인 4명이 여성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긴급조치사건의 변호인으로 나서는 변호사가 매우 드문 때여서 내가 김동완, 권호경, 이미경, 김용상 4명을 맡고, 이건호 변호사가 차옥숭을, 이세중 변호사가 박상희, 김매자, 박주환 3명을 맡아서 변호를 했다.맨 먼저 김동완, 권호경 두 사람이 일을 꾸몄다. 그들은 김진홍 전도사 등 6명이 구속된 후인 어느 날,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는 한 다방에서 만난다. 그리고 김진홍 등이 시국기도회를 열게 된 경위와 그로 말미암아 경찰에 연행·구속된 사실을 전국 교회에 널리 알려서 여론은 환기시키기로 합의한다. 그 방법으로 ‘개헌 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 배포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뜻은 이미경→차옥숭→김매자, 박상희→김용상, 박주환 이렇게 릴레이식으로 전달되어 전원의 호응을 얻었다. 각자의 할 일도 분담했다. 김동완은 총괄, 권호경은 비용 조달, 이미경·차옥숭은 경위서 문안 작성, 나머지 4인은 경위서를 등사·발송하는 임무를 각기 맡았다.1월21일 밤 대현동에 있는 차옥숭의 하숙방에서 이미경, 차옥숭은 문안 작성에 들어갔다.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의 경위’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첫머리에는 “이제 이 땅의 국민들은 15년의 징역살이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일체 개헌에 대하여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대통령긴급조치1호에 의하면 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거나 개정청원만 해도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예언자적 양심과 순교자적 용기를 가지고 개헌논의는 민의에 따라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분연히 일어난 젊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내의 보도기관을 통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진상이 왜곡되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그 내용을 알리고자 합니다”라고 경위서를 쓰게 된 취지를 적었다.그리고 김진홍 전도사 등 6명이 긴급조치 철회, 개헌논의 허용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연행돼 구속되었다는 요지로 초안을 작성했다. 이어서 박상희에게 그 경위서의 타자 발송을 부탁하였고, 박상희는 등사원지에 문안대로 타자를 하고 김용상, 김매자는 이를 등사하여 경위서를 봉투에 넣어 서울, 전주, 대구, 부산 등 수신인 거주 현지에 가서 분산 투함하였다.‘경위서’ 발송 후 이미경을 필두로 8명 전원이 구속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젊은 성직자들이 개헌서명운동을 하다가 잡혀가서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실을 서신으로 알린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긴급조치 제1호의 4항에는 유신헌법을 반대, 개정청원 등 행위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까지도 금한다고 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면 최고 15년 징역까지 과할 수 있게 규정해놓았다.법정에서 그들은 조금도 약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박상희의 회고에 의하면, “방청석에 앉아 있을 가족들에게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사재판 법정에서는 기상천외의 문답이 돌출하기도 했다. 단상의 심판관 한 사람이 김동완에게 “이미경이 당신 애인 아니냐”고 물었다. 함께 그런 위험한 일을 한 것을 보면 혹시 남녀애정관계로 얽혀진 것 아니냐는 투였다. 질문을 받은 김동완은 그 순간 천하의 명답을 남겼다. 가로되 “아닙니다. 그러나 저 혼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살기마저 감돌던 법정엔 때아닌 폭소가 터졌다.김동완, 권호경에게는 징역 15년, 박상희는 징역 10년(항소심에서는 징역7년)이 떨어졌으니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광기 그 자체였다. 이미경, 차옥숭, 김매자, 김용상, 박주환은 각각 징역 3년에 처한다고 해놓고서 그중 세 여성은 “미성년을 갓 벗어난 미혼여성들로서 사리판별능력이 미약하다고 인정되는 등 정상을 참작하여” 5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고 했다. ‘사리판별능력 미약’ 운운은 심판관에게 돌려줄 만한 표현이었다. 네 여성 중 이미경씨는 그 후에도 여성·사회·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가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활동중이고, 박상희씨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면서 여성·환경·인권운동 특히 성폭력 예방·치료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23/1106407205308521.jpg" alt=""/>    ▲ 성고문사건 발생 직후인 1986년 7월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고문·성고문 용공조작폭로대회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성고문 사건 - 권인숙 씨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년 제적생인 권인숙씨는 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 자기 이름을 숨기고 가명으로 중소기업체에 위장취업을 했다. 70·80년대의 크고 작은 기업·사업장에는 대학생, 청년들이 자기 신분을 감추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일정한 몫을 해내곤 했다. 이것을 정부 당국은 ‘위장취업’이라고 부르고, 노동자의 의식화·좌경운동이라고 해서 적발·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권씨도 그런 혐의로 1986년 6월4일 경기도 부천경찰서에 연행된 후 공문서변조 혐의로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달 14일 권씨와 함께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한 여인을 통해 권씨가 경찰관으로부터 성적모욕(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졌다. 7월2일 인천지역 구속자가족 30여 명이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부천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다음 날 권씨도 담당 경찰관인 문귀동 경장을 검찰에 고소하자(이날 인천지검은 권씨를 공문서위조 및 동 행사죄로 기소함) 하루 만인 4일에 문귀동은 권씨를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맞고소했다. 그 다음날(5일)엔 조영래 변호사 등 권씨의 변호인단 9명이 문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6명을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이렇게 해서 세칭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각계에서 항의 규탄이 잇따랐다.권씨 본인과 변호인단의 고소·고발에 의하면, 문 경장은 권씨가 5·3인천사태 수배자 중 아는 사람을 대지 않는다고 온갖 협박성 언사를 쓴 다음, 권씨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여 권씨가 겉옷(재킷)과 남방만 벗고 벌벌 떨고 있자, 권씨의 바지 지퍼를 밑으로 내리고 브래지어를 올리는가 하면, 바지까지 벗겼다(6월6일 새벽 4시 반부터 6시 반까지 사이의 일이었다). 또한 다음 날(7일) 밤 8시경 문귀동은 권씨가 수배자 신원을 허위로 댔다는 이유로 형사 2명을 옆에 세워놓고 뒷수갑을 채운 뒤 끝내는 속옷까지 벗기고 권씨의 몸을 만지며,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추행까지 했다는 것이다.이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한 인천지검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를 통하여 문 경장이 권씨에게 폭언·폭행을 했으나 성적 모욕을 가한 사실은 없다고 했다. 검찰은 문 경장이 6일 밤과 7일 밤 권씨에게 인천사태 수배자의 행방을 대라고 요구했으나 불응하자 권씨의 재킷을 벗게 한 후 T셔츠를 입은 가슴부위를 서너 차례 쥐어박아 폭행을 하였다면서 이것은 추행이라기보다 가혹행위라고 주장했다.검찰은 한술 더 떠서, “권씨의 성모욕 주장은 이들 급진세력 등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 혁명을 위해서는 성(性)까지도 도구로 사용하는 행태”라고 역습까지 시도하였다.더욱 가관인 것은 검찰이 8월21일 문 경장을 기소유예처분하면서 내세운 이유였다. 즉 문 경장의 행위는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저지른 우발적 과오로서 이로 인해 이미 파면처분을 받았으며,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해왔고,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으므로 그 정상을 참작하였다는 것이다. 경찰의 성고문 은폐에 검찰이 앞장을 선 것이었다.검찰 발표에 분개한 사회 각계에는 검찰에 대한 비난과 문 경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재야법조계에서는 1백66명의 변호사들이 대리인단을 구성하여 인천지검의 문 경장에 대한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하고 형사재판에 회부해 달라는 제정신청을 제기했다(나는 권씨가 기소된 사건의 변호인이 아니라 제정신청대리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0월30일 검찰의 원 결정을 번복할 만한 이유가 없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문 경장이 가혹행위를 한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서 재발하지 않도록 응징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도 문 경장이 “비등한 여론 등으로 형벌에 못지 않은 고통을 받았다”는 이유를 대며 기소유예처분이 정당하다고 했다. 어이없는 구실이었다. 대리인단은 “문씨는 서울고법이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구속 기소되야 마땅하다”고 반론하면서 불복, 대법원에 재항고했다.대법원은 재항고 접수로부터 1년 5개월 만에, 성고문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1년 9개월이나 지난 후인 1988년 2월29일 재정신청 재항고가 이유있다고 하여 사건을 서울고법에 되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은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문귀동을 공판에 회부하는 결정을 내렸다.그 사이에 권씨는 13개월 동안 복역하고 석방된 후 1990년 1월에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 4천만원의 배상금을 받아 서울 가리봉동에 ‘노동인권회관’을 열고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교육을 계속했다. 또한 결혼 후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여성학 교수로 있다.한편 문귀동은 특별검사(변호사 중에서 선임)가 공소유지를 한 형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파면당했기 때문에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5년 동안 징역을 살고 만기 석방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은둔생활로 들어갔다고 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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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8화 ‘반유신’ 싸움 나선 성직자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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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6 Jan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16/1105802405308510.jpg" alt=""/>    ▲ 긴급조치 1호 사건으로 군사법정에 선 성직자들. 오른쪽부터 김진홍, 이해학, 이규상, 인명진씨.  이해학 - 주민교회 전도사5·16쿠데타로 불법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는 3선 개헌까지 감행하면서 장기집권을 하다가 마침내는 소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헌정을 파괴한다. 1972년 10월의 일이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의 저항이 거세어지던 끝에 73년 말경에는 ‘유신헌법철폐 1백만인 서명운동’이 전개된다. 이에 호응·참여하는 전국적인 열기가 격렬한 정권 퇴진운동으로 번지자 박 정권은 난데없이 ‘대통령긴급조치’라는 것을 선포한다. 유신헌법 반대·개정운동을 15년 징역으로 다스린다는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법률로도 못할 짓을 대통령 명령으로 막겠다는 이 조치의 처벌대상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였다.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개헌서명운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장준하, 백기완 두 분이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의 제1호로 구속되었다. 그들은 전해 성탄절 전날 함석헌, 천관우, 김동길, 계훈제 등 각계 민주인사들과 함께 서울 YMCA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1백만인서명운동에 들어갔던 것이다.그 다음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피고인은 김진홍(당시 32세·활빈교회 전도사), 이해학(29·성남 주민교회 전도사), 이규상(34·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전도사), 인명진(29·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 백윤수(29·창현교회 전도사), 김경락(36·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중앙교회 목사) 등 기독교(개신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었다.이들에 대한 공소장 첫머리에는 “…북한 공산주의집단의 남침 야욕에 대처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국력의 배양과 국민의 총화단결이 요청되고 있어 1972. 10. 27.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유신헌법을 국민총의로 탄생시켜 우리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안정과 번영 및 평화통일의 기틀을 굳게 다져가고 있는 이때에, 이를 망각하여 유신체제를 뒤엎고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몰지각한 일부 인사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1974. 1. 8. …대통령긴급조치가 선포되었으므로 동 조치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됨에도 불구하고 …”라고 장황한 정치적 넋두리를 늘어놓음으로써 독재정권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피고인들은 위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독재적인 조치라고 그릇 판단한 나머지 동 조치에 항거할 것을 기도하고 있던 차 …”라는 대목에선 ‘그릇’만 빼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만했다.이들의 긴급조치 위반행위를 주도한 사람은 김진홍(현 두레교회 목사)·이해학(현 성남주민교회 목사) 두 사람으로 공소장에 지목되어 있다. 위 두 사람은 긴급조치가 나온 지 이틀 뒤인 1974년 1월10일, 긴급조치 철회와 개헌청원서명운동 허용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한다. 이어서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순차로 만나 시국기도회 개최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받았다. 이들은 김재준 목사를 시국기도회장으로 추대하고 범교회적으로 고문을 위촉한다. 그러나 명망있는 목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국기도회 개최 장소를 물색하고자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다.