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다단계 금융사기 혐의로 자택 감금된 버나드 메이도프가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투자자들의 손실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투자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이름도 드러나면서 앞으로 국내에도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 귀재로 불렸던 메이도프가 세계 금융시장을 들쑤신 애물단지가 되기까지의 전모를 따라가 본다.
해안가 인명구조 대원으로 5000달러(약 650만 원)를 벌어들인 20대의 유대계 청년 버나드 메이도프. 그는 이 돈을 종자돈 삼아 굴리기 시작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사람들을 끌어 모아 사모펀드를 구성하고,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이자를 꼬박꼬박 지불한 것이다. 지인들에게 ‘버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 화려한 언변의 사업가에게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무한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투자자는 끊이지 않았다. 버니는 세계 금융가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에 ‘립스틱 빌딩’으로 불리는 사옥까지 마련했고, 그의 사무실이 있는 립스틱 빌딩 17층은 미국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최상위층만이 드나들 수 있는 ‘그들만의 투자클럽’이었다. 후순위로 들어온 투자자들의 돈을 선순위 투자자들에게 빼내준다는 ‘폰지 사기’를 택한 버니에게 지난 50년 동안 실패란 없었다.
그러나 버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금융위기로 급전이 필요해진 큰손 투자자들이 일제히 투자금 회수를 요청하자 더 이상 ‘돌려막기’를 할 수 없게 된 것. 나스닥 거래위원장까지 역임했던 ‘월가의 큰형님’ 메이도프의 모래성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고 가뜩이나 월가 금융위기로 휘청대던 세계 금융계는 또 다시 카운터펀치를 맞은 채 망연자실하고 있다.
메이도프가 지난 12월 12일 미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기 전까지, 그가 쌓아온 명성은 너무나 화려했다. 메이도프의 이름을 딴 ‘버나드 메이도프 LLC’는 1993년부터 지난해까지 14년 동안 딱 다섯 달을 빼고는 모조리 ‘+’ 수익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닷컴 붕괴 등 크고 작은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경이적인 운용실적이었다.
메이도프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단 한 번의 연체도 없이 평균적으로 매달 투자금의 1%를 수익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통상 ‘투자하자마자 수십 퍼센트를 돌려준다’며 광고 문구에서부터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다른 다단계 금융사기와 달리 ‘월 1%, 연이율 10%’ 정도의 현실적인 수익률을 제시한 것도 신뢰감을 높여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직도 전화를 통한 구시대적 거래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월스트리트에서 컴퓨터를 통한 거래방법을 도입한 것도 메이도프의 명성을 높여줬다.
메이도프는 민주당에 거액의 정치헌금을 정기적으로 기부하면서 월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맏형’ 역할을 맡아왔고, 요시바 대학을 비롯한 유대계 교육기관에 거금을 헌납하며 미국 내 유대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그는 뉴욕주 상원의원인 찰스 슈머, 역시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차기 국무장관에 내정된 힐러리 클린턴, 하원 세입위원장을 맡고 있는 찰스 랭글, 상원 금융위원장을 맡고 있는 크리스 도드 등 거물급 정계 인사들에게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며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메이도프 금융사기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미국의 월가. | ||
한 헤지펀드 매니저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위대한 인류애자로 여겨졌고, 지역사회의 기둥으로 인식됐으며, 나스닥을 이끄는 지도자로 비쳤다”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자수성가로 부를 취득하고 사회적 책임을 준수하는 인물’로 비친 것이다. 일부 월가 전문가들은 “그가 지난 50년간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 높은 수익률을 연체 없이 지급해온 빼어난 경영실적 등을 감안해보면 그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수십 년 간 지구촌 금융가를 지배해온 월스트리트가 한순간에 무너진 최근의 경천동지할 상황만 아니었다면 메이도프가 벌인 희대의 사기극은 영원히 들통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현재까지 메이도프가 벌인 사기사건의 피해액은 500억 달러. 그러나 HSBC은행이 15억 달러, 산탄데르 은행이 30억 달러, BNP파리바 은행이 4억 7000만 달러의 손실을 밝히는 등 유럽, 아시아 지역 금융기관들의 피해액이 속속 드러나면서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섣불리 예견하기 힘든 상태다. 국내에서도 대한생명과 사학연금, 한국투신운용, 삼성투신운용, 한화투신운용, 하나UBS자산운용, 알리안츠자산운용 등이 수백만 달러에서 수천만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액이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투자처에 대한 정밀한 점검이 없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이번 파문으로 인해 금융위기 이후 가뜩이나 위축됐던 월스트리트가 더욱 고통스런 시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1980년대 초반 이후 30여 년간 월스트리트는 사실상 정부로부터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는 ‘무풍지대’ 대접을 받아왔다. 이는 ‘큰 정부는 죄악’이라는 신자유주의가 미국 경제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매김해온 것과 무관치 않다. 각종 악성 루머와 불법 공매도가 횡행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금융당국의 미온적 자세가 결국 메이도프 같은 희대의 사기꾼을 배출하게 된 주요 원인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