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일본 생활을 걱정한 부모님의 예상과 달리 박지성은 교토 시절 매우 밝게 생활했다고 한다. 사진은 지난 2002년 8월 교토 퍼플상가에서 활약하던 모습. 서울신문 | ||
2000년 6월. 지성이가 명지대 2학년 때의 일이다. 고3 때부터 지성이에게 관심을 보였던 교토 퍼플상가에서 또 다시 ‘러브콜’을 보내왔다. 지금 지성이 에이전트로 있는 이철호 사장이 다리를 놔서 교토 퍼플상가의 강화 부장이 입국을 한 뒤 지성이 경기를 보러 다녔다. 그런데 당시 지성이가 부상을 당한 터라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전반전만 뛰고 나온 지성이를 지켜본 그 강화 부장은 이철호 사장에게 지성이 얘기는 빼고 다른 선수에 대해서만 물어봤다고 한다. 순간 초조해졌지만 지성이를 스카우트하려고 입국한 터라 계약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국 지성이는 매스컴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J리그에 입단하게 됐다. 당시 교토 퍼플상가는 2부리그로 추락할 위기에 있어 지성이의 입지가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도 지성이가 워낙 일본에서 축구를 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드러내 부모가 만류할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지성이가 올림픽대표팀 선수라는 사실이 J리그 입단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만약에 고3 때 입단했다면 고작 연습생 선수밖에는 안 되었을 것이다.
지성이가 교토 관계자와 출국하는 날, 나와 아내는 공항에서 지성이가 사라진 게이트를 쳐다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우리 부모가 날 보내면서 눈물을 뿌려댄 것처럼 나 또한 내 자식을 바다 건너로 보내며 복잡한 마음이 돼 아내 손을 잡고 울고 또 울었다.
가자마자 전화통을 붙잡고 이런 저런 안부를 물어 보고 싶었지만 전화 요금이 많이 나올 거란 걱정에 일주일에서 열흘에 한 번씩 짧은 통화로 대신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싼 국제 전화 요금에 청승을 떨었던 게 다소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당시 지성이의 일본 진출이 우리의 경제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큰 보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무조건 아끼고 절약하면서 가게 운영에 매진해야 했다.
지성이가 한국을 떠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축구부 선배들의 구타 때문이었다. 일본에선 적어도 맞아가면서 운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시작한 프로 생활, 그것도 언어는 물론 문화도 다른 일본에서 ‘용병’ 생활을 하는 지성이가 너무 걱정이 된 나머지 두 달이 지난 후 아내와 함께 교토를 찾아갔다.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지성이는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나 잘 지내고 있었다. 그때처럼 맑고 환한 지성이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주위 여건이 잘 조성돼 있어 훈련 외의 시간엔 일본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교토에서 첫 월급을 받은 지성이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했다. 어떻게 보면 지성이를 축구 시킨 뒤 처음 손에 쥐어 본 돈이라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었다. 난 그 돈을 고스란히 은행에 저축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성이가 드린 용돈에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놓고 가신 것처럼 나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입단 후 6개월 정도는 총 5000만 원 정도가 입금됐다. 그러다 6개월 후에 재계약을 했는데 연봉이 3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지성이가 교토에 가자마자 풀게임을 소화했고 ‘천리마’라는 구단 슬로건에 걸맞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부지런한 몸놀림을 보이자 구단주가 아주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윤정환 유상철 노정윤 홍명보 황선홍 등이 J리그를 휩쓸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지성이한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성이가 워낙 무명인 데다 나이 차이가 많아 서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였다. 시간이 흘러 지성이가 올림픽대표팀을 들락거리자 조금씩 지성이의 존재가 부각됐고 몇몇 선배들도 지성이에게 일본 생활에 대한 충고와 격려를 보내왔다고 한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