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일요신문 | 소설 - 조선왕조실록</title>
        <link>https://www.ilyo.co.kr/?ac=list&amp;cate_id=76</link>
        <description>소설 - 조선왕조실록</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Sun, 27 Apr 2008 00:20:08</lastBuildDate>
        <pubDate>Sun, 27 Apr 2008</pubDate>
        <image>
            <url>https://www.ilyo.co.kr/design/images/facebook_icon_200.jpg</url>
            <title>일요신문 | 소설 - 조선왕조실록</title>
            <link>https://www.ilyo.co.kr/?ac=list&amp;cate_id=76</link>
        </image>
                <item>
            <title><![CDATA[[제2장] 조선을 건국하다 <마지막회>]]></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6</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6</guid>
            <pubDate><![CDATA[Sun, 27 Ap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고려는 종말을 맞이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부인이자 대비인 정비에게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고려의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받아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 송도에 있는 수창궁에서 즉위했다.이성계의 즉위는 고려의 도읍 송도를 경악하게 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이성계가 왕조를 찬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으나 하급관리들이나 백성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이성계는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이 때문인지 송도에서의 반발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군사들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계엄 하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송도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이튿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고 백관에게 명을 내려 고려 왕조의 정령(政令)과 법제(法制)의 장단점과 변천되어 온 내력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했다.이성계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계획이었다. 이는 정도전 등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생각이었다. 이들의 개혁 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승려들이 귀족 역할을 하면서 많은 폐단이 있었다.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장려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이성계가 즉위하면서 고려의 국성인 왕 씨들에 대한 처분이 대두되었다. 그들이 송도에 있으면 언제든지 빼앗긴 왕권을 되찾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헌부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국성 왕 씨를 송도에서 추방할 것을 요청했다.“순흥군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은 나라에 공로가 있으며, 정양군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와 관은 장차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니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라.”이성계는 왕 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보내라는 영을 내렸다. 실록에는 이성계의 영이 비교적 부드럽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는 왕 씨들을 몰살시키려는 음흉한 정책이었다. 송도를 비롯하여 전국으로 군사들이 달려가 왕 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추방되는 왕 씨들 중에는 송도의 왕족과 귀족들이 많았다. 이성계의 혁명군은 송도 앞바다에서 왕 씨들을 태운 배가 강화도를 향해 갈 때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수많은 왕 씨들이 억울하게 수장을 당해 원혼이 되었다.이성계가 고려왕조를 찬탈할 때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신인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천상(高天祥), 중보(徐仲輔) 등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 두문동)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통곡을 한 뒤에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이성계는 이들을 여러 가지로 회유했으나 두문동 충신들은 끝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때 이성계의 혁명군은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산을 불태울 때 타죽었다고 한다.이들은 두문동 72현으로 불리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이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게 되었다.이성계는 자신의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려 고조부는 목왕이라 하고, 부인 이 씨는 효비라 하였으며, 증조부는 익왕이라 하고, 부인 박 씨는 정비라 하였으며, 조부는 도왕이라 하고, 부인 박 씨는 경비라 하였으며, 부친 이자손은 환왕이라 하고, 어머니 최 씨는 의비라고 추존했다. 이어서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교지를 내렸다.“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지난 7월 16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배극렴과 대소 신료들이 간곡하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했으나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이나 하였다. 여러 사람이 또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청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하게 한다.”교서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었다.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것은 이 교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의 국성인 왕 씨가 아니었고 고려를 계승할 생각도 없었다. 이성계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그대로 둔 것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한 고도의 책략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는 이런 점에서 무략만 있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왕조가 바뀔 때는 혁신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과 경제개발을 내세웠고 전두환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내세웠다. 김영삼은 군사독재 청산을 정권의 목표로 내세웠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에 의한 도학정치였다. 고려는 확실히 쇠락한 나라였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홍건적의 침략, 왜구의 침입 등으로 고려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는데도 왕실을 지키려는 부대가 없었다는 것은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는 500년 고려의 도읍인 송도에서 벗어나 새 왕조의 일신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천도를 계획했다. 천도는 이미 이성계를 비롯한 혁명세력의 뇌리 속에 있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를 파견하여 도읍의 부지를 물색하게 했다. 그 결과 조선의 도읍으로 한양과 공주 계룡산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여러 차례 한양과 공주를 답사한 뒤에 무학대사의 주장에 따라 한양을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했다.이성계는 왕으로 즉위하고 한 달이 되자 왕세자를 세우기로 했다. 개국공신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왕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뒤였고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가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신의왕후 한 씨는 6남 2녀를 낳았고 신덕왕후 강 씨는 2남 1녀를 낳았다.강 씨는 비록 두 번째 부인이었으나 상당히 정치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려의 권문세가인 강윤성의 딸이었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송도로 진출하면서 권문세가의 힘이 필요했고 강윤성은 신흥 세력인 이성계의 힘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정략적인 계산에 의해 강 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고려는 일부다처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부인을 두어도 상관이 없었다.강 씨는 이성계보다 21세나 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단숨에 이성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 씨는 요염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녀는 정몽주가 해주에 있는 이성계를 죽이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방원을 보내 위기에서 구출하게 해준 책략가였다. 그런 강 씨가 이성계가 왕이 되고 자신이 왕비가 된 상황에서 세자를 책봉하는데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전하, 전하께서는 소첩을 어찌 생각하십니까?”하루는 강 씨가 이성계에게 간드러지게 교태를 부렸다.“핫핫핫! 그대는 송도 제일의 미인이오.”이성계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호호호. 공연히 말씀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그래. 무엇이 갖고 싶어 교태를 부리는 것이오?”이성계는 강 씨를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세자입니다. 소첩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해 주십시오.” 강 씨가 더욱 애교를 부렸다. 이성계는 강 씨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이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방번은 교만했기 때문에 공신들이 이를 난처하게 생각했다.“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이성계가 공신들에게 물었다.“막내아들이 좋습니다.”배극렴은 이성계가 강 씨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말했다.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은 끝내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가 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가장 큰 실책이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국호를 정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황제께 아뢰오니 삼가 천자께서 재가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을 통해 이성계가 명나라에 올린 청이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과 화령에서 골라달라고 명나라 천자에게 부탁한 것이다.“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명나라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보냈다.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면서 조선으로 개국한다는 교지를 반포했다.“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한상질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다. 실로 이것은 종사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이다. 지금부터는 고려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1393년 2월 15일의 일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조선의 개국은 1393년 2월 15일이 되는 것이다.끝]]></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5>]]></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5</guid>
            <pubDate><![CDATA[Sun, 20 Ap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송악산에서 내려다본 송도는 지척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성계는 말 위에 앉아서 고려의 도읍 송도를 묵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고려는 칠흑의 바다처럼 캄캄했다. 어두운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떠서 영롱하게 반짝이고 숲에서는 싱싱한 녹향이 뿜어졌다.“내일 아침, 시중 배극렴이 교지를 받아낼 것입니다.”조준이 뒤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조준의 옆에는 남은과 정도전이 서 있었다. 소위 이성계의 책사들로 그들은 왕조의 틀을 완전히 바꿀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는 이성계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한 뒤에 송도 일대는 참언과 동요까지 나돌고 있었다.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목자는 파자로 합치면 이(李)자가 된다. 물론 그 동요는 이성계 쪽에서 송도의 인심을 얻기 위해 퍼트린 동요였다. 송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녀 민심이 흉흉했다.“고려는 500년 왕업을 이어 왔네.”이성계가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막상 결단을 내리려고 하자 무거운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가 거느린 군사들이 배신하여 고려왕조에 붙어버리면 한순간에 몰락하게 된다. 이성계 자신은 물론 가문이 멸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송도는 태풍전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500년 역사를 찬탈하려는 순간이 닥쳐왔는데도 고려 도읍 송도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것이다.“역성혁명입니다.”정도전이 낮게 말했다. 역성혁명이니 비상한 각오를 해야한다는 뜻이다. 역성혁명은 임금의 성을 바꾸는 것이다. 몰락한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탄생시키는 일이다. 위정자들은 역사를 찬탈할 때 천명을 받았다고 한다. 역사가 바뀔 때 백성들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위정자들은 백성들을 현혹하기 위해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늘을 속이고 백성들을 속이는 일이다.“군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고려 왕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일은 군대가 하는 일이다. 이성계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심지가 깊은 인물이었다. 역사를 바꾸려고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새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는 모양새를 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노회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다. 무예가 당대에 가장 출중한 인물이면서도 책략 또한 따를 사람이 없다.“잠시만 기다리라.”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송악산 주봉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1392년 7월11일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이 창천에서 신비스러운 월광을 뿌리고 있었다. 이성계의 수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성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송악산에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천신대(天神臺)가 있었다. 이성계는 지금 그 곳을 향해 혼자서 휘적휘적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송악산에서 가장 높은 주봉이었다. 희디흰 달빛이 나뭇잎과 골짜기를 휘감으면서 온 누리에 밝은 빛을 뿌렸다.“하늘이시여, 이성계를 보우하소서.”이성계는 천신대에 이르자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지난 며칠, 전쟁터로 출전할 때보다 더 무거운 긴장감이 엄습해 와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비상한 각오로 새 왕조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었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고려는 공양왕이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이성계의 군대에 짓눌려 있었다. 임금을 마음대로 폐하고 세우는 이성계였다. 그가 한 마디 명령을 내리면 무시무시한 피바람이 불어 닥친다. “계획대로 도모하라.”이성계는 한 시진 만에 송악산 주봉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남은, 조준, 정도전에게 무겁게 말했다. 정도전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이튿날 조정을 대표하여 시중 배극렴이 공민왕의 부인인 왕대비 앞에 나아갔다.“지금 왕이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내각 수반인 시중 배극렴이 아뢰자 왕대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배극렴의 뒤에는 무장한 장수들이 따르고 왕궁 곳곳에도 창칼을 번뜩이는 군사들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명령만 내리면 모조리 도륙해 버리겠다는 살벌한 기세였다. “누구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오?”왕대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대비도 이성계와 동맹을 맺은 공양왕이 군대에 에워싸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성계 장군입니다.”“이성계 장군은 이성(異姓)이 아니오?” 왕대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양왕 대신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은 고려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의 왕대비로 이는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그러나 한낱 여인인 왕대비가 막강한 군사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교지를 내려주십시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새 왕조를 세우는데 전 왕조의 왕비인 왕대비가 교지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나라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쓰지 않으려고 교지를 청한 것이다. 왕대비는 어쩔 수 없이 교지를 내려주었다. 남은은 왕대비의 교지를 가지고 공양왕에게 갔다. 공양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부복하여 교지를 받았다.“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어리석어 임금 자리에 앉았으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공양왕은 울면서 왕관을 벗고 왕궁을 나갔다. 임금이 신하의 심기를 거스른 일을 걱정하니 기가 막힌 일이다. 공양왕의 처지를 잘 대변해 주는 말이다. 이성계의 군사들이 공양왕을 원주로 호송했다.1382년 7월 16일,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 김사형 등 대소신료와 한량(閑良), 기로(耆老)를 거느리고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으로 향했다. 송도의 북천동 이성계의 집 앞은 벌써 새 임금이 선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는 홀로 슬퍼하면서 고려가 멸망한다고 애통해 했다. 남은이 벌컥 화를 내고 민개를 죽이려고 하자 이성계가 만류했다.“의리상 죽일 수 없다.”이때 이성계의 집에서는 일가의 부인들이 이성계와 부인 강 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에 만 밥을 먹고 있었다. 조정대신들과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오자 부인들이 모두 당황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이는 실록 태조 총서편에 있는 기록으로 이성계의 인품을 강조하기 위해 씌어진 기록이다. 배극렴 등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성계는 문을 닫고 배극렴 등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해 질 무렵에 이르러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았다. 이성계는 두려워하여 이천우를 붙잡고 겨우 침실문 밖으로 나왔다. 백관이 일제히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왕씨가 건국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간신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요망스런 중 신돈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한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의 제사는 이미 폐해진 것입니다.”이는 고려왕실의 대가 끊어져 부득이 이성계가 임금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이 맨 먼저 대의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키니, 우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 조민수 등이 신우의 처부(妻父)인 이임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 씨의 후사가 두 번이나 폐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공에게 대위에 앉으라고 명한 것인데, 공은 겸손하게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거의 사직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견책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 공양왕)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잃고 백성의 마음이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군정과 국정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배극렴 등이 꿇어 엎드려 아뢰었다.“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이성계는 왕위에 오를 뜻이 없다고 사양했다. 대신들과 이성계가 몇 번이나 권하고 사양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못하여 수창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백관들이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내가 수상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로도 피할 수 있지만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이성계는 마침내 영을 내려 고려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들에게 예전대로 정무를 보라는 영을 내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4>]]></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4</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4</guid>
