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상의 재단법인인 국기원은 2004년 초 김운용 원장이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당하면서 태권도계의 2인자였던 당시 엄운규 부원장이 수장을 맡았다. 그러나 서울시태권도협회는 각종 고소 고발을 진행하며 국기원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에 엄운규 원장은 강수를 뒀다. 2008년 6월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자신을 잘 따르지 않는 국기원 이사들의 동반사퇴를 이끌어내 새롭게 판을 짜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현재의 국기원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대립구도는 이렇다. 뒤로 물러난 엄운규 원장(청도관 관장)은 사무처장을 내세워 국기원 새판짜기를 시도했고, 여기에 서울시태권도협회와 역시 원로 태권도인인 이승완 대한태권도협회 고문(지도관 관장)이 맞섰다.
이 싸움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도 주무관청으로 개입을 했다. 마침 2007년 12월 21일 ‘태권도 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태권도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고, 2008년 6월 12일 이 법률에 따른 시행령(대통령령 제20810호)과 시행규칙(문화체육관광부령 제5호)이 발효됐기 때문이다. 즉 국기원이 민법상의 재단법인에서 특별법상의 특수법인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놓여있던 것이다.
하지만 국기원의 특수법인화는 ‘법이 정한 시한’을 넘기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엄운규 원장과 반대파의 싸움 때문이다. 국기원은 새로운 특수법인 정관을 합의처리하지 못했다. 국기원은 표류했다. 해를 넘겨 2009년을 맞으면서 문광부와 교감이 있던 엄운규 원장의 승리로 점차 굳어져갔다.
그래도 이승완 고문이 호락호락 말을 듣지 않자 문광부와 정치권력은 국기원 이사들을 상대로 한 명씩 사퇴를 종용했다. 정원 19명인 국기원 이사진 중 무려 13명이나 공석이 생겼다. 이것이 지난 4월 중순까지의 일이다. 이제 국기원의 정상화는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문광부가 국기원이 보낸 임시이사 명단을 인정하고, 법원의 승인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이 임시이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고, 엄운규 원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특수법인으로 가기 위한 새 정관을 만들면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변수가 터졌다. 5월 중순 한나라당 원내대표 임기가 만료되는 홍준표 대한태권도협회장이 “어지러운 국기원을 정상화하기 위해 내가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원래 4월 7일 사석에서 홍 회장이 처음 말한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이것이 엄청난 태풍으로 변했다. 홍준표 회장은 유인촌 문광부 장관에게 직접 “내가 국기원 이사장을 맡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홍 회장의 보좌관은 ‘반대 여론이 높다’는 지적에 대해 “누가 (홍 회장의 국기원 이사장 취임을)반대하느냐? 문광부의 누구냐? 정확히 이름을 대라. 장관에게까지 직접 얘기했다. 문제될 것이 없고 홍 회장의 뜻이 워낙 강하다”며 여권 실세정치인답게 목소리를 높였다.
재미있는 것은 홍준표 회장이나, 유인촌 장관 모두 2010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내대표 임기가 끝난 홍 회장에게 태권도는 언론노출 및 대외홍보용 치적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꺼리’다. 특히 재외동포법의 변경으로 향후 해외한인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고(150만 표 추정), 전 세계에 엄청난 민간 네트워크를 지닌 태권도는 정치인에게 엄청난 활용가치가 있었다. 즉 홍 회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기원을 단숨에 정상화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4월 24일 문광부의 인사가 단행됐다. 그동안 국기원을 담당했던 신재민 2차관이 1차관으로 옮겨가고, 체육국장, 실무담당자(과장)가 죄다 바뀌었다. 홍준표 회장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문광부 고위관료가 모두 교체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5월초 문광부는 엄운규 원장측이 작성한 임시이사 후보 13명 중 무려 11명에 대해 비토(veto)를 놓았다. 대신 문광부가 원하는 인사 11명을 내놓았다. 문광부-엄운규의 파트너십이 깨진 것이다. 그러자 여기에 고무된 이승완 고문을 중심으로,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던 기존 5명의 이사는 5월 22일 전격적으로 이사회를 열고 홍준표 회장 등을 신임이사로 선임한 것이다.
기존 ‘엄운규 + 문광부 VS 이승완 및 서울시협회’의 대립구도가 이제 ‘엄운규 VS 이승완 +홍준표’로 바뀌면서 무게중심의 추가 반대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문광부는 말을 아끼고 있다. 22일 급히 국기원을 방문한 김성호 신임 체육국장은 이승완 고문 등에게 “이러지 말고 주무관청과 잘 협조해서 일을 처리하자”고 주문했으나 실세 정치인(홍준표)의 이름을 내건 이날 이사회를 저지하지 못했다.
홍준표를 내세운 이승완 고문 쪽이 역전승을 장담하고 있는 반면 엄운규 원장 측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국기원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단체가 아니다.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신군부 초창기에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이 국기원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바 있다. 22일 이사회는 법적인 효력이 없다. 사표를 제출한 기존 이사들의 권한이 아직 유효하다. 법대로,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실세정치인 홍준표 회장이 ‘손쉽게’ 국기원을 장악할 것이냐? 아니면 태권도계를 대표하는 엄운규 원장이 수성(守成)에 성공할 것인가? 이미 한국만의 태권도가 아닌 전 세계인의 태권도인 까닭에 다소 남부끄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는 쪽은 큰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