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협회와 삼성화재간의 해묵은 분쟁이 업무 협약체결로 급 화해모드가 조성되고 있다. 사진은 을지로 1가에 위치한 삼성화재 건물.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삼성화재와 의료계의 갈등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우리나라 자동차보험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던 삼성화재가 의료기관을 향해 ‘칼’을 빼든 시점이다. 삼성화재는 그동안 의료기관에 지급한 진료비 중 부당하게 청구된 부분이 있다며 대대적인 환수 조치를 취했다. 2002년 이전 3~4년간 부당하게 지급된 보험금을 일주일 내에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의료계의 반발은 거셌다. 사전에 어떠한 내용도 전달받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의료기관마다 최대 3억 원에 달하는 보험금을 내야 했기 때문. 게다가 삼성화재가 요구에 불응한 의료기관을 사기 혐의로 형사고소하면서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갑작스런 삼성화재의 환수 조치는 뒤늦은 법률자문의 결과물이었다. 부당청구로 인한 진료비 지급액에 대해 최고 10년분까지 환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2002년에서야 알게 된 것. 당시 삼성화재 보상전략팀은 “이번 환수조치를 통해 부당청구 의료기관이 대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의료기관에서 치료한 사실이 없는데도 한 것처럼 허위로 청구한 사례도 수백 건이나 확인됐다”고 밝혔다.
삼성화재의 법적 대응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보험을 취급하는 의료기관에 대한 경찰 수사가 증가했고, 의사들은 진료비 허위 또는 과다 청구 혐의로 줄줄이 입건되고 만다. 의료계는 잘못된 관행을 인정하면서도 피해를 입는 의료기관이 늘어나자 적극 대응에 나섰다. 장기적으로 삼성화재 자동차보험 환자를 받지 않겠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의료계의 이 같은 강력한 대응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삼성화재가 의료기관의 동의 없이 진료비를 임의로 삭감해 지급하는 관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보험사는 의료기관이 청구하는 진료비를 두 가지 방법으로 지급할 수 있다. 의료기관이 청구한 진료비가 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보험사는 의료기관의 동의를 얻어 진료비의 80%를 선지급한 뒤 나머지 20%를 자동차보험분쟁심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차후 지급할 수 있다. 심사 기간 중엔 진료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의료기관이 심사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였다. 이 과정에서 보험사가 일방적으로 진료비를 삭감해 지급해 왔기 때문. 게다가 삼성화재 일부 지역 서비스센터가 지급을 미뤄온 미수 진료비를 미끼로 의료간섭을 행해 논란을 빚었다. 지방 의료기관 관계자는 “당연히 지급해야 할 미수 진료비를 이용해 협약서 날인을 강요했다. 통원 치료를 할지, 입원 치료를 할지 여부는 의사의 고유 권한인데 단순히 자동차 수리 견적이 100만 원 이하라고 해서 통원 치료를 강제할 권한이 보험사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자동차보험 시장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삼성화재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 결국 해결점을 찾지 못한 의료계는 그렇게 삼성화재와의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오다 최근 화해 카드를 빼들었다. 삼성화재와 추진하는 ‘건전한 자동차보험 문화를 위한 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화재라면 치를 떨던 의사협회가 갑작스레 업무협약을 추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동안 계속돼 온 삼성화재와의 해묵은 갈등 해결이 일차적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의료계 일각에선 최근 삼성화재가 제기한 고소·고발로 소송이 진행 중인 의사들 중 일부를 구제하려는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다른 손해보험사를 제외한 채 삼성화재하고만 협약 체결을 추진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보험사기에 연루된 의사들 대부분이 삼성화재가 제기한 고소·고발로 수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특정 의사 구제 차원이라기보다는 현재 삼성화재가 제기한 소송과 관련한 의사 모두를 구제하려는 목적”이라며 “실제 협약서 내엔 이미 제기된 소송 취하를 위해 상호 노력하고, 의료기관이 청구한 진료비를 법정 기일 내에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제 불필요한 고소·고발은 없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그러나 의료계 내부에선 협약 내용 중 일부가 의사의 전문성을 해칠 수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내놓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관계자는 “협약 내용 문구가 의료계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특히 ‘타 의료기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문구는 의사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 A 병원에서 퇴원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받은 자동차 사고 환자가 B 병원 의사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입원을 할 경우, 위 문구에 따르면 퇴원 조치를 내린 A 병원은 옳고 입원 조치를 내린 B 병원은 잘못됐단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삼성화재하고만 협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삼성화재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보험사들이 반발할 경우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협약 체결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사들도 있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해당 의료기관 의사가 보험사기에 연루돼 있다면 그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 자정 대상”이라며 “의료계의 전문성을 해치면서 무리하게 협약을 진행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이 분분하자 협약을 추진하던 대한의사협회도 한 발 물러섰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협약이 체결되면 진료비가 과다 청구됐다고 무조건 소송을 걸던 삼성화재의 관행을 막을 수 있다. 이 부분만큼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내부적으로 좀 더 신중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협약 당사자인 삼성화재 보상전략팀 관계자는 “지난 3월, 의사협회 쪽에서 먼저 협력 방안을 제시해왔다. 우리도 불필요한 고소 및 고발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10년 가까이 분쟁을 거듭하던 삼성화재와 대한의사협회. 협약 체결을 둘러싼 양측의 갑작스런 화해모드가 어떤 결실을 맺을지 주목된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