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은 지난 2000년 4월 무배당뉴어린이닥터보험을 출시했다. 이 보험은 이듬해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Ⅱ보험으로 이름만 바뀐다. 핵심 보장 내용은 ‘제1급장해 및 재해장해로 인하여 2~6급의 장해상태’가 되었을 때 재활치료자금으로 매년 1000만 원씩 20년간 지급토록 되어있었다.
이 보험은 인기리에 판매됐고 삼성생명은 2001년 10월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Ⅲ보험을 출시한다. 그런데 ‘어린이닥터Ⅲ’에선 약관내용이 바뀐다. 종전 ‘제1급장해 및 재해장해로 인하여 2~6급의 장해상태’를 ‘재해로 인하여 제1급~제6급의 장해상태’로 변경한 것.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이로써 뇌성마비, 발달장해 등 일반(질병)장해1급은 보장대상에서 제외된다.
‘제1급장해 및 재해장해로 인한 2급~6급의 장해’에 사용하는 장해위험률(0.000051)과 ‘재해로 인한 제1급~제6급 장해’는 동일한 장해위험률로 일반1급장해를 넣거나 빼도 보험료는 변함없이 동일하다. 결국 어린이닥터보험은 Ⅱ에서 Ⅲ로 바꾸면서 보험료는 줄이지 않고 보장범위만 줄인 셈이다.
삼성생명의 어린이보험은 2000년 4월부터 판매해 지금까지 177만 명이 가입하고 3조 4370억 원의 수입보험료를 거두어들인 히트상품. 보소연 측은 “처음에는 모든 장해 1급을 보장해주다가 소비자에게 인지도가 높아지고 인기를 끌자 뇌성마비, 발달장해 등 보장을 빼버리고 재해로 인한 장해1급만을 보장해주는 상품으로 약관표현만을 바꿨다”면서 “동일한 상품명에 Ⅱ에서 Ⅲ라고 추가표기만 해 다른 상품임에도 동일한 상품인 것처럼 판매했다”고 주장했다.
보소연 측은 이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고 밝힌다. 먼저 김포시에 사는 김 아무개 씨는 2003년 초 아이가 8개월 정도 되었을 때 잘 아는 설계사가 삼성생명의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Ⅲ보험을 가입 권유하여 월 3만 9500원씩 납입하는 보험에 가입했다고 한다. 가입 후 선천성 질환보장 여부를 문의했을 때 보험설계사는 “당연히 보장된다. 내가 전에 판매한 이 보험에 가입한 계약자도 선천이상으로 보험금을 받은 적이 있다”며 “걱정 말라”고 답변했다.
불행히도 김 씨의 아이가 20개월째 발달장해로 장해1급 상태에 빠져 매년 1000만 원씩 20년간 지급받는 재활치료자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Ⅱ보험이 아니라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Ⅲ보험이라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며 지급을 거절했다. 아연실색한 김 씨는 현재 여기저기에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김 씨가 보험금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 소송까지 가서 패소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 사는 박 아무개 씨의 경우다. 박 씨는 2002년 9월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 가입한 삼성생명의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Ⅱ보험 증권을 보고 삼성생명 설계사에게 똑같은 상품을 가입시켜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보험은 무배당뉴어린이닥터Ⅱ가 아니라 ‘Ⅲ’였다.
2003년 11월 박 씨의 아이는 ‘감각신경성 난청 언어장애’로 동아대 병원에서 1급장해진단을 받았다. 박 씨는 당연히 매년 1000만 원씩 20년간 지급받는 재활치료연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박 씨가 가입한 상품은 가입을 원했던 ‘Ⅱ’가 아니라 질병장해가 보장되지 않는 ‘Ⅲ’. 삼성생명 측은 역시나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밝혔고 박 씨는 “삼성생명이 계약자를 속였다”며 민원을 제기하다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박 씨도 패소했지만 사실 상품 변경이 ‘법적으론’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보소연 측도 법적 문제보다도 삼성생명의 ‘도덕성’을 문제 삼고 있다. 조연행 보소연 사무국장은 “삼성생명이 초창기에는 상품의 보장폭을 넓게 해 다른 회사와 비교해 상품경쟁력을 확보한 뒤 핵심보장내용을 슬쩍 빼버리고도 동일한 상품명을 사용하여 보장내용이 같은 것처럼 판매했다. 또 이 사실을 소비자나 보험설계사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는 등 얄팍한 상술로 소비자를 기만했다”면서 “이는 비도덕인 영업행위로 지탄 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에 삼성생명 관계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일축했다. 그는 자동차를 예를 들어 반박했다. “쏘나타, 쏘나타Ⅱ, 쏘나타Ⅲ가 시차를 두고 판매가 됐다. 당연히 제품들의 사양은 달라진다. 그런데 쏘나타Ⅲ를 산 소비자가 ‘왜 쏘나타Ⅱ에 있는 기능이 없느냐’고 항의한다면 해결 방법이 없다”면서 “장애가 발생했을 때 질병에 의한 것인지 재해로 인한 것인지는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검토할 만한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