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빈 삼성 구단주가 선수단 격려차 경기장을 방문, 배영수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4월 9일 잠실 두산-KIA전을 중계하던 모 스포츠케이블 채널 PD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홈플레이트 뒤쪽 관중석에 어디서 많이 본 중년남자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종이컵에 맥주를 따르며 안타가 나오면 환호했고, 투수가 삼진을 기록하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복장이나 그가 앉아있는 좌석, 소탈한 동작을 봐선 여느 야구팬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두산건설 박정원 회장이었다. 두산 베어스 구단주이기도 한 박 회장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두산을 응원했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큰아들인 박 회장은 2009년부터 두산 구단주를 맡았다. 당시만 해도 다른 구단주들처럼 이름뿐인 구단주가 되리란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박 회장은 개막전마다 잠실구장을 찾아 선수단을 격려했고, 시즌 중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두산전을 지켜봤다. 시즌이 끝나서도 야구사랑은 여전했다.
2월 말 두산은 일본 미야자키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하지만, 공교롭게 미야자키에서 화산이 터지며 일정이 꼬였다. 이미 예정됐던 박 회장의 스프링캠프 방문도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일부에선 “화산재가 흩날리는 상황에 구단주가 오겠느냐”며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그러나 기우였다. 박 회장은 예정대로 미야자키 스프링캠프를 찾아 사흘 동안 머무르면서 선수단을 독려하고, 격려금을 전달했다.
구단주의 야구사랑하면 LG를 빼놓을 수 없다. LG는 구본무 회장을 비롯한 형제 모두가 소문난 야구광이다. 1990년대 구 회장은 비서만 대동한 채 조용히 잠실구장을 찾곤 했다. 어찌나 조용히 관전하는지 구장 경비원이 구 회장을 평범한 야구팬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구 회장은 그룹 사장단은 집에 초청하지 않아도, LG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수시로 불러 회식을 개최했다. 회식 도중 흥이 나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선수들에게 주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파동 때 LG 선수단이 선수협에 가입하며 구 회장의 야구사랑은 조금씩 식었다. LG 관계자는 “그때를 기점으로 구 회장님의 잠실구장 방문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구 회장의 뒤를 이어 2008년부터 LG 구단주에 오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형보다 더한 야구 사랑을 드러냈다. 구 부회장은 야구 명문 경남중·고 출신이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중학교 동창이다. 젊었을 때부터 직접 사회인 야구를 했고, 최근까지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60살의 나이인데도 투수로 나서면 웬만한 젊은 타자들을 쉽게 제압한단다.
그럼에도, 구 부회장 역시 두산가처럼 야구단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법이 없다. 2002년 이후 팀 성적이 바닥이지만, 인사 문제도 간섭하지 않는다. 대신 선수단을 지원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SK는 정만원 SK텔레콤 사장이 구단주대행을 맡고 있다. 지난해까진 손길승 명예회장이 구단주 대행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구단주는 SK그룹 최태원 회장이다. 사실 최 회장은 소문난 농구광으로 알려졌다. 미국 유학시절엔 교내 농구선수로도 뛰었다. 취미란에 ‘농구’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SK가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르며 최 회장의 야구사랑은 각별해졌다. SK가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자녀와 함께 문학구장을 찾는 건 이제 생경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최 회장은 본부석과 귀빈석을 마다하고 1루 홈 관중석에 앉아 팬들과 함께 응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도 SK처럼 대행 체제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5촌 조카인 신동인 전 롯데쇼핑 사장이 구단주 대행을 맡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구단주 대행과 달리 실세로 인정받는다. 야구계는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과의 재계약 포기와 양승호 감독 선임을 신 구단주 대행의 작품으로 본다. 롯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모 야구인은 “롯데가 엔씨소프트의 창단을 반대하고, 이대호와 연봉조정협상까지 간 것도 신 구단주 대행의 의지가 원체 강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구단주를 맡고 있다. 회사 경영이 바빠 자주 야구장을 찾진 못하지만, 간혹 구장을 찾는 날이면 두둑한 격려금을 주고 간다. 격려금 규모가 8개 구단 가운데 최고라, 삼성 선수들은 이 회장이 찾는 날이면 시쳇말로 날아다닌다. 최근 삼성스포츠단은 그룹 최고위층으로부터 “삼성다운 성적을 낼 것”과 “스포츠단 투자를 아끼지 마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단도 예외가 아니다.
한화 구단주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99년 한화가 우승할 때 직접 구장을 찾아 귀빈석이 아닌 응원석에서 응원스틱을 든 바 있다. 2006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때는 선수단을 위한 격려 메시지를 동영상으로 제작해 전광판에 내보이는 깜짝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야구 사랑이 시들해졌다. 그룹 내외로 부침이 많았던 데다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까닭이다. 구단주의 관심이 줄면서 한화 성적도 2008년 이후 바닥을 치닫고 있다.
KIA 구단주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다. KIA자동차 사장이 구단주대행을 맡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구단주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맡고 있다. KIA가 신구장을 건설을 위해 300억 원을 내놓은 것도 정 부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룹 경영이 바빠 야구장을 찾는 횟수는 적은 편이다.
넥센은 이장석 사장이 구단주를 겸임한다. 8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모그룹이 없는지라, 이 구단주는 메인스폰서 유치를 위해 뛰는 등 구단경영을 도맡고 있다. 이 구단주는 넥센의 홈경기가 목동구장에서 열리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