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 4단
최 4단은 16일 베이징의 중국기원에서 열린 제2회 백령배 세계바둑오픈 예선 결승에서 중국의 여자 정상급 왕천싱 5단(23)에게 백을 들고 불과 112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었다.
왕천싱은 2009년 제8회 정관장배에서 3연승을 올렸고 2012년 제2회 황룡사쌍등배에서는 가공의 8연승, 세계 여자바둑계를 들었다 놓았다. 위즈잉도 2013년 제3회 황룡사쌍등배에서 6연승 깃발을 날렸다.
최정-왕천싱의 한판은 한마디로 최정의 완승국이었으며 이름에 손색없는 명국이었다. 초반에 왕천싱이 잠깐 머뭇거리자 최정은 단숨에 휘몰아쳐 대세를 장악했다. 중반 입구, 형세 불리를 느낀 왕천싱이 도발을 감행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뭔가 한바탕 육박전이 벌어질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터진 최정의 기상천외한 묘수 일발! 압권이었다. 왕천싱의 투지는 꺾였고, 돌들은 전열이 흩어져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닥 노림을 향해 끈질기게 꿈틀거렸는데, 최정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손속은 갈수록 서릿발 같았다. 오히려 한국 팀 검토실에서 “좀 심한 것 아닌가?” “아슬아슬하네. 조심해야 할 텐데. 저러다 뒷발차기에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아냐”는 우려의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랬다. 왕천싱의 꿈틀거림은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여자바둑 단체전 연승 신기록의 보유자답게 반격의 실마리를 더듬고 있었던 것이고, 어느 순간, 최정의 포위망을 뚫으려 좌충우돌하던 왕천싱의 소매에서 비수가 튀어나왔다. 우리 응원석이 먼저 놀랐다. 아이고, 최정이 걸렸나! 비명에 놀란 최정이 응원석을 돌아다보았다. 응원부대와는 달리 전혀 낭패한 표정이 아니었다.
최정은 준비하고 있던 두 번째 묘수를 작렬시켰다. 응원석에서 “아, 저건 전설의 진신두(鎭神頭, 옛 기보에 나오는 묘수. 양쪽의 돌들이 모두 축으로 몰리게 되어 어느 한쪽은 잡힐 상황에서 양쪽의 축을 한 수로 해결했다)!”라고 소리를 높였다. 최정이 연출한 명장면 둘을 소개한다.
<1도> 바둑판의 좌반부 일대가 벙벙하다. 흑은 백 모양 속으로 뛰어들어 지금 헤쳐 나오고 있는 장면이다. 왕천싱은 흑1로 머리를 내밀면 오른쪽 흑돌과 연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리라. 아래 백돌도 약하니까. 최정은 백2로 가로막는다. 그래도 흑3으로 젖히면 더 이상 백이 흑을 저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바로 여기서 백4라는 최정의 귀수가 작렬한다.
<2도> 흑1~5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백은 2로 몰고 4로 늘더니 6에서 틀어막는다. 우격다짐 같다. 흑7-9로 나가 끊으면? 들고양이 게릴라를 가두기에는 백의 올가미가 너무 허술해 보인다. 도처에 단점이다.
<3도> 흑1~7, 끊고 또 끊고, 몰고 또 끊는다(백6은 흑1에 이음). 그리고 9로 가만히 뻗는다. 아~ 이래서는 잡으러 가던 백이 거꾸로 파탄인 것 같다. 그런데 또 바로 여기서 최정이 준비하고 있던 제2의 묘수, 백10이 작렬했고, 지켜보던 한-중-일의 선수 관계자 모두가 경악했고, 대회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4도> 흑1로 이어 수를 늘리자 비로소 백2로 보강한다. 흑3에는 백4로 대꾸한다. 흑5로 잇고 7, 이번에는 이쪽 백과 붙자고 하자 백8~14로 징검다리를 밟듯 가뿐가뿐 날아가 버린다. 여기가 끝이었다. 가공할 화력이라던 왕천싱의 돌들은 전부 불발탄이었고, 왕천싱은 얼굴을 붉히며 돌을 거두었다. 웬만해서는 던지지 않는 중국의 남녀 기사들이지만,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영상을 되돌려 본다. <1도> 백4 때 <5도> 흑1로 나가면? 당연히 백2로 끊는다. 흑은 3에서 5로 몰아가는 길뿐이고, 7-9의 회돌이를 거쳐(백10은 흑3 자리 이음) 11로 젖혀 봤자 백12에서 막힌다. 그쪽이 막다른 골목이니 방향을 바꿔 흑13-15로 이쪽을 나가 끊어 봐도 백16-18로 흑이 한 수 부족이다.
<3도> 백10이 왜 진신두를 방불케 하는 묘착인가? 그냥 <6도> 백1로 따내면(흑이 여기를 이으면 왼쪽의 백 석 점이 걸리니까), 흑은 2로 잇는다. 백도 실전처럼 3으로 보강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러면 흑은 저쪽으로 돌아가 4-6으로 여기를 끊는다. 백7로 이으면 백8 이하로 몰아간다. 백이 한 수 부족으로 잡히는 것. 그러나 백1이 <3도> 백10처럼 A에 있으면, 즉 <7도> 백가 있으면, 흑이 1-3을 선수하고(백4는 흑 자리 이음), <6도>처럼 몰아간다 해도 백10으로,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한 발 먼저 흑돌을 축으로 잡는다.
<4도> 백8 때 흑이 <9도> 1로 젖혀 막으면? 백2로 끊어 4-6으로 회돌이치고(흑7은 백2 자리 이음) 유유히 8로 빠져나간다. 마지막으로 하나. <3도> 백10 때 흑이 <10도> 1로 이 돌을 살리며 수상전 하자고 하는 것은? 백2로 끼우고 4로 돌려쳐 역시 흑이 한 수 부족이다.
이 바둑을 관전한 바둑팬들은 “이번 백령배에서 지금까지 두어진 바둑 가운데 최고 걸작”, “백령배를 포함해 최근에 감상한 바둑 가운데 제일 통쾌한 기보”라고 말했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