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9단(오른쪽)이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중국 탕웨이싱 9단을 상대로 1~2국을 연승, 우승을 거뒀다. 어느덧 25세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쑥스러운 듯 웃는 모습(왼쪽 작은 사진)은 20년 전 필자가 만난 꼬마 김지석의 모습 그대로다.
2국은 김 9단의 무난한 승리. 포석 단계에서 일찌감치 실리로 멀리 달아났다. 집으로는 백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진 상황에서 탕웨이싱 9단은 공격에 올인했으나 김 9단은 신속하고 과감하며 정확한 용병술로 대형 바꿔치기를 결단하는 것으로 승부를 마무리했다.
사람들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또 사람들의 예상이 이렇듯 순탄하고 부드럽게 들어맞은 적도 별로 없었다. 링에 오르는 김지석이나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모두들 편안한 얼굴이었다. 승부는 언제나 모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이번만큼은 김지석이 그냥 어렵지 않게 이길 것이라고 믿는 표정들이었다. 얼마 전에 바로 삼성화재배와 LG배, 두 개 세계기전에서 동시에 결승으로 갔을 때도 말했던 것처럼 김지석은 최근에, 특히 올해 들어서는 지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평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것을 다시 옮기자면 “무엇보다 얼굴이 밝고 편안해 보인다. 수읽기와 전투력은 예전부터도 정평이 있었지만, 올해 김지석의 바둑을 보면 엄청난 수읽기와 가공할 전투력에 유연미까지 곁들여지면서 그야말로 경지에 오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지석은 올해 국내기전에서 현재까지, 며칠 전에 있었던 ‘영재-신예’ 두 소년(열네 살 동갑내기 박종훈, 박진영 초단)과 두어 이긴 것은 빼고, 25승7패를 기록하고 있다. 78.1%의 승률이다. 세계기전에서는 성적이 더 좋다. 이번 우승까지 22승3패로 승률이 무려 88%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중국리그에서도 9승2패, 81.5%의 승률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삼성화재배 결승 직전에, 이쪽에 신경을 쓰느라 그랬는지 2패를 당해 승률이 조금 낮아졌다. 아무튼 올해 김지석은 통산 56승14패, 승률 80%로 달리고 있다. 3연승, 4연승은 다반사고 6연승, 7연승의 기록도 자주 보인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서는 본선부터 준결승까지 6연승에다가 결승 2승이니 8연승이다.
결승전을 엊그제처럼 가슴 졸이지 않으면서 구경한 적도 별로 없었다. 1국은 거의 다 둔 시점에서 김지석이 반집으로 분패할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사람들은 탄식하지도, 발을 구르지도 않았다. 해설장의 진단이 틀릴 리는 없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래도 김지석이 지지는 않을 것 같았고, 또 설령 첫 판을 진다해도 나머지 두 판은 다 이길 것 같았다. 이상한 믿음이었다. 2국도 우리 아마추어들은 잠깐 놀라기는 했다. 바꿔치기가 벌어졌을 때, 김지석의 좌변 흑 대마가 잡히는 것을 볼 때였다. 그러나 그건 잡힌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었고, 작은 것을 버리고 더 큰 백 대마를 잡는 것이었다. 초반에 김지석이 탕웨이싱 9단의 세력권에 쳐들어 갈 때는 무리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쉽게 타개했고, 반대로 탕웨이싱이 김지석의 진영에 수를 내러 왔을 때는 사건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김지석은 어떤 때는 용서없이 어떤 때는 그냥 깔끔하게 처리하는 무르익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초절정 기예다. 확실히 경지에 올랐다. 예전과는 격단의 모습이다. 능수능란, 신축자재”라는 사람들의 칭찬과 감탄이 어느 것 하나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어쩌면 조만간 박정환을 제칠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김지석은 이번 우승으로 세 가지 갈증을 동시에 해소했다. 이제나 저제나, “실력으로는 벌써 세계 타이틀을 한두 개는 따고도 남아야 하는 건데, 왜 아직…?” 하는 자신과 팬들의 조바심과 “뭔지 2% 부족?”인가 하는 주변의 궁금증과 “엄친아여서?”하는 사람들의 의구심 등을 일소했고, 작년에 세계 타이틀 모두들 중국에 빼앗겼던 이른바 ‘한국바둑 2013의 수모’를 떨쳐버렸으며 국가대표-상비군 훈련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입증했다. 게다가 탕웨이싱 9단은 2013 삼성화재배 우승자. 작년에 결승에서 이세돌 9단을 2 대 0으로 이겼었다. 선배의 빚도 대신 갚아준 셈이다.
김지석 9단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이다. 작고한 임선근 9단의 바둑연구실에서였다. 임 9단의 연구실은 교대역 근처에 있었다. 임 9단이 한국기원 사무총장을 맡기 전이다. 김지석은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는데, 지금은 훤칠한 미남자지만, 그때는 또래들보다 오히려 좀 작은 편이었다. 임 9단이 바둑을 한번 두어보라고 했다. 호선이었다. 바둑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흘러갔다. 김지석은 한 수를 두고 옆을 보고, 한 수를 두고 나를 보고, 옆 사람을 보고, 물을 마시러 정수기로 달려갔고, 사탕을 까먹었다. 가끔 하품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김지석이 지루하니 이만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별안간 내 대마를 잡으러왔다. 날카로운 수였는데, ‘꼼수’ 같기도 했다. 궁리, 궁리해 겨우 살렸다. 그러자 꼬마 김지석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웃으면서 조그맣게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잘 두시네…^^” 그 표정과 웃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웃음이 참 맑고도 ‘이뻤다’. 장난 ‘끼’도 그득했는데, 그건 또 나이답지 않게 의뭉스럽기도 했다.
대국 현장에서 사진이 여러 장 날아왔다. 김지석은 활짝 웃고 있고,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다.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어느덧 스물다섯의 청년이고 남편이고 가장이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얼굴도 좀 변하는 건데, 김지석의 얼굴은, 특히 웃는 얼굴은 그때와 똑같다. 아저씨의 대마를 꼼수 비슷한 수로 잡으러갔다가 발각이 나자 짐짓 아저씨를 칭찬하면서 눙치던 꼬마가 세계 타이틀 홀더가 되었으니 그때의 그 아저씨도, 미래의 세계 챔피언에게 칭찬 받았던 기억에 기쁠 수밖에.
김지석의 다음 사냥 목표는 물론, 당연히 LG배고 상대는 박정환이다. 박정환은 김지석에게 마지막 남은 숙제다. 박정환에게는 시원하게 이겨 본 적이 거의 없다. 요즘은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통산 전적 14승4패가 말해주듯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판 맛을 못보고 있었다. 14승이 빅정환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이다. 평자들은 말한다. “김지석은 이기는 것도 이기는 것이지만, 이겨가는 모습이 정말 우아해서 사람들의 기대가 오늘은 이세돌 박정환에서 김지석으로 옮겨가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 말에 한 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