이들은 여러모로 궁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1월17일 오전 10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 위 6인이 예고 없이 들어가 총무인 김관석 목사를 동석시킨 가운데 김경락 전도사 사회로 ‘1·8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열었다.이해학 전도사는 “대통령의 1·8긴급조치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는 등 3개 항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참가자 모두가 개헌청원 서명록에 서명을 했다. 이어서 그 건물 내에 있는 기독교의 여러 기관·단체를 찾아가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배포하고 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헌법을 반대, 헌법 개정을 청원, 이를 권유하고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한 것”으로 단죄되는 판국이었다.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조항까지 포함돼 있었으니, 독재정권의 입법하수인들이 보인 치밀한 충성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김진홍과 이해학 두 사람은 중앙정보부 조사에서 서로 자기가 주동자라고 우겼다. 이에 조사관들이 당혹스러워하다가 (달필이라서) 플래카드와 선언문의 글씨를 쓴 김진홍을 주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비상보통군법회의는 서울 삼각지의 국방부 청사 뒤에 있는 퀀셋법정에서 열렸다. 단상에는 재판장 육군중장 박희동, 심판관으로 육군소장 신현수, 판사 박천식, 검사 김태원, 법무사 육군 중령 김영범 등 5인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단하의 피고인들은 오히려 당당한 목소리로 유신통치와 긴급조치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법정 분위기를 지배했다.심판관석의 군인(장성)이 피고인들에게 질문 아닌 시비를 걸었다. “이 비상사태에 목사·전도사들이 전도는 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단하의 성직자들은 즉각 답변 아닌 역습을 했다.“이 비상사태하에서 당신들 군인이야말로 국방은 하지 않고 왜 여기 와서 재판을 한다고 앉아 있는가.”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통치와 긴급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찬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당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변론을 하기 위하여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펼쳐놓고 소나기식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질문이나 변론에 써먹을 내용이나 구절을 메모해 가지고 법정에 나가곤 했다.그해 2월7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인명진, 박윤수(각 징역 10년)를 제외한 피고인 4명에게 각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이 떨어졌고 대법원까지 가서 그대로 확정되었다. 나는 긴급조치사건을 비롯하여 제법 많은 시국사건의 변호를 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양심과 정의감, 그리고 용기의 원천이 그들의 독실한 신앙에서 비롯됨을 알고, (변호인이 피고인들로부터 감염되어) 마침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16/1105802405308511.jpg" alt=""/>    ▲ 1974년 4월3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전경들이 서울대 의대로 들어서고 있다.   [김천길 사진집 서울발 외신종합]  이직형 - 기독학생연맹 총무1974년 4월3일 밤에 발표된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의 관련자를 처벌대상으로 하여 급조된 것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는 결석, 시험거부, 집단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 과할 수 있다는 기막힌 내용이었다.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사건 수사상황’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어마어마했다. 2백40여 명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 그러면서 학생 주모자들은 이른바 노동자 농민 정부를 세울 목적으로 과도적 통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까지 계획했다고 말했다.5월27일 일본인 2명을 포함해 민청학련 관련자 55명이 1차로 기소된 것을 비롯하여 모두 1백8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6월15일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끌려 나온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황인성, 나병식, 윤한봉, 안재웅, 나상기, 서경석 등과 함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인 이직형씨의 얼굴도 보였다.공소장에 따르면 이 총무는 “평소부터 유신헌법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며, 정부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국민의 의사를 1·8긴급조치라는 강제수단으로 억압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는 등 부당한 처사를 감행한다고 단정하여 이에 불만을 표시하여 오던 중…”이었다고 한다. 공소장 중에서 이 대목만은 매우 ‘정확’했다.공소사실의 첫째는 “유신헌법을 반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 라병식 등의 폭력혁명계획을 격려했다”는 것. 라병식씨는 서울대생 이철, 유인태 등과 폭력혁명의 수단으로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교회 계통과의 연계책임을 담당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다.이 총무는 라씨로부터 자금 지원 요청을 받고 정상복을 통하여 5만원을 줌으로써 폭력혁명계획을 격려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유신헌법 반대는 맞지만 ‘정부 전복’이나 ‘폭력혁명’은 말조차 나온 적이 없었다. 앞서의 5만원은 무슨 혁명 거사자금이 아니라 일상적 비용이었던 것이다.이상의 혐의는 대통령긴급조치 1호, 같은 긴급조치 4호 위반에 형법상의 내란예비음모라는 엄청난 죄명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다 뇌물죄까지 얹혀 있었으니, 그 사연은 이러했다.이 총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첫날 저녁에 임아무개라는 담당 교도관이 주는 종이와 볼펜을 가지고 “아내에게 학생들이 집에 온 사실이 없다고 알려주라. 메모 전달인에게 돈 1만원을 주라”는 편지(속칭 비둘기)를 조아무개라는 KSCF간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조아무개로 하여금 돈 1만원을 교도관에게 뇌물로 주게 하였다는 것. 구치소에서는 흔히 “비둘기를 날린다”고 해서 교도관이 수감자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쪽지(편지)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는 일이 더러 있었다.공소사실 세 번째는 민청학련 구성원인 라병식과 만난 사실 등을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하였다는 ‘불고지죄’였다. 이건 법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 총무를 비롯한 거의 모든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하여 허위자백을 했다고 호소하였는가 하면, 수명(受命) 법무사가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참여를 배제한 채 증인 신문을 하였고, 그밖에 유죄로 볼 만한 적법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군법회의는 1, 2심을 막론하고 유죄판결이었다. 내란음모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도 물론 없었다.나는 변호인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상고이유서를 썼다. 대법원이라고 해서 별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법정에 선 청년·학생들이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 단상의 심판관들과 그들 상부의 군부 집권자들이 범죄인임을 밝혀두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월13일, 용산 삼각지에 있는 군법회의 막사에서는 저들의 각본대로 1심 판결이 나왔다.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사형과 무기징역을 면한 18명의 형기 합산연수가 3백40년이나 되었다. 구형량과 똑같은 선고형이 32명의 피고인 중에서 29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처럼 구형량에서 한 푼도 깎아주지 않는 판결에 ‘정찰제 판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이직형 총무(훗날 장로가 됨)는 서빙고의 보안사에서 군홧발로 짓이김을 당하고 의식을 잃기도 하였으며, C검사한테 조사를 받다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얼굴에 주먹세례를 받기도 하였다.이 총무에게 1심에서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항소심에서는 피고인 전원이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다가 퇴장 당하기도 했고, 단상의 심판관들에 대해서 단하의 피고인들이 역습 공세를 취하자 ‘발언 제지’, ‘퇴장명령’ 등으로 법정 내에 소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심판부는 피고인을 전원 퇴장시킨 뒤 나보고 변론을 하라고 하기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나는 피고인들을 변호하러 여기 왔지, 빈 의자를 변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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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7화 교수들의 국가보안법 수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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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9 Jan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09/1105197605308500.jpg" alt=""/>    ▲ 반유신·반독재·반외세 언론을 위해 힘쓴 이영희 교수는 자신의 저작물과 방북취재 추진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사진제공=한승헌 변호사  이영희 교수‘이영희 교수’ 하면 그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가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 유신통치가 대통령긴급조치 발동으로 극에 달하던 1974년 6월에 나온 이 책은 두고두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청년·학생·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진 ‘고전’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이 교수는 베트남전쟁, 중국문제, 한일·한미관계, 한국언론의 현실문제 등에 관해서 냉전·독재논리에 의한 왜곡을 걷어내어 우리 시대의 지배적 통념의 오류를 바로잡아주었다.그는 또 2년 후인 1976년 9월에 를 세상에 내놓았다가 “중공의 경제활동을 찬양하는 등 중공을 이롭게 하였다”는 이유로 판금(販禁)당했고, 다음해인 1977년 8월에 낸 은 “반국가 단체인 북한공산집단 및 국외 공산계열인 중공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돼 반공법사건의 피고인이 되기도 하였다(반공법은 81년 국가보안법으로 흡수).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을 복역했다.1977년 연말에 구속·기소된 그 사건을 나는 변호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75년에 국보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묶여들어간 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호인석 아닌 방청석에서 그 재판을 지켜봐야 했다.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국제적으로는 냉전질서가 해체되고 신 데탕트시대로 접어들었으며 국내적으로는 1987년의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열기와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이른바 7·7선언을 통하여 남북대결을 지양하고 상호 교류·왕래를 함으로써 통일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을 공언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교수는 자신이 논설위원으로 있는 한겨레신문사측과 방북 취재를 협의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뜻밖에도 ‘국보법 위반’이란 화(禍)를 불러들였다.1988년 8월 어느날, 이 교수는  문학진 기자로부터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취재할 수 있도록 일본에 아는 사람을 통하여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일본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에게 소개장을 써주었으나 결과는 여의치가 않았다.한겨레신문사는 다음해(1989년) 1월에 다시 방북취재계획을 세운다. 창간 1주년 기념 특집을 위한 취재계획의 일환으로 북한에 가서 북의 고위 당국자를 인터뷰하는 등의 구상이었다.이 교수는 정태기 이사와 장윤환 편집위원장의 부탁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이와나미(岩波)서점 편집장 야스에 료오스케(安江良介)를 만난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 만날 수 있다면 이 교수 자신이 기자단을 이끌고 방북하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야스에씨의 요청에 따라 방북 취재를 위한 입북 의사를 밝히고 그 주선을 의뢰하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 야스에씨에게 전달토록 한다. 그 후 서울에 온 야스에씨측의 인사와 만나 방북시기, 체류기간, 취재단의 구성을 알려주는 한편, 캐나다를 통한 단독 입북 의사도 있음을 전해달라고 했다.이것이 공소사실의 전부(요약)다. 그렇다면 방북취재를 구상·추진하는 단계에서 문제를 삼았으니 이것이 무슨 범죄가 된다는 말인가. 검찰측의 ‘해답’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할 것을 예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검사들의 ‘명석함’과 ‘지능도’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의 방북 추진은 그 자체로서는 법적으로 사건화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노태우 7·7선언 이후 정부는 대북 비난방송을 중단하였고, 이산가족 서신 교환, 남북 고향방문단의 연내 교류, 남북 대학생 조국순례대행진 등 남북간의 해빙 방침이 정부 각부 장관의 입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신문·잡지에 북한이 대대적으로 소개되는가 하면, 북한 간행물의 원전이 남한에서 버젓이 출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엄청나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겨레신문사가 방북취재계획을 세우는 일쯤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그런데도 검찰은 이 문제를 왜 법정까지 끌고 갔을까. 이 교수에 대한 조사에서도 방북취재 계획 자체보다는 이 교수의 유신반대 논조에 대한 추궁이 많았다는 데서 어떤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와 , 가 평양을 방문하여 취재한 바 있건만 누구도 입건조차 한 일이 없는데 유독 만 문제 삼아 이 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반유신·반독재·반외세 언론을 침묵시키고자 한 보복이었다. 