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그룹이 자금난에 몰려 회사를 팔면서도 ‘주식 우선매수권’을 걸어뒀을 만큼 애착이 컸던 그룹의 모회사를 10년 만에 다시 품에 안은 것이다. 틈날 때마다 “만도를 꼭 되찾아야 한다”던 고 정인영 명예회장의 한도 마침내 풀리게 됐다. ‘범현대가’의 재결집으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는 만도 인수전의 ‘색다른 이면’을 들춰본다.
한라그룹은 고 정주영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1962년 직접 세운 현대양행 안양공장(만도기계)이 모태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빼앗겼을 때 겨우 만도만 살아남았다가 1996년에는 계열사 18곳을 거느린 재계 12위 재벌로 성장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 한라중공업과 관련한 무리한 투자에 나섰다가 부도가 나면서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 투자컨설팅회사인 한라I&C 등만 남고 그룹이 와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부도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 한라그룹은 2003년 건설경기가 되살아나는 것과 함께 한라건설이 본궤도에 오르자 만도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선세이지가 만도를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자 인수 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번 한라그룹의 만도 인수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만도의 최대주주인 선세이지가 만도 지분 100%를 다 사겠다며 1조 2000억 원을 제시한 글로벌 사모펀드 KKR을 뿌리치고 한라건설에 지분 72.4%를 6515억 원에 팔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라그룹이 제시한 금액을 지분 100%로 환산해보면 9000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선세이지는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이 소유한 자동차 부품회사 TRW로부터도 만도를 1조 1000억 원에 팔라는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돈 버는 일이 최고의 미덕인 사모펀드 KKR이 최소 2000억 원, 많으면 3000억 원에 달하는 돈을 더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포기한 이유는 뭘까.
일부 인수·합병(M&A) 전문가들은 우선 “KKR과 TRW는 처음부터 ‘뻥카’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선세이지가 처음부터 한라그룹을 매수 대상으로 정해놓고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어차피 이번에 팔린 만도 지분 72.4%에 관해서는 한라건설이 우선매수권을 쥐고 있다는 대목이다. 한라건설은 지난 99년 만도를 6000억 원에 팔면서 50% 이상의 지분을 매각할 때는 자신들이 우선매수권을 갖는다는 계약을 맺었다. 사실상 제3자 매각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도록 안전장치를 해둔 셈이다. 이 때문에 만도는 국내 2위의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임에도 한라그룹을 설득할 수 있는 친척기업 현대자동차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도 인수할 엄두를 내지 못해왔다. 따라서 이번 KKR과 TRW의 ‘입질’ 역시 애당초 실현가능성이 없는 ‘할리우드 액션’에 불과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M&A 업계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선세이지가 이상하리만치 서둘러 매각을 진행했다는 점이 의문일 뿐 KKR과 TRW가 만도 정도의 매물에 들러리를 설 만큼 만만한 업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M&A업체 관계자는 “KKR만 해도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사모펀드인데 규모가 훨씬 작은 선세이지가 그들을 ‘동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전했다.
실제 KKR은 연초 공동창업자인 헨리 크라비스가 전용비행기를 타고 직접 한국에 들어왔을 만큼 이번 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M&A업계 관계자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선세이지가 이처럼 작업을 서두른 것은 “선세이지 쪽 내부에 뭔가 사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내부사정’에 관해 두 가지 견해를 제시했다. 우선 매각이 늦어질수록 불리한 쪽은 선세이지라는 해석이다. 최대 납품처인 현대·기아차가 부품 단가 인하를 추진하면서 매각이 지연될수록 만도의 기업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선세이지가 JP모건 계열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전했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위기 발생 이후 미국계 투자자들은 현금 확보를 위해 국내 주식시장에서 연일 대규모 매도공세를 펴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돈을 좀 덜 받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매각할 수 있는 쪽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선세이지가 KKR이나 TRW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KKR이나 TRW에 팔았다가는 자칫 현대·기아차그룹으로의 납품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부담이 더 컸다는 얘기. 이는 ‘범현대가’의 재결집으로 풀이돼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만도가 현대·기아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비율은 58%선. 현대모비스의 역할 확대로 70%에 달하던 과거에 비해서는 물량이 줄었지만 사실상 만도는 현대·기아차가 없으면 기업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이다.
이러다보니 선세이지는 만도를 제값에 팔기 위해서는 현대·기아차의 구매보장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는 선세이지의 거듭된 구매보장 요구에 끝내 답을 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선세이지가 사실상 ‘항복선언’을 한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현대차 측은 이런 상황에 대해 “납품보장은 소송대상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약속”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