            <pubDate><![CDATA[Sun, 13 Ap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역사가 급변할 때나 위기가 닥치면 그 징후가 나타난다. 고려 말은 몽고의 침임 이후 외적의 침입이 더욱 잦았다. 고려의 왕들은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시호에 충(忠)자를 반드시 넣어서 충목왕, 충선왕, 충혜왕, 충숙왕 등 충자 퍼레이드를 벌였다. 국가의 자존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개혁하려는 의지는 쇠퇴했다. 초원의 제국 원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배원친명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국가의 기강이 사라지고 신돈에게 정사를 의탁하여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져 신하들이 왕을 죽이는 시해사건까지 발생했다. 권력층이 부패하게 되자 백성들도 도탄에 빠졌다.고려 말의 전설에 불가사리 이야기가 있다.송악산 밑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과부는 끈적거리는 욕망을 인내하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욕망은 갑자기 일어나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여인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풍만한 가슴을 애무했다. 그때 여인의 몸에서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스멀거리고 기어 나왔다. 여인이 의아하여 벌레를 살피자 벌레는 옷감으로 기어 올라가 바늘을 씹어 먹고 있었다.‘세상에!’여인은 깜짝 놀라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벌레는 여인이 쳐다보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늘을 먹어치웠다. 여인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바늘쌈지에서 다른 바늘을 꺼내주자 벌레가 또 다시 냉큼 먹었다. 여인은 소스라쳐 놀랐다. 벌레는 순식간에 여인의 바늘 쌈지를 먹어치우고 문고리까지 씹어 먹었다. 여인은 기겁을 하고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방안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 치운 벌레는 점점 몸집이 커져서 부엌에 있는 무쇠 솥이며 부엌칼을 먹어 치우고 헛간의 농기구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여인의 집에서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운 벌레는 쇠붙이를 찾아 마을로 기어갔다.“괴물이 나타났다!”거대한 몸집으로 변한 벌레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벌레는 마을의 쇠붙이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마을 사람들의 신고를 받은 군사들이 달려왔다. 군사들은 집채만큼 커진 벌레를 보고 경악하여 활을 쏘고 창을 던졌으나 벌레는 쇠붙이를 먹으면서 더욱 커졌다. 벌레는 마침내 송도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운 뒤에 산처럼 커진 몸으로 바다로 기어들어갔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밀어닥친 것은 벌레가 송도의 쇠붙이를 모두 먹어치우고 바다로 들어간 뒤였다. 군사들의 창이며 칼조차 모두 벌레가 먹어치우는 바람에 이성계는 손쉽게 송도를 점령했다. 이는 고려가 멸망한 뒤에 송도 일대에 나돈 괴담으로 불가사리라는 전설이 된 이야기다. 쇠붙이를 먹는 벌레를 불가사리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탐욕과 욕망의 사회를 경계하려고 만들어진 전설로 보인다. 우왕이 내시들을 거느리고 이성계를 급습하여 죽이려고 한 사건은 그의 멸망을 재촉했다. 고려 도읍 송도를 손에 넣은 이성계의 세력은 우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옹립하려고 했다. 그들은 왕궁밖에 진을 친 뒤에 고려 조정을 좌우했다. 이때 이성계의 세력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은 남은, 조준, 정도전, 조인옥, 조박(趙璞) 등 52인이나 되었다. 그들은 이성계를 추대하려고 했으나 이성계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서 거절했다. 고려에는 아직도 당대의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등이 있었다. 이색은 내외에 신망이 높아서 국정의 수장인 문하시중을 맡았다. 이성계 등이 이색에게 문하시중을 맡긴 것은 온건한 인물이어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이색은 소신껏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좌장군을 지낸 조민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자파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우왕의 아들 창왕이 추대되자 이성계는 민심을 얻기 위해 부패한 고려 조정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일파인 대사헌 조준이 전제(田制)의 개혁을 주장하고, 간관 이행(李行),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제개혁은 귀족들의 부를 축소하는 것이어서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조민수 역시 전제 개혁을 반대했다. 이성계가 고려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멸망으로 치달리고 있는 고려를 구하려는 인물도 있었다. 최영의 조카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는 몰래 황려부(黃驪府: 여주)에 찾아가서 우왕을 알현했다.“내가 평소부터 곽충보(郭忠輔)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가 곽충보와 계획을 세워 이성계를 제거하라.”우왕이 울면서 김저에게 부탁했다. 김저는 이에 곽충보를 찾아가 이성계를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김저는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이성계를 암살하기 위해 한밤중에 장사들을 거느리고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이미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김저는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우왕파의 암살시도에 이성계 일파는 분노했다.“우왕이 이런 계책을 세웠으니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우왕을 죽이면 창왕은 어찌할 것인가?”“우왕과 창왕 모두 신돈의 자식이라고 몰아 세워 쫓아내면 될 것입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는 판삼사사 심덕부, 찬성사 지용기, 정몽주, 정당 문학 설장수, 평리 성석린,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덕부사 박위, 밀직 부사 정도전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회의를 했다. 군사들이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열린 회의는 이성계 일파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우(禑)와 창(昌)은 본디 왕씨(王氏)가 아니므로 왕이 될 수가 없다.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 임금을 새로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 요(瑤)는 신왕(神王)의 7대 손자로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왕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이성계는 심덕부와 함께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즉시 공민왕의 부인인 정비(定妃)에게 통고하고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기고, 창왕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공양왕의 이름은 왕요(王瑤)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이었다. 창왕의 폐위는 그를 추대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돌아간다.창왕을 폐위시키면서 이성계 일파는 이색과 조민수의 제거에 나섰다.“조민수는 적신 이인임에게 편당하여 멋대로 탐욕하고 포악함을 부려 풍속을 크게 문란하게 하였으며, 또 주장(主將)으로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가로막고, 창을 세워 종묘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낭사 윤소종이 조민수를 탄핵했다. 사헌부에서도 소를 올려 이색과 조민수를 탄핵했다. 그들의 죄는 신돈의 아들 창왕을 고려의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었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이었다. 이림은 조민수와 인척 관계였다. 2월에도 간관들이 또 소를 올려 이색과 조민수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결국 조민수와 이색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1389년 12월이 되자 사재 부령 윤회종(尹會宗)이 소(疏)를 올려 우왕과 창왕을 목을 베라고 주장했다. 공양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이 일은 쉽사리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한 일로써 중국에 아뢰었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 등이 있는데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하나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실록은 이성계가 우왕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계가 반대한 것은 형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계의 부하들이 공양왕을 압박했다.“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제 자신에 죽음이 미친 것이 마땅하다.”공양왕은 우왕을 죽이라는 영을 내렸다. 우왕은 유배지 강릉에서 살해되고 창왕은 강화도에서 살해되었다. 창왕은 불과 10세였으나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되었다.고려는 500년의 사직을 면면하게 이어온 국가였다. 500년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과 비전이 필요하다. 이성계가 등장할 무렵부터 호국불교의 국가인 고려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배불숭유론이 일어났다. 1391년 정몽주를 격살한 뒤, 조준, 정도전 등은 고려의 행정체제를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6조로 개편했다. 배불숭유론에 의해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신흥세력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했다. 신진사대부들의 거센 개혁 주장과 함께 이성계의 전횡에 대한 비난도 일어났다. 이성계는 벼슬을 버리고 동북면으로 돌아가는 시늉을 했다.“공의 한 몸은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에 남아 도와서 현인을 등용시키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을 잡으십시오.”정도전이 만류했다. 이성계는 못 이기는 체하고 송도에 남아 권력을 휘둘렀다.“내가 장차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니, 경 등이 내 뜻을 살펴 이성계에게 전하고, 맹서(盟書)를 초하여 오라.”공양왕이 조용에게 말했다.“맹세는 성인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열국의 동맹 같은 것은 옛날에 있었으나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동맹을 맺는 것은 고사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조용이 깜짝 놀라 반대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에 눌린 공양왕은 조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었다.“경이 있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이 같은 맹약이 있기 때문이다.”문맥을 보면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양왕은 맹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즉위한 뒤에 살해된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3>]]></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3</guid>
            <pubDate><![CDATA[Sun, 06 Ap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꿔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는 이성계를 미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조민수가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거나 요동정벌군이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회군할 때 폭우가 쏟아져 위화도가 물에 잠겼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인해 화를 면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장마철에 군사를 일으킨 우왕과 최영에게도 실책이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와의 외교적인 노력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성급하게 요동정벌군을 출정시켜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대규모의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항상 군왕들이 장수들을 의심한다. 우왕과 최영은 막강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이성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승패를 확신할 수 없는 요동정벌군에 이성계를 내세운 것은 그의 군대를 소모시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이성계의 군대가 명나라군과 싸우다가 승리하든지 패하든지 전력 손실을 입는 것뿐이었다.노회한 장군들의 전략은 이 부분에서 불꽃을 튀긴다.왕과 최영은 이성계를 출정시키면서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 훗날 정종이 되는 이방과, 이두란의 아들 이화상을 우왕과 최영이 지휘하는 성주의 전시사령부에 배속시켰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키면 그의 두 아들을 죽이려는 음모였다. 이성계의 아들들은 최영의 인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방원은 전리정랑(典理正郞)으로 개성에 있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대군을 이끌고 회군한다는 소식이 최영에게 날아온 것은 반란군이 이미 성주 가까이에 쇄도하고 있을 때였다. 최영은 깜짝 놀라 이성계의 아들들을 잡아들이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이성계의 아들들이었다. 이방우, 이방과, 이화상은 최영이 군사들을 보내 군영으로 오라는 영을 내리자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아버지가 회군하고 있다. 우리는 아버지의 군영으로 가야한다.”이방우가 긴장하여 이방과와 이화상에게 말했다. 그들은 수하 몇 명과 함께 최영이 보낸 군사들과 혈전을 벌인 끝에 최영의 군진을 빠져 나와 이성계에게 달아났다.“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습니다.”최영은 우왕을 모시고 황급히 전시사령부가 있는 성주에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최영과 우왕이 도망치듯이 개성으로 돌아오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파죽지세로 평양을 지나 개성까지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력이었다. 이성계의 반란군 못지않게 빠르게 움직인 인물이 이방원이었다.이성계는 부인이 둘이었다. 정실부인인 한 씨는 포천 재벽동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 씨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다. 이성계가 포천에 집을 둔 것은 동북면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최영과 우왕이 허겁지겁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개성을 탈출하여 포천으로 달려갔다. 포천의 집에는 벌써 노복(奴僕)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뒤였다. “어머니, 속히 달아나야 합니다.”이방원은 어머니 한 씨와 강 씨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날 무렵에는 벌써 관리들이 삼엄하게 기찰을 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밤을 이용하여 이동하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서 유숙했다. 자신들의 세력권인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 100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했다.“최영은 일을 환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이방원은 나이가 어렸으나 가족을 지켰다.개성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대군이 몰려오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한 개성의 백성들이 다투어 산으로 달아났다. 개성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6월 1일, 이성계는 개성의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을 치고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 앞에 진을 쳤다. 최영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어에 나섰다.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평시에는 공론이 활발하다가도 전투가 벌어지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조정이었다. 고려의 조정 대신들은 권력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집으로 달아나서 대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고려 조정은 순식간에 텅텅 비었다.‘조민수가 어찌 이성계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최영은 조민수가 이성계를 견제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탄식했다. 조민수에게 이성계를 감시하라고 맡겼는데 오히려 그에게 가담한 것이다. 이성계의 반란군과 최영의 정부군은 성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소인이 선봉이 되어 공격하겠습니다.”이성계의 부장 유만수(柳曼殊)가 청했다. 이성계는 빙그레 웃으면서 허락했다.“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돌아올 것이다.”유만수가 출정하자 이성계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침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반란군과 정부군은 선인문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화살이 비 오듯이 날고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유만수의 군사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선인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최영이 비록 늙었으나 고려 최고의 명장이었다. 이성계가 예측한 대로 유만수는 과연 변변하게 싸우지도 못하고 최영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돌격하라! 우리가 먼저 최영을 잡아야 한다.”조민수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조민수의 군사들이 일제히 정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만수의 군사를 격파한 최영은 영의서교 쪽으로 달려가 조민수의 군사와 맞섰다. 조민수는 흑색 깃발을 앞세우고 영의서교 쪽을 공격하고 이성계는 황색 깃발을 앞세우고 선인문을 공격했다. 최영은 조민수의 군사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최영의 부장 안소(安沼)는 이성계를 맞아 싸웠다. “도성에는 오합지졸뿐이다. 돌격하라!”이성계가 칼을 들고 말 위에서 호령했다. 이성계의 군대는 고려 최강의 군대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선인문을 돌파하고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으로 올라갔다. 최영의 휘하 안소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을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달아났다. 이성계의 군대는 정예병이라 안소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대라(大螺: 큰 소라. 나팔)를 불었다. 부우우웅….소라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개성 곳곳으로 퍼져갔다. 이성계의 소라 소리에 최영의 군사는 사기를 잃고 이성계의 군사들은 사기가 높아졌다. 성안의 백성들이 이성계의 군대를 환영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술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대접했다. 백성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최영의 군사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언제든지 승자 쪽에 붙는 것이 민심이었다. 이성계의 군사들은 최영의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최영의 군사들은 공포에 질려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아아 고려 500년 사직이 여기서 끝나는가?’최영은 이성계의 군사들을 막을 수가 없자 비통했다. 하늘이 고려를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인문을 돌파한 이성계의 군사들은 고려 왕궁을 수백 겹으로 포위했다. ‘오오 난군이 왕궁을 포위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군사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우왕은 영비(靈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궁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최영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달아나서 대궐이 텅텅 비었다. 곽충보(郭忠輔) 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냈다. 이성계는 왕궁을 점령했으나 팔각전으로 난입하지는 않았다. “폐하, 옥체를 보존하소서. 옥체를 보존하시면 반드시 설욕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이성계의 부하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최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왕에게 절을 올렸다.“경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경은 나를 버리지 말라.”우왕이 울면서 최영을 만류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최영은 우왕에게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대의(大義)에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 거병했습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이성계가 비통하게 말했다.“그대가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겠소?”최영이 울자 이성계도 마주보고 울었다. 이성계는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시켰다. 최영은 이후 합포와 충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가 공료죄(攻遼罪: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으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에 참수되었다. 최영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했으며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최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영이 제거되자 고려는 이성계의 수중에 장악되었다.‘내가 이성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우왕이 밤에 환자(宦者: 내시)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죽이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으나 그들이 모두 전문(殿門)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이성계는 내시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한 우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성계의 부하들이 우왕을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이성계는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우왕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 뒤에 강화로 쫓아 보냈다. 이성계는 고려 최고의 학자인 이색(李穡)에게 문의하는 시늉을 하고 불과 9세인 우왕의 아들 창을 고려의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2>]]></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2</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2</guid>
