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리 | ||
2003년 3월 제주도 오라골프장에서 열린 제5회 제주도지사배 전국주니어골프선수권대회 여중부 ‘톱5’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위 오지영(죽전중3), 2위 김송희(서문여중3), 3위 김인경(서문여중3), 4위 최혜용(창원남중1), 5위 신지애(영광홍농중3).
이들 5명 중 4명은 88년생 중학교 3학년. 이들은 지난 7월 초에 끝난 2007 US여자오픈에 함께 참가했다. 당시 여중부 최강자 중 한 명이었으나 이 대회에서 다소 부진(11위)했던 최나연도 US여자오픈에 나갔으니 한국의 작은 주니어대회에서 뛰던 동갑내기 5명이 불과 4년 만에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동시에 활약한 것이다(최나연은 2005년에 호적을 87년생으로 수정). 신지애와 최나연은 미LPGA멤버가 아니지만 한국 상위랭커 자격으로 이 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US오픈에 출전한 ‘88년 골프 용띠들’은 더 있다. 브라질교포 안젤라 박(박혜인)은 우승 경쟁을 펼쳐 세계를 놀라게 했고, 초등학교 시절 국내무대를 석권하다 2001년 미국유학을 떠난 박인비도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US여자오픈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역시 메이저대회인 2007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에서 깜짝 준우승을 차지한 민나온도 88년생 코리언 LPGA 플레이어다. 또한 지난 7월 2일 미LPGA 2부투어인 퓨처스투어에서 2주 연속 우승을 달성한 이서재도 88년생이다. 한국 그린에도 신지애 최나연 외에 김현지 김하늘 김진주 이일희 등이 ‘공포의 용띠 부대’를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여자골프가 세계 최강으로 떠오른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특정해인 88년생이 이처럼 동시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골프인들은 ‘박세리 효과’를 첫 손에 꼽고 있다. 한국에서 골프 입문은 보통 초등학교 4~6학년 때 이뤄진다. 그것도 조기교육 바람이 불면서 학년이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그 평균치가 바로 4학년이다. 88년생들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8년 박세리의 세계제패를 경험했다. 당시 엄청난 숫자의 여자 꼬마들이 아빠의 손에 이끌려 골프에 입문했던 것이다.
민나온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세리 언니의 쾌거는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됐겠지만 특히 우리 나이 때 여자 골프선수들에게는 더욱 강렬했다. 그 유명한 US여자오픈의 개울가 맨발샷은 우리들에게 아예 삶의 이정표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88년 용띠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4년 국가대표 및 상비군 선발을 보면 이 같은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고 1학년 선발인원은 원래 3명이 원칙이지만 이때 대한골프협회는 다른 학년 인원을 줄이면서 신지애 김송희 등 무려 7명을 상비군으로 선발하기도 했다. 이들을 지도했던 최봉암 국가대표 감독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들에게는 박세리 세대의 스파르타식 훈련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까지 더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까닭에 당시 상비군 출신들은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기량을 갖추게 됐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신지애는 2006년 한국 그린을 평정한데 이어 2007년에는 미LPGA까지 위협하는 대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프로무대를 건너뛰고 미국으로 건너간 해외파는 US여자주니어챔피언십과 각종 아마추어 대회를 마치 이어달리기라도 하는 듯 제패했다. 이번 US여자오픈에서 “마치 한국오픈같다”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미국 여자주니어무대는 한국선수들이 휩쓴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미LPGA 규정 연령인 18세가 되자 대거 미LPGA 회원이 되었다(김인경 Q스쿨 수석, 김송희 2부투어 상금왕 등).
세계 여자골프계는 박세리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젊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박세리가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이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박세리 쾌거는 한국에서 부모들이 너도나도 어린 딸에게 골프채를 쥐어주는 열풍으로 이어졌고 이어 미LPGA 한류가 거세게 불면서 미국에서도 영파워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도 올해 메이저대회인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승을 일군 모건 프레셀이 바로 88년생이다. 또 최근 슬럼프에 빠졌지만 ‘1000만 달러 소녀’ 미셸 위(위성미)와 ‘남반구의 미셸 위’라는 양희영(호주)이 이들보다 한 살 어린 89년생이다. 88서울올림픽의 정기를 받고, 박세리를 롤모델로 설정한 ‘88년생 박세리 키드’가 현재 세계 여자골프의 영파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