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부 장관 취임 이후 북한의 ‘정동영 때리기’가 계속되다 최근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진은 지난 3월 열린우리당 당의장 시절 도라산역을 방문한 정동영 장관(왼쪽에서 세 번째). | ||
그러나 사정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이 정 장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북한은 정 장관의 개성 방문에 대해 수용 여부를 통보하지 않아 통일부의 속을 태우고 있다. 정 장관과 북한 사이의 갈등을 되짚어 봤다.
정 장관과 북한 정부의 악연은 지난 7월 정 장관의 취임 직후부터 시작됐다. 7월 초 불거진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 조문파동과 7월19일 열린 정 장관의 첫 기자간담회 내용이 시발점이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
조문파동이 나온 직후인 지난 7월 13일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한민전’은 대변인 논평에서 정 장관에 대해 “항간에서는 벌써부터 경거망동하는 그의 행실로 보아 통일부 장관직에 얼마 배겨있지 못할 것이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며 “정동영과 같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자들과는 아예 상종해서는 안된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후 정 장관에 대한 북한측의 비난 강도는 급속도로 높아져 갔다. 상황이 이쯤 되자 통일부 주변에서는 “새 장관 길들이기라고는 해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던 과거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관이 북한과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서야 남북간의 대화가 되겠나”라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듯 정 장관은 북한에 대해 화해의 손길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 8월15일 정 장관은 NSC 상임위원장 취임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조문 문제와 탈북자의 한국 이송 문제에 오해를 해 남북 당국간 대화가 일시 중단된 것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북한이 얼마 전 미국 하원의 북한인권법안과 관련해 탈북자의 대량 입국을 유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제3국에 장기간 유랑하고 있던 탈북자의 신변안전 등 현지상황이 급박해 인도적 차원에서 한국으로 이송한 것”이라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정 장관이 내민 ‘화해의 손’은 ‘원색적인 비난’이 되어 돌아왔다. 8월20일자 <로동신문>은 정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에 대해 “6·15 공동선언 채택 이후 지금까지 잘나가던 북남관계가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 자리에 올라앉은 후 전례없는 도전에 부닥치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며 “명색이 통일부 장관이라는 정동영은 사태의 본질과 책임을 뒤집고 상대방을 모독하는 경망스러운 말을 함부로 해댐으로써 제 낯을 깍고 북남관계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권고하건대 자기를 다잡을 줄 알고 언행을 심중히 해야지 가볍게 멋없이 놀다가는 신세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정동영은 새겨둘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을 대화로 유도하겠다는 정 장관의 8·15 회견의 의도가 사실상 무산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지난 8월 ‘탈북자 송환’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와 통일부를 놀라게 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정 장관으로부터 탈북자 집단입국이나 김일성 조문단 방북 불허와 관련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특히 통일부는 DJ정부 당시 북한측이 홍순영 통일부 장관을 비토하여 결국 낙마시켰던 경험을 상기하며 이러한 남북간의 묘한 긴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 장관에 대한 비난은 지난 8월말 정 장관의 방미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유는 정 장관이 미국에서 “반민족적이고 친미적인 발언을 쏟아냈다”는 것. 친북 대변지인 <통일신보>는 9월5일자 논평에서 “정 장관이 통일부 장관으로 올라앉은 이후 (김일성 주석) 조문 대표단 방북 불허에 이어 북한 주민에 대한 대거 유인 납치소동이 벌어졌으며, 온 겨레의 대사인 8·15 북남 통일행사도 무산되는 행위가 연출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의 반응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우리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연일 쏟아내고는 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정치인 개인에 대한 비난은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보법 폐지 문제나 주적론, 친북사이트 전면차단 등의 남북간의 첨예한 현안 속에서도 이전과 같은 ‘정동영 때리기’가 사라진 것은 이러한 변화를 방증한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를 두고 갖가지 해석도 나오고 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북한이 ‘변화된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대남 유화정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
한 학계 전문가는 “정 장관에 대한 북한의 노골적인 비난은 실세장관에 대한 북한의 ‘눈치작전’이라는 측면이 강했다고 본다. 선제공격을 통한 길들이기라는 목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장 미국이 부시정부 2기가 시작된 이후 강경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이 북한에게는 가장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국제사회속에서의 북한의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는 양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6자회담에서 얻을 것이 당장 없다는 것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고민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북미간의 전쟁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 현재 북한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전략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남북관계의 낙관적인 진전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정 장관이 최근 문제가 된 갖가지 문제에 대해 북한을 향해 유감을 표시하고 북한을 흡수하거나 붕괴시킬 의사가 없다는 정부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을 북한이 긍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호가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정 장관의 개성 방문 신청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최근 남북관계의 기류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됨과 동시에 북한의 ‘대화 파트너’인 정 장관에 대한 북한측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