            <pubDate><![CDATA[Sun, 30 Ma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고려말은 내정이 어지러운데 외침까지 잦았다. 중국에서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동북아 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왜구가 자주 침입을 하는가하면 여진까지 무리를 지어 고려를 침략하고 홍건적까지 10만이나 되는 무리를 모아 고려를 침략했다. 1382년에는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사들을 궤멸시켰다. 이어서 고려 조정에 안변책(安邊策)을 올렸다.이성계는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北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고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대파했다. 1388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 염흥방을 주살하여 내정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최영은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면서 고려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명나라는 원나라를 축출하고 고려에 철령 이북이 한때 원나라 영토였으니 명나라에 반환하라는 요구를 해왔다.“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 한인(漢人), 여진, 달달, 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인 내용이었다. 고려의 정당(政堂:조정)은 명나라의 통고에 발칵 뒤집혔다. 영토 문제는 어떤 임금이든지 한 치도 빼앗길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게다가 철령 이북은 동북면으로 이성계의 세력권이었다. 이성계의 참모들은 요동에서 날아온 첩보에 대경실색했다. 정도전, 조영무를 비롯해 이방원 형제들이 모여 심각하게 대책을 숙의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말했다. 이성계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대책이 없었다. 고려 조정도 명나라의 요구에 대책을 세우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고려는 명나라의 요구에 정국이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위태롭게 돌변했다. 최영이 정당에서 여러 재상과 함께 요동을 칠 것인가, 화친을 청할 것인가 가부를 의논하자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에 찬성했다. 다만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령 이북이 원나라가 한때 점거한 것은 사실이나 짧은 기간 점거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고려의 영토이니 외교적인 노력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사신을 파견했으나 명나라는 고려의 주장을 한 마디로 묵살했다.“철령 이북은 원래 원 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 심양, 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돌려보내라.”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사신 설장수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명을 전했다. 최영은 비밀리에 우왕을 만나 요동을 칠 것을 건의했다. 고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셈이었다. 특히 이성계는 자신의 세력권인 함경도가 명나라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묵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이성계는 전략상 겨울에 요동을 칠 것을 주장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요동이 전쟁 준비를 갖추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왕이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동원하라는 영을 내렸다.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동원하면서 전국이 전쟁의 바람에 휩쓸렸다. 이성계는 최영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우리가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저들이 철령 이북 때문에 전쟁을 하겠는가?”최영이 이성계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최영을 따르는 장수들도 병풍을 치듯 둘러서서 흉흉한 살기를 뿜으며 이성계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렇다면 압록강까지 가서 군사를 회군시킬 것입니까?”이성계도 매서운 눈으로 최영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이성계의 뒤에도 전쟁터를 누비던 맹장들이 눈을 번들거리며 살기를 뿜었다.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했다.“군사를 일으키고 어찌 철군을 하겠는가?”최영이 언성을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요동을 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시기라도 조절해야 하지 않습니까?”“왕명이다. 장군은 왕명을 거역하지 말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명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4불론(四不論)을 내세웠다. 그러나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성계는 다시 대궐에 들어가 우왕에게 요동 정벌을 중지할 것을 아뢰었다. 우왕은 이미 영을 내렸으니 돌이킬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치고 군사를 일으키는 이상 그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과 긴밀하게 협의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에 임명하여 5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되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을 설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보고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비상한 책략을 세웠다.우왕은 최영을 거느리고 자신이 직접 평양까지 출정하여 군사를 감독했다.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고,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에 충당했다. 고려는 좌군과 우군이 합하여 5만여 명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10만 군사라고 선전했다. 고려의 요동정벌군은 5월이 되어서야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다. 이때 여름이 시작되어 위화도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전쟁과 폭우에 놀라 도망하는 군사가 속출했다. 우왕이 도망병들을 모조리 잡아서 참수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금지시키지 못했다.“신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러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도에서 우왕에게 상언을 올렸다. 상언의 내용은 철령 이북의 영토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군사를 회군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조민수와 이성계는 군사적인 이유까지 들어 철군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조민수 장군 같은 인물이 무엇 때문에 이성계에게 가담했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러나 조민수와 이성계는 여러 차례 회군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우왕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군심이 흉흉해졌다.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을 정벌할 의사가 없었고 조민수는 충실하게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우왕과 최영이 회군한다는 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자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성계 장군이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고려 요동정벌군에는 이성계가 떠난다는 말이 떠들썩하게 퍼졌다. 조민수는 당황하여 이성계를 향해 달려갔다. 이성계 군사들이 떠나면 조민수의 군사들로 요동을 정벌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단독으로 회군할 입장도 아니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찾아온 조민수를 회유와 협박으로 설득했다. 이미 조민수의 수하 장수들까지 모두 몰려와 이성계에게 가담한 상태였다. 조민수는 어쩔 수없이 이성계에게 가담하고 무릎을 꿇었다. “만약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상대로 국경을 침범하면 큰 나라가 그냥 있겠는가. 내가 순리와 역리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은 살피지 아니했다. 최영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왕에게 직접 아뢰어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나를 따르겠는가?”이성계가 여러 장수들 앞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선언했다. 군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성계는 악인을 제거한다고 했지만 이는 고려의 왕인 우왕의 제거까지 염두에 둔 말이다. 이성계의 휘하 장수들을 비롯하여 조민수의 장수들까지 반란에 가담한 것은 고려말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나 반기를 드는 것을 장수들이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대들은 나를 따르겠는가?”이성계가 다시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장군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누구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장수들이 일제히 이성계의 영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전군은 회군한다. 회군!”이성계가 마침내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영을 내렸다. 이성계는 즉시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과 백우전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지휘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군사들이 겁을 내고 다투어 건넜다.“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장군은 없었다.”이성계가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군사들이 감동에 젖어서 말했다. 이때 장마가 사흘 동안 계속되었는데도 물이 범람하지 않다가 5만의 대군이 차례로 건너가고 난 뒤에야 큰물이 쏟아져 내려와 위화도가 물에 잠기자 군사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생각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1>]]></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0</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0</guid>
            <pubDate><![CDATA[Sun, 23 Ma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조선왕조실록이 이성계의 무용을 과장했다고 해도 그의 무예는 가히 신화적이었다. 그의 활솜씨는 백발백중이었고 기마술도 따를 자가 없었다. 이성계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명중시켰다. 시위소리가 일어날 때마다 왜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왜구는 이성계의 귀신같은 활솜씨를 보고 공포에 떨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산에 의거하여 진을 펼치고 내려오지 않았다. 이성계는 요해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장수들에게 산에서 버티고 있는 왜구를 공격하게 했다. 장수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산으로 달려 올라갔으나 왜구의 저항이 맹렬하여 패했다.‘시간이 흐르면 군사들이 지치게 된다. 속전속결로 적을 격파해야 승리할 수 있다.’병법으로 볼 때 산 위에 있는 적을 산 아래에서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기꺼이 병법의 하책을 이용하여 왜구를 격파할 결심을 했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이성계는 군사들의 대오를 정돈하고 자신이 선봉에 서서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왜구는 화살을 비 오듯이 날린 뒤에 진을 나와 응전했다. 전투는 다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는 훗날 황산대첩이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했고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성계는 왜구의 숫자가 훨씬 우세하고 지세가 불리했는데도 정공법으로 몰아붙였다.“장군, 뒤를 보십시오.”이성계의 뒤에서 적장이 긴 창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것을 본 이성계의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성계는 미처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두란이 황급히 활을 꺼내 적장을 쏘아 죽였다. 이성계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겼다.“병사들은 나를 따르라!” 이성계가 야차처럼 왜구를 공격하자 왜구도 필사적으로 응전했다.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수라의 지옥으로 변해 갔다. 사방에서 피보라가 자욱하게 뿌려지고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팔다리가 잘린 병사, 창자가 쏟아져 나온 병사, 목이 잘린 병사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워 시산혈해로 변해 갔다. 이성계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갑옷이 혈의로 변했는데도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왜구를 도륙했다. 그의 칼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왜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이성계는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져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졌으나 전쟁의 화신처럼 다시 바꾸어 타고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칼을 휘둘렀다. “앗!”그때 날아오는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꽂혔다. 이성계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왜구와 싸워 고려군은 이성계가 상처를 입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적장을 죽여라! 적장을 죽여야 승리한다!”왜구는 이성계를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이성계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앞으로 돌진했다. 왜구들이 이성계의 앞에서 파도가 몰아치듯이 공격을 해왔다. 이성계가 선두에서 달려오는 왜구 8명을 죽이자 왜구들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앞으로 돌격하라!”이성계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그의 갑옷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산에는 왜구와 아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성계가 피투성이가 되어 용전분투하자 고려의 장수와 군사들이 감동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했다. 왜구들은 야차처럼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이성계를 보고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저 자는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참으로 용맹하구나.’이성계는 왜장 하나가 무예가 뛰어난 것을 보고 감탄했다. 왜장은 나이가 겨우 15, 6세쯤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했으나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감히 대적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아기발도(阿其拔都)다!”이성계의 군사들은 그가 나타나면 일제히 피했다. 이성계는 그의 용맹하고 뛰어난 무예를 아껴서 이두란에게 산 채로 사로잡으라는 영을 내렸다. “장군,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 쪽 사람들이 많이 상하게 할 것입니다.”이두란이 불가능하다고 아뢰었다. “그렇다면 목을 베어라!”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가 영을 내렸다. 아군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를 사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이두란을 비롯하여 고려의 장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활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이두란이 이성계에게 활을 쏠 곳이 없다고 말했다.“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이성계가 이두란에게 영을 내렸다.“장군의 영에 따르겠습니다.”이두란이 말을 세우고 활을 쏠 준비를 했다. 이성계는 즉시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아기발도의 투구를 쏘아 정자를 명중시켰다. 아기발도는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자 급히 투구를 바르게 쓰려고 했다. 그때 이성계가 두 번째 화살로 재빨리 투구를 쏘아 또 정자를 맞춰 투구를 떨어트렸다. 이두란이 즉시 활을 쏘아서 아기발도를 죽였다. “아기발도가 죽었다!”왜구들은 아기발도가 죽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성계는 군사를 휘몰아 왜구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왜구들은 아기발도가 쓰러진 이후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 패퇴했다.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으로 달아났는데 통곡하는 소리가 1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고려군은 승세를 타고 산으로 달려 올라가면서 북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전의를 상실한 왜구들이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쓸리면서 고려군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고려군은 그들을 뒤따라가면서 창으로 찌르고 목을 베어 대파했다. 시체가 골짜기마다 가득하고 냇물이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만에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전리품으로 1600여 필의 말을 얻고 무기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왜구는 고려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 방면으로 도망쳤다.  “적군의 주력은 괴멸되었다. 적의 씨를 남기지 않는 나라는 없으니 그들이 돌아갈 길을 열어주라.” 이성계는 왜구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지 말라고 지시했다.“장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이두란과 이지란을 비롯하여 휘하 장수들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이 전투에는 이성계의 여러 아들도 참가했는데 이방원을 비롯하여 많은 아들들이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군악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왜구의 수급(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기발도가 장군님이 진을 설치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왜구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돌아온 병사들이 이성계에게 보고했다.“핫핫핫! 아기발도가 왜구라고 해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구나.” 이성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성계는 송도로 승전보를 올리고 천천히 개선하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대승은 어지러운 고려 조정을 승전 무드로 바꾸었다. 이성계의 개선군이 보무당당하게 돌아오자 판삼사(判三司)의 벼슬에 있던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다. 이성계가 말에서 내려 재빨리 재배했다.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최영도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이라고 불리는 운봉전투로 고려의 영웅이 된 것이다. 송도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이성계를 환영했다.“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왜구들의 주력은 완전히 격파했사오나 혹시 만약에 다시 침략해 온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이성계가 머리를 숙여 사례했다. 우왕도 이성계의 승전을 기뻐하면서 황금 50냥을 하사했다.“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황공하여 받을 수가 없습니다.”이성계는 사양하면서 아뢰었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치하했다.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위엄은 청구(靑丘)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출목연(出牧筵)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이색은 고려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간신들조차 떠받드는 인물이었다. 그가 시를 지어 이성계의 승전을 치하하자 이성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0>]]></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9</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9</guid>
