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칠 때 떠나기 쉽지 않더이다’
지난 5월 30일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이 돌연 사임했다. 김 사장의 사임은 재계 안팎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더욱이 김 사장은 현대건설이 우여곡절 끝에 현대차그룹으로 인수되고 난 후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현대차그룹의 건설계열사인 현대엠코 김창희 부회장과 함께 현대건설의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된 터라 그의 사임을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갔다. 임기도 10개월이나 남은 상태였다.
김 사장은 공식적으로 “새 경영진이 자유롭게 경영활동할 수 있도록 퇴임을 결심했다. 35년 만에 현대건설을 졸업하는 기분”이라는 말만을 남겼다. 김 전 사장이 현대차 측에는 이미 일주일 전에 사임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건설 내부에서는 김 사장의 측근들조차 30일 아침까지 사임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당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셔츠 차림으로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보고 사임 징후를 느꼈다는 것.
재계에서 김 사장 사임의 변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회사를 떠나는 시점이 워낙 느닷없는 데다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사안도 없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이유와 근거가 없는 사표 혹은 인사는 있을 수 없다”며 “김 사장이 밝힌 사임 배경은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의 사임으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럭비공인사’가 또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 대기업 팀장급 인사는 “정 회장의 인사 스타일이 사실 갑작스러운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대부분 ‘그럴만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면서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는 것이 임직원들의 사기 면에서도 보기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내부에서도 ‘새롭게 사장 임기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내보내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어차피 공동대표니 최소한 연말까지는 보장해주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인 셈이다.
특히 김중겸 사장은 1976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후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현대건설에서 보낸 정통 현대맨이다. 의욕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며 해외 수주를 잇달아 성사시키는 등 현대건설을 업계 1위로 올려놓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3월 주총에서 해임될 것으로 예상했던 김 사장이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게 된 것도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책임이 김 사장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두었고, 평소 씀씀이도 컸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같은 행태를 정몽구 회장이 보기 언짢아했다는 것이다. 현대차 측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접대비라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은 현대차 문화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현대차 측과 정몽구 회장이 건설업계 특유의 접대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중겸 사장이 한창 잘나가다가 갑작스레 하차한 경우라면 김쌍수 한전 사장은 위기의 수렁에서 새로운 비상구를 찾아나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LG전자 부회장 출신의 김쌍수 사장은 지난 2008년 8월 한전 사장에 취임했다. 김 사장은 한전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기업 CEO 출신 사장이 됐다. 그는 1969년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대표이사까지 역임한, 전형적인 LG맨에다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그런 김 사장이 한전 사장으로 취임하자 공기업 한전에 새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김 사장은 혁신을 내세우며 ‘철밥통’으로 인식되던 한전 내부를 변화시키려 했다. TDR(Tear-Down & Redesign)이라는 신경영혁신 기법을 주문했고 LG전자 시절 운용했던 ‘6시그마’도 병행했다. 이로써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절감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 원전 수출 등 굵직한 해외 사업에도 성공하며 공기업에 대한 정부 경영평가에서 3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계속 적자였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묶어둔 탓이 가장 크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영업적자의 모든 책임을 그것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해외 사업을 더 활발히 하는 등 수익구조 개선에 더욱 힘써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 사장은 때때로 한전 내부 임직원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김 사장 방식의 임직원 평가제와 조직개편이 한전 임직원들의 원성을 산 것이다. 김 사장의 경영방식을 반대하는 간부 출신 사원들이 따로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김 사장이 적극 주장하던 발전 자회사들의 통합(한국수력원자력, 5개 화력발전 자회사, 한전의 재통합)도 초기부터 이런저런 반대에 부딪치더니 결국 지난해 8월 정부의 ‘전력산업구조개편안’이 확정되면서 무산됐다.
악재가 연속해서 터지자 지난해 말에는 급기야 ‘김쌍수 사장 사퇴설’까지 나돌았다. 한전 내부는 물론 정치권과 재계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탓에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더 큰 문제는 사퇴설과 관련, 한전 경영진이 ‘경영진의 거취와 관련해 유언비어를 전파, 확산 또는 단순 문의하는 사례가 확인될 경우, 해당자는 물론 상급관리자까지 엄중 문책하겠다’는 공문을 내려 보낸 것이었다. 사내 공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강한 경고와 엄포가 내포돼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김쌍수 사장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설로만 나돌던 ‘김 사장의 사퇴’가 오히려 사실인 듯 인식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일본 대지진 이후 독일이 원전을 포기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원전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지면서 원전 수출에 대한 전망도 밝지 않은 상태다. 김 사장의 입지는 그야말로 안팎으로 위기였다.
이런 김 사장의 최근 행보가 심상찮다. 지난 5월 27일 김 사장은 ‘친정’인 LG전자를 방문해 직원들이자 후배들인 LG전자 직원들을 격려했다. LG전자를 떠난 후 처음으로 LG전자를 방문한 것이다. 이날 김 사장은 LG전자 서초 R&D캠퍼스를 찾아 직원들에게 “독하게 연구개발해서 1등 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사장의 이날 행보는 바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오는 8월 임기가 만료되는 김 사장은 현재 연임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 때문에 김 사장이 ‘다음 목적지’를 물색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LG서브원이 한전의 MRO(소모성 사무자재) 납품을 ‘싹쓸이’한 사실이 알려지며 김 사장의 ‘친정 밀어주기’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전 측은 “사장의 거취, 연임과 관련해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LG전자에는 현재 오너인 구본준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김 사장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하지만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시절, 사내 분위기를 쇄신한 점, LG전자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점 등을 이유로 고문자리 정도는 내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예측했다.
정통 현대맨과 LG맨, 두 CEO의 행보가 주목된다.
임준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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