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 재벌기업 오너의 딸에게 접근해 “5000만 원만 투자하면 매달 15%의 수익을 돌려주겠다”고 유혹한다면 어떻게 될까. 보통사람들 생각에는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재벌가 사모님’들이 이런 뻔한 유혹에 빠져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날린 것으로 밝혀졌다.
한 국내 중견 제지업체의 며느리가 국내 재벌그룹 며느리나 중견기업 오너의 딸 등 재벌가 여인들에게 “홍콩펀드에 투자해 고수익을 올려주겠다”며 거액을 받아간 뒤 돈을 제대로 갚지 않아 법정소송으로 번진 것.
재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상류층 여성들로부터 돈을 빌린 사람은 30대 A 씨다. 그는 중견 제지업체인 B사 오너의 며느리다. B 사는 10대그룹에 드는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등 재벌 사교계에서도 잘 알려진 집안.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 한남동 등 재벌타운에 거주하는 부유층 여성들이며 이들 가운데는 국내 4대 재벌급 집안의 며느리, 중견 코스닥기업 Y사 오너의 딸, 유명 외국계 컨설팅업체 대표 부인 등 내로라하는 최고 부유층 여성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신분노출을 꺼리는 재벌 ‘로열 패밀리’의 속성상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기 의혹 사건에 휘말린 것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피해자 수나 피해규모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처럼 당사자들이 쉬쉬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 중 일부가 얼마 전 A 씨를 상대로 대여금 반환소송을 제기하면서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기 때문.
사건의 발단은 1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유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것으로 소문난 서울시내 모 외국인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던 A 씨는 학부모들을 상대로 “홍콩에 잘 아는 투자전문가가 있는데 펀드에 함께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며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A 씨는 홍콩의 한 방송사에 근무하는 한국계 임원과의 친분을 앞세우며 “그 사람도 함께 투자하기로 했다. 한 달에 15%의 수익을 보장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사건의 당사자들과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 등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사건은 지난 2004년 재벌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베스트 사건’과 닮은 점이 매우 많다. 베스트 사건은 재벌 2·3세 사교클럽 회원들이 총무이자 외국계 은행 직원인 C 씨에게 수백억 원을 사기당한 사건.
당시 C 씨는 유명 사학재단 이사장 아들인 L 씨 등에게 “특별 우대금리로 투자해 주겠다”고 속여 총 700억 원이 넘는 돈을 가로챈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당시에도 사건초기에는 피해자가 2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신분을 숨겨오던 피해자들이 속속 드러나 결국 특정학교 출신 재계 2·3세들이 무더기로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베스트 사건에서도 그러하듯 이번 재벌가 여인들의 ‘사기 의혹’ 사건에서도 당사자들은 A 씨의 그럴듯한 배경과 고수익에 눈이 멀어 상식을 벗어난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지난 2004년에는 재벌가 남자들이 당했는데 이번에는 재벌가 여자들이 비슷한 수법에 당한 셈이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부모인 데다, 어디 내놔도 별로 꿀릴 것 없는 중견기업의 며느리인 A 씨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일부 학부모들 중에는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했다더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자존심 때문에 투자에 참가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A 씨는 학부모들로부터 한 사람당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씩의 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실제로 한동안 A 씨는 수익금이라며 돈을 나눠주는 등 투자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 사실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A 씨를 스스로 찾아와 돈을 맡기는 학부도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A 씨는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부동산을 샀는데, 잔금이 조금 모자란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학부모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 것. 그는 빌린 돈에 대해서도 고율의 이자를 약속하며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A 씨는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보낸 학부모들 대부분이 외국 국적을 가졌거나 해외에 사업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도 철저히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A 씨는 학부모들로부터 해외계좌로 달러를 넣어줄테니 원화를 빌려달라는 등의 제안으로 수천만 원~수억 원씩 돈을 빌리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테면 돈을 빌리는 과정도 ‘환치기 수법’을 활용하는 수완을 보여준 셈이다. 실제로 A 씨는 빌린 돈에 대해서도 처음 몇 달간은 이자를 꼬박꼬박 주며 투자자들을 안심시켜 왔다고.
하지만 A 씨의 행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에게 수억 원을 빌려준 뒤 남편이 알게될까 전전긍긍하던 모 기업 오너의 부인이 “수익금을 포기할테니 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A 씨가 원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자 오너의 부인은 결국 대여금 반환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송은 A 씨와 A 씨 남편을 상대로 제기됐으며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자에 참가한 학부모들은 너도나도 A 씨를 상대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A 씨는 일부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이자의 일부를 갚았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뒤 같은 방법으로 돈을 투자하거나 빌려준 학부모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알져져 사건이 더 확대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도 많은 피해자들이 ‘중견기업 며느리인 A 씨가 그럴 리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들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재계 일각에서는 A 씨가 의도적으로 사기를 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동정론도 일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A 씨가 돈을 갚으려고 노력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자 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다른 사람에게 수익금과 이자를 주는 이른바 ‘돌려막기’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다만 돈을 건네받을 때 ‘홍콩 펀드’나 ‘달러 환치기’ 등을 거론한 점으로 볼 때 의도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한편 문제의 제지업체 쪽에선 “A 씨가 돈을 빌린 후 문제가 생겨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점은 알고 있지만 회사와는 무관한 사건”이라며 “임원으로 재직 중인 A 씨 남편도 이런 일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개인적인 채권채무관계를 다투는 소송일 뿐 회사와는 관련없다”고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