            <pubDate><![CDATA[Sun, 16 Ma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나하추도 원나라의 맹장이었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허공을 갈랐다. 창과 창이 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고 백광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이성계는 용력도 비상했으나 몸이 민첩했다. 수십 합을 크게 싸우자 거구의 나하추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싸울수록 기운이 솟고 나하추는 떨어졌다. 양군의 군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이들의 격전을 지켜보았다.“이 만호(萬戶)여, 두 장수끼리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물러갑니다.”나하추는 급히 말을 몰아 달아나기 시작했다.“이놈!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달아나느냐?”이성계가 벼락을 치듯이 호통을 치고 나하추를 향해 활을 쏘았다. 나하추가 깜짝 놀라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화살이 말의 목을 꿰뚫었다. 나하추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장군님!”나하추의 군사들이 황망히 달려와 나하추를 구출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다가 해가 기울었기 때문에 진을 물렸다. “이제 해가 지고 있다. 놈들은 함관령을 넘어 본진으로 돌아갈 것이다. 별동대를 조직해 놈들을 기습하라.”나하추는 이성계에게 당한 일이 분하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원나라 군사들은 전 세계를 짓밟은 용맹한 몽고 군사들이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함관령으로 소리없이 달려가 본진으로 돌아가는 이성계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나하추는 맹장이다. 반드시 기습을 해올 것이다.’이성계는 본진으로 돌아가는 군사들의 후미를 맡았다. 과연 그가 예측한 대로 해가 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하추의 별동대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기습을 해왔다. 함관령은 산세가 험고해서 꼬불꼬불한 길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영공(令公), 나를 구해 주시오. 영공, 나를 살려주시오.”군사를 감독하는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맨 아래 쪽에 있다가 황급히 이성계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성계가 위에서 내려다보자 은갑옷을 입은 두 적장이 이파라실을 쫓아오면서 창을 겨누고 있었다. 이성계는 재빨리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거의 신화적이다.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게 활을 쏠 수 있었다.“이성계다. 저 자를 죽여라!”나하추의 별동대가 함성을 지르면서 이성계에게 달려왔다. 이성계는 당황하지 않고 화살 서너 대를 한꺼번에 쏘았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맹렬한 파공성이 일어나면서 나하추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나뒹굴었다. 이성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인의 적을 화살로 쓰러트렸다. 원나라군은 필사적으로 이성계를 향해 공격을 해왔다. 한 적병이 이성계를 겨누고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자 이성계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그때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이성계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성계는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섰다. 그러자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갔다. 이성계는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꿰뚫었다. 또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완전하게 둘러싸고 있었다.‘화살을 날릴 데가 없구나.’이성계는 속으로 감탄했다. 적장은 별도로 턱의 갑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했기 때문에 아무리 살펴도 활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말을 쏘자 말이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었다. 적장이 깜짝 놀라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입이 자연스럽게 열려 이성계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적장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적장이 쓰러지자 적이 당황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용감한 철기병으로 이들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의 철기병들이 맹렬하게 공격하자 적병은 다투어 달아나느라고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고 뒤엉켜 진이 흩어졌다. 이성계는 정주에 진을 치고 수일 동안 머물면서 병사들을 휴식시켰다.‘적을 유인해 섬멸해야 한다.’ 이성계는 휴식을 하는 동안 작전을 세웠다. 적들은 초원의 기병들이라 산악지대에는 약했다. 이내 휴식 기간이 끝나자 요충지에 복병을 배치하고 군사를 삼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성곶(城串)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은 도련포(都連浦)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송두(松豆)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드넓은 함흥평야에서 대진했다. 나하추의 군사는 수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이성계는 용기를 내어 단기로 돌진하면서 적을 시험해 보았다.“나는 고려의 장군 이성계다. 나와 겨룰 자가 있으면 나오라!”이성계는 적의 진중을 향해 크게 외쳤다.“기다려라. 내가 간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창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달려왔다. 이성계는 세 장수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이놈들이 나하추의 부장들이구나.’이성계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말을 채찍질해 재촉하는 시늉을 하자 세 장수가 다투어 뒤쫓아 가까이 왔다. 이성계가 갑자기 또 나가자 세 장수의 말이 노(怒)하여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가 재빨리 멈춘 이성계를 앞질렀다. 이성계가 뒤에서 그들을 쏘자 세 장수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성계는 말들을 유인하여 적의 장수들을 죽인 것이다. 고려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창을 흔들었다.“공격해라! 총공격!”나하추가 격분하여 손수 북을 치면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성계는 그들을 유인하여 말들이 잘 달리지 못하는 계곡에서 대파했다. 나하추의 군사들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이성계를 당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나하추는 이성계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 그는 신무(神武)라고 할만하다.”나하추의 누이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이성계의 뛰어난 무용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말했다.1364년 최유(崔濡)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대파하여 반역자들을 원나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왜구의 침략은 거의 전쟁 수준을 방불케 했다. 1380년에는 왜구가 남도지방을 완전히 휩쓴 일도 있었다. 우왕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가 된 어린아이들을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그들이 지나간 곳이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과 술을 놓고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 연해 지방이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 중에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고려말 왜구들의 노략질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욱 처참했다. 우왕이 이성계를 삼도(충청, 전라, 경상) 도순찰사에 임명하여 왜적을 토벌하라는 영을 내렸다. 찬성사 변안열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이성계의 부장으로 삼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 평리 우인열(禹仁烈), 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 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 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 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 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임명하여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했다.이성계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까지 진격하여 6일 동안 주연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이성계가 경산부(京山府)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도착하자 벌써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원수가 그들에게 패전하여 상황이 심각했다.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裵彦) 같은 두 원수는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왜구는 함양 일대를 도륙하고 파죽지세로 남원으로 진격하면서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치고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민심이 요동을 쳤다. 이성계가 남원에 이르자 왜구가 120리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배극렴 등 패전한 장수들이 와서 길에서 이성계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이성계는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 전투를 벌이려고 했다.“적군이 험지에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장수들이 이성계를 만류했다.“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은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서다. 어찌 그들을 기다려야 하는가?”이성계는 부장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진군하라는 영을 내렸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운봉을 넘자 왜구가 수십 리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성계는 본진을 먼저 보내고 황산(黃山) 서북쪽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지세를 살폈다.“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와서 우리의 후면을 습격할 것이다.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이성계는 왜구가 본진을 습격할 것을 예상하고 말을 달려갔다. 고려군의 본진은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하다가 적군의 기세가 강성한 것을 바라보고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이때 해가 벌써 기울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섰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뛰어나왔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9>]]></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1</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81</guid>
            <pubDate><![CDATA[Wed, 05 Ma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는 개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송악산에 있었다. 고려 500년 도읍지인 개성은 황궁을 둘러싸고 수많은 관청과 집들이 즐비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의 뒤에는 방우, 방과, 방의, 방원 등의 아들 형제들이 병풍을 치듯 둘러서 있었다.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문신들로 평가 받는 조준, 정도전도 보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책사나 다름없는 인물로 이성계는 많은 것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뛰어난 무장이지만 이들 아들 형제들도 고려에서 손가락 꼽히는 무장들이었다. 이성계가 송악산을 찾아와 장고를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반대하던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출정하라는 영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뒤에는 문하시중인 최영이 있다고 하지만 임금이 내린 영이었다. 임금이 내린 영을 거부하면 역적이 된다. 이성계는 최영의 심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준, 정도전, 정몽주도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그런데 유독 최영과 우왕만이 요동정벌을 원하고 있었다.‘혹시 나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아닌가?’이성계는 최영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계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건적과 왜구를 잇달아 격파해 조야의 신망을 얻은 최영은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 국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고려 조정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문하시중이 되어 있었다. 이성계는 문하수시중으로 다음 벼슬이었다.이성계도 고려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기울어가는 고려 조정에서 누구보다도 출중했고 강직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죽이고 조선을 개국했다고 하여 정권찬탈자로만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도 잘못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는 공민왕 때부터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원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충자로 들어가는 시호가 붙었던 임금들은 황음무도했다. 왕들은 아버지의 후궁까지 겁탈했다.고려 충숙왕 때에 개성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좌상시 벼슬을 지낸 권형의 딸로 그녀의 남편은 고려의 말단 관리였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늘 곁에 두고 사랑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처럼 권 씨는 남편의 벼슬이 보잘것없고 집안도 가난하자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충숙왕이 사냥을 가다가 집 앞에 있는 권 씨를 보았다. 권 씨는 눈부신 미모를 갖고 있었고 눈에는 색기가 철철 넘쳐흘렀다. 충숙왕 같은 호색가가 권 씨를 그냥 둘리 없었다.“너는 누구이며 지아비는 있느냐?”충숙왕이 그녀를 불러다가 물었다. “저는 권형의 딸로 전 씨 집안의 며느리입니다.”권 씨가 교태가 흐르는 요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미색이 아깝도다. 어찌 미인이 그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내와 살고 있는가?”“시집을 갔으나 정이 없으니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권 씨는 충숙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자 당돌하게 말했다. 왕이 원하면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었다. 왕은 이혼을 하고 오라고 한 뒤에 사냥을 나가서는 그녀에 대해서 잊었다. 권 씨는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와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남편은 그녀의 이혼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내가 당신이 싫어졌으니 이혼을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이혼은 절대로 할 수 없소.”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자 권 씨는 아버지 권형을 움직여 이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서도 그녀의 남편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이혼을 하지 않으면 왕이 너를 죽일 것이다.”권형은 충숙왕의 어명이라면서 강제로 이혼을 하게 했다. 권 씨는 이혼을 하자 즉시 충숙왕에게 구애하여 궁중으로 들어갔다. 충숙왕은 아름다운 그녀를 총애하여 수비(壽妃)에 책봉했고, 그녀는 소망했던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만 추구한 수비는 충숙왕 사후 그 아들 충혜왕에게 겁탈당하게 된다.충숙왕과 충혜왕은 부자지간으로 왕위를 서로 다툰 인물들이다. 충혜왕은 1330년 왕위에 올랐다가 1332년에 폐위되고 1339년에 다시 복위되었다. 수비는 충혜왕이 복위되던 해에 죽는데 그 죽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충혜왕은 수비를 겁탈한 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서모인 경화공주도 겁탈했다. 충숙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셋이나 왕비로 맞아들였다. 첫 번째 왕비로 맞아들인 공주가 죽자 두 번째 공주를 맞아들였고, 그녀가 죽자 다시 원나라 세 번째 공주인 경화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이다. 충혜왕은 상당히 변태적인 인물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경화공주가 잔치를 열어 초청하자 술에 취한 체하면서 경화공주의 처소에서 잠을 자다가 밤중에 몰래 그녀의 침실로 침입해 들어갔다.“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선왕의 왕비입니다.”경화공주는 충혜왕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자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그대는 젊고 예쁘니 밤이 외롭지 않소? 내가 사랑을 해드리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충혜왕이 음탕하게 웃었다.“물러가시오. 사람을 부르겠소.”충혜왕은 경화공주가 펄펄 뛰자 내시를 불러 공주의 팔다리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간음했다. 이토록 음란한 충혜왕은 결국 성병인 임질에 걸렸고, 왕과 동침한 대부분의 여인들도 이 병에 걸렸다. 이성계는 공민왕이 왕위에 있을 때 고려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1361년 이성계는 홍건적 10만 명이 고려를 침략하여 수도 개성이 함락되었을 때 수도탈환 작전에 참가해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1362년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을 휩쓸었다. 이성계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나하추와 혈전을 벌였다.나하추는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 탁도경 등과 함께 홍원의 달단동에 주둔하고, 합라만호(哈剌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 여러 백안보하지휘(伯顔甫下指揮)와 함께 1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덕산동의 들에서 이들과 만나 싸웠다. 이성계는 고려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수였다. 그가 황룡대도를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원나라 군사들이 한꺼번에 피를 뿌리고 죽었다. 원나라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이성계는 함관령, 차유령 두 고개를 넘으면서 추격해 원나라군을 도륙했다. 이날 이성계는 답상곡(答相谷)에 물러와서 진을 쳤다. 나하추는 대노하여 덕산동으로 군대를 옮겨서 진을 쳤다. 이성계는 밤을 이용해 또 다시 이들을 습격했다. 나하추가 혼비백산해 달단동으로 퇴각하자 이성계는 사음동(舍音洞)에 진을 쳤다. 이성계는 전쟁의 신답게 기습에 능통했다. 승세를 잡으면 벼락을 치듯이 몰아쳤다.“병법에는 마땅히 먼저 약한 적을 공격해야 된다.”이성계는 차유령에 있던 적을 기습하여 사로잡고 목 베어 거의 다 없애고, 스스로 날랜 기병 6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가서 차유령을 넘어 고개 아래에 이르렀다. 나하추의 대군이 그때서야 기습을 알아차리고 우왕좌왕하면서 맞아 싸우려고 했다. 나하추의 진영에도 용맹한 장수가 있어서 이성계의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에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철갑옷에 붉은 기를 장식하고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니, 여러 사람이 무서워 쓰러져서 감히 당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부하 군사들이 이성계에게 보고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 자를 죽일 것이다.”이성계는 말을 타고 단신으로 적진으로 달려가 철갑옷을 입은 나하추의 장수와 여러 합을 겨룬 뒤에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나하추의 장수가 앞으로 뛰어와서 창을 겨누고 마구 찔러댔다. 이성계가 몸을 뒤집어 말 옆에 달라붙자 적의 장수가 헛 찌르면서 창을 따라 거꾸러졌다. 이성계는 즉시 안장에 걸터앉아 활을 쏘아서 장수를 죽였다. 이에 적이 낭패하여 도망쳤다. 이성계가 이를 추격해 적의 진영에 이르렀으나 해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래 되었지만, 다시 이와 같은 장군이 있습디까? 마땅히 피하여 속히 돌아갑시다.”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말했다. 그러나 원나라 제일의 맹장이라고 자부하는 나하추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만에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에 이르자 나하추도 그 앞에 진을 쳤다. 나하추가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자 이성계도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서 대치했다.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고려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이 죽고 장수 또한 몇 사람이 죽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장군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나하추가 거짓으로 이성계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속히 창을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이성계는 나하추와 원나라 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나하추는 고려의 군사들에게 약을 올리기만 할뿐 항복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대노하여 군사들에게 강궁을 가져 오게 했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이성계가 활을 쏘자 시위소리만 듣고도 넘어졌다. 나하추의 군사들이 대경실색하고 이성계의 군사들은 창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성계가 또 다시 활을 쏘아 나하추의 말을 죽이자 나하추가 깜짝 놀라 말을 바꾸어 탔다. 이성계는 다시 활을 쏘아서 말을 죽였다. “이 만호야, 내 창을 받아라.”나하추가 창을 휘두르면서 이성계에게 달려왔다. 이성계도 말을 달려 나하추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8>]]></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8</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8</guid>
