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양아버지가 그간 소리 없이 설기현을 뒷바라지해왔다는 내용이었다. <일요신문>이 직접 확인한 결과 소문은 사실이었다. 설기현의 양아버지라고 알려진 주인공은 성수동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김영옥씨(50).
기자가 찾아간 일식집 안은 설기현의 사진으로 도배돼 있었고 그 중에는 김씨와 설기현이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여러 차례 설득 끝에 김씨는 마침내 설기현과 부자지간의 연을 맺게 된 사연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 지난 7월 강릉에서 치른 설기현의 아들 인웅이 의 돌잔치에서 김영옥씨가 설기현과 함께 다정 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설기현에게 부정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설기현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면서도 수시로 아버지 묘소를 찾는 등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설기현이 ‘새로운 아버지’를 만난 것은 지난 1998년 광운대 1학년 신입생 시절이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서울로 진학한 설기현에게 축구부 합숙소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 연고를 가진 동료선수들이 외박을 나간 주말에는 더 더욱 외로움이 사무쳤다. 혼자서 합숙소에 남아 선배들의 빨래 등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던 설기현에게 한발 다가온 사람이 김영옥씨였다.
김씨는 일식집을 운영하며 지역 조기축구회 활동을 하던 축구 마니아였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조기축구회 회원에게서 설기현을 소개받았다. 김씨는 당시 첫 인상에 대해 “강릉서 갓 올라온 기현이는 키만 멀대같이 큰 데다 숫기가 없어 완전 ‘촌놈’이었다”며 “그래도 한눈에 심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첫 만남에서 김씨는 설기현의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조기축구회 회원의 도움을 받아 설기현에게 작은 방을 마련해줬고, 자신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이따금씩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때는 그냥 평범한 선수였어요. 광운대 오승인 코치가 고교후배라서 물어봤더니 운동도 열심히 하고 될성싶은 나무라고는 했지만 지금처럼 대스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냥 마음이 너무 착하고, 성실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김씨의 도움으로 안정을 되찾은 설기현은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듬해 청소년 대표에 선발되는 등 기량이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김씨도 뒷바라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기장을 찾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수시로 고기를 먹이는 등 친아버지 못지 않은 정성을 쏟았다. 김씨의 부인 이춘옥씨(48)도 친아들처럼 설기현을 보살폈다.
“기현이가 올림픽대표를 거쳐, 국가대표가 됐을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 기현이가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인데 고마움을 표시할 때면 정말 뿌듯했습니다.”
지난 2000년 7월 설기현이 벨기에에 막 진출할 당시, 출국 전날 김씨의 일식집에선 설기현과 부인 윤미씨, 어머니 김영자씨, 장인 장모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축하파티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영옥씨는 “우리의 좋은 인연을 평생 가져가자. 너도 마음으로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나도 너를 아들로 생각하겠다”고 말했고, 설기현이 흔쾌히 받아들여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됐다.
“제 친아들과 기현이가 동갑인데다 원체 심성이 고운 아이라 정말 아버지와 아들처럼 평생 지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설기현의 어머니 김영자씨도 “김영옥씨는 정말 좋은 분”이라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월드컵 기간 동안 김씨가 운영하는 일식집 앞마당은 연일 축제분위기였다. 특히 이탈리아전에서 설기현이 후반 42분 동점골을 넣자 김씨는 손님들에게 안주와 술을 공짜로 제공하며 마음껏 기분을 냈다.
설기현도 월드컵이 끝나고 서울시내 카퍼레이드를 마친 밤 11시에 곧장 김씨에게 달려와 얼싸안고 함께 기쁨을 만끽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수시로 국제전화를 통해 ‘부자의 정’을 나누고 있다.
김씨는 “신문을 통해 기현이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보면 곧바로 전화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언론에서 과대포장해서 그런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위로한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7월 귀국 때도 설기현 내외는 강릉에서 치른 아들 인웅이의 돌잔치에 김씨를 초대했다. 김씨는 “기현이가 부상 없이 열심히 선수생활을 하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애틋한 ‘부정’을 드러냈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