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장치 미흡 탓 유치원 등과 달리 마음대로 폐업 가능…“교습비 연대보증 규정 있어야”
10년 넘게 운영돼오던 이 영어학원은 지난 8일 학원 이사장이 돌연 학부모들에게 ‘폐원’을 알리는 안내문을 발송하면서 문을 닫았다. 경영난을 겪던 중 임대인에게 퇴거 명령을 받았다며 폐원 이유를 설명했다. 파산 절차를 진행 중이어서 당장 교습비 환불이 어렵다는 입장도 담았다.
갑작스러운 폐원에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들도 크게 당황했다. 선납한 교습비를 그대로 날릴 처지가 됐다. 이 학원은 학부모들을 상대로 적게는 3개월에서 많게는 1년치 교습비를 미리 받았다. 교습비는 한 달 기준 약 150만 원이다. 학부모들은 현재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지난 3월부터 이 학원에 4세 자녀를 보내고 있던 학부모 A 씨는 “이미 교습비 12개월치를 선납했다”며 “90만 원을 할인해준다고 해 이사장 명의의 계좌로 입금했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 경영상 어려움이 있을 때 나타나는 징후가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원어민 선생님을 새로 뽑으려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원어민 강사 등 이 학원 직원들도 폐원을 미리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0여 명인 직원들은 이달부터 급여 지급이 끊겨 생활에 큰 피해를 입을 판이다. 16일 현장에서 만난 학원 관계자는 “이사장은 아예 연락이 안 된다”며 “사태를 수습 중에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남겼다.
흔히 ‘영어유치원’ ‘놀이학교’ 등으로 불리는 유아 대상 사설교육시설이 갑작스레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학부모들이 이른바 ‘먹튀’ 피해를 입고 있다.
서울과 울산, 전주 등 전국 15개 백화점‧쇼핑몰에 입점해 인기를 끌었던 선불형 영어키즈카페‧어학원 ‘크레빌’은 2022년 돌연 영업을 중단해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해 4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의 한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 갑자기 휴원을 통보해 학부모들의 원성을 샀다. 당시 지역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학원은 휴원 통보를 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음 달 교습비를 받고 원생 모집 글도 올렸다. 이 학원의 본사는 2021년 경기도 시흥시에서도 학원을 운영하다 갑작스레 폐업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아대상 사설교육시설은 일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과 달리 ‘유아교육법’ ‘영유아보육법’ 등의 통제를 받지 않아 폐업 조치도 업주 마음대로 이뤄진다. 폐업 계획을 수개월 전 미리 알리고, 받아둔 교습비를 환불하는 등의 조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행 영유아보육법은 어린이집이 폐원할 경우 2개월 전까지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 이를 신고하고, 폐원 사실을 학부모와 보육교직원에게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자체는 학부모에게 폐원 사실이 통지됐는지 확인한 뒤 폐원 신고를 최종 수리하도록 돼 있다.
유치원 폐원 관련 규정은 더욱 까다롭다. 유아교육법에 따르면 유치원 폐원 일자는 ‘매 학년도 말일’로 정하도록 돼 있어 학기 중 폐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교육청에 폐원에 대한 학부모 동의서와 유아 전원(전학) 조치 계획도 제출해야 한다. 이후 교육감이 폐쇄 예정 날짜와 유아지원계획, 학부모 의견, 유아학습권 등을 종합 고려해 폐원 인가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학원시설은 이러한 법적 장치가 없다.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원 설립‧운영자는 1개월 이상 휴원·폐원 시 교육감에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원생이나 학부모 등에게 이를 미리 통지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의무 규정은 없다.
교육비 납부 방식의 차이도 피해를 키운다. 유아교육법상 유치원은 수업료를 월별로 균등하게 나누어 받도록 돼 있다. 일별‧분기별 납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학원법은 교육비 환불이나 과다 청구에 대해서만 규정을 둘 뿐 나머지 영역은 학원 자율에 맡기고 있다.
학부모와 교육전문가들은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가 관련 제도·규정을 더 엄격한 수준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관리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해 학부모들의 금전적 피해를 막고, 아이들의 정상적인 교육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신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책임연구원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어린이집‧유치원 등의 교육기관이 적용받는 여러 제재 규정 없이 사적 이익만 추구하는 방향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린 아이들이 이용하는 시설이니만큼 더욱 꼼꼼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창현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학원도 엄연히 교육부 관리 아래 있는 점, 아이들의 사회‧정서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점 등을 볼 때 (먹튀 폐업을 방지하는) 세부 법규정이 필요하다”며 “적어도 폐원이나 교습비 선납 등의 문제는 여느 헬스클럽 등과 다르게 다뤄져야 하지 않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학원비 떼먹기에 대한 방비책의 한 예로, 학원비 선납 시 계약 당사자를 학원(법인)과 대표자 모두로 설정하는 안전장치를 둘 것을 제안한다. 폐업 시 상환 책임자의 범위를 늘려놓으면 돌려받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선납 시 보증서를 발급하거나 보증인을 설정하는 등 학원비 계약 규정을 정부 차원에서 정비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있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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