이 교수는 자신의 행위가 실정법에 위반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야스에씨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도 어디에다 깊이 감추어두지 않고 서재에다 두고 다녔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수사담당자는 방북취재계획과는 무관한 말을 많이 하더라는 것이다. 즉 ‘정부에 협조하는 논문도 좀 써라. 아니면 정부 입장도 잘 생각할 용의가 있다고라도 해라’고 하면서 “이제 그만 좀 해라”는 암시를 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었다.변호인들은 “이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군부독재와 천민자본주의로 얼룩진 이 사회에 양심의 발언을 통해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민중을 각성시킴으로써 독재정권과 독재재벌의 위협이 되어온 피고인에 대한 탄압에 다름 아니다”라고 변론했다. 그러나 판결은 항용 그러하듯이 유죄였다(징역 1년6월에 2년간 집행유예). 변호인단의 면면을 보면 당시 정치범이나 양심수들에 대한 변호에 심혈을 기울이던 변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김창국, 조영래, 박인제, 박원순, 천정배, 이석태, 김형태, 그리고 한승헌이 그들이었다.굳이 변호인들의 이름을 열거한 까닭인즉, 이 교수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피고인”의 반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징표가 변호인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09/1105197605308501.jpg" alt=""/>    ▲ 박창희 교수  박창희 교수2004년 12월27일 오전,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고문피해자 기자회견’이 국회에서 열려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들의 공개적 증언이 있었다. 거기 나온 여덟 사람 중에 박창희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역사학)의 얼굴도 보였다.그분은 한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왔을 뿐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해온 실천적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민학교’ 이름 고치기 운동은 독보적이었다. 일제 강점하에서 쓰던 ‘국민학교’란 명칭을 반세기 동안이나 맹목적으로 답습·사용하다가 ‘초등학교’로 바꾼 것은 박 전 교수의 선각적인 외침의 결실이었다. 박 전 교수는 일제 잔재 청산 문제, 농촌 문제, 독도사랑운동, 마쓰시로 일본 대본영(大本營) 문제, 강제징용 노무자 문제, 한일농촌교류운동, 농촌잘살기운동(산수유 발효주 개발 등), 환경운동 등 정열적인 활동을 다양하게 병행해왔다.운동가인 그가 1995년 4월26일 안기부에 의해 구속되었고 ‘박창희 교수 간첩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발표가 나왔다. 거기 적힌 ‘사건의 개요’인즉 이러했다. 박 교수가 89년 8월 일본에서 서태수라는 재일 북한대남공작지도원을 만나 통일운동에 동참하자는 요구를 받고 응락한 다음, 90년 8월 그의 주선으로 4일간 공작아지트에 수용되어 주체사상, 북한 우월성 등에 대한 교양을 받고 포섭되었다. 95년 2월까지 일본과 중국을 30여 회 왕래하면서 서태수와 북한 공작지도부 부부장 등을 접선하고, 국내 정계 고위인사들을 접촉해 활동기반을 구축하면서 각계 동향을 수집, 보고를 하는 등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특히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 서태수 입회하에 노동당 입당식을 거행하여 조선노동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활동비 명목으로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는 것이었다.이러한 ‘수사결과’가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변호인들이 박 교수  접견에서 알게 된 사실과 공판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당국이 발표한 ‘수사결과’의 대부분은 ‘고문 결과’였다. 오죽하면 그가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10년 전의 처절한 아픔을 다시 새김질하며 용공조작과 고문을 폭로하는 자리에 70대 노인의 몸으로 나왔겠는가.변호인들이 검찰 수사단계에서 박 교수를 접견했을 때, 그는 안기부 조사 당시 7~8명의 수사요원들에 둘러싸인 공포분위기 속에서 폭행당한 사실과 검찰에 송치되던 날, 조선노동당 ‘입당’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가 검사로부터 ‘이놈 저놈’ 등의 모욕을 당하고 온갖 폭언과 심지어 발길질까지 당했다는 호소를 하였다.안기부에서 고문·공포에 못 이겨 허위자백한 부분을 검찰에서 사실대로 뒤집어놓으려고 한 박 교수의 안간힘은 좌절과 체념의 벽에 막히고 말았다. 소위 공안사건에 관한 한 검찰의 한계가 이미 알려진 그대로였던 것이다.공판과정에 박 교수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여 공소사실의 허구를 주장하고 나섰다. 우선 서태수는 반 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정할 증거도 없었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조선사연구회 등 학회의 간사 일을 맡아보는 한편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해온 학자였으며, 박 교수가 그런 학문연구의 인연으로 서태수와 교분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친족이 남북한 두 지역에 다 살고 있기 때문에 민단이나 조총련 어느 쪽에도 등록을 하지 않고 남북 어느 쪽도 방문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다음으로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3박4일간 머물며 사상교육을 받았다는 점도 허구임이 밝혀졌다. 박 교수는 그 기간에 제자인 김순영씨의 집에서 묵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참으로 허황한 대목은, 사상교육을 위해서 젊은 남자 2명이 호텔 방에 비디오를 설치했다는 검찰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호텔은 그전부터 전 객실에 재생전용 비디오 테크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것만으로도 검사의 주장은 물론 박 교수의 ‘자백’조차도 허위임이 입증되었다. ‘국가기밀 수집 탐지’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심지어 박 교수가 서씨에게 신장약으로 산수유를 보내주고, “공짜 약은 약효가 없다”면서 상징적인 약값으로 받은 1만엔도 편의제공·금품수수로 기소되었다.95년 10월20일 선고공판에서 박 전 교수는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공소사실 중 편의제공·국가기밀수집, 금품수수 혐의 등은 무죄 판결이 났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큰 틀인 박 전 교수와 서씨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박 전 교수가 선배 사학자를 통해 6·25 때 헤어져 북한에 살아 있다는 친형의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고, 같은 분야의 연구자로서의 교분을 쌓아나간 과정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그러나 한번 내린 1심의 유죄판결은 상급법원에서도 달라지지 않은 채 확정되고 말았다(다만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6월).]]></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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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6화 사학 재단과 맞선 교수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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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2 Jan 2005 00:20:05]]></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5/0102/1104592805308490.jpg" alt=""/>    ▲ 손덕수 교수는 여성운동가로서 지금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손 교수가 반전 시위를 하는 모습(왼쪽).  효성 가톨릭대 손덕수교수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의 설립재단인 선목학원은 1999년 12월3일 교원징계위원회를 열고 그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손덕수 교수를 해임한다는 결의를 하였다.손 교수에게 날아온 해임통지서는 모두 33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으로 무려 15가지 항목의 해임사유를 열거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학생 출·결석 및 성적 부당 처리, 주민등록상의 거주지 아닌 지역 거주, 여성복지 강의시간에 여성해방에 관한 강의를 하는 등 교과서 외의 수업진행, 시험지와 과제물의 1년 내 폐기 등이었고, 이런 사실이 교육자로서의 품성과 자질, 성실의무, 복종의무, 직장이탈 금지, 친절·공정의무 및 품위유지의무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손 교수는 위 사유 모두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징계 의결서에 나열된 항목(사유)들은 허위이거나 과장되었다고 맞섰다.이 사건은 학내에서는 물론이고 학교 밖의 여성, 교육, 종교 등 각계에서 많은 우려를 표명하였고, 설령 학교재단측이 내세우는 사유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교수에 대한 해임사유는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사실 성적, 출·결석 부당 처리, 강의내용, 지방대학 교원의 서울 거주 등을 교원에 대한 징계사유로 삼은 예는 거의 없거니와, 학교측이 교수의 교육권 행사 내지 재량권에 속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조사한 것 자체가 ‘마녀사냥’을 연상케 했다.학교(법적으로는 학교법인 선목학원)와 손 교수 간에 팽팽한 대결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손 교수는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의 재심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손 교수는 ‘한국여성의 전화’ 공동대표, ‘하월곡동 빈민촌 산골공부방’ 이사장, 대통령정책기획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로, 페미니스트 기질을 발휘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여성해방론자답게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었다.손 교수가 13년간 몸담고 일해온 대학에서 ‘해임’이라는 극형(?) 통지를 받게 된 사단(事端)인즉, 손 교수의 수업방식에 불만을 가졌다는 한 야간 대학원생의 의문스러운 투서에서 비롯되었다.앞서 말했듯이 대학에서 교수의 성적 처리나 강의내용을 가지고 징계를 한 예를 찾기 힘들고, 하물며 해임처분을 한 것은 더욱이나 놀랄 만한 일이었으므로 거기에 무슨 곡절이 잠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아심을 불러일으켰다.손 교수는 학교측의 해임통지가 교권유린, 성차별, 헌법상의 기본 인권침해라며, 여기에는 손 교수의 페미니즘에 대한 견제와 탄압의 저의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학교측은 손 교수가 1999년 1학기 여성복지 강의시간에 시를 읽어주거나 대체의학, 성 억압, 남녀평등 등 강의와 무관한 주제를 강의하였는가 하면, “매 시간의 결론은 여성해방”이었다면서 이는 분명한 강의 부실이라고 힐책했다.그러나 손 교수는 이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사회복지에 대한 자신의 교육철학인 전문성·인성·영성 세 가지가 통합된 전인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대학측이 교수의 강의내용을 세세히 탐지하여 문제삼았다는 그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어서 각계의 비판을 받았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설사 그 (학교의 해임조치) 사유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 대학에 13년이나 봉직해오고 있고 재임용기간을 2년 가까이 남겨놓고 있는 교수를 해임하는 중징계를 내릴 만큼 중대한 사안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강의시간에 여성의 해방을 강조한 것이 교수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징계위의 지적에는 아연한 따름이다”라면서 손 교수에 대한 징계조치는 교수의 교육권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기본권인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대한 탄압행위로 보고 엄중 항의한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공개질의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시급하게 중징계 해임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교수의 자율에 맡겨진 학생 성적 평가에 대하여 대학당국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교수의 자율권 침해가 아닌가. 성적 평가에 대한 부정확성이 설사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교수를 해임까지 시킬 수 있는가. 귀 대학의 교수 해임기준은 무엇인가. 여성학에 대하여 학교 당국이 종교적 기준을 적용하여 편견을 개입시킨다면 이는 학문의 자유 침해가 아닌가.”한국여신학자협의회 역시 공개질의의 형식으로 “형사범이나 사상범도 아닌데 학기 중에 중징계 해임을 해야 했던 사유는 무엇인가. 혹시 강의 내용을 가톨릭교회의 눈으로 잰 것은 아닌가? 성적 평가는 교수의 재량권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표적조사라는 인상을 준다”고 비판했다.그러나 한번 해임 결의를 한 이상 이를 학교측이 스스로 뒤집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손 교수는 1999년 12월3일 마침내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해임처분무효확인 등’ 재심청구를 했다.재심청구 사유로는 징계재량권의 일탈·남용과 징계결의의 위법성 등을 14개항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결론으로서, “손 교수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처분은 아무런 의무 위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재량권을 남용한 위법이 있으므로 마땅히 취소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못박았다.교육부 재심위원회는 2000년 2월14일 손 교수에 대한 해임처분을 정직 1월 처분으로 변경하는 결정을 내렸다. 징계사유의 일부는 인정할 수 없다고 판정하면서 해직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재심에서 징계사유가 된다고 열거한 것도 시험 미응시자, 과제물 미제출자, 출석실격자 등에 대한 성적 부여, 성적평가자료 임의 폐기, 휴·보강계획서 미제출, 출강부 허위 날인, 책임시수 불이행(성실의무 위반) 등이었는데, 손 교수로서는 다른 교수들에 대해서는 이런 사유로 징계회부를 한 일이 없었을 뿐더러, 그런 사실 유무를 조사한 예가 없었으며, 바로 여기에 표적조사의 본색이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재심위로서는 당초 학교가 징계사유로 삼았던 사유 중 손 교수의 강의와 연구가 불성실하다는 부분, 시험답안지 점수를 성적표에 불공정하게 반영했다는 부분, 형식적인 주 4일 근무 부분 등은 징계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재심위는 손 교수가 13년 동안 교육계에 몸담아오면서 다양한 사회참여와 봉사활동을 하여온 점 등을 고려할 때 신분박탈 배제 징계인 해임처분은 과중하다고 밝혔다.이로써 학교측의 손 교수 해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심 결정이 나온 뒤 손 교수는 총장에게 꽃다발을 보냈다. 그러나 학교측은 이를 정중하게 사절했다.광주 호남대학 변진흥교수대학의 재단이사장이 학장을 해임하자 그 학장이 재단이사장을 협박·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유죄판결을 받음). 그와 동시에 이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해임무효확인청구소송에서 원고(학장) 승소. 