            <pubDate><![CDATA[Sun, 02 Mar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인임은 우왕이 불과 10세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다. 공민왕이 살해되고 10년 동안은 이인임의 천하였다. 그러나 고려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는 고려에 새로운 군벌을 양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가 기울기 시작해 명나라가 일어나고, 홍건적이 크게 맹위를 떨쳐 고려를 침략했다. 왜구는 해마다 해안지방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권력층이 부패해 있을 때 유학을 받아들인 고려의 신진 사대부들에게 조정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기 시작했다. 왕은 존경받지 못하고 국가의 관리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홍건적의 침략, 왜구의 약탈은 이를 방비하기 위해 고려가 군대를 양성하면서 군인들의 입김이 강해졌다. 이때 군인으로 급성장한 인물이 최영과 이성계였다.최영은 1316년(충숙왕 3)에 사헌 규정의 벼슬에 있던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장사였다.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최원직은 아들 최영의 용력이 비상하자 그에게 손수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 최영은 글도 빨리 배웠지만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했다.“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최원직은 고려의 조정이 부패한 원인이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최영에게 청렴 강직하라고 가르쳤다. 최영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면서 고려 최고의 무사로 성장했다. 그는 청년이 되자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궁중 호위무사)가 되고 공민왕이 즉위했을 때는 안우, 최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장군)이 되었다. 1354년에는 대호군이 되었다.조일신은 고려말의 역신이었다. 고려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이제현(李齊賢)을 시기하는 등 윗사람을 능멸했다. 사람들은 조일신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는 좌충우돌해 친원파의 핵심 세력이었던 기씨(奇氏) 일파와도 갈등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의 대간들이 일제히 조일신을 탄핵했다. “이놈들이 감히 나를 탄핵해?”조일신은 대간들을 위협하고 정치를 전횡하려고 했다. 그러자 조일신에 대해 많은 대신들이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조일신은 조정의 관리들이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 온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일파인 전 찬성사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고충절 등을 동원해 1352년(공민왕 1) 9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기철, 기륜, 기원, 고용보, 이수산 등의 친원세력을 암살하기로 모의하고 사병을 동원해 습격했으나, 기원만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났다. 기씨 일파의 제거에 실패한 조일신은 공민왕이 머물고 있던 이궁(離宮)을 침입해 숙직을 하던 관리들과 군사들을 죽이고 공민왕을 위협해 스스로 우정승이 되었다. 정천기를 좌정승에, 이권을 판삼사사로 삼게 한 뒤에 다른 부하들에게도 마구 벼슬을 내려 환심을 샀다.“조정에서 어찌 벼슬을 조일신 일파에게 내린다는 말인가? 대왕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조일신 일파에만 벼슬이 내려지자 대신들이 일제히 조일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조일신의 급작스러운 벼락출세에 대신들이 변란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했다.‘잘못하면 내가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겠군.’조일신은 역신이라는 소문까지 들려오자 긴장했다. 잘못하면 변란이 일어나 자신이 처형될 수도 있었다. 조일신은 대신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최화상을 살해했다. “네, 네가 나를 죽이다니….”최화상은 조일신이 자신을 칼로 찌르자 눈을 감지 못하고 저주했다. 조일신은 변란이 모두 최화상의 세력이 일으킨 것이라며 공민왕을 협박해 장승량을 비롯한 8명을 효수하고 정천기는 하옥시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조일신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같은 당파까지 모조리 죽인 잔인무도한 자였다.‘참으로 무도한 놈이로다.’공민왕은 조일신에게 이를 갈았다. 때마침 이인복(李仁復)이 조일신의 역적 행위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이인복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의 참살을 결심하고, 행성(行省)에 나아가 김첨수 및 최영, 안우, 최원 등에게 비밀리에 그를 제거하라는 영을 내렸다. 최영은 호위 군사들을 동원해 조일신의 세력을 일망타진했다.조일신은 고충절, 이권, 정을보 등 그의 일파 28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고려는 불과 6일 만에 조일신의 난을 평정했으나 피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조일신의 세력들이 목이 잘리거나 유배를 가고 부인과 딸들은 공신들의 노비로 전락했다. 최영은 호위무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호군이 되었던 것이다. “홍건적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토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장수와 군사를 보내라.”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최영은 공민왕의 영을 받아 유탁, 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로 출정했다. ‘우리가 과연 원나라를 위해 명교와 싸워야 하는가?’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최영은 공민왕의 영을 받아 출정했으나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원나라의 승상 탈탈(脫脫)의 휘하에서 홍건적과 싸웠다. 1355년에는 회안로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크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최영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원나라까지 출정하고 돌아온 최영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홍건적이 온다!”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이북을 무인지경으로 휩쓴 뒤에 순식간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고려는 발칵 뒤집혔고 도읍 개성은 피난을 가는 수레와 백성들이 줄을 이었다.“그대들은 어디로 피난을 가는가? 우리가 홍건적 따위를 두려워하면 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나를 따라 홍건적을 물리치라!”최영은 피난 가는 백성들까지 동원하여 홍건적과 맞서 싸웠다. 고려는 위기에 빠졌으나 최영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끝에 4만 명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공민왕은 최영을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에 임명했다가 해가 바뀌자 서북면도순찰사로 임명했다. 최영은 서북면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장군 홍건적이 또 침략해 오고 있습니다.”최영이 홍건적을 격파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1361년에 홍건적이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번에는 10만 명의 대군을 휘몰아 달려왔기 때문에 온 나라가 전쟁터로 돌변했다. 최영, 안우, 이방실 등 고려의 장군들은 또 다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홍건적은 순식간에 평양을 점령하고 이어 도읍 개성을 함락했다. 고려는 도읍까지 내주면서 남쪽으로 퇴각했다.“홍건적에 우리 강토가 유린되고 있는데 퇴각만 할 것인가? 우리가 오랑캐에게 국토를 빼앗겨야 하는가? 너희들의 목숨을 나에게 맡기라!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죽어라!”최영은 사자처럼 포효한 뒤에 장창을 휘두르면서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가 한 번 장창을 휘두를 때마다 홍건적이 피를 뿌리고 낙엽처럼 쓰러져 뒹굴었다. 장수가 선봉에서 싸우자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해 맹렬하게 홍건적과 싸웠다. 개성 앞의 재령평야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최영은 마침내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그들을 격파해 개성을 수복했다. 홍건적 10만 명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북으로 퇴각했다. “홍건적이 물러갔다!”“와!”“최영 장군이 홍건적을 격파했다!”최영은 백성들과 공민왕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어느 사이에 고려 최고의 명장이 되어 있었다.난세에는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지만 고려말에 최영, 이성계 같은 영웅들이 등장하고 그와 함께 역신들도 잇달아 등장해 고려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1363년에는 김용(金鏞)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이 물러가고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용은 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 등을 살해했다. 김용은 이 음모가 실패하자 도리어 자신의 병사들을 토벌하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사로잡힌 자를 모조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용은 난을 주도했으면서도 1등공신이 되었다.“흥왕사의 난은 김용이 주도한 것입니다.”그러나 김용의 음흉한 간계는 부하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최영은 김용을 사로잡아 밀양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경주로 압송해 사지를 찢어 죽였다. 최영은 흥왕사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판밀직사사 평리를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나라가 망하려면 재앙이 잇따른다. 흥왕사의 난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최영은 이성계 등과 함께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격파했다. 1366년 최영은 신돈의 참소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고려를 이끌던 노장 최영에게는 시련의 세월이었다.‘이제 고려는 끝인가?’최영은 귀양생활을 하면서도 고려를 걱정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최영이 귀양지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신돈의 전횡을 지켜보던 공민왕이 다시 정권을 잡고 신돈을 축출했다. 최영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 필을 요구해 왔다. 공민왕은 제주도에 말을 보내라고 했으나 제주도에서는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최영은 염흥방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했다. 1376년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때 최영은 노구를 이끌고 출정해 부여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7>]]></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7</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7</guid>
            <pubDate><![CDATA[Sun, 24 Feb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1372년 10월에 공민왕은 궁 안에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번국들의 왕자를 천자를 숙위한다는 명분으로 장안(長安)에 인질로 잡아 놓고 번국들이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공민왕은 이를 흉내 내어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해 자제위에 소속시켰다.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혼인을 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에 정비(定妃), 혜비(惠妃), 신비(愼妃), 익비(益妃) 등 4명의 왕비를 두었으나 역시 소생이 없었다. 공민왕이 신돈의 사가에 행차했다가 낳은 아들 모니노(牟尼奴)가 고작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사형에 처한 뒤에 반야의 아들 모니노를 궁으로 불러들여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모니노를 신돈의 아들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수군거리자 공민왕도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하여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자제위에는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 고려 귀족의 아들들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공민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공민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신의 네 부인을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하려고 했다. 공민왕은 이들을 총애하면서 자신의 부인을 간통하라는 영을 내렸다.“폐하, 어찌 이런 망극한 영을 내리십니까?”홍륜 등은 경악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민왕의 요구는 터무니없이 황당했다. 이 무렵 공민왕은 거의 미치광이 같은 광태를 부렸다.“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조리 참수할 것이다.”공민왕이 술에 취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홍륜 등이 공민왕을 살피자 핏빛으로 붉은 눈에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홍륜 등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대답했다.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첩은 죽어도 폐하의 영을 따를 수 없습니다.”공민왕의 부인인 정비, 혜비, 신비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 명을 따르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일국의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민왕은 화를 벌컥 내고 이들을 쫓아버린 뒤에 익비를 침전으로 불렀다.“네가 나의 영을 따르겠느냐?”공민왕이 익비에게 물었다.“어찌 폐하의 영을 따르지 않겠습니까?”익비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그렇다면 홍륜과 침전에서 동침하라. 네가 아들을 낳으면 나의 왕자로 삼을 것이다.”“폐하!”익비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공민왕이 황음한 짓을 자주 저지르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공민왕을 쳐다보았다.“네 나의 영을 따른다고 하지 않았느냐?”“어찌 이와 같은 망극한 영을 내리십니까? 이는 죽어도 따를 수 없습니다.”“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공민왕이 칼을 뽑아들고 익비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익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공민왕의 눈이 핏빛으로 충혈되고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명을 따르겠느냐? 죽겠느냐?”익비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민왕은 미치광이처럼 홍륜, 한안, 김흥경 등을 시켜 익비를 간통하게 했다. “인도가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왕이 형벌을 주고 은전(恩典)을 베풀어 벼슬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일을 항상 간사한 소인들과 의논하고, 충신을 버리니 장차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대전보마배행수(大殿寶馬陪行首) 조준(趙浚)이 탄식했다. 조준은 고려말에 간신들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한 뒤에 이성계와 밀접하게 지내기 시작해 훗날 조선 건국의 1등공신이 되는 인물이다. 이날 이후 홍륜 등은 공민왕의 명이라고 하면서 수시로 익비의 침실을 드나들었다. 김종서가 편찬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공민왕은 정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고려사절요는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다.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뒤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고려를 부정적으로 기술한 점이 많다. 공민왕은 밤이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여자의 옷을 입는 기행을 일삼았다. 시녀들 중에 젊은 여자들을 방안에 들여보내고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에 홍륜 등에게 간통하게 하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면서 좋아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익비가 아기를 밴 지가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은밀하게 공민왕에게 보고했다. 1374년 9월의 일이었다.“내가 일찍이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는 것을 염려하였는데 익비가 이미 아기를 배었으니 내가 무슨 근심이 있으랴." 공민왕이 기뻐하면서 최만생에게 말한 뒤에 다시 물었다.“누구와 관계하였느냐."“홍륜이라고 익비가 말했습니다.”“내가 내일 창릉(昌陵)에 배알하고 술주정을 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라. 너의 가족에게는 크게 상을 내릴 것이다." 공민왕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최만생은 공민왕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공민왕이 자신까지 죽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최만생은 공포에 떨면서 두려워하다가 그날 밤에 홍륜 등에게 알렸다.“우리는 왕의 영을 따랐을 뿐인데 어찌 죽이려고 하는가?”홍륜도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홍륜은 자제위의 동료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그러나 왕이 죽이려고 하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공민왕을 시해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공민왕이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시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독이 든 술을 마시게 하고 홍륜 등이 달려 들어가 칼로 난자해 순식간에 살해했다.“자객이 밖에서 들어왔다!”홍륜과 최만생이 궁 안을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때 조정의 수반은 이인임(李仁任)이 맡고 있었다. 그는 공민왕이 시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대궐을 장악했다. 위사들은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충혜왕의 왕비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가 10세 된 우를 데리고 들어왔으나 공민왕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시중 경복흥(慶復興)과 함께 종친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인임은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우를 왕으로 세웠다. 이인임은 처음에 공민왕이 신임하고 있던 중 신조(神照)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하여 의심했다. 그러나 침전의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피가 뿌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옥에 가두고 국문했다. 최만생은 처절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홍륜과 함께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이들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하라!”이인임은 최만생과 홍륜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한안, 권진, 홍관, 노선과 그들의 여러 아들을 목 베어 머리를 매 달고, 가산을 적몰했다. 처와 첩들은 관비로 삼았다. 그들의 친척들은 곤장을 때린 뒤에 귀양을 보냈다. 고려 조정은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고 이 과정에서 이인임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왕이 보위에 오르지 않았을 적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여 백성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 쏠렸었다. 보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했다.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공신과 현인을 내쫓고, 토목의 역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사고 못된 젊은 아이들을 가까이하여 음란한 행동을 방자히 했다. 무시로 술에 취해 측근 신하를 구타하고 또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책봉하여 대군으로 삼았다. 외인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밀리에 어린 소년들에게 지시하여 후궁의 몸을 더럽혔다. 후궁이 임신하게 되자 관계한 자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으니 패란(悖亂)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사관이 공민왕에 대해서 내린 평가다. 홍륜과 간통한 익비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익비가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이를 죽여야 합니다.”집의 김승득이 글을 올려 익비 소생의 아들을 죽이자고 청했다.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우왕이 명덕태후의 뜻을 받들어 허락했다. 익비가 오랫동안 숨겼다가 내놓았는데 딸이었다. 이인임은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金義)에게 살해하도록 하고 그 동안 배척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金九容), 전리총랑(典理摠郎)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 외교정책을 일제히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이인임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이인임은 최영, 지윤 등과 합심해 이첨과 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 이숭인, 정몽주, 임효선 등을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를 보냈다.이인임은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 임견미, 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아 고려를 무너트리는 데 일조를 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6>]]></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6</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6</guid>
