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29일 의원총회를 열어 작통권 논의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했지만 내부 이견과 의원 정족수 부족으로 결의대회가 무산돼 이미지만 구겼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전시 작전통제권 조기 환수 문제를 비롯해 한·미 FTA 협상, 사행성 오락게임인 ‘바다이야기’ 파문 등 굵직굵직한 정국 현안에 대한 한나라당의 대처방식은 실망을 넘어 한심하다는 비판까지 쏟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무기력해진 것일까. 진단은 각양각색이다.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전략 마인드 부족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웰빙 정당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비아냥까지 들린다.
이 같은 비판은 전시작전통제권(작통권) 조기 환수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를 명분으로 작통권 조기 환수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시작된 작통권 논란은 한나라당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노 대통령이 자주를 명분으로 내건 이상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자주세력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내에선 한미간 작통권 논의에 대해 ‘논의 중단’과 ‘논의 연기’ 등 엇갈린 목소리를 내고,‘색깔론’을 연상시키는 발언과 ‘대미 비판’이 잇따르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특히 당내 강경보수파들이 ‘안보 불안’을 명분으로 “무조건 반대”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정부·여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안보장사’를 하고 있다고 거칠게 몰아세웠다.
한나라당은 더욱 궁지로 빠뜨린 것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윤광웅 국방장관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이 편지는 한반도 전시 작전통제권을 오는 2009년 한국군에 넘기겠다는 입장을 담고 있었다. 사실상 미국이 우리 정부의 방침을 재확인해준 셈이다. 미국이 우리 정부의 작통권 환수 요구에 대해 은근히 반대해줄 것을 기대했던 한나라당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노 대통령이 만든 덫에 제대로 걸려든 모양새라는 소리도 나왔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지난달 28일 강재섭 대표의 ‘여야 영수회담’ 제의에 이어 29일 의원총회를 열어 작통권 논의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했지만 내부 이견과 의원 정족수 부족으로 결의대회가 무산됐다. 이날 의원총회에는 소속 의원(126명)의 절반도 출석하지 않았다. 결국 결의안 채택은 고사하고 국회 본관 앞에서 열기로 했던 결의대회마저 취소됨으로써 더욱 모양새만 구긴 셈이 됐다.
당 지도부는 채택이 무산된 결의문을 3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이틀간 열린 원내·외 위원장 연찬회에서 토론 없이 채택했다. 결의문은 ‘한미 양국 정상은 작통권 논의를 즉각 중단하고, 더욱 강력한 한미동맹의 청사진을 제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각에선 토론도 하지 않고 결의안부터 채택한 것은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 노무현 대통령 |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찰 수사가 정치권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의 실명까지 거론되는 상황에 이르자 당내 분위기는 갑자기 뒤숭숭해졌다. 여권의 집중 표적이 되고 있는 박형준 의원에 이어 누구에게로 불똥이 튈지 모르는 형국이다.
당 일각에선 바다이야기 의혹과 관련 영남지역 의원 3∼4명의 실명까지 나돈다. 한 의원은 청와대 행정관 모친의 지분 보유 사실이 드러난 코윈솔루션 대표와 친분설이 나돌고, 또 다른 의원은 친동생이 지역 행사와 관련해 게임업체 대표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첩보가 당에 접수된 것으로 알려져 더욱 당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특히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검찰 수사에 따른 유탄에 맞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게임 업체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의원들도 겉으론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내심 긴장하는 눈치다. 게다가 홍준표 의원의 주장으로 촉발된 내부 감찰론이 강재섭 대표의 거부 입장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힘을 얻는 양상이다.
그러다면 한나라당은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각종 이슈들에 대해 갈팡질팡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우선은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새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이른바 ‘빅3’로 불리는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대권주자들이 장외에서 대권후보 경쟁을 본격화한 상황이다 보니 ‘관리형 대표’나 다름없는 강 대표에게는 힘이 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상당수 의원들이 벌써부터 특정 대선주자에게 줄을 서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대표가 ‘참정치실천운동’을 앞세워 기강 잡기에 나서고 있지만 정국 현안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 초선의원은 “대선을 1년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대선주자도 아닌 강 대표가 당권을 장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당 관리라도 잘하면 그나마 본전”이라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전략 부재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통권 논란과 사행성 오락게임 파문은 노 대통령의 입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문제들이 불거졌을 때 노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문제들을 꺼집어 낸 이유조차 분석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주장과 의혹을 제기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파문이 확산되자 뒤늦게 ‘노 대통령이 무슨 의도로 그런 문제들을 제기했을까’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당 차원의 전략·전술이 없다 보니 이슈 선점은 고사하고 현안 대응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문헌 의원은 “당이 이런 식으로 가면 대선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제라도 노 대통령의 정국 구상과 여권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통권이나 한미 FTA는 우파의 핵심 아젠다인데 결과적으로는 노 대통령이 선점한 꼴이 됐다”면서 “전략 부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전종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