재단 이사장은 위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온 같은 대학의 교수 2명을 파면하고 위증죄로 고소. 거기에다 학교측과 이사장의 비리 의혹이 담긴 ‘자료모음’을 낸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일련의 사태는 참으로 어지러웠다.한 사학(私學)의 비리 논쟁을 둘러싸고 이처럼 이사장, 학장, 교수가 서로 얽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니, 대학의 풍토는 얼마나 어수선하고 흐려졌을까. 광주에 있는 호남대학이 겪은 지난날의 진통과 시련이었다.나는 위증과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고 기소된 변진흥 교수측의 의뢰로 그 사건의 형사 변론에 나서게 되었다. 1991년 1월의 일이었다. 변 교수측이 말하는 분규의 실상은 이러했다.호남대학을 설립한 재단 이사장 B씨는 대학의 학사운영, 인사권, 재정문제 등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학생처장을 앞세워 ‘비상대책반’을 구성하였다. 이 대책반에서 학내 비리의 시정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감시·회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행사까지 했다. 또한 평교수협의회와 같은 교수들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여기에 분노한 학생들이 1987년 9월, 이른바 ‘9·9사태’ 때 학교측과 충돌한다. 총학 직선제와 학생처장 퇴진 요구를 학교측이 거부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학교 건물시설을 지키는 데 그쳐야 할 소위 구학대(일부 체육학과 교수·학생, 총학 간부들로 구성)가 경찰의 진입 직후 해산하는 시위학생들을 뒤쫓아가 폭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는 것이다.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학교측은 비상대책반의 구성, 9·9사태의 발생, 구학대의 활동 등은 일부 시인했으나 분규 충돌의 발생원인과 불법행위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을 했다.이태영 학장은 이때 학생들의 행동에 동정하는 입장이었으며, “9·9사태 이후에도 재단측의 횡포가 여전하다”는 내용의 재단이사장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이사장은 다음날 학장을 자기집으로 불렀다. 학장은 이때 “이사장이 나를 장시간 감금해놓고 욕설과 협박을 했으며, 심지어 골프채로 구타하였다”며 이사장을 협박·폭행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소했고, 이사장은 유죄판결(징역 6월의 선고유예)을 받았다.싸움은 도를 더해갔다. 학장이 항의성명을 낸 지 1주일 되는 날 이사장이 재단 이사회를 소집하여 학장을 해임하자, 앞서 말한 대로 학장은 광주지법에 해임무효확인소송을 내서 1, 2심에서 승소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불리하게 되자 재단측은 이사장이 패소한 해임무효확인소송에서 원고측 증인으로 증언을 한 변진흥, 정우식 두 교수에 대하여 파면처분을 내린다(두 교수는 이에 불복하고 학교법인을 상대로 해임처분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위증으로 고소하여 형사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운다.  공소사실에서 위증이라고 지적된 주요 부분은 세 대목이었다. 그 첫째는 이사장이 학생처장과 체육과 교수들에게 지시하여 체육과 학생을 주축으로 한 친위대 비슷한 조직을 구성하였는지의 여부, 둘째 1987년 9월7일 학생들이 이사장의 횡포와 탄압에 대하여 시위를 한 것인지의 여부, 셋째 이사장과 학생처장은 체육과 교수들에게 지시하여 체육과나 JC학생들로 하여금 총학 자율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구타하도록 하였는지의 여부 등이었다.변 교수에 대해서는 위증 고소 외에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가 더 얹혀 있었다. 을 간행한 행위를 명예훼손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위 자료 모음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호남대학교권탄압특별대책위원회의 간행물이며, 피고인 개인이 낸 출판물이나 문서가 아니었다. 위 간행물의 내용 또한 호남대의 학내 단체, 광주·전남 지역의 각 대학 교수협의회 등에서 이미 발표한 문건들을 모은 것으로, 피고인 개인의 의사표시는 하나도 없었다.여기 명예훼손 혐의부분에서는 (1)윤아무개 교수의 강제 해직 여부, (2)“평교수협의회는 학교당국 및 재단의 와해책동에 그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라고 한 대목, (3)“이아무개 학생처장의 각종 비행과 불법행위”를 적시한 대목, (4)“대학의 돈을 백화점의 운용자금과 이사장 자신의 투기사업에 이용하기 위하여 대학 내에 둔 믿을 수 있는 충복이 바로 이아무개 처장이다”라는 대목, (5)○○학원은 “전두환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하였다. 학원을 사설기업화하여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시켰다”라고 한 대목이 문제가 되었다.변 교수는 법정에서 자신의 종전 증언이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한 것이므로 결코 위증이 아니라고 강력히 항변하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서류나 증인의 진술도 나왔다. ‘자료모음’은 변 교수가 발행인도 아니고 거기 수록된 개별 문건의 발표 주체도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그 배포에 따른 책임을 부정했다.또 간행물 게재내용이 허위가 아니고, 호남대학의 비리를 바로잡기 위한 일념에서 한 일이지 누구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공소장에 피해자처럼 되어 있는 호남대학재단이나 호남대학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 평가도 언급도 한 일이 없었다. 1991년 1월부터 1992년 6월까지 전후 17회의 공판 끝에 (그러니까 나는 이 사건으로 광주에 17번을 왕래하였다) 7월2일에 선고된 1심 판결은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비록 가볍기는 하지만 유죄판결이었다. 사학의 비리 공방을 둘러싼 학교재단측과의 싸움에서 피고인이 되기도 하고 원고가 되기도 했던 변 교수는 형사사건 항소심의 무죄 판결로 잠시 승리를 거두는 듯했으나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끝내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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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5화 북한책 펴내 수난당한 출판인]]></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084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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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9 Dec 2004 00:20:04]]></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19/1103383204308480.jpg" alt=""/>    ▲ 88서울올림픽 당시 개막식에 등장한 노태우 대통령 내외. 납북 월북 작가들의 책이 해금되는 등 출판계의 ‘해빙’ 분위기는 그러나 그 다음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는 ‘한파’를 만나 꽁꽁 얼고 말았다.(아래)북한에서 나온  11~15권.  한국에서의 출판의 자유는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의 규제 속에서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반헌법적인 사태가 속출하였다.1987년의 6월항쟁 후에 출현한 노태우정권은 온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거스를 수 없어서 잠시 겉으로나마 유화책을 쓰는 듯했다. 그런 중에 북한도서나 납북·월북자의 작품의 해금방침도 묻어 나왔다. 그러나 금서출판 해금의 새 지평은 잠시 보이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정부는 북한 원전의 출판에 대하여 압수, 판금, 구속, 처벌로 되돌아가서 군사압제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번에 다루는 와 의 원전출판사건을 통하여 민족동질성 회복과 학문의 자유를 얽어매는 국가보안법의 사슬을 점검해본다. 출판 강병선씨강병선. 원광대학교 독문학과를 나오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 편집간사, 실천문학사 편집장을 역임한 그는 1988년 9월 ‘푸른 숲’이라는 출판사를 아내 명의로 등록, 실질적 대표자로서 출판업을 시작했다.신생 출판사로서 뭔가 종래의 출판도서와 다른 성격의 책을 내고자 고심 끝에 북한에서 나온 역사서를 원전으로 출판하기로 했다. 마침 실천문학사에 근무할 때 우연히 입수하게 된  복사본이 있어서 이것을 출판했다. 는 북한 역사학계가 총력을 기울여 저술·완간한 총 33권의 방대한 역사서였다. 강씨는 그 중 제11권에서 제15권까지 5권을 중세 1, 2, 3, 근대 1, 2로 하여 간행하였다(1988년 11월).학계와 언론에서는 북한 학술서의 원전 출판을 반기는 분위기였으며, 전향적인 변화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 노태우 정부는 북한서적 내지 ‘금서’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는 듯한 기미를 보인 바도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후의 사회 분위기도 작용하였다. 1988년 7월 정부는 납북·월북 작가의 해방 전 문학작품의 출판을 허용하였고, 이어서 10월에는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공표된 납북·월북 작가들의 순수한 음악·미술 작품의 공개·공연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및 공산권 자료를 전국의 특수자료 취급인가기관(1백여 곳)에서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출판계에서는 북한 원전 간행이 새로운 흐름을 이루어    같은 책을 서점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학문의 자유, 출판의 자유, 북한 바로알기 등에 획기적인 해금(解禁)이 온 듯싶었다.그러나 경칩(驚蟄)이 온 줄 알고 지상으로 튀어나온 개구리는 엄동한파와 부딪혀야 했다. 강병선씨는 다음 해(1989년) 3월28일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5월11일 서울지검 이춘성 검사는 강씨를 구속 기소한다.공소장에 따르면, 위의 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유물사관에 준거한 소위 김일성의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서술한 북한의 선전책자”이며, 미국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지지한 민족의 원수라고 규정하여 왜곡된 반미 시각을 갖게 하는가 하면, 서재필·이승만을 매국노, 친미 분자로 매도하고 각종 역사적 사실을 과격한 반미 시각으로 표출하는 한편 근대조선의 결혼예식, 탈놀이 등의 문화, 풍습조차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왜곡 평가하는 내용이라서 용공서적이라는 것이었다.이런 공소사실에 대해서 강씨는 법정에서 완강하게 맞섰다. ‘우리나라 역사는 남북의 민족이 공유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역사 서술이 어떠한지를 알고 연구하는 것이 통일을 위해서나 학문의 연구·발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노대통령도 ‘7·7선언’에서 북한이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한 이상 북한 원전의 출판은 더욱이나 필요하며 또 허용되어야 한다. 의 원전은 통일원 열람실에 가서 신청하면 일반시민도 열람할 수가 있다. 피고인 자신도 거기 가서  제1권을 열람한 적이 있다. 만일 그 책을 읽게 하거나 소개하는 것 자체가 범죄라면 정부가 그렇게 열람을 허용할 리가 없다.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미국이 양해한 것은 남한의 역사서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다. 서재필·이승만에 대해서는 심지어 민족진영 내부에서도 매도하는 견해가 있다. ‘를 펴내면서’에서 “6·29 항복선언은 그 문맥에 맞는 실질적인 자유와 권리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뒤따라야만 6월 민주투쟁도 값있는 것으로 안다”고 쓴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위와 같은 강씨의 주장은 역사학계의 공론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사건 출판 후 학계, 언론계, 출판계에서는 북한역사서의 원전 개방은 바람직한 일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반응이 나왔고, 남한 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와 비교하면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학 전문지  88년 겨울호에는 바로 이  33권의 총 목차가 실렸으니, 그만큼 학문연구의 자료가치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는 강씨가 구속중이던 1989년 1월18일부터 이틀 동안 한국사 학술회의를 열고  33권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의 한국사 서술 동향과 분석’이라는 주제로 대토론을 벌인 일까지 있었다. 만일 의 출판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면 사학계의 그와 같은 공개적이고 진지한 반응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강씨로서도 그런 책의 출판이 반국가적이라는 인식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혹시라도 있을 과민 반응을 생각해서 원전에 있는 김일성의 교시 인용부분을 삭제하는 신중함을 보였던 것이다. 의 서술방법이나 서술내용을 긍정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소개하는 뜻에서 출판을 했을 뿐이었다.강씨가 구속된 채로 1심 재판이 시작되자 사회 각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 북한자료 개방’ 의지 의문”, “정치 선전물과 동일시 말아라” “북한 원전 압수 찬바람” 등의 기사 제목이 그런 중론을 대변하고 있었다.고려대 강만길 교수는 당시 담당 재판부에 낸 소견서에서 “북한측의 역사 해석 및 서술이 일정한 역사관에 너무 편중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제 출판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대응하는 단계는 넘었다고 생각되며, 어디까지나 학문적 차원의 고증과 해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순리요, 효과적이라 생각된다”라고 견해를 밝혔다.강씨는 그 해 6월29일 선고된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이란 형을 받아 그대로 확정되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19/1103383204308481.jpg" alt=""/>    ▲ 1988년 재발행된  Ⅰ~Ⅱ.   출판 이재선씨이재선씨가 대표자로 있던 출판사 ‘과학과 사상’에서  Ⅰ, Ⅱ를 발행한 것은 1988년 5월30일, 그리고 그가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된 것은 그 해 10월31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출판되어 전국 서점에서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나서 7개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슨 사단(事端)이 끼어들었기에 반년도 훨씬 뒤에야 문제를 삼았는가. 거기에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심의·결정이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작용했다.이 은 박헌영, 이강국 등이 주도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서 해방 후 1년 동안 조선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정세를 정리하여 1949년 10월 라는 제호를 붙혀 발간되었던 것인데, 이씨는 거기에 어구 수정만 하는 정도의 손질을 하고 원문대로 간행을 했다.그 제1권에는 일지, 정세,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 개요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경제, 사회, 노동, 토지개혁,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의 실태를 민전의 시각에서 당시 이북의 시책과 대비하여 서술한 것이었다.