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락전자 장병화 회장은 자신의 뒤를 이을 2세대 CEO를 찾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자신의 뒤를 이어 연 매출액 130억 원, 34년 된 회사를 이끌 CEO(최고경영자)를 찾고 있는 노(老)경영자가 있다. 연봉 1억 원, 순수익에 따라 최고 인센티브 10억 원, 5년간 주식의 10% 양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후계자 찾기를 위해 그동안 들인 직·간접적 비용이 1억 원이 넘는다. 직접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록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07년엔 대기업 출신 경영인을 영입했지만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1960년대 맨손 상경기부터 후계자 찾기까지, 음향기기 전문기업 가락전자 장병화 회장(64)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업경영도 30년 정도 되면 노후화됩니다. 사회가 얼마나 급변했습니까. 저 자신이 경영에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고 2006년께부터 후계자를 물색했습니다. 수천만 원 들여 컨설팅을 의뢰하고 외부 면접관을 모셔오고 해서 20명 넘게 면접을 봤죠. 최종적으로 한 명을 뽑아 2007년 10월, 창업 30주년을 기해 새 사장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 회사 내에 마찰이 생겼어요. 임원들이 사표를 들고 와 자신들과 사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상황까지 몰렸고 결국 사장의 사표를 받았습니다.”
장병화 회장은 이 사건 이후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것에 더욱 신중해졌다. 또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그에겐 장성한 세 자녀도 있고 오랫동안 함께 사업을 해온 임원들도 있다. 그들도 차기 CEO 후보군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기준에는 아직 못 미치는 모양이다.
“경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안 되는데 부모덕에 물려받으면 기업은 3년을 못 갑니다. 2년여 전 말단사원부터 일을 시켜본 큰아들(35)은 곧 다른 회사로 내보냅니다. 10년 후에나 후계 가능성을 다시 검토할 수 있겠죠. 둘째(딸)는 수의사이고 막내(31)는 대기업에 다니다 얼마 전 회사에 들어왔는데 너무 어려요. 내부 발탁도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장에서 해외 제품과 경쟁해야 하는데 외국어 핸디캡이 있죠. 나이도 저랑 별 차이가 없고요.”
장 회장의 기준이 너무 까다로운 건 아닐까.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1세대 경영인은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2세대 CEO는 글로벌화와 미래기술 예측력을 갖추고 내부 고객(사원)과 외부 고객을 조화시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자 ‘간택’의 기준이다.
“오디오 산업이 아주 낙후됐을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런 회사가 업계에 많지 않습니다. 장수기업으로 남아 커나가야 합니다. 우리 회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중소기업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바뀌는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정부가 장수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줘야 합니다. 제대로 된 기업의 승계는 돈이 아니라 책임 가치의 승계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후계자 찾기도 책임 승계의 일환입니다.”
그의 기준이 그토록 깐깐한 이유다. 게다가 가락전자는 독립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장이호 선생의 아들인 그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세우고 일궈놓은 사업이다. 강원도 외가에서 자란 장 회장은 19세 때 차표도 없이 홀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창업의 기반을 다졌다.
“아주 고생하던 시절 이야기를 하려니 눈물이 나네요. 먹을 게 없어서 난전에서 자기도 했죠. 한데 제가 클래식을 즐기시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전파사 앞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일 없는 날 세시봉 같은 데 가서 차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있고 그랬습니다. 그러던 중 전축 만드는 곳에 소개가 돼 들어가면서 음향기기와 인연을 맺었죠.”
1977년, 그의 나이 서른, 부친이 대한민국건국훈장에 추서된 해에 그간의 경험과 기술로 세운상가에서 경일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브랜드는 우리가락의 ‘가락’으로 삼았다. 가락은 나중에 법인화를 하면서 상호가 된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회사는 공중분해 위기에 부딪힌다.
“1980년대 초 일인데요, 잘 아는 분을 영입했어요. 한데 어느 날 이 분이 직원들 15명밖에 안 되는 회사에서, 그것도 연구 영업 회계 책임자 등 핵심인재들을 포섭해 다 데리고 나가 똑같은 회사를 만든 거예요. 정말 어려웠죠. 하지만 제 고객들은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 걱정을 했어요. 거래처도 똑같을 수밖에 없는데 그 회사 제품을 안 쓰더군요. 제가 그때는 기술도 있었고 그동안 고객이 부르면 새벽에도 달려가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이죠. 결국 그 회사는 몇 년 못 가고 부도가 났어요. 그리고 그쪽에 갔던 직원들 대부분이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일제 음향기기를 수입하던 업체가 몇 배 성장하는 걸 보면서도 그는 ‘가락’이라는 브랜드에 걸맞게 음향기기 국산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도 생산했다.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으로 지금은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 최신형 앰프를 수출하는 등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러나 내수에선 그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크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의 ‘상생론’이 나온다.
“우리 사회 현실로 보면 바보짓이었지만 벌어서 다 기술투자를 했어요. 그렇게 기술력은 앞서가는데 매출은 안 늘더군요. 현재 중소기업들의 문제입니다. 그동안 대기업 위주의 정책으로 중소기업 상품은 인지도가 떨어져요. 그리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상생이 아니라 하청관계가 되니까 더 어렵죠.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산업에 허리가 없어요. 허리기업, 즉 스타기업과 장수기업을 키워야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앞으로도 장 회장은, 아니 그의 뒤를 이어 가락전자를 이끌어갈 후계자는 비전이 있는 것일까.
“요즘 녹색이다, LED다, 태양전지다 하지만 음향 분야도 로봇을 비롯해 음성인식 음향치료 등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쪽을 계속 개발해 나아가야 할 겁니다.”
요즘 그는 부천벤처협회 회장을 맡는 등 젊은이들의 창업 컨설팅에 푹 빠져 있다. 가락전자 후계 경영자 찾기의 사회적 확장인 셈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기업이 참 재미있다. 젊은이들이 창업에 관심 가져줬으면 한다. 작은 장사부터 시작해도 된다. 장사가 크면 기업이 되는 거니까”라며 “이런 경험을 통해 똑똑한 기업가정신을 가진 전문경영인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