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부터 KLPGA서 활약하게 될 정일미. 그는 조만간 태국으로 건너가 동계훈련에 돌입한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7년 전 ‘잠시 마실 가는 기분으로 다녀오겠다’며 LPGA로 향했던 정일미(38). 그 7년의 세월 동안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위해 모든 역경과 고난을 참고 견디며 힘들게 버텼지만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잠시의’ 한국행을 결심했고, 내년 출전권이 걸린 한국여자골프투어 시드전에 참가,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후배들 실력이 장난 아니었다”며 살 떨리는 국내 투어 시드전 출전기를 털어 놓는 그는 “최연소 선수(이은빈)와 내 나이가 무려 21년이나 차이 났다”고 말한 뒤 한참을 웃는다. 국내 투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릴 때만 해도 정일미는 2년 연속 상금왕에 올랐고 ‘스마일 퀸’으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었다. LPGA 진출이 항상 그의 숙제처럼 자리잡고 있다가 결국 2004년 미국행을 시도했지만 그는 우승컵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우승은 못했어도 골프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경험하고 왔다는 ‘맏언니’ 정일미를 만나본다.
한국 무대도 만만치 않아
“LA 집에 짐을 다 놓고 왔어요. 한국행을 고민하다가 무작정 비행기 표부터 구해서 들어온 거예요. 사실 한국에서 시드전 출전 여부도 갈등을 반복했는데 일단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덜컥 신청을 한 거였죠. 그러고 보면 뭐든지 즉흥적인 게 많네요. 미국 진출한 거나, 다시 돌아온 거나…. 하지만 고민만 하고 있으면 시간만 가요. 신중한 것도 좋지만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는 용기도 필요하거든요. 제 상황이 오래 생각만 하고 있을 나이가 아니잖아요.”
정일미는 내년 한국 투어에 출전하는 선수들 중 최고참이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주위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다가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고 나서부턴 가급적 주변사람들로부터 욕먹을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단다.
“그런데 나이 먹고 다시 한국 무대에서 뛰려다 보니 왠지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후배들의 자리를 빼앗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미국 가기 전의 화려한 골프는 못하겠지만 7년간의 LPGA 경험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드렸으면 좋겠어요.”
‘오구플레이 논란’ 부글부글
정일미는 한국행을 고민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지난 번 발생한 ‘오구플레이 논란’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캐나다오픈 1라운드 18번홀에서 동반 라운딩을 펼친 안시현과 서로 공을 바꿔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경기가 끝난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선수는 자진해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실격 처리를 받았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한국선수들과도 인연을 맺은 바 있는 래리 스미치라는 캐디가 자신의 블로그에 정일미 안시현이 고의적인 오구플레이를 했다고 글을 올리는 바람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그때는 정말 사람이 싫어지더라고요. 래리 스미치는 제 캐디로도 인연을 맺은 사람이거든요. LPGA에서 유명한 반한파 캐디이긴 하지만 현장에도 없었던 캐디가 다른 캐디의 말만 듣고 일부러 오구 플레이를 펼쳤다고 글을 올렸다는 게 도통 이해도, 납득도, 용서도 안 됐어요. 정말 고소해서 끝장을 보려다가 LPGA 사무국에서 ‘사실무근’이라고 판명해줘 그냥 넘어갔던 거죠. 그래도 LPGA에서 선수들을 대변해 선수집행위원회 이사까지 했는데 이런 오해를 받는다는 게 참 싫었어요.”
▲ 리터칭=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선수집행위원회 이사 얘기가 나와서 관련된 질문을 이어갔다. 정일미는 이화여자대학 학사 출신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출신의 사업가로, 어머니는 서울미대를 나온 후 화가로 활동하셨다. 즉 공부에 관한 한 타고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정일미는 언변이 훌륭하고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한국 선수들이 집중 견제를 받고 있는 LPGA에서 선수들 투표로 집행위원회 이사직을 맡았다는 건 그가 LPGA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골프만 해나기에도 벅찬 미국 투어 생활 속에서 LPGA 선수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다보니 온갖 민원 처리는 정일미의 몫이었다고 한다.