그런 서적을 남한에서 간행했으면 즉각 국가보안법의 철퇴를 맞을 법도 한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이재선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당시 대학을 막 졸업한 26세의 청년이었다. 1981년 고려대 사학과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력도 있다. 1986년 10월부터 1년 남짓한 동안 도서출판 ‘실천문학사’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87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다음 해 4월부터 3개월 동안 도서출판 ‘과학과 사상’ 대표직을 맡았다. 그는 사회과학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송건호 , 박현채 , 강만길 , 김수행 , 조용범  등 공소사실에 열거된 것만 보아도 이씨의 성향을 쉽게 알 수 있다. 검찰은 이 같은 이씨의 독서 경향이나 전력을 견강부회하여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폈다.그 무렵 검찰은 “북한의 실상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관점에서 찬양했다”는 이유로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의 북한방문기 을 압수하고 발행인을 구속했다. 은 8·15해방 직후의 역사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집으로 학계에서도 평가하고 있는데, 어떤 기준과 근거에서 하루 아침에 ‘이적 표현물’로 둔갑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앞서 본대로 도서잡지윤리위원회라는 데서 “위 도서에 대하여 관계당국에 제재를 건의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 사건화의 도화선이었다. 도서잡지윤리강령 및 도서윤리실천요강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결정의 ‘이유’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위 도서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편집한 연감으로 남한도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천명한 내용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청소년 독자들이 비판없이 읽을 경우 편향된 역사의식을 갖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도서잡지윤리강령 제1항 ‘건전성’ 및 도서윤리실천요강 제2항 ‘국가안보’ 등에 저촉된다고 인정,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청소년들이 비판 없이 읽을 경우’를 가상하여 재제를 건의한다는 대목이다. 은 청소년 도서가 아니라 ‘민전’이라는 정치단체가 만든 연보라서 어른도 아무나 읽지 않을 책인데, 하물며 청소년들이 그것을 읽을 경우를 가정하여 건전성과 국가안보를 내세우다니 그 ‘우국충정’과 상상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19/1103383204308482.jpg" alt=""/>    ▲ 강금실 전 법무장관  그럴 여지가 전혀 없는데도 ‘만일’을 앞세운다면 한국의 학문과 언론·출판은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과대망상적 통제 아래 놓이는 위헌적 사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서 을 읽은 청소년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알아보기나 했는가. 그리고 ‘편향된 역사의식을 갖게 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 책을 낸 행위가 범죄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변론에서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북한측 또는 좌익이 쓴 글이나 책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이적표현물소지죄’가 되고, 그것들을 인쇄·출판하면 ‘이적표현물제작·배포죄’가 된다는 근거가 다름아닌 국가보안법이고 보면, 그것은 하나의 악법일 수밖에 없다. 남한의 반공이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일면이었다.그 무렵 이론과실천사 대표 김태경씨도 을 번역·출판했다가 구속되었는데, 그의 부인인 강금실 (당시) 판사는 ‘구속의 필요성 여부에 대한 피의자측 의견서’에서 “국가보안법 자체가 폐지 또는 개정되어야 마땅한 반민주악법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지적하여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이재선씨는 법정에서 북한 관계 자료의 개방이 반드시 남한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염원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런 책을 자유롭게 출판하고 또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정진숙, 한만년, 박맹호씨 등 출판인 77명도 ‘민족화해·민족통일운동시대와 출판’이라는 성명을 통하여 “북한의 1차 자료와 북한을 논의한 출판물은 있는 그대로 공개해야한다”면서 구속 출판인들의 석방을 촉구했다.서울지법은 이씨에 대한 구속적부심사 청구를 기각했는데, 기소 후 몸만 풀어주고 유죄판결로 재판의 막을 내렸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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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4화 불의에 맞선 두 성직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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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12 Dec 2004 00:20:04]]></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종교계의 성직자가 반정부 시위에 나서는 세상은 권력이나 종교 중 어느 한 쪽에 큰 고장이 붙은 사회다. 정·교분리를 핑계삼아 세상의 불의도 외면하고 개인의 복락만 빌고 있는 종교인은 이미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다. 천당이나 극락만 생각하는 그런 신앙에서 벗어나 바로 우리가 숨쉬고 사는 이 땅에 의(義)를 세우는 실천적 신앙의 험난한 길을 선택한 두 젊은 성직자―진관 스님과 탁지일 목사(사건 당시 신학대학생)를 조명해 본다.성직자라는 타이틀에 의지하여 점잖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들이 고난의 아픔을 자청하고 박해를 불러들인 것은 우리에게 참 신앙의 궁극을 깨우쳐주는 ‘생방송’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들을 ‘이단’이나 ‘탈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12/1102778404308470.jpg" alt=""/>    ▲ 1986년에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개헌 추진 대회가 전국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 5월3일 인천 대회는 이 투쟁의 절정을 예고하는 고비였다. 동아일보  5·3 사태 참여 신학생 - 탁지일1986년 5월13일치 한 일간지 사회면에는 “‘인천사태’ 54명 추가 수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나왔다.“경찰과 검찰은 (1986년 5월) 12일 ‘5·3 인천사태’와 관련, 대학생 44명 등 54명을 추가로 수배했다. … 추가로 수배된 사람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인하대, 장신대생 등 대학생이 44명이고 ….”그 추가 수배자 명단에 “장신대=탁지일(21·3년·휴학)”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탁군은 5월3일 인천사태 당시 민정당 지구당사에 방화하고 극렬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휴학생인 탁지일군은 1986년 5·3 인천사태에 참가하여 수배되었으나 잡히지 않고 도피중, 그 해 11월29일 신민당 서울대회의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1987년 1월16일 서울지검 함승희 검사에 의하여 구속기소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나는 탁군의 아버지인 탁명환 목사의 의뢰에 따라 이 사건의 변호에 나섰다. 탁 목사는 나의 대학동문이기도 한데, 신흥종교 내지 이단종교의 연구·고발운동에 열정을 기울여 오는 가운데, 민·형사간에 여러 번 피소(被訴)되기도 하였다. 그는 번번이 협박과 테러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진상규명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변호사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힘들어하기에 내가 몇 건 맡아서 법정에 나갔다.나는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친 부자 변호를 하면서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는 탁군의 기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탁군이 각종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너무 열심히 나서자 부자간에 갈등도 없지 않았다. 여기서 탁군은 좀 더 본격적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자 집을 나와 학교 부근의 친구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는 아들의 ‘가출’을 제지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편지를 통해서 약간의 섭섭함을 표시하면서도 아들에 대한 신뢰와 격려 그리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불의를 보고 항거하지 않는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탁군의 마음을 한층 굳혀주었을 것이다. 인천 5·3사태는 1980년 5월의 광주 이후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반독재 집회시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야권 인사의 정치활동금지, 관권·금권 동원의 일방적 부정 등을 감행하고도 신민당에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면서, 어용야당 민한당은 소멸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어 오다가 1년 후에는 신민당과 재야 정치인이 손잡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되면서 1천만명 개헌서명운동에 들어갔다.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가 전국 여기저기서 개최되었다. 부산을 필두로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서 순차로 결성대회가 열릴 때마다 시민들이 운집하여 뜨거운 성원을 보냄으로써 집권측을 놀라움과 불안에 몰아넣었다.5월3일의 인천 대회는 그동안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반독재 개헌투쟁의 절정을 예고하는 고비였다. 민통련, 노동운동권, 학생단체 등 여러 민주세력이 인천 주안(朱安)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 문자 그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이날의 집회시위는 경찰의 최루탄 및 화염병 세례와 시민들의 투석 등으로 격렬한 ‘시가전’으로 화했고, 정부는 ‘좌경폭력세력의 난동’이라며, 어용언론을 통하여 비뚫어지게 활용하였다. 1백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었는가 하면, 수배자만도 60여 명에 달했다.5·3사태에서 야권의 여러 세력은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고 분파성을 드러냈으나 ‘군부독재 타도’에는 공통된 목소리를 냈다.그날 집회에 참가했던 탁군은 학생운동조직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던 터여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있었다. 용케 피신한 그는 한 후배의 도움으로 경기도 신갈에 방 하나를 구해서 숨어 살 수 있었다.그해 11월29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신민당 서울시대회가 열린 날 탁군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위를 주도하던 중 동대문운동장 근처에서 경찰에 붙들렸다. 그는 경찰에서 구둣발과 주먹 세례를 받아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의연하게 자기 소신을 밝힘으로써 하느님 신앙에 투철한 신학생의 참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배자는 반드시 거꾸러진다는 진리를 확신한다”고 말할 때는 법정 안은 모두 숙연했다.나는 변론에서, 현실 개조 의지를 이단시하거나 정치적 비판세력을 박해하는 잘못을 지적했다.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단층만 탓해서는 안되며, 학생들의 정의감을 감옥행으로 막아보려는 오산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민당이라는 한 정당의 개헌운동본부 결성대회나 현판식에 왜 재야단체가 그처럼 대거 몰려갔으며, 왜 그런 구호가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 사태를 악화시킨 경찰의 책임, 자동차가 불타는 장면은 뉴스로 내보내면서도 시위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폭력은 눈감는 편파성이 더 문제다. 애투련(愛鬪聯)의 성격이나 선언문의 내용은 결코 용공이 아니며, 반 외세 반 독재는 북의 전략과 무관하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적용은 부당하다.’ 대충 이런 요지로 힘주어 말했다.그는 1987년 4월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연세대학교 대학원과 미국·캐나다에서 10년간 유학, 신학과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끝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울산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영어목회도 맡고 있다. 몇 해 전 그의 아버지 탁명환 목사가 자신의 이단규명 활동에 불만을 품은 측의 테러로 목숨을 잃고 불귀의 객이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12/1102778404308471.jpg" alt=""/>    ▲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는 진관 스님(왼쪽 세 번째). 그는 절에 은거하는 대신 집회 현장을 다니며 활동한다. 제공=불교인권위  민주화 통일투사 - 진관스님진관 스님의 본명이 ‘박용모’인 줄은 그에 대한 공소장을 보고 처음 알았다.진관 스님은 절이나 선방에 은거하는 ‘전통적’ 스님이 아니다. 그는 집회 시위 농성 현장에서도 볼 수 있고, 기독교 예배 자리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감옥이나 경찰서 유치장에도 홀연히 드나든다. 쇠고랑을 차고 법정에도 나타난다. 학술·문화행사에도 그는 열심이다. 그는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서예의 대가가 되고 싶어 중학 진학도 포기하고 출가하여 절로 갔다. 종단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보면서 정규 학업도 계속했다. 대학원에서 만해 한용운 연구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1976년에 을 통하여 등단, 시인이 되어 시집도 열 권쯤 냈다. 시조, 희곡, 동화도 창작했는가 하면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그런 다재다능한 스님이 민주화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감옥과 법정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 독재광란시대의 조화(造化) 탓이 아닐 수가 없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범민련(汎民聯) 남측본부 정책위원장이라는 직함이 그의 현실참여를 한층 더 잘 상징해주고 있다.1996년 10월1일, 그는 김제 금산사를 다녀오다가 전주에서 안기부 요원에 의하여 연행됐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회합, 통신)으로 구속되었다. 수사당국은 불교인권위 사무실과 진관이 주지로 있는 광주 미륵정사를 압수 수색했다. 조사받는 동안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았으며, ‘언제 어떻게 북한에 갔느냐’는 황당한 추궁을 받았다. 