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김용남 씨가 최근 어린 ‘용팔이’들의 길잡이 활동을 하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현재 그의 직책은 ‘천국을 만드는 사람들 복음 전도단 학교폭력범죄 예방 상담전도사’. 2003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유명한 작곡가 조운파 선생의 소개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김 씨는 3년 전부터 과거 조직생활을 함께했던 후배 5명과 폭력근절활동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한때 폭력의 대명사였던 그가 역설적인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사뭇 궁금했다.
“원래 후배 조직원들을 어둠의 세계 밖으로 인도하기 위해 복음단을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믿는 종교의 세계를 소개시켜주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스스로 벗어나게끔 할 뿐, 절대 강요하지는 않는다(웃음). 최근에는 폭력범죄 경험이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직접 만나 상담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김 씨는 자신을 일컬어 한 번의 실수로 50년 동안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못난 사람으로 자책했다. 그는 자신의 안타까운 경험을 밑천삼아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힌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매일같이 ‘어린 용팔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 대부분 가정사적으로 상처를 안고 있다. 똑같은 아픔을 겪었던 나다. 며칠간 아이들과 얘기해보면 순간 마음을 열더라.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학생 한 명이 있다. 안 좋은 길에 빠진 학생이었는데 상담을 해보니 상처가 있더라. 양아버지한테 성폭력을 당해 집을 나왔고 자연스레 폭력의 길에 빠진 것이었다. 무조건 학생들을 법의 철퇴로 내몰기 이전에 적절한 상담을 통해 사전에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
그의 말 속에 자신이 만난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번 달에는 청소년 폭력근절을 위한 만화를 제작해 대중에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그는 속된 말로 깡패 출신이다. 인터뷰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화려하지만 어두웠던 옛날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꺼낸 얘기는 역시 지난 1987년에 있었던 ‘통일민주당방해사건’에 대한 소회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당 청년당원 활동을 했다. 정계인사의 사주를 받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야권분열을 막겠다는 일념과 형님으로 모셨던 김두한 전 의원처럼 나도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장세동과 이택돈(올해 5월 작고)의 공작 활동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후에 1년 넘게 도피생활까지 하지 않았나. 정치인들 의리가 개뿔만큼도 없더라. 훗날 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칼을 갈았지만 지금은 신앙생활을 통해 다 잊고 용서했다.”
당시 일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가족이었다. 당시 그는 한 살배기 아들과 갓 100일이 된 딸을 남겨두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가족 얘기를 꺼내자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당시만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그때 100일 된 딸아이 볼에 뽀뽀를 해주면서 ‘아빠 조금만 있으면 돌아올게’라는 말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도피생활 당시 아내는 유흥주점 주방에서 컵까지 닦았다고 하더라. 훗날 아내는 ‘그 때 생각하면 죽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 손목 잡고 학교에 간 적이 없다. 혹여나 ‘깡패 자식’ 얘기 듣고 상처받을까봐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평생 진 빚 갚으며 살 것이다.”
창당방해 사건 당시 100일을 갓 지났던 딸아이는 성장해 이젠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 몇 해 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됐다는 그의 딸은 김 씨의 가장 큰 자랑이다.
김 씨는 어두운 시절 조직 세계를 양분했던 조양은, 김태촌 등 왕년의 보스들과 대도 조세형 씨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 냈다. 사실 그들 모두 최근까지 각종 범죄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최근까지도 그들과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는 김 씨는 아직도 그들에게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깍듯이 붙였다.
“사실 그 분들이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주에는 대도 조세형 씨와 교회행사에 참석해 합숙을 하기도 했다. 옛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고 함께 다시는 어두운 길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용팔이’ 김 씨가 아무런 사고(?) 안치고 생활한 게 벌써 10년째다. 다른 거물급 인사들이 회개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시금 어둠의 세계로 빠졌던 것과 비교해 김 씨는 줄곧 자신의 약속을 잘 지켜나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신앙생활에 귀의한 지 10년이 돼서야 이제 조금씩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간증참석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면 속된 말로 ‘한 탕’하자는 선후배 조직원들이 수두룩하게 붙는다. 지금도 난 매일 달콤한 유혹을 받고 있다. 그것을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분명한 건 그 길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자리는 언제나 두렵고 불안하다. 가난하지만 아무 걱정 없는 지금 생활이 행복하다.”
기자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어린 용팔이로 돌아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글을 배운 적 없는 당신과 달리 글을 읽을 줄 알던 내가 특별한 줄 알았나보다. 없는 살림에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전남 순천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셨다. 꼭 성공한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나쁜 길로 빠졌다. 만약 아버지를 만난다면 꼭 사죄드리고 싶다. 당신의 바람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