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 전 코레일 사장 | ||
지난 1월 21일 코레일 이철 사장이 퇴임했다. 이 전 사장은 퇴임사에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경영 정상화를 이루어냈다”며 “철도공사 역사상 흑자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아직 정확한 금액은 집계되지 않았지만 약 1517억 원의 흑자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인지 당시 행사장은 퇴임식답지 않게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건교부가 이를 반박하고 나선 것은 2월 9일, 설 연휴가 채 끝나기도 전이다. 건교부 최재길 철도기획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영 건전성 지표인 영업수지가 코레일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며 이 전 사장 발언을 반박했다. 경상수지가 흑자인 것은 맞지만 이것은 용산 역세권 토지매각 대금 4000억 원으로 인해 생긴 영업 외 수익이란 것. 오히려 정부 지원금 5553억 원을 제외하면 영업수지 적자는 1조 원이 훌쩍 넘어간다고도 했다. 이어 최 기획관은 “1993년에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있다”라고 말해 사상 첫 흑자라는 이 전 사장 말도 “사실과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최 기획관의 발언이 보도되자 코레일에서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같은 날 오후 보도 자료를 통해 해명과 함께 건교부를 비난한 것이다. 우선 “93년도 흑자는 정부로부터 1조 5000억 원의 부채탕감을 받아 생긴 것으로 흑자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코레일은 “역세권 개발 이익을 왜 영업 외 수익으로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정부가 지원했다는 지원금도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법정비용인데 왜 생색내느냐”라고 건교부를 비난했다.
지금 코레일은 한껏 격앙된 분위기다. 여기엔 노사가 따로 없어 보인다. 건교부라는 ‘공동의 적’을 맞아 오랜만에 노사가 손을 잡은 것. 코레일 노조의 한 관계자는 “왜곡된 논리로 철도적자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며 건교부를 성토했다. 건교부의 잘못된 철도정책으로 누적된 적자를 코레일의 자구노력으로 개선했는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부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코레일 한편에서는 철도정책을 총괄하는 최 기획관이 왜 갑자기 그런 발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들린다. 코레일이 흑자를 달성했다는 것은 지난 연말부터 나온 말인데 “왜 이제 와서 반박하느냐”는 것. 실제로 지난 연말 이철 전 사장의 송년사와 올해 초 신년사에는 “흑자를 달성해 경영 정상화의 기초를 닦았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코레일 한 관계자는 이 전 사장과 건교부의 해묵은 감정싸움에서 이번 논쟁이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전 사장과 건교부는 KTX 영등포역 정차문제, 철도공사 부사장 선임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재임기간에도 여러 차례 건교부를 비난한 적이 있는 이 전 사장은 퇴임 후에도 “KTX 영등포역 정차를 반대한 것은 오만한 발상이자 관료주의의 극치였다”라며 건교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건교부에서도 더 이상 참을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퇴임 후에도 건교부를 비난한 이 전 사장에 대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최 기획관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자세한 얘기는 듣기 어려웠으나 건교부에는 이 전 사장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건교부의 한 관계자는 “임기가 4개월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왜 그만뒀는지부터 정확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라며 “총선을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라고 이 전 사장을 꼬집었다. 이 전 사장이 ‘성공한 공기업 CEO’라는 이미지를 얻음과 동시에 건교부를 공격해 ‘탈 노무현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것. 퇴임 당시 “코레일은 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 전 사장이 퇴임 후에도 계속 건교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코레일 측에서는 “이 전 사장은 여러 차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며 “건교부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이 전 사장은 퇴임하면서 “향후 국가적·사회적으로 필요한 역할이 있다면 검토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출마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전 사장은 ‘총선용 자화자찬’을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건교부가 코레일의 ‘흑자 실적 발표’를 반박한 진짜 의도는 코레일을 혈세만 낭비하는 적자기업으로 몰아 민영화 논리를 확보하려는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새 정부 경제 기조에 맞춰 인수위에 보고를 했는데 코레일이 반발하자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또한 자칫하면 코레일의 영업수지 적자를 ‘덤터기’ 쓸 수도 있다는 내부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대로 가면 영업수지 적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교부의 한 관계자가 “경상수지로만 흑자를 올렸다고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최 기획관의 발언은 새 정부 출범 전에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로도 풀이되고 있다.
아직 건교부에서는 특별한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다. 여러 곳에 문의를 해봐도 “잘 모르겠다”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최 기획관의 발언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철도정책팀의 한 인사는 “철도 정책을 총괄하는 분인데 갑자기 그런 말을 했겠느냐”라고 반문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실적’에서 비롯된 건교부와 코레일 간 충돌은 이제 전면전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건교부가 인수위에 제출한 보고서를 둘러싼 양측 공방이 앞으로도 격화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도 서비스’는 뒷전인 채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심정은 씁쓸하기만 할 듯하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