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3년 1월경 국가안전 및 대외부문 협의를 주재하는 모습. 연합뉴스
선군혁명소조가 조직화된 시점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보면, 대략 김정은의 권력 세습 이후 즈음(2011년~2012년 사이)으로 추측된다. 물론 소조 조직을 준비한 것은 한참 전이다. 생전 김정일과 김정은의 실세 누이 김설송은 2008년 4월경 처음 3대 세습 안정을 보좌할 전문가그룹 양성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조직된 것이 바로 현재의 선군혁명소조로 나타난 것이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 핵실험, 전략미사일실험 등 북한 내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 간혹 이곳이 국내외 언론에 의해 언급되곤 했다. 하지만 선군혁명소조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조명된 바 없다.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선군혁명소조는 김정은 시대의 전 분야 의사결정과정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꾀하고 있고, 큰 영향력을 내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기본적으로 선군혁명소조는 북한 내 전 분야의 사안을 두고 검토와 논의 과정을 진행하는 컨트롤타워이자 브레인스토밍 조직으로 풀이된다.
현재 최고사령부의 직속 조직으로 마련된 선군혁명소조는 김정은이 조장(소조장)을 직접 맡고 있고, 김설송이 소조 내 실무책임자를 맡고 있다. 이와 함께 김여정, 김정철을 비롯한 김씨 가문 주요 인사들이 상시 소조원으로 참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소조의 운영 방식이다. 앞서의 김 씨 일가가 선군혁명소조의 상시 소조원이라면 북한 핵심 권력기구의 각 수장들은 상시가 아닌 ‘게스트’ 자격으로 참여한다. 여기에는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을 비롯해 군 총참모장, 작전총국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급 간부들, 조직지도부 각 부문 담당 부부장급 간부들, 당 기계공업부 부장 및 국제부장 혹은 외무상 등 당과 정부의 핵심 인사 등이 포함된다.
즉 상시 소조원을 제외한 북한 각 분야 수장들은 소조 내에서 자신들의 관련 분야 의제가 올라올 경우에만 비상시 자격 소조원으로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선군혁명소조가 다른 공식 권력기구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사실상의 비상시적 조직이 아니냐는 것이다.
내부 정보에 따르면 선군혁명소조는 거의 매주 금요일 평양시 서성구역 최고사령부 청사 내 지하캠프 혹은 관저나 집무실 주변의 특별초대소에서 진행된다는 후문이다. 소조 회의는 나름 정기적인 성격을 띠고 운영되고 있으며 이따금씩 필요할 경우 최고 핵심관계자들만 동석하는 ‘소조 확대회의’도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선군혁명소조는 별도의 상설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다. 정기적인 회의체는 물론 상시적으로 소조를 운영할 수 있는 사무국이 설치됐다는 것은 의미 있게 살펴볼 대목이다. 소조의 사무국에는 30여 명의 인재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해외 유학 경험과 조직 활동 경력이 있는 전문가 그룹이다. 대다수가 30대를 전후한 우수하고 젊은 인재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소조 회의에 앞서 의제와 관련해 필요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화하여 보고하는 일을 한다. 기존 주요 기구들 내 인재들의 정보 수집 능력과 비교해도 이들의 실력이 더 탁월하다는 것이 내부의 중론이다.
선군혁명소조에 올라온 주요 의제들은 소조 회의에서 논의된 후 그 결정 사안들은 당 서기실이나 국방위원회 서기실을 거쳐 정권 각 기관에 통보된다.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과 매우 유사한 구조라 하겠다. 현재 김정은 시대의 주요 의사결정은 이같이 선군혁명소조의 논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풀이된다. 소조의 위치와 권한을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선군혁명소조는 결국 김정은의 부족한 경험과 리더십을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의사결정 장치인 셈이다. 소조는 공적이면서도 매우 사적인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앞서 밝혔듯 선군혁명소조를 고안한 이는 생전의 김정일이다. 이러한 소조의 고안은 김정일 본인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다.
1986년 7월 전국 3대혁명소조기술혁신전시장을 돌아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연합뉴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공식화되기 이전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사이 매우 치열한 경쟁 과정을 거쳤다. 지금 김정은의 나이와 비슷한 즈음의 시기다. 당시 후계자 경쟁구도에 있었던 김정일은 기존의 핵심 원로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 이를 만회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김정일의 3대혁명소조다.
3대혁명소조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되기 직전인 1973년 2월 당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공식화됐다. 기존의 구시대적인 각 분야 관료들의 본위주의, 패배주의, 관료주의 등을 타파하고 개혁한다는 명목이었다. 김정일은 대학 졸업을 앞둔 청년 인텔리들을 3대혁명소조로 편성하여 각 분야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종의 사상·정신 개혁을 주도했다.
사실 이는 명목상 개혁일 뿐이었다. 기존의 당 조직규율을 완전히 배제하고 당과 사회단체 내에 김정일 자신만을 위한 라인이 구축되는 과정이었다. 김정일은 당시 3대혁명소조를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세력을 당에 투입하고 일선 젊은 소조 책임자들을 통해 각 분야 정보를 취득했다. 당시 소조의 최고 책임자가 다름 아닌 장성택이었다. 김정일의 3대혁명소조 활동을 통해 검증된 인물들은 김정일 시대 최고 실권기구로 등장한 당 조직지도부의 근간을 마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정은 시대의 선군혁명소조는 김정일 시대의 3대혁명소조와 유사점이 존재한다. 두 조직 모두 결국 젊은 지도자(혹은 후계자)의 부족한 당 및 국가 장악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자기 또래의 전문가 그룹(선군혁명소조의 사무국과 3대혁명소조의 일선 소조원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결국 김정일이 생전에 3남 김정은을 위해 고안한 선군혁명소조는 자신이 겪은 3대혁명소조의 경험을 많이 투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당분간 김정일 시대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선군혁명소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북한의 정치적 행보를 살펴보기에 앞서 꼭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