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로라 헤링)가 LA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기억을 잃은 그녀는 사고 현장에서 빠져나와 누군가의 집에 숨어든다. 한편 그 집엔 숙모가 여행 간 사이에 잠시 머물고 있는 베티(나오미 와츠)라는 여자가 있다.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온 베티. 사고를 당한 여자는 베티에게 자신을 ‘리타’라고 소개하고 베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혀 무관한 것 같은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을 나열한다. 애덤 케셔(저스틴 테룩스)라는 영화감독은 외압에 의해 카밀라 로즈(멜리사 조지)라는 여자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해야 한다. 어느 킬러는 세 명의 사람을 죽이고, 한 남자는 공포에 질려 꿈 이야기를 해댄다.
그러나 여기까진 베티의 환상이었다. 사실 리타는 ‘카밀라’였고 베티는 ‘다이앤’이었으며, 아직 무명배우인 그들은 레즈비언 관계였다. 그런데 카밀라는 감독인 애덤의 눈에 들어 이성애적 연인 관계를 맺고, 영화의 주연을 따내며 파티에서 결혼 발표까지 한다. 승승장구하는 카밀라에 비해 여전히 무명인 다이앤. 질투와 분노에 불탄 그녀는 카밀라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하지만 죄책감과 자괴감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렇다면 다이앤은 과연 어떤 시점에서 영화의 전반부 3분의 2를 차지하는 환상을 하게 된 것일까. ‘죽은 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카밀라에게서 버림받은 후 마스터베이션을 하면서 황홀경을 느꼈던 바로 그 순간인 듯하다. 그 황홀경 속에서 재배열된 환상의 스토리에는 다이앤의 이기적이지만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그 환상 속에서 쌀쌀맞은 카밀라는 기억을 잃어 다이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현실에선 다이앤 혼자 열을 냈지만 환상 속의 베드 신은 달콤하며 리타의 글래머러스한 육체는 베티에게 황홀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가발을 통한 일치감이다. 환상에서 리타는 검붉은 머리지만 가발을 통해 베티와 같은 금발이 된다. 이후 그들은 첫 관계를 맺으며, 이후 리타는 항상 블론드 가발을 쓴다. 이 영화는 이성애 관계(카밀라와 영화감독)에 의해 동성애 관계(카밀라와 다이앤)가 깨졌을 때, 버림받은 약자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행복한 레즈비언 관계’를 보여준다. 흔히들 난해하다고 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멜로 드라마적 요소는 의외로 심금을 울린다.
김형석 월간스크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