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원익배 우승으로 국내외 기전 4관왕 위업을 달성한 이세돌 9단. |
원익배 결승3번기 제1국은 이세돌의 승리. 간단히 2 대 0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2국에서는 강 4단이 반집으로 이세돌을 잡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3국도 초반에 백을 든 이 9단이 실리를 너무 탐하다가 흑에게 막강한 외세를 허용해 강 4단이 절대 유리한 국면이었다. 세 불리를 느낀 이 9단은 다시 흑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견 무리. 그러나 이세돌은 능기인 변화무쌍한 흔들기와 신출귀몰한 타개 솜씨로 흑진을 휘저으며 역전에 성공했다.
강4단으로서는 첫 타이틀을 거의 다 잡았다가 눈앞에서 놓쳤으니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한 판이었을 것이다. 일본식 표현으로는 ‘잔념(殘念)의 보(譜)’, 상념이 남는 일국이었다.
‘사이클링 히트’나 ‘전관왕’ 혹은 ‘그랜드슬램’이라고도 하는데, 뭐, 꼬치꼬치 따질 것 없이 모든 타이틀을 다 가져본다는 뜻에서는 그거나 그거나지만, 이번 이세돌의 경우에는 ‘사이클링 히트’가 더 맞겠다. 그랜드슬램은 모든 타이틀을 동시에 장악하는 것, 사이클링 히트는 모든 타이틀을 골고루 한 번 이상 차지하는 것.
국내 바둑 타이틀은 전 기사가 출전하는 소위 정규 본격기전이 8개다. KT 올레배, 하이원배 명인전, GS칼텍스배, 원익배 십단전, 물가정보배, 국수전, 박카스배 천원전과 TV 속기전인 KBS 바둑왕전이 있고, 그밖에 9단들만이 겨루는 맥심커피배, 45세 이상 시니어 기사만 참가하는 대주배, 여자만 출전하는 여류국수전, 여류명인전, 여류기성전, 남자 시니어와 여자기사가 단체로 나와 승발전(농심배, 정관장배 방식)을 벌이는 지지옥션배, 그리고 지역 연고 단체전으로 장기 페넌트레이스를 펼치는 한국리그가 있다. 세계기전(개인전)은 삼성화재배, LG배 기왕전, BC카드배. 현재 한국 프로바둑의 대표 기전은 물론 한국리그. 그러나 바둑 경기는 아직 개인전이 본령이므로 한국리그나 지지옥션배의 팀 성적은 개인 랭킹과는 관계가 없다.
이 가운데 이세돌이 갖고 있는 것은 엊그제 우승한 원익배 외에 KT배, 물가정보배, 그리고 세계기전인 BC카드배. 이래서 4관왕. 따라서 타이틀 수에서는 1등이지만, 전관왕은 아니다. 그랜드슬램도 아니다. 그동안 위의 네 타이틀 말고 다른 기전에서도 한 번 이상씩 우승한 적이 있기에 사이클링 히트는 맞다. 전관왕은 당연히 사이클링 히트이나 사이클링 히트가 항상 전관왕은 아닌 것.
전관왕을 기록했던 사람은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두 사람. 조 9단은 1980년과 82년, 86년 시즌, 세 번이나 전 타이틀 석권의 대기록을 남겼고, 이창호 9단은 1994년 시즌 한국 바둑을 완벽하게 평정했다. 사이클링 히트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겠지만, 전관왕은 힘들 것이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각자 당대의 상황에서 이 9단이 조 9단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았건만 조 단은 세 번인데, 이 9단은 한 번에 그쳤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다.
지금의 일인자 이세돌 9단 또한 이창호 9단보다 못하지 않지만, 성향이 다르다. 조훈현 이창호는 타이틀을 가리지 않고 기복 없이 전력투구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이세돌은 ‘선택과 집중’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성향의 차이이기도 하겠거니와 시대 상황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바둑 발전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뛰어난 재주들도 갈수록 많아져 앞으로는 상대적 일인자는 있겠지만, 조훈현 이창호 같은 절대적 일인자는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나저나 전관왕은 저항감이 없는데, 사이클링 히트나 그랜드슬램은 별로인 것 같다. 용어의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동네에서 빌려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꼭 맞는 옷은 아니어서 어색하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5등 이하의 하반부 10위권으로 내려간 후 이세돌이 1등은 확실하지만, 방금 말했던 것처럼 왕년의 조훈현 이창호 같은 절대지존은 아니어서, 또 이세돌과 비슷하거나 조금 약한 2등 이하가 즐비하고 이들의 하루가 새롭게 현란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어 지금은 정말 춘추전국인 것처럼 보인다. 요즘 바둑이 위기라고 하나 이 대목에서는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
최철한 9단(26)이 국수, 박카스배와 세계기전 잉창치배를 갖고 있는 3관왕. 타이틀 수에는 2등이다. ‘하이원배 명인’ 보유자 박영훈 9단(26)이 4월 7일 맥심커피배 결승에서 이창호 9단에게 반집을 이겨 2관왕. 48세의 아주머니 루이나이웨이 9단도 여류국수 여류명인의 2관왕. 그 다음은 원성진 9단(26)이 GS칼텍스배, 박정환 9단(18)이 KBS바둑왕, 김윤영 3단이 여류기성(22), 조훈현 9단이 대주배를 하나씩 나누어 갖고 있다. 조훈현 9단의 집념이 대단하다.
세계 타이틀도 재중동포 박문요 9단(23)이 LG배, 구리 9단(28)이 삼성화재배, 콩지에 9단(29)이 후지쓰배와 TV아시아컵, 창하오 9단(35)이 춘란배를 분점하고 있다. 국내외 타이틀이 모두 춘추전국인 셈이다.
올해도 세계바둑은 일본이 빠진 상태에서 한국과 중국이 서로 마구 뒤섞여 물고 물리는 난타전을 벌일 것이다. 혼란과 혼돈의 춘추전국이 얼마나 지속될지. 최근 기세나 흐름으로 본다면 조만간 이세돌이 쑥 치고 나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전망하는 사람이 많다. 구리와 콩지에가 잠깐의 부진을 털고 예전 컨디션을 찾을 것인지, 또 하나 뭔가 큰 거 한 방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한국의 박정환과 한 걸음씩 꾸준히 올라와 지난해 마침내 정상의 한 봉우리를 정복한 중국의 박문요, 한-중의 양박이 춘추전국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올 시즌에는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