“헤어진 남자 친구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 후배의 고민에서부터 한국 선수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는 다른 나라 선수들의 민원에다 스윙 폼을 교정해 달라는 청탁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몰리다보니 골프고 뭐고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그래도 그 일을 하면서 제 골프만 아는 이기적인 마인드에서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사회가 어떤 곳이라는 걸 간접 경험도 했고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오지랖이 넓어졌다는 거예요. 한국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로부터 뒷말 듣는 게 싫어서 후배들한테 잔소리가 심해진 거죠. 바지 색깔이 그게 뭐냐, 모자는 푹 눌러써야 멋있다 등등 지적을 많이 해대니까 후배들이 슬슬 절 피하더라고요.”
주름진 부모님 보며 속앓이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험 삼아 미국으로 진출했다. 2004년 컷오프가 마치 친구인 양 수차례 반복하고, 대회마다 새까만 후배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끝에 풀시드마저 놓쳤다. 2004년 말 다시 퀄리파잉스쿨에 도전, 합격한 후 2005년 두 번째 시즌부터는 조금씩 LPGA에 적응해 갔지만 우승은 번번이 그의 손을 비껴나갔다. LPGA에서 우승만 하면 더 이상 미국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자신감을 잃자, 정일미도 숱한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제가 고생하는 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몫이지만, 절 바라보는 부모님의 안타까운 시선과 한국에 나올 때마다 부모님이 연로해지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후배들은 어린 나이에 LPGA 우승을 이루는데 전 7년 동안 단 한 번도 우승컵을 품에 안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절 쓰리게 하더라고요. 오기와 끈기로 버티다 훌쩍 한국으로 들어온 게 마침내 복귀의 수순을 밟은 것처럼 됐지만 오히려 홀가분해요. 미국 무대에 더 이상 미련도 없고요. 한국 투어도 실력이 엄청 향상됐기 때문에 여기서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죠.”
연애는 하고파도 결혼은…
진짜 이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일미가 대뜸 ‘기자님은 결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하고 묻는다. 그래서 ‘결혼할 건가요?’하고 되물었다. 정일미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이상하게도 전 결혼한 사람들이 부럽지가 않아요. 혼자 사는 삶이 더 편해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더 나이 먹으면 외로워질 게 분명해요. 그 전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글쎄요. 골프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건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있는 만큼 선뜻 사람을 소개받는 게 부담스럽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생활할 계획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나 참다운 행복을 맛보고 싶지만 결혼한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게 정일미가 봐온 간접 경험들이었다.
“세리야, 말 못하고 와 미안”
“미국 생활하면서 (박)세리랑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대회 끝나고 둘이 술 마신 적도 많았고요. 나이 많은 처녀들이 청승 떤다면서 둘이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같이 울기도 하고…, 언니 동생으로 많은 걸 주고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있는 사람이 더해요. 세리가 돈 없다며 먹을 거 사달라고 많이 했으니까^^. 한국 올 때 말도 안 하고 왔는데 뭐, 처음엔 배신감 느끼다가 그 다음엔 이해해줄 거예요. 세리라면 제가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알 테니까요.”
정일미는 한국 투어 생활을 앞두고 가장 좋은 점으로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점을 꼽았다. 얼마나 비행기 타는 게 싫었으면 집이 있는 부산과 서울을 오갈 때 아무리 바빠도 KTX를 이용한다고 한다. 요즘엔 비행기만 보면 멀미 나는 증세까지 생겨 한국으로 복귀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국에서 몇 승을 올리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어요. 단, 경험과 연륜이 어떤 의미로 비춰지는지 보여드려야죠. 조만간 태국으로 건너가 동계훈련을 할 거예요. 참, 그런데 요즘 한국 골프 선수들, 왜 이렇게 예뻐요? 전 시드전 출전했다가 선수들 보고 무슨 미스코리아 대회 나온 줄 알았다니까요. 이젠 ‘스마일 퀸’도 안 먹히겠더라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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