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거래소의 느닷없는 이 조치에 소액 투자자들은 사실 확인에 나서는 한편 회사측과 거래소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폭락하던 증시가 다시 회복국면으로 접어든 상황에서 (주)두산의 주식거래가 정지될 경우 손실 만회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증권선물위원회는 (주)두산에 대해 3천90만원의 과징금을 물리는 조치도 취했다.
왜 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일까.
증권거래소와 증권선물위원회가 밝힌 공시 내용은 짤막했다. ‘(주)두산은 지난해 2월 이사회에서 해외현지 법인설립을 결의하고 이를 공시했으나, 나중에 이를 취소했음에도 재공시하지 않아 (주)두산에 과징금을 매기는 한편 5월25일부터 27일까지 (주)두산의 주식 거래를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지난해 3월 (주)두산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하겠다며 이와 관련한 해외법인 설립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두산에선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주)두산이 1백10억1천6백만원을 투자해 파라다이스와 함께 (주)두산파라다이스를 해외에 설립키로 하고 이 법인이 설립되는 즉시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계획은 1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결국 무산됐다.
애초 두산의 계획에 따르면 (주)두산은 2003년 3월 파라다이스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자본금 1천8백만달러를 투입해 (주)두산파라다이스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이 법인은 두산이 전체 지분의 50%인 9백만달러(1백9억2천만원)을 출자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슬그머니 백지화됐다. 두산은 그 이유로 합작 파트너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두산은 지난 5월14일 “그동안 합작 투자자를 물색했으나 중동 사태의 지속 등으로 합작투자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 사업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산의 합작파트너. 두산에선 합작법인의 이름에 들어간 ‘두산파라다이스’의 ‘파라다이스’가 슬롯머신계의 대부인 전락원씨가 이끄는 파라다이스그룹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파라다이스는 이를 부인했다. (주)파라다이스 관계자는 “(주)파라다이스가 두산과의 합작 법인 설립 계획에 연관돼 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하지만 그룹 계열사 중 어떤 회사가 연관됐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해 파라다이스그룹의 다른 계열사와 (주)두산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여기서 눈여겨 볼 또다른 내용은 두산쪽의 사업주체. (주)두산파라다이스는 두산상사BG((주)두산에 소속된 상사 부문 사업담당 파트)에서 추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산상사BG는 월풀 등 수입 가전제품 부문과 냉동내장 물류, KFC 사업부, 수입차 판매사업 등을 맡고 있다.
문제는 이 파트가 두산그룹의 4세 경영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박정원 사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는 점이다. 박 사장은 최근 두산상사에서 맺고 있던 볼보 판매대행 계약을 끝내고 혼다와 새로 판매망 계약을 맺은 뒤 두산모터스를 설립하는 등 경영보폭을 크게 넓히고 있다. (주)두산파라다이스 역시 박 사장이 관할했던 사업부서였던 것이다.
두산쪽에선 두산파라다이스가 사업유니트를 꾸리기 전, 상사BG의 TF팀 단계에서 사업이 깨졌기 때문에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사업 시작부터 종결될 때까지 박정원 사장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두산그룹측의 설명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과거 두산이 SK나 삼양사 등과 함께 ‘엔세이퍼’라는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를 만든 전례가 있다는 점을 들어 (주)두산파라다이스 역시 일종의 이벤트형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박정원 사장과 파라다이스그룹의 2세인 전필립 사장(전락원 회장의 아들)과 친분이 있어서 사업합작을 추진했었을 것이란 얘기다.
최태원 SK(주) 회장보다 두 살 어린 박정원 사장은 최 회장의 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또 파라다이스의 전필립 사장은 최태원 회장과 함께 CCK밴 등에 함께 출자하는 등 사업적인 관계도 돈독하다.
때문에 두산이 비교적 생소한 분야인 엔터테인먼트 사업 진출을 시도했던 것도 재벌가에서 종종 벌어지는 ‘재벌 2세’의 경영실험으로 보는 분위기다.
두산의 엔터테인먼트 사업 진출 시도도 4세 경영자인 박정원 사장의 등장과 함께 연결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같은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박정원 사장은 지난 2001년 10월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국내 재계에 재벌 4세 시대를 처음 연 인물. 그는 두산의 창업주인 박승직씨-박두병 초대 회장-박용곤 현 명예회장으로 이어지는 두산 가문의 장손이기도 하다.
두산파라다이스의 합작 사업 불발은 경영 일선에 나선 대표이사로 경영 이력을 쌓아가고 있는 박 사장에겐 반갑지 않은 악재인 셈.
박 사장은 최근 시작한 수입차 사업인 두산모터스의 혼다차 국내 판매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내놓은 첫 번째 카드인 두산파라다이스의 불발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기 때문.
(주)두산의 물류와 수입상품을 관할하는 상사 부분 대표이사인 박 사장이 이번에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을지 주목받고 있다. 박 사장은 그룹경영권 확보를 위해 해외에서 발행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헐값에 인수했다는 의혹을 받아 이를 다시 환원조치하는 등 데뷔 초반부터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