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덩치들 가운데 가장 초라해진 업종은 중공업·조선이다. 세계 1, 2, 3위를 싹쓸이 하며 10년 치 일감을 확보했다고 자랑하던 게 불과 수년 전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무리한 출혈(저가) 수주에 내부 관리조차 구멍이 난 것으로 드러나면서 시장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SK네트웍스, 삼성물산, LG상사 등 세 종합상사 모두 시총이 순자산을 밑돌고 있다. 아래 사진은 울산 현대중공업 전경(연합뉴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분기까지 3조 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우태윤 기자
세계 조선 1위 현대중공업은 2013년 매출이 54조 원에 달하고, 2014년 3분기까지 매출도 39조 원에 달한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자회사 현대삼호중공업 포함)과 현대미포조선의 시가총액은 간신히 9조 원을 넘을 뿐이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이 17조 원이나 되지만, 시장은 이 가운데 절반가량을 부실로 보는 셈이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 3분기까지 3조 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영업적자로 부실을 떨어낸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추가 부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연매출이 11조 원을 넘고, 자기자본이 6조 원에 육박하는 삼성중공업 역시 시가총액이 4조 원에 겨우 턱걸이하고 있다. 연간 2000억 원의 이익도 채 내지 못하다 보니 순자산 가치의 3분의 1이 할인된 셈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연간 매출이 15조 원을 넘지만 이익은 고작 1000억 원대에 그치고 있어 5조 원에 육박하는 순자산의 3분의 2인 3조 2000억 원가량의 시장가치만 인정받고 있다.
정유·화학 업체들도 덩치 값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연매출 67조 원, 순자산 17조 원에 육박하는 SK이노베이션의 시장가치는 고작 8조 2000억 원대다. 자회사인 SK에너지, SK종합화학이 유가 하락과 화학 업황 부진으로 돈을 벌지 못해서다. 시장은 당분간 SK이노베이션이 번 돈을 까먹기만 할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연매출이 23조 원을 넘고 조 단위 이익을 내는 LG화학도 ‘굴욕’을 당했다. 화학업종 대장주로 군림했지만, 주가가 하락하면서 시총이 12조 7000억 원대까지 떨어졌다. 순자산 가치와 비슷한 수준이다. 화학 대장주 자리는 이미 아모레퍼시픽에 내줬고, LG그룹 내 대장주 자리도 LG디스플레이와 다투는 처지가 됐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화학업체들은 지난 10년여 동안 중국 특수를 톡톡히 누리며 공격적인 설비투자를 단행해왔는데, 최근 중국 업체들이 자체 생산설비를 갖추면서 물건을 팔 곳이 없어지고 있다. 최근의 유가하락도 치명적이지만, 새로운 수요처를 발굴하지 못하면 설령 유가가 반등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업체들이 돈을 벌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화학주 가운데 연매출 30조 원, 순자본 5조 원대인 S-오일의 시가총액은 6조 원을 넘고 있어 대조적이다. 대주주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라는 점이 시장가치를 지켜내는 방패가 되는 모습니다.
드라마 <미생>으로 ‘뜬’ 종합상사들도 ‘빛 좋은 개살구’다. 매출 24조 원인 SK네트웍스, 매출 19조 원인 삼성물산, 매출 12조 원인 LG상사의 시총은 각각 1조 9000억 원, 9조 원, 1조 3000억 원 선이다. 세 회사 모두 시총이 순자산을 밑돈다. 그나마 매출 17조 원의 대우인터내셔널이 유일하게 시가총액이 순자산보다 1조 원가량 많은 3조 3000억 원에 달해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증권업계 다른 관계자는 “종합상사가 업종 특성상 매출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순자산 가치는 웃돌아야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이익을 내는 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적자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미래 먹거리가 없다 보니 미래가치를 현재로 할인하는 주가가 오를 리 없다”고 분석했다.
철강과 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2위까지 올랐던 포스코의 현 시총은 24조 원대다. 62조 원에 달하는 매출과 45조 원이 넘는 순자산을 고려할 때 엄청난 홀대를 받고 있는 셈이다. 분기당 2조 원 가까이 벌던 영업이익이 1조 원대 아래로 떨어진 데에 대한 혹독한 평가다.
한 전직 자산운용사 대표는 “우리나라 산업의 중추는 중후장대한 공장산업인데, 이들이 투자자로부터 홀대 받고 있다는 점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새로운 수요처나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 증시의 미래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