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한 장면. |
새해 벽두부터 전국의 폭력조직이 들썩였다. 어둠의 세계를 떠났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범서방파의 두목 김태촌 씨(64)의 사망소식 때문이었다. 경찰도 150여 명의 인력을 빈소에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행이 우려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발생하진 않았지만 김 씨의 장례식장엔 내내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김 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전국에서 수백 명의 조직폭력배들이 집결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대규모의 조폭은 사라졌다곤 하나 다양한 형태로 탈바꿈해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들의 ‘현재’를 들여다봤다.
“요새 조폭이라고 얼굴에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수차례 조폭소탕에 참여했던 베테랑 형사의 짧고 굵은 대답이었다. 이어 형사가 말하는 조폭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처럼 검은 정장 차려입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수 개의 조직이 함께 공생하는 곳도 있다. 워낙 소규모로 조직돼 있다 보니 폭력조직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형사의 말은 경찰청의 집계 자료로도 증명된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작성한 ‘전국 조직폭력배 현황’을 살펴보면 전국적으로 217개의 조직이 구성돼 있으며 총 5384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몇몇 규모가 큰 조직을 제외하면 평균 20명 남짓한 인원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 범서방파나 OB파, 양은이파처럼 전국구로 명성을 날리는 조직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이처럼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조폭 세계지만 지역별 차이는 확연하다. 전국에서 조폭이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된 경기지역은 무려 29개의 조직 아래 912명이 속해있는데 이는 제주를 제외한 최저 지역인 대전(9개 조직·144명)보다 약 7배에 달하는 수치다. 뒤를 이어 서울(22개 조직·484명), 전북(16개 조직·410명), 경남(18개 조직·400명), 경북(12개 조직·391명), 부산(23개 조직·381)이 조폭의 주요 활동무대로 손꼽혔다.
규모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요 ‘업무’도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조직폭력배 범죄 유형별 검거 현황’을 살펴보면 과거 단순 폭행이나 협박에 머물던 범죄 유형이 각종 불법행위로 다양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조폭의 검거 원인 1위는 폭력행사인데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온 조폭은 무려 7991명(39.2%)에 달한다. 그 뒤로는 유흥업소 갈취로 3703명(18.2%), 서민상대 갈취로 2189(10.7%), 탈세 및 사채업으로 750명(3.7%), 사행성 불법 영업 등으로 672명(3.3%)이 쇠고랑을 찼다. 이뿐만 아니라 변칙적 위장 사업, 경매 및 입찰 개입, 부동산투기 개입 등에도 조폭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지금의 조폭은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 불법으로 수입을 챙기기보다는 합법적인 사업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분야도 가리지 않는다. 사채업을 기본으로 해 건설업, 인터넷 도박사기 사이트, 주식시장, 엔터테인먼트 등 돈이 되는 곳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형국이다. 문제는 아무리 합법인 사업체를 운영한다고 하더라고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조폭도 자금이 든든해야 조직이 유지되기 때문에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경찰들이 워낙 예의주시하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합법적인 사업을 벌이려 하는데 이마저도 결국 불법이 된다. 정당하게 건물을 사서 세입자를 받으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갖은 협박과 폭행이 행사되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한 가지 조폭의 두드러진 변화는 주먹세계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의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보스를 대신해 감옥에 가고 죽음으로 동료를 지키려 했던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현직 경찰들의 전언이다. 그러다보니 검거된 조직원이 경찰도 모르던 범죄 사실을 술술 털어놓는 웃지 못 할 광경이 펼쳐지는 일도 다반사라고 한다.
앞서의 경찰청 관계자는 “조폭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조폭의 활동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조직원의 변화도 잦다는 말인데 이런 상황에선 자연스레 유대감이 약해지고 충성도도 떨어지기 마련이다”며 “과거엔 조폭 한 명을 잡아도 우두머리까지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워 고생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찰들 사이에 ‘한 명만 잡아도 그 조직은 끝’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후배 교화하거나 두문불출
‘용팔이’로 이름을 알린 김용남 씨(63)는 10여 년간의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학교폭력예방전도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김 씨는 후배 조직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폭력범죄 경험이 있는 학생들을 선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씨의 ‘오른팔’로 불리던 백민 씨(61)도 독실한 불교신자로 살아가며 ‘한국범죄예방지원센터’에서 활동하는 중이다.
반면 대외적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들도 있다. 안토니파의 보스였던 안상민 씨(55)는 지난 1997년 은퇴식을 가진 뒤 고향으로 내려가 아내와 함께 이불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안 씨는 은퇴 이후 단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또한 OB파의 두목 이동재 씨 역시 1988년 양은이파의 공격을 받고 미국으로 도피한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한 ‘천안곰’으로 불렸던 조일환 씨, 옥태파의 김옥태 씨, 주먹계의 대부로 불리던 전정길 씨 등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