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며 되도록 외부 노출을 하지 않는 이 회장이나 태광그룹으로선 지난 8월 한 달은 몇 년 동안 벌어질 일이 한 달 새에 다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도박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8월 24일 업체들에 대한 압수수색 이후 다음날 상품권 업체 대표 등 28명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출금 대상자에는 안다미로 김용환 회장,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대표와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국내 최대 상품권 발행업체인 한국도서보급의 대주주인 이호진 회장도 출금 대상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한국도서보급은 이 회장이 지분 50%, 이 회장의 아들 현준 씨가 45%를 가지고 있는 회사다. 나머지 5%를 (사)대한출판문화협회 등 출판관련 회사들이 갖고 있다. 김남태 대표가 CEO를 맡고 있지만 실질적인 의사결정은 대주주에 의해서 이뤄진다고 볼 때 이 회장에 대한 출금설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태광 측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회사 대표도 아니고 대주주일 뿐이다. 확인도 않고 설을 제기한 것이다”며 부인했다. 태광 측의 강력한 어필이 나온 이후 ‘출금설’은 쑥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도서보급이 사실상 이 회장의 개인 회사라는 점과 한국도서보급은 상품권 발행으로 늘어난 유보현금을 계열사 대출에 이용하며 지배력 확장 도구로 썼다는 점에서 도덕성 논란을 피해갈 수 없을 듯하다. 상품권 활성화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결국 이 회장이기 때문이다.
한국도서보급의 자금은 주로 티브로드의 유선방송사들이 1년 미만의 단기대여로 수십억∼백억 원 대의 대출을 이용하고 있고, 태광시스템즈, 태광관광개발, 대주주인 이호진 회장에게도 자금을 대출했다. 대출 이자는 주로 9%였고 일부는 7%대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한편 이 회장의 출금 논란에 앞서 한국도서보급의 전직 이사들이 국회의원들에게 고액의 후원금을 기부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밝혀지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창연, 최선호, 김낙준 전 이사들이 열린우리당 이미경,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등 7명의 의원들에게 150만∼500만 원의 후원금을 냈다.
선관위의 고액 후원금 기부 현황에서 확인한 것들 중 상품권 업체로는 가장 많은 수의 의원에게 기부금을 낸 것이다. 이에 대해 태광 측은 “최선호 전 이사는 도서출판 세계사 대표, 김낙준 전 이사는 금성출판사 대표이사로 이들은 당연직 비상근 이사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업으로 삼고 있는 회사를 위해 후원금을 낸 것이고, 이창연 전 이사는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으로 도서정가제를 위해 후원금을 낸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한국도서보급은 국내 최초로 문화상품권 인증을 받은 회사로 업계 1위인데, 굳이 경품용 상품권으로 지정되기 위해 로비를 할 필요성이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지난 8월 23일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 이른바 장하성펀드는 태광 계열사인 대한화섬 지분 매입을 공시해 재계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교수 측은 태광이 올해 6월 페트병 사업을 접은 뒤 이후 사업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고, 유보된 현금으로 금융 계열사 인수에 쓰는 등 청산 가치가 더 높다고 얘기한 바 있다.
태광 측은 “화섬산업은 저임금 장치산업인데, 국내의 높은 임금으로 중국 업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폴리에스터 보틀칩(polyester bottle chip: 페트병의 원료)을 만들어 팔수록 적자가 커져 사업을 접은 것이다. 또 유보된 자금을 그냥 은행에 맡겨두는 것보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가용해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반응이다.
장하성펀드의 대한화섬 주식 매입과 같은 시기에 태광시스템즈가 대한화섬 주식을 매입한 것에 대해 내부자 거래 의혹과 대한화섬 상장폐지설이 나돌기도 했다. 장하성펀드가 주식매입을 공시한 뒤 대한화섬은 연속 나흘간 상한가를 기록하며 주가가 두 배 이상 뛰었다.
이와 관련해 태광에 대해 ‘내부자거래 의혹’이 나도는 이유는 태광 계열사인 태광시스템즈가 대한화섬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공시한 날이 8월 18일이며 장하성펀드 측으로부터 레터(letter)를 받은 것은 8월 10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8월 23일 장하성펀드의 최초공시 이후에도 8월 24일, 29일 태광시스템즈는 대한화섬의 주식을 사들였다. 이런 태광 측의 대한화섬의 주식 추가 매입은 상장폐지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태광 측은 태광시스템즈의 주식 매입은 7월부터 시작되었고 8월 7일 최초공시를 했기 때문에 장하성펀드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8월 24일, 29일 공시한 것은 매입시기가 8월 21일, 22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8월 7일 공시까지는 760주만 샀으나 8월 18일 공시부터는 7627주, 9424주, 3094주로 대량 매입하고 있다.
태광 측은 이 같은 의문에 대해 “우호지분이 70%가 넘는 상황에서 온갖 악소문을 감수하고 1~2%를 더 사 모아서 주가차익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시장 참여자 대다수는 모르지만 오너는 확실히 주가에 우호적인 재료가 있다는 것을 안 뒤에 추가매입을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증권가에서는 대한화섬이 과거 자본시장 육성법 출범 당시 주위의 강권에 의해 상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광이 대한화섬의 지분을 계속 매입해 상장폐지 요건을 충족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태광 측은 “장하성펀드 등 외국계 펀드가 이미 10.3%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 90% 넘는 지분을 살 수도 없거니와 상장 폐지 자체가 회사의 방침이 아니다”고 반박하고 있다.
한편 장하성펀드의 출현으로 대한화섬과 태광산업, 흥국쌍용화재 등 계열사들의 주가가 두 배 가까이 급등하는 등 전반적으로 시가총액이 급증했다. 대한화섬의 지분 71.88%를 가진 대주주들의 평가 차익도 급증했다. 이호진 회장은 대한화섬 지분 14%를 가지고 있다.
태광 측은 “어차피 팔 주식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 차익은 미실현 이익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장하성펀드에 대해서는 “대립 구도로 보지 말아 달라. 소액주주로 ‘대응’할 뿐이다”고 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던 이호진 회장은 이미 이번 세 가지 파동으로 무대 가운데로 불려나와있다. 무대 위의 이 회장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만인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