그런 사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캐나다 교포 강병연씨와 관계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전화, 팩스통신이 모두 도청되어 수사의 빌미가 되었던 것.1996년 11월22일 서울지검 이용훈 검사는 진관 스님을 ‘박용모’라는 이름으로 기소한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인데, 구체적으로는 국가기밀 수집·전달, 잠입, 탈출, 찬양, 고무, 회합 통신 등 여러 가지였다. 공소장은 A4용지 1백38쪽에 이르는 방대한 문서라서 섣불리 요약·발췌하기가 쉽지 않다. 뼈대만 추려보자면 혐의내용은 이런 것이었다.‘피고인은 반국가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김인서 등 미전향장기수 출소자 3명의 북송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1994년 11월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캐나다에 사는 친북교포인 범민련 해외대표 강병연에게 전화, 팩시밀리, 우편 등을 통해 국내 불교계와 재야단체의 동향 및 자료를 전달했다. 1995년 9월 캐나다에서 강씨를 만나 불교인권위원회 활동보고서, 한국통신 노조 간부 7명의 인적사항 등을 전달했다. 그 달 19일 중국 북경 시내 한 호텔에서 북한에서 온 김아무개와 이아무개를 만나고 여비조로 미화 4천달러를 받았다.’이런 행위가 앞서 옮겨놓은 바와 같은 어마어마한 죄면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진관이 이끄는 불교인권위는 전해부터 이른바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북한 불교도연맹측과의 예비회담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남북공동기도문 낭독 등을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통일인사 석방 불교대책위를 구성하여 범민련사건으로 구속된 목사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진관은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그 단체가 1990년 8월15일 제1차 범민족대회에서 “미군·핵무기 철수, 반미, 반전, 반핵, 평화협정 체결, 군비축소,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여 북한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용공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것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독자적 입장에서 내세운 것이지, 북한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6공 정권이 통일문제를 독점, 민간 참여를 배제하여 민간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 남·북 해외에 범민련이 결성되었던 사정도 법정에서 해명했다.진관 스님은 북한에서 오는 문건들을 수신 즉시 통일원에 신고하였고, 북한 불교계와 교섭을 위하여 북한주민접촉신청을 수차례나 통일원에 내는 등 합법적 방식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캐나다에서 강병연씨에게 말해준 국내 정치상황이란 것도 신문에 보도되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불교인권위의 보고서 역시 소책자로 공개된 것이어서 ‘국가기밀’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이 부분 국가기밀 수집·전달은 1심에서 무죄).첫 공판이 시작되자 진관은 미리 준비해 온 글을 모두(冒頭)진술에 가름하여 읽어내려갔다. 그러자 재판장은 모두진술권이 법에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제지하려 했다. 진관이 5분만 진술하겠다고 하자 재판장은 그것도 너무 길다, 더 짧게 해달라고 당부인지 견제인지 모를 말을 했다. 국보법사건  재판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검사는 15년 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고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나는 1984년 가을 한 재야단체의 출범행사에서 고 문익환 목사님의 소개로 진관 스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각종 집회, 행사, 재판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리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1987년의 저 6월항쟁 때도 우리는 각자의 대열에서 시위에 참가했고, 마침내 주동자로 잡혀간 그를 접견하려고 나는 매캐한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야전군처럼 차를 몰았다. 나의 회갑 때 그분은 과분한 축시를 보내주었다. 아무 효험도 없는 나의 변호로 징역 실컷 살고 나온 처지에 ‘양심의 깃발 한승헌 만세’라는 제목의 축시를 써주셨으니, 참 쑥스럽고 무안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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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3화 용공으로 몰린 재일동포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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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05 Dec 2004 00:20:04]]></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205/1102173604308460.jpg" alt=""/>    ▲ 일본에서 만든 손유형씨 구명전단.  전국체전 왔다 구속 홍성인씨분단조국을 바다 건너에 두고 사는 재일 한국인. 그들의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착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한반도 안의 남북대결은 일본땅의 ‘민단’과 ‘조총련’으로까지 번져 갈등의 벽을 쌓았다.그런 정치색이나 무슨 사상·이념으로도 막을 수 없는 동족의 정은 법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일본 땅에서 동포끼리 얽혀 살면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을 반공·친공의 2분법으로 갈라서, 모처럼 벅차는 심정으로 조국 땅을 밟은 동족을 감옥에 가두어 놓던 지난날의 재일동포구속사건들. 이번에 소개하는 홍성인씨와 손유형씨의 사건에서 불행한 ‘역사의 덫’을 다시 살펴본다.전국체육대회 재일동포선수단 감독으로 1963년에 이어 1964년 10월 모국 땅을 밟은 홍성인씨, 그가 뜻밖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소식은 재일동포사회에서 충격과 놀라움으로 번져나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살고 있는 홍씨는 동포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민단(한국거류민단-한국계)의 청년단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인데, 대한태수도협회 사범으로 다년간 활약하였고, 한국의 태권도선수단을 일본에 초청, 국위를 떨치게 함으로써 국내 각계로부터 감사장이나 표창장을 받았다. 뿐인가. 재일동포 북송(北送)저지투쟁과 한일회담촉진운동에 앞장서 실력투쟁까지 함으로써 반조총련 투쟁에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남한에 와서 공로훈장 대신 수갑을 차게 되었다니, 그 내막이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혐의 내용은 홍씨가 일본에 사는 친지 오용범씨의 부탁을 받고 서울에 사는 그의 친동생인 오용수씨에게 전언(傳言)을 한 것이 반공법상의 ‘편의제공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말 심부름이 곧 범죄라는 것. 홍씨는 같은 오사카에 사는 오용수라는 사람과 동향 출신이라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63년 10월1일 오씨는 홍씨에게 전국체전 재일동포선수단 감독으로 서울에 가게 되면 동대문구 전농동에 사는 자기 친동생을 만나 안부를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홍씨는 다음날 선수단을 이끌고 귀국,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가했다. 대회가 끝난 뒤 서울 전농동에 사는 오씨의 동생 오용수씨를 찾아가 오씨가 부탁한 대로 “부산으로 이사하거든 곧 편지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말 심부름 하나가 엄청난 반국가 용공행위로 몰려 구속사태까지 불렀다.검찰의 주장은 이러했다.오용수는 1965년 3월 제주고등학교 선배 한 사람의 주선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자로서 조총련 오사카지부 간부로 있는 사람인데, 홍씨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 말 심부름을 하여 편의 제공을 하였다는 것. “부산으로 이사하거든 편지하라”는 전갈 내용도 “부산에 이동하여 거소를 정한 후 편지로서 통지하라”는 지시였다는 것이다.다음해인 1964년 전국체전 참가차 다시 귀국했을 때에도 홍씨는 일본에 사는 양아무개의 부탁대로 오용수씨를 만났다. 인천여고에서 열린 재일교포선수단 환영회에 참석중인 홍씨에게 주최측 안내원이 누군가 면회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바로 오용수씨가 와 있었다. 이때 홍씨가 오씨에게 전한 말은 공소장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홍씨는)… 양(梁) 명불상(名不詳)을 상면, 동인으로부터 북괴 선전을 청문 교양 받은 후, 만약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귀국할 시 오용수가 찾아갈 터이니 필히 동인을 만날 것이며, 그리고 동인에게 지정한 장소로 빨리 나와 대기하라는 말을 전하라는 등 지시를 받자… 동 오용수를 상면하고 동인에게 전시 양 명불상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여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그러나 홍씨는 양아무개에게서 친북교양을 받았다던가 무슨 지시사항을 받고 전달했다는 따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사실, 이런 정도의 안부 전갈을 사건화하는 것은 재일동포사회의 실정과 애로를 도외시한 억지였다. 물론 1960년대 전반기만 해도 일본 내에서 좌우대결 즉 남한을 지지하는 한국거류민단(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선인총련맹(조총련) 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그러나 한 지역, 한 마을, 앞뒷집에 사는 동포에게 민단과 조총련으로 소속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접촉과 교분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조총련 사람을 만난 것을 두고 곧 용공이나 불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적화사업’이었다.또한 지금부터 40년 전인 60년대만 해도 한일간의 왕래나 통화가 그리 수월치는 않았다. 그런 현실이고 보면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 조총련계로서는 남한에 사는 친족과 소식이나 안부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민단계라 할지라도 동족의 그런 심정을 박절하게 외면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이런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국내의 철저한 분단·대결 상태를 잣대로 삼아 재일동포의 언행을 범죄로 본 것은 대단한 잘못이었다. 오씨의 부탁이 만에 하나라도 불온한 전갈이었다면 하필이면 민단쪽의 전위적 역할도 서슴지 않는 홍씨에게 섣부른 말을 했을 리도 없었다.그러나 그런 사리와는 동떨어지게 1심 결과는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 몸은 풀려났지만 유죄판결이었다. 민단의 청년운동 간부요 전국체전의 선수단 감독이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자 재일 민단쪽은 한때 낭패에 빠지기도 했다.나는 항소이유서에서 1심 판결의 과오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지적했다. 첫째 “오용수에게… 지정한 장소로 이동 대기하라” 운운하는 전언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말의 뜻과 표현을 견강부회(牽强附會)식으로 각색했다. 둘째, 그 전언 내용이 반국가적, 활동의 편의제공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모종 공작상의 연락이었다면 조총련계 체육회 가입을 거부하고 민단 간부직에 있는 홍씨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가 없고, 홍씨 또한 그런 청을 들어주었을 리가 없다. 셋째, 이 건 유죄판결은 재일교포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판이다. 그밖의 법률적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를 삼았다.끝내 무죄판결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홍씨는 일본으로 돌아가 민단 활동을 계속해서 명예회복을 했고, 나중엔 오사카 민단 단장, 민단 총본부 감찰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조국 분단이 빚어낸 재일동포의 비극 1막이었다.위장전향간첩 딱지 손유형씨일본에서 가내영세기업을 경영하던 재일동포 손유형씨는 거래선과 업무협의를 할 겸 골프를 치기 위해서 1981년 4월25일 귀국하였다가 뜻밖에도 안기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에게는 형법상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의 죄가 씌워졌다.손씨는 제주도 태생으로 14세 때인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식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큰딸을 조선인학교에 보냈고, 사친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제주도에 살던 부모를 초청했고 한국 적(籍)을 취득한 후엔 자주 모국 방문을 했다.공소사실 첫머리에는 “(손씨가) 제주 ‘4·3사건’에 관련되어 친형제가 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적개심과 공산주의사상에 기울어져 조총련계에 가입·활동을 했다”고 기재되어 있다.공소장에 따르면, 그는 북측 공작원으로부터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기 위한 실습을 받았다.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북의 A-3지령을 받았다.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위장 가입한 후 북의 지령에 따라 1971년 7월16일 대한항공편으로 제주도에 ‘잠입’하였다. 그 후 한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각종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하였다. 손씨 자신은 일부 ‘지령’이나 ‘기밀탐지·누설’ 등은 부인하였지만 대체로 범죄사실을 시인하였다. 이 사건은 본시 태륜기 변호사께서 변호를 맡았는데, 그의 항소이유 요지도 “피고인은… 북괴의 꾀임에 빠져 그 요원들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도록 지령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1971년 7월16일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한국의 참모습을 목격한 이후로는 간첩활동을 할 의사를 포기하였고, 이후 한국에 수차 왕래한 것은 고향을 찾기 위한 것일 뿐,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간첩 기타 북괴지령 수행을 위한 활동을 한 바 없다. 피고인이 수집 보고하였다고 적시된 기밀사항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공지(公知)의 내용으로  이를 탐지 수집하였다 하여 간첩죄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피고인에 대한 1심의 양형(사형)은 너무 무겁다”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982년 11월18일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였고, 이어 대법원도 1983년 3월22일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손씨에 대한 사형은 확정되었다.사형 집행의 위기에 직면한 피고인과 가족 그리고 일본에 있는 손씨 구명운동단체에서는 다시 태륜기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고 재심운동에 들어갔다.(1983. 5. 18. 재심청구) 유죄 판시사실 중 1971년 5월1일부터 1973년 10월18일까지 사이에 한국에 잠입(왕래)하여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여기에는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 등록과장이 작성한 공문서와 외국인출입국의 기록조사서, 일본 변호사가 작성한 전화녹취서 등이 새로운 증거로 제출되었다.