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9단(왼쪽)과 박정환 9단의 LG배 결승 대국.
이번 결승3번기 직전까지 두 사람 사이의 통산 전적에서 박정환이 16승 5패, 3 대 1의 압도적 차이로 앞서 있었다. 박정환이 김지석에게는 그야말로 천적이었던 것.
그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승부에 대해서만큼은 조심스럽게나마 김 9단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승부세계의 흐름, 승부사 개인의 기세, 가세의 상승-하강, 그런 것들로 볼 때 지금은 김지석이 뭔가 절정의 컨디션인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긴 지난번 국수전을 빼고는 요즘 김지석은 지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도 보이니까.
그런데 뚜껑을 열자 2월 9일 제1국에서 박정환이 백을 들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176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었다. 그것도 완승에 가까운 내용으로. 박정환은 대국 전 인터뷰에서 “내 바둑은 특징이 없는 것 같다. 색깔을 갖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고, 그걸 주변에서는 “특징이 없다는 것은 골고루 다 잘 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1국이 바로 ‘박정환의 바둑이었다. 박정환은 초반 팔씨름, 중반의 수읽기와 형세판단, 어느 것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기회가 오자 정확하게 결정타를 날렸다. 이른바 ‘무결점 바둑’을 선보였던 것.
10일 하루 쉬고, 11일 제2국. 김지석이 백을 들고 200수 만에 불계승, 피차 백으로 이기면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1국이 박정환의 바둑이었다면 2국은 김지석의 바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초반에 박정환이 리드를 잡았으나 김지석은 서두르지 않으며 집을 벌어들인 후 박정환의 대모양에 뛰어들었고, 거기서부터 눈부신 타개로 흑진을 헤집었다. 검토실에서는 “이것이 최근 김지석 바둑의 본령이다. 곡예요, 예술이다. 김지석이 박정환에게 이기는 법을 찾아냈다. 선 실리 후 타개다”라면서 흥분했다. 김지석의 2 대 1 승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11일 제3국. 다시 돌을 가려 박정환이 흑. 초반 흑21까지는 2국의 재판이었다. 거기까지는 피차 해볼 만하다고 본 것. 김지석은 2국에서처럼 우하 흑진을 산뜻한 감각으로 경쾌하게 삭감했고, 좌상귀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실리를 벌며 포인트를 올렸다. 대신 중앙에 백의 미생마가 하나 떴다. 흑은 두터웠으나 집이 부족한 양상. 박정환은 좌상쪽 백말과 중앙으로 흘러나온 백말, 두 미생마를 엮는 작전을 펼쳤다. 이를테면 양곤마 공략이었는데, 타개에 자신이 붙은 김지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검토실은 어제처럼 감탄했다. “어쨌든 타개에 관한 한 지금은 김지석이 당대 최고”라는 것이었다.
미생마 둘이 살아가자 바둑은 백에게 기울었고, 박정환이 상기된 표정이었던 것에 비해 김지석의 얼굴은 평온했으며 그래서 모두들 세계대회 2관왕 탄생을 축하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고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를 않았던 것. 김지석은 대마가 살기만 하면 이긴다는 생각에 ‘다소 안일하게’ 살았다, 살고 나서는 낙관 무드에 젖어들었다. 박정환이 따라붙었다. 바둑은 순식간에 반집승부가 되었다.
3억 원이 걸린 승부답지 않게 초·중반을 빠른 속도로 처리하던 두 사람의 착점이 비로소 느려지기 시작했다. 두 대마가 완생한 백136수부터 종국한 314수까지 178수가 진행된 2시간여 동안 반집의 저울추는 애를 태우며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김지석이 먼저 실수. 박정환이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다가 박정환도 실수. 재역전의 찬스? 김지석은 패를 걸 수 있었다. 불리했으니 결행해야 했다. 그러나 김지석은 물러섰고, 거기서 검토실은 박정환의 반집승을 선포했다. 김지석이 뒤늦게 버텼으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 차이가 벌어져 바둑은 흑의 1집반승이었다.
그랬다. 졌을 때에도 담담하곤 했던 김지석이었지만, 이날 패배는 아팠던 모양이다. 우승 상금 3억, 준우승 1억,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유일한 세계대회 2관왕, 곧 세계 제일인자, 숙적이자 난적 박정환 제압, 이 몇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었던 기회였고, 좋은 바둑이었고, 질 수 없는 바둑이었고, 박정환도 국후 인터뷰에서 “중반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포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는데, 그걸 지다니.
박정환은 2011년 제24회 후지쓰배에서 우승했다. 박정환의 첫 세계 타이틀이었다. 당시 18세. 후지쓰배 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다. 그때만 해도 금방 세계 타이틀 몇 개는 딸 것 같았건만 오늘 두 번째 세계 타이틀까지 오는데만 무려 4년이 걸렸다. 그 사이 2013년 3월 제7회 응창기배 준우승, 6월에 제25회 TV아시아 바둑선수권전 준우승 등은 각각의 상대였던 중국의 판팅위, 일본의 이야마 유타, 둘 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던 터여서 못내 아까웠다.
응창기배가 특히 더했다. 바로 닷새 전에 농심배 최종 주자로 나서 중국의 셰허, 장웨이제, 두 사람을 연파하고 한국 우승을 이끌었는데, 그 바람에 기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마음고생이 없지 않았다. 한국 1등이면 뭐하나. 국내용인가? 심장이 약해. 뒤에서 그런 말들이 들리는 것 같았는데, 이제 큰 짐을 하나 내려놓았다.
이광구 객원기자
패배 부른 ‘부자 몸조심’ 결승 3국 흑-박정환 9단 / 백-김지석 9단 <1도>가 결승3국의 종반이다. 우하귀 백1-3, 기분 좋은 끝내기. 그러나 백3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흑6이 더 큰 자리였고 여기서 바둑은 ‘흑의 최소 반집’으로 뒤집어졌다는 것. 백3이 바로 낙관이 빚은 몸조심이었다. 흑이 백5 자리에 집어넣는 패로 덤빌까를 견제해 <2도> 백1로 내가 먼저 집어넣을 수도 있다고 위협한 것. 흑2 따낼 때 백3으로 끊는 것이 통렬하다. 흑4로 단수칠 수밖에 없을 때 백이 1 자리에 되때리면 양단수. 그러나 흑이 <1도> 백5 자리에 집어넣는 패를 하기는 어려운 것. 백이 따내고 또 따내면 우하귀 흑 전체가 떨어진다. 그래서 <1도> 백3으로는 흑6 자리에 붙이는 끝내기로 가야 했다는 것. <3도>는 <1도>에서 한참 지나온 장면. 막바지다. 흑1-3은 선수 같았지만, 실수였다. 백4를 깜빡한 것. 흑5의 보강이 불가피해 후수가 되었다. 그런데 백도 6으로는 더 생각했어야 했다는 것. 좌하귀 흑7, 4집짜리 이 젖힘 한 방이 박정환의 마지막 승부수였고, 결국은 이게 통하면서 타이틀의 임자도 결정이 되었다. 백6은 선수였다. 흑이 응수하지 않았으니 <4도> 백1로 집어넣어야 했다. 이래서 패. 이기면 8집을 번다. 팻감은? 득실은? 그건 다음 문제다. <3도> 흑7 자리를 빼앗겼으므로 무조건 결행해야 했다는 것. 그러나 김지석은 <5도> 백1로 돌아갔고, 박정환은 흑2~8을 선수한 후 10의 곳 공배를 이었다. 2억에 값하는 공배였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