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미우리가 이승엽을 잡는 데 올인한 이유 중 하나가 고쿠보(왼쪽)의 이적이었다고 한다. 사진은 지난 9월 경기 중 환호하는 두 사람. 연합뉴스 | ||
요미우리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 재집권 2년째인 내년을 팀 재건의 새 출발점으로 삼고 그 맨 앞줄에 이승엽을 세우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운명을 걸고 달려들어 성사시킨 아시아의 거포 이승엽과의 4년 장기 계약. 그 배경과 이승엽의 속내가 궁금하기만 하다.
초조했던 요미우리
요미우리는 이승엽의 재계약 협상 시점과 엇비슷하게 맞물려 베테랑 선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 장타자인 고쿠보 히로키의 자유계약선수(FA) 권리 행사를 통한 이적 결심, 우완 베테랑 구와타 마스미의 구단 홈페이지를 통한 갑작스런 퇴단 선언, 그리고 오른손 고참 내야수 니시 도시히사의 트레이드 설 등.
이중 이승엽의 재계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고쿠보 건이었다. 고쿠보는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친정팀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의 컴백을 결심했고 이승엽 이외에 믿을 만한 거포가 없는 요미우리에는 비상이 걸렸다. 상종가를 친 이승엽의 존재 가치가 더 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난 2002년 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마쓰이 히데키 이후 4번다운 4번 타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요미우리로서는 현실적으로 이승엽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보다 일본프로야구에서 4번 타자에 대한 이미지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12개 팀 중 4번 타자에게 유별나게 전통적인 향수를 갖고 있는 팀이 요미우리다. 4번 타자는 늘 요미우리의 상징이었다. 나가시마 시게오(25대) 오 사다하루(왕정치, 28대) 하리모토 이사오(장훈, 39대) 하라 다쓰노리(48대) 마쓰이 히데키(62대) 이승엽(70대) 등 4번 타자의 순번을 메겨 기록으로 영원히 남기는 유일한 팀이기도 하다.
요미우리가 타선 개혁에 늘 애를 먹고 있는 것도 4번 타자 중심의 전통적인 생각에 붙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요미우리는 적어도 4년간은 4번 타자에 대한 고민 없이 타선 개혁의 깃발을 올릴 수 있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다.
4년 계약을 수용한 이유
4년 카드는 요미우리가 치밀한 전략 속에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와 이승엽 측이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한 9월 말 요미우리는 처음부터 4년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승엽은 의외의 카드에 놀랐고 3년이냐, 4년이냐를 놓고 짧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언젠가 자신이 메이저리그에 재도전하길 기대하고 있는 고국 팬들의 입장, 그리고 현실적으로 1년에 따라 어마어마하게 달라질 ‘당근’이 1년 차이에 대한 고민을 증폭시켰을 지도 모른다.
실패 위험을 줄이기 위해 최근 몇 년 동안 외국인 선수와 다년 계약을 할 경우 최대 2년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던 요미우리는 혜성처럼 등장한 4번 타자를 만나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초특급 연봉의 4년 계약이 발표된 뒤 일본에서는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요미우리가 내부 원칙까지 깨가며 장기 계약을 성사시킨 마당에 계약 기간 내에 쉽게 이승엽을 풀어주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팀 개혁을 위한 중·장기 플랜, 그리고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유출을 막고 영원한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승엽을 4년 이상 붙들고 있어야 된다는 게 요미우리의 판단이었다.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진출에 의욕이 있다면 3년 이상의 장기 계약은 무리라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그래서 ‘일본시리즈 우승 뒤 구단과의 협의’라는 애매한 메이저리그 진출 옵션은 일본 매스컴에도 낯설게 다가왔다.
이승엽은 “리그 우승이 아니라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할 때까지는 절대 요미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변호사인 미토 시게유키 대리인 역시 “계약 기간 내에 요미우리가 일본 정상에 오른다해도 이승엽 선수가 꼭 요미우리를 떠난다는 얘기는 아니다”라며 메이저리그 진출 옵션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이승엽의 미공개 연봉과 옵션
일본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은 공개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대체로 추정 연봉은 구단 측으로부터 최소한의 동의를 얻어내지 않고는 성립하기 힘들어 상당한 신빙성을 갖기도 한다.
이승엽의 내년 순수 연봉은 6억 5000만 엔으로 알려졌다. 이 액수는 이승엽 측근을 통해 확인됐다. 연봉은 지난해 1억 6000만 엔에서 4억 9000만 엔이 올라 인상 규모로만 따지면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 기록이다. 최저 6억5000만 엔을 기준으로 매년 협상을 하는 ‘유동 연봉제’이기 때문에 이승엽은 4년간 뛸 경우 연봉만으로 최저 26억 엔을 챙길 수 있다.
1억 엔 정도의 재계약금과 개인 타이틀, 홈런 수, 경기 출전 수, 타율 등에 따라 세분화된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 보너스를 합하면 내년 수입은 8억 엔에 이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메이저리그 부자 구단 부럽지 않은 경제력을 뽐내고 있는 요미우리는 최근 몇 년간 구단 안팎에서 냉랭한 기운에 휩싸였다. 요미우리 경기의 평균 시청률이 한 자리수로 곤두박질친 지 오래고 열도 전역에 퍼져있는 ‘거인 팬’들의 이탈이 심해지고 있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극히 일부 선수들을 제외한 주전급 선수들 대부분의 연봉이 삭감될 위기에 놓였다. 요미우리라는 브랜드의 프리미엄을 최대한 없애고 실력과 성적에 맞는 정확한 대우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 같은 감축 운영 분위기 속에서도 요미우리는 이승엽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백지 위임’했을 만큼 파격 대우를 해줬다.
한국 코치 연수의 숨은 뜻
이승엽은 재계약 조건으로 구단 측에 매년 한국인 코치의 요미우리 연수를 제안했다. 매년 요미우리가 한국인 코치 1명을 초빙 형식으로 불러들여 경비 일체를 부담하고 연수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어떤 일을 계기로 이 같은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승엽 스스로에게는 적잖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승엽이 2010년까지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는다면 7년간 한국프로야구와의 단절이 생긴다. 그 즈음이면 이승엽도 은퇴 이후의 진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코치의 일본 연수는 이승엽에게 나름대로 미래를 위한 환기창의 의미를 갖는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일본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고국에 환원한다는 의미도 있다.
요미우리는 이승엽의 뜻밖의 제안에 당황했을 수도 있지만 이번 재계약 협상에서 이승엽 측이 제시한 유일한 조건이 ‘코치 연수’였다고 한다.
일본 도쿄=양정석 일본프로야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