위의 문서들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항에서 말하는 ‘형의 면제 또는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지면 사형은 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2년 5개월 동안 손씨는 일본에만 있었고 일본 밖(외국)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일본 법무성의 조사서에는 쇼와(昭和) 47년(1973년) 이전의 출입국 상황에 대한 기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겼다.이 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태륜기 변호사는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탄압을 받는다. 그는 일본의 손씨 가족에게 판결문과 1심 소송기록 사본을 보내주었는데, 이것이 트집의 발단이었다. 그 수사기록에 의하면, 한국 안기부요원이 일본 내에서 수사 목적의 증거 수집을 한 것으로 보여져서 일본 의회(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혹스럽게 된 한국 정부는 태 변호사의 판결문 및 재판기록 사본 인도행위는 법적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기상천외의 ‘비행’을 발굴해냈다.변호사사무소측에서 판결문과 재판기록 복사를 해준 법원 직원에게 소정의 복사비용보다 좀 많은 금액을 준 것을 ‘뇌물공여’로 찍어냈다. 그리고 징계위에 회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바로 이 단계에서 나는 ‘구원투수’ 요청을 받고 1993년 5월19일 손씨 재심사건의 ‘계투’ 변호인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나는 재심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내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하는 한편 전주교도소를 비롯하여 손씨가 이감되는 대전교도소, 대구교도소에 가리지 않고 달려가 몇 년 동안 수없이 접견을 다녔다. 손씨는 감옥 안에서 지병인 고혈압, 당뇨병과 후두암, 위암 등 몇 가지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일본에서는 ‘손유형씨를 지원하는 모임’을 비롯하여 여러 구명단체들이 여러 해 동안 꾸준한 지원활동과 석방운동을 벌여나갔다.손씨는 1984년 광복절에 무기징역으로 형이 바뀌어 사형을 면하였고, 1988년 성탄절 무렵에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89년 8월29일 재심이 기각되고 나서 9년 만인 1998년 봄,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 맨 처음 사면에서 잔형집행면제로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 정부의 공직에 있던 나는 석방된 손씨를 만나 여러 해 동안의 고생을 위로했다.1981년 4월 구속된 때로부터 17년 동안 손씨가 모국의 감옥에서 겪은 어둠의 세월은 조국 분단이 한 개인과 가정에 미친 참혹한 시간이었다. 손씨의 가족들은 손씨가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자 주변사람들로부터 따돌림과 설움을 받았는가 하면, 제주도에 살고 있던 손씨의 모친은 “당신 아들 때문에 집안 망쳤다”는 친척들의 원망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와 딸네 집에서 기거하다가 3년 만에 한많은 세상을 하직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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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2화 그 시절 기자들의 수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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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8 Nov 2004 00:20:04]]></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여간첩 음독자살 기사 중앙일보 박영수 기자1971년 7월20일,  대전 주재 박영수(일명 영구) 기자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전날 치에 실린 ‘권총 지닌 여인 음독’이란 제목의 기사가 화근이었다. 그 기사에는 ‘거리서 기절, 주민 신고로 입원’ ‘난수표와 가명 쓴 증명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구속 사유인즉, “여간첩이 검거된 사실을 신문지상에 보도하면, 다른 간첩 검거에 곧 지장이 오고, 나아가서는 간접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북괴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서도… 본사에 송고, …여자 간첩용의자 검거 기사를 4단으로 보도함으로써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다”(구속영장)라는 것.  본사의 김천수 사회부장, 지방부 남상찬 기자도 두 번이나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이 사태를 조사한 한국기자협회 조사단은 사전에 적절한 ‘보도관제’를 요청하지 않은 관계당국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 보고서는 “대간첩 관계 기사에 관한 한, 신문·방송·통신이 100% 이상 당국에 협조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사건이 발생하면 사전에 기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보도 보류를 요청하는 자세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했다.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1971년 7월18일 이른 아침, 대전 시내의 중심가 도로 위에서 35세가량의 여자가 극약을 먹고 비틀거리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충남도립병원에 입원시킨 그 여자의 몸에서 권총 1정, 난수표(길이 3m), 사진만 같고 각각 이름이 다른 주민등록증 3장, 현금 50만원이 나와서 경찰을 긴장시켰다.박영수 기자는 사건 발생 당일에는 대전에 있지도 않았다. 그날 충남경찰국 출입기자들은 그 사건을 거의 다 알았으나 “간첩 관계 사건인 것 같으니 기사는 보내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박 기자는 그 자리에 없었으나 나중에 다른 기자로부터 “기사화하지는 않고 다만 본사에 알리기만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도 이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다. 박 기자는  K기자가 본사에 정보사항으로 알려주는 통화내용을 들었는데, 정작 문제된 여인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그러자 민완기자의 본성과 수완(?)을 발휘하였으니, 충남경찰국으로 가서 경비전화로 중동파출소를 불러, 자신이 관계 간부인 양 가장하여 보고를 받는 형식으로 취재하는 데 성공했다.는 7월19일자 1판 7면에 이 기사를 내보냈으나 경찰의 요청에 따라 2판부터는 그 기사를 삭제했다.검사의 공소사실 역시 “여간첩의 검거 사실을 취재, 본사에 송고함으로써 다른 간첩의 검거에 지장을 주는 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였다”는 요지였다.하지만 검사의 그런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 보도로 말미암아 다른 간첩의 검거에 지장을 주어서 이적행위가 되었다고 하려면, 그 여간첩이 다른 간첩과 언제 어디서 접선하려 했다는 점이 어느 정도 밝혀져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입증이 없다.나는 변론에서, 1969년 11월7일 대구고등법원이 내린 세칭  ‘영덕 간첩 보도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세우며 무죄를 주장했다.그 사안인즉, ‘북의 간첩이 묻어둔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장비 및 소지품을 경찰이 발견하고 간첩 잡기에 나섰다’ 는 보도를 한 행위에 대해서(설령 당국의 보도관제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반공법 제4조 1항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그 사건에서는 무기가 묻혀 있는 지점에 간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데다가 수사당국의 보도관제 요청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법원은 “고의적으로 대남 간첩공작을 와해시켜 간첩 체포를 모면케 하여 북괴의 간첩활동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당국이 공작상 필요할 때 활용하는 보도관제 요청이 이 사건의 경우에는 있지도 않았으니 박 기자로서는 자기의 취재 보도가 대간첩작전에 해를 미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 기자는 이 사건과 같은 간첩 체포 기사는 주민의 신속한 신고를 장려하고 간첩 침투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주는 등의 이점도 있다고 진술했다.나는 한국기자협회 창립 때부터 고문변호사로서, 보도의 자유와 기자들의 권익 옹호에 얼마간의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런 인연과 직분으로 해서 기자협회의 변호 의뢰를 받고 대전에 왕래하면서 변론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박 기자는 10월22일 보석으로 석방된 후, 11월4일의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128/1101568804308450.jpg" alt=""/>    ▲ 흰 수의를 입은 고준환 동아일보 기자가 재판에 나와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1심 판결 후 항소해 사건화된 지 7년 만에 그는 무죄가 됐다. 동아일보  선거사범 내사 보도 동아일보 고준환 기자 방송뉴스부 고준환 기자는 1971년경부터 법조 출입을 하며 취재활동을 해왔다. 그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검찰에서 전(前) 국회의원 등 79명을 사전선거운동(사전 조직 점검, 금품수수) 혐의로 내사하고 있는데, 금명간 이들이 구속될 것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취재, 방송뉴스로 내보냈다. 1973년 1월31일 오후의 일이었다.바로 이 뉴스의 취재·보도가 ‘선거에 관한 허위보도’, ‘사전선거운동 혐의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된다 하여 서울지검 공안부가 그를 구속 기소했다. 나는 한국기자협회의 의뢰에 따라 고 기자의 변론활동에 나섰다.방송된 내용에는, “…신민당 소속 송원영씨 등 79명이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되어 오늘과 내일 사이에 구속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늘 대검찰청에 따르면,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되어 있는 전직 국회의원 79명 가운데는, 공화당 소속으로 차형근, 유범수씨와 채영석씨가 들어 있고, 신민당 소속으로는 송원영씨, 김원만씨, 유옥우씨 등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어서, 입건된 의원들의 실명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고준환 기자는 재판과정에서 취재 경위와 보도 내용은 대체로 시인하면서도 허위보도로 선거의 공정을 해치거나 정치인들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우선, 보도 중에 내사(內査)사실 및 그 대상인원 수가 허위가 아니었다. 이 점은 대검찰청 검찰사무과장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설령 검찰이 내사당사자들을 입건 또는 구속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피고인에게 ‘허위’에 따르는 형사처벌을 가할 수는 없다. 고 기자의 보도는 어디까지나 “오늘과 내일 사이에 구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전망기사였다. 따라서 기사의 작성·송고 당시에 그런 판단을 할 만했던 합리적 증좌가 있었다면, 사후에 그대로 적중되지 않았다고 해서 허위보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내사단계에 있는 사람을 입건되었다고 한 것이 허위 아니냐’는 추궁도 있었다. 그러나 내사나 입건이나 어떤 혐의가 있어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수사기관 내부의 처리방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했다고 해서 이를 범죄로 볼 수는 없다.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적용 법조로 내세운 국회의원선거법 제64조에 보면, ‘방송사업을 관리하는 자’만을 규제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고 기자는 방송뉴스부의 기자이기 때문에 위 규정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뿐만 아니라 그 뉴스의 방송은 선거운동기간 전의 보도 즉 후보 등록이 시작되기 전의 행위이므로 ‘선거법상의 후보자’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전선거운동 혐의자에 대한 후보등록 전 보도는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또한 공명선거를 계도하는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한 행위란 점에서도 명예훼손의 책임이 부정되어야 마땅했다.그러나 1심 판결은 ‘무죄’가 아니라 징역 8월에 2년간 집행유예였다. 나는 재판에서 주장한 ‘무죄론’을 항소이유로 재구성하여 2심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모두 ‘이유 없다’고 기각되었다. 다만 피고인의 취재 경위와 동기 등 제반사정과 피해자들이 피고인의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 점을 들어 형의 선고유예 판결이 나왔다.그러나 대법원(주심 민문기 대법관)은 1978년 11월 원심을 파기하여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항소심에서는 1980년 10월23일 변호인의 항소이유를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하였으며, 그 판결은 검찰이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그대로 확정되었다. 무죄이유는 ⓛ문제의 방송은 선거일 공고 전(따라서 입후보 등록 전)에 있었으므로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②명예훼손의 점은 그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인식 즉 범의가 없었다는 요지였다.처음 사건화된 때로 치면 7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으니 ‘진실보도의 승리’를 기뻐하기는 너무도 때늦은 매듭이었다.왜 그런 억지 구속, 억지 유죄판결이 나왔을까. 당시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박정희정권은 5·16쿠데타세력의 본성을 발휘하여 국민의 반독재저항을 탄압 일변도로 억누르다가 그것도 한계를 보이자 1972년 10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난데없는 ‘10월 유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헌정은 중단되고 국회 아닌 비상국무회의가 만든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공포했다.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선거 아닌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데서 간접선거를 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장치를 완비했던 것이다.그 다음 해인 1973년 1월23일 박정희씨는 통대에서 사전 각본대로 대통령에 ‘선출’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반 헌법적 정치쇼가 벌어진 지 1주일 만에 바로 고준환 기자의 구속사건이 벌어졌으니, 사건의 배경이나 이면의 노림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때 비판적 입장을 취하던 기자들이 , 동아방송에 많이 있었고 보면 의혹은 쉽게 풀린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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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1화 시대의 파편 맞은 두 문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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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CDATA[Sun, 21 Nov 2004 00:20:04]]></pubDate>
