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가 어려울수록 명동 사금융시장엔 사기 금융업자들이 늘어난다. 사진은 명동거리로 기사내용과 관련없음. | ||
사기꾼들이 평소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출몰빈도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최근에도 ‘DJ 정부 비자금’이라고 속여서 위조한 1조 5000억 원 이상의 양도성예금증서(CD)와 수표, 채권 등을 시중에 유통시키려 했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위조범들은 지금은 없어진 은행들 명의의 위조 CD와 수표를 액면가 절반에 재력가나 기업들에 넘기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위조 사기범을 적발했다는 소식은 명동 시장에서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는 얘기다.
2년여 전의 일이다. 비교적 활발히 대외활동을 한다는 명동의 한 업자에게 평소에 친분이 있던 정부기관의 A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긴한 일로 상의할 것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A 씨는 소속 기관 수뇌부가 확인, 보고할 것을 지시한 사항이라며 자기앞수표를 보여줬다.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이미 합병되어 없어진 은행의 수표로, 자그마치 수천억 원대였다. A 씨는 이런 수표가 실제로 시장에 돌아다니는지, 돌아다닌다면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인지 자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데 당시 명동 업자는 이 수표를 보며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로 며칠 전에 잘 아는 선배로부터 5000억 원이 입금된 통장의 사본의 확인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0억 원을 통장에 가지고 있다는 인물이 투자를 권유했다면서. 통장 사본을 건넨 사람은 5억 원 정도의 인지세만 투자해주면 돈을 찾아서 두 배로 돌려주겠다는 제의를 했단다. 이 업자는 며칠 전 일을 상기하면서 A 씨에게 이렇게 설명해 줬다고 한다.
“이 수표는 은행에 가면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실제로 발행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찾을 수 있는 방법 등을 바로 알 수 있다. 나도 이런 통장 사본을 받았는데 계좌 존재 여부를 확인해 보니 계좌는 있는데 돈은 단돈 1원만 들어 있었다.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다. 이렇게 가지고 다니는 목적은 돈을 환급하는 수수료, 인지세, 아니면 일정 금액의 예금잔고증명을 만들 목적이다. 그래서 돈을 편취한다든가 아니면 예금잔고증명으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위함이다.”
정부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확인할 정도니 이들의 사기가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업자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업자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신문기자가 ‘명동의 한 호텔 커피숍에 있으니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느냐’고 다급하게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약속 장소에 나간 업자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기자가 명동 사채시장과 관련한 르포 기사를 취재하면서 ‘저렴한 금리에 기업자금을 쓰라’는 브로커와 연락이 되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소였다. 장장 20일간의 긴 통화와 상담을 통해서 200억 원 정도의 자금을 사용하고 싶다고 접근해 그에 따른 서류와 상담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자필서명 후 기표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당일이 되니 여러 사람이 나와서 다시 처음부터 상담을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추정하기에는 기자와 상담을 한 사람 뒤에도 무려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저마다 성사가 되면 소위 말하는 ‘구전’을 받아먹기 위해서 나와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오퍼를 줬던 사람이 나타나서 다시 상담을 시작하자고 하니 어이가 없어 업자에게 확인차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사기대출 상담이었다.
몇 년 전부터는 전직 대통령 비자금이라면서 ‘현금이 컨테이너에 쌓여 있다’, ‘채권이 얼만가 있다’, ‘금이 몇 톤이 있는데 직접 봤다’는 식의 유형에서부터 ‘태평양전쟁 때 미국이 발행한 채권이다’, ‘필리핀에서 한국 교포가 집을 수리하던 중 지하실에서 발견했다’ 등등 종류도 형태도 가지가지로 사기를 시도하는 인사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또 다른 업자는 이런 경험도 가지고 있다. 그는 브로커라고 알고 있던 B 씨로부터 상속자금 200억 원을 세탁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명동의 큰손인 C 회장과 거래를 해도 되는데 수수료를 많이 달라고 하니 둘이서 거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업자는 B 씨의 경력이 일천하고 금액이 너무 컸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심이 갔다. 그래서 거액이라 단번에는 거래가 어렵고 금액을 일단 나누자고 하면서 전부를 처리하려면 2개월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10억 원 정도만 샘플로 거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금의 실체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 업자가 제안을 한 뒤 B 씨가 갑자기 연락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 몇 달 만에 나타난 B 씨는 C 회장과 거래해서 100억 원을 처리했다고 업자에게 자랑을 했다고 한다. 한데 다시 나타난 B 씨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큰 금액을 처리했으면, 그것도 상속자금을 세탁해주는 위험한 거래라면 꽤 많은 수수료를 받았을 텐데도 변한 게 없던 것이다. 이 업자는 자신이 당장 거래를 하자고 하니까 B 씨가 연락을 끊고는 나중에 만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일본의 한 은행이 발행했다는 거액의 채권을 가지고 할인을 하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채권을 가지고 명동의 한 업자에게 상담을 하러 온 D 씨는 서울 강남 어디서엔가 부동산 관련업을 한다고 했다. 이 채권에는 일본의 ‘第一勸業(다이이치간교)은행’이 발행했다는 확인과 ‘특수자금증명서’라는 표기에 큰 글씨로 ‘極秘’(극비)라고 적혀 있었다. 금액은 무려 200억 엔, 지금의 환율로 대충 해봐도 우리 돈 2000억 원에 육박한다.
D 씨는 이 채권을 할인하고 싶다고 했다. 상담한 업자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건 여기서 할인하지 말고 한국은행에 가든지 아니면 당장 일본에 가서 직접 바꿔라. 뭐 하러 돈 들이고 명동에서 바꾸느냐”고 말이다. D 씨는 머쓱해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D 씨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할인을 시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명동 사금융 시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시도하는 삼류 업자들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느냐를 보면서 경기의 흐름을 피부로 느낀다. 그러면서 업자들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확실한 진리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다.
한치호 ㈜중앙인터빌 상무 one1019@chol.com