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현(왼쪽)과 서장훈. | ||
딱하지 않을 수 없다. 농구계에서 ‘돈만 아는 탐욕스러운 선수’로 씻을 수 없는 낙인이 찍힌 김승현이다. 김승현은 올 시즌 연봉협상 과정에서 소속팀 오리온스의 제시액을 거부했다. 한국농구연맹(KBL) 재정위원회에서 이면계약서를 공개하며 파문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면계약서는 없었다”고 말을 바꿨고, 재조사 결과 김승현의 거짓말로 판명이 났다. 18경기 출전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후 9경기로 징계는 감면됐지만 김승현의 가슴 한편에는 씻을 수 없는 피멍이 들었다.
사실 알고 보면 이번 파문의 가장 큰 피해자는 김승현이다. 매년 10억5000만 원을 받기로 한 계약서가 손에 버젓이 들려있는데도, 이제 김승현의 연봉은 6억 원이 됐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은 오리온스 심용섭 단장의 과감한 결정에서 기인했다. 허리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선수에게 매년 10억이 넘는 금액을 지불하려니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치밀한 조사를 했다. 다행히 상위기관인 한국농구연맹(KBL) 총수는 자신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구단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승현 측근 중 한 명은 “승현이와 승현이의 아버지는 민사소송까지 고려했었다. 물론 은퇴를 전제로 한 결정이었는데, 뒤늦게 민사소송에서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모그룹과 연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심 단장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구단보다 김승현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만하다. 김승현과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한 선수는 “솔직히 당해도 싸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김승현이 FA계약 이후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피해를 입었나”라고 항변한다.
김승현이 3년 전 5년간 총액 52억5000만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에 오리온스와 FA 계약을 했지만 이후 불성실한 모습을 계속 드러내면서 ‘FA먹튀’의 대명사가 돼 구단들이 FA 규정을 강화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이면계약 사태의 핵심은 ‘배째라’식으로 나온 오리온스와 심용섭 단장인데, 모두가 김승현에게 등을 돌리면서 모든 피해는 김승현에게 돌아간 것이다.
일단 김승현은 묵묵히 연습에 집중했고, 지난 7일 전주 KCC전부터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20여 분 출전에 한 자릿수 득점과 어시스트에 그치고 있고, 팀은 하위권에 처져 있다. 한때 한국농구의 미래로 불렸던 김승현으로서는 명분과 실리 모두 잃어버린 혹독한 초겨울이 아닐 수 없다.
정확히 지난해 이맘때였다. FA 자격을 획득한 뒤 전주 KCC 유니폼을 입은 서장훈은 시즌 전부터 어려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허재 감독의 지도 스타일과 전술운영 모두 서장훈과는 맞지 않았다. KCC에는 서장훈보다 15cm가 더 큰 하승진도 있었고, 외국인선수 마이카 브랜드도 골밑에서는 제 역할을 다해주는 훌륭한 센터였다. 결국 팀과 하승진 모두 내리막길을 걸었다. 우승후보로 꼽혔던 KCC는 최하위로 곤두박질쳤고, 서장훈은 결국 트레이드를 자청해 인천 전자랜드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전자랜드로 이적한 서장훈은 강했다. 서장훈의 가세와 함께 전자랜드의 전력은 급상승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KCC를 만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과연 서장훈’이라는 극찬이 잇따랐고, 올 시즌 역시 서장훈이 이끄는 전자랜드는 충분히 4강 다툼을 펼칠 만한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확히 1년 뒤. 서장훈이 이끄는 전자랜드는 10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1승11패(11월12일 현재)로 기약 없이 꼴찌로 추락해있다. 지난 시즌 히카르도 포웰 같은 만능 스코어러가 없는 공백이 컸다. KCC 시절처럼 서장훈과 두 명의 외국인선수가 팀의 스피드를 저하시켰다. 상대편에서는 서장훈 쪽에서 발생하는 수비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서장훈은 12경기를 치른 12일 현재 경기당 평균 19.6점 7.1리바운드 2.1어시스트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매번 그랬듯이 개인성적은 좋지만 팀성적은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서장훈을 의식해 후배 선수들의 플레이까지 위축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러나 서장훈의 반박은 설득력이 있다. “내가 속한 팀이 성적을 올렸을 때는 내가 빨랐던 것인가. 농구에서 속공을 하면 5명이 모두 뛰어야 하나. 어차피 키 큰 선수가 있고, 빠른 선수도 있는 것이 농구팀이고 제각각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키가 큰 나는 장신 선수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자랜드는 최근 박종천 전 감독이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유도훈 감독대행이 새로 팀을 맡았다. 스피드 강화를 화두로 내세우면서 KT&G와 2대3 트레이드도 단행했다. 외국인센터 크리스 다니엘스를 내주고 발 빠르고 득점력 높은 라샤드 벨을 영입하는 것이 트레이드의 핵심이다. 팀의 약점인 스피드를 강화하면서 서장훈의 높이를 더욱 살리겠다는 복안이기도 하다.
서장훈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요즘 눈을 뜨고 있어도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다. 너무 삐딱한 눈으로 나를 비난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사람들 때문에 은퇴 후에도 농구판에 계속 머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괴로운 ‘국보급 센터’, 서장훈의 목소리가 이렇게 힘겹게 들린 적은 이전에 없었다.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