            <pubDate><![CDATA[Sun, 17 Feb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공민왕에겐 혜비(惠妃) 이씨, 익비(益妃) 한씨, 정비(定妃) 안씨, 신비(愼妃) 염씨 등의 부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로부터 아들을 낳지 못해 반야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고려의 대신들에게 고백해 훗날 우왕이 되는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모두 고려를 무너트리고 개국한 조선에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고려를 폄하하기 위해 반야의 아들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기록해 그를 신우(辛禑)라고 불렀다. 공민왕의 총애가 극도로 높아지자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가 행차를 할 때는 100여 명의 수행원들이 따르고 생불을 보려는 부녀자들로 길이 메워졌다. 사대부의 부인들은 신돈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설법을 듣고 복을 빌기 위해 찾아왔다. 하루는 얼굴이 해사한 젊은 부인네가 신돈을 찾아왔다.“네가 무엇을 소원하느냐?”신돈은 눈을 지그시 감고 부인네에게 물었다.“높으신 거사님….”부인네는 감히 신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가까이 오라.”부인네가 황공하여 절을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신돈의 집 깊숙한 내당이었다. 그 내당은 기현의 처와 신돈의 두 여종밖에 출입할 수 없었다. 신돈은 휘장이 늘어진 방석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고 방안에는 은은하게 촛불이 켜져 있었다. 어느 방에서인지 은은하게 목탁을 두드리고 독경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부인네는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부인네가 두려움에 떨면서 신돈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앉았다. 생불이라고 불리는 명성 높은 신돈이 만나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것이다.“나는 거사가 아니라 부처다. 나에게 너의 소원을 빌라.”부인네가 가까이 다가와 앉자 지분냄새가 물씬 풍겼다. “부처님, 아들 낳기가 소원입니다.”“내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이제 부처가 너에게 현신할 것이니 광명을 보리라. 너는 눈을 감은 채 아미타불만 외우라. 부정이 타면 안 되니 현신이 끝날 때까지 아미타불을 외워야 할 것이다.”신돈은 부인네를 눕히고 능숙하게 치마저고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부인네는 행여나 부정을 탈까봐 몸을 달달 떨면서 아미타불을 외웠다. 그러나 육중한 사내의 몸이 실리자 아미타불만 외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신돈이 거칠게 밀어붙이자 부인네의 입에서 가쁜 숨결이 토해지고 신음소리가 잦아졌다.신돈은 자신을 찾아오는 부인네들을 방으로 끌어들여 부처가 현신한다면서 이처럼 서슴지 않고 간통했다.신돈은 파렴치한 음행을 저지르고 국정을 농단했으나 개혁정치도 실시했다. 공민왕에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시행했다. 전민도감은 일종의 토지개혁이다. 권력자들과 부호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 다시 농민에게 되돌려주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신돈은 이로 인해 역사가들로부터 개혁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돈은 도감을 설치한 뒤에 농민들의 토지들을 강탈한 권력자들과 토호들에게 토지를 반환할 것을 포고했다.“국내 사람들의 세업인 전민(田民:농민)들의 토지는 대부분 권력자들과 토호들이 강탈하고 점령했다. 이로 인하야 백성들에게는 해독을 끼치고 나라를 궁핍하게 하고 있는데 하늘이 분노하여 물난리, 가뭄, 역질이 잇따르고 있다. 이제 도감을 설치하고 그 시정사업을 담당케 하였으니 서울(개성)에서는 15일 이내로, 지방에서는 40일 이내로 자기 잘못을 알고 시정하는 자는 그 죄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기한이 경과한 후에 발각된 자는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다.”신돈의 포고령이 내리자 힘없는 전민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있던 권문세가들이 땅을 모두 농민들에게 반환했다. 권력자와 부호들에게 땅을 빼앗겼던 농민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신돈은 공도대의(公道大義)를 표방하여 노예들이 스스로 양민이라고 주장하면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노예 해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노예들이 신돈을 찾아와 해방시켜 줄 것을 청했고 신돈은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권세를 누리던 관리들이나 부호들은 신돈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신돈의 이러한 정책은 고려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았다.“성인이 나왔다!”노예들도 신돈을 부처처럼 떠받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주의자는 못되었다. 여자들이 소송을 걸면 얼굴이 예쁜 여자들을 동정하는 체하면서 간음을 하고 재판에서 이기게 해주었다. 공민왕은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신돈은 6년 가깝게 국정을 농단했으나 공민왕이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신돈은 기현, 최사원, 이춘부, 김란 등 심복들에게 갑사들을 모으라는 영을 내렸다. 이내 무예에 출중한 갑사들이 속속 신돈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는 공민왕이 헌릉과 경릉을 배알할 때 갑사들에게 지시하여 암살하라는 영을 내렸다. “알겠느냐? 어떤 일이 있어도 실패해서는 안 된다.”신돈이 눈을 부릅뜨고 갑사들을 다그쳤다. “예!”갑사들이 일제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공민왕이 헌릉과 경릉을 배알하고 돌아왔는데도 갑사들은 암살을 하지 못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어째서 거사를 하지 않았느냐?”신돈이 갑사들을 노려보면서 추궁했다.“경비가 삼엄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갑사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대답했다.“너희 같은 겁쟁이들은 무용지물이다.”신돈은 갑사들에게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암살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신돈에게 벼슬을 얻으려고 문객 노릇을 하는 이인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신돈의 음모를 낱낱이 기록했다가 두 번째 거사가 임박하자 강직한 대신 김속명의 집에 던져 넣었다. 김속명이 경악하여 공민왕에게 보고했다.“국사가 이럴 리가 있는가?”공민왕은 이인이 날조한 것이라고 의심했다.“그들을 잡아들여 신문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김속명의 제안에 공민왕은 신돈의 심복들을 잡아다가 국문했다. 고려 조정은 신돈의 역모 사실이 밝혀지자 발칵 뒤집혔다. 신돈은 신우의 생일이어서 광명사에서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돈의 심복들은 잔인한 국문이 계속되자 마침내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 공민왕은 기현, 최사원 등 5명을 처형하고 3명을 귀양 보냈다. 신돈은 수원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했다. 이부(理部) 헌사(憲司)가 역적들의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 공민왕에게 아뢰었다.“문하성이나 중방에서는 어찌 아무런 의견이 없느냐?”공민왕이 대신들을 다그쳤다.“신돈은 천한 중놈인데 과도한 은총을 받아 권모술수로 국권을 농단하고 은밀히 편당을 만들어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이 있어서 역적들을 모조리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역적의 괴수 신돈은 서울 밖으로 축출했을 뿐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응당 극형에 처해야 하고 그 자식과 동생들도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중방 도평의사가 아뢰었다.“대역의 죄는 천하 만세에 용납 못할 죄인데 신돈은 살아 있으니 옳지 않습니다. 그를 극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한 뒤에 연못을 파소서.”문하성에서도 아뢰었다.“법은 천하 만민의 공법으로 내가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용서할 수 있겠느냐? 마땅히 상주한 대로 극형에 처하라.”공민왕이 신돈을 극형에 처하라는 영을 내리고 신돈으로 인해 귀양을 갔던 최영 등을 불러들였다. 신돈이 서울로 압송될 때 임금이 소환하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말했다.“오늘 나를 임금이 다시 부른 것은 아기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신돈이 말하는 아기는 신우를 말하는 것이었다.“네가 일찍이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들을 매개로 하여 양기하는 것이지 감히 사통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제 듣건대 자식까지 두었다니 이런 일이 맹서문에 있느냐? 성중에 호화로운 집을 일곱 채나 지었다니 이것도 맹서문에 있느냐?”공민왕은 찰방사 임박을 시켜 신돈의 맹서문을 보여주면서 꾸짖었다.“원컨대 당신은 아기를 보아서 나를 살려주시오.”신돈은 사형을 집행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찰방사 임박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애원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신돈은 효수를 당한 뒤에 사지를 베어 각을 떠서 각 도로 조리돌림을 한 뒤에 개성 동문에 효수되었다.“이번에 신돈을 처단한 것은 국가의 큰 경사다. 그런데 또 큰 경사가 있으니 그대들은 알아두라.”찰방사 임박이 사관들에게 말했다.“큰 경사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사관들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상감께서 궁인을 가까이해 아드님을 보았는데 금년에 나이가 7세가 되었다. 그 아기를 신돈이 남몰래 양육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니 이 죄만 해도 죽을 죄다. 사관들은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우왕은 과연 누구의 아기인가. 이는 죽은 신돈만이 알 것이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5>]]></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5</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5</guid>
            <pubDate><![CDATA[Sun, 10 Feb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계집의 저고리 고름을 잡아채자 후드득 뜯어지면서 앞섶이 활짝 벌어졌다. 계집의 입에서 에구머니, 하는 비명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터진 앞섶으로 희고 탐스러운 젖무덤이 드러났다. 크고 요연한 가슴이다. 사내가 마른침을 꿀컥 삼킨 뒤에 계집을 향해 달려들었다.“거사님, 어찌 이러십니까? 너무 난폭하지 않습니까?”계집이 얼굴을 찡그리고 투정을 부리듯이 소리쳤다.“흐흐… 너를 볼 때마다 춘심이 동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느냐?”사내가 계집의 가슴을 덥석 움켜쥐고 보료 위에 쓰러트렸다.“밖에서 아랫것들이 듣겠습니다.”“들으면 대수냐?”“백관이 영공(令公)이라고 부르는 분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원나라에서는 나를 권왕(權王)이라고 부르지.”사내가 낄낄대고 웃으면서 계집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에그….”계집은 어쩔 줄을 모르고 앙탈하는 시늉을 했다. 허겁지겁 달려드는 사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벌겋게 밝은 대낮인 탓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거친 손이 가슴을 애무해오자 계집은 자신도 모르게 낑낑대면서 사내의 민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내 방안이 열기로 가득해지고 계집의 신음소리가 자지러지기 시작했다.사내의 이름은 신돈(辛旽).고려 조정의 최고 실력자였다. 계집은 신돈의 심복인 기현의 후처로 과부로 지낼 때부터 신돈과 사통하던 사이였다. 그녀가 기현의 후처가 되고 기현이 신돈의 심복이 되자 두 남녀는 기현의 안방을 차지하고 노골적으로 음행을 저질렀다. 기현은 자신의 후처가 신돈과 사통하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었으나 신돈으로 인해 권세를 누리는 것만을 좋아하여 분노하지도 않고 수치스러운지도 몰랐다.신돈은 영산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신돈의 처음 이름은 편조였으나 훗날 공민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신돈으로 개명했다. 신돈이 고려의 조정을 좌지우지 하게 된 것은 공민왕이 전폭적으로 신임했기 때문이었다.“거사께서는 과인의 사부가 되어 국사를 다스리는데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공민왕이 김원명의 소개를 받고 신돈과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공손하게 말했다. 신돈은 고담준론에 박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이 청산유수와 같아서 공민왕은 신돈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다. “신은 재주가 없어서 임금의 스승이 될 수가 없습니다.”신돈은 짐짓 사양하는 체했다.“주문왕은 위수에서 강태공을 만난 뒤에 스승으로 삼아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거사께서는 부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공민왕이 신돈에게 절을 하면서 간곡하게 청했다. 신돈은 해지고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공민왕은 그가 청수하고 탈속하여 불법이 높은 고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돈은 글자를 쓸 줄도 몰랐다. 젊었을 때는 떠돌이 중노릇을 하면서 불법을 전한다고 허황된 말로 과부들을 유인하여 닥치는 대로 간음했다. 글자도 모르면서 불법이 높은 고승으로 행세하고 안에서는 비단 옷을 입었으나 밖에서는 해진 옷을 입고 다녀 공민왕을 감동시켰다.“신이 국사가 되면 반드시 참소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참소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임금과 대신들은 참소하는 말을 잘 듣는다고 하는데 어찌 좋은 정사를 펼 수 있겠습니까?”“그렇다면 과인이 서약서를 써 드리겠습니다.”공민왕은 신돈에게 서약서까지 써주었다.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하느님이 증명하실 것이다.공민왕이 신돈에게 써준 서약서로 고려사 열전 편에 있는 기록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사랑했다. 공민왕이 왕자 시절에 원나라에 인질로 들어가서 숙위를 하고 있을 때 원나라는 공주와 공민왕을 혼인시켰다. 노국공주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후원으로 왕자의 신분에서 충정왕을 밀어내고 왕이 되어 고려로 돌아왔다. 1365년 노국공주가 딸을 낳다가 죽자 공민왕은 비통해 하면서 국사를 오로지 신돈에게 위임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다. 승려들이 높은 사회적 신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남자들이 출가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왕실에서도 왕자들이 다투어 출가하고 권문세가의 자제들도 다투어 출가했다. 한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가를 하여 중들의 숫자가 기형적으로 많아지고 일을 하는 남자들이 줄어들었다. 고려 조정은 마침내 한 집에 한 사람 이상 출가할 수 없다는 기이한 법령까지 만들어내야 했다.승려의 신분이 높은 탓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요승들도 많았다. 고려 명종 때의 요승 일엄(日嚴)은 스스로 부처라고 칭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을 낫게 할뿐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나는 살아 있는 부처다.”일엄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현혹했다. 일엄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찾아왔다. 그는 젊은 여자들을 동굴로 불러들여 부처가 현신하여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면서 사통했다. 그러는 동안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들은 동굴 밖에서 기도를 하면서 부인이 생불에게 선택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일엄이 먹다가 남긴 음식이나 목욕한 물을 얻기만 하면 한 방울이라도 천금처럼 생각하여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발을 씻은 물이 법수(法水)라고 하여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전주의 중 일엄이 눈 먼 사람을 볼 수 있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전라도 안찰사 오돈복이 고려 명종에게 아뢰었다. 명종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일엄을 도성으로 불렀다. 일엄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개성의 백성들이 생불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절을 했다.그가 개성으로 들어올 때에 채첩건을 쓰고 박마를 타고는 능선으로 낯을 가렸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그가 탄 말 머리를 가로막았으므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역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있는 기록이다. 명종은 일엄을 보현원과 홍법사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개성에 있는 관리들과 백성들이 일엄이 있는 홍법사로 몰려와 길이 메워지고 개성 시가지가 텅 비었다. 절에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으로 그들이 아미타불을 외치자 10리밖에까지 들렸다. 고려의 내로라하는 조정대신들의 부인과 딸까지 수풀처럼 모여서 머리카락을 길바닥에 길게 늘어트리고 일엄이 발을 딛게 했다. 일엄은 개성의 수많은 부녀자들을 유린하고 재물을 거두어들였다. 명종은 그가 고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강남으로 보냈다. 신돈은 명종시대의 요승 일엄과 같은 자였다. 공민왕은 음식이나 버선을 신돈에게 하사할 때 반드시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존경을 표시했다.“나라를 어지럽힐 놈은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승경이 혀를 차면서 비난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비호로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지나치게 총애했다. 강직한 무장인 서북면도순찰사 정세운이 신돈을 죽이려고 하자 공민왕이 숨겨주기까지 했다.“최영과 이구수 등이 군신을 이간하고 선량한 인재들을 배척하였습니다.”신돈이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들을 무고하여 그들을 국문했다. 잔인한 국문이 계속되자 최영 장군 등은 거짓으로 자백했다. 신돈은 그들의 작호를 박탈하고 농토와 노예들을 빼앗았다.신돈이 최영을 무고한 것은 김란의 딸 때문이었다. 신돈이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쥐고 흔들자 서북면병마사를 지낸 김란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바쳤다.“어찌 자신의 딸까지 중에게 바치는가? 권세가 그토록 탐이 나는가?”최영이 김란을 비난했고 신돈은 이를 고까워하여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켰다가 국문을 하여 귀양을 가게 만든 것이다. 기현의 후처와 한바탕 운우지정을 나눈 신돈은 김란의 집으로 갔다. 김란의 두 딸이 황급히 신돈을 맞아들였다.“술상을 들이라.”신돈이 김란의 딸들에게 말했다.“부처께서 어찌 술을 드십니까?”김란의 딸들이 눈웃음을 쳤다.“나는 생불이니 술을 먹어도 상관이 없고 고기를 먹어도 오히려 도가 높아질 뿐이다.”신돈은 김란의 딸들을 무릎에 앉히고 유쾌하게 술과 고기를 먹었다.공민왕은 후사가 없었다. 그는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 왕비를 책봉하기 위해 왕의, 안극인, 정우, 정양생의 딸을 간택했는데 신돈이 같이 앉아서 간택을 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지극히 떠받들어 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다. 하루는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시중을 드는 여종이 마음에 들어 통정했다. 여종의 이름은 반야였고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훗날 우왕(禑王)이 되어 신돈의 아들이냐, 공민왕의 아들이냐는 논쟁을 낳게 된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4>]]></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4</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4</guid>
