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타계한 고 전락원 회장. | ||
고 전락원 회장의 병세가 베일에 가려졌었던 것처럼 그의 인생도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의 존재와 이력이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지난 93년 김영삼(YS)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YS는 취임 초기부터 개혁 드라이브를 시작했고, 5공화국과 6공화국 인물 상당수가 ‘사정태풍’에 걸려 사법처리를 받았다. 이 때 전락원 회장도 사법처리를 받으며 카지노업계의 세력판도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때 전 회장은 ‘카지노의 대부’로 공인받았다.
전 회장이 카지노 업계에 뛰어들기 전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게 없다. 그는 지난 1927년 유명 목사였던 전주부씨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이 수필가 전숙희씨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으로 그가 사업으로 성공한 뒤 문화예술계를 후원하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전 회장의 이력을 보면 1948년 성균관대 경제학과 입학과 1997년 성균관대 정경학부 경제학과 명예졸업이란 구절이 보인다. 그가 대학을 들어갔지만 졸업은 제때에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젊은 날 그의 공식 이력은 1961년 서울시 청년회의소 부회장, 1962년 한국관광협회 서울시 이사, 1967년 오림포스 관광호텔 대표이사가 전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텅비어있다.
이 시절 그는 한국전쟁 직후에 대구육군 제1통합병원 부원장으로 일하던 처남의 소개로 미군부대 군속을 지내면서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통역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군수물자 조달사업에 관여해 사업기반을 닦았다는 것.
그의 카지노 이력은 인천 오림포스호텔에서 시작된다. 1967년 당시 오림포스호텔 오너였던 유화렬씨의 권유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가된 카지노를 공동 운영(총지배인)하기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국내 최대 카지노였던 워커힐 카지노를 인수했다. 1972년부터 그는 파라다이스 회장으로 변신했다. 이후는 탄탄대로.
그는 3공화국 실력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듯하다. 1973년 워커힐을 인수한 SK그룹의 최종건 회장은 이후 파라다이스와 사업협력을 강화했다. 1993년 전락원 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 당시 SK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카지노 지분과 제주 신라그랜드호텔 카지노 등 전 회장이 소유한 카지노 5곳의 지분을 16~19% 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 물론 SK의 워커힐호텔카지노의 운영권은 전 회장 소유. 말하자면 파라다이스그룹과 SK그룹이 카지노를 매개로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형태였다.
재미있는 것은 워커힐호텔을 인수했던 최종건 회장의 평전에 3공화국 실세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최종건 회장과 절친했다는 점은 언급돼 있지만 전 회장에 대한 부분은 생략돼 있다는 점이다. 카지노가 국가 허가 사업이고, 국내 최대 규모의 카지노가 들어섰던 워커힐호텔도 관광공사 소유의 ‘국영’이었다는 점에서, 전 회장이 당시 실세들과 어떤 식으로든 절친했던 사이라는 게 분명해 보이지만 이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
그러나 그가 3공화국 인물들과 절친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통령 경호실장 출신인 박종규 전 IOC 위원과 돈독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74년 설립한 파라다이스케냐를 바탕으로 1976년 케냐 현지에 카지노를 설립하고, 88서울올림픽 유치 때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모으는 민간외교관으로 한몫을 하기도 했다. 그 공로로 1988년 정부로부터 사회발전유공훈장을 받고, 1989년부터는 주한케냐 명예 총영사를 지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를 보호하고 있던 이런 3공화국 인맥이 사라지면서 그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앞서 언급했듯 탈세 혐의로 국세청의 집중적인 조사를 당하고,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면서 법정에 서게 된 것. 한동안 해외로 도피했던 그는 귀국해 법정에 섰을 때 그는 “카지노로 15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면서 ‘카지노의 국가 경제 기여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정권의 실세들이라는 인맥에서 탈피해 제도권 속에 ‘파라다이스’를 안착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1989년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1994년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을 만든 게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동서문학>이라는 월간 문예지를 1970년부터 발행한 데 이어, 계원예고, 계원조형예술대학 설립 등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임에도 다른 대재벌보다 문화예술계의 큰 후원자 역할을 했다.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던 것.
그런 그의 노력은 지난 2002년 11월 카지노 운영업체인 (주)파라다이스를 코스닥에 등록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정치권의 입김에, 인맥의 부침에 좌우되던 카지노업을 양지에, 제도권 속에 안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젊은 시절 포커를 유난히 좋아해 주변에서 ‘본 투 비 갬블러’(타고난 도박사)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전 회장은 카지노로 일가를 이뤄 자신의 영어 이름을 딴 파라다이스그룹을 남겼다.
파라다이스그룹이 그의 존재가 사라진 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