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심판들은 그라운드에서 잘 웃지 않는다. 한 경기를 책임지고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을 것이고 선수들 앞에서는 어느 정도 권위도 지켜야 판정의 ‘약발’이 먹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운드의 포청천’이라 불리는 심판들도 사람일진대 어찌 당황스러운 순간이 없었으랴. 판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야속할 정도로 ‘찰라’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너무 애매할 경우 위치와 시야에 따라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프로축구의 이상용 심판은 “아∼,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란 말인가”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90년대 중반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일화(현 성남 일화)와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콘스)의 시합. 득점 없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가운데 이 심판의 첫 번째 실수가 나오고 말았다. 문전 혼전 중에 누군가 날린 슈팅이 일화의 골문을 가른 듯 보인 것. 볼은 골망에 부딪치며 ‘철썩’ 소리를 낼 정도로 강했다. 부심도 득점 신호를 보냈고 이 심판 역시 골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그런데 골키퍼인 사리체프(현 신의손·안양 LG)가 태연하게 골대 밖으로 나가 골대 바로 옆 망에 놓여진 볼을 들고 걸어오는 게 아닌가. 실제로는 옆 그물망에 걸린 볼이 워낙 강하게 꽂히다 보니 골망 전체가 골이 된 것처럼 흔들렸던 것. 얼른 ‘노골’로 사태를 수습했지만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대형사고를 암시하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득점 없는 상황에서 2 대 1 패스로 골키퍼와의 단독 기회를 얻은 하석주가 사리체프의 태클에 걸려 넘어지려는 상황이 연출됐다. 볼은 문전으로 흐르고 있었고 하석주는 넘어질 듯하다 다행히(?) 볼 앞으로 착지해 슈팅까지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어드밴티지를 적용하면 안되거든요. PK를 불려는 순간 하석주 선수가 손쉬운 슈팅을 할 것 같아 그냥 넘어갔는데, 사실 그 상황은 장님이 차도 골이 될 정도로 그냥 건드리면 되는 거였거든요. 근데 세상에, 왼발의 달인이라는 하석주 선수가 골대를 맞히더라는 거 아닙니까(웃음).”
대우 로얄즈 조광래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결국 퇴장까지 당했다. 결국 이 일로 이 심판은 3개월, 조 감독은 12게임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야 했다. PK에 얽힌 기막힌 추억은 한병화 심판에게도 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한 선수가 수비수의 태클에 걸려 넘어져 가차없이 PK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수비수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옐로 카드까지 힘차게 꺼내들었건만 선수들이 항의하러 ‘우르르’ 몰려드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태클했던 선수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카드를 꺼내 들고서 ‘니가 했냐?’ ‘너지?’ ‘너 아냐?’라고 돌아가며 물어보는데 전부 아니라는 거 있죠(웃음).” 그럼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못 줬죠. 그냥 주머니에 카드를 도로 집어넣는데 무지 머쓱하더라고요.”
카드와 관련된 사건(?)은 비교적 최근 경기였던 지난 8월 부산과 전남의 경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를 아주 엄하게 다루기로 소문난 김진옥 심판은 이날도 예외 없이 칼날 판정을 내렸다. 전남의 비에라가 경고성 태클을 범하자 얼른 달려가 카드를 꺼내들었던 것.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 김 심판이 자신이 꺼내든 카드를 보니 ‘레드카드’가 손에 쥐어져 있더라는 것. “주심은 판정을 번복할 수 있거든요. 저의 실수였기 때문에 바로 인정하고 카드를 바꿔 꺼내들었죠. 양 팀 벤치와 선수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요. 판정에 대한 항의가 너무 잦아 안타까울 때도 많지만 신뢰가 쌓이면 모두 공감할 수도 있다는 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프로축구 심판이 이렇게 휘슬과 카드 때문에 인간적인 실수를 한다면 프로야구 심판들의 경우엔 볼 판정과 관련된 아픔(?)들이 대부분이다. 10년 경력의 베테랑인 김락기 심판이 ‘마스크를 던지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가슴 아팠던 얘기는 98년 7월 청주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LG의 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3점 리드를 하고 있던 한화의 선발 투수는 구대성(현 오릭스 블루웨이브). 1아웃, 주자 1루, 볼 카운트는 2-3였다. 커브로 결정구를 던진 구대성의 볼을 김 심판은 소신껏 ‘볼’로 판정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은 그 운명의 볼이 스트라이크였다는 것. 그 판정 이후로 구대성은 아웃 카운트 하나 못 잡고 내리 7실점을 허용하며 마운드를 내려오고 말았다. “정말 그 자리에서 마스크를 벗고 나오고 싶더라니깐요. 애매한 볼이긴 했는데 여하튼 그 판정 때문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맘 고생이 좀 심했었죠.”
2군에 있다 최근 1군 경기 주심을 보는 박종철 심판은 ‘자신감’ 때문에 ‘오버’한 기억을 갖고 있다. 1군 주심으로 데뷔 경기를 치르는 날, 박 심판은 ‘여기서 쓰러지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목소리도 엄청 크게 질러가며 경기에 임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는 것. 그런데 의욕이 너무 과했는지, 100% 명백한 볼을 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스트라이크!!!’를 아주 큰 제스처와 함께 외치고 말았다.
“투수와 포수는 물론 양팀 벤치에서도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죠. 그런데 새파란 신입이 자기네들 보기에도 너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전혀 이의를 달지 않고 수긍해 주시더라구요.” 한편 ‘정’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다. 문승훈 심판이 2군 시합에서 주심을 보고 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잘 치던 선수가 2군으로 내려와 타석에 들어서더라는 것. 1회 말 1·3루 상황, 볼 카운트 2-2에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려도 전혀 이상이 없는 볼을 ‘볼’로 판정하며 그에게 기회를 줬는데 곧바로 홈런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 홈런 덕분인지 다시 1군으로 올라간 선수는 이후 9년 동안 한번도 2군으로 안 내려왔다고 한다. “그냥 삼진을 당했으면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봐요. 태평양 시절이었는데 그냥 K라고만 해 둡시다.”
조종규 심판팀장은 과거 시범경기에서 1루심을 보다 대역전극(?)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대학 후배가 친 볼이 평범한 유격수 땅볼로 아웃 타이밍이었는데 ‘세이프’를 외친 것. ‘시범경기, 9회 말, 2아웃’, 더군다나 후배팀이 4점이나 지고 있어서 한 번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이후 5점이 나면서 승패의 명암이 바뀌고 말았다. “후배에게 무심코 기회를 준다는 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죠. 그때 느낀 게 참 많아요. 앞으로는 연습경기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봐야겠구나 하고 말이죠.”
김남용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