            <pubDate><![CDATA[Sun, 03 Feb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행리가 여진족과 전투를 벌이지 않고 적도로 피신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진족은 그 땅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고, 이행리를 비롯한 고려의 백성들이 이주해 온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땅은 넓었으나 한 치의 땅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행리는 그들을 이해했고 그들이 적이 아니라 같이 살아야 하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여진과 직접 싸울 필요는 없다.’이행리는 여진의 공격을 무산시키기 위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이용했다. 쌍성총관부는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였다. 화주에 총관부가 있고 함경도를 총괄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함경도 일대는 발해 멸망 이후 고려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고려의 유민과 이민(移民)들이 여진족들과 섞여 살고 있었다. 고려가 몽고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1258년(고종 45)에 용진현(龍津縣) 출신의 조휘(趙暉)와 정주 출신의 탁청(卓靑)이 고려의 관리를 죽이고 몽고에 투항한 지역이었다.이행리는 쌍성총관부에 구원을 요청해 총관부가 여진을 제압하게 했다. 이행리는 그들의 선조가 원나라에 귀화했기 때문에 몽고인 행세를 했다. 쌍성총관은 이행리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공격했다. 여진족은 막강한 원나라의 군대에 굴복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행리의 무리는 동북면 일대에서 대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여진족의 적은 이제 원나라가 되었고 이행리의 집단과 여진족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이행리는 비록 선조들이 원나라에 귀화했으나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진족과 싸우지 않게 되자 함경도 일대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함경도의 미개척 지역까지 주민들이 들어가 살게 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행리의 아들 이선래(李善來)는 함흥을 대읍으로 만들었다. 그는 쌍성총관 조휘의 딸과 혼인해 동북면의 최고 실세가 되었다. 이선래의 둘째 아들 이자춘(李子春)은 형이 죽는 바람에 부친의 모든 기반을 세습했다. 이 무렵 원나라의 쌍성총관이 죽자 동북면에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쌍성총관 탑사불화(塔思不花)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둘째 부인 조씨가 자신의 아들 나해(那海)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조씨와 그 아들은 그 지역의 세력가였다. 그러자 첫번째 부인 박씨 일족과 탁씨 일족이 반발했다. 두 세력이 총관부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투자 이자춘은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동북면을 내 수중에 넣을 수 있다.’이자춘은 동북면의 정세를 살피고 결단을 내렸다. 박씨는 쌍성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모가 빼어났다.“형수님, 조씨는 두 번째 부인이고 형수님은 첫 번째 부인입니다. 그러므로 후계자는 형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이자춘은 쌍성총관의 첫 번째 부인 박씨를 충동질했다.“그렇기는 하지만 내 아들은 어려요. 나도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박씨 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자춘은 박씨 부인의 한숨에 가슴이 저렸다. 그는 박씨 부인과 쌍성총관부를 손에 넣기 위해 박씨 부인을 은밀하게 찾아갔다.“형님이 돌아가시면 아우가 그 식솔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입니다.”이자춘이 박씨 부인에게 말했다. 이자춘의 말은 취수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자춘은 박씨 부인에게 형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했다. 취수제도는 고구려의 산상왕에 그 예가 있다.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은 제나부의 족장 우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우씨는 고국천왕이 운명하자 이를 내외에 알리지 않고 밤중에 몰래 궁을 나와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갔다.“대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하오.”우씨는 발기를 왕위에 추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골적으로 발기에게 추파를 던진 것이다.“하늘의 역수(易數)는 돌아가는 때가 있는데 어찌 이를 가볍게 의논하리오? 부인이 야행을 하는 것은 더욱이 예가 아니오.”발기는 눈을 부릅뜨고 우씨를 추궁했다. 우씨는 왕제 발기가 자신을 추궁하자 부끄러워하면서 고국천왕의 둘째 동생 연우(延優)를 찾아갔다. 연우는 우씨가 찾아오자 발기와 달리 정중하게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했다.“대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이심(異心)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 무례합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우씨가 연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연우는 좋은 술과 음식을 권하면서 우씨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우씨는 왕위에 오르면 자신을 왕비로 삼을 뜻이 있느냐고 은근하게 물었다. 연우는 평소에도 우씨를 연모했다고 말하고 우씨에게 대접하기 위해 친히 칼을 뽑아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우씨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치맛자락을 찢어 연우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그대는 나를 궁까지 호위해 주오.”우씨가 연우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유혹을 했다. “왕비마마의 영을 따르겠습니다.”연우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씨는 연우의 손을 잡고 수레를 타고 무사히 궁으로 돌아와 고국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내외에 선포하고 군신들에게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연우를 즉위시켜 왕으로 삼았다. 우씨는 취수(取嫂)를 허락하고 있는 고구려의 풍습에 의해 연우의 왕비가 되었고 연우는 고구려의 제10대 산상왕이 되었다.우씨는 산상왕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행실이 나쁜 내가 죽으면 무슨 낯으로 고국천왕의 옆에 묻히겠는가?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우씨는 죽을 때 그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생각에도 형제를 남편으로 모셨던 일이 회한으로 남은 모양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녀의 유언대로 산상왕릉 곁에 우씨를 묻었다.“어제 왕비 우씨가 산상왕의 곁에 묻힌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그와 싸웠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 백성들을 대할 수가 없다. 너는 조정에 알려서 내 무덤을 울타리로 막아 달라.”죽은 고국천왕의 영혼이 한 무당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이에 고구려 사람들이 소나무를 고국천왕 왕릉 앞에 일곱 겹으로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취수에 얽힌 이야기다. 이자춘은 취수제도를 내세워 박씨를 유혹한 것이다.“저를 받아주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어요?”박씨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이자춘을 응시했다.“제가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이자춘은 박씨 부인과 손을 잡고 원나라 조정에 후계자를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박씨 부인의 어린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자 조씨 부인 일가가 일제히 반발했다. 이자춘은 쌍성총관의 아들인 탁씨가와 손을 잡고 조씨가를 공격해 나해를 죽이고 그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박씨 부인은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이자춘에게 쌍성총관부를 위탁했다. 야심이 많은 이자춘은 박씨 부인의 어린아들이 성장한 뒤에도 총관부를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다스렸다.이때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해 명(明)나라가 일어나고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이탈해 명나라와 손을 잡았다. 고려는 1356년(공민왕 5)에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로, 전대호군(前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종부령(前宗簿令) 김원봉(金元鳳)을 부사로 삼아 동북면을 공격하게 했다.이자춘은 동북면의 정세를 살피다가 과감하게 원나라와 손을 끊고 고려와 손을 잡았다.쌍성총관부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고려의 대군에 저항했으나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함으로써 조소생은 이판령(伊板嶺)을 넘어 원나라로 달아나고 쌍성총관부는 폐지되었다. 원나라와 손을 끊고 고려에 내응한 이자춘은 공민왕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자춘의 내응으로 쌍성총관부가 고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공민왕은 고려의 부패한 귀족들을 개혁하고 원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자춘과 같이 배경이 없는 무장과 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네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몸은 비록 원나라에 귀화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이 우리 왕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조(考祖)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이제 너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을지어다. 그러면 내가 장차 그대를 잘 성취시켜 주리라.” 공민왕이 이자춘을 우다치(亐多赤:왕의 시위대)에 임명하고 말했다. 동북면에서 활약을 하던 이자춘은 22세인 그의 아들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도읍 개경에 머물렀다. 이자춘과 이성계는 개경에서 발전된 문물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자춘이 고려의 도읍 개경에 있는 동안 동북면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쇠퇴할 기미가 보이자 여진족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홍건적이 남하할 움직임을 보였다.원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 심양으로 피한 기황후와 그의 일파가 고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신흥제국 명나라와 원나라의 전쟁도 치열했다. 공민왕은 이자춘을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해 쌍성총관부를 지키게 했다.“이자춘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으니 해체해야 합니다.”고려의 대신들이 공민왕에게 아뢰었다.“동북면은 그가 아니면 다스릴 수 없다.”공민왕은 대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자춘은 원나라 천호장의 신분에서 고려 병마사로 신분이 바뀌어 함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27세의 아들 이성계가 동북면을 세습해 다스리게 되었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3>]]></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3</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3</guid>
            <pubDate><![CDATA[Sun, 27 Jan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함관령(咸關嶺). 함경남도 함주군 덕산면과 홍원군 운학면 사이에 있는 고개. 해발 450m. 이 고개는 덕산면과 운학면의 분수령인 웅봉(熊峰)과 봉화산(烽火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있다. 함관령은 동쪽으로 홍원평야, 서쪽으로는 함흥평야를 흐르는 동성천강(東城川江)의 상류와 연결되어 있다. 민족의 지붕 개마고원의 험준한 끝자락이라 골짜기가 깊고 산이 거했다. 옛날부터 함흥과 원산을 잇는 관북의 중요한 도로여서 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고구려의 도성 개경에서 동북 쪽으로 수백리가 떨어져 있는 함관령 영마루에는 수많은 기치창검이 나부끼고 있었다. 함관령은 밤새도록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새벽엔 빗줄기까지 무섭게 퍼부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이 빗줄기가 뚝 그치고 날이 쾌청하게 맑았다. 빗줄기에 씻긴 함관령은 초목이 울창하고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 함관령에 수많은 기치창검을 나부끼고 있는 군사들은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李成桂)의 군대였다. 그들은 동북면에서 여진족인 호발도군을 격파하고 대군을 이끌고 고려 개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관령에 이른 것이다.이성계는 짙은 흑갈색의 오추마 위에 앉아서 홍원평야를 시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정도전과 이성계의 장자 이방우가 시립해 있고 뒤에는 동북면의 맹장 이천계, 이지란, 조영규, 조영무와 이방과, 이방간, 이방원 같은 이성계의 아들들이 삼엄하게 포진해 있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사납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이었다. 군사들 역시 대부분이 동북면 출신의 가별치(加別赤:사병)들이라 위풍이 당당했다.이성계는 입을 꾹 다물고 홍원평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 속에 웅지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성계는 지금 영산(靈山)인 백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몸을 단련하기 위해 사냥을 다니다가 불현듯이 행방을 감추고 백두산에 올랐었다. 언젠가부터 꿈 속에서 북소리를 듣고는 했는데 사냥을 하러 나오자 갑자기 북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이성계는 북소리를 따라 백두산에 이르렀다. 백두산 천지에 있는 용왕담은 장군봉을 비롯한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호수로 내려가는 길은 화경(火頃 : 용암이 흐른 길목)으로 불리는 바위틈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성계는 바위틈을 통해 호수로 내려섰다. 여름철에는 사슴, 노루, 곰 따위의 짐승들이 내려와서 물을 먹을 뿐 인적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용왕담의 물은 북쪽으로 터져 있어 한참을 흘러내리다가 장백폭포에 이르고 다시 협곡을 이루며 흘러내려 송화강(松花江)에 이른다. 송화강의 발원지가 백두산 용왕담이었다.이성계는 용왕담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청량한 기운이 몸속으로 퍼지면서 전신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용왕담에는 빗줄기가 뿌려지고 있어 사방이 잿빛으로 어둠침침했다. 산이 높아서인지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음지쪽으로는 아직도 잔설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이성계는 먼 호수를 응시했다. 호수의 수면에도 장중한 구름이 몰려오고 몰려가면서 차가운 빗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이성계는 다시 산정으로 올라왔다. 멀리 북쪽을 응시하자 아득한 하늘 아래 광활한 대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둥둥둥….그때 이성계는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려오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잠을 자거나 꿈을 꿀 때마다 들려오던 북소리. 가슴이 뛰고 혈관의 피를 자맥질하게 하던 북소리. 그 웅장한 북소리가 백두산 천지에 이르자 더욱 세차게 들리고 있었다.“우…!”이성계는 북소리에 화답을 하듯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대륙을 향해 맹수처럼 포효했다. 그의 앙천성(仰天聲)이 하늘과 땅을 울리면서 대륙으로 퍼져갔다. “장군, 서두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이성계가 백두산 생각에 아득하게 잠겨 있을 때 정도전이 독촉을 하듯이 말했다.“진군!”이성계가 그때서야 긴 회상에서 깨어나 군령을 내렸다.“진군!”이방우가 이성계의 군령을 복창했다. 이성계의 진군 명령은 진중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이랴!”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성계는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말을 달린 이성계였다. 활솜씨도 뛰어났지만 기마술 또한 따를 자가 없었다.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태조가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가 있었다. 태조가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이성계의 무예는 조선역사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성계의 오추마가 홍원평야를 향해 질주하자 정도전과 이방우도 말을 휘몰아 뒤를 따랐다. 함관령은 순식간에 군사들의 말발굽소리로 천지가 떠나갈 것 같았다.태조 이성계. 그는 고려 중기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후손이었다. 고려 무신의 난은 이의방이 워낙 하급 장교라 당시의 상장군인 정중부를 내세웠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불렸으나 실제로는 이의방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고려의 권력은 젊은 무신들이 장악했다. 이의방은 딸을 태자비로 시집 보내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으나 정중부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그의 집안은 전라도 전주에서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쿠데타의 주역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후손 중에 이안사(李安社)가 태어났다. 이안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을 안렴사가 강제로 수청 들게 하자 분노했다. “내 계집을 빼앗는 안렴사를 용서할 수가 없다.”이안사는 밤중에 관청에 침입해 기생을 불러냈다. 기생이 몸을 떨면서 나왔다.“장군,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기생이 불안한 목소리로 이안사에게 물었다.“내가 너를 지키려는 것이다.”이안사는 안렴사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단숨에 목을 베었다. 안렴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전주는 이 일로 발칵 뒤집혔고 이안사는 더 이상 전주에서 살 수 없었다. 이안사는 기생을 말에 태우고 자신이 거느리던 전주 지역 백성 170여 호(戶)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옛날 자신의 원수인 산성 별감이 안렴사가 되어 새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거느리고 동북면의 의주(宜州 :원산)로 이주했다. 이때 170여 호(戶)가 따라갔고, 새로 이안사의 영향력으로 들어온 삼척의 많은 백성들이 이성계의 뒤를 따라왔다. 고려는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임명하여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했다. 이때 원나라가 침략하여 쌍성(雙城:영흥)에 진을 치고 이안사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이안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인 원나라 군대에 투항했고 두만강을 건너 오동까지 진출했다. 이안사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오동지역 몽고군 총사령관에게 친척의 딸을 주어 혼인을 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총사령관의 후원을 바탕으로 천부장이 된 이안사는 연해주 일대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고려민촌을 건설했다. 여진족들은 이안사의 세력이 커지자 위기감을 느꼈다. 이안사가 죽자마자 그들은 수천 명의 장사들을 동원하여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를 공격했다.이행리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을 배에 싣고 두만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 부인과 함께 가양탄(加陽灘)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다. 그러자 들에 적병이 가득하고, 벌써 선봉 300여 명은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때 물이 갑자기 백여 보가량이나 갈라져 이행리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를 같이 타고 적도로 들어갔다. 이행리의 종자들까지 바다를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합쳐져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했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 하였다. 이행리가 적도를 향해 갈 때 갑자기 물이 줄어 모세의 홍해 바다처럼 갈라졌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2>]]></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2</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2</guid>
