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 연기를 둘러싼 재판부 내 갈등설과 정부-현대차 간 물밑교감설 등이 난무하는 가운데 선고공판이 또 미뤄지자 정 회장 양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선 ‘이미 결과는 결정돼 있다’며 정 회장의 앞길을 밝게 전망하는가 하면 항소심 결과를 부정적으로 관측하는 목소리도 떠나지 않고 있다.
최근 정보기관들과 각 기업 정보팀 인사들 사이에 정몽구 회장 항소심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7월 중순께 어느 날 현대차와 정부 양측의 고위인사들이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 회동은 항소심 선고공판 예정일이었던 7월 31일보다 약 20일 전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정몽구 회장이 그동안 재계를 대표해서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에 앞장서 온 것을 감안하면 어색한 회동도 아니다. 정 회장은 지난 4월 슬로바키아와 체코 터키를 방문해 유치활동을 펼치고 지난 5월엔 브라질에 건너가 여수를 홍보했다. 지난 5월 29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4대그룹 총수로선 유일하게 참석해 여수 박람회 유치 활동에 전력투구할 것을 역설했다. 지난 6월 말엔 제4회 제주평화포럼 만찬에 참석해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들의 주한 대사들을 상대로 여수 박람회 유치 활동을 벌였다.
세계박람회 유치활동 과정에서 정 회장은 항소심 재판 때문에 적잖은 불편을 겪어왔다. 지난 6월 5일로 예정돼 있던 정 회장 항소심 결심공판이 2주 뒤로 연기되면서 6월 18일~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정기총회 참석이 무산됐다. 오는 11월 27일 2012년 박람회 개최지 투표를 앞두고 열리는 마지막 총회라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현대차-정부 양측 고위인사 회동은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투표에서 평창이 석패한 7월 4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마련된 자리였다. 이 회동을 통해 정 회장 측이 항소심 공판일정에 따른 유치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놓친 현 정부가 임기 내 마지막 대형 국가사업인 여수 박람회 유치에 사활을 걸고 정 회장 측에 협조를 구했다면 항소심에 대한 의견이 오갔을 확률도 높은 셈이다.
11월 27일 개최지 선정일까지 정 회장이 마음 놓고 해외에서 유치 활동을 벌이려면 항소심 결심공판이 11월 27일 이후로 연기되든가 혹은 조기에 항소심 결과가 집행유예 수준으로 나와야 한다. 1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검찰의 6년 구형을 받은 정 회장이 항소심 무죄판결을 기대하긴 어려운 까닭에 현대차 측이 바라는 결과도 집행유예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두 번의 결심공판 연기 끝에 7월 31일로 날을 잡았던 항소심 재판부 내에서도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공판이 장기화되면서 재판부는 현대차 측이 지난해 약속한 1조 원 사회환원에 관한 구체 계획안 제시를 요구했던 바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국내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큰 현대기아차그룹의 수장인 정 회장 측에 어느 정도 면죄부를 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했다. 한때 기아차 위기설이 나돌자 정부가 현대기아차그룹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소환설만 무성했을 뿐 검찰청사 근처에도 안 갔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나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 이후 올 초 사면을 받은 박용성 두산 회장에 비해 정 회장에 대한 양형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 회장이 항소심 결과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양형의 열쇠를 쥔 재판부 내엔 정 회장 옹호론 못지않은 비토론 또한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소장파 판사들 중심으로 올 초 항소심 공판장 회의 결과에 따라 1심 형량을 항소심에서 줄여주는 온정주의 근절을 주장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재판부 내의 신구갈등이 거듭되는 것이 항소심 결심공판 연기와도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정대근 농협 회장의 항소심 법정 구속에 따른 여파에 주목하기도 한다. 7월 31일로 예정돼 있던 정몽구 회장 항소심 선고공판 연기에 대해 재판부는 “정 회장 공소사실의 유무죄 판단과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에 대한 법리 검토를 위해 변론(8월 27일)을 재개한다”고 밝힌 바 있다. 김 부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정대근 회장은 7월 20일 2심에서 1심 판결(무죄)과 달리 징역 5년에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아 법정구속 됐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정대근 회장의 항소심 결과가 정몽구 회장 입장에선 편치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정대근 회장 구속을 통해 수사당국이 정몽구 회장을 옥죌 다른 정황 근거들을 들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에서다.
정 회장 입장에서야 항소심에서 얼른 집행유예를 받고 그룹 경영과 여수 박람회 유치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러나 선고공판이 거듭 연기되면서 개최지 결정일인 11월 27일 이후에 항소심 결론이 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 경우가 정 회장에게 반드시 안 좋다고만 볼 순 없을 것이다. 올 해 말에 항소심 판결을 받은 뒤 내년 2월 새 정부 출범 전후로 특별사면을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액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두산 박용성-박용만 형제가 지난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뒤 올 초 사면 받은 것을 감안하면 헛된 바람만은 아닐 것이란 지적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