            <category><![CDATA[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121/1100964004308440.jpg" alt=""/>    ▲ 생전의 천상병 시인(오른쪽)과 부인 목순옥 여사.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했던 천 시인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천원만”하며 손을 벌리곤 했는데 후에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이것이 공갈죄로 ‘둔갑’했다.  다시 연재를 시작하며나는 1997년 5월부터 몇 달 동안 [일요신문]에 ‘정치재판의 현장에서’란 제하에 내가 변호했던 중요한 시국사건 51건을 추려서 연성(軟性)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이번에 다시 연재하는 ‘시국사건 재판의 현장’은 말하자면 그 속편이라 하겠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일어난 억압과 저항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남북의 분단과 그것을 빌미로 한 독재와 편견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만한 민주사회를 이룩하기까지의 숱한 곡절 가운데 이른바 ‘시국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좀 더 기억하고 음미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지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 또한 과거에 뿌리를 둔 결과라는 상식을 되살리지 않더라도 한 시대의 아픔이 담긴 지난날의 사건들을 되새겨보는 이런 작업은 그것대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애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121/1100964004308441.jpg" alt=""/>    ▲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한승헌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용공사건 연루 천상병그의 이름 때문에 생전에도 ‘천상(天上)의 시인’으로 불렸던 천상병 시인, 순박하면서도 잦은 기인행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귀천’(歸天)이란 명시를 이 세상에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서 더욱 유명해졌다.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거점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의 피의자 명단에 바로 그 ‘천상병’이란 이름 석 자가 끼어 있어서 세인을 놀라게 했다. 천 시인에게 무슨 용공사건에 연루될 만한 사정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동백림사건’이란 유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문화 예술인, 학자, 유학생, 지식인들이 (당시 분단 독일의) 동백림에 가서 북한 공관원들과 접촉, 반국가적 행위를 하였다는 것으로, 구속 기소된 피고인만 34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 작곡가 윤이상, 서베를린대학 박사과정 임석훈, 화가 이응노, 농업문제 전문가 주석균 등의 이름이 한층 주목을 받았다.나는 그 중 이응노 화백의 변호를 맡아서 서울구치소 접견을 다니고 있었는데, 천 시인만 변호인이 없었는 데다 밖에서 누구 접견 올 사람도 없는 듯해서 내가 변호를 자청했다. 문단 행사나 문인들의 이런저런 모임에서 그와 나는 서로 잘 아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조금도 생소할 것이 없었다.나는 그가 서울상대(商大)를 다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학벌을 짐작치 못했을 것이다. 천 시인 본인의 말인즉 여러 학과를 따로 적은 종이쪽지를 허공에 던져서 가장 멀리 날아간 대학을 택한 것이 서울상대였다. 바로 그 상대 친구의 한 사람인 강빈구씨(당시 서울대 조교수) 역시 동백림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와의 관계가 혐의사실의 단서를 이루고 있었다.공소장대로라면, 사건이 터지기 4년 전인 1963년 10월 초순 어느 날 저녁, 그는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뒷골목에 있는 대포집에서 강빈구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강씨가 자신이 동독과 동백림 등 적성국을 왕래하였으며 난수표와 출판사 이야기를 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동독에 갈 생각이 없느냐는 권유를 하더라는 것이다.그것이 무슨 범죄라고 공소장에 들어가 있는가―하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공소장에 따르면, 그것은 “동인(강빈구)이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구성원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암약중인 간첩이라는 점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치 아니하고…”라고 해서, 말하자면 반공법상의 불고지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참 무서운 법이었다.그뿐인가, 반공법 말고 형법상의 공갈죄가 얹혀 있어서 더욱이나 뜻밖이었다. 그것도 친구인 강빈구씨를 상대로 협박을 하고 갈취를 했다니 파렴치범처럼 되어버렸다.공소사실은 이러했다. 1965년 10월 중순 어느 날 낮, 강씨 집에 가서 중앙정보부에서 자기더러 동독 갔다 온 사람을 대라고 해서 난처하다는 취지로 강씨를 협박했다는 것. 그리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하여 동인에게 금 2만원만 주면 무마시켜주겠다고 금품을 요구, 동인으로부터 금 6천5백원을 교부받아 이를 갈취하고…”라고 적혀 있었다.공소사실 제3항은 또 이러했다. “그시경부터 1967년 6월25일까지 사이에 같은 방법으로 동인을 협박, 동인으로부터 1주일에 1, 2회씩 서울 명동 소재 금문다방, 송원기원 등지에서 주대 1백원 내지 5백원씩 도합 금 3만원가량을 교부받아 이를 갈취하고….”절친한 대학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2년 동안 매주 1, 2회씩 처음엔 6천5백원을, 그 다음엔 1백원 내지 5백원씩 갈취했다는 것이다. 2년도 채 안되는 동안 매주 한두 번씩 상습적으로 뜯어낸 돈의 합계가 3만6천5백원이라? 간첩 신고 협박에 1백원씩, 많아야 5백원을 갈취했다? 이것은 코미디였다.나는 천 시인이 강 교수로부터 그만한 액수의 돈을 받았으리라는 점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천 시인은 누구에게나 악의 없이 손을 내밀고 “천원만”을 버릇처럼 되뇌곤 했으니까.학벌이 좋고 문재(文才)가 뛰어났음에도 그는 가진 것 없이 헐벗어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손을 내밀곤 했던 것이다. 시인 이근배씨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참 후배인 나도 그의 수금처가 되어 거의 정기적인 내방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찾아왔다가 내가 자리에 없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김소운 수필집 를 들고 갔더란다. 헌 책방에 넘길 양으로 들고 갔던 것을 첫 장을 읽다가 그만 오전 2시까지 독파했노라고 털어놓기도 했다”는 것. 또 다른 문인 한 사람도 천 시인은 일생동안 악한 일 한 번 못하고 코흘리개 아이들과 같은 천진스런 행동으로 고작 한다는 짓이 손 내밀고 “나 천원” “괜찮아, 다 괜찮아”란 말뿐이었다고 회고했다.바로 이런 그의 언행 기벽을 아는 사람은 그가 강빈구씨한테서 1백원, 5백원을 거푸 얻어 쓴 것을 금방 이해하고 “또 수금을 했구나”하고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법정은 그런 것조차도 모두 공갈죄로 처벌했다. 징역 1년에 3년 집행유예―그런 식의 재판에 더 기대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천 시인은 항소도 하지 않았다.‘남산’에 끌려갔을 때 받은 전기고문의 후유증에다 영양실조까지 겹친 그는 길거리를 헤매야 했고, 한때 소재불명이 되기도 했다. 그가 서울 응암동에 있는 시립병원에 행려병자로 강제 입원중일 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밖의 문우들이 라는 제호가 붙은 ‘유고시집’을 낸 비화도 있다.아주 고생스러울 때 만난 아내 목순옥 여사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술을 주식처럼 즐기며 살아가던 그는 1993년 4월28일 홀연히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원한 그의 아내인 목 여사는 지금도 인사동 골목에 ‘귀천’이란 찻집을 차려놓고, 남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작품과 유품들과 더불어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img src="https://www.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04/1121/1100964004308442.jpg" alt=""/>    ▲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왼쪽)는 검찰측 감정인까지 마 교수에 유리한 의견을 냈지만 결국 패소했다.  [즐거운 사라] 수난 - 마광수교수1992년 10월29일, 소설 [즐거운 사라]의 작자 마광수 교수(연세대)가 검찰에 연행된 다음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가 형법 제244조의 음란문서에 해당된다는 혐의였다. 그동안 사문화되었거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 조문이 난데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철퇴를 휘두른 것이다.작품의 음란 시비 때문에 작가가 구속까지 된 예는 거의 없었다. 형벌(법정형)도 1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벼운 편이어서 모두가 불구속이었다. 그런데 [… 사라]의 경우는 달랐다. 그 소설책을 펴낸 청하출판사 장석주 사장까지도 구속했다.검찰은 를 변태적 성행위를 묘사해놓은 퇴폐적인 소설이라며 스스로 문학이기를 포기한 도색작품으로 몰았다. 법적으로 보자면, [… 사라]는 “성욕을 자극·흥분시키고 일반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도의관념을 해치는” 음란소설이라는 것. 그러나 ‘남녀 사이의 정사장면을 묘사한 소설이라고 해서 이를 곧 반사회적 범죄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강했다. 음란 내지 음란문서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 급변하는 개방사회의 성윤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성적 묘사를 곧 성풍속에 관한 범죄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나는 곧바로 법원에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하고, 성문제를 픽션으로 다룬 작품을 윤리·도덕에 어긋난다고 해서 형사법 차원에서 단죄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특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각’이었다. 기소된 후에 낸 보석 청구도 역시 기각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현직 대학교수를 구속까지 해놓고 재판하는 데 대한 학교 안팎의 비난은 묵살되었다.마 교수는 법정에서 문학을 법의 잣대로 잰다는 일 자체의 부당함과 구속 수사라는 극한적 방식이 표현의 자유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또 문제된 작품은 무분별한 성의 탈선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한 카타르시스 내지 대리배설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항변했다.언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각계의 공론은 찬반 양론으로 갈리어 논란이 벌어졌지만, 그 해 12월28일 재판부는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8월에 2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심에서는 시일이 많이 걸리는 감정을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구속 상태를 벗어나야겠다는 전략 아래 간략하게 심리를 끝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항소심에서는 당연히 작품에 대한 감정을 신청하는 등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법원은 민용태(고려대 교수), 하일지(작가) 두 사람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 사라]에는 음란성이 없다는 취지의 공동의견이 나왔다. 법정에서는 검찰측 신청의 감정인 민용태 교수와 담당 검사가 언성을 높이며 설전을 벌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검찰이 신청한 감정인조차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감정의견을 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나리라는 전망이 유력해졌다. 그러자 재판부는 이상하게도 검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서울법대의 안경환 교수를 새로운 감정인으로 선정했고, 안 교수는 [… 사라]가 문학작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이라는 감정의견을 내놓았다. 천만 뜻밖이었다.결국 2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이 사건 소설은 앞서 살핀 음란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으로서 형법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성풍속이나 건전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음란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나는 최종 변론 때에 좀 감성적인 공세를 시도했다. 즉 “무릇 음란물이 되자면 우선 사람의 성욕을 자극 흥분시키는 것이 첫째 요건인데, 단상의 재판관 중에 이 소설을 읽고 성적으로 흥분하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고로 무죄판결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라고….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유죄가 선고되자 주변에서 누군가 말했다. “요즘 판사들이 너무 젊어서 그 정도에도 흥분을 하신 모양이다.”나는 상고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건은 하급심에서 무죄가 났더라도 대법원에 가면 그 보수성 때문에 유죄로 뒤집힐 위험이 있는데, 하물며 1, 2심 모두 유죄가 난 마당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될 가망은 없다고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대법원은 기대해볼 만하니 상고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이유인즉 이러했다. “그래도 대법관들은 나이가 좀 많으니, 그리 쉽게 흥분하지는 않을 것이니까….”물론 그건 웃는 이야기였고, 나는 최종심의 올바른 판결을 염원하면서 상고이유서를 정성껏 써냈다. 마 교수 자신도 장문의 상고이유보충서를 통하여 항소심 유죄판결의 오류를 조리있게 해부·논증했다.음란문서 판매죄로 작가와 함께 재판을 받은 장석주씨도 시인이자 평론가답게 검찰과 치열하게 논전을 벌였고 강력한 자기방어 역량을 과시했다.그러나 ‘혹시나’ 했던 상고심 판결은 ‘역시나’로 끝났다.소설에 대한 문학 논쟁이나 윤리적 평가야 자유겠으나, “성 묘사는 퇴폐 음란이요, 반윤리요, 그러니까 범죄다”라는 식의 유죄론은 참으로 위험하다. 더구나 국가가 하루아침에 윤리 도덕의 수호신이 되어, 음란한 성 묘사는 예술이 아니니까 법의 보호대상이 아닌 범죄라고 한다면, 결국 작품의 예술성 유무를 국가권력인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우리나라 사법부가 애지중지하는 ‘음란’ 개념이란 1951년의 일본 판례를 복사한 것이고, 그 판례는 1918년 다이쇼(大正)시대의 판결에 뿌리를 둔 것인즉, [… 사라]에 대한 유죄는 재판 당시 88세 된 노인이 태어날 때, 그리고 1백세가 넘은 초장수 노인이 사춘기였을 때의 성 풍속을 다스리던 판례를 한국 사회에 들이댄 것이었다.[… 사라]의 일어판이 바로 그런 판례의 원산지인 일본에서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10만 부나 팔렸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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