            <pubDate><![CDATA[Sun, 20 Jan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가을비가 구죽죽이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옷 속으로 스며들면서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내는 영마루에 올라서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시린 눈빛으로 산아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산들이 타는 듯이 붉은 것은 가을이 깊었기 때문이고 들판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가을비였다. 구죽죽이 내리는 비가 청승맞은 것은 가을 탓이 아니라 빈 들판을 달리는 바람처럼 가슴이 텅 빈 탓일 터였다.‘갈아엎어야 돼.’사내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솟구쳤다. 가슴 속에 천하를 품고 있는 자신을 핍박하는 세상이 야속했다. 시골의 작은 서당조차 헐어버린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내는 삿갓을 비스듬히 올려 쓰고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잿빛 하늘 어디에도 새 세상이 열릴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천명(天命)이니 하늘의 뜻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리라. 동북면의 무장이라고 해서 새 세상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였다.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李成桂). 통이 큰 사내였다. 그의 휘하에 쟁쟁한 무장들이 있으니 의탁해 볼만했다. 그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찾아가는 길에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비웃듯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장이라고 해도 학자에게 학문을 배워 문리를 깨우친 인물이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시정의 부랑배가 아니었던가. 유방이 천하제일의 책사인 장량(張良)과 명장인 한신(韓信)을 만나지 못했다면 중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고려는 500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탱해 왔으면 왕기가 쇠했을 법하다. 이제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야 한다. 사내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었다.동북면 함주로 가는 길은 빗속에서 고즈넉했다. 사내는 노랫가락을 읊듯이 시 한수를 외우며 휘적휘적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5년에 세 번이나 집을 옮겼는데 금년에 또 이사를 하게 되는구나 들은 넓은데 띠집은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산은 길게 뻗었는데 고목은 쓸쓸하구나 밭가는 사람 서로 성 물어 보고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 버리네 천지가 능히 나를 받아주려니 표표히 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 이가(移家)라는 제목의 시였다. 1382년 10월,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집의 이 사내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가장 유능한 책사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382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는 초라한 유랑자에 지나지 않았다. 정도전은 당대의 대학자인 이색(李穡)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정몽주, 이존오(李存吾), 김구용, 김제안, 윤소종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출중하여 동료들의 선망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다. 1375년(우왕 1) 당시의 권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377년에 간신히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그 곳 출신의 권력자가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왕씨 성을 가진 재상이 별장을 만들기 위해 집을 강제로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정도전은 1382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고 있는 길이었다. 정도전이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5년 동안에 세 번이나 집을 이사했는데 그것도 권력자들의 횡포에 의한 것이었다.정도전은 부패한 고려 조정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이성계 대장군의 막사는 어디에 있습니까?”정도전은 수많은 깃발이 펄럭이는 함주의 막사에 이르자 군사들에게 물었다.“누군데 대장군님의 막사를 찾는 것이오?”군사들이 정도전의 위아래를 살피면서 물었다.“정도전이라는 사람이 대장군님에게 술 한 잔을 얻어먹고 싶어 왔다고 전해 주시오.”“이 사람이 제 정신인가? 우리 장군님이 어떤 분인데 술을 얻어먹겠다는 거야?”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나중에 대장군이 내가 왔다가 그냥 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들은 경을 칠 것이오.”“뭘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이름 석자만 가지고 대장군님을 뵙겠다는 말이오? 공연히 귀찮게 하지 마시오.”“전 성균관 박사 정도전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군사들은 정도전의 초라한 몰골을 살핀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성계보다 먼저 달려나온 것은 홍안의 소년이었다.“선생님, 선생님께서 이 먼 곳까지 오실 줄 몰랐습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홍안의 소년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그대는?”정도전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살폈다. 소년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했다.“이방원(李芳遠)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고명은 익히 들었습니다.”“소년 영웅이로군. 이 장군님의 몇 째 자제입니까?”“다섯째입니다.”이방원과 정도전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이방원은 함주로 출정하기 전에 개경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성계의 아들 중에 가장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392년 정도전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방원이 구출하고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서로가 적이 되어 치열한 대립을 했다. “호랑이 새끼에 고양이가 없다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입니다.”“과찬입니다. 제가 아버님께 모시고 가겠습니다.”이방원은 정도전을 공손하게 안내하여 이성계의 대군영으로 데리고 갔다. 이성계는 정도전이 왔다고 하자 깜짝 놀라서 군영 밖으로 달려 나왔다.정도전과 이성계. 그들은 군영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이 마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탐색하듯이 오랫동안 살폈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이성계였다.“정공(鄭公), 정공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오?”이성계가 탐색을 끝낸 듯이 정도전의 손을 덥석 잡았다.“핫핫핫! 송구스럽지만 천지를 유랑하다가 지쳐서 장군께 의탁하려고 왔습니다. 이틀을 굶고 먼 길을 왔는데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정도전은 제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성계에게 거침없이 음식을 요구했다.“잘 오셨소. 잘 오셨소.”이성계는 반갑게 정도전의 손을 잡고 대군영 막사로 들어갔다. 이성계의 휘하 막장들은 초라한 몰골의 정도전을 이성계가 환영을 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막사로 들어간 정도전은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지시하여 술과 음식을 차리자 고맙다는 말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휘하 막장들은 정도전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웅성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남루한 옷차림에 귀인다운 풍모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장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과 술을 다 먹은 뒤에 피로하다면서 이성계의 침상에서 쿨쿨거리고 잠을 잤다.“장군님, 저자가 뭘하는 작자인데 감히 장군님의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입니까?”조영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성계에게 물었다.“시건방진 작자입니다. 장군님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동북면 무장들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저런 놈은 몽둥이로 두들겨서 내쫓아야 합니다.”이성계의 무장들인 조영규, 이지란(李之蘭), 조영무, 고부 등이 불만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이들은 훗날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할 때 행동에 나서는 장수들이고 이지란은 남송의 명장 악비장군의 후손이었다. 악비장군이 역적 진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후손이 고려에 귀화하여 이지란 대에 이르러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편장이 되어 있었다.“어리석은 소리들 하지 말라. 내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은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장군님, 성균관 박사라면 서생 아닙니까? 서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핫핫핫! 우리는 이제 호발도(胡拔都) 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이성계의 말에 무장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호발도 군은 여진으로 동북면 일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의 군대가 토벌하러 온 것이었다. 이성계는 포용력이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의 휘하에 쟁쟁한 무장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무용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포용력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기꺼이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다. 이성계의 대군영에는 무장들 밖에 없었다. 글을 아는 장수들이 더러 있다고 해도 천하를 경영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사서오경을 읽고 병서에도 통달했다. 고려는 누대에 걸친 부패와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조정은 무능하고 지도자들은 비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는 한 마디로 난세이고 난세는 혁명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정도전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이성계였다.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그것은 용이 여의주를 문 사건이었다. ]]></description>
        </item>
                <item>
            <title><![CDATA[[제1장] 용이 여의주를 물다 <1>]]></title>
            <link>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1</link>
            <guid>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amp;entry_id=31171</guid>
            <pubDate><![CDATA[Sun, 13 Jan 2008 00:20:08]]></pubDate>
            <category><![CDATA[소설 - 조선왕조실록]]></category>
            <author><![CDATA[]]></author>
            <description><![CDATA[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1392년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다. 날은 한여름이어서 후텁지근했고 오랜 가뭄으로 대기는 건조했다. 고려 500년의 왕도 개경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무더웠다. 개경의 남쪽, 수양버들이 휘휘 늘어진 개울이었다. 자남산 동쪽 기슭에서 실개울이 흘러내리고 그 위에 다리가 하나 있었다. 실개울의 둑으로 조복을 입은 노인과 젊은 사내가 말에 앉아 느릿느릿 오고 있었다. 노인은 키가 작았으나 흰 수염이 탐스러운 선풍도골이었고 뒤의 사내는 청수한 젊은 문사였다. 수염이 탐스러운 노인은 고려의 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 젊은 사내는 그의 녹사(錄事:수행원)였다. 정몽주는 날이 더워 개울가에 있는 벗의 집을 찾아갔다. 대문도 없는 그 집은 대나무들이 울타리를 둘러싸 울창했고 안에는 소박한 초가 한 채가 한 여름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정사 앞에는 함박꽃이며 목단, 작약과 같은 여름 꽃들이 만개하여 잎잎이 진한 꽃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대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정몽주가 초가 앞에 이르자 마루에 앉아서 천을 짜던 백의소부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미색이 많기로 유명한 개경이었다. 허름한 백의를 입은 젊은 부인도 당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미인이었다.“지나는 길에 날이 더워 곡주가 있으면 얻어 마시려고 들렀소.”정몽주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백의소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의소부는 총총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가 작은 술동이를 가지고 나왔다. 정몽주가 쿵쿵거리고 술향기를 맡더니 표주박으로 몇 잔을 거푸 마셨다.“오늘은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나워.”정몽주는 탄식을 하면서 술을 마신 뒤에 꽃 사이에서 한바탕 춤을 추었다. 초가의 여주인은 정몽주의 기이한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다가 옆구리에 꽂혀 있던 퉁소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젊은 여인은 퉁소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퉁소를 연주할 때면 봉황새가 날아와 앉고 산속의 뭇짐승들이 내려와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녹사는 그녀가 퉁소를 불자 청솔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아름다운 채운(彩雲)이 하늘에 가득한 기분이었다. 백의소부가 부르는 퉁소 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중국 서한시대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사랑을 호소하면서 불렀다는 봉황곡이었다. 녹사는 황홀하여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이내 여인의 연주가 끝이 났다. 만개한 꽃 사이를 누비며 너울너울 춤사위를 펼치던 정몽주는 말없이 초가를 나와 말을 타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젊은 녹사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너는 뒤에 멀찍이 떨어져 오거라.”정몽주가 뒤를 따라오는 녹사에게 말했다.“소인의 임무는 대감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찌 멀리 뒤떨어져 오라고 하십니까?”정몽주의 기이한 행동을 본 녹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말했다.“나를 바짝 따라오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소인이 죽는다고 해도 대감을 따르겠습니다.”녹사는 정몽주가 몇 차례나 만류하는데도 듣지 않았다. 정몽주는 이날 선죽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방원이 보낸 장사들의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정몽주와 녹사는 서로 껴안고 죽은 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후세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정몽주는 경상도 영천 출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과거에 급제한 뒤에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무너져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성계 일파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정몽주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정몽주는 당대의 대학자인 대사성 이색(李穡)이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부를 정도로 학문이 뛰어나고 강직했다. 그는 이성계 일파의 부당한 유혹을 거부하여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정몽주는 우리 집안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정몽주가 격살당하기 전, 하루는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말했다.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의 무장으로 막하에 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세력은 더욱 막강해져 정도전, 조준, 남은 등 고려의 쟁쟁한 가문이 그에게 가담해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역성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그의 일파를 탄핵했고, 이성계 쪽에서는 정몽주가 목을 조여오자 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너는 정몽주를 모른다. 우리가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하면 정몽주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역성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알 수 없다.”이성계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1392년은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개국하는 해였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정몽주의 진심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날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 뒤에 시 한 수를 읊었다.  <img src="/news/photo/201004/failed" alt=""/>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 산들 어떠하리우리도 이와 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어떠하리이방원이 지었다는 하여가(何如歌)다.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두 번째 연이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로 되어 있다. 이는 이방원이 정몽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지은 시라고 하여 조선시대 내내 인구에 회자되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丹心歌)로 대답했다. 단심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하는 붉은 마음이다.정몽주의 죽음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약간 다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숭교리의 옛집에 이르러 근심을 하고 있는데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 찾아왔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습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정탁이 이방원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방원이 즉시 이성계의 집으로 돌아와 바로 위의 형인 이방과(李芳果)와 이화(李和), 이제(李濟)와 의논하고 이두란(李豆蘭)에게 정몽주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우리 대장군께서 모르는 일을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이두란은 이성계가 모르게 정몽주를 죽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다른 장수들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지만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다.”이방원의 단호한 선언에 휘하 장수들의 눈이 살기를 뿜었다.“이씨가 고려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받고 있다.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에게 더러운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내 휘하에 장수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이 없는가?”이방원이 언성을 높여 소리 질렀다.“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에 일을 처리하겠습니다.”이방원의 맹장 조영규(趙英珪)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다른 장수들도 다투어 정몽주를 격살하겠다고 소리쳤다. 이방원의 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인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등에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 정몽주를 살해하라는 영을 내렸다.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정몽주에게 은밀히 누설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생각하여 병문안을 한다는 핑계로 이성계의 집을 찾아가 동정을 살폈다. “정몽주를 죽이려면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이화가 이방원에게 말했다.“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정몽주를 해치울 때다.”“대장군이 노하시면 큰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이화가 장수들과 계책을 세운 뒤에 이방원에게 물었다.“하늘이 준 기회를 버리면 오히려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이방원은 장사들에게 정몽주가 돌아가는 노상에서 죽이라는 영을 내렸다. 장사들은 이방과의 집에서 칼을 가지고 와서 정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있는 선죽교 주위에 잠복했다. 이내 정몽주가 말을 타고 선죽교에 이르렀다. 조영규가 숨어 있다가 재빨리 달려가서 쇠몽둥이로 후려쳤으나 맞지 않았다. “웬놈들이냐?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정몽주가 조영규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놈을 죽여라!”조영규가 재빨리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고여와 이부도 빠르게 달려가 정몽주를 에워쌌다. 정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고여 등이 정몽주의 머리를 쇠몽둥이로 후려쳤다. 정몽주는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선죽교 위에 쓰러졌다. 다른 장수들도 다투어 정몽주에게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정몽주는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키다가 조영규 등에게 격살을 당해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고려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그의 피가 흥건하게 스며든 선죽교에는 아직도 선혈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description>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